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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3) (주)전북고속②일제강점기

(주)전북고속(사장 황의종)이 오늘 창립 90주년을 맞았다. 1920년 1월15일 당시 전주 재력가 최종렬최승렬 형제가 전주읍 상생정 57번지 1에 '전북자동차상회' 간판을 내걸고 여객운송사업을 시작한 지 90년이 넘었다. 당시 차량은 5대였고, 목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버스 노선은 전주이리, 전주남원 2개였고, 1일 운행횟수 7회에 운행거리는 963.6㎞였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2010년 4월1일 현재 전북고속은 최신형 디젤엔진을 장착한 버스 298대(전북고속 247대, 전주고속 51대)를 보유하고, 도내 전역은 물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청주, 창원, 춘천 등 전국 각 시도에 걸쳐 총234개 노선(면허노선 22만 6892㎞)를 운행하는 매머드급 여객운송기업으로 우뚝섰다. ▲ 쌀 2857가마 가격으로 일본인 회사 인수 도내에서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첫 한국인 자동차회사인 '전북자동차상회'가 1920년 영업에 들어갔지만, 전북지역에는 이미 6년전인 1914년 일본인 야마모토가 세운 야마모토자동차부라는 운송회사를 세우고 영업에 들어갔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영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12년 무렵으로 보인다. 1912년 4월께 일본인 곤도오가 포드T형 1대를 들여와 총독부에 자동차운송사업을 신청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곤도오는 총독부가 사업 허가를 하지 않자 이후 전남 광양만 염전에서 염전공용으로 들여온 자동차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편법 운송사업을 했다. 한 사람당 10리에 20전을 받았다. 버스 사업 첫 기록은 1912년 8월 대구에서 일본인 오오츠까 낀지로오가 '대구경주포항'을 부정기적으로 운행한 것이다. 1914년 전주에서도 버스영업이 이어졌고, 1915년에는 충남 갑부 이종덕씨와 김갑순씨 등이 천안예산, 공주조치원 노선을 허가받아 영업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버스운송사업이 잘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운송사업에 손을 대는 지주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버스운송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최종렬최승렬 형제가 야마모토 자동차부의 자동차 5대와 영업노선 2개를 인수하면서 지불한 돈은 2만원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 가격이 7원 정도였으니, 무려 쌀 2857가마 가격이었다. 최씨 형제가 자동차상회를 설립한 다음해인 1921년에는 군산의 재력가 마학진씨가 자본금 10만원으로 군산자동차부를 창립했다. 마씨는 전주군산 노선을 허가받아 최씨 형제와 경쟁했다. 이에 전북자동차상회는 물러서지 않고 일본 대판에서 생산하는 최신형 버스를 도입, 서비스 차별화에 나섰다. 당시 중고차로 영업에 나섰던 마씨는 경영난에 빠졌고, 전주사람 김진기씨에게 영업권을 넘겼다. 그러나 김진기씨의 군산자동차부는 얼마가지 않아 전북자동차상회에 양도됐다. ▲ 일제 쌀 수탈위해 닦아놓은 신작로 달려 전북자동차상회가 첫 운행노선으로 선정한 전주이리, 전주남원 노선은 당시 일제가 쌀을 수탈하기 위해 닦아놓은 신작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북자동차상회의 노선은 이후 전주이리군산까지 확장되고, 이어 전주정읍, 전주김제부안까지 확대됐다. 이 가운데 전주군산간 소위 전군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2차선 도로이다. 일제가 추진한 전국 주요도로 개수 7개년 사업의 제1기 사업으로 건설된 것. 1907년 5월 1일 시작돼 1908년 10월 완공된 전군도로는 노폭 7m, 길이 46.4㎞로 건설됐고, 자갈 포장 도로였다. 군산옥구 지역에서는 전군도로가 대야의 지맥(地脈)을 끊는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공사는 강행돼 대야의 주산(主山) 백마산이 두동강났다. 주민들에 따르면 백마의 목에 해당하는 자리가 잘렸다고 한다. 어쨋든 목탄차들이 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간 전군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버스에는 사람, 화물차에는 주로 쌀이 실렸다. 그러면 우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던 전주 사람이 교통 신제품인 버스를 타고 군산에 가려면 찻삯으로 얼마나 냈을까. 기록에 의하면 초기 버스 운임은 전주이리 2원, 전주남원 4원80전이었다. 거리상 전주군산 운임은 4원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면 4원 80전은 얼마의 가치를 가졌을까.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67원 정도였다고 하니, 서민 대중이 버스를 타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다. ▲ 최승렬 사장, 조선자동차협회 연합회 부회장에 192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버스회사가 앞다퉈 설립됐다. 전북의 최종렬최승렬 사장을 비롯, 강원의 최준집 사장, 함경남도의 방의석방예석 사장, 충남의 김갑순 사장 등은 운수업계의 거물이었다. 실제로 1930년 6월1일 창립된 조선자동차협회 연합회에서 최승렬 사장은 초대회장 요시다(일본인)에 이어 부회장에 선임될 만큼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업계가 순항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정의 횡포와 경제적 변동 등이 커지면서 군소업체들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회사에 인수합병되는 등 이합집산이 잦았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3년 9월7일 조선 자동차교통사업령과 시행규칙을 발표하고 경찰이 취급하던 운수업 면허를 총독부 철도국 육운계에서도 취급하는 등 자동차 통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전북자동차상회는 도내 3개 회사를 흡수하고, 상호도 공화자동차주식회사로 변경했다. 또 일본인 자본이 대거 침투하면서 최승렬 사장도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33년 무렵 전국 버스운송업자는 216명이었고, 운행되는 자동차도 360여대였다. 그러나 1940년에는 7326대로 20배 가량 증가했다. 버스 1156대, 화물차 3639대, 승용차 1311대, 기타 1220대로 화물차가 절반 가량 차지한 것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이처럼 성장 일로에 있던 운수업계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위축된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31일 육운통제령을 통해 경유 통제를 강화했고, 운수업체들은 자동차 운행을 줄여야 했다. 경유차 운행이 어렵게 되자 목탄차가 다시 등장하고, 아세틸렌차까지 나왔다. 급기야 1943년 6월1일부터는 버스노선마저 대폭 축소돼 자동차운송사업자들은 고사 직전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이어 1944년 3월25일 조선자동차운송사업령을 발표하고 '1도 1사'를 명령했다. 자동차운송사업을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것. 이 조치에 따라 도내 운송업계도 공화자동차(주)를 중심으로 15개 회사가 통합했으며, 상호는 '전북여객자동차주식회사'였다. 초대사장은 최승렬 사장이 맡았고, 병설사업으로 택시사업도 했다. 당시 전북여객은 시외버스 98대, 택시 20대 등 모두 118대의 차량을 등록했다. 주행거리는 월 17만 5333㎞, 일 5844㎞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 세계2차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전북여객은 해방 조국에서 경영 안정을 이루고, 전국 최고 여객운송기업으로 성장해 나간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4.0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2)전북고속①

2010년 2월말 현재 도내에는 68만 7,364대의 자동차가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 전체 등록자동차 1,732만5,210대의 4%정도이다. 이 가운데 승용차는 48만 899대이고, 승합차는 4만 312대, 화물차는 16만 4,133대, 특수차는 2,02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수입차도 불티나게 팔리면서 도내 수입차 등록대수도 7,066대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내 인구가 180만명선인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도내 대부분 가정에서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부 가정은 2-3대까지 운행하고 있으니 현대사회는 가히 자동차 천국이요, 자동차는 모든 사람들의 발이 됐다. 전라북도 자동차 역사는 (주)전북고속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는 4월1일 창립 90주년을 맞는 전북고속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6.25전쟁 속에서, IMF 외환위기 속에서, 승용차의 폭발적 증가 속에서 언제나 모든 대중의 발이 돼 왔다. 지난 1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전북도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전북고속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 자동차, 세상을 바꾸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발명, 기술적 진보 등을 거치며 완성된 자동차는 우마차에 의존하던 인간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빠른 속도와 엄청난 운송 물량은 자동차 산업 자체를 뛰어넘어 모든 산업부문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며 세상을 변화시켰다. 자동차(自動車Automobile)는 자체 엔진을 통해 생산한 동력을 이용해 바퀴를 움직이는 물체로서 도로 위에서 승객과 화물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이다. 엔진이 탑재된 최초의 자동차는 1769년 프랑스 공병장교였던 니콜라 조제프 퀴뇨가 선보인 2기통 3륜 증기자동차로 기록돼 있다. 그동안 영국, 미국, 독일 등에서 자동차 제작과 발명이 시도됐고, 세계 최초의 휘발유 내연기관 자동차는 독일의 칼 벤츠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이 자동차는 1886년 특허 취득에 이어 1888년 생산 판매됐다. 3륜의 이 자동차는 무게 250㎏, 200 rpm에서 0.85마력의 동력을 내는 1기통 4엔진을 탑재했으며, 시속 16㎞의 속도로 달렸다. 1893년 이후 미국에서는 듀리에 모터 웨건, 포드 등이 잇따라 설립돼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자동차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큰 기술적 진전을 이뤘고,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을 갖춘 차종이 생산됐다. 특히 포드사는 1920년대 이후 포도모델 A, 포드 모델 T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세계적 자동차 기업으로 부상했다. 현대식 자동차의 대부분 기술은 1930년대까지 발명됐고, 고급화돼 갔다. 미국영국독일 등이 주도하던 자동차시장에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를 거치며 축적한 기술을 토대로 세계 시장에 진입했다. 우리나라는 현대자동차가 1970년대 이후 일으킨 '포니 신화'를 디딤돌 삼아 1990대 이후 세계 주요 자동차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현대차는 1974년 말 국산 첫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를 내놓았다.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의 엔진을 탑재한 포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현대차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낸 최초의 국산 자동차였다. 이에따라 우리나라는 세계 16번째, 아시아 2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첫해에 1만 726대가 판매됐고, 국내 승용차 시장점유율은 43.5%에 달했다. 포니는 1976년 7월 국산차 최초로 에콰도르에 수출되는 기록까지 세웠다. 1985년까지 총 29만 4000여 대가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포니는 1982년부터 생산된 '포니2'로 이어졌고, 포니2는 1990년 1월까지 35만 9000여 대가 팔린 장수모델로 기록됐다. ▲ 고종 전용어차 포드 A형 리무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자동차는 대한제국 황실이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맞아 1903년 미국 공관을 통해 수입한 미국 포드사의 '포드 A형 리무진'으로 기록돼 있다. 칭경식(고종 즉위 40주년 행사)의 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고종은 칭경식 당일 이 자동차를 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어 1908년에 2대의 자동차가 추가 수입됐다. 한 대는 고종황제용 영국제 검정색 다임러 리무진, 다른 한 대는 순종황제용 프랑스제 빨강색 르노 리무진이었다. 1910년에 수입된 캐딜락은 순종황후가 탔다고 전해진다. 1911년에는 일제의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찌가 고종 환심용으로 자동차를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에서는 서양 외교관이나 기술자, 선교사들이 갖고 온 자동차가 일찌감치 들어와 운행됐을 것으로 보인다.