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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호서 지역의 마한

마한의 공간적 범위는 대체로 경기충청전라지역에 해당되는데, 각 지역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문화적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따라서 마한 영역의 축소를 의미하며, 결국 점진적으로 마한 정치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정치적 변혁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충청지역 즉 호서지역에서는 마한의 보편적인 분구묘와 계통이 다른 주구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어 호남지역의 마한문화와 다른 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 호서지역의 보령 관창리에서 발견된 주구묘(분구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구묘 유적으로서 학사적인 의미가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종류들이 송국리형 토기, 원형점토대토기, 두형토기,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간에 상호 관련성을 가지며, 그 시기를 기원전 3〜2세기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발견 당시 대부분 연구자들은 관창리유적의 주구에서 발견된 송국리 토기에 대해서 교란되었을 것이란 견해에서 그 시기를 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분구묘에서 점토대토기편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어 그 시기를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주구묘는 마한의 보편적 묘제로서 대형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천안의 청당동유적에서는 주구묘와 같이 주구가 굴착된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마한의 분묘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주구토광묘는 공주시와 연기군, 청주일대에서 그 발견 예가 증가하고 있다. 주구의 형태는 대부분 눈썹 형태로 경사의 위쪽에서 매장부 시설인 토광을 감싸고 있지만, 청주 송절동이나 공주 하봉리에서는 토광을 거의 두르듯이 감싼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편 주구토광묘의 매장부인 토광은 주구에 비해 매우 깊게 굴착되어 있는데, 이는 주구묘의 매장부가 토광일지라도 분구 중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주구토광묘의 출토유물은 원저단경호와 심발형토기를 기본적인 셋트로 하지만, 장신구류인 청동제 곡봉형대구(曲棒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그리고 유리제 구슬 등이 부장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천안 청당동에서 출토된 두 종류의 청동대구(帶鉤)에 대한 분석결과 중국 북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임이 밝혀져 대외교섭의 근거로 보았다. 곡봉형대구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서진시기까지 폭넓게 발견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분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호형(虎形)이나 마형대구는 청원 오창, 영천 어은동, 경주 사라리, 김해 양동리와 대성리 등의 목곽묘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적 범위를 통해 중국 북부 ⤍ 낙랑 ⤍ 호서지역 ⤍ 영남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화의 전파 루트나 유이민의 이동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진한전의 기록을 보면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할애해 주었다라는 내용과 더불어 언어 역시 마한인과 다르며 진인(秦人)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기」와 「후한서」에서도 위만의 망명기사와 더불어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통제가 불가해지자 많은 유이민이 한으로 건너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진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많은 유이민의 이입은 물론 물질적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진국(秦國)에도 주구토광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는 위구묘(圍溝墓)가 축조되고 있었다. 따라서 호서지방의 주구토광묘 축조집단의 뿌리는 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유이민과 깊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의 마한세력은 재지전통이 강한 주구묘 축조집단과 유이민집단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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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25 20:26

[최완규 교수의 '마한 이야기'] –마한역사 기록관 '나주 복암리 3호분' (상)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몇 년전에 KBS의 역사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 “아파트형 고분”으로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그것은 하나의 분구(墳丘) 내에 41기의 매장(埋葬)시설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중층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잘 묘사한 제목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복암리 3호분은 마한 분구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마한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곧 혈연을 기반으로 하나의 분구 내에 무려 300〜400년의 시간 폭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매장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장부의 구조가 변하고 있는 점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마한의 정치 사회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서 가히 ‘마한역사 기록관’ 또는 ‘마한 박물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주변의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7기가 자리잡고 있어서 七造山이라 불렸으나 경지정리 과정에서 3기는 훼손되고 현재는 4기만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대형 분구묘가 저평한 구릉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치 산으로 보였던 것으로 이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이라는 의미에서 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은 1996년에서 1998년에 걸쳐 전남대학교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조사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점인 1998년 2월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적 404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의 분구 규모는 동서 36m〜38m, 남북 37m〜42m, 높이는 6m 정도이며, 평면 형태는 방대형을 이루고 있다. 분구의 하단 주위에는 주구가 돌려져 있는데, 경작으로 인하여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이와 같이 거대한 분구를 갖추게 된 것은 오랜 기간 매장이 이루어지면서 평면적으로 확장되고 상하로 중첩이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된다. 곧 조사 결과에서 확인된 분구 조성이전의 선행기와 분구 조성은 2차에 걸쳐 이루어진 3단계를 거친 것으로 층서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또한 각 단계마다 매장부의 구조에 따라 다시 2〜3단계로 세부적인 분기 설정이 가능하였다. 선행기는 방대형 분구 조성 이전에 사다리 모양의 분구묘가 주구를 통해 확인되는데, 매장 시설로는 옹관과 목관이 사용되었다. 방대형 분구 조성 1기는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 확대하여 축조한 것으로 기존의 분구형태를 유지하면서 주구 및 옹관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1기 분구 조성과 함께 안치된 매장시설은 96석실, 수혈식석곽, 옹관 등이다. 분구 조성 2기에는 방대형 분구 완성이후, 성토층을 되파기하여 묘광을 설치한 후 옹관, 횡혈식석실, 횡구식석실, 석곽옹관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보이고 있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분구 축조과정 및 매장시설에서 마한 분구묘의 속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성격을 규명함으로서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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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9 11:3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역사 기록관 '나주 복암리 3호분'(하)

나주 복암리 3호분이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이유는 하나의 분구 내에 400여년 정도 지속적으로 매장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매장부의 유형 변화를 통해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대형분구 축조 이전의 3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이르는 선행기에는 난형(卵形) 몸통의 목이 좁은 형태에서 U자형 대형옹관으로 변화된 옹관이 주요 매장부로 채용되고 있다. 이 시기는 영산강유역의 연맹체 세력들이 백제의 영향력에 압박을 받으면서 새롭게 결집성장하는 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Ⅰ기는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에 해당하는데,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확대하여 방대형 분구를 축조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96석실은 공주지역의 백제 석실분과는 입지, 평면형태, 축조방법과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 구주지역과 교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위 영산강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실 내에 시기차를 두고 안치된 4기의 옹관의 존재는 전통적인 옹관과 외래의 석실이 결합된 양상으로서, 이는 옹관을 주요 매장시설로 이용하던 마한세력이 석실분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정세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틈타 영산강유역의 마한 세력이 대외교섭을 통한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석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96석실 내의 2호 옹관에서 출토된 금은장삼엽환두도(金銀裝三葉環頭刀)를 통해 피장자의 신분이 지배자 계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4호 옹관은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과 달리 생활용기로 사용되던 회청색 경질의 호형토기이며, 4기의 옹관 가운데 가장 늦게 안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옹관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통하고 있어 Ⅰ기의 마지막 단계로서 백제의 지방통치와 관련된 단서가 되고 있다. Ⅱ기에는 본격적으로 백제계의 횡혈식석실분을 매장부로 채용하는 단계인데,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는 석실이 정형화소형화되는 사비유형이 주를 이루지만, 긴 묘도와 연도의 시설에서 전형적인 사비유형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채택하고 있었던 영산강식 석실의 속성이 가미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복암리 3호분 축조집단이 사비유형의 석실분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증거가 된다. 이 단계의 사비유형 5호 석실에서는 관모틀과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유물은 백제 고지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 은제관식은 중국 역사서인 「周書」에 보면 백제의 16관등 가운데 6품인 나솔(奈率) 이상의 관인이 착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은제관식을 착장하고 있었던 피장자는 복암리 3호분 축조집단에서 배출되었던 중앙관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하게 편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산강유역의 마한계 집단도 백제 중앙관리로 진출하여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나주 복암리 3호분은 3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연맹체세력들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갔는지 보여주는 기록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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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8 17:37

