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21 21:26 (Su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소설가, 김탁환 생태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꽃의 아름다움은 고운 빛깔과 향기에 있다. 외관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기는 어렵다. 예수는 영화로운 삶을 살았던 솔로몬 왕도 들판의 나리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을 흉내낼 수 있다면 바로 내면이다. 영하의 날씨와 눈보라, 땡볕과 비바람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꽃과 그를 닮은 사람. 김탁환의 생태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 김탁환은 등단 제도를 통하지 않고 첫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이야기>를 펴냈다. 뒤이어 네 권짜리 장편 <불멸의 이순신>을 썼다. 십오 년 가까이 역사추리소설과 백탑파 시리즈를 꾸준히 발표하다가 2014년 세월호의 아픔을 보듬는 사회파소설 <거짓말이다>를 출간했다. 세월호를 목격한 뒤 과거에서 당대로 시선을 옮긴 작가는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살아야겠다> 등을 잇달아 펴냈다. 그는 지금까지 29편의 장편소설과 3권의 단편집과 3편의 장편동화를 출간하며 소설가의 길을 올곧게 걷고 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여정이다. 인생에서 큰바람 한두 번 맞지 않은 이가 있을까. 큰바람에 낭떠러지까지 몰렸다가 겨우 살아나기도 했으리라. 절체절명의 순간, 어떤 이는 회생하고 어떤 이는 사라진다. 행운과 불운으로 치부하기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한 사람이 평생 지켜온 원칙에 주목해야 한다.(157쪽) 그가 말하는 한 사람의 면면을 떠올려본다. 농민이나 어부의 노동과 생활에는 근대식 공장노동자나 도시의 월급쟁이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얘깁니다.(89쪽)라고 말하던 생태사상가 김종철 선생이 있다. 2006년 5월 곡성에 들어간 후부터, 이 대표는 품이 많이 드는 또하나의 일에 착수했다. 쌀 연구자인 송동석 박사의 도움을 받아 278종의 볍씨를 고른 후, 섞이지 않도록 일일이 손 모내기를 한 것이다. 2006년에는 논 천 평에 품종마다 한 줄씩, 2007년에는 논 8천평에 네 줄씩 심었다.(160쪽)는 농부과학자 이동현도 있다. 한 사람이 더 있다. 공동체 소멸 역시 각자도생이란 단어와 함께 주목받고 있다. 공동체의 안녕보다 개인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회에서 실패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가 김탁환이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는 도시소설가 김탁환이 농부과학자 이동현을 만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동현은 순천대학교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규슈 대학교에서 응용유전해충방제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에 전라남도 곡성의 폐교를 얻어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발아현미를 연구하여 보급하고, 친환경농사로 지은 현미로 가공식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작은 들판 음악회를 열어 기업과 이웃이 상생하는 법을 찾아가고 있다. 작가 김탁환이 이동현의 삶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낸 까닭은 자본을 거스르는 그의 행보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미실란이 어떻게 알려졌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백부장이 답했다. 사람을 살리는 회사로 소개되었으면 해요.(245쪽) 도시소설가가 농부과학자에게 매혹된 이유가 또 있다. 이동현 대표는 새벽마다 논에서 벼를 비롯한 식물, 개를 비롯한 동물과 대화를 나눈다. 복돌아, 복실아! 너희들 생각은 어때? 논 사람들이 만족하는 것 같지?(84쪽) 논 사람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몰라 잠깐 독서를 멈춘다. 다음 문장을 읽는다. 사내의 어법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나무를 숲 사람, 벼를 논 사람이라고 불렀다.(85쪽) 머릿속이 환해진다. 나무와 벼는 숲 사람, 논 사람이고 우리는 그냥 사람(84쪽)인 것이다. 그냥 사람이 되고 나니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미실란 밥카페 <飯하다>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있다고 한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316쪽) 작가는 독자에게 꿈을 함께 꾸며 지방, 농촌, 벼농사, 공동체 등 네 가지 소멸에 맞서자고(13쪽) 손을 내민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죽비를 친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10.14 16: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길상 시인 - 박태건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살면서 비눗방울을 고양이로 상상하거나 구름의 변명을 들어줄 여유, 컴퓨터 안에 부는 바람 혹은 비닐봉투를 머리에 쓴 행운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보인다면 우린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이미 중독된 건 아닐까. 풍요로울수록 헛헛한 날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의 내면이 그만큼 황량한 것이다. 유행하는 새로운 문화에 탐닉하거나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한 것이다. 시 쓰다 쓰다 안 되는 것, 모아서/컴퓨터 폴더에 코끼리 무덤이라 이름 지었다/일생에 한 번/죽을 때가 되어야 찾아간다는 그곳//반짝,/지나치는 시가 있다//신성이 왔다 간 자리/거대한 뼈들의 무덤에/꿈결엔 듯 찾아간 적 있다(박태건 시 코끼리 무덤 중) 박태건의 코끼리 무덤은 일회성을 좇는 현대인의 삶의 풍경과 그 회복을 시적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시의 화자를 시인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이런 풍경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화된 현상임을 감안했을 때 시인은 물신화된 일상의 굴레에 갇힌 존재들의 은유로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물질주의에 침윤된 현대인은 자신들이 물질의 노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편안한 일상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과연 알까. 반짝 지나치는 시처럼 오늘날 시들은 즉물적 존재로 전락했고 사용가치에 따라 죽음의 경계마저 사라진 우리의 일상이 이미 무덤이 된 지 오래다. 코끼리 무덤이란 폴더는 물질의 향유와 빠른 속도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인 셈이다. 따라서 콘크리트 건물과 상품과 자본의 논리로 뒤덮인 도시의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그 문명에 가려진 코끼리를 통해 표출된다. 코끼리와 신성이 간 자리는 시인의 실존적 공허감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비본질적인 것에 매몰된 자아를 태곳적 순수의 세계로 데려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죽을 때가 되어야 한 번 무덤에 가는 코끼리는 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을 상기시키고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 시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 장을 열어준다. 말을 버린 것들은/혀부터 단단해진다/나도 저 나무껍질 같은 지느러미 하나 갖고 싶어서/산의 정수리를 쓸어내리는 겨울바람에/눈을 부릅뜬다(박태건 시 황태라는 나무 중) 나무, 특히 설악산에서 자라는 황태라는 나무의 순정함은 그 나무의 삶의 길과 같다. 허깨비 같은 말들을 단호하게 포기한 황태는 매서운 추위에 비늘 다 떨어뜨리며 얼음계곡에서 몸을 말린다. 삶의 절정인 찬란한 순간이 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언제라도 몸이 더워지면 주저 없이 바다에 뛰어드는, 혼신을 다한 사랑에 삶의 의미를 둔 것이다. 그런 경지는 세속적인 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으며, 막막한 불모지에서 들려온 진정한 삶의 노래인 것이다. 갈수록 자본화되는 시대에 시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해묵은 것들을 시를 통해 상기할지라도 삶이 각별해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박태건은 자연을 전범으로 삼아 인공의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꿈과 더불어 정직하게 산 사람들, 제 몸보다 큰 보퉁이를 인 어머니나 상갓집에 모인 먼 일가붙이, 삼짇날까지 자고 돌아가는 만경고모의 진솔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두고두고 읽히는 작품들이다. △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9.23 16:4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동화작가 - 김근혜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오래 전, <호모 루덴스>라는 놀이하는 인간을 다룬 책이 있었다. 이 책에서 인간은 놀이에서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냈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놀이는 시간의 소비쯤으로 여기지만 사실 예술과 스포츠, 과학까지도 놀이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른도 아이도 놀이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놀이를 빼앗긴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얼마 전, 김근혜 동화작가의 첫 장편동화가 나왔다. 등단 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선보인 책이라서 소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마음껏 풀어놓았다. 제롬랜드라는 공간이 가지는 선명성 때문에 제목부터 시선을 끌었다. 또한, 가상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수많은 몬스터를 탄생시키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우정과 자신들의 일상을 기억하며 제롬랜드를 빠져나오게 하기 까지, 창작 과정의 수고스러움이 눈에 선했다. <제롬랜드의 비밀>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게임과 관련한 동화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게임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찾아 나선다. 친구를 찾기까지 많은 가상공간 속에서 몬스터들과 대항하며 결국 친구인 찬서를 찾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게임은 지나치지만 않다면 집중력이나 판단력, 순발력까지 키워준다. 하지만 게임은 한 번 잡으면 놓을 줄 모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함정이다. 놀이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이 선택한 게임, 하지만 그 대가가 혹독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게임을 무한대로 할 수 있다는 유혹으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쉽게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처럼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면 아이들은 언제든 다시 게임의 유혹에 빠져 일상을 탈출하고픈 생각이 들 것이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가 게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새로운 자극이 함께 하고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짜릿함과 박진감, 생동감이 있다. 이처럼 가상공간은 모험을 제공한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 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대리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고, 어른들이 관여하지 않는 자신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기도 하다. 놀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험과 이야기가 게임에는 가득하다. 그러니 어찌 게임을 멀리하겠는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눈만 뜨면 골목길을 누비던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환경도 시설도 좋은 놀이터가 많지만 빈 공간으로 남아 있고, 아이들은 모두 경쟁으로 몰려 학원을 전전하고 있다.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 기성세대들이 맘껏 누렸던 것처럼 고무줄놀이, 술래잡기,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등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놀다보면 하루가 너무나 짧을 만큼 노는 것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 주지 않는 한 게임의 유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제롬랜드의 비밀>을 통해 아이들이 가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맘껏 놀 수 있는 세상의 필요성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잊힌 기억은 온몸으로 느낄 때 되살아 나!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이 땅의 아이들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놀이의 장을 펼쳐야할 때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9.09 16:5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 김한민 에세이 '아무튼, 비건'

