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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 동비기략

매천 황현, 동학농민군을 치밀하게 기록하다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조선말기 양반 선비로서 시인이자, 문장가요, 역사가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에 저항한 우국지사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 역사서술은 『매천야록』이다. 권1의 상·하책에서는 1864년부터 1893년까지 편년체가 아닌 수문록체(隨聞錄體)의 메모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2권 1894년 갑오년부터는  편년체의 서술과 비평을 남기고 있다. 그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받아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해당 기사를 그대로 기록해 나간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추보와 수정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매천야록을 집필할 때, 저본으로 참고한 책은 없을까.

당대 시대사를 저술한 또 다른 저작으로 『오하기문(梧下記聞)』이 있다. 책 제목은 ‘오동나무 아래서 들은 것을 기록하다’라고 했지만, 정확한 명명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전라도 광양 출신으로 몇 차례 과거를 낙방하고 서울에 와서 강위, 김택영, 이건창, 정만조 등과 어울렸으므로 이들로부터 여러 사실을 듣거나 당시 관보나 신문으로 검증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이 책을 『매천야록』의 대본으로 보기도 하였다. 

오하기문은 모두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필(首筆)은 1894년 이전 상황 개관에 이어 갑오 정월에 일어난 고부봉기로부터 기술하고 있다. 2필(갑오 5월부터), 3필(9월부터), 4필(을미 1895년 4월), 5필(건양 원년 1896년 4월), 6필(광무 4년 1900년 2월), 7필(을사, 1905년 12월~1907년 11월) 등으로 되어 있다. 갑오년부터 정미년까지 14년간 편년체의 서술이며, 행서체와 초서 세필로 기록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부분은 대개 1~3필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

동비기략과의 관계를 언급한 매천야록 부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전에는 이 책 원본이 산일(散逸)되고 또 분철(分綴)이 되어 소장자에 따라 각기 소장한 까닭으로 전승과 유래에 대해 여러 이론이 있었다. 김창수는 『동학난 : 부제 동비기략초고(東匪紀略草藁』을 해제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가 매천의 저술인 동비기략의 초고로 보았다(을유문화사, 1985). 역사학자 이이화는 『동비기략』이 오하기문의 수필, 이필, 삼필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서지학보, 4호, 1991). 

관련 내용으로 동학의 발생과 최제우에 대한 기록은 첫 번째 권 1893년 계사년을 설명하는 부분에 처음으로 나온다. 이는『매천야록』에서 언급된 동학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일부 중복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매천은 동학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책으로 실제 동비기략이라고 언급했다(『매천야록』권1의 중간 부분 계사년 3월 권봉희의 상소).“그러나 고종은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효유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때의 여론은 울분에 쌓여 있었으므로 권봉희가 상소한 것이라면서, 동학의 전말은 동비기략에 상술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대략 언급하였다(東學之始末 詳具東匪紀略 故此編槩反之)”고 서술하였다(『梅泉野錄』 제1권(下 : 1894년 이전 ⑤ ‘崔時亨 東匪紀略 東學宣撫使魚允中’, 간행본에 있는 표제어는 원래 수고본에는 없다). 동학의 전후 사실과 이후 갑오년의 사실은 모두 『동비기략』에 기록되어 있다는 언급으로 보아, 동학농민군 관련기록은 오하기문이 아니라 동비기략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해당 원본의 상단에는 “동비기략은 지금 분실 중이다. 민국(民国) 갑오(甲午) 8월 위현(渭顯) 지(識)”라는 부분이 눈에 띤다. 1954년 8월 동비기략 책은 분실 중이라고 했다. 

