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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225) 12장 무신(武神) 1

쳐라! 아리아케가 장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지금 아리아케는 윤진의 기마군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거리는 이제 300여보로 가까워졌다. 계백군(軍)의 기마군은 1백여기, 아리아케는 600기다. 와앗! 기세가 오른 군사들이 함성을 뱉었다. 땅을 울리는 말굽소리, 장수들의 외침과 함성, 흥분한 말떼는 콧바람을 불면서 네굽을 모아 달린다. 아리아케의 기마군과 250보 거리로 가까워진 순간이다. 지금이다! 윤진이 칼을 치켜들고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한덩어리로 뭉쳐 달려오던 기마군이 두덩이로 와락 쪼개졌다. 절반씩 좌우로 나눠지더니 아리아케의 기마군 좌우 끝을 향해 비스듬히 달려가는 것이다. 정연한 행동이어서 단 1기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통나무가 두 토막으로 탁, 쪼개지면서 좌우로 나눠진 것 같다. 앗! 앞장서 달려오던 아리아케가 저도 모르게 외침을 뱉었다. 손에는 4척이나 되는 장검을 쥐었는데 무겁다. 그러나 한칼에 말 목을 베어 뗄 수가 있다. 눈앞의 기마군이 탁 쪼개지면서 중심에는 가득 먼지만 일어나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거리는 2백보, 자, 양쪽으로 나뉜 적군을 따라 이쪽도 나뉠 것인가? 아니면 어떤 한쪽만 쫓은 것인가? 그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에 말은 20여보를 내달렸다. 그 순간이다. 와앗! 앞쪽에서 함성이 울리더니 먼지 사이로 1진의 기마군이 나타났다. 이 기마군은 이쪽으로 직진해오고 있다. 다시 아리아케가 숨을 들이켰다. 앞쪽 백제 기마군이 쪼개진지 숨을 두번밖에 내쉬지 않았다. 먼지를 헤치고 직진한 계백이 잔뜩 시위를 당긴 화살끝을 아리아케를 향해 겨누었다. 달리는 말 위여서 뛰어 오를 때를 기다려 살을 놓아야 한다. 백제, 고구려 기마군의 마상 사격은 뛰어났다. 기마술이 뛰어나야 해서 기마술부터 익히고 마상 사격을 배운다. 계백은 말이 뛰어오른 그 짧은 순간을 기다렸다가 살을 놓았다. 쌕! 소음속에서 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따르는 기마군은 계백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거리는 이제 120보, 가깝다. 그 순간이다.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다. 와앗! 화살이 아리아케의 두눈 사이에 박힌 것이다. 갑옷으로 무장한 아리아케는 얼굴만 내놓은 상태여서 다 보인다. 화살에 맞은 얼굴이 먼저 뒤로 벌떡 젖혀지더니 이어서 상반신이 넘어졌고 곧 말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와앗! 다시 함성이 울렸을 때는 아리아케군과의 거리가 7, 80보로 가까워진 상태다. 사기가 충천한 백제군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앞장선 아리아케가 장검을 내동댕이 치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말은 말굽을 모으면서 10보쯤 뛰었다. 그동안에 아리아케는 화살에 맞은 채로 말 위에 실려 있었다. 그것을 뒤에 따르던 위사대가 다 보았다. 주군! 주군을 구해라! 이쪽 저쪽에서 외침이 울렸고 말 고삐를 채어 멈추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 서슬에 600기마군이 엉켰다. 말들이 부딪히고 넘어졌다. 마치 떼지어 달리던 마차들이 부딪혀 넘어지는 것 같다. 그때 백제군이 덮쳤다. 우왓! 함성, 이제 아리아케군은 주군 아리아케가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안다. 제대로 칼을 쥐고 덤비는 군사가 드물다. 우왓! 다시 함성이 오르면서 좌우에서 윤진의 기마군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뒤쪽 퇴로는 놔두었다. 도망갈 길을 터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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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0 19:49

[불멸의 백제] (224) 11장 영주계백 20

그 시간에 계백은 말을 달려 쿠로기(黑木) 성 앞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뒤를 따르는 기마군은 2백, 가을 햇살이 머리 위에서 비치는 맑은 날씨다. 2백 기마군의 말굽소리가 황야를 울렸지만 가끔 말울음소리와 말장식 부딪치는 소음만 울릴 뿐 기마군은 말이 없다. 이윽고 앞장선 선봉이 속도를 늦췄고 뒤를 따르던 본대도 속보가 되었다. 쿠로기 성은 타카모리 영지의 중심에 위치한 거성(巨城)으로 성주는 타카모리의 사촌 아리아케(有明), 37세의 용장으로 성 안에는 기마군 8백에 보군 1천이 주둔하고 있다. 아래쪽 가모성을 화청에게 맡기고 병력을 반으로 나눠 곧장 쿠로기 성으로 온 것이다. 이곳이 타카모리의 영지 중 중심이며 아리아케가 가장 반항적인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성에 깃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옆으로 말배를 붙여온 윤진이 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예상대로 싸우려는 것 같습니다. 아리아케의 기마군은 천하무적이라고 했어. 계백이 3리(1.5km) 거리로 다가온 성을 향해 나아가며 말했다. 수적으로 서너배 우위에 있으니 나와 싸우려고 할 것이다. 참기 힘들겠지요. 윤진이 말고삐를 감아쥐면서 말을 이었다. 아리아케는 호승심이 강하다는 소문입니다. 제 사촌 일족이 몰사해서 분기가 충천해 있을까? 아리아케가 영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윤진이 말을 받았을 때 성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주군, 선두에 서지는 마십시오. 중신(重臣) 노무라가 말하자 아리아케가 입을 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마당에 앉은 아리아케는 왜인치고 거인이다. 6척의 키에 앉은 키가 커서 군사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크다. 은으로 만든 비늘갑옷을 입고 머리의 은투구에는 황소뿔을 좌우에 붙였다. 말에도 은갑옷을 입혔기 때문에 거대한 은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다. 계백이 와 있는데 내가 숨겠느냐? 아리아케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출진 북소리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마당에 모인 기마군은 6백, 넓은 마당이 기마군으로 가득찼다. 말고삐를 챈 아리아케가 군사들을 향해 섰다. 아리아케는 수염이 무성했고 얼굴이 붉다. 타카모리 제1의 용장이지만 단순해서 1만8천석의 영지 관리는 중신 노무라가 집사 역할로 관리하고 있다. 들어라! 아리아케가 버럭 소리쳤다. 우리는 타카모리님의 원수를 갚는다! 알겠느냐! 옛! 6백 기마군이 일제히 대답하자 흥분한 전마(戰馬)들이 발굽으로 땅을 찼다. 자, 나를 따르라! 장검을 빼든 아리아케가 다시 소리치면서 앞장을 섰다. 우왓! 다시 함성이 울렸다. 옳지 나온다! 속보로 다가가던 윤진이 성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마군을 보고 소리쳤다. 윤진은 1백기를 이끌고 본대의 앞에서 다가가던 중이다. 그때 앞에서 선봉장의 외침이 울렸다. 성주가 나옵니다! 윤진이 숨을 들이켰다. 성문과의 거리는 1리(500m), 윤진의 눈에도 성주의 문장이 박힌 깃발이 보였고 그 옆을 달려오는 은빛갑옷의 무장이 보인 것이다. 저런! 윤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장관이구나. 햇살을 받은 성주의 은빛투구와 갑옷이 번쩍인다. 더구나 말까지 은갑옷을 걸쳤기 때문에 위풍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때 윤진이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쥐었다. 자! 따르라! 짧게 외친 윤진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힐끗 뒤를 보았다. 계백이 이끈 본진 1백기는 1리쯤 뒤에서 따르고 있다. 하지만 다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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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9 20:34

