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온 지난날 과오 조금씩 덜고 남은 생 후회없이 살고싶다
가끔씩 보내는 내 맞장구에 집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 지인들의 동정하며, 세상사는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점점 커진다. 대화의 종착역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으며, 은퇴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이르렀다.
가만히 뒤돌아 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다. 이젠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를 앞두고 내무반 벽난로 옆에 누워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을 꾸겨갈까 고민하던 후부터 삶의 궤적을 반추해 본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젊고 순수한 영혼의 분노와 좌절, 혼자서라도 사회정의를 지켜보겠다고 세상을 향해 덤벼들었던 무모한 열정과 만용, 그러다가 한 살씩 더 먹어가며 세상과 타협하고 일상을 합리화해온 자신에 대한 회한과 부끄러움. 이런 상처와 얼룩으로 내 자화상은 형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진다. 집사람 눈치 챌까 봐 헛기침을 한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이게 아니었는데…. 이런 참담한 심정을 잘 담았던 박인환님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진정코 내가 바라던 하늘과 그 계절은/푸르고 맑은 내 가슴을 눈물로 스치고/한 때 청춘과 바꾼 반항도/이젠 서적처럼 불타버렸다(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할 때)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가 신체에 호르몬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점잖은 한 선배는 사람들이 나이 먹으면서 철이 들기 때문이란다.
보통 사람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과 공감할 여유와 품격을 갖추어 간단다.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방황, 사랑, 이별 그리고 죽음을 다 경험했기에 인생의 참뜻을 알아서란다. 그래서 눈물은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니 남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 말라고 격려한다.
그러나, 사무실과 가정의 현실에서 추상을 걷어낸 민낯의 나는, 이해해주고 여유있는 상사와 가장은 아닌 것 같다. 한 세대가 넘게 같은 직장에서 봉직하다 보니 일머리도 제법 알고, 벼슬도 제법 높아졌으니 겉으로는 내말을 귀담아 들어 주는 주변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다 경험해본 것 일이라는 생각에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말을 앞세우게 된다.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저렇게 해라라고 단정적으로 지시하는데 익숙해진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내가 안다는 것이 나한테 익숙해진 세상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의사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서 언제 조직이 발전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에게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생활하고 공부하며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는 독선적인 아빠는 아니던가?
그래도 자신을 너무 자학하지는 말 일이다. 적어도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알고 이것을 고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되고 하는 일마다 허물이 없는 경지야 임제스님같은 도인의 경지니 언감생심이요,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이라도 찾아서 할 일이다.
원효스님은 이렇게 현실에서 왔다갔다하는 중생들의 마음도, 무변 무외의 마음, 절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이 말씀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생은 매일매일 과오를 조금씩 덜어내고 덜 후회하는 날들을 만들어 가자. 내 마음속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진여법신을 찾는 공부를 열심히 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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