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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에서 미국가재가 발견되었다. 만경강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가재를 보니 만화영화 개구리 소년 왕눈이에 나오는 가재가 생각났다. 욕심 많은 권력자인 투투의 부하인 가재는 무지개 연못의 평화를 깨며 행패를 부리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특히 투투의 딸인 아롱이의 남자친구 왕눈이와 가족을 괴롭히며 투투와 함께 미움을 받는 가재는 미국가재를 닮았다. 이 미국가재가 발견된 강에는 신천습지(新川濕地)가 있다. 신천습지는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류하는 완주군 삼례읍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이어지는 약 2km 길이의 만경강 하도습지(河道濕地)이다. 신천습지는 만경강에서 생태계가 가장 우수한 곳으로 특히 중앙부에 퇴적물이 쌓여 생긴 섬인 하중도(河中島)는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게다가, 신천습지가 생겨난 이유를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아픈 우리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생명을 품은 곳이라 특별하기도 하다. 일제가 만경강을 직강화하면서 그 결과로 자연이 만들어낸 습지가 바로 신천습지이다. 풍요로운 강이란 말이 걸맞은 만경강 일대는 우리나라 벼농사의 중심지였다. 그렇다 보니 일제 강점기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목적 아래 만경강 고유의 모습도 달라졌다. 만경강을 농경지에 물을 대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일제는 구불구불한 만경강의 물길을 펴며 길고 넓은 제방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직강(直江)화했던 것이다. 고지도에 그려진 만경강의 굽이쳐 흐르던 유려한 물길과 일제 강점기 이후 모습을 비교해 보면 옛 강의 흔적과 변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직강화의 여파로 옛 물길이 지났던 곳에도 습지가 생겨났고 현재 회포대교 인근에 제방이 생기면서 소양천이 만경강으로 합류되면서 퇴적물을 쌓았고 그곳에 생물들이 자라나면서 습지 생태계가 자연스레 생기게 되었다. 물이 만나는 곳으로 유역이 넓은데다가 곳곳에 수중보가 조성되어 있어 유속의 변화가 심하지 않고, 습지 내에 많은 하중도가 있어 습생식물, 수생식물 등 다양한 식물종과 군락이 분포하고 있고 어류의 산란처이자 서식지로 많은 새들이 찾는 곳이다. 이 지역 일대 습지식생의 식물은 왜개연꽃과 노랑어리연꽃 등 연꽃군락과 마름모 모양의 마름, 꽃대가 나사처럼 꼬불꼬불한 나사말, 꽃이 낙지다리 같은 낙지다리, 잎이 자라등 같은 자라풀, 네 개의 잎이 밭 전(田)자 같아서 전자초라 불리는 네가래, 부들, 달뿌리 풀, 흑삼릉, 고마리, 갈대, 줄 등이 군락을 이루며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신천습지가 특별한 이유는 연잎에 가시가 있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의 가시연꽃이 발견되었던 곳이고,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자생하는 북방식물인 개쇠뜨기 군락이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꼬리명주나비의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이 자생하여 군락을 이룬 곳이 바로 신천습지이다. 꼬리명주나비. 출처= 국립생물자원관 꼬리명주나비는 한때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던 나비였지만 환경오염과 농약 때문에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이 귀해지면서 희귀식물 약관심종으로 분류돼 있다. 꼬리명주나비는 나비박사 석주명(1908-1950년)이 이름을 붙인 나비로 제비꼬리처럼 가늘고 긴 꼬리를 가졌고 날개가 명주의 색과 무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수컷은 회백색 날개에 검은색과 붉은 무늬가 있는 반면에 암컷은 흑갈색 날개에 노랗고 붉은 무늬가 있는 호랑나비과의 한 종류로 꼬리범나비로도 불린다. 나는 모습이 아름답고 우아해 나비수집가들이 탐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꼬리명주나비는 우리나라 고유종으로 중국 연해주 등에 분포하며 일본에 없는 나비였는데 1980년대 일본 수집가들이 우리나라에서 몰래 이식해 가 일본 동식물 도감에 올려놓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꼬리명주나비는 쥐방울덩굴에만 알을 낳고 애벌레가 쥐방울덩굴만 먹기 때문에 쥐방울덩굴이 사라지면 꼬리명주나비도 사라지게 되는 공생의 운명을 지녔다. 그 두 연이 엮여 자생하는 연유로 신천습지와 만경강 상류의 둑길에서는 쥐방울덩굴과 꼬리명주나비의 알과 애벌레를 살필 수 있는 주요 관찰지가 되었다. 신천습지는 만경강의 습지들과 더불어 습지 생태계를 형성하며 만경강의 허파로 불리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현재 익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진행하는 만경강 하천환경정비사업도 신천습지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고, 신천습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주민과 전문가들이 습지 생태계 모니터링을 꾸준히 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이정현 사무처장은 생물다양성과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신천습지를 습지보호지역과 생태경관지구로 지정하여 생태테마관광의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며 생태계 교란을 자행하는 일들이 사라져야 한다며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번식력이 좋은 외래종은 생태계의 균형을 깨고 파괴하는 주범이다.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미국가재나 황소개구리 돼지풀 등 외래종을 방치 혹은 식재하거나 풀어놓으면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어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 생명의 물을 머금고 있는 습지는 자연에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고여 썩기도 하며 어느새 사라지는 존재이기도 하니 정성껏 지켜내야 할 대상이다. 팔월의 뜨거운 햇볕이 습지를 내리쬐는 시기, 우리도 예측할 수 없는 국제정세와 일본과의 갈등으로 후덥지근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그간 그러했듯이 어떠한 시련도 잘 견디며 회복했던 위대한 민족성을 믿는다. 그리고 만경강 신천습지 바닥 깊은 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있을 가시연꽃의 씨가 꽃대를 올리고 그 위에 나비가 춤을 추고 토종가재와 금개구리가 노래하는 날을 그리며 지속 가능한 습지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탠다.
명당(明堂)은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생기게 한다는 묏자리나 집터를 말한다. 풍수에서 최고의 묏자리인 음택명당으로 유명한 곳이 남원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에 있다. 그 명당을 홍곡단풍(鴻鵠摶風)이라 하는데 이는 커다란 기러기나 고니가 날개로 바람을 어우르는 형세로 영웅호걸이 천하에 웅지를 편다는 터이다. 바로 그 묏자리에 든 주인은 다름 아닌 황희의 할아버지인 황균비이다. 풍수에서는 명당에 든 뒤에 태어난 자손이 가장 큰 혜택을 받는다 했는데 할아버지 묘소인 그 명당 덕이었을까. 황희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청백리라 칭송받았고, 그의 아들 황수신도 세조시기 영의정까지 올라 부자가 재상이 되었으니 조상의 덕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그 명당을 황희의 아버지인 황군서에게 점지해준 사람은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로 땅속의 기운까지 꿰뚫어 본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 터에 얽힌 풍수설화도 특별하다. 원래 그 명당은 나옹선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소개해주기로 한 것이었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터의 혈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고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큰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 나옹선사를 대신해 돈을 변제해 주고 봉변에서 구해준 사람이 바로 황군서였다. 그에 대한 답례로 점지받은 터는 정면에 문필봉이 들어차고 그 주변의 산들이 층을 이루며 묘를 향해 절을 하는 형상으로 큰 인물이 나올 명당이었다. 명당을 잡아준 나옹선사는 이 땅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후손은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되고 집안에 재상이 둘이 나올 것이요. 다만, 가난할 상이라 부국지세의 터인 숙호형(宿虎形)을 하나 더 잡아 줄 터이니 다른 조상의 묏자리로 쓰시오. 그리고 명심할 것이 있소. 이 운을 차지하려면 묘를 쓴 다음 빨리 남원을 떠나 송악(개성)에 가서 살아야 하오라고 당부를 한다. 그 조언대로 황군서는 부친의 묘를 점지해준 자리에 이장하고, 순창 동계면 숙호형의 자리에 모친의 묘를 쓰고 남원을 떠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으로 가서 황희(1363-1452년)를 얻게 된다. 본래 황희의 선조들은 장수 황씨로 장수에서 살다가 고려 명종 때 난을 피해 남원으로 와 연을 맺으며 번성한 가문이었다. 그러한 터전인 남원을 떠나 고려 말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직에 오른다. 그러다 고려가 멸망한 뒤 은거에 들어갔으나 조선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출사하여 태조, 태종, 세종까지 세 분의 임금을 모시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벼슬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격인 영의정을 87세에도 지내며 90세까지 장수했으니 황희는 조선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영의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뇌물을 받았다고 상소를 받기도 했으며 좌천과 파직을 받으며 굴곡진 벼슬살이를 했다. 그 중 태종의 복심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은 황희였지만 남원으로 유배를 갈 수밖에 없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세종의 즉위를 반대했던 것이다. 1416년(태종 16)에 태종이 황희를 불러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자, 황희는 세자는 가볍게 바꿀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에 왕이 진노하며 황희를 좌천시켰고 세자가 폐위되자 파직시켜 교하(현 파주)로 유배를 보냈다. 정작 성군이 될 임금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대한 황희와 그런 그를 상왕인 태종의 청을 받아 다시 불러들여 오랫동안 영의정으로 곁에 두었던 세종과의 관계가 각별하다. 태종은 교하로 유배 보낸 황희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지를 다시 정해 보내야 한다는 대신들의 청을 따랐지만, 그의 연고가 있는 남원으로 가서 노모를 모시고 처자식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황희는 남원에 오자마자 조부 황균비의 묘소를 찾았다고 전해지지만, 남원에서의 유배 생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황희의 생질인 오치선에게 황희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는 것과 1442년 2월의 남원에 있는 황희를 돌아오게 하다란 남원에서의 유배가 끝남을 알리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남아있다. 황희가 남원에 머무른 시간은 4년이 채 안되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으로 남원의 상징이 된 것이 있다. 바로 광한루(廣寒樓)이다. 보물 제281호인 광한루는 1419년 황희가 지은 누각인 광통루(廣通樓)에서 유래되었다. 광통루는 황희의 6대조 할아버지인 황감평의 서실이 있던 옛터에 지은 것으로 황희의 아들인 황수신이 지은 「누정기」에 전해진다. 광한루는 선조들의 사상과 손길이 깃든 일대의 정원을 포함하여 광한루원이란 이름으로 문화재(명승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지나온 세월의 흔적과 수많은 사연이 얽혀있다. 황희가 유배 시기 자연을 벗 삼아 지내온 광통루는 1444년 전라감사였던 정인지에 의해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인 광한청허부라는 의미로 광한루라 개칭되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수와 증축을 수없이 거치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누각마루는 재판소로, 누각 아래는 감옥으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가치로 남은 광한루는 올해로 건립 600주년이 되었다. 황희의 광통루를 이은 광한루를 많은 선조들이 사랑했으며 춘향이의 사랑이야기까지 덧입혀진 오늘날의 광한루원은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끄는 우리나라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또한, 명당의 기운을 후손에게 전해준 땅은 그 힘을 지역에 굳건하게 전해주고 있다. 명당은 베푸는 덕을 쌓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황희 부친의 덕행으로 점지된 남원명당이 유능한 재상을 탄생시켜 우리 역사의 주춧돌이 되었고, 그가 지은 정자는 지역 자산의 기원이 되어 빛나고 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곳에서 풍류를 즐긴 선조들의 걸음을 따라 그 길한 기운이 서린 남원명당을 찾고 광한루의 600년 세월을 축하하며, 각박한 세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덕을 쌓는 것도 좋겠다.
제가 쏜 총에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진환(1913-1951년)의 죽음을 알리는 절규가 무장에 있던 그의 집을 뒤흔들었다. 6.25 전쟁 중 학도병으로 나가 스승을 적으로 오인하여 죽인 후 통곡하며 알린 제자와 집에서 불과 20여 리 떨어진 산비탈에서 죽임을 당한 그의 사연이 기막히다. 고향의 정취를 주로 그리며 이름을 알리던 화가 진환은 그렇게 사랑하던 고향에서 서른여덟 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애통하게 생을 마감했다. 진환(본명 진기용)은 1913년 6월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무장에서 보낸 그는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의 뜻에 따라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전신) 상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인 무장과 광주를 오가며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당시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며 환쟁이라 불렀던 시대였다. 더욱이 전형적인 유교 가문의 외아들인 그가 그림을 그린다 하니 집안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반대하는 부친과 가족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진환은 동경에서 이중섭(1916-1956), 이쾌대(1913-1965)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많은 대회에서 입선하여 주목을 받았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는 일도 했다. 그러던 중 외조모 사망 급 귀향이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지만 그를 돌아오게 하려는 집안의 허위전보였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른 살의 나이에 전주 출신의 강전창(1922년생)과 결혼해 고향인 무장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해방 후에는 부친이 설립한 무장중학교에서 교장을 지내다가 1948년 홍익대학교의 미술과 초대교수가 되어 전쟁 전까지 서울에서 교육과 창작 활동에 몰두한다. 진환은 한국 근대미술의 여명기를 열었지만, 아쉽게도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세간에서는 그를 두고 망각의 화가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활동할 때 세상을 등졌고 대부분의 작품이 유실되어 유화 8점과 수채화 및 드로잉 30여 점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소의 모습이 유달리 많다. 그가 황토화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고향의 농촌풍경과 그 속에서 우직한 삶을 이어가는 소를 작품의 중심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진환이 그린 소는 당시 농촌의 동네 어귀에서 늘 마주치던 누런 소로 그 모습은 당시 식민지하에 있던 자신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초상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소의 일기>의 서문에는 쭉나무 저쪽, 묵은 土城(토성), 내가 보는 하늘을 뒤로하고 소는 우두커니 서 있다. 힘차고도 온순한 맵시다. 몸뚱아리는 비바람에 씻기어 나무와 같이 소의 생명은 지구와 함께 있을 듯이 강하구나...라는 대목이 있다. 등장하는 묵은 토성은 무장읍성으로 허물어져 무너진 모습으로도 켜켜이 쌓인 역사를 증언하고, 깊은 눈을 가진 소는 담담한 모습으로 세월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 낸 그림 속 주인공이 되었다. 진환의 소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이중섭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쾌대와 나눈 편지에도 등장한다. 긴박한 시국에 반영된 무장의 소를 금년에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경성의 우공들은 부리기 위한 것이고, 무장의 것은 그곳을 떠나기 싫어하고 부자의 모자의 사랑도 가지고, 그 논두렁의 이모저모가 추억의 장소일 겁니다. 형의 우공(우리 집에 있는 <심우도> 소품)은 무장의 소산이므로 나는 사랑합니다 안부 속에 등장하는 진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심우도>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아쉽지만, 무장의 소는 진환을 연상하는 대상으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문학적 소양을 갖춘 화가로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이는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뿐 아니라 당시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6.25 직전 동화책을 내기 위해 50여 편의 동시를 출판사에 넘겼지만 전쟁 통에 아쉽게 분실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자작 그림책(1949년 작)에 몇 편의 동시와 그림이 남아있다. 섬마섬마 하여도 딸랑달랑 / 궁둥방아 찧여도 딸랑딸랑 / 우리 아기 잠잘 땐 같이 잠자고 / 방글방글 잠깨면 같이 깹니다라는 동시 <쌍방울>과 항아리 옆에 종장종장 / 요리조리 숨바꼭질 소곤소곤이라는 <병아리> 등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의성어와 의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리듬을 주었다. 또한 옆면을 빈 페이지로 남겨두어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려했다. 아들이 소장한 유작을 살펴보면 아버지의 그림 이야기 옆에 아들의 낙서가 이어져 부자간 주고받은 대화 같다. 그의 작품 중 날개 달린 소를 대하면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하고 어이없게 떠난 사연이 더욱 애달프다. 우리 민족은 전쟁을 겪으며 망실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제는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지도자가 만나 함께 평화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다. 이러한 시기에 전쟁으로 잊힌 사람들과 잃어버린 흔적들을 찾아 억울함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재조명해야 한다. 바라건대, 뛰어난 실력으로 한국 근대미술의 길을 연 진환을 망각의 화가로 두지 말고 다시 날개를 활짝 펴게 하고 올곧게 평가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잃어버린 작품들의 행방도 찾아 그가 죽어서도 잊지 못했을 아름다운 고장 무장에서 그의 예술 혼이 다시 피어나길 기대한다.
