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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6)어휘와 어법에 천착, 비평의 새 길 연 오하근 평론가

오하근 평론가 오하근 평론가는 1941년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에서 부 오해준과 모 선준량 사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제초등학교 졸업하였고, 김제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1964년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부안여자고등학교와 전주해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75년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군산공업전문대학(현 호원대학교) 교수를 거쳐 1982년부터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를 재직하였다. 1989년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소월 시의 상징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85년 뉴욕의 주립대학과 연변대학의 교환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오하근 평론가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으며, 중학교 다닐 때 『무정』, 『유정』, 『단종애사』와 『원효대사』 등 이광수 소설을 섭렵하였다.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시인 신석정, 김해강, 백양촌 선생이 소개되는 광경을 보면서 찬탄과 경이에 빠졌다고 술회한 바 있다. 전주고 1학년 때 서라벌예대에서 주최하는 전국고등학교 현상문예에 시 「옛날」이 당선되었는데, 담임 선생님 옆자리에 앉은 신석정 선생이 이를 크게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부터 운명과도 같은 신석정 시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석정 선생을 모시고 강인한, 오홍근, 강일부 등과 함께 맥랑시대라는 동인회를 결성하여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하였다. 1960년 전북대학교에 입학해서는 그는 의외로 소설을 썼고, 3학년 때는 전북대학신문사 주최 현상문예에 소설 「신화」 가 당선되었다. 당시 그와 함께 시에 당선된 장지홍, 수필에 당선된 김형진은 훗날 오하근이 주축이 된 『문예가족』의 멤버가 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대학 시절 김교선, 이기우, 천이두 등의 지도로 문학평론에 몰두하였으며, 마침내 1981년 『현대문학』에 「불, 그 영원한 조합」이라는 평론이 추천 완료되었다. 그 후 그는 우리 문단의 깐깐한 평론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해석의 오류로 먹칠 된 작품들에 대한 바로 잡기에 앞장서면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구 저서들을 다수 출간하였다. 『김소월 시어법 연구』를 비롯하여 『한국현대시 해석의 오류』, 『전북현대문학(상, 하)』 등의 역작을 저술하였다. 그는 1970년대 초 석정 선생의 추천으로 시 부문에 등단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사양하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 평론으로 등단하여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 이상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부안여고에 재직하면서 「국정 중학 국어에 나타난 오류」(신동아)와 「인문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타난 오류」(전북일보)를 발표하여 당시 교과서의 문장, 문법, 표현법 등 수많은 오류를 지적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오하근 평론가는 작품 속의 어휘와 어법에 집요하게 천착함으로써 새로운 평론의 길을 열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던 『김소월 시업법 연구』(1995)를 비롯하여 많은 평론에서 작품의 어휘와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끈질긴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어느 선각자의 도전과 좌절」이라는 글에서는 현대문학사에서 외면당했던 많은 작가를 새롭게 조명하여 우리 문단을 풍성하게 하였다. 호병탁은 『문예연구』(2018년 96호)의 기획 추모특집 「오하근론」에서 그가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를 두 가지 관점에서 밝힌 바 있다. 첫째는 작품 속의 어휘와 어법을 제대로 잡아주어 작품 해석의 물꼬를 제시하였다. 특히, 문학작품 중에서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작품, 해석에 논란이 있는 작품, 고착된 오류가 있는 작품들을 골라 오류를 바로잡아 올바르게 해석하는 물꼬를 열었다. 다음으로는 전 북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점이라고 하였다. 2010년 『전북현대문학』 상ㆍ하 권을 상재하여 전북지역 문인들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개진하여 전북문학의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현대문학의 초창기 유엽(柳葉,1902-1975)으로부터 시작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전북문학사를 다듬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최명표는 「자세히 읽기와 지역에서 살기」라는 오하근 추모 기획특집에서 그의 공로를 김소월 시 정본화 작업으로 소월 시 연구의 활로를 모색하였으며, 전북문학을 정리한 점이라고 하였다. 문신은 오하근의 비평은 어김없이 진정성이라는 해석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면서 오하근은 해석의 힘을 사랑했고, 해석의 힘으로 비평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했다라며 그의 비평적 진정성은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오하근은 이렇듯 평론에 굵직한 획을 남겼으며 크게 영달할 기회가 있었지만, 한평생 고향에서 후학들 지도와 연구에 전념하다가 76세 되던 해인 2017년 11월 17일 밤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생전 고인과 함께했던 윤석정 전북일보 사장, 청운사 주지 도원스님을 비롯하여 동인회 문예가족, 전북대 국문과 제13회 동기생들, 금요회, 맥랑시대 가족들은 2019년 5월 3일 김제시 청운사 연지에 오하근 평론가 문학비를 세우고 그의 문학을 기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호병탁의 사회로 서재균 오하근문학비건립추진위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안평옥 시인의 추모시 낭독이 있었다. 그의 제자 오용기은 『문예연구』(2018)의 추모특집에서 늘 함께했던 스승과의 사별을 안타까워하면서 스승의 문학적 열정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선생님 웃음소리 기침소리 사이로 쟁쟁하게 되살아올 문학의 혼과 열정을 기다리렵니다. 평생을 두고 선생님께서 나누신 인정과 지성에 감동한 많은 분들이 살아 있는 백과사전을 무심코 찾다가 문득 빈자리 허전하게 더듬게 될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은 그냥 가신 것이 아니라 봄 잎이 녹음 되고 단풍으로 천지를 채운 뒤 욱욱청청한 숲에 침잠함으로써 오히려 새 날 다시 뽀땃이 암냥하는 순리로 돌아오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 문예연구 96호(2018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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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9 17:26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4)선명한 이미지와 체험으로 풍속화를 그려낸 시인, 최영

최영 시인 최영(崔瑛)은 1945년 해방둥이로 전북 순창군 적성면 내월리 용수막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적성초등학교와 순창중학교를 거쳐, 1964년 순창제일고등학교(옛 이름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멱을 감다가 한 친구가 익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시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친구를 앗아간 섬하도록 푸른 섬진강을 잊을 수 없었고, 그때마다 채계산 넘어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고 했다. 이 경험은 성인이 된 뒤에도 오래도록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감밭과 선돌에서 내려와 원다리 밑으로 풀려나간 먼 날의 긴 이야기 해는 책의산(채계산)을 넘어와서 매봉재로 사라지려 할 때 허공엔 기러기 떼 하늘은 타는데 노을 속에 물든 강뚝으로 그대 어찌하여 떠나갔는가 그대 그렇게 떠남으로 하여 강은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네 눈물겹도록 떠나지 아니하네. 「적성강은 언제나」의 전문 최영은 중학교 1학년 때 장만영 시인의 <달 포도 잎사귀>와 박남수 시인의 <오수>을 외우면서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권진희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에 심취했으며, 김형오(재미작가)와 양병두(초등교장) 등 친구들과 함께 옥천이라는 문학 동아리를 이끌면서 각종 백일장에서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원춘향제 학생백일장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필화사건으로 전고에서 김제고 옮긴 신석정 선생을 이곳에서 뵙게 된 것을 평생 잊지 못했다. 졸업 후 문학에 매진하기 위하여 고향 마을의 앞산 채계산 암자에서 명작을 탐독하며 창작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에 1년간 파병되었으며 5년 만에 제대하였다. 그 후 대림산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브루나이 건설 현장에서 추락하여 상처를 입어 사직하였다. 그의 문학은 군 복무 기간과 외국 근무 동안에도 계속되었으며, 여러 차례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응모하기도 했다. 최영 시집 '개구리' 1984년 『시문학』으로 등단하였고, 1987년에는 첫 시집 『개구리』를 상재하였다. 문덕수 시인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문명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과 생태의 양식, 그리고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여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속에서도 문명과 자연이 자리를 같이하여 그 나름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는데 현대 시의 바른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경장동(京場洞) 주택가는 개구리들의 텃밭을 나누어 가졌다. 무논에서만 삼아야 할 그들이 도자에 깔려 죽고 농토마저 모두 빼앗겼다 살아 있는 목숨들은 흩어져 건폐율(建蔽率)의 그늘에 숨어 정원수 이파리 이슬로 연명했다. 정원수는 묻어나는 달빛의 그늘에 숨어 살다가 최영은 1992년에 자신의 방황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충격을 담아내어 제2 시집 『미룡동의 참새』를 발간하였고, 역사 인식과 그의 고집스러운 의지를 오롯이 담아낸(진동규 시인 평) 제3 시집 『내항』을 출간하였다. 그의 시 「개구리」와 「참새」는 기계문명과 도시 개발로 생명의 존엄성이 위축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도시 근교의 농촌 현실과 소시민의 삶에 대한 고발이고 상징이었다. 그는 땅이 없어지자 하늘로 산다. 하늘이 빌딩으로 안테나로 갈라지자 나머지로 산다. 잃어버린 숲이 그리워서 남의 집 정원수에 전세를 들어 둥지를 틀고 눈치로 연명한다. - 참새 일부, 1984 최영의 문학은 군산이라는 풍부한 문학적 토양 위에서 꽃을 피웠지만, 한순간도 고향 순창을 잊지 않은 것 같다. 고향 용수막의 건너편에 있는 채계산은 내가 시인이 되는 날이면/ 제일 먼저/ 찾아가리라 다짐해 왔던/ 그곳이었고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돌아서는, 그래서/ 나 홀로 회귀할 수 있는 품 속(최영 「책의산(채계산)」중에서)이었다. 또한, 고향 집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빈 고샅/ 어머님의/ 사라진 발자국 위로 / 경운기가 기침을 토하며 / 빠져나간 뒤/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흔들리고/ 빈 마음이 /그늘로 깔린다.(최영 「용수막3」의 일부)에서 보듯 피폐해가는 고향의 그늘로 다가왔다. 최영 시집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최영은 스물여덟 살의 총각 때 군산으로 와서 아내를 만났고, 시인이 되었고,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보면서 군산 사람보다 더 많이 군산을 사랑하였다. 그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호남 매일』, 『군산신문』, 『서해 신문』 등에 군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13년 4개월 동안 414회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이것을 모아 6권의 책으로 묶어 『은파에서 째보 선창까지』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근대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함께 흐를 수밖에 없는 시대와 세월의 이야기를 재조명할 수 있는 군산의 대서사시이며 또 하나의 만인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외에도 『군산 문학의 원류를 찾아서』(2009)라는 책을 펴냈고, 2010년에는 군산의 풍물을 담아 역사가 되고 야사가 될 『최영 시인의 군산 풍물기』를 발간한 바 있다. 시인은 군산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의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자신의 문학 역량을 키웠고, 전북 문학발전에도 이바지했다. 군산문학상, 채만식 문학상 비롯하여 제5회 한국 시학 신인문학상, 제10회 전북문학상, 제3회 전북시인상, 제17회 표현 문학상을 받았으며 한국문인협회 군산지부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 7월,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문단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참고 : 『순창문학』제16집(2011), /송일섭(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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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4 17:1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3)아름다운 낭만주의자, 막이야기꾼 형문창 소설가