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버튼 홈즈 교수(사진학)가 한강을 구경하러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소달구지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는 등 이야기가 있는 것. 일반인들이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01913년 쯤으로 추정된다. ▲ 버스 요금이 쌀 한 가마니값 1911년 경남 진주에 살던 일본인 에가와라는 사람이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간을 운행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영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버스는 저녁이 되면 천막지붕과 가스등을 설치하고 운행했다. 버스요금은 1인당 마산진주 3원 80전, 진주삼천포 1원 30전이었다. 마산진주간 3원 80전은 쌀 한가마니 값이었다. 서울에서는 1913년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 씨와 일본인 곤도, 그리고 상인 오리이 등 3명이 합자, 자본금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우고 '포드 T형' 승용차 2대를 도입해 시간제 임대 영업을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 택시의 시초가 됐다. 1910년대 말, 이북지방에서는 방의석방예석 형제가 8인승 포드차를 도입해 '함흥흥남'구간에서 독점 영업을 했다. 1915년 3월에는 충남 갑부 이종덕박갑순씨 등이 천안예산, 공주조치원 노선을 허가받아 운송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조선인 최초의 운송사업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운송사업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영위했지만, 이 무렵부터 내국인들도 운송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최승렬 형제, 전북자동차상회 설립 전라북도에서는 일본인 아마모토 에츠조오씨가 1914년에 포드 T형 4대를 들여와'야마모토 자동차부'를 설립, 전주이리, 전주남원간 노선 허가를 받아 영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자동차 사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지 회사를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고, 전주 갑부 최종렬최승렬 형제가 인수했다. 1920년 1월 무렵일이었다. 90년 전통의 전북고속 역사가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 때는 나막신과 당혜, 짚신을 신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다양한 외국 문물과 함께 들어온 고무신의 매력에 빠져있던 때이다. 고무신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던 때 선보인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가하였다. 1920년 당시 버스 요금이 1인당 24원 정도(쌀 한가마 값은 67원 정도)로 비쌌지만,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자동차운송사업은 가장 매력적인 사업 중 하나가 됐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3.2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1)경성고무공업사④

경성고무 창업주 이만수 사장의 넷째 아들 이용일 사장은 1957년 3월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하며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이만수 사장은 5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각각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일했고, 셋째는 경찰(경감)이었다. 그런데 1957년 셋째가 미국 경찰제도 시찰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이만수 사장은 넷째아들 이용일을 경성고무 후계자로 지목한다. 이용일 사장은 서울 경동중을 거쳐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인물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 군에 입대해 6년간 근무하고 1956년 3월 제1군사령부에서 육군소령으로 예편했다. 체격이 크고 활달한 성격의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에 입사한 후 열심히 일했지만, 몸집이 불어나는 것이 항상 거슬렸다. 경동중 시절부터 야구선수였던 이 사장은 기업 경영활동을 하느라 운동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 사장은 어린 시절에 국가대표 야구선수를 지낸 매부 유복린으로부터 야구 영향을 받아 경동중 시절 야구부를 만들만큼 야구에 빠졌다. 서울상대 야구부 시절인 1950년 6월 그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학도호국단체육대회에 서울대 야구 대표선수로 참가했다. 그의 포지션은 1루수였다. 6월25일 연세대와 준결승전을 앞두고 터진 6.25전쟁 때문에 승부는 가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육군소위에 임관돼 입대했지만, 군에서도 육군야구단 소속으로 꾸준히 야구를 계속했다. ▲ 군산에 야구의 씨를 뿌리다 이용일 사장은 "너무 살이 쪄 전무로 취임한지 6개월만인 그해 9월부터 야구 동호인을 모집해 군산중고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동호인 가운데서 발굴한 군산중 출신 김금현은 1963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김응룡 등과 함께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한 주역이 됐습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울은 일반인들이 학교 방과후 운동장 사용문제 때문에 싸울 정도로 야구, 축구 등 운동 열기가 후끈한데 반해, 군산은 학교마다 운동장이 텅텅 비어있었다. 그는 "당시 군산에 깡패가 많았는데, 학생들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운동부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군산에 야구를 육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꿈나무를 육성해 중고교 야구부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식의 야구단 육성 계획이었다. 그는 군산 4개 초등학교 교장을 설득했고, 그 결과 1962년 2월에 군산국민학교와 중앙남금광국민학교 등 4개 학교에 야구부가 창단됐다. 이들 4개 야구단은 봄가을 리그전을 펼치며 실력을 향상시켜갔고, 1964년 졸업생부터 군산중에 입학했다. 이어 1967년 봄에는 군산중 야구부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군산고 야구부 창단 시도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 사장은 군산중 출신 졸업생 8명을 데리고 상경, 4명은 동대문상고에, 그리고 3명은 휘문고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그는 고교 야구단 창단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군산남중과 군산상고 야구부를 만들어냈다. 이용일 사장은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가 만들어지자 1년 전에 서울로 갔던 군산중 출신 2명이 내려왔고, 군산남중에는 전주북중 2학년이었던 김봉연(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정읍중 노석현 등이 제발로 찾아오면서 김일권, 송상복 등 제법 굵직한 선수들이 포진, 군산상고 등 군산 야구의 앞날을 밝게 했다"고 회고했다.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군산상고 야구부는 창단 5년만인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역전우승, 한국 야구사에 화려하게 등장하며 고교 야구의 전국시대를 열었다. 호남 연고 학생 야구팀이 정상에 오른 것은 광주서중이 1949년 제4회 청룡기대회였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4대 대회에서 한차례도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972년 7월19일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2만2000여명의 관중이 몰려든 가운데 전통의 야구명문 부산고와 신예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피말리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군산상고에는 1970년 청룡기대회와 71년 대통령기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주역들이 포진해 있었다. 스마일피처 송상복이 마운드를 지키고, 김일권과 김봉연, 김준환, 양기탁 등 불방만이 타선이 늘어서 있었다. 군산상고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1회말 먼저 1점 선취점을 뽑았다. 그러나 3회초 동점을 허용한 뒤 팽팽하게 맞서나갔지만, 8회 초 6안타를 얻어맞으며 대거 3실점을 했다. 1대 4로 뒤진 운명의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선 6번 김우근이 안타를 만들어냈고, 부산고 마운드가 흔들리면서 1사 만루 찬스가 됐다. 1번 김일권의 몸에 맞는 공으로 2-4가 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양기탁 선수가 깨끗한 중전안타를 쳤다. 두 명의 주자가 들어오면서 4-4 동점이 되며 야구장은 물론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리고 김준환의 천금같은 끝내기 좌전안타가 터졌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우승을 이끈 감독은 최관수. 이용일 사장은 "최 감독은 참 보기드문 참스승이었고, 그가 있었기에 군산상고의 신화도 가능했다"고 회고했다. 이 사장은 "당시 야구부는 만들었지만, 좋은 감독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마침 1960년대 실업야구 최고의 투수 최관수(기업은행)가 1970년 3월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 당장 영입에 나섰습니다." 최관수는 인천 동산고 출신으로 1961 제13회 쌍룡기 결승전에서 부산상고를 노히트 노런으로 잠재운 야구천재였다. 이용일 사장은 마침 서울대 상대 선배인 정우창(전주 출신) 기업은행장을 찾아가 간청했고, 최관수는 1970년 7월 기업은행 군산지점으로 발령나 군산상고와 인연을 맺었다. ▲ 프로야구를 태동시키다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를 경영하며 군산 야구를 지원하고, 특히 군산상고 야구부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과 취업 등 진로까지 책임졌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감독들이 제일은행, 상업은행, 농협 등에 포진해 있었고, 국방부 정훈장교로 근무할 때 상관이었던 이선근 동국대 총장 등의 도움이 컸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 대어급 선수들과 함께 실력이 조금 뒤지는 선수들까지 취업 및 진학을 배려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80년을 전후해 이용일 사장은 경성고무가 너무 노동집약적인 업종이라고 판단, 마침 종합무역상사를 출범시키고 수출업종 다각화를 꾀하던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작업을 진행시킨다. 또 박정희 대통령 서거, 전두환 대통령 취임, 민주화운동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됐다. 이 때 5공화국 정권이 내세운 스포츠 정책의 중심에 있었던 프로야구 출범은 이용일 사장에게 인생의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야구계의 마당발 이용일 사장은 5공 정권이 프로야구단 출범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청와대와 문공부를 오가며 계획을 진행시켰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이 된 그는 서종철 초대 총재와 함께 프로야구의 기반을 다지고, 또 키웠다. 이용일 사장은 "1989년 제8구단 창단을 진행시키던 당시 급박했던 상황들이 기억에 남는다"며 "해태의 반발 속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팀을 호남에 유치해도 좋다고 밝히고, 쌍방울과 미원이 공동출자하는 등 조건하에서 제8구단 쌍방울야구단 창단이 급속히 진행됐다"고 회고했다. 이용일 사장은 1990년 12월,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9년동안 정들었던 KBO사무총장을 사퇴하고, 그 이듬해 쌍방울 구단주 대행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98년 쌍방울구단을 사임했다. 기업인으로서, 또 야구인으로서 일생을 풍미한 이용일 사장은 "내 나이 올해 80입니다. 돌이켜보면 멋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3.1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0)이용일 전 사장이 전하는 경성고무공업사③

