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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전북 가야 이제는 검증하자, 자화자찬은 그만“

봉수제출유적의 시기규명, 문헌사료 해석문제 등 여러 쟁점이 있는 전북 가야사를 두고 전국 역사학계의 검증절차를 거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전북도와 군산대학교 가야문제연구소가 유물유적을 발굴한 뒤, 발표한 학설이 통설과의 비교분석이나 비판적인 검증 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이유다. 26일 전북도의 4월 보조금심의위원회 심의안건 서면검토 의견서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문화유산과 심의위원은 올 5월~12월 진행되는 전북가야 역사 재정립을 위한 학술대회, 보고서 발간 등과 관련한 7000만원 예산편성(추경 2000만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심의위원은 이날 전북일보와 통화에서 전북 가야의 학술발굴 작업과 관련해서 많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연구고증분야는 미진하다고 판단했다며 학계와 언론에서 많은 반박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심의위원은 진안문화원 부설 최규영 향토사연구소장이 쓴 글을 소개했다. 최 소장은 글을 통해 국사는 오랜 시일에 걸쳐 여러 학자, 전문가들의 연구와 학계의 컨센서스를 거쳐 정립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은 군산대학교 가야문제연구소의 견해를 확정된 견해처럼 발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 군산대 가야문제연구소가 주장하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무주, 장수, 완주, 금산 등이 고대 가야의 지배권에 있었다는 논거는 <일본서기>에 나온 3월 반파가 성을 쌓고 봉수를 둬 일본에 대비했다(중략)사졸과 무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했다는 기록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성립하려면 봉수로와 반파가 남해안에 연결되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반파로 비정한 장수는 금강유역으로, 남해안과 연결이 되지 않고 거리도 너무 멀다고 부연했다. 최 소장은 이런 전제를 무시한 장수 반파설은 학계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며 현재 반파국을 논하는 연구서들은 거의 성주나 고령 반파설을 지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성주나 고령은 남해와 가깝거나 남강, 낙동강, 섬진강을 통해 연결되고, 신라의 도읍 경주와도 가까운 지역이라며 일본에 대비할 당위성도 있고 신라를 핍박하기도 가능한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봉수와 제철유적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최 소장은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는 봉수인 지 입증되지 않은 곳 107개소를 가야시대에 운용된 봉수였다고 주장하고, 실재(實在)가 증명되지 않은 231개소를 가야 때 운용된 제철지라고 강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야문제연구소에는 봉수전문가도 없고, 고대 제철 전문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제휴해 연구한 실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소장은 이 문제는 사안의 성격 때문에 그대로 봉합되기 어렵다며 전북가야 문제와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공청회 또는 학술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심의위원도 최 소장의 글을 토대로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가야사의 문헌, 봉수제철유적분야 권위자가 있다며이런 사람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학술대회는 예산낭비다. 학술대회와 관련한 예산지출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4.26 17:53

고창지역 문화유산 4건 전북도 문화재 지정

고창군 죽림리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 등 고창지역의 문화유산 4건이 전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창군에 따르면 고창 선운사 영산전(도유형 제277호), 고창 석탄정(도유형 제278호), 고창 삼호정(도유형 제279호), 고창 전봉준 생가터(도기념물 제146호)가 지난 9일 전라북도지정문화재인 유형문화재와 기념물로 각각 지정됐다. 이번 지정된 문화재들은 전라북도문화재위원회의 현지조사를 거쳐 문화재 지정예고(30일 간) 기간 동안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의견을 받아 도문화재위원회에서심의 후 최종 확정됐다. 고창 선운사 영산전(高敞 禪雲寺 靈山殿)은 대웅전, 만세루와 함께 선운사를 대표하는 불전이다. 1713년에 2층 각황전으로 창건되었다가 1821년 단층으로 재건하는 등 연혁과 관련된 기록이 명확하고, 19세기 초 부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고주 7량가 양식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찰의 영산전 건물과 다른 형식의 구조, 공포, 평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적 독창성과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또 영산전 내에는 고창 선운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상(도유형문화재 제28호) 및 16나한상과 함께 건물 내부 벽면에는 1821년 재건 당시의 벽화가 조성되어 있어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등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고창 석탄정(高敞 石灘亭)은 1581년 석탄(石灘) 류운(柳澐)이 낙향 후 학문 강론을 위해 건립한 정자(1830년 중건)다. 넓은 평야에 동산처럼 솟아있는 암반지대에 운치 있게 나무와 정자를 세워 유유자적하며 풍류와 학문을 즐기던 공간으로 전해진다. 전라북도 누정 중에서 창건연대가 빠르며,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지붕 등 건축물의 가구구조가 독특해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됐다. 고창 삼호정(高敞 三湖亭)은 옥천조씨 삼형제(인호 조현동, 덕호 조후동, 석호 조석동)의 호(湖)를 따서 1700년대에 지었고, 1864년에 중건한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집 구조 등 조선 후기의 건축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주변 경관이 우수하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며 시를 쓰고 글을 읽으며 지냈던 당시의 유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로써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고창 전봉준 생가터(高敞 全琫準 生家址)는 동학사, 병술보 등 학술 고증과 많은 연구자들의 논문, 각종 학술조사, 학술대회, 촌로들의 증언 등을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장군이 1855년 12월 3일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때어나 1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확인됐다. 전봉준 생가터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혁명적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하고 이끈 최고 지도자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상징적인 장소로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유기상 군수는 이번 4건의 도지정문화재 지정은 민선 7기 취임 이후 문화재 지정승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온 결과라며 고창군이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한반도 첫 수도 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사례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 심의 중에 있는 고창 무장기포지 , 고창 문수사 대웅전 , 고창오거리당산제, 고창농악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과 고창 상금리 고인돌군에 대한 도기념물 지정 등을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고창군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높여 나감과 함께 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와 활용방안을 모색해 나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21.04.11 17:13