[불멸의 백제] (223) 11장 영주 계백 19

산요님이 오셨소. 오꾸보가 말하자 후다나리는 몸을 일으켰다. 한낮, 오시(12시)가 조금 지났다. 가모성의 청안, 가모성주 후다나리는 타카모리의 오랜 가신(家臣)으로 녹봉 5천석, 산요의 사위가 된다. 그때 청으로 산요가 들어섰다. 피곤한 표정이다. 후다나리가 다가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산요님, 백제방 군사를 이끌고 오셨군요. 백제방 군사가 아니라 계백령지의 군사네. 산요가 수정했지만 후다나리는 시선을 떼지 않고 되묻는다. 같은 군사 아닙니까? 백제방 영지가 계백령 아닙니까? 아니야. 계백령은 아리타, 마사시, 이또 영지를 합한 것으로 왜국 관할일세. 이제 이곳 타카모리 영지도 포함이 되겠군요. 그때 산요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청안에 후다나리의 가신 10여명이 모여 있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성으로 백제방 기마군 2백여 명이 다가왔기 때문에 후다나리는 성문을 닫고 전투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이쓰와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모성은 요충지다. 그리고 성에 기마군 3백, 보군 3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군에 끼어온 산요가 후다나리를 만나겠다면서 먼저 성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산요가 정색하고 후다나리를 보았다. 이보게, 후다나리. 지금 어쩔 작정인가? 그냥 성은 못 넘깁니다. 33세의 후다나리가 바로 대답했다.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고 죽겠습니다. 옳지. 산요가 머리를 끄덕였기 때문에 청안의 시선이 모여졌다. 후다나리도 산요의 반응이 예상 밖인지 눈만 껌벅였다. 그때 산요가 말했다. 잘했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게. 이기리라는 생각은 안했을 테니까. . 이 성에 군사 7백여 명, 주민 8천 정도가 있는 줄 알고 있네. 다 몰사하겠지. . 내가 죽기 전에 타카모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라는 묘비는 세워주지. . 나는 자네가 투항하리라는 기대를 안했어. 내 사위 성품쯤은 아니까. 난세에 5천석 영지를 탐내어 정세 판단도 못하고 군사를 출동시킨 병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대병신이라는 건 알지. . 그리고는 산요가 쓴웃음을 짓고 후다나리를 보았다. 밖에는 계백공의 신복무장 화청이 와 있어. 기마군 2백이지만 이 성안의 군사로는 당해내기 힘들 걸세. 대륙에서 당왕을 패퇴시키고 돌아온 백제군이니까. . 나도 여기서 자네하고 같이 죽겠네. 화청이 날 들여보내면서 그러더군. 한식경 안에 안나오면 같이 죽는 것으로 알겠다고. 쓴웃음을 지은 산요가 안쪽을 기웃거렸다. 내실이 저쪽인가? 가서 내 외손자들을 보고 있을 테니 자네는 나가서 싸우게. 한식경쯤이 지났을 때 성 밖에 군사를 주둔시킨 화청에게 후다나리의 전령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장군께 말씀드리오. 말해봐라. 나무의자에 앉은 화청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령을 보았다. 둘러선 무장들은 모두 백제식 가죽갑옷에 어깨에 깃털을 꽂은 무장도 있다. 당군(唐軍) 기마군의 장식인데 그것을 빼앗아 전리품처럼 꽂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전령이 말했다. 성주 후다나리가 장병과 함께 계백령에 투항한다고 합니다. 성문을 열어드릴 것이니 진입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럼 후다나리가 나와야지. 화청이 흰 수염을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갑옷을 벗고 칼을 풀고 걸어서 나와 맞는 법이다. 가서 그렇게 전해라. 그리고는 화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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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8 19:35

[불멸의 백제] (222) 11장 영주계백 18

거성(居城)의 청에는 화청과 윤진이 와 있었는데 각각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 계백의 거성에도 5백 가까운 병력이 있었으니 1천5백의 군사력이다. 그 중 기마군이 5백5십, 2백5십을 기반으로 3백을 늘렸다. 급조한 군사들이어서 허점이 많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윤진이 계백을 보았다. 백제 기마군단 1개만 데려와도 거침없이 진군할 텐데요. 백제 기마군단은 2천5백으로 형성되었다. 대륙의 백제 담로에서는 1개 기마군단이 그 배인 5천이다. 대륙은 지형이 평탄한 데다 장거리 이동이 많아서 1개 군단이 움직이면 말떼가 2, 3만 필이 따른다. 예비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청과 윤진은 대륙에서도 기마군을 지휘했고 특히 화청은 멸망한 수(隋)나라에서부터 기마군이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나솔이 돌아오는 대로 이쓰와 성으로 진입한다. 이번에는 한낮에 국도를 따라서 가는 거야. 둘러앉은 셋의 앞에 지도가 펼쳐져 있다. 셋이 함께 가는 것이다. 화청이 손끝으로 국도를 짚고 이쓰와 성까지는 350리(175km), 도중에 타카모리 영지의 성 3개를 지나야 된다. 3개가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성 한곳에서라도 군사가 나오면 격전을 치러야 될 것입니다. 성 하나에 최소 5백 이상의 병력이 있을 테니까요. 계백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번에도 계백의 군사는 기마군 5백이다. 말은 3천필, 보군은 영지에 남겨놓고 전군(全軍)이 기마군이다. 그때 윤진이 말했다. 타카모리가 생포되면서 영지의 가신, 군사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일부가 결속해서 복수를 하려는 놈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화청이 대답했다. 백용문이 하세가와의 어떤 대답을 듣고 오던 간에 25만석이나 되는 영지야. 지렁이만 있을 리가 없어. 오후 신시(4시) 무렵이다. 바깥 마당에서는 말 울음소리, 발굽소리로 소란했다. 출동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동시간은 밤 술시(8시), 밤길을 달려 내일 이른 아침인 묘시(6시)경에 타카모리의 거성인 이쓰와 성에 진입하려는 계획이다. 그때 청 밖에서 하도리가 소리쳤다. 주군! 산요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들었고 화청과 윤진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루카 섭정에게 말 50필을 진상하러 왔던 타카모리의 중신 산요다. 말을 바치고 나서 돌아가려다가 이쓰와 성의 변을 듣고 아스카에 머물고 있던 산요를 하도리가 데려온 것이다. 곧 하도리와 함께 산요가 들어섰는데 비장한 표정이다. 왕성이 있는 아스카에서 이곳까지 2백리(100km) 가깝게 되었으니 강행군을 했을 것이다. 마치 포로로 잡힌 것 같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산요, 그대가 왕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았다. 그대 주군도 이곳에 있다. 계백 앞에 엎드린 산요가 머리를 들었다. 50대 초반의 산요는 지쳤기 때문인지 10년은 더 나이들어 보였다.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영지에 하세가와 님이 계시니 그분이 정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때 계백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영주에 그 신하들이로구나. 너한테 영주네, 영지의 주민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산요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내가 나카모리의 일족을 몰사시켰다는 말을 들었겠다? 타카모리는 그 말을 듣고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영지 양도증에다 가신, 주민들한테 나한테 복속하라는 서신을 써 주더구나.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타카모리 영지에 진입하면 네 일족도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것이 군주, 신하들이 받아야 할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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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5 19:53

[불멸의 백제] (221) 11장 영주계백 17

편지를 읽은 하세가와가 조심스럽게 접더니 앞에 놓았다. 이곳은 하세가와의 저택 안, 안쪽에 앉은 하세가와의 얼굴은 병색이 짙다. 그러나 눈은 번들거리고 있다. 하세가와가 앞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계백의 심복 나솔 백용문, 계백이 한상성주 겸 수군항장이었을 때부터 동고동락을 해온 장수 중의 하나다. 그 백용문이 밀사의 임무를 띠고 타카모리의 중신(重臣) 하세가와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 하세가와가 읽은 편지는 타카모리가 쓴 글이다. 타카모리의 영지를 모두 계백에게 바칠 것이니 모두 계백에게 충성해주기를 바란다고 써진 편지다. 하세가와가 입술 끝을 비틀면서 입을 열었다. 이 편지를 갖고 오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하세가와의 눈동자는 흐려져서 앞에 앉은 백용문의 뒤쪽을 보는 것 같다. 청은 10평쯤 되었는데 타카모리의 가신 10여명이 둘러앉아 있다. 모두 침통한 표정이다. 편지를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짐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하세가와가 입을 꾹 다물었기 때문에 청 안에 어색한 정적이 덮여졌다. 그때 백용문이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백용문은 가죽 갑옷차림이다. 부하 5명을 데리고 이곳까지 말을 달려온 것이다. 노인, 타카모리님에 대해서 더 물어보실 말이 없으시오? 없습니다. 하세가와가 여전히 흐린 눈으로 백용문을 보았다. 장군께선 계백영주의 중신이며 거성(居城)의 수비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나한테 오신 목적이 이 편지를 전하시는 것 뿐이시오? 이번에는 하세가와가 묻자 백용문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께 그대로 말씀드릴까요? 그럼 말씀하시지요. 내 주군이며 상관이시기도 한 계백장군께서 날 보내시면서 딱 한 말씀만 하십디다. 모두 숨을 죽였고 백용문의 말이 이어졌다. 하세가와한테 이 편지를 주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고와라. 이렇게 말씀하십디다. . 묻는 말씀이 없다고 하시니 할 말이 없소. 그리고는 백용문이 입을 딱 다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당황한 하세가와가 따라 일어서려다가 비틀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은 하세가와가 두 손을 내민 채 백용문에게 말했다. 장군, 잠깐 앉으시지요. 타카모리님에 대해서보다 다른 것을 여쭤보겠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백용문에게 하세가와가 가쁜 숨을 고르고 나서 묻는다. 장군, 타카모리 가문은 멸문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백 명 가신, 수천 명 군사는 어떻게 됩니까? 내 주군께서는 어떤 말씀도 없으셨으니 내가 내 생각을 말씀드리리다. 백용문의 목소리가 작은 청을 울렸다. 아마 네 생각대로 행동하고 오너라 하고 내 주군께서 말씀하신 것 같소. 듣겠습니다. 그 주군에 그 신하라고 당신들도 다 같소. 어깨를 편 백용문이 하세가와를 노려보았다. 타카모리는 목숨만 살려주면 다 드리겠다고 했소. 그자에게는 신하고 주민이고 안중에 없었소. 제 처자식이 몰사했다는데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소. . 그리고 저 편지를 써 준 것이오. . 그러니 당신들도 마찬가지겠지. 누가 그런 자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단 말인가? . 내 생각을 말하리다. 백용문이 호통치듯 말했다. 가신들이 결속해서 내 주군께 복속한다는 서약을 하시오. 그래야 영지가 안정이 되고 주민들이 편하게 살 것 아니오? 그것이 우선이요. 그리고는 백용문이 길게 숨을 뱉었다. 영주다운 영주를 만나면 영지 주민들이 첫째로 혜택을 받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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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4 19:39

