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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이 계백을 불렀을 때는 오후 미시(2시) 무렵이다. 신라에 갔던 대장군 협려가 기마군을 이끌고 회군해온다는 기별이 온 후다. 그동안 신라의 정변은 수시로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한 터라 백제 조정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들과 상의한 의자는 김춘추, 비담간의 추잡한 왕좌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비담의 약속을 믿기로 한 것이다. 의자가 단하에 엎드린 계백에게 말했다. 은솔, 너 왜국에 다녀오도록 해라. 갑작스런 명이었지만 계백이 잠자코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따르겠다는 표시다. 의자가 말을 이었다. 백제방 방주 풍왕자가 사신을 보내왔다. 근래에 신라 첩자들이 수시로 아스카에 들락인다는 것이다.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김춘추가 보낸 놈들일 것이다. 놈들은 반(反) 백제계 고관들을 접촉해서 왜국과 백제간의 불화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또 김춘추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김춘추가 왜국에 갔다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김춘추를 만나면 베어 죽일까요? 김춘추는 신라 땅에 숨어 있을 것이야. 여왕을 죽이는 대공사를 지휘했을 것이다. 김유신 따위는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없다. 의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국은 우리 백제가 공을 들여 세워놓은 속국이다. 대백제와 왜국은 일심동체인 것이다. 네가 가서 풍왕자를 도와 신라 첩자단을 소탕하라. 예, 대왕. 구드레 포구에 전선(戰船) 3척을 준비해줄테니 네가 지휘하는 기마군단에서 3백명만 추려가도록 해라. 예, 대왕. 닷새 안에 떠나도록 해라. 자르듯 말한 의자가 용상에서 일어나 대왕청을 나갔을 때 계백 옆으로 대좌평 겸 병관좌평 성충과 내신좌평 흥수가 다가왔다. 은솔, 저쪽으로 가세. 흥수가 먼저 앞장을 서서 옆쪽 접견실로 다가가며 말했다. 곧 접견실에 셋이 둘러앉았을 때 성충이 말했다. 혼란한 시기야. 고구려에 패퇴한 당이 잠깐 주춤하고 있지만 전운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 계백이 머리만 끄덕였고 흥수가 말을 이었다. 신라 내부가 분열되어 김춘추가 왕을 죽이고 비담과 왕권을 차지하려는 전쟁을 하고 있지만 당은 신라가 망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네. 그렇다. 안시성 싸움에서 당황제 이세민은 계백의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했다. 만일 신라가 백제와 합병이 되거나 멸망한다면 당은 등에 칼을 맞게 될 것이다. 성충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중원에서는 항상 변방의 적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왕국의 안녕을 도모해왔는데 신라가 망해버리면 등에는 백제와 고구려뿐이니까. 대감,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대왕께서는 신라 첩자단을 소탕하라고만 하셨는데 자세한 지시를 내려주시오. 계백이 말하자 성충과 흥수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흥수가 말을 이었다. 소가 대신이 요즘 왜국 조정에서 전횡하고 있네. 왜왕과 백제방 방주 풍왕자의 권위를 무너뜨릴 기세야. 그때 성충이 말을 받는다. 소가가 당의 지원을 받는 것 같아. 신라 첩자단과 함께 소가를 제거하게.
백제군이 물러갑니다! 염종이 소리쳐 말하더니 상기된 얼굴로 비담을 보았다. 대감! 이 기회에 김유신군을 칩시다. 아니, 서둘지 말게. 비담이 말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눈을 부릅떴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신라 왕위를 바란 것은 신라의 독자생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야 개안을 했다. 비담의 목소리가 떨렸고 청 안의 장수들은 숨을 죽였다. 비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춘추는 거짓으로 백제와의 합병을 추구했지만 나는 진심이다. 백제와 합병하는 것이 대륙의 끝에 박힌 우리 부족의 살 길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옳습니다. 비담의 최측근이며 이찬 벼슬인 염종도 소리쳐 동조했다. 백제, 신라가 합병하면 고구려까지 형제국이 되어서 당(唐)을 단숨에 발 아래로 내려다 볼 수가 있을 것이오! 당장 김유신군(軍)을 칩시다! 중랑장 윤천이 소리쳤고 여럿이 따랐다. 김유신군이 당황하고 있을 것이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백제군이 빠져나가면 전력은 우리가 우세하다. 비담이 손을 들어 장수들을 달랬다. 더구나 김춘추가 여왕을 죽였다는 말이 먹혀드는 것 같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유리하다. 그 시간에 김유신의 진막 안에서 김유신이 상민 복색의 사내와 둘이 마주앉아 있다. 상민 차림의 사내는 바로 김춘추다. 김춘추가 변복을 하고 김유신의 진막까지 온 것이다. 오후 신시(4시) 무렵, 아직 한낮인데도 김춘추가 찾아온 것은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김춘추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대장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시오. 백제군이 저절로 물러갔으니 이제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일어날 때요. 대감, 비담군(軍)의 역선전으로 군심(軍心)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김유신이 찌푸린 얼굴로 김춘추에게 말했다. 군심이 더 흔들리기 전에 비담군을 치는 것이 나겠습니다. 저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테니 오늘 밤에 반월성 서문으로 기습을 하겠습니다. 대장군. 김춘추가 눈을 치켜떴지만 입술은 비틀고 웃었다. 기다리시오. 나는 20년을 기다렸소. 대감. 지금 비담군을 격멸시킨다면 아직 신라 땅을 벗어나지 못한 백제군이 말머리를 돌려 습격해올 것이오. 그때는 우리가 궤멸당합니다. 과연. 김유신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전략은 김유신이 우세하지만 대국(大局)을 읽는 것은 김춘추가 뛰어난 것이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신라 땅을 벗어났을 때 비담군을 격멸시키기로 합시다. 승만 공주를 여왕으로 내세우면 군심이 순식간에 안정이 되고 대세를 우리가 쥐게 될 것이오. 그때 비담 일족을 소탕하십시다. 알겠습니다. 김유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비담이 오늘 당장 공격해 오지만 않으면 전세는 점점 우리에게 유리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춘추가 다시 웃었다. 비담은 우유부단해서 결단이 늦습니다. 지금까지 그 자는 여러 번 기회를 놓쳤지만 난 놓친 적이 없소.
