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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가는 등이 쓸쓸해 보입니다. 내 눈에만 그런가요? 서리병아리처럼 풀 죽은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지난여름은 견딜만했습니다. 열대야에 뒤척이며 잠 못 든 몇 밤이 있었으나 그럭저럭 살아냈습니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만 잠이 든 걸까요? 이미 짝을 만난 걸까요? 매미도 작년처럼 악을 쓰지 않습니다. 미끈유월 지나 어정칠월이라지요. 백중날 호미 씻어 걸어두고 어정거립니다. 꽃달임 한 번 못해도 봄 가고, 복달임 한 번 못해도 여름이 갑니다. 찔레꽃 피던 천변 풀숲에 귀뚜리 울음이 넘칩니다. 주둥이 비틀어진 모기 놈 내뺀 자리 꿰차고 앉아 톱질입니다. 장장 추야 긴긴밤 누구의 애간장 끊을 요량인지 슬근슬근 톱질입니다. 냇물 소리도 이미 어제의 것이 아닙니다. 가물가물 밤하늘의 별빛도 식어갑니다. 밀가루 팔러 나서면 바람 불고, 소금 팔러 나서면 비 온다는 세상사, 검은 밤 멀리 아파트 창문에 등불이 도란거립니다. 가을은 귀뚜리 등에 업혀서 온다지요. 처서, 텃밭에 파 씨를 묻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봅니다. 처진 눈꼬리가 싫어 습관처럼 살짝 밀어 올립니다. 꾹 다문 입술로 살며시 미소를 띠어보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안 보이던 세월이 무서워, 오늘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울을 속입니다. 제가 속인 제 껍데기를 확인하고 믿기지 않는 저를 안심합니다. 실은 김치나 치즈일 뿐인 미소를 환히 믿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우리가 속인 거울에 속고 맙니다. 향나무가 마당에 저를 비추고 있습니다. 깃들지 않는 새들의 노래 부르지 않습니다. 없는 바람에 살랑거리지 않습니다. 애써 굽은 허리를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그림자는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새의 노래도 바람의 살랑거림도 보여주지 않고 지팡이도 감추지 않은 향나무 그림자가 말합니다. 검은 여백에서 향내를 맡으시라, 침묵의 행간에서 청풍을 읽으시라, 말없이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가만, 향나무 그림자에서 향내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댓돌 위에 신발이 가지런합니다. 속내가 시끄러울수록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한다지요. IMF 외환위기 시절 어느 중소기업체 사장님, 날마다 빚 독촉에 시달렸답니다. 콩팥이라도 내놓으라는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했답니다. 살기보다 죽기가 쉽겠다 싶어, 날마다 정갈하게 속옷을 갈아입었더랍니다. 어느 거래처에 얼마 또 어디 얼마, 정리한 부채 메모를 품에 지니고 다녔더랍니다. 철부지들이 어디 현관에 신발짝 제대로 벗어두던가요?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강물에 뛰어드는 이들, 가지런히 신발 벗어놓는다지요. 어느 골목을 헤맸고 어떤 짐을 지고 비틀거렸으며 어찌 한숨 몰아쉬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신발, 더는 필요 없을 신발, 다리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는다지요. 화두 하나 붙들고 면벽할 스님도 선방에 들기 전 신발 가지런히 벗어둔다던가요? 자식을 아홉이나 낳으셨던 제 어머님도 산방(産房)에 들 때마다 토방에 고무신 가지런히 벗어두셨다 했지요. 신코가 안쪽을 향한 걸 보니 간단히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게 분명합니다.
