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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청문제도 보완 필요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인사청문회 제도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된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인사청문회법 제정 이전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나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등을 임명해야 했지만 정작 국회가 이들을 검증할 수단이 없었다. 이러한 법적 불비를 보완하기 위해 2000년 인사청문회법이 제정되었고 여러 차례의 개정을 통해 헌법상 기관뿐 아니라 각부 장관, 권력기관장들도 인사 청문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고 이를 사전에 통제할 수 있었다. 업무능력과 전문성뿐 아니라 공직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도 심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수십여명의 고위 공직자 후보들이 부동산 의혹, 자녀 이중국적, 논문표절, 병역회피 의혹 등으로 낙마하기도 하였다. 공직후보자의 도덕성은 중요하다. 위법행위를 한 사람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법을 따르라고 할 것인가? 이는 중요한 검증기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청문회 운영을 보면 답답한 마음뿐이다.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기 보다는 이들의 신상털기에 주력해왔고 후보 망신주기, 흠집내기로 변질되어 온 것이다. 특히 후보자 자신보다는 배우자와 자녀들의 신상까지도 무분별하게 털리면서 개인정보 보호 및 기본권 문제까지도 훼손할 우려가 있다. 가족정보들까지 필요하다면 비공개적으로 회의를 전환하여 따로 심의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선진적인 제도들이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정치의 선진화가 민주주의 제도의 선진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당은 후보자를 검증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인사청문제도를 통해 여당을 공격하는 정쟁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야당은 언론에 후보자의 신상과 관련된 사항을 공개하면서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한다. 여당 역시 국회차원에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당 후보자를 보호하는데 급급하다. 이는 여야가 뒤바뀌어도 마찬가지 상황으로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탓할 일은 아니다. 둘째 사전검증의 문제이다. 사실 인사청문회 제도의 원조격은 미국의 인준 제도이다. 18세기 말부터 청문제도를 만들고 의회에 막강한 견제 권한을 부여했다. 따라서 행정부는 의회에서 지적받지 않도록 후보자를 선발할 때부터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친다. 백악관 인사팀뿐 아니라 연방수사국, 국세청 등의 엄격한 사전 조사를 통과한 자만이 인준청문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 검증에만 수개월이 소요된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사항이 뒤늦게 공개되어 낙마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그 후보자가 필요한 경우는 사전에 여야간에 협의를 하기도 한다. 장기간 소요로 인한 업무 공백과 비효율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인준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는 비율이 2~3% 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를 서둘러 본 경기에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전 경기를 통해 충분히 역량이 검증된 선수를 내보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나라 인사청문제도의 맹점이다. 우리나라 인사청문제도는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임명권자가 임명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이전에 낙마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임명권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진사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청문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야당은 어차피 인사청문회를 거치더라도 임명권자가 임명할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신상털기와 모욕주기로 일관한다.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에도 고의로 협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여당이나 후보자의 입장에서는 인사청문기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다. 민감한 자료는 최대한 제출을 거부하고 의혹제기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일부 의원들은 오히려 후보자의 대변인을 자처하기도 하고 다른 의원들은 부적절한 질문과 언사로 국민들의 눈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지난 6월, 제21대 국회가 출범하였다. 암울했던 20대 국회에 대한 반성으로 21대 국회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국회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인사청문회 제도도 손질 할 것은 손을 보고 본 회의에서는 능력과 업무중심으로 검증하는 제도로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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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30 17:27

회복기의 삶

나태주 시인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날이 그날 같고 하나도 신나는 일, 즐거운 일이 없다. 그렇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번 생각을 바꿔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에머슨이라는 미국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헛되게 불평하면서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 바로 이것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날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날인가! 그래서 나는 오늘은 나의 생애에 남은 날 총량 가운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이고 첫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그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과 첫날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첫사람이고 또 새사람이다. 이런 생각 하나만 바꿔도 세상은 갑자기 눈을 뜨는 세상이 되고 눈부신 세상, 찬란한 세상이 된다. 부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루한 세상, 짜증나는 세상, 누더기같이 낡은 세상이라고 꾸중하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세상만 그런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보들레르는 시를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은 회복기에 이른 환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복기란 마치 어린 시절로의 회귀와도 같다. () 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는 언제나 도취해 있다.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아이가 형태와 색채를 흡수하는 기쁨과 가장 닮아있다. 우리도 주변에서 가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암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그에게 세상은 오직 눈부신 세상이고 새로운 세상이고 아름다운 세상이고 찬란한 세상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그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는 사람이고 감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암이란 질병에 걸렸던 것은 분명히 불행이고 악운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이후의 날들은 축복의 날들이 될 것이다. 실은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2007년의 일이니까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끝내 살아서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런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꼈다. 날마다 나는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됐고 사소한 일에도 취한 사람이 됐고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됐다. 보는 것마다 새롭고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그것은 취한 삶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취하는 날들이었다. 믿지 못하실 것이다. 그냥 그것은 터닝포인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반전의 인생이었다. 비록 몸은 병들고 왜소해졌으며 많은 가능성이 사려져 버렸지만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고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겨우 이만큼밖에 남지 않았다고 투정하는 사람에서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진정 인생이 지루하신가? 따분하신가? 아무것에도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시나?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만사 살아가는 기대 수준을 조금쯤 낮출 필요가 있다. 조금쯤 부드럽고 다정한 눈길이 준비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외부 지형적이고 타인 지형적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그런 경험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일상적인 일, 흔한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립게만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회복기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부디 자기 자신을 해바라기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때로는 채송화라고 여겨보시라. 세상이 대번에 달라져 보일 것이다. 큰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채송화는 애당초 키가 작은 꽃이기에 해바라기처럼 넘어지거나 줄기가 부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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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3 16:30

파탄적이어도 대화가 시작된 것은 좋은 일이다

정도상 겨레말큰사전 상임부이사장 2020년 7월 한반도의 정세는 하루하루가 증강현실이다. 지난 6월 16일, 북한은 남북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개성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안심하였다. 비록 파탄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비로소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사퇴하는 것으로 남한 당국은 응답하였다. 폭파와 사퇴에 이어 북한의 김여정은 휴전선에서 군사행동을 예고하였다. 실제로 군사행동의 징후들이 포착되었다. 긴장의 파고가 높아갈 무렵,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하였다. 남한 당국은 이인영 의원을 통일부장관으로 내정하고, 청와대의 안보실장을 서훈 국정원장으로 교체하였고, 신임 국정원장에는 박지원 전의원을 내정하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난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 회담으로 시작된 남북대화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보였다. 9월 19일에는 평양에서 군사합의서까지 서명하며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의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대중연설까지 하였다. 기나긴 분단체제가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지만 2019년 2월 베트남의 하노이회담에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CNN은 화면을 둘로 쪼개 한 화면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회담을 생중계하였고, 다른 화면에는 미국 국회에서 진행되는 트럼프 관련 청문회를 생중계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노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 플러스 알파를 내주고 싱가포르 회담의 실무적 전개를 하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실망감을 안고 평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는가?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내용을 살펴봐야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싱가포르 합의문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미-조 관계를 수립.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 즉 종전선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 포로 유골의 즉각적인 송환을 포함해 전쟁포로와 실종자의 유해 복구. 이 중에서 네번째 내용만 실행에 옮겨졌다. 유일하게 북한이 그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 후의 실무회담에서 볼턴을 앞세워 3항만 논의하고자 하였고, 1항과 2항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는 것을 꺼렸다. 북한은 당연히 셈법이 다르다고 항의하였다. 하노이에서 3항의 진전을 위해 영변과 플러스 알파를 내놓겠다고 하였지만 볼턴의 사주를 받은 트럼프는 대기업의 회장 출신답게 외면하고 말았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기회주의적 영리주의자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과 같은 극우적 참모들에 둘러싸여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못했고, 낙관적 중계자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와 대화하며 그가 중계를 받아들였다고 판단하고 그 내용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하였다. 낭만적 실용주의자 김정은 위원장은 그 중계를 믿고 하노이에 갔다가 낭패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당국은 문재인 대통령을 믿었다가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고 느낄만 했다. 게다가 남한 당국은 남북대화를 철저하게 북미대화에 종속시키는 정책적 실패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파탄적 대화의 시작인 것이다. 새로운 통일부장관이 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미워킹그룹에서 통일부가 철수하고, 남북 장관급회담을 복구하는 것으로 임기를 시작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생명공동체를 위한 통일부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하겠다. △정도상 상임부이사장은 615민족문학인 남측협회 집행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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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6 17:13

