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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사원

필자는 최근에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했다.광활한 자연 경관이며, 고대와 중세와 현대까지 아우르는 찬란한 유물 유적들, 그냥 그대로 장관이었다. 또한 많은 왕조들이 교체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중에도 적국의 유물을 그대로 두어 자신들의 보고로 삼는 민족들의 슬기로움을 경의롭게 관람하는 복을 누렸던 것이다.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한 곳에그중에서도 그리스 정교의 원류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한 방을 쓰고 있는 성소피아사원에서 필자는 참으로 감탄스런 정경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상을 옛 터키 이슬람인들이 페인트로 덮어씌웠다가 근래에 다시 겉을 긁어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슬람교의 코란 문자들, 무슨 상형의 말씀으로 겹겹이 안치시켜 놓으면서도 병치하여 나란히 기독교의 성화들이나 조형들을 복원시켜 함께 모셔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국에서 몰려온 각양의 민족, 각양의 종교인들이 이 경건한 두 종교의 화목(?)을 관람하게 된 것이다. 회교 국가의 이슬람 사원을 세계 기독교인들이 돈을 내고 꾸역꾸역 모여드는 상황을 보며 감동이 일었다.터키인들은 조석으로 이슬람식 예법을 챙기면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의 도래에 마냥 기뻐하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기 종교의 강박한 고수보다는 돈벌이가 더 신이 난 것이다. 유럽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선교다 포교다 하는 건방진 행위는 애시애초 마음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서양 문화는 거의가 기독교 문화라고 필자의 인식이 굳어진 터에 저리도 무한 무변한 이슬람인들의 인문학적 넘나듬에 대하여 필자는 골똘해질 수박에 없었다. 유럽의 모든 역사적 전쟁은 거의 종교전쟁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지금도 종교 분규로 총성이 그치지 않은 마당에 여기서는 천연덕스럽게 두 종교가 화평하고 있었다.아, 이렇게 넘나들고 있구나! 서로의 가로막이 경계가 희미해지고, 국경이니 민족차별이니 무슨 이념이니 고집스럽기만 하던 종교적 교부가 서로는 서로에게 물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번지고 있구나!EU라 하며 유럽이 통합되고 화폐도 유로화로 통일되고, 비자도 없이 오고 가는 저 유럽 나라들은 일찍이 국가의 울타리를 걷어차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넘나드는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고대 문명이 현대에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고, 동양과 서양이 합심하여 지중해에서 유람선을 띄우고 있었으니 상황 변이는 그 궁극을 모를 일이었다.필자에게는 저 원효대사의 화쟁 원융의 이상 설파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우리에게도 중세를 넘어오며 유불선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한타랑을 이룬 것도 괄목할 일이 아닌가. 우리 국민에게 이다지도 시시한 지역 감정이란 도대체 무슨 잠꼬대란 말인가. 남북이 철조망을 걷어차버릴 때도 머지 않지 않은가.저 그리스 터키는 구원은 무슨 구원, 아침 저녁 식사를 교차하여 먹는 그들이 마냥 부럽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를 부르짖었다. 우리 독립선언문에 주장된 바, 아시아의 공영 공생은 그냥 막연한 이념만은 아니다. 속좁은 일본이나 동북 공정 운운하며 음흉하게 속셈부리는 중국을 이끌고서 의연한 형님으로서 우리가 동북 아시아 통합 문명권을 창달한다면 오죽 좋으랴 싶다.우리가 동북아 통합문명권 창달해야소피아 사원 안에서 예쁜 터키 여고생들에게 둘려싸여 사진 촬영에 응했던 감격은 순전히 한류 열풍 덕이었다. 세계 젊은이들에게 한국인들은 신비의 민족이 되어 있었다. 굽 높은 우리네 문화 인기를 실감하고서 환상적 세계 넘나들기 여정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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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8 23:02

지역 생활문화의 보물창고, 전통시장

나는 지역 전통시장을 지역의 생활문화가 담겨 있는 ‘보물창고’라 여긴다. 그래서 전통시장을 찾아 지역의 보물들을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심사에 지역문화의 거래 현장을 기웃거리며 즐길 때가 많다. 무주반딧불시장 '우리대장간'무주에 있는 무주반딧불시장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무주반딧불시장 중심을 가로질러 끝자락 모퉁이에는 ‘우리대장간’이라는 작은 대장간이 있다. 오늘날 보기 드문 대장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랍고 반갑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에 무주를 방문하는 날엔 꼭 한 번씩 들르게 되었다. ‘우리대장간’은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쇠를 다루는 소리로 주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한 평쯤 되는 작은 공간 안에는 쇠를 달구는 화덕이 있고, 쇠를 두드리고 다루는 모루와 풀무를 비롯한 여러 연장들이 주인장의 손이 닿기 편한 위치에 가지런히 배치돼 있다. 대장간을 찾는 사람 대부분 농사를 짓는 노인들이다. 무주에 사는 사람들도 있고, 타 지역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농사에 필요한 연장을 새로 장만하기도 하고, 오래 사용해 무뎌진 도구를 고쳐가기도 한다. 모두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맘에 흡족한 듯, 쇠를 다루는 주인장의 꼼꼼한 솜씨로 맞춤으로 잘된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내가 대장간을 찾는 날마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항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차분히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그 일에 대한 사명감이 대단했다.“옛날에는 대장간이 잘되고 인정도 받던 직업이었지. 내가 열아홉에 시작해 벌써 48년이 되었네! ‘우리대장간’이 전북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작을 거야. 그래도 여기서 돈 벌어 자식들 다 키우고 했으니 나에게는 소중하고 고마운 대장간이지.”“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장날이면 꼭 찾아와! 그래서 대장간이 아직 있는 것이고,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지. 내 사명이라고 생각해!, 항상 그분들에게 고맙지.” “이 일도 10년쯤 아니, 15년쯤 되면 사라질 것이 분명해.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고, 이 일을 할 사람들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힘들고 돈이 되지 않아서지. 젊은 사람들은 머리만 조금 쓰면 이 일로도 벌어먹고도 살 수 있지만, 누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드나!”“어찌 보면 이것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라서 난 자부심이 있어. 그런데 이런 전통문화가 사라지게 돼 안타까워. 나라에서 이런 문화를 지킬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데 말이여. 이런 문화가 사라지지 않게 젊은 사람들이 신경 좀 써 봐.” “요즘은 대장간이 흔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행사하는 곳에서 전화가 많이 와! 돈 줄 테니 대장간 행사 좀 하게 오라고. 그런데 그런 곳에서 하는 것이 무슨 대장간이겠어. 흉내만 내는 것이지.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 대장간은 이렇게 사람들 보고 의견도 들으며 만들어가는 것이지,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전통문화를 흉내만 내면서 잘못 소개하면 안 되지!”전통문화, 행사 돈벌이 도구되면 안돼말씀 속에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 현실적인 문제가 담겨 있어 전통문화에 대해 다시금 고민할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전통이라고 떠들어대며 지켜야 할 문화는 지키지 못하고, 전통이라는 모형만 갖춘 박제로 행사용 돈벌이 도구가 되어 그 속에 담긴 얼과 정신은 무시하며 전통이라고 우겨대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는 문화들과 뒤범벅되어 이것이 우리의 전통이라며 포장하고 자랑하는 모습들이 생각나 부끄러웠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자신의 이름이 ‘박재용’임을 알려주며, 자주 찾아와 놀다 가라고 하셨다. 그것이 곧 우리의 전통을 만나는 것이며, 지키는 것이고, 전통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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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1 23:02