금계국 피고 지고 능소화 피고 지고, 삼복에 배롱나무꽃이 뜨겁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 무색하게 석 달 열흘 붉다는 저 배롱나무꽃, 언제까지 꽃일까요? 열아홉 시절처럼 막 꽃망울 터졌을 때 꽃일까요? 빛깔과 향내를 머금어야만 꽃일까요? 더는 벌 나비 찾아들지 않아도 이미 꽃인 걸까요? 저 환한 배롱나무꽃, 어디까지가 꽃일까요? 그래요, 꽃잎 한 장 한 장 다 꽃이겠지요. 예닐곱 장 붉은 꽃잎 꽃송이, 햇살과 바람과 어둠과 별빛과 새벽이슬과 알짱거린 박새까지 죄 어우러져 꽃이겠지요. 어쩔 수 없는 세월에 흩날린 저 돌확의 꽃잎도, 다시금 꽃이겠지요. 간지럼을 태우면 가지 끝이 키득거린다는 배롱나무. 저렇게 웃음보가 터진 걸 보면 누군가 살살 겨드랑이를 간질인 게 분명합니다. 세 번을 피고 져야 흰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이 고운 꽃이 어서 지기를 고대한 적 있습니다. 아직 쌀밥 먹을 때가 아니라는 듯, 떨어진 꽃잎이 돌확에 한 번 더 피었습니다. 꽃그늘이 환합니다.
나폴레옹이 말에서 내렸답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굽 옆 네잎클로버를 살피는데, 머리 위로 적의 총탄이 비켜 갔답니다. 목숨을 건진 거지요. 엄청난 행운입니다. 네잎클로버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일만 분의 일이라던가요? 바람이나 쐴 요량으로 강둑길을 갑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입니다. 토끼풀이라고도 하는 클로버도 있네요. 습관처럼 풀숲을 헤칩니다. 헤치고 또 헤칩니다. 글쎄요, 행운은 신기루인 걸까요? 자꾸만 허방을 짚습니다. 잎과 잎이 겹쳐 보입니다. 눈알이 빠지도록 한식경, 이번엔 분명 네잎클로버입니다. 행운! 행운입니다.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지요. 요행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잡으려고 우리는,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행복을 모른 채 흘려보내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요즘엔 천 원 한 장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해가는 줄 모르고 찾아낸 풀숲의 네잎클로버, 또 누군가에게 행운이자 한때의 위로일 수도 있겠지요. 그냥 두고 갑니다.
소나기는 피하고 가라지요. 후두두 뛰어든 사람들, 다리 밑이 붐빕니다. 누군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넣습니다. 또 누군가 하염없이 허공에 눈길을 던집니다. 곳에 따라 소나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곳을 비켜 갈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 우산 없어 발목 잡히고 흠씬 젖은 이들, 쉼표 하나 찍습니다. 후련한 낭패입니다. 다리 난간이 꼭 필름 구멍 같습니다. 영사기를 돌립니다.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있는, 목덜미가 마냥 흰 소녀가 비켜주기를 기다립니다. 내 유년의 저 산 너머에도 마타리꽃이 피었습니다. 주머니에 가만 손을 넣어 봅니다. 아! 그런데 이 바보 하며 소녀가 던진 하얀 조약돌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을까요? 기억을 더듬는데, 후두두 뛰어들었던 사람들 가던 길을 갑니다. 소나기가 그쳤습니다. 소녀를 업고 건너야 하는데 개울물은 불지 않았습니다. 소나기는 쇠 잔등을 다툰다지요. 그래요, 내 유년에는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피렌체 베르톨리니 여관, 루시와 샬롯은 아르노강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전망이 좋은 옆방 조지와 아버지 에머슨이 방을 바꿔준다. 우여곡절 끝에 루시와 조지는 결혼을 하고, 피렌체 그 전망 좋은 방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영화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푸치니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깔린다. 사람들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을 찾아 나선다. 가장 좋은 전망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랬어요, 《전망 좋은 방》의 대사처럼 잔디밭에 팔을 베고 누어 하늘을 올려본다. 가슴이 뻐개질 듯 깊고 푸른 하늘이 벅차다. 아래쪽 산마루가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바다, 돛배처럼 한 점 흰 구름 떠가는 아득한 하늘을 숨 쉰다. 하늘이 내게로 와 안긴다. 가득 담은 하늘이 흘러넘칠세라, 가만 두 눈을 감는다. 세상 가장 좋은 전망은 지그시 두 눈을 감는 것이라는 듯. 키리 테 카나와의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귓전에 맴돈다.
