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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사적지에서

장석주 시인 새해 들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늙는다는 실감이 또렷해진다. 눈이 침침하고 근력은 떨어졌다. 명민함과 정기도 사라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이 듦의 기색이 완연한 내 모습에 놀란다. 늙는 건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다. 노년의 실감이 늘 생경하고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듦과 죽음은 노력하지 않아도 맞는 실존 사건이다. 오늘 아침 라디오 국영방송 채널을 틀어놓은 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죽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전두엽에 번개처럼 꽂혔다. 나는 죽음을 걱정했던가? 그건 우주의 섭리이고, 풀어야 할 실존의 수수께끼일 뿐인 것을. 북극의 한랭전선이 남진하며 매운 추위가 몰려왔다. 한강이 얼음으로 덮이고, 중부 내륙도 얼었다. 오후에 집을 나서 호로고루(瓠蘆古壘) 사적지를 찾았다. 집에서 멀지 않아 답답할 때면 찾는 곳이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비강(鼻腔)으로 밀려든 찬 기운이 식초인 듯 따가웠다. 평지로 내려서니, 언 강과 응달 쪽 잔설, 쨍 하니 파란 하늘, 임진강 너머에서 남쪽을 향해 나는 쇠기러기 떼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에서 쇠기러기나 두루미 같은 겨울 철새가 자주 목격되는 것은 철새들 먹잇감이 흔한 들녘과 장항 습지, 임진강이 한데 몰려 있는 탓이리라.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의 임진강변 현무암 절벽 위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 사적지다. 호로고루는 임진강의 옛 이름을 호로하(瓠蘆河)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일대는 기원 6세기 중엽 이후 2백여 년 간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아들이던 이들이 고향에 부모 형제 처자식을 두고 떠나와 낯선 땅에서 무장을 한 채 국경을 지키느라 낮과 밤을 흘려보냈으리라. 스무 해 전쯤 유적 발굴조사로 땅 속에 묻혀 있던 삼국 시대의 성벽과 우물이 나오고, 다수의 연화문 와당, 토기, 철기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은 평평한 구릉에 고구려 점령기에 쌓은 성벽과 성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강변 갈대숲에서 날지 않는 쇠기러기를 만났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사체는 얼어서 딱딱했다. 함부로 방치된 조류 사체는 죽음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임을 말한다. 천지간에서 나고 죽는 건 사람이나 조류나 마찬가지다. 1500년 전 번성하던 고대 국가의 흔적을 밟고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는 일은 범상하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성벽을 쌓고 전쟁을 치른 이들은 무명의 병사들이다. 더러는 전쟁 중 팔다리를 잃은 채 귀향하고 더러는 차디찬 주검이 되어 낯선 땅에 묻혔으리라. 공자는 물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흘러감이 마치 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시간은 저 아득한 근원에서 흘러와서 현재에 닿건만 현재는 유동하는 가운데 또 다른 현재에 닿는다. 인간은 그 유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멸의 연쇄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명은 나만의 것인가? 생명은 부모에게 받은 것, 내 의지로 살아낸 것,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다. 세 겹인 것을 굳이 내 것으로 한정할 때 생명이 품은 뜻은 협소해진다. 사람도, 새도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간다. 오래된 경전에 말하듯이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티끌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젊을 땐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세월을 헛되이 썼다. 괴로워 술을 마시고 방황하던 젊은 날의 내 어리석은 선택과 행위들이 뼈에 사무친다. 결핍에 허덕이느라 현재에 더 충실하지 못했다. 너무 젊었던 탓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한 줌 지혜도 품지 못한 채 늙고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에 쓸쓸해진다. 나이 들어 대리석을 깎아 새 집 지을 욕망 따위는 품지는 말아야 한다. 차라리 무덤을 생각하며 비감에 젖는 자에게 한 줌의 지혜가 있으리라. 이제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는 걱정거리는 내려놓자고 다짐한다. 오늘은 호로고루 사적지를 다녀왔고, 날 풀리면 속초의 겨울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강사로 활동하며 시집 햇빛사냥, 산문집 등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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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4 16:50

국민의 마음 읽기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영하 15도에 눈까지 내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달력을 보니 소한이 지났다. 어른들이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 소한 추위는 꾸어라도 한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소한이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봄이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일간지의 뉴스를 훑어보니 이번 주는 부동산에 관한 뉴스와 주식 뉴스가 크게 보인다. 작년 한 해 동안 아파트값이 20%나 올랐고 올해도 떠 오른다고 한다. 주식은 코스피 3000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렇게 다 오르는데 어째 내려가는 것이 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지지율이 36.6%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지율 하락의 주원인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인가 보다. 대통령은 공공임대주택을 방문해서 2022년까지 총 650만 호를 공급하겠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공공임대주택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신임 국토부 장관은 양질의 값싼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줘서 집값을 안정시키겠다 설날 이전에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또다시 스물다섯 번째로 발표되는 특단의 대책에 관심을 가져본다. 1970년대에 방주연이라는 가수가 당신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모래밭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 코, 입 모두 그리고 입가에 미소도 그렸지만 당신의 마음 그 한 가지는 몰라서 못 그렸다는 내용이다. 마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현 정부가 한가지 놓친 것이 있다. 무엇이든 단숨에 다 이루고 성과를 내려고 하다 보니 국민의 마음 읽기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첫째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기도 힘들다. 핸드폰에서 화면을 누르지 않아도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면 전화를 걸어준다. 곧 자율주행차를 타게 된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했더니 이런 변화가 모두 4차 혁명시대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둘째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하여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상을 살아내기에 힘들다. 젊은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도 집 한 채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있고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서 한 칸 장만한 사람들은 세금 때문에 시름이 깊다. 셋째 정부와 소통이 안돼서 힘들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려나 보다. 기자회견이라는 단어도 오랜만에 듣는다. 왕이 종과 북을 치고 피리를 불고 노래를 하자 백성들은 왕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곤궁하게 해 놓고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시끄럽게 노래를 하느냐며 이마를 찌푸렸다. 왜냐하면 임금이 백성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서 즐겁게 놀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이 종과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했더니 백성들이 우리 임금님께서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가. 음악 소리가 참으로 즐겁다고 했다. 이는 임금이 백성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맹자 <양 혜왕 하> 편에 있는 내용인데 소통과 함께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구절이다. 중국 청대 문인이면서 관직에 종사했던 원매 선생은 그가 지은 조리서 <수원식단>에서 위정자가 할 일은 한가지 정책을 더 만드는 것보다 국민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폐단 한가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본다면 스물다섯 번째 발표될 부동산 정책 특단의 조치는 새로운 묘수를 만들어내는 그 것보다는 이미 있는 정책 중 폐단으로 여겨지는 한 가지를 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이것은 그동안 각계 각층에서 정부에 대고 수도 없이 외쳐온 규제 철폐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나라이건 기관이건 간에 리더가 몇 명의 참모만 가지고 좋은 나라 좋은 기관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국민이 원래 자기가 살아오던 방식대로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데 무엇이 불편한지 그 불편함을 제거해 주는 것이 정치다. 어디 그런 세련된 정치를 할 사람 없는가?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신계숙 교수는 저서로 역사로 본 중국음식, 수원식단(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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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7 17:24

