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6-02-05 00:18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소리 공책의 비밀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이유로 나는 일곱 살 때까지 이사를 열세 번을 다녔다고 한다. 희미한 기억 속에 가득 차다라는 느낌, 두 가지가 있다. 처음으로 본 상여 행렬과 추수 때 집 마당이다. 비가 왔었는지 질퍽한 진흙길 위에 상여는 유난히 느리게 갔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상여 뒤를 길게 늘어선 무리만큼이나 시간은 길게 느껴졌다. 상여 위에서 종 치는 할아버지, 상여 뒤를 따르는 상주들의 울음, 마지막 가는 고인을 배웅하는 사람들로 길 위가 가득 찼다. 그리고 추수하는 날은 집채만 한 가마솥에서는 연신 뿜어내는 김만으로 마당은 그득했다. 그때는 뭐였든 서로였고, 함께였던 정서 때문이었을까! 임실에는 그때처럼 모두 함께 하는 필봉굿이 남아있다. 그곳 3대 상쇠였던 고 양순용 보유자의 희생과 노력, 계승 정신이 명맥을 잇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과 떡과 술을 나눈다는데, 이는 고인의 유언이었다. 풍물놀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도 온전히 하나 된 나눔인 것이다. 동화작가 윤미숙의 『소리 공책의 비밀』은 임실의 필봉 농악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갈등 속 두 소년의 화해와 성장하는 모습은 족히 큰 감동과 긴장감을 준다. 개인적으로 윤미숙 작가는 20년 전에 한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었다. 늘 조용했고, 무슨 생각인지 깊이 빠져있는 듯 보였다. 그때만 해도 동화작가가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우연히 그가 대교문학상을 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야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침착하고 잔잔한 그의 이미지답게 꼼꼼한 짜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읽다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인연의 감회였을까! 읽는 내내 몇 번의 소름 돋는 전율을 느꼈다. 즐겨 쓰던 챙 넓은 모자는 사라지고, 멋들어지게 반백이 된 머리색이 스쳐 지났다. 글을 쓰면서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을 모습이 겹쳐졌다. 책 속, 진성의 일방적인 갈등은 참 감칠맛을 냈다. 청력을 잃은 먹이의 노력은 보려하지 않고, 천재성이라 단정해 시기 질투하는 진성의 숨겨진 내면은 헝클어졌다. 드러내지 않고 경쟁하는 모습에 갈증이 날 정도이다. 반면에 가장 절박함 속에 이뤄낸 간절함으로 소리를 그려내는 먹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리를 그리는 모습은 전통을 잇고자하는 이들의 갈망과 절묘한 맞춤이었다. 간신히 물에서 구한 먹이가 열이 내리는 것을 보고, 마당으로 나와 기원이라도 하듯 임실댁이 소고 없이 춤추는 모습이 나온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양손을 가슴께에서 한 번 부딪치면서 머리 위로 올린 다음, 얼굴을 스치듯 내려 가슴에 모았다. 두 손을 가슴에서 모았다가 다시 크게 벌렸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춤을 추었다. 마당을 돌며 당면한 위기로 쌓인 상념을 떨쳐내듯 마음을 정화한다. 마치 의식과 같은 장면이다. 기원을 담은 몸짓을 그려낸 작가의 섬세함이 보이는 대목이기도 했다. 또 글 속에는 나오는 비그이 비설거지라는 예쁜 순우리말은 이야기 흐름에 맞춰 살며시 스며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임실 필봉 농악을 실감나게 그려낸 것은 이야기 속 먹이만큼이나 깊이 빠져 있었을 것이다. 전통을 이어온 이들처럼 작가 또한 이야기 내내 흐트러짐 없는 일치가 이 동화의 핵심이 아닐까싶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10.20 17: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시인 - 고등학생, 전주를 이야기하다

10대 무렵, 고향인 전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때도 남부시장 옆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었고 고풍스러운 전동성당은 운치가 있었으며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경기전은 쓸쓸했다. 지금이야 옛정취가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한벽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풍경도 제법 근사했다. 가끔 향교 근처를 걷다 보면 스러져가는 허름한 한옥 사이로 평상에 앉아 졸고 있는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전주는 외지 사람들의 관심 밖의 공간이었다. 지금이야 전주하면 누구나 한옥마을을 떠올리지만 내 10대의 기억 속 한옥마을은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던 동네였다. 그런 전주에 대해 전주 신흥고에 다니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낸 책이 나왔다. 바로 『고등학생, 전주를 이야기하다』(북컬쳐)이다. 고등학생의 시각으로 전주 한옥마을부터 남부시장, 서학동 예술인마을, 전주의 음식문화, 영화의 도시 전주 등 다양한 소재를 대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담아낸 책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전주를 다룬 책은 많아도 이처럼 청소년의 눈으로 전주를 구석구석 훑은 책은 거의 없다. 이 책을 접하면서 전주에 사는 10대 청소년들은 전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지역에 살면서도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잃고 자괴감에 빠져 사는 이도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내가 책에서 만난 10대들은 전주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이고 생산적이었으며 지역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뜨거웠다. 비록 다양한 시각에서 전주를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쓴 글에는 전주에 대한 열정과 청춘의 뜨거움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10대 청소년들이 쓴 책이 뭐 별거 있겠어하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내려놓을 때쯤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들의 고민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일반 고등학생들의 평범한 관점을 거부하며 진지하다. 고등학생의 단순한 시각이라기에는 내공이 상당하고, 전주를 바라보는 독창적인 관점을 성실하게 담아내는 실력도 갖추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상상이나 머리로만 쓴 전주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전주의 곳곳을 발로 뛰면서 직접 인터뷰를 한 후 글을 썼다. 글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그들이 이 책에 들인 정성과 노력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책에서 전주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아홉 명의 멋진 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찬란하고 빛나는 생각을 가진 청소년을 만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신이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그동안 알고 있던 전주와 다른 전주가 보일지 모른다. 이 가을에는 이 책을 곁에 두고 내가 알던 전주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면 어떨까 싶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10.13 17: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도대체, '그럴수록 산책'

