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0 18:49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경제 chevron_right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8) 광전자 ③ 확장과 발전

1980년대 광전자 그룹은 한국고덴시, 광전자, 나리지온 등 계열사를 설립하면서 그룹운영의 기초를 다진 후, 1990년대에 들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가 인상, 긴축정책 지속, 각 기업의 투자심리 위축 등으로 국내 전자산업은 성장 둔화를 예상하면서 경기동향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나, 장기적인 불황에 대비하여 대기업을 중심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신제품 개발, 생산설비 자동화, 새로운 해외시장 개척 등이 심도 있게 추진됨에 따라 다소간 호전을 기대하면서 엔화강세로 인해 일본과의 국제경쟁력에도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전자부품 산업 또한 반도체가격 하락으로 국내에서는 수출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예측이 지배적이었던 관계로 수출주도형 기업인 광전자도 당연히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진국의 반도체 수요 증가와 광전자만의 고유한 자체브랜드 개발에 성공하면서 오히려 광전자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광전자는 대부분의 제품을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에 의한 판매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고덴시의 경우 일본고덴시의 태양전지와 광소자 하이브리드 어셈블리 제품을 중심으로 가동되었으며, 광전자의 경우 삼성전자의 소신호 트랜지스터(Small Signal Transistor) 중심의 OEM방식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체브랜드에 의한 자기 상품의 필요성을 인식한 광전자는 자체브랜드를 통한 세계시장 진입을 위하여 1980년대 말부터 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신제품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이 때 설립한 연구소가 한국고덴시의 중앙연구소, 광전자의 전자연구소, 나리지온의 기업부설연구소 이다. 설립 초기에는 개발 인력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R&D 투자도 보잘것 없었으나 현재는 총4개의 연구소(광전자의 생산기술연구소 추가 설립)에 100여 명의 연구인력과 매출액의 3% 이상을 R&D 분야에 투자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이들 연구소를 바탕으로 드디어 1990년대 초부터 광전자가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한 상품들이 탄생하고, "KODENSHI"와 "광전자"라는 브랜드를 부착한 제품들이 세계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광전자 그룹은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자체 브랜드가 출시됨에 따라, 광전자는 1993년부터 S사향 OEM 생산라인 외에 자체자금으로 연간 500만개를 생산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생산라인을 구축하였고 1994년에 첫 번째 자사브랜드 제품출하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고덴시의 경우는 일본 고덴시에서 이관된 사업이 단순한 수탁생산이 아닌 기술이전도 함께 진행되었고, 세계시장에서 "KODENSHI" 브랜드의 품질의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지속적인 사업확장에 따른 생산 스페이스 부족으로 1980년대 말부터 3년 주기로 1개 공장을 증설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5공장까지 확장되어, 현재는 익산 수출자유무역 지역의 1/3 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94년에 IC와 포토다이오드를 하나의 제품에 실장한 원몰드 타입의 리모콘 모듈(One Mold RM) 개발 성공으로, 한 때 리모콘 모듈 분야에서 국내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광전자가 중소기업을 탈피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한국고덴시가 1980년대 말부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면, 광전자의 경우는 1994년부터 시작한 자체브랜드 소신호 트랜지스터의 출시와 더불어 약 7년 동안 매년 30%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하면서 광전자 그룹사 전체가 지속적인 사업확장에 따른 이익 증가와 재무구조 안정으로 1996년 광전자, 1997년 한국고덴시가 한국증권협회에 상장하였으며, 1999년에 나리지온이 코스닥에 상장하였다. 특히, 나리지온은 코스닥 상장과 함께 광통신용 적외선 갈륨비소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여 벤처기업상등 유수한 상을 수상하며 유망중소기업으로 대두되었다. 짧은 기간에 광반도체 및 비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기존의 반도체 분야 선두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됨은 물론, 이에 발맞춰 글로벌화 추진전략의 일환으로 한국고덴시는 1992년 중국 심양에 심양중광전자유한공사를, 광전자는 1996년 중국 대련에 광전자(대련)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중국 심양의 [장토(張土)개발구]에 설립한 심양중광전자는 200명의 인원으로 산업용 및 가정용에 사용되는 광센서를 생산하면서 종업원수와 생산라인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면서 회사 규모를 키우기 시작하여 지금은 3,500명 규모에 년간 1억불의 매출 규모를 갖고 있는 심양의 선두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대련시 경제기술개발구에 위치한 광전자의 경우는 설립 초기부터 소신호 트랜지스터 생산설비를 이전하여 사업이관 1개월 만에 생산라인 정상 가동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이며 현재는 월 20,000장 규모의 5인치 실리콘팹(Silicon FAB)과 월 5억개 규모의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IC 생산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는 설계 및 개발, 한국에서는 개발 및 생산, 중국에서는 대량 생산이라는 3국의 장점을 살리면서 Global화에 대비한 3국 분업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 산업·기업
  • 전북일보
  • 2010.10.1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광반도체 어디에 사용하나

광반도체란 가시광과 적외광, 자외광 등 빛(Photo)의 다양한 특성을 이용한 반도체다. 가시광을 이용하여 다양한 색깔(Color)의 표시소자, Back Light의 광원, LED 조명 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자외광을 이용한 UV소자, 적외광을 이용한 발광부와 수광부를 결합한 광 Sensor 등에 활용되는 제품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시광을 이용한 제품으로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Color를 표시하는 Indicator용 LED(발광다이오드) 이며, 실내, 실외용 전광판에 사용되는 LDM(LED Dot Matrix), 휴대폰이나 LED TV의 광원으로 사용되는 Back Light용 LED, 평판조명, 형광등, 가로등에 사용되는 High Power용 LED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그 수요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초기에는 RED, YELLOW, GREEN, BLUE등 단색 LED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1990년대 후반 부터 R,G,B Color를 조합하거나 Blue에 Phosphor를 결합한 White LED 를 적용한 Full Color LED가 사용되고 있다. 적외광을 이용한 제품으로는 발광부를 구성하는 IRED(Infrared Emitting Diode)와 수광부를 구성하는 Photo Diode 또는 Photo Transistor를 결합한 광센서로 발광부와 수광부 사이의 물체 유무를 인식하는 것으로 자동문, 프린터, 복사기, 게임기 및 은행에서 주로 사용하는 지폐계수기, 위폐감별기 등에도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PDA, Cellular Phone, Automobile, Security, 로봇 청소기, 화재감지 센서등 우리 생활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TV, 에어컨, 선풍기 등 Remote Controller에 의해 조정 되는 가전기기에 사용되는 리모콘 모듈도 IRED와 Photo Diode가 결합된 제품이며, 최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3D TV용 안경에도 광전자의 리모콘 모듈이 사용되고 있을 만큼 품질과 기술 면에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 산업·기업
  • 김은정
  • 2010.10.0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7)광전자②사업 초기

광전자의 광반도체 기술은 1972년 설립된 일본 고덴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전자 회장인 나카지마 히로카즈 회장은 일본 쿄토에 광전자공업연구소(현재의 일본 고덴시)를 설립 하고, 텔레비전 및 전자계산기, 전자시계 등에 적용되는 태양전지, 포토다이오드 등으로 샤프, 히타치 등 일본의 대기업들과 함께 광반도체 분야의 선도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연기감지기, TV리모컨, 전자계산기, 전자시계 등 민생용 실리콘 포토 다이오드와 태양전지 수요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이런 시기에 발맞춰 전자기기에 적용되는 광반도체의 최첨단 기술분야를 한국에서 꽃 피우기 위해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1977년에 한국의 반도체 어셈블리업체 2곳을 협력 공정으로 하여 월 생산 35만개의 LED를 생산하고, 기술지도와 품질관리를 목적으로 한국 서울에 기술센터를 설치했다. 생산을 외주업체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던 광전자는 사업확장을 위하여 서울에 생산현장을 직접 마련했다. 한 은행 건물 2층에 60평짜리 사무실을 빌려 일을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 광전자의 시초가 된 한국광전자㈜ 이다. 서울에 진출한 광전자는 1년도 안돼 조립 가공 거점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였으며, 처음 7명으로 시작했던 종업원 수는 300명 까지 늘어나게 되었고 이후 경기도 화성군에 자체 공장을 확보하여 SOLAR CELL, LED를 비롯한 각종 광반도체를 생산하게 된다. 광전자는 1980년 익산 수출자유구역으로 이전한다. 이 회사가 자본금 2450만원으로 설립된 한국광전자연구소(지금의 한국고덴시)이다. 이것이 광전자의 시초이며, 종업원은 200명 정도 규모였다. 나카지마 회장은 서울에서 한국광전자를 운영하는 동안 자체공장이 없어 여러 가지 비능률과 불편함을 겪었고, 이에 보다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회사 운영을 위하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가장 입지조건이 유리한 익산 수출자유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나카지마 회장이 익산을 선택,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두 곳 밖에 없었던 수출자유무역지역이 익산에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생산제품의 대부분을 일본에 수출해야 하는 광전자로써는 수출입 절차, 시간, 관세 등 여러 측면에서 유리한 익산이 매력적인 후보지였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 전라북도는 전자부품업체가 전무한 상태였고 더구나 광반도체 분야에서 광전자는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거의 최초 기업이었던 관계로 한국, 특히 전라북도에서 광반도체 분야를 선도해 나간다는 자부심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광전자는 광반도체를 이용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1980년 5월 전북 익산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회사명에 '연구소'를 붙인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광반도체 고객들의 입장에서 품질좋은 제품을 싸고, 빠르게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사명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익산에 진출한 이후, 일본 고덴시에서 개발한 손목시계용 태양 전지, 대형 전자계산기용 태양전지등의 개발 성공으로 생산 라인을 24시간 풀가동하게 되어 월 생산 40만개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숫자를 달성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시계와 전자계산기등 태양전지만을 고집하지 않고 복사기를 비롯한 사무자동화 기기, 은행ATM기기 등 산업기기류는 물론 텔레비전과 비디오, 가정용 전자제품 등 민생 분야에 적용되는 광센서와 발광원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면서 신생기업답지 않게 급속한 성장을 기록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81년부터는 리모컨용 포토다이오드 및 확산 웨이퍼형 포토트랜지스터를 생산하게 되었고, 1982년 Hybrid Ass'y Line을 가동하게 됐다. 당시 높은 가격으로 큰 수익을 얻게 해 준 하이브리드IC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21세기 광(光)의 꿈을 실현하는 세계 유일의 광반도체 전문기업으로서 QCD(Quality, Cost, Delivery)에 적합한 무결점 상품을 지향했다. 또한, 1984년 정보통신기기 및 사무용기기를 특화 생산할 목적으로 익산시 신흥동의 익산산업공단에 코리아테크노(지금의 광전자)를 설립하였으며, 1988년에는 화합물 반도체 전문기업인 광전자반도체(지금의 나리지온)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광전자 그룹 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 산업·기업
  • 김은정
  • 2010.10.0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6)광전자 ①지난 7월 통합법인 출범 경쟁력 제고