쥐의 해 가고 소의 해 오라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콜레라, 말라리아, 독감, 에이즈 등 인류를 공포에 떨게한 수많은 전염병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과 지금은 박멸된 적사병(赤死病)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가 아닐까 한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을 벼룩이 쥐로부터 사람에게 옮기는 병으로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키면서 중세 암흑기를 끝내고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역사를 바꾼 전염병이다. 흑사병은 14세기 중앙아시아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하여 몽골군이 서쪽으로 침략할 때 따라왔다. 1346년 몽골군은 흑해 북쪽 제노바 무역 기지 카파를 포위 공격하면서 흑사병으로 숨진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성벽 안으로 던져 넣어 적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생화학 테러의 원조인 셈이다. 그 시체에 있던 페스트균은 벼룩을 통해 쥐에게 옮겨갔고 그 쥐는 상인들의 화물선에 무임 승선하면서 이탈리아반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때 배고픈 고양이들이 쥐들을 열성적으로 공격한 덕분에 흑사병은 조금 주춤하기도 했으나 가톨릭 교회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불태워 없애기 시작하면서 마르세이유에서는 고양이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로 인해 쥐들은 대거 흑사병을 퍼뜨렸다. 마침 수년간의 대기근으로 허약해진 유럽인들은 속수무책 쓰려졌고 유럽 사회는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절대 진리로 군림하던 가톨릭교회조차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회개하고 고행을 하거나, 반대로 종교를 버리고 어차피 죽을 거 즐기다 죽자며 쾌락주의로 빠져들었다. 전염병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염자, 유대인, 이교도, 나병환자를 악마로 몰아 화형 시켰다.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농노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장원제도는 붕괴되고 중세를 지배하던 종교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르네상스가 싹트기 시작했다. 쥐들이 퍼뜨린 흑사병이 중세를 무너뜨린 것이다. 흑사병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무서웠던 전염병으로 천연두가 있다. 천연두는 오랜 기간 인류를 괴롭혀 왔는데 이집트 파라오 미라에도 천연두 마마자국이 남아 있고 수백 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우수한 무기보다는 신대륙에 옮겨간 천연두가 원인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매년 40만명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감염자의 20~60%, 소아는 80%가 사망한 무서운 질병이었다. 살아남아도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거나 합병증으로 실명하는데 18세기 런던 수용소의 시각장애인 중 2/3가 천연두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 천연두가 1979년 드디어 지구상에서 영원히 박멸되었는데 거기에 소가 큰 역할을 했다. 예로부터 천연두를 막기 위한 시도로 천연두 환자의 고름 딱지를 피부나 코에 접종하는 인두법이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 시행되었지만 인두법은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감염시키기 때문에 심각한 부작용이나 사망,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시골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소젖 짜는 여인들이 우두(牛痘)를 앓고 나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두를 접종하면 소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어 우두 접종이 쉽지 않았다. 1796년 5월 소젖 짜는 여인 사라 넬름즈의 손의 우두 고름을 하인의 아들 8살 제임스 핍스의 팔에 접종한 후 2개월 지나 천연두 고름을 접종시켰으나 천연두가 생기지 않았다. 이를 왕립 협회에 보고하였으나 인증을 받지 못하자 제너는 자비로 우두법에 대한 논문을 발간하며 홍보했고, 많은 시간이 지난 끝에 인증을 받았다. 제너는 자신의 이 예방 접종법을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가져와 백신 (vacc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암소 덕분에 전 인류는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쥐의 해 2020년이 지나가고 소의 해 2021년이 밝았다. 쥐의 해에는 쥐가 퍼뜨린 흑사병만큼이나 코로나 대유행으로 전 인류가 힘들었다면 소의 해에는 소(vacca)로부터 시작된 백신으로 인류가 코로나19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해 본다. 희망찬 새해! △김성호 과장은 경북대 의과대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북대병원 전공의, 신장내과 전임의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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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1 15:34

신 고군산군도

김철규 수필가 한반도 서해안 중심지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양 날개로 한 반도형 항구도시다. 또한 고군산 군도라는 부속 섬들을 갖고 있으나 새만금 사업으로 이들 섬 대부분 육지가 되었다. 즉 긴 역사 속에 외톨이 섬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고군산 군도이지만 지금은 지난 2010년 4월에 비응도를 출발점으로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까지 연결도로로 인해 육지가 된 것이다. 육지가 됨으로 인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곳을 갈수 있다. 나는 고향이 야미도인지라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이다. 고군산군도는 천혜의 절경을 품은 보물이다. 동해안이나 남해안에서도 볼 수 없는 풍광에 도취되는 곳이다. 그래서 고군산군도 중심지인 선유도에는 선유8경이 있다. 선유8경은 좀 다른 특징적인 8경이다. 1,선유낙조(仙遊落照) 2,망주폭포(望主瀑布) 3,삼도귀범(三島歸帆) 4,월영단풍(月影丹楓) 5,명사십리(明沙十里) 6,평사낙안(平沙落雁) 7,장자어화(壯子漁火) 8,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이 선유8경이다. 선유도에서 선유낙조, 망주폭포, 명사십리, 평사낙안, 삼도귀범을 감상할 수 있다. 명사십리는 선유해수욕장의 보배이며 해당화가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나는 여름이면 선유도해수욕장을 가끔 찾았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가면 명사십리를 달밤에 거닐 수 있다는 생각, 해당화를 본다는 마음은 나로 하여금 선유도해수욕장을 찾게 만든다. 전주에서 직장에 다닐 적에 여름휴가는 가족과 함께 야미도에 계시는 부모를 보기위해 매년 다녀온다. 그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선유도 해수욕장엘 꼭 간다. 1박을 하면서 밀가루 같은 명사십리를 달밤에 거닐던 생각은 지금도 머리를 스친다. 70년대에는 지금처럼 개발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해수욕장이 있을 뿐 명사십리 사구에는 해당화가 장식되어있어 해수욕객들의 눈을 못 돌리게 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평사낙안에는 오랜 세월 폭풍을 견뎌낸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사진작가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잡목이나 풀도 거의 없는 평사낙안을 지키는 이 소나무 한그루는 외롭게 7-80년을 버텨오다가 몇 년 전에 심한 태풍으로 생을 마감했다. 주민은 물론, 이 소나무를 그리는 모두는 안타깝다는 말을 남긴다. 나는 얼마나 아깝고 아름다웠는지 몰랐던 소나무다. 지금도 선유도를 찾으면 소나무는 모습을 감췄지만 펑사낙안은 눈을 떼지 못한다. 또한 월영단풍은 가을이면 신시도를 단풍으로 장식을 하지만 그보다는 월영봉 정상에는 최치원 선생이 글을 읽었다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넓은 돌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5-6번 다녀왔으며 정상에서는 고군산군도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금의 고군산 군도는 육지가 되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어 주말이면 차량 행렬이 붐빈다. 육지가 된 것은 군산에서 부안군을 연결하는 새만금사업으로 제방이 건설되면서 섬끼리의 교량공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 아닌 육지가 된 고군산군도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감개무량함도 있지만 그 보다는 여객선을 이용한 추억의 잔영이 아른거림은 더 한다. 오늘의 새만금이 만들어진 것은 필자가 전북일보 기자시절인 1978년부터 우리나라 국토확장과 식량안보차원에서 서해안에 대단위간척사업을 벌이자는 정책기사를 써댔다. 결국 중앙정부가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 1988년 제13대 노태우대통령후보의 공약사업발표로 1991년 11월에 오늘의 새만금사업 기공식이 있었다. 나는 전라북도 의회 의장자격으로 테이프커팅을 했다. 오늘도 새만금을 생각하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여서 고군산군도를 찾을 때면 항상 가슴 벅찬 감개무량함이 나를 외워 싼다. 오늘도 푸른 수평선이 넘실거리는 선유도 해수욕장과 해당화를 보고 왔다. 끝없는 수평선과 함께 때로는 넘나드는 물결을 벗삼은 선유도 해수욕장은 오늘도 고군산군도를 지킨다. 청춘남녀는 달빛을 품으며 백사장에 사랑의 발자국을 남긴다.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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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1 14:07