순갱노회(蓴羹鱸膾)란 중국의 고사가 있다.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장한이 고향에서 먹던 순챗국과 농어가 생각난다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버린 것에서 유래한다. 주로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벼슬과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 고사 속의 순채(蓴菜)는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다. 순채는 오랜 세월 우리 지역의 특산품으로 알려진 식재료이자 약재였다. 순나물이라고도 불리는 순채는 순(蓴), 수채(水菜), 금대(金帶)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다년생 수초이다. 연(蓮)과 비슷하고 자생하는 곳 또한 얕은 물이나 방죽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잎은 둥그런 연잎에 비해 타원형이고 크기가 5~10㎝이며, 봄철에서 여름 사이 탱글탱글한 투명막에 싸인 줄기와 돌돌 말린 어린잎을 채취하여 식재료로 쓴다. 5월에서 늦게는 8월까지 꽃을 볼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암수 두 가지 모습으로 하루는 암꽃으로 피고 다음 날에는 수꽃이 되어 자색의 꽃을 피운다. 은은한 향과 매끄러운 식감의 순채는 왕의 수라상에 오르고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고급 식재료로 산에서 나는 송이, 밭에서 나는 인삼과 더불어 물에서 나는 순채가 으뜸이라는 찬사를 듣던 신비로운 식물이다. 고려 말 학자 이색은 순채의 생김새를 용의 침이라 비유했고, 이익은 『성호사설』에 순채를 맛보는 것을 신선의 취미라 소개했으며, 서거정은 아예 <순채가>를 지을 정도로 순채를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편에 순채를 각도(各道)에 진상하도록 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 같은 먼 도는 물에 담아 오게 되니 녹아버리기 쉬울 뿐 아니라...하며 승정원에서 순채에 대한 진상을 아뢴 기록이 있다. 왕의 진상품이었던 순채에 대한 기록은 자생지를 비롯하여 조리법과 순채에 대한 시구로 남아 귀한 대접을 받았던 흔적을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채는 『음식디미방』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비롯한 각종 조리서에 차와 무침, 국, 탕으로 조리하는 방법들이 기록되었고,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에는 해독과 해열을 하는 데 쓰이는 약재로서의 효능이 기록되었다. 위의 기를 보하고 이뇨작용이 있다고 알려진 순채는 특히 술독을 풀어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민간요법에 사용되었다. 이렇듯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순채는 고대 중국의 시집인 『시경』에 그 이름이 순(蓴)자로 실린 것을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문집 『동국이상국전집』에 실린 <친구 집에서 순채를 먹다>외 몇 수의 시에 등장하는 순채가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얼음을 삶는다는 건 예로부터 못 들었는데 / 그대는 어찌하여 삶는다고 자랑하는가 / 불러와 자세히 보니 / 곧 순챗국을 말한 것 / 얼음 같지만 풀리지 않고 / 삶을수록 더 또렷또렷하여 / 이것이 바로 얼음 삶는다는 것인데 / 나를 놀라게 했구료... 투명한 막으로 쌓인 새순을 얼음에 비유하여 얼음을 삶는다라 하였고, 씻고 삶아도 막이 잘 벗겨지지 않는 순채의 특성을 잘 표현한 시구이다. 이규보가 당시 전주목에서 근무하며 순채를 접했음과 고려 시대 순채의 인기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허균도 함열에서 저술한 팔도음식 소개서인 『도문대작』에 호남에서 나는 순채가 가장 좋다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강원과 충청도 등을 비롯하여 당시 전라도였던 제주의 두 곳을 포함한 순창, 함열, 만경과 김제 등을 전라도 순채의 산지로 기록했다. 순채가 많이 나는 지역은 순채의 순(蓴)자를 아예 지명에 썼는데 철원 순담(蓴潭)계곡, 의성 순호리(蓴湖里)와 더불어 김제의 순동(蓴洞)에는 지명에 순자가 들어간다. 순담계곡은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요양하면서 연못을 파 순채를 심고 순담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김제의 순동은 특히 소못(牛堤, 금이제)에 순채가 지천이었고, 여러 못에 자생하는 순채가 많아서 생겨난 지명이다. 1934년 6월 매일신보에는 김제 순채 공장에서 불이 난 기사가 실렸다. 김제를 비롯한 지금의 익산, 전주, 완주의 방죽에서 순채가 나다 보니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순채를 채집하여 병에다 넣는 순채 제조공장이 김제에 있던 것이다. 일본에서 준사이(じゅんさい)라 불리는 순채는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식재료이다. 순채 채집을 위해 일본인들이 순채 산지를 수소문하면서 순채를 마구잡이로 채취하며 수탈을 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못이나 방죽에서 부족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논에다 물을 대 재배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다 해방 이후 순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가 1970년 한일국교가 정상화가 되면서 수출길이 열리자 일제시대 순채 채집기록들을 들고 일명 순채꾼(혹은 수채꾼)들이 찾아왔다. 한동안 수중전이라 불리는 순채 쟁탈전이 일어났어요. 순채가 돈이 되었응께~ 동네 아주머니들도 함석판을 배처럼 타고 순채를 따며 돈벌이를 했어요. 순채가 난다는 곳에 힘께나 쓰던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 망을 보며 순채를 지켰지요.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서며 일본 수출 생산지가 중국으로 넘어가고, 어느 순간인가 수질이 나빠지자 오염에 약한 순채가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방죽도 메꿔지며 그 땅에 건물이 생기고 어디는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이제 이런 기억을 하는 사람도 몇 없게 되번졌어요 70년대부터 우리 지역에서 순채의 흥망을 함께 겪은 전병태(1948년생)어르신의 생생한 증언이다. 어쨌거나 청정한 환경에서 자라는 순채는 김제 순동에 이름만 남겨두었다. 현재 순채는 멸종위기 식물로 보호되며 전국에 몇몇 자생지만이 남아있고, 과거 전라도였던 제주의 한라습지생태원에 가야만 군락을 이룬 순채를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지역 어딘가에는 황토물이 흘러들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청정한 물 위에 투영한 줄기를 올려 고운 꽃을 피워내는 순채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숨은 듯 자리 잡은 그 토종 순채가 찾아지면 귀히 여기며 지켜나가 지역의 생태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무를 베어 남산이 민둥해졌고 / 불을 지피니 연기가 해를 가렸어라 / 푸른 자기 잔을 구워내 /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 /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나니 / 몇 번이나 연기 속에 묻혔었을까나 / 영롱하기는 수정같이 맑고 / 단단하기는 산골(山骨, 자연동)과도 같네 / 이제 알겠네 술잔을 만든 솜씨는 /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 / 가느다란 꽃무늬를 놓았는데 / 묘한 게 단청을 그린 것과 같구나... 『동국이상국집』에 김군이 녹색 자기(綠磁)잔을 두고 시를 지어 달라 하기에 백거이의 시운에 따라 함께 짓다.란 제목으로 실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구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쓴 고려문인 이규보의 자는 춘경이며 본래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뛰어난 문장가인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과거시험 공부를 게을리 한 탓에 고려 시대 과거시험인 사마시에 거듭 낙방하였다. 그러다 규성(奎星)이 장원할 것이라 일러주는 꿈을 꾸고 이름을 규보로 바꾼 뒤 꿈과도 같이 장원급제했다. 32세가 되는 해인 1199년에 전주목사록에 임명된 이규보는 서기를 겸하는 관직을 받아 전주목(全州牧)으로 오게 된다. 함께 근무하던 동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기까지 일 년 반 남짓 동안 우리 고장에 머물렀고, 파직 후 <전주를 떠나며>란 자신의 심경을 남긴 시 외에 전라도 지역의 기행문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긴 바 있다. 그가 남긴 명문의 글 중에는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은데, 특히나, 고려청자에 관해 남긴 몇 수의 시는 청자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송나라 사신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도자기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翡色)이라 부르며, 근래 이르러 고려 도자기의 제작이 공교해졌으며 색을 쓰는 것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중국의 비색(秘色)과 다른 특별한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한 기록을 한 바 있다. 송나라의 사신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제작기술에 감탄했듯이 이규보의 시구도 살펴보면 청자 상감기법에 대한 제작기술을 표현하였고, 잔을 빚은 도공의 솜씨를 하늘의 조화라고 칭송하였다. 청자에 대한 감흥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청자에 조예가 깊은 것은 부안 변산에서 왕실의 재목을 관리하는 관직을 지낸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부안 일대는 최고의 고려청자 생산지였다. 추측건대 이규보가 인근에 있는 청자의 산지에서 제작과정을 살펴보며 안목을 넓혔고 그 심정을 글로 담은 듯싶다. 부안이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했던 이유는 지리적 환경이 주요했다. 부안은 흙과 물이 좋고 나무가 울창해 땔감이 풍부하여 양질의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서해 뱃길을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각 고을로 운송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두루 갖춘 최적의 지역이었다. 가장 좋은 청자를 생산했던 곳이 바로 부안과 강진이다. 강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시대 국가에서 수공업을 운영하던 특수행정구역인 소(所)로 기록되어 있고 고급 청자를 제작한 곳으로 일찍이 알려진 곳이다. 이에 반해 부안일대의 가마는 소로 표기된 기록이 없지만, 12조창(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모아 개경으로 운송하는 창고)의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는 중요한 고장으로 고려청자의 최전성기에 아름다운 청자를 생산한 곳이다. 왕의 상징인 용과 파도가 상감되어 있는 청자상감용문매병의 파편과 국가의 관리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간지(干支)가 있는 청자 중 임오(壬午)명이 새겨진 파편이 발견되어 왕실의 자기를 제작했음이 증명되었고, 장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 등이 음각된 청자의 굽바닥이 발굴되어 고려청자의 맥락을 엿볼 수 있다. 유천리와 진서리에 가마가 있던 부안은 고려왕실과 귀족계층에 공급한 최고급의 청자에서부터 포개어 구운 생활용 그릇까지 다양한 자기를 제작한 곳이었다. 유천리 가마터는 1929년 일본학자 노모리 켄(野守健)이 조사하여 1934년 학계에 소개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도굴되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수습된 청자의 파편들은 유천리 가마에서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려청자 계보를 연결하고 있다. 그 귀중함을 인정받은 부안의 유천리 12호 가마터 일대는 1963년 국가 사적 제69호로 지정받아 주요 유적지가 되었고 진서리터는 사적 70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도공의 마음에 덜 차 깨어지고 조각나 폐기장에 버려졌겠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청자의 파편은 온전한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감탄과 아쉬움 속에 같은 문양의 국보급 유물의 출처를 증명해 주고 있다. 유천리(柳川理)란 지명도 그러하다. 그 이름은 고려청자의 백미 물가풍경무늬의 문양으로 버드나무와 어우러진 내가 흐르는 마을을 눈앞에 펼쳐 놓는다. 휘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물가풍경으로 드리워진 곳에 물새들이 물위를 노닐며 유영하는 모습이 유려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청자 물가풍경 무늬 완>과 <청자 물가풍경 무늬 주전자>와 유천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파편 등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이렇듯 자연의 정취와 낭만을 비췻빛 청자와 어우러지게 빚어낸 도공의 솜씨는 이규보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로 감탄하게 했으리라. 유천리 가마는 14세기 말경까지 왕실의 가마로 고려청자의 찬란한 꽃을 피우다가, 왜구의 잦은 침탈과 도공들의 피란으로 피해를 받고 쇠락한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며 백자에 자리를 내주다 맥이 끊겼다. 하늘빛 고운 청자를 빚고 아로새겼던 그 노고까지도 청자의 파편과 더불어 땅속에 묻혔지만, 2011년 그 가치를 조명하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유천리에 부안청자박물관이 개관되면서 많은 이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빚어낸 도공과 그의 솜씨를 노래한 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대들에게는 모두 귀한 선물이다. 고귀한 비색을 품고 있는 부안의 봄날이 한창인 지금, 부안청자가 남긴 고려의 품격을 찾아 버드나무 물가풍경이 아름다운 마을로 시간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1939년 5월 24일 자 <매일신보>를 살펴보면 춘향이가 사러온 듯... 춘향제(春香祭)도 거행이라는 기사 제목과 사진이 눈에 띈다. 기사 속 사진은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년)의 역작으로 알려진 춘향의 영정이다. 김은호는 논개의 영정뿐 아니라, 순종의 어진을 그린 화백으로 동학의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에 관한 관심은 춘향이의 이야기와 상상을 극대화 시키며 인물화의 권위자인 김은호가 조선여성을 대표할 만 한 모습으로 그렸다고 하여 그 기대감이 남달랐다. 기사에는 호남은행과 식산은행의 은행장들의 의뢰받은 김은호가 각 방면의 의견과 고증을 참조한 뒤 조선권번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6개월에 걸쳐 춘향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정은 춘향의 생일인 5월 26일(음력 4월 8일) 춘향제를 거행하고 입혼식(入魂式)을 올려 강주수가 그린 최초의 춘향 영정이 봉안되어 있던 춘향사(春香祠)에 봉안했다. 춘향이의 영정이 봉안된 춘향사는 남원유지들과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명칭)의 기생들이 춘향이의 얼을 기리고자 함께 건립한 사당이다.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란 편액을 건 춘향사는 1931년 6월 1일 광한루 중수기념식과 더불어 명창대회와 궁도대회 등을 열면서 낙성식을 거행했고, 6월 20일(음력 5월 5일, 단옷날) 춘향에게 처음으로 제사를 올리며 제1회 춘향제를 연 곳이다. 초기 춘향제는 이몽룡과 춘향이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여 단옷날에 열렸으나, 이때부터 더워지기 시작하고 농사로 바쁜 농번기라는 이유로 제5회 춘향제부터는 춘향이의 생일인 음력 4월 8일로 조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춘향제의 시기를 조정하면서도 춘향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1675년 음력 4월 8일생으로 태어나 16세가 되던 해 단옷날 춘향이와 이몽룡이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며 정체성을 지킨 면모가 돋보인다. 1931년 시작되어 89년간 오랜 세월 속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풍파를 겪으며 열린 춘향제는 춘향이의 얼을 기리는 다양한 문화공연을 함께 펼치며 우리나라 지역 축제의 효시가 되었다. 1932년 <매일신보>에는 남원읍으로 승격한 전북 남원에서 춘향제가 성대히 거행되었음을 알리고 각지로부터 모인 기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권번주도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춘향제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자 일제의 감시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원의 국악인들과 기생들은 정성껏 제를 올리며 국악을 즐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사에도 남아있듯이 춘향제는 전국 권번소속의 대표 기생들이 제사 비용을 내며 제관이 되었고, 제주는 남원 권번의 수기(首妓, 으뜸기생) 최봉선이 맡으며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제주가 되는 유일한 제사였다. 1950년 20회 춘향제부터는 남원군에서 제례를 주관하면서 그동안 춘향제의 제관을 맡았던 기생들을 대신하여 남원 지역 여고생들이 제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기존의 제례의식에 판소리와 이야기에 뿌리를 둔 춘향의 의미를 더해 명창대회와 한시 백일장을 열며 향토축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또한, 남원 처녀들을 대상으로 한정하는 춘향 뽑기대회를 열게 되면서 현실 속에서 춘향이가 살아온 듯한 광경을 보며 국악잔치를 즐기는 흥미진진한 장을 열었다. 