무엇이? 놀란 김유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백제군이 뒤로 물러난다고? 예, 일제히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장군 품석이 보고했다. 그는 반월성 앞까지 진출했다가 비담군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았다. 그래서 어깨를 헝겊으로 동여매었지만 피투성이다. 비담군의 역선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후 미시(2시)경, 김유신은 반월성 앞 3리 거리에서 전군(全軍)을 지휘하고 있던 참이다. 말에 올라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던 중에 보고를 받은 것이다. 으음. 김유신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백제군의 배신인가? 둘러선 장수들은 거들지 않았다. 그것은 김유신의 지나친 발언이다. 백제군이 갑자기 뒤로 물러선다고 배신한 것은 아니다. 간간히 반월성에서 내지르는 비담군의 외침이 이곳까지 들려왔다. 수백명이 함께 맞춰 지르는 터라 내용이 선명하게 들린다. 이제 이쪽 신라군은 모두 들었다. 그때 옆으로 전령이 달려왔다. 대장군, 백제군 장수가 왔습니다. 소리친 전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위 장수들이 일제히 전령의 뒤쪽을 보았다. 백제군 장수가 10여기의 기마군을 이끌고 달려왔다. 부장(副將)급이다. 김유신 앞 대여섯보 앞에서 말을 세운 장수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소리쳐 말했다. 백제군 부장(副將) 나솔 목기반이 대장군의 말씀을 신라 대장군께 전하오! 목기반은 건장한 체격의 30대 솔품 관등이다. 김유신이 직접 말을 받았다. 말하게. 백제군은 신라 여왕이 모호하게 암살당한 의혹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이번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하시오! 그렇다면 저놈들의 거짓말을 믿는단 말인가? 김유신이 목청을 높였을 때 목기반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상대등 비담은 사신을 보내어 결백을 주장했고 그 증거로 이번에 백제군이 물러나 주면 비담군이 신라를 통일한 후에 백제와의 합병을 추진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김유신이 숨만 쉬었고 목기반의 목소리가 황야에 울려 퍼졌다. 비담은 약속의 표시로 아들 연청, 연석 두 형제를 백제군에게 인질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 또한 비담은 김춘추공이 왜국에 가지 않고 지금 이 근처에 숨어서 여왕을 암살하고 승만공주를 여왕으로 내세우려고 한다는 것이오! 으음. 김유신이 신음을 뱉었을 때 목기반이 말고삐를 쥐면서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우리는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라는 이 대륙의 끝쪽 작은 땅덩이에서 더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천년을 보내게 되시리라. 김춘추공의 계략이 뛰어나지만 우물안 개구리의 간계일 뿐이오! 무, 무엇이! 김유신이 소리쳤지만 곧 목이 메었다. 그때 목기반이 말고삐를 채면서 소리쳐 말했다. 우리는 돌아가오! 곧 목기반과 함께 백제 기마군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비담군의 외침이 뚜렷하게 울렸다. 김춘추가 여왕을 암살했다! 이쪽에서도 함성을 질렀지만 억지로 짜낸 외침이다. 김유신은 이를 악물었다.
화랑 서청입니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장수가 한쪽 무릎을 꿇고 협려에게 소리쳐 말했다. 신라 상대등 겸 대장군 비담의 명을 받고 백제 대장군을 뵈러 왔습니다. 목소리가 진막 안을 울렸다. 둘러선 백제군 장수들이 쏘는 것 같은 시선을 주고 있다. 밖에서는 기마군의 말굽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고 포차가 바위를 떨어뜨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협려가 지그시 화랑을 보았다. 젊다. 기백이 살아있다. 적이라도 이런 장수를 보면 피가 끓고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용사에 대한 경의다. 비담의 전갈을 가져왔느냐? 말하라. 협려가 말하자 화랑 서청이 똑바로 시선을 주었다. 상대등께서는 매복군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상대등 비담은 지금까지 간계를 써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서청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김춘추의 간계올시다. 김춘추는 여왕전하의 백제, 신라의 합병을 무산시키려고 여왕을 암살했습니다. 모두 숨을 죽였고 서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왕전하가 암살되었으니 김춘추는 성골로 마지막 남은 승만공주를 여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군과 함께 우리를 격퇴시키겠지요. 협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직 입을 열지는 않는다. 실로 교활한 계략이며 주변의 모든 이들을 배신하는 악행입니다. 김춘추는 승만공주를 왕위에 올려놓고 뒤에서 조종하면서 결국 백제와의 연합도 무산시킬 것입니다. . 그리고는 때를 기다렸다가 새 여왕을 밀어내고 거침없이 신라 왕위에 오르게 되겠지요. . 상대등께서는 이번에 백제군이 물러나주시면 신라와 백제 연합을 정직하게 추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춘추가 왕이 되면 제 딸과 사위를 백제군에게 살해당한 원한을 품은 채 합병을 추진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으음. 마침내 협려의 입에서 신음이 울렸다. 참으로 어지러운 당국이다. 협려가 뱉듯이 말하자 서청은 이를 악문 채 숨을 죽였다. 너, 이름이 서청이라고 했느냐? 협려가 묻자 서청이 시선을 들었다. 예, 대장군. 우리 백제는 일찍부터 대륙으로 진출하여 담로를 두었고 배를 띄워 수만리 밖의 왕국들과 교역을 해왔다. . 고구려 또한 중원을 압박하여 수를 멸망시키고 당을 패퇴시키며 수만 리 영토를 보유한 대국(大國)이다. 협려의 목소리에 열기가 띄워졌다. 그런데 너희는 좁은 땅 안에서 서로 이간질이나 하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너 같은 화랑의 기상이 견딜 수 있겠느냐? 서청의 시선이 내려졌고 얼굴은 상기되었다. 그때 협려가 옆에 선 연자신에게 말했다. 북을 쳐라. 본진을 30리 밖 뒤쪽으로 물린다! 협려의 시선이 서청에게 옮겨졌다. 네 말대로 여왕 전하가 피살된 상황에 내가 백제군을 이끌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백제군은 곧 귀국할 것이니 상대등께 그렇게 전해라! 서청의 눈에 눈물이 고여졌다.
대장군 협려는 반월성에서 2리(1㎞)쯤 떨어진 야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그래서 성벽 위에 선 신라군의 모습도 다 보인다. 함성이 계속 울리고 있었는데 비담군이 목청을 높여 외치고 있다. 수십명이 일제히 외치는 터라 드문드문 내용이 들린다. 무슨 말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마침내 협려가 장수 하나에게 일렀다. 저놈들이 싸우지도 않고 욕을 해대는 게 아닌가? 장수가 서둘러 야산을 내려갔을 때 부장 연자신이 말했다.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 쉽게 함락되지 않겠습니다. 유인해서 끌어내야 합니다. 김유신이 포차로 성벽을 무너뜨리면 되지 않겠는가? 공성 무기는 김유신군이 갖고 있는 것이다. 백제군은 기마군이다. 연자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김유신군은 사기도 낮은 데다 장비도 허술합니다. 이번에 여왕이 피살되어서 겨우 분기가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것 참. 협려가 혀를 찼다. 황룡사 앞쪽은 신라군 영내인 것이다. 그곳까지 비담군이 침투해 와서 여왕을 기습하다니, 방비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때 심부름을 보냈던 장수가 서둘러 다가왔다. 대장군, 신라군들이 성벽에서 입을 모아 외치고 있습니다. 뭐라고 욕을 하느냐? 욕이 아닙니다. 얼굴의 땀을 손바닥으로 씻은 장수가 숨을 고르면서 협려를 보았다. 여왕은 김춘추가 죽였다고 합니다. 무엇이? 백제와의 합병을 무산시키려고 김춘추가 여왕을 암살했다는 것입니다. 주위가 조용해졌고 장수의 목소리가 이어 울렸다. 비담은 화랑의 명예를 걸고 그런 간계는 부리지 않았다고 맹세를 합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런 성품이라는 것을 신라인이 모두 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반쯤 입을 벌린 비담이 옆에 선 연자신을 보았다. 이 상황에서 김춘추, 김유신이 여왕을 죽이다니, 그럴 수가 있나? 그때 장수가 서둘러 말했다. 김춘추는 왜국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숨어서 김유신과 공모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놈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혼란에 빠뜨리려는 수작이군. 비담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을 때 연자신이 머리를 기울였다. 대장군, 그 말도 조금 일리가 있습니다. 김춘추가 갑자기 왜국에 간 것도 그렇고 여왕이 아군의 진영 깊숙이 들어온 매복군에게 당하다니요? 그건 그렇지만. 황룡사 앞 산기슭까지 오려면 경비 진지를 6개나 지나야 하는데 여왕 경비대를 몰살시킬 정도면 수백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더구나 그놈들은 시체 한 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수십명은 사상자가 났을 것 아닙니까? 글쎄, 그렇게까지. 김춘추 그 자는 신라왕에 목숨을 건 위인입니다. 김유신은 김춘추가 없으면 당장에 적이 떨어질 위인이구요. 백제와의 합병을 반길 위인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장수 하나가 다가와 소리쳐 보고했다. 대장군, 백기를 든 신라군 하나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잡아올까요?