눈으로 말하기와 경청하기

나태주 시인 이제 우리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바깥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자기 집 문밖을 나서는 순간 그 무엇보다 먼저 챙겨야 할 물건이 마스크다. 마스크 착용 없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고 공공장소는 물론 공원이나 예식장, 헬스클럽조차 드나들기 어렵게 됐다. 심지어 가게나 식당에 갈 때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안된다. 이제 마스크는 생활필수품이 돼버린 지 오래다. 오죽하면 속옷 없이는 살아도 마스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다 나왔을까. 그런데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니 언뜻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고 대화하기도 힘들다. 더러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싶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특히 마스크를 쓴 여성분들은 이쪽에서 헤아려 알기가 쉽지 않다. 마스크가 입술과 코를 비롯한 얼굴 아랫부분을 모두 가리는 바람에 이마와 눈썹과 눈만 빼꼼히 나와 있는 모습으로는 상대방의 특징이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도무지 누구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눈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마스크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의사소통에 있어 입술과 볼의 기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만, 입술의 움직임이나 볼의 움직임으로 먼저 상대방의 의중을 짚어 알게도 된다. 그런데 그 입술과 볼이 가려진 형편이니 답답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간에게 눈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 말이다. 눈이야말로 마음의 창이다. 영혼의 거울이다. 마음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얼굴의 기관이 바로 눈이다. 마스크 차림으로 사람들과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전보다 훨씬 밀도 있는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도 실은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역작용으로의 효능이다. 더러 젊은 여자분들 말을 들어보면 마스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얼굴 화장을 하더라도 윗부분만 하게 돼 오히려 편해졌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래선지 여자분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스크 벗기를 꺼리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 또한 마스크가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풍조 가운데 하나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사람이 살아서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 나는 지금도 술잔에 입술을 대고/ 그대를 바라보며 눈물 글썽이고 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외우는 시로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술 노래라는 작품이다. 글의 제목은 술 노래지만 글의 내용은 사랑이다. 마스크를 쓰면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새삼 이런 시가 가까이 다가오는 요즘이다. 더하여, 최근 우리에게 생긴 것은 경청의 문화다. 경청이란 글자의 뜻 그대로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래도 예전에는 경청하는 문화가 있었다. 어른이 말하든 아이가 말하든 누군가 말을 하면 귀를 기울여 정성껏 들었고 또 거기에 정성껏 반응했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지고 피차간 하는 일이 바빠지다 보니 이야기할 때도 상대방의 말에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조심스럽게 말해주는 대화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수월찮게 소원해지고 데면데면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사는 날들이 지속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경청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하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 해도 문학강연에 가서 독자들이 책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할 때 그 이름을 물어 적어주는데 경청이란 것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을 잘못 쓸 때는 저쪽도 불편하고 이쪽도 민망한 일이 된다. 그래서 아예 복사지를 하나 준비해서 거기에 이름을 적어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가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쓰기를 하면서 새롭게 생긴 삶의 형태, 문화 풍조다. 그렇다. 이참에 우리도 이런 것들을 새롭게 익히면서 조금쯤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됐으면 싶다. 코로나 19가 우리의 삶의 형태를 바꿔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좋은 쪽으로도 바꿔놓았노라 자위 아닌 자위를 해보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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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7 17:54

삶은 선택이다

▲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성경의 마가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5000여 명의 무리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과 논쟁보다는 그 자체 상황에 주목해보자. 일단 당시 상황을 보면 네 종류의 주체가 등장하는데, 예수와 제자들, 5000여 명으로 표현되는 성인 남성들, 그리고 무리 속에 있었지만 기록되지 못한 여성과 아이들이 그들이다. 무엇보다 이 주체를 바라보는 예수와 제자들의 시선이 다르다. 제자들은 본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예수와 모인 무리들의 관계로 바라본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36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예수와 무리의 관계가 있을 뿐, 예수와 제자의 관계, 제자와 무리의 관계는 빠져 있다.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항상 제자의 역할, 제자의 길을 강조한 것은 이유가 있다. 본인이 모든 일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일을 하도록 한다. 제자들은 선택하지 않았다. 빈 들에 모인 배고픈 무리들의 현실을 자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상황을 회피한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럼에도 제자들은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퇴로는 없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 후에 나온 결과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는 대답이다. 비로소 제자들은 무리의 굶주림과 결속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선택을 강요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을 지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모든 것을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성경 본문에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빈 들과 날이 저문 것은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이자 조건이다. 예수는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빈 들이니까 속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저물었으니 흩어져 집으로 가야 한다는 제자들의 말을 뒤집는다.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한없이 오만하여 맘대로 살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체념 속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가 지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구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진 다음에, 바람이 불 때, 비가 내릴 때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정작 바람을 멈추게 하려는 이들은 바람이 불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걸 막으려고 했던 이들은 정작 비가 내리면 나 몰라라 한다.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 날이 저문 시각에 빈 들에 서 있다. 이곳이 갑자기 아름다운 숲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고 태양이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은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삶은 선택이다. 선택은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선택하는 삶이야말로 개인을 존중한다. 계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다섯 살 아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없는 삶이 늘어가는 시대에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권리보다는 책임에 가까운 것은 아닐지. 다섯 살 아이에게는 삶이나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그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인해 죽었다. 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선택의 순간을 가졌든 아니든 간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니까. 나아가려면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려면 맞서야 하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165쪽)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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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0 17:00

동결, 감축, 폐기의 3단계 접근이 현실적이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예고된 대로 바이든 신 행정부는 확실히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민주당 행정부가 그래왔듯이 바이든 차기 행정부도 명분과 원칙을 존중하고 동맹 강화와 다자적 접근을 통한 대외전략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국제질서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해 온 토니 블링큰을 첫 국무장관에 지명한 것은 그가 클린턴 정부시절부터 오바마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깊이 관여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그의 대북관은 상당히 원칙론적이다. 바이든 당선자가 김정은 위원장을 불량배라고 부른 것과 같이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도 폭군이라고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비핵화 협상을 벌여왔다고 비난했다. 그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포괄적행동계획(JCPOA)이라는 이란 핵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관여한 바 있다. 북핵문제도 트럼프식의 톱-다운 방식이 아닌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실무적인 부분부터 꼼꼼히 따져나가는 바텀-업 방식의 협상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북아 정세에 있어 한ㆍ미ㆍ일 3자 협력구조를 탄탄히 하여 북한을 후원하고 있는 중국을 압박하고 북한이 핵포기 의사를 명확히 밝히기 전까지는 대북제재를 지속 유지해 나갈 것으로 판단한다. 한 인터뷰에서 동맹국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쥐어짜야 하며 경제적 압박을 위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그의 접근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실 오바마 행정부 시절과 거의 유사하다. 바이든 당선인이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이었고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오바마 행정부시절 백악관 참모였기 때문에 큰 틀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원칙외교, 다자협력 외교를 통해 초국가적 안보문제에 대한 협력을 이끌었고 이란, 쿠바, 미얀마 등 적대 국가들과도 관여정책을 통해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초기 과감한 접근을 시도하려 했으나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로 인해 오바마 행정부는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물론 북미간 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시키고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 식으로 하여 2.29 합의를 도출하였지만 이 역시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로 좌초되고 말았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략적 인내로 회귀했고 중국을 압박하여 북한이 협상장으로 나오도록 했으나 이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핵 위기의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 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북핵 협상과 관련하여 지나온 역사를 리뷰해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대부분의 북핵 위기가 우리와 미국의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과도기의 틈을 활용하여 북한은 핵능력을 강화해 왔고 결국 이에 대한 대응은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귀결되었다. 강경한 대북정책은 도발-보상-파기의 악순환을 형성하면서 다시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초래하는 패턴을 반복시켜 왔다. 바이든 신 행정부와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오바마 행정부와 같이 대북제재를 유지하는 가운데 북핵 불용의 입장에서 원칙적인 대응을 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북한이 오판하여 또다시 핵미사일 도발을 감행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바이든 신 행정부도 오바마 행정부와 같이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협상장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간 북미간 합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한반도는 다시 북핵위기의 긴장과 위협속에 격랑으로 표류할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북한의 핵능력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기간 동안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을 선언하였다. 과거와 같이 불완전한 핵능력을 가지고 핵능력의 모호성을 유지한 채 살리미 전술을 통해 딜을 하려는 시기는 지났다. 북한의 핵위협은 훨씬 강화되고 현실화되었다. 바이든 신 행정부는 북한을 방치하는 것이 아닌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전략과 입장을 반영하여 신속하게 북핵협상에 나서야 한다. 동결-감축-폐기에 이르는 3단계에 맞는 상응조치를 추진함으로써 단계적으로 북한 핵폐기를 유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과거와 같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여러모로 우리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방위적 외교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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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6 17:51

