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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을 해외에 수출하자

살만 루슈디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작가로 유명하다. 1981년 발표했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이 그에게 부커상 세 차례 수상 영예를 안겼던 것이다. 소설은 우리보다 만 2년 늦은 1947년 8월 15일 자정, 인도가 독립하는 순간에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기와 인도 파키스탄 갈등의 역사를 병치시키면서 전개되는 사건이 줄거리인데 신화와 환상, 그리고 현실이 교차되는 마술적 사실주의 경향의 아주 멋진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로 살만 루슈디를 제대로 알았고, 한편으로는 매년 부커상을 주목해왔다. 1988년 〈악마의 시〉라는 작품에서 무함마드에 대한 묘사를 불경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이슬람 최고지도자로부터 처형 명령을 받았던 작가가 바로 그 루슈디다.도내 작가 작품 번역혜택 못 누려부커상을 우리나라 작가가 수상했다고 해서 아직도 문단에서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하다. 헌데 이런 얘기가 어떨지 주저되기는 하지만 수상작 〈채식주의자〉를 읽은 우리나라 작가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이런 것 같다. 당신도 쓰고 나도 쓸 만한 소설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한강의 작품을 폄하할 의도가 눈곱만치도 없다. 오히려 한국문학이 재조명받고 있는 현상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나 자신은 그녀의 또 다른 소설인 〈소년이 온다〉처럼 이 작품을 아주 잘 읽었다는 고백도 해야겠다. 다만 그녀 자신이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처음 출간 당시 문단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세상에 나온 지 칠팔년 넘은 작품이 상을 받게 돼서 어리둥절하다고 작가는 말했다.그렇다. 수상작이 발표된 2007년 이후 한국문학이 내내 캄캄한 암흑기였다면 몰라도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문단은 그동안 부커상이든 다른 문학상이든 수상할 만한 작품들을 적잖이 생산해왔다고 봐야 한다.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새 해외로 소개한 번역 작품들의 상품 선정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주장할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전북의 문학은 절정에 이르러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좋은 작품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전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외에 자주 번역되는 혜택을 누리지는 못했다.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거나 메이저 출판사 혹은 번역원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변방의 작가들에게는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을 우리 전북 문학의 해외 수출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한다.장편소설 한 권 분량을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하는 데는 일급 번역가의 손을 빌리더라도 500만 원이면 가능하다는 얘기를 출판사 몇 곳으로부터 들었다. 우리는 해마다 시 소설, 동화나 희곡 작품집 네다섯 권을 엄선해서 알찬 번역을 의뢰할 참이다.다음 절차는 영업비밀이라 여기서는 공개하지 않겠지만 매년 1억에 못 미치는 자금 지원이면 우리 계획이 어렵지 않게 현실화될 수 있다. 참고로 올 한해 도내 화가들의 해외전시 지원 사업으로 소요되는 예산이 1억4000만원, 그보다 적은 지원이면 문학의 해외 진출도 가능해진다는 얘기다.전북문화관광재단 번역 지원 계획8월부터는 문학진흥법이 발효될 예정이다. 우리 재단이 시방 꾀하는 비책이 그 법에도 잘 부합할 듯해서 기대가 크고 또한 설렌다. 헌데 다른 지역 문학인들이 앞을 다퉈 우리 전북으로 이주하려고 들면, 그땐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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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4 23:02

변하지 않는 것들

새로운 유행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유행이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뒤를 따라가느라 힘겨움을 느낀다. 그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아들이 아버지에게 비디오 리모콘 조작법을 알려주려고 애쓰는 장면처럼 말이다. 케이블 채널을 통해 전개되는 영화의 장면을 보다가 문득 비디오라는 매체도 사라진 테크놀로지가 되어 버렸다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새로움의 변화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모든 이야기에 경쟁 코드 집어 넣어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움을 만들어 낸 인간이 뒤처지는 현상을 두고 독일의 비평가 귄터 안더스는 인간의 골동품화 현상을 오래 전에 논한 바 있다. 초기 미디어 시대를 살았던 안더스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 인간 사이의 격세지감을 두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느새 골동품이 되어 버렸다고 진단한다. 테크놀로지나 미디어 문화를 두고 보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는 문화가 얼마만큼 새로운가 하는 것이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를 생각해 보자. 다양한 채널에서 만들어 지는 두 가지 주요 소재는 아이돌 혹은 음악과 요리 혹은 요리사이다. 뮤방과 쿡방은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이 된다. 프로그램도 하도 많은 탓에 여기에서 일일이 언급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그런데,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두 흐름은 실상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두 편으로 갈라진 요리사들이 제한된 시간 속에서 경합을 벌여도, 기성 가수들이 아마추어 가수들과 한 편이 되는 새로운 시도의 프로그램도 동일하게 지닌 구조가 있다. 그것은 경쟁이다. 음악을 앞세워서 가수와 일반인의 듀오를 만들어 내고, 국내를 넘어서 해외의 요리사들과 함께 요리의 향연을 펼쳐도 대다수의 프로그램들은 서바이벌의 형식을 취한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유행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결국 서바이벌의 변형이다. 유행이나 새로움이나 서바이벌을 다른 형식과 다른 느낌으로 포장해 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서바이벌 형식은 삶의 경쟁을 모토로 삼는 한국의 기업 문화와 학교 문화를 대변한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무엇을 보든 서바이벌이 없으면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대결의 긴장감이 시청률을 보장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믿는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이 구조는 문화의 구조로 고착화 되어 버렸다. 그것은 미디어라는 것은 인간을 새로움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골동품을 고착시키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환기시켜 준다. 한국 사회의 경쟁 문화는 모든 이야기 속에 경쟁 코드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현실뿐만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2등은 무의미한 것이고, 4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진정한 변화는 무의식을 바꾸어야진정한 변화는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을 바꾸는 데 있다. 경쟁적으로 채널을 돌리고, 경쟁적으로 주차장의 자리를 찾고, 경쟁적으로 예매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음악을 통한 여유나 맛있는 음식을 통해 삶의 전환은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경쟁적으로 맛집을 발굴하고, 경쟁적으로 환상의 목소리를 전시할 따름이다. 그 속에 문화가 있다고 여기지만 한국 사회의 구조와 삶을 미디어의 한 프로그램으로 전환했을 따름이다. 무의식의 변화는, 이 고리들과 완전히 단절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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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07 23:02

인류의 미래, 나의 미래

얼마 전 중세전쟁사를 전공하여 〈사피엔스〉로 세계적 돌풍을 일으킨 유발하라리가 우리나라에 강연을 왔다. 그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기술자뿐만이 아닌 의사, 변호사까지도 직업을 잃게 될 수 있다고 단언하면서, 강연 말미에서 “수십억 명에 달하는 무용지물이 될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충격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현재 인공지능은 감히 접근하기 힘들다고 여겨졌던 감성을 대표하는 작곡가와 화가의 영역까지 그야말로 마당발식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뛰어 넘어서 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을 찾지 못한다면, 곧 인간은 그야 말로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경고이다. 기술 발달이 사회 변혁 이끌지만실제로 그런 시대가 온다면 인공지능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뉠지 모른다. 인공지능 혜택을 누리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와 전혀 별개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 유한한 자원을 가진 지구는 무한정으로 인간에게 생존의 장을 제공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여 생로병사의 고통을 최소화한 인공지능 소유자와 황폐한 지구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누어질 가능성도 있다. 누구든 새로운 낙원을 건설한 그 곳으로 어떡하든 갈려고 발버둥치는 시대가 도래한다. 이것이 영화 ‘엘리시움’의 줄거리이다. 기술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사회변화를 넘어 변혁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그 기술도 당장 내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데는 상당한 한계성이 있다. 외국으로 출장을 나간 회사원에게 동시통역을 해줄 수 있는 기계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어나 중국어를 공부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아마 그 시간을 다른 곳에 투자한다면 일자리 확충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표정의 변화를 읽어내고, 나아가 그 사람의 감정상태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기술력이라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에 적절한 통역을 해주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은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이다. 지금 구글의 번역기를 돌려보라.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은 번역이다. 그리고 거의 매년 듣도 보지도 못한 병이 출현하는데 발달된 의술은 거의 속수무책이다. 작년에 메르스사태가 그러하고, 올해 지카가 그러하다. 지카는 우리와는 상당히 무관할 줄 알았는데, 필리핀 여행자가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여름철 모기가 감염자를 물고, 다시 그 모기가 다른 사람을 물면, 지카의 확산은 단순 이론으로는 거의 기하급수적일 것이다. WHO도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스나 지카의 예방약이 나왔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는다.현재 고통 해결하지는 못해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정도로 발달하고 있는 기술력이지만 현재 나의 고통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7포세대니 88만원세대로 전락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흙수저로 비하하면서, 헬조선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암담한 인류미래를 걱정하기에는 내 신세가 너무 처참하다. 청년실업률도 문제이지만, 고령화 사회도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더구나 장기적인 경기침체의 예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줄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인공지능은 아직은 요원하다. 지금 당장 사회적 총역량을 모아 적절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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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31 23:02