나는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 삶이 변화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살던 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 하루가 잘 변하지 않는 나에게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람이다. 이 책 역시 사람을 통해 만났다. 실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귀결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상상할 능력이 없었다. 편리하고 맛있는 걸 참을 수 없는 나를 핑계로 오래도록 모른 척하던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리함은 비용이 든다. 망가뜨린 것은 또 돈을 들여 고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가공식품으로 가득 찬 내 식생활이 될 수도 있고, 편치 않은 공기가 될 수도 있다. 멀리는 지구 저 끝의 빙하가 녹고, 가까이는 말도 안 되게 비가 오는 어제의 일까지도 이어져 있을지 모른다. 동물과 자연환경에 관한 지금의 전통과 문화는 우리가 그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을 때 형성된 것들이 많다. (중략) 과거에 식량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식문화라고 해서, 현재 변화된 삶의 조건에 반드시 필요할까? 오히려 해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의 향수에 젖어 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지키려고 고수만 할 것인지, 변화하는 지식과 윤리에 맞춰 새로이 창조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아무튼, 비건> 中) 이전의 우리가 무엇을 먹었다고 해서 여전히 그대로 먹고 있지 않다. 일상 속 물건에서 문제를 발견했다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런 논의는 이상하게 인간 이외의 생명을 이야기할 때만 비켜 간다. 다른 종의 생보다 인간의 편리와 즐거움이 우선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벼랑으로 내달리고 있음에도 그렇다. 당장 무엇을 함께하자고 강력하게 주창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느낀 영향력과 변화는 차례로 놓인 도미노 같았다. 내가 본 누군가의 실천을 함께 시도해보려는 도전에 가깝다. 용기를 얻는 첫걸음이 이 책에서 시작됐다. 나는 여전히 채식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머릿속에서 첫 번째 도미노 블록이 넘어졌다. 줄줄이 선 도미노의 끝이 어떤 모양으로 남을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이든지 당신이 새로운 시도에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건 참으로 멋지고 다행한 일이다. <(아무튼, 비건> 中)

  • 문학·출판
  • 기고
  • 2020.09.02 16: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시인 - 오은 산문집 '다독임'

