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경사진 언덕바지 햇볕 좋은 골목이 있었다 그 언덕 왼쪽 자락에 핀 보라 제비꽃을 좋아하던 옛 소녀 누굴 찾는 걸까, 골목 어귀를 서성인다 그날 불었던 서풍이 소녀의 볼을 물들였을 석양이 뭇별 쏟아지던 밤이 어디론가 가고 없다 이미 시들어버린 제비꽃, 서성거리던 소녀 말없이 돌아선다 골목을 빠져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화자는 발에 밟힐 뻔했던 보라색 제비꽃이 골목 어귀를 서성이다가 빠져나간 서풍에 양 볼에 물들었다. 보라색이 온통 골목을 물들였을 것이다. 나를 생각해 달라는 무언의 색이라고 말해도 될까. 청초한 꽃에 대한 고백이 솔직하다. 꽃바람이 소소리바람처럼 매서울 때도 있지만 뱃사람들이 갈바람이라고 부른다는 서풍이 봄에 오셨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은 서학동 골목에 핀 제비꽃이란다./ 이소애 시인
내가 실을 감으면 손주는 풀고 감으면 풀고 전기불빛이 감기고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 들리고 감기고 감기며 사과처럼 동그러지는 실타래 엉킨다고 천천히 감고 슬슬 하품이 감기고 펄펄 함박눈이 감기고 어느새 애호박만큼 커지는 실타래 뽀송뽀송 나를 감고 손주는 도란도란 할미 품에 잠드네. △ 맑고 고운 시여서 손주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침내 ‘전기불빛이 감기’는 은유적인 비유는 애호박만큼 동그랗게 커져서 담장에 걸린 호박이 성큼 떠오른다. 사과처럼 감긴 실타래가 하품도 감기고 함박눈이 감긴다는 군더더기 없는 사물의 통찰력에 시의 맛을 느낀다. 나를 감는 실타래는 뽀송뽀송하다니요. 손주의 잠든 모습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따뜻하고 보드라운 숨소리가 아닐까요.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시가 박완서 작가처럼 ‘시의 가시에 찔려서’ 시가 내게로 품었다. / 이소애 시인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느 해질녘 비가 나리고 무담시 지나가던 바람도 너를 어여삐 하였으리라 꽃만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 한밤에 우레도 울고 뿌리까지 오는 뙤약볕도 너를 향기롭게 하였으리라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거나 그것만의 길은 아니다 뽑혀 던져진 풀일지언정 세상에 그의 웃음도 있으리라 △ ‘뽑혀 던져진 풀일지언정’ 내던져진 비참한 생명에 눈길을 준 화자의 마음이 고맙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은 소외되고 멸시받는 잡풀에도 존재감을 인정해주며,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다. 처절한 절망감에서 허덕이는 보잘것없는 잡풀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건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일으켜 세우는 웃음일 것이다. 꽃의 향기는 꽃처럼 시늉하는 모든 사물에서 향기를 맡는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무담시 지나가던 바람’을 소리쳐 불러 내 곁으로 앉힐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테니까./ 이소애 시인
내 주소가 없어 뉘 방(方)으로 산 세월 대문이 있어야 내 문패를 달 게 아닌가 가난한 마음에다 대못 박아 걸 수 없는 일 내 글이란 것도 평생을 남의 방으로 썼으니 인생 심지는 타들어 가고 불은 꺼지려 깜박이는데 언제나 내 글을 만들어 문패를 달아 볼거나 △ 제목만 읽어도 정겹다. 대문에 「문패」가 걸린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문패는 ‘대못 박아 걸’었다. 가끔 우체부 아저씨가 문패를 보고 이름을 부르면 사랑이 담긴 편지를 불쑥 내밀던 시절, 남의 집 셋방살이는 주눅이 들었다. 문패 없는 방이었으니 말이다. ‘인생 심지는 타들어 가고/ 불은 꺼지려 깜박이는데’에서 성급한 시인의 시간 재촉이 엿보인다. 시간이 몸을 끌고 다녀도 문패처럼 시인의 시집들이 깜박이는 불을 꽉 붙잡고 있을 것이다./ 이소애 시인