와앗! 함성이 울리면서 땅이 흔들렸다. 수만필의 말이 달리면서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적이 양쪽에서 옵니다! 청으로 달려들어온 장수 하나가 소리쳤다. 비담과 염종 등은 아직도 청에 모여 있던 참이다. 백제군, 김유신군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기마군만 3만 이상입니다! 결전을 하자는 말인가? 비담이 잇사이로 말하더니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오냐, 내가 여왕이 한풀이를 해주리라. 대감. 따라 일어선 염종이 비담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놈들의 계략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지금 김유신군은 여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분기가 충천한 상태일 것이오. 그러면 성 안에서 막고만 있으란 말인가? 비담이 버럭 소리쳤을 때 장수 하나가 다시 뛰어들었다. 양쪽으로 다가왔는데 왼쪽이 백제군, 오른쪽이 김유신군입니다! 모두 4만 가량이오! 함성이 더 가까워졌고 땅울림이 더 커졌다. 염종이 말을 이었다. 대감, 성벽에 소리꾼들을 세워 먼저 김춘추, 김유신이 여왕을 죽였다고 적진을 향해 소리치게 합시다. 놈들이 그 말을 믿을까? 김춘추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 않습니까? 김춘추가 백제 지원군을 반기면서도 거북해 한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오. 그렇지. 비담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장수들이 동조했다. 백제군도 그 소리를 들으면 의심을 할 것이오. 우리가 손해 볼 것이 없다. 결단이 빠른 비담이 머리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큰 소리꾼을 수백명 모아서 이쪽 저쪽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도록 해라. 김춘추가 왕위를 노리고 여왕을 죽여 백제와의 합병을 무산시킬 작정이라고 해라. 서두르겠소. 염종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장수들이 따라 나갔을 때 비담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렇게 신라는 망하는가? 대감, 백제군이 의심을 하면 김유신군만으로는 우리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장수 하나가 비담에게 말했다. 백제군 대장군 협려에게 우리는 매복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밀사를 보내도록 하시지요. 누가 가겠느냐? 제가 가겠습니다. 화랑 서청이 나섰다. 스물세살로 대장군 서독의 아들이다. 서청이 말을 이었다. 제가 백기를 들고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가지요. 장하다. 비담이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서청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누명을 쓰고 당하는 것이 모욕이다.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더 큰 수치다. 나, 비담이 여왕을 암살하는 따위의 수작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오너라. 예, 대감. 눈을 부릅 뜬 서청이 비담을 보았다. 제가 대감의 결백에 목숨을 걸지요. 그것이 화랑의 본분이기도 합니다. 신라군은 김춘추 같은 위인의 노리개가 아니올시다.
비담이 눈을 치켜뜨고 앞에 선 화랑 석기수를 보았다. 정말이냐? 예, 대감,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여왕이 죽었어? 예, 우리가 매복한 군사들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입니다. 황룡사 앞에서 말이냐? 예, 대감. 비담이 입을 반쯤 벌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전 묘시(6시)무렵, 반월성의 청에는 10여명의 장수가 모여 있었는데 모두 서둘러 왔기 때문에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았다. 그때 대장군이며 비담의 오른팔인 염종이 말했다. 대감,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것은 김유신, 김춘추의 간계요. 글쎄, 간계라도 그렇지. 여왕이 죽었다지 않는가? 그런 헛소문을 뿌려서 군사들이 사기를 높인다는 말인가? 여왕을 우리가 죽였다는 소문을 내면 김유신군은 악에 받쳐 덤빌 것입니다. 백제 지원군까지 온 마당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김유신의 간계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때 잡찬 김홍무가 나섰다. 김춘추 또한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그런 소문 말인가? 아니오. 김홍무가 머리를 저었다. 김홍무 또한 진골 왕족이다. 거기에다 김춘추가 압독주 도독이었을 때 3년 동안 부장(副將)으로 측근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성품을 안다. 김홍무가 말을 이었다. 여왕을 죽이고 우리가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춘추는 능히 그럴만한 위인입니다. 아니, 그럼 그래놓고 백제군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 아닙니다. 김홍무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담을 보았다. 그러면 제 소행이 탄로가 날 가능성이 크니 이번에는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허, 답답하구나. 비담이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왕위에 오를 성골이 누가 남았습니까? 김홍무가 되묻자 비담이 눈을 치켜떴다. 누구냐? 말하라. 승만이 있습니다. 그순간 청 안에 물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렇다. 이 세상에 세명의 성골(聖骨)왕족이 남았다. 하나가 여왕 덕만이요. 두번째가 여왕의 동생이며 의자왕의 모친인 선화공주,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여왕의 사촌동생 승만(勝曼)이다. 승만은 덕담의 부친 진평왕의 동생 딸인 것이다. 그, 승만을 다시 여왕으로? 비담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김홍무가 긴 숨을 뱉고 나서 말했다. 제가 김춘추의 마음이 되어서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여왕 덕만이 백제군을 끌어들여 백제와의 합병이 목전에 닿았으니 김춘추는 이 기회에 여왕과 대감까지 제거하는 음모를 꾸몄을 것입니다. 모두 숨을 죽였다. 김홍무도 지략과 용병술에 뛰어난 무장이다. 김홍무의 말이 이어졌다. 김춘추는 일단 승만을 여왕으로 삼은 후에 백제군을 위무하고 돌려보내고 나서 신라왕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비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가 백제, 김유신군을 전멸시키면 달라진다.