아버지에게 불효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때는 바야흐로 2021년 9월 20일, 추석 전날의 일이다. 부모님과 동생 내외, 두 조카와 나. 식구들이 둘러앉아 배불리 저녁 식사를 마쳤다. 명절 연휴에 설거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설거짓거리가 정말 끝도 없이 나온다. 설거지 당번이었던 나는 꼼짝없이 서서 화수분처럼 자꾸만 솟아나는 빈 그릇들을 해치워야 했다. 고독한 분투를 끝낸 뒤 버릇처럼 아이고, 허리야.라고 한 모양인데,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가 나가서 좀 걸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 나는 그만 욱하고 말았고, 예순 중반에 접어든 늙으신 아버지와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늙어가는 딸이 서로에게 삐쳐서 쌀쌀한 밤을 보냈다. 그래서 이 책이 생각났다. 『그럴수록 산책』! 『그럴수록 산책』은 도대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여덟 컷 만화와 짧은 에세이가 어우러진 책이다. 작가는 산책길에서의 에피소드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버무려낸다. 「노래하는 돌」, 「지렁이의 보은」, 「개미 정도는」 등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만화와 「오디가 익어가는 동안」, 「가방의 무게」, 「오리도 그랬구나」와 같이 통찰력이 돋보이는 에세이가 곁들어져 있어 뜻밖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즐거움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웃음 나는 이야기를 추출하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가진 작가다. 억지스러운 교훈과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랄 수 있겠다. 다만, 자연 속에서는 아무도 초조해하지 않고 각자 다른 빠르기로 찬찬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보여준다. 「잘했어, 순록들!」에서는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일본 홋카이도에서 순록을 이용한 피자 배달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는 기사를 소개한다. 그 무렵 영혼 없는 직장 생활을 하던 작가는 순록들에게 감정이입 해서는 순록이 과연 피자를 배달하는 게 맞단 말인가? 하고 착잡해 하다가 피자 회사가 순록 배달 시스템을 최종 보류했다는 후속 기사를 보고는 환호한다. 순록들이 빈번히 길을 벗어나고, 집 앞에 멈추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피자를 길가에 버리고 가버리는 통에 순록 길들이기에 참패했기 때문. 작가는 세상의 순록들이 엉뚱하게 피자를 나르지 않고 눈 쌓인 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기를 기원한다. 어쩌면 산책도 그런 게 아닐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나에게 집중했다가 서서히 바깥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 또는 그런 힘이 생기도록 만들어주는 시간. 저는 많이 걷습니다. 이유는 대체로 별거 없습니다. 날이 화창해서 걷고, 날이 흐려서 걷고, 기분이 좋으니까 걷고, 기분이 나쁘니까 걷습니다. 좋아하는 길이라서 걷고, 걸어보지 않은 길이라서 걷고, 버스를 타기엔 어정쩡한 거리여서 걷죠. 그리고 슬플 땐 좀 더 많이 걷습니다. (『그럴수록 산책』, 4쪽, 프롤로그 걷기 시작했습니다 부분) 나는 이 책을 일터에 놓아두고 야금야금 읽었다. 점심시간에 책상에 앉기 전에 잠깐, 야근할 때 스트레칭을 하려고 일어선 채로 몇 분. 그렇게 틈틈이 내키는 대로 어느 날은 조금 오래, 어떨 때는 아주 짧게 책 속으로 산책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이것은 내가 즐기는 산책의 방식과도 닮았다. 발바닥이 아프지만, 조금 더 걷고 싶을 때가 있고 왠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도 있으니까. 그게 바로 산책의 묘미 아니겠는가. 산책하기 전과 산책 후의 기분이 미세하게 다른 것처럼 『그럴수록 산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기분이 달라졌다. 아무렴, 어때. 하고 싱긋, 웃을 수 있게 된다. 아버지, 다음에는 꼭 우리 같이 나가서 함께 걸어요.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10.06 16:4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경종호 작가 - ‘윤동주의 동시’를 그리는 시간 ‘윤동주 동시 컬러링북’

누나의 얼굴은/해바라기 얼굴/해가 금방 뜨자/일터에 간다.//해바라기 얼굴은/누나의 얼굴/얼굴이 숙어지어/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전문) 귀뛰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 했다.//귀뚤귀뚤/귀뚤귀뚤//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이만 알자고 약속했다.귀뚤귀뚤/귀뚤귀뚤//귀뚜라미와 나와/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귀뚜라미와 나와전문) 대부분 한 번쯤은 보았을 듯한 동시이다. 하지만 이 시가 윤동주 시인의 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동시 29편을 정갈하게 모아놓은 신간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의 청소년기인 십 대부터 이십 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삶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할 것 같다. 그 길에 시만이 아닌 시의 세상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 바로 [윤동주 동시 컬러링북]이다. 살뜰한 시와 애교 넘치는 그림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싶다. 세상살이에 쫓겨 마음이 폭폭해진 이들이여, 이 풀잎 같은 책을 보시라 김용택 시인의 추천글이다. 그런데 동시라고 하면서 이 책의 대상을 어린이가 아닌 ~이들이여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은 동시이지만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시만 실리지 않고 시와 함께 애교 넘친다는 그림도 함께 실려 있다. 왼쪽엔 동시와 그림이, 오른쪽엔 빈 공간과 스케치를 한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동시를 옮겨 쓰고, 스케치한 그림에 직접 색을 입혀 보는 것이다. 즉, 동시를 공부하는 초등학생부터 주름살이 얼굴 가득 새겨진 어르신들까지 시의 세상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안내서인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먼저 생각한 것이 초등학생들이었다. 1~2학년은 왼쪽의 시와 그림을, 오른쪽에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다. 3~4학년은 왼쪽의 시를 그대로 옮기지만 그림은 자기의 상상에 따라 다르게 칠해보는 것이었고, 5~6학년은 왼쪽의 시를 자신이 고쳐 써보고 그림의 색 또한 다르게 칠해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한 예시일뿐 다양한 활용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이에 더하여 어린이가 아닌 성인, 팔순의 어르신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것 같다. 좋은 동시와 그 동시를 좀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책 한 권이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윤동주 동시 컬리링 북], 우리가 쉽게 놓치며 가고 있는 감성의 한 자락을 슬며시 내밀어 주고 있어 고마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9.22 17:3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안성덕 시인 - ‘코스모스’

유년에는 별이 많았다. 여름밤 멍석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에 쏟아질 듯 가득했다. 별을 따고 싶었다. 별처럼 반짝이고 싶었다. 장대 들고 뒷동산에 올라가면 몇 개쯤 어렵잖게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윤동주의 별, 이문구의 별, 가람 이병기의 별, 초롱초롱 별이 참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여행자에게는 길을 농부에겐 씨뿌릴 계절을 알려주는 별, 은하계에 별이 1011개 그런 은하가 우주에 1011개란다. 광막한 공간과 영겁의 시간 속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무겁고 두꺼운 책 《코스모스》의 첫머리다. 저자 칼 세이건이 아내이자 동료 과학자인 아내 앤 드루얀에게 받친 고백이다. 영겁의 시간과 찰나의 순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겁은 사방 사십 리 바위를 비단옷을 입고 백 년에 한 바퀴씩 돌아 옷소매에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며, 찰나는 소수점 아래 18번째 자릿수라고 한다. 우주는 영원하고 우리 인간은 한없이 하찮다는 말 아니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13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에게는 역사책으로 읽히고 또 누구에게는 과학책, 철학책으로도 읽힌다. 어느 챕터는 술술 읽히고 어느 챕터는 비탈을 기어오르는 듯 턱턱 숨이 차오른다. 천체 물리학, 신화, 철학, 윤리 등에 해박한 저자가 쓴 과학책 아닌 과학책이기 때문이리라. 현재도 팽창 중이라는 우주, 50억 년 후면 백색왜성이 되어 사라진다는 태양, 도무지 실감할 수가 없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하찮은 존재인 인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100년도 못 살고 가는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를 알게 되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허무함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기원전 5세기 때 피타고라스가 우주는 어떤 질서로 움직인다라며 카오스와 반대 개념으로 처음 사용했다. 꼭 한번은 읽어야지 하고 책장에 꽂아두지만 잘 읽지 않는, 잘 읽히지 않는 《코스모스》는 천문학을 철학적인 내용과 결합해 대중의 수준에 맞춰 썼다지만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다. 빅뱅과 별들로 가득한 우주와 태양과 지구의 생성, 지구에 번개와 자외선과 물이 풍부해 수많은 화학작용으로 생명체가 탄생했단다. 인간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으며 그 세포는 탄소, 수소, 산소 등의 원자란다. 은하계의 먼지 같은 별이 태양이며, 그 주변을 도는 창백한 푸른 점이 우리가 사는 지구란다. 허무하다. 거대한 우주 속 먼지 같은 한 점 지구, 아웅다웅해보지만 우리는 하찮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쳐가는 그 하찮은 존재는 위대하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나보다 어린 형이 숨이 안 쉬어진다며 퍽 퍽 주먹으로 가슴팍을 쳤다. 형, 하늘을 한번 올려다봐! 돌아가 별이 되어버린, 지금은 가고 없는 형이 하늘을 올려다봤는지는 이제 와 알 수 없으나, 그때 그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자꾸 멀어지는 시력 탓일까, 별 밭에 별이 흉년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4)

