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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은 작가의 소설집은 핫하다. 핫하다의 사전적 의미처럼 매력이 넘치고, 섹시하고, 열정적이다. hot한 문제적 인간들이 매 작품마다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같은 주제나 같은 인물로 작품을 잇달아 지은 연작소설처럼 읽힌다. 이시은 작가는 교도소 안 곳곳을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미셀 푸코는 개인이 처벌받는 것은 법률 위반 때문이 아니라 전체 사회와 대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근대 이후 교도소는 이런 개인을 처벌하거나 교정하는 공간이 되었다. 삭막한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싸인 교도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작가는 굳게 닫힌 철문 안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 처벌받는 개인과 교정하는 개인의 길항을 그려 낸다. <도어>의 상습절도 전과자 산들은 모범적인 수용 생활로 사소 자리를 꿰찬다. 야무지고 눈치가 빠르고 입이 무거운 그녀는 덜렁이로 통하는 유니폼의 빈틈을 노려 문어와 쪽지로 통방한다. 문어는 그녀에게 정치범 5가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만 찌르라고 한다. 그에 대한 보상은 산들이 남의 집을 털며 평생 꿈꾸어온 집이다. <고래 365>의 나는 식품위생법 위반, 같은 방의 365번은 보건위생법 위반으로 수감된다. 나는 고래를 보러 갈 날을 앞당기기 위해 성실히 조리장으로 일한다. 그러나 출소는 요원해 보인다. 타투 일인자를 꿈꾸는 365번은 도구함 속의 칼을 양잿물 항아리에 깊이 숨겨 놓는다. 칼을 찾지 못한 담당은 문책을 당한다. 깊은 밤 나는 365번을 깨워 고래 문신을 부탁하고, 365번은 장미 가시로 땀을 뜬 자리에 칼날로 선명하게 선을 그려나간다. <층>의 유니폼 나는 교도관이다. 교정교화를 신뢰하지 않는 나와 달리 팀장은 수감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유해화학물질 흡입으로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조진자를 두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진자의 동거남이 사망하자, 팀장은 도리를 앞세워 휴가를 건의하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종이라며 반대한다. 진자의 귀휴는 나의 의견으로 불허된다. 순찰을 돌던 나는 진자에게 고무장갑으로 목이 졸린다. <달팽이 행로>에는 한때 연인이었으나 사형수와 사형집행인으로 만난 두 남자가 나온다. 사형제가 국회를 통과하면서 오랫동안 집행이 미뤄진 사형수들은 사형집행장이 설치된 곳으로 이송된다. 나는 순번제에 의해 석기의 형 집행자가 된다. 나와 헤어진 뒤 나와 닮은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연쇄 살인자가 된 석기에게 나는 석기가 좋아하던 흰색 운동화를 선물한다. 석기는 내게 편지를 남긴다. 운동화는 너무 깨끗해 신을 수 없었다. 운동화를 받는 순간 놀랍게도 내 모든 얽힌 감정들이 녹아내리더구나. 그들은 왜 교도소로 갔을까? 작가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핍진한 묘사로 복원한다. 고아로 마리아집에서 태어나 소녀원과 교도소, 갱생보호소를 거쳐 시립공동묘지에 묻히는 인생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인생의 문을 잘못 연 대가로 평생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연민한다. 미덕이 하나 더 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나무를 식재한다. 산수유나무 감나무 장미 소철 라일락 철쭉 층층나무 엄나무 굴참나무 왕버들 사이프러스. 땅을 가리지 않는 식물들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린다.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은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들처럼 담박하다. 어쩌면 그들은 문제적 인간이 아니라 문제를 해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강렬하고 핫하다.
언제부터인가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을 멀리했다. 다른 말들은 술술 나오는데 이상하게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성장소설의 중요 문구가 눈에 띌 때마다 이 나이에 무슨 내면의 성장과 아름다움을 찾지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면서도 괴롭지 않은 그 뻔뻔함에 괴로웠다. 성장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그래디는 사물의 본질적 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우선시하면서도 교양인의 삶을 강조하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속물적 근성에 환멸을 느낀다.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는 수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목장을 팔려고 했다. 그래디는 그 세계에서 속물로 사는 것을 거부하며 방랑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 방랑과 좌절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면서 코맥 매카시 대부분의 소설의 핵심적 주제다. 이 작품은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그래디와 롤린스의 끈끈한 우정, 블레빈스의 무모한 살인으로 인한 시련, 목장주의 딸 알레한드라와의 사랑 및 그녀의 보수적인 아버지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멕시코 경찰서장의 음모와 협박 등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물들의 행동 이면의 심리다. 경찰서장에 의해 낭패스런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래디는 도덕적 순결과 정신력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는 반면 목장주와 그의 누나는 그래디가 왜 알레한드라를 사랑하는지, 갑자기 왜 말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갔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래디의 진의를 의심한다. 혹시 말썽이 생기면 묵인하거나 그때그때 타협하면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의 진실은 황폐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 다가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블레빈스의 범죄를 구실 삼아 일행의 말을 뺏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경찰서장과 그 패거리들은 권력자나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며 부를 누리는 속물적인 인간들이었다. 약자에게 몰인정한 법률의 위력을 실감한 그래디는 다시 고심한다.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야라고 고백하며 메마른 황무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그래디의 정신적 방황은 계속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데는 사회적 원인이 크겠지만 무엇보다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가 곳곳에 잔존해 있는 사회에서 그 극복방법은 당장 주어질 수 없고 시련과 고뇌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적으로 성장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꾸준히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흡한 점에 대해 실존적 위기감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교양인의 길은 인격의 도달점이나 자기완성이 아니다. 자기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참된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런 삶이 아닐까. 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린 메말라 가는 사회에 지금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책이 많지 않던 시기에는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옛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옛이야기는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개연성이 부족하기도 하고 영웅소설처럼 하늘 신이 불쑥 끼어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이야기 속에 현실을 그려내면서 소망이 얹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는 이분법적인 단순한 플롯에도 쉽게 빠져들기 일쑤다. 《물이, 길 떠나는 아이》는 2005년에 처음 출판되었던 동화이다. 그러다가 2020년에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이다. 이 작품은 옛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할머니가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흡입력이 있다. 주인공 물이는 자식이 없는 부모님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맑은 물을 떠 놓고 삼신 할매한테 기도하면서 얻은 귀한 아이였다. 하지만 삼신 할매 옆에 있던 선녀의 잘못으로 아이의 옷 솔기를 터지게 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삼신 할매가 부모님의 기도와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물이를 보내주었는데도 어머니는 아들이 아닌 것에 서운함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머니의 말은 독이 되어 새로 태어난 아이는 영혼의 한 조각을 잃고 만다. 영혼의 한 조각은 구렁이가 되어 주인공과 삶을 같이 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물이 곁에는 늘 구렁이가 함께 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결국 부모와도 함께 살 수 없게 된다. 구렁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허위와 욕망에 부딪친다. 그럼에도 물이는 끊임없이 자기완성을 위해 삶을 개척해 나간다. 비록 옛이야기라는 옷을 입었지만 물이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결함을 통해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되고, 서로 의지하며 삶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삶은 먼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평탄한 길을 걷듯 편안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힘겨운 날도 있다. 때론 자기완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기여해야 할 때도 있고, 기여했음에도 이해받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듯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살아가며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도 자기완성의 일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준비 없이 맞이하는 시간들이 많지만, 인간만이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한 방식을 스스로 검토하고 결정해 나간다. 어느덧 살갗에 닿는 기온이 달라지고 있다. 날씨보다 마음이 얼어붙었던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변화와 시련들을 감내하는 시지프스로 하루를 열어야 하리라 본다.
