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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가상현실 활용해 복원 시도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최대 규모의 절터인 익산 미륵사지가 가상현실을 활용한 방법으로 옛 모습을 되찾을 전망이다. 현재 미륵사지석탑만 남아있는 터에 각종 시설을 갖춘 절을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등을 통해 복원한다는 것이다. 익산시는 오는 2022년 1월~12월 가상현실을 활용한 미륵사지 원형복원 및 플랫폼 구축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5일 익산시에 따르면,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는 미륵사를 대웅전, 당간지주, 관음전 등을 갖춘 절로 AR과 VR을 활용해 복원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AR아바타 서비스인 제페토를 활용해 복원된 절에서 온라인 종교활동이나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다. 앞서 지난 8월 콘텐츠 구현방법을 위해 불교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 토론회도 개최했다. 이달부터는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뒤, 관련예산을 편성할 계획이다. 익산시 관계자는 미륵사지 설화나 창건 주체에 대한 기록은 문헌사료와 유물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절의 건축구조는 나와있지 않다며 이로 인해 직접 복원하기보다 디지털기술로 구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아직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라며 콘텐츠를 현장에서 구현할지, 앱이나 모바일로 선보일지 추후 논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국내에서 실물이 사라진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 구현한 것은 지난 2019년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서울시가 함께 복원했던 서울 서대문(돈의문)이 첫 사례다. 두 번째 사례는 지난해 복원한 신라 최대의 왕실 사찰 황룡사이다. 익산시는 앞선 두 사례와 달리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일단 하나의 콘텐츠를 실험적으로 개발해서 운용을 해본 뒤,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보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했을 때,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자 왕비가 절을 세우길 청했다는 내력이 전한다. 이후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2009년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10.05 18:21

한국 최초 순교자 유해 입증 증거…목뼈에 남은 참수형 흔적, 백자사발지석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순교자인 윤지충은 생전에 과거시험 소과에 합격한 성균생원이었다. 치아건강은 좋지 않았는데, 치아 32개 가운데 4개는 충치가 있었으며 치주염도 앓고 있었다. 천주교 전주교구가 지난 24일 완주 초남이성지에서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를 열고 지난 3월 발굴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윤지충 동생)에 대한 자세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이들 순교복자 3인의 신체적 특징과 신분, 세례명, 생년, 본관 등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전주교구는 이날 유해 발굴 이후 4개월여에 걸쳐 고고학해부학적 검증 작업을 거친 결과를 자세히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순교자 3인의 유해는 넙다리뼈(대퇴골)가 매우 납작한 아시아계이며, 볼기뼈(관골)의 형태는 남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넙다리뼈와 정강이뼈 길이로 산출한 신장은 윤지충 바오로가 1653.8㎝, 권상연 야고보 152.53.8㎝, 윤지헌 프란치스코 163.93.8㎝였다. 치아가 온전히 보존된 윤치충의 경우 13,12,22,23번 치아가 충치였고, 생전 치주염 증상 이 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이들 3인의 치아와 뼈의 상태로 추정한 사망 당시 연령도 사료 및 유물에 나온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윤지충의 치아로 추정한 나이는 29~39세, 권상연은 31세~41세였는데, 기록에는 각각 33세와 41세로 나와 있다. 윤지헌은 27세~37세였고, 기록은 37세였다. 형벌의 흔적이 남은 유해 전신사진도 공개됐다. 참수형을 당한 윤지충은 다섯 번째 목뼈에서 예기(銳器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된 흔적이 나왔고, 권상현은 목뼈가 없었다. 능지처참형을 당한 윤지헌의 유해는 둘째 목뼈, 양쪽 위발뼈, 왼쪽 넙다리뼈 등이 골절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해남 윤씨 친족 5명, 안동 권씨 친족 5명의 머리카락과 구강세포로 진행한 부계 유전자(Y-STR) 비교분석 결과도 이들 3인과 대부분 일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해 감식 총괄 책임자인 송창호 전북대 의대 교수는 유해의 주인공을 완벽히 밝혀내는게 쉽진 않았다며 사망 무렵 예기손상 흔적과 유전자 비교 분석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순교자 이름과 직위, 집안, 과거 합격기록 등이 적힌 백자사발지석(誌石)도 이날 공개됐다. 사발 바닥엔 모두 한자 22자(字)가 쓰여 있었는데, 망인의 매장시점과 신분, 이름, 세례명, 본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윤지충의 지석에는 이름과 함께 聖名(성명세례명) 保祿(보록바오로)이 적혀 있었다. 당시 성균관에서 치르는 과거시험 소과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뜻하는 成均生員(성균생원), 성인이 된 이후 가진 이름을 일컫는 字禹庸(자우용), 본관이 해남윤씨임을 일컫는 本海南(본해남) 등이 남아있었다. 권상연의 지석에도 당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學生(학생)이 적혀 있었다. 학생은 성균관사학향교에 속한 유생이거나 품계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성인 때 또 다른 이름인 景參(경삼)이라는 의미인 字景參(자경삼), 본관이 안동권씨임을 의미하는 本安東(본안동) 등도 기록돼 있었다. 윤지헌의 묘에서는 다른 두 순교자와 달리 백제자기 접시가 수습됐는데, 묵서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26 16:38

(속보)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 문화재 지정될까

속보 =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인 윤지헌 프란치스코(윤지충 동생)의 유해가 230여년 만에 발굴된 가운데 이 유해들의 문화재 등재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구전(口傳)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순교자의 역사가 실체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유해는 박해를 받은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천주교사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형벌의 실제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25일 완주군 초남이성지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를 연다. 지난 16일 완주 초남이성지에 안치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검증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역사적 가치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유해 검증에 참여했던 전북대 전 고고인류문화학과 교수, 전북대 의대 송창호 교수 등도 참석한다. 전주교구 홍보국장인 송광섭 클레멘스 신부는 지난 1일 유해발굴 관련 기자회견보다 더 자세히 검증과정을 보고하고 의의에 대해 자세히 논의할 것이라며 향후 한국 천주교사 분야에서 관련 연구도 해야 하고, 교황청에도 보고서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화재 지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완주군청과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과 관련한 질문에는 아직 (유해를 발굴한 뒤 의의를 찾고 있는) 시작 단계라며 점진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며 말을 아꼈다. 실제 유해가 가진 실증적 가치도 크다. 1791년 신해박해로 참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은 목뼈 부분에 날카로운 도구에 잘린 흔적이 남아있고,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능지처참을 당한 윤지헌은 목, 팔 등에 절단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3월 발굴된 무덤에서 나온 사발지석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정보와도 일치했고, 윤지헌의 묘에서는 백자제기가 출토됐다. 실증 자료로 근거로 한국 천주교사를 상세히 연구할 토대가 생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함께 향후 순교자 유해를 발굴할 때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호남교회사연구소장인 이영춘 신부는 조선시대 천주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사료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조선시대 형벌의 실제뿐만 아니라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에서 발굴된 사발지석은 문화사적인 가치가 있다며 게다가 윤지충은 다산의 고종사촌관계로 당시 남인 정치세력과 천주교의 연계관계 등 천주교사를 정밀하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유해의 문화재 지정 여부를 두고는 문화재청에서도 지정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개인적으로도 천주교 유산을 넘어 한국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23 17:23