익산 공단에 자리잡고 있는 도내 대표적 반도체 전자부품기업인 광전자, 한국고덴시, 나리지*온은 도내 몇 안되는 상장사다. 전자부품 생산업체 정도로 알고 있는 이들 기업은 증권시장에서 꾸준히 미래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지역 경제계에서도 주목해 왔다. 실리콘 반도체기업 광전자, 광반도체와 LED 생산으로 촉망받고 있는 한국고덴시, 화합물반도체 시장을 선점하며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나리지*온 등 이들 삼총사가 최근 화학적 결합에 성공했다. 지난 7월1일 '광전자주식회사'로 새롭게 출발하여 지난 30여 걸어온 길을 통해 글로벌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광전자의 경쟁력을 알아본다. ▲광전자로 통합 지난 6월15일 곽영훈 광전자 경영총괄 부사장이 여의도 증권가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이날 광전자와 한국고덴시, 나리지*온의 통합 사실을 밝히고 "3사 모두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지속 성장을 도모하고, 성공적인 수직계열화를 이루는 등 시너지 창출에 만전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곽 부사장은 이어 "3사 통합 후 우리는 HP, CANON 등 세계적인 OA기기 메이커와 SMPS(전원공급장치) 초대형 메이커인 델타, 세계적인 가전 메이커인 스카이워스, TCL 등 대형 거래선을 성공적으로 확보해 본격적인 매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자신한 뒤 "합병 후 광전자는 보다 안정적인 매출구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광전자와 한국고덴시, 나리지*온은 소정의 통합 절차를 거쳐 7월1일 공식 합병법인 광전자(AUK)로 출범했다. 과거 국내 증권시장의 스몰캡 정도에 불과했던 3사는 합병 기업으로 거듭나면서 연매출액 4000억원 이상의 전자부품 대기업으로 위상을 새롭게 했다. ▲광반도체 분야 확고한 경쟁력 무엇보다 3사 통합으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광전자는 디스크리트(Discrete) 반도체 전문기업으로 IC,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LED 등 국내 실리콘 반도체 영역을 꾸준히 개척확대해 온 강소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고덴시는 OA(사무자동화)기기, 디지털 가전, 산업용기기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는 광반도체 디바이스 전문기업이다. 한국고덴시는 OA기기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할 만큼 그 위상이 확고하다. 나리지*온은 국내 최초 화합물 반도체 전문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을 만큼 미래 성장성을 인정받고 있는 기업이다. LED 팹(Fab) 라인을 보유하고 있어 자체 칩 조달이 가능한 기업이다. 이들 3사가 모두 광반도체 분야에서 특화된 원천기술과 브랜드 파워를 보유하고 그동한 협력과 경쟁을 병행해 온 셈이다. 이번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는 엄청날 전망이다. 실례로 합병 광전자는 실리콘 팹과 화합물반도체 팹을 모두 보유하게 됨으로써 외부 도움없이 자력으로 칩 개발에서 소자 양산까지 가능해졌다. 명실상부한 글로벌 반도체 부품 전문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난 셈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삼성전자를 제외하고, 실리콘 팹과 화합물반도체 팹을 모두 확보한 기업은 광전자가 유일하다. ▲자체적으로 완제품 공급 광전자는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한 칩을 활용해 다양한 기능의 차별화된 광센서를 제작할 수 있고, 또 다른 기업에서 일체의 부품을 조달하지 않고도 발주처에 완제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또 그동안 각각의 네트워크 인프라를 별도로 구축해 사업을 진행해 왔지만 이번 합병에 따라 네트워크 인프라구축은 물론 제품 융합, 시스템 통합까지 분산된 영역을 집중할 수 있고, 각사의 원천기술을 통해 신규사업 영역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이번 합병을 계기로 투자도 잇따라 진행된다. 그동안 보수적 투자 기조를 공격적으로 전환, 연내 500600억원의 투자를 진행한다. LED TV용 블루 LED칩 생산을 위한 증설로 46억원을 투자하는 등 생산력 확대를 위한 증설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9.30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광전자 설립자 나카지마 회장

TV, 컴퓨터, 리모콘, 디지털카메라, 프린터, 복사기, 보안기기, 로봇, 정보통신기기, 산업자동화기기, LED, 실리콘반도체, 화합물반도체, 칩, 소자. 광전자는 정보산업사회, 자동화 산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전자기기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그 광전자를 설립해 성장시켜온 나카지마 회장은 전북인이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사랑 조국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기업인이다. 나카지마 회장은 1939년 전주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주서중, 전주고를 졸업한 후 1957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 이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이는 나카지마 회장의 인생을 결정한 갈림길이 됐고, 오늘날 광전자의 태동이었다. 나카지마 회장은 대학시절 트랜지스터와 IC 등 반도체 분야에 매력을 갖게 됐고, 대학 졸업 후 약 10년간 샤프사에서 근무하며 꿈을 키웠다. 그는 1972년 일본 교토시에 (주)광전자공업연구소라는 생애 첫 회사를 설립했다. 1979년 광전자 산업의 불모지였던 모국에서 '빛을 창조하는 세계적 기업'을 일구겠다는 꿈을 안고 한국광전자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가 당시 내걸은 창업 이념은 '생명있는 반도체를 통한 풍요로운 인간생활에의 공헌'이었다. 그의 광전자는 독자적인 기술로 다양한 가전 신제품을 생산해 냈고, 국내 가전사에 부품을 공급해 수입대체에 기여해 왔다. 나카지마 회장은 평생 광(光빛)이라는 보다 전문적이고 특화된 길을 깊이 파고 들었다. 그리고 광센서와 광반도체를 폭넓은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기술 및 신제품 연구개발에 몰두해 왔고, 광전자는 글로벌 광반도체 기업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광전자를 세계적 전자부품 종합메이커로 성장시킨 나카지마 회장의 경영 철학은 무엇일까. 나카지마 회장은 사람을 가장 귀한 재산으로 여겼다. 당장 잘나가는 인재보다 훗날 회사의 든든한 대들보가 될만한 자질을 갖춘 인재를 발굴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잡초같은 인재를 중용, 크게 키워 온 것이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9.30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5)(주)전주페이퍼-⑧전주페이퍼 올해 예상 실적

전주페이퍼는 아시아 시장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신문출판용지 업계의 리더가 되겠다는 장기비전을 제시하고 창사 이래 지속적인 투자를 실시해 왔다. 내수 시장에서 45%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전주페이퍼는 인도 24%, 대만 21%, 싱가포르 30% 등 해외 현지시장에서도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 나가고 있다. 전주페이퍼가 그동안 경영층의 잦은 교체 속에서도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또 항상 안정적인 투자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다양한 지종을 개발하는 등 끊임없이 기업경쟁력을 높여왔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신형 고속 초지기를 설치하는 한편에서는 기존 초지기 성능 개량을 진행, 모든 초지기가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000년에는 Pulper(펄프 제조기)에 고지를 투입하여 BDIP(Bleached De-Inked Pulp, 잉크를 제거한 표백펄프)를 생산, 신문용지 원료를 초지기에 공급하는 '5DIP' 건설공사를 실시했다. 이 재생펄프라인은 하루 600톤을 처리할 수 있다. 또 2000년 11월부터 2002년 9월까지는 PM4, 5, 6, 7호기의 운전 속도를 증속하여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SPEED-UP 공사를 진행했다. 이어 2006년에는 신문용지 품질 업그레이드를 위한 PM6PM7호기와 청원공장의 Q-UP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2007년에는 출판용지 경쟁력 강화를 위한 PM3 품질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2008년에는 인쇄용지 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PM5 QI(Quality Improvement)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프로젝트 진행을 통해 전주페이퍼는 품질과 생산성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녹색성장 기반 구축 전주페이퍼는 창사 초기부터 나무심기와 재생용지 사용 등 친환경 정책을 펼쳐왔고, 가장 나무를 많이 심는 환경친화기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1995년 제지업계 최초로 환경부로부터 환경친화기업 인증을 받은 후 지속적으로 재인증받는 등 친환경 모범기업으로 정평이 났다. 보통 신문용지 1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30년생 소나무 17그루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주페이퍼는 1970년 15%에 불과했던 재생섬유 사용 비율을 100% 가까이 높였고, 하루에 폐지 2700여톤을 활용해 신문용지를 생산하면서 연간 4만100㏊에 달하는 숲을 보존하고 있다. 전주페이퍼는 또 범지구적인 기후변화 대응 노력에 동참하고, 에너지의 혁신적인 절감을 통한 온실가스 감축으로 지속적인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을 도모하기 위해 2009년 2월 '그린 365 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린 365는 5년 동안 매월 1~2회 회의를 실시해 추진실적을 점검하고, 새로운 핵심 전략과제 발굴 등 추진방향을 재설정하며 활동하고 있다. 저가 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효율 개선을 위해 저탄소 연료 확보, 경쟁력 있는 자가전력 생산, CDM(Clean Development Mechanism, 청정개발체제)사업, 국내온실가스 감축 등록사업 추진, ESCO(Energy Service Company, 에너지 전문기업) 투자의 적극적 추진을 통한 설비효율 개선 등을 추진하고 있다. ▲바이오매스 열병합발전소 준공 2010년 5월 12일 전주페이퍼 전주공장은 국내 최초로 바이오매스 열병합발전소를 완공했다. 500억원이 투입된 이 발전소는 10MW의 전력과 시간당 100톤의 스팀을 생산하여 제지공정에 공급하는 설비로서, 벙커씨유, LNG 등 화석연료 대신 바이오매스연료(우드칩WCF, RDF, RPF)를 연료로 사용한다. 전주페이퍼는 열병합발전소의 가동으로 화석연료 의존도를 기존의 70% 수준에서 10% 이하로 획기적으로 줄였다. 또 연간 10만여 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 청정개발체제(CDM) 사업을 통한 탄소배출권 판매 승인을 추진하고 있다. 바이오매스 열병합발전소는 폐목재, 폐합성수지, 생활쓰레기 등 다양한 폐기물로 만들어진 고형연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국내 최초의 유동상 열병합발전소 시스템으로, 에너지회수율이 85% 이상(화력발전소는 40% 수준)이다. 전주페이퍼는 이와 함께 폐목재, 폐플라스틱 등을 원료로 고형연료의 일종인 RPF(Refuse Plastic Fuel; 폐플라스틱 고형연료제품)를 제조하는 회사인 '전주에너지'를 설립, 환경에너지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전남 장성에 설립된 전주에너지는 올해 100억 원을 투자, 연간 2만 톤의 폐기물고형연료 생산설비를 갖출 예정이다. ▲환경경영대상 경공업 부문 대상 수상 2004년 6월에는 환경부와 매일경제신문사가 주최하는 환경경영대상에서 제조업경공업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환경경영부문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자율적인 환경경영시스템과 환경경영 활성화 등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전주페이퍼는 1999년부터는 '에너지절약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자발적 협약'을 체결하였고, 2000년에는 에너지절약 국무총리 단체표창과 2001년에는 에너지절약 유공자 산업포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왔다. 1996년 ISO 14001 환경경영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안전보건경영 시스템인 KOSHA 18001 및 OHSAS 18001 인증을 2000년과 2003년에 획득했다. 국내 최초로 폐수 무방류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3년 연속 노사문화 우수기업상 수상 전주페이퍼는 1999, 2002, 2005, 2009년 4회 연속 노동부 지정 노사문화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또 전라북도가 개최하는 '전북발전 노사정 포럼'에서 '2008 산업평화 모범사업장'으로 선정됐다. 이는 경영현황설명회, 간담회, 면담제도, 사내소식지 등 각종 의사소통채널을 활성화하여 노사가 꾸준히 소통해 온 결과물로 평가된다. 전주페이퍼는 매년 12월에 사원들의 성금을 모아 불우이웃을 돕는 사랑의 마라톤 행사를 10회째 잇고 있다. 또 회사 내에 '한지박물관'을 운영하는 등 지역주민과의 소통 채널도 꾸준히 가동하고 있다. 세계일류 신문용지 생산기업으로서 지난 2004년부터는 한국신문협회의 NIE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 미니박스 전주페이퍼(대표이사 한인수)는 2008년에 닥친 세계적 금융위기 여파 때문에 2008년 93%에 달했던 공장 가동률이 2009년에는 89%까지 떨어졌다. 2009년 매출액도 6650억원에 그쳐 2008년 7140억원보다 무려 490억원이나 감소했다. 판매량도 2008년에 93만 3000톤(내수 55만 5000톤, 수출 39만 8000톤)이었지만 2009년에는 91만 3000톤(내수 49만 2000톤, 수출 42만 1000톤)으로 줄었다. 전주페이퍼 생산본부장 나병윤 전무는 "올해 들어 공장 가동률을 97%까지 끌어올리고 있으며, 수출 물량을 늘리는 전략으로 총 판매량을 99만 2000톤(내수 49만 5000톤, 수출 49만 7000톤)으로 늘리겠다. 매출도 7510억 정도 예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1998년 수출량이 2000톤에 불과했는데, 당시 IMF외환위기를 계기로 수출에 주력해 왔으며, 지금은 수출이 크게 성장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전주페이퍼의 지난 2008년 판매량 가운데 수출비중은 41.7%였지만, 지난해는 46.1%로 뛰었고 올해는 50.1%에 달할 전망이다. 나 전무는 "인터넷 발달 등 영향으로 신문용지 수요가 세계적으로 감소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국내 신문용지 시장은 이쯤에서 성숙시장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고, 수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최근 변수로 등장한 중국시장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9.1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4)(주)전주페이퍼-⑦ 90년대 중반이후 변화와 발전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난 한솔제지는 1992년 9월 중장기 전략을 담은 '한솔플랜2000'을 발표하며 독자생존을 넘어 원대한 21세기 청사진을 발표한다. 한솔은 플랜에서 2000년 매출 3조원, 세계적 종합제지회사로 성장, 사업다각화 카드를 내놓았다. 이 계획은 발빠르게 진행돼 1995년 무렵 한솔은 ▲종합제지군(한솔제지, 한솔파텍, 한솔판지), ▲유통무역사업군(한솔무역, 한솔유통), ▲금융사업군(동해종합금융, 한솔상호신용금고, 한솔창업투자), ▲정보통신사업군(한국마벨, 한솔PSI), ▲자원개발사업군(한솔포렘, 한솔화학, 한솔건설, 한솔개발) 등으로 영역을 크게 확대했다. 한솔은 기업간 상호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그룹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업들을 인수했다. ▲ 한솔의 몸집 불리기 부메랑 되다 이처럼 한솔이 삼성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후 발빠른 행보를 보이며 그룹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한솔제지의 견고한 성장세 때문에 가능했다. 한솔제지의 매출액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동안 연평균 15.1% 증가했다. 89년 3억4000만달러(세계 105위)였던 매출액은 90년 4억900만달러(100위)로 뛰었고, 93년에는 5억9600만달러 세계 68위 규모로 성장했다. 또 이같은 성장은 신문시장의 활황 덕분이었다. 1987년 6.29선언으로 언론 창간이 자유로워졌고, 경제성장과 민주화 물결 속에서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타고 신문시장은 창간과 증면경쟁이 치열했다. 전주페이퍼 나병윤 전무는 "1990년대 중반 무렵 국내 신문용지 수요가 워낙 많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도 한 때 수입 신문용지를 신문사에 공급했는데, 수입 제품이 톤당 10만원 가량 비쌌지만 손해를 무릅썼다. 신문사는 우리의 영원한 고객이었고, 놓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나 전무는 이어 "국내에서는 중앙지 기준으로 32면이 일반적이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48면, 64면으로 면이 늘었다. 신문이 잡지 수준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성장세에 있던 신문용지 시장이 갑작스럽게 닥친 IMF외환위기라는 된서리를 맞고 휘청했다. 1997년 국내 신문용지 소비량은 130만톤에 달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경제 전반이 급랭했고, 1998년 국내 신문용지 소비량은 전년대비 38%나 급감한 80만톤 수준에 불과했다. 신문용지 생산업계가 융단폭격을 맞은 듯 충격에 휩싸였다. IMF외환위기 충격으로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 기업의 자금난 가중, 대출금리 상승의 악순환 사태가 벌어졌고, IMF 또한 고금리 처방을 내놓으면서 대기업, 중소기업들이 여기 저기서 쓰러졌다. 은행 등 금융기관도 무너지면서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솔제지 등 한솔그룹도 벗어나지는 못했다. ▲ IMF외환위기 직격탄 맞고 휘청 1992년 한솔플랜2000을 발표한 후 금융기관, 전자기업, 골프장 등 사업성이 있는 기업이다 싶으면 잇따라 인수, 덩치를 키워온 한솔그룹은 갑작스런 IMF외환위기 사태 앞에서 유동성 난조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한솔PCS(018)를 설립하고 핸드폰 사업권을 따낸 한솔은 011, 016, 017, 019 등 경쟁사와 치열한 고객 확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솔제지 등을 담보로 엄청난 은행돈을 끌어다 썼는데, 이 대출금이 IMF외환위기 속에서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갑작스런 위기 앞에서 현금이 부족해진 한솔제지는 직원 월급 만큼은 철저하게 챙겼다. 나병윤 전무는 "제지공장은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데, 당시 우리회사 월 전기료가 20억원 에 달했다"며 "전기료를 12일 내지 못하더라도 직원 월급은 하루도 늦추지 않고 제때 지급했다. 그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극심한 유동성 위기에 처하자 한솔그룹은 현금 확보를 위해 계열사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노른자위 전주공장은 많은 국내외 자본들이 군침을 흘렸고, 1998년 12월31일 한솔제지, 노스케스코그(노르웨이),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캐나다) 3사가 합작 설립한 팬 아시아 페이퍼(Pan Asia Paper Company)에 넘어갔다. 이 때 전주공장은 팝코전주주식회사(PAPCO, Pan Asia Paper Company)로 한솔제지에서 독립했다. ▲ 전주공장,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변모 한솔그룹이 한솔제지와 노스케스코그,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가 각각 지분 1/3씩을 공유하는 조건의 다자간 합작투자 방식을 통해 당시 유치한 외자는 9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외자유치로는 가장 큰 규모였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싱가폴에 위치한 팬아시아페이퍼는 전주와 청원, 중국 상하이, 태국 등 4곳에 공장을 두고 연간 150만톤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이는 아시아 태평양지역 신문용지 시장의 30%를 상회하는 것이다. 팝코전주(주)는 팝코(PAPCO, Pan Asia Paper Company)의 한국내 자회사로 팝코 전체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연간 100만톤을 담당하는 주력기업 위치였다. 팝코전주(주)는 1999년 12월30일 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1년에는 한솔제지가 자사 지분 1/3을 매각하면서 노스케스코그(50%)와 이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50%) 2대주주 체제가 됐다. 2005년 11월, 이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가 본사 경영이 악화되자 팬아시아 지분을 노스케스코그에 매각했고, 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는 노스케스코그 단독주주 체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2006년 1월에는 상호가 한국노스케스코그로 변경됐다. 하지만 노스케스코그도 2008년 9월 손을 뗐다. 2008년 유동성 제고 차원의 글로벌 구조조정을 추진한 노스케스코그 그룹이 모건스텐리PE와 신한PE에 매각하고 한국을 떠났다. ▲ 투명경영과 소통으로 노사 신뢰 모건스텐리PE는 아시아 사모펀드 중 상위 5위 규모로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투자하는 사모펀드에 속한다. 또 신한PE는 국내 사모펀드 시장의 선두 신한금융그룹의 풍부한 고객 기반과 경험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 양 주주사는 지분 인수 후 경영개선 작업과 기업가치 제고 등에 활발히 참여하는 한편, 한지의 명성이 높은 전주의 전통과 40여년 회사의 역사와 기업문화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사명을 '전주페이퍼'로 변경했다. 삼성그룹 시절, 삼성 분리독립과 한솔그룹시절, IMF외환위기 시절을 거쳐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변모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전주페이퍼 구성원들은 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경영진이 자주 바뀌는 과정에서 특히 기업문화도 변화했다. 외국인투자기업답게 눈높이가 자연스럽게 국내 최고에서 '세계 최고'에 맞춰졌다. 경영 시스템은 물론 임직원들의 마음가짐까지 글로벌화 돼야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자경영체제를 거치면서 투명경영이 자리잡았고, 능력평가제와 인센티브제 등 합리적 인사시스템도 자리잡았다. 외국인이 경영에 참여한 초창기인 팬아시아페이퍼 시절부터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원들이 직접 매분기마다 직원들 앞에서 경영현황을 설명하고, 노사협의회에도 참석해 애로사항을 경청하고 있다. 사내 호프데이를 통해 직원과 경영진이 소통했다. 이런 과정에서 감원 등 고용불안이 불식됐고, 전주페이퍼는 안정 궤도를 타고 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9.0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3)(주)전주페이퍼-⑥종합제지회사로 도약