볼턴 회고록, 문제 제기에 답하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볼튼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발간 여파가 크다. 야당에서는 볼턴 회고록과 관련된 국정조사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안보분야의 미대통령 최측근 참모가 현존하는 가장 어려운 협상 중의 하나인 북핵협상과 관련된 숨은 얘기들을 공개했으니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다만 대부분의 언론에서 이미 많은 부분이 공개되었지만 회고록 자체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우리측 카운터파트라 할 수 있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도 외교의 기본원칙을 훼손하고 상당부분의 내용이 왜곡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첫째 우리정부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과대평가하고 싱가포르 정상회담 등을 무리하게 성사시켰다는 지적이다. 볼턴 회고록에서는 모든 외교적 춤판은 한국이 만든 것이었고 북핵 폐기보다는 통일어젠다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종전선언도 문 대통령의 제안에서 나온 것이며 북미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아니라 한국측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왜 이것이 정치적인 쟁점이 되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제안을 했던지 북미는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의 큰 원칙에서 합의할 수 있었다. 전쟁 위협 등 강 대 강으로 치닫던 북미관계가 우리측의 중재노력으로 싱가포르 합의를 이룬 것이다. 현재 비핵화 협상이 답보국면이기는 하지만 우리 정부가 판문점 선언부터 북한에 비핵화 결단을 요구하고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까지 연결시킨 것은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내정치에 이용했다는 의혹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본다. 둘째 6.30 남북미 정상 회동시 미국과 북한이 우리 대통령을 배제시키고 패싱을 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내용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갑작스럽게 성사된 만남이라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양자간 만남으로 제한하려는 북미간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6.30 남북미 정상회동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오히려 우리 대통령의 많은 역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리측은 북미간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영토에 온 타국 정상들을 배웅하고 북미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였다. 외교 현장 즉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는 많은 중간 과정을 거친다. 어느 나라는 이렇게 하기를 원하고 다른 나라는 또 다르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협의와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패싱이라고 하진 않는다. 셋째, 볼턴 회고록에서는 6월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이 북한에 비핵화에 동의할 것을 요청했고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1년 내 비핵화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4.27 판문점 선언에서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고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할 수 있었다. 볼턴 보좌관 자신이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하고 북미정상회담을 뒤에서 조정한 것이지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남북간, 북미간에 합의한 사항인 것이다. 오히려 회담의 훼방자는 볼턴 전 보좌관이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볼턴은 회담을 결렬시키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협상 결렬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옵션을 제안하였다고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한편 종전선언에 우리 정부가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다. 분단국인 우리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병행 추구하는 전략을 오래전부터 추진해 왔다. 한반도의 분단이 정전협정 체제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종전선언을 비핵화의 마중물로서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비핵화비확산에만 관심있는 미국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실시는 북한의 비핵화 위협 감소에 따라 한미간 협의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만약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해도 되겠다고 결정을 내렸어도 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의 문제는 안보의 문제이지 정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볼튼 회고록은 진위여부를 떠나 대체적으로 북미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창의적 전략이 담겨있다. 정치적 계산에 매몰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에 대한 편견으로 사로잡힌 참모 볼턴의 제안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비핵화 협상이 전개되었다는 점은 매우 뼈아픈 부분이다. 우리로서는 올해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는 분위기 마련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반기로 갈수록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다. 외교안보진영의 개편을 계기로 우리의 중재노력이 다시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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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2 17:17

코로나 이후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세상살이가 많이 달라졌다. 몇십 년은 뒤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적막하다. 길거리 자동차들이 많이 줄었다. 당연히 행인들도 줄었다. 어쩐지 그것이 딴 세상에 온 듯 낯설고 서툴다. 공주와 서울을 오가는 자동차의 횟수가 줄었다. 배차 간격이 떠서 많이 기다려야 한다.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의 표지판을 보았더니 인천공항행 버스 시간표 위에 까만 표시가 모두 붙어있다. 공항버스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또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치관이 바뀌었다. 이전에 가치 있는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고 예전에 가치 없던 것들이 다시금 가치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대단위로 무슨 일인가를 하는 일부터 불가능하다. 무조건 사람 많은 데는 피하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제는 혼자서 하는 일들이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비대면, 비접촉, 사회적 거리 두기가 사는 길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는 혼자서 무슨 일인가를 하면서 사는 연습을 해야만 하겠다. 코로나 사태를 건너오면서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학습해야만 했다. 인생이 외롭고 쓸쓸한데 더욱 인생이 외롭고 쓸쓸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프라인의 삶이 위축된 데 비하여 여전히 작동한 것은 온라인의 삶이다. 절대적인 단절과 고독과 속박의 시대에 온라인마저 막혔다면 어쨌을까?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안도한다. 그런대로 답답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의 역할이 컸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온라인의 영향의 더욱 증대되겠지 싶다. 내가 주로 만나거나 소통하는 사람들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 한 분과 이야기하다가 조용히 놀란 일이 있다. 그분은 출판사 대표인데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기네 출판사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코로나 이전 때부터 책의 매출이 더 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로? 문제는 책의 종류다. 그분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생활실용서인데 그 가운데서도 꽃 기르기, 실내 화단 꾸미기, 반려동물 돌보기와 같은 책들이 그렇게 잘 나가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달 실내에 갇혀서 사는 동안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종이접기를 하고 종이 오리기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디지털과 어울린 아날로그의 삶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 방식은 디지털이되 그 내용은 아날로그로 가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코로나 이후의 우리네 삶의 새로운 국면이요 피하기 어려운 한 방향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시기를 맞이하여 시 쓰는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본다. 비대면 비접촉이 강화되다 보면 인간은 더욱 고립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고독감, 소외감, 우울감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이런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주는 그 무엇일 것이다. 울퉁불퉁해지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쓰다듬는 그 어떤 심리적 작용일 것이다. 그것이 그러할 때,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 시라는 문학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문장형식이다. 산문이 작정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쓰는 글이라면 시는 작정 없이 언뜻 떠오르는 감정을 급하게 쓰는 글이다.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문장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격한 마음을 다스려준다. 말하자면 마음의 묘약인 셈이다. 만약에 시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만 한다면 시를 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나의 책은 변함없이 팔렸다. 물론 오프라인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라인 주문을 통해서였다. 코로나 시대. 코로나 이후 시대. 활기차게 자유롭게 살았던 어제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 정작 그것이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평안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행복의 기초다. 그렇게 소중한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시인들은 더욱 정성껏 시를 써야 하겠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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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5 16:19

