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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30)새만금 2단계 수질개선 대책과 동진강

동진강과 만경강 등 새만금 유역 하천호소의 수질이 정부 차원에서 중점 관리된다.정부는 지난 16일 제6차 새만금위원회를 열어 '새만금 종합개발계획(Master Plan)' 과 '새만금 유역 제 2단계(2011~2020년) 수질개선 종합대책'을 확정, 앞으로 10년간 새만금 수질 개선을 위해 2조8905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동진만경강 수역인 새만금 중상류 지역은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목표수질을 4등급(약간 나쁨)으로, 하류 지역은 관광레저 등 적극적 친수활동 보장과 쾌적한 수변환경 조성을 위해 3등급(보통)으로 설정했다.새만금을 창조적 명품 녹색수변도시로 조성하기 위한 수질개선 사업비의 대부분은 새만금 중상류지역 ▲점오염원 및 비점오염원 저감 ▲축산분뇨 대책 ▲하천 유지용수 확보 등에 쓰인다. 점오염원 대책에는 하폐수 처리시설과 마을하수도 등 환경기초시설 확충 사업, 비점오염원 대책에는 생태하천 조성 및 강변 저류지 설치 사업 등이 포함된다.정부는 최근 5년간(2005~2009년)의 추이를 통해 새만금 유역의 수질관리 여건 변화를 분석, 오는 2020년에는 인구와 젖소돼지가 감소하고 폐수 및 토지한우가금류는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또 오염원 배출 부하량은 2009년과 비교해서 2020년에는 BOD(생물화학적 산소요구량) 2.7%, T-N(총 질소) 2.2%, T-P(총 인) 2.9%가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수계별로는 만경강의 배출부하 점유율이 BOD 54.5%, T-N 53.9%, T-P 55.6%로 동진강에 비해 여전히 높을 것으로 분석됐다.만경동진수역의 최근 수질변화 추이를 살펴본 결과 만경강은 2001~2006년 용담댐 방류 및 강우량 증가 등의 영향으로 수질이 다소 개선됐지만, 2007년 이후 악화되어 4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비해 동진강은 최근 10년간 큰 변화없이 3등급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따라 정부는 제 2단계 새만금 유역 수질개선 사업비의 약 80%를 오염부하가 큰 만경강 수계에 조기(2011~2015년)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이에앞서 정부는 제 1단계 새만금 유역 수질보전대책에 따라 2001~2010년까지 1조1859억원을 투자, 하수처리장 및 하수관거 확충(2820km) 사업을 추진했다. 또 전북도에서도 419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자체적으로 마을하수도 설치와 분뇨처리시설 보강생태하천 조성사업 등을 시행했다.정부는 이같은 1단계 사업을 통해 새만금 유역 환경기초시설을 대폭 확충하기는 했지만, 가축 분뇨와 비점오염원 및 총인(T-P) 관리 대책이 미흡해 당초 기대한 만큼의 수질개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새만금호에 유통되고 있는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는 담수화는 2020년을 목표로 추진하되 2015년 상반기까지 오염원 변화와 수질상황 등에 대한 중간평가를 실시, 필요할 경우 추가 대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수질예측 모델링 결과 2단계 수질개선 대책의 정상 추진과 담수화 조건에서 2020년 새만금 유역 중상류 구간(농업용지)은 목표수질(4등급)이 달성되지만, 하류 구간(도시용지)은 목표수질(3등급) 달성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3등급으로 설정된 도시용지 구간 목표수질의 적정성과 달성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이에따라 중간평가 시점인 2015년까지 수질이 개선되지 않아 2020년 목표수질 달성이 어렵게 된다면 새만금 해수유통 문제가 또 다시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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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1.03.21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제방·방조제

동진강은 평야지대의 여느 하천처럼 직강공사 등 대규모 치수사업으로 물길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식량수탈 목적으로 미곡증산 계획을 추진한 일제는 1920년대 중반부터 동진강 일대 치수사업을 본격화, 물가에 둑을 쌓고 강 하구에는 방조제를 축조했다.또한 해방 이후에도 제방축조와 하안정비 공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돼 옛 자연 하천의 모습은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20년대 후반 운암제가 준공되고 김제정읍 용수간선 등 대규모 수리시설이 들어섰으며 섬진강수력발전소의 방류수가 흘러나오는 정읍 칠보면 시산리에서부터 강의 거의 모든 유로를 따라서 인공제방이 축조됐다.이에따라 예전의 물길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신태인 화호(禾湖)리와 신덕(新德)리,감곡면 삼평(三坪)리, 부량면 신흥(新興)리 등에서는 아직도 곡류하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고 호수(새만금호) 안쪽에서 방수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강 하구와 계화도 간척지에 축조됐던 옛 방조제는 이제 그 기능을 상실했다.옛 방조제는 강의 물길이 크게 확장되면서 바다와 접하게 되는 23번국도 동진대교 인근에서부터 나타난다. 바닷물로부터 간척농지의 염분피해를 막아낸 동진강 하구 방조제는 일제시대 공유수면 간척에 의해 축조됐다. 하구 방조제는 이후 농장보호를 위해 개인이 관리하다가 1963년 12월 '방조제 관리법'이 제정되면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공공 시설물이 됐다.동진강 하구에 접해있는 방조제는 광활방조제와 대창서포도선장계화방조제 등이 있다.김제시 광활면 은파(銀波)리에 위치한 광활(廣活)방조제는 1924년에 준공됐으며 9.5km 길이에 5개의 갑문이 설치됐다. 또 1927년 완공된 대창(大倉)방조제는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 일대 원평천과 신평천 하구 3.7km구간을 잇고 있으며, 길이 5.3km에 이르는 서포(西浦)방조제는 1929년에 준공됐다.부안지역에는 동진면 동전(銅田)리와 장등(長登)리안성(安城)리 6km구역에 설치된 도선장(渡船場)방조제와 계화방조제가 있다. 계화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 1968년 말에 준공된 계화(界火)방조제는 길이 12.8km에 이르는 대규모 제방으로 계화도 간척사업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 환경
  • 김종표
  • 2011.03.21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9)강 하구의 '길'

바람이 분다. 언제나처럼 새만금엔 바람이 분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그 바람을 타고 수만리를 날아온 도요물떼새가, 그 바람을 타고 한겨울 숭어떼가, 그 바람을 타고 오는 밀물에 작은 배들이 몸을 실었다.지난 11일, 모처럼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허철희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와 유칠선 생태해설사, 그리고 두 신입 활동가와 함께 동진강 휴게소 제방에서 출발해서 계화도까지 걸었다.▲새들의 마지막 보루, 학당장돌문포 하구 습지동진대교를 건너 제방 안쪽의 작은 둑길로 길을 잡았다. 이 일대는 고부천을 만나 몸을 불린 동진강이 원평천을 만나자마자 드넓은 갯벌에 몸을 푼 곳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갯골을 따라 푸른 강물이 휘감아 흐르고, 육지에서 실어 온 흙과 유기물이 만든 기름진 갯벌이 펼쳐졌다. 그 뒤로 붉은 칠면초와 갈대 군락이 넓게 자리를 잡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구 습지 중 하나였다.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직도 넓게 펼쳐진 갈대군락은 수면과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연출해낸다. 농발게와 대추귀고동을 품었던 갈대는 이제 새로운 생명을 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푸드덕, 푸드덕" 장끼와 까투리가 여기저기서 솟아오른다. 고라니, 너구리 발자국도 배설물도 흔하다. 먼 길 떠날 채비를 마친 큰기러기는 강 둑 너머 논에서 큰 엉덩이를 들고 먹이를 먹느라 바쁘다. 세계적으로도 2천 마리 밖에 남지 않은 저어새는 새만금에서 겨울을 나느라 스푼 같은 부리로 열심히 강바닥을 젓고 있다.2006년 물막이 이후에도 문포, 장돌, 학당의 갯등은 갈 곳 잃은 도요물떼새는 물론 겨울 철새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먹이를 섭취할 수 있는 갯벌이 크게 줄어들면서 동진강 하구 문포와 만경강 하구 화포 염습지 갯등이 그나마 먹이를 찾아 헤매는 새들의 숨통을 틔워주었기 때문이다.▲포구, 그 쓸쓸함에 대하여이 같은 평화로운 풍경은 잠시, 방수제 공사 구간이 시작되면서 불도저와 대형 트럭굴삭기의 소음이 바람을 가른다. 마치 4대강 공사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은 동진강 방수제 3공구다. 제방 아래 갯벌을 밀어서 평탄화 작업을 하고, 갯등을 퍼올려 제방용 흙을 쌓고 있었다. 강 건너 장돌 학당마을 앞 하구도 공사판이다.새만금 바깥쪽에 33km의 거대한 방조제가 있고, 내측의 평균 수위를 -1.6m로 낮춘 지금, 광활한 면적의 갯등이 추가로 드러났다. 이 땅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 무엇이 급해서 새만금의 생태적 자산을 날려버리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비상한 기러기떼가 어디에 내려야할지 망설이다 선회 끝에 멀리로 날아간다.한 시간 남짓 걸으니 어느새 국토지리원이 정한 동진강의 마지막 종점부 문포다. 문포는 한 때 쌀을 실어 나르던 동진강의 큰 포구였다. 2006년 새만금 물막이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 갯벌에서도 생합을 잡고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옛 포구의 영화는 간데없이 긴 그물을 내리지도 못한 실뱀장어 배와 선외기 몇 대만이 할 일 없이 닻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10여 가구 남짓 남은 동네도 적막하기만하다.▲근대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문포에서부터 본격적인 계화 1호방조제 제방 길이다. 왼쪽으로는 넓은 간척평야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갯등 사이로 흐르는 푸른 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심포 거전의 민가사 섬이 보인다. 4대강 공사로 소란스런 금강을 떠나온 가창오리 수 만 마리가 수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가마우지, 고방오리, 비오리, 홍머리오리. 유칠선 해설사의 설명이 바쁘게 이어진다.제방 아래쪽으로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 쪽으로 길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쌓여 있는 돌무더기, 풀에 덮여 제방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이는 텅 빈 초소가 인상적이다.시대의 한계를 딛기 위한 기술자들의 노력과 땀방울, 실향민의 눈물과 쓸쓸한 귀향, 소금기 머금은 땅에 남은 농민들의 애환을 떠올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계화 조류지가 내려다보인다. 수변의 갈대 군락과 둑길의 소나무, 200ha에 이르는 수면이 보기가 좋다. 바닷물의 영향으로부터 제방과 간척지 3,968ha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간척 평야와 하구 갯벌, 그리고 넓은 저류지가 한 곳에 있으니 많은 새들이 이 곳을 찾아서 '조수보호구역' 으로 지정되어 있다.제방 길은 계화도 양지 포구에서 끝이 난다. 물때가 사라지고 갯벌이 메말라가면서 만선의 깃발을 달고, 그레를 메고, 경운기에 몸을 싣고 물때에 맞춰 돌아오던 아름답고 숭고한 포구의 풍경은 이제 사진 속에서만 남았다.그런데 근대화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아름다운 이 길이 세상에 소개되기 전에 사라질 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내측의 방수제를 쌓는데 필요한 토석을 얻기 위함이란다. 지난해 말 슬며시 2호 방조제를 헐어 내다가 염분 피해 우려와 계화도의 상징을 주민 협의 없이 헐 수 없다는 반발에 막혀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농어촌공사는 주민들과 합의를 통해 제방을 헐겠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정현(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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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14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960년대 후반 지도를 바꾼 대 역사

