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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16)원교 이광사의 글씨③-지리산 천은사의 현판들

智異山泉隱寺(지리산천은사): 천은사 일주문(一柱門) 현판極樂寶殿(극락보전):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좌우의 협시보살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혹은 지장보살)을 둔다.冥府殿(명부전): 명부란 염마왕(閻魔王)이 다스리는 저승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절 집을 말한다. 지장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함.智:지혜 지/ 異:다를 이/ 泉:샘 천/ 隱:숨을 은/ 寺절 사/ 極:다할 극, 지극할 극/ 樂:즐거울 락/ 寶:보배 보/ 殿:집 전/ 冥:어두울 명/ 府:곳집(창고)부, 마을 부지리산(智異山)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산청군·하동군 등 3개 도의 5개 시·군에 걸쳐있는 웅대한 산군(山群)에 대한 통칭이다. 한자 발음대로라면 '지이산'이어야 하지만 예로부터 '지리산'으로 읽어온 것으로 보아 '지리'에 순 우리말 어원이 있고 한자 '智異'는 '지리'에 대한 음역어가 아닌가 한다. 옛 문헌에 지리산을 '두류(頭流, 頭留)'로 표현한 예가 많은데 이 '두류'가 '지리'로 음이 변하고 그것을 다시 한자로 표기한 것이 '智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頭流, 頭留)'의 '頭'는 백두산(白頭山)의 '頭'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즉 백두대간 산맥의 산세(山勢)가 주욱 흘러내리다가(流) 머물러서(留) 이루어진 산이기 때문에 두류산(頭流山 혹은 頭留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리산의 한자 표기 그대로를 풀이하여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조선의 대학자이자 스승의 표상이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지리산을 일러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의 산, 즉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 산"이라고 표현하였다. 지리산의 웅장함을 표현한 명구이다.전라남도 문화재 제35호인 천은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28년(흥덕왕3)에 덕운선사(德雲禪師)가 창건하였는데 경내에는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원래는 절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증축과 개축을 거치다가 1773년(영조49)에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775년에 혜암 스님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천은사의 일주문에 걸려있는 '지리산 천은사' 현판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여 절을 중건할 때 샘에서 큰 구렁이가 나오자 잡아 죽였더니 그 후로는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었는데 그 뒤로는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하며 명필 이광사에게 청하여 '지리산 천은사' 현판을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서체로 써서 일주문에 걸자 그 뒤로는 재앙이 그쳤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교 이광사의 이 현판 글씨에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율동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쓴 글씨에는 神이 붙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현판 글씨가 바로 그런 글씨인가 보다. 천은사에는 이 일주문 현판 외에도 이광사가 쓴 極樂寶殿(극락보전)과 冥府殿(명부전) 현판이 있다. 이렇게 여러 장의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은사와 이광사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천은사에 가거든 이광사의 글씨에 주목해 볼 일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15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7)해방 후 전북 문단의 후원자, 백양촌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槿·1921~2003)은 부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한 뒤에 귀국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되던 해 12월 김해강의 추천에 의해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삼례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 성심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행적은 교직 외에 언론계와 문학계에서도 발견되는 바, 일련의 움직임은 전북 문단이 활성화되는 토대를 이루었다.그는 언론인으로서도 분주히 살았는데, 해방 후에 창간된 전라신보의 편집국 부국장과 전북일보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950년 10월 전북일보사에 입사한 뒤로는 전쟁 통에 발표지면을 구하지 못하던 지역의 작가들을 위해 매주 문예면을 고정적으로 할애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지역의 문학 활동은 지속될 수 있었으니, 언제나 남 좋은 일만 해주느라 힘쓰던 그의 품성을 이해할만하다. 그로 인해서 그 동안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는 적었기에, 문단의 인심도 세간을 뒤따르는 줄 알 수 있다.백양촌이 남긴 공은 전북 문단의 이면을 뒤져보면 금세 드러난다. 