[최완규 교수의 '마한 이야기'] 마한역사 기록관 '나주 복암리 3호분' (상)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몇 년전에 KBS의 역사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 아파트형 고분으로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그것은 하나의 분구(墳丘) 내에 41기의 매장(埋葬)시설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중층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잘 묘사한 제목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복암리 3호분은 마한 분구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마한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곧 혈연을 기반으로 하나의 분구 내에 무려 300〜400년의 시간 폭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매장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장부의 구조가 변하고 있는 점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마한의 정치 사회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서 가히 마한역사 기록관 또는 마한 박물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주변의 경지정리가 되기 이전에는 7기가 자리잡고 있어서 七造山이라 불렸으나 경지정리 과정에서 3기는 훼손되고 현재는 4기만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대형 분구묘가 저평한 구릉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어서 마치 산으로 보였던 것으로 이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이라는 의미에서 조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은 1996년에서 1998년에 걸쳐 전남대학교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조사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점인 1998년 2월에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적 404호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의 분구 규모는 동서 36m〜38m, 남북 37m〜42m, 높이는 6m 정도이며, 평면 형태는 방대형을 이루고 있다. 분구의 하단 주위에는 주구가 돌려져 있는데, 경작으로 인하여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이와 같이 거대한 분구를 갖추게 된 것은 오랜 기간 매장이 이루어지면서 평면적으로 확장되고 상하로 중첩이 이루어진 결과로 판단된다. 곧 조사 결과에서 확인된 분구 조성이전의 선행기와 분구 조성은 2차에 걸쳐 이루어진 3단계를 거친 것으로 층서관계를 통해 파악되었다. 또한 각 단계마다 매장부의 구조에 따라 다시 2〜3단계로 세부적인 분기 설정이 가능하였다. 선행기는 방대형 분구 조성 이전에 사다리 모양의 분구묘가 주구를 통해 확인되는데, 매장 시설로는 옹관과 목관이 사용되었다. 방대형 분구 조성 1기는 선행기의 분구를 조정 확대하여 축조한 것으로 기존의 분구형태를 유지하면서 주구 및 옹관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1기 분구 조성과 함께 안치된 매장시설은 96석실, 수혈식석곽, 옹관 등이다. 분구 조성 2기에는 방대형 분구 완성이후, 성토층을 되파기하여 묘광을 설치한 후 옹관, 횡혈식석실, 횡구식석실, 석곽옹관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보이고 있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은 분구 축조과정 및 매장시설에서 마한 분구묘의 속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성격을 규명함으로서 마한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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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1 16:4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유통의 거점 '부안 백산성'2

인류는 생존과 편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왔을 것으로, 그들이 남겨놓은 유적의 주변 환경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생활의 터전인 집자리는 우선적으로 자연의 재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선택하여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죽음의 공간에 해당하는 분묘를 축조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를 선택하지만, 그 집단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통이나 사상 등이 반영되는 지리적 선택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종류의 유적들은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형성되는 것이 보편적 현상이며, 이를 유적 경관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유적 경관은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부안 백산성 역시 이러한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백산성의 주변은 내륙에서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하고, 남북으로는 고부천과 동진강이 감싸고 흘러 서해로 통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유적 경관의 관점에서 보면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매우 적합한 위치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의 수로교통과 관련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현 산천조에 주목되는 기사가 보인다. 그 내용을 보면 백산성에서 서해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東津이 위치하는데 이를 通津이라고도 하며, 벽골과 눌제의 물이 합쳐져 북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되는데, 현에서 16리에 있다.라 하여 김제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로 통하는 수로임을 밝혀주고 있다. 특히 동진을 통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점은 발음에서 유사성도 있지만, 통진이라는 명칭은 사방으로 통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곧 유통의 거점으로서 적합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8년도의 1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3, 4중의 환호는 정상부의 건조물 유구들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적이나 도적, 혹은 다른 동물들이 정상부까지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시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상부에는 보호해야 할 특별한 시설이나 물건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 유통이나 중앙으로의 운반을 위한 잉여 농산물의 보관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여러 종류의 곡물류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한편 백산성의 축조 집단이나 그 시기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마한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같은 기종으로서 제작기법이 동일한 자배기나 장란형토기 등은 백산성이 3세기말에서 4세기 전반경에 마한세력에 의해 축조된 유적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백산성의 축조연대는 인근 벽골제나 마한 분구묘 유적인 지사리 고분군과 동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마한유적이 발견되는 일정한 공간적 범위 내에서 이와 같이 다양한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유일한 지역이 바로 동진강유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진강유역의 유적경관은 마한 제소국의 당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으며, 백제시대 지방통치의 중요 거점이었던 중방 고사성(中方 古沙城)이 설치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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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4 19:0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유통의 거점 '부안 백산성' 1

