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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호남을 볼모로 삼지 마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민초들이 목숨 내놓던 희생의 땅 걸어봤는가

▲ 객원 논설위원

요즘 정치권에선 ‘호남’이 화두다. 특히 야권에 지각변동이 일면서 걸핏하면 ‘호남 민심’을 들먹인다. 그러나 호남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청와대나 여의도에서 계파간 흥정거리로 삼거나 정계의 안주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호남은 오랫동안 한반도를 지탱해온 지주목이었다. 1000년 이상 이 땅의 곡식창고였고, 이 나라가 어려울 때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내놓았던 곳이다. 호남의 정신은 저항과 개혁, 풍류라 할 수 있다. 묻겠다. 김제·만경의 끝없이 펼쳐진 너른 벌을 걸어 보았는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황금들녘을 보며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는가.

 

조정래는 ‘아리랑’ 첫 권에서 이곳을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고,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고 묘사했다.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여기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목숨 7할이 먹고 살았던 곳이 호남을 상징하는 김제·만경벌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는 오히려 호남인들에게 서러운 핍박과 착취를 가져왔다.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탈이 그러했고, 조선시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또한 그러했다. 일제 강점기에 군산항과 목포항을 통한 쌀의 수탈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착취는 때로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든 동아시아 최대의 근대화운동이었다. 농민과 도시민, 소상공인, 몰락양반들이 무장봉기해 전국을 휩쓸었고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 희생자 대부분이 호남인이었다. 그 정신은 일제 때 광주학생의거,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희생을 치른 이 땅은, 그러나 정치적으로 항상 비주류 또는 야지(野地)로 남았다. 더욱이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불균형성장은 호남에 가난의 멍에를 씌웠다. 알다시피 80년대까지 공장이라는 공장은 몽땅 수도권과 영남에 몰려 있었다. 반면 한반도의 곡창이었던 호남은 60년대 후반 이후 진행된 농업의 급격한 해체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한 ‘상대적 가난’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1961년 이후 55년 동안 호남인이 정권을 잡은 건 김대중 정권, 딱 5년에 불과했다.

 

이러한 호남에 정치인들의 구애가 또 다시 시작됐다. 4·13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호남발 정계 개편의 회오리가 불면서다.

 

그러면 최근 정치지도자들이 호남에 대해 어떤 언급을 했는지 살펴보자. “나는 호남의 아들…참여정부가 호남에 드린 서운함을 제가 사과드리겠다” “정권교체를 통해 호남의 꿈을 되살릴 자신이 있다”(문재인), “(호남차별의) 한(恨)을 가지고 계신 분들, 반드시 풀겠다는 약속을 드린다”(안철수), “이완구 국무총리가 경질되면 그 자리에 전라도 사람을 총리시켜 주길 부탁드린다”(김무성), “호남 정치의 복원”(정동영·박지원·천정배), “호남이 거부하는 야권주자는 있어 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어”(김한길), “호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다”(박근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호남의 대변자인양 내세운다.

 

그러나 그 결과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다르다. 호남의 꿈이 실현되었는가? 호남의 눈물을 닦아 주었는가? 호남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가? 아니, 그들은 호남을 표밭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나아가 자신이 정권을 잡는 매개체요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정치지도자들이 정권욕 때문에 호남을 볼모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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