무엇이? 자리를 차고 일어선 협려가 앞에 선 전령을 노려보았다. 여왕 전하가? 예, 황룡사 앞 산기슭에서. 전하를 확인했느냐? 예. 달려온 전령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가쁜 숨을 뱉으면서 전령이 말을 잇는다. 여왕 전하의 시신을 황룡사로 모시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을 했습니다. 축시(오전 2시) 무렵, 백제군 본진이 위치한 대성벌로 달려온 전령이 여왕 덕만의 죽음을 보고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더니 곧 백제 대장군의 진막 안으로 신라군 전령이 들어섰다. 불빛에 비친 신라군 전령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다. 백제 대장군께 말씀드리오! 협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신라 전령이 소리쳤다. 그때 진막 안의 모든 장수가 전령을 둘러쌌다. 협려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말하라. 황룡사 앞 산기슭에서 여왕 전하께서 매복하고 있던 비담군의 기습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네가 보았느냐? 제가 시신을 황룡사에 모시고 달려온 길입니다! 소매로 눈물을 닦은 전령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여왕 전하께서는 칼에 가슴을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돌아갔던 이찬과 위사장은 어떻게 되었느냐? 모두 전멸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황룡사에 있던 위사부장 김기정입니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김기정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대장군! 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때 진막 출입구에 서있던 장수 하나가 소리쳤다. 대장군, 김유신 대장군이 오시오! 협려가 머리를 들었을 때 김유신이 10여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서둘러 진막으로 들어섰다. 김유신의 본진에서 주연을 마치고 헤어진 지 두시진 만이다. 협려에게 다가온 김유신의 두 눈도 충혈되어 있다. 대장군, 여왕 전하께서 비담군의 기습을 받고 돌아가셨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김유신이 협려를 보았다. 내일 아침에 비담군을 칠 것이오. 백제군과 양쪽에서 협공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 좋습니다. 백제군이 좌측을 맡지요. 그때 김유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여왕 전하께서 비담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이를 갈아붙이고 있습니다. 모두 일당백이 될 것이오. 아침 진시(8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화살을 신호로 좌우에서 협공하도록 합시다. 알겠소. 퇴로는 우측 장막산성 골짜기를 틔워 놓겠소. 협려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신의 용병술에 감탄한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한테 덤비는 법이다. 더구나 비담군은 막강한 전력이다. 수세에 몰렸다고 뒤까지 막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역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전세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때 몸을 돌리던 김유신이 충혈된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비담군을 격멸시키고 나서 전하의 장례를 치르도록 하겠소.
이놈들! 신라 장수라면 떳떳하게 나서라! 내가 여왕이다! 여왕이 다시 소리쳤을 때 주위의 소음이 줄어들었다. 습격자들이 주춤한 것이다. 그때 김석필이 소리쳤다. 이놈들! 역적으로 몰려 9족이 몰살당하고 싶으냐! 칼을 버리고 귀순하면 오히려 충신으로 대우하겠다! 여왕 전하께서 윤허하실 것이다! 그때였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괴한 하나가 김석필에게 칼을 후려쳤다. 김석필이 칼을 들어 막았지만 힘에 밀렸다. 찰캉! 다시 한 번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김석필이 비틀거렸을 때 사내의 칼날이 날았다. 으악!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베어진 김석필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을 때 다시 함성이 울렸다. 이제는 살육이다. 전하! 막혔습니다! 칼을 쥔 위사장 요찬이 이 사이로 말했다. 가마를 등지고 선 여왕의 앞에 서서 요찬이 울부짖듯 말했다. 마마, 이놈들은 비담의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함성과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지척에서 울렸고 어둠 속에 습격자의 움직임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쪽도 여왕의 친위 위사들이다. 20여명 밖에 안 되었지만 그 몇 배나 되는 습격자를 맞아 분전하고 있다. 가마 주위를 둘러싸고 다가오는 습격자들을 막는 것이다. 에익! 마침 빈틈을 파고 들어온 습격자의 가슴을 장검으로 깊게 쑤신 요찬이 발로 몸통을 밀면서 칼을 뽑았다. 가슴을 찔린 습격자가 낮은 신음만 뱉은 채 발 밑으로 쓰러졌다. 그때 요찬이 쓰러진 습격자가 덮어 쓴 복면을 뜯어내듯이 벗겼다. 얼굴을 보려는 것이다. 깊은 밤, 불도 없었지만 별빛이 선명했다. 아앗! 사내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요찬이 외침을 뱉었다. 전하! 이놈이. 요찬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여왕이 머리를 돌려 죽은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별빛을 받은 사내의 얼굴이 희다. 그리고 낯이 익다. 그때 요찬이 소리쳤다. 이찬 김춘추의 측근인 장군 김정복이요! 으음, 이놈들. 여왕이 가마에 등을 붙이고는 신음했다. 에익! 요찬이 다시 덮쳐온 습격자 둘을 맞아 맹렬한 기세로 칼을 후려쳤다. 여왕이 눈을 치켜뜨고 밤하늘을 보았다. 이제 알았다! 이놈! 김춘추! 여왕 덕만(德曼)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역적 김춘추! 네 짓이었구나! 에익! 습격자 하나를 벤 요찬이 칼을 치켜들기 전에 다른 습격자의 칼날이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으윽! 요찬의 신음에 이어서 여왕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더 크다. 역적 김춘추! 네가 백제와의 합병을 막으려고 나를 죽이는 구나! 에익! 요찬의 기합, 그러나 후려친 칼이 빗나갔고 습격자의 두 번째 칼날이 가슴을 꿰뚫었다. 숨을 들이켠 요찬이 뒤로 물러서면서 여왕을 보았다. 전하! 그 순간 요찬은 뒤쪽에서 나타난 습격자가 여왕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여왕의 거처인 황룡사 입구가 보였다. 대문 좌우에 모닥불을 펴 놓아서 웅장한 대문이 드러났다. 밤, 자시(12시)가 되어가고 있다. 김유신의 진막에서 나온 여왕 덕만(德曼)도 숙소인 황룡사로 돌아가는 중이다. 가마가 속도를 늦췄기 때문에 여왕이 휘장을 걷고 옆을 따르는 이찬 김석필에게 물었다. 이찬, 김춘추 공은 언제쯤 왜국에 도착할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김석필이 가마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김석필은 말을 부하에게 끌게 하고는 여왕의 가마 옆을 걷고 있다. 김석필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오니까 안심을 하고 간 것이지요. 나한테 기별도 없이 가다니.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여왕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요한 가마꾼들이 주춤거리는 바람에 가마가 흔들렸다. 휘장이 펄럭이면서 여왕이 가마끝을 쥐자 김석필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 가마가 흔들린다! 여왕의 가마는 앞뒤에 시위 네명씩 여덟이 어깨에 맨다. 1인용 가마지만 규격이 컸고 장식이 무거워서 먼 거리는 말을 탄다. 황룡사에서 김유신의 본진까지는 2리(1km) 정도였기 때문에 여왕이 가마로 행차했던 것이다. 그때다. 아앗!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이제는 가마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놈들! 무슨 일이냐! 어둠속이어서 김석필이 다시 소리친 순간이다. 아악! 가마꾼 하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엎어졌고 그 옆쪽 가마꾼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가마꾼이 넘어졌고 가마가 뒤로 기울면서 땅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아앗! 전하! 놀란 김석필이 달려가 휘장을 걷은 순간이다. 