모악산 4대종교 성지 모두 문화재 지정

모악산의 4대 종교 성지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됐다. 김제시는 금산면 수류성당이 지난 2일 전북도 문화재 심의위원회를 최종 통과,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고 5일 밝혔다. 호남 천주교 정착 100여 년 역사를 간직한 수류성당은 교우촌과 더불어 천주교 신앙인들의 중심이 된 사적지로, 한국전쟁 당시 호남권의 천주교 기록물을 옹기에 담아 땅속에 묻어 온전히 보존했다. 특히 인민군에 의해 신도들이 학살되었던 가슴이 아픈 역사적 공간이다. 2003년 개봉한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김제시 금산면에는 불교와 미륵신앙의 성지 금산사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고 근현대 신흥종교로 성장한 증산교의 성지인 증산법종교 본부는 국가등록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초기 개신교 성지로 ㄱ자 교회의 원형이 잘 보존된 금산교회 역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이다. 이번 수류성당의 문화재 지정이 확정되면서 금산면은 면내에 위치한 4대 종교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전국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박준배 김제시장은 이번 수류성당지의 문화재 지정으로 4대 종교의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를 만들어 전라북도민과 김제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이 매우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 문화재·학술
  • 최창용
  • 2021.04.05 17:18

프랑스기록원 문서 전주 한지일 가능성 있어

프랑스 국립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가 고려시기 전주에서 생산한 한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가 중국 원(元)나라 간섭을 받던 13세기~14세기 당시 전주목(全州牧)에 속했던 소양면(완주군)에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던 데다, 당시 전주한지가 품질이 좋아 불교 간행물과 왕실 진상물로서 가치가 높았다는 분석이 나와서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환관이 된 고용보와의 연관성도 거론된다. 29일 한스리그(한지, 한복, 한옥, 한식 분야 전문가 단체) 등에 따르면, 고려시기 전주목이었던 소양면 등지에서는 한지 생산량이 높았다. 전주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의 재배가 제도화돼 지방관아에서 닥나무 밭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시대 왕실의 진상물로서 전주한지는 생산량과 품질면에서 높이 평가됐다고 나와 있다. 실제 고려 공민왕대(1361년) 전주 원암사에서 불교경전인 불조삼경(佛祖三經)이 간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보물로 지정된 이 책에는 원나라 혜종의 세 번째 연호인 지정(至正)과 출간연대, 간행장소, 간행자. 도와준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전북 문화재 의원을 지낸 이태영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원암사 일대에서도 닥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며 자연스럽게 사찰에서 책을 간행할 정도면 (공민왕) 이전부터 높은 한지생산량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국립기록원에 있는 고려한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두고도 전주에서 생산된 한지일 가능성을 열어 뒀다. 이 교수는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고 보지만 프랑스에 있는 한지의 질을 확인해봐야 한다며 한지의 촉감과 책에 따라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둔 원나라 환관 고용보와의 연관성도 거론된다. 고용보는 1310년대 원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며, 1340년대부터 사신으로 파견돼 고려의 정치에 간섭했다. 한스리그 관계자는 교황 요한 22세와 충숙왕이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추정되는 1333년은 고용보가 원에서 공녀인 기씨(훗날 기황후)를 궁녀로 추천하면서 실권을 잡던 시기라며 당시 고려가 원에서 바치던 종이 등 진상품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29 18:21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최종절차 돌입

임진왜란 당시 민관이 하나가 돼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켰던 웅치전적지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단계가 최종 절차에 들어갔다.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TF는 지난 19일 오후 4시 전주비전대학교 비전관에서 전북도청 문화유산과 국철인 과장과 도 관계자, 하태규 전북대교수, 완주군, 진안군 문화재 업무 담당, 용역 담당인 비전대 심정민 교수 팀등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회의를 가졌다. TF는 이날 기존 완주지역 도지정문화재 구역에 이어 진안군 구역까지 아우르는 90만 여㎡ 부지를 국가지정문화재 보호구역대상 신청 지역으로 정했다. 현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인 전북웅치전적지가 90㎡가 넘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다시 태어나는 최종 행정적 단계에 들어간 셈이다. 구체적 대상지역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51번지 일대 74만7347만㎡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산292-2임야 일대 16만807만여㎡ 등 일대 90만 8154㎡ 부지이다. 기존 300만㎡가 넘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면 일대 웅치 전적지보다 면적이 대폭 줄어든 것인데, TF는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보다 효율적인 대상지 조사와 주민설명회, 현장 탐사, 전문가 의견 수렴 절차 등을 거쳤다. TF는 향후 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도문화재지정심의위원회에 진안군 구역을 포함하는 안을 5월 안에 신청하고 6월 중으로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다는 계획이다. 도는 도지정 문화재 위원회 통과 이후 국가지정문화재로 웅치전적지가 지정될 경우 전적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또 웅치전적지 기념관을 건립하고 도와 시군간 연계 협력망 구축, 유지관리, 역사탐방길 조성 등도 검토할 예정이다. 이날 회의에서 하태규 전북대학교 교수는 어려운 과제를 심 교수가 잘 정리해 주신 것 같다. 주민민원이 많았을 텐데, 완주와 진안 두 지자체 관계자가 협조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웅치전적지 국가지정문화재 논의는 1990년대부터 시작되는 등 지역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것 같고 역사적인 사건의 상징성이 부여될 수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도 관계자는 이번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사업 과정에서 주목할한 만한 것은 도와 두 개 기초지자체가 함께 해 지정지역을 도출했다는 점이 의의가 크다다며 전국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지자체간 협의도출의 사례라고 말했다. 국철인 도 문화유산과장은 TF를 작년부터 가동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되면서 오늘까지 왔다. 오늘 회의가 마무리돼 종지부를 찍었으니, 남은 기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21.03.21 18:12