우리나라 고무신 브랜드의 역사는 1922년 대륙고무공업사의 대장군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해서 1932년 경성고무공업사의 만월표 고무신, 1948년 국제화학의 왕자표 고무신으로 이어졌다. 고무신산업이 전성기를 이룬 1960년대 고무신 톱브랜드는 경성고무의 만월표, 국제화학의 왕자표, 동양고무의 기차표, 태화고무의 말표, 삼화고무의 범표, 진양고무의 진양 등이었다. 이들 브랜드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신발 자체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획기적 신제품이었던 고무신의 위상은 공장 증가세에서 확인된다. 1921년 당시 불과 4개였던 우리나라 고무신공장은 1933년까지 10여년간 무려 20배에 달하는 72개로 급증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물자 통제를 하는 바람에 문닫는 공장도 많았지만, 1945년 해방 후에는 다시 늘어나 1949년 무렵 부산지역 등록 신발공장 수가 71개에 달했다. 그러나 군산지역의 경우 초창기부터 경성고무가 있었을 뿐이다. 부산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국내 최대의 신발산업지대로 급성장했다. 이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을 통해 신발 관련 자재와 기술이 비교적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후에는 일본의 신발 기술과 생산설비 이전 속도가 빨라졌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치른 일본에서 노동집약산업인 고무신공장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일본신발업계는 한일국교정상화 물결을 타고 부산을 신발전략기지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1967년 태화고무가 일본 월성고무와 기술제휴했고, 이듬해에는 삼화고무가 일본고무와 기술제휴했다. 이처럼 부산지역 신발공장이 가까운 일본의 선진 신발산업의 영향을 받아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발전하면서 군산 경성고무공업사는 상대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고무신산업의 대표주자였던 경성고무였지만, 신발산업의 중심이 부산으로 대거 이동했고, 엄청난 경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와관련 1957년 경성고무 전무로 입사한 후 1964년 사장으로 취임한 이용일 전 사장은 1960년대 당시 국내 신발산업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다. "1960년대 초 혁명 무렵만 해도 공장 운영이 괞찮았다. 그러나 부산지역의 국제, 태화 등 신발 대기업은 물론 군소업체가 많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내수에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결국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선을 물색하고, 다각적인 수익원을 찾아야 했다." ◆ 부산 신발기업들과 경쟁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신발기술은 포화와 케미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생활수준이 나아지자 신발 주력 제품도 고무신에서 운동화 쪽으로 급속히 기울어갔다. 노동집약성이 강한 운동화 생산이 1970년대 우리나라 신발산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접착제 사용에 따른 공정 혁신도 크게 작용했다. 1970년대 들어 접착제가 신발 공정에 적용되면서 갑피소재가 훨씬 다양하게 채택됐고, 멋있는 제품 생산이 가능해진 것. 1960년대 당시 신발용 갑피소재는 PVC합성피혁이었다. 색깔도 다양하고, 변형도 자유로운 재료였다. 하지만 열에 약해 포화스타일을 만드는 가황공정에서 200℃ 이상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변형이 일어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접착제는 포화를 100℃ 이하 상태에서 아웃솔과 접착시킬 수 있었다. 군산의 경성고무는 급변하는 신발제조 기술, 설비를 도입하고 경영 혁신을 꾀하며 외롭게 부산지역의 쟁쟁한 신발업체들과 경쟁하며 1970년대를 보냈다. 60년대 들어 내수 경쟁이 치열해지자, 경성고무는 신발 수출에 나섰다. 1968년 11월30일 제5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이용일 사장은 석탑훈장을 수상했고, 1975년에는 수출 120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등 외화획득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1970년대 초에는 고무신과 스포츠화 등 신발 외에 폴리우레탄, 스폰지 등도 생산했는데, 다행히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스폰지는 당시 방한용 옷에 모두 들어갈 정도로 꼭 필요한 겨울의류용 재료였기 때문에 의류생산업자들은 경성고무가 생산하는 스폰지를 인수하기 위해 여름부터 공을 들여야 했다. 스폰지 물량 확보에 나선 상인들이 몇천만원의 선금을 주면서 대기할 정도였다. ◆ 선경에 매각된 후 1985년 문 닫아 노동집약적인 신발공장이 많아지면서 경쟁이 심화하고, 인건비까지 크게 오르면서 경성고무는 바이어가 원하는 신발가격을 제시하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용일 전 사장은 "1970년대 당시 주요 신발기업은 동양고무, 경성고무, 태화고무, 국제상사 등이었다. 노동력이 많이 투입되는 신발산업은 값싼 임금으로 버틸 수 있지만, 갈수록 여건이 좋지 않았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우리나라 신발산업은 급격히 퇴조했다.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압력이 커졌고, 비싸진 임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부산지역 유수의 신발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중국베트남 등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대거 빠져나갔다. 이에앞서 1970년대 후반, 이용일 사장은 신발산업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신발공장 경영에서 손을 떼고자 했다. 노동집약성이 강해 인건비 부담이 큰 공장 특성상 공장 난립으로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기업의 부가가치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정부는 기업의 수출을 독려하며 종합무역상사 정책을 폈는데 많은 대기업들이 종합무역상사를 설립해 해외 수출에 나섰다. 선경그룹도 정부의 수출주도정책 하에서 1976년 종합상사인 (주)선경을 설립한 뒤 경성고무 등 중소기업을 인수, 수출종합상사의 위상을 갖췄다. 정부는 종합상사의 자격유지 조건으로 일정수준의 수출실적과 함께 일정의 품목별국가별, 또는 지역별 수출실적을 요구했기 때문에 종합상사들은 가능한 많은 수출 품목과 물량을 확보해야 했다. 자연히 다양한 중소기업을 인수하거나 설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용일 사장은 1979년 선경그룹과 합자 경영에 들어가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선경에 완전 매각했다. 이와관련 이용일 전 사장은 "선친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죄송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선경은 경성고무를 인수한 후 1985년까지 경영하고 문을 닫았다. 결국 경성고무공업사 창업 53년만에 군산에서 사라졌다. 군산시 장재동 1만여평의 부지에 자리잡았던 경성고무 신발공장은 얼마 후 철거됐고, 그 자리에는 한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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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3.1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9)이용일 전 사장이 전하는 경성고무공업사②

일본 고무신공장은 1886년에 처음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무신공장은 고베지방에 많이 설립됐는데, 고베 상인들이 1916년 고무신을 우리나라에 첫 수출했다. 그동안 당혜(唐鞋), 나막신, 짚신을 신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빗물이 새지 않는 고무신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모았다. 우리나라에 고무공장이 들어선 것은 1919년으로 전해진다. 또 우리나라 첫 고무신은 조선 말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이 서울 청파동에 세운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 1922년 8월5일 생산한 '대장군표' 고무신이다. 순종 임금은 이 '대장군표' 고무신을 처음 신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기록됐다. 대륙고무공업사 설립을 전후해 서울 중림동에 반도고무공업소, 평양에 정창고무공장이 잇따라 설립됐다. 1921년 4개에 불과했던 고무공장은 1933년에 무려 72개로 늘어났으니, 가히 우후죽순격이었다. 이만수 사장이 군산에서 고무신 소매점을 개업한 1924년 무렵, 군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무신공장이 있었다. 군산에 고무신공장 진출이 빨랐던 것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 고베지방과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고베의 고무공업이 군산으로 이전,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공업의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신발 원료인 천연고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변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황공정(생고무에 황과 열을 가해 경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경화시킨 후 고무신을 만들어야 했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천연고무 가황작업을 멀리 경성까지 운반해 하는 것보다 군산항에서 물건을 하역한 뒤 곧바로 작업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 일본인 고무신 공장을 인수하다 이만수 사장은 처음 소매로 시작했던 고무신 사업을 착실히 성장시켜 도매업까지 손을 댔다. 고무신은 인기가 높은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장사가 잘됐다. 그는 성실 근면 정직했고, 밤 잠을 자지않고 일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사회 활동도 활발했다. 군산상공회의소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주로 미곡상들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다양한 직종의 기업인들이 참여하는데, 세대 교체의 성격도 띄었다. 이런 가운데 1930년 군산상공회의소 선거에서 이만수 사장은 상의원에 선출됐다. 한국인으로서 군산상의 첫 상의원이었다. 이어 1930년대 말에는 부회두(부회장)에 선출됐다. 이는 이만수 사장이 군산 상공업계에서 큰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 어느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군산에는 고베에서 온 사업가가 세운 고무신공장이 있었는데, 이 공장이 매물로 시장에 나온 것이다. 이만수 사장은 일본인 사장이 공장을 내놓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 1932년 11월13일 (합)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이 당시 군산의 공업은 일제 독점자본으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공장이 일본인 소유였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 군산시 장재동에 자리잡은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이 100여명이었다.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서울 이남지역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 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 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기술을 적용해 흰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 경성고무공업사는 해방 직전까지 이 4가지 제품을 생산, 전국에 공급했다. 1일 생산량은 일제시대 당시 500족 정도에 불과했지만, 해방 후 60년대 들어서는 3만족에 달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 하늘색 등 색고무신을 출시했고, 꽃무늬 고무신과 농구화, 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3000여명 직원이 하루 3만 족 생산 고무신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1957년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 부친 이만수 사장으로 부터 경영수업에 들어간 이용일 사장(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에 따르면 고무신은 생고무와 화공약품을 혼합해 만든 고무판을 미리 제작한 신발 모양 금형에 넣고 증기 철가마 안에서 2000℃에 달하는 고온으로 찌는 공정을 통해 생산됐다. 즉, 생고무에 황 등 여러가지 화공약품을 혼합해 열을 가하는 가황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원료를 잘 섞은 다음 롤러를 통해 고무판(Rubber Seat)과 밑창(아웃솔Outsole)을 제작했다. 고무신 몸체와 밑창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에 고무 재질이 달랐다. 이어 몸통용 고무판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에 맞춰 사전에 제작한 수십가지 금형(Mold)에 넣어 제품 형을 만든 다음 별도로 제작한 밑창과 붙여 제품의 원형을 완성했다. 이것은 증기철가마에서 고온으로 쪄내는 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접착, 고무신 완제품을 생산했다. 밑창(구두창아웃솔)은 고무신은 물론 운동화(Canvas Shoes) 제품 제작에 사용되는 부품이다. 천(Canvas)이 재료인 운동화 윗부분(Upper)은 재단 후 미싱 과정을 거쳐 만들었고, 이 어퍼(Upper)에 운동화 밑창인 아웃솔을 붙여 운동화 원형을 만든 다음 역시 고무신 처럼 증기가마에 넣고 고온에서 쪄 완제품을 생산했다. 이 당시에는 증기가마에서 고온으로 찌는 과정을 거쳐 아웃솔과 몸체 접착을 완성했지만, 후에 접착제가 개발된 후에는 이 과정이 훨씬 쉽고, 또 다양한 재질의 신발 생산이 가능해졌다. 