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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이라는 울타리를 깨고 나간 김용택 시인, 시집 ‘그날의 초록빛’

노련함 대신 예민한 감각으로 다시 읽어낸 세상 44편의 시로 형상화
나희덕 시인 “지구적 대지로 확장된 시각, 노익장의 비장한 선언 인상적”

김용택 시집 ‘그날의 초록빛’/ 사진=창비 제공
김용택 시인. 전북일보 자료사진

어떤 이름은 그 존재만으로 견고한 울타리가 된다. 한국시단에서 ‘김용택’이라는 이름 뒤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섬진강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그랬다. 그것은 시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훈장인 동시에 그를 가두는 안온한 경계이기도 했다.

최근 김용택 시인이 펴낸 시집 <그날의 초록빛>(창비)은 그가 평생 일궈온 거대한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고 나간 한 창작자의 치열하고도 정직한 모험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과거의 문법을 과감히 ‘낡은 거울’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거울의 표면을 깨뜨리고 나아가 거울 밖 미지의 생명들이 뿜어내는 가공되지 않은 파동에 온몸을 맡긴다.

시인은 노련함에 기대는 대신 낯설고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읽는다. 과거의 성취가 주는 지루함과 작별하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로 44편의 시를 완성해냈다. 이는 기성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한 시인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마을에 들고 나는 흔적이 없을 때까지/ 나는 마을을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어 회관 문턱을 넘어/ 마을 공동밥상 앞에 앉았다/ 공부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어서/ 내 모든 공부가, 아는 것이, 지식이/마을에서 소용없어지고,/ 나는 그렇게/마을이 공인한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중략…)/ 나는 눈물을 짓는다/슬퍼서가 아니다/ 하루의 경제적 경영 범위에 따른/ 몸의 고졸한 움직임들이/ 그토록 아름답다”(‘고졸한 경제행위’ 부분)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조급하지 않다. 억지로 해석하거나 재단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의 순리 앞에 무릎을 꿇고 생의 진실을 겸손하게 응시한다. 무거운 세상을 균열내는 것은 강력한 힘이 아니라 끝내 꺾이지 않는 부드러움이라는 사실을 맑은 언어로 증명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의 초록빛>은 노년의 완숙미를 뽐내는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의 첫 초록을 목격한 소년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생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한 삶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나희덕 시인은 해설을 통해 “섬진강을 따라 오롯이 흘러온 김용택의 시적 생애가 이제 지구의 드넓은 대지에 이르렀다”며 “그의 시에는 여전히 싱그러운 흙이 묻어 있고 생명의 물기가 남아 있다”고 헌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퀴퀴하게 낡은 나의 거울에서 나간다’라는 노익장의 선언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며 그가 보여준 문학적 탈피에 경의를 표했다.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1982년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은하수를 건넜다> 등을 통해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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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섬진강 #그날의 초록빛 #창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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