[학술강연회] “전북 항일 운동 배경… 일제 수탈 동맥 구실 한 탓”

한말 31만세운동 전후 전북의 항일독립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 전북일보와 JTV전주방송,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사)독립운동가 박준승선생기념사업회가 18일 전북일보사 2층 공자아카데미에서 주최한 호남 지역의 31 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 투쟁상황 전국 학술강연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자리였다.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 독립을 목을 터져라 부르짖었듯, 우리 모두 애국선열의 충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 위원장은 전북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박준승 선생 등 최고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지역이라며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치신 순국선열 애국지사께 머리 숙여 추모 인사 올린다고 했다. 이날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은 호남지역 31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의 투쟁상황, 동국대 천지명 연구교수는 31운동 전후의 항일운동 양상, 최성미 전 임실문화원장은 임실 지역의 동학, 천도교와 31운동 을 주제로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이 나섰다. 나종우 회장은 전북에서 항일 운동이 활발해진 이유를 식민지 시기 수탈에서 찾았다. 식량해양 자원이 풍부했던 호남은 19세기 일제 식민지 시기 경제적 침탈의 주된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 목포와 군산항 개항 전후로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 창구가 됐고, 호남선과 전라선, 목포-신의주 국호 1호선 등은 일제 수탈의 동맥 구실을 했다. 나 회장은 이런 현실은 전북민들에게 지속적인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이런 저항의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도 전북이 천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데 기인했다. 전주정읍익산임실남원 등지에 각각 종리원(宗理院)이 설치됐고, 동학 접주였던 임실의 박준승은 이준윤효정 등과 함께 헌정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 같은 활동은 31운동 당시 조직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경로를 보면 알 수 있다며 서울에 상경했던 천도교도들이 독립선언서를 지역으로 가져와 31운동 전부터 시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전북 동부 지역의 투쟁도 활발히 전개됐다. 임실순창남원장수진안무주에서는 종교계,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투쟁의 발생건수는 220여 회, 동원된 연인원도 3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제에 기소된 인원도 1131명에 이른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31 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분석은 조선총독부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실상과 거리가 멀다며 종교계, 학생, 농민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해 1920년대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의 계층을 다양하게 하는 토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최성미 전 원장은 동학농민운동이 31운동으로 조직적으로 이어진 근원으로 임실의 천도교를 주목했다. 1873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벌였던 포교활동으로 동학이 사회운동화됐고,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 진보회 전주지부장을 맡았던 김영원 선생은 1919년 2월 상경해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과 숙의를 한 후, 임실교구를 거점으로 독립선언서를 전주, 남원, 순창, 진안 등지에 전달했다며 이에 따라 각 시군에서 3월 10일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고 설명했다. 천도교가 중심이 된 항일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는 게 최 전 원장의 설명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할 때, 천도교 4세 교주 박인호 춘암상사는 수제자와 배일운동 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1938년부터는 멸왜운동(滅倭運動)을 벌여나갔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인들은 815해방되던 날까지 멸왜운동을 계속했다고 밝혔다. 천지명 교수는 31운동 이후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청년운동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전국 단위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 국내 항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해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전북 청년운동은 192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이전은 실력양성에 기반을 둔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기, 이후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기간이다. 천 교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전북 지역 청년운동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관 속에 성장했다며 특히 1922년 10월 조직된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익산 출신 임종환을 지역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또 이 시기는 조선청년총동맹 단계로 전국 단위 청년조직 산하에서 조직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며 1925년부터 전주, 남원, 김제, 군산 용담 5개 청년회가 모여 도 단위의 통합전선 운동을 시작했다부연했다.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은 토론회 자리에서 3.1운동에 대한 지역사 연구가 많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는 감이 있다며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담은 더 많은 사료 발굴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31운동사 외연확장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김 위원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고창 출신의 백관수, 의병활동 지원과 노동농민운동 변호로 일제에 저항한 순창 출신 김병로, 전주 3.1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목사 등 전북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은 대단하다며 이들의 활동은 전북 항일운동 역사의 큰 자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이들 지도자급 항일운동가와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때 전북 항일운동사는 더욱 알차고 풍성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8 18:08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두고 갑론을박