  • 문학·출판
  • 기고
  • 2021.09.15 17: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백석 문학전집 · 시’(서정시학)

막 걷기 시작했다는, 같이 키우는 늙은 개와 어떤 말들을 주고받는다는, 그 개를 형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처남의 둘째 아이를 언젠가는 만나겠지요. 제 손으로 마스크를 벗지 않고 여름을 견뎌냈다는 그 작고 당찬 아이를 팬더믹이 끝나면 만날 수 있겠지요. 처음 만난 고모부가 낯설어 사슴 새끼처럼 제 아빠의 다리 사이로 숨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안아주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요. 아이가 저를 노나리꾼*이나 멧돼지, 혹은 늙은 곰으로 생각해도 그냥 꼬옥 안아주렵니다. 수염의 순결을 따라 볼 비비는 법을 체득할 때까지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렵니다. 국경 봉쇄가 풀리는 그때라면 우리는 같은 집에 머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요. 그 집이 우리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깊은 산골 마가리*이거나 가난한 목수에게 잠시 빌린 집이어도 우리는 이를 둥지라 여기고 느긋하게 머무를 겁니다. 끼니때마다 제비꼬리, 마타리, 가지취, 고비, 두릅순과 같은 나물, 햇콩두부 같은 순한 것들로 밥을 먹을 겁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땀에 젖은 축축한 셔츠를 칼칼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오후의 출출함을 달래렵니다. 늦은 밤 다시 그런 때가 오면 슴슴하고 고담한 국수나 기장쌀로 쑨 호박죽을 나누어 먹겠지요. 온 식구가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먹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낯선 이가 쭈뼛쭈뼛 사립문을 맴돌면 손을 길게 뻗어 고향 사람을 만난 듯 환하게 맞이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그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수런거리며 나누어 먹겠습니다. 사내들이 섞박지에 찰진 돼지고기를 얹어 따끈한 35도 소주를 나누어 마시며 빈 잔에 다정한 말을 담아 건넬 때 엄마들은 아랫간에서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손을 쓸어주며 갑자기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아이에게 옛 놀이를 가르치렵니다. 꼬리잡기, 가마타기, 비석치기는 괜찮은데 쥐잡이는 사양하겠습니다. 제비손이구손이*를 가르치다가 사타구니에 간지럼을 태우고 밀치고 웃고 뒹굴고 안아주며 체온을 나누겠습니다. 늦은 오후 땅강아지가 울기 시작하거나 시간의 냄새가 바뀔 무렵 쓰렁쓰렁 마실을 다녀오겠습니다. 늙은 갈댓잎이나 여린 버드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지 몰라요. 아이는 볼이 아릴 때까지 피리를 불다가 노을을 본다며 목마를 태워달라고 조르겠지요. 저는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주겠지만 혹시 수염을 움켜잡으면 엉덩이를 찰싹 때리렵니다. 엥~ 하고 울면 벌이 깨물었냐고 햇강아지 같은 엉덩이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렵니다. 아이의 발가락이 문득 제 코를 간지럽히면 거리낌 없이 크게 재채기를 하렵니다. 그 재채기 소리가 산 너머 마을에 여우가 태어나는 소리로 들려도, 그래서 저를 교양 없는 사람이나 강낭콩 순을 다 뜯어먹은 노루 새끼쯤으로 여겨도 그냥 내지르겠습니다. 긴 여행의 끝에 식구들이 지치면 잘게 쪼갠 자작나무로 탕약을 끓이겠습니다. 작은 곱돌탕관에 약재를 넣고 토방에 앉아 자작자작 탕약을 끓이겠습니다. 탕약관에서 나는 달큼하고 구수하고 향기로운 내음새와 약이 끓는 삐삐 즐거운 소리가 약보다 더 약이 되겠지요. 아이와 이별하기 전날 밤 돌 속에서 부처를 건져냈다는 아이의 할아버지 이야기와 처남을 큰 바위에 수양아들로 입양시켰다는 할머니 이야기,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태몽으로 꾸었다는 크나큰 범, 잉어, 복숭아 이야기,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봤다는 벼락을 맞아 바윗돌이 되었다는 큰 살쾡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네들의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은 소 같았던 삶을 아이가 잠들 때까지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참 묘연합니다. 답답해요. 델타에 이어 엡실론, 세타 같은 낯선 이름의 바이러스가 출몰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아이에게, 아이의 아버지에게 백석 시집을 보내줘야 할까 봅니다. 낡고 닳고 상처 입은 감각과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가슴속 바위틈에서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당나귀 같은 것, 슬픔, 사랑, 희망 같은 것, 그런 것, 그런 이야기들이 다시 샘솟게 하기 위해서 백석 시집을 꺼내야 할까 봅니다. 시집을 읽으며 쌀랑쌀랑 눈을 맞을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다시 생각해야 할까 봅니다.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했던 사람. 마가리* 오막살이의 방언 제비손이구손이* 서로 마주 앉아 다리를 엇갈리게 끼우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대로 세며 노래를 부르는 놀이 -대부분의 단어와 문장을 백석 시인의 시에서 인용했습니다.- 전북 장수 출생으로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되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9.08 16:5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길상 시인 - 로맹 가리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 조종사, 영화감독, 배우 진 세버그의 남편, 유능한 외교관, 야생동물 보호주의자이며 모든 속박과 권위를 거부한 사회 개혁가이기도 했다. 전쟁과 불평등과 인간소외가 여전한 세상을 향하여 독설을 날리는 냉소주의자였고 반전주의자였고 반문명주의자였던 로맹 가리 읽다 보면 가슴이 아리고 섬뜩하고 어딘가 씁쓸한 이야기들이 그의 삶만큼이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소설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의 대화와 수많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페루 해변에 카페를 차린 사내의 정체는 뭘까. 그 여자는 왜 이곳으로 죽으러 온 걸까. 새들은 왜 하필 페루에 가서 죽는 걸까. 다 읽고 나서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페루일까. 시베리아, 사할린, 아우슈비츠, 페루는 세상의 끝으로 통했다. 나치나 지배세력의 탄압으로부터 피신한 소수자나 약자들이 그 척박한 땅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전쟁의 고통을 통감했던 주인공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추동해온 제국주의자들의 근대적 이성과 합리주의에 독설을 내뱉는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프랑스에서, 스페인과 쿠바에서 큰 전투를 치른 후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 그는 전쟁과 지배권력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모든 것이 역겨웠다. 물질과 타락한 권력에 종속된 세상,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만행을 알면서도 죄의식 하나 없이 사람들은 시를 썼으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식사를 했다. 그들은 도덕적 위기를 사치와 이기적 동기로 해결했던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랑을 비아냥거리며, 속물적인 그녀를 도와주면서 싹튼 사랑의 감정도 고독의 아홉 번째 바다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값싼 희망과 타협하려는 순간 그 죄의식이 그를 옥죄었던 것일까. 그곳은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그의 내면의 바닷가였던 셈이다. 자신을 박해하는 자와 동일시하던 그는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이라고 말을 잇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 새들은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조국이라는,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우리는 지금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일까. 로맹 가리는 결국 권총 자살이라는 실존적 선택을 했다. 이제 아우슈비츠, 시베리아, 사할린, 페루라는 집단적 죄악의 현장은 우리 몫으로 남겨져 있다.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창작과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9.01 17:2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작가 -탁경은 ‘러닝 하이’(자음과 모음)