포스트코로나와 지역화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얼마 전 필자가 일하고 있는 동네에서 지역문화생태계 차원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문화예술인을 후원하는 일명 성북 크리킨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시 성북구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직접 신청하거나 추천 받은 이들에게 10만원을 입금하고, 필요 금액은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별도로 개설된 계좌로 자유로운 입금을 통해 마련했다. 후원자와 후원금을 받는 이를 모두 익명으로 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예술가를 비롯해 약 60 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지원받았다. 프로젝트명에 사용한 크리킨디는 남미 케추아 부족의 이야기로 숲에 불이 나서 다른 동물들이 도망치고 있을 때 작은 부리에 한 모금의 물을 담아 와서 산불을 끄려고 한 벌새 이름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이야.라고 답한 벌새 크리킨디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성북 크리킨디 프로젝트의 출발은 오아시스 딜러버리에서 착안한 것이다. 오아시스 딜리버리는 김선아 다큐멘터리 감독이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통장 잔고에 있는 여윳돈을 주변 독립영화인들에게 흘려보내면서 시작되었고, 여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SNS를 통해 동참하면서 확산되었다. 또한 성북 크리킨디 프로젝트를 곁에서 지켜본 지역 청년들이 갑자기 통장에 떡볶이가 입금됐다라는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폭넓은 공감을 일으켰고, 전통예술인긴급연대에서도 이 아이디어를 통한 프로젝트를 통해 4천만원이 넘는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넘어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일종의 연대감과 공통의 감각을 경험하게 해준다. 공통 감각의 연결은 결국 움직이는 소수의 역할이다. 실제로 성북 크리킨디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한 달 쯤 지났을 때 11만원이라는 낯선 액수가 입금되었다. 10만원을 신청해서 받은 예술가가 10%를 얹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후원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일종의 지역공동체 차원의 새로운 실험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동체은행이나 협동조합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경제적 상호부조의 사례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북 크리킨디 프로젝트는 지역 단위에서 공동으로 제안했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지역사회를 통한 커뮤니티의 성격을 더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후원 과정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연계된 선택과 영향력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개인적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 없는 다수의 페친들이 프로젝트에 동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근대 혹은 탈근대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코로나19 사태는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을 요구한다. 섣불리 결론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문제겠지만, 치열한 고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등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지금 시대의 궁극적 대안으로 지역화를 강조한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는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 낼 결정적 다수를 만드는 것으로서 큰 그림 행동주의(big picture activism)을 제시한다. 이론만으로는 시민 의식을 높일 수 없으며, 새로운 지역화의 감동적인 사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역화는 소규모 활동을 대규모로 하는 것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하는 일과 활동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가까운 곳에서(local), 혹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사한 활동을(global) 바라보고, 공유하고, 전달하고, 확산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치열한 고민과 싸움을 하고 있는 헬레나는 강조한다.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일은 이미 열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를 자신과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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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8 17:44

변화하는 북한의 대외선전 수단과 내용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얼마 전 유튜브에 평양에 사는 어린이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올라왔다. 다른 계정에는 젊은 북한 여성이 영어로 평양 주민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영상을 담았다. 북한의 신종 대외 선전물이라고 판단된다. 요즘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각종 SNS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공존한다. 이중 유튜브는 수천 수만 가지의 정보를 담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SNS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북한의 선전매체도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이러한 새로운 선전 콘텐츠를 차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우리는 노동신문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에 대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북한의 각종 출판물은 특수 자료로 별도 취급해왔다. 물론 우리 언론은 조선중앙통신과 계약을 맺어 관련 기사를 실시간 공유하고 있으며 학술적인 목적 등으로 북한 자료를 열람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기존 방식으로 유튜브와 같은 SNS에 올라온 북한관련 콘텐츠를 제한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유튜브를 열면 나오는 수많은 유튜브 영상 속에서 호기심에서 혹은 흥미로울 것 같아서 보는 클릭 행위에 이적성 여부의 잣대를 들이 댈 수 있을까? SNS의 특성상 누가 올렸는지도 알 수도 없고 콘텐츠물 삭제를 게시자에게 요청할 수도 없다. 그리고 좋아요와 구독을 기반으로 공유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같이 영상을 퍼 나르는 행위도 규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해 본다. 첫째, 국민들의 자정노력이다. 우리 국민들은 인터넷 강국을 기반으로 하면서 정보에 대한 해석력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분단 반세기를 지나오면서 북한 정보에 대한 판단 역량도 자연적으로 습득해왔다. 주변에 북한 선전물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모든 유튜브나 SNS 콘텐츠는 공유자와 구독자들의 댓글과 같은 평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 북한 콘텐츠가 특별히 취급될 이유가 없다. 북한 선전물 역시 온라인상에서 그에 해당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최근 북한의 유튜브 콘텐츠는 정치성을 배제하고 있다. 북한의 선전관련 기구 역시 자극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선전물을 올릴 경우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둘째, 가짜뉴스는 분명히 규제되고 걸러져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떤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생산자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가짜뉴스를 만들어 올리면 구독자들은 이를 전파시킨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이동하거나 삭제한다. 이러한 SNS의 특성을 악용한 가짜뉴스들은 사회를 좀먹는 좀비와 같은 것이다. 북한과 관련된 가짜뉴스는 우리의 안보와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과 유포를 통제하는 조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의도된 세력이나 집단들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위협받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법적 불비는 전체적인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고 북한 인터넷 선전물에만 한정할 것은 아니다. 최근 흑인 용의자를 사망케 한 미국 경찰의 과도한 조치를 담은 동영상이 일파만파로 확산되면서 미국 내에 인종차별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2011년부터 중동과 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은 생활고에 따른 튀니지의 한 젊은 청년의 분신 영상으로 촉발되었다. 온라인상에 올려 진 동영상 하나가 개인적인 삶뿐 아니라 국가구조와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영상을 올리는 개인 혹은 집단이나 이를 운영하는 회사들의 도덕성이 중요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보는 시민들이 정보의 인포데믹(info-demic) 현상 속에서 비판적 독해능력(media literacy)을 함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미 200만~300만명이 넘는 휴대폰이 북한에서 유통되고 있으며 최근 북한 방송 아나운서의 표정과 옷차림, 말투, 스타일이 달라지고 있다. 관광산업의 육성을 전략산업으로 삼고 있는 북한의 경우 이번 유튜브와 같은 선전물을 앞으로도 많이 유통시킬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북한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아직은 통제적인 사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북한의 이러한 변화는 계속될 것이고 공동체적 방식을 통해 평화통일의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할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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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4 17:26