1965년 새한제지로 출범, 삼성에 인수된 뒤 굴지의 제지기업으로 성장한 전주제지는 1990년대 이후 큰 변화의 파도에 휩싸인다. 전주제지는 초창기 10만평에 달하는 논과 밭, 황무지를 갈고 닦아 초지기 1호기5호기까지 가동하며 국내 신문용지의 50% 가량을 공급할 만큼 괄목성장했다. 그러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완화, 소유 분산, 업종 전문화 등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1989년 들어 대기업이 영위하는 사업 가운데 중소기업형 분야 정리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서 전주제지는 결국 삼성으로부터 분리 독립됐다. 삼성그룹은 1991년 11월 6일 전주제지와 신세계백화점의 분리독립 방침을 전격 발표했고, 1993년 7월28일 은행감독원의 확정을 통해 삼성-전주제지는 완전히 분리독립 됐다. 이 때 전주제지 대주주 이인희 고문은 임직원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처우도 삼성과 동등 또는 그 이상으로 보장하는 등 사기 진작에 힘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제2창업 전주제지 김인호 사장은 삼성과의 분리독립이 발표된 지 6일 만인 1991년 11월12일 발표한 '최우량 기업의 실현을 위한 선언'을 통해 독립경영체제 구축을 위한 행보를 서둘렀다. 김 사장은 선언에서 인재 제일의 경영, 새로운 그룹으로의 성장, 독립경영 체질의 확립, 새로운 기업 문화의 창조 등 네가지를 강조했다. 삼성의 그늘을 털고 독립된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명 변경도 추진됐다. 사명 개명작업은 91년 1월부터 착수됐다. 사내에서 공모한 결과, 2만여개의 후보안이 제시됐고 한자 및 외국어 조어형은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2년 5월1일 순한글 명 '한솔'이 새로운 사명으로 결정됐다. 한솔은 발음이 쉽고 외국어 표현도 용이했다. 또 의미적으로도 크다, 유일하다는 뜻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소나무와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솔'을 결합한 한솔은 세계 정상에 우뚝 서겠다는 임직원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1992년 9월23일 임시주총에서 사명 변경을 결정하고, 창립 27주년인 1992년 10월1일 제2 창업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사명 '한솔제지주식회사'가 공식 사용됐다. ▲ 독립의 몸부림 한솔제지는 완벽한 독립을 위해 사명 변경에 이어 새로운 시각물(한솔 마크)을 제작하고, 1994년 1월에는 사가 '한솔의 노래'도 발표했다. 종합제지회사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을 담은 '한솔플랜2000'도 1992년 9월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00년 매출목표 3조 원, △세계적 규모의 종합제지회사로 성장, △제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안정적 사업 다각화 추진으로 요약된다. 즉 제지를 중심으로 원료 조달, 생산, 판매체계를 구축하고 물류, 환경, 엔지니어링 등 제지와 관련된 신규사업에의 진출을 통해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구축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경영 환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한솔제지는 1991년 12월 종이 생산량 400만톤을 달성, 업계 최초로 세계 100위권에 진입한 상태였다. 1986년 1000억 원을 돌파했던 매출액도 1991년 11월29일 3000억 원을 기록했다. 또 전주공장은 신문용지와 중질지, 재생지를 생산하는 대단위 전문공장으로 육성하고, 장항공장은 고급인쇄용지 전문 생산공장으로, 또 대전공장은 산업용지 전문생산공장으로 특화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한솔은 또 폐수처리제 등 고분자화학과 정밀화학을 겨냥한 화학회사, 제지수송과 관련된 물류회사, 금융기업 등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같은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새로운 기업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한 장기적 홍보 전략도 실행해 나갔다. 1991년 말, 기획실 산하 홍보팀을 홍보실로 승격하고 1993년 8월에는 '손과 종이'라는 주제로 첫 TV광고를 내보냈다. 1994199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제일 많이 심어 온 기업'이라는 이미지 광고를 해 환경기업의 이미지를 심고자 했다. 또 1995년 한솔문화재단을 설립, 미술관과 종이박물관 건립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전통한지 제작 기술 보존을 위한 학술 활동비 지원 등 각종 문화 및 지원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 세계 3위의 신문용지 생산공장 1980년대 후반부터 신문용지 시장이 호황이었다. 1990년 신문용지 내수는 전년대비 21.7% 증가한 51만 7000톤을 기록했고, 생산량은 17.5% 증가한 52만 1938톤에 달했다. 수출도 53.4%나 증가했다. 1973년 중단됐던 신문용지 수입이 1989년부터 재개되고, 또 89년 2만3807톤이었던 수입량이 90년에 4만312톤에 달할 만큼 신문용지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국내 제지업계도 설비를 확충했고, 94년들어 생산량이 전년대비 21.4%나 증가했다. 그렇지만 신문사들의 잇따른 증가와 중앙지의 지방분공장 설립, 증면 경쟁이 이어지면서 신문용지 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신문사들의 증면과 다면인쇄, 컬러인쇄가 가속화 하면서 신문용지의 평량 경량화 등 품질 고급화 작업도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전주제지는 54g/㎡였던 신문용지 평량을 경량화하는데 성공, 1989년 7월부터 국내 최초로 48g/㎡의 컬러 신문용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1993년 11월29일에는 새로 증설한 6호기에서 46g/㎡의 초경량 신문용지를 생산해 냈다. 초경량 신문용지 생산은 신문 1부당 중량을 줄여 우편료 절감, 배달 용이 등 효과를 낳았다. 또 85년과 86년에 이어 93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개조 공사를 실시하는 등 품질 관리에 꾸준히 노력했다. 1989년 5호기 건설로 전주제지는 하루 1390톤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최대 제지공장이었지만, 단일공장 규모로는 세계 25위에 불과했다. 이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종합제지회사로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생산량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경영진의 판단이 내려졌다. 1991년 11월6일 핀란드 발멧사와 초지기 도입계약을 체결하고 6호기 증설에 들어갔다. 1500억원이 투입된 이 공사는 1992년 4월 기공식, 12월 기계 설치공사, 1993년 8월16일 시험운전을 거쳐 16개월만에 완공됐다. 6호기는 연간 26만톤 생산능력(최대속도 1500m/분)을 갖춘 초지기와 29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탈묵펄프 처리시설을 갖춘 국제규모였다. 이를 통해 한솔제지는 세계 4위의 신문용지 생산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이어 2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 연산 24만톤, 설계속도 1700m/분, 신문용지 코팅설비 기능까지 갖춘 7호기 발주 계약을 1995년 1월 필란드 발멧사와 체결했다. 7호기 가동으로 전주공장은 연간 100만톤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3위 규모의 신문용지 생산공장으로 그 위상을 높였다. ▲ 종합제지회사로 도약 전주공장을 신문용지 전문공장으로 육성한다는 장기 전략에 따라 인쇄용지 생산공장은 충남 장항 금강하구언변에 세워졌다. 1990년 4월 장항공장 PM21(장항에 있는 제2공장에 건설되는 초지기 1호라는 의미) 건설본부가 발족된 뒤 1600억여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시설된 PM21은 1992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백상지 등 인쇄용지 생산에 들어갔다. 장항공장은 1992년 5월21일 준공과 함께 본격 가동에 들어갔고, 이어 94년 5월 준공된 중성지 생산 초지기 PM22호기는 그해 27만5000톤을 생산, 장항공장의 독립 기반을 이뤘다. 한솔제지는 이와 아울러 특수지 사업과 산업용지 사업에도 진출하며 제3공장 건설프로젝트를 진행했고, 1995년 대전공단 내 7만여평의 부지에 백판지 공장을 설립, 가동에 들어갔다.또 백판지 생산업체인 동창제지를 1994년 인수, 연간 40만톤의 백판지 생산능력을 갖췄다. 이에따라 한솔제지는 1990년대 중반 무렵 신문용지는 물론 중질지, 백상지, 정보용지, 백판지 등 각종 용도의 종이를 모두 생산할 수 있는 종합제지회사의 위상을 갖췄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9.0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2)전주페이퍼-⑤세계를 향하여