동진강 제방 길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김제 광활진봉죽산 등의 하구 습지를 간척하기 위해 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 농로를 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의 대표사업으로 계화도와 육지를 이어 길을 냈다.계화방조제는 계화도를 기점으로 부안군 동진면 안성리를 연결하는 길이 9,254m의 1호 방조제와 하서면 돈지마을을 이은 3,556m의 2호 방조제로 이뤄졌다. 착공 3년8개월만인 1968년12월31일 완공되었다. 방조제 공사는 지도를 바꾼 대역사이자 토목기술을 한 단계 도약시킨 계기가 되었다.지금은 일반화 된 조약돌자갈모래의 3층 필터 설치나 지반의 세굴을 방지하는 매트리스 공법 등 방조제의 안전성을 높이는 기술이 선보였다. 돌을 철망에 담아 쌓는 돌망태 공법도 이 때가 처음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도된 기술은 아니었다. 방조제 유실과 지반 침하 등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기술이었다.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일제 때부터 간척공사에 사용한 23대의 소형 디젤 기관차에 720대의 토운차를 달아서 하루 2000㎥ 씩 쌓아 나갔다. 기관차를 움직이기 위해 부설된 레일의 길이도 총 연장이 32㎞에 이르렀다. 방조제 사면의 기울기도 밀려드는 파도의 힘을 감당하기 위해 완만하게 시공하고, 일정한 간격 마다 방파제처럼 돌무더기를 쌓았다.방조제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계화지구 간척농지 전체 2,467㏊에 실질적인 영농이 가능해진 것은 1983년부터였으니 간척공사가 시작된 지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정현(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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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14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8)지류(하)-원평천·신평천·두월천

전북의 하천, 만경강과 동진강은 그 물길 사이에 '벼고을' 김제를 품었다. 지평선의 고장, 작은 물길들은 각각 흐르는 방향에 따라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그 수계를 달리한다. 김제의 광활한 들녘에서 남서쪽, 또는 서쪽으로 물길을 낸 하천으로는 원평천과 두월천신평천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하천들은 새만금호 입구에서 여정을 마친 동진강과 만난다.◆ 원평천과 왕버들모악산과 국사봉상두산에서 첫 물길을 시작한 원평천은 금평저수지를 빠져나와 곧장 서진(西進), 두월천을 받아들인 후 김제 죽산면에서 동진강 하구로 흘러든다.모악산에서 흘러내렸다고 해서 '모악천'으로도 불렸던 이 하천은 고대 수리시설인 '벽골제'의 수원(水源) 이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벽골제가 원평천의 물을 저수하기 위한 둑이었던 만큼, 이 하천 유역이 한반도 도작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원평천 유역인 김제 봉남면과 금구면금산면 일대는 옛부터 사금(砂金)의 매장지로 유명했다.김제시 죽산면, 원평천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는 밀물때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된 '해창갑문'이 아직도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시대 수리시설이 정비되기 전에는 김제 봉남면 신응리까지 바닷물의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 구간이었다.원평천이 호남고속도로를 가로지른 후 하천 폭을 넓히기 시작하는 지점인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 성덕마을 앞 하천 제방 바로 옆에는 범상치 않은 고목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1982년 천연기념물 제 296호로 지정된 왕버들이다. 이 나무의 높이는 대략 12m, 가슴높이에서의 줄기 둘레는 약 8.8m, 그리고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가량 뻗어있는 것으로 기록돼있다.이 노거수의 나이는 약 300살 정도(문화재청 자료)로 추정되지만, 나무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수령을 '500여년'으로 적어놓았다. 주민들은 하천 옆에 버티고 선 이 왕버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한 나무라고 믿어 잔가지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보호하고, 매년 고사를 지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신평천과 백산저수지신평천은 김제 시가지 북쪽 '돔배들'로 불리는 들판을 남서진(南西進), 성덕면 남포리에서 동진강 하구에 마지막으로 유입되는 자그마한 하천이다. 발원지는 김제 흥사동과 백산면 하정리 사이에 있는 두악산(58m)이다. 신평천은 농업개발과 관련, 인공제방 및 저수지 축조직강공사 등으로 하천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으며 하구쪽에 제수문을 만들어 주변 농경지의 염분피해를 막았다.현재의 신평천은 1969년에 축조된 백산저수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당시 호남야산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축조된 백산저수지가 제수문과 함께 신평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김제시가지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익산 방향으로 약 6km 정도를 달리면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는 야산을 찾아볼 수 있다. 말(斗)에다 쌀을 담아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두악산(斗岳山)'으로 불리는 이 산은 19601970년대 실시된 호남야산개발사업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 기공식을 개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곳 전망대에 오르면 신평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백산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김제시 백산(白山)면 하정(下亭)리에 위치한 이 저수지는 양수시설을 통해 농업용수를 확보한 후 신평천으로 흘려보내 들녘을 옥토로 만들어내고 있다.백산저수지는 또 정읍 출신의 작가 윤흥길씨가 펴낸 장편소설 '완장'(1983년 작)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완장에 집착하는 저수지 관리인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해 낸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김제 백산면이다.김제 신곡동 서쪽 신평천 주변에 펼쳐져 있는 들판을 이 곳 사람들은 '돔배들'이라 불렀다. 신평천에 제수문이 설치되기 전에는 하천을 통해 백산면 석교리 대촌마을까지 밀물이 들어왔고 그 바닷물을 따라 배가 떠다녔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하천 주변 들녘을 배가 뜨는 들판이라는 뜻으로 '뜬배 들'이라 불렀으며 이후 '돔배 들'로 그 음이 변했다. 돔배는 백산면 석교리 대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신평천에서는 지난 2003년~2009년 동진강수계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축제 및 호안공사와 함께 하도정비 공사가 진행됐다. 이와함께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동진강의 마지막 지류 신평천 하구의 생태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우선 하천 하류구간에 갈대군락이 확산돼 물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또 최근에는 새만금 방수제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새만금 내부개발과 함께 하천 하구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두월천 '고향의 강'으로김제 금구면에서 발원한 두월천은 황산면을 지나 벽골제 유적지 인근에서 원평천과 합류한다. 김제역 부근에서 시가지에 근접, 도심 외곽을 지나는 이 하천은 조만간 자연친화형 하천으로 거듭나게 된다.김제시에 따르면 두월천은 최근 국토해양부로부터 '고향의 강' 정비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생태습지공원 조성과 함께 옛 하천의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사업비는 300억원, 사업기간은 2016년까지다.시가지에 인접한 두월천은 획일적인 호안 및 하도계획으로 인해 하천 생태기능이 부족, 시민들이 찾아올 수 있는 친수공간 조성의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고향의 강' 정비사업은 수해방지뿐 아니라 유량확보수질개선 등을 통해 깨끗한 수질환경을 제공하고 주변에 문화공간을 조성, 주민들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하천으로 개발하기 위한 친환경 사업이다.

  • 환경
  • 김종표
  • 2011.03.07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7)지류(중)-정읍천·고부천

동진강은 샘골 정읍에서 물길을 시작한다. 그리고 정읍지역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국가하천 정읍천과 고부천을 받아들인다. 들판을 적시며 호남평야의 젖줄 동진강을 향해 남에서 북으로 곧장 물길을 내고 있는 이 두 하천은 황토현전적지와 말목장터전봉준장군 고택 등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현장을 좌우 양쪽에서 껴안고 있다.◆ 생태하천으로 탈바꿈하는 정읍천정읍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정읍천이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정읍천 생태하천 조성사업'이다.정읍천 사금보~상동교 하류까지 도심 하천 6.29km 구간에서 실시되는 생태하천 조성사업은 지난 2009년 2월 시작, 2012년 1월에 완료될 예정이다. 정읍시에 따르면 총 248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번 사업을 통해 하중도와 돌무지어도가 조성되고 하천 둔치에는 자전거도로산책로조류관찰대 등이 설치된다. 하천의 자정능력과 수질 등 생태환경 개선을 통해 친수공간으로 탈바꿈, 시민들에게 보다 쾌적한 수변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정읍 이평면과 신태인읍의 경계지점에서 강 본류에 합류하는 정읍천은 국립공원 내장산 북측 사면(斜面)의 물길을 모아놓은 3개의 저수지를 주요 수원(水源)으로 하고 있다. 입암저수지와 용산저수지, 그리고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축조된 내장저수지다.정읍 최남단 입암면 천원리에 축조된 입암저수지는 입암산과 방장산 등 주변 산줄기에서 흘러든 작은 물줄기를 모아 북쪽으로 다시 물길을 낸다. 천원천으로 불리는 이 하천은 용산저수지에서 시작된 용산천을 끌어안고 북진을 계속, 호남고속도로 정읍IC 부근에서 정읍시가지를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온 정읍천과 만나 물길을 크게 넓힌다. 천원천과 용산천, 그리고 내장저수지에서 흘러나온 작은 정읍천이 합류, 비로소 정읍천 본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정읍천이 동진강 본류로 흘러드는 지점(정읍시 이평면)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던 '만석보(萬石洑)' 의 흔적이 남아있다. 19세기말 보(洑)가 설치됐던 이 곳에는 지난 1973년 '만석보유지비'가 세워졌고 이후 1999년 '만석보 시비'도 건립돼 1894년 2월, 학정에 대항한 농민들의 함성을 기리고 있다.◆ 호젓한 들판 적시는 고부천고부천은 정읍과 부안의 구릉성 평야지대를 남에서 북으로 흘러 동진강 하구로 유입된다. 호젓한 들판을 유유히 흐르는 고부천은 정읍천과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저수지를 그 수원으로 하고 있다. 고창군 신림면 자포리에 위치한 신림저수지와 고창군 흥덕면성내면에 걸쳐 있는 동림저수지다.신림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줄포만으로 흘러들어 곧장 바다로 향하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림저수지를 채우고 다시 넘쳐나와 고부천 물길을 만든다. 동림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정읍시 고부면 강고리와 관청리 사이에서 여러 갈래의 작은 물줄기들을 모아 하천 폭을 넓힌다.정읍 고부면에서 부안 줄포로 향하는 옛 지방도로는 고부천 '게보갑문' 위를 지난다. 하천 폭이 넓어지는 곳, '눌제(訥堤)'의 옛 터인 이 곳 고부천에는 조선말엽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보(洑)를 만들고 '게보'라고 불렀으나 오히려 홍수 피해가 많아지자 1873년 허물었다. 게보라는 명칭은 인근에서 게가 많이 잡혀 붙여진 것으로 전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당시의 하천 생태계를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다.이후 1919년 고부수리조합에서 옛 보 자리에 갑문(게보갑문)을 설치, 동림저수지와 함께 고부평야 수리시설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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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1.02.28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고부천 '눌제'

정읍 고부면 소재지에서 부안 줄포면 방향으로 시원하게 새로 뚫린 왕복 4차선 도로(지방도로 710호)를 달리다 보면 평야지대를 유유히 흐르는 하천, 고부천을 건너게 된다. 그리고 고부천 교량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래된 갑문(게보갑문) 옆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정자와 비석을 볼 수 있다. 정읍시 고부면 관청리에 위치한 눌제유지비(訥堤遺址碑)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눌제정(訥堤亭)이다.하천 제방에 세워진 이 표석은 이 곳이 우리나라 도작(稻作벼농사)문화의 발상지이자 농경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유지비와 안내문에는 '눌제는 제장(堤長)이 1200보(1보는 약 1.5m)이고 주위가 40리(약 16km)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눌제 유역인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에서 기원전 2~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볍씨 자국이 있는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방이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발상지임을 입증하고 있다'는 문구도 있다.제방의 축조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로 추정된다.정읍시 고부면 관청리 주변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고부천 상류를 막았던 눌제는 삼국시대 이래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더불어 나라안에서 가장 큰 제방이라 하여 '삼호(三湖)'라 일컬어졌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호남과 호서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당시 눌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기록에 의하면 눌제는 1420년 대홍수로 제방이 무너져 큰 피해가 발생한 후 관리에 어려움이 따르자 파제(破堤)가 논의되기도 했으며, 16세기에는 호수가 없어지고 다시 자연하천의 기능을 하게 됐다. 현재는 남쪽에 흥덕제(동림저수지)가 축조돼 옛 눌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또 눌제의 옛 둑은 고부~줄포간 도로 중 일부 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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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1.02.28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동진강 유역 저수지