[직격 인터뷰] 곽장근 교수 “전북 가야설에 대한 반박 논문 통해 해야 한다”

곽장근 교수 속보 = 최근 전북 가야 문화권을 비정하는 기문(己汶)과 반파(伴跛)를 두고 사료문제와 유물유적 검증문제가 쟁점이 된 가운데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의 입장에 관심이 쏠린다. 오랜 세월 이 분야를 연구해 왔으며, 해당 학설의 주창자이기 때문이다.(관련기사 1일 13면, 7일 9면13면) 논란은 남원지역 시민사회 단체 등이 남원 가야계 소국=기문 등식화를 두고 문제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했다. 이들은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신청서에 명시한 기문용어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한 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료인 <일본서기>에 나온 국명이라는 이유다. 반면 남원시는 유네스코에 제출된 서류를 전문가가 검토하는 단계라며 현 상황에서 신청서 내용을 수정하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도 사료해석을 비롯해 봉수제철유적의 존재유무와 조성시기를 놓고 지역사회와 학계에서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이에대해 장수군은 학계에서 다수 학자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반파 용어 사용을 당분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본보는 곽장근 교수의 입장을 들어봤다. -장수군의 반파 보류 결정 어떻게 보시는가 행정은 객관성이 생명이다. 결정을 존중한다. 다만 나는 학자로 행정보다 앞서 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장수 가야에 대한 과제는 특별히 과제라고 말하긴 어렵다. 역사고고학자로서 40여 년간 연구하면서 쌓은 고고학 자료도 있고 문헌학자들의 연구 성과와도 일치가 된다. 설명이 안 될 부분이 없다. 그리고 최근 10개 봉화를 중심으로 발굴 했는데, 가야 토기만 나왔다. 대가야 것도 아니었고 고려, 조선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불 피우는 흔적도 나왔다. -고증을 시작하는 단계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 이제 시작이다. 학자로서 학문의 방향성을 잡고 결론을 도출해나갈 것이다. 학술대회 통해서 계속 검증을 받겠다. -남원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하는 기문문제 어떻게 보는가.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서 관심이 높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이며 폐기된 학설이다. 기문이란 용어는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양직공도>, <환원> 등에도 나와 있다. 일본서기만 가지고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동북아 정세와 역사 맥락배경 등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다. 일본중국 학자들과 수차례 학술대회를 열어 검증도 했다. -전북 가야를 비판하는 매체를 많이 보는가 유튜브, 칼럼 등 다 보고 있다. -비판하는 측을 향한 입장은 어떠한가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만 칼럼과 유튜브, 말로 비판할 게 아니라 논문으로 반론을 제기해 달라. 나는 논문 수십 편으로 내 이론을 세상에 알렸다. 그렇기 때문에 팩트를 기반으로 쓴 논문을 통한 문제제기는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논문과 책이다. 이 방법이 우리의 가야를 만들어갈 수 있고 전북의 미래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이다. -향후 계획은 올해까지 논문을 쓰고, 앞으로 가야사 연구는 후학들에게 맡길 계획이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작고 있기 때문에 좋은 논문이 양산될 것으로 믿는다. 다만 대중서는 계속 쓰면서 도민들께 인사를 드릴 것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07 17:43

장수군 ‘반파=장수가야설’ 학설 인용 보류

장수군이 최근 지역일대에 반파(伴跛)라는 독자 가야세력이 존재했다는 학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대해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고대사학계와 지역사회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논란이 일자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장수군이 해당 학설이 사학계에서 인정받은 뒤 다시 사용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관련유물유적과 문헌사료를 통해 검증해야 하는 과제가 대두하고 있다. 장수군은 6일 전북일보와 통화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학술적인 논란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는 것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학계에서 인정받으면 그 때 다시 반파라고 명명해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했다며 현재는 장수지역에 존재했던 가야세력으로 칭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장수군은 오는 10월 19일 군민의 날 행사에서 반파국 선포식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보류한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그 동안 한국 고대사학계와 지역사회에서 반파=장수가야설을 두고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와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문헌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에 나온 반파(伴跛, 叛波)를 토대로 장수에 반파국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일본서기>에 나온 반파는 백제와 3년 전쟁(514년~515년)을 치르면서 봉수를 쌓아올렸다는 기록과 지표조사를 통해 봉수터로 추정되는 117곳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 가야사 전공학자는 사료에 나온 반파를 대가야로 낮춰 부르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5~6세기 백제와 대가야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다. 또 <일본서기>에 등장한 반파 관련 내용도 중국문헌 <삼국지> 내용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봉수터도 가야의 것만이 아니라 삼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시기에 걸쳐 분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장수 시민사회에서는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쓰인 사료라며 문헌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장수군의 입장대로 추후 반파=장수가야설을 다시 내세우기 위해서는, 유물유적과 사료 검증을 통한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에대해 곽장근 교수는 장수군의 고민과 입장은 충분히 존중한다며현재 발굴이 미진한 상태로 더 많은 발굴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곽 교수는 최근 10개 봉화를 중심으로 발굴을 했는데, 전부 장수 독자세력설을 증명할 수 있는 가야토기만 나왔다며 대가야 토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금까지 30년 넘게 가까이 발로 뛰면서 가야 시대 유적을 발굴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40여편 이상의 논문을 써왔다며 앞으로도 대중서적을 쓰면서 전북 가야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입장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열리는 학술대회와 다른 학자들이 쓰는 논문을 통해 제가 주장하는 전북 가야에 대한 검증을 꾸준히 받겠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9.06 18:02