익산에 전북현대문학관 건립을 제안하며

오는 8월 4일에는 〈문학진흥법〉이 시행된다.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의 수상 소식에 문학 한류의 시대가 왔다느니, 문학이 부흥되었다느니 등등의 호들갑을 떨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법률까지 제정하여 진흥해야 할 지경에까지 내몰린 것이 한국문학의 현주소며 현실인 것이다.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전라북도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한국문학관〉 유치에 나서기로 했고 유치 후보지로 정읍과 남원을 선정했다고 한다. 그나마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다.근대화 애환 집약된 곳에 세워야문학진흥법 3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문학진흥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고, 문학 창작 및 향유와 관련한 국민의 활동을 권장보호육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예산상의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이어 제5조, 8조, 9조, 10조, 11조, 12조, 16조, 19조 등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이 할 수 있는 법률적 책무가 규정되어 있다. 자치단체장들이 마음만 먹으면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전북도민이며 익산시민으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 익산시와 익산지역사회에 〈전북현대문학관〉 건립을 제안한다.익산은 한국문학의 현재이다.전라북도는 지금도 한국문학의 현재이다.가람 이병기 선생을 비롯해 평론가 천이두, 소설가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시인 안도현, 박성우, 김경주 등이 익산에 살았거나 원광대 출신들이다. 당연히 익산은 현대문학의 현재를 살고 있다. 전라북도로 확장하면 시인으로서는 신석정, 고은, 김용택, 복효근 등이 있고 소설가로는 채만식, 최명희, 서정인, 박상륭 신경숙, 은희경, 손홍규, 이병천, 정도상 등이 활동했거나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미처 호명하지 못한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이 수두룩하다.익산은 호남의 교차로였다. 호남을 떠나는 마지막 역이었고, 호남으로 들어서는 첫 역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모이고 흩어진 곳이었다. 한 시대의 슬픔과 상처, 영광과 몰락이 고스란히 반영된 익산에 〈전북현대문학관〉이 들어선다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전북현대문학관은 삼남을 떠나고 삼남으로 들어서는 익산역 앞의 원도심에 들어서야 한다. 근대화의 애환이 집약되어 있는 원도심을 떠나 지을 수는 없다.아주 거칠게 상상해보면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정보원, 교육원, 창작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첫째, 정보원은 전북 현대문학에 관한 모든 자료가 아날로그적으로 수집되어야 하고 디지털 아카이브도 구축하는 업무를 주로 관장한다. 자료의 상설전시, 기획전시, 주요 작가의 개별 작가의 방이나 서재도 재현해야 한다. 둘째, 교육원은 문학교육과 학술활동, 해외 교류, 전문인력의 양성 및 지원의 업무를 주로 관장한다. 또한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문학의 수용과 향수를 위해 라이브러리 파크를 운영한다. 셋째, 창조원은 전문작가의 창작지원, 작가 레지던시, 다른 장르와의 융복합적 콘텐츠 개발 및 지원과 투자를 주로 관장한다.문학적예술적으로 건축을이렇게 기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지 않으면 문학관은 지속가능성을 상실할 것이고 그저 또 하나의 건물로만 존재할 것이다. 지속가능성과 새로운 창의성을 유지하는 것이 문학관 운영의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건축도 여기에 맞게 문학적이며 예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만일 익산역 앞의 원도심에 〈전북현대문학관〉이 들어선다면, 익산은 새로운 문화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관이 있다고 해서 전북현대문학관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것을 위해 문화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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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4 23:02

한복 물결, 저 징허게 이쁜 꽃밭

옷이 날개라는 속담,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실감한 적이 있다. 산사의 방 한 칸을 얻어 공부하던 시절에 스님들 헌 바지 하나를 빌려 입던 날의 일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편한 바지가 있었다니!앉거나 서거나, 혹은 걸어 다니거나 바지는 정말이지 편했다. 오죽했으면 일부러 다리를 들어 올리려고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두 다리가 신들린 듯 번갈아 하늘로 날아오르듯 했다. 그래서 알았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이래서 생겼구나, 하고.다시는 한복을 입지 않았던 사연설이었던가? 결혼빔으로 선사받은 한복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고향집을 찾아갈 적에도 그랬다. 아마도 혼인한 해였을 것이니, 벌써 삼십년도 넘은 얘기다. 아내는 붉은 치마에 오방색이 찬연한 까치저고리 차림이었고 나는 연분홍 바지에 짙은 청색 마고자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할머니들이 우리 부부를 보더니 길가에 세워둔 채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시면서 좀체 놔주지를 않았다. 징허게 이쁘다고, 어쩌면 이렇게 곱냐고 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그때 할머님들의 낯빛이 또렷하다. 하지만 시골집에 도착해서 TV를 시청하던 중에 아주 낭패스런 얘기를 듣고 말았다. 내가 다시는 한복을 입지 않았던 사연이 거기서 비롯했다. 실내에서라면 몰라도 외출할 때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받쳐 입어야 하는 법이라고, 만약 그렇지 않고 마고자만 달랑 걸치고 밖에 나서는 건 상것들의 옷차림이라고 한복 전문가를 자처하는 어떤 여자가 TV에 출연해서 사납게 꾸짖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두루마기가 없었다. 까짓 두루마기 한 벌쯤은 어렵잖게 장만할 수도 있었지만 한번 빈정 상해버렸던 터라 그걸 맞추러가기가 영 싫었다. 내 한복은 그날 이후 장롱 속에 매장된 채로 삼십 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여자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나는 더러 그때를 떠올려보곤 한다.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런 얘기를 언급한 이유가 혹시 두루마기 한 벌 더 팔아보겠다는 얕은 장사꾼의 수작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오방색의 화려한 옷 위에, 더구나 값비싼 호박(琥珀) 단추까지 매달린 저고리와 마고자 위에 반드시 그 칙칙한 쥐색 두루마기를 껴입어야만 한다고 했던 이유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내 한복에게 미안해진다.요즘 들어 전주 한옥마을에는 한복 물결이 출렁인다. 꽃밭도 그런 꽃밭이 따로 없을 정도다. 한복에서 무슨 피톤치드라도 발산되는 것인지, 나는 저절로 흥이 일곤 하는 한복 꽃밭을 구경하느라고 일부러 발길을 그리 돌리기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잠시 길가에 세워두고는 징허게 이쁘다고 들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들 무리 가운데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만약 두루마기까지 입어야 하는 법이라고 돼먹지 않은 훈계를 한다면 그들 역시 오래 전의 나처럼 입고 있던 한복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도로 벗어 내던질지도 모른다.규격화된 환경에서는 질식해 못 살아문화는 그런 것이다. 생전에 무슨 음식을 좋아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홍동백서, 조율시이(棗栗枾梨)식으로 규격화된 제사상을 차리는 환경에서는 질식해서 살지 못하는 게 문화다. 치마폭이 거꾸로 여며지면 기생, 아얌 같은 쓰개가 아닌 전모(氈帽)라는 이름의 어우동 쓰개 역시 기생 모자라는 따위의 괜한 간섭이 한옥마을 인근에서 들려오지나 않을지 별별 걱정을 다 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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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7 23:02