동진강 유역에는 유난히 저수지가 많다.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수리시설이 요구되면서 크고 작은 저수지가 곳곳에 축조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꼽히는 벽골제가 동진강 유역(현재 원평천 주변)에 축조된 것도 이 지역 농경의 역사와 함께 수리시설의 필요성을 설명해준다.동진강 유역 대규모 저수지는 대부분 근대 수리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한 일제시대 이후 1960~1970년대에 걸쳐 형성됐다.우선 동진강 본류의 물길은 1920년대 후반에 준공된 운암제(雲岩堤섬진강 구댐)와 연결된다. 당시 동진수리조합은 평야지대의 부족한 수자원 확보를 위해 운암제를 축조, 임실 운암면의 인공 호수(옥정호)에서 정읍 산외면 종산리 팽나무정 마을 인근 계곡까지 길이 759m의 도수터널을 뚫어 섬진강 물을 동진강 상류로 끌어냈다. 섬진강댐(옥정호)의 수자원은 지금도 동진강 유량 확보에 없어서는 안될 젖줄이다.강의 주요 지류도 물길이 시작되는 곳 부근에 어김없이 큰 저수지가 있다.동진강의 제 1지류인 정읍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3개의 물길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물길은 국립공원 내장산 북측 사면(斜面) 골짜기의 청정수를 모아놓은 3개의 저수지에 각각 그 수원(水源)을 두고 있다. 내장저수지와 입암용산저수지다. 지난 1960년대에 조성된 내장저수지는 3개의 저수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읍시내를 통과하는 도시하천의 상류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고부천도 인근 정읍천과 마찬가지로 큼지막한 몇 개의 인공저수지를 그 수원으로 하고 있다. 고창군 신림면 신림저수지와 고창군 흥덕면성내면에 걸쳐있는 동림저수지다. 특히 동림저수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겨울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가창오리가 주로 찾는 이 곳은 지난해초 국립생물자원관이 실시한 '2010년도 겨울철 조류 동시 센서스'에서 철새 개체수가 전남 영암호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많아 주목을 받았다. 동진강 유역 청호저수지와 김제 백산저수지도 겨울철새 도래지로 손꼽힌다.모악산 계곡에서 시작돼 동진강 하구로 흘러드는 원평천은 김제 금산면 금평저수지에서 큰 물길을 만들어낸다.또 강 하구에서부터 신평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물길이 시작되는 곳(김제시 백산면 하정리)에서 백산저수지를 만날 수 있다. 1969년 호남야산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완공된 이 저수지는 작가 윤흥길씨의 장편소설 '완장'의 무대로도 유명하다.부안 계화도 간척사업과 연계, 1971년말 완공된 부안 하서면 청호저수지는 '동진강도수로'에 의해 정읍시 칠보면 섬진강수력발전소까지 연결돼 섬진강댐의 풍부한 수자원을 공급받는다.이밖에도 최근 정부의 둑 높이기 사업 대상이 된 정읍 수청저수지와 부안군 동진면에 위치한 고마제 등이 동진강유역의 주요 저수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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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1.02.21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6)지류(상)

동진강은 정읍과 김제부안 등 3개 시군에 걸쳐 흐른다. 이 강의 수계(水系)를 이루고 있는 주요 지류로는 정읍천과 원평천고부천신평천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정읍천을 제외한 고부천과 원평천신평천은 강 하구로 흘러들어 동진강의 마지막 여정에 잠시 합류한 후 새만금호로 유입된다. 최근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강 본류뿐 아니라 각 지천도 하류 구간에서부터 생태환경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국토해양부 '하천관리지리정보시스템(RIMGIS)'에 의하면 동진강 수계는 본류를 포함, 정읍천원평천고부천 등 4개의 국가하천과 83개의 지방하천으로 구성돼 있다. 강 지류 지방하천 중에는 신평천과 두월천천원천 등이 규모가 큰 편이다.동진강 본류는 국가하천 구간과 지방1급지방2급 등 3개 구간으로 구분된다. 지방 12급 하천 구간은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에서 정읍시 정우면과 태인신태인읍의 경계지점까지, 그리고 국가하천 구간은 이 곳에서 부안군 동진면 강 하구까지다. 또 정읍천과 원평천고부천도 국가 하천과 지방2급 하천 구간으로 각각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동진강은 강 유역에 거미줄처럼 얽힌 인공 도수(導水)시설이 지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강 유역 농경지에 물줄기를 대고 있는 도수시설은 김제용수간선과 정읍용수간선, 그리고 계화도 간척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동진강도수로 등 3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영농기에는 정읍시 태인면 낙양리에 위치한 취입수문에서 강 본류의 흐름을 막고 인공 도수시설로 향하는 수문을 열어 물길을 돌린다. 강 본류의 유량이 계절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이유다.원평천과 고부천 주변에는 고대 수리시설의 흔적이 남아 동진강 유역이 예로부터 한반도 농경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원평천의 벽골제와 고부천의 눌제(訥堤)가 그것이다. 해발고도 25m의 구릉을 가로질러 고부천 상류를 막았던 눌제는 삼국시대 이래 김제 벽골제 및 만경강 수계인 익산 황등제와 더불어 '삼호(三湖)'라 일컬어졌으며 이로인해 '호남'과 '호서'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한편 전북지역에 물길을 둔 국가하천은 동진강 수계 4곳을 포함, 금강과 만경강섬진강 본류, 강경천소양천전주천요천 등 모두 11개에 이르며 지방하천은 461개소다.※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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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1.02.21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5)새만금 수질과 동진강(하)

2001년 5월, 정부는 2년간 중단했던 새만금 사업을 '선(先) 동진수역, 후(後) 만경수역 개발' 이라는 친환경적 순차개발을 내세워 공사를 재개했다. 공사를 중단하고 민관 공동조사단을 운영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나 여전히 공사 재개와 전면 중단이라는 찬반 주장이 좁혀지지 않자 고심 끝에 내놓은 절충안이었다. 수질이 상대적으로 나은 동진강 유역을 2020년까지 개발하고 만경강 유역은 수질개선 여부를 봐가면서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친환경 순차개발은 농업용지(70%) 및 산업도시용지(30%) 비율과 함께 참여정부의 개발 원칙이었다.그러나 2008년 인수위 시절 이명박 대통령은 복합 산업용지 비율을 당초의 30%에서 70%로 확대하고, 동진수역과 만경수역을 동시 개발하는 방식으로 사업계획을 변경했다. 또 새만금의 비전을 '친수활동이 가능한 명품 수변도시'로 정하면서 목표수질 문제가 수면위로 급부상했다.▲목표수질예산확보 불투명한 새만금 마스터플랜지난해 12월 22일, 향후 지속적인 개발의 법적인 근거가 되는 새만금종합개발계획(마스터플랜)안 공청회가 열렸다. 다양한 친수활동이 가능한 명품 수변도시, 녹색계획과 기술에 바탕을 둔 창조적 녹색도시, 환황해 경제권의 산업업무유통의 전진기지를 목표로 한 화려한 조감도가 세부계획과 함께 제시되었다.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지적이다. 가장 큰 쟁점은 목표 수질로 설정된 도시용지 3급수, 농업용지 4급수 달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21조원에 이르는 사업 예산 확보도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물 밑에서는 해수유통 논쟁이 불거졌다.지난해 발표한 새만금종합실천계획에서 '친수활동이 가능한 수준' 이라는 애매한 문구로 논란이 되었던 목표 수질을 3~4등급으로 수치화했다. 하류에 위치한 도시용지 구간은 담수호의 맛색깔냄새 등이 낚시와 뱃놀이, 수상레저 등 친수활동이 가능한 화학적산소요구량(COD) 5㎎/L, 총인(T-P) 0.05㎎/L 이하인 3급수로 정했다. 중하류에 위치한 농업용지 구간은 COD 8㎎/L, TP 0.10㎎/L 이하로 설정했다.하지만 수질관리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오염원 배출부하량은 2020년 기준 2009년 대비 생물학적산소요구량(BOD) 2.75%, 총인(T-P)3%, 총질소(T-N) 2.29%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새만금 수질, 딜레마에 빠지다담수호 4급수 달성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한 목표 설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전라북도는 3급수 유지가 전주익산완주 등 상류 지역 개발제한을 불러올 수 있으며,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어야 가능하다며 4급수로 통일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가 해수유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지난해 새만금기획추진단장은 "새만금호를 담수화해서 4급수를 유지하는 데만 2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 고 밝혔다. 담수화에 어려움이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는 "수질개선에 비용과 시간을 들이는 것보다 수질부담을 줄이면서 내부개발 예산을 확보하고 기반시설을 집중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전북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라는 국토부의 의견과 같은 맥락이다.20조원을 수질개선에 쏟아붓는 사업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새만금 계획과 수질이라는 현실의 괴리 극복은 피할 수 없는 새만금의 숙명이다.▲구체적인 재원조달 계획 없어새만금 마스터플랜의 사업비는 총 20조8천억원. 크게 용지조성비 13조원(62.5%) 기반시설비 4조8천백억원(23.1%), 수질개선비 2조9천9백억원(14.4%)으로 나뉜다. 그나마 향후 내부 도시건설 비용은 빠진 예산이다. 1단계 사업 완료 시점인 2020년까지 12조4천억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 계산대로라면 연간 1조2천억원 이상 투입해야 정상적인 사업추진이 가능하다. 당초 새만금 사업예산 3조원에 비하면 엄청난 사업비 증가다.특히 수질개선 예산 2조9천9백억원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역시 지난 10년간 동진만경 수역에 1조3천억원을 수질개선 비용으로 투입했지만 수질은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구체적인 단계별, 재원확보 방안도 제시되지 않았다. 올해 새만금 예산이 1500억원에 불과하다. 재원대책이 없으면 새만금 개발은 그림의 떡이다. 5년마다 수립 하는 정부 중기재정계획에 새만금 사업을 포함해달라는 요청이나 장기투자계획 마련도 현재로선 불투명하다.▲방수제 건설 필요성 논란방수제는 방조제를 막아 만든 내부지역의 수면과 토지를 경계 짓는 제방이다. 당초 계획은 125km 구간에 1조8천억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공사였다. 하지만 내부개발 용도별로 담당 부처가 나뉘면서 우선 농업용지 구간 9개 공구 54㎞만 추진되고 있다. 방수제 축조를 일부 유보한 이유는 전면적인 방수제 축조는 친수활동이 가능한 명품도시, 수변공간 조성에 불리하다는 판단에서다.환경부는 생태용지 구간 9.2km에 방수제를 쌓을 경우 새만금호 COD는 10ppm/L 이상, T-P은 0.2ppm/L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방수제를 쌓으면 새만금호 관리수위가 높아져서 개발지구 매립고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군산지구 산업단지 매립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방수제 축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과는 다른 논리다. 어떤 것이 맞는 말인지 다퉈볼 일이다.새만금 마스터플랜의 문제는 그림을 너무 크게 그린다는 것이다. 너무나 큰돈이 들어가고, 너무나 거창한 새만금 내부개발 계획은 추진될 가능성도 낮고, 이른 시간 내 전라북도 발전도 장담하기 어렵다. 따라서 새만금 담수화와 전체 매립만 고집하기 보다는 해수유통을 유지하면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고 개발 수요가 있는 적정 면적을 우선 개발하는 것이 예산확보와 목표수질 등 두 가지 걸림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지속가능한 새만금 토지이용과 명품 수변도시로 가는 지름길이다./이정현 (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기획국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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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2.14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4)새만금 수질과 동진강(상)

