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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 지원 펀드' 설치를 제안한다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문화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한다. 예술가의 삶이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개척해가는 탓인지 사람들은 예술가를 고상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선망하기도 한다. 예술가는 분명 보통사람과 다른 면이 있지만 먹고사는 일에서는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다.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이 밥이 되고 돈이 되어 생계수단으로 충분하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직업은 없겠지만 2016년 3월에 발표된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1년간 예술 활동을 통한 수입의 중간값이 300만 원이며 36.1%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일부 유명 예술가들의 높은 소득을 포함해도 평균수입이 1255만 원에 불과하다. 문화예술 활동으로 생계 해결을 넘어 부자가 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생활에 구애받지 않고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다. 주업은 교수나, 교사로 교육자이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겸업 예술가들은 신이 내린 사람이고 예술가의 절반이 예술과 전혀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프리랜서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보니 노후 대책의 보루인 국민연금 가입률은 56.8%에 불과하다. 대부분 전업예술가는 지금도 막막하고 미래는 더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술가 다섯 명 중 한 명은 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은 경험이 있을 정도로 창작 활동 경비를 외부 지원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그 보조금이란 것이 정말 새 발의 피다. 병아리 눈물만큼 주는 보조금도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나마 것에 목을 매는 예술가의 약점을 이용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못된 발상까지. 예술은 우리의 얼이며 자존심이다. 그것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전통문화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천혜의 자연경관도 없이 관광 대국을 이룬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를 보자. 왕실과 귀족의 뒷받침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예술가들은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문화유산이 후대에 와선 소득 창출의 자산이 되고 있지 않은가. 예술은 단순소비재가 아니다. 회임 주기가 다소 길다뿐이지 생산재임이 틀림없다. 한국지엠을 살리는 데 정부가 7조7000억 원을 투자한단다. 말이 7조7000억 원이지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지방정부도 기업 유치나 생산 지원을 핑계로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에 몇백 억 원 정도는 아깝지 않게 퍼준다. 그러면서도 문화예술지원엔 좀생이 짓을 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각성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문화예술품을 창작하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소모적 경비가 아니라 미래의 먹거리를 만드는 생산적 투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하고 싶은 일에 신명을 바칠 수 있는 바람직한 일자리 창출의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예술가들은 먹고사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창작 활동만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흔히 최고은 법이라고 부르는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뿐 아니라 생계까지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문화예술인지원펀드를 자치단체마다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공감은 하지만 재원이 없다고 예산 타령부터 할 것이 분명하다. 자치단체장들이 지지표를 사기 위해 꼼수로 여기저기 분산해 놓은 선심성 예산만 제대로 모아도 작은 자치단체는 몇십 억, 큰 자치단체는 몇백 억 원의 재원 마련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뽑히는 자치단체장들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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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1 20:58

문화예술과 정치

▲ 염광옥 (사)한국무용협회 전북지회장 예술분야에 활동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만의 창작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건 어쩌면 최고의 행복일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때 부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정치를 하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것 또한 한계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예술인들이 정치인들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도 지금의 상황이다. 세상은 변하고 여기저기 문화발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많은 변화들이 생겼지만 정작 예술인들에게는 여전히 배고픔이 난무한 사회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하며 예술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하는지 진심을 다해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정치인들의 내건 공약들 대부분도 지역개발 같은 인기 영함 주위의 공약이 대부분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문화예술 공약은 빈약하다 못해 거의 전무했다. 문화예술 공약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후보자들의 머릿속에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눈에 뛰는 공약을 살펴보자면 문화 예술 활동 기획 지원의 일원화 정도이다. 사실상 나머지 문화예술 공약은 지금까지 지역에서 논의돼 왔던 공약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전라북도 예술계를 지켜 줄 수 있는 후보도 없는 마당에 예술사업의 장밋빛 전망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양적, 질적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전라북도 문화예술의 과제와 올바를 시책 추진 방향에 대해 논의가 지금부터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그동안 주체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주변인의 입장에 서있었다고 보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예산을 쥐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 얽매여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는 문화예술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당당히 요구하는 변화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문화예술인 스스로가 문화예술발전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힘을 하나라도 모아야한다. 예술기금확대와 예술인 창작확대는 물론이고 문화예술분야 고용확대를 위한 정책 수립을 요구하는 등 지원책 마련도 당당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예산 몇 푼을 위해 끌려 다닌 다면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의 퇴보는 물론이고 문화예술이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문화예술계는 소위 정치면에서 득표로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화예술을 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불쾌하기는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원인의 한축에는 문화예술계의 책임도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계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문제와 스스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뒤에는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전라북도 문화예술인들은 이번 선거 공약을 유심히 지켜보고 판단해 주었으면 한다. 장 미셸 지앙의 문화는 정치다라는 말도 문화예술인 모두가 정치인이 돼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풍요롭게 바꾸는 일에 문화예술이 관여를 해야 하며, 정치도 결국은 이를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지금 한창 선거 기간이다. 전라북도의 문화예술 정책을 제대로 된 시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대책 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리더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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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4 18:45

축제 마당과 문화다양성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축제일에 비가 오면 관객과 연출가 모두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행사를 간단히 취소할 수 없어서다. 물론 돌풍과 같은 자연의 위력으로 관객의 생명 자체가 위험해진다면 취소를 결단하겠지만, 바람이 동반되지 않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곧 그칠 듯 기대를 부풀린다. 이렇게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 앞에 사람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이 경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후속 조치를 낳지는 않는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경험들을 반성의 재료로 활용하는가 아니면 무력감이라는 본능적인 불쾌함을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녀 혹은 그에게 떠맡겨버리는 방식으로 처리하는가에 따라 사람 간의 관계 맺는 방식과 생활태도 는 달라질 수 있다. 비 오는 축제 마당에도 전문적인 예술행사와 생활문화프로그램과 체험부스는 다양하게 구성된다. 어르신들은 민요와 장구 협연을 하시고, 중년들은 7080 음악을 즐기고, 어린이들은 동요와 무술퍼포먼스에 환호하며, 청년들은 시음과 나이트 뮤직 쇼에 참여한다. 축제에서 펼쳐지는 세대별 혹은 성별 문화다양성은 프로그램 외에도 주차장이나 도로나 장터에서 교통을 통제하는 스태프들과 관객들의 접촉에서도 드러난다. 축제 현장에서 프로그램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에서 성별, 세대별 문화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언어와 행동은 문화다양성이 아니라, 폭력으로 해석되는 것이 정확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주행하고자 하는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통을 통제하는 여성 스태프에게 분노하여 차에서 내려 반말을 하며 삿대질을 하고 스태프의 몸을 밀치는 중년 남성의 언행양식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여성에게는 반말을 하거나 손찌검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생활해 온 경험들이 반성 없이 계속 축적되고 강화된 결과일 것이다. 마치 최근 공감되고 있는 갑질 고성과 욕설의 문제와 닮았다. 이것은 문화다양성이 아니고 인권 침해 및 업무 방해 행위이다. 애초에 교통 통제가 없는 축제는 불가능한 것일까? 마을이나 동 단위의 축제로 기획하여 규모를 줄인다면 축제의 숫자는 늘어나더라도 교통 통제와 같은 불쾌한 강제는 사라질 수 있다. 만일 불가능하다면 교통 통제를 자연 질서처럼 수용하고 느긋하게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약간 불편한 질서를 지켜야 하는 국면에서 여유가 나타나려면 개인이 일상 속에서 행복한 삶을 운영해 원망의 습관이나 태도가 축적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화부터 내고 보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그렇게 해서 일단 상대방을 윽박지르려는 문화는 반성과 복기의 가치를 값없이 여기는 사회에서 태어난다. 우리 사회는 반성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성찰활동이라기보다 열등한 자들의 자책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용 및 복지정책과 함께 행복감의 원천을 발굴해내고, 행복을 느끼는 방법론을 공유하는 교육이나 문화정책, 술과 폭력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서적 표현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주는 문화사업, 타인을 거칠 게 대하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쳐 온 권위주의적 생활양식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정밀하고 구체적인 정책과 사업들이 반성과 복기의 힘으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동시에 모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색된 정책과 사업들은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 시범 적용하여 폭력이 아닌 진정한 문화다양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파급효과를 높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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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07 16:27

