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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고려제지 인수한 한국합판 고판남 대표

고려제지 군산공장을 인수한 고판남씨는 한국합판 창업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12년 전북 옥구군 성산면에서 태어난 고판남씨는 군산 제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2월 2년제 군산상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그 해 5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무역업체인 화강상사에; 입사해 11년간 경리직에 근무했다. 상업보습학교에서 상업에 관한 기초이론을 배운 그는 무역회사 근무를 통해 상업의 진리를 터득하면서 사업가로서의 수업을 쌓았다. 사업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얻은 고 씨는 1940년 9월부터 군산에서 삼남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정미업에서 한 밑천을 마련한 고 씨는 1945년 2월 전북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산업에 진출했다. 이때 고 씨의 나이는 불과 33세 였다. 또 당해 9월부터 1962년까지 청구목림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나무와 인연을 처음 맺었다.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고 씨는 1962년 11월 한국합판주식회사를 창립하고 합판업계에 진출했다. 한국합판은 1963년부터 수출을 시작, 해마다 높은 실적을 올리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정부는 1968년 고 씨에게 철탑산업훈장을, 1969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이후에도 한국합판은 수출에 주력, 1970년에는 합판 수출업계에서 국내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고 씨는 1967년 군산상공회의소 회장, 1971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72년에는 초대 국민회의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고려제지를 인수할 당시 이미 합판업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계에서 막강한 존재로 주목받고 있었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7.2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페이퍼코리아④고려제지의 몰락

달도 차면 기울고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이 근 20년간 국내 신문용지업계의 절대적 존재로 군림해오던 고려제지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고려제지는 경쟁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초창기에 비해 기업경영여건이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 사이 막대한 이윤을 남겨 제지업 뿐 아니라 다른 사업분야에도 투자를 하면서 1969년께에는 동원탄광을 비롯해 풍국제지, 어류양식업체인 부간산업과 특수광물수출업체인 수중광업, 어류수출업체인 한양수산 등 여려 계열사를 거느린 '고려제지왕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창업주인 김원전씨가 제지업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경험이 없는 탄광업과 어류양식업체 등에 손을 대는 것은 물론 정계에까지 진출하면서 기업기반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등의 경영상 착오를 저지르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관계당국의 자금지원 중단은 고려제지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4.19이후 민주당정부와 5.16이후 군사정권이 고려제지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의 경우 국내 제지사업을 주요 국책사업의 하나로 책정해 집중 지원하였으나 고려제지는 김원전씨가 군사정권과 공화당에 비협조적이어서 일체의 자금지원이 중단됐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만큼 고려제지에 대한 관계당국의 지원은 극히 미미했다. 실제 1965년 전후 고려제지는 모 제지업체와 함께 각각 250만불씩 상업차관을 신청했으나 모 제지업체는 신청금 전액을 승인받은 반면 고려제지는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후 1968년 220만불의 대일청구권자금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앞서 추진한 공장건설 자금과 운영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새로 도입한 초지기조자 조립작업을 하지 못하고 야적장에 방치되는 등 고려제지의 붕괴 조짐이 도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김원전씨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지만 이미 기운 회사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9년 생산실적이 1만8501t으로 전년대비 11.4%나 감소하는 등 몰락의 최종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던 것. 1972년 초에는 임금마저 제대로 주지 못해 이 해 10월초에는 체무임금이 1900만원에 이르렀다. 그 뿐만 아니라 운영자금의 고갈로 제지공장을 더 이상 가동시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창업주인 김원전씨는 거의 포기상태의 상황에 처했다. 회사사정이 악화일로를 걷자 종업원들은 구사운동에 발 벗고 나서며 공장 정상화에 혼신을 기울였다. 이들은 5억원이나 되는 거금의 운영자금을 마련해 1972년 2월부터 7월까지 직접 공장을 가동시키는 등 구사운동에 적극 나섰으나 종업원들만의 힘만으로는 공장을 재기시킬 수는 없었다 고려제지는 1972년 9월까지 조흥은행에 20억원, 산업은행에 3억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당시 고려제지는 연간 약 2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 수익금만으로는 부채 이자를 갚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주채무은행였던 조흥은행은 고려제지 소유의 자산을 모두 처분한다고 해도 부채를 회수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렇다고 한없이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 입장이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에따라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정책에 의거해 1972년 9월 30일 고려제지를 공매처분했고 주채무은행였던 조흥은행이 12억원에 낙찰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때 '고려제지왕국'으로 불리었던 고려제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고려제지의 붕괴는 20여년간 고려제지와 함께 했던 김원전씨에게 인생의 허무함과 기업인으로서의 불운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매일경제신문은 기획시리즈로 게재했던 상업인맥 제지공업편에서 '김원전씨는 우리나라 제지업의 선구자로서의 명예에도 불구하고 1072년 조흥은행이 고려제지를 압류할 때 기업인으로서 치욕을 느껴야만 했다'고 하면서 "모든게 허무하다"고 탄식했음을 그를 아는 측근들이 전해 왔다고 밝혔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7.2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고려제지 계열사 풍국제지

모기업인 고려제지가 도산하면서 자회사인 풍국제지도 후폭풍을 맞았다. 군산에 소재한 풍국제지는 1929년 10월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편면선화지 공장으로 군산제지의 후신이다. 군산제지는 광복후 적산귀속기업체로 관리돼 오다가 1957년 10월 이광우씨 등 2명이 불하를 받았다. 그 후 1962년 6월 불의의 화재로 공장이 소실됐으나 복구에 힘써 1965년에는 월평균 생산량이 150t에 달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한 후유증이 너무 심해 경영난에 허덕이다 결국 고려제지에 인수됐다. 김원전씨는 풍국제지의 당시 시설로는 도저히 정상운영이 어렵다고 판단,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일본에서 새 시설을 도입해 공장을 재건했다. 그리고 한동안 직접 풍국제지를 운영하며 공장 정상화를 도모했지만 이에 한계를 느껴 총무이사 겸 공장장였던 고서진씨를 대표이사로 임명하고 경영일체를 일임했다. 그러나 모기업인 고려제지가 극도의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상태라 고씨의 회사 정상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72년 부도를 맞았다. 모기업인 고려제지와 운명을 같이 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풍국제지는 그 후 휴업상태에 놓여 있다가 1973년 5월 대한교육보험의 방계회사였던 대교산업에 넘겨졌다. 한때 모기업인 고려제지를 인수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던 대한교육보험이 3개월 뒤 방계회사인 풍국제지를 인수한 것. 대한교육보험이 풍국제지를 인수한 것은 3개월전 인수한 합판제조수출업체인 신흥목재가 같은 지역에 있어 공장관리가 용이하고 시너지 효과를 통해 수익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실제 대한교육보험은 풍국제지를 1억5300만원에 인수해 대교산업 군산제지공장으로 개칭한 뒤 그 해 5개월간 4400만원의 이익을 올렸다. 고려제지 창업주였던 김원전씨는 고려제지가 방만한 운영으로 늘어난 부채 등을 감당하지 못해 공매처리된 뒤 방계회사 중 유일한 제지업체였던 풍국제지에서 재기의 꿈을 키웠으나 결국 풍국제지마저 도산되면서 제지업과의 20년 기나긴 인연을 끝맺었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7.2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페이퍼코리아③고려제지 비약적 성장