나만의 문장 사전을 만들어 노트에 필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냥 흘려들을 법한 평소의 말과 글들이 미묘하게 읽히는 재미가 있다. 일상에서 관찰한 것과 경험한 것을 쓰고 읽으며, 언어의 결을 가다듬는 순간이 불현 듯 찾아오기도 한다.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가 있는 표지가 따뜻해 보이는 책.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기에 좋은 오은 시인의 산문집 <다독임>이다. 사람과 관계, 주변과 사물을 단어 하나에서 시작하여 확장시키는 글과 문장이 많았다. 우리들의 삶과 감정을 가다듬어주고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다독임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써놓았다. 관찰자적 입장에서 섬세하게 포착한 문장을 시인의 마음결로 느낄 수 있다. 막힘없이 익히는 글, 단어의 변형과 활용, 발견하는 기쁨도 더불어 주는 책이다. 삶의 생채기를 만나고 거기에서 여린 살이 돋아나게 하는 힘, 내려앉은 어깨를 토닥여주는 일, 함께 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힘, 후미진 구석과 상대를 배려하는 힘, 먼저 손을 내밀게 하는 다독임을 읽으며 내 마음을 들춰보았다. 애틋하지만 가까울 수 없는 사이, 빗소리와 현장에서 느끼는 삶의 체감온도, 그리고 씻겨 나가는 모든 것을 채우는 기억의 웅덩이들, 틈을 메워보고 마음의 기울기를 다시 세워보기에 좋았다. 필사한 문장의 책갈피를 들춰 보니 많은 구절들이 새삼 반가웠다. 기대는 간헐적으로 찾아오고 걱정은 매일 들이닥친다. 앞으로 잘될 거야!라는 기대는 내일 당장 뭘 입지? 라는 걱정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기대는 점점 줄어드는데 걱정은 풍성해지니, 간만에 품는 기대는 더욱 애틋하고 소중할 수밖에 없다. 쓸 때마다 찾아오는 기진맥진함이 좋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 내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친애하고와 친애하는 사이에는 다름 아닌 쉼표가 있다. 나는 그 쉼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랑하기 위해서, 마침내 친애하기 위해서 들이쉬는 심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참는 태도인가, 이해하기 위한 안간힘인가. 누군가를 친애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빽빽한 쉼표가 담겨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상대를 아로새기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길 정말 잘했잖아. 혼자 여행하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기 위해 무수한 아무것을 거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병원에서 종달리 초등학교까지 이어지던 일흔 네 개의 정류장처럼. 다독다독은 의태어이지만 다독이거나 다독임을 당할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괜찮아 라는 뭉근하고 다정한 위로가 들릴 때도 있고 괜찮아? 괜찮은 거지? 라는 다급한 물음이 들릴 때도 있다. 어느 것이든 괜찮은 사람이 괜찮지 않은 존재에게 건네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존재도 그 순간만큼은 괜찮아지게 만드는 말이다. 마침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이다. 서로를 다독이는데 서툰 사람들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전해주는 단어의 설렘과 아름다운 울림이 파장을 일으킨다. 덧대지 않고 덜어낸 문장들, 깔끔하고 정교하며 차별화되는 언어에 다정하게 나를 가져다가 앉혀본다. 나의 마음에 타인을 아로새긴다는 말을 새겨보았다. 다독이러 갔다가 나오면서 돌아본다는 말이 와 닿았다. 내게서 나온 다독임이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일에 위로를 얻는다. 채집하듯 건져 올린 글을 읽으며 힘을 얻는 일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한 다독임을 내어주며 곁을 챙겨주고 싶은 날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8.26 16:1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 - 주영국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삼복(三伏) 떠나고, 입추(立秋) 너머 처서(處暑)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지독한 더위 속에 백일홍이 붉다. 삼복 기간 동안 저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벼 모가지가 나온다 하였던가. 주영국 시인의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푸른사상, 2020)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자고로 꽃이 핀다는 것은 그런 일 아닐까. 더워서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순간, 살고 싶던 간절한 마음을 세상에 붉게 터뜨리는일 아닐까 하고. 그렇게 터뜨리고 나면 거짓말같이 청죽의 마디 같은 칸칸의 희망이 오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 선선한 초가을 볕 속에서 벼 모가지가 나오는 거라고. 혁명도 결국은 살자고 하는 것이므로, 단 하나 희망을 위해 시인은낫을 갈아 날을 세운 청죽(靑竹)의 창을 들고 / 자주 세상, 평등 세상을 외쳤을지도 모른다. 생의 뒤쪽에 무슨 통증이 있었는지 유랑지의 쓸쓸함도, 욱신거리는 뼈아픔도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살아낸 몫의 생. 하여 시인은 자주 생의 어디에든 발자국을 찍었을까. 그야 무너진 집터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인감도장 같은 것일 테지만, 돌아보지 못하고 멈추는 날이 비로소 찍는 일 끝내는 날이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 이 악다물고 발자국을 찍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처럼 날 수 있다는, 그런 봄날의 꿈을 꾸는 사람이므로. 물론 그에게 있어 희망은 빚 보증 잘못 섰다 날아간/ 길가의 큰 밭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밭을 주고 간 아버지의 검은 색 뿔도장 같은 것, 또는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목숨일 수도 있다. 이전의 생에서 너는 무엇이었든 /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라(돌아오지 마라 중) 하지만 그는 남도의 사내다. 진안 신안의 섬 어의도에서 태어나 육지의 이 곳 저 곳을 산 이력을 지닌 사람. 제13회 전태일문학상과 제19회 오월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강인한 뼈마디와 뜨거운 숨을 지니고 있는 시인. 즉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희망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만들어진 남도의 오월 정신쯤은 기본으로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체 게바라가 붙잡힐 때 소총보다 더 힘껏 쥐고 있었다는 삶은 달걀 두 개로 말미암아 삶을 달걀을 먹을 때마다 체 게바라 생각에 목이 메기도 하는, 그런 류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가난과, 슬픔과, 그리움에 찌들어야 하는 아픈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어루만질 줄도 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가는 그 필사의 시간을 염려하고, 되레 따뜻하게 감싸 안기도 한다. 그렇게 산 생들을 버리는 것보다 껴안아 버리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것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는 꽃불철공소 하나 눈 속에 넣고 있는 것마냥 강렬하며 뜨겁다. 모욕은 견딜 수 있어도 / 배고픔은 끝내 참기 힘든 // 생존의 밥따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자신이 생존을 염원하는 민중이므로, 통증에 시달리고 공터에 버려진 채 추억을 되씹는 허방세상을 안쓰러이 여길 수도 있는 것. 한마디로 주영국 시인은 대지에 봄비 스미는 옹골진 모양새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사각 진 얼굴에 다부진 눈동자가 다가와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살아 있었느냐, 살아 있었느냐 흔들어 묻는 듯하다. 마치 그 말을 묻기 위해 기꺼이 윤회를 해서 돌아든 바람처럼 말이다. 백일홍의더운 비밀을 첫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안에 몽땅 쏟아낸 주영국 시인의 시편들. 그렇다. 그는 삼복을 건너온 저 붉디붉은 꽃의 힘으로, 끝내 너른 논 벼 모가지를 다 꺼내놓고야 말 심산이다. 그것이 바로 남도 사내, 아니 남도 시인의 뚝심인 것이다. 누군가의 시집을 읽을 때 밑줄 그을 곳이 많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밑줄이 그어지는 곳에서 나와 그가 만난다고 여겨져서다. 그러고 보면 상행선 무궁화호에서, 삶은 달걀과 새점을 치는 저녁, 영광 불갑사와 봄바람 봄 나무속에서 우리는 숱하게 만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서로가 은밀히 교환하는 눈빛 같은 거라는 것을 안다. 시집 속에 그어놓은 밑줄 수만큼, 이 여름 가기 전 시인과 목포 뒷개 어디쯤에 여장을 풀고 새우깡에 낮술 한 잔 하고 싶다. 그 때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희망적일 것이므로. 올 여름은 거 참, 시인의 이름 석 자 생피처럼 붉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8.19 16: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소설가 - 백가흠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백가흠 작가의 2011년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을 읽은 것은 특정 상황이나 일상을 재현한 최근의 단편소설 몇 편을 읽은 후였다. 재현(再現)에 그쳤으나 틈 없이 치밀한 구성으로 사유를 끌어낸 것이 대단치 않은가, 하며 낯설게 하기와는 거리를 둔 작품들에 아쉬운 마음을 누르던 때였다. 그런 까닭에 백가흠 작가의 단편집에 실린 소설이 지닌 낯선 풍경이 새로웠다. 각각의 이야기 자체는 익숙한 것이었으나 인물과 공간이 조화를 이루면서 소설적 분위기를 낯설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한 달 전, 림혜숙이 어린 딸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로 시작하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가 대표적일 수 있겠다. 실종 신고를 하고 림혜숙을 찾아다니던 농장주 김 씨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마을 안에 퍼진 또 다른 소문. p.20 약국 문을 닫는 것은 완고했던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황 약사는 생각했다. 흘깃 약국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약국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에서 나타나듯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부풀려지고 당사자를 고립시키면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알음알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누구도 소문의 진실 여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나 익숙한 이야기인가. <그런, 근원>은 5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가족 해체를 겪게 되는 형제의 이야기를 다뤘다. 80년대 5월, 전라도가 배경인 작품이어서 그런지 p.40 누구도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까닭이었다.는 문장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법부터 배운 동생 근본과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근원의 서로 다른 삶은 개인을 넘어 특정 시대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어린 근본과 근원을 찾은 친척들. p.41 그들은 집에 쌀을 놓고 갈 때마다 개가한 어머니를 욕하느라 아이들의 안부나 필요한 것들을 물을 새가 없었다. 시대가 어떻든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어른들이다. 장소와 인물, 묘사와 행간의 조화로 인한 것일까. 후일담으로 그칠 수 있는 이야기가 한의 정서로 남아 아프고 또 아팠다. 작가를 연상시키는 백이라는 인물이 나오는 <그래서>, <힌트는 도련님>, 에서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소설 쓰는 과정과 고통 등을 담아냈다.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풀었다는 생각이다. p.123 <힌트는 도련님> 모던하고자 하는 나는, 현실의 나와 가장 가까운 백 도령과 손을 잡고 자꾸 서사를 꿈꾸는 나를 몰아낸다.고 작가는 썼지만 나는 그가 구성에 있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서사의 힘으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나면 이야기보다 이미지가 주로 남아 독서 방법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던 내게 잠시나마 이야기를 기억하는 기쁨을 주었다. <그때 낙타가 돌아왔다>, <통(痛)>, <쁘이거나 쯔이거나>를 읽으면서는 인간이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핍과 욕망,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더불어, 작가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고 단편집을 출간할 당시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 하드커버의 딱딱함과 그것을 싸고 있는 겉표지의 부드러움을 먼저 느꼈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은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가벼웠다. 소설집 안에 실린 소설처럼 엉성하지도 촘촘하지도 않은 적당한 구성과 문장이 준 무게감을 닮았다. 너무 낯설지도 너무 익숙하지도 않은 인물과 공간 또한 그와 같은 무게감이었다. 책에서 받은 지극히 주관적인 무게감은 그러나 문학을 향유하기에 충분했다. 백가흠 작가의 단편소설집 <힌트는 도련님>은 무겁거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지만 어쨌든 기분 좋게 돌아오는 휴가와 같았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8.12 17:3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동화작가 - 박서진 작가 '남다른 상을 드립니다'