당시 제1회 초대 미스춘향은 기생 출신으로 알려진 김옥순(당시 23세)이 선발되었고, 춘향이를 뽑는 대회는 획기적인 인기를 끌며 우리나라 미인선발대회의 원조가 된다. 그러다 6.25 전쟁 때 사당에 봉안되어 춘향이의 표준 영정으로 삼은 영정이 훼손되어 강주수가 그린 영정만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된다. 이후 1961년 김은호에 의해 다시 그려진 춘향이의 영정이 지금까지 춘향사에 봉안되어 모셔져 있다. 같은 작가에 의해 다시 그려진 춘향이의 영정을 살펴보면 비슷한 모습이나 새로 그려진 춘향이가 입은 한복 저고리는 전의 영정에 비해 무늬가 섬세하게 그려져 새 옷을 갈아입은 듯 보이며, 단심문(丹心門)을 통해 들어 와 춘향사에 모셔진 춘향이의 영정을 보러오는 사람들의 맞고 있다. 또한, 전국춘향선발대회가 회를 거듭하면서 배출된 춘향이의 모습도 드라마와 영화 속에 춘향이 배역을 맡은 배우들과 이미지를 함께 형성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춘향선발대회는 오랜 역사를 지니며 연예계 등용문이 되어 많은 스타를 배출했으며 대표적인 미스춘향 출신으로는 1979년 49회 춘향 진 최란, 1988년 58회 춘향 선 박지영, 2001년 71회 춘향 진 이다해와 춘향 현인 장신영이 있다. 그중 1992년 춘향 진인 국악인이자 배우인 오정해는 엄마의 소원으로 춘향이의 선발대회를 나가게 되었지만, 제 꿈도 이루게 되었어요. 춘향이로 선발되면서 임권택 감독의 연락을 받고는 서편제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남원은 제겐 특별한 친정 같은 곳이에요. 제 정성껏 남원을 알리며 미스춘향으로 선발된 많은 춘향이들과 <예음회>란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며 품격 있는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알리며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란 말을 전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미인의 기준도 달라졌고 지역마다 축제는 물론이고 미인대회도 넘쳐나고 있지만, 춘향제는 춘향의 고유이야기와 지역의 공동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유구한 세월을 담아내고 있다. 이제 춘향제는 특별한 지역의 자산으로 남원만이 지닌 차별화 된 문화적 상징을 가지며, 남원 사람들이 삶 속에 체화되어 내년이면 90회를 맞게 된다. 춘향이로 인해 사랑의 도시이자 춘향골로 지칭되는 남원에서는 올해 광한루 600년을 맞아광한춘몽(廣寒春夢)-사랑에 빠지다란 주제로 5월 8일부터 12일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며 춘향제를 연다. 해마다 춘향이의 생일을 맞이하여 춘향이가 살아온 듯 그 얼을 기리고 봄날 꿈같은 시간을 갖는 춘향제를 찾아 고운 춘향이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전주천 변에는 치명자라는 독특한 이름의 산이 있다. 원래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었는데 7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후에는 순교자라는 뜻의 치명자(致命者)란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곳에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사람으로 전라도의 첫 천주교 신자였고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1756-1801년, 세례명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결혼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다가 처형되어 동정부부 순교자로 알려진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를 비롯한 일곱 명의 가족 순교자들의 합장묘가 있다. 1801년(조선 순조 원년)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박해 당시 유항검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켰다는 이유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처형 직후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였던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형벌)의 형을 받아 헐려 연못이 되었다. 이후, 그의 친지들이 그들의 시신들을 수습하여 유항검의 고향인 초남리와 인접한 김제군 용지면(현 제남리) 바우백이에 임시로 묻어둔 것을, 1914년 4월 19일 전주 전동성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보두네(Baudenet) 신부와 신도들이 승암산으로 옮겨 합장했다. 치명자산 인근 전주천변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하여 초록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 역시 천주교 신자인 두 명의 15세 소년이 순교한 터이다. 1886년에 남종삼(요한)이 순교한 뒤, 아들 남명희도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해까지 처형이 연기되었고, 그를 불쌍히 여긴 전라 감사가 배교하고 새 삶을 찾으라.고 수차례 권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듬해 그가 성년이 되자 전라 감사는 남명희와 성명 미상의 홍봉주의 아들을 처형하게 되는데 차마 목을 베지 못하고 초록바위 위에서 전주천 아래로 떠밀어 수장시켰고 그 슬픔을 지닌 초록바위는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17세기 초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통하여 조선에 처음 소개되어 전파되면서, 유교 이외의 어떤 종교나 학문도 엄격히 금지하던 그 시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전주는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로 박해를 피해 피신해 온 신자가 많았었는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한 곳이다. 윤지충은 외사촌 정약용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전해진다. 그는 1791년 어머니가 죽자 외종사촌인 권상연과 상의하여 천주교 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당시 거주했던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되어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이 순교한 지 100년 뒤인 1891년 순교 터인 풍남문 앞에 보두네 신부가 터를 마련하고, 1908년 명동성당을 완공한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된 성당이 전동성당이다. 당시 일제가 전주에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그 성벽의 돌을 가져와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하여 순교 장소에 있던 돌로 신앙의 요람임을 입증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가 짙게 남은 전동성당은 지난 4월 13일에 선종(善終)한 지정환(Didier tSerstevense)신부가 1960년 전주교구로 와 한국이름을 얻은 곳으로 그가 전북에 발자취를 남긴 출발점이기도 하다. 작년 12월과 지난 3월에 만난 생전의 지정환 신부는 모든 일은 다 우연이 아닌 운명이고 다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내 이름 성이 한자로 지(池)인데, 사실 땅지를 생각한겨. 농민들 밑에 들어가려고 땅지 같은 지씨가 된거여. 이것이 운명이지. 벨기에의 귀족이 한국의 상놈이 된 거여 지신부는 그렇게 사람들 밑에 들어가 거하며 첫사랑이라 말하는 부안을 비롯해 고향으로 여기는 임실의 농민들과 무지개 가족인 장애인들과 전주와 완주에서 함께 했다.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무명(無名)으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을 인정하며 그사람들이 가지고있는것으로 부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있어라. 그들에게 배워라. 가르치는 게 아니여~ 먼저 배워! 그리고 사랑해라~ 이 말은 신학대학 시절부터 소명으로 지녀온 말로 성직자로 한국에서 살았던 60년간 사랑을 실천하고 헌신하는데 지신부의 지침이 되었다. 평상시에 무명, 무교육, 등 없을 무(無)자를 자주 쓰게 된 이유도 임실뿐만이 아니라 도착해 만나는 사람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가진 것도 없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직자로 창세기에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느님을 본받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소외 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과 교육이었다. 무지개 가족이 1984년 설립되었을 당시 수용시설과 같은 곳을 지신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시설로 바꾸고 싶었다. 1층의 넓은 방에 중증 장애인과 경증 장애인 두 사람씩 거처하며 서로 돕게 하였고, 2층에는 독방을 만들어 봉사자가 열심히 일하고 쉴 때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호암재단에서 받은 상금을 마중물로 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을 돕는 무지개 재단이 되었고, 이후 거처 공간도 자립관(自立館)이란 이름으로 하여 장애인들이 온전히 자립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 그것도 전북에서 60여년을 지내 온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지신부의 운명이었고 전북의 행운이었다. 지신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자의 공수신퇴(功遂身退) 천지도(天之道)란 말처럼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 이도 하늘의 뜻이라 했다. 지신부의 장례식장에는 그의 유언대로 그의 방 안에 있던 십자수를 영정으로 하고 장례미사에는 노사연의 <만남>을 작별의 노래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신자와 임실군민들을 비롯한 도민들과 사랑을 받은 장애인들의 감사와 애도 속에 전주교구 성직자의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묻혔다. 지신부가 남긴 정의롭고 환한 흔적은 지역의 천주교 성지에 더해 그가 한없이 사랑했던 임실과 완주와 전주를 비롯하여 부안과 전북을 아우르며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이르기까지 지신부를 기리는 길로 오랫동안 기억되며 지역에 남겨질 것이다.
늙어가면서도 술잔을 놓을 수 없고 / 늙어가면서도 분필을 던질 수 없다 / 분필과 술잔으로나 내 한 생을 보낼까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년) 선생의 <내 한 생(生)>이란 시이다. 애주가이자 선생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오롯이 드러난 시구이다. 가람선생이 생전에 술 복, 제자 복, 난초 복 세 가지 복을 타고 나 스스로가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말한 것에는 그가 태어나 말년을 보내고 잠들어 있는 전북 익산의 여산(礪山)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가양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여산은 호남의 땅이 시작되는 곳으로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곳에 있다. 예로부터 여산은 많은 사람과 사연이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길손들에 의해 술맛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여산의 술이 맛있고 유명한 데에는 지역에서 나는 쌀과 물도 좋지만 땅이 지닌 힘도 있는 듯싶다. 특이하게도 여산에 있는 천호산(天壺山, 마을에서 불린 이름 호산)은 단지나 병에 사용되는 한자 호(壺)를 쓰고 있다. 여산의 산 이름 호산에 고급술에만 붙인다는 춘(春)자를 붙여 호산춘(壺山春)이 탄생했다. 춘자를 붙인 이유는 중국에서 고급술을 춘주(春酒)라 칭한 것에 유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여산의 호산춘 외에도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등 춘(春)자를 붙인 술들이 있다. 고문헌에도 호산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우선 『산림경제』 <여산방>에 호산춘을 빚는 법이 처음 등장하는데, 멥쌀와 누룩을 사용하여 13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빚어내는 삼양주(三養酒)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십이집』에는 호산춘(壺山春)은 여산에서 나온 술로 여산을 호산이라 불렀기에 나온 이름이라 정의하면서 술 빚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전집』에는 <호산춘(壺山春)>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호산춘 술 빛이 잔에 그득 담겼으니 / 그대의 깊은 정에 감사해 백 잔도 불사하리라며 호산춘을 가져다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구가 남아있다. 여산 외에 다른 지방에도 호산춘이라는 이름의 술이 있지만, 문헌에 나오는 호산춘의 호(壺)와는 다른 호수호(湖)자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명주로 불린 호산춘은 호(壺)자를 쓰는 여산의 술을 말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호산춘은 가람 선생 집안을 중심으로 여산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술로 알려졌지만, 정작 그는 호산춘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1951년 3월 5일, 나의 회갑. 일기가 화창하다. 헌수를 받고 또 내빈들과 종일 마셨다. 크게 취하였다. 1955년 4월 14일, 비가 온다. 두견주를 빚었다. 1956년 1월 1일, 만발한 매화와 한잔 마셨다. 가람 선생이 19세인 1909년 4월부터 1966년 6월까지 58년간 쓴 <가람일기>에도 술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지만 호산춘을 마셨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가람 선생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양주는 선생의 25대 조부인 이현려(1136-1216년)가 고려 의종조 때 소부감판사 겸 지다방사(궁중의 살림 특히 음식 담당)로 있으며 빚어 내려온 술이라 전해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음식과 술을 잘하는 집안으로 알려진 연안이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양주는 고려 시대 궁중에서 마시던 술이라 하여 임금님 술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보아 여산에서 거주하는 연안 이씨 가문에서 빚던 술인 그 임금님 술이 호산춘으로 불리며 후손들을 중심으로 여산 지역에 그 명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가람 선생의 동생이며 독립유공자인 이병석 선생의 장녀인 어머니(이경희)에게 술 빚는 법을 배운 이연호(1946년생) 명인이 호산춘의 전수자이다. 이연호 명인은 농림부에서 주최한 2013년 궁중 술빚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2018년엔 전북 무형문화재 제64호 여산호산춘 보유자로 지정되며 인정받았다. 공부를 잘했던 다른 형제와 달리 나는 펜싱선수라 시간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술을 빚을 때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이 외가 집안에서 임금님 술로 불린 호산춘을 전승받게 된 셈이 되었네요. 어릴 적에 술을 담아 오면서 주전자 주둥이에 슬쩍 입을 대고 마시던 그 감칠맛이 지금도 생각나요. 술이 익듯이 느리게 말을 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이연호 명인의 말맛 또한 일품이고, 시중에 팔지 않는다는 호산춘을 건네받아 마셔보니 850여 년의 세월이 담긴 술맛이 가히 명품이다. 호산춘은 맑고 고고한 빛을 지녔으며 단맛과 과실의 깊은 향이 입안에서 감돌다 부드럽게 흘러드는 목 넘김이 좋은 술이다. 가람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시조 시인으로 한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와 더불어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것은 이 깊은 술맛 때문인 것 같다. <가람일기>에 등장하는 두견주와 국화주에 대하여 이연호 명인은 호산춘에 꽃을 더해 즐긴 가람 선생의 꽃주이자 계절주라며 그간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가람 선생의 집안에 내려온 가양주는 옛 제조방식과 연못 옆 정자에서 누룩을 띄우는 것도 그대로 전승되어 이연호 명인이 사는 함열의 집에서도 연못 옆 정자에서 누룩을 띄운다. 그러한 연유로 연못의 습기를 머금은 최상품 누룩이 군내 없는 풍미를 만드는 것 같다. 명인에게서 귀한 호산춘을 건네받고 그 술을 그리워할 가람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술을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새소리와 댓잎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람 선생의 별을 읊조렸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햇살이 눈부신 날 봄볕은 별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운 시구가 피어난 가람 선생의 생가 주변이 정겹다. 수우재(守愚齋)라 이름 지어진 생가 옆에는 가람 문학관이 있어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가람선생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꽃이 피었으니 술을 마시자며 청했을 가람선생의 마음이 느껴지는 시이다. 봄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기, 여산을 찾아 화초와 술을 사랑한 선생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곡주에 꽃을 띄워 올려 보면 어떨까.