경영이 안정된 19701980년대 기간에 전주제지는 세계시장 진출을 준비했다. 규모의 생산체계 구축과 병행, 안정 성장을 위한 기업의 체질 개선도 진행시켰다. 1977년 3호기 가동과 더불어 생산능력 2.1배, 인력 1.4배, 자산 3.1배가 증가하는 등 모든 부문이 급격히 팽창,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관리기법이 요구되자 1978년 9월 한국과학기술원과 생산 관리 및 기계부품 관리의 전산화 용역 계약을 체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1979년 11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컴퓨터를 임차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지업계 최초의 업무 전산화였다. ▲ 제지업계 최초 업무 전산화 1980년 3월에 전산팀을 발족하고, 그해 7월에는 휴렛 팩커드(HP)사의 컴퓨터 HP-3000-33(용량 0.5MB)을 도입했다. 이에따라 자재 및 생산관리를 전산처리하게 됐고, 이어 인사 및 회계관리 시스템도 개발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1978년 6월1일 목표관리제, 1979년 10월 사업부제가 채택됐다. 그러나 목표관리제도는 조직단위로 실시돼 개인의 목표의식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어 개인을 하나의 사업부 단위로 설정하는 개인별사업부제를 1985년 3월15일부터 실시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실적 향상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개인주의 만연과 경영관리자의 창의력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작업표준을 설정하고 과거 실적에 의한 목표 부여와 인센티브제 도입, 부서별 평가기준의 차별화 등을 실시하며 개선해 나갔다. 1989년에는 대표이사 직속기구로 경영합리화추진본부를 설치하고, TPI(Total Productivity Innovation)라는 종합생산혁신운동을 전개했다. 영업전략도 강화했다. 경쟁사에 비해 공급량이 열세인 신문사에 대해서는 가격할인, 외상기일 연장 등 당근을 제시하며 점유율을 높여갔고, 1986년에는 서울지역 대리점들을 한데 묶어 거목회를 조직, 가동했다. ▲ 원료의 안정적 수급 노력 제지산업은 전형적인 장치산업으로 원료 조달 비용을 낮춰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전주제지는 원목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1989년 7월에 원목 공급업체를 하나로 묶은 송우회(松友會)를 발족했다. 송우회는 1989년 3465만재, 1991년 4891만재의 원목을 공급하는 등 전주제지의 원목 수급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971년부터 주요 원료로 사용해 온 고지의 안정적 확보에도 힘썼다. 1986년 15만2000톤, 1990년 37만4000톤 등 매년 고지 수입량이 늘어나자 198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첫 해외지점을 개설하고 고지 및 펄프를 조달했다. 이어 1988년에는 캐나다 ETL사와 설립한 합작법인 사무소를 벤쿠버와 뉴욕에 개설했다. 전주제지는 1972년 하루 30톤 생산 규모의 탈묵펄프생산시설을 갖췄고, 3호기가 가동되기 시작한 1977년에는 200톤 생산규모로 증설했다. 4호기 건설이 진행되던 1984년 하루 500톤 생산규모의 탈묵펄프 생산시설을 갖췄는데, 이는 단일공장 세계 최대의 탈묵시설이었다. 이무렵 탈묵펄프 배합비율도 70%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탈묵펄프를 많이 배합하면 신문용지의 백색도가 매우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수출용 신문용지나 교과서 용지를 생산할 때는 탈묵펄프를 25%밖에 배합할 수 없었다. 이에 전주제지는 1986년 표백탈묵펄프를 개발했다. 그 결과 수출용 신문용지의 탈묵펄프 비율이 25%에서 45%까지 높아졌고, 1989년에는 일반신문용지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탈묵펄프 비율도 80% 수준까지 향상됐다. 전주제지는 하루 300톤 규모의 쇄목펄프를 생산해 중질지 및 옵셋용지에 65%, 신문용지에 20%의 비율로 배합했지만 쇄목펄프는 강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수입 열기계펄프는 쇄목펄프보다 강도가 2배 이상 높고, 자동화가 가능했다. 1988년 12월 캐나다 하이맥사에 설비를 발주, 공사에 들어간 열기계펄프는 1990년 1월부터 정상가동됐다. 이후 3년간 열기계펄프 사용에 따른 원가 절감액은 2732억원에 달했다. ▲ 1986년 11월 매출액 1000억 돌파 전주제지는 1986년 11월13일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뤘다. 1968년 신문용지를 생산한 이래 총190만톤의 종이를 판매함으로써 일궈낸 성과였다. 경제성장에 따라 국가 전반에 걸친 문화수준이 향상되면서 종이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물론 고가의 인쇄용지 수요도 크게 늘난 점, 신문시장 팽창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제지공업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신문용지 생산량은 1986년 27만2000여톤에 불과했지만, 87년 30만2000여톤, 88년 36만8000여톤, 89년 44만4000여톤, 1990년 52만1000여톤 등 87년을 기점으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 5호기 증설 1987년 6.29선언에 의한 언론자유화 조치 등 요인으로 언론산업이 팽창, 신문용지 자급이 무너졌다. 87년 당시 국내 일간신문은 30개에 불과했으나 89년 12월에 68개로 늘어났다. 면수도 87년 12면에서 90년 24면으로 증가했다. 이에따라 88년 31만 7000톤이던 신문용지 수요는 1992년 67만 7000톤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1990년에 4만312톤을 수입할 만큼 신문용지 공급 부족이 심화됐다. 이에 전주제지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5호기 증설을 추진하는 동시에 증설 후 공급과잉을 예상, 수출 거래선 확보에도 나섰다. 홍콩 호주 등을 중심으로 신문용지 수출 거래선을 확보한 전주제지는 1987년 11월 무역의날 행사에서 1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전주공단 내에 5호기를 설치하기로 한 전주제지는 3만2000평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투자비 1113억원을 확보하기 위해 유상증자(51억9000만원) 실시, 회사채(150억원) 발행, KDB시설자금(470억원) 등 내자 745억원을 조달했다. 또 외자 368억원을 도입했다. 전주제지는 1997년까지 보유해야 할 생산능력을 65만9000톤으로 추산하고 5호기의 제원을 지폭 5폭, 운전속도 1100m/분, 생산능력 하루 590톤으로 결정했다. 1988년 4월 기공된 5호기(미쓰비시중공업) 증설공사는 이듬해 9월1일 준공됐다. 이 과정에서 제2호 열병합발전소와 열기계펄프 설비도 건설됐다. 이에따라 전주제지의 연간 생산량은 30만톤에서 50만톤 규모로 성장했고,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열기계펄프 생산시설을 국내 최초로 갖춰 원가도 크게 절감됐다. ▲ 정보산업용지 시장 진출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보산업 분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복사기와 팩스, 컴퓨터, 프린터 등 정보기기가 산업현장과 일반에 대량 보급됐다. 전주제지는 1979년 12월 국내 최초로 설립한 제지연구소를 통해 다양한 용도의 종이를 개발해 나갔다. 1981년 중질복사용지를 개발한데 이어 OCR용지, 청사진 원지, 고속 레지저프린터에 사용되는 비충격 방식의 NIP(Non Impact Printer)용지 등을 개발해 생산했다. 이어 1986년 팩스에 사용하는 감열지(무색 염료인 로이코 염료와 현색제가 만나 열에 의해 반응함으로써 발색(發色)하는 특수지) 개발에 들어간 전주제지는 1987년 4월 공사에 들어가 1988년 5월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제품을 시장에 내놓지 못했고, 1989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스타팩스'라는 상표로 판매에 들어갔다. 전주제지의 감열지 개발 생산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 였다. 이후 1989년 불연무기질종이 개발, 1990년 흑백 및 컬러잉크젯용지 국산화, 1991년 열전사용지, 고감도 감열지, 바이오펄핑기술, 무진지(無塵地)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미립자 발생이 적고 불투명성 및 내열성을 갖춘 무진지 개발은 세계 세 번째 쾌거였다. 한편 전주제지는 기업이미지 변신을 통해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986년 창립 21주년을 맞아 새로운 심벌마크와 로고를 제정, 사용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2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1)(주)전주페이퍼 ④성장기반 구축