내가 찾는 아인 흔히 볼 수 없지. 넓은 세상 볼 줄 알고 작은 풀잎 사랑하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들국화의 내가 찾는 아이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박서진 작가의 동화 <남다른 상을 드립니다>(꿈꾸는 초승달)의 다른이가 그 주인공이다. 마음 깊고 이해의 폭이 넓어 세상 보는 눈이 봄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아이, 남다른. 다른이는 경비아저씨가 키우는 개, 딱지와 헤어질 생각에 마음이 아리다. 그즈음 엄마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방학 전까지 상장을 받아오면 강아지를 키우도록 허락한다는 제안이었다. 이보다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다른이는 털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괜찮아요! 하고 싶다. 하지만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어 콜!하고 외친다. 다른이의 상장받기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다른이에게 상장받을 기회가 여러 번 찾아온다. 그런데 그 기회라는 게 다른이 바램과 달리 자꾸 어긋나고 만다. 경비실에서 택배를 훔친 남자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 공로는 엉뚱하게 친구에게 돌아간다. 열심히 공부해 노력 상을 받으려 했지만 1점 차로 받지 못한다. 다행히 인기투표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이로 뽑혔지만 이 또한 친구의 도움 덕분이라는 걸 다른이는 알게 된다. 이쯤 되면 거의 울 지경에 이를 텐데 다른이는 어째 덤덤하다. 다른이 속에 부처님이 들어앉기라도 한 것일까? 다른이는 경찰이 되는 게 꿈인 친구가 모범 어린이 상을 받자 힘껏 손뼉 쳐 응원했다. 노력상을 받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보려는 친구를 보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친구 도움 덕분으로 얻게 된 인기투표도 정정당당하지 못하다며 상장을 거부한다. 어쩌면 다른이는 나에게 또 우리에게 어른이자 스승이지 싶다. 1점 차이, 뒤바뀐 영웅, 조작된 인기투표 앞에서도 다른이는 상장보다 친구를 응원하는 여유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아이에게 기꺼이 부처님 반쪽 상을 주고 싶다. 내가 주는 상장 받고 강아지를 키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목표를 위해 과정을 무시할 때가 많다. 나 또한 목표만 보느라 가는 길에 꽃이 피었는지 그 꽃 색깔이 연노랑인지 진빨강인지 보지 못했다. 나뭇잎이 연두인지 초록인지 모르니 나무를 키운 바람과 햇살의 수고로움은 어찌 생각할 수 있을까. 나무를 둥지 삼아 사는 수많은 생명의 앙알거림은 더더욱 들었을 리 없다. 지난하고 굴곡져 가는 것이 두려워 아예 처음부터 과정 생략하고 목표에 골인하려는 조급함을 보일 때도 많았다. 지금도 그러하니 다른이보다 못한 어른임에 부끄럽기만 하다. 경주할 때 경주마 눈 양쪽에 까만 눈가리개를 붙인다. 말은 인간보다 시야가 넓어 그대로 뛰었다가는 주의가 산만해져 경주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란다. 경주마처럼 눈가리개를 달고 목표에 치우쳐 달려가는 건 아닌지 삶의 속도를 늦추어 봐야 할 일이다. 여유가 생겼다면 짬짬이 박서진 작가의 『남다른 상을 드립니다』 읽기를 권한다.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처마 밑에서 아이와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좋을 계절이다.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선물로 등단했다. 현재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논술 지도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0년 첫번째 장편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을 출간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8.05 15: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유이우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

버드나무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 흔들림을 다 만져볼 수가 없다. 만지는 것은 그에게 실례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 중). 유이우 시인의 <내가 정말이라면>을 읽고 나자, 오리기와 반대말이 실례를 무릅쓰고 내 물낯을 차고 날았다. 어릴 때 가위를 잡으면 오리고 싶었다. 오리들이 색종이를 걸어 나와 물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매혹적인 글이나 기사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 두고, 두고두고 꺼내 먹곤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홀리즘(Holism)에 빠져 살아 잘린 머리칼이나 손톱, 발톱에 숨길을 주지 못했다. 내가 가짜라면? 내가 아바타라면? 내 삶은 이미 결정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이라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일 것이다. 나는 77억이 넘는 사람 중 독특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나는 느끼고, 생각하고, 걷고,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며 진짜 세상을 본다. 이우성 시인은 유이우는 자유와 항해, 구름 혹은 오후, 구름과 항해, 오후와 항해, 오후의 빛을 타고 늘 항해한다고 했다. 구름과 오후에 홀리어 다다르고자 하는 곳 없이 떠가는 항해가 유이우의 시다. 시어는 헬륨풍선처럼 둥둥 떠오르고, 형상기억합금처럼 탄력 있게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든다. 사람들이 의미, 의미하니까 그렇지, 어차피 세상의 절반은 무의미다. 시인은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있는 여러 스펙트럼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색다른 비법으로 버무린 어휘와 문장을 무인 택배함에 넣어 놓고 저 멀리 가 있다. 시가 시에게 가도록 사람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시인은 말하였는데, 오늘 나는 훼방꾼이 되기로 한다. 내 마음을 오려간 연과 행을 잘라 내 마음에 붙여 놓는다. 거울신경에 늘 비추어 본다. 당신도 그렇게 붙여넣기를 하다 보면 시집 한 권이 사라지는 매직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길 잃은 메아리가// 매미 속에서 우는 법을 알고/ 다시 돌아오는 일(맹인 중). 나무가 비키지 않으면 세상이 나무를 돌아간다(비행 중). 노래를 들을 때 우리는 한명인 것 같다(어린 우리가 중). 언제나 그 음에/ 머무르려고// 피아노가/ 음악 바깥으로/ 나온다(조율 중). 더 오래 서성이기 위해서/ 지구가 무겁구나(풍경 중). 힘을 겨루지 않아// 해는 쉽고/ 어렵지 않고// 해는 막차처럼 소중해지는데(위로 중). 답장처럼 둘이 더 친하게/ 발음으로 물감을 섞는다(놀이 중). 영원, 하고 부르면 계속되는/ 둥근 느낌들(운명 중).