이놈! 역적들의 습격이다! 갑자기 위사 하나가 소리치더니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습격이다! 역적들이다! 비담 무리의 기습이다! 이쪽 저쪽에서 외침이 울리면서 함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김석필이 휘장 안으로 손을 뻗어 여왕의 말을 쥐었다. 전하, 밖으로 나오시지요! 김석필이 소리쳤다. 급박한 상황이니 여왕을 가마 안에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여왕이 김석필의 부축을 받아 모로 쓰러진 가마에서 나왔을 때다. 이놈! 뒤쪽에서 외침 소리가 울리면서 김석필 옆으로 달려들었던 사내 하나가 쓰러졌다. 습격자다. 어둠속에서 김석필은 습격자의 정체를 처음 보았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덮고 눈만 내놓았다. 갑옷은 신라군 갑옷이다. 그때 습격자를 벤 위사장 요찬이 달려왔다. 전하! 습격자가 많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누구냐! 비담이 보낸 암살대인가? 김석필이 소리쳤다. 그러나 앞장선 요찬은 습격자 또 하나를 맞아 칼을 부딪는 중이다. 사방은 칼 부딪는 소리,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찼다. 여왕을 20여명의 위사밖에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방이 습격자로 둘러 싸인 것 같다. 그때 여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놈들! 비담이 보낸 놈들이냐! 여왕의 목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잘 오셨소. 신라여왕 덕만(德曼)이 웃음띤 얼굴로 협려를 보았다. 50여 명의 장수가 들어찬 진막 안은 열기가 덮여져 있다. 감사합니다. 전하. 협려가 앉은 채로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앞쪽에 놓인 상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놓여졌는데 신라와 백제 장수들이 마주보고 앉도록 배치되었다. 여왕 좌우에는 대장군 김유신과 이찬 김석필이 앉았고 이쪽은 협력 좌우에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자리잡았다. 나머지 장수들이 서열 순으로 늘어져 앉아서 불빛을 받은 갑옷이 번쩍이고 있다. 여왕이 지그시 협려를 보았다. 태왕비께서는 건녕하시오? 선화공주, 의자왕의 모친을 묻는 것이다. 예, 전하. 협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선화공주는 여왕의 동생이다. 지금도 말을 타시고 도성 남쪽 수렵장에 다니십니다. 그런가? 여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선화를 못 본 지 40년이 넘었어. 지금 그대의 대왕 연세가 어떻게 되오? 예, 마흔넷이십니다. 그럼 45년이 되었네. 못 본 지가. 긴 세월입니다. 전하. 그렇소. 이제는 여왕이 한숨을 쉬었지만 진막의 분위기는 밝다. 여왕이 술잔을 들고 협려를 보았다. 당왕(唐王)이 짐이 여자라고 왕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는 거요. 그대도 들었소? 예, 주제 넘은 놈입니다. 어깨를 편 협려가 여왕을 보았다. 그자는 제 형, 동생을 죽이고 아비를 유폐시킨 후에 동생의 처를 데리고 사는 놈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하다니요? 무시하십시오. 전하. 비담이 당왕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당왕은 안시성에서 눈 한쪽을 잃고 지금 장안성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담만 죽이면 백제와 신라는 선왕(先王)들께서 염원하신 합병을 이룰 것입니다. 고맙소. 여왕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그때 협려가 고개를 돌려 김유신을 보았다. 장군, 건배를 하십시다. 좋소. 김유신이 웃음띤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양국의 합병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만세! 모두 일제히 술잔을 들고 만세를 외치자 협려가 다시 선창했다. 백제와 신라의 번영을 위하여! 만세! 여왕도 술잔을 들고 웃는다. 주연을 마치고 진막으로 돌아가는 협려에게 연자신이 말했다. 대장군, 김유신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소. 나이가 들어서 지친 것 아닐까요? 아직도 정정하다고 들었어. 말 걸음을 늦춘 협려가 연자신과 말 배를 붙여 걸으면서 물었다. 조금 찜찜하긴 하네. 백제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이 김춘추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말이야. 안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며칠 기다렸다가 백제군을 맞아야 도리 아니겠나? 김춘추가 말이야. 여왕이 보냈다지 않습니까? 김춘추가 며칠 기다린다면 여왕이 잡지는 못했을 거야. 대장군은 생각도 많으시오. 연자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협려는 지장(智將)이다.
백제 대장군 협려는 40대 중반으로 거구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른 터라 김유신과 휘하 장수들도 협려를 안다. 직접 협려와 전쟁을 치른 장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군(友軍)으로 만났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협려가 김유신을 보았다. 김유신은 이때 50대가 되었으니 협려보다 연상인데다 신라에서의 품위도 높았지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군. 반갑습니다, 대장군. 협려의 수염투성이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에야 대장군의 존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로 추켜올렸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그만큼 둘 다 명성이 높은 용장이었기 때문이다. 협려는 부장 연자신과 백준, 그리고 휘하 장수 10여 명을 대동했고 김유신 또한 10여 명의 장수를 모아놓고 기다렸기 때문에 진막 안은 장수들로 가득 찼다. 그때 협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김춘추 대감은 어디 가셨습니까? 여왕 전하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가셨습니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왔으니 여왕께서 마음을 놓으시고 사신으로 보내신 것이지요. 아아, 그렇습니까? 비담이 백제군의 위용을 보고 잔뜩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진막 바닥에 펼쳐놓은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가죽 위에 붉은색 염료로 정교하게 그려놓은 적과 아군의 배치도다. 비담의 진은 명활산성을 중심으로 10리 넓이로 펼쳐져 있었는데 김유신의 진에서 10리 거리였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비담군(軍)의 전력은 아직도 막강합니다. 더구나 산성에 박혀 있어서 기마군을 활용하려면 끌어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군요. 물러나지 않고 결전을 하려는 것이오. 쓴웃음을 짓고 말한 김유신이 협려를 보았다. 저녁때 여왕 전하를 만나 보시지요. 백제군을 위해 여왕께서 주연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유신과 상견례를 마친 협려가 진막을 나와 백제군 진영으로 돌아갈 때 부장(副將)으로 수행한 덕솔 백준이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왔다. 대장군, 김춘추가 여왕을 구해냈다고 들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여왕의 심부름이나 다니고 있군요. 왜국에 가면 백제방부터 들릴 거야. 쓴웃음을 지은 협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신라 도성까지 진입해왔으니 백제방의 충왕자께 부탁을 하면 왜왕을 움직여 왜병을 끌어올 수 있을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신라는 완전한 백제와 합병을 하게 되는거지. 왜병은 백제의 동맹군이니까 말이네. 김춘추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 당, 왜국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백준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덮였다. 신라에 김춘추만 한 인재가 없습니다. 여왕의 충신 아닙니까? 글쎄. 협려가 말고삐를 채어 말을 천천히 걸리면서 말을 잇는다. 뛰어난 인재지. 하지만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 웃음 띤 얼굴로 협려가 백준을 보았다. 대왕께서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어. 김춘추를 가장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내 눈앞에 없군.