그는 1945년 8월 27일 시인 김해강, 연극인 김구진 등과 함께 문화동우회를 발기하여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당시 전북 지방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던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들은 해방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문화계의 정지작업을 신속히 수행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듬해 2월에 그는 이병기, 김창술, 김해강, 정우상, 채만식 등과 함께 전북문화인연맹을 조직하여 문화인들의 통합과 친목 도모에 진력하였다. 위의 경력으로 알 수 있듯이, 백양촌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전북 문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이러한 공적보다도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동문학의 중흥에 헌신한 일이었다. 백양촌은 1946년 전라북도아동교육연구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2월부터 5월까지 기관지 '파랑새'(제1-4호)를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발행인은 김수사, 인쇄인은 오영문이었다. 주요 필자는 김해강, 백양촌, 김목랑, 김표 등이었고, 신석정은 창간사를 썼다. 잡지는 나중에 재정 사정으로 폐호되었으나, 도내 초중학교에 배포하여 학생들의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수사는 뒷날 서울로 올라가서 유명한 잡지 ?학원?의 편집인을 지냈다. 또 백양촌은 1948년 어린이들의 예술 발전을 위해 봉선화동요회를 조직하고, 동요와 동극 운동을 전개하였다.해방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건국신문' 등지에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건대, 백양촌은 일제시대부터 작품을 쓴 듯하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 한 권 만들지 못했다. 평생 도내 작가들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거나, 궂은일을 행하면서도 잇속을 챙기는데 서툰 탓이다. 만년에 그가 와병하자, 1989년 후손과 후학들이 힘을 합하여 '백양촌시전집'과 '백양촌수필전집'을 발행하였다. 그의 완쾌를 빌며 작품집을 만든다고 하자 서정주가 선뜻 '서'를 써준 것이나, 1940년대 말 군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시작 모임 토요동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평론가 원형갑의 작가론을 보면, 백양촌이 문단에서 두루 존경받았던 줄 짐작할 수 있다.백양촌의 작품들은 거의 순수한 세계를 지향한다. 더욱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고, 지역의 유수 신문사에서 고위직에 있었으며, 유명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답지 않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평이한 일상어로 쓰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추구한 문학은 한없이 소박하고 담백하다. 세간에서는 그가 시를 썼다고 시인이라고 칭하지만, 차라리 동시인으로 보아야 마땅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순결한 시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태반이다. 생전에 스스로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술회하던 백양촌은 어린이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종합해 보면, 백양촌은 해방 후에 어수선하던 지역의 문단 사정을 신속히 정지한 후원자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전북의 문단은 재빨리 조직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의 성실한 노력은 후속세대를 양성하기에 쓸모있는 아동문학계에서 빛났다. 언제나 어디서나 성인문학이야 문명을 탐하는 이들까지 나서서 성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런 판국에서 아무 보상이 없을뿐더러 주목받지 못하는 아동문학은 뒷전에 밀리기 십상이다. 나라를 빼앗기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린이들을 서둘러 잘 가르쳐야 할 터이므로, 소란한 시기일수록 아동문학의 중요성은 더하다. 이때 백양촌이 없었더라면, 전북의 아동문학은 초기에 활성화되지 못했을 터이다.이와 같은 백양촌의 행적에서 바람직한 교육자의 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가 문단의 뒤에서 선배와 후배 작가들을 이어주는 역할에 충실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면에서 각광받는 편보다 뒤에서 웃는 일에 익숙한 교사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14 23:02

"시 쓰는 순간, 정화가 돼 사는 맛 느껴"