남원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등재 신청서가 지난 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프랑스 파리)의 완성도 검사를 통과한 가운데, 등재 타당성을 두고 지역 역사학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신청에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은 제외하여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문화살림 대표라고 밝힌 글쓴이는 이 게시판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을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과 같이 세계유산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계 유적이 발견된다고 이들 지역을 가야 강역으로 지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대가야(고령)의 서부 영남지역에서 4~5세기경의 백제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고 해서 백제의 강역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4~5세기 경 백제와 가야의 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증표로 봐야 한다며 오늘날 영호남 경계지역은 고고학역사학적으로 호남 동부지방의 백제와 영남 서부지역의 가야와 인적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또 고분의 축조방식과 출토 유물도 백제와 가야의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어 가야 고분군으로 단정하긴 어렵다며 문화재청도 지난 2018년 고분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할 때 5~6세기 전북 동부 지역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명시했다고 밝혔다. 글쓴이는 고대사가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며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재신청은 전국 학계와 국민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에 논의하도록 해달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른바 호남 가야설에 대한 충분한 연구검토와 고대 국가의 영토강역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 세워진 후 고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글은 지난달 5일에 청원이 시작돼 지난 7일 청원이 마감된 글이지만, 이를 두고 전북 지역학계에서 논의는 분분하다. 군산대학교 곽장근 역사철학부 교수는 16일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을 수 없다며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을 두고 일본중국 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검증을 거친 뒤 등재신청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세계유산센터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연구사는 문화재청에서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과 충분히 논의를 했고 절차상 문제점이 없다고 밝혔다고 했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 A씨는 청원게시판에 나온 의견이 타당한 부분도 있다며전북 가야사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전북 동부지역 백제사에 대한 연구가 완전히 선행된 뒤, 가야사를 조명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역사학 교수 B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가야사 복원사업을 발표한 뒤, 등재를 서두르는 통에 역사적 규명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학 교수 C씨는 전북 동부권에 발굴된 유적이 가야의 것임은 확실하다며 특히 남원 두락리 고분군은 명백한 가야의 무덤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전북 동부 가야세력이 독자세력인지 대가야가 외연을 확장한 세력인지 확실히 규명하고, 봉수의 제철유적의 실체도 좀 더 면밀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원 글에 대해서는 지난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전북을 배제하려는 움직임과 현 고대사학계의 입장이 반영된 글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6 18:29

전북지역 임진왜란사 정리 필요성 대두

전북지역 임진왜란사 정리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 전북지역 관군과 의병이 지역뿐만 아니라 경기도, 경상도 등 전국적으로도 파견돼서 국가를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연구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에서는 최근 호남 의병을 기리기 위해 남도 의병역사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전북에서도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연구고증작업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북 역사학계 등에 따르면, 1592년 있었던 웅치(진안과 전주사이에 있던 고개)전투와 이치(금산 서평)전투는 조선이 왜군을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최대의 곡창지대로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오던 전라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듬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국가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 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며 전쟁의 정황을 전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 전북의 관군과 의병은 많은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1593년 경기도 행주산성을 막아낸 행주대첩에서도 전북 관군이 활약했다. 전라도도절제사로 이치전투를 이끌었던 권율은 전쟁이 끝난 뒤,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병력 1만여 명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경상도 지역의 왜군을 막기 위해서도 파견됐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전라도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 뒤, 경상도 지역에 증원되는 왜군을 감당해야만 했다며 전북은 향토방어라는 관점도 있지만 국가를 수호하는 군대의 역할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북은 웅치, 이치 등 일부지역 전투를 제외하고 종합적인 연구와 자료 정리가 미비한 상황이다. 정유재란 시기 연구는 공백 상태이며, 일부 의병을 두고는 진위논란까지 빚어지는 상황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1990년대부터 임진왜란사 자료 정리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돼왔다. 경북에서는 <경북의병사>(1990년), <대구지역 임진란사>(2017), <경북지역 임진란사>(2018)가, 전남에서는 <호남지방임진왜란사료집>(1990)이 발간됐다. 전남도는 지난 9일 2024년까지 440억원을 들여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일대 36만㎡에 건물 연면적 8300㎡규모로 남도 의병역사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도는 의병관련조사연구, 전시교육, 교류선양 등 활동에 필요한 유물 수집에 나섰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전북대학교 한문종 사학과 교수는 경상도나 전라남도 같은 경우 임진왜란 관련 자료 수집이 진행되고 있으며, 개별가문에서 문집들을 간행하기도 한다며 문집의 진위여부를 떠나 연구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영구 교수는 연구인력이 경상도에 많은 영향도 있다며 이들 중심으로 임진왜란사 자료정리와 연구가 이뤄지다보니 전쟁 자체가 향토방어로 각인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전라도 군인이 경상도 지역에서 이동해서 싸운 전투를 두고 경상도 임진왜란사로 기록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북에서도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정리와 고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관찬사찬기록, 각 문중 소장 자료, 일본중국의 고문서 등을 수집한 뒤, 연구를 거쳐 학술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는 게 도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한문종 교수는 황진, 채홍국, 김제민 등 전북 의병장 및 문무관, 최호, 송상현 등 타 지역 활동 인물, 권율, 이복남 등 다른 지역 출신이 전북에서 활동한 사례 등 정리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임진왜란 당시 전북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4 16:57