이거 우리 딸이고만 곱기도 허다 망헐 년 시집가더니 한 번도 안 와 늙지도 않고 부자로 잘 산디야 아이고 곱기도 허다 망헐 년⋯⋯ 이 사진을 보고 치매 깊으셨던 할머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당신의 처녀 적 사진인데 △ 읽을수록 마음이 아린다. 흐릿한 기억에서 방황하는 눈동자에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는 듯 목메인다. 시인은 이 시를 완성할 때까지 얼마나 할머님을 불러보았을까. 생각만 하여도 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하루를 산다는 것은 괴롭다. 아프다. 곱디고왔던 내가 허공을 나는 새처럼 날개를 젓다가 제집을 잃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상상은 무섭다. 어느 누가 할머니의 기억을 훔쳐 간 걸까. 시간일까. 외로움이었을까./ 이소애 시인
달궁에 가보라. 달궁! 그 옛날 마한의 효왕*도 숨어든 그윽이 깊은 계곡, 달의 궁전 나무들 모여 끝이 먼 숲을 이루고 숲은 첩첩 삼도(三道) 아우르는 삼림대로 뻗쳐 올랐다 비탈에서조차 곧추서 나무들 하늘 향해 의젓하고 계곡 따라 있어야 할 제자리에 좌정한 묵직한 바위들 사이사이 휘감으며 유장히 흐르는 석간수 더는 비할 데 없어 느긋한 골짜기 달궁에 가보라 홍진 세상 등진 지 풍진 세상 비켜선 지 이미 오래인 거기, 달궁에 가보라 달궁! *효왕- 백제, 진한, 변한의 공격을 피해 지리산에 도성을 쌓고 천혜의 요새인 달의 궁전을 지어 살았다는 마한의 6대 임금. △ 그 옛날 효왕이 지었다는 달의 궁전인 ‘달궁’이라는 말속에는 나를 안아주는 포근함과 달달함 그리고 그윽함이 다 들어있다. “홍진 세상 등진 지/풍진 세상 비켜선 지/이미 오래인”사람들은 거기 달궁에서 ‘세상이 틀어졌어도 “곧추 서”있는 나무를 우러를 것이다. 삶에 찌든 “홍진”과 “풍진”을 깨끗이 씻어내리라. 곧 깨끗한 선비 한 분 걸어 나오시리라./ 김제 김영 시인
늙은 호박이 밭두렁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노란 얼굴 가득 주름이 깊다 나는 호박을 따다가 보았다 그가 오래 앉아있어 움푹 파인 자리 세상 밖으로 처음 나갈 때 나처럼 그도 오래오래 망설였던 것일까 한자리에 오래 뭉그적거린 흔적 또렷하다 △ 한자리에서 오래 궁싯거리던 호박은 다 늙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가 앉았던 자리는 “움푹 파”였다. 얼굴이 외꽃처럼 누렇게 뜨도록 호박을 무엇을 궁구한 것일까? ‘호박’ 대신 ‘시인’으로 대체해보자.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문단에 나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가? 남들 다 익어가는 가을 되어서야 저도 한번 슬그머니 세상 밖으로 나선 ‘신인 시인’은 또 얼마나 떨렸으랴! 움푹 파이도록 망설였던 가을 호박을 가만히 안아준다.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서는 어린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제김영>
밑바닥으로 떨어진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다 혀의 경전을 마저 읽으며 몸을 곧추세워 그늘진 고리봉에 매달린다 뙤약볕에서 까칠한 옷을 벗기고 무쇠 가마솥에서 열병의 신고식을 치른 후 생의 비린내를 심방에 가두고 누각을 짓는다 뼈를 버리고 뼈의 눈물을 흘려 짓누름을 건디고 살 한점 떼어 직사각형을 이룬다 불은 자력에 대추 숯에 이끌리어 무수한 뿌리를 늘인다 질항아리 속에서 혀의 누각을 빚고 있다 △ 집집이 커다란 장 항아리가 있던 시절이 있다. 그 항아리마다 씨 간장을 소중하게 보관하던 시절이 있다. “무쇠 가마솥에서” “생의 비린내를” 벗어버린 콩은 메주가 되고 그렇게 만든 메주가 대추 숯과 함께 몸을 바꾸는 곳이 항아리 속이다. 메주가 하는 일은 “질 항아리 속에서 혀의 누각을 빚”는 일이어서 집집이 맛있는 간장이 발효되는 것이다./ 김제 김영 시인