산경표 속 후백제 방어 전략

우리나라 전통지리학의 지침서가 산경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신경준에 의해 편찬됐다. 순창읍 남산대에서 출생한 신경준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절대 산을 넘지 않는다’는 기본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산경표를 완성했다. 1900년대 초 우리 곁을 떠났다가 1980년 서울 인사동 고서방에서 산악인 이우형이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산경표 속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의 도읍을 지킨 산성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후백제 강성함 느껴지는 산성 유적전주 동고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후백제 산성의 특징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됐다. 승암산을 한 바퀴 휘감은 성벽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을 가지고 쌓았다. 성돌은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으로 그 끝이 상당히 길어 달리 견치석(犬齒石)으로도 불린다. 성벽의 뒤쪽에는 성돌과 뒤채움석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기다란 돌로 채웠다. 고려 말 전주성을 축성하면서 성돌 대부분이 반출됐지만 후백제 산성의 비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조선시대 십승지지에 그 이름을 올린 운봉고원을 감싼 백두대간에 동고산성과 축성방법이 비슷한 산성이 많다. 아마도 철의 왕국인 운봉고원을 지키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다. 금강과 섬진강 물줄기를 갈라놓는 금남호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있다. 견훤이 다시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팔공산 남쪽 장수 합미산성은 마치 두부처럼 잘 다듬은 견치석으로 쌓아 지금도 성벽이 위풍당당함을 자랑한다. 장수군 장계면 서쪽 방아다리재 부근에 침령산성이 있는데, 후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使行路)가 통과하던 길목이다. 성벽의 높이가 8m 내외로 전북의 산성 중 가장 높고 웅장하다.진안고원의 서쪽을 휘감은 금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많다. 달리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의 금산분지에서 전주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백령산성이 있다. 이 산성을 쌓기 위해 견훤이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했다는 대목에서 마음까지 숙연해진다. 진안 용담댐 일원에서 전주로 나아갈 때 주로 넘었던 노래재 남쪽에 환미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서쪽 골짜기를 휘감은 포곡식으로 옥수수 낱알모양의 성돌과 품자형 성벽쌓기, 성벽의 뒤채움이 동고산성과 똑같다.삼국시대 때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백두대간 속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에 대한 견훤의 관심이 아주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집중 배치된 많은 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주로 향하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들까지 개축함으로써 철통같은 동쪽 방어망을 구축했다. 후백제는 융성할 때 갑자기 망했다. 그리하여 산경표 속에 남겨놓은 후백제의 산성들을 보면 저절로 견훤의 자신감과 후백제의 강성함이 느껴진다.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돼야얼마 전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다. 서울 북한산성과 함께 한성을 지킨 조선시대 주된 피난성이다. 견훤은 평상시 인봉리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피난성인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 동고산성의 사용 기간이 무척 짧았던지 후백제의 역사이야기가 거의 없다. 이를 근거로 동고산성이 축성되기 이전까지는 전주 남고산성이 후백제의 피난성으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국시대 이후의 왕조들이 대부분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후백제 문화유산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조속히 시작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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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4 23:02

공설운동장, 그 추억과 미래 사이

그 날 아침에는 학교엘 가지 않았다. 공설운동장에서 교련실기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학교 가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위아래 교련복 챙겨 입고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요대와 각반은 교련복 차림의 마지막 완성이었다. 그 두 가지가 빠지면 그저 헐렁한 군복 흉내의 건달 같았지만, 허리에 요대를 철컥 차고 각반을 바짝 동여매는 사이에 우리는 제법 군인다워졌다. 멀리 책에서만 보던 학도병 생각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전주시내의 모든 고등학교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그 동안 갈고 닦은 군사훈련 솜씨를 자랑하고 경쟁하는 날이었다. 남자들은 목총을 들고 ‘찔러 찔러 뒤로 돌아 길게 찔러’ 외치며 총검술을 하고, 여고생들은 들것과 부목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저희들끼리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했다. 전쟁이 곁에 있는 듯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즐기던 곳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험을 보러 그 자리에 모였고 전주시민 수만 명과 함께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며 통성기도를 했다. 그렇게 영험 있는 분의 인도로 그 정도 외치면 통일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또 정말로 운이 좋은 어느 날은 국가대표 축구팀이 화랑과 충무 팀으로 나뉘어 경기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측 터치라인을 따라 돌파하던 김진국 선수가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더 작고 빠르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억은 시간 순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고 공설운동장에서는 체육행사만 펼쳐진 게 아니다. 때로 그 자리는 정치가들의 유세현장이기도 했고 가수들의 콘서트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축제의 메인 싸이트였고, 또 어느 날은 팔달로를 따라 펼쳐지는 퍼레이드의 집결지이자 해산지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설익은 첫사랑을 만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 근처 어디쯤의 버스 안에서 황혼의 로맨스가 싹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기억들 가운데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야구장에서의 어느 날이다. 승부는 격렬했고 관중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날 야구장의 모습이 갑자기 오래 된 극장으로 보였다. 아 이건, 사진으로만 보던 고대 그리이스 극장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반원형의 관중석은 그 시절의 말굽형(horse-shoe shaped) 객석이고 경기장은 오케스트라라 불리던 연기공간이었던 것이다. 포수 뒤편의 관중석 자리만 무대배경이 된다면 영락없는 그 시절의 극장 꼴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타디움, 콜로세움, 오디토리움이 모두 비슷한 뿌리말로부터 나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투수 마운드 언저리는 제단(altar)이 있던 자리이다. 저 공간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몸으로 무엇인가를 공들여 만들어 내고 그를 바라보며 집단으로 갈구하고 즐기던 자리였다. 그렇다면 축제의 뿌리도 결국 이런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것 아닌가? 오늘날 어딜 가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아우성을 치며 노는 자리가 경기장인 건 다 사연이 있는 셈이다. 시민축제 상상 공간으로 됐으면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장은 그냥 운동장이 아니다. 모두가 제 살기에만 바쁘고 제 가족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운동장은 여전히 여럿이 어울려 노는 자리이고 함께 꿈을 꾸는 공간이다. 저 자리가 끝 모를 욕망의 소비 공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도시 한 복판이 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시민축제의 상상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야구장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아이들이 구석구석 들락거리는 거대한 우주선으로 바꿔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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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8 23:02

지역생활문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우울했던 상반기의 시간들을 잊으려고 그런지 아니면 계획되었던 자금을 모조리 소비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난히 이번 가을에는 나라 곳곳에 지역 축제들이 한창이다. 그 축제들은 하나같이 지역문화와 환경, 지역 활성화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생각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삶·문화 거래되는 시장하지만 그 축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몇 여타 축제들을 짜 맞추듯 구성해 명칭만 다를 뿐, 대동소이한 축제들을 양산하고 있어 지역만의 특색과 문화는 살리지 못하고 중복되게 예산만을 낭비하며, 지역축제의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에 대한 이해와 깊은 고민 없이 유행처럼 경쟁하듯 축제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축제를 여는 이유는 지역민의 교류 화합일 것이며, 지역문화를 통한 지역 경제순환을 바라서일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명목만 거창한 축제를 생각하기보단 작아도 좋고, 축제라는 이름이 없어도 좋으니, 지역민이 상호 교류하고 지역 현실과 지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 속에는 지역민이 주체가 되고 참여자가 되어 서로 부담 없이 어울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판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역 전통시장 또한 그 자체가 지역 생활문화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일상의 판이 될 수 있는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상에서 지역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가 지역 전통시장을 찾는 것이다. 전통시장은 지역의 지리적 환경적인 특성에 따라 재배되고 생산되는 것들이 모이며, 그 지역의 수요 욕구에 따라 다양한 품목들이 갖추어지고 구성되는 현상으로 지역 특성의 삶과 문화가 융합되는 창고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지역 시장마다 각기 다른 지역 특성을 보이기에 시장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기회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시장에서는 그 지역의 지리적 자연환경의 작용에 의한 1차 산업의 먹을거리 품목들이 강세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떠한 지역 시장에서는 2차 산업의 가공 품목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 지역의 지리적 환경에 의한 지역 특성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고, 예측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통시장에서는 단순히 대형마트에서처럼 구매의 목적만을 앞세워 시장을 방문하는 것으로는 그 지역의 고유한 삶과 문화를 느끼기에는 어렵다. 시장에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서 대화가 필요하고 그 대화로 서로 협의에 따라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문화교류이며, 그 또한 시장의 거래문화이다. 그로 인해 지역의 생활문화가 유지되기도 하고 생성하기도 하며, 지역경제가 순환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의 거래가 지속해서 형성될 수 있도록 지역 전통시장의 활성화는 중요하다. 전통시장 활성화 중요그러나 현실적으로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에 밀려 쇠퇴해가고 있다. 현재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수요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키며 전통시장을 지켜나갈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전통시장을 통해 지역과 지역민,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상호 교류하고 소통될 수 있는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판이 지역 전통시장에 필요한 때라 여긴다. 그것이 지역의 생활문화를 지속, 자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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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1 23:02

