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도내 순환관광에 참여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특별한 종교도 없어 혼자 여행을 떠난다. 지난번에는 선운사 코스와 내장산 코스를 답사하고 11월18에는 덕유산 향적봉에 올랐다. 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오르니 편했다. 백두대간 덕유산은 언제나 힐링을 하게 해준다. 발아래 멀리 보이는 계곡의 집들이 두세 두세 하다. 첩첩산중이다. 그곳에서 내가 태어나 자랐다니, 나의 인생길처럼 참 멀리도 왔다. 부모님이 너무나 훌륭한 분이라고 되뇌어 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 앞서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보다 못한 분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 세상살이를 하셨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다.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 특히 그분들이 처했던 시대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렵고 힘든 시대였다.
1944년 음력10월14일 나를 낳으셨다. 어머니는 28살 아버지는 27살 때였다. 평생 농사꾼으로 사시면서도 나와 형제들을 잘 기르시고 가르치셨으니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어제는 나의 자식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내 생일을 축하했다. 감회가 깊었다. 첩첩산중에서 태어나 나를 비롯하여 자손들이 번창했으니 지하에 계시는 부모님도 기뻐하시리라.
나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일에 파묻혀 지게를 지고 모내기를 하며 풀베기와 보리타작, 콩 털이를 하던 생각뿐이다. 몹시 가난했던 게 내 어린 시절이었고, 그 뒤 군대에 입대하면서부터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어쩌다 고향엘 가면 괜스레 무슨 죄라도 지은 것 같아 주눅 든 마음으로 몸가짐에 조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향토를 지키며 흙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객지 바람에 거덜난 사람 같아 자괴심이 들었다. 물레가 도는 가슴으로 어둑어둑한 길을 올라가는데 개구리 합창소리가 대낮보다 더 시끄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난 그만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소리를 빽 지를 뻔했다. 그것은 벌거숭이 내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의 왁자지껄하던 함성이었으며, 타작마당의 기계소리나 도리깨질 소리 같았다. 아니 풍물 치는 소리나 밤안개 속에서 들려오던 개짖는 소리 같았다.
첩첩산중 가난하게 살던 어린 시절에 본 붉게 물든 아름다운 저녁노을은 나의 희망이요 꿈이었다. 동네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어린 소년의 눈에 비쳐오는 타는 놀빛은 한없는 동경과 꿈의 세계였다. 그러나 전광석화처럼 청장년시절이 지나가 버렸다.
노년에 향적봉에서 발아래 보이는 고향의 모습을 보며 명상에 젖었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과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은 자연의 소리며 힐링 장소였다. 사람도 대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진즉 알았지만 오늘 다시 실감했다.
장수 장안산 덕산 계곡으로 향했다. 제2용소는 ‘남부군’ 영화 촬영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논개의 생가 터를 보고 전주로 향했다. 오늘은 짧은 여행이지만 나에게는 의미하는 바가 컸다.
* 김세명 수필가는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하여 <수필과 비평> 에서 등단했으며 수필집 <업業> 등이 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과 행촌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업業> 수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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