또 고무판 생산도 후에 믹서기가 도입되면서 한결 손쉬워졌다. 고무신 공장은 초창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작 공정 특성상 노동집약적이다. 실제로 전성기 때 하루 3만 족 이상을 생산한 경성고무의 경우 직원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00여명이 여성이었다고 이용일 사장은 회고했다. 고무판을 생산하는 롤러부를 비롯해 남자들이 근무하는 부서는 주야간으로 계속 일해야 밀려드는 일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근로자들은 낮에만 근무했다. ▲ 1960년대 이후 부산업체와 경쟁 치열 창업주 이만수 사장이 1964년 별세한 후 경성고무 경영을 맡게 된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공장의 모든 작업공정이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저도 항상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일했습니다. 중간관리자들이 잘해 준 덕분에 공장도 잘 돌아갔죠" 운동화를 만들면서부터는 경성고무공업사 공장 한켠에 방직공장도 뒀다. 실을 사다가 방직공장에서 운동화용 천(캔버스)를 직접 만들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 등을 이용해 운동화 어퍼(Upper)를 제작했다. 또 롤러 등 고무신 생산라인의 기계가 고장날 경우 공장내 기술자들이 필요 부품을 제작하는 등 직접 수리에 나섰기 때문에 공장 내에 철공소도 운영했다. 즉,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 미싱부, 철공소까지 둔 셈이다. 게다가 신발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금형(Mold)도 수십종류에 달했다. 금형은 신발공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가를 두고 금형을 떴다.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의 품질은 10여가지에 달하는 화학약품을 배합하는 기술에 있었다"며 "1960년 혁명기 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60년대들어서면서 부산쪽 신발공장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6.25전쟁 이후 부산지역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제시대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군산 경성고무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경성고무는 고무신 외에도 폴리우레탄과 스폰지를 생산하며 고무신 쪽 경영난을 타개했다. 방한용 의류 안감용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의류업자들이 스폰지를 확보하기 위해 몇 천만 원씩 선불을 주고 공장 인근에서 대기할 정도여서 경영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대부분의 방한의류에 스폰지가 들어가야 소비자들이 눈길을 주었으니, 의류업자들은 스폰지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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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3.0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8)이용일 사장이 전하는 경성고무공업사①

고무신을 신고/ 달리기를 하였더니/고무신이 헐떡헐떡거리며/달려왔다// 고무신을 신고/ 비 오는 날 걸었더니/쫄쫄내린 비가/고무신에 괴어/찔국찔국 넘어 나왔다// 고무신을 신고/ 웅덩이를 지나다가/ 물방개를 보고/ 얼른 떠 담았더니/ 작아진 웅덩이 안에서/ 한 바퀴 두 바퀴/ 맴만 돈다 <이창규 '고무신을 신고'> 아마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무신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전주에 사는 김숙자씨(55)는 "국민학교 때 엄마가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 주셨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가슴에 안고 등교했다. 동네에서 학교 앞까지 흐르는 작은 수로가 있었는데, 고무신을 배로 띄우고 정신없이 가다보니 그만 학교에 지각하고 말았다"며 웃었다. 기자도 비가 많이 와 질퍽거리는 길을 가다가 고무신에 진흙과 물이 함께 들어와 자꾸 미끄러지는 고무신을 아예 벗어 손에 쥐고 학교를 오가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개구장이들은 고무신을 접어 자동차 삼아 놀았고, 고무신을 거꾸로 쥐고 코스모스 꽃에 앉아 있는 벌을 잡거나, 싸우다가 밀리면 신고있던 고무신을 꼬나들고 휘둘렀다.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사라져간 고무신. 그 고무신 공장이 도내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아는 도민은 드물지 않을까. 경성고무는 군산에 있던, 당시로서는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경성고무의 존재는 군산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고, 군산 시민들 사이에서도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40대 이상 군산시민들에게 그 기억이 아련히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이라면 흔하게 나오는 사사(社史) 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경성고무는 역사 속에서 조차 그 존재를 찾기 힘든 고무신공장이다. 본보는 경성고무공업사를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경영하던 중 노동집약적인 신발업종 특성 때문에 경영권을 선경그룹에 넘기고 군산의 야구사,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 큰 획을 남긴 이용일 전 경성고무 사장(전 KBO사무총장)을 인터뷰, 경성고무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 경성에서 온 이만수 군산 경성고무공업사를 키운 이만수 사장은 경성 사람이었다. 1891년생인 그는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사업을 하며 재력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3남1녀 중 둘째 아들인 그는 전망있는 사업을 구상하던 중 마침 한일합방 전에 옥구군에서 관료로 일하던 이모부(이모)와의 인연을 계기로 군산으로 내려간다. 그가 경성에서 군산에 내려온 것은 1924년이었다. 33세의 이만수는 당시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1924년 당시 군산은 일제의 식량과 원료 공급기지로서 한창 번창 일로에 있는 신도시였다. 일본인들은 군산에 부두를 만들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대거 수집해 오사카로 날랐다. 일제가 군산을 쌀 수탈 창구로 선택한 이유는 '군산항 축항 완성 이전에 3000톤급 기선이 완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기 군산에서 쌀을 싣고 오사카로 간 화물선은 빈 배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사카와 고베는 당시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활발하게 가동되던 곳으로, 미쓰비시 등 일본의 주요기업 가운데 오사카 출신들이 세운 기업이 많다. 일본 기업인들은 군산으로 돌아가는 빈 배에 주목했다. 오사카 고베지역 기업인들은 군산에서 쌀을 싣고 온 뒤 돌아가는 빈 화물선에 조선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각종 상품을 선적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선진 문물이 뒤떨어져 있었고, 일찌감치 문호를 개방해 선진 문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화 한 조선에 자국 상품을 마음껏 팔아 이익을 챙겼다. 예를들어 일본인들은 조선에 방직공장을 세우지 않고 버텼다. 1913년 일본인이 조면기 32대를 설치하고 운영한 조선면화 이리공장은 익산지역 유일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면화농장과 조면공장을 운영하면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방직공장은 선뜻 세우지 않았다. 조선에서 조면한 물량을 일본으로 가져간 뒤 방직공장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만들어 조선에 역수출, 큰 이익을 챙기는 수법이었다. 빈 배에 화물을 실으면 정상 운임의 2030% 가격만 지불하면 됐기 때문에 군산항은 일본 상품이 들어오는 주요항구로 자리매김했다. 이 때문에 군산항은 갈수록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발전했다. 일본 상인들이 대거 몰리고, 군산항을 통해 오가는 화물량과 비례해 자금이 돌면서 은행 등 금융기관도 잇따라 들어섰다. 군산지역은 정미소와 주조장, 금융기관, 유곽 등이 많이 들어선다. 1920년대 이후 군산시내 주요 풍경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유곽과 요정은 이 지역 경제를 가늠하게 하는 것 중 하나로 꼽혔다. 당시 군산에는 5층짜리 유곽이 많았고, 일본 요정은 3층에 주로 자리잡았다. 군산에 일본 기업인, 상인들이 차고 넘치면서 군산시내 풍경은 일본화돼 갔다. ▲ 1932년 경성고무공업사 설립 비록 일제 강점하에 있었지만 군산은 번창하는 도시였고, 경성에서 내려온 이만수는 고무신 소매상점 문을 열었다. 성실 근면하고 정직한 성품의 이만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았다. 예나 지금이나 신발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생활필수 소모품이다. 이만수는 이같은 점을 주목하고 당장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꾸준히 장사를 하며 '저축하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만수는 주변 사람들이 "왜 다른 많은 사업 가운데 고무신 소매업을 시작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고무신은 썩지 않고, 아이들이 먹어 없애지도 않으니 판매가 조금 늦는다고 해도 크게 손해볼 일이 없지 않느냐"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고무신 사업은 요즘으로 말하면 휴대폰 사업과 엇비슷했다.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은 비오는 날에도 빗물이 들어오지 않는 고무신에 열광했다. 집전화만 사용하다 휴대폰에 열광하던 현대인들과 1920년대 조선인은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고무신은 각자 한켤레씩 가져야 하고, 수명이 영구적이지 않아 몇개월 또는 1-2년 정도면 새 신발을 사야 한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최신제품인 고무신을 신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고, 한 번 산 신발도 얼마 가지 않아 잃어버리거나 찢어지거나 닳아 구멍이 나면 재구매 해야 했다. 처음 고무신 소매업을 하던 이만수는 점차 사업 규모를 확장해 도매업을 영위했다. 근면 성실했던 이만수는 적정 자본이 마련되자 더 큰 사업을 구상했다. 고무신공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만수는 1932년 11월 13일 일본인이 운영하던 신발공장을 매수, 합자회사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군산에서 조선인이 조선 자본으로 설립한 첫 기업이었다. 또 만월표 고무신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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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2.2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7)백화양조 ④두산 거쳐 롯데주류BG

청주시장을 제패하고, 소주에 이어 양주시장까지 사업 규모를 확대하며 종합주류 메이커로 성장한 백화양조는 소주와 양주 사업 부문에서 패착에 빠지고, 경영권까지 흔들리면서 1985년 말 결국 두산그룹에 경영권을 넘기고 만다. 또 두산은 24년만인 지난 2009년 3월부로 주류사업부를 롯데주류BG에 양도했다. 65년 역사의 백화양조는 이제 롯데주류BG 군산공장으로서 고급청주 설화 등 청주와 소주(처음처럼) 명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위스키 시장 진출 과정과 실적 1975년 12월31일 시판을 개시한 죠지 드레이크(원액함량 19.9%)가 국내 양주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엄청나게 팔려나가자 백화양조는 위스키 제조공장을 이전 설립하기 위해 1976년 10월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에 60만평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어 12월에는 1980년말까지 몰트 위스키 국산화 시설을 완비하는 조건으로 위스키 제조면허를 받았다. 그러나 백화양조는 죠지 드레이크가 원액함량 19.9%로서 주세법상 '기타 재제주'에 속함에도 불구, 원액함량 20% 이상인 '위스키'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돼 결국 1977년 4월 탈세혐의로 수사를 받는 등 어려움에 처한다. 당시 기타 재제주의 세율은 100%인 반면 위스키는 200%에 달했다. 조사 결과 탈세는 무혐의 판정을 받았지만, 법인세 6000만원을 추징당했다. 또 죠지 드레이크라는 상표 사용은 물론 위스키 표시도 할 수 없어 죠지 드레이크 생산을 중단했다. 큰 타격이었다. 이 사건 후 국세청은 1977년 7월까지 원액함량 25% 이상인 위스키를 개발해 시판토록 조치했고, 주류업계는 주세법 제5조에 의거해 위스키 제조장을 별도로 세워야 했다. 백화양조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중기 계획으로 세웠던 위스키 고창 공장 설립을 포기하고, 1977년 6월23일 군산세무서로부터 위스키 면허를 재발급 받은 후 군산시 월명동 군산 북중학교 자리에 위스키 공장을 세웠다. 백화양조의 새 위스키는 원액함량 25% 알콜도수 43도였고 원액은 노드런 맥콜사에서 공급받았다. 당시 국세청 방침은 위스키 상표명이 순수한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것. 