형문창 소설가 형문창 소설가는 1948년 6월 29일, 남원시 운봉면 주촌(배멀마을)에서 아버지 형진우, 어머니 이호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운봉초등학교, 운봉중학교, 전주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0년 전주 중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아오스팅이었다. 1971년 대학 졸업 후 전북대학교신문사 전임기자를 역임하였고, 1973년에는 무주중학교 국어교사 발령을 시작으로 26년간 재직하였으며, 작가로 정진하기 위하여 51세 때인 1999년 전주중앙중학교에서 명예퇴직했다. 1968년, 대학교 2학년 때 시(詩) 「겨울이 지난 자리에서」가 대학신문에 발표된 것을 시작으로, 1969년 단편소설 「눈사람」으로 제13회 전북대학교 학예상에 당선되었으며, 1970년 단편소설 「출타(出他)」로 제1회 전국대학문화예술축전에서 우수상을 받으면서 작가적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지만, 그의 문단 등단은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역작(力作)을 써서 등단하려 했는데, 문우들과 술 마시고 귀가하다가 그만 원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후 오랜 시련을 겪었으며 1996년에야 『월간순수문학』에 단편소설 「조개껍질은 녹슬지 않는다」로 등단하였다. 형문창 장편소설 '여자 이야기' 2003년에는 좋은 소설이라는 카페를 만들어서 180여 명의 문우들과 교류하였으며 그해 3월 단편소설집 『엉클린 머리를 비다듬다』를 상재하였다. 2004년에는 장편소설 『여자 이야기』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동희(시인, 평론가)는 이 작품의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덧칠한 그림을 벗기고 보니 여자 이야기의 밑그림은 페미니즘에 경도된 여성찬가요, 나아가 사람 이야기였다. 또한, 적나라한 음란성과 외설성은 서사적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한 의도로 읽었다. 이런 이야기가 세태 풍속을 공론화는 담론의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냐는 논외의 문제다.라고 밝히면서 문학은 문학의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소설은 소설의 길로 갈 것을 주문하였다. 작가는 이후로도 『불효자전』, 『대박』, 『자화상 그리기』, 『그 여름 깊은 잠』, 『참말같이 쓴 소설』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작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문단에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 1996년 가톨릭문우회에 입하였고, 2001년 전북가톨릭문우회장을 비롯하여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가톨릭문우회, 국제펜클럽, 전북문협, 전주문협, 문예가족, 한국미래문학 등에서 활동하였다. 2006년에는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제17회 표현문학상(2002)을 비롯하여 전북예술문학상(2004), 한국미래문학상(2007), 전북문학상(2009)을 수상하였다. 아직 쓸 이야기가 많은데도, 그는 2011년 2월 12일 새벽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 그의 나이 63세였으니,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문단의 선후배들은 모두 황망하기만 했다. 조기호 시인은 형문창과의 인연을 애틋하게 회상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의 이름은 시빗거리(?)였다고 했다. 그보다 나이 많은 문단의 선배들은 그를 형문창이라 부르는데 난색(?)을 표했고, 그래서 곧잘 아우문창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상수리 열매보다 더 커다란 두 눈을 끔벅도 않고 / 두꺼피 파리 차먹듯 술도 잘 마셨고, 검정 무쇠로 지어 부은 가마솥 뚜껑 같은 사람/ 뜸이 들면 주르륵 눈물 한 방울 (조기호의 시 「막이야기꾼 아우문창」에서) 흘릴 줄 아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뛰어난 글쟁이였다고 했다. 『참말같이 쓴 소』과 『거위의 꿈』을 이승의 마지막 이야기로 남기고 떠났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상휘 소설가는 형문창을 지구에 내려온 반달곰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 감성어린 형(邢) 작가의 외로움을 충족시켜주지 못하여 그가 떠났다고 했다. 아름다운 낭만주의자였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 모습이 도토리를 배 속에 잔뜩 채워놓은 욕심만은 반달곰 같았다고 그를 회상하였다. 형문창이 훌쩍 떠나버렸던 2011년 11월에 발행한 『문예가족』에는 소설가 형문창 추모 특집을 실었는데, 여기에는 이목윤 시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형제처럼 지냈던 이목윤 시인이 직접 그의 연보를 추적하였고, 그를 사랑했던 문우들이 추모의 글을 모았다. 올해 초, 고인(故人)이 된 이목윤 시인은 그의 말대로 지금쯤 어느 행성에서 형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여보게 아우! 아니 이제 형이지, 자네 먼저 그 행성에 갔으니 뒤따라가야 할 우리는 그날부터 아우가 되는 걸세 그래 자네는 형문창이니 항상 형인데도 아우 먼저 형님 먼저가 늘 어울하다던 자네 호랭이가 답싹 물어갈 사람아! 그래서 그리 서둘러 갔으며 진짜 형님 되는 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째지는가! 이목윤 시인의 시 「백만 불의 눈웃음 형문창」의 일부 정군수 시인(전 전북문인협회 회장)도 형문창과 각별한 사이였다. 대학 선후배로, 재학 중 소설가 최명희와 형문창과의 추억을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특히, 형문창이 등단하려고 준비했던 원고 뭉치를 잃어버리고 겪었던 시련에 대해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늘 함께하며 문학과 인생을 토로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대 함께 가던 길 멈추고 어느 주막에서 물 먹은 별 서성이는 밤 호올로 누구를 기다리는가 입술 닿은 술잔 아직 온기 남았는데 어쩌자고 휴대전화에 모두 실려 보내고 아득하게 혼자서 멀어져 가는가 달밤 아니더라도 그대 그리우면 이승길 저승길 맞닿아 있어 소리쳐 부르면 달려오기도 하련만 비오고 길 잃은 날은 어이하리 사랑은 늘 울음으로 다시 피더라. 우리 걸어온 발자국 노을이 붉다. -정군수 시인의 시「악수」의 일부 참고자료 : 문예가족동인회 발간 『문예가족』 제19집(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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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31 17:4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2)“시(詩)를 종교로 시작(詩作)을 신앙”으로 살아온 시인 이기반

이기반 시인 이기반(李基班) 시인은 1931년 5월 25일, 전북 완주군 조촌면 반월리에서 출생하였다. 시인은 전주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 국문학과에서 공부했고, 1956년 전북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골든 스테이트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신석정 시인이 『자유문학』에 「설화」, 「가마귀 울어도」, 「말 없는 반항」 등을 추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1961년 『삼남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인은 1955년 삼례고등학교에서 근무였고, 전북대 강사를 거쳤으며 1976년부터는 전주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대학신문?방송주간,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정년퇴임 후에는 전주대학교 교회 장로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1958년 조재섭 시인과 함께 첫 시집 『두 날개』를 펴낸 후, 『대합실의 얼굴들』, 『내 마음밭의 꽃말』, 『겨울 나그네』 등 20여 권의 시집과 수필집 『은하의 모래알들』, 연구서 『한국현대시연구』, 『언어예술의 시간과 공간』, 『현대시론』 등 수십 편을 펴냈다. 시인은 전북 문학 발전과 작가적 역량이 높이 평가되어 전북문학상과 전북대상, 노산문학상, 백양촌문학상, 한국시문학대상, 목정문화상 한림문학상, 국민훈장동백장, 기독교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인은 신석정 시인의 1세대 제자로서 석정문학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석정문학』과 『기린문학』을 발간하여 후학들의 문학 활동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시인이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형제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시인의 수필 「월촌 이야기」에는 열다섯에 누이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마을에 뜨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과 슬픔을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시인의 나이 오십 즈음에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성한 둘째 아들을 잃게 된다. 시인의 표현대로 파랑새로 훌훌 날려 보내는 아픔은 그의 시 여러 편에서 감지된다. 시인이 허무와 생명의 본향을 뼈저리기 느끼면서 기다림으로 일관했던 것은 어쩌면 가슴 한구석에 못이 박히듯 지울 수 없었던 아픔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1980년에 출간한 시집 『아침의 눈망울』에서 시에는 더욱 높은 차원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시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아울러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기를 추구했다. 최승범(전, 전북대학교 인문대학장)은 시를 종교(宗敎)로, 시작(詩作)을 신앙(信仰)으로 한결같이 정진해 온 시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시를 향한 그의 정열(情熱)은 실로 무섭기까지 하다. 어떠한 오브제이거나 그 정열의 도가니를 거쳐 나오기만 하면 바로 우리의 심장과 영혼에 잔잔하고도 해맑은 종소리의 시행(詩行)이 되고 만다. 특히 시인(詩人)의 시는 공해(公害)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은하(銀河)」 「모래알」 같은 「꿈밭」을 펼쳐주리라 믿는다. 1993년에 출간한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강물로 흐르려네』의 자서(自序)에도 이런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시와 함께 산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외로울 때 시를 생각하고, 피곤할 때 시를 읽고, 괴로울 때 시를 쓴다. 그러니까 나에게 시가 있는 한, 외롭지도 피곤하지도 괴롭지도 않다. 이처럼 충만한 내면의 풍요를 행복으로 거둘 수 있는 그 열매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거룩한 것이다. 엉킨 실타래 올올이 풀어내어 한 줄기 강물로 흐르려네. 메마른 땅 촉촉이 적셔 씨 뿌리고 가꾸어서 크낙한 열매 거두게 하려네. 저마다 굽이굽이 막히고 서린 한을 생명의 젖줄로 뚫어서 풀어 보려네. 공해에 시달리는 구석구석 얼룩진 자국을 씻어내며 거침새 없이 맑히려 하네. 온갖 잡소리 다 거두어 버리고 새 소리랑 물소리만 노래하게 하려네. 눈 멀고 귀 먹고 벙어리된 사람들 일깨워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게 하려네. 강물로 흐르면서 고향 마을 두루 돌고 돌아 정일랑 사랑으로 물들이게 하려네. -「강물로 흐르려네」(전문) 또한, 이기반의 시에는 전원의 풀 내음과 꽃내음이 있고, 보리밭의 이랑을 나르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것이 전원(田園)이기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인의 고향 반월리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운중반월(雲中半月)>의 형상이라고 한다. 구름 가운데 있는 반달의 의미니 그 풀이가 마음에 들어 스스로 호를 월촌(月村)으로 지었으며, 전주 시내로 이사하고서도 고향 마을 같은 느낌이 드는 서학동(棲鶴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부는 바람은 토끼풀이랑 쑥 내음이 숨어 있어서 순이가 생각나고 복남이가 그립지만, 바람은 색깔이 없어 보이지 않은 얼굴들이 구름 따라 어디론가 날아간 그 자리마다 이야기만 남아서 올봄엔 민들레꽃이 피네 -「고향에서 부는 바람」 한평생 후학의 지도와 창작에 몰입하였던 시인은 많은 시집과 연구서를 남기고, 2015년 11월 18일 영면하였다. 전북문단의 중책을 많으면서 전북문단을 크게 활성화했고, 영생대학과 전주대학교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맥(文脈)의 중심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조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시인이 집대성한 많은 작품이 재평가되고 조명됨으로써 후학과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읽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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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7 17:2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1)분단의 비극을 피흘림으로 풀어낸 시인 김영

김영 시인 김영(본명 김웅)시인은 1929년 9월 전북 순창군 순창읍 옥천동에서 아버지 김동혁과 어머니 손순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식자공으로 근무하였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김영이 다섯 살 때까지 순창 해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원을 그만두고 행상할 때는 외가댁에서 외할머니에 의해서 키워졌다. 1937년 순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학년까지 모두 갑(甲)을 맞아 전교 1등을 차지하였고 1943년 순창농림고등학교(현 순창제일고등학교) 졸업 당시 『여섯 해』라는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재학 중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아 그는 고향에서 천재로 알려졌고, 1949년에는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이무영, 염상섭으로부터 창작법 강의를 듣고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좌익계 전국문학예술총동맹 순창군지부 서기장을 맡았고, 혁명극과 시낭독 등으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28일 이후 인민군이 패퇴하자, 잔류한 좌익세력과 그 협력자들이 회문산으로 들어갈 때 시인도 합류하였다. 김영이 입산한 이유는 『남부군』의 작가로 유명한 이태가 빨치산 동료였던 시인 김영(본명 김웅)을 주인공으로 삼은 실명 소설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연세대 재학 중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은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혐의자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탈법적인 처형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시인은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야겠다. 그는 회문산 입산 후, 전북총사령부 제2정치부에서 전단지 원고 작성과 배포를 도맡았다. 토벌군에 밀려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지만,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다가 심한 동상과 열병까지 앓다가 1952년 3월 8일 백무골에서 체포되었다. 1952년 4월 광주수용소를 거쳐, 그해 11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전향 거부로 3년간이나 독방생활을 하는 등 고독의 극한과 폐결핵 중증으로 각혈까지 하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이 무렵,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무성했던 어머니를 재회했고, 고향 출신 국회의원 임차주와 순창교회 박석은 장로 등이 구명운동을 했다. 1958년에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 전향서를 쓰고 1960년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이마저 기각되고 말았다. 1962년 재소자 문예 작품 전시회에 그의 시 「벽과 인간」이 당선되어 법무부차관상을 받았다. 1964년 12월 19일 마산교도소에서 가출옥으로 세상에 나왔으며, 1965년 9월에는 신동아 논픽션에 「벽과 인간」이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그의 자전적 소설 『빨치산의 철장 수첩』(1990)을 읽으면서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절감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시대와 대결하여 무너지고 좌절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벽에 부닥쳐 종소리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 먹고 뱀처럼 꿈틀거린다. 수건이 마르지 않은 방에서 열병을 앓고 난 신경들이 부딪쳐서 불꽃을 낸다. (중략) 벽에 두개골을 곤두박쳐 스스로 출혈을 마시고라도 보랏빛 새벽을 열어야 한다. 「벽과 인간」 서른여섯의 노총각 김영은 출옥 후, 열한 살 아래의 고향 처녀와 결혼하였다. 순창고등학교의 영어 강사로 교단에 섰지만, 빨치산 경력이 문제가 되어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10년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물레방아글모임이라는 문학단체를 이끌었다. 1978년, 겨울에는 서울 영등포 도림동으로 이사하여 고물상과 리어카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88년 11월에는 『창작과 비평』에 「한 줌의 흙」 등 다섯 편의 시를 기고하였고,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비롯하여 자전수기 『총과 백합』(1988)과 『빨치산 철장 수첩』(1990), 제2시집 『별난 사람 리어카 시인』(1991), 서간집 『두 하늘에 띄운 그림자』(1991) 등을 연달아 출간했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의 서문에서 총소리가 요란한 전쟁터에서 피 묻은 수첩에 쓴 시가 대부분이었으며, 출소 후에도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땅을 파면서 비닐하우스 안에서 시를 썼고, 행상을 하면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시상을 리어카 위에서, 때로는 사과 상자 위에서 썼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시인은 음지에서 습지로/독버섯 따 먹고 살아온 인생/이었고, 역사여 입을 열어라/ 누가 이들의 꽃봉오리를 짓밟았는가(「음지-태양 없는 땅」 중에서)라고 올곧게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아이들의 울음에 음악이 흐르고/갓난이의 방실 웃는 얼굴은 / 꽃봉오리보다 아름답다// 내일에 이 집의 주인 /내일 피는 해바라기/(「기저귀」 중에서)에서 보듯 밝고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살았다. 시인은 1995년 10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시인의 시에는 평이성과 현장성이 두드러진다. 시인은 시란 우리 시대 다수가 읽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듯 그의 시편은 평이한 시어로 우리가 당면한 현장을 잘 그려냈다. 그리하여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면서 분단의 벽에서 벽돌 한 장이라도 헐어내기를 갈망했다. 장교철(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김영의 시 세계는 체험이 직서적으로 드러난 통한의 목소리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개성과 인간의 해방을 근력하고 있다.라고 정리한 바 있다. 참고 : 장교철 「우리 분단의 슬픈 역사를 피울림으로 통곡하더니」(순창문학 제2호) 김 영 『빨치산 철장수첩』(1991)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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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3 17:4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0)풍자와 해학, 후덕한 인품으로 세상의 빛이 된 작가 라대곤