우화루(雨花樓), 부처가 설법할 때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의미를 담은 불가의 공간이다. 서울에 있는 청룡사 우화루는 단종(1441-1457년)이 유배 가기 전날 정순왕후(1440-1521년)와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로 헤어짐을 슬퍼하는 그들의 눈물이 비처럼 흐른 곳이다. 그런 이유로 영원히 이별을 나눈 집이라 하여 우화루를 영리정이라고도 부르고,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는 영월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헤어져 다시는 못 만나 영영 이별한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비운의 사연을 지닌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는 세종 22년 태인현(현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났다. 대부분 세자의 빈으로 추대되어 남편이 즉위하게 되면 왕비가 되지만,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상 왕과 혼인 한 왕비로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는(본관 여산(礪山)) 풍저창(豊㶆創, 궁중에 상납하는 곡물을 취급하는 관서)의 부사로 종 6품이었다. 정읍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 왕비가 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남편인 단종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숙부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모자라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 또한 부인으로 강등되며 궁에서 쫓겨나 18세에 단종과 헤어져 역사의 뒤안에서 피눈물을 삼켰지만, 단종보다 64년을,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며 82세까지 장수했다. 그녀의 고향인 정읍과 궁에서 나와 생을 마칠 때까지 지냈던 서울, 그리고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과 남양주 사릉에는 정순왕후의 한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비운의 삶은 수양대군이 1453년 김종서를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과 여러 대신을 죽인 계유정난으로부터 시작된다. 병약했던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왕위에 오른 어린 왕 단종이 겪은 두려움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 수난의 역사 속에 이듬해인 1454년 왕비로 간택된 송씨가 실제 왕비였던 기간은 고작 1년 6개월이었다. 송씨가 왕비가 되기까지에는, 아버지 송현수와 친분이 있는 수양대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편에 있던 영응대군(세종의 8번째 왕자)의 부인이 송현수의 누이이고, 송현수의 처 민소생의 자매인 민대생의 딸은 권세가인 한명회의 부인이었다. 당시 14살의 어린 나이였던 단종의 혼인은 문종의 상중이라 반대가 있었지만,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심 하에 자신을 위협하지 않을 송현수의 딸인 송씨를 단종의 비로 간택한다. 수양대군은 이후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나서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된다.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세조 2년(1456년)의 『조선왕조실록』에 임금 세조가 송현수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고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내 굳게 고집하여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이다라는 기록을 보아 세조가 불러일으킨 피바람 속에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죽였지만, 친분이 있는 송현수의 목숨을 구해준다. 하지만, 불안한 세조는 이듬해에 영월에 있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송현수도 결국 죽임을 당한다. 단종이 유배를 가면서 18세에 홀로된 정순왕후는 궁에서 나와 정업원(淨業院, 현 청룡사)에서 지냈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 밤마다 잠을 청하니 잠은 이룰 수 없고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구지만 그리움이 사무쳐 한이 된 정순왕후의 마음도 평생 매한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는 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를 시양자로 삼았지만 정미수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이씨에게 자신의 뒤를 부탁한다. 밤낮으로 슬퍼하여 울고 있던이라며 자신을 표현한 정순왕후는 82세(중종 16, 1521년)로 한 많은 삶을 마쳤고 해주 정씨의 묘역이 있는 남양주에 모셔졌다. 그런 까닭에 매년 양력 5월 20일이면 전주 이씨, 여산 송씨, 해주 정씨의 세 문중이 모여 정순왕후에게 제를 지낸다. 숙종은 1698년 정순왕후를 복위시키며 단종을 평생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의미로 정순왕후의 묘에 사능(思陵)이라는 능호를 올렸다. 사릉참봉의 벼슬을 한 서유영은 아! 왕비는 어린 나이에 불문에 몸을 의탁하여 한을 품고 고통을 인내하며 여생을 마쳤다며 『금계필담(1873년)』에 탄식을 하고는 능침을 배알할 때마다 목이 메인다고 했다. 사릉의 꽃과 나무, 선봉(仙封)을 지켜주고/ 소쩍새 소리마다 원망이 서려있네 / 정업원 동편에 있는 세 길 넘은 바위는 / 지금도 영월의 봉우리를 바라보네라는 문구로 슬픈 역사로 남은 정순왕후의 넋을 달랬다. 숙종의 주도 아래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킨 데 이어 영조는 친히 사릉을 찾아가 예를 마치고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 정업원의 옛터에 정업원구기라는 비석을 세우고 유적지에 친필을 남겼으며, 정조도 단종에 관한 과거사 재정립을 하고 관련 유적을 정비하며 기록을 남겼다. 특히나 영조가 정순왕후에 극진한 예를 갖춘 데에는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과 정순왕후가 같은 동향인 정읍 출신인 까닭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읍 시산리 동편마을에는 정순왕후의 태생지 안내판이 증조할아버지인 송계생의 유허비각과 노태우 대통령 때 새긴 정순왕후여산송씨태생지비가 함께 있다. 정순왕후가 궁을 나와 머물던 현 종로구 일대에는 단종이 있는 영월인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는 동망봉을 비롯하여 자주동천과 여인시장이 있던 장소들이 유적으로 있고, 영월에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며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과 장릉이 있다. 그 한을 달래려 1999년에 사릉에서 자란 소나무를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하였지만, 합장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각자 잠든 능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나라의 자랑이 되었지만 그들의 한은 어찌할까. 봉분을 이불처럼 감싸고 있는 떼라도 서로에게 보내주어 그리운 마음을 보듬게 하면 좋겠다. 또한, 정읍의 정순왕후 태생지도 인근 태산 선비문화와 연계하여 왕가의 여인 정순왕후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유적지로 보완해 지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삼월은 봄의 길목에서 새싹을 틔우고 꽃을 맞이하는 때이다. 희망을 상징하는 이 시기 봄처럼 우리 곁에 온 사람이 있다. 임실 치즈로 유명한 지정환 신부이다. 본명이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인 그는 삼월 전주에서 지정환이란 한국이름을 얻으며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 1931년 벨기에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였지만,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참혹한 영상이 운명처럼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당시 가장 위험한 나라로 떠나는 그를 주변에서 말렸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희망을 주고자 사제가 된 다음 해에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2달 만인 1959년 12월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1960년 3월 첫 발령을 받아 전주교구 전동성당에 온 그는 본명 디디에의 발음과 비슷한 지를 성으로 하고, 전주교구의 김이환 신부의 이름 환을 따 정의가 환하게 빛난다는 정환이란 이름을 받아 훗날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된다. 1961년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간 부안은 농촌이지만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선교보다는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 줘야 하는 곳이었다. 마침 부안은 정부주도로 간척사업을 하고 있어 주민들을 설득하고 간척허가를 받아 바닷물을 막고 농지로 만드는 고된 작업을 함께 한다. 무리한 탓에 건강 이상이 생겨 담낭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도 3년 만에 100ha(약 삼십만 평)의 땅을 만들어 한 가구당 약 3천 평씩 100가구가 나누게 되었다. 스스로 나는 쓸개 없는 사람이여라고 농담하는 지신부는 농부들에게 땅이 생겼으니 잘 살꺼라 안심하며 요양차 벨기에로 떠났다. 그러나 6개월 후 돌아와 보니 많은 농가가 땅을 팔거나 더러는 노름으로 땅을 잃어 피땀으로 일군 부안간척사업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간척지의 특성상 염분 때문에 벼가 죽기까지 하자 당장 먹고 사는 게 힘든 농민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땅을 처분한 것이다. 부안의 실정에 실망하던 중 1964년 임실 성가리 소나무집이라는 작은 임시성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임실도 당시에는 민둥산에 풀만 자라는 척박한 농촌이었다. 우연히 만난 당시 문필병 임실군수는 신부님! 이곳을 떠날 땐 가난한 임실을 위해서 뭔가를 남겨 주세요!라는 부탁을 한다. 그 간절한 당부에 고민에 빠졌던 지신부는 삼례의 오기순 신부가 선물한 산양 두 마리를 시작으로 임실 치즈의 역사를 쓰게 된다. 10여 명의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산양의 젖을 짜고 사육 두수를 늘리며 협동조합을 설립했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산양유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 판매도 힘들고 온도에 민감한 산양유가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그 처리를 고민하던 지신부는 치즈를 떠올렸고 치즈를 모르는 청년들에게 치즈는 두부 같은 거여라며 함께 치즈 만들기에 도전한다. 산양유를 굳히면 치즈가 되는 줄 알고 약탕기와 비눗갑을 사용해 두부를 만드는 간수도 넣어도 보고 누룩도 넣어봤지만, 치즈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벨기에에서 가져온 응고제를 발견하고 치즈를 만들게 된다. 본격적인 치즈 상품화를 위해 첫 번째 공장을 주민들과 함께 짓고 두 번째 공장은 벨기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사실 그가 한국의 농촌에서 치즈를 만들고 공장을 짓는다 하자 가족들은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 디디에가?라며 의아해했지만, 지신부를 믿고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균등한 품질의 치즈 생산에 실패하자 핵심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치즈공장을 돌다 기적적으로 이탈리아 장인에게 비법을 전수 받고 이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 석 달 만에 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사이 주민들은 양을 처분해버렸고 홀로 남은 청년 신태근과 비법을 적어온 수첩을 보며 마침내 1969년 균일한 맛과 향을 지닌 치즈를 만든다. 이후 다시 뭉친 주민들과 공장 뒤편에 있는 산에다 정과 망치만으로 굴을 파 숙성기간이 긴 치즈를 만들었지만, 한국 사람에게 낯선 치즈의 수요는 적었다. 고민에 빠진 신부는 직접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로 가 외국인이 많이 머무는 호텔과 한국최초의 피자가게를 찾아갔다. 외국인 신부와 농부가 만든 신선한 치즈에 대한 호기심은 이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산양유가 부족할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다. 많은 양의 치즈가 필요해지자 산양 대신 젖이 풍부한 젖소를 기르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임실치즈의 토대가 된다. 임실치즈가 자리 잡는 사이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병이 생긴 지신부는 치료차 벨기에로 떠나며 모든 권한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공수신퇴(功遂身退)란 말을 남긴다. 그가 평소에 존경한 노자의 공을 이루었으면 미련 없이 물러난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지신부의 산양 두 마리와 청년으로부터 시작된 임실치즈는 국내 치즈 산업의 자양분이 되고 임실 치즈테마파크와 축제의 자산이 되어 지역의 경제발전의 큰 축이 되었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신부는 휠체어를 탄 채 완주 소양의 별아래 집과 전주의 무지개 장학재단을 오고 가며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역을 맡았다. 2016년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받은 지신부는 현재,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사회와 만나는 것에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그들의 삶이 나아지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임실치즈농협, 지정환 치즈피자의 체인점들은 매달 무지개 장학재단에 브랜드 사용료로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고 세영재단과 그 사랑을 받은 무지개가족도 함께 기부하고 있다. 그의 방에는 무지개가족의 일원이 자립교육으로 동양화 자수를 배우고 나서 선물한 십자수 초상이 있다. 내 장례식에는 저 십자수를 영정으로 쓰고 노래 만남을 불러줘요라는 말을 한다. 양띠인 그가 치즈를 만들고 장애를 겪으며 장애인과 함께하기까지 그 여정에 담긴 역경과 사랑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하고 나누는 삶을 이어가는 지정환 신부는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이라고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잘 해가는 것이 기쁨이 되는 시간이라고 담담하게 전하는 그의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지금, 찬란한 봄이 열리는 삼월 우리 곁에서 함께 하는 지정환 신부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발자취에 담긴 시간의 흔적을 존경하고 지금의 시간을 아낌없이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봄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연다.