새만금호로 유입되는 하천은 크게 동진강과 만경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만경강수계는 유역면적 1,504㎢, 유로연장 80.9㎞, 유역평균폭 18.6㎞이며 이보다 규모가 다소 작은 동진강수계는 유역면적 1,124.14㎢, 유로연장 51.03㎞, 유역평균폭 22.03㎞의 하천이다. 동진강은 만경강과 더불어 새만금호 수질확보를 위해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할 하천이다.환경부에서 유역의 수질관리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수질오염총량관리제에서는 오염물질을 크게 생활계, 축산계, 산업계, 토지계, 양식계로 구분하고 있다. 전주군산익산시 등 전라북도의 주요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만경강의 경우 하천으로 배출되는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 총량배출량 중 토지계가 41%, 생활계가 31%, 축산계가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읍김제시 등 농촌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동진강의 경우 토지계가 34%, 축산계가 30%, 생활계가 18%를 차지하고 있다.두 수계의 오염물질 배출 특성을 살펴보면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만경강의 경우 토지계와 더불어 생활계의 배출량이 많은 반면 농업지역이 집중되어 있는 동진강의 경우 토지계와 더불어 축산계의 배출량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동진강의 하천수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주요 오염물질이 농업 및 축산활동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동진강수계는 총 83개 하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하천은 정읍천고부천원평천신평천 등이 있으며 상류 및 중류는 정읍시, 하류는 고창군부안군김제시가 위치하고 있다.환경부 및 전라북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수질측정망 자료를 이용하여 하천수질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본류에는 3개의 측정지점(동진강1, 2, 3)이 위치해 있다. 각각의 위치는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행정교 △정읍시 신태인읍 신용리 신태인대교 △김제시 부량면 옥정리 군포교이다. 2010년 평균 수질자료에 의하면 BOD기준으로 측정지점의 수질이 각각 0.79㎎/L, 1.64㎎/L, 2.9㎎/L로 변하고 있었으며 T-P(총인) 역시 각각 0.035㎎/L, 0.085㎎/L, 0.179㎎/L로 변하고 있어 본류로 유입되는 정읍천, 용호천 등의 수질이 본류의 수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동진강의 전반적인 오염물질의 발생특징을 살펴보면 비점오염물질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하수나 공장폐수와 같이 특정위치에서 하수관로와 같은 경로를 통해 배출됨으로써 유출경로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오염물질을 점오염원이라고 하며 도시, 농지, 산지, 공사장 등 불특정장소에서 불특정하게 배출되어 유출 및 배출경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오염물질을 비점오염원이라고 한다. 동진강의 경우 점오염과 비점오염 비율이 BOD기준으로 각각 36.5%, 63.5%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하천의 수질개선을 위해서 추진되고 있는 사업들을 살펴보면 하수종말처리장 및 축산폐수처리장의 확충 및 증축, 하수관거정비사업, 마을하수도사업 등 점오염에 대한 대책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향후 점오염에 비해 비점오염에 대한 비중이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새만금 사업의 추진을 위한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수질확보를 꼽고 있다. 정부는 친수활동이 가능한 수질확보를 위해 3등급이상의 호소수 수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새만금호 및 상류지역의 수질확보를 위해 추가적인 수질개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새만금 상류에 위치한 동진강수계 역시 만경강수계와 더불어 새만금호 수질확보를 위한 노력을 요구받고 있다.새만금호의 수질확보를 위해서는 유입하천의 유량과 수질이 확보되어야 한다.동진강의 하천유량은 발원지와 각 지천에서 유입되는 유량과 섬진댐에서 유입되는 유량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이 발달된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하천용수가 대부분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있어 하천유지용수가 부족한 상황이다. 섬진댐의 경우 동진강 상류로 유입되는 유량(농업용수+발전용수)은 동진강유역 총유출량의 약 1/3정도이지만 그 중 47%가 동진강 상류 보림보에서 취수되어 계화도 간척지까지 이동,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나머지 유량과 동진강 상류의 유출량은 낙양보에서 취수되어 김제간선, 정읍간선을 통해 김제평야로 관개되고 있다. 따라서 동진강 본류하천의 유량 유지에 기여하는 정도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익산지방국토관리청은 최근 새만금 개발계획에 맞춰 만경강동진강 수변을 새만금내 생태녹지축(井형)으로 본격 조성하여 지역주민에게 생태가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를 위해 전북지역에 1,61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저수지증고사업 및 생태공간 등을 통하여 하천유지용수를 확보 할 수 있는 물그릇이 확보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좀더 충분한 하천유지용수 확보를 위해서는 농업용수 배수체계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사회적 변화에 의해 활용성이 떨어진 여유수량을 찾아내 하천으로 물길을 돌려주는 것도 하천유지용수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그러나 간선수로를 통해 활용된 후 다시 하천으로 재유입되는 농업용수에 대해서는 관리가 필요하다. 섬진강댐에서 유로변경을 통해 공급된 농업용수는 동진강유역의 드넓은 평야를 거치면서 농업활동 과정에 활용되었던 비료농약액비퇴비 등의 성분이 농작물에 완전히 활용되지 못한 채 하천으로 다시 흘러든다. 환경적 측면에서 이러한 물질은 하천의 수질에 BOD, T-N(총질소), T-P(총인) 등을 증가시키는 유기물질과 영양염류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 1977년 완공된 일본 아키타현의 하치로가타 간척지의 경우 농업용수의 배수내 영양염류 집적으로 인하여 녹조와 같은 수질오염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한 사례가 있다.점오염에 비해 농지와 같은 불특정 배출경로를 통해 유입되는 비점오염의 경우 대상유역이 넓어 시설만을 통하여 제어하기에는 어렵다. 따라서 비점오염의 경우 발생원에서부터 사전 예방적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 동진강에 있어 그 대상은 당연하게 농지와 벼, 보리, 채소 등을 기르기 위해 농지로 유입되는 각종 영양분들이 될 것이다. 이들에 대한 관리주체가 주민들이므로 강 유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환경적 측면의 농지관리를 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전라북도는 2010년부터 주민, 사회단체, 의회, 행정,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광역거버넌스 구축을 위하여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실로 2010년 12월 전라북도 의회의 조례 승인으로 2011년 '전라북도 강 살리기추진단(안)'이라는 거버넌스 조직이 출범할 예정이다. 전라북도 강살리추진단(안)은 하천을 소유역으로 구분하여 민간 주도의 하천네트워크를 형성, 자발적인 내고장 하천 살리기 운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하천네트워크의 구성원이 지역민이 되었을 때 내고장 하천에 애정을 가지고 성공사례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이제 동진강을 비롯한 새만금 및 전라북도 유역의 수질관리는 민간영역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정부는 새만금 수질대책의 일환으로 수질 측면을 고려한 하천정비계획 추진 계획을 수립하고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동진강과 만경강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개의 하천으로 유입되는 지천의 수질이 깨끗하지 못하다면 그 노력이 허상으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동진강의 수많은 이랑들이 동진강의 푸른 물결을 이루길 기대한다./김보국 (전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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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1.24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3)동학농민혁명과 동진강

'물'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 장대한 역사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김도삼정익서 등이 고부 농민들과 함께 온갖 폭정을 저지르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며, 말목장터에서 항쟁을 계속했던 고부농민봉기가 시작이다.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 고부면은 정읍시에 딸린 작은 면이 되었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동진강 연안의 비옥한 농지에 형성된 배들평야와 고부천정읍천 주변의 드넓은 농토. 그만큼 지배세력의 억압과 수탈이 극심한 곳이었다.부패한 봉건 정부의 하수인인 조병갑도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수탈을 일삼았는데, 그중 하나가 만석보 축조를 빌미로 수세를 받는 것이었다. 멈춰버린 하천.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할 물의 흐름을 방해하면 결국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동진강 물길 닿는 이랑이랑 녹두꽃은 또 피고 질 터인데.동진강이 휘도는 정읍과 김제 곳곳에 동학농민혁명의 자취가 남아 있다. 김남주 시인의 시처럼 '한 시대의/불행한 아들로 태어나/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승리 없는 투쟁/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황토현에 부치는 노래」中)들의 위대한 걸음걸음이다.정읍은 온통 '동학'이다. 내장산 입구 공원은 <전봉준 공원>이며, 호남선 정읍 지역 휴게소도 <녹두장군 휴게소>다. 정읍 사람들이 그만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증거일 것이다. 둘러볼 곳도 여럿이다.마른 흙냄새 여전한 고부면에는 <고부관아 터>와 <군자정>, <사발통문 작성 터> 등이 있다.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옛 고부관아 터이며, 학교 바로 옆은 향교다. 군자정은 못으로 둘러싸인 누정. 지배세력들이 가혹하게 억압과 착취를 해서 얻은 고부군민들의 고혈로 풍류와 사치를 즐기던 씁쓸한 현장이다. 사발통문 작성 터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이 수립되었던 곳이다. 두 달 후인 1894년 1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입구에 당시 사발통문 거사를 기념하기 위한 <동학혁명모의탑>과 <무명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져 있다.사발통문 거사 모의 때와 동학농민혁명 제1차 봉기를 단행할 당시 전봉준(1855~1895)이 살았던 이평면은 <전봉준장군 고택>과 <전봉준장군 묘역(단비)>, <말목장터>, <만석보 유지비> 등이 있다. 그가 실제 살았던 고택은 고부농민봉기 때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를 복원한 것이다. 그의 생가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 고택에서는 고부농민봉기를 전후로 3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비는 고택에서 약 500m 떨어진 소나무 숲에 있다. 단비는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의 비석이다.말목장터는 이평면 소재지 삼거리에 있는 장터다. 부안태인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곳. 익산 군수로 발령 받았던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해오자 전봉준은 통문을 돌려 1894년 1월 농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이게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죽창 수백 개로 무장한 뒤,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다. 고부농민봉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 바로 이 곳인 것이다. 점령 당시 앞선 농민 500여 명이 모여 있었다는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입구에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동진강 상류로 합수되는 곳에 쌓은 만석보 파괴를 기념하는 <만석보파보선정비>가 서 있다.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있는 황토재는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다. 이 곳은 동학농민군이 정부의 공식 군대와 맞서 승전을 거둔 현장이다. 황토재 마루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때 세워진 것.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다.'탑신에는/그날 녹두장군의 뜨거운 피가 돌고/배들 농민들의 징소리가 들린다/그날 만석보 농민들의 피진 함성이 들려오고/고향 용두봉 독고봉이 일어선다' (정렬의 시 「동학혁명기념탑」中)동학농민혁명기념관도 여기에 있다. 이 곳에는 전봉준이 사용하던 유품 중 벼루붓패랭이갓신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갑오실기』, 『전봉준 공초기』, 『용담유사』, 『동경대전』 등의 사료를 비롯해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사진과 무기책 등이 전시돼 있다.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의 최후 격전지로 알려진 태인면 성황산에는 <태인 성황산 전투지>가 있다. 원평 구미란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1894년 11월 이 곳에 진을 친 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에는 김개남(1853~1895)의 <고택터>와 <묘역>이 있다. 백산대회에서 손화중(1861~1895)과 함께 동학농민군 총관령으로 추대된 그는 남원금산무주진안용담장수 등을 아우르며 폐정개혁에 나섰다. 전봉준이 체포된 순창 피노리와 지척인 산내면 종성리는 <김개남 피체지>다. 김개남은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전라감사에 의해 전주 초록바위 아래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당시 대역 죄인은 서울까지 압송하여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전라감사는 김개남의 혁명적 열정과 서릿발 같은 기개가 두려워 전주에서 서둘러 처형했다고 전한다. 김개남 묘역이 있는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뒤쪽에 고택 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김개남장군 생가 터>라는 표석이 있다.상평동 음성리에는 동학농민군 총영관이었던 손화중의 묘역이 있으며, 북면 마정리 월천마을 출신으로 사발통문 모의와 고부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최경선(1859~1895)의 묘역은 칠보면 축현리에 있다.김덕명(1845~1895)이 접주로 활동하던 김제는 금산면 용호리 <구미란전투지>와 원평장터의 <전주입성 직전 선전관 처형지>, 학원마을의 <원평집강소> 등이 있다. 금산면 용계리 <집회 터>는 1893년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집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호남지방 동학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금구원평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 집회는 전봉준이 중심이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금산면 장흥리는 김덕명의 무덤이 있고, 용계리에 그의 추모비와 당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이 곳 남쪽 언덕인 구미란전투지는 우금티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세에 몰린 동학농민군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 곳. 소나무 숲에 팻말로 남은 봉분 수십 기가 죽창처럼 솟아 있다. 전라도 뻐꾸기, 육자배기 가락보다 더 구슬프게 운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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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1.17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2)민속