라대곤 작가 라대곤 작가는 1940년 군산시 신영동 구시장 입구의 팔진당이라는 과자 공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업을 접고, 김제의 신곡리로 이사하는 바람에 김제에서 초중고를 졸업하였다. 그는 농사꾼으로 시작해서 노숙자, 악극단 단원, 연탄공장 인부, 약장사 행상, 예비 소설가, 그룹과외 강사, 회사원 등을 거치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다. 그의 자전적 수필에는 어린 시절의 곤궁했던 삶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방 한 칸에서 8남매가 잘 때, 방 가운데의 까만 솜이불 속에서는 형제들의 발이 수시로 엉키기도 하였다. 특히, 맏형의 요절은 작가의 삶을 온전히 바꿔놓았다. 하루아침에 장남이 되어 가족들에게 매이게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하였다. 전방 근무 중 선임하사가 사준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 술값이 보급품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사건은 훗날 그에게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없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1965년 월간잡지 기자로 잠깐 근무하다가 술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하여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달아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소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수도 없이 이사하는 바람에 장독대에는 성한 단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폐기물 처리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수필 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문예사조』에 「두창이와 연주의 합창」이라는 소설로 데뷔하였는데, 이때 작가의 나이 54세였다. 출발은 늦었지만, 작품을 왕성하게 써서 악연의 세월』(1995)을 비롯하여 다섯 권의 소설집, 『망둥이』(2005)를 비롯한 세 권의 장편소설, 『한번만이라도』(1995) 등 네 권의 수필집을 썼고, 말년에는 암 투병 중에도 동화집 『깜비는 내 친구』를 3부까지 연달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탐미문학상(1998)을 비롯하여 전북문학상(1999), 표현문학상(2000), 채만식문학상(2006)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에는 군산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라대곤 작가가 문단에 끼친 영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영면(永眠)에 이를 때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고발하는 등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수필과 비평』의 발행과 신곡문학상제정 등으로 문단을 풍성하게 가꾼 점이다. 특히 『수필과 비평』의 발행인으로서 훌륭한 작가들을 발굴하여 배출하였으며 문인들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문단 환경을 크게 바꾼 점이다. 셋째는 고매한 인품으로 후학들에게 큰 모범을 보이신 점이다. 어려운 문인들을 보면 돈 때문에 신경 쓰이면 좋은 글 쓸 수가 없어!라면서 아낌없이 도와주셨고, 후배들의 출판기념회나 시상식 등 행사 끝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일일이 응원엽서를 보내주신 문단의 자상한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작가의 서거 3주기를 맞이하여 나온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에는 작가와 후배 문인들이 나누었던 꿈과 사랑이 가득 이어졌다. 평론가 오양호는 작가는 군산의 백릉 채만식과 겨룰 만큼 훌륭한 역량을 갖췄다고 칭찬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창작이 뒷전으로 밀려서 그렇지 작가의 타고난 문학적 역량은 대단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정종명은 작가는 화려하거나 섬세한 문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힘 있는 글로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호병탁은 작가는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통렬하게 쏟아냈다고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소설 『망둥어』에는 자신의 결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비틀린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잘 표출되었다고 했다. 특히 망둥이는 욕심이 많아서 제 살을 찢어 미끼로 써도 사정없이 물고 늘어져 자살하듯 버둥거리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질타하였다고 했다. 작가는 『취해서 오십 년』이라는 수필집에서 보듯 술을 즐겨 마셨던 것 같다. 작가가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셨던 이유는 따뜻해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살기 위해서 였던 것 아니었을까. 정휘립은 <라대곤 다시 읽기>라는 글에서 그의 작품들은 서민들이 겪는 소박한 애환의 일상사를 제재로 하여 생에 지치고 마음 한쪽이 헛헛한 외로운 존재들의 행렬을 그린 풍속화집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나이 일흔에 췌장암, 담도암 수술을 연거푸 받았고, 체중이 20kg이나 빠지는 상황에서도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았다. 매우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손자 경아와 민재에게 들려주는 『깜비는 내 친구』라는 동화집을 6부작으로 구상하였지만, 아쉽게도 3부까지만 썼다. 이 동화집에는 호수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는 평화로운 동산의 이야기를 그의 손자와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김영(전북문인협회 회장) 시인은 작가를 권위적이지 않고 높임받기를 좋아하지 않으신 지구에 온 어린 왕자라고 회고한 바 있다. 후덕한 인품을 지닌 작가로서 후배들과 나눈 그의 꿈은 오래오래 우리 문단에 아름다운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서거 3년이 되던 해인 2016년 7월 9일 김제시 청하면 청운사에 라대곤 문학비가 세워졌는데, 그 뒷면에는 작가에 대한 문단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하는 김남곤 시인의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오늘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산 하나가 장중하게 허물어지던 그해 봄날, 우리들은 그대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라며 애도했노라. *참고 :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2016), 안도(전 전북문인협회 회장) 『라대곤 소설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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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21.07.20 18:0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49) ‘불멸의 애국혼’되살린 논개(論介) 시인, 고두영(高斗永)

고두영 시인 시인은 1929년 7월 11일, 전북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 1239번지에서 아버지 고봉석과 어머니 배오목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지만, 주경야독으로 고학하였으며, 경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고향 장수의 초등학교에서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 등으로 40년 넘게 봉직하였다. 시인의 고향 사랑은 아주 특별했다. 『장수군지』를 비롯하여 『장수의 얼 동화집』(공저), 『장수의 표상』(공저) 등을 저술하였고, 장수교육지원청에 근무할 때는 『장수문맥』이라는 학생 문예지를 해마다 발간하여 장수 학생들의 문예 지도에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필자가 장수교육지원청에 근무할 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장수문맥』을 속간(續刊)하고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매우 흐뭇해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시인은 주논개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여 불멸의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 앞장섰다. 시인은 사람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전해 오는 논개(論介, ?~1593)를 만나면서부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논개의 삶을 추적하여 1977년에는 『이애미 주논개』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논개의 생애와 순국 정신이 하나의 정설로 정립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 진실성에 접근해 보려는 시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논개 연구 및 논개 관련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대동아 공영과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서 장수에 전해오는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受命碑)를 파괴할 계획이었으나, 장수의 청년들이 미리 알고 숨김으로써 그 수난은 면했지만, 그 앙갚음으로 출생지의 논개 선조 묘와 사적을 없애면서 실 가닥처럼 전해오는 논개의 역사적 사실은 허망하게 증발해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20일에 이 비석이 발굴되면서 의암사 건립과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시인은 이 무렵부터 사료를 뒤적이며 논개의 가문과 출생, 작명, 효성, 생애, 임진왜란의 거사, 순국 등을 정리하였다. 1972년에는 『장수 절개』라는 책을 펴냈으며, 또한 그의 노력으로 1981년 KBS 생방송 전국 일주 프로그램에 논개의 생가터가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당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짐으로써 시인은 청와대를 두 번이나 방문하여 브리핑함으로써 생가복원과 성역화 사업을 끌어냈다. 죽음에서 태어난 그 이름이여 ! 햇빛에 떠오르면 정사가 되고 달빛에 잠기면 야사가 되거늘 햇빛 달빛도 비켜서 버린 외로운 이름이여. 이젠 꽃빛 불빛으로 민중의 가슴 속 화석으로 새겨진 의낭루에 불사조로 살아난 구원의 여신 거룩한 이름이여 그 이름이여! 「그 이름 의낭(義娘) - 논개」 (전문) 시인은 여러 편의 시를 통하여 논개의 삶과 애국정신을 기렸다. 어쩌면 시인의 문학은 논개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국난의 위기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논개의 애국 충혼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가슴이 뜨거워졌음을 그의 시편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사와 야사에서도 버림받은 논개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각별했다 더운 피가 붉다 하되 임보다 진할쏜가/ 진주 남강 푸른 물결 임보다 푸를 쏘냐 / 조국 향한 우국단충 원수 왜장 수장했네 /논개님의 애국충정 겨레에 불 밝혔네.(「논개님의 액국단충」 중 일부)라며 논개의 애국 충절을 기리고 일깨웠다. 시인은 퇴직 후에도 고향에 살면서 장수의 문화적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다. 장수문인협회 회장과 장수문화원장을 역임하면서 장수의 문학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시작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시인은 총 8권의 시집을 냈으며 노년에 쓴 『들플의 향기』와 『들풀의 소살거림』은 일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로 고향의 평화로운 정경과 온후한 시골 사람들의 삶을 정겹게 그려냈으며, 또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점차 피폐화되어가는 고향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50년대 50여 호 되던 산골 요촌이 도시로 하나 둘 떠나가고 눈 덮인, 쓸쓸한 고샅길 고추바람만 오락가락 사람들이 사는지 마는지 말 물어볼 인적도 없이 죽음의 고요가 장막을 치고 깊어 가는 밤 촌로들이 깜빡이던, 등불 하나 둘 꺼져 가면 빈집의 적막, 검은 불 켜 들고 언젠가는 마을의 씨 불 다 꺼진 날 한촌의 텅 빈 마당 찬바람이 판을 치겠지 「한촌」의 전문 시인은 여러 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늘 부끄럽고 두렵고 쑥스럽기 그지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시인의 말대로 애써 모은 작품들을 버릴 수 없고 하여 마치 다신 정약용 선생의 「노인 일쾌사」를 떠올리면 만용을 부렸다고 겸손해했다. 타향에서 떠돌이 별로 흐르다 오갈 길 막장에 부딪혀 흐르는 별이 줄을 긋는다 흙바람 사납게 불고 돌멩이가 날고 구르는 눈뜨고 바로 서기 힘든 흙무덤에 한 몸 부려놓고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리 떠난 후 그럴 일 없으려니와, 혹시나 그 뉘 찾거든 옛 고향 찾아갔노라 이르고 언제쯤 오느냐고 묻거든 먼 나라로 이사 갔노라 말해주오. 아아, 언젠가는 꼭 돌아가야 할 그 고향길 웃고 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었으면 좋으련만 「고향길」 전문 이 시에는 사모님을 여의고 홀로 지내면서 쓴 시로 근원적인 고향으로 돌아가야 함을 내비치고 있는 시다. 그 뉘 찾거든 / 옛 고향 찾아갔노라 이르고 / 언제쯤 오느냐고 묻거든 / 먼 나라로 이사 갔노라 말해주오에서는 언젠가는 가야 할 이승의 마지막을 늘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시인은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였다고 한다. 시인의 자녀들은 항상 온화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이끌어주신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으며, 최선의 자아실현을 가훈으로 삼고 늘 강조하였다고 했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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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9 16:4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48) 삶과 詩가 질박하면서도 올곧았던 서래봉 시인, 박찬

박찬 시인 시인은 1948년 11월 4일, 전북 정읍시 장명동 7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규, 어머니 정혜상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시인이 태어난 마을은 박 씨 집성촌으로 향교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이어진 동네로 수도곶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황산 기슭에는 대숲 바람이 일렁거렸고 고개를 들면 내장산 서래봉이 바라다보이는 곳이었다. 시인은 정읍동초등학교, 정읍중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의 최전방 양구에서 ROTC 육군 중위로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시계산업을 하는 ㈜미광에 입사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시계 유통에 관여했다. 1978년에는 경성고의 교사 김매심 씨와 6개월 정도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1979년에는 갓 태어난 첫딸의 이름을 딴 주식회사 세의를 세울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그러나 1026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등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거치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는 화곡동 산동네로 전셋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시인에게 화곡동 시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시를 배우기 위해서 동아일보 문화센터에서 시 공부를 시작했고, 수강생들과 함께 〈동강시〉동인회를 구성하여 창작 의욕을 불태웠다. 1983년 시 전문지 『시문학』에 6개월여에 걸쳐 추천 완료되었다. 그의 첫 시집 《수도곶 이야기》에서는 시인에게 각인된 유소년기의 원체험을 서정적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 후, 실업자 시절 쓴 화곡동 연작시는 소박했던 달동네의 삶이 잘 그려졌다. 업가 業家가 업자 業者가 되어 돌아오던 날 아내는 배가 아팠다. 딱총 사건 이후 경제는 낙엽처럼 떨어져 가 주머니 속엔 부스러진 잎사귀만 가득 멋쩍게 대문을 들어서는 내게 핼쑥한 얼굴로 멋쩍게 맞다가 아내는 배가 아팠다. 초여름 낮의 길고 긴 병실 앞에서 오락가락 풋내나는 담배만 맥없이 사루고 공주가 더 예쁘죠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한 귀에서 한 귀로 바람처럼 스쳐 간다 병실 창밖으로 공을 굴리는 아이들 시간도 소리 없이 굴러가고 잠을 깬 아내의 충혈된 눈에서도 소리 없이 굴러내리는 것 괜찮아 나는 딸이 훨씬 좋으니까 -나의 참말에 손을 내미는 아내야 나는 안다. 당신의 배보다 지금은 당신의 가슴이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화곡동 1-반전 反轉」 전문 시인은 5년간의 실업자 생활을 마감하고 1885년에 《스포츠서울》 창간 기자로 입사하면서 새로운 삶을 펼친다. 그는 문학 담당의 베테랑 기자가 되었으며, 스포츠 신문으로는 보기 드물게 〈시가 있는 수요일〉이라는 지면을 만들어서 독자들과 시로 소통하였다. 시인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를 답사하였다. 내 젊은 날의 슬픔은, 짐짓, 인생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 다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것 세상모르고 살아온 어느 불혹의 밤 불현듯 떠오르는 그 밤의 강 출렁이는 빛 물결에서 꿈결처럼 보았네 산은 산, 그 안에 담겼을 이치를, 온갖 은유를 그러나 비유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안개 속에서 커 보이던 나무 하나, 안개 걷히자 앙상한 뼈만 남아 죽어 있네 -「밤의 강가에서 」 전문 이 여행은 망막한 광야와 폐허와 모래바람 속에서 원초적 그리움과 우리네 삶의 본디를 생각하게 하였다. 구름과 연기처럼 마음의 행로를 따라 구름처럼 연기처럼 떠돌면서 시인은 삶과 존재의 본질을 궁구하였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질박하고 올곧게 살아가는 시인에게 간암이라는 복병은 참으로 냉혹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였고, 희끗희끗해져 가는 머리카락 한 자락을 초록으로 물들인 초록 머리를 애교스럽게 꾸미고 살았다 한다. 간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달 만에 통증이 심해져서야 입원한 그는 마지막 순간에 숨을 모아 사랑하는 딸 세의야, 세연아 사랑해라는 입 모양을 지으며 숨을 놓았다고 한다. 이제,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저 나무를 자를 수는 없다. 곱게 자라는 풀들을 파헤칠 수는 없다 살아서 힘겹게 내 자리를 마련했듯 지금 펄펄 살아서 꽃 피우는 나무와 풀들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썩어 없어질 육신은 불살라 산에 들에 강에 뿌리고, 고시레 새들이, 고기들이 섭취한 배설물로 자연스레 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둥둥 떠도는 흰 구름으로, 연기로 나의 흔적을 지워나가야 한다. -박찬 「화장(火葬)」의 전문 시인은 병원에 가기 전에 두 딸을 불러 엄마 외롭게 하지 마라. 아빠 마이너스통장 정리 좀 부탁하고 말러의 교향곡을 들려주렴. 사랑해 라고 마지막 당부를 했다. 2007년 『시인시각』 봄호에는 누가 봐도 절명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 「소리를 찾아서 서래봉 가는 길」을 남겼다.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 못 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 박찬 시인 평전을 쓴 이경철은 시인은 병중에도 병마와 싸우지 않고, 그 비극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삶과 문학을 갈무리했다. 채움보다는 비움, 팽팽한 긴장의 대칭보다는 느슨한 비대칭의 구도, 평화롭고 여유로우며 삶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는 인식을 생활철학으로 내면화했다라고 평가했다. 박찬 시인은 『수도곶 이야기』(1985)와 『그리운 잠』(1989), 『화염길』(1995) 등 세 권의 시집과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2008)을 남겼다. 참고 : 이경철 『시인 박찬 평전』(2021, 계간문예)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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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5 17:4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7)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수필 쓰기로 행복한 삶 일군 김학 수필가