카프카의 'K'와 냉소주의

익명 또는 보통명사의 개념쯤으로 독해되는 ‘K’는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로 유명하지만,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서 주인공이 ‘K’라고 호칭되어 더 유명해졌다. ‘K’는 목수로서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떤 성을 찾았는데 문밖에서부터 거절당한다. 생소한 제도로 막히고, 절차의 까다로움으로 거부되고, 고약한 인습과 상이한 문화로 그의 접근이 차단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인간성 차원도 아니며 다만 외지에서 굴러온 낯선 사람이라는 점 하나로 배척당한다. 이 익명의 ‘K’는 성밖에서 마냥 서성거리는 국외자일 뿐이다. 모든 거부의 눈빛 앞에서 주눅이 들고 스스로 하염없이 왜소해지는 심대한 좌절을 경험케 된다. 카프카 ‘K’의 우울과 침통이 감전되는 듯하다. 외지에서 왔다고 배척해서야필자의 친구 한 사람이 좋은 직장을 버렸던 예화 하나가 떠오른다. 그는 제법 내로라하는 큰 회사를 다녔다. 초반에는 행복하고 희망한 출근이었다고 했다. 사장님도 인품이 고매하고, 회사는 퍽 합리적이며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소속한 ‘과’에서는 거의 모두가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들의 반감은 뿌리가 너무 깊어서 저 ‘카인의 냉소주의’에 몸서리쳤다고 했다. 정치인 거두들이 지역감정을 되새김질할 때여서 그곳 과원들과 동화되기는 너무나 어려워 직장을 스스로 사직했다는 고백이다. 가령 점심때가 되면 자기들끼리만 눈짓으로 교감하여 한 식당으로 몰려가므로 혼자만 덩그렇게 남는 신세였단다. 식사때 정경도 그렇거니와 업무처리 하나하나에서는 오죽했을가. 그런데 우리 사회에 만연된 것은 저러한 지역 감정뿐만 아니다. ‘ㅈ’신문을 구독하는 사람과 ‘ㅎ’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는 서로 친구지간일망정 한자리에 앉았다하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가장 정론에 입각하여 불편부당하게 진실을 기술해야 할 신문이 저리도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소위 거짓 정의를 내걸고, 가장 이성적입네하고 위장하는 모습은 너무나 꼴사나운 모습이다. 대전제가 민주-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발상에서 펜은 달려가야 함에도 어떤 집단에 영합하는 자기 모순 속에 함몰하는 꼴이라니, 종교의 화두가 그렇고, 정치의 각론이 또한 그렇고, 국가관이나 시국관이 또한 양극 쏠림현상으로 치달으니 ‘정반’에서 ‘합’은 절대로 도출되지 않는, 냉소주의의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의 충돌도 아니다. 기득권층과 이에 반하는 계층의 상호 이반이다. 서울 강남권과 강북권의 상호반대를 위한 반대의 의식들은 또한 어떻던가 또는 어떤 분야, 그 재정적 편중과 예산의 몰아주기 행태는 치졸을 넘어 파렴치함의 극에 도달한다.우주의 대 섭리 안에서, 과학이나 철학의 영토인 공적 공간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입각한다면, 합리적 이성주의가 이 땅에서 향유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반목의 장막 거두고 화목해야조영남의 ‘화개장터’란 노래가 있다. 5일장으로, 하루는 전라 경상 두 고을 사람들이 서로의 냉소주의 장막을 거두고 화목하다는 내용이다. 차라리 5일장에서, 나흘은 화목하고 하루만 냉소해도 그게 나을 성싶다. 아니 5일뿐만 아니라 세월 네월 언제나 영원함으로 가는 민족 화해의 계단에 올라서야 할 것이다.‘세월호’는 냉소의 ‘네월호’가 파생, 만연되고, 단순한 인도주의적 정의도 흐려지고 있다. 그 참상의 현장인 진도 앞 바다는 싸늘한 냉소의 짙은 안개가 뒤덮고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반 인간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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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14 23:02

후백제와 초기 청자, 진안 도통리

우리는 청자를 소개할 때마다 ‘고려’를 붙여 ‘고려청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를 천하제일의 명품으로 꼽는데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 청자 제작 기술이 들어온 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부터 10세기까지 그 견해가 다양하다. 아마도 그 주된 배경으로는 중국 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국제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친 후백제의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의 월주요가 우리나라 청자 기술의 출발지라는 점에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 한다.진안 도통리만 문화재로 지정 안돼후백제는 892년 광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45년 동안 오월과 국제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오월에 한 차례의 사신을 파견한 것이 두 나라 국제외교의 전부였다. 918년 견훤은 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말을 실어 오월로 보냈다. 927년 오월 왕 전유는 감사의 뜻을 담아 반상서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전주에 파견했다. 견훤과 전유는 왕대 왕으로 41년 동안 양국의 국제외교를 이끌었다.우리나라의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국제외교를 가장 역동적으로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렇다면 후백제가 오월과 반세기 동안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청자 기술이 후백제로 전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백제와 오월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가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전파 루트가 아니었을까? 이제까지는 오월의 도공이 고려로의 망명이 큰 지지를 받았었다.우리나라 초기청자는 오월의 월주요 도공들이 직접 파견되어 벽돌 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구웠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도공이 중국에 가서 배워 온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에 청자 기술은 오늘날 원자폭탄처럼 국가의 최첨단 기술로 국가에서 직접 관리 운영했다. 오월도 국가 차원에서 월주요의 도공을 특별히 우대하고 후원했다.우리나라와 중국은 가마의 구조와 그 운영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은 벽돌 가마로 그 길이가 40m 이상 되는 대형이지만, 우리나라는 흙 가마로 20m 내외이다. 청자를 굽는 방식에 있어서도 중국은 딱 한번만 구웠지만, 우리나라는 초벌구이를 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다시 굽는 재벌구이다. 천하제일의 고려청자를 빚은 과학의 신비가 가마의 구조와 굽는 방식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지난해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후백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됐다.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중국제 청자로 학계에 보고된 전주 동고산성에서 나온 초기청자도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 그런데 후백제가 갑자기 멸망함으로써 전주로의 공급이 끊기고 도공들의 강제 이주로 인해 후백제의 첨단국가산업단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도자문화 관광정책에 포함해야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터는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부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진안 도통리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일억 년 전 큰 호수였던 진안고원의 고령토와 조상들의 지혜가 만나 일궈낸 것이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부터 손내옹기까지 도자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요즘 마이산 개발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진안군의 관광전략이 발표됐는데, 진안고원의 도자문화를 관광정책에 꼭 포함시켜 관광활성화의 동력으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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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7 23:02

축제는 광장에서

다시 축제의 계절이다. 가장 전주다운 축제인 소리축제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열리는 축제들로 동네가 들썩인다. 거리마다 온갖 색깔의 현수막이 넘쳐나고 유인물들이 흩어져 날린다. 관광객 오백만 시대라는 전주 구도심의 즐거운 가을 풍경이다. 이제 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주를 찾는 이들도 제법 많아졌다. 그 대부분은 블로그를 통해서 하루 일정을 빠듯하게 확인하고 오는 젊은이들이다. 즐길 준비, 놀 준비로 단단히 무장한 축제관광객들이다. 근엄한 공연장·막힌 천막 벗어나하지만 아직도 이 축제의 계절에는 허전한 구석이 많다. 전주 사람들의 표정이 그다지 흥겨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축제의 최대 상품은 지역주민이다. 관광객들은 그 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의 축제를 얼마나 흥겹게 즐기고 있는지 보려고 간다. 거기에 뒤섞여 함께 놀아보려고 불원천리 찾아가는 게 축제관광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독일 맥주 맛 궁금해서 옥토버페스트에 가는 거 아니고, 요사쿠이 마쯔리에 풍경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고, 자라섬 째즈페스티벌에 음반 사러 가는 게 아니다. 전주의 축제는 결정적으로 무엇을 팔까? 한 마디로 전주 사람을 팔아야 한다. 전주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전통문화도시임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낸 음식, 소리를 컨셉으로 한 축제들을 내세워왔다. 하지만 음식도 소리도 그 자체만으로는 상품이 될 수 없고 축제로서의 폭발력도 지닐 수 없다. 전주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흥겨워하고 더불어 잘 노는지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은 전국에 널려있는 지루한 특산물 축제들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전주사람들이 축제를 통해서 잘 노는 모습은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문제는 축제의 공간이다. 근엄한 공연장이나 식당에서, 임시로 만든 가설 천막들 언저리에서 전주다운 흥을 펼쳐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다시 거리와 광장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옛날 식으로 부르자면 동네의 큰 마당이고 고샅이다. 고샅은 동네사람들이 무시로 오고 가며 이야기를 물어 나르던 선(線)적 소통의 공간이다. 이 작고 좁은 길을 통해서 크고 작은 동네의 소식들이 사방팔방, 이 집 저 집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마당이야말로 이 작은 길들이 만나고 서로 뒤엉키는 면(面)적 소통의 공간이었다. 마당에 이르러 비로소 개인들은 집단이 되었고 집안의 밀실에 웅크려 있던 희로애락의 사연들이 광장으로 나와 뒤엉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 일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서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전승되면 축제가 된다. 그런즉 고샅과 마당, 거리와 광장은 축제의 본질적 요건이자 가장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축제를 공연장이나 술집, 가설 천막과 특산물 진열대 안에 가두려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삶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넓은 마당·길거리서 놀 수 있도록그런 축제가 관광객들에게 매력 있을 리 없다. 지역민들의 애환, 전통과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생생한 축제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도시 한 복판의 광장과 그를 둘러싼 거리에서 펼쳐진다. 영국 레딩의 워매드 사이트가 그렇고 호주 애들레이드의 도심 공원인 보태닉 파크, 멕시코 문화예술의 성지와도 같은 소칼로 광장 등이 다 그렇다. 멀리 갈 것 없이 서울시청 앞 광장은 어떤가? 전주의 구도심에는 아직도 광장이 될 만한 공간, 길놀이나 퍼레이드를 펼칠 만한 공간들이 남아 있다. 종합경기장 터도 그렇고 최근 들어선 전통문화의전당처럼 새로 만든 건물들의 앞마당도 있다. 발상을 바꾸면 다 보인다. 문화가 관광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시대라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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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30 23:02