북선제지 군산공장을 불하받은 김원전씨와 우자형씨는 초장기 3년간은 명콤비가 돼 상호를 고려제지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사세 확장에 치중했다. 김씨는 상장으로 있으면서 군산에서 생산에 전념했고 우씨는 부사장으로 서울사무소에서 판매와 자금 조달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업관계는 불과 몇 년만에 끝나고 김씨가 1인 경영체제로 회사를 이끌어나갔다. 두 사람의 결별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회사 경영과정에서 서로 의견 차이로 갈등이 쌓이면서 우씨가 새로운 제지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결별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를 뒤받침하는 것으로는 김씨가 금전적으로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았던 종업원들에게 근로에 대한 보상으로 주식을 분배해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삼은 뒤 회사 경영문제로 우씨와 의견 대립시 종업원들의 지지를 얻어 우씨의 주장이 묵살하면서 공동경영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우씨가 김씨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고려제지는 김씨와 우씨의 불협화음으로 한 때 홍역을 치르기고 했지만 정부의 제지공장 부흥계획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실제 정부의 1954년도 제지공장 부흥물자 공급계획표에 따르면 군산공장과 삼덕제지 및 신흥제지공업 등 3개 제지회사 부흥 및 시설소요자금으로 32만6824달러가 배정됐고 이중 군산공장에 전체 배정액의 63.2%인 21만 3000달러가 배정됐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정부가 신문용지 생산공장인 군산공장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1953년 신문용지 소비량이 13만752t으로 전년대비 55% 증가하는 등 국내 지류 수요가 가히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당시 신문용지를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던 군산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은 고작 5400t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 덕에 군산공장은 1958년말 기준 연간 생산능력이 1만 2000t으로 증가했다. 여기에는 모두 42만8369달러가 투입됐다. 이에 따라 한때 20%대에 머물러 있던 국내 신문용지 자급률은 고려삼풍대한 등 신문용지 생산 3사의 보수 및 신설공사 완공과 함께 1959년부터 60%대로 크게 향상됐다. 정부의 제지업 육성책은 자유당정권 몰락과 민주당정권 붕괴, 군사혁명정부 등장 등 격변의 시기였던 1960년대에도 계속됐다. 그 것은 혁명정부가 제조업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에 포함시켜 정책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고려제지도 이에 힘입어 시설 보수를 통한 증산계획을 추진했다. 1958년 말 기준 1만2000t의 연간 생산능력을 1962년에는 1만7000t, 63년에는 2만t으로 제고시킨다는 청사진을 마련했다. 독무대나 다름없던 국내 신문용지 시장에 삼풍과 대한제지가 참여하면서 생산능력 제고를 통한 경쟁력 강화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고려제지의 10여년에 걸친 제1호 초지기의 복구 및 개보수사업은 마침내 1966년 연간 생산능력 2만t을 갖추면서 일단락됐다. 1953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그동안 총 76만6300달러가 투입됐다. 회사가 비약적인 성장을 한 고려제지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1965년께 군산에 소재한 풍국제지를 인수하면서 신문용지 외 편면지 공장까지 거느리게 됐다. 이후에도 신문용지와 관련없는 동원탄광을 비롯해 어류앙식업체인 부간산업과 특수광물수출업체인 수중광업, 어류수출업체인 한양수산 등 여려 회사를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려나갔다. 하지만 지류제조업으로 출발한 고려제지가 동일계열인 풍국제지를 인수한 것은 이해되지만 탄광업과 수산업까지 문어발식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스스로 쇄락의 길을 자초하고 만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6.30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창업주 김원전씨 정치가로 변신

고려제지 창업주 김원전씨는 정부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날로 기업이 번창하면서 군산지역 유지로 자리잡았다. 고려제지의 상시 종사자는 200여명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생산업체가 드물었던 당시에는 그 규모가 상당했으며 정식 종사자 외에도 고려제지와 관련있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적지않아 지역유지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58년 4월 제4대 민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자유당정권은 이미 떠나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지역의 덕망있는 인사들을 민의원 선거에 공천했고 이 일환으로 김원전씨를 군산시 민의원 후보자로 공천했다. 김씨는 야당 입후보자인 김판술씨를 물리치고 당당히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김씨가 자신의 지명도와 재력을 믿고 민의원에 입후보했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정계에 입문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업가에서 정치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고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당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김씨는 하루 아침에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사로운 정치보복은 금한다고 하였으나 운영자금 융자를 동결해 기업경영이 극도록 위축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군산공장에 칩거하며 본래의 사업가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민주당정권을 대신해 집권한 군사혁명정부는 그를 정치일선에 불러내려고 애를 썼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창출하려면 지방유지들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자기의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내심으로는 국방에 임해야 하는 현역군인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한 인사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 시류에 맞춰 적당히 처신했어야 했는데 너무 비협조적이어서 오히려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결국 김씨의 정치가로서의 변신은 한시적으로 끝나고 본래의 자리인 사업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6.30 23:02