민속은 민중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문화다. 옛 사람들의 풍류가 살아 있는 동진강도 그만의 독특한 민속을 가지고 있다.▲ 김제도작문화의 근원인 벽골제. 김제는 농경문화에서 창출된 여러 민속놀이가 있다. 벽골제의 쌍룡놀이와 풍년을 비는 마을당제 때 행하는 선돌줄다리기, 우도농악이 원평천과 두월천을 축으로 한 김제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백제시대에 쌓았다는 벽골제는 2천여 년의 역사에 걸맞게 숱한 사연들이 전해진다. 단야 낭자와 쌍룡의 전설이 대표적이며, 벽골제쌍룡놀이는 벽골제 인근 웅덩이에 살던 청룡이 벽골제방을 부수려는 것을 단야 낭자가 몸으로 막자 청룡이 감동해 물러났다는 설화를 춤과 노래, 현란한 움직임으로 재연한 것이다. 벽골제를 지키고 풍년과 인간 화합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던 단야 낭자의 정신은 쌍룡놀이가 전하는 주요 메시지다. 매년 10월 지평선축제 기간에 열리며,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대동쌍룡놀이와 쌍룡횃불놀이 등으로 진행된다.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민속놀이 부문 최우수상인 문공부장관상을 받았으며,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됐다.선돌줄다리기는 두월천이 흐르는 입석동의 월촌동사무소 앞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입석(立石) 앞에서 정월대보름날 밤 달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면 시작된다. 벽골제를 쌓고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입석을 세웠다는 설과 벽골제 사이에 당재와 토끼재를 연결하는 능선이 작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 터가 세기 때문에 이를 누르기 위해 김제동헌에서 입석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여자들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로 늘 여성들의 함성으로 줄다리기가 끝나면 선돌에 감겨 있던 묵은 줄을 풀고 새 줄을 감는다. 당산제가 끝나면 술과 떡을 나누어 먹고, 석주의 주변을 돌면서 풍물놀이를 즐긴다.김제의 농악은 전형적인 호남우도농악이다. 명절이나 칠월 호미씻기가 되면 각 마을 단위로 농악놀이가 성행했으며, 특히 추석에는 두 마을의 줄다리기와 함께 농악놀이 경합이 매우 극렬했다고 전한다. 김제의 농악은 상쇠 김도삼과 나도숙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들은 군진법을 중심으로 한 판굿에 있었는데, 현판금이막동백남윤김문달박판열이준용으로 계승돼 이 지역 풍물굿의 주류를 형성했다. 지금도 전북도 지정무형문화재 제7-3호인 박판열과 이준용의 굿이 전승되고 있다.동제는 원평천이 흐르는 금산면 금산리 산신제와 봉남면 종덕리 왕버드나무(천연기념물 제296호) 당산제, 봉남면 행촌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80호) 당산제, 부량면 대장마을 당산제, 두월천이 흐르는 금구면 선암리 유령당산제 등이 있었다.▲ 정읍호남 우도농악의 대표 격인 정읍농악은 192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정읍을 중심으로 보천교(정읍 입암면 대흥리에 본부를 둔 민족종교)가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보천교가 민족종교로 크게 부흥하면서 농악을 종교음악으로 지정하고 우대했기 때문이다. 호남 우도풍물의 판이 갖춰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정읍을 중심으로 호남 서해안 평야지대에서 우도농악이 위세를 떨쳤고, 박남식전사섭이봉문을 필두로 쟁쟁한 장인들이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모두 작고하고, 전북도 지정무형문화재 제7-2호인 유지화와 김종수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찬란했던 정읍농악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3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정읍의 농악 관계자들이 우도농악에 대한 꾸준한 발굴 작업을 시도했고, 산야에 묻혀있던 무명의 농악인들을 판으로 이끌어내는 한편, 유지화 명인을 정읍으로 초청해 정읍농악을 체계적으로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정읍농악단이 만들어졌고, 유지화김종수 선생의 지도하에 후진 양성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정읍농악은 굿가락이 다양하고 리듬이 다채롭다. 웬만한 사람은 가락을 따라 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박자가 난해한데, 2분박과 3분박의 절묘한 혼합박은 정읍농악 가락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정읍농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부포놀음'이다. 쇠꾼이 쓰는 상모를 부포상모(일명 '뻣상모')라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흉내 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그 놀음의 기예가 어렵다. 정읍농악 유지화 명인이 부포놀음의 최고 명인이며, 김종수 명인은 멋진 춤사위와 발림이 담긴 소고놀이가 으뜸이다.태인천이 흐르는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고현은 칠보의 옛 이름)의 향음주례와 전통혼례는 가을에 재현된다. 고현향약은 1470년 벼슬에서 물러난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이 처가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만든 것으로,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1556년)보다 80여 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 향약이다. 16세기 말부터 1977년까지 기록된 향약 자료집은 1993년 보물 제1181호로 지정됐다.대표적인 당제는 마을 부녀자들의 '단속곶 춤'으로 액을 몰아내는 북면 오류리 당산제와 '당산 할미의 옷을 입힌다'는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당산제, '열두당산'으로 유명한 칠보 백암리 원백암마을 당산제 등이 있다.▲ 향제풍류의 발상지 동진강동진강은 향제풍류의 발상지다. 향제풍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태인 출신의 전계문(1872~1940)과 이를 발전시킨 전용선(1888~1946)이 정읍에 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정읍풍류는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이리풍류와 구례풍류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이리풍류의 강낙승황상규와 구례풍류의 김무규 등이 정읍 초산율계의 율객이었던 전추산김윤덕 명인의 제자들이었다.절묘하고 애절한 선율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풍류음악은 민간의 풍류방에서 스스로 수양하거나 명상하듯 즐기는 음악으로, 지방에 전승되는 현악영산회상인 향제줄풍류는 지방 풍류객들의 호방한 음악성이 반영돼 흥취가 높다.현재 민간풍류가 살아남아 영산회상을 줄풍류로 이어가고 있는 곳은 정읍과 이리, 구례 세 곳. 정읍풍류는 <초산음률회>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샘기픈소리>(대표 김문선)가 정읍풍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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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1.03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1)강과 인물(하)-정읍지역

태인천정읍천내장천고부천 등 오래된 한지의 실핏줄처럼 뻗어있는 동진강 물길에는 수많은 위인(偉人)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최치원으로 상징되는 정읍 지역 선비의 맥은 조선시대 김회련정극인송세림김약묵신잠이향 등으로 이어졌으며, 오늘까지 도도한 절조와 풍류를 더하고 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최경선김덕명 등 동학농민혁명의 앞선 이들 역시 동진강가의 사람들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이인좌의난항일운동독립운동 등 국가의 위기에도 정읍을 중심으로 한 선인들은 늘 빼어난 기상을 자랑했다.임진왜란 의병장 김재민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송흥록, 정묘호란의 장군 김준, 이인좌박필현의 난을 평정한 의금부도사 김도언, 한말 의병활동을 한 김기술, 독립운동가 백정기, 31운동의 민족대표 박준승 등이 그들이다. 을사조약 체결에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1851~1916)은 옥구 출신지만,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은 칠보면과 산내면, 동진강 어귀다.▲ 동진천의 최치원과 정극인동진강 본류가 흐르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관장 안성렬)에서는 살아 있는 고운 최치원(857~?)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상춘곡」의 배경인 태산(현 칠보) 지역의 선비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그곳에 채용신(1850~1941)의 붓에 담긴 최치원의 초상이 있기 때문이다.사료관 바로 옆에는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1401~1481)의 동상이 있다. 그는 단종이 폐위되자 정언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태인에 은거하면서 이 작품을 지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玩賞)하며 안빈낙도를 노래한 이 작품의 시작 부분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옛사람 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에서 '옛사람'은 최치원의 풍류를 말한다. 태산의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축조해 유상대(流觴臺)를 만들고 검단대사와 더불어 풍류를 즐긴 역사를 흠모하는 것. 굴곡진 작은 물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수로를 돌아 앞에 오면 시 한 수를 읊던 선비들의 풍류다.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신라시대에 행해졌던 이 놀이는 칠보의 동진강변에 흔적을 남겼다. 돌의 홈을 파서 만든 경주의 포석정은 인공적인 성격이 짙지만, 동진천의 물을 끌어들였던 유상대는 칠보팔경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1700년대 큰 홍수로 유실된 유상곡수 수로 터에는 최치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건립한 감운정(感雲亭)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는 유상대의 내력을 상세히 알려주는 유상대유지비가 있어 유상곡수의 옛터를 증명하고 있다.유상곡수에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술 한 잔을 띄워놓고 시를 읊다보면 어느새 유유히 흘러오는 술잔은 한 떨기 꽃잎처럼 보였을 것이다. 매년 11월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최치원태산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태인천의 정순왕후와 숙빈 최씨태인천이 흐르는 칠보와 태인에는 조선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1440~1521)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자취가 있다. 정순왕수의 태생지는 칠보면 소재지인 시산리 동편마을. 그는 판동녕부사 송현수(?~1457)의 딸로 14세에 단종 왕비로 책봉됐으나, 18세에 홀로 된 뒤 82세까지 생애를 청빈하게 보냈다. 시산리 남전마을에 유허비각이 있다.태인면 거산리에 있던 대각교(大脚橋)는 조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 깊은 인연이 있다. 숙빈 최씨는 천민 출신 하급 궁녀에서 정1품 후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한 여인의 입지전적 성공담을 그린 MBC드라마 <동이>의 주인공. 대각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이 다리에서 만나 데려다 키웠다는 '거지소녀'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그 나이와 용모의 귀여움은 자기의 딸과 비슷하였다'는 그 소녀가 숙빈 최씨로 알려져 있다. 지금 그곳에는 <만남의 광장>이 조성돼 있다.▲ 정읍천의 송시열과 이순신숙빈 최씨가 왕의 눈에 들지 못할 무렵,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윤)의 세자책봉을 막으려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자신이 화를 입은 이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정읍 시내를 관통하는 정읍천은 우암이 사약을 마시고 쓰러진 자리에 세운 추모비 '송우암 수명 유허비'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가 가까이 있다. 유허비는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 우암은 숙종 15년인 1689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 수성동에서 사약을 받고 83세의 나이에 죽었다. 6년 뒤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고암서원이 세워졌으며, 1737년 이 자리에 비가 세워졌다.충렬사는 충무공이 45세이던 1589년부터 1년 4개월 동안 정읍과 태인의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쌓은 치적을 기려 1963년 준공되었다. 성황산 서쪽에 공원 형태로 조성된 충렬사는 정읍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매년 4월 28일 이순신의 덕과 충의 정신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내장천의 안의와 손홍록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가치가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태인의 선비 손홍록(1527~1610)과 안의(?~1593)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조선 전기의 방대한 역사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춘추관과 성주사고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비롯한 정읍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 180년 동안의 실록과 서책들이 불타 없어질 것을 걱정했고, 사재를 털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과 비래암에 옮겨 보관했다. 이들과 함께 영은사(현 내장사)의 승려 희묵과 무사 김홍무 등 의병 100여 명이 함께 했다. 두 사람은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남천사에 향사되었다.▲ 고부천의 동학농민들과 백정기고부천에 흐르는 동학농민혁명의 장장(章章)한 기운은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정읍 영원면 은선리 구파 백정기(1896~1934) 의사의 유적지다. 윤봉길이봉창과 함께 3대 의사(義士)로 불리는 구파는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주중공사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돼 이듬해 일본 나가시키현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순국한 항일 애국투사다. 부안읍에서 태어났지만 1907년부터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은선리에는 백 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와 유품 및 활동상을 전시해 놓은 구파기념관, 교육이 가능한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동상, 어록비와 순국비, 추모비가 시민들을 반긴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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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27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0)강과 인물(상)-김제·부안지역