“후백제성 동고산성 정비계획 수립해야”

후백제 성터유적으로 꼽히는 동고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를 실사하는 과정에서 정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고산성은 1990년~2014년까지 7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지만, 발굴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정비계획은 수립되지 않은 상태다. 문화재의 상태에 따라 정비계획을 병행하면서 복원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북대학교 남해경 건축공학과 교수는 11일 전주시가 개최한 후백제전주성(동고산성) 국가지정 승격 학술대회에서 동고산성에 대한 보존과 활용을 전체적으로 기획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남 교수는 동고산성 정비는 성벽, 성 내부 시설, 문지 등의 보존과 문화재 안내판, 이정표, 편의시설 등 설치가 해당된다며 세분화한 계획을 제시했다. 성벽은 상태가 좋지 않은 지점부터 조사한 후 보수를 실시하고, 벽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주면의 수목은 정리해야 한다는 게 남 교수의 설명이다. 성 내부에 있는 소나무 등 교목을 두고는 이식을, 경작지는 정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적 탐방로에 위치한 민묘의 경우 이장을 주문했다. 남 교수는 정비를 전제로 보수복원경관유지관리재정계획을 순차적으로 세워야 한다고 정리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 도성의 피난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주 건물지가 궁전이었다는 고(故) 전영래 교수의 이론과 다른 관점이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 강원종 학예실장은 성벽, 성문, 건물지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개축과정이 보인다며 이런 대대적인 개축은 평상 시 이뤄진 개보수과정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로 성벽의 통과선이 다르고 견치석으로 다듬은 성돌을 면석으로 사용했다. 주 건물지와 성벽 가까이에는 대형건물이 재건축된 흔적도 있다며 이런 축성법은 전쟁이 잦은 후삼국시기에 이뤄지는 대사역이라고 설명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의 성이라는 확증할만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공주대학교 서정석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견훤의 옛 궁터로 전해온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라며 소어벽 최하단 성돌이 일반 성돌보다 크고 돌출된 부분을 두고 축성 시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날개처럼 좌우 양쪽에 쌓아 가운데 성의 부족한 기능을 도왔던 익성(翼城)의 최초사례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익성은 대몽항쟁기에 처음 출현한 성으로 춘천 삼악산성 내성, 원주 영원산성, 충주 대림산성, 속초 권금성 등이 대표적이다. 전주시 최락기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동고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한 기반을 조성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11 18:35

[단독] 프랑스국립기록원 한국한지 존재 확인

프랑스 국립기록원이 고려시대 한지로 추정되는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려가 중국 원(元)나라 간섭을 받던 13세기, 고려왕이 원 황제에게 공물로 바친 종이가 프랑스왕에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문서를 두고는 전주에서 제작한 한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면서 관심이 집중된다. 한지와 한복, 한옥, 한식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단체 한스리그(공동대표: 손주경, 천상묵)는 지난 2019년 프랑스국립기록원에서 한지로 추정되는 문서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8일 한스리그 관계자는 전주시와 2017년부터 바티칸 비밀수장고에 있던 교황 요한 22세-충숙왕 서신(1333년), 고종 황제-교황 비오 10세(1904년) 서신을 한지로 복본하는 과정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서가 한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은 프랑스에 있는 아시아 박물관인 기메(Guimet) 박물관장과 바티칸기록원에서 고문서를 담당하는 엔리코 플라이아니 박사가 제기했다고 덧붙였다. 기록원에 따르면, 문서는 1289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일족인 몽골족이 지배하는 일칸국(바그다드 위치)의 왕이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서신이다. 고려 충렬왕(1264~1308년)이 쿠빌라이에게 조공으로 바친 종이를 일칸국에 교역물품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칸국 왕이 고려 종이를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서신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고반여사> 등과 같은 사료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들 사료에는 고려가 원나라에 고려종이를 공물로 바친 사실이 나와 있다. 특히 중국사람의 취미를 설명한 명나라 사료인 <고반여사>는 원나라가 종이를 공납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제조하게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시 일칸국 성직자가 원나라를 오갔다는 사료는 고려 한지가 일칸국에 전달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경교 사제인 라반 바사우마(Rabban Bar Sauma)는 1287년 바그다드, 북경, 아비뇽 교황청 등을 다니며 일칸국의 사자(使者) 역할을 했다. 실제 프랑스 기록원이 가진 문서에도 Papier Coreen으로 적혀있어, 고려 한지임을 추정케 한다. 넓게는 전주에서 제조된 한지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고려시대 전주와 진안은 종이, 먹, 벼루 등을 생산했던 부곡으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한스리그 관계자는 전주한지라는 추정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몽골문서 내용을 계속 추적해왔던 하버드대 엔칭도서관과 한국 동양사학계, 전주 한지 전문가 등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08 18:24