[다시쓰는 전북기업사] 페이퍼코리아-②고려제지로 새출발

6.25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북선제지 군산공장은 북한군이 퇴각한 후 공장 복구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선 북한군에 의해 해체돼 은닉돼있던 2대의 초지기를 찾아 조립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부족한 부품을 조달할 길이 없어 공습으로 파괴된 제2호기의 부품을 뜯어다가 제1호기를 보수하고 1951년 5월에야 정상가동을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관계당국에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해 생산능력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1953년 2244t였던 생산량이 이듬해에는 5311t으로 236% 증가했고 그 다음해에는 6900t으로 껑충 뛰었다. 생산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종업원 수가 늘어났다. 1956년 당시 군산공장에는 사무직 및 경비원 46명, 기술직 29명, 숙련공 105명, 공원 172명, 기타 34명 등 모두 386명의 종업원이 있었다. 또한 1956년에는 공장장을 미국에 파견해 최신기술을 연마케 하는 등 선진 제지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정부에서도 지류의 수급문제가 날로 심각해지자 제지공장에 막대한 원조자금을 투입하는 한편 제지공장의 장기부흥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유일의 신문용지 생산공장였던 북선제지 입장에서는 새로운 경쟁자 등장으로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김원전씨와 동업관계나 다름없던 우자형씨의 세품제지에 정부가 50만불을 지원하면서 또 다른 신문용지 생산공장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더 큰 변화는 적산귀속기업체인 북선제지 군산공장의 불하문제였다. 당시 관리인였던 김원전씨나 우자형씨측에서 먼저 공장을 불하 받고자 했는지, 아니면 정부에서 불하하려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러 정황 등을 분석해볼 때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충격이 컸던 김원전씨 등에서 자진해 먼저 불하를 받겠다고 나설 처지가 안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면 총리가 적극 밀었던 사학재단에서 군산공장에 눈독을 들여 불하공작을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원전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학재단에서 북선제지 군산공장을 불하받으려 했고 당시의 장면 내각도 이러한 방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적산귀속기업체는 관리인측에 기득권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수는 없었다고 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오늘에 이르렀으며 6.25의 피해를 겨우 복구해 이제 제대로 가동하려는 공장을 내놓을 수 없었던 김원전씨는 당시 군산공장과 신문용지 독점공급관계를 맺고 있던 연합신문의 도움을 바탕으로 공장 불하를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무회의에서 공매내정가격을 6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2배 인상해 단독응찰임에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불하를 포기하면 자연스럽게 사학재단이 불하를 받게되는 현실에 김원전씨와 우자형씨, 연합신문은 재응찰을 위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결국 3자는 2배로 뛰어오른 대금으로 응찰을 해 마침내 낙찰을 받게 됐다. 사학재단을 지원했던 장 총리는 당시 정부 대표로 유엔에 파견돼있던 시기라 별다른 방해공작없이 공장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공장인수와 함께 북선제지는 고려제지로 사명을 개편하고 초대 사장에 김원전씨가 취임하면서 제2의 도약기를 맞게 된다. ◇공장 불하받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 북선제지 군산공장 불하문제가 국무회의에 상정되자 당시 법무부장관였던 조진만씨는 장면 총리가 유엔총회에 참석해 부재중인 관계로 장 총리가 귀국할 때까지 불하를 연기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장 총리의 의중이 사학재단에 있음을 알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인 듯 하다. 하지만 국무총리 권한대행였던 사회부장관 허정씨가 조 장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매입찰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자 조 장관은 재무부에서 산정한 불하예정가격이 너무 싸게 책정되었다고 주장하며 60억원였던 불하예정가격을 120억원으로 대폭 인상했다. 김원전씨의 증언에 따르면 불하예정가격 인상 사실이 비밀에 붙여져 입찰 당일 뒤늦게야 알게돼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적산귀속재산의 공매 등을 담당했던 관재청 처분국장 이재항씨가 직접 공장에 내려와 시설 등을 포함, 동산과 부동산을 모두 점검하고 공매가격을 60억원으로 책정했는데 이보다 2배나 높은 가격에 응찰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것. 당시 북선제지 군산공장이 보유한 현금이 고작 7억원에 불과했고 김원전씨 사유재산도 넉넉치않았기 때문에 불하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자형씨가 주도적으로 나서며 재응찰의 물꼬를 텄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60억원의 추가자금 마련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이전까지 거의 휴지조각에 불과했던 지가증권을 불하대금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면서 자금문제는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액면치의 20% 정도로 지가증권을 사모아서 불하대금을 납부한 것. 울며겨자먹기로 60억원의 돈을 더 물어야했을 상황에서 법 개정으로 오히려 더 헐값에 공장을 불하받게 된 것이다. 지가증권 매입자금 대부분은 우자형씨가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분에서 다소 의구심이 생긴다. 사장은 김원전씨인데 자금조달은 우자형씨가 했다는 점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이와 관련 공장 불하를 받은 뒤 주식을 분배해 공동출자로 단일법인체를 만들자고 3자가 합의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자 당사자인 김원전씨는 강력히 부인한 상태다. 하지만 김원전씨와 우자형씨가 이후 결별하면서 김원전씨가 합의내용을 이행하지 않아 서로 헤어지게 됐다는 설이 회자하고 있다.

  • 산업·기업
  • 강현규
  • 2011.06.23 23:02

[다시쓰는 전북기업사] 페이퍼코리아①북선제지의 태동

군산시 조촌동의 약 53만㎡(16만평) 부지에 ㈜페이퍼코리아가 둥지를 틀고 있다. 1944년 10월 북선제지로 고고성을 터트린 이 회사는 이후 고려제지, 세대제지, 세풍 등을 거쳐 2003년 페이퍼코리아로 사명을 바꿨다. 환갑을 훌쩍 넘긴 67년이라는 회사의 역사가 말해주듯, 페이퍼코리아는 군산 지역경제의 한축을 떠맡아온 향토기업이라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이퍼코리아는 '국내 최초의 제지업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제지공장을 짓고 가장 오래된 인쇄용지를 생산한 이 회사는 고려제지 시절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용지였던 군산갱지를 공급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워크아웃이라는 시련을 딛고 제2의 도약을 선언하기도 했던 이 회사는 혁신과 도약을 양축삼아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3년 500억원에 달하는 공장 현대화 설비투자의 결과로 첨단 원료공장 신설과 초지 설비혁신을 이루는 등 일산 900t 규모의 탈묵설비와 연산 33만t의 생산능력을 가진 국내유수의 신문용지 전문업체로 뿌리내렸다. 이 회사의 주요 생산품은 신문용지, 중질지, 만화용지, 전화번호부지 등이며 전량 폐지를 재활용하는 등 환경친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에 본보는 앞으로 페이퍼코리아의 역사를 되짚으며 한국제지사를 가늠해본다. 페이퍼코리아① 북선제지의 태동 페이퍼코리아의 모태인 북선제지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였던 왕자제지㈜ 조선공장의 방계회사로 지난 1935년 설립됐다. 왕자제지는 1930년대 들어 조선만주의 양지(洋紙)소비시장, 동만주두만강변의 원시림에 눈독을 들이고 북선제지화학공업㈜를 설립했다. 함경북도 길주에 첫번째 공장을 설립한 북선제지측은 펄프용 원목의 수집과 제품수송 등을 감안해 군산에 제2의 생산공장을 지었다. 북선제지 군산공장은 설립당시 남한의 유일한 인쇄용지(신문용지) 생산공장으로, 연 3만t 규모로 알려져 있다. 1954년 3월에 발간된 한국총람에는 '1943년 군산에 쇄목펄프와 갱지를 초조하는 북선제지 군산공장(용지 15만평)이 건설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제지계(製紙界)도 '1943년 당시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전국(戰局)이 급전직하로 악화됨에 따라 선박부족과 일본내의 양지생산능력의 저하로 우리나라에 대한 공급이 점차 감소를 불면할 추세에 있자 우리나라의 양지 자급자족체제의 확립을 위해서 북선제지화학은 조선총독부의 종용으로 군산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다만 북선제지 군산공장 부지의 경우 당초에는 제지공장이 아닌 방직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1943년 2월 착공식을 가진 북선제지 군산공장은 다음해인 1944년 10월 제1호 초지기를 준공한 뒤 조업에 나섰다. 제1호 초지기를 가동한 지 불과 10개월만에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군산공장은 미군정청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미군측은 기본생산시설이 극히 빈약했던 남한내에서 북선제지 군산공장의 존재가 크다고 보고 구레보 중위를 재산관리자로 파견하는 한편 고무신업계의 큰손이었던 경성고무회사 이만수 사장을 첫번째 한국인 관리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만수 사장은 구레보 중위와의 소통에 한계를 드러내며 관리인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수개월만에 관리인직을 물러났다. 이후 1946년 2월 미군정청 제지부문 고문으로 재직했던 김원전씨가 이 사장의 빈자리를 메우며 제2대 관리인에 임명됐다. 전주중 교사출신이었던 김원전씨는 당시 29세로 영어가 능숙했고, 김씨의 친형인 김흥전 박사는 당시 전북 민정장관이었다. 김원전씨는 관리인 취임직후 군산공장의 질서확립에 주력했다. 당시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김씨는 작업복에 고무신 차림으로 넓은 공장안을 순회하면서 종업원들을 격려지휘했다는 일화가 회자되고 있다. 이같은 김씨의 노력에 힘입어 군산공장은 1950년 3월 제2호 초지기를 증설하는 성과를 냈다. 당시 군산공장은 물론 국내 제지업계의 일대 쾌거로 손꼽히는 낭보였다. 광복직후 국내 기계제지공장은 남북한을 통틀어 21곳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7곳은 삼팔선 이북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군산공장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식인 장망식 초지기를 보유한 유일한 제지공장이었다는 점에서 '국내 양지생산량=북선제지화학 군산공장의 생산실적'으로 인식됐다. 당시 군산공장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사해주는 대목인 셈이다.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산공장도 전화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든다. 페이퍼 코리아 연혁은 ▲1943년 2월 북선제지 군산공장 착공 ▲1944년 10월 북선제지 제1호 초지기 준공 및 조업 개시 ▲1950년 3월 제2호 초지기 증설 및 조업 개시 ▲1954년 6월 고려제지 개편, 김원전 사장 취임 ▲1972년 8월 고려제지 도산 ▲1973년 3월 세대제지공업㈜, 고려제지 인수합병 ▲1974년 2월 제3호 초지기 조업 개시 ▲1976년 7월 KS마크 획득(신문용지 1호) ▲1980년 1월 N-1 M/C초지기 증설 조업개시(일산 250M/T) ▲1985년 8월 한국합판, 세대제지공업㈜ 흡수합병(자본금 합계 191억5000만원) ▲1985년 8월 ㈜세풍으로 상호변경 ▲1991년 12월 열병합발전소 완공(1만2000㎾/H) ▲1992년 10월 N-2 M/C공장 준공(일산 400M/T) ▲1995년 10월 ISO 9002 인증 획득 ▲1996년 12월 ㈜전주방송에 투자 ▲1998년 6월 GR(Good Recycled) 마크 획득 ▲1998년 7월 채권금융기관협의회 WORKOUT 대상기업 선정 ▲1998년 12월 합판사업본부 폐업 ▲2000년 2월 ㈜전주방송 주식매각 ▲2002년 11월 워크아웃 졸업 ▲2002년 12월 대표이사 회장 구형우 취임 ▲2003년 4월 법인명을 ㈜세풍에서 페이퍼코리아㈜로 변경 ▲2003년 10월 공장현대화 준공식 ▲2006년 11월 디지털미디어 생산공장(나투라미디어) 준공 ▲2007년 4월 대표이사 이명철 취임 ▲2008년 10월 ㈜나투라파워 준공(수소연료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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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6.1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조직문화 개선에 앞장"