달솔 협려가 이끈 백제군 3만이 신라 도성 50여리 근처에 육박했을 때는 그로부터 사흘 후다. 전령이 기를 쓰고 달려왔지만 백제군과는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어서 그야말로 비담 일당은 아연실색을 했다. 그만큼 백제 기마군의 기동력이 빨랐던 것이다. 5만 이라고? 되묻는 비담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예, 5만도 넘는 것 같소. 땀과 먼지로 뒤집어 쓴 전령이 비담을 보았다. 전령은 기를 쓰고 말을 달려왔지만 백제 기마군과의 거리를 떼어놓지 못했다. 더구나 왕국이 두개로 쪼개져서 비담에게 전령을 보내지 않은 성주도 있는 터라 뒤죽박죽이다. 전령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은 도중의 성을 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직진했습니다. 여왕께로 간 것입니다. 신라 6백년 사직을 여왕이 백제에게 넘기는구나. 비담이 이를 갈아 붙이며 말했다. 이년, 기어코 김춘추하고 공모해서 신라를 백제로 넘기는구나. 대감. 이찬 염종이 비담을 불렀다. 진막 안은 전령의 급보를 듣고 나서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분위기다. 모여있던 20여명의 장군들은 할 말을 잃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었다. 김춘추 김유신이 여왕을 옹위하고 도망친 후에 세력은 이쪽이 우세했지만 명분으로는 밀렸던 비담이다. 그런데 백제 기마군 5만이 순식간에 닥쳐왔으니 혼비백산할 만 했다. 여왕이 백제군 5만의 지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전력(戰力)이 밀립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 군사를 더 모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염종이 말하자 장군 서너명이 동의했다. 현재 비담군의 전력은 그동안 더 불어나 기마군 3만에 보군 3만 5천가량이다. 여왕을 업고 있는 김춘추 세력이 기마군 1만 5천, 보군 3만 정도였는데 졸지에 백제 기마군 5만이 증원되었으니 이제는 이쪽이 열세다. 더구나 백제 기마군은 대륙을 석권한 최강의 기마군이다. 그때 비담이 눈을 치켜뜨고 염종에게 물었다. 이찬, 그대는 이번 전쟁에 명분이 없다고 보는가? 아니오. 당황한 염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명분은 대감이 품고 계시오. 여왕과 김춘추, 김유신 일파는 진즉부터 백제와 내통한 데다가 자력으로 왕국을 존속시킬 역량과 의지가 없었소이다. 김덕만을 여왕으로 옹립한 것부터 잘못된 처사요. 기회는 지금 뿐이야. 비담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신라의 자립을 위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 화백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우리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 옳습니다! 이번에는 10여명의 장군들이 소리쳤다. 김춘추는 이 기회에 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신라에서 출신한 김유신의 전철을 밟을 예정이다. 그놈들의 행태를 누가 모르겠는가? 비담의 열띤 목소리에 대부분이 왕족들인 장군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군사를 더 모을수가 있소! 여기서 싸웁시다! 김춘추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소! 백제군이 왔다고 해도 대적할만 합니다! 비담이 숨을 가누었다. 그렇다. 김춘추의 조부는 진지왕이었다. 그러나 그 진지왕은 화백회의에서 황음무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즉위 4년만에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했다. 그 후로 김춘추 가문은 진골로 격하되어 왕권과는 멀어졌던 것이다.
아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승만(勝曼)이 숨을 들이켰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다. 그러나 승만은 침상에 오르지 않고 수를 놓는 중이었다. 이곳은 도성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저택, 그러나 담장이 높은데다 저택 안에 1백명 가까운 사병(私兵)을 고용하고 있어서 작은 성(城) 같다. 승만이 문도 열지 않고 묻는다. 깊은 밤에 누가 왔단 말이냐? 왕국이 둘로 짜개져서 전쟁을 하는 상황이다. 여왕파와 비담파로 나뉘어진 신라는 왕조의 운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다. 여왕파에는 김춘추, 김유신 등 신진세력이 가담했고 상대등이며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 비담 일파에는 염종 등 왕족들이 뭉쳐있다. 그때 밖에서 집사가 대답했다. 예, 이찬 김춘추 대감과 김유신 대장군이 오셨습니다. 무엇이? 놀란 승만이 벌떡 일어서자 수를 놓던 수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일어선 승만은 거인(巨人)이다. 거녀(巨女)라고 해야 맞다. 6척이 넘는 키에 팔이 길어서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손이 내려왔다. 그러나 미인이다. 승만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라더냐? 바깥채 앞에서 뵙자고만 하십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숨을 고른 승만이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내가 청으로 나갈테니 청으로 모셔라. 예, 아씨. 집사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고 승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승만은 현(現) 여왕인 김덕만(金德曼)의 사촌 여동생이니 곧 진평왕의 친동생 갈문왕의 딸이다. 김덕만도 진평왕의 맏딸인 것이다. 승만이 청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드렸다. 공주께서 놀라셨겠습니다. 김춘추가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밤늦게 찾아와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자리를 권한 승만이 앞쪽에 앉으면서 묻자 김춘추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역적 비담의 무리는 곧 소탕될 것입니다. 승만이 머리만 끄덕였다. 비담이 신라왕이 된다면 승만도 현(現) 여왕인 덕만 일당으로 몰려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가 불빛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승만을 보았다. 공주께 여왕 전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하의 말씀을 듣겠소. 전하께서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공주께서 신라국 왕위를 이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당치 않소. 놀란 승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왕마마께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주. 김춘추가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승만을 보았다. 부릅뜬 눈에 흰 창이 더 커졌다. 신라 사직을 위한 여왕마마의 명령이십니다. 공주께서 여왕마마의 명을 어기시렵니까? 아니, 나는. 여왕마마께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시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해주시지요. 이찬, 나는. 약속을 받고 여왕마마께 전해드려야 합니다. 그러자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 승만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여왕마마의 명을 받겠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김춘추가 앞장 서서 마당 끝쪽의 나무 밑에 섰다. 주위는 어둠에 덮여졌고 10여보 떨어진 담장 밑에서 위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김유신을 보았다. 전하께서 마음이 흔들리시는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럽게 김유신이 묻자 김춘추는 한숨부터 뱉었다. 전에는 우리한테 하대를 하시던 전하께서 이제는 존대를 하시는구려. 그렇습니까? 자신감이 떨어지셨소. 어쩔수 없는 일 아닙니까?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춘추가 묻자 김유신은 한동안 침묵했다. 묵묵히 김춘추를 응시한 채 입을 열지 않는다. 답답해진 김춘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장군, 전하께선 진즉부터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염두에 두고 계셨소. 그것이 신라 주도의 합병이건 백제 주도건간에 말이오. 압니다. 그것이 전하의 부친이신 진평왕의 염원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선화공주를 백제 무왕에게 보낸 것이지요. 이제 비담의 난으로 진평대왕의 꿈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전하께서 백제군을 맞으시면 합병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 백제 기마군 3만은 비담군을 깨뜨린 후에 신라에 계속 주둔하면서 합병의 지원세력이 될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머리를 들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대장군,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비담이 신라왕이 되는 것이 낫소. 김유신이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 될 수가 없소. 말이 합병이지 신라의 왕족은 백제 치하에서는 7품 이상으로 오르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대감, 우리 가야 왕족의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김춘추도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가야국이 신라와 합병하면서 가야 왕족도 같은 시련을 겪은 것이다. 시련이 아니라 수모다. 가야 왕족인 김유신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온갖 수모를 겪고 마침내 대장군에 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신라가 백제에게 합병된다면 김유신의 피눈물나는 성취는 허사가 된다. 김유신이 지그시 김춘추를 보았다. 대감, 백제 기마군 3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먼저 약속을 해주시오.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하시겠소? 이미 대감께 내 가문의 운명을 맡긴 사람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맙소. 김춘추가 두 손으로 김유신의 손을 감싸쥐었다. 대장군, 방법이 있소. 말씀을 해주시오. 따르겠습니다. 백제군은 사흘 후에 도착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비담은 아직 백제군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전력을 다해서 이곳을 공격하겠지요. 