김학 수필가는 1943년 10월 5일, 전북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 박사마을에서 아버지 김옥기와 어머니 이복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의 유아 사망으로 일찌감치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삼계초등학교, 오수중학교, 전주제일고등학교를 거처 전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하였다. ROTC 4기로 임관하여 전방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였고, 제대 후에는 해성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69년 서해방송 공채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1980년 방송 통폐합으로 KBS로 옮겨 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을 역임했다. 선생의 본격적인 수필 쓰기는 서해방송 입사 후, 『밤의 여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부터다. 방송수필집 《밥의 여로》를 비롯하여 『호호 부인』, 『아름다운 도전』(2003),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2006), 『하여가 & 단심가』(2015), 『쌈지에서 지갑까지』(2017), 『하루살이의 꿈』(2019), 『지구촌 여행기』(2019) 등 16권의 수필집을 냈다. 특히, 1980년 《월간문학》에 「전화번호」라는 수필로 등단한 후, 선생은 수필에 대한 애정과 필력을 왕성하게 보여주었다. KBS에서 정년퇴직한 후에는 전북대 평생교육원,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등에서 수필 창작지도에 열정을 쏟았다. 많은 제자의 수필 첨삭지도와 각종 문예지의 수필 평(評)과 해설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온전히 수필 속에서 활짝 피어났다. 올해 1월, 김학 수필가의 부음은 큰 슬픔과 충격을 주었다. 망망대해에서 선장을 잃어버린 것처럼 동료와 제자들은 망연자실했다. 후학들은 그 슬픈 마음을 가다듬고 『전북수필』 92호(2021.4)와 『수필 세계』 (2021년 봄호)에 김학 선생 추모 특집을 마련하여 선생의 삶과 문학을 기렸다. 영호남수필문학협회 김정길 회장은 낙락장송에 살포시 내려앉은 고고한 학의 모습으로 맞아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으며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자세로 정진하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겠다고 했다. 전북문인협회 박귀덕 감사는 선생은 전북이 수필의 메카가 되도록 저변 확대에 이바지한 공이 크며, 문하생들에게 항상 칭찬과 격려로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자신만의 수필의 안경을 지닐 것을 강조하였다고 회고했다. 온글문학회 백봉기 회장은 직장의 선배이고, 문단의 선배이기도 했던 선생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수필의 소재로 삼아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쉽고, 읽게 좋게 글을 쓰셨다라고 했다. 김학 선생은 곁눈질하지 않고 수필에만 전념하였다. 선생이 얼마나 수필에 애정을 가지고 생활했는가는 『수필아, 고맙다』라는 수필집에 잘 나와 있다. 수필은 다정한 나의 친구요, 정신적 동반자다. 수필이 있기에 나는 늘 행복하다. 수필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아둔한 내가 열한 권의 수필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수필이 베풀어준 시혜다. 또 수필집을 출간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KBS에서 정년퇴직한 내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서 후배들을 모아 유능한 수필가를 양성할 수 있게 된 것도 수필이 마련해준 혜택이다. 수필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나에게 기쁜 일만 제공해주고 있다. -「수필아, 고맙다」의 일부 오경옥 시인은 선생의 수필 세계는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의 자세, 사학자로서의 역사의식과 전통에 대한 온고지신, 방송인으로서의 다양한 매체를 통한 건강한 사회의 미담과 인간학, 여행에서 깨달은 높은 식견과 창의적인 발상과 비유로 승화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라고 정리했다. 윤재천 중앙대 명예교수는 현실에 충실한 김학의 수필 감상 소회를 떠돌며 추슬러 곧게 세우는 수도(修道)라고 밝힌 바 있다. 항상 성찰하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일깨우면서 좋은 에너지를 쏟아놓은 선생의 수필을 그렇게 평가한 것이다. 선생이 갑작스럽게 영면(永眠)에 든 점은 문인들과 후배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선생의 주옥같은 글들은 그대로 남아 지혜와 영감, 성찰의 기쁨을 줄 것이다. 선생께서 자신과 후학들의 글을 소개했던 블로그 《김학-두루미 사랑방》은 지금도 선생을 뵙는 듯 온기가 있다. 특히, 「인생, 그 행복과 불행의 교차로」라는 수필은 긴 여운을 준다. 선생의 고희 때 자신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필인데, 삶의 전반을 회고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등에 금불상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지. 그러나 그 금불상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이들이 많아서 탈이긴 하지만 밀일세. 세상으로 눈을 돌려볼까? 면장, 군수, 도지사, 대통령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할 금불상이야.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은 불상의 크고 작은 것과 비유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 금불상을 평생 자신의 등에 싣고 다닐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아 걱정일세. 그 불상을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면 좋으련만. 부자에게는 돈이 금불상일 것이고, 문인에게는 문학이 금불상이 아닌가? -「인생, 그 행복과 불행의 교차로」의 일부 참고 : 안도(前 전북문인협회 회장)의 〈김학 수필가 자료〉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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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1 18:50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6) 근원적 고통을 문학으로 풀어낸 시인 이목윤

이목윤 시인은 1936년 완주군 소양면에서 태어났다. 전주공업고등학교 토목과를 졸업하였으며 스무 살 때 갑종간부 133기(1956년) 공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0년 한미연합 기동 훈련 중 부대원의 실수로 지휘자인 이목윤 중위는 포탄을 뒤집어쓰는 상황이 되었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오른손을 잃었고, 얼굴에 큰 화상(火傷)을 입었다. 1963년 육군 대위로 퇴역하면서 국가유공자가 되어 귀가했다. 그리움 대신 두려움 앞서 갈아타는 역사(驛舍)마다 멈칫멈칫 발걸음을 늦추며 쉬어 가네. 포화에 이지러진 이 몰골 발길 돌려도 어디 숨길 땅 없어 밤을 기다려야 돌아가는 길 사립문을 펼치니 우리집 누렁이는 짖어대고 동생마저 날 몰라보고 놀라 달아나네 나여... 입안 가득 돌던 침을 삼키고 장승처럼 서 있는 날 바라보던 어머니는 통곡으로 얼싸안네 -「귀가」 전문- 집으로 돌아오는 시인의 마음은 매우 불안하고 복잡했다. 그 두려움은 기차마저 멈칫멈칫 발걸음을 늦추며 쉬어 간다고 표현하였다. 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아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역(驛)으로 마중을 나갔다가 목발에 의지한 아들 진수를 보고 에라 이놈아!하고 울먹이던 만도의 모습이 연상되는 시다. 그러나 시인은 슬픔에 빠지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틈틈이 책을 읽으며 글을 썼던 일을 떠올렸다. 바로 그 이듬해 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64년에는 〈문예가족동우회〉를 결성하면서 문학에 빠져들었다. 1967년에는 『문예가족』이라는 문학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중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유인실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영혼의 반짇고리』의 시평에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닌 평생의 고통 콤플렉스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했다. 군대에서 겪었던 참혹함은 그에게 실존의 위기를 안겨주었다. 시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하였으며 존재의 구원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는 유독 절대, 무한, 영혼이라는 시어가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시인이 평생을 통하여 그토록 갈망했던 새로운 세계라고 하였다. 한때라도 꽃처럼 피어서 눈물 글썽이는 영혼에게 핏물 뚝뚝 지는 감동을 베푼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새처럼 노래를 불러 땅끝으로부터 끓어오르는 회한을 쏟아 밤이 무너지는 울음 울게 한 적 있는가 과연 시인답게 살았는가 체면 털고 인정 털고 몇 사람이나 그렇게 대답할까 해 저무는 산모롱이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본다. -「나에게 묻는다」 의 전문- 그래서 시인은 늘 자신에게 다그쳤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지만 눈물 글썽이는 영혼에게 핏물 뚝뚝 지는 감동을 베푼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울러 한 번이라도 새처럼 회한을 쏟아 울어 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시인의 삶은 자기 존재의 토대를 인정하면서 지향해야 할 세상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는 구도자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문학을 반려로 삼아 시를 썼으며, 그동안 첫시집 『바람의 이랑을 넘어』(1992)를 비롯한 『별 밭이랑에 묻고』(1996), 일역(日譯) 시집 『귀택(歸宅)』(2000), 『지리산 연가』(2004), 『차나 한 잔 더 드시게』(2005), 『영혼의 반짇고리』(2014), 『은하계 아내별 통신』(2019) 등을 출간했다. 그후, 시인은 유년 시절의 고향 완주군 소양면의 아름다움과 전설, 설화 등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고향 이야기를 조곤조곤 쏟아내어 『소양천 아지랑이』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소설까지 쓴 시인은 내친김에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전에 써 두었던 단편소설들을 묶어 『비둘기자리 별』이라는 소설집을 냈고, 이 외에도 8편의 소설을 남겼다. 2015년 7월 19일 제6시집 『영혼의 반짇고리』를 내고 역사소설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집필하고 있는 사이에 사랑하던 아내 김남순 여사를 하늘로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게 된다. 아내를 살뜰히 보살피지 못한 것을 자책하였지만, 때 늦은 자책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먼 하늘에 천둥이 울고/ 도시 숲이 노랗게 부서져 내리네(그의 시 「시인의 아내」의 일부)라며 목을 놓아 울었다. 아내를 보낸 후 한동안 허송세월하다가 그의 자서(自序)에서 밝히듯 2019년 마지막일지 모르는 시집 『은하계 아내별 통신』을 출간한다. 은하계 안에 든 아내와 화상통화로 그리움을 달래는 시인의 모습이 비친다. 이 무렵부터 시인은 몸이 시들시들 아프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는데, 이는 스스로 마누라 곁으로 가고 싶어 애자져하는 병이라 하였다 한다. 설움도 원망도, 두려움도 다 벗어놓으니 우리의 이별은 이별이 아님을 봅니다. 당신이 먼저 가고 내가 뒤따라간다는 약속일 뿐입니다. 이승살이가 그러했듯이 저승살이도 당신이 먼저 가서 짐 들여 살림 정리하고 문간에 청사초롱 밝히려고 앞서 간 줄 압니다. 우리는 이별이 아닙니다 따순 밥상에 편한 잠자리 내주던 당신 다음 세상은 내조와 외조를 바꿔 살자던 당신의 농담에 당신이 무안해져 속절없이 먼저 떠난 줄 알기에 다시 만나는 저 세상은 꼭 당신이 낭군, 내가 아내 되는 약속드립니다. -「이별이 아닙니다」의 전문 시인은 2021년 2월 18일 아내가 있는 은하계로 떠났다. 시인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이승의 역사를 마감하고 은하계로 가서 부인 김남순 여사를 만났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은 시인의 약속대로 내조와 외조를 바꿔 알콩달콩 지내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아내를 보내고도 5년 넘게 더 살면서 전북 문단의 어른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항상 문우들을 아끼고 보살폈으며 말년이 이만큼 즐겁고 행복할 수 있음은 / 나를 얼싸안고 얼러리 둥둥 / 사랑을 나누는 문인들 덕이라네(그의 시 「노을이 아름다울 수 있음은」의 일부)라며 문인들과의 사랑과 우의에 늘 고마워했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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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11 19:06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5) 분단 극복과 통일을 노래한 시인 박봉우