  • 문학·출판
  • 기고
  • 2020.07.29 16:4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동화작가 박예분 그림책 '우리 형'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속에서 추억을 쌓아간다. 그 추억은 때때로 기억 속에 묶여 가슴 한쪽에서 산다. 특히나 아리고 슬픈 기억은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가족 간의 추억은 살아가는 동안 아련한 형태로 남아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고, 아픔으로 남아 있기도 한다. 이처럼 오래된 기억을 소환해서 책으로 엮은 박예분 작가의 그림책 『우리 형』이 출간되었다. <우리 형>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형과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첫 장을 펼치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전형적인 우리 시골 모습이 등장한다. 하얀 눈이 내린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펼쳐진 논, 밭에는 하얀 눈으로 가득하고 기다란 싸리비에 앉아 있는 어린 동생을 형이 앞에서 끌고 가고 있다. 동네를 지키는 커다란 나무들은 빈가지만 남았지만 황량하지 않다. 그것은 형과 동생의 웃는 모습만으로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열두 살이나 많은 형은 아버지와 다름없다. 이불에 오줌 싼 비밀도 지켜주고 처음 본 유리구슬도 사다준다. 받아쓰기 20점을 맞았을 때도 괜찮아, 형도 너만 할 때 그랬어.라며 내편이 되어 위로해 주며 한글을 가르쳐 준다. 얼음이 얼면 썰매를 만들어 주고 한 번도 넘어가지 않는 왕딱지를 만들어준 형은 나에게 하늘같은 존재이다. 형이 떠난 뒤 나는 형이 그랬던 것처럼 동생을 보살핀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피난을 가기도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인민군에게 시달린다. 그러다 형의 수첩만 집으로 돌아온다. 작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큰아버지의 비망록을 읽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닳은 수첩에는 고향 주소와 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청년이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쟁터에서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직도 휴전 상태로 남북관계는 요원하기만 하다. 또한 이산가족들의 슬픔은 여전하다. 전쟁이 개인의 삶과 가족들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이 책을 통해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7.22 16:5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이준관 동시집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중략)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이준관 시인의 동시는 읽을 때마다 느끼는 특별한 맑음이 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눈에는 꽃밭도, 마당도, 푸른 들판도, 파란 하늘도 다 아름답고 넓은 세상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채송화꽃의 시기부터 시야를 확장하고 화자를 성장시킨다. 시인이 감탄한 차암 많은 집에서도 아이가 바라보는 순수한 눈이 벅차오름을 느끼게 한다. 참이 아닌 차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순수는 시인의 동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생각이 많아요.에서는 나름 심각한 생각을 방해하는 엄마를 극복하고 아이는 희망을 꿈꾼다. 깜짝! 세상을 놀라게 할지 누가 아냐고 말이다. 그 아이에게는 자기만의 필살기인 반짝 빛나는 생각 하나가 있으니까. 시인의 동시를 읽는 동안 독자로서의 나는 신나고 즐거운 상상을 하는 아이 하나를 줄곧 만난다. 시인 또한 동시를 쓸 때면 늘 가슴이 설레고, 자연과 친구하는 즐겁고 신나는 아이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가끔 아이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낙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제로 아이를 동시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아이를 찾아가 친구로 만난다. 놀이터에서 같이 그네도 타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도 하면서 가까이 가는 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동시 속의 아이가 자유롭게 뛰어 노는가보다. 봄볕은 모두에게 고루 내리쬔다. 차별이 없다. 따사로운 봄볕은 올망졸망 모여 사는 골목 안을 따뜻하게 만든다. 다투는 고양이와 강아지, 민들레꽃과 냉이꽃, 골목사람들, 나지막한 지붕, 빨래, 화분, 조그만 아이들 신발까지 봄볕을 나눠준다. 할아버지의 손수레는 남이 버린 헌 것만 모으러 다니는 할아버지 수레에 생명을 실어주는 뭉클함이 있다. 버려진 화초는 헌 신문지에 싸 손수레 앞에 싣고, 데리고 와 기르는 작은 개는 할아버지 뒤를 따라간다. 누군가 생각 없이 버린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운다. 쓸쓸한 할아버지 수레 뒤를 지켜주는 개의 모습이 차암 따뜻하다. 조그만 발은 첫 연 1행과 마지막 연 1행에 참 놀랍지 않니?하며 감탄을 두 번 한다. 25cm가 될까 말까 한 조그만 발이 얼마나 묵묵히 걷고 버티고 있음을 돌아보게 한다. 가장 아래에서 힘겨움을 감내하는 발, 작은 간지럼에도 웃을 수 있는 넉넉함을 그렸다. 시인의 눈은 또 섬세하다. 큰 별 뒤에 숨은 작은 별, 조그만 일개미들처럼 작은 것을 발견한다. 초승달에 끈을 매달아 별들이 짤랑짤랑 소리 나는 가방이 가지고 싶다는 동시를 읽다 문득 예전에 부르던 동요가 떠오른다. 푸른 하늘 은하수 작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언제 불러도 맑고 순수한 이야기가 그려지는 노래다. 이준관 시인의 시는 자연을 노래하고 작은 마음을 노래한다. 아이들은 물론 골목길과 자연만물이 다 친구가 된다. 작은 세상을 우주보다 넓게 노래한다. 지금도 시인은 아름다운 무언가를 찾아주는 시를 찾고 있을 거다.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보는 시인의 세상은 늘 따뜻하다. 이런 따뜻함을 품었기에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길 희망한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7.15 17: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문신 시인 - 문정 시집 '하모니카 부는 오빠'