"난 시가 재밌어서 씁니다. 시를 쓰는 순간은 정화가 돼 사는 맛을 느끼죠. (시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삽니다. 그래서 시를 '벌기'위해 여행을 많이 다녀요."전북시인협회(회장 송 희)의 '제4회 도민과 함께하는 문학강좌'에 초청된 문인수 시인. 12일 전북은행 3층 회의실에서 만난 문 시인은 '길 위에서 시쓰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일상은 아스팔트 포장처럼 속도감으로 지나가지만, 여행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객창감(호젓하고 낭만적인 정서)을 준다"며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여유로움이 있다"고 했다."시를 잘 쓰려면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해야 돼요. 집요한 관찰이 답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자문자답의 결말이 곧 시죠."늦깎이 시인인 그는 마흔 턱을 넘긴 1985년에야 등단했다. 하지만 활발한 창작열로 시집을 여러 권 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00년쯤부터 시가 좋아졌다는 평가가 잇따랐다는 점이다. 미당문학상 최종 심사 때 심사위원 정현종 시인은 그를 두고 "이 친구, 아무리 봐도 지금이 전성기야."라고도 했다.길 위에서 삶을 묻는 그의 시는 삶을 향한 진득한 고뇌만 도드라진다. 시인은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배꼽'등을 펴냈으며, 김달진문학상, 미당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13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⑮원교 이광사의 글씨(2)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何以解憂, 惟有杜康.대주당가 인생기하 비여조로 거일고다 하이해우 유유두강술을 대하거든 응당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네 인생 얼마나 된다고. 비유컨대 아침 이슬과 같은 것, 지나쳐 버린 날들이 안타깝게도 많구나. 무엇으로 근심을 풀거나? 오직 술밖에는 없도다.對:대할 대/ 酒:술 주/ 當:마땅 당/ 歌:노래 가/ 幾:몇 기/ 何: 어찌 하, 얼마 하/ 譬:비유할 비/ 朝:아침 조/ 露:이슬 로/ 去:갈 거/ 苦:괴로울 고/ 多:많을 다/ 解:풀 해/ 憂:근심 우/ 惟:오직 유/ 杜:막을 두/ 康:편안 강소설《삼국지》의 핵심인물인 조조(曹操)가 지은〈단가행(短歌行)〉이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조조는 흔히 난세의 간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소설 삼국지에 그렇게 묘사되었기 때문일 뿐, 실지 역사 인물로서 조조는 천하의 인재를 구하여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잡고자 하는 영웅적 포부가 강하였고 또 탁월한 지도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문학적 소양 역시 대단하여 그의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더불어 '조씨 3부자'라는 이름 아래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이었다. 이 시〈단가행(短歌行)〉은 조조의 시재(詩才)와 포부와 당시의 어지러운 시대상을 잘 표현한 조조의 대표작이다. 시에 나오는 '두강(杜康)'은 중국 고대에 술을 처음 발명했다는 인물인데 후에 그의 이름 자체가 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최근 중국에서는 '두강'이라는 이름의 술을 개발하였는데 명주로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조조의 이〈단가행(短歌行)〉시 처음 두 서너 구절을 읊조리곤 한다. 술맛을 돋우는 시임에 분명하다.원교 이광사가 쓴 이 작품은 중국서예와는 다른 조선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중국 서예사를 통관해 보면 해서(楷書:정자체)의 대가들이 많다. 왕희지는 물론, 당나라 초기의 구양순(歐陽詢), 중기의 안진경(顔眞卿), 원나라 때의 조맹부(趙孟?), 명나라 때의 문징명(文徵明) 등이 다 해서의 대가들이다. 그런데 이들 대가들이 쓴 해서는 하나같이 그 규구(規矩)가 엄정하여 마치 자로 잰 듯이 어떤 틀에 딱 들어맞는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런데 이광사의 해서는 그렇게 자나 컴퍼스로 잰 것 같은 규구성(規矩性)이 거의 없다. 중국의 해서가 대부분 벽돌을 빈틈없이 쌓거나 곧은 나무를 잘 맞추어서 지은 집과 같다면 이광사의 해서는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삐뚤빼뚤 얽어지은 우리의 건축과 너무나 닮았다. 이게 바로 동국진체의 매력이다. 원교 이광사가 시작한 이 동국진체의 바람은 창암 이삼만에 이르러 보다 더 조선적인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그런데, 이런 동국진체의 바람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있다. 바로 추가 김정희이다. 추사의 문집인《완당선생전집》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원교의 글씨를 호되게 비판한 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추사의 그런 비판이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적지 않다. 왜 그랬을까? 24살의 젊은 나이에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가서 한 달 여 동안 머물며 중국의 대가들을 두루 만나 당시 청나라에 일던 새로운 서예 풍조를 느끼고 돌아온 추사의 눈에는 조선의 글씨가 너무 고루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그래도 그렇지. 비록 다소 촌스럽기는 해도 그 안에 우리의 민족 미감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잘 가꾸려는 노력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추사는 조선의 자생적인 그런 서예 조류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그가 일으킨 이른 바 '완당바람'은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광복 후 50, 60년대 우리나라에 미국 열풍이 불 때 미국에 잠시 다녀오기만 하여도 으레 미국문화에 도취되어 미국은 추켜세우고 한국은 비하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24살의 젊은 나이에 청나라에 다녀온 추사는 청나라의 서예에 너무 일찍 그리고 많이 도취되어 버렸던 것은 아닐까?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0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16)농민문학을 개척한 신세대 작가 이근영