사적 409호 백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은 표고 47.4m의 높지 않은 구릉이지만,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먼 거리까지 조망하는데 매우 좋은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쪽으로는 인접해서 직강화가 이루어진 동진강이 서해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직선거리 1.6km 정도 떨어져 고부천이 서해로 흘러들고 있다. 또한 이 유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고부, 동쪽으로는 신태인, 북쪽으로는 김제로 통하는 육로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고, 서쪽으로 동진강과 고부천을 통해 서해로 통하기 때문에 해로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 전개과정에서 지원군으로 바다를 건너온 왜군을 의자왕의 아들인 풍장왕(豊璋王)이 직접 백촌(白村)에 나아가 맞으리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보이는데, 백촌이 바로 백산성에 해당한다. 또한 백산성의 정상부 평탄지대에는 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1984년 갑오동학 농민전쟁 당시에 동학군이 혁명의 기치를 들었던 이른바 백산기포(白山起包)의 역사적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죽창을 들고 이곳 백산으로 모여들었던 흰옷 입은 농민들의 당시 상황을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는지 짐작된다. 이와 같이 백산성이 백제 부흥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백산성은 백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064m에 달하며 평면 장축 길이는 358m, 폭 230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3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당초 예상되었던 백제시대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1차 조사에서는 정상부에서 원삼국시대 집자리 1기와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청동기시대의 유물포함층과 방어시설로 판단되는 3중의 다중환호가 경사면을 따라 굴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차 조사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7기, 시대미상의 석관묘 1기, 구상유구와 주혈군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완, 발, 장란형토기, 시루, 주구토기 등 자비용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방추차, 철도자, 옥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자연유물로는 쌀, 밀, 보리, 조, 콩, 팥 등의 탄화작물종자와 다양한 잡초종자, 동물의 뼈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곡물류는 이곳이 바로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한편 2차 조사의 주거지 4기에서 나온 탄화작물과 1차 조사에서 출토된 탄화 목제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북서쪽 주거지들은 2세기 전반에서 3세기 전반에 해당하고, 남동쪽에 밀집된 주거지의 연대는 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중반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인근에 위치하는 벽골제의 초축연대나 영원면 일대의 분구묘 연대와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특히 3차 조사에서는 해발 39-43m에서 4중의 환호가 확인되었고, 그 가운데 2호와 3호의 환호 사이 해발 약 42m에서 2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사적 제409호 백산성의 성격은 백제시대의 태뫼식 산성이 아니라 환호로 둘러싸인 유통의 거점과 같은 특수목적의 유적으로 재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최 완 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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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8 19:3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

왕과 왕비가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고고유물 가운데 최고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지역에서는 이러한 금동관이 당시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지역에서, 그것도 왕릉이 아닌 분묘에서 그 출토예가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 요리 목곽묘,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목곽묘, 서산 부장리 분구묘, 익산 입점리 석실분, 고흥 길두리 석실분, 나주 신촌리 분구묘 등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백제지역에서 금동관이 출토되는 분묘 양상은 익산 입점리를 제외하면 중앙 지배세력의 묘제와 다른 다양한 유형의 분묘라는 점에서 각 지역별로 분묘 전통이 다른 토착세력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금동관이 출토된 분묘들은 한성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어서 당시의 백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한 변이 3530m, 높이 5.5m의 방대형 분구묘로서 분구 내에 상하 이중으로 12기의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부로 안치하고 있다. 그 중 을관(乙棺)에서는 한국 최초로 고대국가의 금동관이 부식되지 않고 거의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한편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한 전면 재발굴을 통해 분구의 축조기법을 살필 수 있었고, 분구 중에 열을 지어 돌려 세워놓았던 원통형 토기가 확인되었다. 신촌리 9호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25.5㎝로서 관모와 대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관모의 전체적인 형태는 2장의 금동판을 겹쳐 둥글게 감싸 덮은 후, 각각 4개의 원형머리를 가진 못으로 고정한 고깔 형태이다. 좌우 측판에는 연꽃과 넝쿨무늬, 그리고 파상문을 타출(打出)기법으로 전체적인 문양을 표현하였다. 금동대관은 둥근 테에 앞쪽과 양 측면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장식을 세운 형태이며, 영락과 유리구슬을 달았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금동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나주 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론이 분분한 편이다. 다만 이러한 금동관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과 공반되는 유물이 장식대도나 중국제 청자 등 위세품이란 점에서 백제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사여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에 비해서 금동관의 기본 형태나 문양수법에서 공통점이 많아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신촌리 금동관을 중앙에서 하사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4〜5세기의 지방통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곧 담로제나 왕후제(王侯制)에서 작위를 받은 지방세력들이 금동관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영산강유역의 마한 유적에서는 가야나 왜 등 대외교섭이 활발한 증거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금동관이 출토된 다른 지역에 비해 백제 중앙과 관계 속에서 좀 더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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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1 19:47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국제성

고창 봉덕리 일대에는 대형 분구묘 5기 외에도 많은 수의 마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어서 이곳을 중심으로 마한 「모로비리국」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아산-고창간 지방도 확·포장 공사구간에서 발견된 봉덕유적은 추정 방형분 1기와 주구 6기, 인근 구릉의 사면에서 52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 조사된 만동유적에서는 봉덕유적보다 이른 단계에 해당하는 분구묘 13기, 단독묘 4기 등에서 환두도와 철부 철모, 그리고 다양한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봉덕리 1호분은 발굴조사 결과 파괴된 석실 내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신발편과 특히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금동신발을 비롯한 화려한 위세품을 통해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구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5기의 석실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4호 석실에 부장되었던 중국제 청자와 소호장식광구호(小壺裝飾廣口壺)는 모로비리국의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서로 주목된다.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는 석실의 남동 모서리에 뒤집어져 있던 토기 항아리와 같이 세워져 놓여 있었다. 이 청자는 높이 36.8cm 로서 아가리가 작은 쟁반과 같은 반구호(盤口壺)로서 최대 너비를 이루는 어깨에는 6개의 고리가 부착되었다. 각을 세워 만든 고리는 횡으로 2개를 한조로 반대편에 대칭으로 부착하고 그 사이에는 동일한 형태의 1개씩의 고리를 역시 대칭으로 부착하였다. 시유된 유약은 녹황색의 탁한 색조를 띠면서 거친 편인데, 동체부 하단에서 바닥까지는 시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리 모양을 특징으로 하는 반구호는 중국에서는 동진 말기에서 남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호장식유공광구소호는 석실 내의 남벽 중앙에서 호와 받침이 한 세트를 이루고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출토된 예이다. 아가리가 넓은 호의 어깨에는 형태가 동일한 4개의 작은 광구호를 부착하고 하나의 구멍을 뚫고 있으며 둥근 바닥을 가지고 있는데, 높이는 17.4cm 이다. 받침으로 사용된 고배는 높이가 15.0cm로서 배신의 아가리는 넓고 그 아래에 2조의 돌대를 돌리고 그 밑에는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다. 대각은 그리 높지 않으며 세장방형의 투창을 4곳에 뚫고 각 투창 사이의 하단에는 원형 구멍을 뚫었다. 한편 대각의 바닥은 일반적인 고배와 달리 막음 처리를 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토제 구슬이 담겨져 있어 흔들면 방울처럼 소리가 난다. 이러한 형태의 소호장식광구호는 중국에서는 우리엔콴(五聯罐)이라 불리며 청자로 제작된 것이지만, 후지엔성(福建省)민허우 통꺼우산(桐口山) 출토의 동진시대 것과 통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발견된 예를 보면 장식호와 받침인 기대가 부착된 상태로 제작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특히 6세기 중엽이후의 것들은 매우 높은 기대가 부착되어 있다.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에서 발견된 중국 동진대의 청자는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다수 발견 예가 있다. 한편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의 고분시대의 스에끼(須惠器)와 토기제작수법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고창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유물자료를 볼 때, 봉덕리 주변의 마한 분구묘와 집자리를 축조했던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폭넓은 국제적 교류를 통해 백제 영역화 이후까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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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14 17:2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사회를 담은 분구묘