[불멸의 백제] (220) 11장 영주계백 16

무슨 일인가? 청에 와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지만 백제방의 전령은 왜국의 관리와는 다르다. 전령은 8품 시덕 관등의 백제관리로 백제방 방주이며 백제왕자(王子), 왜국의 제1품 벼슬인 대덕(大德) 부여풍이 보낸 자인 것이다. 소가 이루카가 왜국의 섭정이라고는 하나 백제방은 왜국 왕가(王家)의 자문역이며 방주는 왜왕의 자문관이니 이루카보다는 격이 높다. 실권은 없지만 위상으로써는 소가 가문이 감히 눈을 맞출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때 전령인 시덕 연권이 어깨를 펴고 이루카와 에미시를 번갈아 보았다. 40대의 연권은 두 부자(父子)와 안면이 많다. 대감, 왕자 전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둘의 시선을 받은 연권이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이번에 마리타, 마사시, 이또의 영지를 다스리게 된 백제방의 은솔 계백이 타카모리의 기습을 받아 어쩔수 없이 타카모리의 거성을 기습, 일족을 멸문시키고 타카모리를 생포했습니다. 에미시도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로 연권을 노려보았고 이루카는 허리를 흔들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그때 연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사시가 전에 합의한 5천석 영지를 내놓으라면서 군사를 투입시킨 것입니다. 지금 마사시 영지에 기마군 2천 5백, 보군 3천이 투입되어 있습니다. 계백은 타카모리를 생포하고 철수했지만 이대로 후환을 놔두면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깨를 편 연권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타카모리의 영지를 몰수하며 소가 가문과 계백이 나누어 통치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십니다. 타카모리는 영지를 내놓겠다는 합의서를 써낼 생각이며 가신들도 죽거나 등을 돌린 상황입니다. 이대로 두면 무주공산이 되어 도둑떼가 창궐하게 될 것이니 시급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에미시가 물었다. 지금 타카모리 영지에는 누가 있나? 하세가와가 있습니다. 으음. 신음을 뱉은 에미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영감이 죽기 전에 안좋은 꼴을 보는군. 왕자 전하께서는 타카모리 영지는 이미 없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지와 여기 있는 섭정의 영지가 타카모리 영지와 붙어 있어. 에미시가 이루카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코이 산 서쪽 땅을 소가 가문이 가져가도록 하지. 그럼 이번 혼란을 수습하도록 해주겠네. 전하께서는 아와강 서쪽 땅을 소가 가문이 가져가는 것이 공평하다고 하십니다. 연권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은 소가 가문에 대한 왕자 전하의 예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몇만석짜리 땅으로 성의를 훼손시키면 되겠습니까? 이봐, 성의라니? 누구한테 선심쓰는 것이냐? 화가 난 이루카가 버럭 소리쳤을 때 에미시가 손을 들어 말렸다. 섭정, 시끄럽다. 아버님, 계백이 안하무인입니다. 타카모리가 과욕을 부린 벌을 받은 것이다. 그놈이 성급했고 앞뒤를 구분 못한 때문이야. 자르듯 말한 에미시가 연권을 보았다. 알았네. 왕자 전하의 뜻을 받들겠다고 전해드리게. 연권이 청을 나갔을 때 이루카가 찌푸린 얼굴로 에미시를 보았다. 아버님, 아와강 서쪽 영지를 우리가 떼어 받으면 계백을 타카모리 영지 25만석중 18만석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16만 5천석에서 단숨에 18만석이 불어나 34만 5천석의 대영주가 됩니다. 너는 이미 85만석 아니냐? 에미시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루카 자신은 90만석이다. 거기에다 이번 7만석을 합치면 1백만석 가깝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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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3 19:57

[불멸의 백제] (219) 11장 영주계백 15

하도리가 청으로 들어섰을 때는 오시(12시) 무렵이다. 주군, 타카모리가 양도서를 쓰겠다고 합니다. 하도리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이곳은 계백성의 청 안이다. 진시 무렵에 성에 도착한 계백이 잠깐 눈을 붙이고는 나온 참이다. 계백이 시선만 주었을 때 하도리가 말을 이었다. 타카모리 영지 25만석을 계백령의 계백공에게 양도하겠다는 양도서입니다. 청 안에 둘러앉은 가신(家臣), 장수들이 수군거렸는데 몇 명은 소리죽여 웃음소리를 내었다. 계백은 여전히 보료에 몸을 기댄채 듣기만 했고 하도리가 말을 계속한다. 그리고 영지의 가신, 장수, 군민들에게 앞으로 새 영주를 맞아 충을 다하라는 글도 쓰겠다는 것입니다. 머리 상처는 어떠냐? 불쑥 계백이 물었더니 하도리가 어깨를 치켜올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여전히 엄숙한 표정이다. 예, 칼등에 맞은 머리 꼭지가 터졌기는 하지만 뇌가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제정신이란 말이렸다? 예, 머리가 아프다고 술을 달라고 해서 한병을 주었습니다. 영지를 내놓고 죽겠다더냐? 아니올시다. 주군. 턱도 없는 말이라는 듯이 하도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살려주는 조건으로 합의서를 쓰겠다는 것입니다. 살겠다고? 예,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저한테도 사정을 합니다. 제 일족이 아이까지 몰사된 것을 알고 있느냐? 예,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직 제 목숨은 살려달라고 했단 말이지? 예, 주군. 옳지. 계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를 가져갈만 하다. 하세가와한테 그 합의서와 가신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내주도록 해라. 무엇이? 버럭 소리친 이루카가 옆에 앉은 에미시를 보았다. 오시(12시)가 조금 지난 시간, 둘의 앞에는 타카모리 영지에서 달려온 전령이 엎드려 있다. 하세가와가 보낸 전령이다. 전령은 어젯밤의 내막을 보고했는데 과장이 심했다. 계백군(軍)을 수천명으로 보고했고 타카모리측 피해자도 수천으로 부풀렸다. 이루카의 저택 안이다. 오늘도 부친 에미시가 와있었기 때문에 진구 섭정이 내막을 함께 들은 셈이다. 타카모리를 생포해갔단 말이냐? 이루카가 비명처럼 묻자 전령이 한숨을 쉬었다. 40대쯤의 하세가와 가문의 가신이다. 예, 대감. 일족은 다 죽이고? 예, 유아까지 다 죽였습니다. 허, 타카모리 가문이 끊겼구나. 이루카가 말했을 때 에미시가 물었다. 그리고 기습군이 돌아갔단 말이냐? 예, 대감. 하세가와는 그 사실만 보고하라고 하더냐? 예, 대감. 질문을 그친 에미시가 머리를 둘려 이루카를 보았다. 하세가와가 타카모리한테 만정이 떨어진 것 같다. 그나저나 계백이 안하무인입니다. 이루카가 눈을 부릅떴다. 이러다가 우리 가문에다 칼을 휘두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 마당이 떠들썩하더니 집사가 소리쳤다. 백제방 왕자 전하의 전령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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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2 19:31