하늘에는 샘이 있나 보다 몇 날 며칠 장대비가 내리는 걸 보니 큰 샘이 있나 보다 하늘에는 군대가 있어 싸움하나 보다 큰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큰 포병이 포를 쏘나 보다 하늘에는 큰 발전소가 있나 보다 번쩍번쩍 비추는 걸 보니 크나큰 전지로 땅을 비추는가 보다 △긴 장마가 끝났다. 하늘은 얼마나 많은 것들로 하늘이 되었을까? “큰 샘”이 있으니까 “장대비”가 지치지도 않고 내렸을 것이다. “군대”가 있으니까 “포를 쏘는” 소리로 천둥이 울어댔을 것이고, “큰 발전소”도 있으니까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걸 쏟아내서 아무것도 없고 모든 걸 다 갖추어서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걸 다 아는 노인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의 마음이 닮는 것도 같은 이치다. / 김제 김영 시인
사람은 떠나고 청춘은 눈감았듯이 바람 속 천 개의 얼굴은 분노와 저항 속에서 잠들지 않았다 흰 가시로 동여맨 몸은 그들의 탐욕과 구속을 이겨냈으며 가난한 인내와 희생으로 뿌리의 곡선을 보호했다 바람이 꽃을 문다 고개 숙인 무거운 설움은 시들은 잎사귀를 뚫고 생명으로 응집된 절체절명으로 노오란 희망꽃 피워냈다 바람도 웃는 꽃을 이기지 못한다 꽃이 웃는다. △ “사람은 떠나고 청춘은 눈 감”았어도 “바람 속 천 개의 얼굴은” “잠들지 않았다”라는 저 선언 속에는 인생의 여정이 “인내와 희생으로” 박제된다. 잠들지 않은 바람은 “희망꽃을 피워”낸다. 그렇게 바람도 결국은 “웃는 꽃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앉는다. “무거운 설움”도 “노오란 희망꽃”을 피워내는 힘이 된다. 오늘 하루라도 “웃는 꽃”을 피워 보고 싶은 마음이다. <김제김영>
허리를 휘감아 오르는 노란 줄기들 새콩 가지도 괭이싸리 다리도 노란색으로 뒤덮인다 다닥다닥 달구지풀 실새삼 열매 사람들 머리 같다 석탑으로 든 계단을 오르는 햇빛 짱짱한 초파일 아들의 취업 기원하는 논물 든 걸음 줄기처럼 휘어지고 비틀거리고 가래 끓는 주문이 구멍 난 양말보다 더 질긴 천원 지폐 한 장 복전함이 받는 땡볕 아래 고목처럼 서 있는 아버지 그 곁, 그늘 참새 한 마리 △ “고목처럼 서 있는 아버지”는 땡볕에서, “참새 한 마리”는 그늘에서 서로의 영혼이 치유되는 계단을 오른다. 초파일 복전함에 정성껏 넣은 지폐가 “아들의 취업 기원하는” 기도였다. “허리를 휘감아 오르는” 생의 궁핍에 쪼들리지만 아버지는 꼿꼿하시다. 풍요로운 열매로 복전함을 채울 꿈이 있다. 기도는 허기질 때 신의 소리가 들린다. 신의 소리는 “구멍 난 양말”에서 들려온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새가 된다. / 이소애 시인
가을 햇살이 내려 흙담 너머로 빨간 고추가 익어가고 황금물결 출렁이는 들길 낡은 모자를 둘러쓴 허수아비 손짓에 알밤 익는 소리 추녀 끝으로 맑게 갠 하늘이 들어와 앉는 숲길을 걸으면 그대 향기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들꽃만 본다. △ 가을을 부른다. 두 손 오므려 나팔을 만들고 큰 소리로 가을을 불러본다. 된더위가 놀라 뒷걸음칠 때 가을은 초록을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수채화를 그리기에 바쁠 것이다. 논두렁을 오가는 아버지 발걸음이 아닌 허수아비의 늙은 모자가 새를 불러올 가을이 뛰어올지도 모른다. 허수아비를 보고 가을이라고 손짓하지 않을까. 가을이여! “빨간 고추가 익어가”기 전에 코스모스와 들국화꽃 꽃바람을 타고 오시게나./ 이소애 시인