사내 공모 끝에 '베리에이틴'을 선정해 신고했으나 국세청은 순수 우리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베리나인'이다. '베리'는 순 우리말 벼루의 사투리로서 '낭떠러지 아래가 강이나 바다로 통한 위태한 벼랑'이라는 뜻. 공교롭게 벼랑계곡을 뜻하는 영어 'Valley'와 음과 뜻이 일치한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뜻한다.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 대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위스키를 만들어 왕과 같은 고객에게 바치겠다"는 해석을 붙여 가까스로 국세청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또 과거 공전의 히트를 친 죠지 드레이크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죠지 드레이크 병을 사용하고, 상표 디자인도 그에 따랐다. 이 때 경쟁사들도 새 위스키를 내놓았는데, 진로는 '길벗' 해태주조는 '드슈'였다. 우리나라 주세법상 최초의 위스키 베리나인은 1977년 7월23일 첫 생산됐고, 대대적인 TV광고를 업고 7월25일부터 본격 시판됐다. 백화양조는 77년 하반기와 78년 상반기에 걸쳐 모두 5만 2856상자의 위스키를 출고, 51.6%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진로 39.3%, 해태주조 9.1%였다. 그러나 새로운 위스키 시장을 놓고 엄청난 판촉활동과 광고전을 벌이면서 위스키 사업분야는 적자를 면치못했다. 하지만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게 압도당한 경쟁사들이 만회를 위해 고급 신제품을 출시할 것으로 판단, 고급 신제품 '베리나인 골드'를 개발했다. 베리나인 골드는 '주령 12년의 정상급 위스키 베리나인 골드'를 헤드라인으로 내건 광고를 앞세워 1978년 7월26일 시판에 들어갔다. 진로가 프리미엄급 위스키 '길벗 로얄'을 개발해 대항했지만, 1979년 1년간 베리나인 골드는 프리미엄급 위스키 부문에서 28만 2500상자를 출고, 시장 점유율 68.5%를 기록하는 등 시장 점유율을 더욱 확대했다. 하지만 1980년을 전후해 대통령 시해사건과 제2차 유류파동이 터지면서 국내 위스키를 비롯 맥주와 청주 시장은 침체됐고, 반면에 소주 소비량이 급신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 동양맥주가 미국 씨그램사와 합작, 오비씨그램을 설립한 후 1981년 8월 내놓은 위스키 '블랙스톤'이 점유율을 올려나가면서 백화도 타격을 받았다. 1983년 백화양조의 위스키 점유율은 50.2%로 내려앉았고, 진로 26.2%, 오비씨그램 23.6%였다. ▲ 위스키 생산 전문기업 설립과 실패 백화양조, 진로, 오비씨그램 등 위스키 3사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적자경영을 해야 했다. 다른 주류사업 부문에서 얻은 흑자로 위스키 부문 적자를 상계, 회사 전체의 이익을 줄였기 때문에 결국 법인세 납부액이 감소했다. 이는 다른 주류 가격 인상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에 정부는 1981년 12월, 세수확보와 대중주 가격 인상 방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위스키와 타주류를 함께 생산하는 기업에 대해 1982년 6월말까지(추후 12월말까지 연장) 위스키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이 당시 백화양조는 주력인 청주의 소비 감소와 건설 등 신규사업 실패 등으로 심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위스키 단독법인을 설립할 경우 존속시킬 능력이 크게 부족했다. 하지만 그동안 다져온 베리나인 골드 시장을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스키 전문기업 '베리나인'의 설립등기를 1982년 12월 10일 마쳤다. 자본금 5억 6000만원 가운데 5억원을 백화양조가 출자했다. 초대 임원은 회장 강정준, 사장 이건중, 부사장 강희중 등 이었다. 베리나인 위스키 공장은 백화양조로 부터 현물출자 받은 대명동 소주공장 자리에 세워졌다. 블렌딩실, 병입시설 등을 갖추고 1983년 11월 9일 첫 제품이 나왔다. 새 공장은 생산능력 1000㎘의 몰트위스키 제조시설과 연간 50만 상자의 병입시설 외에는 투자를 극소화한 시설이었다. 베리나인은 제1기(6개월)에 순매출 38억 7000만원, 순이익 2억원을 올렸다. 또 다음해인 1984회계연도에는 순매출 93억 3000만원, 순이익 2억 8500만원을 달성했다. 이 때 광고선전비가 무려 18억 3000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프리미엄급 위스키 베리나인 골드로 큰 성장을 이어가던 베리나인은 1984년 특급위스키 시장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며 1985년도 회계연도에 매출액이 72억 5700만원으로 떨어졌고, 무려 9억 4600만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정부의 특급위스키 생산정책에 따라 1984년 6월 내놓은 '베리나인 킹'이 오비씨그램의 '패스포트'와 진로의 '비 아이 피'에 밀린 것. 특급 위스키 시판 전 70일이었던 매출채권 회수기일이 베리나인 킹 시판 5개월 후인 1984년 11월에 100일을 넘어섰고, 1984년 6월 130억원이었던 차입금이 1985년 6월에는 209억원으로 늘어나는 등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됐다. 베리나인은 킹의 대체품으로 신상품을 계획, 1986년 7월28일 신제품 썸씽 스페셜을 첫 출하했다. 1912년 스코틀랜드의 힐 톰슨사가 발매한 프리미엄급 위스키로서 맛이 매우 부드러워 한국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출하 초기 6개월동안 9만 2000상자가 판매돼 특급위스키시장 점유율 16.7%를 기록했다. 베리나인은 1987년 위스키 총판매량을 50만 상자로 끌어올리며 15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백화양조가 경영권을 두산에 이양한 후의 일이었다. ▲ 소주사업 포기와 원료용 주정배정권 매각 백화양조는 초기 청주 전문 생산기업으로 출발, 소주와 주정 생산에 뛰어들어 백화소주와 백화산업을 계열사로 이끌었다. 또 술 지게미(주박)을 이용한 식초 생산기업인 화영식품을 인천시 북구 작전동에 설립했고, 태양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종합주류 메이커로 성장하기 위해 위스키 사업도 펼쳤다. 또 이 과정에서 백화양조는 김제 포도주 농장, 고창 위스키공장 부지, 경기도 용인 부지 등 많은 부동산도 보유했다. 백화양조는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할 만큼 청주 부문에서는 거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화영식품도 창업 초기 어려움을 딛고 흑자를 내는 기업이었고, 위스키 부문도 베리나인 골드라는 명품을 내세워 기반을 탄탄히 했다. 하지만 1979년 무렵 내린 '소주사업 포기' 결정은 백화양조의 경영상 큰 오점으로 지적된다. 당시 백화양조 등 소주업체들은 경영상 어려움이 있었다. 정부가 1976년 11월 '도내에서 50% 이상을 의무 판매'하도록 조치, 백화양조의 경우 이리의 보배양조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정부의 주조 시설 개선책에 의거, 55만달러를 투자한 것도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소주는 출고량 비율로 원료 주정을 배정받기 때문에 주정 배정량 확보를 위한 밀어내기 출고에 따른 출혈도 심했다. 결국 백화양조는 전체적인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소주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정, 1980년 1월 소주 원료용 주정배정권을 진로와 무학, 보배, 보해 등에 12억 8530만원을 받고 매각했다. 하지만 이 무렵 제2유류파동 등 불황으로 고가의 위스키와 청주 판매는 줄어들고, 저가의 소주 판매가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소주 시장은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갔으니, 백화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두산주류BG시절 옛 백화소주의 명성을 살리기 위한 계획이 추진됐고, 1999년 4월 '백화소주 20'이란 이름으로 20년만에 부활했다. 이후 2003년 산소주, 2006년 2월 처음처럼(19.5도)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백화양조는 두산을 거쳐 롯데 일가가 되면서 안정적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비록 경영권이 변하고, 시대가 변했지만 '백화수복'의 명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2.1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경영권 변화 과정과 지역에 미친 영향

백화양조는 1973년 11월 액면가 1000원의 신주 22만 2000주를 공모, 12월 주식을 상장했다. 이 때 미원그룹은 법인세법의 소유 한도 비율 규정에 따라 백화양조의 주식을 매입, 1976년에는 21.88%의 지분을 소유해 27.95%의 백화양조와 함께 대주주가 됐다. 이를 계기로 미원은 백화양조 경영에 참여하게 되는데, 조직의 단합은 물론 경영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화양조는 1985년 5월께 경영권 이양을 추진한다. 곧바로 미원그룹, 진로그룹과 매각 문제를 협의하던 백화양조는 1985년 6월께 두산그룹에 인수 의사를 타진한다. 두산그룹은 8월에 그룹 기획실에 백화양조 인수 프로젝트팀을 구성해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백화양조 매각이 결정될 무렵인 1985년 11월1일은 백화양조 창립 제40주년 기념일이었다. 임직원들은 제2도약을 다짐했다. 기업 매각설이 파다하게 나돌자 백화측은 사실무근이라고 증권거래소에 공시까지 했다. 12월17일에는 연말 상여금 100%를 지급했다. 하지만 1985년 12월21일 두산그룹 인수 실무팀이 군산에 도착, 백화양조 경영권은 두산으로 넘어갔다. 백화양조를 인수한 두산은 범그룹적으로 청주 소비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1986년 6월 신제품 청하(淸河)를 출시, 사계절 마실 수 있는 전천후 청주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7년 매출 543억원에 3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낸 백화양조는 군산임해공업단지에 2만5400여평의 부지를 매입, 1990년 6월 청주공장을 현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 그러나 지난해 두산그룹이 두산주류BG 부문을 롯데그룹측에 넘기면서 도민들의 추억이 깃든 백화양조는 2009년 3월3일'롯데주류BG 군산공장'으로 새출발했다. 롯데주류BG 사업장은 군산공장과 강릉공장(처음처럼, 산소주), 경산공장(마주앙, 설중매)이다. 롯데주류BG군산공장(공장장 강춘식)의 주생산품은 주정을 비롯해서 청주(백화수복, 청하, 한큰술), 양생주, 위스키, 복분자, 오디주, 처음처럼이며, 모두 10개 주류 제조 면허를 보유하고 있다. 롯데주류(대표 김영규)는 지난해 젊은 세대를 겨냥, 16.8도의 저도주 '처음처럼 쿨'을 출시했으며, 월평균 134만 상자를 출고했다. 또 1999년부터 군산지역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수익금 일부를 군산교육발전진흥재단에 장학금으로 기탁(총 1억 2525만원)하는 등 지역민과 함께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2.1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⑥백화양조-(3)종합 주류 메이커로 도약하다

1960년대 들어 식량난, 주세법 개정,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 제한조치 등 어려운 경영환경 속에서도 대한양조는 월등한 품질을 앞세워 특급청주 시장을 휩쓸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양곡을 원료로 하는 청주 제조에 대한 정부의 제동이 심했고, 합성청주 생산을 통해 특급청주 감산 부문의 경영상 리스크를 보완해야 했다. 정부는 식량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양곡으로 술을 제조하는 방식에 부정적이었고, 그래서 쌀과 밀, 보리, 옥수수 등 곡류로 제조하는 청주와 증류식 소주에 대해 고율의 세율을 적용했다. 예를 들어 1961년 1월 개정된 주세법에 따르면 증류식 소주는 희석식 소주보다 세율이 3.6배 높았다. 정부는 식량난도 완화하고, 세금도 많이 거둬들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한편 법을 개정해 주정을 원료로 사용하는 합성청주와 희석식 소주 생산 쪽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가운데 1963년 8월 양곡을 원료로 하는 청주 생산 중단 조치가 내려졌다. 이 때 대한양조는 희석식 소주 생산에 눈길을 돌렸다. 당시 희석식 소주 신규 제조면허는 취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64년 3월 김제군 김제읍 신풍리에 대지 465평을 매입, 희석식 소주 제조장을 갖춘 다음 김제군 백구면 월봉리 소재 부용양조장의 희석식 소주 제조 면허를 양수했다. ▲ 희석식 소주시장 진출 대한양조가 '백화소주'상표를 내걸고 희석식 소주를 생산한 것은 1964년 6월25일이었고, 원료인 주정은 군산의 한국주정(주) 등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주정 면허의 길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정부는 1964년 12월8일 공시한 양곡 소비 절약 지침을 통해 고구마를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제조업자에게 주정면허를 부여했다. 또 이들이 희망하면 희석식 소주로 제조 종목을 바꿀 수 있도록 했고,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정 및 증류식 소주 제조를 일체 금했다. 이 조치로 인해 희석식 소주의 판매가 급상승, 1965년 10만 2343ℓ, 1966년 12만 5736ℓ를 출고해 655만 5817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또 김제 소주공장을 확장하고, 전주에 출장소를 개설했다. 대한양조는 또 희석식 소주와 합성청주 생산에 들어가는 '주정'을 직접 생산,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1966년 11월1일 자본금 4000만원을 투입해 주정 생산 법인 '백화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군산시 경암동의 대지 1600평과 건물 287평을 매입한 후 먼저 증류식 소주 제조 면허를 취득했다. 