우리나라 경제는 1960년대 도전기를 거쳐 1970년대 성장통을 앓으면서 안정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 있었기에 80년대와 90년대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고, 1997년 닥친 IMF외환위기도 슬기롭게 극복, 21세기를 활력있게 출발할 수 있었다. 1965년 삼성이 새한제지를 인수해 출발한 전주제지는 우리나라 격동의 경제사와 궤를 함께 하며 국내 제지산업을 선도해 왔다. 전주제지는 1968년 9월1일 역사적 가동에 들어간 뒤 1991년 11월 6일 삼성으로부터 분리 독립, 1992년 10월 한솔제지로 사명을 바꾸었다. 당시 정부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완화돼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삼성은 전주제지와 신세계백화점을 계열 분리 대상으로 결정했다. 분리독립 후 전주제지는 사명을 한솔제지로 바꾼 후 제2창업을 선언하고 홀로서기를 넘어 대그룹화를 겨냥,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하지만 IMF외환위기의 파고 속에서 경영이 흔들렸고, 1998년 세계 12위 규모의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캐나다의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사와 노르웨이의 노스케스코그사가 공동 지분으로 참여하면서 1999년 12월31일 3개사 합작법인인 팬아시아페이퍼 코리아(주)로 사명이 바뀌었다. 그러나 3개사 공동지분 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솔제지가 2001년 보유 지분을 아비티비와 노스케스코그에 전량 매각하고 손을 뗀 것. 이후 2005년 노스케스코그가 지분 100%를 확보한 뒤 2006년 1월 한국노스케스코그로 사명을 바꾸고 경영 안정을 이뤘지만, 2008년 9월 모건스탠리PE(58%)와 신한PE(42%)가 지분을 인수하고 사명을 현재의 전주페이퍼(주)로 변경했다. ▲성장기반의 구축 전주제지는 1968년 9월 초지기 1호기를 가동한 뒤 곧바로 2호기 설치 작업에 들어가 1969년 가동에 들어가는 등 초기부터 공격적인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상당 부분의 투자금이 외국 차관이었지만, 경쟁 제지사들의 열악한 시설과 생산량, 그리고 향후 종이 수요 급증에 따른 공급 부족 현상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예상해 내려진 결정은 빗나가지 않았다. 전주제지는 공장 가동 후 약 3년간 누적 적자가 1억6946만 원이었지만 신문용지 시장을 중심으로 점유율을 높여나갔고 72년부터는 순이익이 났다. 72년부터 74년까지 3년간 누적 흑자 규모는 16억4251만 원에 달했다. 물론 이같은 흑자 규모는 정부의 8.3조치 영향과 함께 비약적인 경제발전 속에서 언론 출판 교육이 활기를 띠며 종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적 흐름이 크게 작용했다. 전주제지는 국내경기 호황에 따른 제지 수요 증가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시설 증설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시장조사 결과, 1974년 국내 제지업계의 공급능력은 11만 7000톤이었고, 당시 고려제지를 인수한 세대제지가 증설작업을 마쳐도 16만톤 정도에 불과했다. 이정도 공급량이 유지될 경우 1977년 4만톤, 1979년 8만톤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3호기 증설과 시련 전주제지는 곧바로 3호기 증설에 들어갔고, 장기적 안목에서 하루 생산 200톤 규모로 결정했다. 이는 12호기를 합한 생산량 130톤을 훨씬 웃도는 대규모 시설이다. 1974년 10월31일 서독 엣샤비스사와 2433만3000마르크에 초지기 도입 계약을 체결했고, 1977년 4월7일 준공했다. 이 과정에서 3호기에 소요될 쇄목펄프와 탈묵펄프 생산시설 증설도 병행했다. 1976년 10월 완공된 탈묵펄프 설비는 자체 기술에 의한 공정 개발과 설계로 완전한 국산화를 이룬 것으로 이 곳에서 생산되는 하루 100톤의 탈묵펄프로 3호기에서 생산되는 신문용지 원료의 45%를 공급할 수 있었다. 3호기 증설을 통해 전주제지는 하루 380톤, 연간 13만톤으로 생산능력이 확대돼 국내 최대 규모의 제지회사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3호기는 가동 초기부터 결함을 드러내 많은 어려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기계 중단이 잦았고, 가동률이 90%를 넘지 못했다. 게다가 품질도 떨어져 종업원들의 사기도 저하됐다. 3호기는 1978년 9월에 가서야 설계보증속도인 800m/분을 성공할 수 있을 만큼 애를 먹였다. 이 과정에서 자금난이 발생했고, 외상매출금까지 늘었다. 77년 41억원이던 외상매출금이 78년에는 56억원까지 늘었다. 단기차입금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78년 5월에는 원료 야적장에서 화재가 발생, 5억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 ▲초지기 개조, 생산성 향상 1980년 무렵 국내 제지업계는 전주제지의 3호기 가동과 세대제지의 증설로 신문용지 공급능력이 연간 18만톤에 달했다. 이는 수요를 웃도는 규모였다. 그동안 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제지업계는 이 무렵에 와서야 원가 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1977년 3호기 가동으로 국내 제지업계 선두 자리를 굳게 지킨 전주제지도 이 무렵 1968년 첫 가동에 들어간 1호기 등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 등 설비 현대화 작업에 들어갔다. 개조 작업을 거쳐 1981년과 1984년에 각각 정상 가동에 들어간 12호기는 노후 배관 교체, 헤드박스 신형 교체 등 대부분의 시설이 최신형으로 교체됐고, 신형 프로세스 컴퓨터를 설치해 제품의 평량(坪量)과 수분(水分)을 자동제어했다. 이에 따라 품질이 현격히 향상됐고, 원가도 크게 절감됐다. 이어 3호기도 개조했다. 설계 당시부터 결함을 안고 있어 문제가 됐던 3호기는 85년과 86년 두차례에 걸쳐 개조공사가 진행됐으며, 이를 통해 지절 감소 등 생산성이 향상되고 품질도 크게 개선됐다. 전주제지는 기존 123호기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작업을 벌이는 한편 향후 국내를 넘어 국제 규모의 제지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야심찬 계획하에 수퍼머신 증설 계획도 함께 진행했다. 이 계획은 1979년 4월 경영정책결정회의에서 결정됐지만, 그 해 말에 닥친 제2차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미뤄지다 1982년 10월22일 최종 결정돼 시행에 들어갔다. ▲수퍼머신 증설 수퍼머신은 해외 건설과 전주공장 외 건설 등 안이 검토됐지만, 당시 금강유역상수도공사가 착공돼 용수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판단되고 또 열병합발전소 가동(83년 10월)으로 인한 에너지 절감 등을 감안, 전주공장 건설로 결정됐다. 수퍼머신의 생산규모는 하루 500톤 안까지 검토됐지만, 400톤 규모로 결정됐다. 또 생산지폭 6304㎜, 운전속도 850m/분, 설계운전속도 1000m/분 등 각 부분의 용량을 여유있게 함으로써 기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향후 생산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또 신문용지 경량화 및 인쇄기술 발달에 대비, 기존 장망식(長網式) 대신 양망식(兩網式)으로 결정하고, 기종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벨로이트사의 벨베 포머형으로 했다. 1983년 8월26일 미쓰비시중공업과 초지기 도입계약을 체결한 전주제지는 1984년 2월17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간 뒤 1985년 9월부터 본격적인 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전주제지의 수퍼머신은 3호기 증설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감안, 조직적인 계획 속에서 진행돼 성공적인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주제지는 수퍼머신이 가동됨에 따라 하루 840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 명실상부 국내 최대의 신문용지 제조기업으로 우뚝 섰다. 한편 수퍼머신 설치에 앞서 1984년 10월 탈묵공장을 준공했고, 그해 12월에는 쇄목펄프시설도 준공했다. 이 당시 쇄목기 4대가 추가 설치돼 전주제지는 총16대의 쇄목기를 보유, 하루 290톤 생산 규모를 갖추게 됐다. 수퍼머신에 양망식을 적용함으로써 제품 품질이 대폭 개선됐고, 설계와 설치, 시운전, 생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체 기술로 해결, 국내 제지기술도 크게 향상됐다. 특히 전주공장 수퍼머신 증설로 인해 전주제지는 기존 인력의 40%에 해당하는 인력을 전주와 인근에서 충원, 지역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1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972년 국내 최초 탈묵 펄프 개발

2호기가 1970년 4월부터 신문용지를 생산하면서 원료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이의 해결을 위해 1970년 8월 하루 생산 36톤 규모의 쇄목펄프(Groundwood Pulp) 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쇄목펄프 생산을 위해 매월 160만재(材)라는 엄청난 원목이 소요된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 때 전주제지가 주목한 것이 탈묵(脫墨)펄프였다. 고지(古紙)의 잉크를 제거한 후 펄프로 재생하는 탈묵펄스 생산시설(하루 30톤 생산 규모)은 1972년 3월 시험가동됐다. 국내 첫 탈묵펄프시설이었다. 처음 하루 30톤 에 불과했지만, 꾸준한 연구개발 끝에 50톤 규모까지 증설됐고, 1973년 9월에는 100톤 규모로 증설됐다. 초기 하루 30톤 가량 생산된 탈묵 재생펄프는 전주제지 원료의 15%를 차지했다. 이는 월간 36만재의 원목과 180톤의 화학펄프를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원료난 극복은 물론 원가 절감에도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자체 탈묵펄프 시설을 갖춤으로써 전주제지는 효과적으로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고, 대외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특히 산림자원 보호에 큰 기여를 했다. 전주제지는 또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표백쇄목펄프(BGD, 인쇄용지 원료) 생산시설을 19741975년에 도입, 하루 생산 45톤 규모로 가동했다. 외화절약은 물론 국내 인쇄용지 업계에 저렴한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 자사는 물론 제지업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생산성을 극대화한 노력도 흑자 경영으로 이어졌다. 당시 제지공장의 생산량 증대의 키포인트는 초지기의 증속(增速) 실현에 있었다. 도입 당시 1호기의 보증속도는 400m/분이었지만, 1971년 440m/분으로 높였고, 2호기도 300m/분에서 360m/분으로 증속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12호기의 생산성이 각각 5.7%, 6.5% 향상됐고, 파지율도 각각 33%, 63% 개선됐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1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30)(주)전주페이퍼③-1970년대 초반

전주제지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규모의 경제에 걸맞는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출발했기 때문에 가동 첫 해부터 신문용지 시장에 돌풍을 예고했다. 가동 첫 해인 1968년 당시 경쟁사들의 생산 능력이 1일 45톤에 불과한 반면 전주제지의 생산능력은 130톤에 달했다. 10월1일 첫 가동한 전주제지의 68년 생산량은 5524톤이었는데, 이는 그 해 고려제지의 연간 생산량 2만880톤의 26%에 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주제지가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은 많았다. 거대한 제지공장을 짓는데 들어간 자본의 상당 부분이 외국에서 들여온 대규모 차관이었고, 제지시장의 경쟁도 치열했다. ▲ 어려운 출발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국내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많은 차관을 들여 설립한 전주제지도 그 산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부가 급성장 기조에 제동을 걸고, 1970년대 들어 석유파동까지 겹치면서 전주제지도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1969년 11월 재정긴축과 유동성 규제를 골자로 하는 '안정기조 구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조치로 인해 69년 15.9%였던 경제성장률이 70년 8.9%로 반토막났다. 제지업계도 국제 펄프 파동으로 원가가 상승, 원료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 6월 반표백 크라프트 펄프(SKP) 가격은 전년대비 30% 이상 상승한 톤당 205달러에 달했다. 또 정부가 산업비림제 운용방식을 변경하는 바람에 원목 조달도 힘들어졌다. 자연히 원목값도 불안했다. 수입 증가도 문제였다. 1969년 6638톤까지 감소했던 신문용지 수입량이 1970년에는 1만 2782톤으로 급증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국내업체들은 엄청난 출혈경쟁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신문용지 생산업체 4개사 중 전주제지를 제외한 고려대한삼풍제지가 법정관리 또는 은행 관리에 들어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전주제지도 서독 상업차관 800만 마르크, 미국 FNCB의 현금차관 240만 달러, 한국외환은행 대부금 220만 달러를 1969년부터 상환해야 했다. 더구나 2호기 생산이 3개월이나 늦어지면서 적자폭은 늘어났다. 결국 단기 고리의 사채로 버텨야 했다. 이 당시 전주제지의 손익 상황을 살펴보면 1969년 21억 42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이익 -7367만원, 1970년 34억 10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이익 338만원, 1971년 37억 8700만원 매출에 당기순익은 -9917만원이었다. 3년간 누적 적자액이 1억6946만원에 달했다. ▲ 신문용지 시장 안착 이런 가운데 전주제지가 1969년 국내 신문용지의 35.4%를 생산하고, 35.3%의 시장점유율을 보인 것은 생존할 수 있는 힘이 됐다. 하지만 전주제지는 2호기에서 생산한 인쇄용지 시장에서 실패했다. 69년 생산량의 76%에 불과한 5267톤 판매에 그친 것. 결국 전주제지는 1970년 4월부터 2호기 생산 지종을 판매가 용이하고 자금 회전이 빠른 신문용지로 전면 변경했다. 이에따라 전주제지의 1970년 신문용지 생산량은 3366톤으로 국내 생산량의 43%에 달했다. 값비싼 화학펄프 대신 값싼 기계펄프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가도 절감됐다. 1969년 전체 원료비에서 수입펄프 비중이 66.3%였지만, 지종 변경 후인 1971년에는 47.6%로 떨어졌다. 당시 수입펄프가격은 3년간 53.2% 상승했다. 2호기 지종을 신문용지로 변경한 것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전주제지가 인쇄용지 시장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주제지는 1968년 11월, 정부의 자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 제정에 따라 삼성그룹 최초로 기업 공개에 나섰지만 회사 수지가 악화되면서 상장을 거부당했다. 이후 1972년 5월17일 증권시장에 상장했고, 당시 주식은 주당 액면가 1000원이었다. 발행 규모는 보통주 119만 9996주와 우선주 30만주였다. 기업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969년 3억 5000만원, 1970년 2억원, 1971년 9990만원을 증자, 1971년 현재 자기자본비율을 26.1%로 끌어올렸다. 또 전환사채 발행, 산업은행 차입 등을 통해 1970년말 7억3900만원이었던 사채를 1971년 말 3억7700만원 수준으로 낮췄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1972년 '8.3긴급경제조치'를 발표, 기업의 사채동결 및 대폭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경제 전반에 걸친 호황은 제지업계에도 파급됐다. 전주제지의 생산량은 1972년 5만9383톤(56.2%)에서 1974년 6만1388톤(41.2$)으로 크게 늘었다. 신문용지 가격도 올랐다. 1965년 연평균 8.8% 인상돼 왔던 신문용지 가격이 1972년 4월 16%나 인상되면서 제지업계의 경영 여건을 크게 호전시켰다. 전주제지는 주거래선인 신문사와 출판업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1972년과 1973년 각각 56%와 52%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 흑자 시대 1972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기간에 전주제지는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다. 1972년 당기순이익이 3억6664만원에 달했고, 73년 5억4426만원, 74년 7억3161만원이었다. 1969년 401%까지 치솟았던 부채비율도 1973년 141%로 낮아졌다. 유동성비율도 71년 63.7%에서 73년 140.6%로 개선되는 등 재무구조가 크게 안정됐다. 이처럼 재무구조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힘이 컸다. 8.3조치에 따라 전주제지는 2억8500만원의 사채잔액을 신고했고, 3억3456만원의 은행채 금리도 21.6%에서 8%로 낮출 수 있었다. 게다가 3년거치 5년 분할 상환의 장기 저리 조건이었다. 이에따라 전주제지가 얻은 비용 절감효과는 연간 1억7만원에 달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1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공장건설과 병행한 업무