안동 도산, 병산서원에 다녀왔습니다. 점심상 짭조름한 간고등어 구이가 입에 맞았습니다. 저물녘의 만대루(晩對樓)는 밤 깊도록 먹먹했고요. 다음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 임청각(臨淸閣) 마당에서의 일입니다. 새파란 아버지가 내게 기역, 니은을 가르칩니다. 손가락으로 마당에 1, 2, 3, 4를 씁니다. 빙빙 솔개가 하늘을 돌자, 겁먹은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습니다. 아버지의 도리깨질에 운을 맞춰 어머니는 키를 까붑니다. 멍석 깔린 초례청, 낯선 낭군 앞 연지곤지 막내 고모 얼굴이 시루봉 진달래꽃보다 붉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까요? 아이고 아이고, 머리를 풀고 마당에 들어서는 고모들, 후두두 비 때문입니다. 어제 먹은 간고등어 때문입니다. 맨땅에서 비린 것이 훅 치고 올라옵니다. 먼 유년의 마당을 정갈하게 쓸어두고 싶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싸리비를 찾는데 누군가 재촉합니다. 헛제삿밥 예약되어있습니다. 꿈 깼습니다.
반짝 볕이 났습니다. 가문 세상을 적셔주는 장맛비가 잠시 주춤, 촉촉합니다. 우리 사람의 몸 칠 할이 물이라지요. 숨 붙은 모든 것들 다 물에서 왔다지요. 물 없이는 한시도 부지할 수 없는 목숨입니다. 단비에 세상이 환한 이유입니다. 한동안 못 만난 거지요. 주야장천 내리는 비에 갇혀 새까맣게 가슴만 타들어 간 거지요. 연잎 위 개구리 두 마리가 부둥켜안았습니다. 이젠 떨어지지 말자. 죽어도 같이 살자, 허리를 껴안고 있습니다. 문구멍 뚫고 신방 훔쳐보듯 곁눈질한 연꽃 망울도 그만 붉고 말았습니다. 금세 터질 것 같습니다. 몸도 마음도 가려운 거겠지요. 푸른 돌옷도 한결 생생합니다. 밭아가는 못물을 보탠 단비 덕분이지요. 아닌 밤중에 발칙한 개구리 한 쌍 때문이지요. 후- 촛불 불어 끄듯, 빙- 커튼 둘러치듯 다시 또 장마 구름입니다. 여우볕에 세상이 다 고슬고슬해졌습니다.
어서 오라 오동잎이 손을 까붑니다. 초입 오르막길, 자일처럼 칡덩굴이 늘어져 있습니다. 떡갈나무 숲속에 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라고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붑니다. 허방을 짚은 게 저라는 듯 노랑나비 한 마리 배틀배틀 앞장섭니다. 딱새가 남겨둔 버찌와 산딸기 몇 개 입에 넣어봅니다. 핸드폰이 울리다 끊깁니다. 한나절쯤 세상을 끊으라는 양 불통입니다. 사드락 사드락 발걸음 소리가 꼭 쌀 씻는 소리 같습니다. 재 너머 어디선가 뻐꾸기가 울고, 갈참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수지가 겨우 손바닥만 합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니 세상이 생각보다 참 작습니다. 망초꽃에 싸리꽃, 꽃다발을 건네받는 사람의 얼굴이 자귀 꽃처럼 붉습니다. 돌아오는 길, 길 가운데 그령을 그러매 둡니다. 내 그림자가 먼저 발목 잡혀 주저앉았으면 좋겠습니다. 편백숲 속 하나뿐인 벤치에 나란히 앉습니다. 반 남은 물병에 꽂은 꽃다발이 곱습니다. 두고 가는 마음 찾으러 마음 마을 산길에 금세 오고야 말 것입니다.