몇몇 사람들과 길거나 짧게 살다 완전한 독립을 시작한 지 6개월에 접어들었다. 혼자도 잘사는 나는 다시 친구들과 함께 살 궁리를 한다. 결혼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은 만들고 싶다. 소담스러운 주거 공동체를 꿈꾼다. 하지만 본격적인 실천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어딘가 복잡할 것 같고, 왜인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미래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다수의 사람이 인정하고 상상하는 방식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단어 이외의 선택을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여기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에서도 선택지의 바깥, 동거를 말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면, 굳이 사회가 인정하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있지 않아도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 (중략)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욱여넣는 대신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게 현명한 방법이리라.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中) 제도권 밖 가족의 모습은 우산 밖으로 튀어나온 어깨와 같을지 모른다. 우산이 작아 비죽 튀어나온 어깨가 줄곧 거센 비를 맞듯, 가족이나 식구라는 일상적인 단어로 서로를 묶고 있지만 실상 아무런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 책은 축축해진 어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깨를 구겨 넣는 대신에 더 큰 우산을 들자고 말한다. 선택지에 고르고 싶은 것이 없어 고민하던 내게 선택하지 않는 방법, 선택지를 만드는 방법을 상상하게 했다. 각각의 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살며 다름을 발견하는 이야기부터 제도와 서류에 관한 이야기까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지만, 나만의 방은 갖고 싶은 이야기. 일상을 나누지만, 명절에는 내 집에 가고 싶은 이야기. 여자 둘이 사랑하며 사는 이야기. 나의 고민과 걱정에 대한 모종의 대답을 호쾌한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다.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장거리 마라톤을 함께 하는 페이스메이커가 된 기분이 든다. 이 긴 레이스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왜인지 작가와 나란히 뛰는 것 같은 상상에 사로잡힌다. 레이스의 끝을 알 수 없어도 괜찮다. 내가 뛰고 싶은 트랙이 없다며 슬퍼할 필요도 없다.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길로 방향을 틀어 뛰더라도 두려움 대신 용기를 낼 수 있을 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옆에서 함께 뛰어줄지도, 앞에서 뛰고 있던 누군가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곁에서 새로운 길을 환영하는 기쁨의 춤을 출지도. 빈칸과 빈칸 사이에 억지로 자신을 욱여넣을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트로트를 틀고 막춤을 춰보자. 연자 언니의 말대로.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中)
자꾸만 멀어지는 기억의 흔적을 붙잡아두는 일은 매력적이다. 글로 남기고 사진으로 저장하는 일은 풍경 밖에서 마음의 정서를 기록하는 재미와 발견의 기쁨을 준다. 눈웃음이 선하고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경종호 시인의 디카시집을 펼쳐보았다.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순간의 시적형상을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하는 영상과 문자예술이다. 활자와 이미지라는 두 개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적 텍스트로 완성하는 표현양식이다. 사물에 닿는 눈빛의 한계를 순간적으로 받아 적은 것 일까? 스쳐 지나가는 의미를 예민한 감각으로 기억해 낸 것일까? 손닿을 듯 낚아채는 시인의 눈매가 절묘하다.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물을 시인의 깊은 사유로 담은 디카시집은, 그의 생태적인 감각이 견고하게 들어있는 기록장치이며 시인의 사진과 결합된 시는 농익은 듯 때론 낯설게 다가서기에 좋다. 그가 내어놓은 이미지에는 일관된 의미와 구체적인 원형의 구도가 들어있다. 자연과 사물이 환기시켜주는 언어를 발견하며 시인의 촉수는 더욱 밝아졌으리라 믿는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고 프랑스 시인 랭보는 말했다. 상처받은 영혼이 정밀하게 바라보며 자연의 풍경과 삶을 구성하며 나가는 일, 티끌 같은 삶의 얼룩을 온전하게 바라보는 일, <상처>라는 시에서 여린 것들을 품은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파리 떨어진 자리는 좀 더 굵었습니다 나비가 닿지 못하는 계절엔 좀 더 딱딱하게 비틀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꽃이 환장하게 피어대는 날들은 곧 올 것입니다 -상처 전문 삶의 중요한 배경이나 찰나로 번져가는 흔적, 조형물을 통해서 시인이 지향하는 풍부한 프레임이 가득하다. 관찰자적 시선으로 사물을 더듬어보고 받아 적는 일을 시인은 촘촘하게 그려내었다. 자연이 남긴 다양한 문양은 시인의 문장 속에서 친밀하게 생명력을 보여준다. 때론 사물을 통해 자신이 경험해 온 시간을 드러내고, 흐릿하고 맹숭한 기억은 머문 자리에 선명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생이 다 한 어느 날 내 안에도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 사람 살아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 하나 전문 나무옹이를 보고서 사람 하나를 이미지와 일치시킨 시, 살아온 내력이 박혀있는 나무옹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과 사람 하나가 들어가 있다. 삶과 사랑의 면면을 묻고 답하며 일상이 말하는 자연의 섭리와 사람과 사람사이의 무언의 의미가 다가왔다. 안쓰럽고 작은 것, 덜 여문 것에게 시선을 돌리며, 드러내지 않고 배경이 되어주는 일, 그늘을 새긴다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았다. 짧은 시편들의 행간을 드나들며 새기고 돋는 일로 시샘달을 건너가도 좋을 것 같다.