최근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가 화제였다. 그 흥행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인 입시문제를 다룬 점에 있다. 입시나 교육열에 관한 것은 과거제도 하에 시험을 치르며 선조들도 겪었던 문제로 예나 지금이나 관심의 대상이다. 과거급제야말로 출세의 길이라 여기며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했을 모습과 좋은 학교와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제자로 들어가 노력했던 것은 드라마 속의 내용과 다른 듯 닮아있다. 조선 시대의 그림 <소과응시(小科應試)>와 김홍도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란 작품에는 과거 시험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김홍도의 그림은 과거 시험을 치르기 직전 새벽부터 모여든 풍경을 그린 것이다. 스승 강세황이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피곤하여 졸고 있는데 등촉은 눈부시게 빛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란 글을 더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응시생의 어려움을 가늠해보고 과거 시험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 시험장은 자리 선점이 중요한 것으로, 전날 밤에 시험장의 문이 열리면 선접군(先接軍)이라는 재빠르고 힘센 사람을 앞세워 좋은 자리를 다투어 선점했다. 그 모습은 조선 풍물 가사인 <한양가>에 건장한 선접군이...각색 글자표를 하여 등(燈)을 보고 모여 섰다 /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 온다 /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 별이 흐르는 듯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도 살 같도다라는 대목으로 나온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큰 양산인 일산(日傘)을 천막처럼 펴고 응시생을 중심으로 선접군과 시험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심부름을 하는 노비가 접(接)이라는 한 팀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워낙 많은 응시생이 몰리는지라 시험문제를 빨리 보고 제출하는 응시생들이 합격에 유리했다. 그 때문에 자리다툼이 심해 무질서했고 사람들이 몰려 8명이 압사했다는 숙종 때 기록도 전해진다. 흔히들 엉망진창 뒤죽박죽일 때 난장판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뒤엉켜 싸움판이 벌어지고 더러는 부정행위도 했던 난리 속의 과거 시험장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결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대략 30세이고 최연소 합격생은 13세, 최고령 합격생은 85세였다. 늦은 나이라도 뜻한 바를 이루고자 평생을 바쳐 과거 시험에 매달려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춘향전>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다. 과거를 보기 위해 춘향이와 남원 오리정(五里停)에서 애달프게 이별하고 한양으로 가 장원 급제를 한 이몽룡이 춘향이를 다시 만나는 내용에서도 당시 과거제도에 대한 경쟁과 시험 합격 후 갖는 위력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가문은 그야말로 고을의 자랑이었다. 순창 구미마을 남원양씨 종중에서 600년 동안 보관해오다 국립전주박물관에 기탁한 과거 합격증 홍패는 보물 제725호 이다. 고려 공민왕 4년(1355) 양이시가 과거에 합격해서 받은 홍패와 아들 양수생이 우왕 2년(1376년)에 받은 홍패로 다른 합격증과 교지 5매로 구성된 『남원양씨 종중 문서 일괄』에 포함되어 있다. 두 장의 홍패가 보물이 된 이유는 교지라 쓰인 조선 시대 합격증서와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었고 고려왕의 어보가 찍힌 점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 합격증을 받기까지 주경야독하며 공부했을 선조들의 총총한 눈매와 글을 읽는 낭랑한 음성까지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선조들이 공부했던 학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 고등교육 기관이었던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4학(四學)과 지방향교가 관학으로 있었고, 사립 중등교육 기관인 서원과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이 있었다. 향교의 학생을 교생이라고 칭했는데 재학하는 동안 국역이 면제되는 특권을 지녔다. 교생은 각 군현에 따라 정원이 달랐으며 일정 교육을 받게 되면 초시(初試)인 생원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합격 후엔 성균관 입학을 허용했으며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왕의 방문이 있을 시에 특별하게 치른 지역균형 선발제 격인 외방별시가 있었는데 우리 지역엔 전주별시가 있었다. 특정 지역민을 위한 응시이다 보니 해당 지역에 일정기간 거주를 하고 향교나 서원에 적을 두어야 응시할 수 있었다. 지방 인재양성의 요람인 향교는 교육공간과 배향공간으로 구성되어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교육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향교는 지역의 백성을 교화하고 유학의 소양을 지닌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세종 시기 지리지를 살펴보면 당시 329개의 향교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1407년 장수에 창건되어 본 모습이 잘 남겨진 장수향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향교는 임진왜란 등 풍파를 겪으며 훼손된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했다. 이후 갑오개혁(1894년) 때 학제 개편을 하며 교육을 기능을 상실했고, 현재 서울에는 성균관과 양천향교 1개, 전북 26개, 전남 28개, 경북 40개 등 남한에서만 234개의 향교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때부터 이어온 우리 지역의 향교로는 고려 공민왕 때 학당사였다가 1512년에 개명한 고창향교와 고려 말 건립된 익산의 용안향교와 정읍의 고부향교 그리고 전라도의 수도향교로 칭해진 전주향교가 있다. 전주향교는 초기 경기전 근처에 건립되었다. 그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경기전이 세워졌는데 향교로부터 들리는 교생들의 소리가 소란하다 하여 1401년 전주성 서쪽에 향교를 이건 하였다가 1603년 현 위치인 완산구 교동에 자리 잡고 중수와 보수를 거듭했다. 향교의 주요공간인 명륜당의 명륜(明倫)은 『맹자』의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에서 유래했다. 지역사회를 밝혔던 향교는 교육기관으로 사회 교화의 기능은 물론, 지역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품은 가치가 높다. 입학과 새 학기가 다가오는 즈음 겨울의 정취가 어우러지는 향교를 찾아 그 가치를 살펴보고 선조들이 배움에 열과 성을 다했던 공간에서 힘을 받는 것도 좋으리라.
얼어붙은 냇물과 자갈밭에서는 사내아이들과 남자 어른들이 어울리며 연날리기가 한창이었다. 연 날리는 패들은 쇠전 강변 언저리로부터, 매곡교를 지나 전주교가 가로 걸린 초록바우 동천에 이르기까지 가득하였다. 까마득한 청람(靑藍)의 겨울 하늘 꼭대기에서 감감하게 떠다니는 연들은 흡사 꽃잎들 같았다 1986년 『전통문화』 2월호에 연재된 최명희(1947~1998)의 미완 소설 『제망매가』의 내용이다. 최명희 작가가 묘사했듯이 연날리기는 이맘때쯤 즐겼던 대표 민속놀이로 한지에 대나무 살을 덧댄 연과 감치(유리를 곱게 빻아 풀에 갠)먹인 연실이 감긴 얼레를 신바람 나게 들고 뛰어나가 동네 어귀 둑방이나 언덕에 올라 연날리기를 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그해의 재앙을 연에 실어 날려 보내고 복을 맞는다는 의미로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는 액막이글이나 자신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연에 써서 하늘 높이 날린 다음 연줄을 끊어 멀리 날려 보냈다. 대보름 이후에는 더는 연을 날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 연을 날리는 사람을 보면 고리백정 혹은 백정이라고 놀렸다. 거기에는 연날리기를 좋아했던 영조임금의 이야기가 있다. 영조는 몸소 연날리기를 즐겨하며 대신들에게 연날리기를 권유했었다. 그러다 보니 연날리기가 온 나라에 크게 유행하여 글공부를 소홀히 하는 선비들과 연 날리는 재미에 빠져 농사일을 게을리하는 농부들이 생겼다 한다. 이를 크게 걱정하던 영조는 정월 대보름까지만 연을 날리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백정이라 부르라는 영을 내렸다. 그 이후에는 가장 천한 사람으로 취급받던 백정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 정월 대보름날 마지막 액막이연을 날리고 연을 날리지 않게 되었다. 다가오는 농사철을 대비하고 본업에 충실하라는 임금의 명이 풍습이 되어 연날리기는 농한기 겨울철 놀이가 된 것이다. 연은 오랫동안 인류 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것으로, 초창기에는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에서는 BC400년대에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장군인 아르키타스(Archytas)가 새 모양의 나뭇조각을 날린 것이 서양 연의 기원이라 하며, 동양에서는 BC200년경 중국 한나라의 장군 한신(韓信)이 연을 높이 띄워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는 것이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起源)』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장천1호고분》에 새 모양의 연을 날리는 모습으로 추정되는 5세기경의 고구려 벽화가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반란군을 토벌한 김유신이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날렸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647년 신라 진덕여왕 즉위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날 당시 별똥이 떨어져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지자 김유신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워 어제 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승리할 것이라 소문을 내어 진압군의 사기를 높이고 반대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심리전으로 반란군을 이겼다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고려 말엽 최영 장군이 탐라(제주도)에 목호(목축을 하는 몽고사람)의 반란을 평정했을 때 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절벽인 곳에 상륙할 수 없자 최영 장군이 꾀를 내어 군사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띄웠다고도 하고 불덩이를 매단 연을 날려 보내 불을 내어 혼란해진 틈을 타 점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 세종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 하고,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 병선과 병선으로 연락하는 수단으로 연의 문양에 따라 명령을 달리한 신호연을 사용했다고 한다. 왜적에 맞선 조선 수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던 비결이 바로 충무연이라 불린 전술연 덕분이었다. 군사적 목적 외에 놀이로서의 연은 조선 중기부터 성황을 이루었다. 연은 한자로 솔개연(鳶)자를 쓰는데 솔개가 하늘에서 날개를 펴고 빙빙 도는 모습이 마치 연과 같아 주로 종이솔개인 지연(紙鳶)으로 표기하였으나, 연이 나는 모습을 딴 풍연(風鳶), 방연(放鳶)과 바람에 날리는 연의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비슷하다 칭한 풍쟁(風箏) 등 부르는 이름이 많았다. 연은 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주로 방패연, 꼬리연의 형태였고 갖가지 문양을 그려 넣었다. 연실은 주로 황사(누런실)나 면사(무명실)를 많이 사용했고, 가장 가볍고 질긴 백사(명주실)는 신분이 높은 계층에서만 사용했다. 연실을 감는 기구인 얼레의 명칭은 고거, 선거, 낙거, 자새, 거확, 추, 실패 등 연줄을 감은 얼레의 중요한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었는데 함경도 충청도에서는 연자새, 황해도 일부에서는 연패라고 불렀다 한다. 연은 만드는 기술 못지않게 날리는 솜씨가 중요한데 특히 연싸움에서 중요하다. 연을 높이 날려 재주를 부리며 서로 얼려 연 끊어먹기를 하는 것으로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공중곡예를 부리며 승패가 갈렸다. 흔히 붙임성이 좋은 사람을 보고 넉살 좋다라 하는데 이 말은 연을 잘 날리던 강화사람에서 유래되었다. 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5개짜리 연살로 만든 연으로 참가했는데 강화도 사람은 4개짜리 연살로 연을 날렸다고 한다. 바람이 강한 강화도에서는 허릿달(연의 허리에 붙이는 대)이 없는 연을 쓰는데 그 살이 4개인 연을 넉살이라 불렀다. 한 개의 살이 부족한데도 연싸움에서 승률이 높아 넉살 강화연 좋다라는 말이 나왔고, 이것이 나중에 넉살 좋다라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대표를 뽑아 팔도 연날리기 대회를 했던 시절도, 최명희 작가의 글 속 연날리는 사람들로 붐볐던 전주천변도 이제는 옛 기억으로 남았다. 게다가 연 대신 드론을 하늘에 날리는 세상이 되다 보니 아이들이 더러 날리는 연을 제외하고는 김제 지평선 축제 등 전통문화 체험장에서나 대규모로 날리는 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는 대보름 즈음에도 각 지역의 연날리기 명소에서 연날리기 행사와 대회가 개최된다. 굳이 대회가 아니더라도 송액영복(送厄迎福)을 빌고 창공을 드높게 비상하는 연에 새해의 소망을 실어 하늘 높이 날려 보자.
새해주를 마시는 모임을 그린 풍속화가 한 점 있다. 1912년 정월 초하루 밤의 모임을 그린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로 장승업의 제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화원인 안중식(1861~1919)의 그림이다. 탑원(塔園)이라 불린 오세창의 집에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해 모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림의 제목에 도소(屠蘇)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새해맞이 술인 도소주를 마시는 모임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저 멀리 원각사탑을 흐릿하게 그려 넣고 뿌연 밤안개에 주변을 담그고 누각에 모인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 당대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흰 술병과 술잔이 놓인 탁자를 가운데 두고 차례로 돌아가며 도소주를 마시고 삿한 것을 물리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어떤 다짐을 했을지 그 마음을 더듬게 하는 명작이다. 도소주는 후한(後漢)시대 명의인 화타 혹은 당나라의 의학자 손사막이 부정한 기운을 피할 수 있도록 처방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약주로 초백주(椒柏酒)와 함께 새해에 마시는 술인 세주(歲酒)이다. 조선의 후기 학자 조재삼(1808~1866)은 『송남잡지(松南雜識)』에 도소주의 도는 귀신의 기를 발라 버리고, 소는 사람의 혼을 각성시킨다라고 하였는데, 설날 도소주를 마셔 귀신을 물리치고 사람의 혼을 깨어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도소주의 도(屠)는 잡다라는 뜻이고 소(蘇)는 사귀(邪鬼)의 이름이니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술이다. 또한, 도소주(屠蘇酒)의 한자를 해체해 의미를 살펴보면 죽은(尸) 자(者)를 위하여 나물(菜)과 생선(魚)과 밥(禾)을 차례상에 올려놓았다가 마시는 술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묵은해를 보내며 새해맞이 풍속으로 집집마다 정성껏 빚은 가양주(家釀酒 집에서 담근 술)를 차례주로 올리고 액땜으로 마신 의미를 지닌 술이다. 세주 역시 각 집안이 가진 전통과 특색이 담긴 술이다. 집안마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이 더해졌기 때문에 잘 담근 술은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곤 했다. 예로부터 우리 지역은 기름진 평야지대와 서해를 끼고 있어 전통적으로 먹거리가 풍부했고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가양주 형태의 토속주가 발달한 곳으로 조선의 3대 명주 중 이강주와 죽력고의 산지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흉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해 금주령이 내려지게 되면 술 빚는 것 또한 엄격하게 단속했다. 법이 무섭기도 했지만 먹을 양식도 없는 민가에서는 세주를 담글 엄두도 못 냈다. 대신 약재 주머니를 우물에 담갔다가 끓여 식힌 물을 술잔에 담아 도소주!라고 외치고 마시며 무병장수를 기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유한 양반집에서는 밀주(密酒)를 담가 명절마다 먹기도 했던 것 같다.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세시풍속을 적은 『세시잡영(歲時雜詠)』에 관가의 금주령이 두려워, 감히 도소주를 담그지 못하네. 백성들이 어찌 알겠는가, 큰 항아리에 청주가 넘치는 줄을이라고 풍자한 것을 보면 당시의 폐단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명의 허준(1593~1615)은 도소주를 마시는 것을 도소음(屠蘇飮)이라 하며 백출 1.8냥, 대황, 길경, 감초, 천초, 계심 각 1.5냥, 호장근 1.2냥, 천오 6돈 이 약들을 썰어 빨간 주머니에 넣어 12월 그믐에 우물 속에 담갔다가 정월 초하루 새벽에 꺼낸다. 이것을 청주 2병에 넣어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이고 동쪽을 보며 마신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1잔씩 마시고, 찌꺼기는 다시 우물에 담가 두고 그 물을 마신다고 『동의보감』에 기록했다. 약재 성분이 담긴 우물을 마을 사람들이 건강하게 나누고자 했던 마음이 귀하다. 도소주에 비하여 초백주의 제조법은 간단하다. 서유구(1764-1845)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의하면 섣달 그믐날 후추 7알과 동쪽으로 뻗은 잣잎 7개를 따서 술에 넣으면 된다고 한다. 술 빚을 때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가지로 술을 저으라는 미신이 있듯이, 동쪽으로 뻗은 잣잎은 신성한 기운을 담은 것으로 보았다. 기존의 술 마시는 예법과 달리 새해에 마시는 술은 젊은이부터 먼저 마신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초하룻날 집안이 함께 모여 차례로 세배하고, 나이 적은 사람부터 이 술을 마신다.고 기록한다. 조선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인 심수경(1567~1608)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는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나중에 마신다. 지금 풍속은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불러서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풍습은 도소주와 같이 전해 온 중국의 오랜 풍속으로, 후한시대 동훈(董勛)이 지은 『문예속(問禮俗)』에 젊은 사람은 한 해를 얻으니 먼저 마시고, 노인은 세월을 잃으니 뒤에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도소주를 마시는 순서에 대한 관습은 새해 나이 들어감을 쓸쓸해하며 읊은 여러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신정(1628~1687)의 『분애유고(汾厓遺稿)』에서 도소주를 제일 나중에 마신다고 한탄하지 말게나, 이 몸도 역시 일찍이 소년이었다네라고 한 것이나 임상원(1638~1697)이 『염헌집(恬軒集)』에 도소주를 마실 때에 내 나이 많아졌음을 깨달았네라고 한 시구가 그렇다. 이제는 집집마다 세주를 만들던 풍습도 많이 사라지고 전통주를 만드는 곳에서도 세주를 구하기 어렵다. 오랜 세시풍속으로 내려오는 풍습인 세주를 우리 지역에 있는 전통주 양조장과 술테마 박물관에서 계승하고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돌아오는 설에 세주를 빚기 어렵게 되면 차례주를 음복할 때 젊은 나이 순서에 따라 도소주!라 외치며 삿한 기운을 쫓고 모두가 내내 건강하기를 기원해 보자.