수렵채집시대,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 아이러니하게도 갈수록 먹고살기 어렵습니다. 경쟁자가 많아 식솔 건사하기가 여간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 야기되는 요즘, 자동차를 타고 더 빨리 더 멀리 나가야만 하지요. 출근길이 꽉 막힙니다. 신호에 걸린 자동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이 경고등 같습니다. 비까지 뿌리는데 왜 일찍 나서지 않았느냐, 나무라는 것 같습니다. 백미러를 봅니다. 백 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선 것처럼 금방이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듯 꼬리를 물고 부릉거리네요. 앞으로 달리는 자동차, 앞만 잘 보면 되는 거지 백미러로 뒤는 왜 살펴야 할까요? 쌩쌩 잘 나가는 속도의 브레이크는 왜 밟는 걸까요? 차선을 바꾸거나 길을 갈아탈 때 자칫하면 사고가 납니다. 백미러로 뒤를 살피며 차선을 바꿔야 하지요. 살짝 브레이크 밟으며 길을 갈아타야 하지요. 사람 사는 일도 매한가지입니다. 가끔 뒤를 돌아봐야 합니다. 때로는 브레이크 걸어야, 평생 무사고입니다.
늦은 점심 탓일까요, 까무룩 낮잠이 들었습니다. 가다 서다 반복하며 복작거리는 도심을 빠져나왔습니다. 평화동을 지나자 평화롭습니다. 한적한 농로를 10분쯤 더 달려 옴팡집, 등만 보이는 녀석은 안 봐도 상열이네요. 이미 불콰한 용기 놈이 일장춘몽 80년의 봄을 곱씹습니다. 뽀글뽀글 주인아줌마, 꽃무늬 셔츠에 월남치마 차림입니다. 오랜만에 돼지비계로 목구멍 때 좀 벗겨라. 양재기 가득 탁주를 부으며 상열이가 자꾸 권합니다. 삶은 달걀에 동태찌개, 병치 회에 찐 감자, 안주 일체가 걸게 차려졌네요. 후래자삼배, 사양 않고 거푸 받아 마신 때문인지 훅 올라오네요. 장발이 가발 같은 용기 녀석의 눈동자가 꼭 명태 눈깔 같습니다. 나 화장실 좀, 급히 일어서는데 아내가 흔들어 깨웁니다. 안 자던 낮잠에 웬 잠꼬대? 완주군 구이면 술 테마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타임머신 타고 30여 년 전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옴팡집에서 대포 한잔했습니다.
연두가 슬쩍 발을 뺀 자리에 초록이 들어앉았습니다. 초록이 슬며시 연두를 밀어냈습니다. 지금 저 왕버들의 초록 자리에도 때가 되면 가을이 또 겨울이 찾아들 것입니다. 삼천 변에 억새가 푸릇합니다. 빛바랜 작년 것 틈에 햇것이 끼어들었습니다. 제법 목을 가눕니다. 굽이굽이 삼천을 끼고 마을을 이뤄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아들로, 손자로 대를 이어 살아온 온고을 사람들 같습니다. 아비 억새는 슬쩍 발을 빼고 아들 억새는 슬며시 들어섭니다. 우리 아비들이 그래왔듯이, 저 아비 억새도 어린것들 장딴지에 알이 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지켜줄 겁니다. 등판에 바람을 짊어질 때가 되면, 품 안에 개개비 떼를 품을 때가 되면 자리를 비켜 줄 겁니다. 스러져 거름이 될 겁니다.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삼천이 흐릅니다. 앞물결이 뒷물결을 잡아끌며 수천 년 삼천이 흘러왔습니다. 연두 자리에 어느새 초록이 짙습니다.