다시 좋은 세월이 오면

나태주 시인 최근 코로나 대란으로 우리의 삶은 많이 제한적이다. 예전에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하던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모여서 식사를 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조차 편안하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보는 일도 쉽지 않고 대단위 회의나 축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외국 여행이다. 가끔 여행 가방을 들고 인천 영종도 공항을 거쳐 외국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우리들 삶의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지루한 일상을 새롭게 싱싱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아주아주 막혀버린 것이다. 나는 외부 나들이가 잦아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다. 이것도 코로나 이후에 일어난 변화인데 시외버스 시간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매표구 앞에 걸려있는 시간표를 보면 검은색으로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그것이 모두 버스 노선을 줄인 증거다. 아예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표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아예 공주에서는 인천공항으로는 버스가 한 대도 가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 그만큼 비행기가 안 뜬다는 얘기다. 그러니 관광업이든 숙박업이든 제대로 되겠는가. 이제는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 대란이 평정돼 예전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외국 여행 한 번쯤 다녀오는 것 말이다. 만약 나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겨 다시금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스페인을 들고 싶다. 그냥 멀리서 생각할 때는 투우의 나라, 집시의 나라, 피카소의 고국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정작 가보니 스페인이야말로 자연이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햇빛이 다르고 바람이 달랐다.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 자유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똘레도가 가장 좋았다. 내가 똘레도를 찾은 것은 오후의 시간 한나절. 똘레도의 골목과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며 기분이 좋았다. 발길이 허뚱허뚱 허공을 딛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에서나 미국 세도나에서 느꼈던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저녁 식사시간. 여행사 직원이 준비한 식당이 그럴듯했다. 포도주와 애저꼬치뇨 요리가 메뉴였다. 애저는 애기돼지를 이르는 말이고 꼬치뇨는 돼지 통구이의 스페인 말이란다. 이른바 새끼돼지 바비큐. 돼지 다리 하나씩을 줬다. 조그맣고 먹음직스러웠으나 나는 차마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애기돼지를 죽여 바비큐로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나는 내 차례로 온 바비큐를 다른 사람에게 밀어주고 대충 요기를 한 다음, 음식점 밖으로 나와 한동안 서성였다. 골목길이 아주 좁았다. 그 길을 사각형 조그만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빠져 다녔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길가에 만들어놓은 턱에 올라가 자동차를 피했다. 자동차들도 조심조심 지나갔다. 그럴뿐더러 거리의 불빛이 매우 흐렸다. 어른어른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애상적이고 환상적이었다 그럴까. 어디선가 문득 카르멘의 후예인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불쑥 나타나 나에게 웃어줄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길거리에 버려진 돌멩이처럼 멍하니 서서 울먹이고 있었다. 울먹임. 까닭도 없는 울먹임. 울먹임 그 자체의 울먹임. 그런 애상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골목길을 저만큼 걸어 낯선 가게를 하나 발견하고 불쑥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플라멩코 춤을 추는 집시 아가씨 인형을 두 개 사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 안 될 것 같은 목마름이 그때 있었다. 아, 다시금 좋은 세월이 오면 스페인이란 나라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도 좋고 프라도 미술관도 좋고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도 좋고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은 더욱 좋았지만, 그 어디보다도 똘레도에 한 번만 더 가보고 싶다. 몬주익 언덕에서는 황영조 선수의 조각상을 보기도 했었지! 하루만 똘레도의 골목길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성성이고 싶다. 낯선 가게, 낯선 음식 앞을 기웃거리며 걷고 싶다. 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지! 어쩌면 이것은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닐 것이다. 하도 지루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날이 계속되다 보니 내가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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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9 17:48

백넘버 51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취미로 야구를 시작했다. 공을 좋아해서 축구와 농구, 당구, 족구,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했지만, 야구는 주로 시청하는 것에 만족했던 종목이다. 운동 역시 자신과 맞는 것이 있어서인지 주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야구라는 스포츠는 직접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야구 경기라는 것을 해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투수로 나서 완투했던 기억인데, 경기 후 한동안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번에 야구를 시작한 데에는 건강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경기 안 되었지만 현재까지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타율도 아직은 좋은 편이다. 직접 선수로 뛰면서 느낀 것은 그 동안 야구라는 스포츠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다. 흔히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야구 선수들은 거의 뛰지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 식으로 약간의 조소가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야구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체력을 요하진 않지만 매우 섬세한 집중력을 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비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나 공을 잡고 던지는 것, 심지어 주루를 할 때 베이스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하거나 부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격을 하는 것도 투수가 던진 공을 배트 중심에 맞춘다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엇보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축구는 한 두 사람이 잘 못 뛰거나 실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축구 경기에 퇴장을 뜻하는 레드 카드가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야구 경기는 9명의 선수가 수비와 공격에서 자신의 자리와 타석에서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수비에서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날아오는 공을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타석에 들어서서도 투수의 공을 보고 치는 것은 자신만의 몫이다. 물론 투수의 비중이 절대적이고 소위 강타자의 역할이 큰 것은 맞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퍼즐을 맞추듯이 모여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구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각자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배치가 가능하다. 투수와 포수, 내야수와 외야수 등 각자의 포지션에 따라 다른 역량이 요구된다. 유격수처럼 순발력과 강한 어깨가 더 요구되는 포지션이 있는가 하면, 1루수처첨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많지 않은 자리도 있다. 타선 역시 1번부터 9번까지 나름의 배치와 그 이유가 존재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야구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야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세 명이 아웃되지 않으면 이닝이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 끝이 난다. 후반전에는 힘이 있는 선수가 더 많이 뛰어 경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각 선수가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어려운 순간이나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집중하고 걸어갈 때에야 공격과 수비가 교체되듯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유니폼 뒤에 새겨진 백넘버는 51번이다. 첫째 아이라 51세에 야구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정해 주었다. 지금은 신발과 헬멧 외에 글러브와 배트 등 대부분을 빌려 쓰고 있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축구나 농구를 할 때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다. 내가 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답답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역할을 생각하고,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부족한 것들이다. /권경우(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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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2 20:09