우리의 눈높이가 초록으로 우거지는 계절이면 떠오르는 시 구절이 있다. 아직도 모든 산맥에서는 강물냄새가 난다라는 문장은 시 물고기자리에 놓여 있고, 그 시는 문정 시인이 썼다. 시가 실려 있는 시집 <하모니카 부는 오빠>는 여기 있지만, 시인은 여기 없다. 내가 알기로 그는 시로 태어났어야 옳았다. 결과적으로 시인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싶지만, 시집 한 권으로 그를 대신하는 일은 크게 아쉽다. 그런 까닭에 헙수룩한 기분이 들 때면 나는 그의 유고 시집을 펼쳐들고는 소리 내어 읽는다. 꼭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그의 시가 마침내 눈을 뜬다. 문정 시인은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가을, 자신이 쓴 시의 한 구절처럼 그는 모천으로 헤엄쳐 가던, 수많은 연어나 송어처럼 신화도 말라버린 달력 속에 갇혀버렸다. 나는 특별히 그의 등단작 하모니카 부는 오빠를 좋아한다.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을 찾아 밤하늘을 수없이 올려다본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따뜻하고 유쾌한 시는 기어코 가슴에 강물을 들여놓고 만다. 그런 날이면 강심까지 숨을 견디며 자맥질해간다. 그의 시는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 서늘하고 맑기 때문이다. 또 신발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두 무릎 꿇고/내 이승과 하늘 별장도 모두 다 내맡기고 싶은 신들이,/현관에 버려져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마지막 연을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몰아쉰다. 찬탄하기 위해서다. 나는 기다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에서 배웠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의탁할 수 있는 신발의 쓸모에도 새롭게 눈을 떴다. 한 편의 시에서 두 가지, 세 가지를 깨우쳤으니 나는 그의 시에게 인생의 한 나절쯤을 빚진 셈이다. 이제 드는 생각이지만, 그는 제법 소란한 사람이기도 했다. 말수가 적은 대신 그의 눈빛은 늘 어딘가를 바쁘게 헤집어댔다. 구름과 꽃과 나무와 언덕과 국밥과 택시와 골목들이 그를 숱하게도 소란하게 했다. 그 소란을 끌어안고 그는 시를 썼다. 밤벌레가 내 속에 들어와 알을 슬어놓(밤벌레)은 이야기도 노을 한 냄비를/보글보글 끓여 내놓고 있(가을햇볕)는 가을 햇볕 이야기도 그렇게 썼다. 그렇지만 그의 시를 읽고 난 속내가 소란한 것을 두고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이 무렵이면 일없이 소란할 뿐, 그래서 그의 시집을 펼칠 뿐,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가는 것 뿐, 그저 그냥 그럴 뿐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7.08 16:5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시인 - 최동현 시인 시집 '바람만 스쳐도 아픈 그대여'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지는 삶은 없다. 만약 그런 삶이 있다면 누구라도 기꺼이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시인의 길도 그렇지 않을까. 간절히 원했으나 끝끝내 시인이 되지 못하는 이가 있고, 의지와 무관하게 시인의 길을 걷는 이가 있다. 어떤 시는 당대에 사랑받기도 하고 어떤 시는 시간이 지난 후에 더 사랑받기도 한다. 어느 날 시인은 선배인 정양 시인이 건네는 참말로 시인의 가슴을 가졌다.(<밤차에서>)라는 말에 마음 설렌다. 그 설렘은 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시에 대한 불씨를 지피던 바람이기도 했다. <바람만 스쳐도 아픈 그대여>는 그가 그런 가슴을 다독이며 써 내려간 시집이다. 이 시집이 1985년 <남민시> 동인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시인의 오랜 필력에도 불구하고 첫 시집이라는 사실은 의외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평생을 시를 품고 살아온 이에게 첫 시집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가 걸어온 삶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집은 낯설고 생경하면서도 풋풋한 언어와 잘 익고 곰삭아서 어느새 경계가 모호해져 버린 언어가 적당히 어우러진 토탄층처럼 다양한 결을 갖추고 있다. 오랜 시의 여정만큼이나 오늘날 읽어 보면 다소 생경한 시도 적지 않다. 이 역시 그가 걸어온 세계의 한 부분일 것이다. 시집의 1, 2부의 시가 삶의 거친 외연으로 향한 시선을 보여준다면 3, 4부는 가깝고도 먼 존재인 가족에 대해 깊어지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몇 편의 시에서 보여주는 아버지(<퇴원>, <아버지>)나 아내에 대한 곡진한 사랑(<아내>, <아내 생각>, <수술>), 아들에 대한 연민(<운동화>)은 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삶의 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일이 사실은 거창한 게 아니라 소소한 관심의 연장이었음을, 그 관심이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시인이 삶의 갈피에서 그걸 배우듯, 우리 역시 그 평범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그의 시가 한 시인의 서툰 고백이기에 앞서 주위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제대로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무수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시에 알갱이보다는 쭉정이가 더 많다고 고백하며 은행나무가 되고 싶었던(<은행나무>) 시인은 얼마쯤 그 꿈을 이루었을까? 오늘은 그 고백의 끝을 붙잡고 나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좋은 시란 과연 어떤 시일까.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일인가. 언제쯤이나 우리는 그 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문학·출판
  • 기고
  • 2020.07.01 17:3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경종호 시인 - 박성우 시인 '컵 이야기'

우-리하고 천천히 입술을 열면 입안 가득 장다리꽃 향기가 들어와 고이는 말, 을 담은 책이 있다.커커라는 주인공을 가진컵 이야기가 있다. 커커 대체 무엇이 큰 것일까? 입일까, 귀일까, 하다가 그것은 귀였구나! 했다. 이 책은 시인의 우화고, 동화이니까. 시인은 듣는 사람이니까. 생각하니 눈일 수도 있겠다. 시인은 보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시인은 들어주고 보아주는 사람같다. 나를 들어주고, 보아주었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박성우 시인의 이 컵을 가만히 곁에 둔다. 이 컵에는 커다란안이 있다. 그안에존재라는 우주를 한 방울 물방울로 담아 놓았다. 참 맑은 얼굴, 참 맑은 눈동자를 가진 시인은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다. 단정하다. 주인공 커커가 되어 시인이 삶을 고스란히 보여줄 뿐이다. 쉽게 제 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고 하늘과 밤과 낮, 새와 바람, 흙과 벌레의 말을 들어준다. 넝쿨이 무엇인가를 감고 오르다 감을 것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라도 감고 오르는 그 힘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세상은 이런 사소한 것들의 움직임이 만물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들어주는 것만으로도보여주려 한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은 꽤 조심스러운 일이 된다. 얇은 지식으로 그것을 포장하려는 것은 아닌지, 어설픈 사고로 그 책을 초라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염려하게 된다. 그래서 어설픈 수사 몇 문장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그냥 이 책에 담긴 문장을 옮김으로 보다 더 가까이 안내하고 싶다. 외로움에 익숙해져 외롭지 않은지도 모르고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둘은 숨기고 싶었을 자신의 모습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일로 자신을 더욱 아껴주고 사랑해주었다 버릇없이 구는 차차를 커커는 온전히 받아준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며 내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다 만족스러운데 너에게 줄 거라고 생각하니 다 부족해 보여. 이런 게 사랑인가? 외로울 때면 외로운 노래를 듣다가 울었고 외로운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더욱 외로워져서 울었다 음, 그냥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시간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 외로움이 지겨워하다 떠날 때까지 자신이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울었고, 자신이 아니었다면 꽃잎을 아무도 봐주지 않았을 것 같아, 꽃잎을 안쓰러워하며 엉엉 울었다 놓쳤던 마음 하나를 겨우 발견했을 뿐인데 걸음이 경쾌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커커는나이고너가 되어우리를 보여준다.이렇듯 저마다 자리에서들어주고, 담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을.