긴 줄을 섰지요.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한두 시간쯤 아무렇지도 않게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지요. 공중전화기가 점점 사라집니다. 어쩌다 보이는 부스도 찾는 이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어딘가로 접속되어 있지요. 몸에서 수십 수백 개의 플러그가 뻗어 나와, 도무지 외로울 틈이 없지요. 그리워할 틈이 없지요. 궁금한 것이라곤 없지요. 빨간 공중전화 부스에 모처럼 사람이 보이네요. 지금 저 이는 분명 깜빡 핸드폰을 두고 온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몇백 원 잔돈을 남겼으면 좋겠네요. 핑계 삼아 나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넣고, 뚜- 뚜- 길게 신호 가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은 우체통이 빨간 이유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그렇담, 빨간 공중전화 부스는 발효의 시간을 경고한 것이 아닐까요? 술이 익고 장에 맛이 드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그립고 조금은 궁금한, 그래요 발효는 그런 것이겠지요. 전화국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오직 그대를 생각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문짝 돌쩌귀가 빠져나간 집 마당 가득 망초가 우거진 집 무너진 담장 위로 찔레꽃이 소복한 집 처마 끝에 왕거미가 세 든 집 뒤란 늙은 감나무 아래 빈 의자가 주저앉은 집 비우며 자물쇠도 안 채워둔 집 창호지 찢고 바람이 드나드는 집 두레 밥상에 쥐똥 한 상 잘 차려진 집 이따금 이웃집 개가 짖어 주는 집 담배 한 대참 건너 새 아파트가 즐비한 집 아무도 달력을 넘기지 않는 집 언제까지나 2006년 병술년 9월인 집 마당에 싸리비 자국 정갈하던 집 빨랫줄에 빨래가 고슬고슬 말라가던 집 담장 밑에 봉선화가 곱던 집 바람벽 수건으로 말갛게 얼굴 닦던 집 복 福자 밥사발에 밥 푸고 목숨 壽자 대접에 국 담던 집 형광 등불 아래 달그락 겸상하던 집 칠월 스무사흘 아버지 생신상 차리던 집 반질반질 마루가 윤나던 집 숟가락 통에 숟가락이 많던 집 가나안처럼 약속이 있던 집 추석에 내려올 자식들 미리 기다리던 집 도란도란 파란 대문 집
솥적다 솥적다 소쩍새 우는 봄밤. 살강의 국자처럼 정수리 위에 북두칠성이 떠 있습니다. 으스스 아직은 한기가 듭니다. 옛날 옛적 한 시어머니, 며느리가 미워 작은 솥으로만 밥을 짓게 했답니다. 식구들 밥을 푸고 나면 제 먹을 밥이 없었겠지요. 굶다 굶다 결국 피를 토하고 죽은 며느리, 그 죽은 자리에 피보다 붉게 철쭉이 피어난답니다. 소쩍새가 된 며느리는 한이 맺혀 솥적다 솥적다, 이산 저산 옮아가며 서글피 운답니다. 쌀독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래, 막 입하(立夏) 지났으니 보리타작 할 망종(芒種)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지도에도 없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눈물 반 한숨 반 넘던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한 사발 두 사발, 배곯아 죽은 며느리 먹으라고 이팝 꽃 핍니다. 주린 배 채우고 단숨에 보릿고개 넘으라고 이팝 꽃 핍니다. 새참으로 한술 더 뜨라고 아카시 꽃도 핍니다. 입하에 피어 입하 꽃, 흰쌀밥 같아 이밥 꽃. 이팝 꽃 고봉으로 피었습니다. 항아리를 닮은 감꽃은 아직입니다.