하얀 제비꽃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모처럼 데레사 수녀님이 공주에 왔다는 전갈에 서둘러 외부 일정을 마치고 루치아의 뜰로 갔다. 루치아의 뜰은 공주의 옛 거리에 있는 찻집으로 오래된 한옥 하나를 고쳐서 만든 찻집이다. 공주의 바닥 사람들에게보다는 외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잘 알려진 찻집이다. 왜 루치아의 집인가 하면 찻집 주인의 세례명이 루치아이기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루치아는 천주교 신자. 그래서 찻집 이름도 루치아의 뜰인데 이 집에는 그런 연고로 바깥에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자주 찾아오신다. 내가 찻집에 들어섰을 때 수녀님 세 분과 운전을 맡은 남자 한 분이 루치아 내외와 함께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의 수녀님이다. 마치 동화 나라에서 등불 하나를 들고 이 세상으로 나왔다가 다시 이 세상의 등불로 바꿔 들고 동화 나라로 돌아가는 아이와 같다. 그렇구나. 데레사 수녀님에게는 우리 공주가 동화 나라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세상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기에 그렇게 수녀님은 수녀원에서 짬만 생기면 공주를 찾는 것이고 또 루치아의 뜰과 우리 풀꽃문학관을 방문하는 것이겠구나. 들어보니 수녀님 일행은 이미 풀꽃문학관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월요일이라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으므로 문학관 안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집 둘레와 꽃밭만 보았노라 한다. 그런데 일행 가운데 나이가 좀 드신 수녀님이 문학관의 꽃밭에서 제비꽃 사진을 여러 장 찍었노란다. 알고 보니 그 수녀님이 데레사 수녀님이 머물고 있는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 수녀님, 왜 제비꽃 사진을 찍으셨어요? 다른 꽃들도 많은데. 네, 보통 제비꽃은 보랏빛인데 문학관의 제비꽃은 하얀 색깔이더라구요. 그래서 찍었어요. 그러하다. 우리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있다. 있더라도 아주 많이 있다. 본래 문학관에는 하얀 제비꽃이 없었는데 문학관 관장의 일을 보는 조동수 선생이 다른 데서 캐다가 심어서 하얀 제비꽃이 살고 있다. 심더라도 아주 많이 심었다. 문학관 둘레 마당과 담장 아래에 촘촘히 가득 심었다. 그걸 또 야생화 연구가인 백승숙 여사가 와서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원장님, 이 제비꽃 이렇게 많이 심으면 안 돼요. 이 녀석들 번식력이 강해서 나중에는 아예 제비꽃 밭이 됩니다. 그래서 꽃을 심어준 조동수 선생의 눈치를 살피며 제비꽃들을 대충 뽑아냈다. 결국은 지금 문학관 뜨락에 피어있는 모든 하얀 제비꽃들은 그때 조동수 선생이 심었는데 뽑지 않은 몇 그루 제비꽃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조동수 선생의 제비꽃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더러는 그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러면 왜 조동수 선생은 그렇게도 많은 제비꽃을 캐다가 문학관 뜰에 심었을까?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조동수 선생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이미 오래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한 분밖에 남아 있지 않던 육친마저 돌아가신 것이다. 젊은 나이이고 집안 대소가도 많지 않아 두서없이 간소하게 어머님 상을 치렀다 한다. 적적하게 어머니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둘러보니 자기의 슬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더란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꽃이 길가에 피어있는 하얀 제비꽃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내 슬픔을 알아주는 것은 너뿐이구나. 그런 뒤로 조동수 선생에게 하얀 제비꽃은 어머님의 꽃이 되었고 어머님을 생각하는 꽃이 되었단다. 그러니 어찌 내가 문학관 뜰에 심은 하얀 제비꽃을 깡그리 뽑아낼 수 있었겠나. 몇 그루라도 하얀 제비꽃을 그냥 놔두기를 잘했다 싶다. 이런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 해마다 하얀 제비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하얀 제비꽃이 조동수 선생의 어머니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다. 이것을 원장 수녀님이 느끼시고 영혼의 손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래서 수녀님은 다른 예쁜 꽃들, 화려하고 큰 꽃들을 제치고 초라하고도 작은 하얀 제비꽃을 사진기에 담으신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또 수녀님 마음이 하얀 제비꽃의 마음이고 조동수 선생의 마음이고 또 조동수 선생 모친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세상의 일들은 참으로 깊고도 멀고도 아득하다. 유정하다. 서럽도록 아름답다. 노을 속으로 꽃잎을 싣고 가는 저녁 강물 하나를 본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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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8 17:12

한 사람의 힘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2020)라는 책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은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일지도 모른다. 유예된 활동, 격리된 시간들은 그 초대에 응할 기회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우리야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되돌아가고 싶은지 등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서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고 말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이 전염의 시대에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생각을 한다. 그저 매일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보면서 불안과 안도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바이러스 확산 주범을 찾아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런가하면 알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빠져 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언제쯤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인지,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묻는다. 하지만 묻는 이들도 알고 있다. 여기에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그저 서로에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잠시나마 불안을 떨쳐보려고 애쓸 뿐이다. 수많은 예측은 빗나가고, 막연한 희망은 무너진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지연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다시 제자리에 서 있다. 이 지연과 반복을 견디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다.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의 한 복판에서 그나마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건너가고 있는 이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인류의 삶을 생각하고, 언젠가 종식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상황 이후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으면서 국가의 역할과 정체성,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해, 수많은 방역과 검사와 역학조사, 진료 등을 통해 지방정부와 공공의료에 대해 생각한다. 일상의 변화에 따라 삶과 인생, 가족, 공동체, 생태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감염과 전염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본다. 언론에 보도된 학원강사발 코로나19 감염 확산이라는 감염 경로는 한 사람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일터와 삶터를 통해 만나는 타인에게 일종의 감염이 진행되고, 감염된 주체는 또 다른 타인을 감염시킨다. 이렇게 반복되는 감염이 결국 전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 전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염병 대란이 고작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한 사람은 대구 신천지 신도나 인천 학원강사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사례인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으로서 한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감염시키고 확산시키는 한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힘을 생각하자는 말이다. 이때 힘은 일방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효과에 가까울 것이다. 한 사람이 무제한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와 관계, 우연성, 상호성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의도하거나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시작점을 찍는 행위에 가깝다. 한 사람은 악하고 부정적인 것의 숙주가 될 수도 있지만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누는 최소이자 최선의 단위이다. 그 한 사람의 힘을 주목해보자. 내가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 동물, 풍경에 보내는 눈빛과 몸짓, 말이 모여 그 사람이 감염되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고 상상해보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공존과 협력, 연대와 희망, 우정과 환대, 공감과 위로, 감동과 찬사를 전파하고 전염시키자.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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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1 18:44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의 길

김형준 명지대 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3년(5월 10일)을 맞이했다. 집권 후반기로 들어섰지만 국정 운영 지지도는 71%(한국 갤럽 5월 1주 조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갤럽이 과거 조사한 역대 대통령의 취임 3주년 무렵 지지도는 박근혜 대통령 42%, 이명박 대통령 43%, 노무현 대통령 27%, 김대중 대통령 27%, 김영삼 대통령 41%, 노태우 대통령 12%였다.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70%를 넘은 건 지난 2018년 7월 이후 1년 10개월 만이다. 전례 없는 압도적 지지 속에서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통해 남은 임기 2년 동안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최근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는 지난 3년 간 국정 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 때문이라기보다는 코로나 사태에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강하다. 갤럽 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자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가 53%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정책 항목인 복지 확대는 4%에 불과했다. 대구경북에서 긍정 대 부정이 53% 대 30%였다. 60대 이상에서도 그 비율이 64% 대 26%였다.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성과가 없고 전통적인 보수 진영에서 조차 문 대통령 지지에 대한 긍정 평가가 상당히 높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제임스 데이비스(James C Davis)가 제시한 J-커브 이론을 적용하면, 코로나 사태 해결에 대한 기대와 국민들이 체감하는 성취 간에 인내할 수 없는 격차가 커지면 민심이 폭발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3년을 아주 냉정하게 평가하면 코로나 방역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국민이 기대했던 성과는 아직 요원하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구상과 약속은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지 못했고,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지 못했으며, 대통령부터 새로워지지 못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지 못했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끝내지 못했으며, 대통령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도 체감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통합과 공존이 아니라 분열과 독존이 판을 쳤다. 문 대통령이 그토록 갈망하는 국민과 역사가 평가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으로 토대로 변혁적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민과 대통령과의 관계는 승화되어 정치과정을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물론 국가가 지향하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국민의 에너지를 최대한도로 끌어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와 협치, 그리고 겸손이 필요하다.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예일대 교수는 코로나 이후 인류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전체주의 확산, 포퓰리스트 득세, 이념적 편 가르기, 사실을 무시한 선전선동, 정부의 공포 마케팅 등을 제시했다. 그는 위기 상황인 지금이야말로 공포가 아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냉철한 판단이 중요하다 면서 코로나라는 위기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 정부가 무엇이든 해도 되는 기회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선도형 경제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개척, 전 국민 고용 보험 실시, 한국판 뉴딜 구축, 연대와 협력의 국제질서 선도 등과 같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 못지않게 지금까지 추진했던 핵심 정책들이 왜 성과를 내지 못했는지 깊이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정책 오류가 발견되면 정책 기조를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강성 친문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통합 대통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단언컨대, 겸손한 권력만이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도전은 기만이고, 성과 없는 비전은 허구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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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4 17:16