축제란 무엇일까

영화제가 끝났다. 새삼 영화제가 무엇일까라는 자문을 해 보았다. 여러 장면들이 지나가면서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프리드리히 헤겔은 존재의 기원에 어리석음을 두었다는 이유로 셸링을 꾸짖었다. 헤겔은 대번에 심기가 불편했다. 인간의 현존재에 시원적 어리석음을 귀속시키는 일은 헤겔에게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희대의 오독을 불러올 골칫거리가 분명했다.좋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 외에도철학자 아비탈 로넬의 어리석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어리석음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헤겔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불편한 일일 것이다. 영화제 전에 화제를 모았던 알파고와의 대결의 결과 인간의 스마트함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매력이 스마트함과 이성적인 것일까라는 생각을 새삼 해 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자주 발견한다. 코미디 영화가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어리석음을 하나의 장르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 아닌가.아비탈 로넬은 이어서 말한다. 타자 앞에서 나는 어리석다라는 지혜야 말로 진정한 철학적 앎이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주류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발견해 내는 동시에 정리와 탐구를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일종의 오류로 배제되거나 통제되어 왔다.영화제를 하다보면 계몽주의자에 가까워질 때가 많다. 세상에는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사유를 담은 작품도 있어요.라고 말이다. 실상 영화제에 대한 저널의 글들을 보면 상영작품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대부분 기사는 행사에 대한 것이다. 덕분에 작품을 소개하려는 의지는 더 커진다. 그런데, 올해 새삼스럽게 드는 생각은 영화제라는 곳도,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모아 두는 것도 계몽의 의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먼저 영화가 보여주는 어리석음이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상 각지에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들이 보여주는 우둔함, 유럽의 이민자들이 벌이는 갈등 그리고 코미디와 폭력을 오가는 장르적 변주들은 대부분 인간의 어리석음을 기반으로 한다.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들을 보며 스스로 각성하기도 하고, 어리석음을 보태기도 한다.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그렇게까지 불편한 장면을 만들어야 했는가라는 것이다. 그런 질문이 나오는 영화의 상당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의 행동이 일으키는 불편함을 주제로 삼는다.그러나, 질문은 그 장면만 빼면 아름다울 텐데 왜 불편하고 힘든 장면을 넣었느냐고 반문한다. 정답은 이미 질문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불편해 했을 한 장면을 위해 전체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단편 영화 심사위원으로 왔던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도 자주 받았던 질문이다. 진지한 영화가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편함을 카메라를 통해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시선이 그러한 현실에 가 닿을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일영화제는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장소다. 흔히 축제를 좋고 아름다운 것, 화려한 레드 카펫의 무대로 상상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리석음의 교감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런 진심이 꽤 통했던 것 같다. 50회 이상 늘린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지난해 보다 늘린 상영작 편수를 통해, 그 어느 해보다 잘난 체 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지만 그 또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어리석음들이 모여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영화제는 분명 특별한 시간이다. 나는 이러한 시간들이 축제가 끝난 후 우리의 일상에 더 많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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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0 23:02

내 맘대로 엮어본 전주국제영화제

나는 그저 그런 단순히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관객일 따름이다. 영화촬영을 하고 있는 현장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레드카펫을 걷는 연예인에게도 예쁜 여배우를 빼고는 별로 관심도 없는, 해외의 영화제나 심지어 국내의 다른 영화제에도 참가해보지 않은 무척이나 소극적인 관객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러가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전주영화제는 지성스럽게 참가하였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전주국제영화제를 내 맘대로 엮어볼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형식적 행사 줄인 파격적인 개막식내게 전주영화제의 시작은 개막식 예매부터 시작된다. 개막식 예매를 직접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예매 시작 채 2분이 안되어 매진이었다. 예매 시작 30분전부터 영화제 홈피에 접속해 오픈만을 기다리다가 재빨리 좋은 좌석을 지정해 예매를 시도한다. 아뿔사 좋은 좌석은 초대석으로 지정되어 예매가 안 된다. 또 다시 괜찮은 좌석으로 메뚜기 뜀을 시도한다. 벌써 다른 사람이 예매했다. 별 수 없다. 2층 가장 외진 곳으로 날아간다. 다행히도 예매가 된다.이렇게 어렵사리 예매를 했으나, 문제는 개막식이었다. 개막 시작 2시간 전에 도착해도 소리 문화의 전당 주차장은 엄두도 못낸다. 게스트 차량만 통과시켜주기 때문이다. 괜스레 심사가 뒤틀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영화감독과 배우, 그리고 영화축제를 위해 수고해주신 분들인 만큼 당연한 대우이다. 하지만 기분은 어지간해서 풀리지 않는다.그런데 작년부터 야외에서 개막식을 진행한 덕택에 예매가 많이 수월해지고 주차 문제도 많이 풀렸다.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올해는 더욱 파격적인 개막식이었다. 긴 레드카펫 행사가 있었고, 이어서 간단한 개막식 행사가 이어졌다. 시장님의 개막 선언과 불꽃놀이에 이어서 간단한 공연과 심사위원 소개와 인터뷰 진행으로 끝났다. 지역인사 분들의 기나 긴 연이은 축사가 빠진 것이다. 참가자에게는 흥미 없는 주례사를 듣지 않아 다행이지만, 내년 예산 확보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싶다.무어라 해도 영화제의 꽃은 영화이다. 일 때문에 많은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으나, 3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임에도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만 기억나는 1회 폐막작 트라우마로 흥미가 없어진 때문이기도 했다. 매회 몇 편의 독립영화를 관람했으나, 인내심이 부족하여 중간에 그냥 나오기도 하였다. 흥미를 끄는 영화도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관람 의욕을 북돋우지는 못했다. 작년에 본 우리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옹고집 노친네가 전단지에 실린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을 믿고, 복권을 받기 위해 긴 여행을 아들과 함께 다녀오면서 부자간의 갈등을 풀고 가족애를 회복하는 네브래스카를 재미있게 본 후 올해는 더 많은 영화를 관람해보리라 결심했다. 이번 개막작 본투비블루도 추위에 떨었던 고통을 보상해줄 정도의 우수작이었다. 다음 날 본 샌드스톰은 수작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이다. 감독과의 대화도 매우 유익했다.많은 사람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축제영화제도 축제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축제이다. 많은 전북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전 국민에게 흥미 있는 축제로, 전 지구인에게도 오고 싶은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러 장애를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겠지만, 한바탕의 재미가 아닌 인생을 전환시켜주고 보듬어주는 한 마당의 꿈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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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3 23:02