"전북은행은 전북과 전북경제를 지탱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북은행은 전북의 지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두형진 전북은행 노조위원장(45)은 "현재 전북에는 '전북'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는 기업이나 단체가 많지 않다"면서 "전북은행이 진정한 향토은행이자, 전북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아직도 갈길이 멀다"고 말했다. 두 위원장은 "전북은행 노조는 단순한 파업이나 투쟁을 넘어 지역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보듬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밀착형 노조를 구현하기 위해 해마다 다양한 봉사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두 위원장은 그러면서도 은행내 유연성 확보를 위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은행조직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적지않았다"면서 "노조가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조직문화를 바꾸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은 어느 조직에 비해 소통과 중용이 필요합니다. 사회적경제적 약자와 어깨를 맞잡는 은행이 되기 위해서는 노조의 할일이 적지않습니다. 유기적이고 수평적이면서도, 상호소통이 가능한 전북은행 조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전북은행노조는 그동안 전북은행을 전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은행으로 발돋움시키기 위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면서 "회사가 어려움이 처했을 때마다 팔소매를 걷어부친 게 노조였다"고 말했다. "은행이 증자에 나설 때면 노조가 직접 나서 우리사주를 취득해달라는 권유를 잊지않았습니다. 노조의 동참권유가 증자에 적지않은 도움을 줬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 노조는 전북은행이 초일류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난 1988년 전북은행과 인연을 맺는 두 위원장은 지난 2003년부터 본격적인 노조활동에 나섰고, 지난 2009년 전북은행 제16대 노조위원장에 당선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한국노총 금융산업노조 전북지방본부장과 한국노총전북본부 전주완주지부 지도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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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6.0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⑧앞으로의 50년은

전북은행은 올해로 41주년을 맞고 있다. 이제는 중년으로 접어든 전북은행은 가시밭길 같은 부침의 세월을 겪으며 장밋빛 청사진을 준비하고 있다. 전북은행은 그동안 정도경영을 앞세워 초일류 지방은행으로 도약하기 위한 내실을 다졌고, 이제는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김한 은행장을 통해 앞으로의 50년을 가늠해본다. -전북은행이 불혹의 나이를 넘겼습니다. 전북은행이 그려갈 앞으로의 청사진이라면. ▲은행 슬로건으로 정한 '최고의 은행'을 이루기 위해 임직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변화와 혁신활동을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마인드 혁신업무 프로세스 개선, 아웃바운드세일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아울러 은행의 대형화와 겸업화 추세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규모가 다소 협소한 전북은행으로서는 향후 지속가능 기업으로서의 기반확보를 위해 적정규모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영업뿐만 아니라 자금력이 풍부한 수도권 지역에서도 영업활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전북은행이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꼽으신다면. ▲IMF 금융위기 당시 많은 은행이 퇴출되고 합병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북은행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한 배경을 설명해주신다면. ▲은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됩니다. 전북은행은 지난 41년간 내실을 바탕으로 영업기반 확충과 업무의 다각화로 최고의 은행으로 성장해 나갈 방침입니다. -광주은행은 IMF경제환란 당시 합병파트너로 거론됐고, 최근에는 전북은행의 합병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광주은행 합병논의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동안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분야를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보다 규모가 큰 광주은행 인수를 추진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했습니다. -전북은행이 튼실한 향토은행으로 성장하면서 도민들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각별히 노력해온 점이 있다면. ▲전북은행은 지역과 공존하고 상생관계에 있는 지역밀착 은행이라는 입장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매년 수익의 일정부분(당기순이익의 10~15% 수준)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습니다. 지역 상공인에 대한 금융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대출 심사절차를 대폭 개선하고 서민금융지원때 '당일대출을 원칙으로 신속하게, 최소한의 서류만으로 간편하게 지원한다'는 쪽으로 시스템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도내 개인 및 상공인을 대상으로 금융지원을 확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JB 새희망홀씨대출' 등 특화대출을 출시해 낮은 수준의 금리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기초생활수급권자,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다자녀가정, 부모부양자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금리를 우대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주주인 삼양사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삼양사는 지난 41년간 전북은행의 대주주로서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북의 지역은행 육성에 기여해 왔습니다. -전북은행은 지방은행 가운데서도 '작지만 강한 은행'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같은 평가가 있기까지, 전북은행이 경주해온 노력을 설명해 주신다면. ▲전북은행은 여신의 심사관리 강화와 집중화위험 방지를 통해 대손충당금 규모를 안정적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향후에도 지역내 경제상황과 영업환경 등을 고려해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겠습니다. 또 산업별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나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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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6.0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⑦2000년대 이후