제지 공장은 원목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원목이 주원료의 80%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공장 건설에 나선 새한제지는 1966년 8월에 원목 조달 업무를 중앙개발 산림부에 위임하고, 농림부로부터 실수요자 지정을 받는 등 원목 확보 업무를 시작했다. 1966년 10월 상공부에 원료 수급 신청서를 제출하고, 이듬해 1월에는 원목 생산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강원도 삼척에서 3400㎥, 명주에서 1300㎥, 경북 봉화에서 1300㎥ 등 총 6000㎥(전국 수급량의 5%)의 펄프재를 배정 받은 것. 1967년 3월에는 중앙개발 산림부를 새한제지로 흡수 편입, 원료 조달을 담당시켰다. 당시 총무과는 원목관리와 조림, 양묘 등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 효율화 조치가 필요했다. 1968년 1월에는 임산물 집산지인 경북 안동에 임무소(林務所)를 설치했고, 삼척과 봉화에는 주재사원을 두어 원목 구입과 발송 업무를 수행토록 했다. 이후 주재사원은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경북 울진 등에도 배치됐다. 조림사업도 전개했다. 1966년 대부받은 전북지역의 국유 임야 2026정보의 관리권을 중앙개발로부터 이양받아 부안에서 첫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1967년 4월에는 중앙개발 소유인 경북 안동, 봉화, 영주 등지의 임야 1270정보를 매입했다. 1968년말 당시 전주제지는 총 3296.86정보의 임야를 소유하고 조림사업을 펼쳤다. 조림을 위한 양묘장은 1967년 4월 부안에 조성됐고, 68년 2월에는 전주공장 내에도 양묘장이 설치됐다. 한편 전주제지는 펄프의 경우 화학펄프인 반표백 크라프트 펄프(SKP: Semibleached Kraft Pulp)만 미주지역에서 수입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0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9)(주)전주페이퍼②

새한제지를 인수한 삼성은 국내 제지업계의 생산시설이 소규모이고 기계가 낡은데다 향후 제지 수요 증가에 따라 공급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했다. 1965년 국내 제지업체 63개사의 총 생산 능력은 19만 2600톤에 불과했다. 이중 근대적 설비를 갖춘 12개사의 생산 능력은 10만 9000톤으로 전체의 56.6%에 달했다. 1개 업체당 생산량은 2207톤이었고, 1만톤 이상 생산 능력을 갖춘 업체는 5개사 뿐이었다. 게다가 기술과 시설이 낙후돼 가동률은 총생산능력의 72.1%에 불과, 13만 9014톤 생산에 그쳤다. 1965년 국내 용지 총소비량은 14만 3610톤이었다. 즉 2000톤 가량이 수입되고 있었다. 삼성은 생산 규모 확대를 겨냥, 당초 2만평에 불과했던 부지를 9만 7720평으로 확대했다. 초지기도 하루 40톤 생산 규모로 계획됐던 것을 1967년 2월13일 하루 60톤 생산규모 변경했고, 이를 다시 80톤 규모로 확대 조정했다. 그러다가 1967년 7월에는 80톤 규모 1대와 50톤 규모 1대 등 하루에 총 130톤의 인쇄용지와 신문용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도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국내 유수 제지업체들이 하루에 40톤을 생산할 수 있는 소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은 원가 절감 등 경제적 측면에서 양산체제를 갖추는 것이 향후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또 시장조사 결과, 1970년을 기준하여 예상되는 부족물량이 신문용지 6만톤, 인쇄용지 4만톤에 달했다.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새한제지의 생산규모가 연간 4만6만톤 정도로 정해진 것이다. ▲ 2년 만에 12호기 건설 1966년 12월10일 평토제에 이어 1967년 3월22일 기공식을 가진 새한제지는 곧바로 8만여평 부지에 대한 정지작업을 벌인 뒤 4000여평 공장 기초공사에 들어갔다. 서독 엣샤비스사에 발주한 기계설비가 12월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공장 신축 공사는 여름 땡볕과 겨울 혹한 속에서도 강행됐다. 1968년 3월에 기계설치공사가 시작됐고, 4월1일부터는 신문용지 생산을 위한 1호기(1일 80톤 생산능력) 조립공사가 시작됐다. 서독 엣샤비스사에서 파견한 기술자가 전주에 도착, 기계 설치작업을 도왔고, 4월30일에는 4000여평 본공장 앞에서 상량식을 올렸다. 8월5일 쇄목기 2대가 시운전에 들어갔고, 8월9일에는 공업용수 송수가 이뤄졌다. 8월28일 철도 인입선 시운전에 들어간지 사흘만인 31일에는 원목을 실은 기차가 북전주역에서 첫 운행에 들어갔다. 이처럼 모든 작업이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8월25일 설치가 완료된 초지기에 대한 점검이 이뤄졌다. 이날 초지기는 225m/분에서 400m/분까지 운전속도를 내며 가동됐다. 제품에 불순물이 생기는 문제점 등을 개선한 후 1968년 9월1일 유희춘 사장은 전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1호기 가동 스위치를 눌렀다.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1호기가 힘차게 가동됐고, 종이가 차곡 차곡 쏟아져 나왔다. 2년여간 땀을 뻘뻘 흘리며 눈코뜰새없이 부지매입과 정지작업, 공장 건설 및 기계 설치작업에 매진했던 임직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1호기는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전주제지는 제품을 처음 시장에 출하한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1일 50톤의 인쇄용지를 생산할 수 있는 2호기도 발주됐는데, 1호기를 제작한 서독 엣샤비스사가 수주했다. 1호기 건설 경험, 공사기간 단축 등 이점이 작용했다. 1969년 12월 도입된 2호기는 설치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돼 1969년 4월 시운전에 들어갔다. 새한제지는 1967년 3월22일 기공식 후 2년여만에 초지기 12호기를 건설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이에 투입된 자금은 서독 상업차관 220만달러 등 외자 445만 6168달러와 내자 23억 9639원이었다. ▲ 제품의 생산과 판매 새한제지는 1968년 8월 본격적인 공장 가동을 앞두고 상호를 변경하고 상표를 제정했다. 상호는 8월28일자로 새한제지공업주식회사에서 전주제지주식회사로 변경됐다. 상표는 사내 공모 절차를 거쳤는데, 응모된 1683점 가운데 '삼성표'가 상표로 결정됐다. 이 상표는 둥근 원 안에 삼성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과 새한제지의 첫 알파벳 'S'를 도안하고, 원 위에 '삼성표'라고 썼다. 제지업계의 중심, 원목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부여됐다. 1968년 무렵, 국내 신문용지는 고려제지(북선제지의 전신, 훗날 세대제지, 현재 페이퍼코리아)와 삼풍제지, 대한제지 등 3개사가 공급하고 있었다. 북선이 하루 45톤 생산규모였고, 삼풍과 대한은 35톤 생산규모 였으며, 점차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들 3사의 국내 총공급량은 1965년 4만5397톤, 1966년 5만4701톤, 1967년 5만7579톤으로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1967년의 경우 국내 총수요 7만 2039톤 중 1만 4460톤을 수입할 만큼 공급이 부족한 상태였다. 공급 부족은 신문용지 수입 증대로 이어졌고, 이들 3사는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런 시장 환경 속에서 3사의 재고량은 1967년 4080톤에 달했고, 이는 그 해 국내 공급량 5만 7579톤의 7.1%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68년 10월1일 가동에 들어간 전주제지는 첫 해 5524톤의 신문용지를 생산, 생산량의 77%인 4298톤을 판매했다. 불과 2개월여만에 이같은 판매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소재 신문사 9개사와 지방신문사 7개사와 거래하는 등 짧은 기간에 전국 판매망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8.0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8)전주페이퍼①