역사왜곡, 동북아 냉전, 그리고 우리는?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정치학자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비추는 현재의 거울인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최근 625 전쟁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언급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625 참전 70주년 연설에서 625 전쟁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의 침략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항미원조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중국 지도자의 언급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625 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5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자를 낸 한국 역사상 가장 슬픈 전쟁이다. 북한의 남침이라는 객관적 역사의 증거 앞에서는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 자체도 남침에 의한 전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 있음에도 이를 다르게 기술하는 역사의 왜곡 현상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역사의 왜곡 현상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논란을 가져오고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식민주의 시절 본인들이 자행한 많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후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터무니없이 주장하고 있으며 위안부ㆍ강제징용 등 과거사에 대해서 통렬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 등을 통해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지역의 역사를 왜곡해 왔다. 최근 강조하는 중국몽을 통해 중화민족주의의 부활을 위한 역사왜곡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현상이 동북아시아에서 유독 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냉전의 여파와 현재까지도 그 냉전적 질서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데 연유한다. 2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였던 유럽이 유럽 공동체로 발전한 것을 보면 참 대조적인 현상이다. 유럽의 경우 냉전기간 중 역사와의 과감한 화해를 시도하였다.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역사의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은 석탄철강공동체 형성을 시작으로 정치 공동체까지 일구어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는 통절하게 사죄를 구하고 또 그 반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볼 때 역사를 대하는 유럽인들의 통찰력은 가히 본 받을만하다. 동북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이다. 남북이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세계 1, 2위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세력다툼은 점입가경 수준이다. 대선 기간 중인 미국은 중국 때리기를 통해 미국인들의 결속을 호소하고 있고 중국은 이러한 공세에 밀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70년 전 항미원조 전쟁이 지금 다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시 중국 참전의 명분이면서 현재 중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침략자를 때려눕혀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줬다. 주권, 안전, 발전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 인민은 정면으로 통렬한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중국 역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미항전을 통해 정치적 체제결속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는 우리는 매우 불편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되거나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어도 미중 갈등이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다. 문제는 이러한 미중갈등이 동북아시아의 신냉전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미일 대(對) 북중러 구도가 고착될 가능성이 높으며 한반도의 분단선은 과거 유럽 동서냉전의 철의 장막처럼 견고한 미중 대립의 마지노선으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놓여있는 우리는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요구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북관계마저 한미관계와 북중관계 속의 틀에 갇혀 표류하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전진도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로서는 강대국들의 역사왜곡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 뿐 아니라 미중갈등 속에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남북관계가 주도적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구조적인 틀을 제공할 것이나 주변 강대국의 집요한 편가르기와 북한의 잘못된 선택, 우리 국민들의 분열 등이 중첩되면 매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여야가 힘을 모으고 국민들이 정부 정책을 튼튼하게 지지해 주어야 한다. 그 것이 문제해결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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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9 19:41

근근이 먹고산다 -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해 근근이 먹고 산다. 지금도 이 문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온다. 이 문장은 우리 집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다닐 때 여름방학 숙제로 쓴 일기장에 들어 있던 문장이다. 마침 그때는 나도 아들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시절인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여름방학 숙제 검사를 하던 아들아이 담임선생님이 일부러 나를 불러서 보여준 문장이기도 하다. 아들아이가 일기장에 쓰기는 했지만 이 말은 애당초 아들아이의 것이 아니다. 아이의 엄마가 아들아이에게 자주 해준 말이다. 그러기에 아이가 그것을 외워두었다가 마침 일기장에 아무것도 쓸 거리가 없는 날 이 말을 기억해내고 무심히 옮겨 적은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 아주 작은 단독주택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홍가가게라고 부르던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아이는 그 장난감들에 눈독 들여 살았다. 들락날락 가게 문을 드나들며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장난감을 넉넉하게 사줄 만한 돈이 아내에게 있을 까닭이 없었을 터. 늘 푼돈으로 쪼개어 써도 돈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쌀값, 연탄값, 반찬값을 제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새로운 장난감에 마음을 뺏기고 자꾸만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으리라. 그럴 때마다 아내가 아이의 등짝을 한 대씩 때리면서 했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하여 근근이 먹고산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나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경각심을 심어주던 아이의 엄마나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참으로 한심한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한심한 사람은 바로 나. 그래, 학교 선생으로 일한다는 사람이 아이에게 장난감 하나 시원시원 사주지 못하고 아내에게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들고 또 아이에게는 그걸 또 일기장에 쓰게 했단 말인가! 이제 와서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고 송구한 심정이다. 근근이란 말은 일상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어렵사리 겨우란 뜻의 부사이다. 또 이 말은 한자에 그 뿌리를 둔 말이기도 하다. 근근이에 쓰여지는 근(僅)이란 글자는 여러 가지 뜻인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며 마이너의 뜻이다. 겨우, 거의, 가까스로, 다만, 단지(但只), 희미하게(稀微--), 적게의 뜻이 그것들이다. 정말로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삶이 그러했다. 매우 왜소하고 매우 부족하고 매우 썰렁하고 매우 춥게 살던 시절이다.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형편이나 상황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근근이 어렵게 사는 삶이다. 시간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고 인간관계가 그렇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두루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단군 임금 이래 가장 잘 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들쑥날쑥이 있기야 하겠지만 의식주가 그런대로 해결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한껏 보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나의 발언이 선뜻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나잇살이나 먹은 내 눈으로 보기엔 우리는 지금 분명히 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냥이 아니라 기적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고 자기만 낙오자라고 투덜거린다. 마이너라고 루저라고 한숨을 짓는다. 모두가 상대적 비교 탓이다.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것만 흘낏거린 탓이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자기의 것을 소중히 아름답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높여야 할 일이다. 근근이 먹고 산다는 이 말을 우리는 지나치게 부끄럽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상 우리는 모두 오늘날도 여전히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안쓰럽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람들이다. 비록 근근이 먹고 살지만 마음만은 더욱 너그럽게 부드럽게 풍부하게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길이 정말로 물질로 마냥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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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2 15:50

체념과 희망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 동안 삶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훅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주름, 흰머리, 뱃살, 노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이 주로 외모나 신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실패와 좌절, 절망, 불안, 우울 등은 심리적이고 정서적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체념이라는 단어 역시 그 중 하나다. 실패나 좌절이 더 깊고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체념은 기대를 접는 데 있어서 뭔가 순간적 감정이나 판단 등 일시적 느낌으로 남는 듯하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라고 썼다. 칼 폴라니는 죽음이라는 좀 더 궁극적인 절망 앞에서 체념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은 일상의 다양한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시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체념 사이에서 흘러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던 꿈은 이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체념의 숫자를 늘려가는 중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체념으로 구성된다. 동그란 공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거의 좋아했다. 잘한다는 말도 꽤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 몸은 과거의 몸이 아니다. 초등학교 운동회때 부모들이 이어달리기에서 많이 넘어지는 이유도 머리가 과거의 몸을 기억하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제 조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체념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내 몸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체념과 포기는 다르다. 체념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시간에 따른 판단 행위를 뜻한다면, 포기는 미래를 포함한 시간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다. 그런 점에서 체념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체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체념 이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체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체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거나 발견하기도 한다. 체념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체념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한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상상,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절망과 죽음이라는 극단의 비극에서 비로소 희망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살면서 더 필요한 일은 수많은 체념 속에서 희망을 엿보는 일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라는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다네. 하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사실,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은 항상 시궁창 같은 현실에 절망했고 좌절했다. 그 속에서 체념은 지극히 당연한 대다수의 선택이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체념 가운데 별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궁창에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시궁창 안에서도 탐욕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기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고 말을 해주어야 한다. 칼 폴라니가 말한 죽음이라는 현실을 기초로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것은 어쩌면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현실적인 노력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온통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방법만 강조할 때, 누군가는 저기 사람이 살고 있다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체념 가운데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권경우(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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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5 17:43