전북에서 만나는 가야이야기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최근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가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가야에 대한 사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가야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1970년대 이후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유적이 발굴조사 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가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크게 나아졌다. 그러나 영남지역 밖의 가야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특히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가야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행히 전북지역 연구자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로 최근 많은 가야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1982년 남원 월산리 고분군을 시작으로 최근의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발굴조사 되어 우리 지역 가야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땅을 깊게 파서 돌로 덧널을 만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라는 구조에 많은 토기와 무기 등을 부장하는 가야의 장례풍습을 따르고 있다. 부장된 토기의 모양이나 조합 관계는 대체로 경남 고령지역 대가야의 것과 유사하다. 흔히 고고학에서의 장례문화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큰 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오랜 기간에 걸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런 연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전북 동부 산악지역의 가야 유적을 대가야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북 지역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가야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기는 형태적으로는 대가야와 유사하지만 보다 곡선적이며 무게의 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등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확인된다. 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영남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국 청동거울과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진 천계호(天鷄壺)라고 부르는 닭머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청자 주전자, 그리고 금동신발 등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당시 최고위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백제 중앙정부가 주변지역의 여러 작은 나라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건낸 위세품들이다. 이러한 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백제가 이 지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나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서 나오는 기문국(己汶國)을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한다. 그리고 이 지역 정치세력이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있으면서 번갈아 복속되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유물의 출토 양상은 어느 한 세력의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북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정치세력들이 인접한 가야의 장례문화를 받아들여 가야와의 동질의식을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면서도 백제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독립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러한 특성은 문화의 혼종화나 혼합문화가 당시 성립되어 있음을 표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 전북 가야 의 독자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오백년 전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꿈과 살아가던 모습을 무덤 속, 또는 여러 생활터전에 남겨 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꿈과 다양한 흔적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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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30 18:39

균형있는 문화정책이 아쉽다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문화만큼 멋진 말도 드물다. 민중문화, 청년문화, 사회문화, 조직문화처럼 어떤 단어에 붙여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가 않다. 다소 부정적 의미의 단어와도 적절히 호응하며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격을 높이기까지 한다. 예술이란 단어도 그렇다. 예술은 문화와 분명히 다른 개념이지만 전문 예술가에 의한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 대중화에 이르면 문화와 예술의 이미지가 서로 융합되어 구분이 어려워진다. 요즘엔 아예 한데 묶어 문화예술이란 복합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정책 분야에서도 문화와 예술을 포괄하는 문화정책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를 굳이 따지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이 대중예술에 편중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동네 주민자치센터 곁을 지나다 보면 낭자한 장구 소리가 따스한 봄볕처럼 온몸을 휘감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만화방창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로 주민자치센터나 문화의 집에 가면 노래, 춤, 요가, 서예, 글쓰기 같이 예술이든 문화든 여가를 즐기며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꺼리가 아주 많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저곳을 순회하며 하루 종일 취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지천에 널렸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대중예술분야임에도 그냥 대중문화라고 부른다. 어쨌든 지방자치로 인해 대중문화가 만화방창의 호시절을 맞은 건 사실이고 칭찬의 박수를 받을 일이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소프트웨어적인 대중문화 프로그램은 양적, 질적으로 크게 팽창했지만 하드웨어적인 문화기반시설은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해졌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된 지난 20여 년 동안 자치단체가 주도적으로 건립한 문화시설이 몇 군데나 되는지 손을 꼽아보면 그 실상을 쉽게 알 수 있다. 선출직들은 임기 내에 성과를 드러내고 그것을 표로 연결해야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므로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이 조급하다. 그러니 장기간이 소요되고 예산이 엄청나게 필요한 문화기반의 확충보다 시간과 돈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효과가 속 빠른 대중예술 프로그램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문화정책에 대한 이런 인식이 20여 년 이상 누적된 결과, 주민들의 대중문화 향수 기회는 크게 늘었지만 우리 도내의 문화시설은 부끄러울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전라북도예술회관은 건립된 지 35년도 넘어 화장을 진하게 한 노파의 주름진 얼굴 형상이다. 지역 문화의 계발과 전승을 주도하도록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전주문화원은 어떠한가? 전국 문화원의 작년도 예산 평균이 4억9000만 원인데 비해 전라북도는 2억4000만 원으로 전국평균의 절반을 밑돈다. 그나마 도청소재지인 전주문화원은 1억3000만 원에 불과하여 문화진흥사업은커녕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실정이다. 독립된 원사(院舍)도 없이 과거에 동사무소로 사용되던 건물의 한 모퉁이를 빌려서 쓰고 있다. 도청소재지는 물론 우리 전주와 규모가 비슷한 도시 중 독립된 문화원 건물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전주가 유일하다. 인접한 논산시의 경우 문화원만 해도 대지 2000평에 건물이 525평 규모로 우리 도의 예술회관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부럽기도 하고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기도 하다. 우리 지역 자치단체장들의 균형 있는 문화정책이 아쉬운 대목이다. 건물이나 시설이 그 지역 문화예술의 척도는 아니지만 문화기반시설은 문화예술발전과 지원에 대한 정책적 의지의 표현에 다름없다. 누가 뭐래도 전주는 문화예술의 도시 아닌가. 대중문화 확산에 걸맞게 전주의 랜드마크로도 손색이 없는 문화시설 하나쯤 건립한다고 해서 토를 달거나 반대할 시민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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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3 21:03