전북은행은 IMF경제환란에서 촉발된 금융구조조정의 소용돌이속에서도 공적자금을 한푼도 수혈받지 않고 생존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특히 전북은행은 2000년 이후 발군의 경영성과를 앞세워 '작지만 강한 은행'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전북은행은 2000년 9월 정부의 제2차 은행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대내외적으로 확고한 독자생존능력을 재확인시켰다. 또 같은 해 전북도금고를 유치하면서 자타공인의 향토은행으로 발돋움했다. 2001년 3월에는 제9대 홍성주 은행장이 취임했다. 취임직후부터 내실있는 정도경영을 표방했던 홍 은행장은 대형은행과의 무분별한 경쟁을 지양하는 대신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하는 등 외환위기 후유증을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임 박찬문 행장이 특유의 내실경영으로 금융구조조정을 돌파하는 기반을 다졌다면, 홍 행장은 달리는 전북은행에 날개를 달아줬다는 것. 홍 행장은 특히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위기에 앞서 신탁업무 및 키코상품 배제, 예대비율 준수, 노사평화선언을 통한 임금동결 등 과감한 선제적 대응으로 창립이래 최대의 경영실적으로 거뒀다. 2001년 9월에는 전북은행의 총수신이 3조원을 돌파했다. 1995년 10월 총수신 2조원을 달성한 이후 6년만의 일이다. 홍 은행장의 취임이후 요구불성 예금의 획기적인 증대, 자동화 거래 및 전자금융 활성화 등 수신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결과라는 게 은행측의 설명이다. 2002년에는 IMF경제위기로 인해 누적됐던 부실채권을 완전히 청산했다. 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서울지역 여신을 대폭 감축해 내실과 건전선 제고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고정이하여신비율을 국내 은행 가운데 최저수준인 1%대로 낮추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1999년 8월이후 줄곧 액면가 이하로 밑돌았던 전북은행의 주가가 액면가를 회복하며 대외적인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2003년 4월에는 계약직(비정규직) 직원들의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국내 은행 최초로 창구담당직원제도를 시행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금융환경변화와 시장여건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국내은행 최초로 본부영업조직을 은행전통업무를 담당하는 영업본부와 비전통사업부분을 전담하는 전략사업본부로 이원화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11월에는 우량기업 육성 차원에서 전북은행 주요고객을 회원으로 하는 전북은행 비즈니스클럽을 창립하기도 했다. 12월에는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이 무디스사로부터 투자적격등급(장기신용등급 Baa3단기신용등급 Prime-3재무등급 D-신용변동가능성 Stable)을 받아 대외적으로 시장신뢰도와 공신력을 인정받았다. 2004년 9월에는 깨끗한 금융인상 정립을 위해 전은 윤리강령 실천 다짐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같은해 11월에는 외환업무를 전영업점으로 확대, 사상최초로 연간 환전 및 송금실적이 1억달러를 달성했다. 2005년 3월에는 타은행과의 차별화 및 이미지뱅킹을 강화하기 위해 꿀벌을 의인화한 메인캐릭터인 '이루미'와 서브캐릭터 '다정이'를 선정했고, 2005년 6월과 2009년 6월에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로부터 지배구조 최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2005년 8월에는 총대출금이 3조원을 달성했다. 2003년 4월 총대출금 2조원을 돌파한 이래 2년4개월만이었다. 11월에는 전북은행의 주가가 1999년 4월이후 6년7개월만에 1만원을 넘어서는 저력을 발휘했다. 업계에서는 전북은행이 2000년이후 우량한 경영실적을 바탕으로 지방은행이라는 저평가를 극복한 사례로 평가했다. 한달뒤에는 한국경영인협회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기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 3월 무디스사는 '전북은행이 도내지역에서 시중은행과의 치열한 경쟁속에서도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고,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익기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앞세워 전북은행의 장/단기 예금등급을 기존의 Baa3/P-3에서 Baa2/P-2로 상향조정했고, 재무건전성 등급에 대한 전망을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높였다. 무디스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7년 5월에는 장기신용등급을 신용상태 양호등급인 A3로 두단계 상향조정했고, 단기조정등급도 최고등급인 P-1으로, 재무건전성등급의 경우 D-에서 D+로 두단계 높였다. 2008년 8월에는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가 국내 상장사를 대상으로 지배구조 현황을 평가한 결과 전북은행의 경우 기업지배구조가 가장 우수한 우량등급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같은 실적을 등에 업고 전북은행은 벌써 몇년째 사상최대 이익규모를 잇따라 경신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3월 김한 은행장이 취임하면서 공격경영의 기세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전북은행은 지난해 5370억원의 영업수익과 613억원의 당기순익을 기록하는 등 6개 지방은행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펼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가 전북은행에 대해 '위기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성공적인 은행'이라는 후한 점수를 던지는 것도 더이상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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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5.2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과 삼양사의 인연

최대주주인 삼양사는 전북은행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전북은행측은 "삼양사처럼 신사적인 대주주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며 대주주와 은행간의 각별한 인연을 에둘러 표현했다. 삼양사측은 그동안 전북은행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후원자역할을 맡아왔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은행 안팎에서도 '삼양사가 전북은행의 요청에 따라 적정거래를 유지하는 등 전북은행의 정도경영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가 두드러진다. 지난 2006년에는 '삼양사가 신사업 진출을 위해 주식을 매각해 자금을 마련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전북상공회의소협의회가 나서서 "전북의 경제발전과 도민 은행인 전북은행의 발전을 위해 ㈜삼양사가 전북은행의 대주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줘야 한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삼양사는 지난해 3월 특수관계인 현 김한 은행장의 취임을 계기로 전북은행에 발을 뺀 상태다. 김 은행장은 삼양사를 창업한 김연수씨의 손자로,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씨가 선친이다. 현 삼양사 김윤 회장과는 사촌간이다. 전북은행 관계자는 "삼양사가 은행법에 저촉되지 않기 위해 전북은행과의 거래를 중단했다"면서 "김한 은행장이 대주주에 기대지 않는 대신 독자경영에 주력하고 있는데다, 경영실적도 탁월한 만큼 삼양사와의 거리두기는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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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5.2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⑥IMF 경제환란…위기를 기회로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과 자금지원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시작된 IIMF 구제금융의 후폭풍은 혹독하고 매서웠다. IMF경제대란의 도미노는 퇴출과 실업대란으로 이어졌고, 각 조직마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일상화됐다.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동화은행을 비롯해 대동은행, 동남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이 퇴출됐다. 자력회생에 실패했던 상업은행-한일은행, 조흥은행-강원은행-현대종합금융은 합병됐다.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 하나은행과 보람은행도 대형선도은행으로 거듭나기 위해 합병수순을 밟게됐다. 1998년 당시 퇴출된 5개 은행을 제외한 22개 일반은행의 적자규모는 사상최대인 14조원에 달했다. 30곳에 달했던 종합금융사도 1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도내지역도 IMF경제대란의 시름이 깊어져만 갔다. 지역연고의 대표적인 종합금융사와 보험사였던 삼양종합금융과 BYC생명이 간판을 내렸고, 호남권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한남투자신탁도 국민투자신탁으로 넘어갔다. 도내에 소재했던 동화은행 2개 지점과 동남은행 1개 지점은 각각 신한은행과 주택은행으로 인수처리됐다. 특히 동화은행에 출자했던 도내 실향민들은 휴지조각이 된 소유주식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전북은행도 경제환란의 홍역을 치렀다. 전북은행은 IMF구제금융이후 22개 점포와 전 직원의 3할에 해당하는 361명을 감축하고, 본부조직도 3지역본부10부4실에서 8부2실로 대폭 줄였다. 85개였던 일선 점포수도 63개로 줄었고, 영업점은 지역센터 및 위성점포체제로 정비됐다. ㈜전은경영경제연구소도 개소한 지 1년7개월만에 간판을 내렸다. 1998년 1월에는 삼양좀금과의 합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은행측은 '삼양종금과의 합병땐 전북은행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단기외화부채와 부실자산을 떠안게 되고, 이로 인해 동반부실 및 전북경제에 예측할 수 없는 대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합병을 무산시켰다. 전북은행은 그러면서도 다른 은행들과 달리 '퇴출공포'의 악몽은 시달리지 않았다. 힘겨운 고통이 계속됐지만 치명적인 위기를 비껴갔다는 것. 무엇보다 당시 박찬문 은행장의 선견지명이 퇴출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는 주된 배경으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2월 취임한 박찬문 은행장은 취임직후부터 은행의 대표적인 건강 판단지표인 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IMF구제금융에 앞서 부실여신을 정리하고 리스크관리에 주력하는 등 BIS기준을 8% 이상 유지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지역별심사제를 도입해 사전에 부실여신을 차단했고, 전주익산군산 등 3곳에서 연체대출금 감축과 부실여신의 조기회수를 위해 채권관리전담반을 운영했다. 또 특정업종에 대한 여신편중을 방지하고 업종별 여신규모의 적정성을 통한 여신 건전화를 위해 업종별여신한도운용규칙을 제정하기도 했다. 한국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미국 뱅크웨어사의 소프트웨어인 자산부채종합관리(ALM)시스템을 활용해 각종 리스크의 효율적인 분석과 금리 및 자금량 예측에 따른 시뮬레이션 분석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업체별 신용위험한도 설정운용규칙을 시행, 담보위주의 여신관행에서 탈피해 기업의 재무구조와 영업성과 등을 바탕으로 하는 여신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안간힘을 썼다. 지방은행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박 은행장은 1998년 1월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10개 지방은행이 공동으로 협조해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10개 지방은행공동협조융자협약을 체결, 공금고업무를 지방은행에서도 담당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추게 됐다. 이같은 결과에 힘입어 10개 지방은행 가운데 규모면에서 7위에 머물렀던 전북은행은 국내은행 가운데 BIS기준 자기자본비율 1위라는 성과를 냈다. 1998년 6월 기준으로 전북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은 15.95%에 달했고, 전국적으로 '전북은행=작지만 튼튼한 은행'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같은 해 6월에는 일부 시중은행과의 합병추진설이 제기돼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이에 대해 박 은행장은 "전북은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병의사가 없으며, 일부 은행의 합병추진 계획은 실현가능성도 없는 자구책으로 시장원리에 의한 구조조정에 역행하는 행위"라면서 "감독당국의 엄중한 주의환기가 필요하다"며 '지역특화전담은행으로 독자생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공개하기도 했다. 같은 해 8월에는 국내 은행 최초로 신종합전산시스템에 대한 ISO90001인증을 취득했다. 1999년 10월에는 전북은행을 포함한 대구부산광주경남제주은행 등 6개 은행이 정기적인 공동상품개발과 공동마케팅에 나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지방은행간 포괄적 업무 제휴 조인식을 갖기도 했다. 결국 전북은행은 CEO의 혜안과 전 임직원의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시너지효과를 내며 IMF경제환란의 터널을 힘겹게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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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5.1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⑤1990년대