종전선언은 다시 추진되어야 한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종전선언은 법적 용어는 아니다. 대립되는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전쟁을 종결하자고 합의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다만 일방 당사자가 또다시 전쟁을 걸고 들면 이 선언은 파기될 수밖에 없다.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아직 정전협정 체제이다. 70년전 625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휴전협정 상태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남과 북, 주변국들이 보는 휴전상태, 정전체제를 보는 시각은 각기 다르다. 북한은 탈냉전이후 1990년대 들어 흡수통일의 불안감 등으로 정전협정 체제의 무력화 조치를 시행해 왔다. 정전협정 이행의 중요한 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등을 차례로 무력화시키고 북-미 사이에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라도 새로운 평화보장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면서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조미 군사기구를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이며 따라서 자신들과 미국이 주체가 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과 중국은 어떤가? 이들의 대한반도 정책, 정전협정을 보는 시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 전쟁과 냉전, 그 이후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열세에 처한 남한을 돕기 위해 미국이 참전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한반도가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북한을 돕기 위해 중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했고 중국은 이른바 항미원조 즉 미국의 대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20세기 동서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625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냉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는 한반도의 분단선은 주변 강대국들의 지역 패권의 임계철선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지난 70년간의 동북아 질서를 완전히 전환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과 동서 냉전을 거치면서 사분오열한 유럽국가들은 냉전체제를 극복하고 하나의 유럽연합 체제로 전환하였다. 유럽 연합 회원국들간 경계와 철조망을 없애고 화폐와 관세도 통합하였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자유롭고 군사적인 적대행위가 종식되었다. 유럽은 하나의 거대한 평화체제인 셈이다. 유럽의 역사만큼 역사의 상호작용이 심했던 동북아시아에서 유럽연합과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냉전체제가 남아있는 한반도만이라도 정전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평화체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상호간 위협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시키고 비핵화를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이 중심이 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입장 하에 노력해왔다. 그리고 남북관계뿐 아니라 북미관계의 개선을 위해 북미간 비핵화 협상의 전개를 측면에서 지원해 왔다. 지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우리 정부가 노력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안전보장을 교환한 싱가포르 북미 합의도 커다란 진전이 있었지만 당시 종전선언을 도출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 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오랜 분단구조 하에 상호 신뢰가 부족한 한반도 상황에서는 평화체제의 시작점으로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종전선언 당사국들간의 정치적 의무, 국제적인 책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923(한국시간) 유엔총회 연설에서 문대통령은 종전선언 추진을 다시 제기하였다. 종전선언은 지난 1,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북미간에 논의를 한 바 있고 북미 모두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대선일정, 북한의 고립적인 대외전략 등을 감안할 때 북미관계에서 커다란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을 제안한 이유는 하노이 회담 결렬이후 북미협상의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창건 75주년, 미국 대선 등 굵직한 정치행사로 인한 동북아 정세의 가변성을 감안한 제안으로 해석된다.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대화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줬다고 본다. 비핵화 협상이 북미구도로 흐를 경우 우리측이 소외될 수 있다는 점, 종전선언을 통해 남북미 구도로 협상을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인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노이 회담이후 2년 가까이 되도록 북미간 실질적인 비핵화 협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종전선언은 향후 비핵화 협상을 추동하는 중요한 기제로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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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4 16:10

사람 나이 50쯤이면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사람이 나이 50살쯤이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자님은 사람의 나이 50을 일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셨다. 지천명이라? 공자님 당신께서 50 나이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 하늘이 뜻을 헤아려 알게 됐다는 말씀이다. 글쎄. 보통 인간들도 50쯤 나이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 어림없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오직 공자님이니까 그렇게 아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대놓고 자기 나이가 50이 됐으니 지천명의 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발 가운데 망발이다. 나이 50과 관련지어 생각나는 사람은 또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50세 이전까지는 아주 자유롭게 호기롭게 산 사람이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것은 모두 누리며 산 사람이었다. 건강과 돈과 명예와 사랑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모든 일을 가능한 일로 알고 살았던 톨스토이. 그는 50세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을 스톱시켜 놓고 회심(回心)의 기회를 갖고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 살았다 한다. 지금까지 산 인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인생이었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이었다. 비로소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가 얻은 재화를 자기가 아닌 타인,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32년. 참으로 장한 인생이고 보통 사람은 꿈꾸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인생이다. 인도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인생을 경영했을까? 인도의 힌두교에는 인생 4단계론이 있는데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50세를 넘어 75세까지를 임서기(林棲期), 75세가 넘으면 유랑기(流浪期)라 한다고 한다. 참 특별한 인생 경영이다. 어쨌든 인생살이에서 50살은 매우 중요한 나이이고 계기로 보인다. 50살이 돼 무언가 이전의 삶과 다르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보살핌이 있고 신의 도움이 큰 사람, 행운의 사람이라 하겠다. 나의 생각은 그렇다. 사람이 비록 50살이 돼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 지어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언가는 좀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노력, 자기 삶의 족적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유소년기에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가족이 생기고 이웃이 생긴 뒤로는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 늙은 사람이 된다. 필경 그가 늙은 사람이 돼 신의 축복을 받고 선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시간이 허락되리라고 본다. 누군가의 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 독립된 한 개체로 살아가는 기간이 열리리라고 본다. 더욱 좋은 축복이 있고 신의 선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다시금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 안에서 늙은 사람이 된 것이다. 늙은 사람이 된 것도 커다란 은혜입음이다. 그러므로 갚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눔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내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식을 나누고 내가 재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나눠야 한다. 그것만이 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누게 되면 늙은 사람의 한탄과 고독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늙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젊은이 흉내를 내는 일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만족이 있어야 한다. 유지하려고 해야 하지 확장하려고 해서는 낭패다. 진정 그렇게 사는 것이 늙은 사람의 삶이고 또 그것이 늙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는 좋은 길이다. 요즘 인생은 60부터다, 70부터다 하는 말은 지나친 억지다. 거짓말이다. 속지 말고 속이지 말 일이다. 나는 70살이 넘어서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을 알게 돼서 매우 기쁘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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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7 16:36