동진강의 지류인 김제의 두월천과 신평천, 원평천은 꼿꼿하게 흐른다. 이 땅을 대표하는 참된 선비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의 처신은 분연히 일어나 싸우거나, 은둔하며 도(道)를 지키거나, 목숨을 끊어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의병항쟁과 민족교육운동, 살신성인의 의열(義烈)로 이어진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한국 병탄에 반대해 자결로 뜻을 밝힌 일유제 장태수(張泰秀1841~1910)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재산을 바친 일송 장현식(張鉉植1896~1950), 한말의 학자이자 사상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 근대 실학의 대가인 석정 이정직(李定稷1841~1911),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로 불리는 간재 전우(田遇1841~1922) 등은 험난한 세월 변함없이 지조를 지킨 대표적인 예다.▲ 두월천의 장태수와 장현식"내가 두 가지 죄를 졌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이요, 이름이 적(敵)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장태수의 유언 중에서)두월천이 시작되는 김제 금구면 서도리에서 태어난 '남강거사'(南岡居士) 장태수는 병조참의동부승지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으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북 고산현감으로 부임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국권 강탈 후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일본이 회유를 위해 주는 돈을 단호히 거절하고, 세 아들이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가자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했다. 그의 생가이자 그가 순국한 집인 남강정사(전라북도 기념물 제64호)와 재실인 서강사(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그의 유물이 있는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도유형문화재 105호)에서 그의 고고한 기품을 찾을 수 있다.장태수를 종증조(從曾祖)로 둔 일송 장현식 역시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과 문화교육 사업에 바친 대표적인 항일의사다. 그는 인동 장씨 가문의 장손으로 호남평야의 만석꾼이지만,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등에도 불화를 입지 않을 만큼 대대로 덕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강직한 성품만큼이나 자신의 재산이 의롭게 쓰이기를 원했고,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에 군영자금을 제공했으며, 수만 원의 독립자금이 알게 모르게 임시정부로 건너갔다. 중앙학원과 고려대, 동아일보 등의 태동에도 상당한 재산이 쓰였다.특히 민족어 보존을 위한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참여, 정인승이극로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전라북도 제 2대 도지사를 지낸 그는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서울에서 납북돼 그해 10월 평양에서 사망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40여 년 동안 이유도 없는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그의 흔적이 담긴 김제 서도리의 고택은 최근 후손이 전주시에 기증하면서 전주한옥마을로 옮겨졌다. 지금도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리는 전주향교 옆, '장현식 고택'으로 불려야 할 '인동장씨 고택'이 그것이다. 정면 6간 측면 5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은 고난의 시기, 민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한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켜켜이 쌓인 한(恨)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신평천의 해학과 석정김제 신평천은 해학 이기와 석정 이정직의 고고한 기운이 흐른다. 전남 광양의 황현(黃炫1855~1910)과 더불어 호남 3걸로 불렸던 해학과 석정은 도학과 과학의 조화와 상생을 주장했다. 전통적인 도학을 존중하면서도 공리공론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학이 과학과 더불어 이용후생에 실용화 될 수 있는 실학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특히 유형원정약용 등의 학통을 계승한 해학은 동학혁명에 참가한 이후 평생 항일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일신했으며, 독일의 칸트 등 서양철학을 주자학과 비교분석한 석정은 조선의 학문을 근대적인 체계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제 성덕면 대석리 해학의 생가(지방기념물 제118호)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이었으나 지금은 슬레이트로 개조된 안채만 남아 있다. 백산면 상정리 석정의 생가(지방기념물 제21호)는 한 뼘 정도의 축대에 초가로 남아 있으며, 그의 유저와 유물은 지방 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돼 있다.▲ 부안 계화도의 간재와 채용신"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간재의 말 중에서)간재 전우 역시 동진강 끝머리에 흔적을 남겼다. 전주 다가동에서 태어난 간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세 차례에 걸쳐 「척참오적」이란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조약을 파기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했으며, 「포고천하문」과 「경세문」 등을 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탄핵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이후 그는 82세로 귀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부안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유학의 전통을 지켰다. 계화도의 계양사와 의령의 의산사, 고창의 용암사, 정읍의 태산사 등에 제향 되었으며, 전주덕진공원에 유허비가 있다. 최근 군산 옥도면 신시도 대각산 아래 안골에서도 유허비와 학당터가 발견되기도 했다.간재가 계화도에 머물던 1920년의 초상은 석지 채용신(蔡龍臣1848~1941)의 붓끝으로 남아 있다. 채용신은 흥선대원군과 고종황제의 어진을 그렸으며, 조선 태조의 어용(御用)을 모사했던 한국 초상화의 마지막 대가로 불린다. 1905년 시국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전주익산변산고부남원 등을 다니면서 초상을 그렸는데, '우국지사나 도학자들의 경우, 그 집안이나 사당을 직접 방문하고 대부분 대가 없이 그려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41년 정읍에서 삶을 마쳤다고 전한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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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06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9)강과 축제

강이 출렁거리는 만큼 그 주변도 흥성거린다. 동진강도 그만의 운치가 있다. 매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무렵 축제는 때맞춰 열리고,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든다. 활짝 피어난 꽃들처럼 환한 웃음이 넘쳐나는 동진강가의 축제들. 온갖 꽃들이 꽃빛깔로 무지개 서고, 풀잎마다 가지마다 한 세상 누리는 꽃술들이 여한 없이 황홀하다.축제 특유의 제(祭)와 전통국악 공연, 초청가수의 공연, 농수산물과 향토음식 판매, 백일장과 사생대회사진공모전 등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지치지도 않고 이어진다. '군민의 날'이나 '면민의 날'식의 행사들은 노래자랑과 장기자랑, 푸짐한 경품 추첨행사가 전체 프로그램의 맨 윗선에 있다. 건강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수확의 기쁨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축제이며, 지역 주민과 함께 어울리면서 시골의 훈훈한 정을 듬뿍 담아 갈 수 있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봄 축제눈처럼 하얗게 날리는 꽃잎, 밤이면 강에 띄운 그림자 꽃들과 어울려 운치를 더하는 벚나무들의 풍광. 원평천이 시작되는 김제 금산사 입구와 정읍을 관통하는 정읍천변의 벚꽃들은 매년 봄 쌀밥같이 허연 꽃무더기를 흩날린다. 햇살이 비치는 낮도 그렇지만 어슴푸레한 달빛이 스며든 밤은 더 황홀하다.그 무렵 정읍천의 지류인 정우면 정읍시농업기술센터에서도 꽃잔치가 벌어진다. 정읍 자생화축제가 알리는 봄의 절정. 할미꽃, 앵초 등 정읍의 자생화 200 여 종을 비롯해 광릉요강꽃, 복주머니란, 히어리, 동강할미꽃, 노랑할미꽃, 파초일엽 등 흔히 볼 수 없는 희귀 자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모악산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진달래의 진분홍 물결도 수수하지만 매혹적이다.꽃소식에 실려 문화예술축제들도 기지개를 켠다. 수많은 축제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진강의 봄은 어디나 축제 준비로 분주하다. 수십 만 명의 관광객이 몰릴 만큼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부터 수백 명에 불과한 소박한 것까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행사만 해도 어림잡아 십여 개를 훌쩍 넘는다. 종류도, 색도 가지가지다.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며 전라도 '민의 혁명'의 의미를 다시 새길 정읍 황토현동학축제는 5월을 한층 성숙하게 한다. 황토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초의 농민군 전승지. 1967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황토현숙영캠프, 황토현청소년축전과 체험놀이마당, 갑오선열 위패봉안례, 전국농악경연대회, 황토현동학축제기념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있는 소중한 역사체험장이다. 축제는 정읍 온 동네를 휘감고 열린다.넉넉한 힘과 넉살을 가진 황소들이 콧바람을 일으키는 전국민속소싸움대회도 황토현의 봄나들이에 한 몫을 한다. 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소들의 한판승부. 1996년 첫 대회가 열렸으며, 1998년 전국대회를 거쳐 2003년부터 정부가 인정하는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다.▲ 가을 축제축복이 담겨 있는 인자한 가을볕. 가을 산은 섬세하고, 강은 힘차다. 가을 들녘은 한없이 풍성하다. 마음이 넉넉해진 사람들은 한데 모여 복과 흥을 나눠 갖는다.신과 자연의 보살핌과 존재의 귀함을 일깨우는 가을. 우리 민족은 신명나게 놀기 위해 하늘에 제(祭)를 지냈다. 그 제는 한 해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풍성한 가을축제로 분해 우리에게 손짓한다. 수확의 계절인 만큼 내용도 다채롭고, 인심도 후하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물들어가는 오색 단풍과 수수한 들꽃에 눈이 호강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잘 영근 과일은 입안에 침을 괸다.끝없이 펼쳐진 들녘. 하늘과 맞닿은 들의 넉넉한 미소.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을 거닐면 동양화 속 주인공이 부럽지 않다. 호남 최대의 곡창지대와 한국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김제의 지평선축제는 상상만으로도 상쾌하다. 농경문화체험을 테마로 한 지평선축제는 김제의 자연환경과 그곳에서 생산되는 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가을 원평천이 안고 흐르는 벽골제에서 열린다. 농경문화와 한국의 전통생활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우수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기도 했다. 축제가 시작되면 김제의 들녘 곳곳에서는 다양한 허수아비들이 먼저 행인을 반긴다. 벽골제 제사와 쌍룡놀이를 시작으로 입석줄다리기, 벼 베기, 단야낭자 손인형극 및 동화구연, 선비문화체험, 새총활쏘기, 용오름전시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허수아비들을 쫓아가면 황금벌판 우마차 여행과 벼 추수 체험, 메뚜기 잡기,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허수아비 만들기, 연날리기, 짚으로 만든 공예품 등 농경문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동진강의 발원지로 언급되는 내장산에서는 내장산단풍부부사랑축제가 열린다. 유일하게 전해지는 백제가요 「정읍사」에 담긴 여인의 숭고한 사랑을 다시 떠올려보기 위해 마련한 이 축제는 부부사랑 추억여행이다. 사랑의 단풍엽서, 단풍나무 소원지, 단풍잎 책갈피, 단풍 페이스페인팅, 단풍잎 물들이기, 단풍미인쌀 체험 등 6종의 단풍체험과 백제 왕관, 백제 도깨비가면, 수제천 연주, 전통혼례, 정읍사 목판 등 5종의 백제문화체험이 특색 있다.오색 단풍과 국화향이 어우러진 내장산의 가을. 내장산 국화축제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식 정원'을 테마로 11만여 점의 국화작품을 전시해 단풍객들의 걸음을 단풍보다 먼저 잡아챈다. 농특산물 장터와 토속음식 코너, 국화차 시음장도 운영된다.가을이 깊어지면 동진천이 흐르는 정읍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은 새하얀 선비로 옷을 갈아입는다. 호남 유교문화의 산실이자 정읍 태산선비문화의 중심지인 무성서원에서 '태인고현동향약'(泰仁古縣洞鄕約고현은 칠보의 옛 이름)을 재현하는 최치원태산선비문화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고현향약의 의전이었던 혼례상음례계례관례 등 선현들의 전통의식을 재현해 온 이 행사의 대표 프로그램은 도포와 갓, 망건 등 전통의관을 갖춘 지역 유지들의 고유제와 향음주례, 전통혼례. 특히 향음주례는 동민(洞民)들이 향약을 권하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상호친목을 다짐으로써 쟁송하는 일이 없고 예의를 숭상하는 미풍양속을 길렀다.피향정문화축제 역시 선비 문화를 앞세운 축제다. 취타악대를 선두로 200여 명의 퍼레이드를 비롯해 신임 태인현감 부임행차 재현, 태인현감 부임 축하연, 육방놀이, 유교경전강의 등 색다른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어르신 섬김 행사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축제의 의미는 넘친다.청명한 가을햇살, 정읍 산내면 옥정호구절초테마공원은 산비탈 전체를 가득 채우듯 구절초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난다. 그 군락은 매년 구절초축제를 열리게 한다. 순백의 구절초가 하얗게 뒤덮은 송림은 걷기에 더없이 좋고, 무리지어 핀 구절초를 보면 늦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대표 프로그램은 클래식 음악회. 자연과 조화를 이룬 수채화 같은 무대, 감미로운 음악선율은 가을로 한 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낭만적인 시간이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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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9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8)강과 종교