가짜뉴스는 공공의 적이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중국 고전 삼국지의 명장면은 누가 뭐라해도 적벽대전이다. 수백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출사표를 던진 조조는 수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거짓 항복한 방통의 조언대로 배들을 쇠사슬로 묶었다. 묶인 배들 간의 왕래는 자유로 왔으나 손권-유비 연합군의 불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결국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른바 연환계로 잘 알려져 있다. 적벽대전에서는 거짓 항복을 거짓 항복으로 역이용하는 책사들의 두뇌싸움도 흥미진진하다. 손권의 책사 주유는 조조의 부하인 채중과 채화 형제가 거짓 항복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심복인 황개를 매질을 하고 내쫓는다. 내쳐진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하자 조조는 그럴 리가 없다며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손권 진영에서 황개가 매질 당하는 것을 목격한 채중채화 형제가 사실이라는 점을 조조에게 몰래 전하자 조조는 황개의 거짓 항복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주유가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황개를 심하게 때려서 거짓 투항케 했다는 점에서 고육책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렇듯 과거 전쟁사에서는 수많은 가짜뉴스를 둘러싼 정보전이 존재해 왔다. 나쁜 소문을 퍼트려 장군과 군사들을 빼오는가 하면 작은 정보도 크게 부풀려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보의 진위와 옥석을 가릴 만큼 정보 수집의 양과 방식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고도 정보화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뜬금없이 김정은 위원장 신변이상설과 같은 정보의 인포데믹 현상을 경험하였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한반도 상공을 날고 있는 특수정찰기도 없었던 삼국지 시대에는 그렇다 치자. 요즘이라면 곧 들통 날 가짜뉴스들이 계속 확대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신변이상설, 사망설에 휩싸였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20일 넘은 침묵을 깨고 공개 활동을 통해 건재함을 과시하자 무분별한 가짜뉴스의 생산과 확산에 대한 비판론이 실로 크다. 특히 이들은 우리 정부가 충분한 정보자산을 가지고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이 믿는 특정 정보 소스에만 의존하면서 의혹만을 부추기는 경향을 보였다. 연예인 SNS에 악성댓글을 다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실로 무책임한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짜뉴스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 옥석을 가리기 힘들어지는 소위 정보의 홍수현상 때문이다. 또한 통신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이동수단이 온라인으로 집중됨으로써 가짜뉴스의 피해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카더라 하는 루머에 상처를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연예인에서부터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 안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외교안보 분야에 이르기까지 유무형의 피해는 실로 무차별적이다. 적벽대전의 패배에서 보듯 정보 하나하나가 전쟁의 승패와 국가의 흥망까지도 좌우하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문제는 가짜뉴스 생산과 확산의 보이지 않는 커넥션에 대한 페널티 부과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들 세력은 특정 자본을 매개로 하고 있어 자신들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다. 가짜뉴스로 판명되어도 소리소문 없이 잠적했다가 얼마 지나서 또 다른 의혹들을 제기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를 활용할 의도가 있는 한 이러한 가짜뉴스는 계속 생산될 것이다. 가짜뉴스 생산과 확산에 대한 법?제도적 장치 마련이 되지 않는 한 가짜뉴스는 온라인이라는 익명성과 파급력을 타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생활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건전성을 좀먹게 될 것이다. 이번에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신변이상설이 불거짐으로써 그가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 정부가 해명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정부가 특이동향이 없다고 해도 믿지 않으니 공개해서는 안될 전략자산도 은연중에 드러나게 되었다. 전략자산이 없었던 조조도 스파이를 심어 상대편의 의도를 이중삼중으로 파악하는데 노력했다. 전 세계 유일 폐쇄국가인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신중해야 한다. 통일 전 동독주민들은 서독 TV를 보면서 서방세계의 자유분방함을 동경했다고 한다. 자극적인 가짜뉴스가 아니라 북한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가치 있는 진짜뉴스는 없는 것일까? 가짜뉴스가 공공의 적이라고 인식할 때 진짜뉴스가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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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07 16:49

뉴노멀사회와 수축사회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우리는 과거의 일상(normal)을 잃어버렸고,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하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뉴노멀이 일종의 트렌드라기보다는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중요한 개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상황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분야,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문제라는 점에서 총체적 대변동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어떤 삶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것은 그것이 사라져서 지금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의 삶터를 바꾼 신도시와 아파트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살던 동네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몇 년 후 그 자리에는 뉴타운이나 신도시가 들어서곤 했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우리의 삶과 사회는 바뀌어왔다. 그럼에도 지금의 대변동은 전혀 다른 충격을 던지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 김호기 교수는 이중적 뉴노멀의 미래를 전망했는데, 경제 영역의 불확실성과 국가의 귀환, 제3의 자리로 이동하는 사회였다. (국민)국가와 경제의 변화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지만, 사회에서 제3의 자리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개인적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이러한 흐름이 함의하는 바는, 코로나 광풍이 그치면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옛날의 자리가 아닌 제3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제3의 자리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더욱 중첩되는 공간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되거나 중첩되는 공간으로서 제3의 자리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 세계 사이에서 어떤 대안이 나올 것인지 궁금하다. 이 문제는 국가와 경제(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이번 사태로 분명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지만, 여전히 세계화와 지역화는 치열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단기적으로 국가의 귀환은 당연해 보이지만, 국가의 역할과 기능, 시민의 역할과 정체성의 문제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2018년 말 출간된 <수축사회>(홍성국 지음/메디치)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 낯선 세계의 문턱에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는 팽창사회였다면, 2008년 금융위기 전후로 수축사회로 진입하면서 제로섬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축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기주의, 모든 분야에서의 투쟁, 현재에만 집중하는 태도, 팽창사회를 지향하는 집중화, 심리적 문제 등. 수축사회는 어쩌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수축사회를 돌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인류 모두가 이타적으로 바뀌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타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어떤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회는 달라진다. 따라서 경제적자본 이전에 사회적자본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팽창사회에서 붙잡고 있던 효율성과 합리성이 아닌 도덕과 윤리를 통한 사회적자본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낯선 세계의 문턱에 서 있다. 결국 각자의 삶을 살펴야 한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삶이라는 일상을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것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해야 하는 물음이다. 개인의 질문이 우리의 질문으로 바뀔 때 출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순서를 잊지 말자. 시장과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다음은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하다.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그림자를 스스럼없이 당신 머리 위로 던져 주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두운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그 안에서 당신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끄집어 내십시오.(나츠메 소세키, <마음> 중)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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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3 15:43