‘완주군 조선시대 타임캡슐’,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되다

조선시대 전기 복식사와 지방유림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완주 류세화류세무 분묘 출토 유물 2건이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됐다. 전라북도는 다음달 27일까지 문화재 지정 의견청취 후 최종심의회를 거쳐 지정을 확정한다. 2일 완주군에 따르면 류세화와 류세무는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에 터를 잡은 전주 류씨 류혼(柳渾)의 5세손 진학재(進學齋) 류팽성(柳彭成, 14831547)의 장자와 차남이다. 류세화, 류세무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전주 류씨 진학재공파가 완주군 둔산리에 선영(先塋)을 조성해 대대로 장지로 삼았는데, 1998년 이 일대를 전주과학산업연구단지로 조성하던 중 여러 무덤에서 다량의 부장품이 출토됨에 따라 전북대학교박물관의 긴급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류세화 분묘에서는 백자, 묘지명, 패옥과 구슬, 석제 인장, 청동거울과 청동수저 등 50점의 유물들이 출토됐으며, 류세무의 분묘에서는 백자, 묘지석, 벼루, 청동거울과 청동수저, 부채살, 붓 등 36점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조선 전기(16C)에 활동한 무덤 주인의 신원이 명확해 해당 연대가 뚜렷하고, 조선시대 복식사와 상장례 풍속사 분야의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조선 전기 문인의 행적을 파악하는 사료의 가치와 조선시대 지방 유림의 부장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왕미녀 문화관광과장은 앞으로도 국가 및 도지정문화재 지정 추진을 통해 소중한 완주군 향토문화유산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밝혀감으로써 완주군 역사자원에 대한 인식 제고와 역사 재정립 계기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완주군은 국가 및 도 지정과 향토문화재를 포함해 총 59개의 지정문화재를 관리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김재호
  • 2021.03.02 17:33

후백제 왕도 유일한 성터 동고산성 역사적 가치 재조명

이달 초 전주가 후백제 왕도였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유일한 성터유적인 전주성(동고산성)의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될 예정이다. 동고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승격에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전북도 지정문화재였던 동고산성은 지난 2017년부터 사적 승격이 추진됐지만, 지정기관인 문화재청의 요구로 발굴조사정비 부문을 보완해 지난해 12월 다시 신청서가 제출된 상태다. 전주시는 이런 상황 속 동고산성의 중요성을 상기하기 위해 오는 11일 한국전통문화전당 교육장에서 후백제전주성(동고산성) 국가지정 승격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날 공주대 서정석 문화재보존학과 교수가 동고산성의 역사적 가치 및 특성, 전주문화유산연구원 강원종 학예실장이 동고산성의 발굴성과, 전북대 남해경 건축공학과 교수가 동고산성의 정비 및 활용을 발제한다. 토론자로는 군산대 곽장근 역사철학부 교수, 국립익산박물관 최흥선 학예실장, 문화재청 김석희 사무관이 나선다. 주제별 발표와 토론이 끝난 뒤에는 전주대 이재운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주재 하에 종합토론이 열릴 예정이다. 실제 동고산성이 가진 발굴성과와 사료적 가치는 크다. 동고산성은 승암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1712m에 이른다. 총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13개 건물터, 25동 건물지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 건물터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암막새에 새겨진 全州城(전주성) 글자는 이곳이 견훤이 쌓은 산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도 거론된다. 이를 두고 동고산성 일대를 왕궁으로 비정하는 설과 배후를 방어하는 방어성으로 보는 견해가 나눠진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서는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두는 창고가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런 역사적 가치로 인해 동고산성의 사적 지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전주시의 설명이다. 사적으로 지정되면 발굴복원관리비 70%가 국비로 지원돼 안정적으로 복원관리할 수 있다.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관계자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동고산성 학술조사를 계속 해왔는데 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규명됐다며특히 학술적으로는 산성의 축조 기법까지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3.01 17:27

고창 봉덕리 고분군 ‘금동신발’ 보물된다… 삼국시대 신발 유물 최초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금동신발이 삼국시대 신발 유물로는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16일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2건을 각각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창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백제 5세기에 제작됐다.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 삼국시대 고분 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보기 드문 사례다. 그동안 삼국시대 고분 출토 유물 중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지만, 금동신발이 보물로 지정 예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동신발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시대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고대 금속공예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의 고분에서는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4기의 대형 분구묘 중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제4호 석실에서 2009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했다. 4호 석실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금동신발 한 쌍이 무덤 주인공의 양쪽 발에 신겨져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출토됐다. 특히 고창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현재까지 삼국시대 고분에서 나온 19점의 금동신발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알려졌다. 나주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비교했을 때 어자무늬(물고기 알 문양) 등 삼국시대 초기 문양이 확인돼 시기적으로 앞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창 금동신발은 백제시대 의례용 금동신발로 보기 드물게 원형을 갖춰 출토된 중요한 고대 금속공예품이라며 다양하고 뛰어난 공예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5세기 중반 백제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2.16 17:34