우관 이근영(牛觀 李根榮·1909~?)은 옥구 임피 출신의 소설가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높은 관심을 지녀 아들이 함라의 소학교를 마치자, 상경을 감행하여 아들의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을 고려하여 장남을 큰집에 양자로 보낼 정도였으며, 이근영의 학비를 마련하고자 친척집에서 침노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중동중학을 다니다가 보성전문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숙명여전에 다니던 김창열과 장안이 떠들썩하게 연애하다가 결혼하였다. 1934년 대학을 마친 이근영은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그는 생전에 소설을 비롯하여 수필, 동화, 평론 등의 여러 갈래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1935년 '신가정' 10월호에 그는 소설 '금송아지'를 발표하면서 대략 40년에 가까운 작품 활동에 나섰다. 이 작품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었던 신여성들의 허영심리를 포착한 단편이다. 그는 식민자본주의의 이식으로 물신화되어 가는 세태를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윤리를 작품의 저변에 깔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소설화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세계에 두드러지는 바 그로 하여금 작가적 양심에 입각하여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응시하는 심급으로 작동하였다. 그의 소설적 평가들이 대부분 긍정적 입장에 치우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의 치열한 사회의식과 남다른 작가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근영의 '최고집 선생'은 청빈을 생활 덕목으로 삼은 최하원 영감의 얘기이다. 동네에 소문난 가난뱅이 외골수 최 영감은 전통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는 면장 따위의 감투도 마다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이 지주의 첩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그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에 고향땅을 떠난다. 그의 만주행은 실낱같은 벼리조차 지켜낼 수 없는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초래한 가난의 결과이다. 이근영은 일제의 농지 수탈이 농민들에게 궁핍을 강요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윤리마저 훼손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소설들을 논의하기 수월하게 농민문학의 범주에 묶어버리는 연구자들의 편의주의적 속성을 나무란다. 그처럼 식민지 사회의 자잘한 모순까지 행간에 마련해 둔 작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그의 다른 소설 중에서 이채로운 작품은 '소년'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에 천재적 소질을 가진 한 소년을 다루었다. 소년은 인력거를 끌고 직공 노릇을 하면서도 예술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꿈을 갖고 있다. 그는 회사가 자본을 앞세워 회유하자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근영은 소년의 과단성 있는 거부 의사를 통해서 식민자본주의의 폐해가 예술적 꿈까지 파멸시키고 있는 비극적 현실과 자본의 도움이 없다면 소중한 희망조차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의 허약한 상황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작가적 책임감이 예정한 결과이다. 그의 주제의식은 포악하고 교묘한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에 여지없이 무너져가던 당대의 예술가들을 향한 날선 꾸짖음이었고, 미국에 자신이 직면할지도 모를 절망감과 패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소설적 결의였다.이와 같이 이근영 소설의 근저에는 도저한 윤리의식이 흐르고 있다. 그 점을 앞서 알아차린 평자들은 그의 작품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무수한 농민작가들처럼 농촌 현실이나 소박한 농민들의 심리를 그리는데 만족한 작가가 결코 아니다. 그 점은 그가 '고향사람들'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과 그로 인한 이농현상을 서술하면서도, 결말부에서 농민들끼리 장래를 걱정하는 대목을 준비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의 간교한 이간과 흉포한 억압이 지속될지라도, 민족간에 염려하며 다독거리는 한 광복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하찮아서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대동의 실천을 강조한 셈이다. 그 작은 덕목은 식민지 말기가 가까울수록 작가나 독자에게 공히 요구되는 것이었다.1941년 이근영은 영창서관에서 단편집 '고향 사람들'을 펴냈다. 이 작품집은 그가 월북하기 전에 낸 것이어서 전작품을 수록한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이유 중에서 그가 전쟁 통에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한 탓이 크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문학가동맹의 농민문학위원회 사무장을 맡았으며, '해방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이나, 1973년 이후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 연구자들은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활동상과 함께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6.07 23:02

'허아람의 꿈 꾸는 책방 낭독회', 전주 온다