진정한 축제의 의미

봄기운이 완연하여 온 세상이 파스텔 빛으로 가득한 이 시기에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 또는 연인과 행복한 주말을 보내기 위해 관광지나 축제장으로 나들이를 떠난다. 전국적으로 축제와 행사가 많은 이 시점에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함께 행사와 공연으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축제나 행사 등을 생각하면 공연관계자들이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임하고 있는 지 의문이 생긴다. 시민들, 즉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인지 혹은 상업성만을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행사인지를 묻고 싶다.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는 축제나 행사의 경우 각 지역성을 고려한 특산물이나 해외 관광객을 위한 여러 가지 콘셉트를 활용하고 있다. 의미와 색깔과 목표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속성만을 유지하려다보니 실질적으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과 같이 겉은 화려하고 속은 텅텅 비어있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전반적인 내용을 잘 파악하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기획자나 예술 감독을 부르지 않고 이벤트성으로만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단순 흥미만을 유발하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늘 하던 식의 뻔한 행사만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행사의 주는 그 지역의 관공서나 큰 기획사가 주가 되어 행사를 준비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축제나 행사 공연 등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컨셉과 분위기를 걸맞게 만들 수 있는 전문가와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성 없고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어설픈 행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성공적인 예로 천안 흥타령 춤 축제를 들 수 있다. 이 축제는 춤을 주제로 5일간 천안 삼거리 공원에서 펼쳐진다. 전국에서 5000여명이 참여하는 춤 경연과 시내 중심가에서 춤과 음악으로 구성, 전 세계 무용인들 참여하여 거리 퍼레이드를 경연 방식으로 진행한다. 축제장에서는 매일 댄스 왕 선발, 비보잉(b-boving), 스포츠 댄스, 재즈 댄스 등의 행사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춤을 배울 수 있으며 또한 누구나 참여해서 춤을 출 수 있는 자유로운 무대 운영을 하고 있다. 전국 유일의 춤을 테마로 참여하는 국제화 축제, 천안 시민이 스스로 만들고 모두가 참여하는 함께하는 축제라는 점에 최우수 축제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든 축제가 성공한 이유는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며 시민들이 주가 되어 축제를 준비하여 관광객들이 함께 숨 쉬고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온 국민이 함께하는 전문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진행하여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행사가 된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공한 축제라고 해서 그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지역과 풍습이 다름으로 자기 것을 노력해서 만들어 내야한다. 큰 기획사나 관공서 직원이 아니라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지역민을 기획자나 연출자로 만들어내서 축제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매년 축제를 즐겁게 준비하며 손님들을 자랑스럽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천막에서 파는 파전과 막걸리, 대형 가수만을 부르는 이벤트성으로 행사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을 절감하여 지역민들이 주인이 되어 부족하지만 지역민들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색을 지켜나가고 공부하며 가꾸어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면 지역발전과 더불어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크고 작은 축제와 행사들 모두 내실 있게 만들고 가꾸어 낸다면 모두가 기다려지는 진정한 축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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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8.04.16 19:41

인권과 문화다양성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국가들이 제정하는 헌법의 기초가 되는 세계인권선언은 전문과 총 30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서로 간에 행동해야 한다이다. 24조에는 휴식과 여가를 요구할 권리, 27조에는 문화권이 명기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과연 인권을 잘 지키고 누렸는지 자문해본다. 새삼스럽지만 이 지면을 통해 늦게나마 서 지현 씨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다. 윗사람에 대한 순종과 굴종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8년을 견디고 기다려 온 그녀의 노고와 용기에 놀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성추행을 당하고 인사 불이익까지 겹으로 받은 고통을 대변해줄 수 없었다.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 피해와 고통을 발언하고,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깨달은 진리도 요약해주었다. 첫째, 피해자가 입을 다물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잘못에 대한 사과는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한다. 셋째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오직 가해자의 전적인 잘못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부당한 죄책감으로 피해자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권력이 중심이 된 문화, 약한 자들의 인권은 논외로 취급되던 역사는 이제 재를 남기며 사라질 수순을 밟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저지른 폭력적 행태와 질서를 걷어내는 마라톤과 같은 혁명이 시작되었다. 인권은 표현될 때 지켜진다. 묵종, 굴종이 가정과 조직과 사회를 위한 미덕이던 시대가 떠나간다. 생존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을 지닌 모든 약자들에게 세뇌되어 온 묵종의 미덕은 권력자의 지시를 숨죽이고 따르도록 억압하는 시스템으로까지 강화되었고, 우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가치관으로 변질되어 우리 인권의 날개는 꺾였다. 커피 수다가 좋고, 가맥 수다가 좋은 것 중의 하나는 억압적 질서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정서와 분노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억압의 반대편에서 우리가 진정 원했던 이해와 소통과 인정에의 갈망이 임시적으로나마 그 수다의 공간에서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수다의 공간에서도 어김없이 폭력의 유혹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권의 잣대와 인권의 횃불을 늘 목숨처럼 붙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권 중의 하나인 문화권은 문화적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이며, 2000년 이래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증진은 전 세계의 문화인이라면 주목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연다. 이제 문화다양성은 사회통합에 장애가 되는 문제 꺼리가 아니고, 오히려 사회가 정체되는 것을 막고 발전을 모색해갈 수 있는 발전적 자원이며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여겨진다. 우리 스스로 정직하게 표현하고 또 누군가가 표현하는 것을 경청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인정해가는 인권 존중의 사회를 만들 의무가 문화다양성 증진을 통해 성취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돌아가, 모든 국가와 국민이 합의한 세계인권선언 1조에는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양심이 있다는 틀림없는 명제가 있는데, 2018년에도 욕망의 노예가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크고 작은 일상의 권력들에 의해 그 명제가 냉소적으로 무시되고 있지 않은지 우리 각자가 차분히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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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9 18:42

전통문화에 대한 단상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전통문화는 우리 선인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의 자존감이기도 하다. 자존감은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고 존중하는 데서 세워진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은 그가 속한 집단의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견고한 지와 연관되어 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단순한 견고함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의 견고함에서 비롯된다. 개인이 갖는 자존감이 사회적 신념으로 발현되는 것이 문화적 자긍심이다. 그렇게 볼 때, 전통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와 현재의 우리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전통문화는 공동체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국가나 지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며, 사라진 문화유산을 복원하여 전통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통이란 자연스럽게 계승되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부 정책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만의 패러다임이 조정되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때 구호처럼 외쳐 우리 귀에 익숙한 찬란한 민족문화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얻은 전통에 대한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통에서 충효와 호국이 필요 이상 강조되었던 때도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속에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달성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와 같은 예는 전통문화가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때론 과장되거나 어느 한 부분이 강조되며 제시되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진정성이 결여된 전통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의 고취는 집단 구성원에게 공허한 구호로 인식되게 한다. 그간 활동하기 불편하다고 외면당해왔던 한복이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다채로운 한복 물결이 관광지를 활보하는 현상은 그동안 무겁고도 거북하게 느껴졌던 전통문화가 새롭게 패러디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엄숙함으로 포장된 전통문화가 이제는 전통체험이라는 놀이의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지금도 여전히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택되거나 확대되면서 생존과 번영의 유효한 수단인 것처럼 포장, 재생산되기도 한다. 정치나 과도한 상업주의에 경도된 전통은 오히려 전통을 왜곡시키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는 더 늦기 전에 철저히 고증되고,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여 재해석되어야 한다. 복원의 기준도 다시 세워야 한다. 가령, 수입 자재를 사용하여 실용성을 간과한 외형만 전통양식으로 꾸민 가구를 진정한 복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규격화된 비빔밥은 과연 전통의 맛을 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즈음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문화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국수적으로 전통문화를 추종할 경우, 또다시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거나 타문화와의 소통을 막는 장벽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오늘날 다원화된 문화 환경 속에서 전통은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계승을 통해 진정성 있는 새로운 전통의 탄생을 모색해야 한다. 전통문화는 숨 쉬는 공기처럼 편안하고,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과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미래의 무형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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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02 20:05