고부봉기의 전말과 창의문 전문을 수록한 오하기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이 책에서 동학농민혁명과 본격적인 기록은 갑오 정월 고부봉기로부터 시작한다. 이어 3월 3일자 기사에서는 “고부(古阜)에서 동비(東匪) 전봉준(全琫準) 등이 봉기하였다. (중략) 전봉준은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가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동학에 물이 들어 항시 울분을 지니고 있었다. 민란이 일어날 때 많은 동학도들이 그를 괴수로 추대하였으나, 그가 간사한 뜻을 펴 보기도 전에 동학도가 해산하였으므로 자신도 창황히 피신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순찰사와 안핵사가 그를 급히 수색하자 그는 그의 일당 김기범(이후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과 모의하여 대사를 꾀하였다. (중략)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과 호응하고 우도(右道) 연해 일대의 10여 읍도 일시 호응하여 10일 만에 수만 명이 늘어났다. ‘동학도와 난민이 합류한 것(東學之與亂民合)’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는 유교를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동학의 세계관을 비판했고, 난을 생각하는 불온한 집단으로 동학세력을 동비, 도적 등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이 책을 서술한 첫째 이유였다. 

다음으로 1894년 3월 “전봉준 등이 무장현에서 큰 집회를 열고 민간에 포고하였다”고 하면서 무장포고문 전문을 기록해 두고 있다. 이후 4월 18일경 나주 아전에게 보내는 글이나 홍계훈 초토사에게 보내는 글도 수록하였다. 이러한 글에서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보국안민의 계책을 마련해야 하며,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내쳐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천은 포고문에서 언급된 유교의 군신윤리, 민유방본이라는 민본주의, 보국안민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평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전주화약 이후 평화롭게 해산하는 동학농민군조차 토벌했어야 했다는 적대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가장 귀중한 기록은 1894년 1차 농민전쟁시기 뿐만 아니라 집강소 시기에 동학농민군의 내밀한 활동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도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학문을 ‘도학(道學)’, 하부 구성원을 포와 접으로 표현하고 도접주아래 접주(接主)라 칭하면서 서로 존대했으며, 접은 규모에 따라 구성원이 만명을 이루는가 하면, 어떤 접은 천 명가량으로 구성되기도 했다”고 보았다. 서포(徐包), 법포(法包), 남접(南接), 북접(北接) 가운데 어디 소속인가를 물어 그 연원을 따질 뿐이라고 했다. 더구나 읍마다 접을 설치했는데, 이를 대도소(大都所)라고 하며, 대도소에는 관에서 수령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행하게 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군 조직과 활동에 대한 기술사항은 지금까지도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기본 틀로 활용되고 있다. 

그가 특이하게 주목한 장면도 있었다. 동학도들은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서로 대등하게 두 손을 마주 모아 잡고 인사하는 예를 법도로 삼았다. 노비와 주인이 함께 입도한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서로 상대방을 접장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평등하게 대했다. 그 때문에 집안에서 부리는 사노비, 역참의 아전과 심부름꾼, 무당의 남편, 관아에서 물을 긷는 사람 등 신분이 낮은 부류가 가장 좋아하며 추종했다고 했다. 매천은 신분제를 넘어서는 평등한 사회관계의 형성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유교주의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동학과 농민군의 활동을 있는 그대로 적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치다.   

이후 동학농민군의 향배와 관련하여 남원에서 6월 중순으로 추정되는‘시월망간(是月望間)’에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는 사실, 청일전쟁에 대비책을 모색하면서 7월 6일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관민상화 협상,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의 대처 방안의 차이 등을 적시했다. 다만 집강소시기에 자행된 동학도의 수탈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며 사회적 혼란과 신분계층적 갈등을 조장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제747호)로 지정된 오하기문.  국가유산청 제공

이 책에서는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어 자세한 전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북접과 남접의 현상과정이나 공주로의 진격, 그리고 당시 격문들도 다루지 않았고, 대신에 동학농민군에 저항한 장흥부사 박헌양의 죽음, 의병장 김한섭 등의 죽음을 안타까와했다. 조선의 정부군·민보군·일본군에 의해서 자행된 수만명의 동학농민군의 희생에 대해서도 정당한 토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호남의 적(賊)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 등 농민군지도자에 대한 재판과 처형 사실을 끝으로 오하기문의 세 번째 기록(3필)은 마감되었다.  

오하기문의 원본은 매천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필사본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전질이 있고, 일부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원문의 텍스트는 <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에서 제공하고 있고, 번역해제본(김종익, 역사비평사, 2016)이 활용되고 있다.

왕현종(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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