1990년대 들어 전북은행의 역사는 '금암동시대'로 요약된다. 금암동 본점을 앞세워 전국 최고의 향토은행이라는 자부심을 키워갔다. 1989년 12월 착공한 현재의 금암동 본점은 착공 3년6개월만인 193년 6월 23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본점 기념식은 1993년 7월 1일에 열렸다. 금암동 본점은 당시 '호남최대의 건물'이라는 자부심을 앞세워 단숨에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향한 금암동 본점은 3000여평의 대지에 지상 20층지하 3층의 규모로, 연건평은 1만2624평에 달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로 가동하는 ATM을 설치해 적지않은 관심을 모았었다. 영업부 지하 1층에는 최신식 첨단시설을 갖춘 대여금고를 설치해 고객들이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1990년 9월에는 서울대 산업미술학과와 CI도입 계약을 체결한 뒤 다음해인 1991년 8월부터 기본디자인시스템, 심볼마크, 응용디자인시스템, 객장인테리어 모듈 등에 대해 새로운 CI를 적용했다.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이 CI는 다이아몬드를 형상화해 고객으로부터 무한신뢰를 받는 은행의 이미지를 극대화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전북은행은 1990년 말에는 총수신이 7781억원에 달했고, 총여신도 4673억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또 1992년에는 금융자율화의 단계적 실시로 인해 은행간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서도 총수신 1조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잠깐의 시련도 찾아왔다. 1992년 3월 남녀기성복 업체인 ㈜논노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200억원의 자금부담을 안게 됐다. 당시 전북은행 안팎에서는 '타지에 있는 기업에 과대한 여신을 지원했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4월에는 신정제지㈜가 부도처리되면서 100억원의 손실을 안는 등 불운이 잇따랐다. 같은 해 7월에는 고광직 은행장이 퇴임하는 대신 정승재 은행장이 새로 선임됐다. 논노와 신정제지의 부실로 인해 경영난에 직면한 전북은행을 새로 이끌게 된 정 은행장은 '경영의 내실화와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기치로 내걸고 도민과 고객의 은행으로 거듭나기 위한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조합도 시련 극복차원에서 '우리 모두 한마음 운동'을 펼쳤다. 전북은행은 경영난의 와중에서도 같은 해 12월 전북애향재단에 장학금 5000만원을 출연하고 해마다 5000만원 출연을 약속했다. 또 전북경제사회연구원에 출자하는 등 지역사회에 수익을 환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전북은행은 금암동시대를 맞은 1993년의 경우 낭비성 지출의 과감한 폐지, 영업점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점포수 증가 및 감량경영에 주력했다. 같은 해 3~4월 금융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대고객 서비스 강화를 위해 'START93'운동을 펼쳤고, 4월 1일에는 여행원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서무원들의 청원경찰 전직제도를 신설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성장가능성이 높은 유망 중소기업를 발굴하기 위해 '유망업체 선정 및 운용규칙'을 제정, 대출금리 감면 등의 편의를 제공했다. 6월에는 탁구부를 해체하고 국가대표 선수인 정소영을 중심으로 한 배드민턴부를 창설해 지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94년 들어서는 소형다점포전략을 주력한 결과 순창군을 제외한 도내 군단위 이상 전 행정구역에 점포망을 형성했다. 이에 힘입어 같은 해 9월 총수신이 1조5000억원을 넘어서는 뒷심을 발휘했다. 1995년 2월에는 중도퇴진한 정승재 은행장을 대신해 제8대 박찬문 은행장이 취임했다. 박 은행장은 임기내내 전북은행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은행장의 내실경영에 힘입어 전북은행이 IMF경제환란의 쓰나미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박 은행장은 취임직후 의식개혁, 서비스개선, 수신증대, 대출절차 간소화, 연체감축, 지역밀착화, 거액부실여신 추방 등 7대 중점사업의 추진과제를 제시하며 체질개선에 주력했다. 같은 해 9월부터는 금융시장 개발에 따른 금융서비스 선진화 및 국제화에 대비하기 위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해외현장체험연수를 실시하기도 했다. 11월에는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한지, 합죽선, 목기, 석기, 죽염, 민속주, 현미유, 장류 등 도내 특산품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1996년말까지 50억원 규모의 지방특화산업지원자금대출을 시행해 눈길을 끌었다. 1996년 2월에는 은행경영전략수립을 비롯해 지역금융 및 경제와 관한 조사연구, 신용대출관행 정착과 체계적인 여신사후관리를 위한 산업분석, 기업경영관련 정부수집 및 보급 등 지역종합정보센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10억원을 출자해 ㈜전은경영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전은경영경제연구소는 지방화시대를 맞아 지역의 중추적 금융기관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박 은행장은 1996년 2월에는 여신업무의 효율적 지원과 부실여신의 사전방지를 통한 여신건전성을 제고하기 위해 기업분석실을 신설하는 등 리스크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박 은행장이 '선견지명의 CEO'로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1997년 IMF경제환란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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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5.1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 '드라이브 인 뱅크'

