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만난 구도의 선객
숲은 세상으로 통한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밝은
삶처럼 팍팍하다.
숲길 또한 이와 같아
막힐 때와 뚫릴 때가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길
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한
숲길을 더듬어 간다.
대낮인데도 어둡다.
그럴 때마다 잠이 든다.
때로는 고요 속에
때로는 폭풍 속에
우우 살아나기도 한다.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닌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닌
숲은 우주로 통한다.
-주봉구, '숲길을 가다' 전문
시인은 하고 싶은 말(言)을 직접하지 않고, 숲을 하나 데리고 와서 말을 하게 한다. 말로써 다 말할 수 없으니 형상으로나마 그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소위 사의전신(寫意傳信), 입상진의(立象盡意)의 방식이다. 마치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대중을 모아 설법을 하던 중 '깨달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꺾어든 연꽃처럼, 주봉구 시인도 '숲'이라는 형상으로써 그가 터득한 삶의 진의(眞意)를 전하고자 한다.
이는 무언(無言)의 숲에서 삶의 지혜나 우주의 섭리를 넌지시 배우고 깨치게 되는 일종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인 셈이다.
어느 날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 시인이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에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쳤듯이 주봉구 시인도 '숲길'에서 인생의 길, 곧 '도(道)'의 길을 깨치고자 한다. '입구(入口)와 출구(出口)가 불분명'한 '숲의 길', 그러기에 그것은 '때때로 막히고 때로는 뚫리는' 고달픈 인생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을 화자는 '더듬어 간다.'고 하였다. '어디로 가야 옳으냐/ 길은 네 갈래로/ 찢어지고/ 대학 병원이 눈앞에 보이는/ 생(生)은 사(死)/ 사(死)는 생(生)의 길/- / 어디로 가야 옳으냐?'('네거리에서', 1988)에서와 같이 그의 삶은 '대낮인데도 어두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잠이 든다'. '잠'은 '팍팍하고', '어두워' 지친 삶에 안식과 휴식을 준다. 침묵과 명상의 시간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폭풍 속에서/도-우우 살아난다'고 한다. 그것은 미몽(迷夢)에 시달린 화자가 어느 날 순간적으로 확철대오 (廓徹大悟 )하는 순간이요, 깨침에 의해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견성(見性)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깨침의 세계는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니고 /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의 경지요, '있고', '없음'을 같이 보고, '상(相)'과 '공(空)', '유(有)' 와 '무(無)'를 통시(通視)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길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어둡고', '막힌'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밝고', '뚫리고' '가벼운' 삶으로 거듭난다. 마침내 하나의 우주와 소통하는 대 광명, 대 자유의 세계가 도래한 셈이다. 아니, 재가불자(在家佛子)로서 오랫동안 수행·정진한 그가 '있다고 있는 것이 아닌 /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닌' 중도(中道)에서 만난 값진 구도(求道)의 숲길이 아니었을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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