전북 출토 유물 집대성하는 국립 기관 건립된다

전북혁신도시에 입주하는 또 하나의 국가기관이자, 전북을 포함한 호남북부지역 출토유물을 집대성할 전북문화재연구소가 올해부터 건립절차에 들어간다. 15일 문화재청과 국립완주문화재 연구소 등에 따르면 올해부터 전북혁신도시내 완주권역인 완주군 이서면 용서리 868번지를 대상으로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전북문화재 연구센터 건립을 위한 부지매입이 이뤄진다. 연구센터 건립 총사업비는 300억원(299억1500여만원)에 달하며, 전액 국비이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76억원의 예산으로 2만5600여㎡ 부지를 매입하게 된다. 이후 설계 공모에 나서고 내년에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 용역을 거쳐 2023년에 착공, 2025년에 지하1층과 지상 2층, 건축면적은 3700㎡, 연면적 7500㎡ 규모의 센터 문을 열 계획이다. 이서 국립완주문화재 연구소 전북문화재 연구센터 예정지 센터는 출토유물보존관리(일반, 개방형 수장고, 유물정리실)와 연구기반시설(보존처리실, 실측실, 연구실)외 열린도서관, 교육, 홍보(연구성과) 등 다목적 시설과 국민과 함께 공유하는 체험형 유적문화공원 등 복합기능을 갖춘 지역주민 친화형 문화공간이 되게 된다. 현재 국립완주문화재 연구소는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내 위치해 있는데, 유물 보관고의 경우 가설 건축물을 사용하는 등 국립연구소라는 명칭에 맞지 않게 운영돼 왔다. 문화재청은 센터 건립이 마무리되면 전북권역 매장문화재 출토유물들의 안전하고 체계적인 보관관리, 보존처리 등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사연구 결과를 일반 대중과 성과 공유, 전시활용, 문화재 체험, 홍보 등 종합적인 학술조사연구와 개방형 연구시설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센터 건립은 안정적인 기관운영과 연구기반이 조성되는 것으로, 호남 북부지역의 초기철기시대 및 후백제, 가야 유적 조사연구기능 강화, 연구의 지역적 편차 해소, 지역문화권의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남북부지역은 고조선과 마한, 백제 및 가야, 후백제로 이어지는 고대사의 핵심 연결고리로 문화재청에서도 중요시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센터가 건립되면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 전시 할수 있는 기관이 될것 이며, 지역사회 일자리 창출뿐만아닌 문화유산의 새로운 가치도 창출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백세종
  • 2021.02.15 18:24

[전북 가야 찾기 어디까지 왔나] (하) 쟁점과 과제

전북 가야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은 진전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도내에서 가야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유적은 계속 발굴되고 있지만, 독자세력의 존재여부를 규명할 만한 검증이 더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북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봉수와 제철유적의 시기규명, 문헌사료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해석문제가 관건이다. 가야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소 이견이 큰 상황이다. 이에 철저한 학술연구와 고증을 바탕에 두고 전북 가야를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쟁점-대가야 하위집단 vs 독자세력 학계에서는 남원 운봉고원과 장수 일대에 존재했던 세력을 대가야의 하위집단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익명을 요구한 고대사 박사는 4일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가 섬진강까지 유역을 확장했고, 순천까지 대가야 묘제가 있다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를 통해 봤을 때도 통설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전북에서는 이 세력을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있었던 독자적 가야 세력으로 보고 있다. 봉수와 제철유적,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 고분군을 근거로 들고 있으며, 존재했던 시기도 5세기 초부터 6세기까지 본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사는 특히 계수호는 중국과의 독자적인 외교 가능성을 시사한다며 대가야에 귀속되지 않은 느슨한 연맹체 상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연구와 고증, 발굴성과를 축적한 뒤, 통설과 비교분석하면서 입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역의 요구를 대변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경량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가야사 같은 경우 자신이 속한 지역의 역사가 가장 가치있다는 사고에 사로잡혀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며 전문가와 학계가 냉정한 시각을 바탕에 두고 철저한 검증과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 제철유적과 봉수 시기 규명 제철유적에 대한 시기비정도 과제다. 현재 전북에서 발굴된 제철유적 전체가 가야가 존재했던 고대시기에 국한해서 볼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온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고대시기부터 존재했던 모든 제철 산지가 나오는 데, 전북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사학계에서도 전북에 제철유적이 존재했던 시기를 고대로 한정하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제철 유적 전문가로 유명한 한신대학교 이남규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제철산지가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봉수도 제철유적과 마찬가지로 고대시기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 제기된다. 봉수제의 운영 초기 단계 시대에 100여개나 되는 봉수를 운영했다고 보긴 어려운데다, 불을 일으키는 발화구의 성격도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고대사 박사는 봉수는 먼 곳의 소식을 중앙에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아차산의 보루성에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봉수가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이어 남원 운봉고원 일부 등을 방어하기 위해 봉수를 100여 개나 세웠다는 설은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며 다시 고증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문헌사료 해석문제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파를 둘러싼 해석도 통설과 이견이 크다. 사료에는 백제의 주변 소국으로 반파, 탁, 다라, 전나, 신라, 상기문 등이 나오는데, 학계는 반파를 대가야를 설명하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고대사 박사는 봉수, 고분, 계수호를 비롯한 위신재 유물과 문헌기록을 맞춰 전북 지역에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삼국유사에 전북 가야의 존재가 기록이 안 된 이유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경북 김해), 아라가야(경남 함안), 소가야(경남 고성), 고령가야(경북 상주), 대가야(경북 고령), 성산가야(경북 성주)가 나와있다. 전북 가야사를 설명할 때 일본서기를 활용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기경량 교수는 가야사와 관련된 사료 자체가 적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면서도 사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굴곡과 왜곡이 있기 때문에 사료비판을 엄밀히 하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2.04 18:41