동진강은 한국 종교의 성지들을 담담하게 품고 흐른다. 동진강 일대는 동학과 천도교, 증산교, 보천교 등의 발상지이자 태동지이며, 초기 기독교와 가톨릭 신자들의 흔적도 곳곳에서 찾아진다. 유교와 무속신앙의 맥도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특히 원평천의 발원인 김제 금산면 일대는 금산사와 귀신사, 금산교회, 증산법종교본부, 수류성당 등이 모여 있는 종교인들의 순례지다.미륵신앙의 본산인 금산사는 1400여 년 전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후 1626년에 재건된 것이다. 금산사 일대는 2008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 제496호로 지정받을 만큼 역사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뎅그렁, 뎅그렁. 낡고 오래된 종탑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것 같은 김제 금산교회(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는 1908년 건립됐다. 남녀가 한 자리에서 얼굴을 맞댈 수 없었던 당시의 풍토는 남쪽은 남자들이, 동쪽은 여자들이 앉아 예배를 보는 'ㄱ'자형 건축해법으로 해결했다. 삐거덕거리는 실내에는 오랜 역사를 알려주는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고, 교회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낡은 독일제 풍금은 언제라도 정겨운 소리를 들려줄 것 같다.이 곳은 초기 교회 신자들의 깊은 신앙심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전한다. 주인과 머슴의 관계였던 조덕삼과 이자익의 이야기다. 주인과 머슴이 대결을 펼친 장로 투표에서 머슴이 뽑히면서 두 사람은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으로, 교회에서는 신자와 장로의 관계로 만나 주인이 머슴인 장로에게 설교를 들었다는 것. 이후 조덕삼은 머슴이자 금산교회 1대 장로인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게 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이곳에서 금평저수지를 지나 차로 20여분 거리에 수류성당이 있다. 교복을 입은 갈래머리 여학생들이 발랄한 웃음으로 뛰어나올 것 같은 이곳은 완주군의 되재와 익산시의 나바위와 함께 1890년대 호남의 3대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1907년 48간의 성당을 건축했으며, 이듬해 전북 최초의 신식학교인 인명학교를 세워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959년 지어졌으며,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동진강은 공소(公所)가 곳곳이다. 공소는 사제가 없는 교회. 한국의 천주교는 일본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서양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민족 스스로의 믿음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자랑스러운 역사만큼 아프고 시린 순교의 역사도 간직하게 되었다. 60여 년 동안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견딜 때 공소는 신앙의 터전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공소는 익산과 완주, 진안, 장수 등 이 땅에 고르게 분포해 있는데, 정읍에 유달리 많다.동진강의 본류를 따라 산내면 능교리 능교(능다리)공소, 칠보면 반곡리 동막공소, 산외면 상두리 구장리공소와 종산리 원전(원바실)공소, 옹동면 상산리 저상(닥배미)공소, 태인면 거산리 신기공소와 태창리 태산공소가 있으며, 정읍천을 따라 내장동 쌍암리 죽림(대숲골)공소와 입암면 등천리 등천리(등내)공소, 북면 한교리 한교공소, 신월동 신성공소, 장명동 구량실공소가 있다. 정읍 감곡면 유정리 옥신공소와 진흥리 석점공소는 김제 땅을 적시는 원평천의 지천에 있다. 동진강 끝머리인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와 의복리는 각각 천주교창북공소와 돈지천주교회공소가 있다.공소가 있는 교우촌(敎友村)은 대부분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나 궁벽한 시골마을에 터를 잡은 곳. 당시 교인들은 숨어 살면서 숯을 굽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고, 화전을 일구어 조감한봉 등으로 연명하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특히 정읍 산내면 매죽리와 백필리, 능교리는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친동생인 김난식(1827-1873)과 사촌조카인 김현채(1825-1888)의 묘가 산내면 종성리 일대에 있는 것으로도 그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공소는 대부분 스스로의 역사를 밝히고 있는 곳이 드물다. 그러나 동막공소는 '1886년 경상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迫害)를 피해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했다가 이주한 곳'이라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신성공소 역시 조선 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피난을 와 교우촌을 형성한 곳이다. 1903년에 건축된 우리나라 초기 한옥 형태의 성당건축으로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80호로 지정되었다.신기공소는 평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교우촌들과 다르다. 1934년 태인 공구 내에서 살던 주민 3가구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신기'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정읍순창금산 등 인근 산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큰 마을이 됐다. 차(車)씨들이 정착해 이룬 칠보면 수청리 청광마을의 공소 건물은 한국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소실됐다. 등천리(등내)공소 역시 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4년 뒤 다시 세웠고, 태산공소는 1933년 태인에서 칠보로 넘어가는 거산고개에 세워졌으나 30여 년 뒤 철거됐다.동진강은 다양한 종교가 발생한 곳이지만, 그 귀함은 다툼 없이 한데 어울려 있다는 것에 있다. 부침(浮沈)의 역사를 간직한 신앙의 터전들. 동진강은 그 곁에서 가깝게 흐르며 부침하는 작은 배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도 끝끝내 그 흐름을 그치지 않았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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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2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증산교와 보천교

증산교는 1902년 고부 출신인 강일순(1871~1909)이 창시한 종교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했는데,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증산교는 1894년 정읍에서 시작된 동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억압과 소외로 힘겨워하던 농민들이 주축인 동학은 결국 이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회를 개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고, 증산교는 이 때 태동했다. 강일순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는데, 그의 포교지역은 자신이 '광제국'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이 중심이었으며, 그 일대인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했던 동진강 어귀였다.김제 금평저수지 옆 증산법종교본부(등록문화재 제185호)는 1949년 증산도 교주 강일순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종교 성지다. 주변에는 묘각인 영대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 등 195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있다.교리를 인의(仁義)에 기초한 보천교는 1911년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1880~1936)이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서 창시한 증산교 계통의 종교다. 1920년대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해 사용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는데, 600만 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자 친일활동을 했는데, 이는 교단의 분열을 초래했고, 태을교동화교수산교삼성교무을교인천교원군교 등 새로운 교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으로 보천교는 해체되었으며, 해방 후 다시 교단이 조직되었다. 정읍 입암면에 보천교중앙본소가 있다.동진강을 중심으로 발현한 일부 종교들은 민족종교와 유사종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이들이 담당했던 역할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에 앞서 일제가 식민통치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덧씌웠던 허울들이 먼저 전해진 탓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한 방송매체의 인터뷰에서 "민족종교는 우리 국민이 가진 전통민속감정을 그대로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민족종교의 탄압은 한민족 의식과 문화의 부활을 막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일제가 그토록 강력하게 이 종교들을 말살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할 일이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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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2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7)강과 문학(하)- 소설이 쌓여 흐르는 강

동진강은 물길 닿은 곳 어디나 소설(小說)이 쌓여 있다. 벽골제와 금산사, 모악산과 내장산, 동학과 일제강점기의 수탈 등 동진강이 안고 흐르는 역사는 모두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동진강은 기억을 거슬러 한민족의 역사를 형상화한 민족지를 일구어 내고 있는 것이다. 동진강을 타고 흐르는 소설들은 이 땅 사람들의 마음을 아련케 하는 힘이 있다.류영국의 장편소설 『만월까지』의 배경은 김제와 부안이 잇댄 김제시 부량면 옥정리 부근. 동진강의 달빛은 궁궐의 마당(玉庭) 같이 밝다.'정작 큰일은 그날 밤 강가에서 벌어졌던 거여. 그놈의 동진강 달빛은 왜 그렇게도 맑어? 낮에 보면 뿌연 갯바닥인디 저녁에 달이 뜨면 은하수 같더라고. 탱자나무집 그 가시내를 생각험서 내가 부는 퉁소 소리에 내가 취혔는디, 느닷없이 청년들이 떼로 몰려오더니 두말헐 것도 없이 눕혀놓고 진흙 반죽을 허드라고, 참.'구한말을 배경으로, 종살이 삼대의 분노와 한으로 얼룩진 삶의 응어리들을 그린 이 소설은 민초들의 끈질기고 건강한 생명이 문장 구절구절 짙게 배어 있다. 묻히고 잊힌 토속어가 감칠맛 나게 풀어져 있으며, 소(牛)부리기, 물꼬 싸움, 베 짜기, 굿판 등 강어귀에 살던 이들의 전통 생활양식과 풍습도 실감나게 그려 있다.일제 강점기 후반과 해방 전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일대 동진강 나루터를 배경으로 한 아동문학가 김용재의 청소년소설 「나루터마을」에도 동진강은 살아 있다. 그는 "동진강은 맑은 물이 흐르기도 했지만 홍수 때는 흙탕물이 범람하여 귀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고, 서해 바닷물의 조수왕래가 있을 때는 나룻배를 밧줄로 얽매어놓아야 했다"고 기억한다. 나루터마을에는 바닷물이 밀고 온 갯벌에서는 짱뚱어가 뛰어놀고 갈게나 농게들이 춤을 춘다. 갯바람에 서걱서걱 한들거리는 개개비가 노래 부르고, 그 노래를 들으며 나룻배의 뱃사공이 노를 젓는 풍경이 담담하게 그려진다.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송기숙의 「녹두장군」, 이병천의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유현종의 「들불」, 채길순의 「동트는 산맥」과 「흰옷이야기」 등 반복되는 수탈과 저항을 동학으로 되살려 낸 소설들과 「전봉준」이란 동명의 이야기를 담은 작가들, 이이화우윤안재성김자환김삼웅안도현조채린김덕길이정범신복룡김현숙안세희김한룡유인옥박상재김향이김경희이광열김원경. 그리고 정읍이 고향인 손홍규의 소설 「귀신의 시대」, 김제 출신 장종권의 단편소설 「그 여름의 동진강」, 홍종화의 소설 「매창」, 김종광의 「율려낙원국」 등에도 동진강은 유유히 흐른다.김원일의 소설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주요 배경을 철새들의 도래지인 '동진강'이라고 설정했다. 그러나 소설 속 중부리도요라는 귀한 새가 삼각주에 도래하고 청둥오리와 왜가리, 고니, 원앙이, 농병아리 등 철새들의 터전인 것은 맞지만, '동해남부선의 작은 역이 있는 곳'이나, 오징어잡이배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면 전라도의 동진강은 아니다.동진강 갈래천인 두악산 아래 신평천의 백산저수지(김제 백산면 하정리)는 소설가 윤흥길이 1982년 발표한 소설 「완장」의 무대다. 하지만 작품에 백산저수지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종술이가 완장을 찬 왼팔을 훨씬 더 활기차게 휘저으면서 갈지자걸음으로 순찰하던 소설 속 '판금저수지'도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다. 작가는 백산저수지 근처에서 과수원을 하던 친구, 지금은 백산저수지 바로 옆에 묻혀 있는 고(故) 이상열 시인으로부터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전한다. 소설가 김승옥이 순천만을 '무진'으로 변형시킨 것처럼, 윤흥길은 백산저수지라는 구체적 공간을 판금저수지로 바꾼 것이다.작품에 묘사된 것처럼 백산저수지는 1966년부터 3년간 대대적으로 벌어진 '호남 야산개발' 때 축조된 인공저수지다. 50Km 쯤 떨어진 섬진강 다목적댐에서 물을 끌어와 가두어 두었다가 개간으로 생긴 논에 물을 공급한다. 작가는 종술의 욕망을 희화하기 위해 소설 속 저수지를 실제보다 훨씬 큰 규모의 것으로 과장한다. '감시원 완장 차고 물가상이로 왔다리갔다리 허면서' 막강한 권력자처럼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던 종술. 그에게 완장의 허황됨을 깨우친 것은 술집 작부 부월이의 일침이다."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 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권력 중에서 아무 실속 없는 놈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주워 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완장」은 유장한 강의 흐름처럼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완장'은 어느 시대나 존재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으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를 떠올리며, 완장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한 징후를 읽어낸다. 지금 '완장'을 찬 사람은 누구인가. 완장을 차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도록 외면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소설 '갯들' 과 '아리랑'- 수탈의 땅, 뿌리뽑힌 민초들의 이야기'광활 갯벌'과 '동진농장'은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시린 역사를 일러주는 대표적인 상징어다.1924년 일제는 김제 동진농장 간척지를 개간하기 위해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다. 동시에 간척지의 염기를 제거하고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섬진강을 막아 운암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까지 길고 긴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5년 정월 김제의 광활한 벌판에 이주민들이 밀려들었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땅마저 빼앗긴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국내외를 떠돌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애환은 임영춘의 소설 「갯들」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찾을 수 있다.1981년 세상에 낸 「갯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 부모가 간척지로 이주해서 살았던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다. 배경은 동진농장으로 불리던 간척지 이민촌. 일제가 동진강 하류 갯벌을 개간해 이민을 받아 조성된 김제 광활면이다.'당시 일제는 '손바닥 검사'(손에 괭이가 박히도록 일을 많이 한 사람) 등 신체검사를 통해 소처럼 일을 할 수 있는 소작인을 모집하였다. 그들에게 제공된 것은 바람도 막을 수 없는 움막이 전부였으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자고, 일하는 것뿐이었다.'(「갯들」中)작가는 시달리다 못해 쓰러지는 어른들을 지켜보았고, 그 스스로도 '개구리와 뱀이 썩은 도랑물을 먹고 굶주림 속에서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났다'고 회고한다. 그 모습은 소설에서 '노예시장에서처럼 쓸 만한 놈을 골라 와야 한단 말이야.', '조선은 우리 식민지야.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좋아.', '말채 같은 단단한 채찍을 만들어서 말 안 듣는 놈은 마구 후려치는 거야.', '요놈(불에 달군 집게)으로 말 안 듣는 놈은 살을 푹푹 지지는 거야.' 등의 표현으로 구체화된다.「아리랑」의 시작은 김제시 죽산면 내촌마을. '들'은 흔하고, '산'이 귀한 곳이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나락들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첫 번째 수탈의 대상이다. 작가는 죽산면 자작농과 소작농들의 삶을 통해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으로 농촌사회가 파괴되고 농민이 분해되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영구소작권을 받기 위해 뻘밭을 농토로 만드는 사업에 참여했던 소설 속 한기팔의 한 마디,"참말로 기가 차시. 재주넌 곰이 넘고 돈언 왕서방이 다 묵드라고 요것이 무신 꼴이여. 우리가 그리 피땀 흘리고 골빠지게 일해 갖고 결국 왜놈덜만 조리 존 일 시켰으니, 원퉁히서 못살겄네."생전사후 분하고 억울한 일, 동진강은 안다. 그래서 기차게 흐른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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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5 23:02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16)강과 문학(상)-시(詩)로 흐르는 동진강