이어 가동 몇개월 후 증류식 소주 면허는 반납하고 주정 제조 면허를 취득하는 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희석식 소주 쪽으로 기운 정부정책에 따라 주정공장 설립이 잇따르면서 시설 과다현상이 나타났다. 1966년에만 9개가 설립되는 등 전국 주정공장이 25개에 달했고, 원료인 고구마의 절대량이 부족해지면서 주정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는 문제도 나타났다. 대한양조는 소주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1967년 김제공장을 백화산업 설립 당시 매입한 백화산업 옆 군산시 대명동 5400평(후에 베리나인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 당시 대한양조는 상호(대한양조)와 상표(백화) 통합을 추진, 소비자들에게 브랜드 이미지가 좋은 '백화'의 공신력을 높이 평가해 1967년 4월19일 상호를 백화양조주식회사로 변경했다. ▲ 상표상호 백화로 통일 백화소주는 공장을 군산으로 이전, 계열사인 백화산업과 상호초자에서 각각 주정과 공병을 손쉽게 수급할 수 있었다. 판매도 급증했다. 군산으로 공장을 이전한 1967년 백화소주는 김제공장 시절의 15.5배에 달하는 1940㎘를 출고했다. 이어 1968년 2045㎘, 1969년 3820㎘, 1970년 5868㎘, 1971년 8014㎘ 등 급신장세를 보였다. 1971년 무렵 소주 생산 선두업체는 진로주조(점유율 21.8%)였고, 이어 삼학산업, 광림주조, 금복주, 무학주조, 대선주조, 삼학양조, 백화양조(4.3%) 등 8개사가 전체 소주 생산량의 65.7%를 점유했다. 당시 소주업체는 무려 254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1970년 11월부터 소주 품질 향상과 세원 확보 용이 목적으로 업체 통폐합에 나서면서 2년 후 68개업체로 줄었다. 이 때 백화양조도 1973년 8월부터 전남 강진읍의 은하소주공사, 광주 삼천리주조장, 경남 진주소주 등의 주정 배정권을 흡수하고, 포항과 춘천, 청주, 여수, 제천, 인천, 목포, 진주, 홍성에 9개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 해 전국 판매망이 17개 출장소로 늘었다. 주정 배정권과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대량생산을 위한 자동화 설비도 서둘렀다. 1974년 4월에는 전자동 병 세척기, 전자동 타전기, 병 검사기, 상표 부착기 등을 설치했다. 이로써 백화소주는 연산 5만㎘ 소주 생산 능력을 갖췄고, 시장점유율도 9.9%로 치솟아 소주업계 2위가 됐다. 백화소주가 주정 배정권을 늘리는 것과 때를 같이 해 백화산업도 부실 주정공장 2개를 인수, 1일 주정생산 능력을 170드럼으로 확대했다. 이는 국내 14개 주정공장 중 4위였다. 전주의 서호주정은 152드럼, 이리의 보배는 100드럼 규모였다. 한편 백화양조는 1971년 1만3167㎘의 청주를 출고, 우리나라 청주 출고량의 63%를 차지했다. 전국 21개 청주 업체 중 명실공히 선두자리를 확고히 굳힌 것. 백화 뒤를 이어 삼학산업(2468㎘), 보해양조(1069㎘), 매화양조(758㎘), 삼학양조(602㎘), 백광양조(430㎘)를 출고했지만, 이들 5개 업체 총 출고량은 백화의 39%에 불과했다. ▲ 최초 국산양주 죠지 드레이크 인기 폭발 1970년대 정부는 주류 수입에 따른 외화낭비를 줄이기 위해 과실주 개발과 브랜디 위스키류의 국산화 정책을 펼쳤다. 또 우리 토산물인 인삼을 이용한 차와 치약, 담배 등 인삼제품의 개발 및 수출을 유도했다. 백화양조는 이같은 정부시책에 호응, 1972년 기타 재제주인 인삼주와 포도주 공장을 병설해 사업을 개시했다. 원액 20%에 주정 등을 가미한 제품이었다. 정부는 1972년 백화양조와 진로주조를 인삼주 수출업체로 지정했고, 백화양조는 그해 11월부터 인삼주와 포도주를 생산했다. 1973 회계연도(1972.10.11973.9.30)에는 인삼주 0.7ℓ짜리 12만 4445병, 0.18ℓ들이 2만 6120병 등 총 9만 1813ℓ를 출고, 이의 48.7%인 4만 4726ℓ를 수출했다. 포도주는 총 5만474ℓ를 출고해 15.2%인 7680ℓ를 수출했다. '백화 고려 인삼주'의 첫 수출국은 홍콩이었다. 이어 1973년에는 위스키와 브랜디 원액을 혼합한 인삼주 개발을 추진, 정부로부터 수출 조건부로 브랜디 및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았고, 이어 '진셍 브랜디'와'진셍 위스키'를 생산해 수출했다. 1974년 회계연도에 60만 6000달러 어치를 미국에 수출했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실적이었다. 그러나 동남아 시장에서는 인기를 끌어고, 인삼이 영약이라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독일프랑스 등 세계 22개국으로 수출됐다. 이 과정에서 백화양조는 국민소득 증가로 음주 기호가 고급화되는 추세를 반영, 양주 시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진셍 브랜디와 진셍 위스키의 국내 시판 허가를 받아 1974년 9월부터 판매에 들어가는 한편 새로운 국산 양주 개발에 주력했다. 백화양조의 첫 양주는 1975년 12월 31일부터 시판된 국내 최초 국산 양주 '죠지 드레이크'였다. 원액 함량 19.9%이 기타 재제주인 죠지 드레이크는 인삼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양주 스타일 위스키였으며, 처음부터 폭발적 인기 속에서 판매됐다. 베리나인 골드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2.0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⑤백화양조-(2)백화수복의 탄생

1950년 6월에 터진 6.25전쟁은 조선양조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기계가 파손되는 등 피해가 없지 않았지만 9.28 수복 후 강정준 사장은 전열을 정비, 청주 생산을 재개했다. 한 때 중공군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지만 충주 부근에서 격퇴됐기 때문에 군산의 조선양조는 안정적으로 청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주류 회사들은 전화를 입고 술을 생산하지 못했다. 이 때 조선양조의 청주 '조화'는 목포를 비롯해 장항, 대구, 부산, 대전 등 타지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공병이 모자라 술을 담을 수 있으면 아무 용기에나 담아 팔았다. 술을 사려면 현금과 함께 용기가 있어야 가능했다. 실제로 1947년 168석(1석=180ℓ)이었던 청주 생산량은 1951년 698석, 1952년 1516석으로 급신장했다. 강정준 사장은 날로 늘어나는 판매량에 대비, 공장 창립 당시 300400석 규모이던 생산저장시설을 늘렸다. 배합저장용탱크를 143개에서 155개로 늘렸고, 쌀을 찌는 대형 가마솥도 3개에서 6개로 확충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당국이 '한강 이남 지역 관리업체 민간인 불하 공포'를 하자 조선주조 연고권을 갖고 있는 강정준 사장은 곧바로 불하 신청, 회사를 불하받았다. 또 1952년 2월 상호를 대한양조(주)로 변경했다. 청주 상표도 변경했다. 그동안 논산의 조선주조와 함께 사용하던 '조화'를 1952년말까지만 사용하고, 1953년부터는 새로운 상표'백화(白花)'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주 시장에서 '조화'인지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백화 상표 아래 '구 조화'를 새겨넣는 등 백화 브랜드 관리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는 양질의 청주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식량난과 물가 폭등 등 경제난이 계속되자 정부는 1953년 2월14일 화폐개혁을 단행(100대 1 평가 절하)하고, '원'을 '환'으로 변경했다. 이같은 경제상황에 대응, 대한양조는 쌀을 주원료로 하는 청주보다 합성청주를 더 많이 생산했다. 대한양조는 1953년 회계연도에 청주 1급 289석, 합성청주 1급 66석, 합성청주 2급 1314석을 생산 판매했다. 1952년 합성청주 2급은 77석 생산에 불과했다. 합성청주 상표는 '군화'였으며 1급은 노란색, 2급은 남색으로 구분했다. 이처럼 쌀을 주원료로 하는 청주 생산이 힘들어지자 대한양조는 이 때 증류식 소주(1954년 생산 중단), 주정에 향료 및 기타 물료 등을 희석한 모조 위스키와 브랜디(1956년 생산 중단) 등을 생산하기도 했다. ▲ 품질 또 품질, 백화 시대가 열리다 강정준 사장은 6.25전쟁 동안 조선주조 불하, 상호(대한양조) 및 상표(백화) 변경 등을 통해 기업 기반은 물론 경쟁력을 완전히 갖췄다. 특히 이 기간동안 전국 청주시장에서 제품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성과를 거뒀다. 대한양조가 청주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기반은 '주질본위'의 경영방침이었다. 청주 품질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 노력한 결과, 1950년 5월8일 제1회 전국주류품평회 최우등상, 1953년 6월 광주 주류업조합 품평회 우등상, 10월 제2회 전국박람회 장려상, 1954년 전국 국산품 선전 박람회 우등상, 국산품 부흥 선전 박람회 재무부장관상 수상, 제3회 전국 국산품 박람회 최우등상, 1955년 10월 제2회 주류품평회 최우등상 등 각종 상을 휩쓸며 고품질 청주 '백화'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처럼 '백화'의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향상되면서 조해주조의 '조해'와 조화주조의 '조화'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서울과 충청지방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이에 1957년 10월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 첫 서울출장소 문을 열고, 서울 시장 공략에 본격 나섰다. 백화 청주 주문이 잇따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1957년 10월 제1회 전국 산업기술전람회에서 재무부장관상, 같은 해 12월 제1회 전국 양조식품 전시회 특선, 1959년 제3회 주류품평회 최고 우등상 등 각종 수상이 잇따랐다. 특히 백화 청주는 주류품평회 13회 대회를 연달아 석권, 백화 청주의 높은 품질을 인정받았다.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판매량도 크게 늘어났다. 1960 회계연도에 1만745석을 판매, 사상 처음으로 1만석을 돌파했다. 이는 전국 청주생산량 10만 9644석의 9.8%였다. 총매출액은 7억5000만환, 주세는 2억4471만 5000환, 당기순이익은 1849만 6000환이었다. ▲ 특급청주 수복 쌀로 빚어내는 청주는 품격 높은 고급 양조주로서 사랑받았지만 해방 후 이어진 식량난과 쌀값 폭등, 높은 주세 등 생산 환경은 크게 열악했다. 막걸리는 28℃ 이상 고온에서 발효시키지만, 청주는 16℃ 이하 저온에서 발효시켜야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여름에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현대식 생산설비를 갖춘 롯데주류BG 군산공장의 경우 중앙제어조정실에서 발효탱크의 온도변화를 자동으로 제어하며 연중 생산하고 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투자재원 확보를 위한 조세정책을 폈다. 그 결과 1962년 1월1일 주세를 대폭 인상, 청주 업계가 큰 타격을 받았다. 특급청주의 세금은 석당 3600원에서 1만800원으로 200% 인상됐고, 1급청주는 2100원에서 3200원으로 53%, 합성청주는 1250원에서 2650원으로 112% 올랐다. 세금 폭탄으로 주류 소비가 감소하고, 세수 전망도 흐리다고 판단한 정부는 결국 1962년 8월19일 특급청주와 탁주맥주의 세율을 20%씩 인하했고, 이에따라 특급청주 주세는 8640원으로 떨어졌다. 또 그해 11월28일 주세법을 개정, 특급청주와 1급청주 주세를 8540원으로 단일화 했다. 정부는 식량난이 더 극심하자 1963년 7월18일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의 제조 제한조치까지 내렸다. 이로 인해 청주는 그해 10월까지 제조가 금지됐다. 이에대해 대한양조는 1.8ℓ짜리 10병들이 상자당 출고가를 1800원에서 2300원으로 인상하는 한편 쌀을 원료로 하지 않는 합성청주(청주 원료를 조금만 넣거나, 주정만으로 만든 청주) 생산에 주력, 매출 공백을 메웠다. 1만석을 넘던 출고량이 1962회계연도에 4748석(특급청주 95석, 1급청주 4653석)에 그쳐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합성청주를 많이 판매한 1963회계연도(특급 246석, 1급 1383석, 합성 4366석)에는 546만 1486원의 흑자를 냈다. 이처럼 싼 합성청주가 대거 출고되면서 상대적으로 희귀해진 특급청주의 인기가 높아졌다. 시중에는 특급청주 품귀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한양조는 1963년 10월 특급청주의 명칭을 '수복(壽福)'으로 변경, 차별화를 꾀했다. 수복이란 '오래 살면서 길이 복을 누리라'는 뜻. 백화수복은 포근한 정취를 풍기며 소비자들에게 쉽게 다가서 큰 인기를 얻었다. 대한양조는 1964 회계연도에 166㎘, 1965 회계연도에 483㎘가 판매된 수복에 힘입어 큰 성장을 이뤘고, 백화수복은 청주의 대명사로 자리잡아 갔다. 일부 요정과 음식점에서 다른 청주를 백화수복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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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1.2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④백화양조-(1)백화에서 롯데까지