지난 십 년 나는 나를 걸쳐 입고 바깥을 맴돌았다.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았고 막연히 견뎌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십 년 동안의 시를 한데 엮으며 알았다. 시가, 그리고 무궁한 당신들이 나의 바깥이었다는 것. -시인의 말 中에서 대학 동기 윤석정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걷는사람, 2021)을 냈다. 첫 시집 『오페라 미용실』(민음사, 2009) 이후 근 십 년만이다. 그리고, 응달진 곳마다 아직 흰 눈이 남아 있는 입춘 날이다. 그 십 년 동안 윤석정 시인은 간간이 시를 썼고, 누구에게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의 시 ?스물?에서처럼 단순히 사랑이, 사랑이 있는 시가 뭔지 모르겠고 막막했고 죄책감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어느덧휘어진 마음을 뚫고 달려오는 전철이 보이기 시작한 마흔이, 아아, 마흔이 훌쩍 넘어 있었으므로. 내가 아는 윤석정 시인은 늘 호방했다. 자유로웠고, 큰 이목구비만큼이나 거침이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장수 산골처럼 크고 투박한 주먹 속에는 따뜻한 마음도 쥐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시골 촌놈 같은 그 따뜻함을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 해서 시인이 자신의 바깥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는, 그 막연하고 막막한 생 속에 자신을 밀어두고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 했으리라. 하지만 시인은 비워도 가벼워지지 않고, 가볍게 사는 게 뭔지 모르는 채 살았다. 아무리 길을 더듬거려도 어디로 갔는지, 누가 가져갔는지 알 길이 없었던 사라진 그의 도장처럼 나를 놓치고 살았다. 그의 시『커서의 하루』,『잃어버린 도장』을 통한 그 공허하고 헛헛한 울림의 고백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가 아주 잘 살았을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의 시 곳곳에 등장하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내가 알 수 없는 얼굴들, 잠든 아버지 파리한 얼굴, 어둠에 가려진 얼굴등. 하나같이 어둠과 직결되어 있는 그 얼굴들이 마음을 아프게 짓누른다. 시인이 내가 잃어버린 게 도장만은 아니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알게 된 것들과 같아서. 그래, 한때 나의 증거였던 내가 사라졌다고 한 시인의 말 같아서 말이다. 그렇다고 윤석정 시인은 막막히 견뎌야 할 것들을 견디면서만 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근원인 일곱 살 어린 날로 다녀오기도 하고, 자신을 정돈하기 위해 절필도 해본다. 뒤돌아보게 하는, 뒤돌아봐도 볼 수 없는등이 그리워 지나는 길목마다 낄낄대다가 꺽꺽대기도 했다. 결국 우리의 리듬이풍진 세상의 아픈 도돌이표라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 시인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바깥 아닌 바깥을 실컷, 길고 끈질기게 헤매고 다녔다. 날이 풀리자 꽃이 핀다 날이 꽃을 시샘하자 꽃이 견디다 진다 우리의 리듬은 야생음표 우리 속에서 날마다 울울창창하다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생음표는 피고 견디다 진다 -우리의 음악 中에서 우리 모두가 피고 견디다 지는 야생음표라는 것을 알 때까지. 그리하여 십 년, 그럭저럭 자알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흐린 날 오후, 늦은 산책을 나갔다. 안개 낀 호수 공원을 느리게 걸었다. 축 늘어져서 아무래도 힘이 나질 않아, 이럴 때 누군가 등이라도 토닥여준다면, 글쎄. 깊은 숨을 몰아쉬며 비척비척 걸을 때 청둥오리 떼가 얼어붙은 호수 위로 내려앉았다. 쉬어 가는구나. 나도 잠시 걸음을 멈췄다. 키 높은 메타세쿼이아를 올려다보았다. 안개에 잠겨 나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메타세쿼이아라는 이름 대신 안개에 잠긴 나무를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우는 바람 소리, 주먹 쥐고 일어나, 작은 나무 같은 인디언 이름이 떠올랐다. 작은 나무는 어른이 되어도 작은 나무로 불릴 텐데 괜찮을까. 이름이 한정하는 개인의 특징을 생각하다 사이를 두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작은 나무는 어른이 되어도 영혼의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랄 테니까 작은 나무여도 괜찮아. 아빠가 세상을 뜨신 지 1년 만에 엄마도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다.로 시작하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중 체로키족인 작은 나무가 조부모와 살면서 체로키족의 생활방식을 배우는 이야기다. 정부에서 지정한 인디언 보호구역이 아닌 깊은 산에 살면서 다섯 살 꼬마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그러나 아이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운다. 계곡을 흐르는 물, 새, 나무들의 언어를 배우고 일부러 걸음을 늦춰 아이가 따라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며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던 할아버지를 통해 진짜 어른의 모습을 배운다. 할머니가 읽어주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통해 세상 이야기를 듣고 문학을 배운다. 진짜 어른처럼 보이던 할아버지도 때로는 욕을 하고 고집불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절제와 사랑 가득한 조부모가 위스키 업자들이 찾아와 분란을 일으키자 그들을 조용히 쫓아 보내는 방법도 배운다. 소수자, 약자이기에 고통받고 왜곡된 역사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대한 고민은 뒤로 미룬다. 작은 나무에게 나쁜 일이라곤 없다. 매번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조부모와 떨어져 고아원에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늑대별을 통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든 우린 함께 있는 것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와 신념을 배운다. 이번 생은 망했다처럼 소비되는 생이 아니라 p.657<이번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 작은 나무야, 다음번에는 더 좋아질 거야. 또 만나자.>와 같이 죽어가는 이의 삶이 나쁘지 않은 것으로 재생산 되는 것도 본다. p.657<언제나 앞장서서 걷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이 끝장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 나무는 깊은 절망감에 쌓였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세상이 끝장난 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너나없이 힘든 시기에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니 공허할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정작 자신은 받지 못한 위로를 건네자니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주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변에 말로 전하지 못했던 위로를 서평으로 대신하고 싶어 주인공이 처한 환경이 어두울지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위로가 담긴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지인(소설가 권효진)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자 그녀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책을 추천했다. 이후, 아름드리미디어에서 나온 그 책을 구매한 뒤에야 포리스트 카터라는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가 오래 전에 읽은 아파치족 추장의 생애를 다룬 <제로니모>의 작가라는 사실에 반가웠다.
살다가 문득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의문을 품는다는 건 견고하고 빈틈없다고 생각한 삶에 균열이 생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잠시 멈춰 서서 삶이라는 담벼락에 기대앉아 오래전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운이 좋으면 균열의 뿌리를 발견해 낼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쉬어갈 타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김영주 작가의 첫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 푸른 생각>에 주인공 레오(세례명)는 문득 익숙함에 의문을 던진다. 절대적이었고 지배적이었던 대상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무슨 까닭에 성당을 다니는 걸까? 사춘기가 시작된 레오는 지켜야 할 것도 많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은 종교 생활이 점점 버겁다. 친구들과 뛰어놀라치면 성당 교리 수업을 가야 했고 주말에 실컷 늦잠 자고 싶어도 그저 꿈같은 일이다. 성당 다니는 애가 왜 그 모양이야? 성당 다니면 착해야지. 하는 편견어린 시선은 레오를 더 예민하게 했다. 새로 오신 보좌 신부인 레오 신부의 까칠한 태도도 한몫했다. 융통성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레오 신부와 레오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급기야 레오는 성당을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태어나 지금까지 종교에 관해 자기 결정권, 자기 의지를 갖춰보지 못한 레오였다. 