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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 생명의 길을 묻다] (23)동학농민혁명과 동진강

강변 들녘, 그 날 농민들의 뜨거운 함성이 들린다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난 2004년 5월, 착공 4년만에 개관했다. (desk@jjan.kr)

'물'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 장대한 역사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김도삼·정익서 등이 고부 농민들과 함께 온갖 폭정을 저지르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며, 말목장터에서 항쟁을 계속했던 고부농민봉기가 시작이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 고부면은 정읍시에 딸린 작은 면이 되었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동진강 연안의 비옥한 농지에 형성된 배들평야와 고부천·정읍천 주변의 드넓은 농토. 그만큼 지배세력의 억압과 수탈이 극심한 곳이었다.

 

 

 

 

지난해 4월말 부안군 백산면서 열린 제116주년 동학농민혁명 백산봉기 기념행사 모습. (desk@jjan.kr)

부패한 봉건 정부의 하수인인 조병갑도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수탈을 일삼았는데, 그중 하나가 만석보 축조를 빌미로 수세를 받는 것이었다. 멈춰버린 하천.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할 물의 흐름을 방해하면 결국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동진강 물길 닿는 이랑이랑 녹두꽃은 또 피고 질 터인데…….

 

동진강이 휘도는 정읍과 김제 곳곳에 동학농민혁명의 자취가 남아 있다. 김남주 시인의 시처럼 '한 시대의/불행한 아들로 태어나/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승리 없는 투쟁/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황토현에 부치는 노래」中)들의 위대한 걸음걸음이다.

 

정읍은 온통 '동학'이다. 내장산 입구 공원은 <전봉준 공원> 이며, 호남선 정읍 지역 휴게소도 <녹두장군 휴게소> 다. 정읍 사람들이 그만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증거일 것이다. 둘러볼 곳도 여럿이다.

 

마른 흙냄새 여전한 고부면에는 <고부관아 터> 와 <군자정> , <사발통문 작성 터> 등이 있다.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옛 고부관아 터이며, 학교 바로 옆은 향교다. 군자정은 못으로 둘러싸인 누정. 지배세력들이 가혹하게 억압과 착취를 해서 얻은 고부군민들의 고혈로 풍류와 사치를 즐기던 씁쓸한 현장이다. 사발통문 작성 터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이 수립되었던 곳이다. 두 달 후인 1894년 1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입구에 당시 사발통문 거사를 기념하기 위한 <동학혁명모의탑> 과 <무명 동학농민군위령탑> 이 세워져 있다.

 

사발통문 거사 모의 때와 동학농민혁명 제1차 봉기를 단행할 당시 전봉준(1855~1895)이 살았던 이평면은 <전봉준장군 고택> 과 <전봉준장군 묘역(단비)> , <말목장터> , <만석보 유지비> 등이 있다. 그가 실제 살았던 고택은 고부농민봉기 때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를 복원한 것이다. 그의 생가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 고택에서는 고부농민봉기를 전후로 3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비는 고택에서 약 500m 떨어진 소나무 숲에 있다. 단비는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의 비석이다.

 

말목장터는 이평면 소재지 삼거리에 있는 장터다. 부안·태인·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곳. 익산 군수로 발령 받았던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해오자 전봉준은 통문을 돌려 1894년 1월 농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이게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죽창 수백 개로 무장한 뒤,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다. 고부농민봉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 바로 이 곳인 것이다. 점령 당시 앞선 농민 500여 명이 모여 있었다는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입구에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동진강 상류로 합수되는 곳에 쌓은 만석보 파괴를 기념하는 <만석보파보선정비> 가 서 있다.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있는 황토재는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다. 이 곳은 동학농민군이 정부의 공식 군대와 맞서 승전을 거둔 현장이다. 황토재 마루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은 1963년 박정희 정권 때 세워진 것.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다.

 

'탑신에는/그날 녹두장군의 뜨거운 피가 돌고/배들 농민들의 징소리가 들린다/그날 만석보 농민들의 피진 함성이 들려오고/고향 용두봉 독고봉이 일어선다' (정렬의 시 「동학혁명기념탑」中)

 

동학농민혁명기념관도 여기에 있다. 이 곳에는 전봉준이 사용하던 유품 중 벼루·붓·패랭이·갓·신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갑오실기』, 『전봉준 공초기』, 『용담유사』, 『동경대전』 등의 사료를 비롯해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사진과 무기·책 등이 전시돼 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의 최후 격전지로 알려진 태인면 성황산에는 <태인 성황산 전투지> 가 있다. 원평 구미란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1894년 11월 이 곳에 진을 친 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에는 김개남(1853~1895)의 <고택터> 와 <묘역> 이 있다. 백산대회에서 손화중(1861~1895)과 함께 동학농민군 총관령으로 추대된 그는 남원·금산·무주·진안·용담·장수 등을 아우르며 폐정개혁에 나섰다. 전봉준이 체포된 순창 피노리와 지척인 산내면 종성리는 <김개남 피체지> 다. 김개남은 서울로 압송되지 않고 전라감사에 의해 전주 초록바위 아래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당시 대역 죄인은 서울까지 압송하여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전라감사는 김개남의 혁명적 열정과 서릿발 같은 기개가 두려워 전주에서 서둘러 처형했다고 전한다. 김개남 묘역이 있는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뒤쪽에 고택 터라고 알려진 곳에는 <김개남장군 생가 터> 라는 표석이 있다.

 

상평동 음성리에는 동학농민군 총영관이었던 손화중의 묘역이 있으며, 북면 마정리 월천마을 출신으로 사발통문 모의와 고부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최경선(1859~1895)의 묘역은 칠보면 축현리에 있다.

 

김덕명(1845~1895)이 접주로 활동하던 김제는 금산면 용호리 <구미란전투지> 와 원평장터의 <전주입성 직전 선전관 처형지> , 학원마을의 <원평집강소> 등이 있다. 금산면 용계리 <집회 터> 는 1893년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집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호남지방 동학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금구·원평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 집회는 전봉준이 중심이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금산면 장흥리는 김덕명의 무덤이 있고, 용계리에 그의 추모비와 당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각> 이 세워져 있다. 이 곳 남쪽 언덕인 구미란전투지는 우금티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세에 몰린 동학농민군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전투를 벌인 곳. 소나무 숲에 팻말로 남은 봉분 수십 기가 죽창처럼 솟아 있다. 전라도 뻐꾸기, 육자배기 가락보다 더 구슬프게 운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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