고대국가 권력의 형성과 관련하여 고고학적인 지표로는 성곽의 출현과 거대한 고분의 축조를 통해 설명하곤 한다. 그것은 성곽이나 거대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의 동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예에서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거대 규모의 적석총 축조를, 신라는 적석목곽분의 출현을 국가권력 형성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고대국가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던 마한사회에 있어서도 삼국시대 고분에 못지않은 거대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바로 대형 분구묘가 그것이다. 마한의 이른 단계의 분구묘를 보면 주매장부로서 성인용의 토광을 설치하며, 그 언저리나 주구에 소아용의 옹관이 안치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보면 혈연관계에서 비롯된 가족묘로 판단된다. 다음 단계에는 주매장부의 토광과 비슷한 규모의 매장부가 평면적으로 추가되며 주위에는 주구를 돌려 영역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평면적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는 형태에 따라 분구의 외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분구의 형태가 정형화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한 분구묘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면 주매장부의 시설이 토광에서 대형 옹관이나 석실로 변화가 이루어지며, 분구의 외형도 방형, 원형, 방대형 등으로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분구 내에는 토광과 옹관, 그리고 석실 등의 매장부 시설이 안치되는데, 특히 석실의 경우에는 영산강식과 백제 말기의 석실분이 보인다. 이와 같이 복암리 3호분은 다양한 형태의 매장부가 오랜 기간동안 수평이나 수직으로 확장됨에 따라 분구의 형태가 방대형에 가깝게 재정비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신촌리 9호분과 같이 일정한 묘역의 정형화된 분구를 조성한 후 그 내부에 대형 옹관을 상하 중첩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고창 봉덕리 분구묘는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축조수법과 차이가 있는데, 능선의 끝자락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을 이용해서 먼저 동서 52m, 남북 27m 정도로 깍아서 기저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다시 성토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분구묘 축조 방법은 매장부를 안치하기 이전에 이미 철저한 기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분구 내에 5기의 석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영산강식 석실 뿐 아니라 백제식 석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중앙과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시대의 왕릉과 비교해도 그 규모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마한 분구묘의 축조에서 보면 마한세력도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왜 백제에 복속되었을까? 그 해답은 마한 분구묘와 삼국시대의 거대 고분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마한 분구묘는 혈연을 기반으로 다장이 이루어지면서 대형화가 이루어지지만, 삼국시대의 최고 지배계층의 고분은 1인을 위한 거대 고분이 축조된다는 점이다. 결국 삼국시대의 거대 고분은 권력 집중을 기반으로 축조가 이루어졌지만, 분구묘에서 보이는 마한의 혈연중심 사회구조적인 특징은 마한 정치체가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데 있어서 한계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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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7 17:5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최고의 철기제작 집단 ‘완주 상운리 사람들’

고고학 자료란 당시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직접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문헌자료에 비해 높은 사료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고학 자료는 거의 유일하게 연구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분묘는 구조나 부장된 유물에서 축조 집단의 사상적 측면이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고고학 자료로 취급된다. 완주 상운리 유적은 익산-장수간 고속도로의 나들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2003년부터 4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의 입지환경은 전라북도의 동부산간지대와 서부평야의 접경지대에 해당하며, 만경강의 상류인 고산천과 소양천이 인접해 있어 방어와 교통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사결과, 해발 35?40m 정도의 낮은 구릉에 많은 수의 마한 분구묘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고려조선시대의 토광묘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사된 마한 분구묘의 구조나 출토유물을 통하여 마한 사회의 변천과정이나 성격 등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한 분구묘는 4개 지점에서 3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피장자 1인을 위한 분묘가 아니라 주구를 갖춘 중심 매장부 주위에 또 다시 매장부와 주구가 추가되는 다장(多葬) 형태의 분구묘로 확인되었다. 분구 내에서 확인된 매장부 유형은 점토곽(粘土槨)과 목관 116기, 옹관 38기, 석곽 9기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흙덩이를 이용하여 매장부를 축조하는 점토곽 방식의 채용 사례는 상운리 분구묘에서 처음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익산 황등제나 김제 벽골제의 제방이나 영산강 유역의 분구묘의 분구 축조기술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분묘의 축조 방식은 혈연을 기반으로 조성된 마한 분구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매장부 구조나 규모의 차이는 계층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은 토기류 321점, 철기류 500여점, 옥류 6,000여점으로 방대한 양의 부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가운데 주목되는 유물은 단연 철기 유물이다. 일반적으로 마한 분묘에서는 철기가 수십여 점 정도 출토되는 것에 비해 이 유적에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철기는 주로 분구 내의 점토곽과 목관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종류 및 비율을 보면 무기류 25%, 농공구류 40.8%로서 무기류와 농공구류가 대부분이며, 그 이외에도 마구류와 기타 철기류가 있다. 이들 철기 가운데 망치와 집게, 그리고 줄, 철착, 쐐기, 모루 등으로 구성된 20 세트의 단야구는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상운리 분구묘의 조영집단은 철기를 생산하는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던 집단으로서 마한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왜 사용 가능한 단야구와 같은 생산도구를 무덤에 부장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철기 제작 기술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기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혈연을 기초로 축조되는 분묘의 양상과 부장유물에서 볼 때, 철기의 생산 기술은 대대로 상속되어 백제 영역화 이후 5세기 후반까지 주요한 철기 생산 집단으로 존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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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17: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인의 영원한 안식처 옹관 2