천만 번 방아에 쳐 눈처럼 둥그니 저 신선 부엌의 금단과도 비슷하네 해마다 나이를 더하는 게 미우니 서글퍼라, 나는 이제 먹고 싶지 않은걸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지은 <첨세병(添歲餠)>의 시구이다. 그는 세시(歲時)에 흰떡을 쳐서 만들어 썰어서 떡국을 만드는데 추위와 더위에 잘 상하지도 않고 오래 견딜 뿐 아니라 그 깨끗한 품이 더욱 좋다. 풍속에 이 떡국을 먹지 못하면 한 살을 더 먹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이름을 첨세병이라 한다.며 시를 지은 의미를 소개했다. 첨세병은 새해 떡국을 먹음으로써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나이를 물을 때 떡을 넣고 끓인 탕인 병탕(餠湯) 몇 사발 먹었느냐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 설날 차례상에 올릴 음식과 세배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하고 대표적인 세찬이 바로 떡국이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속은 오래된 것으로 신년 제사 때 먹는 음복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떡국에 대한 기록은 1609년의 『영접도감도청의궤』에 병갱(餠羹)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1791년) 12월 24일 하번군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도록 명한다는 기사에 고향 돌아가는 길에 양식을 주어 보내어 부모처자와 함께 새해 병갱을 배불리 먹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도 새해에 떡국을 먹어왔던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시 병갱은 국수나 수제비, 떡국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고 오늘날의 떡국은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나온 문헌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1819)』에는 흰떡을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둥글고 길게 문어발같이 늘이는데, 이를 권모(拳摸골무떡)라고 했다. 섣달그믐에 권모를 엽전 모양으로 썰어 넣은 뒤 식구대로 한 그릇씩 먹으니 이를 떡국(병탕餠湯)이라 한다고 했으며, 『경도잡지(연도미상, 정조 때로 추정)』에서는 떡국을 멥쌀로 만든 떡을 치고 비벼 한 가닥으로 만든다. 굳어지기를 기다려 엽전같이 얇게 썰어 끓이다가 꿩고기와 후춧가루 등을 넣고 국을 만든 것이다. 세찬으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을 떡국 몇 그릇 먹었냐고 할 정도다.고 했다. 『동국세시기(1849)』에는 찐 멥쌀가루를 안반(案盤떡을 칠 때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 위에 놓고 떡메로 쳐서 길게 뽑은 떡을 백병(白餠흰떡)이라 하고, 이를 엽전 모양으로 썰어 국에 넣고 쇠고기 혹은 꿩고기를 곁들여 끓이면 떡국이라 한다. 이것을 제사에도 쓰고 손님 대접에 사용하므로 세찬에는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라 기록했다. 예전의 떡국은 지금의 가래떡과는 달리 생으로 반죽해 동그란 모양으로 떼어낸 떡국을 즐겼는데, 이를 생떡국이라 불렀다. 그리고 쇠고기가 널리 쓰이기 전에는 꿩고기로 맑은 육수를 내거나 꿩고기를 볶아 넣은 꿩 떡국이 원조 떡국이었다. 하지만 귀한 꿩이 없을 때는 닭고기를 주로 썼다고 하여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는 각 지역에 따라 떡의 모양과 떡국에 들어가는 재료와 애칭도 다양하다. 궁중 음식의 영향을 받은 서울식은 육수에 떡을 넣고 끓인 뒤 달걀지단과 고명을 올린 모양으로 지금껏 전해지는 일반적인 떡국 형태로 서울을 기준으로 남쪽 지역에서 주류를 이룬 떡국이다. 충청도에는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반죽해 찌지 않고 손으로 뜯어 넣어 손 떡국으로 불린 날 떡국이 있고, 경상도지역에서는 동그랗게 썬 떡 모양이 마치 태양 같아 이름이 붙은 태양 떡국이 있다. 전라도에는 닭으로 육수를 낸 국물에 두부를 넣어 함께 끓인 깔끔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두부 떡국과 전통식 꿩 떡국이 별미로 있고 남해안에는 굴이나 해물을 넣은 굴 떡국과 매생이 떡국도 있다. 떡국을 기본으로 응용을 한 남쪽 지역과 달리 북쪽 지역에서는 떡국에 만두도 함께 넣었다. 떡국 대신 만둣국을 먹기도 하는데 만두를 즐긴 중국과 가까워 영향을 받았거나 쌀농사를 많이 짓지 않아 쌀로 만든 떡 대신 밀이나 메밀 등으로 빚은 만두를 사용한 이유도 있다. 평안도의 굴린 만둣국은 말 그대로 완자 모양의 만두소를 만두피로 싸지 않고 감자 전분에 굴려서 만든 북부지역의 대표 음식이다. 강원도엔 두부 떡만둣국과 황해도엔 소금에 절인 배추인 강짠지로 만두소를 만들어 아삭한 식감이 별미인 강짠지 만둣국이 있고, 개성엔 조랭이떡국이 유명하다. 대부분의 떡국 떡이 둥글고 어슷한 것과 달리 조랭이떡은 조롱박이나 누에고치 모양이다. 가늘게 뽑은 가래떡을 굳기 전에 나무칼로 비벼 작게 토막 낸 후 모양을 만들었다. 조롱박 모양으로 떡을 만든 이유는 옷끈이나 주머니에 다는 조롱박이 액을 막아주고 새해 복을 기원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사는 사람들이 고려가 망하자 분한 마음에 이성계의 목을 조르듯이 떡을 비틀어 조롱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지역에 따라 맛과 재료도 다른 모습이지만 새해 꼭 먹어야 하는 첫 음식인 떡국의 의미는 조선 팔도가 같이 공유했으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떡국의 흰색은 경건한 삶을 의미하고 긴 가래떡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며 떡을 엽전 모양으로 동그랗게 써는 것은 재복을 바라는 의미이다. 또한, 떡국은 흰(白)색 떡에 붉은(赤)색 고기, 파란(靑)색 파, 노란(黃)색 달걀노른자 지단, 검은(黑)색 김을 고명으로 얹어서 음양오행설에 색을 맞추며 그 의미를 확장한 음식이다. 설날 먹는 떡국 한 그릇에는 경건함과 건강, 풍요에 대한 소망을 담은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며 복(福)을 맞이하는 선조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그런 음식이니 새해맞이 덕담을 건네며 나누기에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2019년 새해가 되자 떡국을 먹은 사람도 먹지 많은 사람도 모두 한 살의 나이를 먹었다. 떡국 나이를 먹는 것이 서글퍼서 신년 떡국을 마다한 사람들도 돌아오는 구정에 어김없이 세시 음식인 떡국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설날 으레 먹는 떡국에는 새해를 맞는 다짐과 바람이 올곧이 깃들어 있다. 어쨌거나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설에 떡국을 함께 먹으며 서로에게 새해 덕담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선조들의 귀한 가르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겨울 바닷바람이 차다. 고군산 선유도 초분공원(草墳公園)이 있는 이곳은 더욱 쓸쓸하다. 이즈음의 계절은 사람의 생을 돌아보며 스러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기에 적기인 듯싶다. 삶은 어쩌면 바람처럼 스치듯 지나며 연을 잇는 것일 수도 있으니 땅 위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육탈을 한 풍장(風葬)의 풍습과 초분의 흔적이 있는 곳에 마음과 발길이 간다. 바람의 장례를 치루고 자연에 소멸을 시키는 풍장과 임시 무덤의 개념인 초분은 분명 다르지만, 초분은 땅에 묻히지 않고 육탈을 하는 풍장의 한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초분이 있던 고군산 섬들의 풍경이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 등장한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안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도 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실제 바닷가 섬인 고군산도와 부안의 위도와 계화도, 해안 인근인 고창의 월성리와 죽림리 등에 초분이 최근까지 있었다. 대부분 초분을 만든 이유도 여럿인데, 정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달에 땅을 파면 땅신이 노한다는 설, 출어시기 땅을 파면 해가 되기 때문이거나 망인의 유언을 따른 경우도 있고, 시신의 육탈 후 명당이나 선산에 모시기 위해 초분을 쓰기도 했으며, 후손이 타 지역에 있어 임시 초분을 쓰고 이장을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우리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초분들 중에는 도로공사나 방조제의 공사로 인해 이장을 했다가 산운이 맞지 않거나 액을 피하고 후손이 잘된다는 믿음에 따라 초분을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초분의 풍습이 주로 섬과 해안지역에 남아 있어 섬을 중심으로 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초분과 풍장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땅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던 장례의 한 방식이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은 채 돌이나 나무 위에 관을 얹어 놓고 짚으로 엮은 이엉과 용마름으로 덮은 임시 무덤을 말한다. 초분의 모습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부분의 초분은 돌을 깔아 덕대를 만들어 그 위에 관을 놓으므로 그 크기는 관의 길이에 비례한다. 그리고 파분하였다가 다시 만들어진 초분은 크기가 작고 정방형의 상자에 모신 경우엔 원뿔 형태이다. 초분의 이엉교체는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 여겨 새옷을 입힌다라고 하며 가을 초가지붕 이엉을 교체하기 전에 초분의 이엉을 먼저 교체하거나 섣달그믐날 혹은 고인의 기일 등에 후손들이 제작하여 교체했다. 탈육 될 때가지 대략 2-3년 정도 초분에 안치했다가 분을 해체하여 뼈를 추스려 씻골(뼈를 씻는)한 후 땅에 묻기 때문에 두 번의 장례를 치루는 셈이라 2차장 혹은 복장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초분을 만들고 해체하며 죽음을 최종적으로 재확인 하고 뼈를 깨끗하게 씻어 묻음으로써 다음 생에 다시 잘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로 본장(本葬)을 할 때까지 초분에 임시로 시신을 모셔두는 것으로 여겨 초빈(草殯), 출빈, 외빈, 고빈이라 불렸지만 빈소의 개념으로 상중의 의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초분과 이중 장례에 관한 기록과 사연들은 많이 있다. 초분은 장례풍속의 하나인 빈(殯)에서 유래하는데 백제 무령왕릉의 지석에는 왕이 사후 2년 3개월이 지난 뒤에야 3년상을 치루고 왕릉에 묻혔다는 장례의 기록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사자(死者)가 있으면 모두 가매장한다. 겨우 열수 있도록 하여 피육이 다하면 뼈를 취하여 그 곽(槨) 안에 두는데, 온 가족이 그 곽을 함께 사용한다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발기(發岐)의 시체를 거두어 초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합장하려할 때, 객사했을 때, 집이 가난해서 장지를 구하지 못할 경우나 어린아이가 죽거나 전염병이 걸릴 경우 이장을 하다가 사고가 났을 경우에 초빈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신재효(1812-1884)의 《흥부전》엔 놀보의 심보를 말하며 사람마다 오장육부였지만 놀보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술보가 왼편 갈비 밑에 달려있어 심사가 말할 것이 없는데...새 초빈(草殯)에 불지르기, 이장할 때 뼈 감추기라는 초분과 관련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마른 짚으로 이엉을 엮어 주로 만들기 때문에 불이나 짐승의 접근으로 인한 훼손의 위험에 후손들은 늘 노심초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초빈에 불을 지른 죄로 벌을 받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초분은 여러 이름으로 지칭되며 선조들의 오랜 풍습으로 이어온 장례의 형식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위생법을 제정하면서 초분을 금지시키고 화장을 권장했고, 1970년대에 이르러 새마을운동의 생활개선 일환으로 정부가 법적으로 초분을 금지하며 점차 그 흔적이 사라졌다. 고군산내 선유도와 무녀도의 초분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까지 초분이 있었던 무녀도에서도 이젠 그 흔적이 주민들의 기억과 떠도는 말로만 남아있다. 맨 마지막까지 있던 초분엔 부안 위도 사람이 모셔졌지 8년인가 10년인가 된 것 같소. 그 양반은 처가가 무녀도라 여그서 살다 갔재. 저그 무녀봉 기슭에 있었어. 그 초분은 우리도 봤재 그러다 고향으로 모셨는지 근처 묘를 썼는지 어느새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어릴 적이지만, 아직도 기억나요. 아버지를 바닥 판판한 돌 위에 모셨고 위엔 짚풀로 이엉을 엮어서 초가집마냥 초분을 썻어요. 그러다 나라에서 금지해서 초분을 없애고 아버지를 모시고 산소를 쓰려고 올라갔던 그 산길이 아직도 생생혀요 무녀도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내온 어르신들의 초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초분의 토속 장례풍습은 사라졌고 그 흔적은 선유도에 재현한 초분공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다. 초겨울 그 언덕에서 황동규의 『풍장』을 읊조리다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본다. 같은 시선으로 바다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저 바람소리가 그저 바람소리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노랫말에 쓸쓸한 안부를 흘려보낸다.