[불멸의 백제] (218) 11장 영주계백 14

놈들이 겁이 난거다. 슈토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오전 진시(8시) 무렵, 마사시성(城)이 보이는 들판에서 슈토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타카모리의 기마군 2천5백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춘 채 휴식 중이다.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말은 옆에 세워놓았다. 슈토가 말을 이었다. 저놈들은 기껏해야 2, 3백이야. 성문을 열고 나온다고 해도 한식경이면 몰살을 당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마사시성 안의 성주 윤진과 군사들은 깃발도 세우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햇살이 환한 아침이다. 밤을 세워 이곳까지 달려 온 기마군은 이제 아침을 먹고 있다. 타카모리군(軍)에게 마시시성 안의 장졸들은 압도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부장(副將) 나까오까가 말했다. 슈토님, 보군은 오늘밤에나 도착할 것 같으니 군사들이 아침을 먹고 나면 영지로 내려가 정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래야지. 본래 그럴 작정이었기 때문에 슈토가 선선히 대답했다. 새 영지의 회수작업이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그 영지에서 녹을 받아먹던 무사, 관리들은 땅을 내놓고 돌아가야 한다. 점령지 처리나 같다. 어깨를 편 슈토가 말을 이었다. 엄연히 합의된 땅을 돌려 받는 거야. 계백이 어떤 놈이건 만용을 부리지는 못 할 것이다. 그때 말굽소리가 울리면서 기마군사들이 달려왔다. 앞장 선 기마군을 보자 슈토가 몸을 세웠다. 주군 타카모리의 위사조장 나베였기 때문이다. 다가온 나베가 굴러 떨어지듯이 말에서 내렸을 때 슈토가 소리쳐 물었다. 나베, 무슨 일인가? 나베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의 시선이 모였고 나베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소리쳐 말했다. 슈토님, 주군이 기습을 받아 계백에게 생포되었고 내성의 일족은 모두 몰살했습니다! 무엇이! 그게 무슨 말이냐! 어젯밤에 내성이 기습을 받았소! 나베의 목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내성에 있던 중신, 주군의 일족은 모두 죽어서 산 사람이 없습니다. 주, 주군은? 계백이 생포해 갔습니다! 어, 어디로? 모릅니다! 숨을 고른 나베가 다시 소리쳤다. 하세가와 님의 전갈이오! 군(軍)을 철수시켜 거성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소! 하, 하세가와님이 예, 거성에 계시오. 그때서야 슈토가 아연한 얼굴로 옆에 선 부장 나까오까를 보았다. 초점을 잃은 눈이었고 나까오까는 그 시선도 받지 않고 외면했다. 그때 나베가 잊었다는 듯이 서둘러 말했다. 오는 도중에 보군대장 요시무라 님을 만났소! 요시무라 님은 즉시 군사를 돌려 거성으로 회군하고 있습니다! 슈토가 다시 머리를 돌려 마사시성(城)을 보았다. 성은 여전히 깃발 하나 세우지 않은 채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때 부장 하나가 말했다. 슈토님, 주군이 생포되고 일족이 멸족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들판 위로 울렸다. 보군까지 돌아갔다는데 돌아가십시다! 슈토는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야말로 청천벽력이란 말이 어울린다. 발을 잘 못 딛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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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1 17:20

[불멸의 백제] (217) 11장 영주계백 13

결사대를 따라 청으로 진입한 계백은 청 안쪽에 서있는 타카모리를 보았다. 옆에 그림 같은 미인이 타카모리에게 딱 붙어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여자에게 의지하고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눈이 초점이 또렷한 대신 타카모리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치켜뜬 눈, 벌린 입, 엉거주춤한 자세가 그렇다. 이것은 계백이 눈 깜박하는 순간에 본 장면이다. 생명체는 이 짧은 순간에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다음 순간 계백이 소리쳤다. 다 죽여라! 영주이며 대백제 은솔, 대장군, 대륙을 누비며 당왕 이세민의 눈알을 뺀 용장 계백이 손수 칼을 쥐고 외친 것이다. 벽력 같은 외침, 이 외침을 들은 수하 결사대는 누구인가? 계백을 따라 수십번 전장을 누빈 역전의 용사들이다. 와앗! 처음으로 결사대의 외침이 터졌다. 전투는 기세로 승부가 난다. 접전, 난전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기가 오른 용사의 기세는 일당백이 된다. 내려치는 칼날은 제아무리 검법의 달인이라고 해도 막아내지 못한다. 으악! 앞을 가로막던 가신 하나의 비명을 시작으로 청에 살육이 일어났다. 치고 받는 싸움이 아니라 도살장이 된 것이다. 막는 시늉을 했지만 시늉이고 대부분 단칼에 베어진다. 계백은 결사대 사이를 빠져나가 타카모리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타카모리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다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는 중이다. 타카모리의 팔을 잡아 부축한 여자가 없었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타카모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상황에 빠진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의 전투에 선 적도 없다. 앞을 가로막은 위사 하나의 어깨에서 허리까지를 베어 넘어뜨린 계백이 타카모리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옆에서 위사 하나의 칼날이 날아왔지만 어깨를 비틀어 피하면서 칼로 목을 쳤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계백의 몸에 뿌려졌다. 그때 타카모리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여자와 함께다. 타카모리! 계백이 벽력처럼 소리쳤다. 나는 영주 계백이다! 천둥 같은 소리가 청에 울렸을 때 살아있던 두어 명의 가신, 위사가 주춤했다. 놀란 것이다. 그때 타카모리도 숨을 들이켰지만 머리를 돌리지는 않았다. 여자만 이쪽을 보았을 뿐이다. 그때 계백이 한걸음 뒤까지 다가가며 다시 소리쳤다. 너, 타카모리 아니냐? 아니오! 타카모리가 엉겁결에 소리친 순간이다. 계백의 칼이 날아가 타카모리의 뒷머리를 쳤다. 아악! 타카모리의 비명이 청을 울렸다. 밤, 자시(12시)가 되었을 때 자리에 누워있던 하세가와가 마당에서 울리는 소음에 몸을 일으켰다. 말굽 소리, 외침, 부르고 꾸짖는 소리가 내실까지 들린 것이다. 누구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소리치자 문 밖에서 집사 요시다가 소리쳤다. 모리 님이 오셨습니다. 모리는 타카모리의 위사부장으로 500석을 받는 가신이다. 하세가와가 문을 열자 앞쪽 마루 밑까지 와있던 모리가 헐떡이며 소리쳤다. 하세가와 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주변에 등불을 든 하인, 경비병이 모여 섰기 때문에 모리의 몰골이 드러났다. 피투성이다. 하세가와의 시선을 받은 모리가 소리소리쳤다. 다 죽었습니다! 하세가와의 눈빛이 강해졌고 모리의 입꼬리가 떨렸다. 계백군이 내궁을 기습해서 청에 있던 가신, 위사들을 몰살시켰습니다. 계백이 선두에 섰습니다! 내궁으로 진입해서 주군의 마님들, 일족까지 모두. 내전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주군과 나미코님을 사로잡고 마장의 말을 타고 모두 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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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8 21:36

[불멸의 백제] (216) 11장 영주 계백 12

주군, 슈토님이 출동했습니다! 마쓰야 골짜기에 다녀온 가신 노무라가 소리쳐 보고하자 타카모리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됐다, 슈토가 영지로 진입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된다. 옆에 앉아있던 측실 나미코가 타카모리의 안주 접시에 생선회를 덜어놓았다. 요즘 들어서 타카모리의 총애를 받고 있는 7번째 소실이다. 나미코의 허리를 당겨 안은 타카모리가 노무라에게 물었다. 기마군이 떠나는 것을 보았느냐? 예, 뒤를 보군이 따르는 것까지 보고 왔습니다. 오늘 밤을 달리면 내일 낮에는 마사시 영지에 도착하겠지. 예, 기마군은 충분히 도착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타카모리가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삼켰다. 나미코가 젓가락으로 생선회를 집어 타카모리의 입에 넣어주었다. 간드러진 몸매와 얼굴에 가득 교태를 띠고 있다. 회를 씹어 삼킨 타카모리가 앞쪽에 앉은 중신(重臣) 헤이치에게 물었다. 헤이치, 계백이 회신을 하지 않은 것은 거부하겠다는 의사 아니냐? 그렇습니다. 헤이치가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마사시성의 성주 윤진에게 영지반환을 통보한 지 사흘이 된 것이다. 회신을 요청한 날보다 하루가 더 지났다. 건방진 놈. 타카모리의 둥근 얼굴이 붉어졌다. 튀어나온 눈이 부릅떠졌고 두꺼운 입술이 굳게 닫혔다. 이번에 버릇을 잡아놓지 않으면 앞으로 힘들어진다. 이곳은 백제가 아냐, 내가 백제방의 신하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타카모리가 왜왕의 심복도 아니다. 9대조 이에하치가 바다를 건너온 후로 영지를 개척하여 백제령 소왕국(小王國)의 국왕 행세를 해온 것이다. 섭정인 소가 가문도 마찬가지다. 소왕국끼리 연대하여 왜국을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백제방이 없었다면 왕실은 진즉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다. 그때 북소리가 울렸다. 성문을 닫는 북소리가 일제히 울리고 있다. 응, 벌써 술시가 되었나? 혼잣소리로 말한 타카모리가 빈 잔을 내밀자 나미코가 술을 따랐다. 내일은 영락정에서 술을 마시기로 하자. 타카모리가 나미코에게 말했다. 마사시 영지를 가져온 기념주를 마셔야겠지. 가신들을 모아 축하연을 할 테니 준비를 시켜라. 예, 대감. 나미코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을 때다. 밖에서 외침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먼저 헤이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너 명이 외치는 소리다. 주군 내실 근처에서 무슨 소동이냐? 헤이치가 청 뒤쪽에 선 위사를 꾸짖었다. 당장 중지시켜라. 그때 마룻바닥을 찍는 소리가 들리더니 위사가 청으로 뛰어들었다. 주군! 위사가 무릎을 꿇지도 않고 소리쳤다. 반란이오! 무엇이! 헤이치와 가신들이 놀라 일어섰다. 그때 칼 부딪치는 소리, 비명, 외침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반란이라고? 청에 모인 가신은 모두 10여명이다. 주군 앞에서는 칼을 풀어놓는 것이 법칙이라 칼은 모두 마룻방 끝의 칼걸이에 놓았다. 그때 청 안으로 사내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사내들은 위사다. 대여섯 명이 칼을 들고 있었지만 쫓겨들어 온 것이 금방 드러났다. 이쪽에 등을 보이면서 뒷걸음질로 들어온 것이다. 이얏! 기합소리가 여러 번 울리더니 사내들이 들어섰는데 난폭한 기세다. 모두 농군, 어부 차림이다. 이놈들! 반란이냐! 헤이치가 소리쳤고 가신 몇 명이 따라서 외쳤다. 타카모리는 일어서 있었지만 입만 달싹일 뿐 소리가 뱉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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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7 20:51