영산강유역의 나주, 영암, 함평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대형 옹관묘는 4~5세기 마한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불릴 만큼 독특한 문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대형옹관에는 마한인들의 내세적 사상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마한 분구묘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실용성이나 효율성이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형옹관을 통해 마한인의 정신세계나 사회구조, 그리고 고도의 토기제작기술에 대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마한 전기 분구묘의 주매장부는 낮게 성토가 이루어진 분구 중앙부분을 굴착하여 토광에 시신을 안치하고, 때로는 대상부나 주구에 옹관을 배장으로 안치하고 있다. 배장으로 사용된 옹관은 규모가 작은 편으로, 유아나 미성년자가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분구묘 내에 주매장부로서 토광과 배장으로서 옹관이 배치된 것에서 보면 혈연에 기반을 두고 축조된 분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배장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그에 따른 유아의 출산과 사망률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한편 배장으로 사용된 옹관 중에는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동체가 S자형의 것들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영산강유역의 대형 옹관은 미성년자용 옹관에서 성인용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마한 사회에 대형옹관을 만들 수 있는 고도의 토기 제작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한 분구묘의 변화과정에서 보이는 가장 특징적인 점은 평면적 혹은 입체적으로 분구가 확장되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는데, 이에 따라 분구의 형태는 제형과 같은 부정형에서 점차 방형이나 원형으로 규격화가 이루어진다. 부정형 분구 단계에서 대형옹관이 매장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원형이나 방형 분구묘에서는 대형옹관만 안치되지만, 후기 단계에서는 백제를 비롯한 외부의 영향으로 석실도 매장부에 축조된다. 영산강유역에서 대형옹관의 채용은 분구묘의 속성, 곧 분구 중에 매장부의 설치와 분구확장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매장시설을 분구 중에 둘 경우 지하에 설치하는 것에 비해서 야생동물의 피해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시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형옹관이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분구확장 과정에서 상하단으로 토광을 안치할 경우 앞서 안치된 토광이 파괴될 우려가 커진다. 따라서 분구묘 매장주체부로서 대형옹관은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서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대형옹관의 형태는 땅 속에 살고 있는 애벌레나 캡슐, 혹은 계란에 비유하기도 한다. 매미의 애벌레는 땅속에 7년을 머물다가 껍질을 벗고 비로소 매미로 태어나듯이 옹관의 주인공도 사후 부활을 꿈 꾼 것을 아닐까? 나주 장동리 고분의 4세기대 옹관에서는 웅크리고 있는 미성년자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어머니의 자궁 내에서 머물던 모습과도 닮아 있어서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는둣 하다. 대형옹관의 내벽에는 붉은색을 칠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역시 사후 부활을 기대하며 영원한 안식처로서 옹관에 잠들어 있던 마한인의 바램은 아니었을까.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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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3 17:41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인의 영원한 안식처 옹관 1

죽음이란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영원한 안식처라 할 수 있는 무덤을 축조함에 있어서 영혼불멸에 대한 강한 믿음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무덤 내부의 모습은 피장자 생전의 삶의 공간을 재현하거나 혹은 그들의 신념이나 신앙적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고고학 자료 가운데 무덤은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무덤 축조인의 출신이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영산강유역에는 거대한 규모의 분구를 갖춘 고분들이 나주, 영암, 함평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그 내부에 시신을 안치한 대형옹관은 이 지역의 특징적인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형옹관은 백제 고지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유형과 전혀 다른 것으로 영산강유역에서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옹관묘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범위가 매우 넓은 편이며,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인 서안 반파유역에서 유아용으로 사용된 예가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옹관묘는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송국리문화 단계에 금강 및 만경강유역에서 유행한 묘제로서, 익산 석천리유적에서처럼 옹관을 세워서 안치한 예들이 발견된다. 이후 영산강유역에서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아가리를 맞댄 소위 합구식 옹관묘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유아용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시대의 옹관묘는 일반적으로 일상용으로 사용되던 호형토기를 이용해 사용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은 제작 당시부터 옹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성인을 위한 전용옹관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용옹관은 3세기 무렵에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가리가 매우 넓으며 어깨에는 톱니무늬를 돌려 장식하고 바닥에는 무문토기 전통의 돌대가 부착되어 있다. 이른 단계의 옹관은 S자형의 볼륨을 가지고 있지만, 4~5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목이 넓어지고 동체가 길어져 U자형으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거친다. 또한 바닥에 부착된 돌대는 점차 없어져 음각된 동그라미 형태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대형옹관의 구연부 두께는 5~6cm 정도가 보통이지만 두꺼운 것은 10cm가 넘는 것도 있으며, 기벽의 두께는 평균 2cm 정도가 된다. 길이는 50cm에서부터 3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며 평균적으로 2.3cm에 달한다. 이와 같은 대형옹관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고도의 토기 제작기술이 필요한데, 아가리부터 바닥에 이르는 테쌓기 수법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형옹관 안에서는 철제 못이나 꺽쇠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목관이나 혹은 시신을 올려놓기 위한 나무판을 옹관 내부에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외에도 옹관 내부에서는 부장유물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시신을 납입한 후에는 2개의 옹관을 맞대어 합구한 형태가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목판이나 판석 혹은 대형 토기편으로 옹관을 밀폐하는 경우도 있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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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6 17:14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김제 벽골제의 축조세력은 마한이었다

김제 벽골제(사적 제111호)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벽골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로서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고대 저수지를 대표하고 있다. 벽골제의 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고대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만이 가능했을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풍납토성과 같이 거대한 토성을 축조할 수 있는 수준높은 기술력과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정비한 백제에 의해 3세기 중엽에 벽골제가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축조의 주체세력 또한 백제의 중앙으로 인식되어 왔다. 풍납토성의 축조방법은 우선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의 중심 토루를 구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내벽과 외벽을 덧붙여 쌓아 나갔다. 이처럼 여러 겹의 토루를 덧붙여 전체 성벽을 완성한 방법이야말로 풍납토성의 성벽 축조방식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기본적으로 중국 선사시대 성벽 축조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벽골제의 축조방법은 그동안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점토 흙덩이(土囊)를 이용해서 접착력을 높여 견고하게 쌓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수법은 호남 서해안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마한 분구묘의 축조방법과 매우 비슷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암 내동리 초분골 1호분, 나주 신촌리 9호분, 영암 신연리 9호분, 나주 복암리 3호분, 고창 봉덕리 1호분 등의 분구 성토과정에서 보이는 토층이 벽골제 제방의 성토방식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벽골제의 초축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에서 백제가 이 지역을 영역화하기 이전인 문헌 기록대로 330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 중앙세력이 아닌 이 지역의 마한 세력에 의해서 거대한 토목공사인 벽골제가 축조되었을 것인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료는 3, 4세기에 들어서면서 호남지역에서는 집자리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취락이 대규모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전북 서부지역에서만 20여개소가 군집을 이루고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익산 사덕유적은 100여기, 전남 담양 태목리에서는 400여기 이상의 대규모 취락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자료에 의거할 경우, 3,4세기가 되면 마한 사회는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됨에 따라 노동인력이 풍부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식량자원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벽골제와 같은 관개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을 것인데, 마한 세력집단은 분구묘의 축조를 통해서 높아진 기술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토목공사의 결정체인 벽골제 축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벽골제의 초축 기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아니라 신라본기의 訖解尼師今 21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연구자들은 구체적인 비판없이 벽골제가 위치한 지역이 백제 고지라는 이유로 벽골제의 초축을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찬술 방식을 살펴보면, 마한에 대한 정보가 매우 소략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벽골제 시축에 대한 내용은 백제본기에는 원래부터 없었고 마한과 관련된 기사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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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9 17:2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익산은 마한의 건마국이었나?