접었던 꿈을 다시 펼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적응해 살다 보니 자신의 꿈과는 멀어지고 다른 방향의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과거의 꿈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그 꿈에 도전하며 삶의 가치를 알아가는 이들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문화 관련 일을 하는 나는, 현장의 삶에 관심이 많아 이곳저곳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어떠한 삶도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시대의 문화를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자신의 끼와 소질 스스로 인식하게내가 예술을 전공해서인지 유독 관심이 가는 삶이 있다. 예술분야에 끼와 소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자신의 꿈을 접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달려온 삶이 그렇다. 이제 그들은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내재하여 있는 끼와 소질을 알고 있기에 아련한 꿈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그런 이유로 시작한 것이 그들에게 자신의 꿈을 스스로 찾을 기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방법은 일반적인 예술 교습처럼 테크닉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끼와 소질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자랑할 기회와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양한 만남에서 여러 꿈을 만나게 되었다. 사진을 하고 싶어 하는 분, 노래와 연주, 작곡을 하고 싶어 하는 분, 글을 쓰는 분, 그림을 그리며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분 등, 그들 각자의 표현은 다르지만, 그들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들과 만난 지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내가 본 그들의 열정은 여느 예술가 못지않았다. 어느 날, 휴대전화에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급 연락 바람’이라는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전화를 했더니 “요즘도 많이 바쁜가 봐? 잘 지내고 있지? 한번 보고 싶네!” 한다.(솔직히 지난주에도 만났다.) 마치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러 번 ‘부재중 전화’가 찍혔음에도 막상 통화 내용은 형식적인 안부 인사뿐이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내게 얼른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먼저 “제가 오늘 한번 놀러 가도 될까요?” 했더니 “어! 그래 좋지. 내가 요즘 이런저런 것을 좀 해 봤는데, 자네 맘에 들지 모르겠네, 하하! 빨리 와!” 한다. 마치 숙제를 잘해 놓고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그에게 갔더니 그는 그동안 그려놓은 그림을 보여주며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작품 설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날 줄을 모른다. 그에게 앞으로의 꿈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 함께 작품 활동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싶다고 한다. 주변서 인정해주면 살아있음을 느껴내가 아는 그들의 생활은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직업과 다시 찾은 꿈을 위해 두 개의 삶을 오가며 이제 더욱 바빠졌다. 그런데도 자신을 주변에서 인정해주기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일어난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각에서 자신이 사회 일원으로 주체가 되어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적극적인 사회활동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늦었다고 할 때가 시작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살며 주변에 인정받는 삶이 얼마나 큰 행복임을 그들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그들을 통해 나 또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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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3 23:02

'아니면 말고'의 교훈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여우가 포도송이를 따려 했다. 아무리 높이 뛰어도 포도덩굴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자 여우는 ‘저 포도는 매우 신 거야’하고 그만두었다는 이야기.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지는 않고 스스로를 기만한 것이다.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며 자가당착하는 그런 세상 사람들의 일탈을 풍자로 경계한 우화인 것이다.삶 포기하는 우를 범해선 안돼필자는 한때 유행하던 ‘아니면 말고’라는 말을 상기한다. 정치권에서 득세한 세력이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상대편에게 허위 사실을 퍼뜨려 그에게 심대한 인격 모독을 끼친 뒤, 이에 강력히 항의하면, 그때에 슬그머니 ‘아니면 말고’하면서 물러서는 야비한 경우들이 많았다. 이미 그 헛소문으로 상대편의 이미지는 말이 아니게 추락한 후였다.그야말로 비굴한 언동의 극치였다. 이때에 그 헛소문을 일컬어 유비통신이라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에 치달을 즈음 정치권에서의 마타도어는 한국인의 얌전한 정서를 뿌리 채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었다.그런데 이솝 여우의 ‘아니면 됐고’나 유비통신의 ‘아니면 말고’는 그 의미상 사뭇 대칭적이다. 전자는 자기 변명을 위해 소용된 말이고, 후자는 상대방 비방을 목적으로 한 꼴사나운 언사인 것이다. 그러나 다같이 경계해야 마땅한 언동인 점에서는 틀림이 없다.필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아니면 말고’를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는 데에 교훈으로 삼자는 화두를 감히 던진다. 말하자면,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하여 열심히 정려하고서도 실패하면 스스로 심한 좌절감이나 낭패감에 함몰되어 생동하는 삶을 포기하는 우를 범할가 싶어서이다. 속담에 ‘놓친 물고기는 더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 역설로 받아들여서 놓친 고기는 너무 작고 하찮은 것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에 다잡자는 것이다. 한때 성취가 좌절되면 이를 빨리 체념하고 패망감에서 탈출하여 제2의 목표를 설정하다면 언제나 생동하는 슬기로운 삶이 전개될 터이다. 그러니까 놓친 것, 실패한 것, 운이 따르지 않은 것 따위를 몰아쳐 ‘아니면 말고’를 목청껏 부르짖을 일이다. 이는 인생 반전을 위해 지극히 필요한 자기 심리적 치유의 한 수단인 것이다. ‘돈 잃고 사람 잃은다’라는 말은 돈 잃었을 때 곧 바로 ‘아니면 말고’를 스스로에게 외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불운의 기운 속에 자신을 침몰시켜 버린 자기 괴멸의 경우인 것이다. 말도 안되는 자해라든지,자학이라든지, 또는 자살하는 행위는 이 ‘아니면 말고’를 일상화하지 않는데에서 연유한다. 성취하여 거머쥔 것은 거룩한 것이요, 놓친 것은 한낱 티끌이요, 앞으로 쟁취하려는 것은 높고 높은 가치의 대상이라고 자신에게 자꾸 관념지울 일이다.저 다윗왕이 했다는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명언은 차제에 효용성을 높인다. 오늘 노심초사하며 또는 전전긍긍하며 애태우던 일은 내일이면 아무것도 아닌 티끌에 지나지 않는 법, 한 국가의 흥망성쇠까지를 일컬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한다면 우리의 오늘 이쯤에서의 우울은 대번에 싹 가시고 말 것이다.앞으로 할 일, 큰 가치 있다고 생각을필자는 근래에 온 세상을 다 놓고 자살하여 이승을 떠난 한 친구를 자주 생각했다. 그는 비교적 유복했는데도 처자식과 지구 전부를 티끌로 여기고 어둠에게 묻혀버렸다. 그는 필자에게 반면 선생이 되었다. 하루하루 나에게 몰려오는 번뇌나 어려운 일상이 친구의 버린 것들에 비하면 너무 작은 미세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이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두려움도 삭고,부끄러움도 쇠멸되는 소위 수신의 경지가 이룩된 셈이다. 결국 일체유심조라는 명언에 귀의한다. 포획한 포도는 달고,놓친 포도는 시며, 앞으로 다시 따려는 포도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나를 영활케 하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충고한다. “인생은 헛되고 허무하다. 그러나 치열하게 생동하라. 그대의 운명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던져지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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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16 23:02