그때여, 춘향이는 옥방에 홀로 앉아 장탄식으로 울음을 우난디, 춘향 형상 가련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비만 와도 임의 생각 추오동엽락시에 잎만 떨어져도 임의 생각... 《춘향전(春香傳)》중 춘향이가 옥중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몽룡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사랑가이다. 명창 임방울(1905-1961)과 안숙선 그리고 오정해 박애리 이윤아에 이르기까지 춘향이의 아픈 마음을 토해내듯 전해줄때면 그 애절함에 절로 마음이 미어진다. 춘향이는 헝클어진 쑥대머리의 형상으로 목에 칼을 쓴 채 옥(獄)에 갇힌 모습으로 안타깝게 앉아있다. 대부분의 드라마 속 영상으로 그려진 옥중 춘향이의 모습이다. 갇힌 독방에는 짚풀이 놓여 있고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옥의 모습이 네모난 공간으로 확장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옥의 형태는 원형으로 춘향이가 갇혀있던 남원의 옥도 원형옥(圓形獄)이었다. 원형옥은 북부여(기원전 200년쯤)에서 사용됐다고 전해지며 수차례의 왕조가 바뀌는 동안에도 2000년 이상 원형옥의 형태는 그대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옥은 둥근 모양으로 담장을 쳐 그 안에 옥사를 설치했고, 감옥이 아닌 옥(獄)이라는 용어로 불렸다. 하지만 갑오경장(1894)때 관제를 개혁하면서 기존의 전옥서(典獄署, 고려 초에 설치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옥에 갇힌 죄수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를 감옥서라 개칭했고 이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1907년 감옥서를 감옥이라고 개칭했다. 이후 감옥이란 명칭을 형무소로 바뀔 때까지 29년간 사용했다. 게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우리나라 전국 읍성과 관아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고유의 원형옥도 함께 훼손돼 지금은 문헌과 그림 그리고 고지도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옥서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중 태조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옥서는 수도(囚徒)의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2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며, 사리(司吏) 2명이다. 전옥은 형조의 죄인들을 판결이 있기 전까지 수용하는 옥으로 칸마다 벽 위쪽에는 창살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판자를 깔아 두었으며 문은 두꺼운 판문에 자물쇠를 설치하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음식을 넣어 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읍성 내 독립된 시설로 존재한 원형옥은 그 모습을 만든 선조들의 사상이 돋보이는 시설이다. 원형인 이유는 감시의 사각을 없애기 위함도 있다지만 사상적인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원형의 옥을 축조한 것은 원이 하늘이나 우주를 의미한 것으로 원형 안에 죄인을 수용하면 죄인들이 스스로 교화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죄인을 가두는 것이 아닌 다시 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는 애민(愛民)사상과 집안 사정을 고려해 죄인의 형을 감하거나 면해 주는 휼형(恤刑)과 연관돼 이어진다. 단순히 죄인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형벌만을 가하는 것이 아닌 교화와 재사회화에 중점을 둔 것으로 사람을 위한 형벌제도의 취지가 우리의 원형옥에 깃들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이 승하했을 때 남긴 부고에는 크고 작은 형벌을 애써 삼가서 불쌍하게 할 것을 관리에게 경계하여, 비록 일태일장(一笞一杖)일지라도 모두 조정율문(朝廷律文)에 따라서 하고, 절대로 함부로 억울하게 하는 것을 금하여, 교령(敎令)에 기재하여 나라 안에 반포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 항상 경계하여 살피기를 더하게 하기를, 안옥(犴獄)에 이르기까지 하고, 도면을 그려서 안팎에 보여 그림에 따라 집을 짓게 하되, 추운 곳과 더운 곳을 다르게 하였으며, 구휼하기를 심히 완비하게 하여, 횡액에 걸려 여위고 병든 자가 없게 하였다.란 내용의 업적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세종은 재위 8년(1426)에 만든 옥의 표준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에 옥을 지을 때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지반을 한자(30㎝) 이상 높여 짓도록 했다. 또 옥사를 남향으로 짓고, 옥담 위의 처마를 길게 빼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 온도를 낮출 수 있도록 했다. 계절의 특성을 고려하여 옥을 지을 때 죄인이 병들거나 죽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려 하였고 죄의 과중에 따라 나누며 또한 남녀를 구분하여 남옥과 여옥으로 분리해 수용하였다. 1595년 서양의 네델란드에서 처음으로 남녀감옥의 분리가 실시되었다고 하니 조선이 서양보다 1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원형옥은 선조들의 애민사상이 담겨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에서는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죄수를 괴롭히지 못하게 엄하게 다스리라고 명한 부분이 있다. 안옥(犴獄)은 원통하고 억울하게 되기 쉬우므로 중외의 옥을 맡은 관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안옥을 설치한 것은 본래 죄 있는 사람을 징계하자는 것이고 사람을 죽게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 교조(敎條)를 내려서 힘써 긍휼하게 하였는데, 옥을 맡은 아전과 군졸들이 법도 아닌 것으로 죄수를 괴롭히고 침노하니, 이제부터는 갇힌 사람의 친속을 시켜서 하소연하게 하며 엄하게 다스려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펴게 하라. 하였다. 하지만 선조들의 사상이 깃든 원형옥은 일제에 의해 해체돼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다행히 최근에 각 지자체마다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과 관아의 터를 복원하여 지역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추세이다. 바라건대 원형옥의 모습도 복원되어 당대의 사상과 이야기들도 함께 체험 할 수 있으면 한다. 사유지이거나 복원이 어려울 경우 관련 안내판이라도 해당 장소에 올곧이 세워야 할 것이다. 특별히 춘향이의 이야기가 담긴 남원에는 지역의 명창이 건네주는 춘향이의 옥중가를 그곳에서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깊은 가을 춘향이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들어보며 그 흔적을 찾아가 본다.
11월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겨울 채비를 하게 된다. 그 월동 준비의 최고는 김장하는 것으로 입동(立冬)을 기준으로 5일 내외에 김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김장용 무를 수확할 때 무의 뿌리가 길수록 그 해 겨울이 춥다는 입동 맞이 점치기는 김장을 할 때 무뿌리 길이를 살피며 겨울의 추위에 대한 단골이야기의 소재로 쓰였다. 점점 추워질 즈음 겨울에서 봄까지 먹기 위해 김치를 담그는 김장은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우리만의 독특한 풍속으로,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김치는 자긍심을 가져오는 우리 전통음식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김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전해오는 곳은 중국이다. 김치에 관한 기록은 약 3000년 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으로 알려진 『시경(詩經)』에 밭둑에 오이가 열렸네. 오이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라는 구절로 처음 등장한다. 저는 오이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김치류로 추측되며, 존경하는 사람이 저를 즐기자 따라 먹은 공자를 보고 공자가 저를 먹느라 콧등을 찌푸렸다. 3년을 먹고 나니 적응이 되어서 수월했다라는 기록도 약 2700년 전 쓰여진 『여씨춘추)』에 남겨져 있다. 이렇듯 김치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담긴 음식으로 상고시대 때 소금에 절인 야채를 뜻하는 침채(沈菜)라는 말에서 오늘날 김치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상에 최초로 김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시기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가포육영(家圃六詠)」으로 소금에 절인 김치는 겨우내 반찬 되네.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져 서리 맞은 것 칼로 잘라 먹으니 배 같은 맛 일세라는 문구와 오이ㆍ가지ㆍ순무ㆍ파ㆍ아욱ㆍ박의 여섯 가지 채소로 만든 김치가 기록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조선 문인 서거정(1420~1488)이 지은 『사가집(四佳集)』에는 배추김치(菘虀 숭제)라는 시가 등장한다. 서풍이 늦가을 배추 향기를 솔솔 불어오자 / 항아리에 김치 담아라 색깔이 한창 노랗네 / 주옹이 나보다 먼저 이것을 좋아했거니와 / 씹어 먹으니 맛이 고량진미와 맞설만하네, 김치를 좋아한 서거정은 강희맹(1424-1483)이 건넨 중국산 배추 씨앗을 받고 흥겨워 채소밭을 돌 때면 기뻐서 미칠 것 같다네라는 시구로 그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시기 기록에는 침장고(沈藏庫)가 언급되어 당시 김장을 담그는 일을 맡은 관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의 성종 시기 성조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부녀 교육을 위해 지은 내훈(內訓)에도 침채가 소개되며 선조들이 김치의 맛과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장이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이어온 겨울맞이 세시풍속임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권근(1352~1409)의 『양촌집』 김장(蓄菜)에서 나온 시월이라 거센 바람 새벽 서리 내리니, 울에 가꾼 채소 거두어들였네. 맛있게 김장 담가 겨울에 대비하니 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와 17세기 후반의 김수증(1624-1701)의 『곡운집』에 집집마다 가을이면 무와 배추를 양지바른 곳에 묻는 김장이 연중행사라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조의 『농가월령가』(1816년) 10월조에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하오리다. 앞 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鹹淡)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양지에 가가(假家)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하였으니 월동 식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이 이즈음에 가사 중 큰 연례행사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치는 중국의 기록이 최초이지만, 우리 선조들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재료로 활용한 다양한 조리법과 문화를 형성하며 발전시켰다. 1400년대 기록인 『산가요록』에는 파와 쌀밥, 소금으로 만든 생파김치나 송이와 동아, 닥나무잎, 소금으로 만든 송이김치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500년대의 『수운잡방』에는 채소에 소금을 섞어, 천초, 할미꽃 뿌리, 겨자, 마늘, 후추 등을 섞어 만든 다양한 김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00년대 『산림경제』, 『소문사설』, 『증보산림경제』등에 김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때 비로소 김치에 고추를 넣는 기록이 보인다. 1800년대 후반에는 통이 크고 알이 꽉 찬 통배추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배추가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며 배추통김치가 확산되었고, 1900년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37종류의 김치 조리법을 소개했다. 다양한 부재료를 사용한 김치의 발전과 함께 공동작업의 형식의 풍속인 김장은 우리만의 특별한 정체성을 만들어 왔다. 김치와 김장문화는 우리네 역사와 함께 한 인류문화 자산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라는 명칭으로 2013년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대표적인 식문화인 김장문화가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김장문화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공동체 나눔이라는 상징적 정서가 숨어 있다. 김장은 월동 준비의 필수적 부분으로서 김장을 통해 나눔의 정신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김장철마다 많은 단체들이 김치 담그는 데 참여한다. 여기에서 담근 김치는 소외된 이웃과 필요한 이들과 나눈다. 이러한 담근 김치를 나누는 풍습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더욱 끈끈한 유대감을 갖는다. 김장을 해놓고, 이제 겨울 준비 끝났다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음 짓던 할머니와 노란 배춧속에 남은 양념을 버무려 밥에 쌓아 주시던 그 기쁨 넘치던 손길이 그립다. 김장김치는 따스한 손길과 고향의 기억을 불러온다. 겨울 채비를 맛깔나고 든든하게 해야 할 지금 남원 운봉과 진안의 고원에서 나오는 고랭지 배추 그리고 임실과 순창의 고춧가루 부안 곰소 젓갈로 김장 준비를 하며 풍요로운 호남의 정도 돌이켜 본다. 나눔의 손길에 힘을 더할 생각에 마음이 따스해지고 김장 양념이 맛깔나게 버무려진 배추 소를 햅쌀로 지은 밥에 싸 한 입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안에 침이 돈다.
