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언론인·역사연구가)
전주 익산은 역사적으로 고도(古都)이지만 맛과 멋이 어울어진 풍류의 고장이며 예향(藝鄕)이다. 충청도가 고향인 필자에게 이 세 가지는 항상 부러움으로 남아 있다. 육회, 비빔밥의 감칠 맛, 구수한 막걸리에다 가슴을 울리는 판소리, 그리고 합죽선의 정결한 풍류를 어디에다 비견하랴.
필자가 더 이 고장을 생각하는 것은 '백제와당'이 있어 그렇다. 오랜 기간 이 분야에 몰입하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 와당에 대한 인연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30년 전 익산의 한 교육자분(지금은 작고)과 함께 처음 익산 일대 유적을 답사 한 적이 있다.
아! 이럴 수가…. 그 때는 모든 유적들이 정비가 안 된 상태였는데 어디를 가도 백제 와당의 편린이 산란했다. 천년 영화 백제 잔영이 수 없이 흩어져 있던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아름다운 연화문와당 파편들을 몇 점 줍기도 했는데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를 와당(瓦當)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와당을 좁은 의미에서는 막새라 하는데 재미있게도 숫막새(夫瓦)와 암막새(女瓦)로 나뉜다. 암키와 수키와의 접합을 남녀 상열에 견줘 이같이 이름한 것인가. 옛날 사람들은 막새에 각종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 넣었다.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이 연화문이며 그 다음 인동(忍冬), 당초(唐草), 봉황(鳳凰), 도깨비(鬼面) 등이다.
백제 와당은 다른 시대의 와당 보다 태토가 부드럽다. 소박한 백제 여인의 유백색 살결처럼 곱디곱다. 혹자들은 백제 문화의 특색을 얘기 할 때 와당을 손꼽는다. 특히 미륵사 제석사 왕궁평 출토 와당의 균형미는 와당 중 백미로 평가된다.
재미있게도 경주의 왕궁터 혹은 절터에서 출토된 제일 밑에 층의 기와들은 바로 백제 와당을 닮은 것들이다. 부여 혹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와당과 똑같다. 백제 와장의 작품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탑의 금제 봉안기 명문을 가지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사리기에 나타난 문양이 다시 화제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사리기 외면에는 화려한 인동당초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같은 형식의 문양이 경주 구황동 황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 여래좌상의 광배(光背) 문양과 너무 닮고 있다는 것이다. 황복사는 바로 신라 황실 사찰였다.
백제 금제사리기는 639년의 것이고 신라 황복사지 출토 여래상은 명문으로 보아 706년(신라 聖德王 5년) 무렵으로 67년 차이가 난다. 신라 황실의 금제장이 미륵사지에 창건에 간여한 것인지 백제의 장인이 통일 신라 황실에 참여하여 같은 작품을 완성한 것인지 아직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유물의 연대로 보아 백제의 영향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익산의 장인이 아니면 그 직 후계자가 백제 멸망 후 신라 왕실의 비호를 받고 경주로 가 황복사 불사에 참여한 것은 아닌지.
백제 신라는 비록 전쟁을 하면서도 부처를 경배하는 데는 적대를 초월했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대역사에 백제의 건축 기술자, 장인들이 참여했다는 고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황룡사는 바로 고도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백제 장인들에 의해 창조 된 것이며 이는 동서화합의 산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백제 고도문화권역의 세계 유네스코유산 등재에 익산 부여 공주가 모두 노력하고 있다. 익산역사유적지구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됐다고 한다. 이미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된 판소리에 이어 또 하나의 세계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남는 그런 멋과 맛 풍류의 고장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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