팔달로를 '로얄 마일(Royal Mile)'로

한옥마을의 관광객이 누구도 상상 못 했던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이대로 그냥 둔다면, 우리가 각자 어떤 한옥마을을 꿈꾸었든지 간에, 한옥마을은 ‘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전통문화 중심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차분하고 편안한 마을이 되길 원했던 이들은, 이 ‘돈’의 속도와 흥청거림이 너무 어지러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초심으로 돌아가길 부르짖는다 해도, 이미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막을 길도, ‘돈’을 따라 움직이는 투자자들의 욕망을 제어할 길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전통문화도시로서의 품격과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이 관광객들의 발길도, 주민들의 현실적 욕망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방안 중의 하나로 전주의 구도심 전체를 공간적 거점으로 삼는 거리예술축제를 구상해보면 어떨까?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성공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로얄마일은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부터 왕궁이 있는 홀리루드 수도원(Holyrood Abbey)까지의 약 1.6 Km 거리를 말한다. ‘마일’이라는 단어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 거리는 이른바 구도심의 한복판이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인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는 중심공간이다. 해마다 칠팔월이 되면 이 거리에 전 세계의 공연예술 관계자들이 모여들어서 밤낮없이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하고 생각을 나눈다. 그리고 이 거리에서 발굴된 작품들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연투어를 떠난다. 이 기간 동안 로얄마일 주변에서는 프린지페스티벌 말고도 문학, 미술, 영화 등 다방면의 예술축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당연히 경제적 부가가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에딘버러 시민들이 축제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전주 한옥마을의 흥청거림이 조금 더 색다르고 생동감 있는 도시의 모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방안으로 팔달로에 주목하면 어떨까? 오거리 영화의 광장으로부터 풍남문 광장으로 이어지는 팔달로를 주말 거리축제의 공간으로 내어주자는 것이다. 물론 날씨가 좋은 계절을 골라서 구상할 일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주말 사흘 동안 팔달로와 주변 거리들에서 온갖 장르의 거리예술가들이 자신들만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팔달로를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과 구간은 세심하게 점진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주말마다 이 거리 곳곳의 광장은 물론이고 원래 있던 소극장과 갤러리들, 크고 작은 카페와 길모퉁이 공터 등에서 온갖 장르의 예술가들이 길거리 퍼포먼스를 펼치는 축제와 예술장터가 펼쳐진다면, 그야말로 가장 전주다운 진풍경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 거리는 전동성당, 경기전, 풍남문, 객사 등의 역사적 공간과 영화의 거리, 동문예술거리, 웨딩거리, 남부시장 등이 가로 세로로 이어진 전주구도심의 등뼈와도 같다. 이들 공간을 잘 활용하고, 연극,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 이 지역 각 분야 예술가들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결합한다면, 거기에 이 거리에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현실적 욕구를 잘 결합한다면, 팔달로가 전주의 로얄마일을 꿈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구도심 거리서 문화예술축제를포화상태에 이른 한옥마을의 흥청거림이, 전국, 나아가 세계에서 몰려온 거리 예술가들의 창의적 에너지와 뒤섞인다면, 전주는 그야말로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역동적인 전통문화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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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02 23:02

땅에서 희망을 보다

세월호는 우리 눈앞에서 침몰했다. 꽃 같은 젊은 생명들과 함께. 그 비극적 참사를 지켜만 봐야 했던 우리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인식했고, 우리 삶과 사회구조의 문제들을 보게 되어 다시 한 번 통곡하며 미안해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다시는 미안한 세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함께 힘을 모아 아이들을 지켜내야 할 시기이다.■ 타율적으로 형성되는 청소년문화우리 아이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교육제도의 좁은 틀 안에서 자신들의 욕구와 바람은 숨죽인 채, 공부라는 경쟁사회의 굴레에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경험들이 필요한 시기에, 자율적 경험과 여가를 즐길 기회가 부족하여 청소년문화가 다양하게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문화 활동마저도 대학 입시와 연계된 활동이나 기성세대의 목적과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로 청소년문화는 질적 양적으로 매우 협소하다. 청소년문화는 청소년이 당사자이기에 그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되어야 하나, 그 또한 도 타율적으로 형성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이 인터넷 중독이나 일탈과 비행,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들로 몰고 가는 것은 기성세대의 불안과 욕심이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변화시켜내는 노력 없이 ‘미안함’도 ‘지켜준다’는 말도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기성세대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기에 기성세대가 지니지 못한 다름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는 상황에서 기성세대의 것들을 강요만 한다면 우리 미래에 대해 밝음은 사라질 수 있다. 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세상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청소년들도 많이 있다. 기성세대가 바라볼 때 학업 걱정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 삶의 주인으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본다. 내가 아는 열다섯의 최 군은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친구이다. 노래에 대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에게 노래를 왜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노래가 있어 자신이 매 순간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행복을 느낀다 했다. 자신의 노래가 세상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길 바라는 믿음으로 노래를 한다고 했다. 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학교는 다니지 않지만, 계획성 있게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용기가 대견하고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 삶의 주인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사람들의 관심은 없지만, 지역의 주인으로서 지역의 지속가능 변화를 꿈꾸며 자발적으로 모인 고등학생 동아리도 있다. 그들은 지역 현장을 살피며 지역 문제를 찾고, 그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계획하며 지역사회에서 도움이 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스펙을 쌓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자질을 통한 지역사회 참여이다. 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의 확장과 함께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 자율적 주도적으로 실행되고 있어, 지원금을 지원받지 않는 활동으로 추진되더라도 관련된 교육계나 지자체에서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는 희망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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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6 23:02

제2의 청년, 60대를 칭송하며

루소는 사람이 60대에 이르면 오직 탐욕으로만 움직여진다고 했다.그러나 공자는 60세를 이순(耳順)이라 일컬었다. 세상일과 자연의 이치를 바로 알고 깨달으며 거친 소리도 순치(純致)해 듣는다고 했다. 두 명인의 표현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어서 마치 산의 정상과 깊은 구릉의 대비만큼이나 극단의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속물 근성의 천박함을, 후자는 철인에 가까울 정도의 고매한 인품을 강조한다.시골과 도시, 근대와 현대 아우른 삶60세를 기점으로 활발하던 경영은 마감되고, 지난 적 삶을 성찰하거나 음미하는 시기다.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성취와, 아직도 저급한 가치에 탐닉하며 미로를 헤매는 등의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저러한 평가 외에도 60대에는 대체로 한 가지 더 불순한 이미지가 붙어 있다. 회색 세대라는 의미의 외연(外延)으로 분장된 것이다. 언제나 생활하는 시간대도 과도기다. 생성과 소멸 사이, 생산과 소비 사이, 상승과 퇴락 사이 등의 어름에서 멈칫거린다. 흑백의 논리가 서로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극렬하게 논쟁할 때에도 60대는 엉거주춤 절충의 공간에서 쭈밋거리기만 했다. 어떤 사조(思潮)나, 의식이나, 생활 양식이 변천의 급류를 탈 때에도 주체자로서가 아닌, 객체자로서 휘둘림을 당한 세대다.우리나라 산업이 발달되어 오던 때에도, 전통의 고수를 집요하게 주문하던 앞 세대와, 그들이 전에 향유하던 문화를 인습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야 했다.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윤택하게 이뤘음에도, 우리나라 생활 수준을 이만큼이나 높이는 데 기여했음에도 이제는 오히려 전진의 걸림돌로 하대받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회 현장에서 퇴출의 우선 순위로 지목된 지 오래다.앞 세대를 잘 모셨지만 뒷세대에게는 소홀하게 대접받아도 내색조차도 할 수가 없는 세대인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세대요, 빚보증을 잘 서 주던 세대였다. 청장기엔 집 장만에서부터 모든 생활 전선에서 진력하여 가족에게 고스란히 희생된 세대이다. 조상들 무덤을 잘 돌보았으면서도 훗날 자신의 주검을 어떻게 부탁해야 할 지를 걱정한다.우물 안 개구리가 밖에 나와, 세계화 정보화 세상에서 늘 쩔쩔맨다. 컴퓨터에 조롱당하고 스마트폰이란 괴물에 농락당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생경하다. 음식은 서양풍으로 변해 그들의 식탁은 자신의 기호를 고집할 수가 없다. 어린이날은 융숭했지만 어버이날은 카네이션 조화 한 송이로 만족해야 한다. 퇴직금은 자녀 교육비다 혼수금이다 하여 이미 통장이 고갈 상태다. 60대는 매사에 회의를 품는다. 결단은 더디고, 번민의 회랑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다. 양보하고 망서리며, 진정한 자아는 방기한 상태다.모든 세상 소리를 순화 경청할 수 있어그러나 이제는 60대를 칭송하고 경륜을 높이 사야 할 때다. 모든 분야에서, 그것이 예술이건, 학문이건, 또는 고급 문화를 영속시키는 일이건, 이제는 이 60대에게 마지막 선승(善勝)의 결말을 도출하는 신성한 역할을 맡겨야 한다. 60대를 내치는 가정이나 국가 사회는 쇠락하거나 어두운 미로에서 유랑할 것이다. 그들은, 도시와 시골을 거쳐온 삶, 근대와 현대를 아우른 삶이었다. 많은 경험과 이성적 사변으로 변증법적 예지와 슬기를 창도할 것이다. 60대는 이미 사악함은 걸러지고 모든 경역에서 벌써 달인이 되어 있다.모든 세상소리를 순화 경청하는 이순의 60대를 칭송해야 할 때에 공자의 거룩한 말씀이 퍼뜩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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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9 23:02