동서독 보건의료협력 교훈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북한은 지난 3월17일 평양에 종합병원을 착공하기로 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참석한 착공식에서 김 위원장은 인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올해 내로 이를 완공할 것을 지시하였다. 연설 중 눈에 띄는 것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스스로가 수도인 평양에 마저 현대적인 의료보건시설이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실토한 점이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 확산에 북한은 확진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북한의 방역 및 의료체계를 감안할 때 북한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하다. 차제에 남북 방역 및 보건의료분야의 협력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거 동서독은 어떠했을까? 서독의 동방정책으로 1972년 동서독은 우리의 기본합의서와 같은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교통, 환경, 보건,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부속협정을 맺었다. 1974년 동서독 보건협정에서는 전염병의 예방과 퇴치에 있어 정보를 교류하기로 하였고, 의약품, 의학 기술품, 소모품 등의 내용을 공유하기로 하였다. 앞서 1973년에는 접경지역의 감염성 질환이나 재난, 환경오염 등이 상대국에 미칠 때 협력하기로 한 공동재난과 관련된 협정도 체결되었다. 사실 이러한 분야의 협력은 동독이 우선적으로 체결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서독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동독은 다른 분야에 비해 보건의료 분야의 협력이 동독 내에 미칠 영향을 가장 낮게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까지 동서독 보건의료 협력분야에 큰 진전은 없었다. 동독이 여전히 소극적인 데다가 국제정세의 악화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북간 보건의료분야의 협력은 어떤가?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체제위기 이후 보건의료체계의 붕괴를 경험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적 의료배급 시스템으로 인해 여전히 의약품 부족, 의료시설과 의료기술의 낙후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의료보험 체계의 부재로 도농간, 계층별 보건의료 혜택이 상이한 것도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부터 우리는 북한에 대규모 식량과 비료지원을 추진한 바 있고 이후 보건의료분야에 취약한 임산부, 영유아 등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지원을 지속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소극적인 태도로 국제기구나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고 당국 차원의 구체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지난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의 후속조치로 남북 보건 당국 간에 보건의료 분과회담을 개최된 바 있다. 전염병 방지를 위한 정보교환, 결핵과 말라리아 등 치료협력, 중장기적인 방역과 보건의료협력을 추진해 나가기로 합의하였지만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이후 추가적인 협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방역과 보건의료체계는 일거에 어느 수준으로 올릴 수 없다. 많은 재정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전반적인 시스템의 질이 동시에 향상되어야 한다. 병원이 만들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안을 채워야 할 의료기기와 의료진, 의약품과 기반 시설 또한 선진적인 수준이 되어야 한다. 남북한이 동등한 수준의 복지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년간의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결국에는 통일이 되어서야 보건의료 등 양측의 복지수준을 맞추는데 있어 수천억원의 재정이 투입되었다. 단순히 재정적인 투입을 넘어 남북이 생명과 건강 공동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남북간에 협력을 해 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코로나 19와 지난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코로나 확산에 대응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우리가 남북간 보건의료 협력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과거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의 소극적인 자세를 충분히 예견해야 한다. 북한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체제에 부담이 되는 사항은 뒤로 넘기고 예방의학, 한의학, 전염병 치료 등 북한이 관심있는 분야의 정보교류와 기술적인 분야의 협력을 우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세계보건기구(WHO) 등과 같은 국제기구와 연대하여 의료장비와 기술의 지원을 병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류가 보다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인적교류가 수반되고 정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북이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제도화의 과정을 마련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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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9 15:17

사랑의 거리 -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예전, 젊어서 고향에 살 때의 기억이다. 금강 하구 철새도래지로 가끔 청둥오리 사냥을 가는 젊은 축들이 있었다. 그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백조에 대한 것이다. 백조는 우리 말로는 고니라고 불리는 몸집이 크고 털 빛깔이 새하얀 새이다. 녀석들은 갈대숲이나 습지에 무리 지어 앉아있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어김없이 사람이 다가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난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다. 말하자면 생명의 거리인 셈이다. 동물치고는 참 영리하고 똑똑한 녀석들이라 하겠다. 인간 세상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 해도 너무 거리가 가까우면 진력이 나고 싫증이 나게 되어 있다. 좋은 사이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 동료 사이도 그렇고 심지어 애인 사이도 그렇다. 가까운 사이 좋은 사이일수록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세심한 조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집에 사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상호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삼갈 것은 삼가고 눈감거나 비켜 갈 것은 또 그래야 한다.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도 부부유별이라 했다. 부부 사이는 구별이 안 되는 밀접한 인간관계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것은 매우 평범하고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교훈이라 하겠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사귀면서 내가 지키고 있는 원칙 같은 것이 있다. 누구하고든 거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특히 좋은 사람, 내가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지만 지나칠 정도로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도 모조리 하지는 않고 조금은 아껴 둔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미온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나빠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좋은 느낌으로 그 자리에 그냥 멈추어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좋은 관계로의 새로운 복원이 가능하다. 이것을 나는 사랑의 거리라고 말하고 싶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은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사랑은 둘이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관계로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를 말해주는 것도 같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사람들 관계가 많이 소원해진 경향이다. 언어폭력이든지 성추행이란 말까지 나돌아 특히 남녀 사이가 많이 경직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이 얼마나 따스한 말이고 좋은 말인가. 그러나 그런 말조차도 조심스런 세상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마음의 거리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사랑의 거리가 아니고 강제로 만들어진 마음의 거리다. 왜 우리가 이 좋은 세상을 살면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게 되었는가. 많이 서글픈 마음이다. 최근엔 코로나19 전염병 때문에 사회적 거리란 것이 다시 생겨났다. 일상의 평범한 삶은 멈추고 갑자기 이상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삶과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신종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거리를 두어야 하고 신체적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방책이다. 우리 풀꽃문학관만 해도 계속 휴관 중이다. 뜨문뜨문 관광객들이 오고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갑지가 않다. 멀리서 바라보며 인사하고 좋은 시절이 오면 다시 오시라 인사를 보낸다. 물론 악수도 하지 않고 사진도 같이 찍지 않고 책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해도 다음에 하자고 미룬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참 많이 소원해진 느낌이다. 어쨌든 다 좋다. 고니들에게는 생명의 거리. 나에게는 사랑의 거리. 미투 사태에는 마음의 거리. 코로나19에는 사회적 거리. 모든 거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단절이 있을 수 있고 소통의 부재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모든 거리들이 사람을 살리는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쯤 섭섭함과 공허함과 불편함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넘어서 생명의 거리, 소생의 거리, 끝내는 사랑의 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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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2 15:18

어둠 속의 희망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미래는 어두운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대체로 미래가 띨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다. 1915년 1월18일,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이다. 지금처럼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왠지 위로가 된다. 재난과 위기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미래는 항상 어두운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세계와 공동체에 대한, 자본과 경제에 대한, 노동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 주변의 일상은 그야말로 대혼란과 격변의 시대이다.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고, 대학은 온라인강의로 대체되고 있다. 영화관을 찾는 사람도 급감해서 단축 운영 및 휴관이나 폐관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공공시설은 대부분 휴관 상태이다. 문제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측은 있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지금 사태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제 끝날지 모른다.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으로 90세, 100세를 예측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질병으로, 누군가는 사고로 일찍 죽는다. 이 불확실성은 우리를 어둠으로 이끈다. 그 결과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다. 그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어쩌면 삶의 여정에서 어둠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 속에서 희망을 떠올린다. 어둠 속의 희망이라는 책에서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 희망이란, 약속되거나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솔닛이 생각하는 희망은 세계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성취와 성공 가능성이 아니라 선한 일을 바라보고 그 일을 해나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지키는 일이다.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좀 더 삶의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노동을, 시간을, 돈을, 기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다음은 리베카 솔닛의 책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어느날 아침 비를 맞으며 케네디의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노라니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여성파업 소속의 그 여성은 말했다. 몇 년 후 그는, 가장 주목받는 반핵행동 중 한 사람이 된 벤저민 스팍 박사가 자기 삶의 전환점은 한 작은 무리의 여성들이 비를 맞으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만드는 일은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거대한 악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는 일이다. 누군가는 하찮은 것이라고 비웃을지라도, 비록 큰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작은 위로와 격려의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그 일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향해,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하나씩 쌓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만약 그것을 일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면 비록 연약할지라도 작은 승리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치와 사회 각 영역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 기준으로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일, 서로의 필요를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희망이 아니겠는가.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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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6 17:07