(부제) 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16) 강과 문학(상)- 시(詩)로 흐르는 동진강(부제) 강변의 시인들, 고향 땅 이야기 출렁출렁 풀어내다(부제) 신석정김민성오남구박영근박형준 시인 등(부제) 강과 들녘의 삶역사문화애정으로 담아내동진강 하구역 강물은 오래 흘러온 길을 갯물에 씻고물 때가 온다물골을 트고갯벌이 논다농게 참게 능쟁이는 볼볼볼 춤을 추고드난살이 말뚝망둥어는 알을 슬고,먼 개를 지나 숭어새끼들은 너울을 타고 솟구쳐 오고 있을 것이다뻘밑 깊은 곳에서는백합이 숨 쉬는 소리한 숨한 숨살이 오르는 소리달과 지구 사이 수만년의 바다가 흘렀을 것이다천 갈래 만 갈래 살아 넘치는 바다바람 자면 저물어 멀리 야위는 바다밀물과 썰물 사이 수만년 산 것들이 물길을 열었을 것이다갯벌에강물에댕기물떼새 한 마리 기진한 허공을 내려와뻘 한 점을 물고 있다<박영근 시인의 시 「물때」 전문>동진강은 희망의 물줄기를 찾는 시(詩)의 힘으로 흐른다. 시인들의 핏줄에 스민 '동진강의 풀잎들은 가슴으로/가슴으로 쓰러져 들어와 바람처럼/물결처럼'(이영진 시 「동진강가 그 미친 햇살로」中) 성긴 머리를 풀어 시인을 깨우고, 이윽고 강은 출렁출렁 숨을 쉬며 거침없이 흐른다. 긴 긴 어둠을 뒤흔드는 더운 피, 참 삶을 꿈꾸며 강을 건너는 사람들. 신석정(1907-1974), 김민성(1927-2003), 정렬(1932-1994), 박정만(1946-1988), 오남구(1946-2010), 박찬(1948-2007), 박영근(1958-2006) 동진강이 삶인 이 땅 시인들의 뼛속까지 잠기는 동진강 물소리.부안 출신인 오남구 시인은 1975년 첫 시집 『동진강월령』에서 「벽골제」, 「백산나루」, 「조소리 구름밭」, 「숫구지 나루」, 「보쌈네 흰 눈썹」, 「말목댁 베 맨 솜씨」, 「부안 기생의 이쁜 눈썹」 등을 통해 신명 지핀 넋두리를 풀어냈다. 박강순 시인은 1993년 첫 시집으로 『동진강』을 상재했다. 강민숙유미선황송문허만하 시인은 「동진강」을 시제로 동명의 작품을, 정휘립 시인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각종 문예지를 통해 6편의 연작 시조를 발표했다.평생 고향인 정읍을 지키고 있는 장지홍 시인의 작품에는 농경문화의 향토성과 동진강의 곰삭은 민속이 해학 가득한 민화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방귀대회에 나가서 방귀로 동해물과 불러버렸더니 대번에 일등상을 주더라는 뻥쟁이 만덕이'(「칠석날」中) 얘기처럼 그의 시에는 동진강의 푸지고 푸진 삶들이 민화처럼 곰삭아 흐른다.'바람새 한 떼 푸드득 품에' 안는 「가을 동진강」의 낭만과 서정은 김찬옥 시인이, '빈 들녘 깊은 숨결 산을 돌아 에워' 오는 「겨울 동진강」의 물소리는 이금배임남재 시인이 품어준다. 동진강 끝머리의 애잔한 서사는 진흥원 시인의 「동진강 하구」와 안도현 시인의 「개펄에서 놀던 강」에 담겨 있다.동진강이 개펄에 닿는 부안 동진면 문포. 박남준 시인은 그곳에서 '작고 낡은 배 몇 척과 아이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하던 그 비린 갯내음'(박남준 시인 「문포바다까지」中)을 떠올린다. 변산반도가 고향인 박영근 시인도 동진강 하구 마른 갯벌을 위해 시 「물때」를 남겼다. 어린 날 뻘밭 자욱했던 하구(河口)의 흥성거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부안 출신 박형준 시인의 시 「싸리꽃」에는 수리조합 둑 아래로 흐르던 초록풀 물든 동진강 물소리가 알싸하게 들린다. 어린 시절 강에서 건져낸 오빠에게 부끄러워 인공호흡을 하지 못하고, 그날 이후 다시는 오빠를 볼 수 없게 된 슬픈 추억. '수리조합 둑방의 풀이 유난히 푸르다/사람들이 오누이를 에워싸고 있고/무릎 꿇고 고개 숙인 소녀의 모습/수리조합 물살에 떠내려간다/물에서 건져낸 오빠의 얼굴/풀물 들어서, 소녀는 얼굴이 발그레하다' 새만금물막이공사로 꽤 오래 숨을 참고 있는 지금의 동진강도 발그레하다.김제 금구가 고향인 최형 시인은 그의 네 번째 시집 『이런 풀빛』에서 유난히 '강'의 심상을 드러냈다. '강물은 필연적으로 흘러가는 곳으로 흘러간다'는 뻔한 명제에 대한 그의 시적 확신은 전망 없는 시대에 절망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이데올로기에 깊게 패인 그 상처, 그믐달처럼 외롭게 숨죽이며 살아가야했던 시인은 이제 절망의 시대인 겨울에도 봄의 꿈을 꾼다. 강물에 실리는 늦봄 어스름이다.금구천, 감곡천, 두백천이 합류하는 김제 원평천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고 시를 쓰는 김유석 시인은 지금도 징게맹게 너른 들에서 허리 굽혀 시를 건져 올린다. '머뭄과 떠남을 물에 일러/저편에 이른들 수심(水深)을 아는가'라는 반문이 늘 그와 함께 한다.동진강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동진강이 가까워오면 임의 목소리가 들리고/(중략)/손을 흔들자 임은 보이지 않고/동진강 강물만/그의 사랑을 안고'흘러간다는 정군수 시인의 시 「변산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를」에서 찾을 수 있다. 범영 김민성 시인이다.'동진강 강물은/바다로 흘러가지만/바닷물이 아니었다//응어리진 가슴을/강물에 씻지도 못하고/바닷물에 씻지도 못하고/늘상 누르뎅뎅하게 흘러보내야 했던/그 많은 세월들/이젠 되짚어 생각하기도 싫었다//발길 끊겨진 강뚝길/바람은 혼자 강에서 일어나/온종일/흔들리다가 속삭이다가/갈 길을 잊어버렸고/갈 길을 잊어버렸고/흐를 줄을 모르는 강물은/또 다른 사연의 아픔만 몰고 왔었다'(김민성의 시 「동진강 강물」 전문)웅성 깊은 고향사랑과 정중한 인간애가 행간마다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시편들은 고향 땅의 역사와 문화를 지극한 애정으로 보듬어 안은 절절한 감성으로 더욱 빛나고 풍성했으며, 그로 인해 동진강은 더 미더워졌다. '고향 부안을 관통해 흐르는 동진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날아가는 한 마리 새'(「동진강 아으리랑」中)가 되기를 소망했던 시인. 그가 떠난 자리는 허허롭지만, 시인은 시로 남아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비가 쏟아져도 속이 꽉 찬 고목으로 동진강의 황혼을 안고 여울져 흐른다.울창한 고목이 돼 있을 그가 강처럼 섬겼던 신석정 시인은 '서러운 옛 이야기 지줄대며/동진강 굽이 굽이 흐르는 들'과 '우리 할아버지들의/피맺힌 옛 이야기를 잊지'말라며 '서럽고 안쓰러운 이야기는/동진강 푸른 물줄기'(「곡창의 새해」中)에 실어 아득한 신화로 떠나보내라고 서둘러 말했다. 그러나 석정과 범영이 그토록 기다렸을 것은 메마른 산하를 울릴 드높은 격양가. 선배 시인의 외침은 젊은 시인들의 가슴에 이르러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귀를 기울이라'(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中)는 다짐으로 동진강의 시사(詩史)를 더욱 탄탄하게 받치고 있다. 이제 동진강은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다./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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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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