왜 중앙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가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613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입지자들은 하나같이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겠음을 약속하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깜도 안 되는 어중이떠중이까지 뒤섞여 엄정해야 할 선거판을 난장판을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옥석을 가려야 한다. 이번만큼은 맑은 정신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분간하여 잘 뽑아야 한다. 역대 정부의 두드러진 홀대 속에 호남의 변두리로 전락하여 곁불이나 쬐고 있는 우리 전북이 반전을 이룰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통령 하나를 잘못 뽑아 국정이 농단 되고 나라가 절단 난 경험이 있다. 믿고 뽑아준 단체장이 연달아 구속되고 낙마했던 지역도 있다. 오로지 지역발전과 주민이익의 잣대로 사안을 판단하고 정책을 결정해야 함에도 중앙정부에 휘둘리고 대기업의 술수에 말려들어 주어진 밥상을 차버린, 그러고도 그 경위를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단체장도 있었다. 지난 일을 곱씹는 것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 말자는 뜻이다. 나는 모든 출마자에게 일일이 묻고 싶다. 꼭 그 자리에 앉아야만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주민들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지난 4년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왕 묻는 김에 하나 더 물어보자.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따와서 지역발전과 주민복지를 위해 풀어놓을 비전과 구체적 방안은 있는가? 지방자치의 가장 현실적 문제는 재정이다. 지방정부 수입의 근간이 되는 지방세가 전체 조세액의 20%에도 못 미치는 세수구조 아래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자치재정 확보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지방정부의 자치권에 대한 제도적 보완 없이 정치적 타협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졸속하게 시행한 탓이다. 자체수입으로는 공무원들의 인건비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치단체가 절반이 넘고 평균 재정자립도가 30%에도 못 미치는 우리 전북의 도와 시군은 재정의 대다수를 중앙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전북이 낙후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국가예산의 배분권을 무기로 지방정부를 통제하고 길들이기까지 하는 마당에 예산을 받아내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더구나 사회간접자본을 늘리고 산업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대형 사업을 정부정책에 반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 아니다. 자치단체마다 더 많은 국가예산을 확보했다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주시와 어느 예비후보의 논쟁처럼 성과를 부풀리고 여론을 호도하는 숫자놀음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수십 년을 끌어온 새만금사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또 새만금에 버금가는 대형 개발 사업을 발굴하여 선순위 국가사업으로 반영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있다. 일자리 확대와 소득을 높이기 위해 먹거리 사업 예산도 최대한 받아내야 한다. 때마침 문재인정부와 우리 전북 정치권의 관계가 아주 돈독하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했다. 전북 홀대를 환대로 바꿀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높은 지지나 좋은 관계만으로 국가예산을 알아서 증액하고 두둑이 배정해주는 중앙정부는 없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중앙정부를 우리 전북에 호의적이고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정무적 능력과 배경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몫을 제대로 받아오고 덤으로 그간에 빼앗겼던 몫까지 찾아올 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 그런 사람이 도지사나 시장군수 그리고 교육감으로 뽑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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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26 20:03

전라북도 예술의 뿌리

▲ 염광옥 (사)한국무용협회 전북지회장 21세기는 문화예술이 국력이라는 말을 한다. 국민행복과 함께하는 문화융성을 국정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제와 같은 생존이 관련된 문제에 비해 예술은 순위에서 다소 밀리곤 한다. 아마 사회적 역할로 이어지는 예술의 즐거움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사회적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경제의 수치처럼 측정하기 힘들다 보니 말로 하는 주장만큼 증거를 내어 놓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예술과 사회의 영향관계를 보자면 예술로부터 얻게 된 개인적 만족과 기쁨이 공감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식능력을 신장시켜 연대나 공동체적 의미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에 딱딱한 정책만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예술과 결합하게 되면 한 층 부드럽게 해결점을 찾게 되고 민감한 문제들이 예술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제3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로 보자면 전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해년마다 벌어지는 축제들과 다양한 행사들 큰 프로젝트들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문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들을 인정해주고 발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할 공적기관에서 조차 예술인들의 노력을 기부형태나 하청업체의 직원 정도의 대우로 끝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목격되고 또 격 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조차 이를 당연시 여기기 시작하고 주도해버리는 입장이라면 뿌리를 내리고 예술혼을 불태운 이곳의 문화예술은 더 이상의 발전도 갈 곳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곳에 편승하거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느 순간부터 예산의 문제나 주변 여건들로 인해 흔들리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몇몇 예술인들로 인해 예술인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받고 있다. 특성과 다양한 생각들이 달라서이지만 분명히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방식과 표현방법이 일반 사람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예술인들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봐라봐 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예술인들이 주체적으로 똘똘 뭉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여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라북도에 원로 예술인들께서 뿌리를 내려 싹을 나게 하고 튼튼한 나무가 될 때까지 열심히 수호신처럼 굳건히 지켜 오신 이 자리들을 소중히 지켜가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젊은 예술가들이 예술가적 마인드를 지니고 우리지역의 예술을 격상 시키는 예술지킴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뿌리 깊은 역사, 성숙한 문화, 풍요로운 예술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물질적 풍요의 가치가 드높아질 것이라 믿는다. 또한 예술이 살지 않으면 국가는 결코 발전 될 수 없으며 단단해 질 수 없다. 그간 묵혀두었던 사람들의 갖가지 소망과 희망들이 봄꽃처럼 피어올라 오는 시점이며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입으로만 예술인들을 위한 다는 말보다 예술인들의 본연의 의미를 존중해주고 그에 대한 인정과 대우를 해준다면 지켜온 뿌리만큼 전라북도의 문화예술이 도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나갈 것이다. 우리가 현재 지키고 있는 예술의 힘을 믿고 당당한 행보를 했으면 한다. △염광옥 회장은 예진예술원 이사장과 한국보훈무용예술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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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9 21:16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