[불멸의 백제] (215) 11장 영주계백 11

이쓰와성 서문(西門) 수문장 고다와가 해산물을 등에 지고 들어오는 어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제는 많이 잡았나? 좀 잡았소. 어민 하나가 소리쳤다. 풍랑이 그친 날이어서 고기떼가 많이 밀려왔소! 눈먼 놈들이로구만. 고다와가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오전 사시(10시)무렵, 바닷가에서 이쓰와성까지는 60리(30km)거리였으니 새벽에 길을 떠났을 것이다. 어민들은 30명쯤 되었는데 제각기 바구니에 든 고깃짐을 졌고 수레도 2대가 된다. 모두 이쓰와 시장에 내달 팔 고기들이다. 시장에서 고기와 양곡, 또는 피복이나 생필품을 바꿔야 되는 것이다. 고다와 옆에 서있던 오장 사쓰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아침에는 나뭇짐을 진 셋쓰 마을의 농민들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시장은 다른 때보다 장사가 잘 될 것 같습니다. 허, 셋쓰 마을에서도 왔어? 셋쓰 마을은 북쪽 산지의 화전민들이다. 고다마가 힐끗 서쪽을 보았다. 슈토님이 마쓰야 골짜기의 군사를 이끌고 마사시 영토로 간다는 소문이 났던데. 서쪽이 마쓰야 골짜기다. 그러자 사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일어나기 전에 양곡을 사들이는 것이 주민들이지요. 비올 때 개구리처럼 전쟁 일어나는 것 첩자들보다 주민들이 먼저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몰려온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주군이 마사시 영지의 새 영주가 된 계백하고 전쟁을 해서 승산이 있을까? 내궁의 위사로 있는 사촌 다다시한테 들었는데 이번에 영지를 내놓지 않으면 곧장 슈토님을 쳐들어가게 한답니다. 계백의 군사는 몇백명 되지 않는다는군요. 하긴 이루카님이 우리 주군을 밀어주고 있으니까, 조금전에 산요님이 끌고 간 말떼는 이루카님께 드리는 예물이야. 그때 활짝 열린 서문으로 다시 한무리의 상인이 들어갔다. 다 들어왔습니다. 하도리가 말하자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계백도 상인 행색이었지만 이제는 수레 바닥에 싣고 왔던 활과 화살통을 옆에 놓았고 손에 장검을 쥐었다. 이곳은 타카모리의 거성인 이쓰와성 안 호국사뒷마당이다. 주위에 20여명의 조장들이 둘러서 있었는데 모두 백제에서부터 계백을 따라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제각기 조별로 은신해 있다가 술시에 성문을 닫는 북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기습한다. 정해진 목표를 기습하되 목표를 이루면 내성으로 집결한다. 알았느냐? 옛! 조장들이 낮게 대답하더니 계백의 눈짓을 받고 일제히 흩어졌다. 모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쓰와성 안으로 잠입한 것이다. 계백은 처음부터 정공법을 생각하지 않았다. 신라의 가야성을 함락시킬 때처럼 잠입하여 수괴의 목을 베는 전법을 택한 것이다. 계백은 하도리와 함께 20명을 이끌고 직접 타카모리의 내궁을 칠 것이었다. 계백과 함께 잠입한 백제군은 250, 마사시 영지를 맡고 있는 윤진은 마사시 성에서 타카모리의 사신을 맞아야 했고 화청은 이또의 거성이었던 야마토성을 지키고 있다. 그때 상인 복장의 사내 하나가 서둘러 계백에게 다가왔다. 주군, 마사시성에 갔던 타카모리의 사신이 돌아왔고 타카모리가 슈토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내궁 밖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부하다.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슈토가 마쓰야 골짜기의 대군을 이끌고 마사시로 떠났을 때 계백의 기습군은 타카모리를 치는 것이다. 됐다. 준비해라. 호국사는 쇼토국 태자가 건립한 절중의 하나로 뒷마당에는 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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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6 20:32

[불멸의 백제] (214) 11장 영주계백 10

지금쯤 계백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을 거다. 타카모리가 둘러앉은 중신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타카모리의 거성(居城) 이쯔와(五和)성, 왕성(王城)인 아쓰카 성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고 소문이 난 성이다. 청도 넓어서 사방 200자(60m)의 면적에 붉은색 기둥이 6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타카모리는 35세, 백제계로 체격이 커서 5자반(170cm)의 키에 배가 나왔다. 둥근 얼굴, 눈이 튀어나왔고 두툼한 입술에는 기름기가 배어 있다. 타카모리의 시선이 중신(重臣) 산요에게로 옮겨졌다. 회신은 언제까지 보내라고 했지? 예, 내일까지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타카모리가 이제는 중신 슈토에게 물었다. 병력은 대기 시켰겠다? 예, 주군. 어깨를 편 슈토가 말을 이었다. 기마군 2500, 보군 3천이 마쓰야 골짜기에서 대기 중입니다. 좋다. 타카모리가 어깨를 폈다. 이루카님께는 산요, 네가 가라. 예, 주군. 53세의 산요가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말했다. 주군, 섭정께 예물로 말 1백마리 정도는 가져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50마리를 보냈으니 50마리만 가져가도록. 예, 주군. 타카모리가 다시 슈토를 보았다. 슈토는 38세, 역전의 용장이다. 계백은 아직 3개 영지의 군사를 모으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리타성의 주력군은 백제에서 데려온 기마군 200정도에 투항한 군사 300가량이다. 타카모리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내일 계백이 영지를 넘겨주지 않으면 바로 마사시 영지로 진입해서 약속받은 영지를 접수한다. 알았나? 예, 주군. 슈토가 기운차게 대답했을 때 집사 겸 늙은 중신 하세가와가 입을 열었다. 주군, 좀 기다리시지요. 뭐라고? 눈을 가늘게 뜬 타카모리가 하세가와를 노려보았다. 영감, 뭐라고 한거냐? 기다리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네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까? 예, 그러시면 더욱 좋지요. 넌 노망도 들지 않나? 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입 닥치고 가만 있어. 왜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영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게 아니라 10년이건 20년이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동안에 너는 물론이고 나까지 죽겠다. 이번에 영지 반환 사신을 보낸 것도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병으로 집에 누워있지 않았다면 말렸을 것입니다. 여봐라, 위사! 타카모리가 소리치자 놀란 위사들이 달려왔다. 타카모리가 손으로 하세가와를 가리켰다. 이 영감을 집으로 데려가서 눕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라! 옛! 위사들이 하세가와의 양쪽 팔을 움켜쥐었다. 비켜라! 하세가와가 위사들의 팔을 뿌리치더니 타카모리를 향해 절을 했다. 타카모리 이에하치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영감이 진짜 노망이 들었구나. 활짝 웃은 타카모리가 손뼉을 쳤다. 타카모리 이에하치는 백제에서 건너온 타카모리의 9대 선조였기 때문이다. 몸을 돌려 청을 나가는 하세가와를 향해 타카모리가 소리쳤다. 나를 이에하치라고 불렀어. 내 선조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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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5 16:11

