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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국중하 대표의 문학 사랑 - '문학도의 꿈' 수필집과 여산재로 이루다

첫 직장때 펜팔·부인과 사랑편지 계기 문학 관심…기업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여산장학재단도 설립

▲ 국중하 대표가 지난 2003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학동마을에 세운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 전경.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우신산업 국중하 대표. 그의 이면엔 여린 문학 소년의 모습이 서려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자리를 박차고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점령하겠다는 포부로 우신산업을 설립한 그의 모습엔 강인함이 베여 있지만 오늘의 그가 있기 까지는 서정적 정서가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기업가이면서 수필가인 그의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여산장학재단 설립과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 설립이다.

 

 

▲ 국중하 대표

△펜팔로 이루어진 사랑

 

국중하 대표는 1962년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국내 제1의 대기업으로 꼽혔던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주) 회사 공채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뗀다.

 

당시 호남비료 구성원들은 우리나라 초 엘리트들로 구성돼 있으며, 지방 대학생의 입사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호남비료에서 받던 급여는 당시 마을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던 면서기의 7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고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가장 즐겨하던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펜팔' 이었다. 손바닥만 한 가요책 뒷면에는 펜팔 명단과 주소가 있었고 그는 수시로 얼굴 모를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던 중 한 여대생의 어려운 소식을 접했고, 그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충주대학교에 다니던 불우 여학생이 있었는데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돌아가셨고 집안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시와 편지를 좋아했던 문학소녀로 국 대표는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일체를 지원했다.

 

그 문학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만도 300여통에 이를 정도며, 그 소녀는 국 대표의 이 같은 동정심을 연정으로 착각, 향후 졸업 후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찾아와 구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국 대표는 맞선을 통해 현재의 부인을 만났고 부인과도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그가 썼던 편지 첫 글귀는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 빨간 단풍나무 위에 걸려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간히 스치는 소슬바람이 뺨을 스칠 때 마다 그대의 얼굴이 떠올려져 이렇게 펜을 듭니다"라는 내용으로 지금 그 편지를 보면 낮이 간지러울 정도라고 한다.

 

그후 수십년이 흘렀고 그는 1998년 8월 '수필과 비평'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다.

 

그는 한국문인 문학상 본상과 전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들녘 바람몰이' 등 6권의 수필집을 문단에 내놓기도 했다.

 

△예술·문화 공간 여산재 설립

 

국 대표는 지난 1973년,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 밑에서 27만톤급 배를 만드는 당시에 현대건설(주) 기계과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에 산업 시찰을 갔는데 50살이 넘은 여자가 영빈각에서 잔잔한 베이직 음악을 틀어주면서 무릎을 꿇고 손님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은 자원과 경제력만 앞서는 강국이 아닌, 문화도 한국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분개와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는 사실에서다.

 

이날의 기억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졌고 2001년 드디어 여산장학재단을 만들고 2003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학동마을 125번지에 문화예술 공간 여산재를 설립했다. 여산재는 그의 꿈이었다.

 

'여산'이란 호를 지어준 사람은 수완스님(통도사)이며, 여산재는 문화공간이지만 다실, 서재, 외국인과 내국인를 배려한 숙소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음은 물론 공연 및 세미나, 전시실을 겸용한 외부 공간을 갖춘 문화 사랑방이다.

 

여산재에는 다도를 즐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영빈각이 설치돼 있으며, 야외와 실내 공연장이 마련,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가능하다.

 

또 서재에는 수십점의 그림과 글씨 등이 전시돼 있다.

 

국 대표는 그간 연중 무휴(공휴일은 제외)로 여산재를 운영하면서 문화산업 창업 강좌, 관리자 대학생 취업대비 워크샵, 가톨릭문우회 심포지엄, 전주시립국악단 공연, 주부클럽연합 전북지부 세미나, 전북수필문 제58호 출판기념회, 국제 디자인 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전북 대표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국 대표는 "여산재는 30여년간 키워온 나의 꿈으로 지난시절 기업 임원으로 일할 당시 우리의 접대문화에 회의를 느꼈다"며 "그러던 중 문화 예술이 함께 어울어진 여산재를 구상하게 됐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만발하는 꽃에서 향기가 없다면 진실과 가치가 무너지듯이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분과 예술의 한 장르를 일궈 내겠다"며 "동시에 혼신을 바치는 예술가와 함께 호흡하며 아름다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새로운 것들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혼자 보기 아까워 꿰놓은 게 바로 수필이라며 대중 앞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부드러운 글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퇴고를 거듭하며 원고지와 씨름을하고 있다. 이강모기자 kangmo518@

 

 

 

● 국중하 대표 프로필

 

△1962. 3 :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1962 - 1967 : 호남비료(주) 나주공장

 

△1967 - 1971 :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1971 - 1972 : 극동건설(주) 기계과장

 

△1972 - 1973 : 현대건설(주) 기계과장

 

△1973 - 1982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

 

△1982 - 1983 : 현대정공(주) (상무이사)

 

△1983 - 1985 : 현대건설(주) (상무이사)

 

△1985 - 1987 : 현대중공업(주) (상무이사)

 

△1987 - 1994 : 우신공업·우신엔지니어링(주)·(주)우영·우신산업(주) 설립

 

△1998. 8. 29 : 「 수필과 비평 」 수필부문 「성지를 찾아서」 신인상 수상

 

△1999: 한국문인협회 / 국제펜클럽 / 전북문인협회 /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한국문인 수석부이사장 / 새천년 문학회 문학상 운영위원장 역임

 

△2001 - 2004 : 우석대학교 반도체 전기 자동차공학부 강사

 

△2001. 6. 20 : 여산(餘山) 장학재단 설립(재단이사장)

 

△2002. 2. - 2008. 12 : 전주문화재단 이사

 

△2003. 12: 여산재(餘山齎)개관

 

△2009. 3: 우신엔지니어링(주) 군산공장 준공, 본사이전

 

△2010. 4 : 어린이재단 전북 지역본부 후원 회장

 

△2010. 10: 한국 엔지니어클럽 전북지부 회장

 

● 저서

 

『수필집』

 

△내 가슴속엔 영호남 고속도로가 달린다(1998. 8. 15.)

 

△호남에서 만난 아내 영남에서 만든 아이들(2001. 8. 30.)

 

△나의 삶은 도전이며, 시작이다.(중역수필집. 2003. 9. 1.)

 

△나에게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 존재한다.(2004. 9. 5.)

 

△들녘 바람몰이(2007. 10. 1.)

 

△여산재 가는길(201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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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모 kangm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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