무릎도 안 아프고 암시랑 않다 허리 택배로 보내주신 한 자루의 거짓말 껍질을 까기도 전에 매운 눈 뜰 수 없네 멀쩡하단 말씀에 생생한 줄 믿었네 물크덩 썩은 속내 도려내며 알았네 어머니 거짓 안부만 입에 달고 사셨네 △ "택배로 보내주신 한 자루의 거짓말”은 화려한 수사나 감정이입 없이 살아 있는 사물의 실체를 옮겨놓았다. 사물이 꿈틀거리며 냄새를 풍기고 "썩은 속내를 도려”낼 때 어머니의 거짓말이 뭉클 눈시울을 뜨겁게 했으리라. “암시랑 않다”라고 소리 내어 읽으면 허리 아픈 어머니의 말씀이 들린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택배로 보내면 아린 가슴이 씻겨질까? 잠 못 드실 가슴앓이 병은“썩은 속내 도려”낸 자식 걱정 잊은 지 오래다./이소애 시인
벽골제에 가면 물소리가 들린다 농부의 가슴을 흘러 김제 들녘을 적시고 마당 앞으로 지나가는 물소리 하늘을 이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어깨 쑤시는 아픔이 벼포기 마다 푸르다 가장 아득하고 가장 가까운 지평선을 달려온 소년의 이야기가 새만금으로 이어지고 있다 벽골제에 가면 둑을 쌓던 백제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벽골제에 가면 백제시대의 사람들이 “둑을 쌓던” 노랫소리가 들린다. 옛 농부의 땀방울이 벽골제를 지나, 논둑을 지나, 풍요로운 밥상에서 숟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면 “마당 앞으로 지나가는 물소리”가 김제 평야 지평선이 보였다. 벽골제 둑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지금도 백제 사람의 노랫가락에 맞춰 꽹과리를 친다. 벽골제는 백제 사람을 기억에서 불러내는 마법을 가진 혼이 있었다./ 이소애 시인
고고한 넋이 외로움을 이겨 함초롬히 솟아난 혼이다 몸맵시 가다듬고 세월을 낚아 올곧게 자라온 선비다 그윽한 향기 봄볕에 녹아 창문을 두드리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떠나고 난 후 란蘭의 자태를 보면 알 것 같습니다.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고 고풍스럽게 “몸맵시 가다듬고” 살아 온 사람은 더 그립습니다. “세월을 낚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노라면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사랑은 시들고 기억으로 떠오르는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은 “란”의 향기와 같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며듭니다./ 이소애 시인
궂은 시대를 건넌 아버지는 왜 자주자주 노래에 엉켰을까 광복절 환호 속에 막걸리 거나한 날 단상에 올라 온 동네 흐드러진 김삿갓 노래 어제처럼 쟁쟁하다 만주벌판 누비느라 못다 한 소절 내 비록 잇지 못했어도 한더위 잦은 심부름 어김없어 열두 살 단발머리 노란 주전자 골목 휘돌아 집으로 가는 길 몰래 가끔 마셨지 미스터 트롯 막걸리 한잔에 한 잔 맹물로도 얼큰하다 △ 영탁의 ‘막걸리 한 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만주벌판 누비”시던 아버지 생각난다. “광복절 환호”성과 함께 막걸리 거나하게 드시고 “김삿갓 노래” 부르시던 아버지 생각난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 받아오다 “몰래 가끔 마”시던 어린 나도 거기 있다. “미스터 트롯 막걸리 한잔” 들으면서 막걸리 대신 “한 잔 맹물”만 마셔도 아버지 생각이 얼큰하게 올라온다./김제 김영 시인