전북은행의 차별화된 고객서비스 가운데 금암동 본점에서 문을 열었던 '드라이브 인 뱅크(Drive In Bank)'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995년 6월 12일 국내 은행 가운데 첫 선을 보인 드라이브 인 뱅크는 차에 탄 채로 은행업무를 보는 원스톱서비스였다. 자동차를 가지고 은행을 찾는 고객들이 주차하는 번거로움과 오랫동안 대기하는 데 따른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됐다. 개설당시 첨단금융서비스제도라는 찬사와 함께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특히 택시기사와 장애인 등이 애용하면서 지난 2002년의 경우 하루평균 70명, 월말이나 공과금 마감일에는 최대 150여명이 이용하는 성과를 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인터넷뱅킹과 텔레뱅킹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드라이브 인 뱅크 이용자수가 급감했고, 결국 은행측은 11년 만인 지난 2006년 3월에 폐쇄결정을 내리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전북은행 관계자는 "급변하는 금융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를 위해 미국에서 보편화된 드라이브 인 뱅크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설했었다"면서 "전자금융의 활성화로 인해 이용고객이 급감한 탓에 직원을 상시 배치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자 폐지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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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5.1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③1980년대

1980년대의 한국은 폭압과 혼돈의 시대였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이 배태시킨 암울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에워쌌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북은행은 성장을 거듭하며 도약의 토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전북은행은 1980년대를 계기로 전국 제일의 향토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전북은행은 1981년 7월 지방은행 가운데 부산은행과 대구은행에 이어 세번째로 전산개발팀을 신설했다. 은형 대형화의 기반을 다지고 대고객서비스와 업무전산화를 조속히 추진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전산개발팀은 불과 발족 2개월만에 급여업무 전산화개발을 완료했고, 다음 해 1월에는 '업무개발계획, 전산전문요원 양성 및 확보, 1985년까지 전 점포 온라인 실시, 전용터미널 설치, 전직원에 대한 전산기초요원 교육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전산업무 종합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부실채권의 정리 및 사후관리를 위해 관리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같은 해에는 9월 예그린주택 관련여신의 부실화로 인해 한독맥주㈜와 율산실업㈜에 이어 세번째 시련을 맞게 됐고, 이로 인해 이예철 은행장이 퇴임수순을 밟았다. 뒤이어 선임된 배민홍 은행장은 '인화단결연수강화선창선도(신뢰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조직의 내실을 다지는 등 '진정한 도민은행'을 지향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 같은 해 4월에는 경원동의 본점 청사에 대한 대대적인 증축공사가 진행됐다. 7개월만에 마무리된 증축공사를 통해 당시 4층 규모였던 경원동 본점을 7층으로 높이는 등 전주의 랜드마크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같은 해 4월에는 전북은행 최초로 남부지점(현 남문지점)과 북부지점(현 태평동지점)에 야간금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5월에는 꿀벌을 형상화한 전북은행의 심벌마크를 제정했고, 경영합리화와 이미지쇄신을 위해 CIP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1982년 2월에는 예수금 800억원을 달성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6개월만인 8월 30일에는 예금규모 1000억원을 달성하는 성과를 이뤘다. 같은 해 10월에는 금융정책당국의 지침에 따라 전일상호신용금고를 제한경쟁입찰로 매각했다. 1983년 12월에는 부안읍에 부안지점 신설을 계기로 도내 전지역 점포망 구축작업을 마무리지었다. 1984년에는 은행사상 최초로 전북은행 행보를 격월간으로 발간, 전북은행소식 및 금융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같은 해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제5대 송주인 은행장을 선임했고, 송 은행장은 '서로 돕고 위하자, 아끼고 늘려가자, 자기계발에 힘쓰자'는 경영지침을 밝히며 사세 확장에 주력했다. 전북은행은 전산업무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면서 1985년 1월 전산실을 독립승격시켰고, 7월에는 전산실을 전산부로 승격시켰다. 이처럼 은행업무의 전산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86년 1월에 정기적금을, 2월에는 자유저축예금, 4월 가계금전신탁, 5월 가계우대정기적금, 6월 가계종합예금, 10월 별단예금을 순차적으로 온라인화했다. 1987년에도 1월 정기예금을 시작으로, 3월 내국환, 4월 당좌예금, 8월 목돈마련저축과 적립식목적신탁, 11월 여신정보 등을 온라인화했다. 1985년 12월에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해 비자카드 업무를 도입했다. 1986년 7월에는 일신상의 이유로 중도퇴진한 송주인 은행장의 후임으로 고광직 은행장이 선출됐다. 특히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중장기 경영계획을 수립한 전북은행은 첫해인 1987년의 목표를 '적극적인 영업신장, 자산의 효율적인 운용, 경영의 내실화, 직원의 능력개발'로 설정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의 경우 6월 민주화투쟁, 8월 극심한 노사분규, 9월 유망중소기업인 천마화학㈜ 도산 등에도 불구하고 총수신 3000억원을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같은 해 2월 도내 유망중소기업 및 중견수출기업들과 협의회를 구성한 데 이어, 12월에는 전북지역 경제에 관한 각종 통계자료를 수집편집하기 위해 전북지역 경제조사지인 '전은조사'를 창간해 지역경제를 선도하는 중추적인 금융기관의 면모를 재확인시켰다. 한편 전북은행에게 1989년은 각별한 한 해였다. 창립 20주년을 맞아 성년으로 발돋움한 전북은행은 '1989년은 전북은행 약진의 해'로 선언하고 외형과 내실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주력했다. 1980년대 말은 금암동시대를 열기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1989년 11월 본점신축을 위한 본점건축본부를 신설한 데 이어 한달여 뒤인 12월 28일에는 금암동 본점 착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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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5.05 23:02

