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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미간의 신뢰·양보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독일의 분단·통일을 거울삼아-(중)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의 개선과는 반대로 동부의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서부에 빠르게 확산되어 갔고, 소련과 동독의 지원과 협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미국과 서부는 서부지역만의 독자적 발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독일국민이 간절히 바랐던 미래의 독일통일을 굳게 약속하였다.

△미국에 의한 화폐개혁, 아데나워의 활약상, 독일의 분단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심이 되어 내린 극비리의 과감한 결단의 하나가 서부지역의 화폐 개혁이었다. 미국이 마샬 플랜과 유럽 부흥계획을 실현하고 독일의 서부 지역을 이에 참여시키기 위해 영점 이하로 떨어진 화폐의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화폐개혁을 단행해야만 했으며, 이에 동부가 서부의 화폐를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곧바로 화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두 지역의 분단은 가속화되었다. 이때 필자는당시의 독일분단이 영원한 분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었지만  때 이른 판단은 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미국이 주장한대로 서부지역은 신속한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계획경제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데나워 수상과 에르하르트 경제학 교수가 중심이 되어 관료적 계획경제를 탈피하고 사회시장경제 제도를 택함으로써 소비자들을 유리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1947년 이래 독일정책은 분명히 미국이 주도하게 되었고 소련과 동독은 끌려가는 입장이 되었다. 특히 동·서 대립의 극한적인 상황이었던 소련의 베를린 전면봉쇄 시(1948. 6. 24) 미 클레이(L. Clay) 장군의 서부 베를린에의 식료품 공수작전의 성공은 서방 연합국들을 승자로 보게 하였으며, 소련의 동부 공장해체의 지속은 반공을 위해 단합토록 하였다.

이와 함께 민주 독일을 유럽 자유 국민공동체에 참여시키려는 의도가 그리고 서부국가(서독)수립 계획이 분명히 드러났다. 곧이어 동부를 배제한 가운데 서부지구 3군정장관들은 베를린에서 3지구 통합초안을 완성 시켰으며, 이는 동·서 지구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될지도 모르는 것으로 전후 독일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독일 최고의 문화의 터전이자 자유사상의 본 고장인 본(Bonn)이 기본법 제정을 위한 장소로 선택되었고 모든 주의 간접선거를 통한 의회평의회가 구성될 수가 있었으며, 그 결과는 73세의 고령의 나이로 아데나워가 의장으로 피선되었고 이로써 독일 현대사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어 기본법(基本法)이 발표된 뒤에 남은 일은 총선거를 실시해 서부 점령지역에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과열된 선거 분위기 속에서 8월 14일 연방의원 선거를 실시하였고 기민당이 승리했으며, 대통령에는 호이쓰(Heuss, 자민당), 연방수상에는 아데나워(Adenauer, 기민당)가 피선되었다. 한편 동부지역의 정부수립은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인민의회(人民議會)에 의 의해서 적극 추진되었다. 이듬해 10월 28일 입법기관인 인민의회가 동독 공산당의 독일민주공화국의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로테볼로 하여금 정부를 수립토록 함으로써 마침내 동·서독이 탄생함과 동시에 50여 년 동안의 동·서의 분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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