▲ 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지금도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박서(the boxer)를 들으면, 노랫말 속의 주인공이 추운 도시 뉴욕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그 정서와 현실에 공감한다. 뉴욕이라는 미국 동부도시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주는 물리적인 추위 뿐 아니라 지극히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청년이 자본주의 첨단 도시에서 자본과 후원자 없이 견디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추위가 느껴지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이다. 듣는 청자인 나도 불쑥 고향의 이미지가 있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이다. 보편적인 정서는 표현하는 언어나 표현 방식은 달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에 우리는 보편적 정서에 기초한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 가치도 추구한다. 다만 인류애를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싶은 가치라기보다는 슈바이처나 한비야와 같은 그 누군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타인을 평가할 때 적용하는 잣대 가치로 여겨 오히려 우리들 서로에게 추위를 더 가하고 마는 선언적 가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인류애보다는 자기애가 일방적으로 앞서고, 문화다양성보다는 자문화애의 무의식적이고 편향적인 집착이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증진을 막는 것은 아닐까. 인류애나 문화다양성 증진을 자기 지역과 자기 일터와 자기 가정에서 실천하려면 성인이 되는 과정의 성장의 역사 속에서 이미 굳어져 버린 자기 습관과 다른 새로운 문화와 보편적 가치와 요청에 직면할 때 느껴지는 어색하고 쑥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 물론 때로는 자기애마저도 자기를 제대로 돌보는 정서인가 점검해보아야 한다. 즉 자기 스스로 타인이나 타문화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자기 정서를 끊임없이 상처내면서 그 문화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왜곡된 자기애는 없는지, 자기애의 내용과 방식을 복기해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자기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표현해야 할 자기의 정서를 오히려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반면 타문화를 동경한 나머지 우리 문화를 상대적으로 경시 하거나, 또는 반대로 타문화를 무조건 사대주의적 문화 혹은 저질문화로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 초기 문화생활에는 미국 하이틴 소설 번역본이나 미국의 대중음악이 일정부분 역할을 했고, 현대사 이전의 문화생활은 일제 강점기의 강요된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영향을 입었으며, 조부모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문을 기반으로 한 중국문화와 질서에 기초하여 문화생활을 영위했다. 우리는 이렇듯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타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문화혼성적 문화퇴적층을 형성해왔다. 어느 나라도, 어느 지역도 예외가 없다. 문화는 그렇게 타문화와 접촉하고 영향을 입고 입히며, 형성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타문화의 부정적 영향은 제거하고 긍정적 영향만을 소화해 내려는 노력도 끝없이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출발은 건강한 자기애에 기초한다. 자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 즉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정서가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지도 관찰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를 분명히 찾아 바로잡을 때,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열린 접촉이 가능해지고, 비로소 가식적인 인류애가 아닌 진정한 인류애의 동참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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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2 20:07

스포츠 유토피아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2018년 제23회 평창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93개국에서 출전한 젊은 선수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펼쳤고,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자기 국가의 대표팀을 응원하였다. 이번 올림픽은 정전 상태에 있는 분단국에서 개최되는 만큼 평화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각인시킨 행사로도 기억될 것이다. 평화를 희망하는 많은 세계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출전이 결정된 북한팀 선수단과 여자 하키 남북단일팀 결성을 기다려주고 대회 참가를 기꺼이 지지해주었다. 원래 올림픽은 신을 모시는 제전의식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발단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지루한 전투를 멈추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남북한이 함께 한 이번 동계올림픽은 고대올림픽 정신을 잘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대 올림픽은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는데,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쿠베르탱은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영국의 스포츠 교육에 감동을 받아 올림픽의 개최를 꿈꾸었다고 한다. 영국의 스포츠 교육은 부를 축적한 영국 사회의 퇴폐적인 문화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또한 근대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스포츠는 충성스러운 국민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것이고, 그 연장선에 올림픽이 존재한다는 다소 냉소적인 견해도 있다. 특히 신체적 활동과는 무관한 사격이 올림픽 경기에 채택된 것은 20세기 초엽의 군국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일부 견해도 있다. 어쨌든 고대에 태동하여 근대에 꽃피운 올림픽은 전쟁과 퇴폐문화라는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면서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로 승화한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또 다른 자기의 실현이고 스포츠의 진정한 매력이다. 오늘날 대중화되고 있는 스포츠는 그러한 신체적 활동을 강화해 나가는 것뿐 아니라 레크리에이션의 기능, 시민으로서의 민주적인 절차와 의식을 체화하는 데에도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는 대부분 상대 선수와의 관계만으로 설정되어 있는 듯하지만, 수많은 관람자와 관련 단체, 자원봉사자들의 참여 속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제3자의 시선으로만 존재했던 관람자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가령 팀추월 경기에서 뒤쳐진 선수를 배려하지 않고 질주한 두 선수에 대한 관람자의 비난은 규칙에는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경쟁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이 아님을 관람자가 선수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또한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보여준 경기규칙에 대한 엄정한 판정은 작은 반칙도 용납하지 않는 여러 사례에서도 잘 보여주었다. 진정한 스포츠는 공정함과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스포츠 정신은 타문화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 상대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스포츠에 내재된 공정함과 배려가 경기가 진행될 때에만 작동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기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상과 유리된 채 존재하는 이상적인 스포츠는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유토피아로서 존재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그 이상이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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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05 18:54

그들의 추악한 손버릇

▲ 윤철 전북수필문학회장 해마다 노벨상을 결정하는 시기가 오면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우리나라 사람으론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원로 문인이지만 추악한 손버릇을 가진 괴물이기도 했다. 그의 손버릇은 뒷담화 같은 소심한 저항을 통해서 이미 문단의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그가 이번에 직격탄을 맞았다. 이 한방으로 문인으로서의 깊은 사유와 경륜은 위선이 되고 틀기만 하면 수돗물처럼 나오던 주옥같은 시는 모두 똥물이 되었다. 또 다른 그가 있다. 수재 중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검찰조직 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꽃보직만 옮겨 다니며 미래의 검찰총장감으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다. 돈 봉투 사건으로 좌천되자 시대를 탓하며 사표를 집어던진 강단도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도 아주 추악한 손버릇을 지닌 나쁜 사람이었다. 연극계에도 추악한 손버릇을 가진 그가 있고 대학에도 있고 성직자 중에도 있음이 드러났다. 나라 전체가 성추행의 아수라장이 된 듯하다. 그들은 자기 분야와 조직에서 좌장 노릇 하던 어른이나 스승, 상급자로 절대적 갑의 위치에 있었고, 여성을 노리개 정도로 여긴 성추행의 상습범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 여성이 딸이나 며느리, 여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동료로, 후배로, 제자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빗나간 성 의식과 물리적 권력이 결합한 최악의 갑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적 갑질이 개인에 국한되거나 일부 특정 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라는 점이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상대의 인격조차 말살해버리는 사람답지 못한 괴물이 어찌 검찰이나 문화예술계에만 있으랴. 성추행과 희롱의 기억을 떠올리며 혹시 자신의 행위가 들통 나서 언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체면을 구기게 될지 몰라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이 사회 곳곳에 숨어있으리라. 검찰 발(發) 미투운동이 문화예술계를 초토화하고 이제 사회 전반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실마리가 된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 김수희 극단대표 등의 대단한 용기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자칫하면 개인 신상이 몽땅 드러나고 자기가 몸담은 조직에서 매장될 수 있다는 위험과 두려움 그리고 사적인 수치심까지 무릅쓰고 진실을 폭로한 그들의 순교자적 고백이 결코 헛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동계올림픽도 끝났다. 잔치로 들떴던 분위기를 차분히 정리하고 차근차근 챙겨야 할 중요한 일이 많다. 적폐청산과 함께 다스 의혹도 명료하게 조사하고 사법처리해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키며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는 미투운동의 고백과 고발을 모두 모아 철저히 조사하고 단호하게 처분하는 대책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하지 싶다. 이것이 용기 있는 미투운동 동참자들이 겪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대한 유일한 보상이며 2차 피해를 방지하는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으로 속속 드러나는 경악할 사실에 대해 정부에서 모른 척 침묵하거나 소관 타령이나 하고 시효 운운하며 흐지부지 넘어갈까 염려된다. 정부가 침묵의 목격자로서 공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소관 부처별로 따로따로 챙기기에는 환부가 너무 넓고 복합적인 사회문제다. 그 때문에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범정부적인 특별조사기구를 만들어서 사회 전반에 숨어있는 성추행 갑질을 철저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엄벌하도록 촉구하며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미투운동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평등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장과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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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6 22:25