박봉우 시인과 책 <휴전선>, <사월의 화요일>. 시인은 1934년 7월 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승주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시인의 학창시절은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광주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 전남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서울 생활을 거쳐 전주로 내려와 살다가 1990년 3월 1일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혹자는 박봉우 시인은 전남, 광주 사람인데, 전북의 작고 문인으로 거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봉우 시인은 이 고장 전주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우석대 문신 교수는 「절대 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시인 박봉우」라는 논문에서 박봉우 시인은 전주에서 혹독한 피로 자신의 영혼을 물들였다라고 하면서 전주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전주에 있을 때 시인은 그토록 갈망했던 분단 현실과 통일 조국, 군부 독재를 향한 반전(反戰), 반독재의 윤리가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자신을 대신하여 남부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던 아내를 잃었고, 마지막에는 활화산보다도 더 뜨거운 심장으로 지키고자 했던 자신마저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전주 문인들과의 추억, 그리고 젊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최명표 박사의 기념비적 명저 『전북 작가 열전』에서도 시인의 삶과 문학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고려하였다. 박봉우 시인의 삶은 크게 3기로 나누는데, 그것은 광주에서의 유소년기(1~23세), 서울에서의 청년기(23세~42세), 전주에서의 장년기(42세~57세)다. 어린 시절, 광주를 배경으로 한 학창시절에는 그는 문학의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2년에는 「석상(石像)의 노래」가 주간지 『문학예술』에 당선되었고, 또한 친구들과 4인 시집 『상록집』을 냈다. 23세 때인 195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그의 서울 시대가 펼쳐진다.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그가 명동 거리에 나타나면 아르뛰르 랭보가 나타난 듯 요란했다고 한다. 4월 혁명 정신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왜곡되자 시인은 그때의 분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4월의 피바람도 지난 수난의 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갈라진 가슴팍엔 살고 싶은 무기도 빼앗겨버렸구나 _「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의 일부 이 시절 박봉우는 기인으로 알려졌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며,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전날, 한 술집에서 빨치산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취재차 내려간 지방에서 집단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의 서울살이는 정신분열, 생활의 불능, 타인과의 불통이 겹치면서 매우 고달팠다. 1965년(32세)이 되어서야 6년 동안이나 미루어 온 결혼식을 탑골공원에서 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장녀 나리와 장남 겨레가 특별 하객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 분단의 아픔에 괴로워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시인은 독립선언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결혼함으로써 시인의 시대정신을 드러냈다. 그가 전주로 오기까지에는 시인의 고교 동창이었던 당시 이효계 전주시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박봉우 시인이 서울에서 매우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시장은 그를 전주시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배려한 것이다. 시인은 1975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서울 하야식(下野式)」(1975)을 발표한 후 전주로 내려왔다.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서울 하야식(下野式)」의 일부 전주로 내려온 시인은 1990년 3월 1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전북의 문인들, 그리고 각 대학의 문학 지망생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소재호(현, 전북예총회장)는 「박봉우 시인의 전주에서의 삶, 그 흐린 하늘」에서 박봉우 시인은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마쳤지만, 자기 시를 줄줄 외는 등 그의 기억력이 빼어나게 출중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천재성은 남을 포근하게 감싸면서도 그 어디에도 오만함은 없었지만, 다만 시에 대해서만은 혹독하리만치 비판의 서슬이 파랬다고 했다. 장교철(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자신의 시집 『황지의 풀잎』을 주면서 시인은 시대를 꿰뚫는 시대 정신을 가져야 한다라던 박봉우 시인을 기억했다. 한 번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 문인들의 회식 장소를 찾아갔는데, 시인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술 취한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문전박대하자, 매곡교 부근 시인의 단칸 셋방으로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던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1990년 박봉우 시인의 장례식에서 자작 조시를 낭독한 백 학기(시인, 영화배우)는 민족분단의 비원을 가슴에 품고 통일의 의지를 노래했던 시인의 삶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봉우 시 연구」라는 논문에서 시인의 시는 분단상황 인식과 그 극복 의지, 내밀화된 사랑의 풍경, 혁명과 민중적 세계관, 그리고 세상과 따뜻한 소통 그리고 화해 등이 잘 담겨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지났지만, 전주의 문인들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한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효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지만, 평생 시인이 열망했던 꿈은 절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참고 : 문신 「절대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박봉우 시인」, 백학기 「박봉우 시 연구」 (2000), 최명표 『전북작가열전』(2018)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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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7 18:0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4) 시대를 직시하고 구원(救援)을 노래하다, 석정(夕汀) 연구의 대가, 허소라 시인

시인 허소라(許素羅, 본명은 형석(衡錫), 1936-2020)는 1936년 3월 12일 전북 진안군 진안읍 군상리 499번지에서 부친 허재혁과 모친 송순엽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은 금산중앙초와 금산동중학교, 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60년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처 1988년 경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인은 전주신흥고와 군산수산전문대학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1984년부터는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문학연구에 매진하다가 2001년 퇴직하였다. 군산대의 대학신문 주간, 대학원장 등의 보직을 맡아 대학발전에 이바지했고, 고려대학교 교류교수와 대만국립정치대학 객원교수, 중국연변대학 조문학과 객좌교수로 활동하면서 우리 문학을 해외에 알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시인의 글쓰기는 전북고녀(현 전주여고)에 다니는 누나에게 편지를 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보다 일찍 글을 깨우친 그는 고사리손으로 누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누나의 친구들이 이를 칭찬하자 더욱 고무되어 열심히 편지를 썼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습작으로 막연하게나마 문학에의 꿈을 키워나가던 시인은 전북대학교에서 신석정 시인을 만나면서부터 인생과 문학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스승 석정은 시인에게 시업(詩業)에 평생을 바치려면 저만한 인격, 저만한 자세, 저만한 애정을 지녀야겠구나 하는 객관적인 표본이 되었다. 석정 선생도 시인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으며, 소라(素羅)라는 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시인은 1959년 8월 『자유문학』에 「지열」, 「피를 말리는 」, 「도정」 등 시 세 편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1964년 첫 시집 『목종』을 출간한 이래 『풍장』, 『겨울나무』,『아침 시작』, 『겨울밤 전라도』, 『누가 네 문을 두드려』, 『이 풍진 세상』 등을 출간했다. 산문집으로는 『흐느끼는 목마』, 『파도에게 묻는 말』, 『숨기고 싶은 이야기』와 평론집 『못다 부른 목가』 등을 펴냈다. 석정의 시 세계를 동경해왔던 시인은 저평가된 스승의 문학사적 위치를 바로잡기 위해서 한평생 석정 문학 연구에 매달렸다. 이러한 공로로 시인은 전라북도문화상과 전북대상, 백양촌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석정 시인과 맺은 인연은 석정 시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석정문학회 설립, 신석정문학제 개최, 『석정문학』발간, 신석정 전집 간행, 석정문학관 건립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009년에는 『조선일보』에 신석정의 미발표시 「인도의 노래」를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또한, 시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가시인,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신석정 시인을 시대의 굴곡과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지 않은 현실참여 시인, 또는 저항시인인 점을 일깨웠다. 시인은 늘 이렇게 다짐했다. 40여 년간 석정 선생 연구만 해왔는데, 석정이 목가시인으로만 알려진 점이 늘 가슴에 아렸어요. 푸성귀로 덮어 씌워져 있는 가시면류관을 벗기고 싶었습니다.라고. 허소라 시인은 1974년 7월 스승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석정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표지도 없이 심하게 파손된 시집 여백에서 13편의 미발표 시를 발굴하였다. 이 작품들은 석정(夕汀)이 암장(暗葬)해 놓은 저항시였다. 가택 수색이라도 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들키지 않기 위한 석정 선생 나름의 고육책이 파손된 시집의 속의 여백이었던 것 같다. 시인은 일생의 스승이요 어버이 같은 석정에 대한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을 夕汀 스승 시비 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달을 보며」라는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나보다 먼저 온 풀벌레 울음이 하얀 달빛을 실어내고 있었다 아무리 마다 하고 마다 해도 세상은 지저귀며 다가왔다가 이윽고는 침묵으로 떠난다 보름달 바라보며 기울이시던 술잔, 오석(烏石)이 대신하여 세월을 떠받들고 밤마다 첨벙이던 어둠이 더듬더듬 연못을 빠져나와 음각(陰刻)의 비문 속으로 숨으면 산을 향해 길게 드리운 그림자 하나 단 몇 줄로 요약된 생애를 성큼성큼 건너뛰며 영원 쪽으로 가고 있다 누워 있음과 서 있음의 차이 그러나 눈 감아도 산이 되고 나무가 되어 우리를 겹겹으로 다스리나니 -「달을 보며」 허소라 시인은 그의 마지막 시집 『이 풍진 세상』을 펴내면서 첫 시집 『목종』(1964)의 자서(自序)를 쓸 때는 세상에 내놓는 최초의 연서인 양 수줍고 설레었는데, 근 20여 년 만에 내놓는 제8 시집의 자서(自序)를 쓰려니 마치 마지막 유서를 쓰는 듯 만감이 교차한다.라고 하였다. 오하근 평론가는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하여 그가 살아온 능욕의 구렁텅이에서 시대를 건지려 노력했고, 젊은이들의 기지와 풍자로 시대상을 조명하였으며, 또한 노년의 예지와 사랑으로 평화와 평등을 설파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시인의 삶은 아래 시 「진달래」에서 보듯 한세상으로 덮씌워 은폐되고 실제로 존재가 상실된 세상에서 은근과 끈기의 삶을 추구했던 것 같다. 진달래 타는 넋 봄도 지천으로 다발지고 사랑 그리운 날 너를 보니 한세상 진하게 글썽이고 -「진달래」- 허소라 시인은 지난해 12월 16일, 향년 84세로 영면하였다. 당시 김남곤(전 전북일보 사장) 시인의 「소라여, 소라여!」라는 조시(弔詩)의 내용처럼 지금쯤 허소라 시인은 그립던 석정(夕汀)님을 만나 목마 타고 흐느끼는 어여쁜 밀어들을 더 고운 이야기로 꽃피우고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이준호 <허소라, 자기 구원과 시대를 증언하는 시>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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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13 18:1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3) 최창학, 폭력의 시대 그 실존과 불안을 증언하다

최창학 소설가는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1년 7월 26일, 전북 익산시 오산면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오산남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54년 이리로 이사하여 이리동중과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19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신구문화사와 민음사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78년부터는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7년 2월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1968년 중편 「창(槍)을 『창작과 비평사』에 발표하면서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 이 외에도 『바다 위를 나는 목』(1979), 『하늘의 침묵』((1983), 『긴 꿈속의 불』((1988), 『창(槍)』(1990), 『가사자의 꿈』(1994), 『아우슈비츠』(1997), 『케모포트』(2019)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최창학은 해방과 전쟁, 유신독재 시대를 살아오면서 한순간도 불안과 공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손주를 돌보기 위해서 상경했던 부모가 자신의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사고를 겪었고, 첫아들의 죽음을 아프게 대면해야 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전쟁과 사회적 갈등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는 불안과 공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의 이러한 체험적 사실은 그의 소설 속에서 그대로 변주되면서 불안과 공포로 특징되는 그만의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의 중편소설 『창(槍)』(1990)은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소설에서는 가족의 죽음과 자신의 불치병에서 비롯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한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열정을 갖지 못한 시대 상황까지 더해지면서 주인공 이상(李常)은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면도날로 팔의 동맥을 끊는 공상을 하는 자학의 광기를 보여 준다. 엄숙희 전북대 교수는 〈최창학 소설에 나타난 불안과 증상으로서의 광기〉라는 연구에서 소설 『창(槍)』의 주인공 이상(李常)이 겪게 되는 불안은 작가가 경험했던 유신 시대의 불안 등 당대의 불모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은 크게 엇갈린 것 같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일상 의식의 흐름을 기록한 보기 드문 문제작이라고 하였지만, 평론가 김현은 타기해야 할 소비 문화적 외설소설(猥褻小說)에 불과하다고 했다. 최창학은 1997년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왕성하게 쏟아냈다. 그런 그가 1997년부터 22년 동안 절필한 사건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가 절필하게 된 사연은 엄숙희 교수의 연구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 연구에 의하면, 작가는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신문사 지인으로부터 거절하기 어려운 소설 연재 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하늘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이 소설이 대중의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 후 1983년, 고려원에서 문제작만 써왔던 최창학이 백만 독자와의 악수를 위해 최초로 시도한 대중소설이라는 광고 문안까지 담긴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 후 여러 곳으로부터 드라마와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지만, 최창학은 이는 곧 소설의 죽음이라며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이에 최창학은 소설의 신문 연재를 치명적인 실수로 생각했고, 자신을 단죄하는 차원에서 절필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의 흥미에 영합한 자신을 진정한 작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투철한 작가 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최창학은 그 후 어떤 작품도 내지 않다가 대장암으로 투병하면서 최후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2019년 12월에 출판한, 제목조차 낯선 『케모포트』라는 소설이다. 케모포트란 항암 주사를 맞기 위해 어깻죽지 안쪽에 심어 놓은 장치라고 한다. 그러니까 케모포트는 암 환자에게 약물을 몸 안으로 넣은 투입구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케모포트는 대장암과 싸우는 격전지인 동시에 절망적인 순간에도 작가에게 소설을 쓰게 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대장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항암 주사를 맞아가며 쓴 회고록이나 유언장 같은 작품이다. 암 투병기와 젊은 시절 아내와의 첫 만남, 연애, 결혼, 여제자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교차하고 있으며, 죽어가면서 아내에게라는 부제가 보여 주듯 아내에게 모든 것을 고해하고 용서를 구하는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소설가 신경숙, 시인 지연의, 제자 조복순 등의 실명이 거론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창학 소설가는 우리 고장 익산 출신이지만, 작품활동은 주로 서울에서 하였다. 그래서 전북 문단보다는 중앙 문단에 더 널리 알려진 분으로 그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점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전북에서부터 큰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 참고자료 엄숙희 〈최창학 소설에 나타난 불안과 증상으로서의 광기> 이승준 〈최창학의 중편소설 『창(槍)』의 연구 :소설 미학적 실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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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3 18:1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2) 초속(超俗)의 달관, 참선비 근정(槿丁) 조두현 시인