마치 조류가 태어나자마자 처음 본 대상을 엄마라고 여기는 것처럼 레오에게 성당은 각인 그 자체다. 응당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보니 엄마가 가톨릭 신자였고 그러니 생존에 필요한 추종 반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오와 레오 신부를 읽다 보니 나의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교회에 간다고 하자 아빠는 완강히 반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빠가 불교 신자인데 딸이 기독교 신자인 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뭐 독실까지는 아니어도 계절이 바뀌면 절에 가시긴 했으니 아주 맥락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종교는 내 권한이었다. 나는 보란 듯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나갔다. 처음에는 오기였고 나중에는 믿음으로 굳어진 행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빠는 더는 내가 믿는 종교를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무사히 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아빠와 달리 레오 아빠는 레오의 선택을 존중했다. 이러다 영영 성당을 나가지 않으면 어떡하지! 성당 안 다니면 이담에 어떡하려고 그러나?라는 조급함 대신 레오를 격려했다. 만약 아빠가 레오의 선택에 반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레오는 성당에 영영 발길을 끊었을지 모른다. 성당 선생님, 레오 신부, 주임 신부 모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레오를 기다려 주었다. 덕분에 레오는 자신의 선택을 재고하고 복기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김영주 작가는 이야기 속 주인공 레오는 갈등과 위기를 겪고, 충돌 속에서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 해답과 치유 방법을 자기 스스로 찾아낸다.며 이야기에서 강요된 신앙으로 무조건 행복할 거란 편견을 깨고 싶었다. 까칠하고 완고한 레오 신부님도 어린 레오에게 배우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살아야 한다.라고 서문에서 말했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깨지고 부서지면서 삶의 방식을 터득한다. 성당을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레오가 보인 행동은 자기 의지의 중요성과 선택에 따른 책임의 관계를 이해한 결과가 분명하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탄생 순간부터 트루먼 쇼에 주인공 된 트루먼. 뒤늦게 자신의 삶이 잘 짜인 각본임을 깨달은 트루먼은 과감히 세트장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영화를 본 사람 누구나 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가 선택한 바깥세상이 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어제의 나와 분명 다른 오늘의 나를 만나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나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어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레오와 레오 신부>를 읽고 익숙함에 딴지를 걸어 보자. 운 좋으면 나다움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슨 색깔로 사시나요? 함박눈의 색조를 따라가려는 폭설같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저는 오늘 김헌수 시인의 소묘를 흉내 내 보려 해요. 점이 선이 되고, 면적이 되고, 공간이 되고, 삶이 되는 세계는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요. 별들이 무한하게 자랄 때까지 그들이 찬란해질 때까지 초승달로 문고리를 달아 놓고, 시인의 별빛을 눈썹에 받아내겠어요(유월 하늘에 뜨는 별은 중). 시인의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를 읽기 전까지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작고 하얀 질문들을 점묘법처럼 당신 마음에 찍어보려 해요. 나는 누구야? 어디로 가고 있어?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어떻게 적응하지? 나를 바꾸는 편인가, 주위를 변화시키는 편인가, 경계가 어정쩡한가? 커튼콜이 드리워진 밤에는/ 특별한 목소리를 포박해 둘 거야(벨칸토 음악회를 보고 온 날에는 중). 내 삶이 끝난 후 나의 특이한 무늬를 다시 불러낼 환호성은 있을까? 불안은 꽃 피지 말고/ 같이 살아보자고 몸부림만 치고 있어(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하루 중). 내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리모컨뿐인 날들이 있지요. 거칠어진 선이 그어진 결핍에서 멀어지고 싶(어반스케치 중)은 시절이 있지요. 우리는 모두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컬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빛을 받으면 자신만의 독특한 색상을 내뿜어요. 불안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편안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이여! 피어나지 말고 더불어 뿌리로 살아봅시다. 숲을 걷다가 씻어내지 못한 얼룩에 갇(결벽증 중)힌 사람아! 천연색 지닌 숲을 닦아 유리창에 신겨보게요. 발바닥이 튼튼해서 신발을 신지 않는(피핀과 메리와 나는 중) 모두는 휘파람을 불 때까지 살아보자요(버베나 꽃잎은 접어지고 중). 누구나 본질을 떨치어 드러내고 싶은 발달 욕구를 가지고 있어요. 저수지 속에서 반짝이는 어제를/ 서늘하게 헹구고(경천저수지에서 중) 싶어 하지요. 발달은 발이 달렸어요. 돌아보면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술래를 향해 항상 움직이는 게 참된 본디의 형체라고 해요. 어눌한 것은 바깥으로 돌아가도 좋다(도서관은 발효 중 중). 가로썰면 안도 밖이 되죠. 그러니 물 흐르듯이 유려하지 못한 저는 먼 바깥으로 돌아가도 좋으니 떠듬떠듬 가겠어요. 밖으로 가는 길은/ 원점을 돌고 돌아/ 갈피를 잡을 수 없겠지만요(토마토 중). 그러나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기에 바라는 일들도 한곳으로 모이게 되지요. 무엇을 얻거나 하고자 하는 바람이 좁은 곳에 휘몰아쳐 세상은 늘 흔들리죠.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아야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개성을 펼칠 수 있다고 해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래서 절제사만큼이나 제 마음 호리는 이름을 가진 통제사가 필요한가 봅니다. 시인 김헌수가 삼도 통제사인 셈이죠. 나를 업고 가는 달에게 다시 말할 수 있다/ 물결무늬로 겹쳐질 수 있다고/ 거듭 둥글어질 수 있다고(중얼거리는 달과 물은 중). 겹쳐지고 둥글어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겠지요. 그곳에 이르면 유다른 특성을 산맥에 널어 말려 한 시절 먹을 수 있겠지요. 색감은 판독하기 어려운 중심을 따라가고/ 나는 내내 터무니없는/ 곡선을 붙잡아 두겠어요(컬러링 중). 자신의 색채로 끝없는 설원을 달리는 기차에서 컵라면 국물을 마시며, 제가 비구상의 끝을 말하면 당신은 추상의 시작을 말(미술관에서 만나요 중) 하세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보석처럼 빛나는 열정, 사랑, 추억들이다. 그런데 허세로 무장한 사색이야말로 삶을 버티게 하는 요소라고 말하는 소설이 있다. 『범수 가라사대』의 주인공 범수는 엄마 친구 결혼식에서 결혼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어느 날, 군중 속의 고독보다 더 강한 고독을 만나게 될 때 칸트처럼 사색하라는 축사를 하는 중2 남학생이다. 운동화를 전족처럼 느껴서 쓰레빠를 신고, 선생님 책상에서 외출증을 훔쳐 점심시간에 집을 오가며 사색과 고독을 즐긴다. 하지만 친구들한테 외출증을 뺏긴 뒤 범수의 산책은 막을 내린다. 허세 없는 사색이 있을까요? 세상 모든 범수의 사색을 지지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을 읽노라니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학창시절, 내 꿈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는 꽤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그 당시 내 곁에는 팝송을 즐기고 춤을 잘 추는 친구가 있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야. 니가 예수냐? 난 내 꿈을 지지하지 않는 친구에게 서운해서 한동안 거리를 두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허세였고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태도를 만드는데 영향을 준건 분명하다. 아니, 그 덕분에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내가 하는 말 속에 스며있는 허세 덕분에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허세로 무장한 사색은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일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준생의 그것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술 취한 가장의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그런 허세를 받아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쓴 신여랑 작가가 얼마 전에 전주에 둥지를 틀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차분한 성품 속에 숨겨진 유쾌함과 재기발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내 마음 속에 감춰둔 허세로 무장한 사색을 꺼내도 되겠다.
