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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미륵불교 정인표(鄭寅杓)의 리더십과 ‘13명의 독립유공자’

안후상 한국신종교학회 이사·고창북고 역사교사
안후상 한국신종교학회 이사·고창북고 역사교사

“해방이 되어 출감하자마자 가족보다 먼저 찾은 건 일제의 고문으로 죽은 제자의 가족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인 내년에 정읍시와 전라북도는 13명의 독립유공자를 어떻게 숭모할 것인가?”

1940년 전후는 일제강점기 그 어느 때보다도 엄혹했다. 당시는 한국의 독립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자가 전무할 정도로 살벌했다. 그러한 때에 정읍 태인에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신종교(新宗敎)가 있었다. 말이 ‘미륵’이지 강증산을 신앙하는 종교 단체였다. 살벌했던 시기에 미륵불교의 정인표(鄭寅杓)는 ‘신인동맹(神人同盟)’이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모여 멸왜기도(滅倭祈禱)를 하고 일본의 명치천왕의 신령을 불러다놓고 ‘만사무석(萬死無惜)한 놈’이라며 크게 꾸짖었다. 더불어 조선에는 생(生)자를, 일본에 사(死)자, 소화(昭和)천황에 낙(落)자를 써 붙이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한국의 독립 의식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런 비밀집회에 일본경찰의 밀정이 교인으로 위장한 채 숨어들었다. 교주 정인표와 그를 따르던 42명의 제자들이 1938년에 일망타진 당했다. 이들은 심한 문초를 약 4년 동안이나 당하다가, 1943년 9월에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옥사한 자도 나왔다. 재판에 회부된 정인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사건은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니 형벌은 내가 받겠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해 달라”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던 일제는 교인들을 이간질했다. 따라서 일부 교인 가운데는 지금까지 간직해 온 신념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때 정인표는 “이런 황량한 시기에 사회로 나간들 무슨 쾌심사(掛心事)가 있겠는가. 우리도 해원할 날이 반드시 온다. 현하 대세를 누가 알겠는가” 하면서 “을유년(1945) 8월에 태인에서 상봉해 태평주나 마셔보자”라는 말로, 제자들을 다독였다. 이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의 예언대로 1945년에 8월에 해방이 되었다. 이때 정인표는 감옥 앞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뒤로 하고 고문을 받다 옥사한 제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그 가족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요즘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 있다. 그들은 때론 변명을 하고 때론 자기를 따랐던 이들에게 책임을 미루기도 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두 전직 대통령을 빗대 조폭 두목만도 못하다는, 그런 비소(鼻笑)를 자아낸다.

정인표 이하 신인동맹 가담자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미륵불교가 미신사교 또는 사이비 종교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1997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애족장이 수여됐다. 애족장이 수여된 이들은 무려 13명이다. 한 명의 독립운동가라도 지자체에서는 숭모 사업을 벌인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자체의 큰 자랑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13명이 독립유공자가 정읍시와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다가 죽거나 옥고를 치렀다. 내년이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정읍시와 전라북도는 13명의 독립유공자를 어떻게 숭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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