1965년 1월24일자 전북일보 1면 하단에 한 회사의 설립등기공고가 실렸다. 사명은 새한제지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는 송근석, 김광수 2인이었고, 자본금은 2500만원이었다. 당시 수년간에 걸쳐 전주지역 주요 인사와 유력 상공인들이 제지공장 유치 활동을 폈고, 새한제지공업(주) 설립은 그 결실이었다. 하지만 전주시 팔복동에 공장을 짓던 새한제지는 자산이 3100만원에 불과할 만큼 초기부터 자금난이 심했고, 공사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을 안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65년 10월 새한제지를 인수해 공사를 진행했고, 새한제지는 1968년 9월1일 역사적 가동에 들어갔다. 새한제지는 1968년 9월3일 상호를 전주제지(주)로 변경했다. 1991년 11월 6일 삼성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전주제지는 1992년 10월 한솔제지로 사명을 바꾸고 제2창업을 선언했다. 하지만 IMF외환위기의 파고 속에서 경영이 흔들렸고, 경영지분 변경 등 요인이 작용하면서 1999년 12월 팬아시아페이퍼코리아, 2006년 1월 한국노스케스코그로 사명이 바뀌었다. 2005년 노스케스코그가 지분 100%를 확보하며 경영이 안정됐고, 현재의 사명 전주페이퍼는 지난 2008년 9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연간 84만톤의 신문용지와 출판용지를 생산하는 전주페이퍼의 생산능력은 현재 단일공장으로 세계 3위 규모이다. 지난 45년간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를 써 온 전주페이퍼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새한제지의 출범 전주는 전통 한지로 유명하다. 6.25전란 중에 많은 자료가 소실됐을 당시, 인쇄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훗날 국회의원까지 지낸 삼화인쇄 유기정 회장이 전주에서 대량으로 한지를 생산, 대법원에 납품했을 만큼 1950년대에도 전주는 한지의 고장이었다. 하지만 신문용지, 출판인쇄용지 등 다양하고 또 많은 양의 종이가 필요해지면서 한지보다 양지 수요가 급증했고, 도내에서도 고려제지 등 군소 제지업체가 다수 가동됐다. 1961년 당시 국내의 종이 소비량은 연간 8만 2066톤으로 연평균 13%의 신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 중 신문용지와 인쇄용지가 전체의 69%인 5만6288톤에 달했다. 당시 신문용지는 고려삼풍대한제지가, 인쇄용지는 한국특수무림삼덕남한제지가 생산했다. 이중 신문용지가 전체 문화용지의 73%인 4만 1280톤에 달할 만큼 종이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당시에는 교과서, 일반서적 등 출판에도 신문용지가 사용될 정도로 종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때문에 문교부와 출판업계는 인쇄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고, 제지공장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무주 출신의 대한교과서(주) 김광수 사장이 교과서 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인쇄용지 생산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나섰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1962년 7월, 서독의 푸루마이스터(Fuhrmeister)사와 하루 25톤 생산 규모의 제지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800만 마르크(200만 달러) 차관 계약을 체결했지만, 국내 자본 조달 능력이 부족하고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 요건도 미비, 사업은 계속 지연됐다. 이런 가운데 전주에서도 지역 주요인사와 유력 상공인들이 '제지공장 유치 추진위원회'를 구성, 제지공장 유치활동을 벌였다. 추진위는 김광수 사장이 주도하는 제지공장 설립이 가시화되자 전주 유치를 강력 요청하고 나섰다. 또 자금 부족으로 공장 설립이 지연되자 전주의 재력가 송근석 씨에게 달려가 참여를 요청하는 등 전주에 제지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그 결과 새 제지회사의 자금 규모는 내자 3억원, 외자 220만 달러로 늘어났고, 이어 정부가 1964년 12월21일 열린 제4회 경제장관회의에서 경제협력 자금 적격사업으로 승인, 활력을 띄었다. 1965년 1월5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 128번지에 '새한제지공업주식회사'간판이 걸리고, 이 회사의 정관도 정해졌다. 인쇄용지 제조 판매, 조림, 펄프 생산 등을 사업 목적으로 정한 새한제지는 주당 1만원짜리 주식 2500주를 발행했고 자본금은 2500만원이었다. 주요 임원은 대표이사 회장 송근석, 대표이사 사장 김광수, 상무이사 최규명, 이사 양덕희 박두성, 감사 서도식 등이었다. ▲ 삼성이 인수, 1966년말 착공 1965년 3월26일 차관 도입에 관한 정부 지불보증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전주공업단지 내 2만평이 제지공장 부지로 정해져 매입에 들어갔다. 이어 1965년 7월1일 서독 푸르마이스터사 및 엣샤비스사와 차관 계약이 체결되고, 하루 40톤 생산 규모의 제지기계(초지기抄紙機)가 엣샤비스사에 발주됐다. 하지만 새한제지는 차관계약을 체결한지 불과 2개월만인 9월들어 자금난에 빠졌고, 10월에 삼성의 손에 넘어갔다. 삼성은 1965년 3월 중앙일보를 설립하는 등 사업 다각화 과정에서 종이의 안정적 공급을 원하고 있었다. 삼성에 넘어간 새한제지는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삼성은 전주시 팔복동 1가에 추진되고 있는 제지공장의 사업성을 전면 재검토했고, 당초 초지기 1대를 도입하려던 계획을 2대 도입으로 수정해 생산능력을 늘렸다. 장치산업의 특성을 살리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국내 제지업계 선두로 나서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에따라 공장 부지도 재검토됐다. 이미 매입한 전주시 팔복동 1가 2만여평의 부지를 답사한 결과, 이 일대는 저지대여서 공사비가 많이 소요되고, 국제규모의 공장으로 확장하는데 미흡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따라 수송망과 용수(用水)등을 고려해 군산과 이리, 경기도 안양, 덕소 등을 후보지로 내정됐다. 하지만 당시 전주시는 '전주공업단지 조성 및 새한제지 유치 추진위원회'를 구성, 부지매입에 협조하는 등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이병철 회장도 이같은 지역사회의 절대적 호응을 외면하지 않고, 팔복동 인근지역 부지 매입을 결단했다. 새한제지는 용지매입추진위원회를 구성, 부지 매입 작업에 나서 마침내 1966년 8월 전주시 팔복동 1가에 6만 7138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지질시험을 한 극동지질연구소는 점토질이 가득해 공장 부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부지 물색에 나선 새한제지는 1966년 11월17일 팔복동 2가3가 일대를 공장부지로 확정하고 이어 4개월간의 작업 끝에 9만 7720평을 확보했다. 이어 12월10일 공장 번영을 기원하는 평토제(平土祭)를 올리고 토목공사를 개시했다. 이듬해인 1967년 3월22일 새한제지와 전주공업단지 기공식이 전주종합경기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2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7)(주)보배-⑦다시 보배 소주로 거듭나다

보배가 1995년 7월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법원은 8월1일 회사재산 보전처분 결정을 내리고, 보전관리인으로 이영배씨가 취임했다. 1996년 2월29일 법원이 회사정리절차 개시 결정을 내림에 따라 보배그룹 산하 기업들은 생사를 달리했다. 경영상태가 좋은 (주)보배와 도시가스, 동주발효 등은 임자를 만나 생존했는데 보배는 1997년 3월6일 조선맥주(주)에 양도됐다. 당시 맥주 브랜드 하이트를 내놓고 승승장구하던 조선맥주는 전북을 연고로 하는 보배를 인수, 전국 소주 시장에 진출하고자 했던 것. 조선맥주측은 97년 7월 회사정리계획안을 제출하고, 10월 20일 회사정리계획안을 승인받은 뒤 11월5일 김인준씨를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조선맥주측은 1998년 1월21일자로 상호를 변경했는데, (주)보배를 하이트주조(주)로 고쳤다. 조선맥주(주)가 문병량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보배라는 이름을 하이트로 바꾸고, 소주 브랜드 명칭도 하이트소주로 바꾼 것은 당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하이트맥주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민들은 하이트소주를 외면했다. 잘 나가던 보배그룹이 무너지면서 보배소주의 브랜드 관리에 구멍이 뚫렸고, 지역 소주를 타지역 자본인 대기업이 인수한데 대한 애주가들의 반발 심리, 그동안 진로소주를 애써 자제했던 애주가들이 대기업이 만드는 하이트소주 앞에서 애향심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게 된 점 등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가능했다. 1979년 백화소주를 인수, 전북 대표 소주기업으로 군림했던 보배소주는 한때 전북지역 시장점유율이 85%에 달할 정도였지만, 하이트주조가 인수한 무렵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곤두박질쳤다. 2001년 21%까지 떨어졌던 전북 자도주 하이트소주의 최근 도내 점유율은 5년 넘게 30%선에 머물고 있다. 하이트주조측은 지역밀착 경영 이미지를 통해 도민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하이트소주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제1차 전북사랑기금을 적립(하이트소주 1병당 1원 적립), 지역사회에 기부했는데 총1억6500여만원이었다. 이어 제2차 전북사랑기금 적립에 들어간 하이트주조는 하이트소주 1병당 3원을 적립, 총3억원의 기금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7월 현재 적립액은 4600여만원 정도이다. 또 제품 라벨에 전북지역 14개 시군 지역축제를 홍보하는 마케팅 전략도 펼쳐왔다. 2007년 1월부터 시작된 이 마케팅은 2008년에 14개 시군으로 확대 실시되고 있다. 농번기 농촌봉사활동을 펼치고, 폭설피해 복구 봉사활동, 저소득층 가구에 사랑의 연탄 지원 등 도민과의 스킨십 강화에 주력해 왔다. 급기야 사명을 변경하는 극약처방까지 냈다. 하이트주조는 1998년 보배를 하이트주조로 바꾼 후 전국 시장 진출을 모색했지만, 전국 진출에 실패했고 게다가 도내에서 조차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2010년 5월 하이트주조(주)를 (주)보배로 변경했다. 사명을 (주)보배로 바꾼 뒤 보배는 지금 도민들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무학, 선양 등 타지역 자도주들이 높은 점유율을 보이며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과 달리 안방에서 30% 점유율에 머물고 있는 보배. 사명을 바꾸면서까지 도민들이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보배는 조만간 신제품을 내놓고 진정한 지역 제1의 소주기업으로 변모하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2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문어발식 경영실패 경험 바탕 타산지석 삼아야

1974년 3월 문병량 사장은 이리상공회의소 회장에 피선됐다. 41세의 나이에 이리상의 회장에 피선될 만큼 문 사장의 활동폭은 넓었다. 그는 남성학원 이사장을 지낸 이춘기, 원광대 초대 총장을 지낸 숭산 박길진, 원광대 총장을 지낸 김삼룡, 도지사와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 등 지역 출신 주요 인사들과 막역했고, 업계에서도 진로 장학엽, OB 박두병 등재계 거물들로부터 사업가로서의 기질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이리에서 남선양조장을 시작한지 불과 11년만에 이리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될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업가적 치열함과 적극적인 기질, 항상 주변을 벤치마킹하며 시대에 앞서가고자 했던 도전과 창의력 등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리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활동하던 1977년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로 아수라장이 됐을 때 문병량은 재난대책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이후 1981년에는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4년간 보사위원회에서 일했다. 국회 예결위원, 올림픽 특별위원 등으로도 활약한 문 회장은 서해안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에너지 절약 시대에 대비해 프랑스 고속열차 떼제베(TGV)와 같은 고속열차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을 기회있을 때마다 했다. 소주업을 하면서도 국민건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는 B형간염 관련 법안에도 관심을 보였다. 소주기업 사장 문병량은 두주불사였다. 1990년대 알콜도수 43도짜리 민속증류주 '천지'를 개발, 중국시장 개척에 나섰을 때 문 사장은 '천지(天地)'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주연에 사용했다. 하지만 보배그룹이 쓰러지면서 천지를 내세워 중국시장에 진출하려던 문 회장의 꿈도 무산됐다. 전북의 대기업 보배그룹이 쓰러진 것은 정치적 상황이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진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던 전남 목포의 삼학소주가 정치적 이유로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의문과 비슷한 지적이다. 하지만 당시 보배그룹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늘리는 공격적 경영을 빠르게 진행했고, 게다가 개발과 건설사업에 뛰어들면서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많다. (주)보배, 동주발효, 보배도시가스, 보배항운 등은 당시 경영상태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1990년 이리시 창인동에 18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보배빌딩이 침체된 부동산경기 영향으로 임대난을 겪는 등 어려움이 겹치면서 결국 그룹 전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이전,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고 은행에서 거액을 차입해 몸집키우기에 나섰다가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 소주업 본연의 수직계열화에 치중하지 않고, 섣불리 수평계열화에 나섰다가 가라앉고 말았다는 것. 비록 그가 그룹 회생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고 하지만, 보배그룹을 둘러싸고 관계를 맺었던 많은 이해당사자들에게 이런저런 피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실패 사례는 되새겨보고, 미래 발전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문병량 회장이 문어발식 확장 경영을 하다가 도산했다는 비판이든,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성장했다는 비판이든, 기업인이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는 주장이든 결과적으로 보배그룹은 쓰러졌다. 옛 보배그룹의 한 관계인은 "오직 한 길, 본업인 소주를 중심으로 한 수직계열화에 충실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2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6)(주)보배-⑥전성기와 쇠퇴