이제는 콘텐츠다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이었다. 옆자리에 덩치 큰 외국인이 앉았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시종일관 노트북만 두드려 댔다.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은 착석을 하면서 먼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책을 읽든 잠을 자든 영화를 보든 하는데 이 인간은 처음부터 눈인사 한 번 없이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으로서 무언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나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만 들여다 보았다. 아마도 일본어로 된 미술서적이었던 것 같다. 스튜어디스의 음료수 서비스에도 손만 내밀 뿐 고개도 돌리지 않는 덩치 옆에서 꽤 언짢은 기분이 들었으나 아마도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으려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참 후에 화장실을 가려는지 자리를 뜨더니 돌아오면서 내 책을 흘낏 보는 것 같았다. 앉자마자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불퉁스럽게 대꾸하곤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묻는다. 뭐하는 사람이냐, 아티스트! 단답형으로 답했다. 와우! 이 사람이 반색을 하면서 노트북을 덮더니 상체까지 돌려가며 대화모드로 들어간다. 중요한 출장 보고서를 작성 중이지만 예술가랑 얘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며. 이십여 년쯤 전의 에피소드다. 그 당시엔 외국의 어느 곳을 가나 예술가로서의 프리미엄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창적인 또는 특별하게 창조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는.이제는 누구나가 예술가인 세상이다. 경제가 발전을 하고 생활이 여유로워지면 사람들은 문화예술로 눈을 돌린다. 예술시장으로 자본이 유입되고 활성화 되면서 나아가 직접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한때는 너도 나도 고가의 최신형 캐논, 니콘카메라를 메고 장소헌팅을 다니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으나 휴대전화기의 성능이 눈부시게 발전한 요즘엔 보기에도 놀라운 구도의 샷을 누구나가 셀룰러폰 갤러리에 수백 개씩 저장하고 공유한다. 한편에선 작가들도 갖기 어려운 초고가의 장비나 작업실을 확보해서 기존 작가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재생산하기도 하다가 아예 작가 선언을 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나서기도 한다.이렇게 국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향유하고 싶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전국의 지자체들은 대부분 상당한 규모의 문화예술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한때는 엄청난 규모의 예술의 전당 건립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더 크게! 를 외치며 하드웨어로 경쟁을 하다 보니 그 큰 공간의 효율적 운영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임실 작업실에 들어가는 산길은 전주와 임실, 완주의 경계선을 구불구불 넘나든다. 따라서 나의 행동반경도 이 세 군데 행정구역 안이다. 작년에 완주의 삼례문화예술촌을 처음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히 깜짝 놀랐다.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양곡창고의 역사성과 이미지를 크게 훼손 시키지 않고 소박하게 리뉴얼한 건축물과 시설물 콘텐츠의 콘셉트가 너무나 좋았다. 물론 설립취지에 걸맞게 성장하려면 상당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또 하나, 문화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잠업시험장단지 역시 훌륭했다. 역시 콘텐츠의 개발과 보완이 하나의 숙제가 되겠으나 현재 완주군이 보유하고 있는 시설물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질 문화예술의 성장이 크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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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0 23:02

인류공동체의 뿌리인 문화다양성

아시아의 어원은 아쑤바이다. 아쑤바는 친구, 동맹의 뜻을 담고 있다. 때때로 친구는 가족보다 더 소중하다. 친구에게는 비밀스런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족 간에는 다소 무례를 범하기도 하지만, 친구 간에는 무례하면 곧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기에 주의하게 된다. 비밀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행복과 발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친구는 인류공동체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회관계일 것이다.하지만 현재의 아시아 지역 국가와 도시 간에는 그 어원에 걸 맞는 친구관계가 농익었다고 보기 어렵다. 수시로 무례가 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친구를 꿈꾸고 있는 역사적 시점, 친구로의 전환이 필수인 시대라고 하면 동의해주실지?벌써 2년 반이 지난 일이다. 국제연합(UN)에서는 2015년 9월 총회에서 2030년까지 세계의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국제사회의 방향타로서 세계의 변혁: 2030 지속가능개발 의제를 채택하였다. 누구 한 사람도 뒤처지지 않는 (Leave No One Behind) 발전을 지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예전에는 빈곤국가의 빈곤탈피 등만이 중요 의제였는데, 이제는 선진국의 한 사람 한 사람도 이 의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름은 선진국이지만 그 안에서 나타나는 불평등과 소외, 사회 양극화 현상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본 것이다. 특히 문화 분야에 있어서는 문화다양성 인식과 문화유산의 보호, 지역문화의 활성화 등이 세부목표로 명시되었다.유엔만이 아니라 유네스코(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도 2014년~2021년까지의 중기전략을 발표할 때, 문화 간 대화, 문화유산의 보호,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과 창의성의 촉진 등을 전략적 목표로 설정했다.문화유산은 인류 공동의 자산이며,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은 인류 공동 행복의 방법이고 척도인 것이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나의 방식대로 표현하는 것이 나만을 위한 길이 아니고, 나의 조직, 나의 도시, 나의 국가, 나를 포함한 아시아, 나를 포함한 세계 인류가 공동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논리이다. 나와 너의 집합체인 집단으로서 우리의 표현이 존중되지 않거나 제외되는 지구 혹은 세계는 더 이상 인류 공동체일 수 없고, 어떠한 존재 의미도 없을 것이다.전주시는 글로벌문화관광도시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인 도시로 전주문화의 동심원을 확산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아시아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친구가 진정으로 고락을 같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시는 현재 약 6,000만 평의 부지 중 100만 평을 아시아문화심장터로 가꾸어 가고 있다. 과거에 아시아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혹은 과거에 아시아를 대표할만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심장터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풍요롭고 다양한 아시아권역의 문화다양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따뜻하며 쉼 없이 뛰고 몸의 모든 부위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의 특징을 비유로 차용한 것이다. 전주 시민의 마음과 지식과 섬세한 시선과 손짓과 발걸음으로 우리의 고유한 색깔이 살아있는 한식, 한복, 한옥, 한지, 국악, 한국화, 수공예, 한글서체, 마당극, 영화, 문학의 역사와 실체를 지속적으로 100만평 안에서 표현하고 발신하고,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아시아는 규모면에서 지구의 약 1/3의 공간에 해당하고, 인구도 약 60%를 차지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눈으로 아시아를 바라본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깝게 다가온 아시아이다. 아시아의 뿌리인 문화다양성이 이해되고, 즐겨지는 오늘과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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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13 23:02