김춘추가 숨만 쉬었고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오는 이유를 뻔히 아는 터라 비담은 대왕전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김춘추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여왕 선덕을 모시고 도성 위쪽의 황룡사로 왕궁을 옮긴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과 함께 모여 앉았다. 이곳은 여왕의 침전이 된 황룡사의 안쪽 객방 안이다. 거대한 황룡사는 9층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1백여 칸의 승방이 있는 데다 사찰 둘레가 10리 가깝게 되어서 여왕의 임시 왕궁으로 적당했다. 선덕이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을 들고 김춘추에게 물었다. 백제군이 오면 승산이 있겠소? 예, 마마.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선덕을 보았다. 그리고 아직 비담은 백제군의 응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백제 기마군 3만과 합하면 전력이 비슷해집니다. 따라서 기습을 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선덕의 시선이 김유신에게 옮겨졌다. 대장군을 믿겠소. 예, 마마.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김춘추는 여왕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기세를 올렸지만 아직도 비담군(軍)에 비교해서 전력이 열세다. 상대등 비담은 여왕 다음의 위치인 데다가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인 것이다. 김춘추와 비교해서 월등한 지위와 권력을 장악한 상태다. 김춘추는 오직 김유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백제군의 지원이 없다면 며칠도 견디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선덕이 물었다. 아군의 전력은 얼마나 되오? 기마군 1만에 보군 1만5천입니다. 비담군(軍)은? 기마군 2만5천에 보군 4만입니다. 선덕이 입을 다물었다. 비담군이 압도적인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말했다. 백제 기마군 3만이 오면 아군의 기마군이 우세합니다. 마마. 그렇소? 선덕이 다시 김유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김춘추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마마, 신(臣)을 믿으시옵소서. 김춘추가 굳어진 얼굴로 말하자 선덕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경을 믿소. 황공합니다. 이 난리가 수습되면 선화를 부를 예정이오. 순간 김춘추가 숨을 들이켰다.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져 있다. 선화가 누구인가? 바로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인 선화공주다. 선덕의 동생인 것이다. 진평왕의 두 딸 중 장녀는 신라 여왕이며 둘째는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다. 선덕이 말을 이었다. 선화를 내 후계자로 선포하고 백제와의 국경을 개방하겠소. 선화가 내 후계자가 되면 이어서 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겠지. 그러면 의자가 신라, 백제를 함께 다스리게 될 것 아닌가? 선덕이 상기된 얼굴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번갈이 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다시 선덕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백제군의 지원이 그 계기가 되었어. 비담의 난이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당겨준 셈이 되겠구려. 마마,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요. 김춘추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몸을 세웠다. 김유신도 따라서 허리를 굽혔기 때문에 선덕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춘추, 김유신의 본진은 황룡사 앞쪽 반월성에 자리잡았고 비담은 10여 리 떨어진 명활산성이다. 가까워서 상대방의 북소리 호각소리가 이곳까지 울린다. 선덕의 침전을 나왔을 때 김춘추가 김유신을 불렀다. 대장군, 상의 드릴 일이 있소.
대감, 육기전이 어젯밤에 비담측에 가담했습니다. 장군 김정복이 김춘추에게 보고했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도성 밖 본진에 머물고 있던 김춘추는 시선만 준다. 김정복이 말을 이었다. 육기전은 기마군 5천을 이끌고 왔는데 보군 1만7천은 사흘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적. 김춘추가 낮게 말했지만 진막 안의 장수들은 다 들었다. 육기전은 김춘추의 심복으로 대장군에까지 오른 무장이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지만 김춘추의 지원이 없었다면 3품 잡찬 벼슬에 대장군으로 보기당 당주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춘추의 옆에 서 있던 김유신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대감, 육기전이 비담에 가담했지만 전력화(戰力化)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왜 그렇소? 비담은 의심이 많아서 육기전을 측근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육기전이 대감과 내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옳지.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군사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합시다. 육기전과 연합해서 밤에 비담을 야습한다는 소문이 어떻소? 그러지요. 세밀한 계획까지 꾸며서 퍼뜨리지요. 김유신이 말했을 때 진막 안으로 위사가 들어섰다. 대감, 경산성주가 왔습니다. 오, 들여보내라. 김춘추가 반겼다. 경산성주는 서쪽 백제와의 국경에 위치한 성주로 김춘추의 친척이다. 곧 경산성주 김대영이 들어섰는데 군관 복색의 사내와 동행이다. 대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김대영이 절을 하더니 김유신과 눈인사를 했다. 먼 길을 달려와 주었구나. 고맙다. 감동한 김춘추가 치하했다. 예, 기마군 5백을 끌고 왔습니다. 잘왔다. 대감,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김대영이 정색하고 말했기 때문에 김춘추가 머리를 끄덕였다. 대장군만 남고 모두 밖으로 나가라. 잠시 후에 진막 안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김대영과 군관 복장의 사내까지 넷만 남았다. 그때 김대영이 군관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백제대왕께서 보내신 밀사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춘추가 군관을 보았다. 30대쯤의 사내는 김춘추의 시선을 받더니 입을 열었다. 곧 백제 기마군 3만이 대감을 지원하려고 올 것입니다. 기마군 3만이라고 했소?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살았소. 이곳까지는 언제 도착할 것 같소? 엿새 후쯤 될 것이오. 엿새라, 엿새를 버텨야겠구나. 혼잣말을 한 김춘추가 김유신을 보았다. 대장군, 가능하겠소? 여왕을 모시고 서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면 비담은 우리가 도성을 포기한 줄 알고 마음을 놓을 것 아니겠습니까? 옳지, 그 계략이 신통하오. 그때 밀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비담 일당이 제거되고 신라와 백제가 우호국으로 서로 공존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소. 당연한 일이요. 김춘추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고 김유신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신라의 도성은 반으로 쪼개졌다. 외성 아랫쪽과 내성인 왕성은 상대등 비담이 점령했고 북쪽은 김유신, 김춘추가 점령한 것이다. 물론 여왕 선덕은 김춘추가 보호하고 있다. 그날 밤이 지난 후에 김춘추와 비담은 동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장은 군사력과 도성의 대부분을 장악한 비담이 우세했지만 김춘추는 여왕을 모시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양대 세력은 도성 안에 성벽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신라의 정변은 사흘만에 백제 의자왕에게 보고가 되었는데 도성 안에 있던 첩자가 사흘 밤낮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선덕이 시동 차림으로 빠져 나왔단 말이냐? 첩자의 보고를 들은 의자가 웃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비담의 손에 선덕이 죽었다면 신라와 병합이 더 어려워질뻔 했다. 그러나 아직 비담의 세력이 강합니다.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 사비도성의 대왕청 안에는 백여명의 문무백관이 모여 있었는데 의자가 긴급 소집을 시켰기 때문이다. 성충이 말을 이었다. 대왕, 아직 비담의 세력이 막강합니다. 김춘추는 세력 기반인 대야주를 잃고 대야군주 김품석과 42개 성, 5만여명의 병력을 잃은 터라 비담에게 전력이 훨씬 뒤집니다. 머리를 끄덕인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우리가 대야주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비담이 이렇게 나서지도 못했겠지. 그때 내신좌평 흥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비담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대왕. 약화시키는 것보다 아예 말살을 시켜 놓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김춘추 세력이 급부상을 하게 됩니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여왕과 김춘추가 신라를 완전히 장악하면 백제와의 병합 약속을 헌신발처럼 버릴 것입니다. 흥, 당장 병합을 압박하면 두 세력이 연합해서 대들겠지. 그렇습니다. 김춘추도 어쩔수 없이 백제에 대항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자가 용상에 등을 묻으면서 말했다. 비담의 세력을 어떻게 약화시킬 것인가? 시급히 대책을 내놓아라. 신라와의 합병은 의자가 태자 시절에서부터 머릿속에 박아 놓은 목표다. 그것은 부친 무왕(武王)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데려왔을 때부터 내려온 소망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그 선화공주의 아들인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합병의 대업을 물려받은 입장이다. 그때 동방방령 의직이 나섰다. 대왕, 동방의 상안성에서 비담의 주력군이 모인 신라 서부 오금성까지는 3백리 거리입니다. 동방의 기마군으로 오금성을 기습 격파하면 비담이 놀라 도성에서 빠져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비담 대신으로 김춘추를 견제할 대역을 은밀히 양성해야 될 것입니다. 옳지.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성충과 흥수, 의직을 번갈아 보았다. 동방과 친위군의 기마군 3만을 떼어가도록 하고 즉시 시행하라. 예, 대왕. 출전 장수는 대장군 협려가 낫겠다. 부장으로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따르도록 하라. 모두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든다는 표시를 했다. 일사분란한 체제다.