종종 제목이나 겉표지에 낚여 덜컥 사버릴 때가 있다. 책 펼치자마다 아뿔사! 낚였군.해도 이미 내 손에 책이 온 후. 후회막급해도 소용없고, 책표지 뒷장 바코드 아래 책값을 두고두고 째려본 들 어쩌겠는가! 그 충동에 구입한 시집이 있었다.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집을 펴고 한 일은 목차를 보고 시를 찾았다. 목차 어디에도 없었다. 책을 잡으면 끝장을 보기도 전에 잠이 몰려오는 나를 단 한번에 온읽기를 시켜버렸다. 아주 고단수가 따로 없다. 처음에는 안 보이는 게 약이 올라 읽다, 나중에는 오기로 읽었다. 어쩜 그 말이 그 말인 셈이지만. 콩나물 국밥에 다진 청양고추 넣어 말아버린 것을 어쨌든 찾았다. 나중에 들은 후문이지만, 출판사 대표가 제안해 나온 제목이란다. 박수서 시는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처럼 기막힌 시어들이 숨어있다. 시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어느 날 하루는 박 시인이 철 한 수저를 먹었는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형, 나하고 친해서 사람들한테 욕먹지? 난 망설임 없이 냅다 대답했다. 그래! 박수서는 별종 중에 별종이다. 나는 곁에 별종 하나 있는 게 좋다. 뽕작시의 선두주자, 자칭 삼류시인, 고독한 미식가를 사랑하는 고독한 미식가다. 어찌 보면 시인이 만든 한 장르이다. 사뭇 기괴한 물건이 따로 없지만 이 별종이 나는 좋다. 서문에 일출을 보러갔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라면 한 그릇 먹었더니 해가 중천에 떴더라 하면서 그렇게 한눈팔다 시를 잃었다고 말한다. 박수서는 어쩌면 인생에 서 먹을 라면 한 그릇이 너무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매일 삶이란 무엇이냐?하며 징징거린다. 그런 식으로 시를 갈급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둘러대는지 모른다. 『빈집』을 보면 박수서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시를 못 쓰고 막걸리를 마실까, 소주를 마실까 고민할 때면 빈집처럼 부산해진다. 정신을 빼놓는다. 박수서 시인은 시 쓸 때는 세상 진중하다. 나는 가끔 몸살 난 박수서를 보면 쌍화탕 한 병 주듯 시 써라! 한다. 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익어갈지 감나무에게 감히 물을 수 있었을까! 자신이 덜 익었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가기 쉽겠는가? 『거미』시를 읽고 누군가 말했다. 기죽고 힘들어하지 마시게나. 다 보기 나름이라네. 요즘은 매일 위기와 동거하는 세상 같다. 다들 힘내자는 말 대신『거미』의 시구로 마무리 하련다. 죽지 못하고 끝까지 줄 위에서 버티는 것은 스스로 거미줄을 먹어치울망정 세상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시 한 편 읽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다면 우리 사는 일이 왜 지지부진하겠는가! 세상의 철벽 앞에 시는 무기력하고 시인의 시 쓰기는 무모한 도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를 읽는 일은 우리가 세상의 벽만은 되지 않겠다는 버둥거림이 아닐까? 젖은 서사는 아무리 구겨도/날개를 펴지 않는다라는 시구를 읽다가 시집을 잠시 덮었다. 점심 무렵 우편물을 찾아왔으니 오후 서너 시쯤이었을 것이다. 9월이었고 맑았고 아무 일 없는 날이었다. 심심하기 그지없었던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방비였던 나는 젖은 서사라는 말을 흠뻑 뒤집어써버렸다. 바야흐로 그날 오후가 온통 흥건해져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김영 시인의 시 사물들의 본적을 만나게 된 정황이다. 새벽마다 반송되는 나의 미래는/언제나 부러진 기억 쪽으로 수납된다라는 시구는 저녁 어스름이 슬금할 무렵에 읽었다. 낮밤의 기수역에서 마음이 산란했는지도 모르겠다. 무턱대는 성격도 아닌데 그 구절을 덥석 잡아채고 말았다. 묵음은 모든 불안의 본적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한번 더 마음이 삐끗했다. 시를 읽다보면 주춤거리며 말려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를 읽는 일이 그랬다. 이것이 김영 시인의 시 일어서는 묵음을 읽고 난 소회다. 김영 시인의 시집 <파이디아>에서 두 편의 시를 먼저 풀어놓는 것은 공교롭게도 두 시가 존재의 본적을 다루고 있어서다. 본적은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제도화된 형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응되는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영 시인은 파이디아(paidia)를 전면에 내세웠다. 소개하자면 파이디아는 무질서한 상황을 즐기는 아이들의 놀이 형식을 어원으로 삼고 있다. 제도화된 존재와 질서 없는 존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 시집을 꼼꼼 읽었고 곰곰 생각했다. 삶은 규칙 없는 놀이(파이디아1-흐르거나 머물거나)에 닿았다가 기원이 다른 사유가 한 페이지에 머무르는 것은, 갈등을 부르는 존재 방식이었나 봐요(파이디아2-숲이 되는)를 짚은 후 세상은 같은 문장을 다른 의미로 읽어주지요(파이디아3-대성당)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질서와 무질서, 규칙과 변칙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이 인간 존재의 기원이라고 한다면,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규칙적인 같은 문장으로부터 무질서와 변칙으로 이루어진 다른 의미가 탄생하는 곳이었다. 하나의 뿌리(본적)에서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어 탄생하는 것이 우리의 삶(존재)이라는 생각으로 시집 읽기를 갈무리했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밤은 모든 존재의 본적처럼 살아 있는 것들을 흠뻑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시를 읽는 일은 자주 나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시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견고한 세상의 벽과 맞선다. 김영 시인의 시집 <파이디아>를 읽고 우리 인간의 본적이 인간 자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소박한 것일까? 사소할지라도 새겨둘 만한 일이다. 시 읽는 일이 이렇다.