부산의 청소년 인문학 서점'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대표(40)가 또다시 일을 저질렀다. '허아람의 꿈꾸는 책방 낭독회'로 전국 유랑에 나선 것이다."정의로운 사회를 이끄는 힘은 인문서적을 많이 읽는 데서 나옵니다. 인문학을 책방에만 둘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으로 끄집어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거든요."그의 '인문학 혁명'은 오래 됐다. '인디고 서원'은 부산의 토착 서점들이 인터넷 서점에 밀릴 때 문을 열었다. 서가엔 그가 직접 고른 20~40권의 신간 등을 비롯해 3000여 권의 책들이 진열된다. 그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물론이고 교육인적자원부의 필독서나 납득할 수 없는 대형서점의 청소년 추천도서와도 차별화된 도서목록'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은 정가제를 고집하면서 책이 다시 문화가 되는 환원고리가 되는 곳. 그는 국내·외 석학들의 초청 강연 '주제와 변주'와 '인디고 서원'에서 토론 모임을 하는 청소년들이 두 달마다 직접 만드는 인문학 잡지 'INDIGO+ing'를 발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왔다다. 지난해부터는 영문으로 된 국제 인문학 잡지 '인디고'(INDIGO·2000부)를 펴내 45개국 110곳 도서관과 연구소에 보내기도 한다. 두 잡지의 수준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9일 오후 7시30분 전주 전통문화관 한벽극장에서 열리는 이번 인문학 콘서트는 110분간 계속된다. 허 대표가 추천하는 인문학 서적의 구절 낭독에 이어 청소년들과 세계를 돌면서 만난 저명한 저자들과 나눈 대화를 동영상으로 공개하면서 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의 저자 역사학자 하워드 진, '액체근대'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등 창조적 실천가들의 인터뷰가 소개될 예정이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6.02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⑮사회주의 비평가 윤규섭

절산 윤규섭(節山 尹圭涉·1909~?)은 남원 운봉 출신의 비평가이다. 그는 1930년 전주고보에 다니던 중에 신간회 전북지부의 간부였던 이명수의 지시에 의해 전주여고보의 임부득, 전주농림학교의 양판권 등과 동맹휴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전주시내 여학생 중심의 비밀결사체를 조직하고 창간호'뉴쓰' 를 등사하여 전국의 여자 중등학교에 발송하려고 모의했으며, 그 해 7월 전주교육회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의 문구를 담은 격문을 배포하다가 발각되었다. 윤규섭은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검거되었는데, 마침 서울에서 발생한 고려공산당 사건과 연루된 혐의가 가중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출소한 뒤에 윤규섭은 서울 출신의 규수와 혼인하고, 1937년 '문단 항변'을 발표하면서 비평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후부터 평단의 각종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외국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이 시기의 평단에서 그의 평문은 국내파 비평가의 수준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식민지시대 그의 비평적 궤적은 '휴머니즘론 비판 - 제3의 논리 비판 - 주체재건론 비판'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주요 논쟁에 참여하여 비평적 견해를 표명하는 순발력을 보여주었고, 당대의 유수한 비평가들과 논전을 서슴지 않는 투지를 드러냈다. 또한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문장'과 '인문평론' 등 주요 지면을 통해 다양한 평문들을 발표하면서 비평가로서의 명성을 다졌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는 비평의 논리를 체계화하였고, 선배 비평가들에게 결코 지지 않는 내공을 쌓으며 후일을 도모하였다.윤규섭의 비평은 계급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은 확실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이 뚜렷하게 검출되지 않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와 운동단체의 관련상이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아마 그가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된 탓에 의도적으로 사상적 탄압의 단서가 될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의 비평은 당대의 평단에서 문제적 평론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그것은 아주 민첩한 대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가 발표한 평문들은 부지런한 읽기와 사유의 소산으로 제출된 것이다. 더욱이 전환기에 속하는 이 시기의 평문들은 일정한 전망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윤규섭은 시대적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태작에 대한 과감한 각하와 수작에 대한 애정을 표한 것이다. 그의 비평적 대응력은 카프의 해소와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로 위축 상태에 놓였던 평단에서 기민한 축에 든다.그와 견줄만한 비평가로 무주 출신의 김환태가 있다. 둘은 동시대에 활동한 비평가였다. 그들의 활동상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김환태가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평문들을 발표하며 그와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양인은 비평적 대립각을 노출하지 않았다. 