[불멸의 백제] (213) 11장 영주 계백 9

타카모리는 소가 가문하고 가깝다. 소가 이루카 섭정이 타카모리의 여동생을 소실로 삼았지. 왕자 풍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마사시와 영토 분쟁이 일어났을 때 타카모리의 편을 들어준 것 같다. 그것이 마사시가 신라소 측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계백이 잠자코 풍을 보았다. 오후 유시(6시) 무렵, 계백은 말을 달려 아스카의 백제방에 와 있는 것이다. 풍이 계백에게 물었다. 타카모리는 아스카 주변에서 영향력을 가진 영주 중의 하나다. 땅이 기름지고 주민이 많아서 군사를 1만 가깝게 보유하고 있는데다 충성스런 무장(武將)이 많다. 더구나 이루카 섭정이 친척이니 마사시가 약속한 대로 5천 석을 떼어주는 것이 어떠냐? 그렇게 물은 것은 네 생각대로 하라는 간접적인 표현이다. 그때 계백이 고개를 들었다. 마사시는 반역을 일으키다가 죽었습니다. 그런 마사시의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타카모리는 성격이 급하다. 마사시가 약속한 제 영지를 찾겠다면서 군사를 보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여왕께서 저지할 명분이 모자란다. 타카모리를 베어죽이면 그 영지는 어떻게 됩니까? 불쑥 계백이 묻자 풍이 빙그레 웃었다. 청에는 풍과 계백, 풍의 중신 백종까지 셋 뿐이다. 풍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은솔, 그 말을 하려고 직접 왔구나. 예, 전하. 타카모리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성품이 거칠어서 신하건 주민이건 거침없이 베어 죽인다고 합니다. 단세에는 그것이 명군(名君)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전쟁이 오래 끌면 너한테 불리해질 것이다. 알고있습니다, 전하. 그 후의 대책을 듣자. 예, 타카모리 영지 뒤쪽으로 소가 섭정의 부친 소가 에미시 전(前) 섭정의 영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36만석이다. 타카모리를 없앤 후에 소가 에미시님께 뒤쪽의 영지 10만석 정도를 떼어주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15만석은 계백령에 포함시키고 말이냐? 백제방 영지입니다. 전하. 7만석 정도만 떼어줘도 에미시 영감은 좋아할 것이다. 예, 그렇게 하지요. 다시 말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이루카 섭정이 군사를 일으켜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 정색한 풍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루카가 거병할 명분을 주는 것이지. 그러면 백제방과 왕실까지 위험해진다. 명심하겠습니다. 타카모리의 무장 중에 용장이 많다. 예, 전하. 고개를 숙인 계백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미 타카모리 영지에 첩자들을 보냈습니다. 허어. 어깨를 편 풍이 짧게 웃었다. 네가 내 자랑이다. 청을 나온 계백이 마당 건너편의 마구간으로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던 하도리가 다가왔다. 주군, 지금 떠나실 겁니까? 이곳에서 영지인 전(前) 아리타 거성 계백성까지 2백리(100㎞) 거리다. 계백은 하도리와 위사 1백기만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속보로 달린다고 해도 자시(1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닿는다. 계백이 말등에 오르면서 말했다. 속전속결이다. 곧 갑옷소리와 함께 말굽소리가 백제방 마당을 울리더니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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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4 19:12

[불멸의 백제] (212) 11장 영주계백 8

소실이 둘 생겼다. 계백이 여색(女色)을 탐한다면 아리타, 마사시, 이또의 처첩을 당장에 10여명 내실로 몰아넣을 수도 있지만 절제한 것이 둘이다. 계백은 화청과 윤진, 백용문 등 수하 중신(重臣)들에게 나머지 처첩들을 내실로 데려가도록 했다. 모두 입이 귀 밑까지 찢어져서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계백 내궁의 시녀장이 된 마사코가 주군(主君)의 처첩이 옹색하다고 불평을 했지만 대놓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날 밤에는 계백이 하루에하고 첫날밤을 보냈다. 아리타의 측실이었던 하루에는 처음에는 수줍어서 몸이 나무토막처럼 이리저리 건드리는대로 흔들리더니 곧 몸이 뜨거워지면서 매달렸다. 흐려진 눈으로 탄성을 내지르는 하루에를 보면서 계백은 문득 무상한 인생을 떠올렸다. 하루에는 아리타의 품에 안겼을 때도 이렇게 열락의 세상으로 함께 빠졌을 것이었다. 계백은 하루에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것이 전시(戰時)의 인생이다. 역사가 승자의 몫인 것이나 같다. 내 품에 안겨있는 한 만족시켜 주리라. 내가 하루에를 빼앗길 때는 내가 패했을 때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다음날 아침, 하루에의 시중을 받으면서 아침을 먹던 계백이 물었다. 네 동생 이름이 무엇이냐? 예, 고노라고 합니다. 스무살이라고 했지? 예, 나리. 시선이 마주치자 하루에게 몸을 조금 비틀었다. 눈밑이 붉어졌고 얼굴은 상기되었다. 몸을 섞은 남자를 향한 교태다. 뜨거운 밤을 떠올린 하루에의 몸이 간지러워진 것이다. 병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계백이 묻자 하루에의 두 눈이 더 반짝였다. 예, 나리. 검술 수업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합니다. 데려와서 위사장을 만나라고 해라. 예, 나리. 하루에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이더니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위사대에 뽑히면 3석의 녹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공을 세우면 녹봉이 늘어난다. 하루에의 부친이 녹봉 20석을 받는 전상자였으니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청에 나갔을 때 마사시성 성주가 된 윤진한테서 전령이 와 있었다. 전령이 보고했다. 주군. 옆쪽 타카모리 영지의 중신 산요가 보낸 전령이 왔었습니다. 백제인 전령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지난번에 마사시와 협의를 해서 카마에강(江) 북쪽 영지를 가져가기로 한 바, 군사를 보내 접수할 테니 양해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계백이 지그시 전령을 보았다. 타카모리는 마사시 영지 옆쪽으로 25만석의 영지를 가진 호족이다. 타카모리의 조상도 백제계여서 매년 백제식 제사를 지내고 조상묘도 백제식으로 꾸며서 서쪽을 향해 조성해 놓았지만 백제방과는 소원한 관계다. 마사시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영지 다툼이 많았는데 카마에강 북쪽에 있는 5천석 정도의 영지를 타카모리가 가져가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청안의 중신들이 계백을 주시했고 초조해진 전령은 입안의 침을 삼켰다. 타카모리는 몇 대째 영주냐? 불쑥 계백이 묻자 대답은 옆에 앉아있던 노신(老臣) 사다케가 했다. 이또의 중신이었던 사다케가 내력을 훤하게 안다. 예, 현(現) 영주 타카모리 이에하치가 9대가 됩니다. 시조가 백제에서 넘어온 진(眞)씨 성의 진종님이셨지요. 진씨는 한성에 도읍했던 백제시대 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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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1 19:25

[불멸의 백제] (211) 11장 영주계백 7

아야메에게 술상을 봐 오라고 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계백에게 물었다. 하루에님께 술 시중을 들게 할까요? 너희들 둘이 같이 시중들어라. 대번에 그렇게 말했을 때 아야메는 방긋 웃었고 하루에는 수줍은 듯 고개를 더 떨구었다. 곧 시녀들이 술상을 들고 왔고 아야메와 하루에가 좌우에서 술 시중을 든다. 노회한 시녀장 마사코는 잔소리 들을 것이 싫은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내궁 안은 조용하다. 외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영주의 거처인 것이다. 먼저 아야메가 따라준 술잔을 들고 계백이 하루에에게 물었다. 네가 아리타의 첩이라는 것만 알았다. 네 내력을 네 입으로 말해보아라. 계백이 추상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왜국에 와서 내가 죽인 반역도의 첩들이나 거느린 신세가 되었는데 너희들 또한 팔자가 기구하지 않느냐? 어디, 네 지아비를 죽인 원수의 품에 안기는 신세도 좋다고 한 년이니 거침없이 말해도 들어주마. 그야말로 신라군 진중으로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는 계백의 기상이 입담으로 옮겨졌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아야메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하루에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계백을 보았다. 맑은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눈에 물기가 많으면 등빛을 받아 더 반짝인다. 곧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가난한 하급 무사의 딸로 지내다 우연히 아리타님의 눈에 띄어 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리타님이 죽고 또 우연히 영주님께 선택되었는데 제가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렷한 목소리에 막히지도 않는다. 계백을 응시한 두 눈이 두어 번 깜빡였을 뿐 두려운 기색도 없다. 아야메는 숨도 죽인 채 하루에를 응시한 채 굳어져 있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제가 거부하면 20석 녹봉을 받지만 전쟁에서 팔 하나를 잃고 사시는 아버지가 당장 녹봉을 내놓아야 할 것이며 20살짜리 남동생은 병사로 뽑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 식구의 목숨이 저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놈이 왔어도 그놈 품에 안기겠다는 말이냐? 예, 장군.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이년. 계백이 낮게 꾸짖었을 때 처음으로 하루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음 순간 눈 주위가 붉어지더니 하루에가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었다. 잘못되었습니다. 학문은 어디까지 배웠느냐? 소토쿠 태자께서 세우신 호오류사에서 경전과 백제 박사들이 가져온 한서를 읽고 배웠습니다. 계백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고는 하루에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술을 따라라. 얼굴을 붉힌 하루에가 술병을 집다가 옆쪽 안주 그릇을 건드렸다. 아야메가 얼른 그릇을 제대로 놓는다. 술을 따르는 하루에의 손이 떨리는 바람에 술병 주둥이가 흔들렸다. 이년이 간덩이가 큰 줄 알았더니 좁쌀만한 년이군. 혀를 찬 계백이 병 주둥이를 잡아 술을 채웠을 때 하루에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술잔을 든 계백이 아야메와 하루에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들 둘이 기둥이 되어서 내실의 기율을 잡아라. 둘은 숨을 죽였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대륙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다. 너희들의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 한 모금에 술을 삼킨 계백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산 자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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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31 16:29