[전북 가야 찾기 어디까지 왔나] (상) 발굴·고증 현황

남원 유곡리두락리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최종 절차를 밟고 있는 가운데 전북 가야사의 실체가 어느 정도 규명됐는지 관심이 모아진다. 현재까지 밝혀진 전북 가야사의 존재는 일부 문헌사료와 고분 및 부장품, 제철유적, 봉수 등을 통해 확인된다. 문헌사료에 있는 기록과 유물유적과의 비교 분석도 진전되면서 고증도 진전되고 있다. 특히 장수남원 등지에서 발굴되는 제철유적은 주목할 만하다. 흔히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 하지만, 가야의 중심지라고 일컬어지는 김해와 고령에서 발굴된 제철 유적은 없다. 다만 전북 가야 세력을 독자 세력이 아니라 영남권 대가야의 하위집단으로 보는 통설, 봉수제철유적의 연대기가 가지는 불확실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 등이 남아있다. 전북의 가야사를 엿볼 수 있는 문헌사료와 유적 분포현황, 대표유적 그리고 이들이 갖는 의미와 추후 과제를 정리해본다. △ 전북 가야 유적 현황과 관련사료 1일 전북도에 따르면 도내 가야 유적은 남원완주무주장수진안임실순창지역에 모두 822개가 있다.(2020년 12월 현재) 종류는 고분, 제철유적, 봉수 산성으로 다양하다. 이 중 전북 가야의 존재를 방증해주는 유적인 제철, 봉수, 고분은 776개로 94%를 차지한다. 전북에 가야소국의 존재여부를 추정할 수 있는 문헌사료도 있다. 중국 양나라 때의 사료인 양직공도(梁職貢圖)와 720년대 완성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이다. 일본서기에는 반파는 백제와 3년 전쟁(514년~515년)을 치르면서 봉수를 쌓아올렸다고 나온다. 군산대학교 곽장근 역사철학부 교수는 반파는 가야계 소국으로 추정되며, 기록에 나온 봉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가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봉수 주변 가야계 산성과 석축, 수혈식 석곽묘, 축대시설이 분포한다며 가야의 봉수로 해석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양직공도에는 남원시 일대에 기문이라는 소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곽 교수는 이들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백제에 의탁하면서 연명했던 소국이라며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와 봉토분 양식을 문헌사료와 비교해보면 가야계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대표유적-남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이 고분군은 기문국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로 꼽힌다.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40기의 봉토분(封土墳)으로 존재하며, 이 중 12기는 지름 20m가 넘는 대형고분이다.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다. 무덤양식은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며, 지난 1989년과 2013년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축조세력이 지배층이었음을 방증하는 유물도 출토됐다. 금동신발편, 청동수대경, 갑주, 환두대도(環頭大刀-장식용 칼) 등을 비롯한 금속유물 160여점, 기꽂이, 마구류, 꺽쇠 등의 철기류 210점, 원통형 기대를 비롯한 대가야 양식의 토기류 110여점 이다. 이 중 금동신발과 청동수대경은 처음 출토된 것으로 백제와 왜, 중국 남조 등과의 대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유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전북도 노기환 학예사는 토기를 통해서도 인접 국가와의 대외교류를 유추할 수 있다고 봤다. 노 학예사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을 가야나 백제에 주고 토기를 가져왔을 것이라며 고부가가치의 생산품을 주고 소모품적인 생산물을 가지고 오는 무역 형태라고 했다. 이어 기문국의 주 세력은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사람들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 대표유적-단야구(鍛冶具) 지난해 9월 장수 백화산 고분군 발굴현장에서 공개된 단야구는 반파와 철제 유물의 실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로 꼽힌다. 단야구는 철기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망치, 집게, 모루 등의 도구로 호남 가야고분에서 처음 확인됐다. 게다가 단야구에서는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타격흔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피장자는 장수지역 철기제작을 담당했을 수장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수남원 등지에서 확인되는 제철유적과의 연관성까지 높여준다. 곽 교수는 운영의 주체는 고증이 되고 있다며 문헌사료와 비교해보면 반파국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표조사를 통해 확실히 가야 철제유물이라는 점을 시기적으로 규명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2.02 19:02

충주박씨 기증유물 2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지정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충주박씨 기증유물 2점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일 익산시에 따르면 충주박씨 기증유물인 눌재 박상 초상화와 사암 박순 초상화가 지난해 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예고를 거쳐 최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5호제276호에 각각 지정됐다. 눌재 박상사암 박순 초상화는 충주박씨 문중이 유물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지난 1970년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눌재 박상은 병조좌랑, 사간원헌납, 상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조선 전기 사림파 문신이다. 박상 초상화는 오사모에 담홍색 단령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15세기 문인 관료 초상화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19세기 이후 서화를 본떠서 그리는 이모(移模)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색과 음영기법이 추가됐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양식과 시대적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회화사적과 지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눌재 박상의 조카인 사암 박순은 눌재 박상의 조카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 문신이다. 박순 초상화는 오사모와 청색 단령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서 16세기 공신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18세기 이후 이모(移模)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색과 장식적 기법이 추가됐으며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양식과 시대적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상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회화사적, 지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박상박순 초상화는 원광대 박물관 4층 서화기증실에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사전예약 후 관람 가능하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21.02.02 16:15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