모든 운동에는 어느 정도 육체의 고통이 뒤따른다. 가장 무난해 보이는 걷기조차 오래 걸으면 발목이 아프고 발바닥이 당긴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할 때는 고통을 대신할 재미를 찾게 된다. 팀을 이루거나 짝을 지어서 하는 구기 종목은 서로 몸을 부딪고 말을 섞을 수 있어서 힘들지만 즐겁게 뛸 수 있다. 반면 달리기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독한 운동이라고 한다. 탁경은 작가의 청소년 장편소설 「러닝 하이」는 달리기를 통해 성장해 가는 두 소녀의 이야기다. 서하빈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러닝크루를 검색한다. 충분히 사랑 받고 자랐지만 갑자기 외톨이가 된 듯했고, 자신을 버린 친부모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빈이 휴학하겠다고 했을 때 양부모는 사랑하는 딸의 결정을 존중했다. 하빈은 러닝 하이라는 러닝 크루에 가입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러닝 크루는 주말마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모여 달린 다음 쿨하게 헤어지는 모임이었다. 하빈은 그곳에서 두 살 아래의 열다섯 살 권민희를 만났다. 민희는 스스로 존재감이 없다고 믿는 아이였다. 남자애들은 민희의 살찐 외모를 비하했고, 맞벌이하는 부모는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살림을 도맡아 하는 민희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민희는 러닝 크루 첫날 겨우 2킬로미터를 달리고 주저앉았다. 두 소녀의 두 번째 만남은 마포대교 위였다. 답답함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민희는 마포대교까지 걸었다. 대교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트였다. 하빈은 매주 금요일마다 마포대교를 지켰다. 여섯 살 위의 오빠가 하던 일이었는데 하빈이 하겠다고 나섰다. 대교에는 투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날 하빈과 민희는 조금 더 친해졌다. 마포대교는 두 소녀를 달리기 멘토와 멘티로 이어준 연대의 다리였다. 민희는 러닝 크루의 하빈, 설이 언니, 하나 언니를 만나며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다. 민희의 특별한 미각과 요리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하빈은 입양아라는 충격에서 벗어나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함께 달렸던 사람들은 하빈의 상처가 아물도록 보듬었다. 나 스스로에게 잘 대해 주기로 했어. 그래야 남들도 날 소중하게 대할 테니까.(194쪽) 하빈의 다짐은 민희를 뜨끔하게 했다. 민희는 가족 안에서도, 하나뿐인 친구 시영이한테도, 선생님이나 선배 사이에서도 한 번도 1순위였던 적이 없어서 늘 불만이었다.(194쪽) 하빈의 말은 원망과 분노로 가득했던 민희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무도 날 칭찬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칭찬해주면 된다.는 답에 이르도록 했다. 두 소녀와 취업 준비생 설이 언니, 하나 언니는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서 오래 달릴 수 있을 것이다. 탁경은 작가는, 공부라는 중압감에 짓눌려 날마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가는 청소년들에게 함께 달리자고 연대의 손을 내밀고 있다. 독자들에게 아이들의 러닝 크루가 되어달라고 청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민희가 자신의 빛나는 가치를 깨닫도록, 아직 닿지 않은 미래가 설렘으로 다가오도록. /황보윤 작가

  • 문학·출판
  • 기고
  • 2021.08.25 18:5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무진기행」은 <무진으로 가는 버스>, <밤에 만난 사람들>,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와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무진기행」의 나에게 무진은 애써 지우고 싶은 자기이며 잊고 있었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곳이다. 무진은 어둡던 청년시절과 자신을 닮은 이들이 여전히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승옥의 인물들에게 생활이란 남들이 별 생각 없이 예사로 사는 그런 생활이며, 「무진기행」은 생활과 자기 세계 사이의 갈등이 대립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바다는 상상도 되지 않는 먼지 낀 도시에서, 바쁜 일과 중에, 무표정한 우편배달부가 던져주고 간 나의 편지 속에서 쓸쓸하다라는 말을 보았을 때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과연 무엇을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었을까? (중략) 내가 그 바닷가에서 그 단어에 걸어보던 모든 것에 만족할 만큼 도시의 내가 바닷가의 나의 심경에 공명할 수 있었을 것인가? 아니 그것이 필요하기나 했었을까? (중략) 그 대답을 아니다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진은 근대적 가치와 전통적인 가치가 혼재된 공간이며, 바빠도 서툴게 바쁜 곳일 뿐 완전한 도시적 성향을 갖추지 못한 곳이다. 윤희중은 무진에서 만난 조, 박, 하인숙에게서 과거와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실패와 환멸의 기억을 되새긴다. 무진을 떠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이 진정 원하던 세계를 선택하지 못하고 생활로 귀환하는, 환멸의 순환 고리를 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인 것이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희중이 아내인 영의 전보를 받고 갑자기 무진을 떠나게 되면서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지만, 이내 찢어버리는 행위는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독자는 윤희중이 결국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나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텍스트 안에 감춰둔 장치를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광주 역구내를 빠져나오며 본 미친 여자의 비명을 들으며,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격리되어 의용군 징발과 국군의 징병 모두를 기피한 후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汚辱)을 견디던, 무진의 골방에서 쓴 일기에 제가 지금 미친다면이라 쓴 문구를 떠올렸던 것과 하인숙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소리에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를 떠올리는 태도는 윤희중이 무진에서 만난 하인숙을 청년시절의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계였음을 들추게 한다. 저자가 텍스트 읽기를 유도하고 독자가 몰입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생산의 순환이 무한하다. 작가 김승옥은 419, 516 직후의 한국문학에서 반짝이는 별이었다.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전후 1960년대 초반, 생존만이 절대가치였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도덕적 가치도 양보해야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던 전후 현실에서는 인간다운 삶의 형식을 위한 문제의식이 필요했다. 그의 소설은 생존을 위한 윤리적 물음에 왜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너무나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한다. 1964년 발표이후 60여 년이 지나는 지금도 「무진기행」이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절필을 하고, 이후 뇌졸중으로 잃은 말 대신 필담을 나누는 소설가 김승옥을 고라니가 뛰어노는 순천만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순천문학관의 집필실과 서울 본가를 오가며 무진을 새롭게 만나게 될 우리를 기다린다. 무진에서의 그의 세계는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419, 516은 저에게 역사는 집단적 폭력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실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서는 절대가치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상대적인 세계라면 행위의 결정권자는 나의 욕망 또는 나의 이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승옥, 『싫을 때는 싫다고 하라』 /정숙인 소설가

  • 문학·출판
  • 기고
  • 2021.08.18 19: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김용택 외 ‘해찰하기 딱 좋은 전북 천리길’