군산시 소룡동 군산산업단지 내 12만6530㎡(3만8275평)의 광활한 부지에 자리잡은 (주)롯데주류BG 군산공장(공장장 강춘식)은 청주와 소주, 인삼주, 와인, 위스키 등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주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정부의 주류정책, 서민들의 애환, 주류업계의 전쟁, 수출, 사업가의 고충과 기업(가)의 부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광복 후 고 강정준 회장이 설립, 65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백화양조는 두산주류BG를 거쳐 롯데주류BG로 거듭나는 등 경영권에서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하지만 백화양조가 국민 가슴에 깊숙히 새겨넣은 청주의 대명사 백화수복 브랜드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2009년 3월3일자로 롯데주류가 인수한 군산공장은 연간 8만㎘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백화수복과 청하 등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청주에서부터 고급청주 설화에 이르기까지, 마시기 편하고 품질좋은 청주를 생산하는 전통기업으로 여전히 각인돼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주 '처음처럼' 생산량은 지난 12월 한달동안 4500만병에 달했다. 지난해 월평균 생산량은 4020만병이었다. 가정용과 유흥주점용 등을 모두 합했을 때 처음처럼의 마켓쉐어는 485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주류는 사업을 인수한 후 16.8도의 저도주'처음처럼 Cool'을 출시,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주는 바뀌었지만, 군산에서 생산되는 청주 수복과 설화은 물론 소주 시장에서도 '처음처럼'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 일본으로 건너가 '정종'된 전래의 술 '청주' 지난 15일 방문한 (주)롯데주류BG(Business Group사업부) 군산공장.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 관리팀 유진후 팀장의 안내를 받아 공장 견학에 나섰다. 하루에 860가마(80㎏들이)의 현미를 3차에 걸쳐 가공하는 대규모 도정공장을 출발해 홍보관과 세미, 증미, 발효, 압착, 저장에 이르는 일련의 청주 제조 공정 등을 살펴보는 견학은 1시간이 넘는 코스다. 청주(淸酒)는 쌀로 빚는 양조주다. 말 그대로 맑은 술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다보니, 청주는 일본식 표현인 '정종'으로 불리고, 일본 전통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청주는 우리 전래의 술로서, 일본에 건너간 술이다.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응신 천왕 때(AD 270312년) 백제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으로 건너 와 청주 제조 기법을 전수하였다"라는 기록이 그 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집에서 청주, 약주, 막걸리 등을 빚어 마셨다. 하지만 술빚는 일이 양조업으로서 기업화된 것은 대부분의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1900년 이후 일이다. 1909년 주세법이 공포됐고, 각 지방마다 주조장이 세워져 규모화 된 생산이 이뤄졌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 일제의 쌀 침탈 창구가 되면서 군산은 정미업과 양조업이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군산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개항 당시부터 군산에 세워진 주요 회사 및 공장은 1899년 상야주조장, 암본주조장, 1908년 적송장유 주조장, 1909년 향원주조장, 1920년 군산주조(주), 1927년 조선주조(주) 등 양조기업이 많았다. 이들 양조장은 모두 일본인 소유였다. 청주 공장 설립은 타지역에 비해 늦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주 공장은 1883년 1월 부산에 세워졌고, 이후 인천과 부평, 서울, 마산에도 들어섰다. 군산에 청주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7년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 일본인 니시하라가 충남 논산에 조선주조(주)를 세운 뒤 '조화(朝花)'상표를 단 청주를 생산했는데, 생산이 늘어나자 1917년 군산에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설립해 경성(서울) 공급 물량을 맞췄다. 당시 전국에는 120여개의 청주 제조업체가 가동됐으며, 군산의 청주공장은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비롯해 향원양조장, 상야양조장, 암본상점, 군산주조, 일본주조 등 6개였다. ▲ 청년 강정준 조선주조 군산공장 인수해 창업 백화양조 창업주는 인당(仁堂) 강정준(姜正俊) 회장(전 호원대학교 이사장2001년 4월 작고)이다. 해방 후 백화양조를 창업,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강 회장은 1915년 6월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강인지는 호조참판을 지냈고, 부친 강덕찬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넉넉한 가세를 유지했다. 강 회장은 유복한 집안 환경 속에서 자라던 중 1931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했고, 와세다대학 상과에서 기업인의 꿈을 키웠다. 강정준은 25세이던 1940년 귀국 후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에 취직, 일하던 중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인 공장장 다음 서열의 부책임자가 됐다. 해방 후 일본인 기업은 모두 미군정청에 귀속됐다. 전북지역 귀속기업은 모두 219개였으며, 군산의 기업체가 67개로 가장 많았다. 군산분공장에서 경리와 판매책임을 맡아 일했던 강정준은 미군정청의 적산기업 관리방침에 따라 책임자로 선임됐고, 공장 내부를 정리한 후 1945년 11월1일 청주 생산을 재개하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아울러 귀속기업 불하를 겨냥, 새로운 회사 설립 작업을 벌였으며 1946년 5월 '조선양조주식회사'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대표 취체역에 선임되는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46년 5월27일 설립등기 당시 자본금은 200만원이었고, 1주당 50원 모두 4만주의 주식이 발행됐다. 공장 근무자는 경리판매직 4명, 생산공원 20명에 불과했으며, 양조 기술자가 없어 상야양조장에서 일했던 장동남을 기술자로 채용했다. ▲ 난관 헤치고 첫 해 15만원 순이익 조선주조 군산공장의 모든 시설과 재산을 임대해 출발한 조선양조는 1500여 평의 공장에서 연간 300400석(1석=180ℓ)의 청주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요 시설은 가마솥 3개, 화입솥 3개, 압착기 2대, 정미기 2대, 여과기 6조, 목통 129개, 탱크 14개였다. 하지만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며 조선양조를 출범시킨 강정준 대표의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저한 저온관리가 요구되는 청주의 제조상 특성 때문에 여름철을 피해 공장을 가동해야 했다. 해방 전과 달리 현미를 구할 수 없어 밥을 지어먹는 반미를 도정해 청주원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청주 품질이 떨어졌다. 전력난 때문에 야간에는 촛불을 켜고 작업하기 일쑤였고, 물이 부족해 인근 샘물을 계약해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제1결산기인 1946회계연도(1945.11.11946.8.31)에 청주 352석을 생산판매, 194만 4930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15만 337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1946년 2월 한 가마니에 60원 하던 쌀값이 1947년에 8300원까지 치솟고, 미군정청이 식량난 해소를 이유로 1946년 11월22일 양조 금지령을 통해 쌀을 주원료로 하는 술 제조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1948회계연도에는 주정에 기타 물료를 첨가한 합성청주를 생산하는 등 악전고투했지만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조선양조는 '주질본위'의 경영방침을 고수하며 품질향상에 힘쓰는 한편 49년7월에는 자본금을 600원으로 늘렸다.이어 새로운 주세법 시행으로 양조의 쌀 사용조치가 완화되자 1950회계연도에는 청주 453석을 생산했다. 특히 1950년 5월8일 열린 제1회 전국주류품평회에서 최우등상, 전국상공장려관 개관 전시회에서 우등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청주 전국 제패의 서곡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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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1.2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③광복 후 전북의 기업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 자본과 기술이 철수하면서 국내 공업은 어려움에 빠졌다. 일제시대에 구축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경제구조로 인해 남한은 공업 수요에 대한 공급이 부족했고, 특히 군산의 경우 쌀 수출항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정체와 쇠퇴의 상황에 처했다. 국내 경제기반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철수한 뒤 기업들은 원료 구입난, 기술 부족, 판로 상실 등으로 공장 가동이 어려웠고, 상당수 공장이 문을 닫았다. 1946년 군산지역에 청구목재, 동인화학이 설립되기도 했지만 백화양조를 비롯해 경성고무, 북선제지, 문화연필, 전주방직, 전주한지 등 많은 기업들이 원료공급 부족에 시달리다 휴업하는 일이 잦아졌고, 갑작스럽게 북한과 중국 시장을 잃은 기업들은 생산품을 팔지 못해 공장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 소비재 공업이 대부분 1948년 정부 수립 후 미국의 원조가 활발, 공업활동이 회복세를 보였지만 1950년 터진 6.25전쟁은 전국의 공업시설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당시 4.4% 정도의 공장시설을 유지하고 있던 전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1952년 무렵 도내 대부분 공장시설이 복구됐고, 섬유와 직물, 기계, 제지 등 모두 402개 공장(종사자 9,538명)이 가동에 들어가 전후 수요가 급증한 공산품을 공급했다. 이처럼 공장이 활기를 띄면서 1956년 무렵에는 모두 817개(종업원 1만2000명)가 가동됐다. 하지만 대부분 공장들은 규모가 영세했고, 소비재공업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도내 기업들 가운데 철강과 비철금속, 석유화학 등 기초소재 관련기업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이같은 공업구조는 '낙후 전북'이란 오명을 오랫동안 지속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 1950년대 전북의 주요기업은 군산과 이리, 전주에 집중돼 있었다. 군산에는 고려제지(주), 풍국제지(주), 한국주정공업(주), 청구목재(주), 경성고무공업사, 한국조선회사, 한국원양제빙회사, 조선특수이기연구소 등이 있었고, 이리에는 한양직물공장, 남선고무공업(주)가 가동됐다. 전주의 경우 전주방직사, 삼성제사소, 문화연필(주) 등이 주요 기업이었다. 1960년에 발간된 전라북도 상공자료에 따르면 당시 도내 상공업단체는 전북메리야스공업협회 등 13개 협회(조합)가 있었고, 회원수는 1,114개사였다. 주요 업종은 메리야스, 직물, 성냥, 한지, 요업, 공예, 고무공업, 중소 섬유, 철공, 석기 등이었다. 이들 중 직물공업 회원수가 99개사인 것을 비롯해 한지 150개사, 공예 150개사, 중소섬유 86개사, 철공 115개사, 특산물 328개사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 80년대 주요 대기업 30여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다. 또 이 무렵 정부의 산업정책은 현재까지 전북의 상대적 낙후를 고착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84년 발간된 한국은행 자료 '국민소득계정'에 따르면 1961년 39.1%였던 농림어업 비중이 1983년 13.7%로 뚝 떨어졌다. 반면 1961년 15.5%였던 광공업 비중은 1983년 28.9%로 뛰었다. 하지만 전북의 공업은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작아졌다. 전북의 제조업 생산이 전국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62년 6%에 달했지만, 1982년에는 2.92%로 떨어졌다. 이같은 현상은 경기, 경상지역에 비해 뒤진 공업단지 조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북의 첫 공업단지인 전주공업단지는 1969년 11월에야 준공됐다. 이어 1974년 12월에 이리공단이 준공됐고, 전북의 본격적인 공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군산임해공업단지는 1979년에야 조성됐다. 전주공단과 이리공단이 섬유와 제지, 종이, 귀금속 가공 등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종으로 구성된 데 비해 군산임해공단에는 한국유리, 두산유리, 쌍용양회, 동양시멘트, 영진주철, 한전, 청구목재, 대한통운, 한국카디날장갑 등 철강, 기계, 시멘트, 유리, 화학, 목재가공 등 입주, 전북 제조업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했다. 도내 공업생산이 집중된 전주이리군산지역에 산업단지가 들어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 1980년대 전북의 주요 대기업은 33개였다. 종업원이 3003000명에 달한 대기업은 호남식품, 대한방직, 삼양사, 전주제지, 문화연필, 백양, 백화양조, 한국합판, 청구목재, 세대제지, 경성고무, 후레아훼손, 동양스와니, 쌍방울, 올림포스정밀, 두산유리, 호남잠사, 전북제사, 삼양식품, 한국카디날 등이었다. 80년대 들어 도내 제조업 구조가 식음료품(콜라, 사이다, 술 등)과 담배 등의 비중이 떨어지고, 화학, 프라스틱, 비금속 비중이 커지는 등 변화가 일면서 사업체 규모도 중기업, 대기업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 80년대 이후 80년대 이후 도내에는 동양화학(OCI), 기아특수강(세아베스틸), 대상, 한국유리,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LS전선, KCC 등 굵직한 기업들이 들어서고, 군산과 군장, 익산 국가산업단지에만 600개가 넘는 기업들이 들어서 6000억원에 달하는 생산을 하고 있다. 