지역 내 가야사 갈등 지속 이유는

남원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기문(己文) 삭제 요구와 반파 장수 가야설등 소위 전북 가야사와 관련해 지역사회에서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를 두고 자치단체가 역사를 검증 없이 지역 활성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진단이 나온다. 유물유적이 묻혀있는 곳을 지표조사를 하거나 발굴한 뒤, 통설과의 비교분석, 비판적인 접근이 부족한 상태로 전북 가야의 유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있는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전국 고대사학계에서 반대 의견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철저한 검증과 지역사회의 공감대 형성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바른 등재를 원하는 남원지역 초중등 교사모임에 속한 한 중학교 교사는 교육청에 남원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서류에 적힌 기문 삭제를 부탁드린다는 민원을 넣었다. 이를 두고 지역사회에서 계속 갈등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앞서 남원 지역 시민사회 단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문이라는 명칭은 <일본서기>에서 당시 남원 일대를 지배한 정치체를 일컬은 것이라며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곽장근 군산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며 가야 소국의 하나인 기문이란 용어는 일본서기 뿐 아니라 다른 사료에도 나와 있다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비슷한 입장을 내놓은 상태다. 반파 장수 가야설을 두고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실학의 비조인 성호 이익은 최초로 가야의 범위를 전북 동부까지 확장했다며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반파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특히 섬진강 하구는 반파국이 남해로 나가는 수송관문이고, 이와 연계된 운봉고원과 장계분지에서는 막대한 제철 유적이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반면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은 역사와 고고학은 문헌과 물증으로 입증해야 한다며 봉화망의 실재(實在)도 의문이고, 언제 운용되었는지도 모를 제철지를 놓고 가야 제철지로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섬진강 물길이 반파의 수송로 역할을 했다면 장수와 섬진강 하구는 수로로 연결돼야 하는데, 장수와 장계는 금강수계라고 부연했다. 자치단체가 국정과제에 따른 전북 가야사 발굴을 명분으로 검증 없이 지표조사와 발굴만 밀어붙인 게 이같은 갈등의 원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실제 전북 동부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발견된 제철, 봉수, 고분은 800여개로 알려져 있지만, 전부 가야시대 유물로 보긴 힘들다는 게 고대사학계의 주장이다. 봉수는 조성시기와 간격문제, 제철은 입지 문제가 주요 화두다. 특히 제철은 전근대 제철시기가 망라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치단체 관계자는 문재인 정권 이후 가야사 관련 예산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급하게 (지표조사, 발굴을) 추진한 감이 있다고 말했다. 진안 마령고 이상훈 역사교사는 역사를 지역 활성화 차원에서 접근한 게 문제라며 검증도 안된 상태로 섣부르게 (가야 유물이라는) 결론을 내놓다보니 많은 사람들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학자는 가야사 육성이 국정과제가 되면서 정부가 무분별하게 예산을 투입한 것부터가 문제라며 급하게 추진하다보니 조사결과도 오류가 많고 나중에 이를 바로잡는 데도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를 엄정한 비판없이 활용한 탓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정린 전북도의원은 가야사 연구는 학계에서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분야로 알려져 있다며전북도가 하반기에 개최할 예정인 전북가야 역사 재정립 학술대회에서 기문가야 논란을 비롯한 여러 부분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31 18:21

(속보) 남원 유네스코 등재 고분 일제 ‘기문국’ 용어 사용…교육부 민원

속보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예정인 남원 유곡두락리 고분군에 <일본서기>에 나온 지명인 기문을 명시한 사실과 관련된 논쟁이 교육부까지 전달됐다.(관련기사 20일 13면, 25일 9면)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바른 등재를 원하는 남원지역 초중등 교사모임에 속한 한 중학교 교사는 최근 교육부에 민원을 넣었다. 이 교사는 세계문화유산 위원장이신 유은혜 교육부 장관님이라며 남원가야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서류에 적힌 기문 삭제를 부탁드린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원지역은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앞두고 갈등이 심해졌다며 최근 가야문화유산을 임나일본부설 근거자료인 <일본서기> 속 지명에 따라 기문으로 설명에 넣어 등재하려고 하기 떄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한 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이다. 이 교사는 이곳 남원은 역사적으로 항일의 뼈아픈 현장이라며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잘 막아낸 곳이지만, 정유재란 때 만여 명이 순국한 피흘린 역사의 고장이며, 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이 있었던 처절한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런 땅에 식민사관의 근거자료를 마련해주는 용어인 기문이란 두 글자를 꼭 넣어야 하는가라며 기문이란 이름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위원인 이마니시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이 임나일본부설을 되살리기 위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나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정됐다며 믿으라고 한다며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사례를 예로 들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이 교사의 민원 요청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또는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인 학자는 물론 대다수의 일본인 학자들도 부정하고 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 합의되기도 했다고 답변했다. 이 교사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 영어 원문에 기문의 근거를 <일본서기>로 든 점도 지적했다. 실제 세계문화유산 등재 원문에는 기문의 출처를 Japanese history Nihon Shoki(Chronicles of Japan)으로 밝히고 있다. 이 교사는 기문이란 지명이 여러 차례 강연과 홍보를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여러 사서에 기록됐다고 전달했던 내용과 다르게, 일제시대 임나일본부설주장을 합리화하던 <일본서기>마을 근거로 제시했다고 했다. 현재 이 민원은 교육부에 접수된 상태다. 이에 대해 무소속 이용호 의원(남원임실순창)은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기문국이라는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이와 관련, 남원시는 세계유산등재 추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적극적인 소통과정을 거쳐야한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30 17:34

“신석정 시인 고택 사라지면 안 된다”