감나무가 보이는 것은 마을이 멀지 않다는 뜻이다. 이름에 감나무가 들어간 길도 마찬가지다. 이곳에는 저마다 살길을 찾아 드나들던 산성이 있고, 간절한 마음을 밝히는 절이 있다. 풍류 깊은 폭포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마을이 있다.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이들을 모두 품어주는 고종시마실길. 전북 천리길 중 하나인 이 길은 완주군 소양면 위봉산성부터 위봉사와 위봉폭포, 동상면 다자미마을과 학동마을에 이르는 11㎞ 구간이다. 이름에 담긴 고종시(高宗枾)는 동상면 특산품인 곶감을 만드는 감의 이름. 언제 걸어도 좋지만, 감꽃 피는 늦은 봄이나 알알이 붉게 물든 고종시가 익어가는 가을은 더 반갑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서늘한 바람, 생명이 움찔하는 계곡, 밤이슬 젖은 바짓가랑이에 차이는 날벌레들, 놀란 가슴을 털어내며 깔깔대는 달빛, 대숲은 곳곳에서 술렁이고, 댓잎처럼 날카롭고 빠른 바람이 숲에서 불어온다. 그 바람은 적벽에 부는 동남풍처럼 기세가 등등하다. 그 기운에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도 길을 낸다. 그래서 길을 가다 모퉁이를 만나면 더 반갑다. 그 구부러진 자리에서 손을 잡고 싶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잰걸음을 하거나 뛰어가기도 한다. 느티나무와 참나무, 서나무와 때죽나무, 산벚나무와 소나무가 산 아랫마을과 사람들을 품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이 소담한 길. 이 길을 머금은 숲에 꽃 피고 잎 지고 눈 내리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물소리를 귓전 가득 품었을 바람은 이야기를 품은 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있고, 그 길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그러니 길을 나서면 우선 내 마음부터 다정하고 볼 일이다. 전북의 길을 걸을 땐 『해찰하기 딱 좋은 전북 천리길』(전북문화관광재단2018)을 벗 삼으면 더없이 좋다. 길을 보면 길에 서 있는 내가 보인다(완주), 달빛을 찍어 달빛 위에(정읍), 물길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장수), 싸목싸목 걷다 보면 솔래솔래 풀린다(김제)와 같이 인문생태적으로 가치가 높은 길을 14개 시군마다 한 곳씩 선택해 전북의 문학인들이 직접 걸으며 영근 생각과 감동을 엮었다. 낯설면 낯선 만큼, 낯익으면 또 낯익은 그만큼 설레고 정다운 전북 천리길의 여정. 이 길에 서면 꼭 해찰해야 한다. 기웃기웃, 두리번두리번. 딴 길로 새면 또 다른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맑은 바람 소리가 걸음을 떼는 길 위로 푸르게 깔린다. 발자국에 발자국이 놓이고, 그 위에 또 발자국이 쌓이며 사람들은 구불구불 이야기를 담은 길을 낸다. 질기지만 고운 인연과 일상의 소박한 풍경이 자분자분 살갑게 말을 걸어온다. 손잡고 내딛는 걸음과 걸음에, 길과 길을 잇는 선에, 해찰하기 딱 좋은 전북 천리길에 우리가 있다. /최기우 작가

  • 문학·출판
  • 기고
  • 2021.08.11 17:0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 김근혜 저 ‘유령이 된 소년’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혹 자신의 신념을 버리거나 의도하지 않게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불안하고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청소년기의 불안에 대한 농도는 성인의 그것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러한 불안으로 흔들리는 신념과 가치관을 다잡기 위해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얼마 전, 김근혜 동화작가가 청소년 소설 <유령이 된 소년>을 출간했다.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가다 보면 곤지산에 위치한 초록바위가 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참수 터였다. 작가는 참수 터에 세워진 소년 조형물을 보고 소설을 구상했다고 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신념을 버리고도 목숨을 잃은 홍이를 통해 단우의 성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주인공 단우에게는 등반가인 아버지가 히말라야로 등반하러 가서 실종되는 일이 발생한다. 엄마와 단우의 일상은 깨지고, 방황하는 단우를 데리고 결국 엄마 고향인 전주로 내려오게 된다. 전학을 왔지만 단우아버지의 실종 사건은 꼬리표처럼 다시 단우의 상처를 건드는 사건에 휘말린다. 이일로 국회의원 아들인 경준이와의 갈등은 학교폭력위원회에까지 불려가게 된다. 폭력의 결과는 봉사활동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초록바위진혼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진혼제를 보고 곤지산으로 발길을 돌려 천주교 신자들의 참수 터였던 곳까지 귀신에 홀린 듯 올라간다. 그곳에서 이상한 차림으로 서 있는 아이 홍이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가 천주교 신자였지만 신념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의 만류에도 산으로 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반항과 일탈을 일삼던 단우에게 홍이와의 만남은 아버지의 산에 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빠는 가족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멋대로 내던졌고, 엄마는 우울증에 빠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나도 내 멋대로 사는 거다. -작품 중에서 단우는 아빠가 그리웠고 엄마의 위로가 필요했다. 혼자서 아버지의 부재를 이겨내기에는 어렸다. 그 아픔을 일탈과 폭력으로 채웠지만, 주변의 선생님과 성당 아저씨, 엄마의 사랑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일상으로 데려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어도 그게 다른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선택이 늘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선택의 결과가 대부분 시행착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행착오는 삶을 더 단단해지도록 한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힘겨운 과정을 문학과 함께 한다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문학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과 사회에 묻고 싶은 부조리와 불합리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유령이 된 소년》을 통해 청소년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떠올리고 성장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단우와 홍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동화작가 이경옥

  • 문화
  • 기고
  • 2021.07.28 16:4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시시 벨 저, 고정아 역 '엘 데포'