최근들어 세계적 기계공작 기업인 두산인프라코어와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입주했다. GM대우와 타타대우,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3사가 가동하면서 자동차기계부품산업이 함께 부상했고, 첨단 인쇄전자산업과 탄소 소재산업, 신재생에너지 관련 산업, RFT산업 등이 전북의 미래 산업으로 급부상하면서 관련 기업들이 입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정부들어 탄력을 받고 있는 새만금지역은 전북 공업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하고 있고, 90년대까지 타지역으로 빠져나갔던 섬유 관련산업도 들썩거리고 있다. 한지산업은 한류디자인과 결합, 새로운 가치 창출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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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1.1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②일제강점기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에도 자본주의가 서서히 들어왔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자본주의였다. 우리 재래식 공업은 일본의 식민지공업과 함께 발전해 왔다. 문제는 일본의 서구화된 공업생산경영과 달리 재래식공업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고, 기계시설도 갖추지 못해 여전히 수공업 상태였다는 점이다. 1910년에 들어서면서 공장제 기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체제 기초공작 때문에 미미했다. 당시 일제는 방직물을 일본에서 수입했다. 국내에는 방직공장을 세우지 않고 조면공장을 세웠다. 조면을 일본으로 수출, 자국 방직공장에서 고부가가치 방직물을 생산한 뒤 우리나라에 수출해 거대 이익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이와관련 전북대 최낙필 교수는 저서 '지방경제의 이해'에서 "일본이 1910년 회사령을 공포한 것은 일본의 국내공업과 경쟁되는 근대공업의 건설을 억제하고 경쟁되지 않는 부분의 공업 건설에 한정하여 허가한다고 하는 정책적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라며 "일본의 국내공업을 위한 식량원료를 증산시키는 방향으로 자본을 유치하려고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1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 자본은 주로 은행, 상업, 운수, 농업 부문에 주로 투입됐다. 광공업 투자는 1차대전 수요에도 불구하고 미흡했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경제기초가 구축되면서 식량과 원료 확보를 위한 근대적인 공장제 공장 건설에 나섰다. 1910년 후반부터 공장건설이 현저히 많아졌지만, 몇개의 제련소와 제철소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정미업과 섬유공업 부문의 공장들이었다. 1919년 공업 생산액은 농업 생산액의 18.2%에 불과했다. 공장의 반수 이상이 수공업적 기술에 의존한 영세공장이었고, 동력을 사용하는 공장은 10%에 불과했다. ▲ 1913년 조선면화 이리공장 가동 당시 전북의 공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899년 군산항 개항,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 등 철도 개통 등으로 사회간접시설이 갖춰졌지만, 전북의 공업은 군산과 이리, 전주를 중심으로 느리게 진행됐다. 군산의 경우 1899년 개항 후 1907년 십팔은행 군산지점 등 4개의 금융기관이 1920년까지 들어섰다. 군산항을 통한 수출입물량이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군산항을 통한 수출액의 97% 이상은 쌀이었고, 쌀과 관계 있는 정미소와 양조장이 들어섰다. 1899년 5월 우에노 주조장, 10월 이와모토 주조장, 1909년 12월 향원 주조장, 1917년 10월 하나오카 정미소, 1919년 7월 조선 정미소(주), 1920년 10월 군산주조(주) 등이며, 규모는 미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인구 4000명에 불과했던 익산시는 1912년 이후 크게 팽창, 1919년 무렵에는 인구 1만명에 달하는 소비도시로 발전했다. 1913년 일본인이 조면기 32대를 설치하고 운영한 조선면화 이리공장이 당시 이 지역의 유일한 공장이었다. 해방후 익산이 쌍방울과 태창으로 대표되는 방직공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기반인 셈이다. 일제시대 당시에도 전북지방은 공업화에서 크게 뒤져 있었다. 19101919년 당시 우리나라 제조업 성장률이 12.9%에 달했고, 1920년 무렵 우리나라 전 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7.3%였지만, 전북의 제조업 비율은 1%에도 못미쳤다. 1916년 당시 도내 전체인구의 87.7%가 농업과 축산, 임업 등에 종사했지만, 광공업 종사자는 1%에 불과할 만큼 공업화에서 뒤져 있었다. ▲ 전주 동양제사 종업원 500여명 달해 1920년대를 거쳐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농업이 62.1%로 줄어들고, 제조업이 25%로 증가했다. 연평균 성장률도 농업은 2.6%에 불과한 반면 제조업은 8.4%에 달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이 당시 전북지역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1910년대에 6개의 공장이 세워진 반면 1920년대에는 9개 공장이 설립됐다. 1920년 군산주조(주), 1923년 미호제염소, 1924년 나가타정미소, 1926년 가모석험공장마사키조선철공소, 1927년 나카오장유양조장, 1928년 오사와조선소조선주조(주)지점, 1929년 린켄냉장고 등이 세워졌다. 1910년대에 비해 업종이 다양해졌고, 이같은 과정을 거친 군산의 1930년 인구는 3만4556명에 달했다. 익산도 교통요충지로서 공장 설립이 활발했으며, 1925년 인구가 1만3403명으로 불어날 만큼 발전했다. 1927년 당시 문화상회 등 34개의 중소 공장이 있었고, 이리주조, 이리소주, 전북소주도 가동됐다. 당시 익산의 주요 공산품은 생사, 양말, 철 주물, 죽세공품 등이었다. 전주도 1925년 인구가 2만3000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전주에는 주로 잠업과 관련된 제사, 잠종, 잠구 공장이 들어섰다. 원료구입이 용이하고, 값싼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경공업이 주를 이뤄 발전한 것. 1927년 전북제사(주) 전주공장이 설립됐다. 이 공장은 공장부지 4370평, 건평 1038평, 종업원 300명에 달했다. 또 1928년 편창제사방적주식회사 전주제사소(동양제사)가 설립됐는데 공장부지가 1만2000평에 달했고, 종업원도 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설이었다. 1921년 162개였던 도내 공장수는 1930년에 195개로 33개가 증가했다. 종업원 수도 3486명에서 5266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정미업이 주종을 이뤘고, 제지업과 주류제조업, 신문 인쇄업 등이 뒤를 이었다. 정미업은 전체 생산액의 85%를 차지했고, 주류 제조업은 2%, 기타는 1% 미만일 정도였다. 일제 침략전쟁이 산업구조에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전북의 공업도 변화를 보였다. 화학공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1.2%였고, 기계기구업과 가스전기업 등이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1.0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①곡창호남의 중심 전북

<< 아쉽게도 현대적 의미의 기업이 등장한 시기는 일제시대다. 물론 일본인들이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기업을 이 땅에 설립, 운영했지만, 전북의 경우 정미업과 양조, 제지, 목재 등 경공업이 주류를 이뤘다. 물론 기업인도 일본인이 많았다. 당시 설립돼 최근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은 백화양조(군산 두산주조), 전북여객, 삼양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동차, 선박, 태양전지, 탄소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신재생에너지, 인쇄전자, 첨단 RFT산업, 자동차기계부품소재 산업이 전북의 산업 중심을 차지하며 전북경제의 밝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전북일보가 창간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이번 시리즈는 오랜 세월 도민과 애환을 함께한 전북여객 등 전북의 토종기업들을 다룬다. 암울했던 시대를 헤쳐 온 기업의 역사를 통해 전북 경제의 단면을 들여다 보고, 현재 그리고 미래 전북 경제발전을 주도해 나아갈 기업상을 그려본다. >> ▲ 삼한시대부터 본격화된 곡창 '농도'로 대변되어 온 전북의 지형적 특색은 '비산비야(非山非野)'다. 동부지역은 산간이고 서부지역은 평야, 전체적으로 산과 평야와 바다를 두루 갖춰 농림수산물 생산에 제격이었고,'곡창 호남'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다. 전북지방에서는 먼 옛날부터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부족 세력과 나라가 형성됐고, 역사적 흔적은 마한 등 삼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 고장 역사학자 전영래의 '한국청동기문화의 연구,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1983년'에 따르면 충남 논산을 중심으로 남북 각 100㎞, 동서 각 50㎞의 타원형 범위 안에 75개소의 출토지와 254건의 청동기가 보고됐다. 이른바 '금강유역 청동기문화권'이 북으로는 경기도 용인화성, 동으로는 경북 김천, 남으로는 전북 전주익산장수무주 지역까지 형성돼 있었던 것.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제품과 함께 석기, 옥 제품, 유리 제품, 철기 등도 함께 출토돼 고대시대부터 다양한 생산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곳 역사 문화는 중국 역사, 고조선 역사와 연결돼 있다. 4세기 무렵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 준왕은 궁인 1000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따라 남하, 마한을 세웠다. 이 때문에 준왕이 전북 금마에 도읍했다는 설, 익산 쌍릉이 준왕의 무덤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정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마한과 관련한 나라 54개 가운데, 김제와 부안, 고부, 고창, 남원, 정읍, 전주, 익산에 해당하는 명칭이 보여 전북이 마한의 관할권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김제 벽골제와 익산 금마 미륵사지, 익산 왕궁터 등은 전북지역이 농업의 중심지였고, 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청자가 꽃을 피운 고려시대에 전북지방에서는 부안 신작유천리, 고창 용계리 등 수많은 가마가 세워져 1300여년까지 약190여연간 자기를 생산했다. 고려시대 개성 중앙정부로 올라간 삼남지방의 물품 가운데 대부분이 전라도 지방 농림수산물과 도자기 등이었다. 고려사 창화지(倉貨志)에 따르면 고려 왕실은 12조창(漕倉)을 두고 조운선이 출발하는 포구를 운영했다. 전북지방의 조창은 임피 진성창(진포)이 중심이었다.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진포대첩도 전북경제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 종이, 도자기, 부채 품질 최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전북지방의 풍부한 생산물품은 중앙정부로 보내졌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전부고(東國文獻備考 田賦考)'에 따르면 조선 정부가 거둬들인 전세미(田稅米:논밭의 조세로 바치던 쌀)는 총10만 3062석이었고, 이 중 전라도 지방에서 거둬들인 전세미는 4만 2253석으로 무려 41%에 달했다. 여기에 삼수미(三手米:훈련도감 소속의 삼수군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거둔 세금)까지 합하면 무려 5만8457석의 세금을 전라도에 의존했다. 전북을 비롯한 전라도 땅은 그야말로 곡창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은 곡물만 풍부했던 것이 아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전라도에서 조정에 바치는 공물은 마와 종이, 자기, 목기, 유기, 약재 등이었다. 전주에서 바치는 공물로서 가장 으뜸은 피지(皮紙)였고, 도자기 생산도 눈에 띈다. 특히 종이는 전주와 남원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이 뛰어났다. 전주 부채는 고려시대부터 유명한 생산품이었다. 고대 삼한시대 이래 토기, 견직물, 활과 화살, 창, 각종 장식품 등이 수공업 형태로 생산됐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공업은 한층 발전했다. 고려시대의 경우 관영(官營)수공업, 사영(私營)수공업, 농민수공업의 생산조직을 갖췄다. 조선시대의 관영수공업은 중앙 관서에 소속돼 필요 물품을 담당하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 관서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돼 운영됐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15세기 중엽 경공장의 종류는 129종이었고, 종사자는 2841명이었다. 외공장은 27종에 3656명이 종사했다. 1471년 117명이었던 전라도 외공장 종사자는 1785년 무렵 775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16세기말부터 관영수공업은 차츰 무너져갔고, 이에따라 국가는 공업적 수요가 생기면 사영수공업에 의존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도자기공업과 유기공업, 제지공업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초기형태인 공장제수공업 형태를 띄기도 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1.01 23:02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