속보 = 전주시 노송동 주민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비사벌초사 보존대책위원회(보존대책위)를 결성했다. 비사벌 초사는 신석정 시인(1907~1974)이 생전 거주하던 고택인데, 노송동 지역에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고택의 철거여부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송동 주민과 전북지역 18개 문화예술단체(전북문인협회 등)가 지난 4일~8일 보존대책위를 구성한 뒤, 고택의 존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보존대책위는 10일 문화도시로서 자긍심을 지켜야 할 전주시가 개발 논리에 밀려 역사 문화적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석정 시인은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았다며 1961년 조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인 단식의 노래, 춘궁은 다가오는데, 전아사를 발표했다가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시인이 남긴 삶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전주, 특히 이곳 노송동 일원을 떼어놓고서는 말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실제 비사벌초사는 당대 시인들과 교류하는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 고택에는 이병기, 박목월, 김영랑, 김남조, 박두진 시인 등이 자주 들렀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던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이 출간한 시집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댓바람 소리> 중 3권을 비사벌초사에서 썼다. 대책위는 전북대학교, 영생대학에서 시론 등을 강의하기도 했고, 1963년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등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셨다며이후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비사벌초사에서 거처하셨다고 부연했다. 대책위는 비사벌초사를 문화유적으로 온전히 보존하고, 근처에 신석정문학관 건립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에 강력하게 촉구한다며비사벌초사는 미래에대에게 남길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 가치와 정신이 보전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주시 미래유산 14호로 지정된 신석정 시인 고택 비사벌초사의 존재를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서명운동(SNS방식 병행)을 전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8.10 17:41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무형유산을 논하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종희)이 디지털 신기술(ICT)을 무형유산 전승기록과 콘텐츠 활용에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한다. ICT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있는 가상현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을 의미한다. 국립무형유산원은 29일 오후 2시 원내 국제회의실에서 신기술(ICT)과 무형유산 전승활용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기록이 어려웠던 무형유산 핵심 기예능이 데이터로 구현되는 방안과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생한 체험이 가능한 방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대회는 안재홍 카이스트 교수의 주제발표 무형유산에서 신기술 적용 영역과 방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진행되는 1부는 유정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와 임정환 한국산업기술문화재단팀장이 무형유산 기록보존을 위한 신기술 현황 및 고도화 방안을 주제로 논의한다. 2부에서는 유상현 서경대학교 교수와 최경준 바이더미디어랩 감독이 각각 무형유산 체험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실감형 콘텐츠 개발 방안, 다양한 미디어 아트 기술을 이용한 무형유산의 표현 방법을 발제한다. 종합토론은 안재홍 카이스트 교수를 좌장으로 김진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실장, 장지헌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김주섭 서강대학교 교수, 유미옥 서경대학교 교수, 송민선양진조 국립무형유산원 과장이 발표자 전원과 심도 있는 의견교환이 이뤄질 예정이다. 학술대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화와 전자우편으로 사전신청을 받아 선정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국립무형유산원 유튜브에서 생중계도 할 예정이다. 앞서 무형유산원은 지난 21일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당장 직무대리 최원일)국립중앙극장(극장장 김철호)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와 공연예술 문화유산 보존활용을 위한 업무협약(MOU)도 체결했다. 이날 협약으로 무형유산권과 4개 기관은 △공연예술 아카이브 발전을 위한 정책개발학술연구 등 협력 △아카이브 서비스의 원활한 운영과 확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아카이브 운영을 위한 법 제도적 개선 노력을 공동으로 펼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27 17:46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 매듭지어야”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독립군이나 의병과 마찬가지로 항일 활동을 벌였지만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역사적 행적에 걸맞은 예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해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교육관에서 개최한 정기학술대회 반일항쟁을 지향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농민군 서훈에서는 근대사학자들이 모여 예우방안과 관련법, 2차 동학농민혁명의 반일항쟁 성격 등을 두고 논의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올 4월말 기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로 공식 등록된 인원은 총3687명이다. 이들 가운데 1894년 3월 1차 봉기 참여자는 전체 6%인 211명, 9월 이후 2차 봉기 참여자는 85%인 3151명에 이른다. 2차 봉기가 서훈문제가 쟁점화 된 항일의병전쟁기이다. 유족은 모두 1만2071명이다. 자녀는 10명에 불과하며, 손자녀는 1206명, 증손녀 4590명, 고손자녀는 6265명이다. 그러나 이들 참여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추진되는 기념사업이 전부이다. 김양식 청주대 교수는 독립유공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국가 공훈록에 등재돼 서훈을 받는다면서 그 후손은 취업, 요양, 주택우선 공급, 정착금 등 다방면의 지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반면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은 명예만 회복됐을 뿐 실질적인 국가예우는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문제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법률은 일제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독립유공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보상토록 명시하고 있다. 심사 기준년도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895년 전후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로 한정한다. 김양식 교수는 동학농민혁명은 1895년 직전에 일어났으므로 충분히 심사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 지가 쟁점이다. 허수 서울대 교수는 현재 학계의 입장을 봐도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입장을 통일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서훈을 받는 독립유공자처럼 동학농민혁명군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전봉준의 일제 법정 심문에 답한 재판기록인 <전봉준공초>에는, 전봉준이 2차 동학농민혁명의 목적을 일본의 침략반대와 보국안민으로 답변한 기록이 있다. 실제 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에도 국경을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사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으며, 각 지역 일부 농민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유생, 관리들과 연합전선을 추구한 사례가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이를 두고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강토침략으로 인식하고 대적했다며 항일투쟁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국왕이 일제에 포로로 인신이 구속되는 등 1894년은 이미 국권이 탈취된 상태라며 당시 동학농민군은 일본 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전국에서 봉기했다고 설명했다. 관련법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률로 개정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법적 근거를독립유공자법에 따를 경우 기존의 법 관행상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자체 법률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김양식 교수는 역사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518민주유공자법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며예우 방안으로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등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했는데,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을 개정할 때도 이 사항을 참고해 예우조항을 조문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립묘지 조성, 동학농민군 현충사업 지원 등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바다 고려대 교수는 동학농민군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예우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 전체를 살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반외세, 반침략, 항일 구국 투쟁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학농민군의 독립운동 참여가 충분히 근거를 얻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22 17:01