[다시쓰는 전북기업사] (60)전북은행-③1970년대

1970년대의 전북은행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는 전주시 경원동 청사였다. 전북은행은 창립당시 전주시 전동에 본점을 뒀었다. 하지만 지상 3층 규모에 불과한 당시의 본점은 전북은행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았고, 창립직후부터 본점 신축논의에 들어갔다. 은행측은 전주시 경원동1가 108번지를 새 둥지로 낙점한 뒤 1970년 9월 22일 본점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년뒤 전북은행은 1971년 8월 30일 경원동 본점 이전식을 갖고 '경원동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상 11층지하 1층 규모의 경원동 본점은 전주는 물론 전북의 대표 건물로 손꼽혔다. 지금도 장년층 이상의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이른바 '미원탑'의 심장부에 위치한 경원동 본점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전북은행은 경원동 청사 입주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전북은행은 창립 100여일만인 1970년 3월, 총예금규모가 10억원을 넘어섰고, 총대출금은 5억7400만원을 기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이리지점을 개설했고, 첫날 1억1700만원의 예수금을 올리기도 했다. 12월 27일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읍단위 지점인 김제지점을 신설했다. 1971년 1월에는 고창 상공인협회 대의원들이 '전북은행 지점 유치운동'에 본격 나서는 등 전북은행을 유치하자는 각 지역의 열망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여기에 경원동으로 본점을 옮긴 뒤에는 은행의 질적양적성장이 이뤄지면서 향토은행의 명성을 착실히 쌓아갔다. 1972년 3월 22일에는 지방은행 가운데선 처음으로 전북은행의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영예를 누리며 공개법인이 됐다. 같은해 전북은행의 총 영업점수는 10곳으로 늘어났다. 1973년 들어 이은행은 예금규모를 처음으로 50억원대로 늘렸고, 이를 앞세워 도내 일반 은행의 예수금 가운데 30.7%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또 같은 해 6월 전국금융노동조합 전북은행 지부로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초대위원장은 박종한씨가 선출됐다. 당시 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최공술 전북은행 동우회장은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이었던 만큼 노조결성은 모험에 가까웠다"면서 "전북은행의 발전을 위해서는 은행내 민주화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따라 공채 1기 직원들이 팔소매를 걷어부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1975년 6월에는 은행의 숙원이었던 서울지점을 개점하며 은행발전사의 또다른 전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전북은행은 지역은 물론 서울지역까지 영업구역을 확장하면서 재경 전북출신 기업인들과의 업무제휴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도 없지않았다. 1976년 9월 한독맥주㈜가 부도를 내면서 원금 4억2700만원을 포함한 13억50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의 전북은행의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액의 부실여신을 안게 된 셈이다. 결국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0월 당시 3연임했던 최주한 은행장이 퇴임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뒤이어 같은 해 11월 제2대 송규섭 은행장이 선임됐고, 새 행장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독쇼크'를 탈출하기 위한 전 임직원의 고난행군이 이어졌다. 그리고 불과 수개월만인 1977년 3월 들어 숙원이었던 총예수금 200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같은 해 말에는 213억3800만원을 달성하는 등 가파른 경영정상화가 이뤄졌다. 1979년 2월에는 총예금 400억원을 돌파하는 금자탑을 쌓았고, 수권자본금을 기존의 34억원에서 50억원으로 늘리는 등 자본확충 기반을 튼실하게 마련했다. 전북은행은 같은 해 2월 율산실업㈜의 부도로 인해 취급여신이 부실화되면서 다시한번 시련을 맞게됐다. 또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려왔던 당시의 국내 경제는 원유가격 폭등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까지 겹치면서 스테크플레이션 현상까지 두드러지는 등 내우외환이 불가피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10년차에 접어든 전북은행은 '100년 은행'의 토대를 다지며 본격적인 도약을 예고했다. 1979년말의 예수금규모는 457억원으로, 대출금도 314억원에 달했다. 당기순이익도 5억4000만원을 시현하며 18.6%의 배당을 실시했다.

  • 산업·기업
  • 정진우
  • 2011.04.2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은행-②창립까지 과정

전북은행이 설립된 직접적인 단초는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급한 연두교서에서 비롯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지역적 자본을 집대성해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향토은행의 고고성이 됐다. 당시 정부의 이같은 방침은 한국경제의 실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1962년부터 실시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22.6%라는 의욕적인 계획투자율에 비해 실제 실적은 15.1%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자원동원능력에 대한 조사가 불충분했던데다, 재원조달과 관련해 해외부문과 정부부문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민간 투자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될수록 지역간 발전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당면과제도 두드러져갔다. 결국 정부는 민간투자를 유도하고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역개발 금융체제의 확립이 절실하다는 대안을 찾게 됐다. 사실 정부의 절박함외에도 지역경제계의 향토은행에 대한 갈증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의 추동력으로 공업화를 강조하면서 경제개발은 일부 특정도시에 편중됐던게 사실. 이에 따라 특정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은 금융경색에 시달렸고,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극심해졌다. 당시 한국의 금융구조는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으로 구축한 탓에 지방에서 조성된 자금이 지역기업에 환원되지 않은 채 서울지역 기업들로 유출되는 기현상이 연출됐고, 이로 인해 지역업계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 사실 지역경제계에서는 전북은행의 창립에 앞서 향토은행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64년에도 지태순씨를 중심으로 가칭 호남은행의 설립을 추진하자는 움직임이 두드러졌었다. 당시 이정우 지사가 지역경제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측에 향토은행 설립을 적극 건의했지만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처럼 지지부진하던 향토은행 설립 논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계기로 새 국면을 맞게 된 셈이다. 연두교서이후 전북도지사, 3개시 상공회의소 회장, 전북출신 국회의원과 실업인 등 48명은 전북개발을 위한 은행설립추진위를 구성하고, 장경순 국회부의장을 추진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또 1969년 3월 10일부터 4월 1일까지 다섯차례의 간담회를 갖고 '납입자본금은 2억5000만원(재일교포 1억원재경실업인 1억원전북영세자금 5000만원)으로 하고, 도민 1인주1주 갖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전 도민이 참여하는 은행으로 만들자'는 데 중지를 모으는 등 향토은행의 뼈대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뒤이어 같은 해 4월 17일에는 전북도청 상황실에서 전북은행 설립준비위가 발족됐고, 5월 16일에는 서울 청진동의 한 음식점에서 제1차 발기인회를 가졌다. 발기인은 회장인 엄주상 전 상업은행 전무이사를 비롯해 김현성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고판남 한국합판㈜ 대표이사, 이갑동 이리상공회의소 회장, 최현식 신흥건설㈜ 대표이사, 김상홍 ㈜삼양사 대표이사, 조우동 전주제지㈜ 대표이사, 임대홍 미원㈜ 대표이사, 강정준 백화양조㈜ 대표이사, 송갑섭 건설협회 전북지부장, 황태문 태흥광업사 회장 등 11명이었다. 제1차 발기인회를 통해 '신생 은행의 수권자본금은 3억원으로 하고, 창립비용의 한도는 300만원, 납입자본금은 당초의 2억5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축소조정한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발기인들은 10월 23일까지 다섯차례 회의를 갖고, 은행장 인선을 위한 7인소위를 구성한 데 이어 초대 엄주상씨에 이어 최주한 전 산업은행 이사를 후임 발기인회장으로 선출했다. 창립총회는 같은 해 11월 10일 총주주 296명 중 77명(총 20만주의 주식 가운데 15만6079주)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최됐다. 총회를 통해 최주한 발기인회장이 초대 대표이사(은행장)를 맡게 됐다. 초대 전무이사는 김지완 전 산업은행 지점장, 상무이사에 김길동 전 은행감독원 검사역, 이사는 권병로 전 제일은행 차장, 비상근 이사는 지태순강정준김문갑씨, 상임감사는 엄병근 전 기업은행 지점장, 비상근 감사는 김상홍씨가 선출됐다. 본점은 현재의 새보건약국이 들어선 전주시 전동 2가 135번지에 설치하고, 전주에 예금취급소 2곳, 군산과 이리에 각각 지점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마침내 전북은행은 1969년 12월 10일 문을 열었다. 창립당시 임직원수는 상근 5명 비상근 4명의 임원외에도 책임자 10명, 남자행원 25명, 여자행원 14명 등 모두 66명이었다. 전북은행의 창립은 지방은행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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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1.04.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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