담쟁이 넝쿨이 벽에 붙어 바락바락 기를 쓰며 오르고 있다 맨 앞 꼭두만을 고집한다 제 뿌리가 땅에 뻗어 있는 줄은 까맣게 잊고 오직 하늘만 바라본다. 그 밑을 한들거리며 여유롭게 해찰하는 능수버들이 있다 △ “바락바락”이라는 말, 참 질긴 말이다. ‘바락바락’이라는 말은 ‘악을 쓴다’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사람의 목덜미에는 예외 없이 핏대가 선다. 벽을 기어오르던 “담쟁이 넝쿨”도 담쟁이의 핏대였다. 굵은 그 핏대는 여간해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의 목적을 다 이룬 후에야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핏대를 타고 올라온 말속에는 불이 들어있어서 제 속도 타고 듣는 사람의 속도 탄다. 능수버들이 손잡아 주지 않았으면 불같은 성미가 들끓는 세상은 잿더미가 될 뻔했다./ 김제 김영 시인
밤새 꽃이 하는 말 듣기 위해 새벽하늘에 귀 하나 걸어 놓았다. △ 캄캄한 밤이 결국은 아침에게 자리를 내주는 이유가 이 시에 있다. 어둠 속에 핀 꽃이 이 어둠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동이 트기 전에 어둠을 헤치고 꽃은 우물의 첫물을 길어 올렸을 것이다. 신은 꽃의 기도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시려고 “새벽하늘에/ 귀 하나//걸어 놓았”을 것이다. 해서 아무리 캄캄하고 절망스러워도 끝내 꽃은 활짝 피어날 것이다./ 김제 김영 시인
푸른 하늘의 구름은 추상화다 천 년 고찰 은적사 뒤 숲길을 거니는데 삶이란 찰나가 아닌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면 자유일 텐데 꽃과 나무는 가벼워지면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데 시간의 빠름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데 나는 자유로운 산중인이 되어 자연과 같이 인생의 한 조각 자서전을 쓰고 있다 △ 삶이 순간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다. 매 순간 천만년 살 것처럼 마구 덤비고, 욕심부린다. 순간마다 끝까지 혼자만 살아남을 것처럼 싸우고 미워한다. “꽃과 나무”가 모든 걸 내려놓는 시간이 있듯, 사람도 어느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자연의 말을 충실하게 받아 적으며 자연의 한 조각으로 스며들고 싶을 때가 있다. / 김제 김영 시인
바람 솔솔 불던 어느 늦은 초겨울 저녁 할머니는 집 뒤 장독대에 시루떡 정성 들여 차려놓고 한없이 소원성취 위해 손바닥이 닳도록 빌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철없는 손주는 시루떡 먹고 싶은 마음으로 할머니 기도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 손주는 그때의 시루떡을 생각하면서 할머니 기도를 듣고 있습니다 △ 그리움과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 옛 기억은 내적 분열로 폭발하여 시어를 불러낸다. 시는 기억에 대한 파편이다. 할머니의 기도는 장독대 시루떡으로 떠오르지만, 할머니 나이가 된 손주는 비로소 기도가 들리는 것이다. “손바닥이 닳도록” 할머니의 손은 뜨거웠을 것이다. 기도는 시루떡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의 뜨거운 그리움이 기억을 불러온다. 시루떡이 할머니이다. / 이소애 시인
[기고] 학교폭력 응답률 1위 오명 씻어야
[의정단상] 새만금에 뜨는 두 번째 태양
[타향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조세정책과 우리 기업의 대응
[사설] 전북교육청 3년 연속 최우수, 성과 이어가야
[오목대] 학원안정법과 국정안정법
[사설] 전북도, 고병원성 AI 방역 철저히 하길
[사설] 종광대2구역 보상, 국비 확보에 나서라
[한 컷 미술관] 이보영 개인전: 만들어진 그 곳
[딱따구리] 익산시민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
[백성일 칼럼] 민심이냐 당심이냐로 판가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