[불멸의 백제] (210) 11장 영주계백 6

김부성이 항구 근처의 민가에 숨어있다가 집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습니다. 백제방에서 달려온 전령이 보고했을 때는 다음날 오후다. 도망친지 거의 한달만에 붙잡힌 셈이다. 그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신라소가 폐쇄되고 김부성과 연합했던 3곳의 영지가 통합되어 계백령이 되었다. 앞에 엎드린 전령이 말을 이었다. 여왕께서 김부성의 처리를 방주께 맡기셨기 때문에 지금 김부성이 백제방으로 압송되는 중입니다. 잘 되었어. 계백이 전령인 고덕 직급의 무장(武將)에게 말했다. 이곳이 안돈 되는대로 왕자 전하를 뵈러 갈 것이네. 나리. 전령이 청 바닥에 두손을 짚고 계백을 불렀다. 주위를 물리쳐 달라는 전령의 부탁에 청에는 계백과 전령 둘 뿐이다. 왕자 전하께서 영지의 군사력을 길러 왕실과 백제방을 보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명심하겠다고 전하게 그리고 본국 소식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신라는 비담 일당이 대부분 제거되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장악했다고 합니다. 계백이 머리만 끄덕였고 전령의 말이 이어졌다. 새 여왕은 김춘추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속이고 내부의 불만세력을 무마하기 위해서 당분간 왕좌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김춘추는 곧 왕이 될 것이야.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혼잣말을 했다. 이제 백제와 신라의 합병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반도에서 고구려와 함께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꿈이 절반은 깨진 것이야. 왕좌 전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리. 40대의 전령도 길게 숨을 뱉었다. 김춘추는 결사적으로 당에 매달릴 테니까요. 이미 김춘추는 당왕 이세민에게 아들 법민을 시종으로 붙여놓고 신라 관원의 관복을 모두 당(唐)의 관복으로 바꿨다. 의식이나 절차도 당을 따랐는데 당에 복속했다는 표시다. 그러니 외침을 받으면 당(唐)이 당한 것이나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전령이 돌아간 후에 계백은 영지안의 중신들을 불렀다. 내일까지 계백성으로 모이도록 전령을 보내고 내궁에 들어섰을 때는 술시(8시)무렵이다. 침소로 다가간 계백이 문앞에 서있는 두 여자를 보았다. 앞에 선 여자는 아야메다. 같이 밤을 새운 때문인지 시선을 받은 아야메가 웃는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계백을 보더니 조금 뒤쪽에 선 여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하루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네가 마사코 할멈 대신이냐?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침전으로 들어서면서 하루에가 가리킨 여자를 슬쩍 보았다. 하루에보다 두치(6cm)쯤 컸고 그만큼 몸도 풍성하다. 그리고 가는 허리, 둥근 어깨, 볼록한 젓가슴이 분홍빛 비단 겉옷 밑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선을 내린 속눈섭이 비오는날 반쯤 내려진 창문같다. 곧은 콧날, 조금 얇지만 굳게 다물린 입술, 두뺨은 복숭아 색으로 물들어 있다. 스치고 지나면서 일어난 공기의 흐름에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아야메하고는 다른 체취다. 이제는 두 여자가 시녀들 대신으로 계백의 관복을 받아들고 집안에서 입을 옷을 걸쳐준다. 계백이 시중을 받으면서 웃었다. 이래서 영주들이 주색에 빠지게 되는구나. 요사한 마사코 할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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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30 16:50

[불멸의 백제] (209) 11장 영주계백 5

다음날 마사시 영지까지 돌아보고 난 계백은 아리타성을 거성(居城)으로 삼았다. 아리타성은 계백성(階白城)으로 바뀌었고, 영지 이름이 계백으로 되었다. 계백은 나솔 화청과 윤진, 백용문을 각각 1만석 녹봉을 받는 중신(重臣)으로 임명하여 영지를 나눠 주었는데, 화청은 이또의 거성(居城)을, 윤진은 마사시의 거성을 지키는 성주(城主)를 겸임시켰다. 하도리는 계백 친위군의 대장이며 위사장을 겸하도록 하고 녹봉 1천석을 주었으니 가신(家臣)까지 거느린 소용주가 되었다. 논공행상을 마친 계백에게 이제 측근이 된 사다케가 찾아온 것은 저녁무렵이다. 사다케는 계백령의 집사가 되어서 계백성으로 옮겨온 것이다.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청 앞에 엎드린 사다케가 낮게 말했다.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손짓으로 청에 있던 가신들을 물리쳤다. 청에 둘이 남았을 때 사다케가 계백을 보았다. 주군, 이또의 측실이었던 아야메님을 이곳으로 부르시지요.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사다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 아리타의 처첩 중에서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첩을 두명, 마사시성에서도 두명을 골라 놓았습니다. 주군께서 계시는 거성의 내궁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올시다. 이것이 지사역 중신(重臣)이 할 일이기는 하다. 그때 사다케가 계백을 보았다. 이또의 시녀장이 공평하고 일을 잘합니다. 주군을 따라 이곳과 마사시 거성에 가서 내궁을 둘러보고 조처한 것입니다. 이름이 마사코입니다. 사다케가 시켰을 것이다. 며칠전 아야메를 데려온 늙은 시녀를 말한다. 마사코를 시녀장으로 임명하시지요. 알았다. 내궁의 일은 마사코에게 맡기면 되실 것입니다.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사비도성에 있는 아내 고화와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가족을 이곳까지 부를 수는 없다. 왜국 영주는 왜국 왕실과 백제방의 기반을 더 굳히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언제라도 대왕이 부르시면 귀국을 해야만 한다. 그날밤 계백이 침소에 들어섰을 때 시녀장 마사코가 시녀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사녀들이 계백의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돕는다. 뒤에 지켜서 있던 마사코가 입을 열었다. 주군, 오늘밤에는 이곳 아리타의 측실이었던 하루에님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계백이 몸을 돌려 마사코를 보았다. 내가 남의 과부만 데리고 잔단 말이냐? 더구나 내손에 죽은 놈들의 처첩 아니냐? 목소리는 낮았지만 놀란 시녀들이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늙은 마사코는 시선만 내렸을 뿐 위축된 것 같지가 않다. 그것이 관례가 그렇습니다. 내가 쫓아내면 자결을 할까? 오갈 데가 없으니 그럴 것 같습니다. 하루에가 누구냐? 아리타의 다섯 번째 측실로 제가 직접 뵙고 골랐습니다. 계백이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뭘 보고 골랐는지 말해라. 예, 주군. 두손을 모은 마사코가 거침없이 말했다. 먼저 의향을 묻고 나서 용모와 성품, 소양과 근본을 알아보았습니다. 영주의 측실이 된 만큼 모두 뛰어났지만 하루에님은 주군의 첩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때 계백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마사코, 네가 내궁의 질서를 잘 잡았다. 그러나 오늘으 내가 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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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9 15:15