근정(槿丁) 조두현 선생(1925.7.30.~1989.12.28.)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211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4년 전북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삼례중 고교 교사, 1954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7년 전주대학교 교수, 1978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의 제3 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을 쓴 이상비 교수의 글에는 근정(槿丁) 집안의 자녀교육에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선생의 증조부가 황소로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장사꾼이 책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증조부가 그를 불러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칠서(七書), 즉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대답하니 즉석에서 자신의 황소와 책을 바꿔왔다는 이야기다. 황소 한 마리면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기에 이를 본 이웃들이 모두 놀랐다는 것이다. 이렇듯 황금보다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의 전통은 자연스럽게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근정(槿丁)의 구남매(九男妹)가 모두 각 분야에서 훌륭하게 된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집안 내력 아닌가. 선생은 1958년 『현대문학』에 「애가」 외 세 편의 시와 「한시신역」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으며, 1967년 『어느 門 밖에서』를 비롯하여 『증언』, 『책장을 넘기다가』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근정(槿丁) 선생은 한문학에 조예가 깊어 1971년부터 일지사,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에서 중고등학생용 한문 교과서 저자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한문학 연구서와 대학교재 등을 출간하여 한문학과 한문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생은 고달픈 삶 가운데에서도 생명 의지를 지적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 「청명절(淸明節)」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무심한 관조와 달관의 자세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제 밤에 비가 부슬거리더니 새벽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노곤하여 달력을 바라보니 모레가 청명(淸明)이 아닌가 창을 열어놓고 뜰을 걷다가 백목련이 봉곳이 방울져 지금 잎이 돋아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머리털이 더욱 희어져 보이는 것은 이 봄의 탓이 아닌가 이 세월의 탓이 아닌가 -청명절(淸明節) 전문 홍석영 교수는 근정(槿丁) 선생을 평생 삶의 도반(道伴)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했다. 특히, 남중동 황새골에서 대문을 마주하고 살 만큼 늘 가깝게 살았다. 두 분은 9.28 수복 이후 익산의 남성학교에서 만났는데, 당시 남성학교에는 장순하, 천이두, 이동주, 박항식, 최학규, 김영협 등 훗날 한국문학의 대들보가 된 분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풍(南風)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고, 어쩌다 논쟁이 치열해지면 근정(槿丁) 선생은 그건 아녀, 아녀.하며 장자풍(莊子風)의 푸근한 인간미를 보였다고 한다. 천이두 교수은 근정(槿丁)의 첫 시집 『어느 門 앞에서』의 발문에서 선생은 재학 중에 연비동인회(燕飛同人會)를 결성하여 좌장이 되었는데, 당시 동기들은 만학(晩學)의 선생에게서 형장(兄丈)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항상 따뜻이 보듬고 아우르는 온후한 선생에게는 어느 구석에도 문사연(文士然)하는 모서리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함께한 국문과 1회 동기들이 박병순, 이기반, 조두현, 진을주, 최승범, 최진성, 김영협 등 모두 거목이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이보영 교수는 그의 제3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에서 근정(槿丁)의 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물의 완상과 찬미, 조촐한 선비다운 자적(自適), 초속적(超俗的)인 달관과 범용(凡庸)의 진덕(眞德)에 대한 긍정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내가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그 나무에서 돋는 이파리는 어떤 빛깔일까 내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때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어떤 냄새일까. 내가 한 마리 새로 울음을 울 때 그 새의 부리에서 울리는 소리는 무슨 가락일까. 내가 한 개의 열매로 맺을 때 그 열매의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은 무슨 이야기일까 -「열매」시 전문 - 이 시는 2000년 솜리예술회관 뒤뜰에 세워진 선생의 시비에 새겨진 시다. 이 시에는 늘 성찰하면서 청아한 삶은 누리고자 했던 선생의 학수천년(鶴壽千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송남 이병기 시인은 근정(槿丁)선생 송수(頌壽) 시문집에서 「걸어 다니는 무궁화」라는 시에서 선생의 삶을 기린 바 있다. 겉으로 하얀 꽃 이파리 / 깊은 마음일수록 속으로 타는 불덩어리 / 이웃을 깨우치고 / 들뜬 선잠을 사랑으로 재우던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분이 선생이라고 했다. 근정(槿丁)의 제자 송하춘 교수는 「우리 조두현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스승을 높이 우러렀으며 김병기 교수도 생아지부(生我之父)에 견줄 만큼 큰 스승의 사랑을 회고하였다. 이렇게 높은 학덕과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 선생의 참 선비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그의 고향 비봉공원 무궁화 동산에 빗돌 하나 세워줄 것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 : 근정 조두현 선생 송수 시문집 『학수천년(鶴壽千年)』 외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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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19:0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1) 황매천 연구의 권위자 송남 이병기 시인

송남 이병기 선생 송남 이병기 선생은 1931년 3월 10일, 전북 김제시 월촌면 명덕리 142번지에서 태어났고, 2008년 10월 9일 타계했다. 1956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대 대학원 석사,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익산의 남성여고를 비롯하여 도내 중등학교에서 10여 년간 근무했으며, 1975년부터는 전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은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석류초」, 「소연가」 등이 당선되면서 문단의 시선을 끌었다.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석류초』 등 9권의 시집과 연구서 『황매천 연구』 등 5권, 번역서 『역주매천황현시집』 3권(공역) 등을 펴냈다. 신성적 시인은 선생의 첫 시집 『석류초』 서문에서 시인은 새가 그 천후(天候)에 따라 까마귀처럼 어두운 조가(弔歌)를 부를 수 있고, 소쩍새처럼 통곡할 수 있고, 꾀꼬리처럼 구슬을 굴리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중조(衆鳥)이어야 하며 폭풍우에 거목(巨木)이 흔들릴지언정 제자리를 잊지 말고 보다 먼 앞날을 노래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송남 이병기 선생은 석정의 말씀대로 중조의 시인이 되어 문학의 밭을 일구었다. 허소라 시인은 선생의 제4 시집 『풍남문』의 발문에서 굵직한 톤의 자기 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시세(時勢)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한국적 전통의식을 자기 나름의 새로운 호흡으로 표현하였다고 했다. 오하근은 선생의 아홉 번째 시문집 『모악산』 발문에서 모성(母性) 탐험(探險)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이 시문집은 우러러 모악산에 오르고 내려서 77세의 삶을 반성한다라는 제사(題詞) 붙어 있는 선생의 유고시집이다. 눈이 내리면 참으로 포근한 품안에 묻히데 서늘하게 맑은 숨 골라주는 품안 다소곳이, 어머니의 소중한 말씀에 -중략- 눈이 내리면 참고 참아 봄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품안 어디라고 싸움하는 형제들이 모일 것인가 어디라고 노래가 익을 수 없겠는가 가운데 앉아서 사방으로 문을 열어라 마음을 고르게 언제나 누구에게나 들리는 자장가 가락이 있데 모여 의논하는 삶의 가락이 있데 -「모악산3」의 일부 선생은 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한시(漢詩) 시집 『완산태평가』(1992)를 냈으며, 2001년에는 『한시연습』을 발간했다. 그는 매천의 한시(漢詩)는 작품성과 표제적 주제성, 민속적 역사성까지 더하고 있어 후대들이 새겨볼 만한 작품이라며 황현 연구에 몰두했다. 1944년의 『매천 시 연구』와 1995년의 『매천 황현 산문 연구』에 이어 2007년에는 완산고 김영붕 선생과 황현의 시를 공동번역하여 『역주매천황현시집』라는 책을 냈다. 선생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소탈하고 격의 없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학문연구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투철했고 꼼꼼했다. 동아리 지도교수로 하계 봉사활동에 참여한 선생은 구슬땀을 흘리며 모범을 보였고, 밤새도록 제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었다. 선생의 77학번 제자들은 졸업여행 때 선생과 함께 한 추억을 떠올렸다. 거구의 체격임에도 가뿐히 한라산 정상에 오르더니 제주도가 맷방석 같다!라며 즉석에서 시를 읊조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상권의 「진정한 괴짜가 그립다」(새전북신문, 2006-06-16)에 나오는 일화다. 1980년 5월 학생 시위 때 교수들이 앞장서야 경찰이 학생들을 때리지 못한다라면서 선두에 섰다. 그날만큼은 경찰의 폭력진압은 피했지만, 선생은 517 이후 해직대상 우선순위에 들 만큼 위태로움을 겪기도 했다. 한때 총을 사서 사냥을 즐기기도 했지만, 술자리에서 헤밍웨이처럼 자살할 때를 대비했다라는 얘기에는 숙연해진 일도 있다 한다. 선생은 자녀들에게 승어부(勝於父)의 정신과 지덕겸수(智德兼修)를 강조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자녀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장남 이경재는 육군 준장으로 퇴역하여 원광대 교수로 근무했으며, 3남 이재운은 미국 베일러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장녀 이수월과 차남은 공무원으로, 차녀는 사업가로 일가를 이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모님에게 여보 중전이라고 부르면서 그동안의 미안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말년에는 잇몸암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펴내고자 했던 『모악산』은 어쩌면 시인이 아내에게 바친 마지막 헌사일지도 모른다. 또한, 시인의 고향 사랑도 특별했다. 구한말 황현과 이기와 더불어 3대 선비라 불리는 김제의 거유(巨儒) 석정 이정직의 문학과 미술을 발굴하여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고향 마을에 많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누가 묻기라도 하면 훗날 아이들이 이곳으로 소풍이라도 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좋아했다고 한다. 김제 검산공원에는 그의 시 「돌아가야 하리」를 새긴 시비가 그의 귀거래를 환영하고 있다. 두레가 나면 모두 즐기던 들녘 마을에 모정에 앉아 가을 나르던 젊은 보람의 결실에 울 없이 살아도 도둑 없이 도란거리는 이웃에 -중략- 돌아가야 하리 바작으로 부려놓 듯 두엄같이 구수한 마을에 -「돌아가야 하리」 김제 검산 체육공원에 있는 시비에서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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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3 17:4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0) 순정의 시인 최진성, 전문문단 활성화에도 큰 기여

시인은 전북 장수군 장수면 원개정마을에서 부 최삼홍(崔)과 모 박판례(朴判禮)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마을에서 성장한 시인은 수분재를 넘어 남원으로 유학, 남원중학교와 남원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에서 공부하였고, 1952년에는 동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수제자로 고하 최승범, 구름제 박병순, 사봉 장순하 등과 1953년 <가람동호회>을 조직하였으며, 시조 전문지의 효시가 된 시조(時調)(3집 이후 신조(新調)로 개칭)에 「단장」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일설에는 『신조』란 시조집에 「풍년」으로 데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豊年 해바라기 」, 「冬寒」, 「연푸른 설화(說話)」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시인의 작품에는 자연에 묻힌 시적 화자의 소박한 삶이 잘 나타나 있으며, 많은 작품이 자연 예찬으로 승화되었고, 고전적 시조형식을 현대 자유시 형식으로 표현하여 순정과 낭만을 진솔하게 묘사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초현실적인 영원주의를 추구하면서 인생의 참모습을 부단히 탐구한 순정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11 시집 『무창포』(1999)에서 시인은 시를 궁극적으로 추구한 바는 상상(想像)의 정도요, 진정한 창조로 보겠으며, 인생의 끊임없는 선택에서 오는 가장 아름답고 견인한 정서와 사상의 율어에 의하여 표현하고 감흥을 부여하는데, 큰 목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독자를 크게 의식할 필요는 없겠으나, 시와 더불어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에 이른다고 하였다. 또한, 시는 진실한 체험이라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취사 선택한 진실을 고도의 수법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마음을 즐겁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내 가슴속에는 강물이 흐릅니다. 가슴속에 흐르는 강물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강을 따라 정을 찾아 남도 500리길 ...... 미리 알고 멀리멀리 떠나갔나 봅니다. 한 번 만져보다가 그리운 마음 어찌할 수 없어 엽서만 남긴 채, 텅 비인 가슴을 달래며 당신이 처음 넘던 운령(雲嶺)을 이젠 나 홀로 넘어갑니다. 지금쯤 구름에 싸여 떠나가고 있을까. 아니면, 은하수 하얀 물결에 꿈을 띄우고 환상이 아련히 떠오르기만 합니다. 눈감은 채 추억도 사랑도 모두 천국에 던져 봅니다. -최진성 시인의 시 「엽서만 남긴 채」 (전문) 시인의 문학은 시조에서 출발하였지만, 뒤에는 많은 시를 쓰면서 자연과 인생을 생각하였고, 그 속에서 독자들에게 작은 감흥을 주려고 하였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시인은 주로 운문만 창작했지만, 그 이후에는 산과 관련된 수필을 많이 썼다. 1990년의 『마이산 길』(1996)에 이어 1998년의 『지리산(智異山)』 등이 있는데, 특히 수필집 『지리산(智異山)』에는 40여 년 산과 함께한 시인의 여정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이 책에는 1977년의 <지리산 종주> 체험을 비롯하여 내장산, 대둔산, 월출산, 속리산, 북한산, 설악산, 가야산 등의 방대한 산행기가 수록되어 있다. 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김동수 시인은 전북일보 문학칼럼(2013-02-03)의 <최진성편-초현실적 영원 추구하던 순정의 시인>이라는 글에서 그의 문학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순수한 자연 관조 정신을 바탕으로 무위(無爲)의 노장사상과 불교의 연기에 인생의 본질을 교직하였으며, 초현실적인 영원주의를 추구하면서 인생의 참모습을 탐구한 순정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동주는 시인을 옛 선비의 멋과 맛을 아는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시인은 평생 교직과 문학에 전념하면서 학생들과 후배 문인들을 이끌었고, 틈이 나면 바둑과 술을 즐겼고, 특히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여 한순간도 동양적 선비풍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최진성 시인 또한 시인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활발한 문학작품 활동 못지않게 전북문단 활성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1969년 7월에 창간된 『전북문학(全北文學)』이 전북문인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해왔으나, 1985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전북문인협회 정기총회에서 『전북문학(全北文學)』을 동인지로 선언함에 따라 전북문인협회는 기관지를 잃어버린 일이 일어났다. (전북문단 이런저런 이야기, 16쪽)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전북문인협회를 이끌고 있던 최진성 회장은 1987년 문단을 통합하고 대표할 수 있는 기관지 『전북문단(全北文壇)』 창간호를 발행함으로써 2020년 제92호로 이어지는 『전북문단(全北文壇)』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최 회장은 창간사에서 전북 문단이 크나큰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화합의 광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시인은 1983년에는 <전라시조문학회>를 창설하여 현대시조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또한, <두리문학>, <진안문학>을 창간, 초대회장을 맡는 등 문단발전과 지역문학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시인은 전북문화상을 비롯하여 노산문학상, 풍남문학상, 목정문학상, 문예사조문학상, 두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는 『호접부(胡蝶賦)』를 비롯하여 열두 권, 『지리산』을 비롯한 다섯 권의 수필집, 서한집 『은하수 건너서』와 기행문 『이웃 나라』를 남겼다. 평생 문학과 문단발전에 일생을 바쳐온 시인은 2002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약 1년여의 투병 끝에 전북 장수 선영하에 영면하였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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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8 16:5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9) 유기수, 최초의 의사 출신 작가