[전북사의 과제] ④에필로그

1주일간 연재했던 전북사가 종결했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되짚어보면, 후백제 왕도인 전주에 대한 문헌기록과 유물유적, 고조선 준왕이 금마(익산)로 내려왔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마한사, 남원장수지역에서 확인된 봉수와 제철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야사를 소략한대로 짚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전북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백제사를 비롯 각 역사별로 보완해야 할 점을 제언한다. 전북의 백제사는 다른 시기 역사보다 상대적으로 논쟁이 적은 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관세음응험기> 등 문헌사료에 익산의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유적,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 등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사기와 왕궁리 유적은 익산이 왕도로서 존재했다는 데 힘을 보태준다. 삼국사기에는 익산에 있던 궁궐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있고, 왕궁리 유적 내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지칭한 명문이 있다. 이를 두고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천도설과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별부설 등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익산이 백제 무왕대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해석은 연구자들끼리 일치한다. 앞서 지난 2015년에는 왕궁리 유적 주변이 시가지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왕궁리 유적에서 동남쪽 1.3㎞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물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왕궁리와 제석사지 사이, 궁 남쪽의 탐리마을에서는 기와편, 건물터 등 생활유적도 확인됐다. 백제 왕도로서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도성체계라는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왕궁리 유적은 궁성, 미륵사는 국찰, 쌍릉은 왕릉 등으로 비정하고 고고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며 익산에 산재한 유적은 동시대의 것들로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야 익산도성 본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고 했다. 전주가 후백제 왕도로서 갖는 역사적 정체성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는 후백제왕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등 각지에서 산성유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대부분 유적이 땅속에 매장된 상태로 성격규명이 미진한 상태다. 후삼국 시대에 존재했던 왕조의 수도인 만큼 도성, 궁성, 분묘, 사찰, 생산시설 등을 세분화해서 발굴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해야 한다며 여러 시설의 위치를 연계하면서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한사는 중국 문헌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등에 집단의 존재가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등 호남지역 사학자들은 1970년대부터 발굴에 매진한 결과, 마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토기, 분구묘, 동검, 유리구슬 등 다수의 유물을 발굴했다. 그 결과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규명했으며, 소국 11개~12개 정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도 밝혀냈다. 다만 기존 유물유적 발굴과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한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깨고 전북 동부 지역에 독자적으로 존재했다고 이론을 세운 점을 두고는 학계에서 평가가 긍정적이다. 가야로 통칭하는 각국에 대한 분석에서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을 간과했던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다만 근거로 쓰이는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보완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사료 자체로 문제점이 제기된 <일본서기>의 해석문제를 두고는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9 18:20

[전북사의 과제] ③가야사

전북 가야사는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의 범주에 들어갔지만 전국 고대사학계에서는 가장 쟁점이 많은 분야다. 전북 동부지역에 대가야가 존재했다는 통설을 뒤집고, 독자세력 존재를 주장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근거로는 지표조사로 발견된 봉수와 제철, 중국과 일본의 문헌사료를 든다. 그러나 봉수의 조성시기, 제철의 입지, 문헌사료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치열하다. 아직까지는 통설(전북 동부지역=대가야)이 힘을 얻고 있다. 전북 가야사를 둘러싼 쟁점과 가야할 길을 두 짚어본다. 전북도 등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북 동부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발견된 제철, 봉수, 고분은 800여개다. 특히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은 역사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프랑스)의 완성도 검사까지 통과한 상태다. 가야세력의 존재여부를 유추해주는 문헌사료도 있다. 중국문헌인 <양직공도>와 일본의 <일본서기>다. 두 사료에는 반파(가야소국)가 봉수를 쌓아올린 기록과 남원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되는 기문국이 나온다. 이들 유물과 문헌을 근거로 대두한 학설이 전북 독자가야설(장수 반파가야설)이다. 곽장근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반파의 위치는 역사 고고학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며 전북 동부에서 발견된 110여곳 8갈래 봉화로의 최종 종착지가 장수군 장계분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서기에 반파가 513년 기문과 대사를 두고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봉후 기록이 나오는 데, 그 물증이 전북 동부지역 봉화망이라고 부연했다. 전북 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117개 봉수는 조성시기가 주된 논쟁거리다. 논쟁은 고대시기부터 구한말까지의 문물제도를 망라한 <증보문헌비고>에서 촉발된다. 이 사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각 봉수당 거리는 11.6km이다. 봉수분야 전공자인 김주흥 LH밀양사업단장은 이를 두고 (거리상으로 볼 때) 가야시대에 (특정 한 지역에서) 110여 개의 봉수를 운영했다는 게 맞지 않을 수 있다며장수 지역 봉수는 삼국, 고려, 조선 등 다양한 시기에 걸쳐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한다. 형태를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다. 110여개의 봉수가 가야시기에 지어졌다면 구조상으로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과 전쟁이 많은 고대시기에 급조해서 만든 봉수는 형태가 제각각이며, 양식도 토축암반석축형으로 다양하다는 입장이 충돌하고 있다. 제철은 입지 문제가 화두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대시기부터 존재했던 모든 제철산지가 나오는데, 전북과 관련된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장수에 고대부터 제철산지가 존재한 게 아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남규 한신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입지상의 문제로 장수 대적골과 같은 산간에서는 제철이 생산되긴 힘들다며 고대시기 유통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곽 교수와 조명일 군산대가야문화소연구원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주변을 지표조사 했을 때 삼국시대 토기편이 적지 않게 수습됐다며 특히 대적골에서 발굴된 유물은 통일신라 문화층까지 접근했다고 반박한다. 많은 가야사 전공 학자들은 반파를 대가야로 보는 통설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반파=장수가야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처럼 사료인 <양직공도>와 <일본서기>를 근거로 들고 있다. 다만 유물유적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선 이들은 반파를 백제가 대가야를 낮춰부르는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5~6세기 백제와 대가야가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서기>에 등장한 반파 관련 내용은 중국문헌 <삼국지>의 내용을 윤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유물유적과 연관한 해석에서도 △반파가 성을 지은 자탄은 경남 거창 , 대사는 경남 진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고령토기의 확산지점이 넓다는 점 등을 들면서 통설에 힘을 실고 있다.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반파 장수 독자세력 이론에 대한 근거도 고고학적 자료인 봉화뿐만 아니라 문헌사료인 일본서기로도 들고 있다며 사료의 문제점이 제기된 이상 논리보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통설을 뒤짚은 학설인만큼 검증을 통한 논리보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장수가야 독자세력설을 입증하려면 봉수봉화뿐만 아니라 국가체제의 상징인 산성, 왕궁, 왕릉, 수취체제인 창고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가야=연맹왕국이라는 틀을 깬 이론인만큼 시각을 유지하면서 연구검증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는 정치체를 놓고 중심과 변두리라는 등식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며 장수와 진안일대,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자율적 발전론에 무게를 두고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8 17:12

