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만 한화그룹 부사장
‘어느 여름 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식민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세르비아의 이름 없는 한 청년이 슬라브의 이름으로 게르만 지배자를 총으로 저격했다’ 정치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신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익히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필자는 여기서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바로 이거다.
‘어느 가을 날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만주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대한의군 참모중장인 안중근이 대한의 이름으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했다’ 그냥 데자뷰가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교통도 통신도 발달하지 않은 그 시기에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에서 보여준 한 열혈청년의 기개가 바람에 실려가기라도 하듯 발칸반도를 추동한 것이리라. 게르만 지배자의 저격사건이 있기 5년전인 1909년, 사라예보로부터 7,815킬로미터나 떨어진 아시아에서 똑 같은 일이 이미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올해는 2.8독립선언,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나라 전체가 각종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온 국민이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매스컴에서도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뿐 아니다. 올해 개교 100주년을 앞둔 도내 장계초, 조촌초, 풍남초, 고창중고, 전주고 등에서도 전통을 이어가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달포 전 서울 프라자호텔에 필자의 모교동문 500여명이 모여서 ‘창의인재육성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서로 독려한 것도 그 한 예다.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고, 이국 땅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된 조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는 일들이 1919년 전후에 주로 이루어졌는데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 일련의 일들이 어찌 보면 애국지사 안중근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안중근 하면 흔히 연상되는 단어가 하얼빈이나 이토 히로부미이지만 필자에게는 언제부턴가 조마리아 여사다. 두 모자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당시 아사히 신문에서 언급했을 정도로 그녀는 당차고 의기로운 여장부였다. 1910년 2월 사형 선고를 받은 장남 안중근을 면회 가는 두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전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하여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전해 듣는 아들의 심정도 어머니 못지 않게 비통했겠지만 안중근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의연히 죽기로 결심하고 항소를 포기했고, 사형 선고된 지 40여일만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다.
아, 2월 14일! 오늘이 바로 일제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날이다. 그런데 정작 요즘 대다수가 기억하는 2월 14일은,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한 그 일제의 어느 제과업체가 상술의 일환으로 만든 국적불명의 발렌타인데이가 아닌가? 오늘 초콜렛을 먹든, 사랑을 고백하든 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가 끝내 전하지 못했을 말이 지금 이순간 필자의 귓전에 맴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사형선고 소식이 내겐 피를 토하는 고통이다. 허나 대한의 만백성이 세세토록 이 날을 기억하리니 너나 나나 너무 원통해 말자꾸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