후백제 왕궁 터 찾아야 한다

흔히 왕이 거처하는 궁전이 있던 곳을 왕궁이라고 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최상의 격식과 위용을 갖춘 곳이다.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도읍을 상징하는 최고의 건축물이다. 왕궁을 중심으로 도읍을 둘러 싼 성벽을 도성이라고 하는데 달리 서울로도 불린다. 37년 동안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에는 도성 안에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왕궁이 있었을 것이다.강원도 철원 북방 풍천원 벌판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태봉의 도성은 왕궁 터를 감싼 왕궁성과 내성, 외성의 3중성 구조다. 비록 철원에서 쓴 태봉의 역사가 14년으로 짧지만 외성의 둘레가 12.3km로 남북으로 긴 사각형의 도성 안에 왕궁 터가 있다.전주 후백제 왕궁터 아직 못 찾아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고려 왕궁 터인 만월대가 있는데, 본래 왕건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처음 불리기 시작한 만월대는 궁성과 황성이 정전인 회경전을 이중으로 감쌌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그 터만 남아있던 것을 참여정부 때 인력과 예산을 지원해 발굴조사가 시작됐다.후삼국 때 궁예의 태봉, 왕건의 고려와 패권을 다툰 후백제의 경우만 왕궁 터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 다행스러운 것은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견훤의 성터가 도면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전주부사’에 그 평면형태가 반월형을 띠는 성벽이 온전하게 표시되어 있다. 전주 동쪽에 우뚝 솟은 기린봉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는 승암산을 거쳐 전주천을 건너 남고산성을 휘감았고, 북서쪽으로는 서낭댕이를 지나 반대산까지 이어졌다.1960년대부터 전주시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성벽의 흔적이 대부분 유실 내지 훼손됐다. 최근에 전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도성의 성벽이 상당부분 복원됐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후백제의 왕궁 터는 최소한 반월형의 도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후백제 왕궁 터와 관련하여 전주 동고산성설과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이 있다. 그런데 후백제의 도성과 무관하게 왕궁 터로 비정된 곳이 전라감영지다. 엄밀히 말해 전라감영설은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 바깥에서 전주객사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삼국시대 이후의 어떤 왕조도 도성 밖에다 왕궁을 둔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현재 태봉의 도성은 휴전선이 그 중앙을 관통하고 있지만, 2006년 철원군에서 축소모형으로 제작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황성 옛터로 알려진 만월대는 지난해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강화도의 고려 왕궁 터와 삼별초의 항쟁 거점인 진도 용장산성 내 임시 왕궁 터도 발굴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파악됐다. 삼국시대 이후의 왕조 중 유일하게 왕궁 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후백제다.한옥마을 연계한 관광전략 필요지난해 한옥마을 찾은 관광객의 수가 5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박이다. 세상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제일의 여행 후보지가 미국 그랜드 캐년이라고 한다. 그랜드 캐년을 뛰어넘는 관광객이 한옥마을을 다녀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옥마을의 가치를 웅변해 준다. 앞으로 후백제 왕궁 터를 꼭 찾아 한옥마을과 연계시키는 장기적인 관광전략이 마련됐으면 한다. 요즘 후백제의 왕궁 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국립전주박물관 모든 구성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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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2 23:02

가자(Gaja), 세월호 그리고 가진 자의 피해의식

세월은 모든 것을 묻는다. 가슴 속에 묻고 기억 속에 묻고 잘 해야 종이 위에 묻는다. 지난 것들은 그저 지난 것들일 뿐 결코 되살아오지 못 한다. 인간은 진정 과거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존재인가? 과거의 기억이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면 참으로 좋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인간들은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악을 배워온다. 그들에게 과거란 저주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쌓아놓은 지하 창고와도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해서 좋을 과거와 가슴 깊이 묻고 삭혀야 할 과거를 잘 분간한다. 오로지 과거의 악마들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자들만이 평화로운 현실을 무참히 망가뜨린다. 문제는 이들이 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이다. 힘을 지닌 존재들이 과거의 피해의식에 깊이 젖어있을 때 그들의 손짓 하나 목소리 하나, 글 한 줄도 다 흉기가 된다. 인간을 야만으로 만드는 피해의식이천 년의 유랑과 가혹한 살육의 기억으로부터 유대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되살려오고자 하는 것일까? 여전히 세상 모든 나라가 그들을 적대시하고 멸망시키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 끔찍한 피해의식이 가공할 폭력 무기들과 뒤엉켜 날뛰는 자리에 죄없는 어린 것들의 찢긴 시신이 나뒹군다. 가자지구의 비극은 인간의 피해의식이 국가라는 이름의 집단 폭력과 결합할 때 얼마나 무서운 악마로 변하는가를 보여준다. 유엔학교도 병원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퍼부어대는 저 끔찍한 첨단 무기들은 과연 저들이 숭상하는 유일신이 보낸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이것은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기억이 보낸 것이다. 그것도 직접 살육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까지 대물림되어 내려온 집단적 피해의식이, 악마의 이빨이 되어 저지르는 일이다. 이게 남 일인가? 패전국임을, 원폭의 피해자임을 한 시도 잊지 않고 곱씹어 온 아베 정권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징벌에 더 깊이 파고든다. 그리고 그 피해자로서의 집단기억을 부추기고 되살려서 은인자중 키워온 엄청난 국방력으로 어느 때라도 다시 이웃을 쳐들어갈 태세를 가다듬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불안한 이웃이다.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가해자였고 여전히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내면에 도사린 피해의식이 얼마나 무서운가? 무서운 사람들, 그 흘긴 눈, 함부로 휘두르는 주먹들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꽃다운 아이들 수백 명이 맥없이 죽었다. 어찌 그 배의 이름은 하필 세월호인가? 그래도 건져주겠지 카톡을 하다가, 너무 무서워서 고래고래 랩을 하다가, 울면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다가, 왜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 모처럼 차려입은 육십 대의 동창생들과 제주도로 살러가던 젊은 부부, 그리고 그 비슷한 처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떼로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 눈 번히 뜨고 어 이게 먼 일여 하다가 죽었다. 그렇게 수백 명을 대낮에 수장시키고도, 그리고 백일을 훌쩍 넘기고도, 이 나라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무슨 엄마라는 이들, 정치가들, 사회지도층이라는 이들이 땡볕의 유가족들 앞에서, 그 지옥 끝까지 절망한 이들 앞에서, 추하다고, 노숙자 같다고, 이제 좀 편안히 살자고 눈알을 부라린다. 엄마라는 이름을 이렇게 모욕해도 되는가? 어리고 약한 존재, 슬픔에 빠진 이들, 가난한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신이 인간의 내면에 원초적으로 심어 둔 본성이다. 그럴진대 저 으르렁거리는 흰 이빨들이, 핏발 선 눈들이 어디 인간의 것인가? 저들의 내면에 도사린 피해의식의 깊이를 알 길이 없다. 누구의 피해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대물림되고 옮겨온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점잖은 종편 패널들은 정권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이란다. 도대체 그 배에서 죽은 이들이, 그 유족들이 이 정권과 기득권 층 누구에게 무슨 피해를 입혔단 말인가? 저주복수의 대물림 끊어버려야전방의 내무반에서 한 병사를 악랄하게 괴롭히다 끝내 죽인 이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당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죽어가던 병사가 마지막으로 본 저들의 눈빛은 과연 인간의 것이었을까? 피해의식은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린다. 그 피해의식의 야만적인 요동을 멈출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이긴 자들, 힘을 가진 자들에게만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스스로의 끔찍한 피해의식을 딛고 서서 저주와 복수의 대물림을 끊어버린 이들도 참 많다. 바라건대, 세상의 모든 가진 자들이여, 낡고 허황한 피해의식을 부추겨 짐승 같은 가해자가 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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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5 23:02