익산지역이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왔던 근거는 중국 고대사서 『삼국지』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으로 와서 마한을 개국했다고 요약된다. 일반적으로 문헌기록에 보이는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은 익산의 금마 일원, 감해국 혹은 염로국은 익산 함열 일대, 여래비리국은 익산 여산 일원으로 비정되어 왔다. 그 가운데 건마국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로 자리잡고 있었고, 마한 정치체의 성장에 따라서 익산의 건마국에서 충남 직산의 목지국으로, 목지국은 한강유역의 백제에 정복되는 단계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어 왔다. 이병도 박사가 건마국을 마한 후기의 맹주국으로서 익산으로 비정한 이래, 특별한 비판없이 건마국은 익산일 것으로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는 현재의 지명인 금마(金馬)와 건마(乾馬)의 음운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건마(乾馬)의 음이 金馬 혹은 古馬의 어느 편에 가깝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천관우는 『삼국지』의 국명 열거 순서가 북에서 남이라는 방향에 착안하여 감해(感奚)를 익산에 비정하고, 마한 54개국 열거의 마지막 순서에 가까운 건마를 장흥의 백제 때 명칭인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나 신라 때의 마읍현(馬邑縣)이라는 점에서 장흥 일대를 건마국으로 비정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건마국을 이른 단계의 마한 소국으로 이해하거나 마한 후기의 맹주국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차이를 보이며, 오늘날 익산과 장흥지역은 매우 떨어진 지역으로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거리감이 없지 않다. 한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정관(貞觀) 13년(639)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현재의 금마지역인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한의 성립과 준왕의 남천지로 비정되는 금마 일대는 백제시대에는 지마마지 혹은 지모밀지에서 금마저(金馬渚)로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지모현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금마군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상해의 방언에서 支牟와 金馬의 발음이 jin mou로 동일하게 발음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현대의 중국어로도 乾은 qian이나 gan으로 발음되고, 金은 jin으로 발음되고 있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어인 금마와 건마가 유사한 음운이라는 사실만을 근거하여 동일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금마 일대를 마한 소국 가운데 건마국으로 비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요망된다. 건마국의 명칭은 3세기 중엽에 쓰여진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며, 기록된 소국명은 3세기 중엽경의 양상일 가능성이 크다. 익산이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는 시기, 즉 준왕의 남천과 관련된 마한의 성립시기는 문헌자료나 고고학 자료(그림1.2.3)에 의하면 B.C 3세기경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건마국이 등장하는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약 600여년 동안 건마국이란 명칭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고학적 성과로 보면 익산지역에서는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토광묘 축조집단 이후, 특히 3~4세기에는 다른 지역과 뚜렷하게 구분될 정도의 우월적 지위를 갖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에 마한의 국명으로 등장하는 건마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요망되며, 이 뿐 아니라 건마국이 익산이라는 전제로 전개된 마한의 성장과 세력변천에 대한 견해도 재고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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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6 17:57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개발에 밀려난 마전 분구묘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0기의 조선 왕릉 가운데 김포 장릉 인근 문화재보존지역에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건설 중인 아파트의 철거 여부를 놓고 찬반 논쟁이 일고 있다. 국토개발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화유적에 대한 훼손을 막기 위해서 공사를 시작하기 전 지표조사를 통해 유적 부존 여부를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면서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문화유적의 보존 목적도 있지만 문화유적의 보존에 따른 공사 주체자의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김포 장릉의 경우는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김포 장릉이 공사의 장애물(?)이 될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2007년 전주 서부 신시가지 개발과정에서 발견된 마전유적도 위의 사례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바 있다. 마전유적은 마한 전통의 분구묘로서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삼천천을 중심으로 마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세력집단의 분묘로 밝혀졌다. 그런데 마전 분구묘는 발굴조사 이전에는 지표상에서 크게 노출되지 않았고, 이 유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문학대라는 누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문학대는 고려시대 초축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년)에 중건했는데, 1976년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 24호로 지정되었다. 신시가지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문학대를 통과하는 남북 대로의 건설이 계획되었다. 문학대가 지방문화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별다른 대책없이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자 했던 전주시 관계자들의 담대함에 놀랄 뿐이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김포 장릉 주변의 개발공사 문제를 보면서 2007년 마전유적의 발굴과정에서 있었던 당시의 복잡한 심정에서 언제까지 문화재는 개발의 장애가 되어야 하는지 자괴감을 가지게 된다. 마전 분구묘 유적은 황방산 산줄기에서 뻗어내린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에서 하단부에 걸쳐 5기가 열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3호분은 문학대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분구 상면이 일부 삭평이 이루어진 것이 확인되었고, 나머지 4기의 분묘에서는 주구와 매장시설만이 노출되었다. 매장 시설로는 토광, 석곽, 석실, 옹관 등 다양하게 확인되었는데, 특히 3호분에서는 토광목곽에서 석곽과 석실로 이어지는 주매장시설의 변화과정과 분구확장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다. 출토유물은 각종 토기류와 철기류 옥 등인데, 4호분 3호 토광에서는 600여점이 넘는 옥이 부장되어 있었고, 5호분에서는 환두대도, 3호분 1호 석실에서는 말재갈과 다양한 토기와 옥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로 볼 때 마전유적의 주인은 전주 삼천천을 기반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집단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학대는 누정이다. 따라서 주변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최적의 장소에 세웠을 것이다. 마한 전통의 분구묘의 입지조건 역시 구릉의 정상을 따라 열을 지어 배치하는 것이 공통적 현상이기 때문에 마전유적도 그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간 삶의 쉼터와 죽은 뒤의 안식 공간이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주변 환경의 중요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다행인지 모르지만 도 지정문화재인 문학대와 발굴조사가 완료된 마전 분구묘 유적은 인근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문화재란 원래 있던 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을 때만이 온전한 가치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보면, 문학대와 마전유적의 이전은 못내 아쉬운 결정일 수 밖에 없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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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2 17:5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백제 속의 마한(서산 부장리 분구묘)