어두운 터널을 건너는 법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지금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기차를 타고 코로나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다. 도착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암울한 나날이다. 잠시 출구가 보이가 싶더니, 다시 어두운 터널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세대, 모든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답답한 심정만 토로할 따름이다. 남아 있는 것은 터널을 달리는 규정 속도와 안전 수칙뿐이다. 기차 객실을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고, 최소한의 이동만 가능하다. 객실에서 웃거나 떠들 수도 없고, 음식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은 높아지고, 감정은 날카롭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설프게 제안하거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모두의 견제를 받게 된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언제쯤이면 이 터널의 끝을 만날까? 정도이다. 아무도 알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질문만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더 큰 문제는 달리는 기차 안에도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상황에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는 생존 자체가 위태롭고, 답답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도 있다.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삶의 질적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터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편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우두커니라는 단어가 아닐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는 사전에 넋이 나간 듯이 가만히 한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양으로 정의되어 있다. 처음에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우두커니 있었다면, 지금은 우두커니 있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언제 나올지 모를 출구를 기다리면서 마냥 우두커니 있을 것인가. 혹여 지금 지나고 있는 터널의 끝을 만날 수 있겠지만, 만약 또 다른 터널이 그 앞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두커니라는 단어를 만난 시를 읽어본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그때 그 일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그때 그 물건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더 열심히 말을 걸고/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더 열심히 사랑할걸.//반벙어리처럼/귀머거리처럼/보내지는 않았는가/우두커니처럼./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문학과지성사/1989))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널의 끝과 출구만 생각하고 기다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한 게 없으면 추억도 없다. 삶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지속가능성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처음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임업 분야였다. 나무를 베는 만큼 나무를 심는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현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10년 후, 100년 후, 나아가 1,000년 후를 상상하는 일이다. 지금 모든 것이 멈추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끝을 모르는 터널의 연속이다. 코로나라는 터널이 아니라도 원래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게 삶이다. 시인의 말처럼,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하자. 우두커니 앉아 있지 말자. 일어나 걷자. 홀로, 같이, 걷자. 서로 안부를 묻자. 더 많이 보고, 더 자주 듣고, 더 깊이 생각하자. 누군가는 터널을 탈출해야 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속지 말자. 터널 안이든 밖이든,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자. 그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만약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100년 후, 1,000년 후 미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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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0 16:44

BC, AC, WC? 21세기의 페스트를 성찰하며

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다시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코라나19에도 묘하게 이념의 투쟁이 투영되어 있다. 1차 대유행에 이어 지난 8.15의 광화문 집회 이후에 2차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코로나19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정책과 대책들이 물거품이 된 것만 같다. 나의 가까운 친척 중에도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보건소에 가서 검진을 받으라는 연락에도 공산주의의 음모라는 이유로 버티고 있다. 슬프다. 많은 사람들이 BC(Before COVID-19)로 돌아갈 순간만을 기다리며 AC(After COVID-19)를 견디고 있었는데,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더 늦춰진 것이다. 고급식당에 몰려가서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즐거움, 매일같이 영화관 앞에 줄을 서고 온갖 공연장에서 댄스홀에 이르기까지 만원을 이루며 공공장소라면 그 어디라도 성난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무질서한 인파, 몸이 닿으면 뒤로 물러나면서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팔꿈치를 팔꿈치에게로, 이성을 이성에게로 다가가게 하는 인간의 온기에 대한 열망(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 중에서)이야말로 BC의 풍경이었다. 페스트를 겪는 중에서도 오랑시의 시민들은 페스트 이전의 삶을 극도로 추구하였다. 오랑의 시민들과 지금의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그 시절을 BC라고 부른다. 코로나 19가 나타나자 세계는 AC로 진입하였다. AC의 시대에 사람들은 어서 빨리 백신이 개발되어 BC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이제 마스크는 사람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도서관과 전시장, 극장과 박물관은 문을 닫았다. 예정되었던 강좌와 학술포럼도 취소되고 있으며 교실은 텅 비었고 직장인들의 일부는 재택근무를 해야만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족 내의 불화와 폭력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시장은 텅 비었고, 식당과 술집도 한산해졌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과 자영업자들은 생존이 위협당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다. 일상도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AC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AC의 날들을 견디면서 BC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BC로 돌아갈 수 있을까? AC가 되자 신자유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금방 드러났다. 국가 간의 이동은 금지되었고, 교역의 상황을 날마다 나빠지고 있으며 이주노동자의 이동도 중단되었다. 문제는 인간의 오만함이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바이러스에도 일상이 온통 어그러지고 생존에 위협을 받은 허약한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옛 추억(BC의 추억)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근대 이후 인간중심주의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혹독한 상처를 입혔는지 그리하여 지구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성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BC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19는 수없이 많은 변종으로 변이하며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마치 독감처럼 말이다.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19가 아닌 코로나21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혼돈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인류는 성찰하고 대비해야 한다. 즉,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BC가 오지 않는다면 WC(With COVID-19)로 가야 하는 것이다. 무한 소비의 삶을 돌아보고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과 조화하며 사는 방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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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3 17:11

남북교류협력법은 남북관계의 비전을 담아야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하 교류협력법) 개정안이 입법예고(8월 27일) 되었다. 30년 전인 1990년 제정된 교류협력법을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여 개정한다고 한다.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등 노태우 정부의 시대전환적 대북정책을 법제화한 것이 1990년 교류협력법 제정이었다. 하지만 남북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 지켜본 입장에서 이번 교류협력법 개정안과 관련해 두 가지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개정안에 꼭 반영되기를 희망했으나 반영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지난 5월, 공청회때 공개된 개정안에는 접촉신고를 대폭 완화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번 입법예고안에 빠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접촉은 방북, 교역, 협력 사업과 같은 다른 교류협력 행위의 전제가 된다. 현행 교류협력법과 같이 모든 북한주민 접촉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해외여행 중 우발적인 북한 주민과의 만남, 이산가족이나 북한이탈주민의 재북 가족친지와의 단순 연락, 순수 학술목적을 위한 연구 활동 등 모든 접촉은 현행법상 신고의 대상이다. 법이 제정될 당시인 1990년에는 모든 접촉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혁명 시대이다. 인터넷으로 북한의 노동신문을 읽거나, 북한주민의 유투브 채널에 좋아요를 클릭하는 것까지 위법 여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늘의 현실을 법률에 반영하는 차원에서 접촉신고의 완화 또는 폐지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교류협력법 개정을 추진하는 통일부의 접근이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이에 대해 우리 사회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 발전의 비전을 갖고 주무부처가 선도적으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본다. 교류협력법 제1조에 따르면 이 법의 목적은 남과 북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강조하였다. 어떻게 해야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지, 통일부가 반대하는 국민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설득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으로, 최근 KBS에서 보도된 외교부의 이견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낀다. 보도에 따르면 외교부는 교류협력법 개정안에 대해 제1장 총칙과 관련된 조항에 국제사회 제재 상황을 고려한 전제조건 마련 필요라는 수정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수정안을 제시한 이유는 개정안 일부 내용의 경우 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에 저촉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교부가 이같은 수정안을 제시한 것이 타당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률인 교류협력법이 제재에 저촉된다고 볼 수는 없다. 제재의 대상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재와 관련된 일반 총론을 법률에 반영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 속박하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교류협력법은 북한 주민과의 접촉, 방북, 물품의 대북 반출반입 등 모든 과정에서 통일부장관의 신고수리 또는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그간 협력 사업이나 반출반입 승인 과정에서 대북제재를 고려하여 결정해왔다.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미국과 세세하게 협의하고, 제재면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외교부가 교류협력법 총칙에 대북제재를 고려하는 조항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대미사대주의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를 우리 법과 제도 안에 담아내어, 향후 남북교류협력을 견인할 새 그릇이 필요한 시점이다. 3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교류와 협력 사업이 법적인 뒷받침 아래 이루어졌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등 많은 성과도 있었다. 교류협력법이 변함없이 미래의 남북관계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할 것이다. 통일부의 분발을 촉구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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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7 16:19