체르노빌의 목소리

지난 2월 23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201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합독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초록시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합독회는 내가 먼저 제안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이정현 사무처장이 좋다고 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매주 화요일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어느덧 4월 19일 저녁에 읽기가 끝났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묘사도 서술도 없는 언어의 뼈들이 가시처럼 내 눈을 찔렀다. 30년 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엄마, 나 못 참겠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숲은 아무도 안 씻겨줘요. 숲도 죽을 거예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방사선을 그려보세요. 나는 노란 비가 내리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빨간 강도 그렸어요.”1986년 4월 26일 발전소의 제4원자로가 폭발하자 체르노빌 주변에는 사신(死神)이 덮쳤다. 방사선이란 사신은 냄새도 색깔도 없이 공기에 섞여 미세먼지보다 더 작은 빛으로 날아다녔다. 사고가 나자마자 소방대원, 군인, 해체작업자, 엔지니어 들은 심지어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영웅이 되었지만 핵에 오염되어 빠르게 병들었고 상상도 못할 지경으로 망가진 채 죽어야 했다. 뒤이어 사고현장에 도착한 공산당원, 마을주민들, 교사, 기자, 과학자, 작가, 사진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체르노빌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신의 검은 손에 몸과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내며 자식이었고 부모였다. 그들은 정치와 관료주의 그리고 서방에 대한 정치공세라는 시스템에 가로막혔고, 집단적인 무지와 방심 그리고 국가와 언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핵발전소의 사고가 내린 이 재앙의 깊이와 예리한 칼질이 어떻게 삶을 완벽하게 무너트리는지 알지 못했다. 뒤늦게 발견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체르노빌 사람들은 그저 병에 걸린 채 죽어가야만 했다. 〈체르노빌 목소리〉의 처음과 끝은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내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첫모임에서 첫 번째 장을 읽는 순간, 모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삼키고 견디느라 제대로 낭독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방사선 덩어리가 된 남편에 대한 여자의 지극한 사랑은 참으로 위대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과 방사선이 삶을 근본에서부터 망가뜨려도,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는 생애의 폐허 속에서도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 사랑의 말들을 읽을 때, 그냥 울었다. 합독에 참여했던 초록시민들은 어떤 해설과 평가도 없이 그냥 소리 내어 읽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낭독하면서 몸으로 전해지는 어떤 울림과 떨림의 실체를 느꼈다. 유통기간 지난 원자로 계속 도는 한국오늘 4월 26일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체르노빌 이후 30년. 체르노빌의 사신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통기간이 지난 원자로를 계속 돌리고 있으며, 어떤 원전 직원은 히로뽕을 투약하고 근무하기도 했다. 검사내용이 조작된 짝퉁 부품을 10년 이상 사용하고도 처벌받지 않는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30년 전, 1986년 체르노빌의 재앙은 어느 먼 곳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바로 여기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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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6 23:02

술 빚어 나그네를 부를지니

지난 주 금요일에는 전라남도 무안을 다녀왔다. 전주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남짓, 무안 땅 초입에 이르면서부터 짙은 녹색의 양파들이 봄빛을 듬뿍 받고 땅 기운에도 힘을 얻어서 마치 세워놓은 죽창들처럼 꼿꼿하게 자라는 모습들이 눈에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차 판로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알 수 없어도 올 양파 풍작만큼은 충분히 예측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화제가 양파는 아니다. 양파보다 더 푸르게 남도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건,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이 출범한다고 해서 가던 길이었으니까.문화에 관광 융복합 시킨 재단그쪽 재단 명칭은 원래 문화예술재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전라북도가 문화에 관광을 융 복합시킨 형태로 재단 이름을 문화관광재단으로 정해놓자마자 재빨리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는 개명 절차에 들어갔으며 급기야 또 한 차례 출범식을 거행한 것이다. 아, 전라북도에, 그리고 대한민국 천지간 문화관광 모두 복 있으라.문화에 관광을 접붙여 놓고 이를 기념하는 자리였던 만큼 재단 이사장인 이낙연 지사의 환영사는 온통 관광 얘기로 채워졌다. 전라남도에 관광객 5000만 명을 유치하겠다고 처음 공약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뻥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고, 여수 한 지역만 해도 천이삼백만 명이 다녀가 제주도를 코 바로 밑까지 육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불러일으킨 파급력 때문이었을까 하고 필자가 되뇌는 사이에 원인은 이사장 입으로 술술 밝혀졌다. 첫째는 여수 엑스포 영향, 둘째가 KTX 운행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철도여행 프로그램 내일로(Rail路),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수를 중심에 두고 동서와 남북으로 훤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이순신대교 등의 교통망 덕택이었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놀랄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전체 인구가 5000만인데 그중 팔 할이 넘는 이들이 남도 한 곳을 다녀갔다니까 말이다.좋다. 바로 어제 19일, 문화관광의 원조 격인 우리 전북에도 문화관광재단이 출범했다. 장소가 전주시내 한 중심가 팔달로 예술회관이니까 양파 밭 가운데 들어선 거기 무안 쪽보다 불리할 건 없다. 게다가 수도권에서 남도를 찾아가는 이들이라면 시쳇말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그쪽으로 건너갈 엄두를 낼 수도 없을 터다. 굳이 예시하자면 완주 대둔산이나 익산 미륵사지, 전주 한옥마을이며 김제 지평선을 거치지 않고, 일부러 돌아간다면 혹시 몰라도, 제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거기 이르지 못한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도 삼 백리를 향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어떻게든 한 번 불러볼 수는 있어도 손을 잡아끌 순 없다. 대신 여기저기 타는 저녁놀은 분명 같을 터, 다만 술 익는 마을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면 나그네 역시 용빼는 재주 없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리라. 막걸리를 적지 않게 좋아하는 필자인지라, 이 말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싶다.전북 맛, 멋, 문화로 '술 익는 마을'을술 익는 마을이 대체 무엇인가? 그게 우리 전라북도의 맛이고 멋이고 또한 문화다. 문화와 관광이 만나 신접살림을 차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네, 우리 이웃의 문화예술인들에게 간곡히 제안하고 싶다. 우리도 우리 마을마다 술이 익어가도록 만들자. 어제 출범한 재단이 그 절대적인 재료, 기껍게 누룩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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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9 23:02

셰익스피어 코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준비한 프로그램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 특별전이다. 서거 4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 명목이기는 하지만 단일 작가로서 가장 많이 영화화 된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분명 셰익스피어는 첫 번째, 두 번째 손가락 사이에 꼽힐 것이다. 여기에 영감을 주거나 원작을 변형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분명 첫 번째로 꼽힐 수밖에 없다. 작품수도 많은 데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쓴 탓에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준비전주의 상영작 8편은 BFI(브리티쉬 필름 인스티튜트)에서 디지털로 모두 리마스터링한 작품이다. 리마스터링한 작품이 많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제외된 작품들을 고려해 보면 영화사에서 남을 법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1910년대 만들어진 다양한 원작 영화들이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주변국가에서도 셰익스피어 원작을 빌려왔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에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셰익스피어가 영화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보편성을 지닌 이름이었다는 것은 다른 문화 장르로의 전이를 손쉽게 하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문학, 연극, 영화, 음악을 오가며 하나의 보편적 코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기인했다. 〈베니스의 상인〉, 〈오델로〉의 무대가 되는 곳은 베니스다. 심지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는 이탈리아의 베로나로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낯선 도시를 무대로 삼았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과정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충실하게 대변하였다. 사랑은 물론이고, 질투, 과욕, 파멸과 죽음 그리고 후회의 감정들이 희극과 비극을 막론하고 감정의 결을 따라 뚝뚝 묻어난다.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들은 색깔도, 소리도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원한 것은 인간의 행동과 얼굴 속에서 묻어있는 감정이다. 이들은 셰익스피어를 소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극적인 감정들을 연출해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기대어 스크린 위에 인간의 감정을 묘사해 볼 수가 있었다. 100년 이상 보관된 필름들의 모음집인 〈무성시대의 세익스피어〉는 움직이는 화면과 인간의 극적 감정이 조우하는 다양한 순간들을 집성해 놓는다. 셰익스피어 코드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꽃을 피웠다.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영국드라마 중에 국내에서도 공중파로 방영된 〈닥터 후〉 시리즈 중에는 셰익스피어 코드라는 제목을 단 내용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시대로 간 닥터와 여주인공이 셰익스피어를 도와주고, 그 시대에 존재했던 마녀(알고 보면 외계인)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황당한 내용이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을 느꼈다면 공감할 법한 내용이다. 마녀들의 계획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주문을 거는 것이었다. 이 주문의 실체가 바로 셰익스피어 코드다.친숙하기에 더 끌리는 세계로이 강력한 코드는 시간을 초월하여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 당신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이름을 버리세요. 그러면 나도 캐퓰릿의 이름을 버릴게요.라는 줄리엣의 황당한 주문에 물론 그러겠소. 난 이제 로미오가 아니오.라는 넋이 나간 로미오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감정은 일순간 이성을 마비시키고, 당신에게 주문을 걸고, 사람들을 인생극장으로 끌어들인다. 아마 8편의 작품이 신경마비의 순간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것은 친숙하기에 더 끌리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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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2 23:02