고대사회에 있어서 동일한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를 설정하는 데에 고고학적 자료 중 분묘와 생활 토기가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예에서 보면, 고구려는 적석총, 백제는 횡혈식석실분, 신라에서는 적석목곽분이 각각의 정치적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축조되고 있어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활 토기 역시 동일한 기종일지라도 삼국의 각 나라마다 형태나 문양에 있어서 그 속성을 달리하고 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백제에 의한 마한의 복속 시기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마한 분구묘 자료를 근거로 마한 정치세력은 문헌자료 기록보다 무려 2세기를 더 지나 6세기 초엽까지 존속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와 분묘의 축조 범위가 일치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민 구성이나 공간적 범위에서 서로 겹치는 마한과 백제는 일시적인 정복을 통해 영역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통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한의 정치세력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마한 분묘의 축조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치체와 문화유산 결정체의 존재가 꼭 일치되는 현상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는 충남 서산 부장리에서 발견된 마한 전통의 분구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4년에서 2005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진 부장리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더불어 백제시대의 주거지 43기, 수혈유구 15기, 분구묘 13기, 석곽묘 3기 등 모두 74기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유적 구성에서 보면 백제인들의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머지않은 곳에 각각 배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특히 마한 전통의 분구묘 13기 가운데 3기는 주구 일부가 중복되어 있지만, 대부분 각각의 독립된 묘역을 유지하며 축조되어 있다. 분구의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정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20m~40m에 이른다. 매장시설은 모두 토광을 굴착하고 있는데, 하나의 분구 안에 적게는 1기부터 많게는 9기가 시설되고 있다. 부장리 분구 내의 부장유물 중 직구원저단경호, 광구원저호, 원저호 등 토기류들은 백제계 토기라는 점에서 호남지역의 분구묘 출토 토기와 차별성이 보인다. 이외에도 환두대도, 철제초두, 철부, 철겸, 철도자, 철모 등의 철기류와 금동관모, 금동식리, 금동이식, 곡옥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가운데 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식리를 비롯하여 5호분의 금동관모와 철제 초두는 부장리 분구묘에 묻힌 사람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곧 서산지방을 중심으로 자라잡고 있었던 마한계 세력집단으로 볼 수 있다. 충청남도 아산만 일대는 이른 단계의 분구묘인 보령 관창리와 뒤이어 축조된 서산 예천리, 그리고 백제 영역화 시점과 맞물려 축조된 서산 기지리와 그 이후 축조된 부장리 분구묘가 발견된 지역이다. 곧 강한 마한 문화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가 축조되는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창지역과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분구묘의 성격을 곧바로 마한 정치체와 연결시키기 보다는 백제 영역화 이후 지속된 마한문화와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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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5 17:33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분구묘의 여명 (익산 율촌리 유적)

1997년 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에서 잠깐 쉬고 있던 중, 익산지역 정밀지표조사를 나갔던 연구원으로부터 교수님 예비군 참호 내에서 옹관이 노출되어 있고, 그 안에 토기가 한 점 놓여 있어요, 옹관묘 아닐까요? 전화기 너머 다소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일상적으로 수고했네, 근데 그곳이 어딘가? 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등 율촌리라는 곳입니다. 분구는 삭평된 채 주구만 남아 있기 때문에 주구묘라고 불렸던 익산 율촌리 분구묘 발견 당시의 상황으로, 마한 분구묘의 원형을 알게 해 준 순간이었다. 현장을 방문해서 더욱 놀랐던 것은 아주 낮은 구릉을 엄폐물로 이용하여 예비군 참호를 설치했는데, 이 낮은 구릉 위에 볼록볼록하게 일렬을 이루고 있는 지형은 고분의 분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분구묘에 대한 인식 없이는 육안으로 분별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높이가 1m 정도도 되지 않는 5기의 낮은 분구가 능선을 따라 배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2차에 걸쳐 분구묘 4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각각 분묘들이 품고 있는 속성에서 마한 분구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호분의 분구는 남북 11m, 동서 7.8m로서 남북 방향으로 약간 긴 편이며, 높이는 75cm로 계측되었다. 분구의 성토는 7개 층으로 구분되며 분구 끝자락에서 주구가 확인됨으로써, 분구의 축조는 확인되었지만 묘의 중심시설인 매장주체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분구를 먼저 쌓고 나중에 매장부를 시설하는 소위 선분구 후매장 의 분구묘 축조 방식이라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확인하게 되었다. 2호분과 3호분은 평면형태가 방형에 가까우며, 분구는 50~100cm에 불과하다. 내부에서 옹관과 선행 유구인 청동기시대의 석관이 노출되었다. 특히 2호분에서는 청동기 시대 석관의 석재를 이용하여 옹관을 둘러싸 보호하기 위한 흔적도 확인되었다. 5호분은 동서 15m, 남북 18.5m, 높이 1m 정도의 분구가 계측되었다. 분구 및 주구 내에서 대형 합구옹관 1기와 소형 옹관 2기, 그리고 청동기시대 석관 4기와 옹관 1기가 확인되었다. 대형 옹관은 두 개의 옹을 횡치하여 아가리를 맞댄 합구식으로 그 중 한 점은 민묘 축조과정에서 심하게 파괴된 채로 노출되었다. 옹관의 규모는 합구상태로 198cm이다. 북옹이 100cm, 남옹이 98cm로 계측되며, 옹의 두께는 무려 2~3cm나 된다. 아가리는 매우 넓은 편이며 어깨에는 거치문(鋸齒文)이 새겨져 있어 영산강유역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통하고 있다. 율촌리 분구묘의 대형 옹관은 영산강유역에서 소위 선황리식으로 불리는 마한의 이른 시기에 사용된 대형옹관과 동일한 형태로서 율촌리 분구묘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마한 성립지로 알려진 익산지역의 낮은 분구묘 내에서 대형 옹관의 출토는 율촌리 분구묘가 호남지역 대형 분구묘의 조형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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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8 17:1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전북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한 소국의 중심지를 고고학적인 자료를 활용하여 추정해 보면 12개소에 달하며, 고창지역의 경우 3개의 중심지를 상정할 수 있다. 첫 번째 중심지(Ⅳ-1소국)는 해안가 지역에 인접한 해리면상하면심원면 일대로서 주요 유적은 왕촌리자룡리의 분구묘와 두어리하련리의 주거유적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중심지(Ⅳ-2소국)는 고창읍과 고수면 일대에 해당하는데, 봉덕리만동남산리의 분구묘와 석교리부곡리봉덕남산리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주거유적 등이다. 그리고 세 번째 중심지(Ⅳ-3소국)는 대산면성송면공음면 일대로서 성남리광대리의 분구묘 유적을 들 수 있다. 특히 고창읍과 고수면아산면 일대의 Ⅳ-2소국은 반경 5km 이내에 마한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서 봉덕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자료를 보면,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대형 분구묘 축조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고창 봉덕리 1호분은 5세기 이후 등장하는 대형 고분으로 4호 석실에서는 금동신발, 중국제 청자호, 은제장식대도, 청동탁잔, 성시구 등이 출토되었고, 5호 석실에서는 금동신발편, 대금구 등이 출토되엇다. 이러한 유물로 볼 때, 봉덕리 일대의 마한세력은 백제의 영역화 이후에도 상당한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고창지역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 명칭을 이어받아 백제시대에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또는 모량현(毛良縣)으로 불렸다. Ⅳ-2소국 중심지 일대에서 마한문화유적을 축조하고 영위한 주체는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 자료로 볼 때, 바로 모로비리국의 중심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주변의 마한 소국연맹의 맹주국으로서 그 위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창 해안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Ⅳ-1소국의 자룡리 분구묘에서는 주구 내에서 시유도기(施釉陶器)와 다량의 유공광구소호가 출토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왕촌리 분구묘에서는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원통형토기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출토품이 주구 내에서 다수 확인되어 영산강유역과의 교류 및 연관성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서해안에 인접한 점을 고려할 때 고창지역의 마한 소국은 해상을 기반으로 한 세력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고창 남쪽의 중심지(Ⅳ-3소국)는 전남 영광과 바로 연결되는 지형으로 고창 대산면을 중심으로 성남리, 광대리에서 다수의 분구묘 및 주거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인접한 지점에 영광 군동 분구묘 유적도 위치하고 있어 Ⅳ-3소국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자료들을 볼 때, 고창지역의 마한문화는 영산강 유역과의 교류나 고대 한일간의 문화교류, 나아가서는 마한에서 백제로 변화하는 시기의 모습도 종합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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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7 17:43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동진강유역의 마한 소국