비전통적인 안보분야의 남북협력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25년 전인 1995년 이맘때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한 계기에 북한에 대한 긴급 식량지원 발표를 한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심각한 체제위기에 직면하였다. 80년대 말 탈냉전의 격변기에다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대기근 발생, 배급제 붕괴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1994년 추진했던 남북정상회담의 기대감이 사라지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중에 김영삼 대통령은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북한에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도 불구하고 조문파동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에 있었지만 식량사정이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북한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해 6월부터 남북간 북경 쌀 회담이 개최되었다. 수세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북한은 당국 간 회담이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협의하는 형식을 요구했다. 남북의 공방 끝에 쌀 15 만톤을 원산지는 표기하지 않고 남측 선박으로 수송한다는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다. 분단이후 사상 처음으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아쉽게도 후속회담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측은 이 기회를 당국간 접촉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활용코자 하였으나 북한은 최대한 비공개적으로 추진하되 식량지원만을 확보하려하였기 때문이다. 쌀 수송과정에서 인공기 게양사건, 삼선 비너스호 선원 억류사건 등 여러 악재들이 출몰하여 합의 이행도 늦어졌다. 이듬해 북한은 다시 대홍수의 피해를 입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할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남한 정부에 대한 공식 지원요청을 주저하였고 남한도 당국간 공식절차를 통한 협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남북관계는 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북경 쌀 회담은 탈냉전 직후 발생한 남북회담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다. 대부분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바뀌면 변화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북한의 근본적인 대남 인식이라고 판단된다. 흡수통일에 대한 불안감과 이에 따른 수세적인 대응이 그것이다. 자존감 때문에 어려워도 지원을 요청하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문재인 정부의 평화프로세스에서는 우리의 대북정책의 목표가 북한을 붕괴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북한은 스스로 라기보다는 우리쪽의 이끌림에 따라 서서히 남북대화에 나오기 시작했고 우리도 북한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남북관계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로 뒤숭숭한 상황이다. 코로나 19 확산에 대한 북한 내 상황이 불확실한 국면에서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북한 당국도 국가비상방역체계를 세우고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으며 해외 감염사례들을 실시간으로 주민들에게 전달하고는 있으나 국경유입과 외부정보 차단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어 내부 사정을 알기 어렵다. 북한은 진짜 코로나 19의 안전지대일까? 이참에 남북간 방역협력, 보건협력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개성공단을 통해 우리도 부족한 마스크를 제조하고 북한에게도 지원하자는 제안들도 눈에 띈다. 북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명분과 자존심을 중요시하고 고난의 행군과 자력갱생의 방식에 익숙한 북한은 우리 쪽에 협력이나 지원을 먼저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초국가적 방역협력의 문제를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해 보인다. 먼저 우리 내부의 코로나 19 극복 노력이 우선이다. 다행히도 이번 주를 중심으로 확진자 증가세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국민들이 단합한 결과이다. 조속한 시일 내에 코로나 19 청정지대로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다음으로는 국제적인 확진자 증가에 대비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재유입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일치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남북 접경지역부터 시작하여 북한 내부의 감염병 퇴치, 보건의료 분야 협력을 위한 남북간 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은 우리와의 협력에 공식적으로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남북 정상간 친서가 오고 갔다. 과거처럼 여건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노하우를 북한 지역에 전달하고 필요한 인도적 지원을 강구하고 북한이 빗장을 연다면 코로나 19와 같이 비전통적인 안보분야의 남북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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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2 17:02

슬럼프에 대하여

나태주 시인 가끔 문학강연을 하면서 젊은 친구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글쓰기에 대해서, 독서에 대해서, 더러는 인생에 대해서. 한결같이 쉽게 대답해줄 수 없는 무거운 문제들이다.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그다음은 슬럼프에 관한 것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니 경험도 있고 그런 경험 가운데 사랑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알고 있겠고 슬럼프 극복에 대해서도 무언가 묘안을 갖고 있지 않겠나 싶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자 얼버무리지만 슬럼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답을 내놓기도 한다. 슬럼프.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일종의 고난이고 고통이겠다. 슬럼프가 뭐 별것일까. 내내 잘 글러가다가 주춤주춤하는 것이 슬럼프다. 그러다가 심해지면 가속도가 떨어져 아예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막막한 일이고 답답한 일이다. 이러한 절망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름대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냥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인데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제대로 된 답이 아니다. 어찌해야 좋은가? 이쯤에서 나는 나의 지난날 경험을 불러내야만 한다. 그러한 때 나는 어찌했던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젊은이들도 나에게 묻는 것이리라. 그러하다. 나에게도 나름 몇 차례 슬럼프가 있었다. 인생의 슬럼프가 있었고 시인으로서 시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 슬럼프가 있었다. 처음엔 무척 당황해하고 답답해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우선은 기다려야 하고 생각을 좀 더 느슨하게 가져야 했다. 단기전으로 생각지 말고 장기전으로 접근해야 했다. 거기에 첫 번째 항목이 기다림이고 느긋함이다. 시간의 은택을 입어야 한다. 시간이란 참으로 은혜로운 존재이다. 많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새로운 능력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사막에 사는 전갈의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전갈은 사막의 맹독성 절지동물. 생김새도 흉측하지만 꼬리 부분에 치명적인 독침이 있어 이 독침으로 먹잇감을 공격하고 나서 그 대상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식량으로 삼는다고 한다. 때로는 그 먹잇감 가운데 제법 큰 동물도 걸려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천하무적 같은 전갈도 잡아먹히는 때가 있다고 한다. 바로 독침으로 먹잇감을 쏘았을 때이다. 그 순간을 노려 사막여우 같은 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전갈을 집어먹는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갈은 일단 상대방을 쏘고 난 다음에는 재빨리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긴다고 한다. 한참 동안 몸에서 빠져나간 독이 새로 생겼을 때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기다림이고 물러섬이고 인내이고 시간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 안에서 새롭게 생기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비록 작은 동물이지만 우리 인간도 이러한 전갈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하겠다. 이것이 하나의 지혜요 현명이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가? 슬럼프에 빠졌는가? 그렇다면 일단은 참을 줄 알아야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나름 궤도 수정도 필요하다. 터닝포인트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힘을 비축할 때 새로운 출구가 열린다. 나 자신만 해도 여러 차례 슬럼프가 있었고 위기가 있었다. 인생의 위기. 시인의 슬럼프. 그 슬럼프와 위기가 그 이후의 나의 인생과 시를 새롭게 좋은 쪽으로 바꾸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고마운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 없이 성급하다. 기다릴 줄 모르고 참을 줄 모르고 물러날 줄 모른다. 그러니 나날이 고달프고 지치고 답답한 것이다. 목전의 유익이나 편리보다는 보다 먼 날의 성공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한다. 인생은 의외로 길고 지루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름답고 찬란하기도 한 것이기도 하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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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5 16:18

코로나19와 봄이라는 기적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매년, 그리고 매일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계획한다. 그리고 대부분 새로운 삶을 만들기보다는 실패하고 만다. 본인의 의지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실패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삶을 위한 계획이 내적 의지만 있을 뿐 외부 환경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계획한 사람은 저녁 회식을 줄이거나 취침시간을 앞당겨야 하는데, 실제로는 환경은 그대로 두고 의지로만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만큼 우리의 삶의 조건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사례는 근래 없었던 것 같다. 정치적 혹은 경제적 상황 역시 큰 충격이 있었지만 개인의 일상을 이렇게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 상황은 거의 전쟁이나 쓰나미를 겪은 지역의 그라운드 제로와 같은 현실에 가깝다. 그 결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는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고 있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복잡하고 바쁜 삶이 새롭게 성찰되고 있는 점이다. 사람들의 삶이 단순해지고 있다. 수많은 사회적 관계는 가장 중요한 관계로 축소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종료된 이후 이 두 가지 특징이 어떤 양상으로 이어질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보 과잉의 측면에서 마스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전문가와 비전문가, 일반인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이 언론과 SNS 등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양산되고 확산된다. 전문가들 또한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예가 마스크에 대한 관점이다. 최소한 국가인증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입장부터 해외 사례를 들면서 굳이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다는 관점까지 서로 다른 정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지금처럼 감염 확산이 빠르게 진행되는 현실에서 대중은 불안 속에 극도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마스크를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대형마트 앞에 줄을 서는 풍경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태도로 이 과정을 견뎌야 하는 걸까? 우선 수많은 정보 가운데 핵심 원칙을 가려내서 준수하고, 나아가 삶의 불필요한 요소들을 걸러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동시에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화되고 현실에서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남과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은 맞지만, 지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도 결국 공동체의 힘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온화했다. 과일이나 벼농사 등 열매를 맺어 추수를 하는 것들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 속이 꽉차고 맛이 난다고 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 일 없는 인생이야 없지만, 이러저러한 고통을 견디고 어려운 시간들을 거친 이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문제는 그러한 순간들을 어떤 자세로 직면하고, 그 시간들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추위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있다. 언젠가, 봄은 올 것이다.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시인 김소연은 봄을 가리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고 했다. 그 기적을 위해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시점에서 봄이 오는 순간까지 어떤 시간으로 채우는가 하는 점이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혐오,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채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맞이할 봄에 더 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땅을 다지고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누군가는 벽을 지탱할/대들보를 운반하고,/창에 유리를 끼우고,/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중에서)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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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7 15:26