선비 정여립이 걸어간 길

학문(學問)은 배우고 묻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배움은 과거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 치중한 것이라면 물음은 현재의 관점이 작용된 것이다. 전자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실천행위이다. 학문이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라고 정의되는 것은 후자의 비중이 더 높다는 말이다. 따라서 학문은 과거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새롭게 묻고 해석하여 실천하는 데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겠다.중국 남송 대에 주희(朱熹)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과 통치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성리학은 조선전기에는 새로운 문화 창달의 원동력으로서 조선사회의 질서와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데 이용되었다. 16세기 중후반에는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심화되는 흐름 속에서 기호학파로 대표되는 율곡 이이(李珥)와 영남학파의 퇴계 이황(李滉)이 조선의 성리학을 토착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은 주희를 좌표로 삼아 자신의 학문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다. 특히 사서오경으로 대표되는 경서는 주희에 의한 해석만을 신봉하며, 심지어 주희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학문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의 사문난적이라고 하여 배척당하곤 하였다. 새로운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새로운 사유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성리학이 조선의 향촌사회에까지 정착되던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활동했던 학자이다.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에서 근무했을 정도로 경학에 밝았던 그는 기존의 해석을 고증하고 새롭게 재해석하는 데 흥미를 가졌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주희의 이론에서 벗어나 사실을 확인하고 원시유학이 갖고 있는 본연의 사유를 자기화하고 싶었다. 특히 촉나라가 한나라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주희의 역사관에 대해 위나라를 정통으로 한 사마광이 직필(直筆)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저 답습하기 보다는 정여립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의구심과 경각심, 진실에 접근하려는 열린 생각이야 말로 지식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정여립의 학문적 자세와 용기는 어디에 근원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대동(大同)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인이 함께 공유한다는 천하공물(天下公物) 의식을 통해 그가 꿈꾸는 성리학적 이념은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대동사상은 오경 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근원을 두고 있다. 대도(大道)가 행하는 세상에서는 온 천하를 공공(公共)의 것으로 여겨,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다스리게 하고, 교육으로 신의와 수양과 사회적으로 화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어버이만 친애하지 않고 남의 노인도 친애하며 자기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사랑한다. 노인에게는 안심하고 삶을 마칠 수 있게 하고 장년에게는 직업을 갖게 하며.정여립은 고전을 넓고 깊게 탐구한 학자였으며, 경학에서 얻은 지식을 사회화하고자 애쓴 선비였다. 그의 이상과 실천은 기축옥사(1589)를 당하며 좌절되었고, 그 여파는 호남 선비문화의 토대를 괴멸시켰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서 전혀 퇴색되지 않는다. 그에게 반역자, 혁명가, 공화주의자 등의 수식은 부질없는 것이다. 그가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은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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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6 23:02

문재인표 삶의 질을 기대한다

삶의 질이란 단순하고 명료한 개념이 아니다. 그 자체가 가치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주관적 개념이고 외적 환경에 대응하여 상대적으로 형성되는 복합개념이면서 시대와 지역, 사회 환경과 계층, 문화 전통과 신념에 따라 욕구가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가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코, 획일화하거나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것이 삶의 질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그런데도 UN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에서 주기적으로 나라별 삶의 질을 수치화하고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그러나 발표하는 그들조차도 삶의 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혹시 있다 해도 그건 그의 주관일 뿐 삶의 질 전체를 포괄하는 답변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런 조사 결과를 100% 신뢰하거나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국민이 누리는 삶의 질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그다지 좋지 않음을 참고할 뿐이다.문재인 대통령은 금년도 신년사에서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국정 목표로 삼겠다고 했다. 정량평가가 어려운 약속은 마음먹기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약속을 좀체 믿지 않는 편이지만 정치인들은 계량이 어려운 약속을 좋아한다. 자기들의 공약을 자체평가하면서 항상 100% 지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 꼼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 대통령 약속만큼은 믿고 싶다. 내가 문재인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편이고 문재인 대통령은 인연을 소중하게 알고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는 세평 탓만은 아니다. 신년사를 들으면서 부탄이라는 나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부탄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인구 75만 명의 아주 작은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이 1,500불에도 못 미치고 문맹률이 53%에 달하는 가난한 나라로 왕이 세습되는 군주국이다. 일부다처제이며 종교의 자유가 없고 군인보다 승려가 많은 불교국가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금연 국가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벌금을 내고 국민은 나라가 규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 외국인 관광객도 매년 비자 쿼터를 정하여 제한하는 은둔의 나라다. 한편, 부탄은 국민총생산(GDP)보다 국민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의해 나라발전이 결정된다는 국정철학으로 국민총행복(GNH)을 추구하는 특별한 나라이기도 하다.문재인 대통령은 잠룡 당시인 2016년 7월에 부탄에 가서 국왕 직속의 국민총행복위원회 관계자를 만나 그들의 정책을 듣고 배웠다고 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부탄의 행복정책을 도입하겠다.고 약속도 했단다. 당선이 확정되고 처음으로 전화 통화한 외국수반이 부탄의 총리였다니 그의 의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삶의 질 개선의 국정 목표를 믿고 기대하는 연유도 여기에 방점이 있다.사람다운 삶의 조건은 경제적 여유와 정신적 만족, 육체적 건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최적이 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경제적 윤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재인표 삶의 질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호응해야 마땅하다.정신적 만족의 가치체계는 사회적 공정과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일상에 만연한 적폐와 사회적 불평등 해소가 삶의 질을 높이는 제일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낙하산 인사, 부와 권력의 부정세습이 공공연히 존재하는 한 조금 더 배불리 먹게 되었다고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참여와 선택의 기회가 보장되고 평평한 운동장에서 공정하고 자유롭게 달리기하는 문재인표 삶의 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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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30 23:02

국사봉 물안갯길을 걸으며

이른 아침 창문을 여니 맑은 아침공기와 밝은 햇살이 눈 위에 내려앉아 황홀하게 반짝인다. 임실 옥정호 호숫가 작은 폐교에서 작업을 하는 중이다. 50년쯤 전에 지은 아담하고 소박한 작은 학교다. 빛 바랜 적갈색 지붕과 벽돌 조각이 부서져 내리는 낡은 건물이 정겹다. 요즘 보기 드문 나무 창살도 그대로다. 천정을 뜯어내니 나무로 짜맞춘 트러스 형식의 골격이 드러나서 그대로 두었다. 기분 좋은 공간이다.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와 들풀을 본다. 건축물과 세월을 함께 한 아름드리 벚나무들도 봄이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낸다. 바람에 그 작은 꽃이파리들이 운동장을 부유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배롱나무꽃의 화사함에는 잠시 숨이 막힌다. 이들은 낡은 교사에 생명을 불어 넣고 살아있게 만든다. 허투루 손을 댔다가는 그 조화를 깨트릴까봐 내부는 수리를 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외관은 옛날 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작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작업실을 옮겼다. 한동안은 매주 서울을 들락거리며 방황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시골 사람들과의 소통도 어려웠다. 이게 아니다 싶기도 해서 다시 서울로의 회귀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 혼란스러움을 정리하기 위해 이른 아침 물안갯길을 걸었다. 매일처럼 인적 없는 산길을 걷다 보니 전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풀꽃들과 수종을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나무와 이름 모를 풀들이 자기자리에 본연의 자세로 묵묵히 존재하고 있다. 가끔씩 만나기도 하는 고라니와 너구리까지.관찰하며 바라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때 혹은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바라볼 때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과연 얼마나 인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체이다. 인간에 의해 쓰여진 글이나 그림에도 생명이 있다. 생명을 갖는 존재는 모두가 아름답다. 그 본질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실질적인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때 새로운 창조의 창이 열리지 않을까. 이제 이곳에서 나는 풍요로운 창조의 힘을 축적해 갈 것이다.임실의 물안갯길은 아름다운 산자락과 고요한 호수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 걸음 한 걸음이 감동이다. 서울 근교에 이런 곳이 있다면. 이미 대책 없는 난개발로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 임실군의 환경보존과 개발정책이 조화롭다. 국사봉 산길 10여 키로 또한 임실군 행정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흉측하게 여기저기 세우는 타 지자체들의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았을까? 고마운 일이다.겨울이 찾아오면 거의 매일처럼 이 산 저 산에서 소나무를 베는 엔진톱 소리가 웅웅거린다. 마을 사람들의 겨울 난방용 땔감이라 한다. 십 년 전에 폐교를 구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환경이었다. 인근의 산들은 온통 잡목림이 없는 소나무산이었으며 학교는 소나무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포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뒷산은 물론 산이 하나 둘 벌거숭이가 되었다가 밭으로 변하고 있다. 나름대로 얘기를 안해본 것도 아니지만 아직은 시골주민들에게 자연이나 환경에 대한 의식이 없다. 생활이 모든 것에 우선할 뿐이다. 지자체에서 그 어떤 노력을 한들 주민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환경의 파괴는 막을 수가 없다.아름다운 자연만으로 세상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 소중함을 인식하고 가꾸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가 수반되어야 지구상의 생명체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질 것이다.△전수천 교장은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았으며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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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23 23:02