고창의 풍류문화 · 전통가요 전승과 문화적 활성화 방안 모색

고창의 풍류문화와 전통가요를 전승하고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북대 농악풍물연구소는 16일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고창의 풍류문화 전통가요 전승과 문화적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관련학계 전문학자 5인의 발표와 6인의 토론으로 이뤄진다. 제1부에서는 부산대 최헌 교수가 현전 백제가요 전승 자료들과 그 문화-역사적 가치: 고창지역을 중심으로, 전북대 김익두 교수가 최근 새로 발굴된 <선운산곡禪雲山曲>의 발견기록화 과정과 그 역사문화적 특성가치의의를 발표한다. 토론에서는 나승만 목포대 교수를 좌장을 맡아 안후상(고창북고) 진동규(전북대) 호병탁(원광대) 선생의 논의를 진행한다. 제2부에서는 전남대 나경수 교수가 고창지역 주요 전승가요/민요들과 그 문화적 활성화 방안, 숭실대 성영애 교수가 고창지역의 선비 풍류문화 : 이재 황윤석의 <현금악보>에 나타난 자료적 성격과 풍류생활, 전북대 권민정 박사가 고창지역 풍류문화의 근현대적 전승과 미래: 고창지역 관련 율계를 중심으로를 발제한다. 이어서 전북대 하우봉 교수를 좌장으로 김헌선(경기대)최선아(서울대)이용찬(전북대) 선생의 토론이 진행된다. 제3부에서는 강릉원주대 강등학 교수를 좌장으로 발표자 토론자 및 청중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이 이어질 예정이다. 유기상 고창군수는 이번 고창학 학술대회는 지역이 보존해 온 풍류문화가요문화를 오늘날의 문화적 맥락에서 재발견한 뒤 미래문화로 재창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는 고창군이 주최하고, 전북대 농악/풍물굿연구소 및 사단법인 민족문화연구소가 주관한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5 18:12

[전북사의 과제] ② 마한사(하)

전국 역사학계에서 전북에 마한소국이 존재했다는 이론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마한을 구성하는 종족의 분포양상과 영역 범위,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이동했다는 설 등을 두고는 이견이 있다. 우선 전북에 마한 세력만 존재했을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마한이란 용어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 교수는 마한을 구성한 여러 정치체가 전라도-경기-충청 지역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다만 호남 동부지역을 마한이라는 이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족도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문헌사료에 누락되거나 이미 다른 세력에 통합돼 실체가 사라진 종족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도 마한 등 여러 고대문화의 정체성이 주거지나 무덤에서 발견된 한두 가지 유물로 규정될 수 없다며 주거지와 무덤, 성곽, 수혈, 패총 등 모든 유구의 특질과 출토된 유물에 대한 과학적 해부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준왕이 남쪽(익산)으로 내려왔다는 기록도 역사적 사실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대재 고려대 교수는 중국 문헌 <삼국지>에 나온 준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윤색된 기록이며, 기자가 고조선에 와서 문화를 교화시켰다는 중화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또 마한에 정착한 조선계 유민이 준왕과 가계를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관련분야 연구자 육성과 고고학적 보완 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마한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연구자가 적다며 전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인 만큼 지역 대학에서 관련분야 연구자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근까지 지표상으로 확인된 유적유물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최 이사장은 혁신도시와 만경강 일대에 마한사와 관련 있는 다수 유물유적이 확인됐다며 그러나 이 부지에 유물유적이 묻혀있다는 표식조차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확인된 유물유적을 빨리 발굴한 뒤 보관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드는 등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익산지역에 3~4세기 이후 존재했다고 보이는 마한소국인 건마국의 실체도 규명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최 이사장은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자료가 발굴되지 않고 있다며위치비정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요망된다고 했다. 이어 건마국이 익산이라는 전제로 전개된 마한의 성장과 세력변천에 대한 견해도 재검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5 17:45

[전북사의 과제] ② 마한사 (상)

전북 마한문화권을 둘러싸고는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 개정안 포함 여부가 관심사다. 당초 전북에서는 지역 마한문화권을 역사문화특별법의 범주에 넣으려고 했으나 충북중원문화권 추가 의견이 제기되면서 무산됐다. 이후 전북도는 충북의 중원문화권, 강원의 예맥문화권과 병합심사를 염두에 두고, 지역학계와 마한문화권 포함을 추진하고 있다. 관련 개정안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에 올라가 있다. 도와 지역 역사학계는 문헌사료와 고고학적인 유물을 근거로 전북 서남북부에 마한 11개의 소국이 존재했고, 이들 소국이 중심부를 형성했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전국 역사학계에서도 마한이 전라도에 존재했다는 이론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다만 존속했던 기간과 종족의 분포양상, 고조선 준왕의 남쪽 이동 등을 두고는 이견이 존재한다. 전북 마한문화권에 대한 이론과 쟁점, 과제를 짚어본다. 중국 문헌사료인 <삼국지>와 <후한서>, 한국 사료인 <고려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에 따르면, (고)조선왕 준(準)이 위만에 패한 뒤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을 정복하고,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고 나와 있다. 특히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에서는 준왕이 내려온 지역을 금마군(익산)으로 지목하고 있다. 관련 유물유적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최근 만경강 이남과 황방산 일대에서는 대형 군집묘와 구상유구(U자 모양 수로)가 발견됐다. 김승옥 전북대 교수는 관련 연구를 통해 국읍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인구가 밀집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익산 영등동과 율촌리에서는 각각 주구묘와 분구묘가 잇달아 발견됐는데, 특히 주구 내에서는 마한 초기 문화권을 보여주는 점토대토기들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중국-마한-변진한 왜로 연결되는 국제교역망을 설명해주는 유물도 발굴됐다. 철기, 푸른 유리구슬, 덩주식 동검, 중국산 동경 등이 대표적인데, 이는 만경강 일대와 완주 갈동과 신풍 익산 평장리 등에서 확인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마한에 대한 기록이 적은 상황에서 각종 고고학 유적과 뮤이 출토돼 역사상을 복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평했다. 전북 역사학계는 문헌사료와 유물유적을 근거로 전북 서북부 지역이 마한의 중심부였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학계는 중국문헌사료 <삼국지>에 등장하는 54개 마한소국 가운데 11개~12개 정도가 전북에 위치했다고 보고 있다. 익산의 감해국, 고창 모로비리국, 김제 벽비리국, 부안 지반국, 정읍 구소국, 군산 만로국, 익산 건마국, 정읍 초산도비리국, 전주 불사분사국 등이다. 묘제와 토기문화권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한 곳이다. 최 이사장은 특히 감해국, 벽비리국, 모로비리국은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한다고 말했다. 존속했던 시기도 기원전 3세기 말~기원 후 6세기 중엽까지로 보고 있다. 총 4단계로 나눠진다. 조기(기원전 3세기 말~기원 전후)는 만경강 등 서남해안 일대, 전기(기원전 1세기~3세기 중반) 서울인천 경기충청전라 일대, 중기(3세기 중반~4세기 중후반) 인천경기 일부와 전라일대, 후기(4세기 후반~6세기 전후) 고창과 영산강 일대에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전북 마한소국이 사라진 시기도 4~5세기로 보고 있다. 백제가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병합됐다는 것이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3 18:31

