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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②핏빛 어린 회문산-산이 기억하는 빨치산

우리들 마음의 성채(城砦)이던 회문산, 꽃다운 젊은이들의 피와 살이 수없이 뿌려지고 묻힌 너 회문산아-먼 훗날 조국 분단의 비극이 끝나고 오늘의 싸움을 나제의 옛 애기처럼 역사 속에 묻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저 상봉 높이 금석의 기념비를 세우리라. 이곳은 약소민족의 설움이 엉켜 있는 곳,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 분단의 아픔을 몸부림치며 호곡하던 비극적 민족사의 현장이었다고…

회문산 6·25양민희생자위령탑 / 사진 = 오세림 기자
회문산 6·25양민희생자위령탑 / 사진 = 오세림 기자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는 저서 <남부군> 에서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면서 수 개월간 의지했던‘회문산’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태가 1988년 내놓은 수기 형식의 <남부군> 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그때까지 빨치산 관련 이야기는 토벌군 입장에서 소수 소개됐고, 이 또한 토벌군에 쫓기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리산권 중심으로 다뤄졌다. 참여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이 이뤄지며 빨치산 관련 사실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남북분단 아래 이데올로기적 제약 등으로 빨치산 관련 문제는 지금도 어려운 숙제다. 특히 본의든 아니든 빨치산과 연루돼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회문산권 주민들에게 빨치산 이야기는 상처일 수밖에 없다. 빨치산에게 보금자리였던 회문산이 정작 지역민에게는 아픔의 산이 된 셈이다.

 

비극의 씨앗, 전북도당 사령부 둥지

회문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관련돼 있다.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반대하며 일어났던 여순 봉기사건 참여자들이 진압을 피해 지리산 회문산 덕유산 등으로 들어가 유격 투쟁을 벌인 것이다. 6.25 이전 입산한 이들이 구 빨치산이다. 6,25 전까지 회문산 주변 산악지에서 활동하던 구 빨치산은 토벌 작전으로 거의 진압 단계 있었으나 전쟁 발발 후 세력을 확대했다.

회문산이 빨치산 본거지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9.28 서울 수복 이후다. 9, 28 서울 수복 후 조선노동당 각 도당 위원회 조직이 모두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전주에 있던 전북도당도 이즈음 회문산으로 들어갔다.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회문산 인근 순창군 구림면 여분산 골짜기로 전해진다. 이태는 <남부군> 에서 전주에서 대피해온 도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인근 쌍치 구림 팔덕 덕치 운암 강진 청웅 태인 등의 민청원, 여맹원 등 300여명이 풀밭 둘레에 초막을 지었다고 당시 사령부 모습을 소개했다.

전북도당 위원장 겸 유격대 사령관은 경남 거제 출신의 방준표(1906~1954)였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월북한 후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중앙당의 신임을 받은 엘리트 당원으로, 1954년 덕유산에서 토벌대에 체포되기 전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당 사령부는 이후 회문산 기슭으로 옮겨 세를 확대시켰다. 회문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평균 대략 400~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빨치산이 가장 득세했던 1951년 2월경에 그 수가 1000명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북도당은 여러 차례 조직을 바꿨다. 전성기 때는 병단체제로 운영하며 탱크 병단까지 뒀다. 전투부대와 별도로 사령부에 병원과 피복과 병기제작을 담당하는 기구에다 ‘노령학원’이라는 정치군사 훈련소를 뒀다. 또 현재 회문산자연휴양림 입구 안시내 마을에서 생산된 창호지로 당보인 <전북도당통신> 를 발간했다. 사령부 연예대가 농가의 넓은 마당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모닥불을 피우고 위문공연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빨치산 활동으로 인한 피해

회문산 빨치산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통신 체계를 교란하고, 관공서 습격과 우익세력 살상, 좌익 사상 선전교육 등을 벌였다. 전북도의회가 1994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림 동계 복흥 쌍치 등 순창 4개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279명이 희생됐다. 공산치하 인민군이 점령했던 순창경찰서만 해도 수복 10일만에 빨치산에 의해 두 차례나 전소됐다. 회문산 빨치산에 의한 순창지역 피해 상황은 순창문화원이 발간한 <내가 겪은 6,25> (1988)에 생생히 전해진다. 순창이 고향인 김병로 대법원장의 부인도 부산으로 간 가인과 떨어져 친정인 순창 인근 담양에 머물다 빨치산에게 총살을 당했다. 현직 대법원장 부인이 빨치산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인의 공인 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저서 <가인 김병로> 에 적고 있다.

빨치산이 발호하면서 군경의 토벌작전도 강화됐다. 최덕신 사단장이 이끄는 11사단은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1950년 11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견벽창야’(堅壁淸野)(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을 초토화)라는 작전을 수행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견디지 못한 전북도당 사령부는 회문산을 탈출해 운장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 때가 1951년 3월로, 6개월여의 빨치산 회문산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전북도당은 이후 1951년 7월 덕유산 6개 도당회의를 거쳐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 산하로 흡수돼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회문산 빨치산 잔당 활동은 56년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통해 마침표를 찍었다.

회문산 빨치산 활동으로 인한 회문산권 주민들의 피해는 컸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도 빨치산으로 인해 쌍치 등 일부 회문산권 지역은 미수복지구로 남아 군경과 빨치산 사이 교전이 지속됐다. 순창 관하 전지서가 완전 수복된 것이 1952년 2월이었다. 미수복지구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국군과 빨치산 양쪽으로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특히 군·경에 의한 순창지역 희생자가 1028명으로,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는 게 전북도의회 조사 결과다.

화문산 역사관 / 사진 = 오세림 기자
화문산 역사관 / 사진 = 오세림 기자

어떻게 기억하나

지금의 회문산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시 빨치산이 만들었을 방호나 초소 모습은 오간데 없다. 다만 능선을 따라 나뭇잎으로 두텁게 쌓인 곳을 어렴풋이 방호가 아닐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회문산이 빨치산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 회문산 휴양림 안에 설치된 회문산역사관과 위령탑, 비목공원 정도다. 회문산 역사관은 90년대 후반 빨치산 사령부가 사용했던 지하 벙커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나 빨치산 관련 유물은 아예 없다. 사령부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작은 부조물 하나가 고작이다. 그 곁에 ‘빈틈을 노리는 국가안보의 위협을 111로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국정원 홍보판이 서 있다. 영화촬영지에 대해 흔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회문산에서 영화 <남부군> 촬영지라는 안내판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빨치산 활동에서 비롯된 회문산의 비극을 그저 부끄러운 역사, 감추고 싶은 역사로만 치부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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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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