1970년을 전후한 시기, 전국의 소주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300여개에 달하던 소주업체는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254개로 줄어들었다. 진로와 삼학, 대선, 백화 등 대형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제법 큰 술도갓집 수준에 불과할 만큼 영세했다. 1969년 5월 중앙동에서 마동으로 이전한 문병량 사장은 남선양조장 설립후 처음으로 소주공장을 확장하고 공격적 마케팅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1970년 3월 경품부대를 조직, 판매 작전을 전개하고 나섰다. 당시 소주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고, 자사 제품 판매를 늘리기 위해 경품부 판매가 많았다. 당시 경품은 승용차, 피아노, TV, 자전거, 선풍기, 금반지 등이었다. ▲ 전국으로 뻗어가는 보배 1970년 7월 전주에 출장소를 개설하며 전국 시장 확대를 선언한 문병량 사장은 이듬해에는 충북 청주에 출장소 문을 열었고, 1972년 6월 충북 제천출장소, 73년 2월 강원도 춘천연락소, 4월 목포출장소, 강진출장소, 대전출장소, 9월 정읍출장소, 광주출장소, 영산포출장소 등을 잇따라 개설하며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해 나갔다. 정부의 주류 통폐합 조치에 따라 1973년 5월 태양, 진강 등 8개 소주업체 면허를 흡수 합병한 보배양조는 대내적으로는 군산의 백화와 경쟁하면서 대외 시장 확대에 온 힘을 다했다. 이처럼 사업이 확장되면서 문병량 사장은 1973년 10월 모범상공인으로 선정돼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연예인협회 연기분과위와 자매결연을 맺는 등 대외적 활동 폭도 넓혀 나갔다. 당시 유신체제 구축 과정에서 문 사장이 정치적 오해에 휩싸이면서 보배양조는 73년 12월 2개월 조업중단 조치를 받기도 한다.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에서 호남의 기업인 문병량은 자칫 모든 것을 날려버릴지도 모를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문 사장은 특유의 처세를 바탕으로 슬기롭게 극복해 낸다. ▲ 이리상의 회장 피선 한바탕 거세게 몰아친 폭풍우를 이겨낸 보배양조는 더욱 단단해진 기반 위에서 성장한다. 이 당시 소주업계는 정부가 탈세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통폐합 조치를 취하면서 68개로 줄어들었고, 보배양조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며 성장을 지속했다. 1974년 12월 3차 소주공장을 증설하며 완전 자동화 시설을 갖췄고, 1975년 7월에는 상호를 보배양조에서 (주)보배로 변경해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1980년 4월 6차, 85년 7차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소주공장을 증설하면서 보배는 시설의 완전 자동화 및 고성능화를 이뤘고, 생산비도 크게 절감했다. 생산능력도 소주 60만 병/일(360㎖기준), 주정 5만 ℓ/일에 달했다. 보배는 재수도 좋았다. 정부는 1973년 소수업계를 통폐합하면서 도당 1개소 정도의 소주공장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도내에서는 백화와 보배가 살아남아 힘겨운 경쟁을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1976년 11월에 자도주의 도내 의무판매 비율을 50% 이상으로 정하면서 백화와 보배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양측 모두 이익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79년 무렵 2차 석유파동이 닥치면서 청주와 위스키 등 고급주류업계가 타격을 받았는데, 소주만 생산하는 보배보다는 백화의 어려움이 컸다. 결국 백화가 1979년 9월 소주 부문을 보배에 넘겼고, 보배는 전북 대표 소주 지위를 확보하는 행운을 안았다. 백화가 소주공장을 포기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80년대 초반부터 소주시장이 살아났고, 그 수혜자는 바로 보배였다. 보배는 이같은 여세를 몰아 1981년 3월 광주에 연락소를 낸다. 문병량 사장이 광주에 보배 연락소를 낸 것은 도내 시장 방어적 성격이 컸다. 그 당시 전남의 보해양조는 고창과 부안 등 전남 도계 인접지역에 보해소주를 진출시켰다. 전북의 맹주 보배로서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문 사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 전남에 간 보배소주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지역 장벽이 너무 컸다. 하지만 애초 광주전남시장 장악이 아니라, 도내시장에 진출한 보해양조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기 때문에 실망스런 것은 아니었다. ▲ 도내 시장점유율 85% 이처럼 성장한 보배소주는 1990년대 초 전북시장점유율 85%를 기록했다. 매출도 2000억원에 달했다. 진로와 선양, 보해 등이 도내 시장에 진출해 있었지만, 보배소주가 전북시장은 완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항상 전주지역이 문제였다. 전주지역은 전통적으로 자도주인 보배와 백화에 대한 인식이 약했는데, 보배가 대표 자도주가 된 상황에서도 개선되지 않고 진로, 보해, 선양이 설 자리를 제공했다. 이에 전주출장소를 강화했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문병량 사장은 이듬해인 1982년 12월 (주)보배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고, 태용해 전무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주)보배는 보배소주가 성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해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들을 인수하는 등 방법으로 그룹을 일궈갔다. 그 결과 1995년 무렵 보배그룹 계열사는 (주)보배를 비롯해 주정공장인 (주)동주발효, (주)보배개발과 (주)보배운수 육운사업부, (주)보배운수 해운사업부, (주)보배상사, (주)보배양주, (주)보배도시가스, (주)보배건설, (주)세화창투, 보배홍콩유한공사, 북경보배유한공사 등 12개사에 달했다. 주정과 소주 제조 판매 외에 외국산 주류의 수입판매업과 도시가스업, 육상운송과 항만하역업, 건설업, 금융업 등 다각적인 사업을 전개하면서 거대 그룹을 꿈꾸었다. 1989년 2월 서울 삼성동에 보배 서울빌딩을 확보하고, 1992년에는 보배이리빌딩(지하 4층 지상 12층) 2층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1989년 무렵 중국에 들어가 북경 한복판에 북경보배원을 설립하고 영업에 나선 것도 문병량 회장이 그린 세계로 뻗어가는 보배그룹의 원대한 꿈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병량 회장은 그 꿈을 다 그리지 못했다. 1994년 어느날 채권은행들이 갑작스럽게 1000억원대의 대출금 회수에 나섰고, 1994년 12월 30억원을 증자해 총자본금을 81억원까지 확대했지만 회생의 길을 마련할 수 없었다. 보배소주와 동주발효, 도시가스 등 많은 계열사들이 흑자를 내고 있었지만, 건설과 개발 부문에서 외부 금융자금을 빌려 공격적 투자에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보배는 1995년 7월10일 회사정리절차 개시 신청을 하고, 1996년 2월29일 법원의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선 굵었던 향토 기업인 문병량 회장은 1996년 2월11일 6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문 회장의 한 측근 인사는 "문 회장은 애향심이 투철한 기업인이었다. 지역에 큰 것을 만들어 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회사를 위해 지독하다 할 정도로 열정을 기울였다"며 "문 회장은 사적 치부를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기업인이었다"고 회고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1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보배 창업주 문병량은 누구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조부모 아래에서 성장한 문병량은 1996년 2월11일 6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거친 세상을 거침없이 살다간 기업인이었다. 비록 그가 사업을 확장하던 중 금융권의 자금 회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일생을 바쳐 일군 보배그룹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지만, 그가 남긴 보배소주는 전북의 큰 자산으로 남아 도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있다. 180㎝의 훤칠한 키에 호남형의 문병량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항상 시간관리에 철저했던 그는 매일 5시 전에 어김없이 기상해 하루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직원과 거래처 등에 전화를 돌려 업무를 조율하거나 지시하고, 면담 약속을 정하는 일이 습관이 됐고, 이같은 전화업무는 아침 68시 사이에 이뤄졌다. 이같은 그의 습관은 거래 상대방이 이동하기 전에 미리 조율해야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일도 일사천리로 잘 풀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사장한테 달려드는 놈이 나중에 진짜 내식구가 된다"며 비판적이고 적극적인 인재를 중용했다. 대화중에 속담을 잘 섞어 쓰는 등 재치있는 말씨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마법의 소유자였다. 그가 비록 거액의 금융 채무 때문에 그룹을 잃었지만, 사채는 멀리했다. 그는 "사람도 기계도 쉬어야 돌아가는데, (사채)이자는 분분초초 잠도 자지 않고 자란다"며 사채를 경계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없었던 그는 항상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정신을 강조하며 살았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결과적으로 문제의 시작이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결국 기업까지 잃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정권 실세의 재선 요구를 물리친 것은 기업인이 정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보배그룹 회장으로서,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전북 경제발전을 위해 온 몸을 바쳐 일하다 간 향토 기업인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기업 자금을 빼돌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기업은 망해도 사장은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은 그에게 그저 속설일 뿐이었다. 기업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중수교 전에 중국에 진출, 베이징에 '북경 보배원'을 설립해 운영한 것은 문병량 사장의 사업가적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0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5)(주)보배-④성장기

1963년 소주 양조장을 창업한 30세의 문병량 사장은 창업 2년만에 상표와 상호를 보배로 바꾸고 서울 시장을 넘본다. 이 당시 전국에는 300여개의 소주공장이 난립,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게다가 문병량 사장이 군산에서 이리로 터전을 옮겨 소주업에 진출한 지 불과 1년만인 1964년 6월 청주를 본업으로 하던 대한양조 강정준 사장이 '백화'상표를 내걸고 소주시장에 뛰어들었다. 문병량 사장으로서는 지역 시장을 방어하는 한편 시장 규모가 큰 서울 무대로 진출, 판로를 확대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보배가 서울로 진출하던 1965년 7월 당시 충무로는 서울의 중심가였다. 동국대학교 옆에 소주 하치장과 서울사무소를 개설한 보배는 소주업계 공룡기업 진로와 전남의 삼학, 보해, 전북의 백화 등 쟁쟁한 소주 메이커들과 경쟁했다. 당시 진로는 '야야야 차차차'CM송으로 소주시장을 급속히 장악해 가고 있었고, 보배의 존재는 너무 미약했다. 하지만 문병량 사장은 1903년생으로 1924년부터 양조장을 경영해 온 대선배 장학엽 회장을 각별히 존경하며 따랐고, 그로부터 사업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환갑을 훌쩍 넘긴 장 사장은 이제 막 소주공장 하나를 설립해 서울에 진출하겠다고 좌충우돌하는 젊은 사업가 문병량이 한편으로는 가소롭고, 또 한편으로는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병량 사장은 장학엽 회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를 통해 보배의 미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 진로 장학엽 회장의 영향 1960년대에 서민들 사이에서 닭곰탕집이 유행했는데, 닭곰탕을 안주삼아 소주 소비도 많았다. 서울 충무로, 무교동 등 시내 곳곳 대부분의 술집에서는 진로소주가 대세였고, 진로의 CM송 '야야야 차차차'는 애주가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문병량 사장은 보배소주도 광고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시 전차 내에 광고를 하고, 라디오 CM송을 제작해 방송광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1968년 6월에는 CM송 '보배로구나'를 선보였는데, 송해 씨가 부른 이 CM송은 국민들 사이에 유행가 노래처럼 친근하게 파고들어갔다. 시나브로 보배소주의 존재 가치가 애주가들 가슴에 자리잡아 갔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보배로구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보배로구나 보배로구나/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마시는 기분 취하는 기분/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아무리 마셔도 뒤탈없는 보배/ 쿨쿨쿨 쿨쿨쿨 마셔보는 보배/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보배소주는 1966년 6월 전국 소주 인기투표에서 최우수상인 재무장관상을 수상하고, 이어 8월에는 전국주류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인 국세청장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품질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 보배주정 설립으로 수직계열화 보배소주가 안정적으로 팔려나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문병량은 사업 확장을 구상한다. 그가 생각한 사업확장은 수직계열화였다. 사실 희석식 소주는 주정공장으로부터 공급받는 주정에 물을 일정비율 섞어 만드는 제품이다. 어찌보면 주정과 물, 그리고 첨가물을 잘 배합한 뒤 병입해 판매하면 그만이다. 핵심 원료인 주정의 품질을 제어할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주 제조업체가 양질의 소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좋은 주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제 아무리 큰 소주공장 사장도 주정공장에서 넘겨주는 주정을 그대로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좋은 주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일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소주공장이 제아무리 맛좋고 독특한 소주를 만들고 싶어도 주정공장이 양질의 주정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셈이다. 양질의 주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소주의 품질과 생산효율, 이윤을 높이는 데 직결되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었다. 문병량 사장은 1967년 6월 주정 생산업체인 보배주정공업사를 별도로 설립, 수직계열화 구상을 곧바로 실행했다. 창업 4년만이다. 그러나 주정공장은 소주공장과 달리 설비가 중공업 수준이고, 따라서 초기 투자금이 많이 들어간다. 게다가 문병량 사장이 보배주정을 설립할 무렵은 주정공장이 급증했다. 1966년 한햇동안에 무려 9개의 주정공장이 신규 설립됐고, 보배주정이 설립된 1967년 무렵에는 30개에 달했다. 이처럼 주정공장이 급증한 것은 양곡부족에 처한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사용하는 증류식소주 면허를 제한하고, 주정을 원료로 사용하는 희석식 소주 제조 체제로 전환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당국이 주정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증류식 소주공장에 주정제조면허의 길을 터주면서 많은 소주공장이 주정공장으로 전환한 것. 이 때문에 주정 원료로 사용하는 고구마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결국 원료가 부족하니 주정공장 가동률이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 부도의 아픔을 딛고 군산의 대한주조가 청주와 소주공장에 공급할 주정공장 백화산업을 설립했지만, 고구마가 없어 수입 당밀 등으로 근근이 주정을 생산하다가 급기야 1967년 5월에는 생산을 일시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같은 주변 악조건 속에서 보배주정을 출범시킨 문병량 사장은 결국 자금난에 봉착했고, 부도를 내고 만다. 갑작스럽게 부도를 낸 문병량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34세의 젊은 사장은 그동안 닦은 신뢰를 바탕으로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곧바로 회생한다. 주정공장 설립 문제로 한동안 홍역을 앓고 일어선 문병량 사장은 1969년 5월 익산시 마동(현재의 보배 자리)으로 소주공장을 확장 이전하는데, 문병량의 보배가 완전한 기틀을 잡아가는 신호탄이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08 23:02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