[불멸의 백제] (208) 11장 영주 계백 4

계백이 아리타의 거성(居城)에 입성했을 때는 오후 신시(4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아리타의 영지는 6만5천석, 계백이 차지한 3개 영지 중 가장 컸고 성(城)도 규모가 컸다. 안에 5층 누각까지 세워져있어서 볼만 했다. 영주는 영지 안에서는 절대군주다. 가신(家臣)이 곧 신하요, 사병(私兵)이 군사요, 주민은 백성이니 작은 왕국이나 같다. 이곳에서는 선발대로 온 하도리의 지휘로 가신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리타의 처첩들까지 모두 대기하고 있다. 청으로 들어선 계백에게 아리타의 집사이며 중신인 고바야시(小林)가 보고했다. 500석 이상 가신이 45명이며 그중 6명이 이번 전쟁 때 주군과 함께 사망했으며 남은 39명 중 7명이 가솔과 함께 영지를 떠난다고 합니다. 새로 오신 주군께서 받아들여 주옵소서. 고바야시는 60세, 6천석의 봉록을 받고 있었는데 아리타를 4대째 주군으로 모셔왔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고바야시가 말을 이었다. 이또 영지에서는 중신 사다케가 그대로 집사로 머문다고 들었으나 저, 고바야시는 가솔과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허락해주시기를. 고바야시가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계백을 보았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맑았고 체격도 크다. 뒤에 엎드린 가신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네가 모신 주군 아리타는 뒤쪽의 효고 영지를 탐내고 있었더구나. 그래서 이번에 신라소와의 거사가 성공하여 백제방이 무력해지고 왕실의 권위가 약해졌을 때 섭정께 부탁하여 효고의 영지 10만 석을 차지할 계획이었지? 계백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청안은 얼음이 덮여진 것 같다. 계백의 좌우에는 화청과 윤건 등 장수들이 벌려 앉아 있어서 마치 포로를 심문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때 고바야시가 머리를 들고 계백을 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장춘몽이 되었습니다. 너희들 가신들은 한 몸이 되어서 아리타를 모셨느냐? 아리타는 무장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앞장서서 칼을 휘두른 적이 없습니다. 고바야시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같이 죽은 가신 오쿠치와 키타고가 주동이 되어 아리타를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떠나라. 감사합니다. 그러나. 계백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남은 가신들의 봉록도 일단 모두 몰수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조정을 할 테니 모두 성 안에서 대기하라. 추상같은 명령이다. 이제 아리타의 가신 전부는 성 안에 구금되어 심사를 받은 후에 처리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때 하도리가 소리쳤다. 하도리는 이제 영주의 선봉장 겸 위사장이다. 모두 일어서라! 하도리의 인솔로 가신들이 물러 나갔을 때 계백이 둘러앉은 장수들에게 말했다. 이보게, 그대들은 나를 따라왔다가 가신(家臣)이 될 형편이 되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 화청이 짧게 웃었는데 흰 수염 속의 이가 드러났다. 가신이 되었다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면 다시 본래의 직위로 돌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덧붙였다. 소장은 가신으로 주군을 모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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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8 19:31

[불멸의 백제] (207) 11장 영주계백 3

아야메는 계백이 옷을 벗기자 움츠리고는 있었어도 팔을 들고 허리를 올려 금방 알몸이 되었다. 알몸이 된 계백이 아야메를 안았을 때 놀라 숨이 들이켜졌다. 아야메의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숨도 가빠져 있었고 안았더니 금방 사지를 폈다.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이다. 자시(12시)가 되어 가는 내궁 안은 간간히 순시병의 발자욱 소리만 들릴 뿐이다. 곧 방안에서 가쁜 숨소리에 섞인 아야메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를 물어서 신음이 코로 뿜어져 나오더니 곧 참지 못하고 가쁜 숨과 함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울린다. 계백은 망설이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품에 안긴 뜨겁고, 땀이 배어 미끈거리며 문어처럼 꿈틀거리면서 엉키는 아야메를 이끌고 달려가고 있다. 때로는 아야메를 쉬게 하고, 또 때로는 아야메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더 뜨거운 곳으로 몰아간다. 이윽고 아야메가 사지를 늘어뜨리면서 절규했다. 너무 소리가 커서 계백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아야메가 계백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었다. 뜨겁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작은 새가 품안에 든 것 같았다. 그렇다. 아야메는 작고 가늘었지만 부드러웠고 뜨거웠다. 뜨거운 샘에서는 생명수가 넘쳐흘렀으며 계백의 목을 감싸 안은 두 팔은 의식을 잃고 나서도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 눈을 뜬 계백은 침상 옆쪽에 아야메가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도 말끔하게 빗었고 옷도 빈틈없이 마무리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가늘고 여린 목소리, 그러나 여운이 있어서 분명하게 고막을 울린다. 아야메의 말을 처음 듣는 터라 계백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어젯밤 그 긴 시간 동안 열락의 세상에 빠져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신음과 탄성, 비명 같은 쾌락의 울부짖음만 울렸을 뿐이다. 계백의 웃음을 본 순간 아야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눈꼬리가 조금 솟은 두 눈, 곧고 가는 콧날에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 얼굴형은 계란형이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 넌 그동안 극락에 몇 번이나 다녀왔느냐? 처음입니다. 빨개진 얼굴을 그대로 든 아야메가 습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몸을 일으키자 아야메가 준비해 놓은 옷을 입혀 주기 시작했다. 바지를 입히고 저고리에 팔을 꿰어 주면서 아야메의 숨결이 이마에도 느껴지고 뺨에도 닿았다. 그때 계백이 아야메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물었다. 너, 어젯밤 여기서 쫓겨났을 때 죽으려고 했느냐? 예, 영주님. 바로 대답한 아야메가 허리를 계백의 몸에 붙이면서 처음으로 웃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면서 입끝도 올라갔다. 귀여운 모습이다. 침실을 나온 계백이 위사들과 함께 청에 들어섰을 때는 오전 진시(8시) 무렵이다. 기다리고 있던 화청과 윤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아리타와 마사시 영지까지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3개 영지를 통합한 16만석의 영주가 되었으니 왕궁이 위치한 아스카 주변에서는 제법 큰 영주인 것이다. 앞장을 서서 청을 나온 계백이 화청과 윤진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국 영지를 대륙의 담로처럼 백제가 다스리는 것이 낫겠소. 대륙의 담로는 곧 백제의 직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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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5 20:28

[불멸의 백제] (206) 11장 영주 계백 2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가신 중에 떠난 자는 몇 명이냐? 셋이 처자식을 끌고 떠났습니다. 나머지는 저와 함께 남았습니다. 사다케가 말하자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사다케, 너한테 수습하는 일을 맡기겠다. 돌아가 가신과 주민들을 안돈시켜라. 숨을 들이켠 사다케가 시선만 주었을 때 계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들었느냐? 내가 일을 맡긴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죽으라고 할 때까지 네 배는 나한테 맡기도록 해라. 몸을 돌린 계백을 바라보던 사다케가 이윽고 머리를 청 바닥에 붙이고 절을 했다. 그날 밤, 야마토성 내궁의 침실에 누워있던 계백이 문밖의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나리, 내궁의 시녀가 왔습니다. 백제에서부터 따라온 위사여서 지금도 나리라고 부른다. 무슨 일이냐? 그때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계백이 침실의 문을 열었다. 마루 위 등의 불빛을 받고 선 두 여자가 보였다. 뒤쪽에 선 위사는 당혹한 표정이다. 그때 앞에 선 시녀가 계백에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가게 해주시지요. 계백이 머리를 끄덕이자 시녀가 앞장을 섰고 뒤를 젊은 여자가 따른다. 시녀는 나이 들어서 머리가 반백이다. 시녀의 우두머리인 시녀장이다. 이윽고 계백이 자리에 앉았을 때 여자 둘은 나란히 앞에 앉았다. 방 안의 공기가 흔들리면서 향내가 맡아졌다. 기둥에 붙여진 양초의 불꽃이 흔들렸다. 그때 시녀가 말했다. 수청을 들 부인을 모셔왔습니다. 이미 짐작은 한 터라 계백이 가볍게 대답했다. 필요 없다. 데려가라.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는 너희들처럼 닥치는 대로 상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 백제 본국은 그렇게 기준이 섰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앞으로 이곳도 그렇게 기준이 있어야겠지, 물러가라. 이분은 이또님의 소실로 아야메님입니다. 영주님. 이또가 죽었으니 절에 가서 여승이 되어도 좋다. 계백이 바로 대답했을 때 시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제는 절로 가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침실에서 쫓겨났으니 자결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죽지 말도록 해라. 사다케님은 명을 받들겠지만 아야메님은 다릅니다. 영주님. 네가 데려왔으니 너도 함께 죽는 것이 낫겠다. 계백이 눈을 치켜뜨고는 시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 장검을 쥐었다. 건방진 년, 내 앞에서 위협을 하느냐? 이리 목을 늘여라. 두 년의 목을 단칼에 베어주마. 그러자 시녀와 아야메가 동시에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더니 목을 늘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계백이 장검을 쓰윽 빼들었다. 칼집에서 칼이 빠져 나오면서 쇳소리가 났고 두 여자의 몸이 굳어졌다. 그때 계백이 다시 장검을 칼집에 꽂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늙은 년은 불을 끄고 물러가라. 그리고는 침상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아야메라고 했느냐? 너는 새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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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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