알파고 승리, 학습일까 창의일까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여파가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어느새 인공지능이 이렇게 발달하였을까 놀라면서 곧 이어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아이, 로봇’의 ‘비키’와 같은 공포가 실현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져 본다. 또 다른 편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은 인간을 도와주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해치는 인공지능은 없다고 선을 긋는다. 하늘이 무너질 가능성은 없겠지만, 대비책까지 포기하고 마냥 인공지능의 행복한 미래상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번 대국에서 필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주목했다.창의성 발휘·몰입 환경 조성 필요이번 대국에서 구글은 미국 기업인데 알파고 밑에는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알파고를 최초로 개발한 회사가 영국의 딥마인드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를 구글이 인수하여 본부를 여전히 런던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구글이 미국 국기가 아닌 여전히 영국 국기를 걸게 해두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구글은 자본을 통한 점령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부심을 택한 것이다. 미국의 국기가 아닌 영국의 국기 아래 알파고 팀의 자발적인 연구 능력 확대를 택한 것이다. 결과는 구글에게 시총 58조 증가라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이번 대국에서 필자가 주목한 또 하나는 알파고가 전통적인 바둑과는 상당히 다른 수를 두면서 결국 승리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둑에 문외한이라 대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른다. 중계를 들으면서 특히 제 2국의 초반에서 중반까지 알파고가 의외의 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세돌이 우세하다는 해설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런데 막상 후반에 접어들자 알파고의 그 의외의 수가 이세돌을 불리하게 하고 결국 불계패로 몰아갔던 것이다. 4000년 역사를 통해 인류가 개발한 바둑 수를 능가한 기보를 알파고는 어떻게 창출할 수 있었을까. 개발자들이 창의적인 요소를 집어 넣어 프로그램화한 결과일까. 아니면 알파고가 3000만 번의 기보를 집중 학습하는 능력에서 창출된 것일까. 다시 말해 알파고의 창의적인 한수 한수는 창의 학습을 모델로 개발된 교육 프로그램에서 창출된 것인지, 아니면 수없이 많은 시간을 특정 분야에 몰두한 집중 학습의 결과에서 창출된 것일까. 전자라고 한다면 창의적인 학습모델을 개발하는 것에 집중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후자라면 특정 분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협동심 키워주는 교육 우선돼야한편 알파고 개발팀원은 1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100여명이 투자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할 수는 없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작업을 진행할 때 그 시너지 효과가 훨씬 크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인재를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한 사람에게 모든 분야의 능력을 키우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일 것이다. 한 사람에게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키우는 교육보다는 여러 명의 전문가가 협동하여 일을 할 수 있는 협동심을 키워주는 교육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해답은 명백하다. 특별한 창의적인 교육 모델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흥미를 갖고 긴 시간 여러 사람이 협동하여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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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5 23:02

역주행의 당당함

익산 역 앞에는 시에서 조성한 문화예술의 거리가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거리는 아니다. 한국의 어느 중소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낡고 늙은 원도심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 거리다. 나는 그 거리에 있는 E127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 거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기만 해야 하는 일방통행 길이다.익산역 문화예술거리 일방통행길한 달 전쯤의 일이다. 승용차를 몰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들어와 카인드마트 앞에 왔는데 역주행 하는 승용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일방통행의 길에서 역주행하고 있는 자동차가 비켜 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역주행하는 승용차가 비켜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역주행 승용차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적을 빵빵 울리며 나더러 비켜 달라고 성화였다. 어이가 없어 그대로 서 있었더니 양장점 옆으로 방향을 움직여 겨우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교차하면서 여기는 일방통행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X새끼야, 뭘 어쩌라고? 니가 비키면 되지! 라는 욕을 퍼붓고는 가버렸다.112에 전화를 걸어 일방통행로의 역주행에 관련해 민원을 넣었더니, 인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더니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으라는 친절한(?) 해법도 제시해주었다. 그 후로도 이 거리의 역주행 문제는 어떤 해결의 기미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는 사실상 일방통행로가 아닌 쌍방통행로가 되어 버렸다.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들이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하다.며칠 전의 일이다. 승용차를 몰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막 들어오는데 역주행하는 차와 맞닥뜨렸다. 역주행하는 차니까 먼저 양보를 할 줄 알고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상대방 운전자가 창문을 열더니 손짓으로 옆으로 양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처구니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경적을 울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어이 비켜주질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이 길은 일방통행로인데 역주행하는 차가 비켜주셔야죠. 라고 말했다. 아, 그 X발 너무하네. 좀 비켜달라니까! 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쯤 되면 나도 물러설 수는 없다. 일방통행을 위반한 역주행 차가 비켜야 하는 거지. 내가 왜 비킵니까?라고 응수했다.그 때, 허름한 양복점에서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나오더니 거 좀 비켜주지 빡빡하게 나오네. 라고 말했다. 화를 꾹 참고 아니 역주행하는 차가 비켜야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되물었다. 아 거참, 깐깐하시네. 그냥 좀 비켜주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나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양복점에서 나온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그들의 비아냥에도 꾹 참고 버티니까 그들은 역주행하는 차로 가서 양보하라고 말했고, 그 차가 양보(?)했다. 양보라니. 저들은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역주행을 하던 그 운전자는 무슨 승리라도 한 듯이 욕설을 퍼부으며 소위 양보(?)를 했다. 몰염치와 몰상식이 거꾸로 승리하는 순간이었다.몰염치 몰상식이 오히려 큰소리 쳐문화는 시민적 교양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그 오래된 빛을 발휘한다.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가 더 당당한, 몰염치와 몰상식이 늘 염치와 상식을 억압하고 있는 상태가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정치문화까지 천민성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형편이 이러하니, 시민적 교양은 아예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아니 교양이랄 것도 없다. 그저 상식만 지켜도 되는 일이 아닌가. 일방통행로에서의 역주행은 불법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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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9 23:02

우리가 보았던 바둑의 신, 다음은?

전주 출신 이창호 기사가 열여덟 나이에 바둑으로 세계를 제패했을 때, 이전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기사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고 또 몹시도 허탈해마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은 오랜 세월 우리가 믿어왔던 대로 그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라서 지천명의 나이 오십은 돼야 비로소 바둑판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그 충격과 황망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과학 발전의 정점에서 신을 대하다니누군가가 기사 이세돌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만약 바둑의 신이 있다면 몇 점이면 되겠습니까? 이세돌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두 점 깔면 충분합니다. 그런 뒤 덧붙였다. 만약 목숨을 걸라고 한다면 석 점은 깔아야겠죠. 이 얘기는 원래 일본의 기성 후지사와에게 기자들이 물었던 내용이다. 당시 후지사와는 석 점이라고 대답했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게 만약 목숨 대국이라면 넉 점을 깔고 두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세돌은 후지사와보다 한 점씩을 더 줄여 대답한 것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둑을 아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세계 정상급 기사들의 바둑 내용을 평하기를 궁극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바둑 9단을 따로 일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입신(入神)이라고까지 하지 않던가?인간 두뇌의 대표인 이세돌과 인공지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지난주 끝이 났다. 필자 역시 아마 몇 급에 지나지 않는 실력이지만 관전 분야에서만큼은 8단이라고 평소에 자랑하고 다녔던 터라 기대 속에서 대국을 지켜봤고, 이세돌의 연패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두려웠다. 이창호가 바둑계를 평정하던 시대의 당혹감은 오히려 낭만적이었던 셈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4:1이라는 전적만으로 본다면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두 점 접바둑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면 알파고가 바로 바둑의 신일 터였다. 신이라니? 우리가 이 대명천지 과학 발전의 정점에서 막상 신을 대해야 하다니?바둑 대결이 한창일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영국 최대 국립은행이 인공지능을 활용한 로보 어드바이저 도입을 확대하면서 550여명의 인력을 해고할 방침이라는 사실을 전한 바 있다. 그 족집게 도사 로봇이 알려주는 대로 투자하면 과연 수익률이 어떻게 될는지 현재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지만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는 할망정 우리 곁에 투자의 신까지 이미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그런가하면 지난해 언론재단에서는 한 의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로봇이 자동 작성한 신문기사를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작성 주체가 사람인지 로봇인지를 묻는 실험이었는데 불과 46%만 정답을 맞혔다고 한다. 머지않아 기사 작성의 신까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문화예술분야도 로봇이 대체할까문화예술 분야는 어떨 것인가? 로봇이 시를 쓰고 소설을 창작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게임과 달리 예술은 인간 정신의 영역이라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까? 이번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는 단순한 알고리즘을 넘어서서 무엇인가 사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국이 끝난 뒤 이세돌은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지만 필자는 그날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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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2 23:02