의미와 재미의 균형을 잡아주는 삶, 문화다양성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분량의 삶을 들여다보자.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활동은 각기 직업이나 취향 그리고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진 노동자인가에 따라서 다르고, 산과 커피숍과 시장으로 다니며 자연과 사람과 쇼핑을 즐기는 취향이 있는 사람과 혼자 있는 정적인 시간을 즐기는 사람의 활동이 다르며, 낮과 밤 시간 혹은 식사 시간대에 따라서 활동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구별된다. 물론 최근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혼합되고, 낮과 밤의 활동이 구별되기 어려운 다각적인 콜라보- 공동작업, 협력-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물론 이러저러한 활동을 꿈 꿀 틈도 없이 행사 준비로 뛰어다니거나 식당이나 편의점, 혹은 문구점이나 마트에서 상품 판매에 넋이 나갈 정도인 활동도 있다.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을 줄여가며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그 활동들이 의미와 재미가 전혀 없다면, 그 활동은 자율적으로 선택한 몰입으로서의 노동이나 여가가 아니어서, 추후 그 부작용인 고통이 예견되기도 한다.이렇듯 우리 삶을 구성하는 활동의 외양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하는 바를 단순화하면, 의미 찾기와 재미 찾기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은 의미와 재미의 두 차원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이 두 차원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내적으로 그 편중으로부터 발생한 불균형으로부터 불만이 쌓이고, 그 불만으로 인해 늘 전투태세가 된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에 인내심을 잃게 되고, 그 불만은 다각적인 분노의 방식으로 표출되어, 조직과 사회의 미래에 부담이 된다. 게다가 의미만 추구한 키다리 아저씨들과 재미만 추구한 한량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은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절대시한 결과이기도 하다.외롭고 절대적인 분노의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인권과 표현을 존중하는 이해와 관용의 의미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재미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찾아진다. 문화다양성은 생물의 종 다양성과 동일한 비유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생물의 종 다양성은 생물의 종을 보호하여 멸종을 방지하면 지구상의 생물의 다양성과 풍요를 통해 인류의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게 되는 차원이다. 문화다양성은 단지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고유한 문화와 그 표현들을 보호만 하면 되는 차원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문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문화를 즐기는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과업이 따른다.자신의 문화나 취향과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귀찮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진정한 문화발전을 위한 첫 걸음이며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와 재미가 타인에 의해 이해되는 일과 동일한 맥락이다. 동전의 앞뒷면인 것이다. 따라서 고립주의적 운동들은 사실상 문화다양성을 배격하는 일종의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혼란스럽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며, 우리가 소속된 지구상의 인류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동의 문화자원이 늘어나는 일이다. 나는 과연 우리 고유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다른 문화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미와 재미를 균형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되 그 의미 속에서 문화다양성의 힘을 실감하고 재미를 느끼게 되기를 소망하는 시간이다.△정정숙 대표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연구실장, 한국문화기획평가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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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6 23:02

'탐미'의 여정-전시품 맛보기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가끔 박물관의 전시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필자는 대체로 전시품 앞에 서 있는 경험을 많이 하세요.라고 대답할 뿐, 상대방이 기대하는 속 시원한 비법을 일러주지는 못한다. 필자의 태도는 매우 무성의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나마 그러한 답변이 최선이 아닐까한다. 전시품과 마주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박물관을 여러 번 방문하게 될 터이니, 스스로 감상하는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던진 답변인 셈이다.본질적으로, 감상은 직관과 감성의 영역이고, 좋은 전시나 전시품은 감상자에게 창조적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전시품의 최종적인 완성은 감상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섣부른 감상법을 제시하는 것은 감상자가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을 방해할 수 있고, 되씹을수록 우러나는 작품의 무한한 맛을 한 가지 맛으로 단정짓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당나라 말엽의 사공도(司空圖)가 예술 작품에 대해 음식으로 비유하여 좋은 작품은 신맛이나 짠맛 그 너머에 있는 맛 너머의 맛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 역시 작품에 숨겨진 맛을 찾아가는 탐미(耽味)의 여정과 같은 것이다.말하자면, 미(美)의 여정은 맛(味)의 여정이기도 하다. 원래 미라는 글자는 달다는 뜻의 감(甘)으로 풀이되기도 하였다. 이 감자는 입 속에 음식을 하나 물고서 아직 삼키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하니 미(美)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맛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맛보기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다고 하는 맛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맛도 있는 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맛은 여러 맛을 다 맛보아야 알 수 있는 경험의 산물이다. 그렇게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을 다 맛보고 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 볼 수 있는 안목도 생긴다. 그리고 작품이 주는 정보가 짠맛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맛보기를 통해 단맛도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가 무미한 맛, 담담한 맛이 곱씹어볼수록 맛이 있음도 알 수 있게 된다.감상의 요결을 묻는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이념적이고 교육적인 공간으로 인식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박물관을 방문하기에 앞서 관련 지식을 공부하고 가야한다는 중압감을 갖고 있다. 그러하기에 작품을 본다는 것이 마치 작품을 분석하고 알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좋은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박물관은 지루한 곳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통한 배움은 즐거움이 연계되었을 때에야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원래 예술은 유희의 산물이며, 예술 감상은 그러한 유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면에서 필자는 더 이상 박물관 관람을 교육의 연장으로 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싶다. 박물관은 일상 속에 함께하는 놀이의 장소, 아이들이 커서 박물관에 익숙하도록 낮설지 않은 공간임을 알려주는 즐거운 나들이 정도로만 여기면 좋겠다. 박물관 나들이 자체를 아이에게 선물한다는 마음이라면 제일 좋겠다.△김승희 관장은 공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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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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