언제인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어느 날은 학교의 지붕이 열리고 로봇을 조종하며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표지가 귀여워 집어 든 『엘 데포』에서 어린 시절 나의 슈퍼 파워를 다시 찾아냈다. 후천적으로 청각장애를 얻은 시시는 학교에 가기 위해 고성능 보청기를 착용해야 했다. 가슴께가 불룩 튀어나오는 기계를 매달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건네야 했다. 종일 마이크를 목에 걸고 다니는 담임 선생님 덕에 시시는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됐다. 시시는 남몰래 이걸 슈퍼 파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아이들과의 관계를 쌓는데도 이 보청기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엘 데포(시시의 영웅 이름)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슈퍼 파워를 사용했습니다. 보청기를 들고 싱클맨 선생님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내는 일이었지요.(엘 데포 中)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자습시간, 반 아이들이 모두 떠들 때도 시시는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오는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재능처럼 보이기도 했을 테다. 나는 오래도록 아토피를 앓고 있다. 어릴 때는 팔과 다리에만 일어나던 피부 습진이 성장기를 지나면서 손과 발에 자리 잡았다. 손에 힘을 주는 대부분의 일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도록 양손의 악력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머물렀다. 덕분에 나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특히 혼자서는 캔이나 페트병 음료를 열 수 없는 상황을 자주 마주쳐야 했다. 집에 혼자 남아 생수병을 열기 위해 시도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소리를 지르며 잔뜩 성을 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매번 혼자 남을 때마다 물을 마시지 않을 수도,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렛대의 원리를 정확하게 활용하는 아이가 되었다. 지렛대는 어디에서든, 무엇으로든 재료만 있다면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영수증도, 작게 찢은 조각도, 여러 번 덧댄 실도, 가위도! 남들과 다른 것?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창의력과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다름도 놀라운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것이 우리의 슈퍼 파워 입니다.(엘 데포 中) 손이 불편해 별수 없이 무엇이든 지렛대로 만들던 상상력은 나의 특별한 능력이자 슈퍼 파워가 됐다. 이제는 손에 힘이 없는 것은 큰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수많은 도구가 있으니 말이다. 몇 달 사이 10년이 넘도록 유일하게 멀쩡하던 엄지손가락에도 피부염이 번졌다. 엄지손가락이 편안하지 않은 삶에 또다시 적응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엘 데포』를 만나 꽤 많은 불안이 정돈됐다. 나는 도구를 무척이나 잘 쓰는 사람이니까 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상상력이 있잖아! 하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7.21 16: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찰리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여름은 울창하게 뻗어간다. 마음의 구멍들은 저녁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세기 바쁘다. 유쾌하지 않은 나른한 삶, 살다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과 마음이 축 처지는 날이 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심통이 나고 힘들다는 생각에 주저앉을 때가 많다. 팍팍한 삶 앞에서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완벽함을 쫓느라 마음이 불편할 때면 오롯이 집중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 보는 걸 즐긴다.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는 해칭연습을 하면서 그 안에 무거운 짐도 풀어놓고 스트레스를 날리곤 한다. 책상위에 놓인 그림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찰리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다. 논리적인 설명도 없고 미사여구도 없고 삽화도 화려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펼쳐보기 좋은 얇은 두께, 글밥이 적고 드로잉이 맘에 들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선문답처럼 주고받는 대화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림에 빠져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소년은 두더지, 여우, 말을 만난다. 삶의 궁금한 점이 많은 소년과 케이크를 좋아하는 두더지, 상처받아 말 수가 적은 여우,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말이 나온다. 서로가 견고한 유대와 사랑을 나누며 삶의 문제를 대화하며 나아간다. 주인공 소년이 동물에게 질문하고 그 동물이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으로 전개되는 그림책이다. 네 명의 친구들이 주고받는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대화와 우정, 그리고 반려견이 밟고 지나가 그림에 그대로 남은 강아지 발자국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각각 그대로 완결된 작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짧은 글과 그림, 좋은 글귀들이 가득했다. 네 컵은 반이 빈 거니, 반이 찬 거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난 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아주 작아. 두더지가 말했어요. 그러네. 소년이 말했어요.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살면서 얻는 가장 멋진 깨달음은 뭐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어떤 것도 친절함을 이길 수 없어 말이 말했어요. 친절함은 조용히 모든 것을 압도해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어. 소년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도 뒤돌아 봐. 말이 말했습니다. 멀찍이 걷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서로에게 기대어 토닥여주며 힘든 길을 걸어간다. 덤덤한 말투로 대화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128페이지 분량의 서정적인 그림체와 짧은 글귀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 안의 답을 찾기에 충분했다. 말없는 여우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듬직한 말의 위로의 문장들까지 마음에 큰 자유를 줬다. 짧지만 담백하게 풀어나가는 대화 속에서 진정한 나는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것을 느꼈다. 삶의 여러 단면이 이들의 대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찰리맥커시는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은 언어의 바다를 통과해야 닿을 수 있는 섬과 같다라고 말하며 글과 그림에 서사를 따라 가지 않고 무언가 따뜻하고 편안한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힘들어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모든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며 원천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때론 무척이나 포괄적인 사랑 앞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타인에 대한 미움과 의심은 우리 주변의 아름다움에 집중해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면 어떤 큰 문제가 닥쳐도 호젓하게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폭풍우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며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존재를 인정하는 소년의 말에 깊은 성찰을 갖게 된다. 코로나19의 끝이 보이지 않아 참담하다.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일상을 지켜내고, 어려운 상황을 잘 대처하고 있는 모두를 토닥토닥 해주고 싶다. 가볍게 읽어도 좋고 깊게 읽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책, 내면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 한 자락을 잡고 싶을 때 꺼내보면 좋은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지치고 힘든 어른들에게 위로가 되고 삶에 대한 고찰이 녹아있는 그림책,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7.14 17: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이영종 시인 -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우리는 던져진다. 태양계 끝에서 바라보면 해쓱한 푸른 점에 맡겨진다. 첫 울음은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미션을 말하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언제든 아픔이 끓는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세포에 감겨있는 디엔에이를 풀면 명왕성(소행성 134340)까지 다다른다. 그 속에 해야 할 일과 잘 하는 일이 담겨있다. 어떤 에이아이도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랑의 아련한 그림자에 가슴 뛰지 않는다. 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에이모 토울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름을 말하라는 비신스키 검사에게 백작은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쓸데 없는 그런 작위와 칭호들은 얼마든지 가져도 좋소라고 말하는 검사에게서 백작의 나락을 읽을 수 있다. 백작은 죽을 때까지 메트로폴 호텔을 나올 수 없다. 한 걸음이라도 호텔 밖으로 나간다면 총살될 것이다. 백작은 학문과 사회생활로 다져진 품격을 지니고 있고, 문학를 사랑하며,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진 그야말로 신사다. 자유로움을 가지려면 자유롭지 않은 상태를 겪어봐야 한다는 듯 그곳은 쓰라린 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려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해야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의 날개로 난다.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 입에 갈대를 물고 나는 기러기처럼 지혜를 다해 허허로운 들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꽃을 피운다. 백작은 호텔에서 만나게 될 니나와 그녀의 딸 소피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경제적 숙명, 문화, 지식, 심리, 사회, 신체, 언어의 감옥을 넘는다. 깃펜으로 펜싱을 하는 백작은 우리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나이다. 소피야가 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하더라도 음 하나하나를 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현명한 지혜를 긍정적인 자세에서 찾으려 한다. 백작은 똑바른 자세는 침착성과 참여 정신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준다며, 6미터 되는 방에서 50킬로미터를 걷는다.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궁정 만찬 모임에 갔을 때 그를 헬레네 옆에 앉히지 않았더라면 트로이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자리 배치의 중요성을 말한다. 백작은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온도계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한 번도 일정을 정해놓고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점심 식사 전에 온전히 충실한 시간을 보냈으므로 오후에는 현명한 자유로움을 누려야 한다고 믿었으며, 시작과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에 몰입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신사였다. 사람을 보는 그의 눈은 버들가지의 눈을 닮았다. 서성거리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첫인상은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칵테일의 재료는 각자의 농담에 웃어줄 수 있고 각자의 실수를 눈감아줄 수 있는, 그리고 대화 중에 서로에게 소리 지르지 않는 두 가지로 한정되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목적 있는 삶을, 그리고 신이 허락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고, 우려를 표명한 다음에는 세 발짝 물러서야 한다. 우정이나 유무 보존의 법칙을 말하기도 한다. 우정의 지속 기간은 결코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베토벤을 귀먹게 만들고 모네를 눈멀게 만든 바로 그 신이 우리에게 준 것을 나중에 와서 반드시 회수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경제와 심리에 우레를 친다. 백작이 속삭인다. 목욕부터 해. 뭘 좀 먹고 와인도 한잔하라고. 그리고 밤새 푹 자도록 해.