  • 문학·출판
  • 기고
  • 2020.06.24 17: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시인 - 박수서 시집 '갱년기 영애씨'

아내가 밤마다 사라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 나 혼자 누워 있다. 거실에 나왔다가 소파에 잠든 아내를 보게 된 것은 얼마 전부터다. 밤새 아내는 어디로 다녀온 것일까? 혼자 깨는 아침이 늘어나면서 나는 아내의 꿈이 궁금하다. 분명 그녀와 나는 생의 중요한 고비를 넘고 있다. 갱년기다. 박수서의 여섯 번째 시집 <갱년기 영애씨>는 중년의 다시 겪는 사춘기 이야기다. 사는 일이 자꾸 삐걱거릴 때, 그래서 간신히 견디는 일상의 무사함이 고맙게 느껴질 때 이 시집을 읽어보자. 사춘기는 신체와 정신이 재구성되는 시기. 이때 겪는 성장통은 다음 한 세대를 견디게 하는 예방주사다. 생활인으로 살아온 중년의 시인은 갱년기를 겪으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음 시간을 준비 한다. 시인은 시간의 불안함을 견디는 존재일까? <갱년기 영애씨>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시적 버전이다. 시집 곳곳에서 순수했던 시절을 호명한다. 시인의 사랑은 때론 너무 무겁고(주문진항) 자꾸 삐걱거려도(마흔일곱) 살아야 하는 법을 배운다. 갱년기는 한때 눈부셨던 초록의 기억을 조금씩 꺼내 먹으며 살아야 견딜 수 있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주말 부부인 시인은 월요일은 혼술 하고 금요일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혼자 견뎌야 할 일주일을 혼술로 달래는 갱년기는 지독히 외롭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 지금. 여기. 없는, 사아랑은 눈물겨운 삶을 견뎌야 하는 것이니까. 생각건대 박수서 시인은 사랑이라는 닻에 자신을 묶어두고 산천을 떠도는 에코의 숙명을 가졌으리라. 시인은 경험한 것에서 상상하고 상상하는 것에서 성찰한다. 평생 다른 사람의 등만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을 시인은 아프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 비애야말로 시인이 발견한 사랑의 문법이 아닌가? 내가 알기로 애달픈 사랑아 그래도 어떡하니?라는 문장을 시에 담은 시인은 지금까지 없었다. 한국시가 발견한 눈물의 또 하나의 경지가 여기에 있다. 이번 시집에는 먹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이 냄새는 갱년기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의 표현이다. 아, 오늘 하루도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이 왜 이리 아프게 들리는 걸까? 시인의 절창인 흑백영화처럼 눈이 내리고 부글부글 홍합탕은 끓고 있어라가 어울리는 계절이 기다려진다. * 박태건 시인은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가족사로 등단했다. 시화집 <봄, 기차>, 산문집 <나그네는 바람의 마을로> , <사람의 마을에 꽃은 피고> 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6.17 16:5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 김한민 그래픽 노블 '책섬'

스스로 여러 이름을 만들어 활동한 작가가 있다. 그가 사용한 이름은 무려 120여 개. 그 이름마다 결이 다른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얘기. 이 신비로운 작가를 내게 소개해준 이는 만화가 김한민이다. 어느 날 훌쩍 포르투갈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페소아의 작품을 연구했고, 최근까지 페소아의 시집 3권과 산문집 1권을 번역했다. 김한민 역시 수많은 영혼을 가진 페소아를 닮았다. 작가이자 한 해양동물보호단체의 활동가이며, <아무튼 비건>을 통해 비건(완전한 채식주의자)의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나와 동년배인 이 재주 많은 작가가 부럽다 못해 미워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마냥 질투만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지은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 <책섬> 때문이다. 구구절절 이야기가 장황하였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책섬>이 바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 책섬에는 책 짓는 노인 한 명이 살고 있다. 책이 쇠락하는 시대에 책 만드는 사람으로 태어난 노인은 말년에 자신의 책 짓는 기술을 전수받을 제자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난 제자는 하필이면 책병에 걸린 아이. 방문부터 장롱, 냉장고, 심지어 벽에 걸린 스위치까지 펼쳐지는 것은 무엇이든 책으로 보이는 기이한 병에 걸린 어린 제자와 노인은 무사히 책을 만들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닿기까지 그 과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하겠는가. 책 짓는 노인은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이라고 말한다.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문제투성이 결투를 유리하게 만드는 그만의 방법은 직면하기이다. 끝없는 직면. 문제가 나한테 질려버릴 때까지 버티는 것.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난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회피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진득하니 견디며 우리는 많은 일을 헤쳐 나왔다. 노인과 어린 제자가 책으로 만든 섬, 섬으로 만든 책, 책섬을 완성한 날. 노인은 제자를 책섬에 실어 보낸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을 암시하며 책은 끝이 난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이야기가 대개 그런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앞에도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얄궂게도 고군분투하며 그 문제를 돌파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독자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책장마다 글과 그림이 구별 없이 한데 섞여 뛰노는 <책섬>.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으로, 여백이 넉넉하여 빈 곳에는 독자가 자신만의 질문과 사색을 채워 넣기에 좋다. 책 속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6.10 17: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 - 김용옥 수필집 '생각 한 잔 드시지요'

들녘엔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고 모내기를 마친 논에선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피어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봄조차 빼앗겼다고 생각했는데 계절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시간대로 흘러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발이 묶인 요즘, 마음의 발을 움직여 생각 한 잔을 마시러 떠나본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그녀, 김용옥. 많은 작품 중에서 강하게 마음을 흔드는 것은 네 번째 수필집인 <생각 한 잔 드시지요>이다. 5부로 구성된 마흔한 편의 수필을 읽다보면 자연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족과 이웃, 세상을 향한 발걸음의 방향을 고민하게 한다. 아직 갈아엎지 못한 마음밭에 올곧은 생각을 심어주고 내공을 갖춘 삶을 추구하게도 된다. 더욱 반가운 것은 씨오쟁이, 뱅뱅이질, 낭차짐하게 휘어진, 타분하거나 짐짐하다, 사슴사슴 낯설게 간다, 빗대짐을 한다 등 정감 있는 순우리말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서 있는 이 땅 정서가 담뿍 담긴 우리말을 통하여 이 곳에 어울리는 정서를 누릴 수 있게 한다. 아울러 꽃마리, 봄맞이꽃, 복수초, 타래, 은꿩다리, 솜방망이, 매발톱, 뻐꾹나리, 누운주름잎 등 백서른세 가지나 되는 야생초를 가꾸며 삶을 수용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그녀의 삶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아픈 사랑 차마 못 다한 사랑의 현신 꽃이라며 아버지의 사랑, 하양 나팔꽃을 키우는 작가. 우리는 어떤 꽃으로 현신하여 어떤 이의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유월의 삼천천은 바람을 노래하는 소리쟁이. 화해를 소망하며 피기 시작한 개망초. 보라색의 갈퀴나물꽃과 각시붓꽃. 하얀 등을 달고 있는 토끼풀. 노랗게 꽃을 피운 씀바귀나 애기똥풀, 금계국. 그 위를 날아드는 노랑나비. 김의털이나 새포아풀 위에서 먹이를 찾는 참새 등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이 책을 읽은 후엔 이러한 자연의 변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곁에 앉아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들 모두 먹다 죽다의 생활인이 아니라 먹다 꽃 피고 죽다의 사랑이 되면 진짜 좋겠다. 작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우리 독서문화운동본부와 전주우석대학 평생교육원, 광주조선대학 평생교육원 등에서 독서지도사를 양성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6.03 18: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시인 - 김헌수 시화집 '오래 만난 사람처럼'