마당을 쓸었습니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나는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로부터 별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학력이라야 고작 고등학교 졸업. 12년 동안 나를 특별하게 귀여워해 줬다던가 사랑해준 선생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키가 작고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미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런 아이였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른이 돼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선생님을 나는 다시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름 아닌 김기평 선생님. 그분은 내 고등학교 시설인 공주사범학교 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분이다. 1979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공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부터이다. 그 학교로 내가 갈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추천 덕분이다. 선생님은 당시 공주교육대학의 교무과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내가 그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셨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다. 나는 선생님을 지근거리로 만나면서 인생의 후반기 많은 교훈을 얻었다. 먼저 온유한 성품이다. 선생님은 어떤 경우에도 말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든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분이었다. 몸에 밴 인품이었다. 그다음은 호학(好學)과 성실함이었다. 선생은 65세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뒤 26년 동안 혼자서 공부해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을 완역해 주해서를 출간하셨다. 인생 후반부의 삶과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실례다. 그리고 무욕의 삶이다. 선생은 식사나 일상생활, 대인관계에도 일말의 사심이 없었고 무엇이든지 줄여서 조그만 인생을 사시려고 애썼다. 그리고 부지런하셨다. 90대에 들어서 시력이 극도로 나빠지신 후에도 선생은 하루하루 무언가를 하시면서 부지런히 사셨다. 어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보면 무슨 일이든 일을 하고 계신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을 읽지 못하니까 정원의 꽃들을 살핀다든지 텃밭에 나가 채소를 가꾼다든지 그런 일을 하면서 소일하시는 것을 보았다. 틈이 나시면 몽당비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와 도로를 쓸기도 하셨다. 나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기도 한 시라는 작품을 쓴 것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감 덕분이다. 대문 밖 도로를 쓰시는 모습이 나에겐 그렇게 잔잔한 감동이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2009년 내가 공주문화원장이 돼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셨을 때 선생님은 흔쾌히 수락하시면서 나의 강력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해마다 1월 초순이면 어김없이 후원금을 들고 원장실로 오신 선생님은 조용히 돈을 놓고 가시면서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는 말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액수도 적지 않았다. 어느 해는 백만 원을 주시고 어느 해는 이백만 원을 주시기도 했다. 일단 돈을 주셨다면 선생님의 기준은 백만 원이셨다. 노인이 연금으로 생활하시면서 어쩜 그렇게 배포가 크신지 번번이 놀라는 바가 있었다. 2017년 7월 문화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임식이 있던 날, 나는 비로소 해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생님이 바로 그분임을 말했다. 그 자리에도 선생님은 와 계셨다. 이미 90대 중반의 노인이시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도 따님과 사위 되는 분의 부축을 받고 계셨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문화원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보살핌과 사랑이 마음에 와닿아 그랬다. 그로부터 3년. 선생님은 건강이 아주 힘들어지셨고 드디어 100세가 됐다. 놀라운 일이다. 내 생전에 100세 되신 분을 가깝게 뵙다니! 비록 나는 정식으로 학교 다니던 시절 학생으로서 선생님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지는 못한 사람이었지만 학교를 떠나 어른이 돼 살면서 한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인생의 교훈을 얻은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하게 기쁘게 생각한다.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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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0 16:38

내가 살고 싶은 동네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코로나와 장마, 부동산과 주식. 만약 지금 한국사회를 표현한다면 이 4개 단어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 단어들이 함축하는 바와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이 단어들을 구분하자면, 코로나와 장마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큰 영역이라고 한다면, 부동산과 주식은 개인의 선택과 관심, 조건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영역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확산을 개인위생과 방역을 통해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지만 코로나의 발생과 소멸을 인간이 통제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장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520억원짜리 슈퍼컴퓨터를 갖고 있는 기상청을 비난하지만, 사실상 오늘날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가깝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은 더 자주, 더 강하게 닥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은 상황이 다르다. 지금 온 나라가 부동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다양한 조건들을 제외하고 보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욕망의 격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다양한 생활문화시설 등 인프라를 갖춘 시설, 출퇴근 등 이동이 편리한 교통환경 등 더 나은 주거환경을 추구하는 동시대인의 욕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주식은 또 어떤가. 요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물론 주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탐욕의 리그가 안타까울 뿐이다. 적절한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 등 온전한 삶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은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영역을 놓고 보면 더 나은 돈과 환경 등 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의 결과이다. 문제는 더 나은이라는 상대적 비교에 그치지 않고 점차 모든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필자 역시 어렸을 때는 삶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 거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부추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과연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대단한 지름길이나 확실한 해법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발견하는 일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가 아무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삶을 꾸려가야 한다.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는 지루한 일상을 건너뛰고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면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목소리도 있다.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와 힘을 갖고 있다. 그 유혹을 이기는 힘은 오히려 가장 작은 일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동네에서 가능하다. 동네는 군 단위나 작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 동네가 있다. 2020년은 문명의 전환을 이야기할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이다. 코로나와 기후위기만 생각하더라도 삶의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가치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앞자리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학습과 경험 또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질 필요가 있다. 동네는 그러한 학습과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어 공동체를 경험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를 향한 욕망이 생겨날 것이다. 서로의 욕망이 모여 지금까지와 다른 욕망의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함께 찾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을 할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가자. 17개 광역시도가 아니라, 226개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1000개의 동네, 아니 1만개의 동네를 만들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만들자.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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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3 16:26

"6·15공동선언에 동의하면 간첩"이라던 형사

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어느 아침이었다. 서울경찰청 보안과 소속의 형사들이 간첩행위에 관한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우선 집에 있는 두 대의 컴퓨터 하드를 압수한 뒤에 서가의 책을 뒤졌고, 침대 매트리스까지 들춰서 무언가를 샅샅이 찾았다. 간첩행위를 한 적이 없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노모를 비롯해 식구들은 날벼락을 맞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며칠 후, 홍제동 산속에 있는 대공분실로 가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화 도청 기록을 A4 용지로 칠천 페이지로 프린트를 해놓았고, 내가 인터넷에 접속해서 로그인 흔적을 남겼거나 메일을 주고받은 내용도 그만큼의 분량으로 프린트를 해놓고 있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개와 이러저러한 통화를 했죠? 형사가 물었다. 벌써 3년 전의 통화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내가 대답했다. 제가 기억나게 해주겠습니다. 하더니 형사가 그 날짜의 도청기록을 펼쳐 내게 읽어주었다. 특이한 내용도 없는 그런 통화였다.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나는 간첩일 수가 없었다. 실제로 간첩행위를 하지 않았으니 간첩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사가 아닌 논쟁이 시작되었다. 6.15공동선언에 동의하죠? 형사가 물었다. 당연히 동의하죠. 내가 답했다. 그러니까 피의자가 간첩이라는 겁니다. 아니 6.15공동선언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맺은 남북의 협약이며 동시에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속한 일인데, 그것에 동의하면 어떻게 간첩이 되고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겁니까? 김대중은 개새끼죠. 형사가 소리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아무개씨의 간첩행위에 대해 증언을 해주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처리하겠으니 협조하시죠. 형사가 말했다. 나는 아무개 선배의 간첩행위에 대해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간첩행위에 대해 조사를 종결하자마자 형사는 새롭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내가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 현장에 참석한 것과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문제 삼았다.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면 이적단체에 이익을 주기 때문에 그 주장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기소의견으로 검찰로 송치했다. 검찰에서는 사건을 질질 끌다가 최종적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내 귀에는 김대중은 개새끼죠.라는 형사의 외침이 생생하게 남게 되었다. 올해 2020년은 6.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15공동선언뿐만 아니라 10.4 공동선언, 4.27판문점선언, 9.19평양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이 합의했던 선언들의 이행이 거의 되질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6.15공동선언의 내용에 동의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그 형사가 떠오른다. 그 형사는 공무원이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소통이었다. 국가의 중대한 정책이나 과제에 대해 유관기관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기관에 소속된 공무원 사회 전체가 이해하고 소통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업무상 다른 일일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의 국정과제 등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충분한 소통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언의 이행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이제 새로운 통일부장관이 임명되어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6.15공동선언에서 9.19평양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그 이행의 방식에 대해 새로운 도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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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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