또 연희전문 출신의 윤규섭이 경성제대 출신의 실력자 최재서의 총애를 받은데 비해, 큐슈제대 출신의 김환태는 김기림을 비롯한 일본 유학파들의 후원을 등에 업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비평적 입점부터 판이한 극단의 두 비평가였으나, 동향 출신이란 점을 의식했던지 그들은 논쟁의 당사자로 한번도 맞서지 않았다. 두 비평가의 존재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평단은 전북 출신의 왕성한 활동 무대였다. 그들의 선구적 비평에 힘입어 전라북도의 평단은 형성된 것이다.해방 후에 윤규섭은 임화가 주도하는 문단 조직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그의 선택은 일제시대에 임화를 비판하던 연장선상에서 단행된 것이었고, 전가족을 이끌고 월북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윤세평(尹世平)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그는 고전문학 연구에 공을 쏟아서 '문학 이론화 작업과 고전의 윤색 주해 작업을 통해 북한 민족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고전문학의 체계화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전에 전주의 고서점에서 완판본을 대거 입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월북하면서 싣고 간 완판본 자료들은 남한에서의 연구를 저해할 정도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였다. 북한 고전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그는 김일성대학에서 문학 강좌장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았다.그러나 1962년 7월 천세봉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문단에서 윤규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은 북한의 평단에 해방 후 세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판도를 장악한 시기였다. 그 후 황해도의 귀순자 농장으로 그가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외의 개인사적 근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로써 그는 남북한의 비평사에서 매몰되어 연구의 대상에서 누락되기에 이르렀다. 북한 연구자들에 의해 드물게나마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비평 활동이나 업적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윤규섭의 비평세계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에는 시일이 필요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5.31 23:02

"노동 현실은 곧 詩…이번 시집, 작은시론에 가까워"

시'찔레꽃 오월'을 보며 '(중략) 세상에 살아서 / 살아남아서/ 그래서 수치스러운 오월의 찔레꽃은 나의 저승목이다'라고 나무를 위로하던 김사강 시인이 다섯번째 시집'봄풀의 노래'(신아출판사)를 출간했다.건설 노동 현장을 떠돌던 그의 마음 한 켠엔 늘 시가 있었다.그는 "어려서는 소설가가 되려다 그 길로 가지 못하고, 그림에도 잠시 기웃거리다 뒤늦게 시인이 됐으나 그렇다고 훌륭한 시인이 되지도 못한 것 같다"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노동 현실이 곧 시라고 생각해요. 가난이 긴장감을 줬습니다.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데 눈을 돌렸겠죠. 배 주리지 않고 여지껏 살았고, 시인으로 한생 살았으니 명예욕도 없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좋은 시 한 편 제대로 못 썼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열심히 살려 했던 사실에 감사하면 돼요."이번 시집은 작은 시론에 가깝다.그동안 입으로만 떠들던 시론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시가 시론에 우선한다'는 이 명제를 위해 공사현장을 전전하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다. 밥을 먹고 배설하듯 일상이 바로 시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때마침 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가 그에게 시집을 내지 않겠느냐며 제안해왔다."문학으로부터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더 좋은 시가 있다면 좋겠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급조된 시들이 많아 아쉽습니다. 게으름을 피운 덕분에 20여 편을 하루 이틀 만에 쓰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런 지 아직도 집나간 자식들이 많네요."표제작 '봄풀의 노래'는 눈물의 다리 같은 그 땅의 역사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떠올리며 쓴 것. 한 때 그도 80년대 정치적 혼돈기에 참여시를 쓰기도 했다. 이 땅의 역사를 직시하며 흘린 눈물 앞에 마냥 부끄러워진다.그는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며 조용히 웃었다.진안에서 태어난 그는 1992년 '시세계'로 등단해 시집'겨울 민들레','다시 내 하늘을 볼 수 있다면','산다는 거'과 함께 아내 시소향 시인과 함께 '바람이 내게 말하는 것은'을 출간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5.30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⑭순수비평의 개척자, 김환태