유기수 작가의 생전 모습. 유기수(1924-2007)는 정읍시 태인에서 태어났다. 태인보통학교를 마치고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평생 의사로 살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남북의 대립과 갈등, 민주화의 열망이 가득했던 시대를 살아왔다. 대학 재학 중에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군의관으로 차출되어 중국 대륙에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야 했다. 해방 이후,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의 군의(軍醫)로 징발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9.28 수복 이후에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고, 곧 풀려나서는 국군의 군의관으로 중부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의 인생 전반부는 격랑의 소용돌이였다. 일본군에서 인민군으로, 다시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전전함으로써 그의 삶은 20세기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삶과 죽음의 극한 상황을 거듭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만주 벌판에 비는 자꾸 구지고 부상병들은 야영에 울고 우리는 벙어리부대 이역만리에서 소리 없이 아, 소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누구를 위한 대열이기에 <하르빈> 참호를 붉은 피로 물들여 외인부대 무장 없는 병정들의 아리랑을 들어라. -징병이었다. -학병이었다. 동인성 만주 땅에 오붓이 모여 종소리 아득한 속에 서로 이름 부르며 신의주로 가는 길은 젊기도 했다. -「외인부대」 전문 『공백의 장』(정음사. 1958) 이 시는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만주로 끌려가서 관동군의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쓴 시로,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는 학병으로, 의병으로 끌려와서 하르빈 참호를 붉게 물들여 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무의미성이 드러난다. 그 후, 선생은 전주로 낙향하여 유기수 산부인과를 개업하면서부터 전쟁과 역경 속에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소설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병원도 호황을 누렸지만,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끊이지 않은 갈증처럼 오래가고 깊어지기 시작했다. 선생에게 문학은 지난날의 청춘을 보상받을 수 있고, 청년기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안식처가 되었다. (『전북작가열전』 최명표, 신아출판사) 196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호로박사」가 당선되면서 선생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었다. 이 작품은 장편으로 개작되어 1977년 6월부터 『전북신문』에 연재되기도 했지만, 의사들의 반발을 사면서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다. 이는 문학작품이 갖는 허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었지만, 작가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했다. 선생은 필연적으로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것 같다. 시대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살아온 선생의 삶은 그대로 한 편의 소설이 되기에 충분했다. 선생이 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은 특별한 서사구조를 갖춘 완벽한 이야기가 되었다. 『인간교량』을 비롯하여 『지리산 사람들』, 『북에서 온 기러기』, 『벽소령 가는 길』, 『두만강 칠백 리』, 『지리산에 핀 꽃은 시들지 않는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들은 당대의 삶의 애환과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증언하는 데 손색이 없다. 문덕수 교수는 유기수는 소설을 펜으로 쓰기 전에 먼저 발로 쓰는 작가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체험을 확인하기 위하여 현장을 답사하고, 다시 역사적 제재를 찾아 그 현장을 발로 뛰면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유기수 소설가의 특별함은 그가 최초의 의사 출신 작가라는 점도 한몫했다. 선생은 도규계(刀圭界)에서 성공한 의사이기도 했지만, 문학계에서는 특별한 체험과 서사구조를 통해서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임헌영 선생은 그의 문학을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했다. 하나는 진솔하게 실화를 기록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적 소설을 통해서 당시의 민족관, 세계관, 역사관을 재조명했다는 점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울분과 분노, 희생 또는 가학행위 등을 통해서 좌우 이념의 편향적 시각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변증법적 역사의 순리에 따른 세계관과 인생관의 변모를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6.25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전북문단 재건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시원(詩園)』 발간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당시 도내에서 발간된 신문에 유림일(柳林一 )이라는 필명으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전북 문단을 이끌었다. 전북문인협회 이사로 김해강을 보필했고, 표현문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민족통일문학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에 취임하여 1998년 북한 동포 책 한 권 사보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선생은 한국의 안톤 체호프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고 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안톤 체호프는 의과대학에서 수준 높은 정규교육을 받은 의사이면서 단편소설에 몰두하며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이며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선생은 의사이면서 사실주의적 단편소설을 많이 썼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선생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뒤편에서 신음하던 군상들의 설움과 분노, 한탄과 아픔을 다루었다. 특히 지리산과 관련된 당대의 비극을 자주 언급하였는데, 이는 지리산의 화해 없이는 남북 대화도, 조국 통일도 없다는 작가적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지리산의 저편에서 자신과 동질의 정서를 소설화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와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다졌다. 선생은 작가로서도 훌륭하였지만, 개업 의사로서도 유복한 삶을 누렸다.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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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6 17:0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7) 서정성 높은 동양적 휴머니즘의 시인, 최학규

최학규 시인 시인은 50대 중반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절실했다. 당시 익산에는 남풍이라는 시 동인회가 있었는데, 시인은 이 동인회에서 좌장을 맡기도 했다. 대부분 현직교사인 그들은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한 사람도 빠지지도 않고 모두 나와 활발하게 시와 문학을 논의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식탁엔 아침부터 메뉴에도 없는 피곤이 오르고, 그대와 나 말없이 담배만 피우며 끄며 얼핏 보면 일상에 지친 나른한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그들은 당시 아름다운 토속어가 많이 죽어버린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자고 다짐하곤 했다. 시인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킨 향토 시인으로 동양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정의 농도를 짙게 풀어 쓴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시인이 태어난 곳, 청하는 김제, 군산, 익산과도 가까운 곳이어서 시인은 이 세 지역을 활발하게 오가면서 문학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청송(靑松) 같은 의지로 작품을 쓰는데 열정을 다하였다. 만년에는 김제 청하를 떠나 인근 군산시 성산면 나포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썼다. 시인은 1962년 3월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이사로 선출되어 전북 문단 활성화에 이바지하였고, 1965년 3월에는 김제 최초의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신석정 시인이 직접 발문을 써 준 처녀시집, 『길』을 출간하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66년에는 제2 시집 『빛과 사랑의 시』을 출간했다. 홍석영은 발문에서 그의 시를 세정(世情)에 조련찮은 시인의 생리로 하여 산고를 겪으면서 인간의 절실한 내적 필연성에서 움트게 된 생명의 소박한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시인은 1970년 11월 한국문협 김제지부를 창립하면서 초대지부장으로 선임되어 김제 문단 활성화와 김제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0년에는 시집 『모과』를 냈고, 1971년에는 시집 『우러러 사는 풍토』와 채규판, 강상기 시인과 함께 3인 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하였고, 1975년에는 여섯 번째 시집 『3월의 모음(母音)』을 출간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적 태도는 첫 시집에서 여섯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다. 특히 그의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보듯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신만의 삶을 가꾸려고 한 것 같다. <전략> 어디를 가나 흙내를 풍기지만 흙을 외면할 순 없으리라. 산을 배경으로 영토는 넓고 <중략> 죽음과 영원과 사랑의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나를 결실하며 우러러 한없이 열린 길을 나두야 나만큼은 열고 간다. -최학규 「자화상」에서 시인은 멀리 산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평야의 흙내 풍기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과 영원과 사랑의 섭리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한순간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시인의 삶은 항상 경건하였으며, 주어진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배경에 담긴 현실을 받아들였고, 또 그 문제를 확인하여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고자 하였다. 특히 시인과 함께 공동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한 채규판(원광대 명예교수)은 「고산 최학규 선생을 생각하며」 (전북문단 통권 제7호, 1990)에서 그의 시를 평가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 쓰는 데 몰입하였고 항상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진행하였다. 시인의 시에는 어떤 게으름과 오만함도 없었으며, 한순간도 심미적 자아 성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렇듯 시인은 항시 맑고 깨끗해지려고 노력했고, 아름다운 것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늘 고독하기도 했지만, 시인은 시를 통하여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기에의 지향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나는 그 많은 허물을 벗고 객관적으로 서면 나무가 된다. <중략> 벼랑에 서도 바위를 애착하며 인간에 몰리어도 人形을 사랑하며 모연이 자욱한 날에도 미소를 피우며 해가 기울어도 기도(祈禱)의 자세는 수직(垂直)으로 영원의 가지에 단풍(丹楓)이 들면 나는 견고(堅固)한 나목(裸木)이 된다. -최학규의 「견고(堅固)한 나무」의 일부 시인은 어느 때나 생각이 분명하고 뚜렷했던 것 같다. 원래 인간적 질서에의 회귀라는 말은 인간 본질에 관한 확인일 것인데, 시인에게 시는 언제나 매우 정직한 도전의 과정이었다. 시인은 이렇듯 한결같이 견고(堅固)한 나무로 우리 곁에 서고자 하였다. 시인은 1971년 11월에 제5집을 『우러러 사는 풍토』를 낸 뒤, 3년간 쓴 작품 중에서 새로 66편을 골라 시집 『3월의 母音』을 내면서 그 서문에서 파고들어 시의 바탕은 따뜻하고 싶다. 원래 고독한 인생은 더욱 따뜻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심에서이리라라며 한순간도 새로움을 궁구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대가 달라졌다 시대를 따라가기도 바쁘다 이런 의미에서도 젊고 싶다 세월은 가는데 낡은 것은 싫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도 시는 새롭고 싶다. -최학규의 『3월의 모음』 서문에서 이렇듯 시인은 어떤 시기나 관점에 고착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이런 태도는 시를 쓰는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최학규 시인 시인은 원광대 채규판 교수와 아주 각별하였던 것 같다. 그와 만나면 밤을 새워 시와 문학을 논했다고 전해진다. 1975년 추석을 앞두고 시인은 그와 만나기로 했다. 시인은 그를 만날 기쁨에 아침부터 서둘러 농약을 하다가 그만 농약 중독사고를 당했다. 결국, 시인은 유명을 달리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채 교수는 매우 놀라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시인과 공동시집을 낼 만큼 가깝게 어울렸던 채 교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채 교수는 시인을 시를 천직(天職)이라고 뼈아프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시인이라면서 시인의 시에는 최소한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삶에 있어서 긍정의 방법을 선택해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라고 했다. 시인은 그렇게 떠났지만, 그를 따르던 동료와 후생들은 시인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1년 11월, 김제시 교동 성산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天門冬(천문동) 푸른 골짝을 은하가 이어 흘러 내 가느단 血管(혈관)에도 푸른 물소리 스며 든다. 七層塔(칠층탑) 감고 넘은 검푸른 하늘에는 상기 푸른 입김이 서려 있어라. 沈默(침묵)과 더불어 자리하신 부처 앞엔 念佛(불념)도 되려 俗(속)된 푸념 같아 머리끝까지 젖어드는 木鐸(목탁) 소리에 차리리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古山의 시 「금산사」 전문 시인은 우리에게 동양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자연 친화적 일체감을 노래한 시인, 그리고 서정성 짚은 작품을 통해서 많은 공감을 준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필자는 최학규 시인을 추적하면서 시인의 동향인(同鄕人) 최현호 씨가 시인과 관련된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권의 일기와 세 권의 미발행 친필시집, 그리고 많은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1929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과 사회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기와 미발행시집 <창작시집>, <불평을 노래합시다>, <고산시선> 등이다. 이 자료들은 곧 우리 문단에 공유되어 최학규 시인의 삶과 문학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현호 씨에게 거듭 감사드리며, 머지않아 전라북도문학관에서 최학규 시인의 문학이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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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3 17:5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6) 광활한 우주 속으로 들어간 천재 시인, 박정만