  • 문학·출판
  • 기고
  • 2021.06.16 16:3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전은희 ‘웃음 찾는 겁깨비’

춤추고 노래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는 옛날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이다. 때로는 무섭고 심술궂기도 하지만 순박하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 어렸을 때 우리는 도깨비를 상상하며 신기하고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곤 했다. 전은희 작가는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를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탄생시켰다. <웃음 찾는 겁깨비>의 주인공 겁깨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겁이 많은 어린 도깨비이다. 인간을 골탕 먹여야 도깨비 방망이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어, 대장깨비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도깨비 방망이를 잃어버려 그걸 주운 건호를 따라가 한바탕 소동을 겪는다. 건호는 도깨비 방망이를 주는 대신 하루만 학교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한다. 겁깨비는 아이들을 골려주고 겁을 주고 교실을 엉망진창을 만든다. 하지만 나중에는 교실에 눈을 내리게 하고 바닥을 매끈한 얼음판으로 만들어 함께 신나게 논다. 그 과정에서 인간을 골탕 먹일 때보다 인간에게 웃음을 줄 때 방망이의 에너지가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기로 핸드폰을 충전하듯이 인간을 골탕 먹여야 도깨비 방망이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는 설정과 겁이 많은 도깨비라는 새로운 캐릭터는 이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고리타분하고 낡은 이미지의 도깨비가 우리 반 친구처럼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 천둥 같은 소리로 방귀를 뀌는 아빠와 큰소리로 건호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며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겁깨비의 모습에 아이들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낄 것 같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겁깨비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 즐겁게 웃고 즐기는 경험을 할 것이다. 세련되고 멋진 모습의 전은희 작가가 옛 이야기나 우리 신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의외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간 써온 작품들을 보면서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소재지만 새롭고 낯설게 접근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반짝임을 만들어 내는 작가라는 걸 알았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책 속에 푹 빠져서 신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멋진 작품들을 순풍순풍 써주었으면 좋겠다.

  • 문화
  • 기고
  • 2021.06.09 16: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박상재 ‘아바타 나영일’

선배동화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이 있다. 많이 읽어라. 아마 이 말은 동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박상재 작가 또한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일을 꾸준히 실천해야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박상재 작가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순창군에서 처음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 천방지축 오찰방은 그가 자라난 곳, 장수군 계북 초등학교가 동화 속 참샘 초등학교가 그 모델이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할까보다. 많이 경험하는 것, 작가의 경험이 좋은 배경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곳간에 모아둔 귀한 씨앗과도 같다. 박상재 작가의 많은 작품 중에는 아바타 나영일이란 저학년 인성동화가 있다. 동화 속 나영일은 집에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나 소풍을 가서도 엄마의 지시를 받는다. 나영일, 스스로 결정해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영일은 일기를 쓰고, 엄마가 그것을 읽는다. 그리고 어이없게 잘 썼다고 칭찬을 해준다. 누구의 일기인지 알 수 없다. 나의 첫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의 주인공 레오는 나영일과 비교하면 혁명을 일으켰다. 내 길은 내가 갈 거야.라고. 어느 날 영일이네 반은 실내 스케이트장에 가게 된다. 엄마는 전에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준다는 아빠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포기시킨 적이 있었다. 막상 느닷없이 스케이트를 타려니 두려운 영일에게 민수가 다가와 스케이트 신는 것을 도와주며 말한다. 영일아, 무서워하지 마. 엉덩방아 몇 번 찧을 생각하면 돼. 넘어져도 아프지 않아. 아이가 어른보다 낫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체험을 말리는 엄마 탓으로 엄마가 없으면 모든 게 두려워지는 영일이다. 그런 순간 영일아! 두려워하지 마.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겪어봐!라며 친구 곁에 지켜준다. 그럼에도 벌벌 떠는 영일이를 보고 민수는 야, 나영일. 네가 스스로 해 봐. 난 몰라!하며 영일이 손을 뿌리치고 가버린다. 민수는 볼모지에 친구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부딪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 스스로 해 봐!라고. 그때부터 영일이는 한 발, 한 발 스스로 내딛기 시작하고, 나의 결정이란 의미를 찾아간다. 자신의 과오를 너무 빨리 깨닫는 엄마를 보며 급속결말에 웃음이 나오지만 요즘 아이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소재를 다룬 동화다. 이밖에 박상재 작가는 도깨비, 장승, 솟대, 허수아비, 고무신, 도자기 등을 문화를 소재로 한 동화를 많이 썼다. 틈만 나면 동화의 글감이 될 만한 소재를 찾기 위해 각종 매체에 관심을 갖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글감을 찾기 위한 노력은 작가들 모두의 공통과제다. 동화의 독자는 어린이다. 하지만 아바타 나영일은 읽을 필요가 있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을 조정하려는 부모, 어쩌면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을 수 있다는 동화의 이점을 볼 수 있다. 박상재 작가의 아바타 나영일을 통해 세상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사유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길 바란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6.02 18: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시인 - 이충렬 ‘간송 전형필’

작년에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품을 경매로 내놓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비록 상속세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간송미술관을 아끼던 이들이 우려를 표명했고,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최근에는 이건희 회장이 평생 모았던 예술품 기증 또한 사람들의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이처럼 특별한 예술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많은 관심이 쏠리고 사람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곤 한다. 우리 문화재를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어쩌면 문화재에 대해 무관심한 이라도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나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그가 일본에 뺏길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세창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에 한국 문화의 지킴이로 거듭 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다룬 책을 접하기는 처음이다. 이 책은 단순한 인간 전형필의 일대기를 넘어선다. <간송 전형필>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고 우리 문화의 숨결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던 한 인간의 일대기이자 살아 있는 역사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희미하던 때, 그 가치를 모르고 귀한 서화들이 불쏘시개로 전락하거나 헐값으로 고물상에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덩달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치 역시 한없이 추락하던 시절이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의 문화재를 굳건히 지켜낸 이가 바로 전형필이다. 일부 허구적인 내용이 곁들여졌지만 그래도 간송의 생애 전반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가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 곁으로 다시 돌리기 위해 일본인 수집가들과 벌였던 협상과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1930년대의 박진감 넘치는 당시가 떠오른다. 자칫하면 일본인의 개인 수장품으로 또는 일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들이 간송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만석꾼으로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되는 삶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쓴다고 해도 누가 무어라 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개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만약 그가 우리 문화재에 대해 무관심하고 개인의 향락에만 취했더라면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은 지금쯤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글의 제작 경위를 알려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그렇고, 국보로 지정된 청자와 백자, 그리고 수많은 서화가 그렇다. 이 책은 간송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이지만 우리 문화재에 무관심했던 우리 조상에 대한 반성을 떠올리게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왜 그때 우리는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던가. 그 시절 우리는 왜 우리 문화재를 그렇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회의가 무수히 들었다. 비록 지금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지만 당시 간송이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우리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게 꼭 문화재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5.26 18:0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 타탸나 루바쇼바, 인드르지흐 야니체크 ‘ROBOT’