통합 보수 정당이 나아가야 할 길

김형준 명지대 교수 자유한국당과새보수당, 전진당이 합당해서 미래통합당(통합당)으로 17일 공식 출범했다. 지난 2017년 1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보수가 뿔뿔이 흩어진지 3년 만이다. 통합당 지도부는 한국당 체제가 사실상 그대로 유지되고, 기존 한국당의 김형오 공관위원장 체제도 이어받기로 했다. 일단 야권 정계개편의 가장 큰 축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주목 받을 만하다. 총선을 두 달 정도 남기고 그동안 파편화된 보수 정당들이 하나로 통합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보수가 힘을 합치라는 국민의 뜻에 부응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설 연후 직전에 KBS와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1월 18일-21일)에 따르면, 선거 전에 보수 야당 간 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필요하다(50.7%)는 응답이 필요하지 않다(37.5%)보다 훨씬 많았다. 특히 보수의 텃밭인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에서는 통합 필요성에 각각 59.9%와 55.3%가 동의했다. 통합당은 일단 탄핵의 강을 건너 새로운 집을 짓고 개혁 보수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산도 많아 보인다. 통합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벌써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통합의 한축이었던 유승민 의원은 통합당 출범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지역구 공천을 둘러싼 통합 세력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유 의원은 김형오 위원장이 갈수록 이상해 진다라며 총선 공천 작업에서 새보수당 인사들이 부당 대우를 받고 있다는 취지의 불만을 표출했다. 여하튼 유승민 의원의 전략적 두문불출이 길어지면 그만큼 통합의 시너지 효과는 반감된다. 통합의 화룡점정을 위해 조속한 시일 내에 황교안 대표, 유승민 의원, 김형오 위원장간의 3자 회동이 추진되어야 한다. 공천을 포함해 정치로 풀어야 할 것을 정치로 풀어야 통합의 강을 건널 수 있다. 단언컨대, 흩어졌던 보수 세력이 단순히 합치는 것만으로는 보수가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확보하고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통합당이 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정당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 표출된 국민들의 이해를 잘 집약해서 좋은 정책을 만들고, 대한민국 미래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을 충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정파적 이익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챙기고,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진영의 논리에 빠져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할 것이 아니라 대안과 정책을 갖고 경쟁하는 정책 정당이 되어야 한다. 낡은 이념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미래통합당이 당명과는 달리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과거에만 얽매이거나, 통합에 앞장서지 않고 분열에만 치중한다면 오히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원내 113석의 통합당 출범으로 이번 총선은 1여다야 구도가 아니라 진보 대 보수간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총선은 본질적으로 현 정부에 대한 중가 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통합당이 내세운 정권심판론이 보수 세력 결집과 중도표심 확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가 최대 관심사다. 한국갤럽의 2월 둘째 주 조사(11-13일)에 따르면,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정부지원론(43%)보다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정부견제론(45%)이 앞섰다. 한 달 전 조사(1월 7-9일)에서는 정부 지원론이 견제론보다 무려 12% 포인트 앞섰으나, 이번에 역전됐다. 민주당의 잇단 악재에 불만이 쌓인 중도층에서도 지원론(39%)보다 견제론(50%)이 훨씬 많아졌다. 보수 통합으로 지금까지 진보로 기울어졌던 운동장이 이제 겨우 평평해졌다. 선거는 통상 새로움의 경쟁이다. 어느 정당이 더 큰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지가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변화가 최상의 전략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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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0 16:15

학교, 부모, 청소년이 함께하는 통일교육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지난 11일 통일부와 교육부가 지난해 학교통일교육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통일이 필요한가에 대한 우리나라 초중고 청소년들의 대답은 필요하는 의견이 55.5%라고 한다. 10명이면 절반정도가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공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할 대상인 북한에 대한 이미지도 청소년들의 대략 60%가 전쟁, 군사, 독재 등 과거 남북 대결구조 속의 이미지를 연상하고 있다.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43.8%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비중도 35.8%나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물론대부분의 여론조사가 그렇듯이 이러한 수치들은 그해 그해의 남북관계 상황 등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실제로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2018년에는 훨씬 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결과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생 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필자로서는 청소년들의 통일의식이 변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다소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초중고 청소년들이 앞으로 통일미래시대를 열어나가는 세대라고 볼 때 청소년들이 통일문제에 대해 희망적인 사고를 불어넣어주어야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통일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이 80%에 육박한다는 것은 국영수 문제풀이와 입시에 바쁜 우리 청소년들이 그나마 도덕이나 별도의 체험을 통해 통일문제에 대해서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계기를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이 통일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아직 정서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청소년들은 대부분 부모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모든 사안을 판단한다. 부모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만났던 지인은 어린 손주가 통일을 하면 우리나라가 망한데요라는 말을 하기에 누구에게 들었냐고 물었더니 엄마 아빠에게 들었다고 해서 좀 놀랐다고 했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 치열한 입시와 높은 취업문 속에서 처절한 경쟁을 경함한 젊은 부모 세대들은 통일이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거나 자녀 세대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으로 인식될 경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쉽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은 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앞둔 자녀들의 인식에 그대로 투영될 가능성이 높다.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논란이나 탈북자들도 동등하고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의견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는 통일문제가 더 이상 당위가 아닌 개개인의 현실 문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실태조사에서도 다양한 체험활동 제공, 적절한 자료뿐 아니라 통일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의식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통일이라는 이미지가 통일비용(10.9%)이나 사회갈등(10.6%) 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평화와 화합(34.0%)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표출된 것은 그동안의 평화 유지노력 덕분이다. 당장의 통일이 어려운 현실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항구적인 평화상태를 구축하고 점진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비핵화 협상이 조속히 마무리되어 핵없는 평화구조를 정착해 나가는 것이 긴요하다. 현재 북미협상이 교착국면이지만 남북관계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든다면 북미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대북제재와는 별개로 우리 국민들의 개별관광이 실현된다면 남북 이질감을 극복하고 동질성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이 허용되고 나아가 지난 금강산관광처럼 민간교류의 하나로서 남북관광교류가 실현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산 통일교육의 장은 없을 것이다. 통일 전 동서독도 동방정책이후 동서독 청소년 교류도 전개하였다. 일전에 만난 독일 학자는 전범국이자 분단국이었던 동서독이 자신들의 통일염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지만 교류를 통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통일은 남녀노소, 남북을 구분할 것 없이 전체 민족의 단합된 염원의 결집으로 나타나야 한다. 북한이 조속히 핵포기 결단을 내리고 남북이 생명공동체로서 공존 공영하는 틀을 만들 때 가능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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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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