박정만 시인 시인은 1946년 8월 26일, 전북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5년, 시인은 경희대학교 주최 고교생 백일장에서 시 「돌」로 장원으로 뽑혔다. 1967년에는 경희대학교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대학 1학년 때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1972년에는 문화공보부 문예 작품 공모에서 시 <등불설화>와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시인은 학원문화사ㆍ중앙문화사 등의 출판사와 월간문학, 어깨동무 등의 잡지사에서 근무하였고, 1980년에는 고려원의 편집부장이 되었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잠자는 돌』을 낸 이래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서러운 땅』, 『저 쓰라린 세월』,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혼자 있는 봄날』, 『어느덧 서쪽』, 『슬픈 일만 나에게』 등의 시집을 냈고, 유고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시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시인은 1981년 5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시인은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동안 유령처럼 누워서 지내다가 집을 뛰쳐나와 유랑하는 등 시인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보안사에서 당했던 치욕의 순간을 잊기 위해 밤낮 술독에 빠지면서 더 큰 고통에 휘말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던 날, 시인은 제목도 없는 다음과 같은 2행짜리 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좋은 시를 열심히 썼던 시인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의 사인(死因)은 간 경화였지만, 그의 죽음은 1981년의 한수산 필화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아무 죄도 없는 한 시인이 이렇게 참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이는 무도한 역사가 빚어낸 재앙이었다. 당시 한수산은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1970년대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을 통속적으로 그려냈는데, 다음과 같이 군(軍) 관련된 언급이 있었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이것이 당시 군사정권의 수뇌부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을 자신들의 정권을 모독하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군 보안사(당시 사령관은 노태우였다)에서는 한수산과 중앙일보사의 문화부 관련자 손기상, 권영빈, 정규옹, 이근성, 그리고 여기에 의외의 인물 박정만을 잡아갔다. 시인과 한수산은 서로 잘 알지 못했다. 보안사에서 한수산에게 연루자를 대라며 윽박지르자 박정만의 이름을 댄 것이다. 한수산은 시인과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금방 풀려날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사도 하지 않고 시인을 극악무도하게 짓밟아 버렸다. 정치도, 권력도, 이데올로기에도 관심이 없었던 시인에게는 매우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시인의 영혼은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시인의 첫 시집은 1979년 12월 고려원에서 낸 『잠자는 돌』이다. 이 시집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국적 서정이 잘 드러났다는 평가다. 김재홍은 시평에서 소멸과 애환의 표층 정서와 순결한 생명력과 부활 의지라는 심층구조로 이루어진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 시집의 비극적 현실은 어둠으로 표상되고, 어둠의 종결은 죽음의 세계로 귀착된다.라고 했다.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중략-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감고 천 년을 깨어 있는 봉황(鳳凰)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禪) 모양으로. -박정만의 시 「잠자는 돌」의 일부 첫 시집의 표제작 「잠자는 돌」에는 그의 비극적 종말을 예감한 듯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라고 읊더니, 그렇게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인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시인을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고 불렀다. 이혼 후, 세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압박이 대단했을 법한데, 시인은 돈 버는 일보다 술 마시고 시 쓰는 일에 더 신명을 냈다. 황동규 시인은 박정만의 시선집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에서 시인의 문학을 서정적 서정시라고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포괄적 역설 혹은 포괄적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의 시 「저 강물 속으로」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참다운 삶으로 변모하려는 기원이 담겨 있다. 그런데, 막상 이어지는 표현 강물 속으로, 푸른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고 싶다에서와 같이 포괄적 역설 기법을 썼다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에서 문성재 쪽으로 몇 마장쯤인가 들어가면 무릉도원이라는 곳이 있다. 무릉이라는 마을과 도원이라는 마을이 한 마장쯤 격해 있는데, 구불구불한 산굽이를 타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 속으로는 가을 강의 단풍들이 어지러운 색동저고리처럼 갓을 펴고 있었다. 아, 나는 살고 싶다. 저 강물 속으로, 푸른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고 싶다. -「저 강물 속으로 」 전문 시인의 삶에는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 외에도 1987년에 쓴 시 300편 사건이 있다. 시인은 1876년 여름, 20여 일 동안 술독에 빠져서 연달아 300편의 시를 정신없이 썼는데, 이는 그때까지 자신이 써온 시보다 더 많은 숫자다. 시인은 시를 쓴 후, 날짜와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 이는 술에 취한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얻고, 마치 접신(接神)의 경지에서 시를 쏟아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떨어진 단추처럼 헌 고무신처럼 메마를 땅으로 자꾸만 흘러간 목숨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피리어드 찍듯이 그렇게 흘러간 목숨 외씨버선으로 고리짝에 눈깔만 남아. -「흘러간 목숨」(1987년 9월 9일 새벽 5시 30분) 하루에도 몇 수씩 시를 썼지만, 이때 시인은 자신의 삶을 피어리드(마침표) 찍듯이 그렇게 흘러간 목숨으로 보았다. 마치 다가올 죽음을 예감이라고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그의 초기의 시는 기존 작가들의 시류와 비슷했지만 한수산 필화사건 이후에는 서서히 다가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한 듯, 직설적으로 죽음을 언급했다. 간이 점점 무거워 온다 검푸른 저녁연기 사라진 하늘 끝으로 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 하루내 내 울음을 대신 울다 갔다. -「죽음을 위하여」 일부- 그해 10월 2일 일요일 오후 서울올림픽 폐막식이 있던 그 시간에 시인은 아무도 없는 봉천7동 연립주택 1층, 시인의 집에서 홀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가 운명한 시간은 세 자녀도 모두 집을 비운 상태여서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메아리도 살지 않은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 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녹을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산 아래 앉아」 전문 이 시는 시인의 고향 내장산 호수 옆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다. 메아리도 살지 않은 산은 어디이며, 그리운 이의 이름은 누구일까. 그리고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인의 한(恨) 많은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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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9 18:2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5) 올곧은 선비, 작촌(鵲村) 조병희의 삶과 문학

작촌(鵲村)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가 올해로써 열아홉 해가 되었다. 그런데도 선생에게 붙은 많은 수식어와 함께 전북의 큰 어른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망백(望百)에 이르도록 그는 한순간의 정체도 없이 시조 시인, 한학자, 서예가, 향토사학자, 고서 수집가 등으로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지켜냈고, 청무성(廳無聲, 소리 아닌 것을 듣지 말라)의 올곧음으로 진실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국권침탈이 되던 해, 1910년 11월 23일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 기슭 까치말에서 태어났다(선생이 출생 당시에는 이 지역은 전라북도였음). 선생의 호 작촌(鵲村)은 고향마을 이름인 까치말의 한자음을 쓴 것이다. 네 살 무렵 부모를 따라 전주로 옮긴 후, 전주고등보통학교(현 전주고의 전신)에서 공부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관촌과 전주의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였고, 양봉사업을 벌여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방의 인정과 풍속, 생활상을 견문하기도 했다. 선생은 평소에 문학과 역사, 한학(漢學)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은 집안의 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대로 내려온 선비 집안에다가 선생의 외삼촌이었던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선생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조부이신 소암공(小巖公)으로부터 천자문과 소학, 논어를 배우고 글 쓰는 법을 익혔다. 소암공(小巖公)은 남다른 열정으로 손자의 교학에 열정을 쏟으셨다고 한다. 근엄한 소암공(小巖公)은 작촌(鵲村)이 공부에 태만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이에 상응하는 편달(鞭撻)을 감수하도록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스승이면서 조부에게 배운 한문은 훗날 선생이 한시와 서예, 한학을 연구하는 큰 힘이 되었다. 전국을 돌며 양봉사업을 할 때부터 지은 한시(漢詩) 500여 편에서 180여 수를 골라 선생의 나이 아흔에 『작촌(鵲村) 한시집』 (신아, 2000)을 낸 바 있다. 또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사랑하여 육순이 넘은 1978년에 『현대문학』지에 박병순, 정소파, 이태극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1989년에는 시조집 『새벽 까치소리』에 이어 『해거름에 타는 꽃불』(이삭, 2002년)을 출간했다. 선생의 시조는 시조의 정형성을 고수하면서 고향과 문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회 등을 정갈하게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한학(漢學)과 더불어 서예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서(書)는 예(藝)가 아닌 도(道)이다라는 일관된 생각으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전념하였으며, 특히 작촌의 초서(草書)는 매우 유명하다.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와 서예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1999년에는 평생에 걸쳐 수집한 고문서, 향토사 및 문집, 서예 등 2,300 여권의 고서를 우석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사랑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 지역의 각종 비문, 잊힌 지명과 위치를 고증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특히 문화재 감정 및 향토사학자로 향토문화 발굴 및 보존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풍남문 완산종복원위원으로 종기(鐘記)를 쓰고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으로 명명하도록 자문하였으며, 향토 사학 자료를 발간하여 『완산(完山)고을 맥박(脈搏)』(탐진, 1984)을 출간하였고, 전주, 완주를 중심으로 읍지(邑誌) 및 군지(郡誌) 발간에 도움을 주었고 만민의총 충열사 비문과 임란공신 조경남, 의사 황대연의 비문을 짓는 등 향토사학자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선생은 살아계실 때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선생의 꿈은 미술학도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 미술학교로의 유학의 뜻을 세웠지만, 어려워진 집안 형편 탓에 포기하고 대신 취직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선생은 그 이상의 꿈을 이루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패기 있고 강직한 성품의 선생은 당시 우리 민족의 울분과 한(恨)을 문학과 서예, 그리고 서화(書?)로 달랬다. 작촌(鵲村) 선생도 한때는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였지만, 문학과 역사에 대한 내면의 열정은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평생의 글쓰기와 역사연구는 선생으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선생의 3남 조정형 (전통명주 이강주(李薑酒)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유품 중 필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은 선생께서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쓰셨다는 일기장이었다. 수십 권의 일기장에 빼곡하게 담겨 있을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자세, 가풍을 잇고 세상을 걱정하는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작성한 『작촌 조병희 생애록』과 「작촌 자작 행록」에는 선생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리고 선비로서 강개한 기상을 가지고 살아오셨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맴돌다가 넘어져도 멈출 수가 없는 독백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이 침잠한 밤거리에서 컹컹 짖는 수캐마냥 삭정이로 둥지 틀어 까치말로 호를 하니 가죽나무 가지 높아 첫 고동에 트는 여명 봄소식 알리고파서 새벽녘에 깍깍 소리 -조병희 「자화상」 전문 이렇듯 선생은 첫 새벽, 동트는 골목에서 봄소식을 알려주는 까치처럼 고고한 선비로서 시조와 한시 창작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세계를 확장해 주었으며, 내 고장의 역사와 이웃들의 삶을 조명해 줌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내일을 여는 지혜를 꾸준히 일깨워 주었다. 조정형 회장은 지금도 다가동 고택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령 100년이 넘는 모과나무가 우뚝 서 있는 이 집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마다 이 집에서는 직접 장만한 음식과 술을 나누면서 문학과 예술, 역사 이야기로 날 새는 줄 몰랐다고 한다. 특히 그때 곁들인 술은 선생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가 있었는데 그 맛과 향기가 아주 특별했다. 그것이 오늘날, 잘 알려진 전통명주 이강주(李薑酒)의 기원이 되었다. 이강주(李薑酒 배와 생강을 재료로 하여 빚어낸 전통명주인데, 대한민국의 대표브랜드가 되기까지에는 선생의 3남 조정형 회장의 집념과 뚝심의 결과라고 한다. 작촌(鵲村) 선생을 비롯한 가족들은 선비 집안에서 술을 만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형 회장은 아버지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것처럼, 명주 이강주(李薑酒)를 만드는 일이 가문의 전통과 뜻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1993년 KBS 드라마 『그 집에 술이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국에 알려지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촌(鵲村) 선생은 2001년 향토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원로에게 헌정하는 <전북의 어른 상> 제1회 수상자이다. 이 상은 KBS 전주방송총국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마련한 행사로 평생 향토와 나라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전북의 원로를 찾아 그 업적을 선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당시 KBS 전주방송총국은 작촌(鵲村)의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촌(鵲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또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와 전통명주 조정형 회장은 작촌(鵲村)의 올곧은 인생관과 열렬한 향토애, 지고한 인품, 꿋꿋한 선비정신을 기리고, 회원들의 창작 열정을 높이기 위해서 2002년 전북펜작촌(鵲村)문학상을 제정하여 격년제로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작촌(鵲村) 선생은 아흔두 해 동안 세상과의 인연을 접고, 2002년 12월 17일 숙환으로 영면하셨다. 선생의 올곧은 성품과 청정한 삶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이 크게 애통해했다. 다음 시는 선생께서 숙환으로 입원하고 계실 때 쓴 것으로, 이 세상과 하직한 날 선생의 손자가 낭독했던 「병석에서 보는 TV 영상」이라는 시다. 불면증이 두려워서 낮잠을 물리치고선 TV 영상 앞에 엇비슷 기대앉아 불 뿜는 운동경기에 쏠려 드는 눈정기 스스로 격동되어 주먹을 쥐어도 보고 고조된 응원 소리에 덩달아 열을 올리곤 슬며시 다가온 졸음 잠을 청해 보리라. -작촌 선생 영결식장에서 손자가 올린 시 조병희 작 전문 작촌(鵲村) 선생은 때로는 강직함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일깨웠고, 때로는 따뜻한 격려와 관심으로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누구보다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고, 우리 고장의 역사를 사랑했다. 한평생 시대의 올곧은 선비의 표상으로 전북의 정신을 일깨우고 전북의 긍지를 높여 주었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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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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