'소년 파르티잔' 개봉에 맞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수입한 〈소년 파르티잔〉을 개봉했다. 이에 맞춰 서효인 시인과 함께 명동의 씨네라이브러리 극장에서 대담을 나누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처음부터 〈소년 파르티잔〉을 개막작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고민했던 작품들의 경우 게스트 방문이 어려워지면서 부랴부랴 〈소년 파르티잔〉을 개막작으로 선정하게 됐다. 전주로 옮겨온 후 이전의 개막작 분위기와는 달리 최소한 개막작 감독의 참석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전에는 개막작 게스트가 없이 전주에서는 개막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개막식의 느낌이나 개막작 위상으로 적절치는 않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세상에 대한 의심회의 던지는 일 필요아무려나 오랜만에 〈소년 파르티잔〉을 관람해야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파르티잔이다. 한국에서는 빨치산으로 옮겨진 파르티잔의 원래 뜻은 유격전을 펼치는 비정규군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은 아니지만 레드 콤플렉스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파르티잔이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사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작년 이 무렵에 적당한 개막작의 제목을 고민하던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라는 서효인 시인의 시집을 알게 되었다. 당장에 서점에 달려가 시집을 들춰봤다.항문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옵니다. 당신의 등을 밀어냅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 꽃의 슬픈 유래나 강물의 은결 무늬에 대한 노래에 항문이 간질간질하던 당신, 구타의 음악 소리에 볼기짝이 꽃처럼 붉어져 혼자 타오르고 있던 당신,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참고서를 완주하던 당신, 바로 당신. 붉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 배운 대로, 그렇게.(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부분)나는 시집의 제목과 동일한 시의 내용이 고스란히 영화 속 주인공 알렉산더의 분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원제인 파르티잔을 대신하여 소년 파르티잔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몇 주 혹은 몇 달의 시간이 흘러 출판사 민음사에 방문할 일이 있었을 때 서효인 시인의 이야기를 꺼냈고, 편집부 직원들은 내 앞에 서효인 시인을 데려다 주었다. 그는 민음사 한국문학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지난 주에 서효인 시인을 만났을 때 그는 팀장이 되어있었다. 물론, 팀원은 한 명 밖에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무대 위에서 벌어진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나는 앞서 소개한 이 영화의 제목을 짓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에게 영화를 보고 난 후 정말 당신의 시집과 비교하는 것이 어떤지 질문을 던졌다. 서효인 시인은 감각적 의심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은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첫 시집인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을 내놓았을 때 세상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던지는 것에 열중했다는 표현을 했다.순종만으로는 자아를 성장할 수 없어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산더가 성장과 함께 고민하는 것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심이다. 이 감각적 의심은 한 자아를 성장시킨다. 학교나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질서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순종이지만 순종만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 질서가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이 유지가 되는지를 의심하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된다.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의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부정의 정신은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기다린다. 〈소년 파르티잔〉의 동화적인 상상력은 동생을 안고 도망친 알렉산더를 통해 미래의 시간을 품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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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5 23:02

역사가는 미래를 바라본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E.H. Carr의 유명한 명언이다. 이 명언은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 역사가와 사실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다. 역사가가 다루는 사실은 과거에 있으나, 역사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가 성립된다.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가는 먼지 냄새 풀풀나는 옛날 책과 문서를 왜 뒤지는 걸까. 역사가가 과거의 부스러기를 이렇게 뒤지는 이유가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단순히 궁금해서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가들이 과거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생생한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를 전망해 보는 수단으로 과거를 택했을 따름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는 한 눈은 과거에 두면서, 한 눈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겠다.오늘날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않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만화로만 보아왔던 로봇이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등장할 수 있다고 하니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나는 로봇 태권 V의 세대도 아닌 강철 로봇 마치스테의 세대이다. 마치스테는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된 만화였다. 내용은 이제 거의 기억이 안난다. 어린 소년이 로봇을 시계로 조정하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그런데 실제로 로봇이 나오고, 핸드폰 같은 것으로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면 곧 이어 웨어러블 형태로 시계 같은 것으로 조정기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인간이 조정하는 로봇이 아닌 스스로 학습하여 인지하고 행동하는 로봇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세돌 9단과 컴퓨터와의 바둑 대결이 곧 벌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세돌 9단이 5전 전승을 했으면 한다. 그러나 골퍼들이 평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들다고 하는 홀인원을 로봇 골퍼가 5회 만에 이루었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5전 전승이 아닌 3승을 기원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기술력이 발전하는 시대에서 과거를 통해서 역사가는 미래를 어떻게 전망해줄 수 있을까.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는 청동기와 철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이 급속하게 사회를 변동시켰다. 그 다음 시대의 사회에서는 기술력을 기반으로 급속하게 변화된 사회를 법과 제도를 통해서 통제하는 율령사회가 등장하였다. 또 산업혁명 이후에는 급속하게 팽창된 생산물을 세계 곳곳에 팔고 값싼 원료를 획득하기 위해 제국주의가 등장하였다. 기술력의 팽창과 함께 국가 권력이 형성되고 커져왔던 것을 알 수 있다.기술력 발전과 함께 강조되는 도덕성그런데 최근의 기술력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국경선을 넘어 글로벌화 되고 있다. 기술력의 발전이 통제를 벗어나 자칫 사회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화된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UN과 같은 세계기구가 필요로 할지 모른다. 인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기술력과 권력자들에게 똑같이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될 것이다. 인류 경험상 도덕성은 스스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강제력이 뒤따라야 한다. 기술력의 발전과 함께 도덕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다. 아무튼 사회는 변화되고, 역사는 흘러간다. 역사가의 양쪽 눈이 바쁘게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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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8 23:02