사람이 문화를 만든다

타지에서 전주로 이사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과거 내 기억속의 전주는 낮은 건물들 탓인지 전주에 들어오면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로웠으며, 어느 식당에 가든 음식은 맛이 있었고, 값도 쌌다. 또한 도심권에 유적지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여유롭게 둘러보고 느낄 수 있어 전통문화의 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 관광객에겐 시민들이 전주 첫 인상그보다도 나를 더 전주에 푹 빠지게 한 것은 바로 전주 사람들이었다. 양반 도시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금 느린 듯해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다. 또한 음식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절기마다 이웃과 음식을 나눠 먹는 공동체적 풍습들이 있었고, 단오제나 기타 지역 축제에서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옥마을 경기전 소나무 아래 어르신들이 모여 여가를 즐기는 풍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주 사람들은 흥이 있었고 정이 넘쳤으며 멋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게는 이러한 전주 문화가 멋있어 보였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전주의 힘이었다. 한옥마을의 유명세 때문인지 몇 년 전부터 지인들의 전주 방문이 꾸준히 이어지고 전주 소개를 부탁한다. 그렇지만 나는 전주를 예전처럼 자신 있게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 또한 방문에 앞서 한옥마을의 비싼 숙박료와 식사 가격 등 주변에서 들었던 바가지요금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그런 우려를 뒤로하고 그들이 한옥마을을 방문한다 해도 너무 많은 상점이 편중되어 한옥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가 없어 조금 실망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다른 관광객들도 한옥마을에서 꼭 찾아봐야 할 것들을 찾아보지 못하고, 카페나 상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다 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다시 한옥마을을 찾아올까. 잠시 내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일 때문에 전주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일이 많다. 짐 때문에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니며 편한 복장 차림이다. 그런데 차가 없어서 택시를 타는 일이 많은데 가끔 불쾌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내 차림새와 남도 사투리 때문에 관광객으로 오해한 택시 기사님은 내가 뻔히 아는 길인데도 빙 돌아서 간다든가, 다른 손님을 태우기 위해 목적지에 못 미처 내려주기도 한다. 내가 전주 사람이라고 말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기사님도 있고, 신고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기사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온 길이 맞는다며 우기거나 화를 내는 기사님도 있다. 만약 외지 사람이 이런 일을 겪고 나중에 바가지요금을 낸 것을 알았다면 두 번 다시 전주를 찾고 싶을까. 설령 관광객이 끝까지 바가지요금을 낸 사실을 모른다 해도 이것은 그 기사님의 양심이며 전주의 양심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기사님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떤 택시 기사님은 전주에 대해 설명도 잘해주시고 짐도 챙겨주시는 기사님도 있었다. ■ 자율적 자생적 주인 의식 발휘해야전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전주 시민은 곧 전주의 얼굴이다. 택시 기사든, 음식점 주인이든, 기념품 가게 직원이든 관광객들이 만나는 모든 전주 사람들이 곧 전주에 대한 첫인상인 것이다. 시민의식 수준은 지역을 보여주는 얼굴이며 지역 문화의 척도이다. 그렇다면 전주시는 관광객 유입을 위한 외형적 환경 조성에만 총력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시민의식의 함양 및 위상을 제고도 함께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시대적으로 시민의식 함양에 있어 계몽적인 강요가 아닌 시민 자율적 자생적 주인의식을 발휘하며 성숙한 시민의식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채성태 대표는 전북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며 사회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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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9 23:02

이상한 민족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중앙지에서 읽었던 까마득한 기억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 2세 교수 한 사람이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중국인 안내인에게 일러 조선족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안내인이 말하기를, 조선족은 참 이상하다고 했단다. 해질녘에 동네 주민들이 동청에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다가 마지막엔 꼭 싸움질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란다.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다음날 바로 화해하고 다시 모여 그 일을 반복하는 점이란다. 화해가 바로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의 즐거움이 불화가 오래 지속되도록 내벼려둘 수 없게 하는 것이란다.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겨미국 교포 교수는 오히려 이 점이 한민족의 바람직한 특성이며 우리 민족이 선진 문화 민족이라고 정의하며 신문에 이를 소개했던 것이다.우리 민족에게는 아득한 선조로부터 저러한 유전인자가 전속(專屬)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필자는 유추해 보았다. 인문학이며 철학의 발원도 갑론을박 논쟁하는 데서 유래했을 터이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양은 그것이 바로 종합예술적 형태의 원초이었을 것이며, 소위 풍류며 낭만의 끼는 저러한 습속에서 잉태되지 않았을까 하는 사려에 골똘해졌다.사실 우리 민족의 아득한 고대에는 제천의식이란 것이 행해지고 있었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지내는 원시 종교 의식이었는데, 일종의 추수감사절인 셈이었다. 부족 전체가 한 광장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즐겼다고 전해진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마한의 시월제 따위가 그런 것들이다. 무속행사이면서, 집단 예술 행사였고, 나아가 부족의 결집과 통솔을 위한 통치 수단의 하나였다. 이때 제사장은 부족국가의 왕인 셈이며 한편 무속인인 것이었다. 일하는 것과 노는 일이 한타랑으로 혼융(混融)되었다. 우리 민속 국악이 노동요로 시발된 점에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면 대개는 농악 속에도 주술적 기복(祈福)의 목청이 숨어 있음도 금방 간파된다. 무속행사는 성장해서 나중엔 정교한 종교가 되기도 하지만 높은 차원의 예술로도 발전한다.프로이트란 사람이 말한다. 집단적 무속행위는 집단적 환상으로 몰아쳐져서 사이비 종교가 된다고. 또 마레트란 사람은, 설명항 수 없는 것에서의 경외감, 초자연적인 힘, 영적인 힘 등은 영적인 에너지로 진작되고 고차원의 문화 문명을 잉태시킨다고도 했다.그렇게 이상한 민족은 그 이상한 점을 크게 성장시키고 창대하게 육성시켜 오늘의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인류학자들이 말하기를 축제의 중심에는 반드시 신이 있고, 그리고 절대로 감성의 큰 폭풍이 있다고 주장한다. 감성을 끊임없이 배양하고 길들이기의 좋은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오늘 한류 열풍 일으키는 국민 돼가령 미개한 민족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할 때, 그러나 그들은 오직 같은 감성을 공유하고 같은 풍부한 정서로 무장할 때, 그리고 그것을 공동선으로 향진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문화 문명의 대칭 거리에 있다 할지라도, 그 민족은 위대하고 거룩한 민족인 것이다. 이는 실존적 의미를 마냥 부여해도 무리는 아니다.우리 민족은 이상한 민족이 아니라, 신비하고 감성적이며, 상징을 잘도 꾸며내는 특별한 민족인 것이다. △소재호 관장은 1984년 시단에 등단했으며 완산고 교장·전북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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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2 23:02