나무의 심장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세상에 나무의 심장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으려나. 아마도 거의 없겠지만, 이 책은 나무의 심장소리를 사랑해 온 한 남자의 숲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 안도현도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몸을 비벼본다(<시인>)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숲 읽어주는 남자라니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우선 표지부터 고즈넉한 숲을 만나러 가고픈 마음이 저절로 들게 한다. 이 책은 숲과 더불어 살면서 삶의 지평을 넓혀온 저자의 진솔한 생활기록이자 친절한 숲 해설 안내서이다. 책 군데군데 있는 세밀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가 직접 그린 세밀화는 그가 얼마나 숲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필요하다면 사진으로 쉽게 처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구태여 손과 정성이 많이 가는 세밀화를 택한 마음이 정겹다. 올해 우연한 기회에 생태해설사 수업을 들으면서 꽃과 나무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절꽃 이름이야 그렇다 해도 초살도나 결각과 같은 단어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어휘였다. 토종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구분하는 법도, 계수나무 잎이 익어가면서 달달한 솜사탕 냄새를 풍긴다는 것도 올해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무심히 스치며 이름으로만 알던 꽃과 나무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 책은 숲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이나 숲과 친해질 준비를 마친 이에게는 안성맞춤인 해설서이다. 책에는 우리 사는 동네의 공원과 가로수, 남산과 북한산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숲을 읽어주는 남자답게 여러 나무와 숲이 머금고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정결하게 풀어놓는다. 이 책은 때로 숲에 관한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 들다가도 맛깔스러운 수필을 읽는 느낌이 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는 나무와 숲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숲에 깃들어 사는 다양한 생물에 대한 살뜰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토끼풀 이야기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였던 손기정 선수와 얽혀 있는 대왕참나무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 곳곳에는 알아두면 요긴한 꽃과 나무 이야기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만난다면 내년 봄을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서둘러 들판에 나가 민들레와 냉이를 구분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겨울을 이긴 봄꽃이나 새순을 토해내는 나무를 만나면 당신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가슴은 거칠게 뛸 것이다. 저자는 본문만으로는 아쉬웠는지 나무와 친해지는 7단계를 부록으로 남겨 두었다.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나무와 좀 더 친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단계이다. 그의 표현으로 하자면 나무 식별하는 법이지만 내게는 나무와 친해지는 법으로 읽힌다. 이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더 풍성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의 인생이 더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서 벼가 싹을 틔운다. 하늘의 숨결을 느끼고, 땅의 속삭임을 들으며 생명이 자란다. 인간이 공손히 손을 모으면 그 마음이 스미어 천지감동의 순간이 인다. 그때 벼가 여문다. 모든 생명의 처음과 끝인 쌀의 기원.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게 이어가는 아리랑 가락처럼 쌀 한 톨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은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진 들판, 징게 맹갱 외에밋들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왜놈 돈 20원 받아먹고 팔려 갈 신세에 처한 방영근과 그 어미가 김제에서 군산으로 가는 풍경을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라고 적었다. 소설은 이곳을 배경으로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초를 겪는 민중과 애국지사의 삶,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은 친일파의 실상을 그린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땅마저 빼앗긴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국내외로 떠돌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눈물 나는 역사. 그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민초의 숱한 고난과 끝없는 좌절과 눈물겨운 투쟁의 여정이다. 책장을 넘기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행과 간이 지평선처럼 아슴아슴하다. 광활 갯벌과 동진농장은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시린 역사를 단적으로 일러준다. 1924년 일제는 김제 동진농장 간척지 개간을 위해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다. 간척지의 염기를 제거하고 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섬진강을 막아 운암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까지 길고 긴 수로를 연결했다. 이듬해 그 벌판에 전국의 이주민을 쏟아냈다. 정읍, 여산, 백구, 태인, 옥구, 익산 이 땅 구석구석에서 땀과 눈물로 키운 쌀들은 가마니 채 징용되듯 끌려와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 쌀을 싣고 일본으로 떠나는 배들은 눈물 꽤나 흘리며 뱃고동을 울렸을 것이고, 군산 앞바다 물결은 운반선을 가로막으며 철썩철썩 가슴을 쳐댔을 것이다. 떠나가던 쌀들은 농부들이 부르던 아리랑 가락이 목에 걸려 가슴이 아리고 저렸을 것이다. 그 가락은 태산이고 파도이면서 애간장 타는 속울음이고 천 리 밖의 넋을 부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천지간에 다 아는 노래다. 때와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가락을 달리하며 부를 수 있는 신통한 노래이며, 제각기 가사를 엮어가며 새록새록 신명을 돋울 수 있는 가상한 노래다. 차례로 가사를 엮을 때면 논마지기가 더 있고 없고, 집칸이 더 크고 작고, 인물이 더 잘나고 못나고 하는 따위가 없다. 아리랑 가락은 누가 시작하든 곧 합창이 된다. 서러움이 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픔도 달래고 힘겨운 것도 이겨낼 수 있게 한다. 광복 75주년, 쌀은 여전히 이 땅 곳곳을 떠돈다. 쌀에 얽히고설킨 분하고 억울하고 야속한 일들은 농심을 성나게 하고, 벼 가마니를 방패 삼은 야적시위로 이어졌다.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고 엉덩이가 씰룩거리도록 아리랑을 더 크고 재미지게 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삶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김형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에서 도대체 우리는 왜 문학을 하려고 마음먹게 되었을까, 혹은 인간은 언제 문학에 욕심을 내기 시작할까. 김형수 시인은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가 작가라고 말한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는 창작법에 대해 고민하는 문우에게 고마운 벗이 되는 책이다. 문학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문학이 되는지를 함께 고민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글이 시작되었던 지점은 언제 어디였을 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나와 같은 마음이 될 것이다. 글을 시작하려는 사람과 독자로서 작가의 고독한 삶과 그의 세계관을 알아차리고 싶거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의 문학적 자아가 태어난 곳을 찾아야한다면 이 책은 고독하고 위대한 개인인 그에게 글의 기준을 잡아줄 것이다. 그 지점에 문학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게 될 것이다. 김형수 시인에게 최초의 문학적 자의식, 표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은 편지였다.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서, 산골소년이 세계로 향한 간절함으로 썼던 편지. 매형이 될 두 형님에게 부쳤던 편지가 용돈이 되어 왔을 때 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에겐 세 곳의 지점이 있다. 처음은 그의 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의 서문에서 내 말(言)의 고향 밀래미장터에 바친다라고 밝혔듯이 그의 문학적 자아가 태어난 곳은 밀래미장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광주고 시절, 문예부에 간다는 말만으로도 발길을 막을 교사가 없었다고 했던 문예부였고, 그곳이 삶의 문학적 체계가 잡힌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80년 5월 18일 광주 계림동 헌책방 골목이 그의 문학적 경향의 진원지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아버지 때문이었을까, 그는 말이 꼭 필요한 지점에서 말더듬이가 되는 일이 잦았다. 김형수 시인은 어느 강좌에서 인간의 사유는 언어를 매개로 진행되고 언어가 없다는 건 사유가 없다는 것이며 문자로만 가능한 것이 사상이라고 했다. 하늘이 자신을 가엾게 여겨서 시골 장터 한복판에 떨어뜨렸기에 천지가 온통 글자로 넘쳐나는 것을 보았던 그는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시인이자 논객이며 신동엽 문학관 관장이다. 언젠가 신동엽 문학관의 초입에서 대면했던 신동엽 시인의 흉상과 참 많이 닮아서 놀랐던 적이 있다. 말 대신 글을 얻은 그는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모두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시인이라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작가수업2.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와 함께『조드』도 추천한다. / 글. 정숙인 소설가
사람을 닮은 동물 혹은 사물에게 너희는 참 사람을 닮았어, 하고 말한다면 어쩌면 그들에게는 모욕일지도 모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듯하다. 허수아비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린 흔히 허수아비가 같다고 하지만 허수아비 또한 허수아비대로 어떠한 의미로든 존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존재감이라는 말, 자존감이라는 말이 요즘 들어 중요한 단어로 쓰이고 보다 심오하게 다가오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소개할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도 이에 대한 말을 한다. 이 시집은 우리가 흔히 사진에 담곤 하던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쁜 사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다양한 사진 속에서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오리마저도 거부하는 도전이 없는 삶에 대하여 말을 하고, 인간이 돌아가는 마지막 종착지는 결국 동그란 o으로 남는다는 잘린 나무를 보여주고, 아기가 나에게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한다. 어쩌면 우리는 천사를 찾기 위해선 지옥을 뒤져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말, 유유자적 놀고 있는 동자승들의 넉살로 우리가 부처라는 등짝을 때려대는 말을 한다. 또한 물보다 술을 더 사 가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며 몸속의 피만큼 눈물도 준비해야 한다는 그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 속에서 겨울 시장, 친구 아지매들과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 풍경으로 삶의 따뜻함을 담아 낸다. 시인은 이미 시인의 말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의 촉수를 자극하는 장면을 만나면 사진에 담았다. 거기에 담긴 기억과 느낌을 소환하여 시를 썼다. 시와 사진의 혈맥이 섞여 한 몸이 되는 방식이다. 디카시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의 장점이 바로 이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담기 위하여 시적인 것을 찾아내는 그 눈과 마음이 보다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나와 우리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우리는 또 선물을 받은 듯 하다.