쳐라! 김유신의 외침이 울리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이곳은 외길, 비담의 1천 보군이 내성의 왕궁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던 참이다. 깊은 밤, 쌍방이 횃불도 들고 있지 않아서 함성만 일어났다. 와앗! 기습한 김유신군이 먼저 승기를 잡았다. 양쪽에서 뛰어나왔는데 비담군(軍)은 허리가 잘린 뱀처럼 꿈틀거리며 흩어졌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용사들이어서 금방 내성 앞 도로는 쌍방의 살육장으로 변해졌다. 와앗! 그때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기 때문에 김유신이 놀라 부장(副將)을 소리쳐 불렀다. 비담군이 2개 대로 나뉘어졌느냐? 모릅니다! 부장이 정신없이 소리치더니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함성은 더 커졌다. 뒤쪽이다. 와앗! 김유신이 소리쳤다. 형달은 5백을 이끌고 내 뒤를 따르라! 서둘러라! 예엣! 뒤쪽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김유신이 장검을 빼들고 앞장을 섰다. 궁성의 문은 4개, 그중 서문으로 공격해온 비담의 주력군을 기습했던 것이다. 비담이 1개 군(軍)을 나누어 북문 쪽으로 진입시켰는지는 몰랐던 상황이다. 앞장서서 수염을 흩날리며 달리던 김유신이 소리쳤다. 놈들을 북문으로 진입시키면 안된다! 대장군! 나는 이곳을 맡겠소! 김유신의 등에 대고 김춘추가 소리쳤지만 곧 함성 소리에 묻혔다. 같은 시각, 왕궁의 침전에 있던 여왕 선덕이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왕궁 안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있다. 선덕은 대번에 사태를 짐작했다. 반란군이 침입한 것이다. 반란군 수괴는 상대등 비담, 마침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마마! 침전 밖에서 위사장 박무가 소리쳤다. 마마! 반란군이 북문으로 진입했습니다. 어서. 그때 밖으로 뛰쳐나온 여왕이 낮게 소리쳤다. 내가 시동 차림을 하고 나올테니 잠깐 기다려라! 그러더니 잠시 후에 침전에서 시동 하나가 뛰어나왔다. 여왕이 시동으로 변장을 한 것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고 시동 복색을 했으니 위사장 박무도 지척에서 알아보기 힘들다. 마마. 박무가 더듬거렸을 때 여왕이 앞장서 달리면서 말했다. 멀리서 따르라! 바짝 붙으면 눈치챌 것이다! 선덕은 반란군의 침입에 당황해서 이쪽저쪽으로 내달리는 시녀 시동 사이에 끼어 동문으로 나아갔다. 북문으로 침입한 비담의 수하 화랑 석기수는 여왕의 침전까지 돌입했지만 허탕을 쳤다. 동문을 빠져나온 선덕이 달려온 김유신과 만났을 때는 왕궁이 완전히 비담에게 장악된 후다. 마마. 선덕 앞에서 눈물을 떨군 김유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비담 일당을 기어코 소탕하여 신라 사직을 구하겠습니다. 대장군에게 맡기겠소. 시동 복색의 선덕이 흐려진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북문 밖 거리에 여왕과 대장군이 서있다. 여전히 함성이 울린다.
저택에서 군사들이 나왔습니다. 달려온 군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모두 보군으로 2천명이 넘습니다. 기마군을 쓰지 않군요. 부장(副將) 형달이 김유신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어둠속에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곳은 왕궁 서쪽의 군사 조련장이다. 짙은 밤이어서 황야는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소음이 들려왔다. 김유신이 모은 군사 1500명이다. 이쪽도 보군으로 구성된 군단이어서 은밀하게 움직이려는 의도다. 김유신이 바람에 날리는 수염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센 흐린 날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별 한점 보이지 않는다. 그놈들이 왕궁으로 오려면 두갈래 길이 있다. 아직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자.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도 호곡성에 박혀있는 줄 알고 있겠지? 이렇게 나오신 줄 알았다면 비담이 움직였을 리가 없지요. 옆에 선 장군 김용무가 말했다. 비담 주위에 고관의 6할이 모여 있습니다. 대장군. 많을수록 좋지 않겠느냐? 김유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졌다. 그 반역의 무리를 소탕하면 신라는 새로운 기운으로 덮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이다. 고관의 6할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비담 일당은 신라군(軍) 전력의 8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삼천당 등 주요 부대 지휘관 대부분은 비담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로 채워졌고 대왕과 김춘추 무리로 분류된 장군, 관리는 변방으로 쫓겨났다. 지금 김춘추가 가 있는 신주(新州)만이 김춘추, 김유신에게 우호적이다. 그때 어둠속에 잠깐 동요가 있는 것 같더니 김유신 앞으로 한 무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 사내가 김춘추다. 대감. 김유신이 다가가 김춘추의 손을 쥐었다. 무사히 오셨군요. 이틀 동안 달려왔습니다. 김춘추의 지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성벽을 넘어오면서 도둑 무리 같은 내 신세가 한심했소. 이 난관만 지나면 신라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김춘추가 김유신의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내가 가야 출신 대장군의 도움으로 신라 사직을 구하는군요.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6살 연하의 44세. 작년에 세력의 기반이었던 가야주 42개 성을 잃고 잔뜩 위축된 상태다. 가야주는 본래 가야왕족인 김유신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김유신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감. 비담이 조금 전에 왕성을 향해 군사를 출발시켰소. 이제 우리가 그놈들을 급습할 차례요. 승산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군사 수는 적지만 기습을 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담이 직접 옵니까? 왕궁을 습격해서 여왕전하를 벨테니 비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군. 머리를 든 김춘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이번 당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할 거요. 그래서 당황제는 신라왕이 누가 되든 신경도 쓰지 못할 겁니다. 목소리를 낮춘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비담은 그것을 노리고 있지요. 그놈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말했을 때 다시 전령 하나가 달려오더니 소리쳤다. 비담군(軍)이 장계신길로 꺾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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