[전북사의 과제] ① 후백제사

2021년 6월 10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전북 고대사의 역사적 실체 규명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법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6개 문화권으로 구분한 뒤, 국가가 이 권역에 맞춰 보존, 관리, 발굴, 복원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전북은 백제와 가야문화권이 포함됐다. 그러나 관련 문화권 유물의 시기비정, 도성의 정확한 위치파악, 백제사에서 익산이 차지했던 위상규명 등이 숙제로 남아있다. 아직 법에 포함되지 않은 마한문화권의 심사통과 여부도 과제로 거론된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王都)로서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 후백제 문화권도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최근 법에 포함될 필요성이 제기됐던 문화권부터 과제를 짚어본다. 후백제의 사료는 <삼국사기> 열전 견훤전,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전에 제한적으로 드러난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견훤은 900년 나라의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후백제 왕이라 칭했다. 관부(官府)도 설치했으며 직책까지 나눴다. 영토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전주의 인구 확충을 위해 신라 등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옮겼으며, 백제 부흥을 선언할 때 고조선-마한-백제 계승의식을 드러냈다. 이외에는 견훤과 관련한 설화와 평가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완산지>에는 토성과 왕궁 등 전주에 존재한 도성관련 시설의 존재가 드러난다. 사료는 도성 고을의 방향, 읍성(邑城)을 쌓을 때 사용한 석재, 궁터, 도성의 규모와 방어체계, 도시 구조 등을 보여준다. 다만 정확한 위치가 제시되지 않아 학계에서 계속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도내에서 후백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목되는 산성은 전주 동고산성, 익산토성(오금산성, 보덕성), 익산 미륵산성, 정읍 고사부리성, 임실 월평리 산성, 장수 침령산성, 장수 합미산성이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군산대학교 박물관 등이 이들 산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9세기~10세기경 토기, 수막새, 집수시설 등이 발견됐다. 그러나 전주 동고산성을 제외하고는 후백제의 특징을 찾기엔 어렵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이 성은 1991년부터 총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13개 건물터, 25동 건물지가 있던 것으로 밝혀진 상태다. 주 건물터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암막새에 새겨진 全州城(전주성) 글자는 이곳이 견훤이 쌓은 산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도 거론된다. 반면 전주성글자만 두고 후백제의 성으로 확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지난 3월 전주시가 개최한 후백제전주성(동고산성) 국가지정 승격 학술대회에서성돌이 크고 돌출된 것을 봤을 때 익성(翼城)의 최초사례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익성은 대몽항쟁기에 처음 출현한 성으로 춘천 삼악산성 내성, 원주 영원산성, 충주 대림산성, 속초 권금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동고산성 일대를 왕궁하는 비정사흔 설과 배후를 방어하는 방어성으로 보는 견해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후백제 왕궁위치와 관련해서는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 연구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놨다. 1940년 간행된 전주부사에서는 물왕멀(현재 중노송동) 일대를 궁성지로 꼽았다. 근거는 기와자기편왕성 초석 등을 내세웠다.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1980년 동고산성 개괄 조사를 통해 발굴한 全州城(전주성)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 84.2m14.1m의 대형 건물터 등을 근거로 이곳을 왕궁지로 주장했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전주부사의 견해를 토대로 풍남문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을 왕궁지로 추정했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이전 KBS가 있던 자리인 거북바위를 주목, 전주왕도에 사령(四靈) 수호개념(기린용거북봉황)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에 맞춰 동고산성 일대를 궁성지로 추정했다. 조 교수는 기존에 전주 왕궁과 도성유적을 확인하기 위한 기존 연구는 단편적 편린만 보여줄 뿐, 아직 구체화된 성과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며이에 대해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조사연구가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논산에 있는 견훤왕릉에 대한 공간적 내용적 포섭문제를 두고도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는 통일신라 시대에 있던 격자형 도로, 전라감영 등을 통해 유추한 통일신라 시대의 행정치소 등을 근거로 궁성을 전주 천변인근의 평탄지대로 봤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 왕성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현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뒤쪽의 토축을 궁성의 서벽으로 제시했다. 차상민 전주시 전통문화유산과 주무관(전 전라문화유산원)은 후백제의 성곽시설은 도시구조 변화과정에서 일부 흔적만 남고 대부분이 멸실된 상태라며 고대도시 구조라는 시각을 전제로 왕실사찰, 왕궁, 도성유적, 왕릉, 유적의 위치를 연계해서 심도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7.12 18:49

전북 마한문화권, 역사문화정비특별법 포함 여부 ‘주목’

지난달 10일부터 시행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역사문화특별법)에 전북 마한문화권이 포함될지 주목된다. 역사문화특별법 개정에 앞서 전북 마한문화권은 충북의 중원문화권, 강원의 예맥문화권 등과 병합 심사를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5월 국회를 통과한 역사문화특별법은 지역 역사문화유산 정비를 위해 역사문화권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탐라 등 6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북은 백제와 가야문화권에 포함됐다. 그러나 마한문화권은 영산강 유역을 기반으로 한 전남만 포함돼, 전북을 포함한 특별법 개정이 요구됐다. 전문가들은 특별법이 원안대로 시행될 경우 마한의 시작과 전성기를 함께한 전북지역의 마한사 연구와 발굴, 복원 등이 사멸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지난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전북 마한문화권 추가 개정안을 상정해 심의하기로 했으나, 충북 중원문화권 추가 의견이 제기되면서 관련 논의는 쟁점 법안으로 분류됐다. 결국 전북 마한문화권 추가 개정안은 상정되지 못했다. 이후 각 자치단체는 역사문화특별법에 중원문화권, 예맥문화권 등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도 문화유산과 관계자는 문화재청 등과는 역사문화특별법에 전북 마한문화권을 추가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향후 전북 마한문화권은 충북 중원문화권, 강원 예맥문화권 등과 병합 심사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는 역사문화특별법 개정 작업과는 별도로 전북 마한사 복원을 위한 대선 공약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또 문화재청의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전북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 계획에는 마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관광 자원화 방안 등을 담을 방침이다. 한편 전북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마한이 존재했다. 특히 익산 금마는 고조선 준왕이 망명해 마한 세력의 중심지가 됐다는 고고학역사적 사료들이 많다. 고창 봉덕리 유적을 비롯한 서남부권은 영산강 유역과 함께 후기 마한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7.07 18:00