걷기를 좋아하고, 산책을 사랑한다. 스스로 산책중독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하곤 한다. 이것은 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자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걷기로 이루어지는 산책은 발바닥으로 그날의 골목과 날씨와 풍경을 읽는 일. 그리고 소리와 말들을 채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속도 따윈 철저히 무시해도 된다는 점이 짜릿하다. 두 발로 더듬어 찾아낸 몇 개의 낱말과 몇 개의 장면을 주머니에 넣고서 만지작거리며 돌아올 때는 어둑했던 마음의 방에도 불이 켜진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은 무심코 길을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환하고, 따스하고, 어여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 찰나를 혼자만 몰래 간직하고 싶은 욕심과 누구라도 불러와 같이 바라보고 싶은 심경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다툰다. 그만큼 <시와 산책>은 문장과 문장 사이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라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그의 섬세한 문장은 시간과 서사가 정제된 단편영화를 보는 듯 구체적인 장면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저물 무렵이면 사람이 사는 집에는 전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빈집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묻힌다. 그 사이를 쭉 이으면 별자리가 될 것도 같다. 돌아누운 사람의 굽은 등 자리, 깎인 발톱 자리, 아픈 고양이 꼬리 자리 같은 것.(<시와 산책>, 47쪽) 낯선 곳으로 이사한 뒤 외지고 적막한 동네. 무질서하게 얽힌 골목과 거기 빈틈없이 앉은 집들에 마음 붙이기 위한 방편으로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는 한정원 작가. 그는 어느 마당에 어떤 나무와 꽃이 피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는 밤길이 힘들지 않게 되었고, 불이 꺼진 창도, 그 창 너머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감은 눈꺼풀처럼 순하게만 보였다라고 산책자로서의 내력을 밝힌다. 제목부터 시와 산책이 나란히 짝을 이룬 책답게 <시와 산책>에는 여러 시인과 시의 구절이 등장한다. 페르난두 페소아, 파울 첼란, 실비아 플라스, 세사르 바예호, 에밀리 디킨슨. 작가가 오래 머금고, 어루만지고, 아껴왔을 이 시인들의 시 조각들을 함께 음미할 수 있다. 산책을 나설 때는 홀가분한 차림이 어울리듯이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글 한 편 한 편이 짧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단정한 문장으로 다져놓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풍경 속으로, 시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애틋이 여기는 이의 손을 잡고 걸을 때처럼,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같이 이미 멀리 왔어도 조금 더 걷고 싶어진다. 평소에 그다지 시와 친하지 않고, 설령 몹시 서먹서먹한 사이라고 해도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 아는 시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모르는 시를 발견하면 설렘을 누리면 된다. 만약 반갑지도, 설레지도 않는다면 그냥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산책하며 우리는 어떤 풍경은 그저 등 뒤로 흘려보내기도 하니까.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둔다고 일별하는 한정원 작가가 소개하는 월러스 스티븐즈의 시,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는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하고 노래한다. 걷기를 통해 우리는 모호하고 어렴풋했던 세상이 분명하고 선명한 실체로 다가온다는 것을 비로소 헤아리게 된다. 그러니 무수한 말들의 성찬에도 위안을 구하지 못했다면 산책을 권한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시와 산책>을 펼치면 저녁의 공기가 아늑하고 그윽해지리라.
알맹이로만 또글또글 살아있는 시어를 만나면 시집을 마구 쓰다듬어주고 싶다. 영혼의 창문이 열린 듯하고 열린 창문으로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가슴이 콩닥거리기도 한다. 그 시어를 품어 내 살을 채우고 싶기도 하고, 시가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맡기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지난 여름에 만난 시선집이 그랬다. 나혜경의 시, 김동현의 사진으로 구성된 시선집,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이다. 사라질 것만 찍고 싶다는 사진가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만 찍고 싶다는 시인처럼이라는 표현이 차례를 읽기도 전에 내 마음을 흔들었다. 파리의 풍경 한 점과 시 한 수가 마주 보는 시선집. 나지막하게 말을 건네는 파리의 사진 50편과 절제된 언어 뒤로 숨겨놓은 마음이 담긴 시 50편으로 구성됐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치 파리의 풍경 속에서 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여유로움과 낯선 감흥에 젖는 시선집이다. 뒤엉킨 기억의 조각들을 바로 맞춰주는 저장소인 사진. 그 사진에서 풀어낸 언어들을 농축시켜 건져 올린 시어. 시인에게는 신이 허락한 언어의 축복이 있다고 했다.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 않아도 살며시 밀어낸 시어에서 쏟아져 내리는 생각들이 경이롭다. 한 발 나아갈 수 없을 땐/제자리에서 저렇게 깊어지는 겁니다 (나혜경 시 나무 홀로 푸르다 전문) 짧은 두 행으로 완성되는 삶의 진리. 달려오다가, 달려갈 길이 아직 남았는데 길이 뚝 끊겨버렸을 때. 괜한 헛손질로 기력이 쇠잔하여졌을 때.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로 젖은날개를 접어야할 때. 그 자리에서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함을, 그것이 인생임을 깨닫게 한다. 안으로 창을 내고 깊이를 재정비할 때라며 나직한 함성으로 격려한다. 소망을 잃은 듯, 뺏긴 듯 무심한 오늘, 그리고 또 내일을 견디어내려면 침잠하라 한다. 거기서 새로운 도근점을 찾으라 한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마음 놓을 만한 문장을 찾아내어/ 음악처럼 듣고 또 듣는다 (나혜경 시 안녕을 빌 만한 문장 중) 해결해야 할 일에 짓눌려 앞이 안 보일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또는 한층 위로 솟구쳐 올라서 그것도 아니면 한 길 아래로 내려가서 이 시구를 곱씹어 볼 일이다.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시구는 다시 일어설 힘을 풀무질할 것이다. 간단한 식사를 학습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흩어진 이름을 간절히 부르기도 하는 비/ 마술사처럼 나는 낭만을 귓바퀴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쏟아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나혜경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중) 비가 오거나,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올 때, 눈이 내리고 다시 진달래가 피어날 때.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을 대할 때든 혼자여서 설움이 짙어질 때든지 어느 때나 그리움이 묻어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제 조심조심 그리움을 부르며 더불어 징검다리를 건너보자. 라일락에게서 꽃 한 가지 얻어와 유리병에 꽂고/ 배추꽃 몇 송이 얻어와 비빔밥 위에 얹고/ 목련에게서 꽃 한 송이 얻어와 뜨거운 물에 우리고/ 단풍 한 잎 얻어와 책갈피에 끼워 놓고 홀쭉한 맘 다독이는/ 살아가는 일은,/ 얻어, 먹는, 일 (나혜경 시 걸식 전문) 우리네 삶, 하루하루는 자연에게서 조금씩 빌려 쓰고 돌려주는 것이란다. 아직 얻어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감사할 가을이다. 평화동 사거리에서 용흥 중학교로 가는 길에 은행잎이 노란 불을 켜서 이 가을을 익히고 있다. 가을향의 맑은 소리를 얻어 들으며 시 한 구절 펼쳐놓고 거닐어 볼 만하겠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청소년 소설 <나는 새를 봅니까?>(문학동네)에 흥미를 느끼게 된 건 중의적 표현을 가진 제목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가 송미경을 향한 남다른 관심으로 시작된 선택이었다. 송미경 작가를 알게 된 건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 꽂힌 책 한 권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떤 아이가>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그로테스크한 설정과 기기괴괴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동화였다. 