눌인 김환태(訥人 金煥泰·1909~1944)는 무주 출신의 비평가이다. 그는 전주 보통학교를 마친 뒤에 상경하여 시인 김상용이 재직하던 보성고보에 진학하였다. 그는 192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쿄토의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정지용을 만났다. 그후에 후쿠오카의 쿠슈제국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메슈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에 관한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귀국해서 이광수와 안창호 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안창호와의 친교로 인해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어 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36년 그는 박팔양, 김상용,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 당대의 쟁쟁한 작가들이 모인 구인회에 가입하였다. 이 해 6월 그는 '시문학'을 주재하던 광주 출신 시인 박용철의 누이 박봉자와 혼례를 올렸다. 김환태는 1938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43년 11월 무학여중으로 근무지를 변경하면서 상경하였다.그의 움직임을 눈여겨 살펴보노라면, 한 비평가의 행로에서 차지하는 인연의 중요성과 역할을 짐작케 해준다. 김환태가 맺은 인연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문학적 관점을 형성하는데 큰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가 나중에 김상용이나 정지용에 관한 평문을 쓴 것을 일러 개인사적 친분의 결과라고 각하할 수 있으나, 평문에 나타난 세련된 감각과 유려한 필치는 비평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주류 비평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명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실과 함께 천부적으로 뛰어난 감수성을 살린 비평적 인식안에 힘입은 것이다. 그를 가리켜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라거나 '순수문학의 기수'라고 칭하는 이유인즉 김환태의 비평에 아로새겨진 문학적 안목과 예리한 작품 분석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그는 1934년 최초의 평문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문학의 순수성을 벼리로 삼은 비평적 신념을 드러내었다. 그는 문예비평을 "작품에서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비평적 특징을 온전히 서술한 이 구절은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카프 비평가들이 퇴각하여 공란 상태이던 비평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문학작품의 이해와 평가에서 '몰이해적 관심'으로 접근하기를 바라면서, 비평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문학 작품에 감동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라고 거듭 강조하였다.이 시기에 김환태가 전대의 공리주의적 문학관을 배격하며 주창한 바는 예술의 순수성에 입각한 인상주의 비평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카프에 억눌려 열세에 놓여 있던 반카프 진영의 평단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특히 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언어의 감각적 측면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시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정지용의 시에 편애에 가까운 애정을 보인 것도 그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이처럼 문학의 순수한 국면을 중시했던 그는 평소에도 공허한 관념이나 경직된 태도를 멀리 하였다. 그가 서울에서 할일 없이 노는 동안에 만나 평생지기로 삼았던 비평가 이헌구는 "지극히 낮고도 부드러운 음성과 웃을 때마다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고르고 고운 이빨, 크게 웃지도 않고 조용히 소리 없이 포개지는 작약처럼 수줍게 미소짓던 그 모습"을 추억한 것만 보아도, 김환태의 비평적 태도와 삶이 둘이 아닌 줄 알 수 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는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지극한 애정을 수시로 강조하였다. 모름지기 비평가는 작품 외적 요인에 압도당하지 말고, 자신의 고유한 안목에 의거하여 작품을 읽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등장으로 평단은 문학의 형식적 요소를 포함한 본질적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문단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시대 상황은 악화되어 전 부면에서 일제의 군국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작가들에 대한 계속적인 압박은 더욱 강도가 높아지고 횟수가 늘어갔다. 그처럼 비문학적인 상황에 내몰린 김환태는 비평 대신에 절필하고 낙향을 선택하였다.그는 끝내 지병이었던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한창 활동할 서른 다섯의 나이에 생을 마치었다. 덕유산국립공원의 나제통문 앞에는 김환태문학비가 우뚝 솟아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맞고 있으며, 2010년에는 고향의 유지들이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를 열어 그의 비평세계를 기리었다. 또 문학비를 앞장서 세운 문학사상사에서는 '김환태평론문학상'을 제정하고, 일년 동안 가장 활발히 활동한 비평가를 선발하여 그의 비평정신을 잇도록 격려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5.24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