지난 2월, 서울에서 지인과 만나 점심을 같이 먹을 때의 일이다. 밀린 안부를 나누는 우리 등 뒤에서 고객님께 맛있는 음식을 가져가는 중입니다라는 음성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돌아보니 로봇이었다. 서빙하는 로봇이라니! 지인과 나는 음식을 나르는 로봇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졸졸 쫓았다. 지난 주말에 광주비엔날레에 다녀온 회사 동료는 전시 안내를 로봇이 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코로나-19의 장기화가 첨단기술의 발전을 가속화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지만, 나와는 먼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치 누군가 명령어를 입력한 것처럼 나는 책장에서 『ROBOT』을 꺼내 들었다. 『ROBOT』은 체코의 시나리오 작가 타탸나 루바쇼바와 일러스트레이터 인드르지흐 야니체크가 협업하여 만든 책. 이 그래픽노블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인간의 흔적을 탐사하는 로봇들의 탐험기쯤 되려나. 비옷을 입고 다니는 과학자 로봇 윌리엄과 모자를 쓴 탐험가 로봇 메리웨더는 자원을 찾고 그들 종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탐사한다. 오래전에 인류는 사라졌고, 인간 없는 세상은 산과 강, 광활한 자연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도시를 둘러싼 성벽 바깥세상은 온통 처음 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경이롭다. 윌리엄과 메리웨더는 숲을 헤치고, 절벽을 오르고, 동굴 속을 걸으며 발견한 인류의 유물들을 엉뚱하게 해석해 낸다. 인류와 로봇 종족의 비밀을 밝혀낼 귀중한 증거로 수집한 표본은 선이 꼬인 이어폰, 리모컨, 알람 시계 같은 것들. 프로그래밍된 기계답지 않게 천진난만하고 수다스러운 두 로봇과 함께하는 모험은 유머와 재치가 윤활유가 되어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준다.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은 윌리엄과 용감하지만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메리웨더의 조합도 흥미롭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두 로봇의 여정을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응용해 시원시원하게 표현한 장면들도 탐험의 즐거움을 더한다. 『ROBOT』의 한국어판을 담당한 편집자는 우연히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얼마 후 다시 우연히도 프라하에 살게 되었으며, 또 다른 우연이 겹쳐 책을 샀던 서점의 주인이자, 일러스트 작가인 인드리히의 작품 『ROBOT』을 국내에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었던 2020년도에 그는 프라하의 작은 아파트에 격리되어 한국어판 로봇 탐험기를 만들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과 불안이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옅어졌노라고 소회를 밝혔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 세계 곳곳에서 생태주의적 가치를 일깨우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멀리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그들을 지지하는 시를 쓰는 전주의 시인들이 있고, 구호물품을 보내는 시민들이 있다. 살기 위해 우리가 버린 것들과 끝내 지켜내고자 한 것들의 총합이 인류의 내일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둡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구체적이고 단단한 희망을 발명해 내는 존재라는 믿음을 간직하기로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월의 아찔한 아까시 향기와 붉은 덩굴장미, 붕붕거리는 벌들과 연약한 듯 한없이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을 윌리엄과 메리웨더는 어떻게 명명할까?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5.19 18: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경종호 시인 - 박성우 ‘마음 곁에 두는 마음’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시적인 것들을 만나곤 한다. 그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과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시로 빚어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후자를 시인이라고 한다. 그래도 난 시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눈 맑은 사람이면 모두 시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도, 시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도 참 좋아한다. 오늘은 시인이고, 시적인 것을 항상 곁에 두는 시인의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성우 시인의 산문집 마음 곁에 두는 마음]이다. 희노애락. 우리는 어떤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할까? 기쁨, 화, 슬픔, 아니면 즐거움. 모두 기억하고 살 수는 없겠지. 그래도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잊혀질 것은 적당히 잊혀질 것이고, 남는 것은 또한 남을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꽤 중요했던 어떤 순간들이. 권영상 시인의 누가 지우개를 주면서 라는 동시가 생각난다. 지우고 싶은 날이 있으면 지우라는.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아이는 선뜻 지워버려도 좋은 날은 내게는 없었습니다 하고 말한다. 박성우 시인의 마음 같다. 이 책에는 80편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80여 개의 기억들을 꺼낸다. 오후 3시에 찾아오는 고양이, 녹색 어머니회 아침 봉사, 상추를 문 앞에 놓고 가신 할머니, 모교의 학교에서 청소부 일을 하신 어머니, 봉제공장에서의 20대, 밥 한 끼 같이 먹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얘기하듯, 나른한 오후 커피숍에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중얼거리듯 풀어낸다. 몇 년째 나는 1년에 한 번씩 어느 단체에서 주관하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처음 글쓰기를 접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 이분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단하고, 중요한 것만이 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나는 그것이 아닌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른 사람에게 없는 내 사소한 이야기가 최고의 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 책을 만난다는 것은 이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또한 읽는 것을 즐기는 누구나에게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5.12 18: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입춘 며칠 전 이웃 할아버지께서 허드렛물 흘려보내는 도랑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장마를 염두하고 도랑의 살얼음 낀 진흙을 힘겹게 퍼내고 계셨습니다. 여름이 아직 멀었는데 어찌 서두르시냐 여쭈니 지금이 도랑을 정비해야 할 그때라고 무던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정정하신 분이니 이치에 닿는 말이라 믿고 돕기는 했으나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습니다. 잡초가 자라지 않은 살짝 얼어있는 진흙을 퍼내는 일은 입춘을 앞두고 몸을 풀기에 맞춤한 일이었습니다. 일에 신명이 붙을 때쯤 마실 다녀오시던 이웃 할머니께서 이때가 그때라며 좋은 날을 골라 도랑을 정비한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할아버지에게 남은 믿음을 내어 주며 늙은 농부처럼 몇 계절 너머를 보는 이도 없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도 드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씨앗 안에 담겨 있는 우주, 오묘한 세상살이의 이치 등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경험과 연륜, 혜안이 있어야 하고, 보는 방법도 조금 배워야 하지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 할 수 있다는 것, 마음을 열고 애정을 가지면 시간과 공간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감각의 전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있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배운 책이 「오주석의 한국의 美(미) 특강」 입니다. 잘 가르쳐 주셨으나 저는 좋은 제자가 아니어서 아직도 이 책을 옆에 끼고 읽고 또 읽습니다. 이 책은 한국화를 보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옛사람의 마음으로, 그림의 대각선 길이를 고려해서, 우상에서 좌하로 시선을 이동하며, 선과 여백을 따라 찬찬히, 논리와 이성,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등 그림 감상의 여러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법도 방법이지만 대상을 보고 대하는 작가의 그 곡진한 마음을 배운 것을 저는 더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에 눈은 도구일 뿐이며 마음이 읽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함의를 헤아릴 수 있으며 객관적 사실을 전제한 실체적 감동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만져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 퍽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배운 그 방법과 마음은 글을 읽고 쓸 때, 사람과 세상,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등 여러 곳에서 요긴한 도구가 되어 저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글을 읽을 때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만 읽을 때가 많습니다. 배운 것을 잊고 오만방자한 학생이 된 것이지요. 특히 시가 그렇습니다. 제가 오독 하고선 이미지를 통해 에둘러 말하는 시의 의미 전달 방식 때문이라고, 시인이 절제하고 덜어내는 과정에 너무 충실했다고 핑계를 댑니다. 문제는 조리개를 조절하지 못했던 제 마음의 눈과 함부로 셔터를 눌렀던 제 이성이었는데요. 시의 향기는 맡지 못하고 표현의 화려함만 찾았던 제 오감 때문이었는데요. 그래서 이 책은 당신도 당신이지만 저에게 추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밀려가 그것들에 닿게 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1.05.05 18: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