동진강유역이라 하면 정읍시와 부안군의 전역, 김제시의 부량면, 봉남면, 죽산면 일대가 해당되고 있다. 이 지역의 마한 소국을 유추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조에서 찾을 수 있다. 자료에는 왜가 신라와 가야 7국을 평정하고 백제를 복속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작전은 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가야지역을 비롯하여 영산강과 동진강유역의 서남해안 지역에 진출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윤색된 것으로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백제가 근초고왕 24년(369년) 침미다례(?彌多禮)를 정벌하자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比利?中布彌支半古四邑)이 백제에 자연스럽게 복속됐다는 것이다. 먼저 침미다례의 위치는 남해안의 해남지역이나 강진, 또는 고흥반도로 비정하며, 비리와 벽중은 내륙지역으로 인식하여, 백제가 해로와 육로를 장악하면서 마한을 복속시킨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에 대한 지명 가운데 비리(比利)는 전주 혹은 부안, 벽중(?中)은 김제, 포미지(布彌支)는 정읍 일대, 반고(半古)는 부안과 태인 일대로 비정되고 있어 4세기 중엽 경에 이르면 전북지역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마한 유적의 밀집도에 따른 마한 소국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동진강유역에는 3개의 소국이 위치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부안지역의 마한 소국(Ⅲ-1)은 부곡리, 신리, 대동리, 하입석 등에서 발견된 주구묘 유적이다. 이는 평면이 방형과 제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대체로 1변이 개방되었고, 1,2개의 모서리가 개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주매장주체부는 모두 삭평되어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상부나 주구에서 옹관편과 다량의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유구의 평면형태나 출토유물은 김제에서 발견되는 양상과 비슷하며, 마한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정읍지역의 마한 소국(Ⅲ-2)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영원면의 지사리나 운학리에 남아있는 대형 분구묘의 존재를 들 수 있겠다. 이들 분구묘는 백제의 고분으로 알려져 왔었지만, 최근 마한 분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마한 분묘의 축조전통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운학리 3호분에서 발견된 도금된 용문투조과판(龍紋透彫?板) 등은 피장자의 위계를 살필 수 있고, 고대 한․일간 교류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읍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한 소국(Ⅲ-3) 가운데 신면유적에서는 지점을 달리해서 집자리와 더불어 분구묘 8기가 조사되었다. 신면유적 분구묘 3,4호의 경우, 주매장시설로는 토광이 중앙에 안치되어 있고, 대상부나 주구 또는 인접된 공간에서 옹관이 발견되고 있다.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영산강유역과 가깝기 때문에 백제의 중앙세력의 주요 거점이 되었을 것이며, 이는 신정동 백제 석실분의 축조에서 뒷받침된다. 동진강유역의 마한 소국은, 마한 전기에 새당하는 주구묘 유적들은 부안지역의 소국(Ⅲ-1)에 분포된 반면, 후기에 해당하는 대형 분구묘들은 정읍 영원면 지사리나 운학리 일대(Ⅲ-2)에 축조된다.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구심점이 형성되어 동진강유역 마한 연맹체의 중심국으로서 백제시대에 중방 고사성이 설치되는 근간이 되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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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7 16:54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만경강유역의 마한 소국

전북지역의 마한 소국은 함열함라 일대의 감해국(感奚國),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김제의 벽비리국(闢卑離國) 등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을 뿐, 대부분 연구자 개별 의견만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자료를 근간으로 마한 소국의 공간적 범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문자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구체적으로 마한 소국명칭을 대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만경강유역에서는 익산시, 완주군, 전주시, 김제시 등을 4개 지역별로 마한 분구묘나 주거 유적의 빈도수가 높게 나타나기 마한 소국의 중심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편의상 현재의 행정구역 중심이지만 인접된 지역에서는 중첩되고 있다. 먼저 익산시(Ⅰ-1소국)의 주요유적은 모현동과 영등동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분구묘와 주거유적을 들 수 있다. 모현동 묵동유적의 분구묘는 수평 확장과정 및 출토유물을 보았을 때 5세기 중 후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유역의 백제 석축묘에서 출토되는 고배와 직구호 등 동일한 유물이 부장되어 동시대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금강유역과 달리 마한의 전통적 묘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완주(Ⅰ-2소국)지역 중심 마한 소국의 주요 유적은 완주 상운리와 수계리 분구묘, 그리고 익산 사덕의 주거유적으로 들 수 있다. 완주 상운리 유적은 완만한 구릉 일원에 위치하며, 전기단계부터 후기단계의 분구묘가 분포하고 있어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가-1지구의 1호분의 매장주체인 토광에는 점토곽을 시설한 후 목관을 시설한 것으로 규모나 축조방법에서 볼 때 최고 유력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부장유물인 환두대도, 금동이식, 철정, 철부, 철촉 등의 다양한 철기유물과 옥류, 토기 등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완주 상운리 분구묘는 군집양상과 규모, 출토유물 등에서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고도의 철기제작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던 유력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벽비리국(闢卑離國)으로 비정되는 김제일대(Ⅰ-3)에서 주목되는 유적은 농경수리유적인 벽골제를 들 수 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330년에 시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백제가 김제지역을 영역화하기 이전에 해당한다. 발굴결과 부엽공법과 토낭을 쌓아 제방을 축조하고 있는데, 토낭을 이용한 수법은 마한 분구묘를 성토하는 수법과 같아 벽골제 축조 주체는 마한 세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주지역의 소국(Ⅰ-4)은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주요유적으로는 축조 중심연대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전 분구묘와 6세기 초에 해당하는 장동 분구묘를 들 수 있다. 그리고 6세기 중엽이후의 주구를 갖춘 석실분이 축조된 안심유적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만경강유역에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가 축조되었던 이유는 마한의 성립지로서 강력한 마한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이 마한의 본향이라는 자긍심은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와 견훤의 후백제 건국으로 이어지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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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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