동화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파격적인 환상성을 가진 작품을 읽고 난 뒤부터 그의 동화를 더 찾아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새를 봅니까?>에는 모두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 <신발이 없다>는 신고 나갈 신발이 없어 외출은커녕 학교도 가지 못하는, 신발을 사기 위해 온종일 웹 서핑을 하는 유주가 등장한다. 마땅한 신발을 사지 못하던 유주는 우연히 발사랑 사이트 운영자 주은발을 만난다. 유주는 저와 너무도 다른 발랄함을 갖춘 주은발에 의해 저도 모르는 사이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신발이 없어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아이. 온갖 핑계로 소통을 회피하고 내 안에 나를 가두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요즘. 그런데도 아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건 결국 물질이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작가는 신발이라는 소재를 끌어와 신선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는 새를 봅니까?>의 주인공 동준은 어느 날 커다란 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를 보게 된 것은 수학학원을 가던 길이었다. 동준은 새에 대해 말하지만, 아빠는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일축하며 시험 성적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즈음 수치화된 공부와 아빠의 지나친 기대에 짓눌린 동준은 친구의 자살로 고장 난 나침반처럼 방향을 잃어버리는데.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에 상실의 나날을 보내는 동준을 새는 이불 같은 커다란 날개로 감싸 안는다. 극단의 경쟁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반짝이는 수십 개의 은빛 눈동자를 달고 있는 새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나지 않는 냄새>는 어른들은 맡을 수 없는 십대들의 냄새 이야기다. 봄이 시작되고 진하다 못해 지독한 솜사탕 냄새가 동네에 퍼진다. 그러나 정작 유리는 친구들이 다 맡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p23. 나지 않는 냄새를 맡는 것 외에 우리 동네 내 또래 어느 누구도 다른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냄새를 모르는 어른들에겐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는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아이들의 침묵에도 귀 기울여 할 이유가 있다는 걸 나지 않는 냄새가 말해주고 있다. <나를 기억해?>의 승우는 친구 소라의 죽음이 같이 담배를 피우다 이모에게 걸린 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6월의 끝자락에서 소라를 찾느라 골목을 더듬는다. 사실 승우는 효주가 밴드에 들어오게 되면서 소라와 조금 멀어진 것에 마음이 쓰였다. 그러던 차에 사고로 소라가 죽자 승우는 소라를 외면했던 시간과 순간을 떠올리며 힘들어한다. 토마스 만의 말처럼 사람의 죽음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의 문제였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한 때는 아주 친했지만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진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헤어짐에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기억하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찰나의 순간에 친구와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 외 <겨울이 오기 전에> <마법이 필요한 순간> 모두 아이들의 내면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벌어진 틈으로 불안감이 조심스레 스며드는 이야기다. 기이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송미경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문장으로 펼쳐진다. 낯설면서도 불편한 그런데도 호기심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모든 것이 희붐하고 막연했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청소년기를 살고 있고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송미경 작가가 들려주는 나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건네주고 싶다. 키와 몸무게, 여드름의 숫자보다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 이해받지 못한 나, 공부에 대한 압박에 점점 좁아 드는 골목길을 걷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머리 위로 수많은 은빛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커다란 새의 날개를 덮고 편안하고 고요히 잠들 길 희망해 본다.
용서하시라! 문화영 시인의 화장술에 대해 논해 보련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산뜻하게, 시인의 화장술은 가벼움을 지향한다. 잡티나 기미 따위를 굳이 감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시에 대한 화장 기술을 익힌 이면에 묵혀온 이야기가 있다. 낙엽에도 추락의 비밀이 있듯 시인의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한 비밀은 통점을 지나 시간의 이파리들로 피어나 떨어진다. 정신문학인 시에 영혼이 있다는 것은 비밀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 문화영 시인은 비밀의 봉인을 해제하고 시인 자신과 안쓰러운 존재를 위한 시의 다양한 화술을 펼친다. 대학원 동기로 만났던 그 옛날, 불혹을 훌쩍 넘긴 시점에 시를 쓰겠다고 생고생을 자처한 그녀가 궁금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이끌렸고 동향(同鄕)인 점도 가까이 지내게 된 배경이 된 셈. 시인을 안 지 10여년 만에 반가운 선물을 받았다. 첫 시집답게 유년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나 성장 서사가 오랜 시간의 파장과 무늬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양한 생의 형식들이 현실적 사물이나 기표를 동원 내면에 눌어붙은 기억의 풍경들을 소환한 것. 물론 기억은 주체의 욕망과 삶의 방식에 의해 선택-배제되면서 재구성된다. 사실적 재구(再構)와 함께 변형되고 현재화 된 그녀의 삶은 행복했지만 쓸쓸함이 도처에 묻어있다.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를 통해 시인의 사유를 구체화시키는 전술은 칼을 오래 갈아온 흔적일 터. 지시와 비유의 간극, 추억과 구축의 공간, 대상과 비대상의 전복이 상처치유의 질료가 되었을 것이고 재현하는 힘과 왜곡과 변용으로써의 묘사가 팽팽히 맞서는 지점에서 시인으로서의 프로의식이 배양되었을 것이다. 시집에서 시인의 기억은 주로 어머니, 아버지, 나라는 세 개의 꼭짓점 사이에서 선택되고 배제된다. 부모님과 행복했던 그리고 서글펐던 기억들이 풍화, 존재론적 심층부까지 뻗어 내린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내면화하는 일련의 과정은 시인의 첫 시집이 어머니께 헌정하는 사모곡(思母曲)의 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도 통렬하여 감정 이입된 필자 또한 한참을 눈물지었다. 연쇄적이고도 쓸쓸한 감각은 1980년 정치적 질병의 시대를 소환한다. 광주518민주항쟁 역사증언대에 자신을 세우고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과 함께 파생되는 신산한 삶들을 적시하는데서 이제 그만, 스스로를 용서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문화영 시인에게 시란, 어머니를 기록하고 싶은 데서 출발하였으나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추억하는 와중 유년기와 마주쳤을 것이고 청소년기의 아픔을 회억했을 것이고 끝내는 아버지와 화해했을 것이다. 자본의 세습과 익명화된 현대사회에서 부유하는 자신을 발견, 윤리적인 자세를 견지하느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년기의 상처와 타자의 상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작가로서의 윤리가 고귀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조만간 깨달을 것이다. 세상에 나온 <화장의 기술>은 독자들의 변화무쌍한 해석 앞에 속수무책일 것이고 이중의 배반에 대한 부담은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 끝에 세상에 나온 <화장의 기술>을 벅차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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