리얼리즘의 복권을 위하여

2월 어느 날, 몹시 바람이 불고 추운 날, 서울의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유홍준이 기획한 〈리얼리즘의 복권〉 전시회에 갔었다. 이종구,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고영훈, 오치균, 권순철, 민정기의 그림이 층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을 찬찬히 보다가 문득 “복권”이라는 말에 어떤 의문이 들었다. 복귀도 아니고 복권이라니……. 한국의 문학예술에서 리얼리즘은 ‘파문’ 당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파문' 당한 한국 문학예술 리얼리즘민중미술, 민족미술, 리얼리즘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풍미할 때에도 당대의 미술시장에서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오윤을 필두로 한 현실주의자들은 ‘미술시장, 당대의 화풍, 아뜨리에’라는 제도의 바깥에 존재하며 현장에서 시대와 격투하며 화폭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온몸으로 참여했었다. 당대 주류비평과 시장은 그들을 그림자처럼 취급했고 무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의 탄압과 투옥, 시장의 외면에 굴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강렬한 전위적 존재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잊혀졌다. 유홍준의 이번 기획전은 한 시대의 추억과 회고를 통해 ‘이 땅의 오늘’을 살피자는 의도로 기획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홍준의 이름을 걸고 리얼리즘을 복권시키겠다는 의도는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성공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추억과 회고에 집중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이란 여전히 ‘과거에 갇힌 시선’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신학철의 〈한국현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오늘의 역사를 준엄하게 담고 있었으며, 이종구는 농민들의 굽은 등과 서슬 퍼런 낫의 ‘투쟁’에서 깊고 푸른 밤의 산 속에 등불 하나로 빛을 내보이고 있는 미황사의 ‘영성’으로 존재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황재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눈 가득 흘러넘칠 듯 눈물을 담고 이 세계의 남루와 가혹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치균과 권순철 민정기 고영훈의 작품 앞에서도 오래 머물렀다. 세계를 채운 어두운 색채와 거친 질감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얼마 전, 옛 보안사령부 건물에 다시 들어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거부당한 문익환 목사가 철조망을 넘어오는 그림을 다시 출품한 임옥상은 당대성이 펄펄 살아 있는 작품으로 유홍준의 기획전에 응답했다. 서른여섯 장의 목탄화로 구성된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결코 팔리지 않을 그림이었다. 시대의 가장 아픈 곳에 응답해온 임옥상의 이 그림은 경찰청 종합상황실의 모니터와 완벽하게 닮아 있다. CCTV가 실시간으로 전송해오는 서른여섯 개의 상황을 경찰청 종합상황실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그 한 복판에 물대포와 맞서고 있는 농민이 서 있다. 임옥상은 노자의 가장 아름다운 이상인 상선약수를 그림의 제목으로 삼아 2015년의 대한민국을 야유하고 있었다. 임옥상은 물을 그렸으니 이제는 불을 그리겠다고, 적당한 제목이 없다고 고민했다. 그 자리에서 삼계화택(三戒火宅)이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불의 그림 삼계화택은 오직 붉은 색의 단색화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즉물적인 것에만 현혹된 건 아닌지이번 〈리얼리즘의 복권〉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품은 황재형의 ‘폭설주의보’였다. 이재규는 이 그림을 “곧바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 겨우 버티고 서있는 산속 집에 내린 ‘폭설주의보’는 우리 모두에게 닥쳐온 위기의 깊이를 짙게 보여준다. 보는 내내 아팠다.”고 평했다. 나도 더 이상의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 모두에게 닥쳐온 위기의 깊이를 우리는 애써 외면하며 겨우 살고 있다. 즉자적이고 즉물적인 그 무엇에만 현혹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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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1 23:02

전라북도 거시기 사전

선생님, 쇳대 주세요.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 부임해 오신 물리 선생님은 젊은데다가 미인이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오죽하면 물리실 청소 당번으로 뽑히는 게 영광이고 자랑이었다. 소년 몇이 그날 그 영광을 안았다. 쇠, 때라니?. 선생님은 당연히 그렇게 반문했다.아, 물리실 끌르는 거요. 소년 하나가 설명했지만 선생님에게는 더욱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끌르는 거?아, 키 말이니? 소년 하나가 손가락을 모아 비트는 수화를 곁들인 다음에야 선생님은 쇳대에 대해 이해했다. 소년들이 그때 일제히 외쳤다. 기요!.표준어 정책으로 사라지는 우리말키(key)를 두고 처음에는 쇠때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왜 기라고 말하는 것인지, 선생님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고운 눈길을 보냈지만 소년들은 그저 신을 내고들 있었다.소년들이 자라서 군대에 갔더란다. 하루는 쇠고깃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선임병들이 사전에 다들 나눠 먹은 터라 기름이 둥둥 뜬 국물이 전부였다. 그걸 본 호남 병사가 순전하게, 정말 알 수 없어서 혼잣말을 해버렸다. 이게 무슨 말국이야?. 그러자 타 시도 출신의 선임병이 귀싸대기를 냅다 갈기더란다. 그도 살코기를 먹었던 선임 가운데 하나였던 터라 비밀이 탄로날까봐 쉬쉬하던 참이었으리라. 야, 쇠고깃국을 두고 뭐, 말(馬) 국이라고?전라도 사투리를 두고 잠시라도 웃는다면 다행이다. 웃을 일 하나 없는 판국에 전라도 사투리라도 있어서 함께 박장대소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기특한가 말이다. 헌데 때로는 억울한 심사가 들 때도 아주 없지는 않다. 쇳대는 그렇다 쳐도 표준어로 등록해야 할 말들을 배척하는 대신 용납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을 마치 선심이나 쓰듯 표준어로 인정할 때가 그렇다.이를테면 사과가 너무 익었다고 한다면 그 사과는 상품가치도 떨어질뿐더러 먹기에도 좀 그렇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너무는 작년에 표준어로 채택이 됐다. 아, 그 물리 선생님은 너무 이쁘셨지, 하고 동창회에서 누군가가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 걸까?손주라는 말도 표준어가 된지 오래다. 명백한 한자어 손자(孫子)를 일러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은 손주라고들 불렀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면 아니고, 기면 죽어도 긴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인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표준어로 채택해야 할 말의 수효가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겠지만 손주라는 말이 표준어로 자리 잡는 바람에 한 자리를 꿰차지 못한 아름다운 전라도 말도 있다.이를테면 열쪼시라는 말이 그렇다. 교양 있는 서울시민들은 닭을 보면 그게 암탉인지 수탉인지, 아니면 병아리인지만 관심을 갖는 모양이다. 씨암탉이란 표현까지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건 속담에 인용된 탓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삼계탕 재료로 딱 좋은, 대닭이나 소닭이 아닌, 중닭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게 바로 열쪼시다. 헌데 이 멋진 표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일러 영계라고 해버리는 것이다. 표준어 정책이 우리 국민들을 조금은 우습게 만들어버린 예다. 깜밥과 눌은밥은 없고 누룽지만 있다고?이제 전북 사투리 지키기 나선다할 수 없다. 우리말이니까 우리가 지킬 수밖에. 그래서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은 우리 사투리사전을 편찬할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사투리사전이라는 말도 싫다. 아구똥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전라북도 거시기사전〉이라고 명명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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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3 23:02

한국 영화인들이 늘어난 베를린 풍경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는 정말로 한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베를린 경쟁작에 한국영화가 있거나 초청작으로 한국영화가 많아서가 아니다. 외화를 수입하려고 하는 한국인들이 대거 베를린 영화제의 EFM(유럽피안필름마켓)의 배지를 달고 왔기 때문이다. 최근 5년 동안 한국 영화의 외화 시장은 큰 증가세를 이루어 왔고, 그러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수입될 작품 완성본 확인하려고베를린의 경쟁 부문을 포함하여 입소문이 난 작품은 이미 국내 수입사에 팔린 지 오래다. 한국인들이 베를린에 온 까닭은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기 위함이 아니다. 미리 지불한 영화의 완성본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언제부터인가 아트영화들의 흥행이 몇몇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면서(여기에는 IPTV를 통한 부가판권 시장의 확장도 이유가 크다), 경쟁구조가 가열화 되었고, 이제는 보기도 전에 선점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제 영화는 선점하여 수입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기도 전에 미리 사지 않으면 화제작이 될 만한 것들을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자본주의적 압박은 점점 큰 도박판이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외 세일즈사들은 한국영화 수입사에게 세 편의 영화를 묶은 패키지들을 판매하려고 한다. 그들로서는 골치 아픈 영화의 판매를 해결하는 방식이 되고, 한국의 수입사는 좋은 영화를 선점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패키지에 응찰한다.여기에 새로운 상황이 하나 더 생겼다. 최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수입한 〈소년 파르티잔〉의 개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 말부터 포털 사이트에 올리는 예고편 동영상들을 모두 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통상적으로 포털 사이트의 예고편 동영상은 수입사들 역시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 왜냐하면, 이 예고편 영상이 영화의 인상을 보여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수입사로서는 이래저래 대중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영화의 예고편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다 제도적 검열까지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예고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면 불필요한 제도다. 예고편에서 성적 노출이나 자극의 빈도라는 것은 현재의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혹여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양산되어 가는 문화에 제동장치가 필요한 일인가 의문이 든다. 자본의 검열, 제도적 검열을 통해 문화는 자유로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지금 팽창하고 있는 예술영화 시장의 실체이고, 따지고 보면 자본과 통제로 잃어버린 허울 좋은 예술 시장이기도 하다.세상에 좋은 영화는 많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영화를 제외한 작품들은 시장을 위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낯선 언어, 낯선 배우, 낯선 감독에 대해 환호할 경우의 수는 지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수입사들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좁은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눈치전이다. 그것은 수입작품 가격을 높이고, 보지도 않고 구매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개봉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자본검열로 잃어버린 예술영화감내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많은 외화가 수입됐다고 좋아하지만 잘 따져보면 포화의 상태에서 좋은 영화를 만날 확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라면 망하는 것이 맞다. 증식해 가는 속도 속에서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달리는 기관차에 비상브레이크를 잡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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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6 23:02