새만금, 한·중 교류의 큰 무대

새만금은 인문학의 보물창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새만금 국책사업이 시작된 이후 인문학과 관련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깝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새만금 내 군산도에서 한 몸을 이루어 줄곧 해양문물교류의 허브로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지속된 새만금 속 한중 교류사를 소개하려고 한다.국가 차원 영접행사 열리던 곳일본에서 농경의 신과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 제나라 방사 서복이다.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새만금과 제주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 기원전 202년 제나라 왕 전횡이 어청도로 망명해 왔다.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자 두 명의 형제, 측근과 병사 500여 명을 거느리고 어청도로 망명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망명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뛰어 넘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진시황의 서복 파견과 전횡의 망명 이후 새만금의 해양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고고학에서는 패총을 해양문화의 백미로 평가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학계에 보고된 600여 개소의 패총 중 200여 개소가 새만금에 밀집되어 있다. 흔히 패총이 해양경제를 대변해 준다고 한다면 말무덤은 정치를 상징한다. 군산대 캠퍼스 내 미룡동에서 말무덤이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 말무덤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새만금이다.삼국시대 때도 마한의 해양문화와 그 역동성이 그대로 계속됐다.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뒤 새만금을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로가 열림으로써 새만금의 해양문화가 더욱 융성했다. 그러다가 한 동안 전쟁터로 그 위상이 바뀌면서 아픔도 많았다. 당나라 소정방 13만 군대가 상륙한 기벌포도, 백제부흥군과 왜의 파병 군이 나당연합군과 해전을 벌인 백강도, 676년 신라 수군이 당나라 수군을 물리친 최후의 격전지도 새만금이다.851년 해상왕 장보고 선단의 거점인 청해진을 없애고 당시 최고의 바다 전문가들을 새만금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들은 후백제가 오월 등 남중국과의 국제교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927년 오월의 반상서가 전주를 방문할 때 오갔던 후백제와 오월의 사행로도 새만금을 경유해 전주까지 이어졌다. 새만금 속 군산도가 후백제에 의해 사행로의 거점 항구로 본격 개발됐을 가능성이 높다.1123년 송나라 사신단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영접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김부식이 새만금 내 군산도를 방문했다. 그리하여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행궁을 비롯하여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바다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오룡묘와 사찰인 자복사, 객관이 있었다. 새만금은 송악산 만월대의 회경전과 벽란도를 제치고 국가 차원의 영접행사가 열린 국제외교의 큰 무대였다.크루즈선 도입박물관도 건립을중국인들이 해외 관광을 할 때 중국과의 역사성과 인연을 가장 중시하는데, 새만금은 두 가지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새만금 속 군산도는 절강성 주산군도와의 관련성이 탁월하다. 신라초와 고려도두로 상징되는 주산군도는, 중국 4대 불교 성지로 해마다 15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군산도와 주산군도를 하나로 묶는 크루즈선을 새만금신항에 띄우는 장기적인 관광전략이 마련됐으면 한다. 동시에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동성을 담아낼 새만금박물관의 건립도 모색됐으면 한다.△곽장근 교수는 사학을 전공했으며, 군산대 박물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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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5 23:02

축구, 알제리, 친일파

우리나라의 올해 월드컵은 끝났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평가전을 포함해서 여러 차례의 졸전으로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 가운데 가장 실망스러운 경기는 대 알제리전이었다. 알제리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고 세 차례의 경기 가운데에서도 우리 팀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결과를 안겼다. 그들이 보여준 경기력은 우리 선수들을 놀라게 할 만했다. 유니폼을 찢고 튀어나올 듯한 상체근육, 지칠 줄 모르고 경기장을 누비는 저들의 체력 앞에서 우리 선수들은 한 동안 기가 질린 채 바라보고만 있다시피 했다. 식민주의 잔재 걷어내야 진정한 해방알제리는 큰 나라이다. 땅덩어리로 치면 전 세계 10위권에 든다.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유적들이 거의 방치된 채로 산재해 있어서 앞으로 관광 부국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알제리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통찰로 유명한 프란츠 파농이 그의 짧은 생애를 바친 나라이다. 파농은 같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출신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가 독립을 보지 못 하고 백혈병으로 요절한 작가이자 의사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이어진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이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압도적인 폭력과 차별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 피해자들은 대체로 저항의 의지를 잃는다. 그 대신 식민주의자들의 얼굴에 자신들의 얼굴을 얹어서 동일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학하고 식민지배가 운명적인 것이었다며 수긍하려 한다. 파농은 〈검은 피부 흰 가면〉이라는 책에서 피식민자들이 그들의 의식과 일상에서 식민주의의 잔재를 걷어내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오지 않는다고 외쳤다. 알제리 독립전쟁은 1954년에 시작해 1962년에 끝났다.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축구를 배웠던 이 나라에서 ‘마르세이유 턴’으로 유명한 축구스타 ‘지네딘 지단’이 나왔고, 이 나라가 프랑스에서 배운 디자인 감수성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을 탄생시켰다. 문화적으로 식민모국의 자존심을 압도한 셈이다. 알제리 축구팀은 사상 처음으로 유럽 팀을 꺾은 아프리카 팀(1982년 스페인월드컵)이기도 하다. 우리 축구 대표팀이 알제리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하면서 자존심을 구기던 그 무렵, 두 번째 지명 받은 이 나라의 국무총리 후보자는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항변을 하느라고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조선민족이 불결하고 게을러서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라 외치던 그였다. 교회에서의 강연 동영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 동안 써온 칼럼들의 내용이 거의 비슷한 신념으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의 자유’ 운운하며 그를 감싸기도 했다. 그렇다. 그의 확신만은 알아주어야 한다. 파농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피부는 조선 사람의 것이었으되, 한평생 그의 의식을 지배해온 것은 현대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온 강대국들의 지배논리였다. 그것이 그의 ‘흰 가면’이지만 그는 그게 가면인지 자신의 피부인지도 분간하지 못 한다. 자신이 왜 친일파 소리를 듣는지 저승에 가서도 깨닫지 못 할 친일파들이 그 주변에서 다시 철옹성을 쌓는다. 고통 받는 약소국에 뜨거운 연대를알제리 축구 대표팀은 귀국 환영행사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국민들과 함께 환호했다. 팔레스타인, 문씨 같은 이들에게는 아마도 게으르고 불결해서 신의 채찍을 받고 있는 나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알제리의 축구선수들은 고통 받는 저 약소국 국민을 향한 뜨거운 연대와 동료애를 당당히 자랑한다. 우리가 저들에게 진 게 축구만일까? △곽병창 교수는 전북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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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8 23:02

모스크바 다이어리

지난 6월 28일에 폐막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지난해 〈레바논 감정〉이 이곳의 국제경쟁 부문에 소개됐고, 올해는 삼인삼색 작품인 〈조류인간〉이 경쟁 부문에 소개됐다. 신연식 감독과 배우 소이 씨도 함께 했다. 주상영관인 ‘옥토버’(10월)극장은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거리 아라바트와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극장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백야 현상 때문에 밤 11시가 되어도 환한 탓에 모든 것이 늦게 시작됐다. 오후 2, 3시가 되어야 공식상영 프로그램들이 시작됐고, 극장에는 저녁 7시가 되어야 퇴근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꽉 들어찬 풍경을 연출하고는 했다. 영화 보다 한국에 대한 관심 높은 듯국제경쟁에 소개된 작품은 좀 제각각이었다. 신인들의 첫 작품도 있고, 알려진 중견들의 영화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의 중견 감독이 만든 〈하얀 이끼〉처럼 이 지역의 에스키모라 할 수 있는 유목민들의 신화와 현대적인 러브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 인상에 남았다. 〈조류 인간〉팀을 따라 기자회견 자리와 인터뷰 자리를 따라가 보았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이 꽤 많았다. 왜 하필이면 ‘새’로 변하는가, 그것이 한국의 전설과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인가, 왜 하필이면, 여자만 새로 변하는가 등. 전설과 관련된 질문은 나름 신선하다고 할 수 있는데,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꽤 많아도(구미호 이야기처럼), 인간이 끝내 동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의외로 없는 편이다. 신연식 감독은 전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 이야기가 ‘정체성’에 관한 것임을 강조했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변신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던 것 같다. 또한, 한국의 동시대 분위기를 이 영화가 어떻게 내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꽤 있는 편이었는데, 그것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공식 상영이 열리는 옥토버 극장에서 얻은 영화제 데일리에는 〈조류인간〉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리뷰가 실려 있었다. ‘조류인간’ 팀은 영화 상영 전 무대 인사로 공식 일정을 마무리 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영화제의 공식 상영을 경험했던 것 같다. 영화제는 저마다의 특징과 분위기를 지닌다. 그것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 경쟁부문의 프로그램인 동시에 첫 상영이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영화제라는 사이트를 통해, 그곳의 극장에서 처음으로 상영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있을 것이다. 평소 무심하게 배치를 했던 것을 진행하는 이의 입장이 아니라 경험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지켜보게 되니 좀 다른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뿐만이 아니라 전주영화제의 다른 작품과 프로그래머들이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전주영화제, 국제교류 통해 위상 제고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삼인삼색은 뜨거운 평가를 받았고, 신연식 감독의 〈조류인간〉은 6월 말에 열리는 모스크바의 국제경쟁 부문에, 기요르기 폴피의 〈자유낙하〉는 7월초에 열리는 카를로비바리 국제경쟁 부문에 상영이 된다. 여기에는 다른 프로그래머가 참석할 예정이다. 그리고, 박정범의 〈산다〉 역시 좋은 결과가 예상된다. 결과에 대한 발표가 따로 있겠지만 이러한 성과를 내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것은 기획과 영화의 힘이었다. 당분간 전주영화제의 새로운 토대는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에 집중했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 국제적 교류와 위상을 높이는 데 있을 것이다. 모스크바는 국제적 첫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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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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