오래 만난 사람, 눅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사나흘 아카시아 향 가득한 비가 내렸습니다.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물상들, 멀고 아득한 것을 떠올릴 때 기억하고 싶은 지향이 풍경을 왜곡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지요. 오늘 저는 누군가의 삶 지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추억의 무늬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수세미를 팔던 여자의 좌판 흥건했던 말들에 습기를 닦아주고 생의 장단에 맞춰 후드득거리는 빗방울과 복받치는 가로등 아래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삶의 무상함에 어깨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장면과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동질적 공감에 실은 따뜻했습니다. 시간이 한 순간 흘러가버린다는 것은 통념일 뿐 추억은 소멸이나 과거의 분열이 아니라 생성의 지표였던 거지요. 대창이용원, 방물장수, 쌀집 등 철거위기에 놓인 존재처럼 불안한 신분들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에 경의를 표해봅니다. 타자에 대해 편집증적인 적의나 설익은 풍자 따윈 없습니다. 시인이 좋아한다는 국수 한 사발 대접하는 것처럼 소박하고 애정 어린 시선만 가득합니다. 시인에게 기억은 단순히 시간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재구성이며 굴곡과 상처들을 기민하게 수신하는 육체인 듯합니다. 저 또한 현재의 삶에서 이탈하고자 과거로 돌진 중이었습니다. 엉켜버린 오후, 자귀나무, 루드베키아가 있는 거리에서 오래 만난 사람을 소환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그것이 생채기를 환기시킬지라도 불가역의 시공간에서 삶의 흠집과 고단한 생활의 구멍도 박음질했던 재봉틀 소리를 내내 듣고 있었던 겁니다. 시인에게 모과나무와 골목 끝집과 모래내 다방과 곤달걀을 먹는 아버지는 소멸의 영상이 아니라 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 화소인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와 걸쭉한 입담을 나누던 방물장수 또한 유년기 설화의 한 장면인겁니다. 왕사탕을 굴려 먹으며 귀가 쫑긋 서던 그런 날이 있었기에 단념하거나 절망하고 견디면서도 시를 쓰며 꿈 꿀 수 있었던 거지요. 과거와 현재가 삼투압 되어 생의 절박함과 쓸쓸함이 그리움으로 여물어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오고 있는 것이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기명숙 시인은 목포 출신으로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됐다. 글쓰기 센터, 공무원 연수원 등에서 강의 중이며 시집으로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5.27 16:4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 한창훈 장편소설 '꽃의 나라'

마침내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슬픔마저 무성영화처럼 비어버린 적막. 이팝꽃 흐드러진 5월의 광주, 바람결에 푸르게 빛나던 잎사귀들의 소란스러움을 떠올리는 것마저도 이상한 계절, 1980년의 봄이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된 2020년 5월, 우리가 한창훈의 <꽃의 나라>를 찾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되는 재생에서 멈춰버린 흑백의 기억을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이다. <꽃의 나라>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난다. 한창훈이 굳이 열일곱 살에서 열여덟 살의 나의 성장을 통해 정말 이상한 1980년 5월을 진술한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희망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누렇게 삭아버린,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생활계획표 같은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라고. 한창훈의 <꽃의 나라> 1부는 온통 이상한 사람들 투성이인 나의 세계를 다룬다. 2부는 1980년 5월의 진실을 담고 있다. 나가 열여덟 살이 되는 2부의 봄에서, 최소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한 어른인 생물교사에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라고 묻는다. 교사는 다시 그의 선생님을 찾아가 알래스카 개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이 물러가라고 외치는 사령관이 만들어낸 짓, 그 사령관에게 필요한 공포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혼란을 겪는 동안 나는 그들이 원한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숱한 죽음의 공포는 죽음을 일상의 풍경으로 만들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싸우게 한다. 슬픔도 애도도 사라진 극한의 공포는 글의 마지막까지 슬픔을 허락하지 않는다. 진실을 진술하며, 감상에 빠진 감정의 피로함만으로는 이상한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 *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정숙인 소설가는 역사를 마주보는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백팩과 빛의 증거와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5.20 18: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최형 시집 '다시 푸른 겨울'

휘내닫는 불길은 아우성으로 후끈거리더니/ 불꽃 튀듯 후드득거리더니 마침내(시 다시 푸른 겨울 中) 왔다던 1987년 6월. 그때 전주 팔달로에 모여든 사람들은 들판처럼 거칠었던 그곳에서, 한길 가득 도도한 불빛의 흐름을 만들었다.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토록 목 놓아 부르던 꿈은 여전히 신기루다. 당시 이순(耳順)이었던 한 시인은 1987년 6월항쟁부터 1991년 12월까지 전주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이 땅 민주화운동을 대하 서사시로 형상화했다. 시인 최형(1928-2015). 늘 푸른 문학청년이었던 그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하늘선비가 되었을 그의 힘찬 목소리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일 것이다. 최형은 시와 소설과 수필로 현실과 역사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고, 꾸준히 시대의 아픔을 토해냈다. 젊은 날의 그에게 문학은 신산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구원이었고, 현실의 모든 모순에 대한 저항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일체의 사슬과 멍에, 그리고 소외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해방과 희망의 언어였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철저한 자기 확인과 안온함에서 벗어나는 일. 시간은 포위망을 좁혀오듯 그를 에워싸기에, 세월을 머금은 그는 더 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보통의 생활인에서 싸우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어를 분주하게 옮겨 시집 9권과 산문집 3권, 소설집 1권, 자서전 1권, 시문집 1권 등 15권의 책을 냈다. 이데아와 서정의 행복한 결합. 저항이 없어지면 문학의 고뇌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그의 샘은 절대 마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저항적인 시를 사나운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사나운 시와 사납지 않은 시의 경계는 없다. 현실과 역사, 삶을 향해 늘 깨어있는 그의 시들은 스스로 성찰을 통해 생명을 얻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성찰은 민족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며, 그 생명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안아야 할 상처이고 각성이다. <다시 푸른 겨울>은 시대의 진공을 뛰어넘어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불러온 날카로운 긴장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고문 타살의 충격과 분노로 점화된 민중의 항거는 1987년 6월 민주대항쟁의 들불로 이어지고, 대통령 직선의 열기와 참담한 결말, 위장된 민간군사체제 노태우 정부의 출발, 그 뒤를 잇는 끊임없는 사건과 투쟁, 투쟁들. 이 두꺼운 시집의 어느 한 면을 들추어도 생생히 살아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마주치게 된다.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는 629가 과연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 길고 긴 서사시는 민주화를 가져온 사람들의 고귀하고 치열했던 삶과 암울했던 역사와 고난을 어지간히도 생생하게 우리 앞에 털어놓는다. 더욱이 이 대하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 전라북도에서 살을 맞대며 살아가는 낯익은 인물들이다. 이 서사시는 노(老) 시인의 눈물겨운 현장 체험의 진솔한 기록이며, 지면 안 되는 싸움, 그러나 질 수밖에 없었던 싸움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던 그 시절 이 나라 사회운동가들의 처절한 기록이다. 어두운 권력에 솟구치는 시인의 속내다. 이 수상한 시대에도 신록은 푸르고, 선량한 사람들의 바람은 오늘도 광장 이곳저곳을 유전하며 배회한다. 최형 시인의 추모 5주기(5월 16일), 결코 흔들리지 않던 하늘선비의 꼿꼿한 시대정신을 다시 떠올린다. *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한 최기우 작가는 연극창극뮤지컬창작판소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서 <꽃심 전주>와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0.05.13 17:5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