세월을 담아내는 나무처럼

군산엘 가면 자주 만나는 것 중 하나가 제재소이다. 공장의 드넓은 마당에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면 괜히 가슴이 뛰곤 한다. 그렇다고 아무 제재소나 무턱대고 들어가 나무를 구경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차창 밖으로 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던 중, 지인이 군산에 있는 어느 제재소를 인수하였다는 말을 듣고 얼씨구나 하고 드나들게 되었다.오동나무는 시간이 흐르면 명품으로제재소를 들락거리면서 나무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름드리로 쌓여 있는 원목들이 비슷비슷하게만 보여 그저 나무려니 했는데 지금은 초보적인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원목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원목이 아니었고, 나무의 종류와 원산지에 따라 쓰임새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건축자재 중에서 막 쓰는 나무가 뉴송이다. 뉴질랜드 소나무란 뜻인데, 왜송이라고도 부른다. 뉴송은 지름 30센티 정도 자라는데 20여년이 걸린다. 지름 30센티에 나이테가 스무 개 정도 있다는 뜻이다. 이 나무는 너무 물러서 건축 현장에서 막 쓰고 버리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어(魚)상자를 만드는 등의 허드렛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수입하고 있다.요즘 한옥 건축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나무는 미국에서 수입하는 더글라스 퍼라는 나무다. 재질이 단단하고 붉은 색이 은은하게 나와 한옥 재료로 적당하다고들 한다. 이 나무가 지름 30센티 정도 자라려면 60여년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이 나무로 한옥을 지었을 때 삼년 정도가 흐르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단단해서 조각이 잘 안 먹을 정도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으로 갈라지는 특성이 있다.남대문 복원 공사에 사용해야 할 나무는 우리나라 토종의 금강송이어야 했다. 하지만 금강송은 금강산에나 가야 만나볼 수 있을 뿐, 휴전선 남쪽에서는 거의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용했던 나무가 시베리아 적송이었다. 시베리아 적송이 30센티 정도로 자라려면 90여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물론 금강송으로 복원 공사를 해야 했지만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시베리아 적송과 금강송을 육안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 그것을 대목수는 알고 있었고, 손쉽게 시베리아 적송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전문가들은 금강송이나 시베리아 적송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만 금강송으로 남대문을 복원하겠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 국민들 또한 금강송으로 복원할 줄로 알고 있는데 시베리아 적송으로 복원해버린 것이 문제였다.합판으로 만든 가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접착이 약해지거나 부풀어 올라 곧 쓰레기가 된다. 물푸레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원목 가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골동품이 되어 간다. 겉모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합판은 시간을 담아내지 못한다. 시간을 담아내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쓰레기가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란 나무로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명품이 된다.전북문화관광재단, 긴 호흡의 사업을문화도 저와 마찬가지다. 단기순이익을 구하는 작품은 결국 쓰레기가 될 터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작품은 고전이 된다. 뉴송이나 왜송으로 집을 지을 순 없다. 더글라스로 지으면 처음에는 보기가 좋지만 나중에 그 내면의 싸구려가 드러난다. 잘 건조한 금강송이나 적송으로 집을 지으면 천년의 세월을 견디는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갓 출범한 전북문화관광재단도 문화와 관광을 행정적으로 지도하려 들지 말고, 단기사업에만 몰두하지 말고, 금강송이나 적송을 키우는 긴 호흡의 사업에 밝은 눈을 돌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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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02 23:02

임도 보고 뽕도 따러 가는 길

지금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풍경의 하나가 됐지만 뽕밭은 예로부터 물방앗간과 함께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이던 대표적인 로맨스 장소였던가 보다. 〈뽕〉이라는 영화가 지난 80년대 이후 잇따라 제작돼 히트하더니 재작년에도 마치 저 80년대에 응답이라도 하듯 〈뽕 2014〉가 제작 상영된 적이 있다. 문화예술은 '임', 관광은 '뽕밭'그런가하면 우리 고장 부안에서는 벌써 7년째, 〈님의 뽕〉이라는 별난 이름의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지역의 자랑스러운 특산물인 뽕을 홍보하기 위한 축제라고 한다. 발음을 혹 잘못했다가는 상스런 욕설로 들릴 위험이 있지만, 이 명칭의 근거는 보나마나 ‘님도 보고 뽕도 따고’란 우리 속담에 있을 게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 뽕이나 뽕밭이 불러일으킬 자발적 상상력에 편승하려 했을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그러저러한 일들 덕분에 뽕밭은 아예 구경조차 못해봤을 신세대들조차 뽕밭이라고 하면 이제 야릇한 상상을 한번쯤은 하게 될 판이다.말이 나온 김에 물방앗간 얘기도 마저 하고 싶어진다. 물방앗간은 뽕밭 이상 우리 조상들이 아끼던 전통의 성역(性域)이었다고 할 수 있다. 툭 트여 있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뽕밭보다 은밀해서 좋고, 폭풍우나 폭설이 내려도 개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삐걱대면서 돌아갈 물방아소리가 있어 웬만한 소리쯤은 밖으로 새나가지도 않았을 터다. 그래서 전주한옥마을을 찾아오는 젊은 관광객들을 위해서 한옥마을 어디 한갓진 부지에 물방앗간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듣는 귀가 없어서 안타깝다. 옛적 한옥마을이라면 물방앗간 하나 정도는 필시 있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방앗간 입구 기둥에는 작게 이런 글 하나 붙여두면 어떨까 하는데, 연인이세요? 그럼 잠깐 쉬어가세요. 이곳이 우리 전통의….뽕밭이 있고, 물방앗간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전북문화관광재단’이 태동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태중 움직임 단계이니, 아직 탄생까지는 하지 않은 상태라고 고백해야겠다. 수많은 도민들이 예의주시하면서 재단이 도대체 언제 입을 열어 고고성을 터뜨릴지 관심이 많은 판국이라서 아직은 출생 전이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곤 하는 사정을 독자제현들께서 헤아려주셨으면 한다.헌데 많은 이들은 의문을 갖는 듯하다. 다른 광역단체들과는 달리 유독 우리 전라북도에서만 문화에 관광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뻔하다. 차제에는 문화예술이 관광산업에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리라.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문화예술과 관광은 서로 다른 굴속에 사는 두 마리의 토끼가 아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 허둥댈 일은 애초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과 관광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닌, 임과 뽕의 관계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전북문화관광재단 기대하세요문화예술이 임이라면 뽕밭은 관광이다. 임이 없는 사람에게 뽕밭을 가라고 하면 아마 죽을 맛이 될지도 모른다. 그 반대로 임은 있는데 근처에 뽕밭이 없다면 어디를 가야할지 참으로 난감할 게 뻔하다. 요즘 들어 유행하는 무슨 융 복합 그런 게 아니더라도 문화예술과 관광은 서로가 있어서 상승효과를 내기 알맞은 분야들이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은 그 절실한 필요성에 의해 창설이 됐다. 재단은 지금 임도 보고 뽕도 따러 가는 길이다.△이병천 대표이사는 소설가이며 전주MBC에서 PD로 29년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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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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