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명창이 판소리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된다. 종목은 판소리 중에서도 ‘춘향가’다. 나이 칠십을 훌쩍 넘어섰지만, 별칭이 ‘영원한 춘향’이고 보면 ‘춘향가’로 기능보유자 자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명창의 뒤늦은 문화재 지정에 ‘아직 문화재가 아니었다고?’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종목은 ‘가야금 병창’이다. 지난 1997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가 됐다. 그러니 그는 ‘명불허전’ 판소리 명창이면서도 정작 판소리 기능은 국가의 제도로 보호받지(?) 못했다.
국악의 길에 들어선 지 60년여 년, 온전히 판소리와 함께였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판소리가 아니라 가야금 문화재로 살아왔던 상황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는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명석하고 재기 넘쳤던 그를 눈여겨보았던 이모 강순영(가야금명인)은 소리꾼 주광덕에게 보내 소리를 배우게 했다. 두 번째 스승은 외당숙이자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였던 명창 강도근이다. 그의 소리가 애절한 서편제 품새에서도 곧고 치열한 소리 속을 뿜어낼 수 있는 공력은 바로 이 두 번째 스승으로부터 받은 소리 물림 덕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남원국립국악원에서 소리를 배우다 서울로 갔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김소희와 박귀희 문하에서 판소리와 가야금을 배웠다. 박귀희는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후계자로 삼았다. 덕분에 그는 가야금 명인으로 먼저 이름을 얻었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로 삼은 것은 판소리였다. 86년에는 고향 남원에서 열린 판소리 명창대회에 처음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고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강도근 박봉술 정광수 정권진 성우향 등 당대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더늠을 고루 배우고 품었다. 86년을 시작으로 해마다 한 바탕씩 다섯 바탕을 완창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스승들의 더늠을 고스란히 살려낸 무대는 늘 화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찌 된 일인지 판소리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김소희 선생의 소리를 오롯이 받았다’고 하는 그가 소리 기능보유자 반열에서 밀려나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사실 국악인으로서 그의 궤적은 단연 판소리로 빛난다. 2003년 영국 에든버러축제 공식초청 무대에서 세계의 음악전문가들을 환호하게 했던 7시간짜리 춘향가 완창조차 그의 궤적으로 보면 극히 작은 흔적일 정도다.
이번 판소리 기능보유자 인정 예고로 그의 가야금병창 보유자 지정은 해제됐다. 하나를 얻는 대신에 하나는 버려야 하는 이 상황을 그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선택이 쉬웠을 리 없다. 명창 안숙선의 결단이 그래서 더 반갑다./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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