동학농민군 편지, 국가등록문화재 됐다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우리가 왜군과 더불어 오랫동안 싸운 것은 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함이라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어섰던 동학농민군 중 한명의 편지가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1일 동학농민군 편지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편지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유광화(1858~1894)가 1894년 11월께 동생 광팔에게 보낸 한문 편지다. 유광화는 양반가의 자제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로 활동하며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화순전투 등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유광화는 편지에서 자신이 나라를 위해 왜군(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으니, 동생에게 군자금을 급히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의 처지, 농민군 지도자들의 의식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각 지역에서 일어난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농민과 양반이 참여한 범민족적 혁명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 동학농민군 일원이 전투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편지 원본이라는 희소성 면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 편지는 손자인 유길홍이 오랫동안 보관해 왔다. 자료 원본 형태 그대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동학농민군 편지'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와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해 체계적으로 보존ㆍ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문민주
  • 2021.07.01 16:59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 과거급제 어려워”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이 과거에서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이 학술대회를 통해 제기됐다. 전북대 이재연구소가 지난 25일 교내 인문사회관에서 이재 황윤석의 西行日曆과 科擧를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는 황윤석이 전라도민이라는 이유로 과거제도에서 차별받았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연구소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인 경화사족과 교유를 확대하고, 서울에서 만난 실학자들을 통해 서학을 익혀 조정에서 인정받으려고 했던 사실을 25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재난고>를 통해 확인했다. 조선후기 농업경제와 화폐유통에 대해서도 살폈다. 이 과정에서 <이재난고>등 여러 저서에 대한 번역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문종 이재연구소장(전북대 사학과 교수)은 이재 황윤석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관찬사서에 나오지 않은 조선시대 생활상과 경제양태 등을 연구하기 위해 기록 전반에 대한 번역을 진행해야 한다며 <이재난고>를 국가지정 문화재(보물)로 신청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 1752년~1785년 총 15차례에 걸쳐 과거시험을 치른 경험을 상세하게 남겼다. 이 기록에는 관찬사서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 나오지 않은 과거의 종류가 나온다. 황윤석이 참가했던 과거, 소식만 들은 과거, 자격이 되지 않아 참가할 수 없는 과거 등 다양하다. 당시 수험생의 입장도 자세히 담고 있다. 황윤석은 과거를 치르기 전 출제자인 지배층(왕)의 출제의도를 정확하게 알려고 했다. 그해 새롭게 도입된 국가운영정책, 정치환경, 왕의 지식계층 관리 정책 등 다양하다. 김승룡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임금이 출제하는 책문을 잘 쓰기 위해선 정치사회 현안을 대하는 왕의 태도를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며 황윤석은 매일 왕의 동향과 발언, 인사정책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황윤석 같은 향촌 지식인이 완벽이 동향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면 벌열집안(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경력이 많은 집안) 후손들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동향을 알기가 용이했다. <이재난고>에는 전라도 인재들이 중앙정부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유영옥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18세기에 이르러 경(京)향(鄕)의 경계가 확연해졌다며 이런 추세 속에서 호남은 서울 근기뿐만 아니라 호서나 영남보다 차별받았던 땅이라고 설명했다. 송만오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도 당시는 개인의 능력보다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고 부연했다. 실제 조선시대 전라도 출신들의 문과 점유율 평균은 대략 6.7%로 경상도나 충청도에 비해 낮았다. 송 교수는 전라도 출신이 문과에 급제하긴 어려웠다며 남원은 3.8년 만에 한 명, 전주는 5.2년 만에 한 명 정도 배출됐으며, 특히 황윤석의 고향인 흥덕(고창)에서는 71.7년 만에 한 명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황윤석은 소과엔 합격했지만 바로 관직엔 진출하진 못했다. 게다가 고관으로 향하는 문과의 벽은 평생 넘지 못했다. 황윤석은 이조판서 정흥순과 전직 이조판서 서지수의 도움으로 어렵게 장릉참봉직(종 9품)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과 급제자가 아니어서 중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다. 결국 경화사족과의 교유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전라도 출신인 그의 입장에선 이들과의 관계가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루트였다. <이재난고>에는 황윤석이 교유했던 인물 18명이 거론돼 있다. 조정정경순홍봉환홍계익김상익 등 고위관료다. 다만 교유에는 원칙이 있었다. 유 교수는 공과 사의 구분, 자신을 지키려는 지조, 선친이 맺은 교유의 연장을 계속 고수했다며 자존감을 지키고 올곧은 선비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화사족 역시 박학군자로 유명한 황윤석을 만나보려 했다고 부연했다. <이재난고>에 있는 서행일력에 따르면, 황윤석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토대로 수학과 유클리드 기하학, 마테오리치의 산수역법 등 서학을 접하고 익혔다. 과거 시험을 앞두고도 서학 정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당시 명망 있는 인물인 홍대용과 이덕무를 통해서는 서양의 천문역법을 배웠다. 천기철 부산대 연구교수는 황윤석은 박학으로 명망을 얻어 영조에게 인정을 받았다며 1783년 호남의 문학극망지사(文學極望之士)로 추천돼 외국에 갈 기회까지 얻었으나, 모친 상중이라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이재난고>는 18세기 사회경제적 상황도 드러낸다. 황윤석은 집안이 가진 토지면적과 농업 경영 형태(지주-전호제), 동전과 같은 화폐지출 내역, 고리대, 노비들의 태업 등 당시 경제문제를 기록했다. 이정수 동서대 일본어학과 교수는 이재난고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보를 제공한다며 학술서적 시장, 지방재정의 운영, 가정경제의 운영, 산송, 하급관료와 수령의 생활 등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세희
  • 2021.06.2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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