엄마 손을 꼭 잡은 꼬마 공주, 발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대문을 나섰습니다. 엄마표 김밥과 음료수와 과자 몇 봉지와 첫물 참외를 넣은 배낭을 메고 아빠가 앞장섰지요. 뒷좌석 세 살배기 공주는 내내 지저귀었고요. 치즈 마을 언덕엔 벌써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수녀와 트랩 대령의 일곱 아이가 둥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양 떼를 부르는 알프스 목동들의 알펜호른 소리도 들렸고요. 사월 내내 바빴던 아빠 때문입니다. 꽃동산의 튤립은 이미 다 졌고요. 빨랫줄의 빨래가 가만 귀엣말을 합니다. 어제는 온종일 새물내 나게 쨍쨍 웃었다고 펄럭입니다. 이젠 구경하기 힘든 풍경이지만, 용달차의 이삿짐은 그 집의 살림살이를 귀띔해주고 빨랫줄의 빨래는 한 가족의 하루를 소문내지요. 그래요, 어젯밤 꿈속에서 꼬마 공주는 분명 마리아 수녀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불렀을 겁니다. 일곱 아이와 함께 도~ 레~ 미~, 노래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나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드라마에 주역인 우리, 그러나 세상의 무대에선 대부분 엑스트라일 뿐이지요. 세상이 극소수의 선택받은 주인공만 캐스팅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행인 1, 동네 아저씨 2, 건달 3인이지만 애초에 주인공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주인공을 소망했을 세상엔 엑스트라만 넘칩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주인공 차지입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떠받치는 건 한둘쯤 빠져도 표도 안 나는 단역들이지요. 그들 중 일부를 감초라 부르는 건, 쓰디쓴 세상에 감초 같은 존재라는 은유겠지요. 엑스트라를 병풍이라고도 합니다. 잔치의 주인공 뒤에 둘러치는 병풍 말입니다. 그러나 병풍 없는 잔칫상 없지요. 험한 세상 건너느라 고단한 장삼이사 우리, 오늘은 봄의 주역인 꽃을 들러리 세우자고요. 저 빈 의자에 한 번 앉아보자고요. 꽃보다 붉게 웃자고요.
칠흑 어둠을 깨는 천둥 번개, 간밤 요란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겨날 때도 그랬겠지요. 태아처럼 웅크렸었습니다. 방울방울 처마 끝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찰나인 듯 영원인 듯, 바닥에 닿아 산산이 부서집니다. 빅뱅 이전의 우주가 한 점 점이었다지요? 그렇담 폭발하는 빗방울도 퍼져나가 우주를 이루겠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갠 들녘에 민들레가 노랗습니다. 그 환한 현기증에 그만 주저앉습니다. 갓털에 싸인 홀씨가 빅뱅 직전입니다. 바람에 실려 갈 저 홀씨는 또 어떤 우주일까요? 봄 들녘, 한없이 작아져 묻습니다. 빗방울은 어디로 스몄을까요? 민들레의 영토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엘피판, 눅눅한 곰팡내가 싫지 않네요. 아련한 옛 생각에 젖어 봅니다. 먼지를 털고 턴테이블에 얹습니다. 그래요, 흘러간 노래는 역시 엘피가 제격이지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디스크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겁니다. 대중가요라 불리는 유행가는 시대의 거울이지요. 당대의 문화와 역사는 물론, 그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의 인생도 담고 있지요. 제 처지와 닮은 가사를 외우듯 따라 부르던 이의 소설 같은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겁니다, 3분 드라마라고도 하지요. 흑백 사진 속 그날, 나는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로 끝이 없었던 걸까요? 꽃반지 낀 손을 잡고 누구와 오솔길에 다정했던 걸까요? 그 이야기 속 그대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섭니다. 클래식 음악이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었듯 아이돌 노래는 오늘의 유행가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비티에스의 페이크 러브를 그리워할 늙은 아이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지지직 지직 곰팡내 나는 그 시절 그 노래. 엘피판도 나도, 그땐 현재 진행형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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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동심 담긴 그림 세상에서 다시 만나다
겸손의 중요성
전북작가회의, ‘불꽃문학상’ 황보윤·‘작가의 눈 작품상’ 박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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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전북도립미술관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