가을 내장산은 곱다. 가을에 들어서면 온갖 색들의 향연이 산세를 따라 그림처럼 펼쳐진다. 내장산의 찬란한 계절을 이끄는 단풍은 갓난아이 손바닥 모양을 닮은 아기단풍으로 그 빛깔이 유난히 붉고 화려하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일컫는 화양연화(花樣年華)란 단어가 가을 내장산에 잘 어울린다. 그렇듯 화려한 가을 내장산이지만, 고즈넉한 산사의 깊은 가을도 내장산의 가을이다. 가고 가도 산길은 구비 구비 끝이 없는데 / 하룻밤 내린 서리에 온갖 나무는 붉게 물들었네 / 쓸쓸한 절간 낯 설은 방에서 문득 놀라 일어나니 / 울음 짖는 먼 기러기 떼는 가을바람 맞고 가는구나 조선 문신으로 순창군수를 지냈고 의병장으로 알려진 김제민(1527-1599년)이 남긴 내장산유상풍엽(內藏山遊賞楓葉)이란 시구이다. 선조들도 내장산의 가을 낭만을 즐겼듯이 설악산을 시작으로 산의 맥을 따라 붉게 타오르며 남으로 내려오는 단풍 소식은 이즈음의 내장산을 소개하며 절정에 이른다. 내장산의 가을 유명세는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매일신보》의 기사로도 알 수 있다. 1927년 09월 13일자에 觀楓客을 기대리는 井邑內藏山(관풍객을 기다리는 정읍내장산)이라는 이름으로 내장산을 소개했고, 1928년 10월 27일 자에는 丹楓의 內藏 內藏의 丹楓 내장산의 단풍구경(단풍의 내장 내장의 단풍 내장산의 단풍구경)이라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이렇듯 기사에서도 매년 가을에 내장산을 소개한 것을 보면 예로부터 내장산이 단풍명소임을 알 수 있다. 내장산은 소백산맥에서 뻗어 나간 노령산맥이 호남에 이르러 전라북도 정읍과 순창, 그리고 전라남도 장성을 어우르며 9개의 봉우리가 동쪽으로 트인 말발굽() 모양으로 빚어진 산이다. 호남 5대 명산으로 알려진 내장산은 주봉인 신선봉(763m)을 위시한 장군봉, 서래봉, 불출봉 등의 봉우리들이 저마다 독특한 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호남의 금강으로 불려왔다. 세조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성임(成任)의 <정혜루기(定慧樓記)>에 호남에 이름난 산이 많은데, 남원에는 지리산, 영암에는 월출산, 장흥에는 천관산, 부안에는 능가산이 있으며, 정읍의 내장산도 그 중의 하나이다라는 구절에서 호남 5대 명산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내장산을 기준으로 하천의 수계를 나눈 기록이 나온다. 근원은 정읍현의 내장산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군의 동쪽 15리에 와서 서쪽으로 꺾여 태인수(泰仁水)와 합하여 부안현의 동진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고, 목제천ㆍ치천 두 내가 모두 내장산에서 나와 현의 서쪽 10리에 이르러 북천에 합친다. 북천 내장산의 물이 노령의 물과 합치고, 흘러서 현의 서쪽에 이르러 고부군 모천에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호남의 정맥이 되는 노령산맥의 주산인 내장산은 동진강과 섬진강 그리고 황룡강 등 3개 하천을 품어내고 나눈 생명의 산임을 알 수 있다. 내장산은 내장사의 본사인 영은사(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으로 불렸다가, 산 안에 감춰진 것이 무궁무진하다 하여 안 내(內), 감출 장(藏)자인 내장산으로 불린다. 또한, 구절양장(九折羊腸)에 빗대어 깊은 계곡이 양의 내장같이 굽이굽이 굴곡을 이루는 산이라 하여 내장산이라 불린다고도 한다. 영은사는 636년(백제 무왕 37년)에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오십 동의 큰 절을 지으며 창건되었다고 하며, 원 내장사였던 백련사(白蓮社)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에 지어졌다 전해지는 사찰로 두 사찰 모두 내장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고승을 배출하며 불교문화를 꽃 피운 사찰이다. 그러다 숭유억불 정책이 한창이던 조선 중종 때 조정의 사찰 철거령으로 두 사찰 모두 타격을 받게 된다. 사헌부가 영은사와 내장사가 도적승의 소굴이므로 철거할 것을 건의하다라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1539년) 기사에서 내장사와 영은사의 철거령에 대한 관련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영은사와 내장사는 내장산에서 소실되다가 중창되는 변곡을 지나며 영은사는 근세에 와서 내장사로 개칭되었고, 백련사 혹은 내장사라고도 하는데, 내장산에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백련사는 추사 김정희의 청으로 벽련사(壁蓮寺)로 개칭되어 고내장(古內藏)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내장산에는 승병장(僧兵將)으로 활약했던 내장사(당시 영은사) 주지 희묵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천하장사로 알려진 희묵대사의 힘의 원천을 그가 마시는 물로 여겨 그 물을 장군수로 샘을 장군샘이라 부른다. 스승처럼 강해지기를 원한 제자 희천은 스승의 허락 없이 샘물을 마셨다. 희묵대사가 제자의 힘을 시험하려 산봉우리에서 희천에게 돌을 던지자 힘이 세진 희천이 그대로 받아 쌓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희묵대사는 전주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영정을 손홍록과 안의 등과 함께 내장산 용굴과 비례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지켜냈으며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 1597년(선조 30년) 9월 많은 왜군을 죽이고 전사했다고 전해지며 당시 승병을 배치하고 머물렀던 곳을 유군치(유군이재)로 지휘소였던 봉우리는 장군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하여 내장산에 구국의 전설을 더해 놓았다. 희묵대사가 돌을 던진 봉우리는 마치 밭을 가는 농기구인 써래를 닮았다 하여 서래봉으로 불리며 희천스님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돌무더기는 지금의 벽련사의 석축으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벽련사와 원적암 사이에 있는 돌길인 딸깍다리는 아들을 바라는 부부가 딸깍 소리가 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건너게 되면 아들을 낳는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원적암을 지나 불출봉으로 올라가다 보면 거대한 암벽동굴에 975년(고려 광종 26)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불출암(佛出庵)이 있던 자리가 있다. 불출암에 나한상을 봉안하기 위해 1922년 나한전과 요사를 지었는데 내장산의 주요 사찰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소실되어 지금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에서나마 당대의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내장산은 이 산천을 올곧게 품어주고 기원하며 지켜온 사연들이 굽이굽이 깃든 곳이다. 또한, 아름다운 단풍과 더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 굴거리나무 등 희귀식물과 동물들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로 내장산 일대는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사시사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명산이다. 그럼에도 내장산은 단풍터널을 감탄하며 지날 수 있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이 계절을 놓치지 말고 찬란한 내장산 가을을 눈과 마음에 담아보고 전설로 남은 이야기들에 우리의 추억을 더해보자.
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 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이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에 대하여 읊은 시구이다. 그곳 참성단에서 채화(菜火)한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익산에서 타오르고 있다. 전라도 정도 천년이 되는 시기에 익산을 중심으로 전북 일대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는 그 의미가 크다. 전국체육대회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전국 규모의 종합경기대회로 큰 축제이다. 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그해 11월 열린 전 조선 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초기에는 단일 종목별 경기를 개최하다가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면서 종합대회의 형태로 열렸지만 1938년 7월 일본인 체육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조선체육회가 통합되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란 주제로 1945년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부활하게 된다. 이후 1947년 조선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하고 이듬해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KOC)로 개칭하였고 자유롭게 참가했던 방식을 시도별 대항제로 바꾸면서 지금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1920년 첫 경기가 치러진 이후 99회 차 전국체전이 우리 고장에서 개최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큰 행사인 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 주요 개최지인 익산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흥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전국체전은 개최지뿐만이 아니라 참가하는 선수는 물론이고 올림픽의 정신으로 오랜 인류 역사를 잇는 큰 축제임을 상기해야 한다.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기간 내내 메인 경기장인 익산종합운동장을 밝히는 성화도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의 역사를 이으며 전통을 따랐다. 전국체육대회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를 봉송하며 개최지의 성화대에 점화하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성화 채화의 전통은 1956년 제37회 대회 때부터 민족의 역사가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의 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1872년 제작된 강화부의 지방지도를 살펴보면 마니산 정상에 단군시대 이래 제사를 지내왔다는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정족산성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정족산 사고 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는 참성단과 단군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사단 참성단은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 돌을 모아 쌓았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예전 방식대로 이 사단에서 별에 제사 지냈는데, 아래에 재궁(齋宮)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참성단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속 단군신화에 다다른다. 이렇듯 오랜 세월 단군에게 제사를 올린 참성단에서 불꽃을 받아온 전국체육대회의 성화와 백제 문명이 융숭하게 깃든 미륵사지에서 채화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의 불꽃은 대회 기간 내내 성화대를 밝힌다.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는 올림픽의 성화와 맥락을 함께한다. 올림픽의 성화는 고대 올림픽 경기 기간 중,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낼 때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경기를 신에게 봉납하는 의미로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엘리스 주의 헤라 신전에서 태양의 빛을 받아 채화한다. 그와 같은 전통을 지켜 성화를 밝힌다.는 것은 고대 올림픽 정신의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연관하여 하늘의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달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죄로 매일 새들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문명을 밝히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 신화로부터 불은 인류의 이성, 계몽, 창조적 능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하고 그 불이 전 인류를 비추는 올림픽의 정신과도 연결되었다. 올림픽은 신에게 제사를 올린 종교행사로 시작해 전쟁을 위한 훈련의 성격을 띠며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겨룬 올림피아 경기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776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엘리스에서 헤라클레스가 처음 개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도 1세기 전부터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렸다고 한다. 당시 남자들이 모두 옷을 벗은 채 경기에 임했고, 여자는 참가는 물론 관전조차 금지됐었다고 한다. 최초의 경기 종목은 단거리 달리기만 있었지만 점차 중거리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가 포함되었고 이후 레슬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마차경주, 권투 등이 더해졌다. 그 흔적은 그리스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안에서 겨루기 대회로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경기를 벌이는 근육질의 모습으로 남아 그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을 거슬러 올라가 서구의 문명과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그들이 남겨놓은 철학과 예술, 문학과 건축 등의 유산은 오늘날 서구문물 거의 모든 분야의 원형으로 손꼽히고 있고 그리스신들의 이야기는 그 특별함을 더해준다. 올해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와 전국장애인체육대회는 지금까지 개별 봉송되었던 방식과 달리 개천절인 10월 3일 같은 날 채화하여 동시에 봉송되었다. 전통적으로 채화를 해온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는 단군신화와 민족의 염원을 담은 장소이고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2년이 되던 601년에 창건되어 백제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우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다. 전국체육대회의 개폐회식이 열리는 익산종합운동장의 주 무대와 성화대도 어김없이 그 의미를 이어받아 미륵사지 석탑을 형상화했다. 성화대의 모습은 하늘을 받든 두 손이 모여져 미륵사지 선형을 나타내고 보석 같은 불꽃을 피워 내도록 디자인되었다. 아름다운 가을날 천년의 문을 활짝 열며 백제 무왕이 품었던 큰 꿈도 헤아려 본다. 그 미륵사지를 창건하며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간절한 마음도 불꽃으로 화하여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전북을 밝히고 한반도를 환히 비추기를 소망해본다.
남북관계가 호전되면서 철길을 잇는 이야기가 화제다. 단절되었던 남북철교가 이어지는 꿈은 그 바람을 타고 시베리아와 중국을 횡단해 유럽까지 내달리고 있다. 이러한 소망은 비단 우리만의 바람만은 아니었다.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고 미국의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다녀온 조선의 사신들은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1885년 일본군이 진남포와 평양을 잇는 80㎞의 군용철도인 진평선을 놓은 것이 우리나라의 첫 철도였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일본의 대륙진출 토대를 다지는 군사적 목적과 수탈을 위한 경제적 목적으로 부설되기 시작했다.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고 1900년 한강철교의 준공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X자형의 노선망을 구축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 땅을 관통하는 철도건설에 힘을 쏟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을 시작한 일본은 조선인들이 1904년 설립한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허가를 취소시키고 1909년 부설권을 탈취한다. 당시 조선이 직접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금조달 운동이 벌어졌다. 전주에서는 호남철도연구회가 조직되어 관찰사를 위시한 백성들이 중앙의 유지와 뜻을 모아 주식 공모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호남선은 철도 자국 건설 운동에 가장 많은 국민들이 참가한 철도였지만, 일본은 목포, 군산 지방의 일본 거류민들을 동원해 호남철도기성회를 조직하고 전국의 일본거류민단과 합세하여 자국 건설 운동을 좌절시켰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마자 식민지배의 기반을 갖추고 수탈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철도건설을 서두른다. 그 일제의 야욕으로 민족 애환이 된 흔적은 우리 지역 만경강과 섬진강 강물 위에 역사의 증거물로 남아있다. 만경강에 남은 폐철교인 구 만경강철교(萬頃江鐵橋)는 전북 전주시 덕진구 화전동과 전북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를 잇는 교량이다. 그 전신은 1911년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된 것으로 미츠비시(三菱)사가 만경 평야의 농산물을 반출하기 위해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편철도(주로 농업철도로 사용되는 궤도의 간격이 좁은 철도)를 개통하면서 만든 목교(木橋)다. 교량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만경강을 통해 배로 수탈 물자를 운송하였으나, 교량이 완공되면서 삼례역을 통해 철도를 주로 이용하였다. 곡물 수탈의 통로로 경편철도의 활용도가 높아지자 일제는 1927년에 사설철도인 해당 노선을 국유화하고 궤도의 간격을 넓히며 경전북부선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27년 8월 29일 자 『중외일보』에서는 조선에서 한강철교 다음으로 긴 만경강철교의 착공을 소개하고 있다. 철제 빔을 대들보 삼아 건설한 스틸거더(Steelgirder) 형식으로 만경강철교(교폭 1,985m, 길이 475.76m)가 1928년 준공되었다. 이후 경전북부선의 교통량이 늘면서 1978년 서대전과 익산 사이의 구간을 복선으로 재공사했고, 1985년에는 제2의 만경강 철교를 설치하면서 철교가 2개가 되었다. 1999년부터 추진한 호남선 고속철도 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에는 철로가 4개로 늘어났고 고속철도가 도입되었다. 2011년 전라선 복선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근처에 콘크리트 소재의 교량을 새로 건설하여 최초의 만경강 철교는 폐쇄되었다. 관리기관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은 2011년부터 철도 기능이 중단된 만경강 폐철교를 철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과 완주군이 오랜 세월 동안 일본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지역의 애환이 담겨 있어 한국 근현대사의 숱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폐철교를 보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결과 2013년 12월 20일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579호로 지정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4량의 퇴역 열차가 놓여있다. 카페 겸 복합문화쉼터로 구성된 열차는 비비정 예술열차라는 이름으로 만경강 8경 중 5경인 비비낙안의 주요 자산인 비비정과 함께 만경강 자전거길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만경강에 문화유산이 된 폐철교가 있다면 섬진강에는 일제가 마저 잇지 못한 미완성 교각이 있다. 순창 풍산과 남원의 대강을 잇고 담양방면으로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 공사를 하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상판을 올리지도 못한 채 남겨진 교각이다. 교각과 이어지는 곳에는 일제강점기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마을 뒷산을 뚫어 만든 철도용 터널인 향가터널(384m)도 있다. 전북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의 향가는 섬진강이 유려하게 굽이쳐 흘러들어와 산자락을 휘감고 나가며 강변에 모래밭이 자연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곳이다. 향가를 동네에서는 행가 또는 행가리라고 부른다. 향가(香佳)라는 명칭은 섬진강의 물을 향기로운 물(香水)이라 하고, 강 옆의 산인 옥출산(玉出山)을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의 가산(佳山)이라고도 불렀는데 각각 한 글자씩 따다가 향가(香佳)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강 건너 남원 대강(帶江)은 섬진강이 마치 띠처럼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있어, 띠 대(帶)와 물 강(江)자를 써 대강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선조들이 뱃놀이를 즐기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휘돌아 나는 맑은 섬진강변에는 너른 백사장이 있고 기암과 노송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순창 향가터널을 지나 섬진강에 교각을 놓고 철길을 잇는 철로 공사는 섬진강을 따라 금지 방면으로 조성되다가 일본의 패망 후 교각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며 중단되었고 이제는 그 흔적을 짐작할 뿐이다. 해방 이후 그대로 방치되었던 교각은 2013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이 주관한 섬진강 자전거길이 조성되면서 교각 위에 233m의 데크를 설치해 향가목교란 이름을 얻고 자전거길로 변신했다. 강 위에 오랜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낀 교각의 모습도 특별했지만 온전한 다리로 재생된 후 강을 쉽게 건널 수 있고 주변 풍광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섬진강 자전거길 인증소가 다리 옆에 설치되어 있고 다리 중간에 있는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인상적이다. 전망대에 서면 섬진강이 돌아 나는 순창의 향가유원지와 남원의 대강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투명한 유리 바닥으로 강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만경강과 섬진강에 일제의 야욕과 민족의 애환이 담긴 두 곳은 철길 고유의 운명을 다했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강과 어우러져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미완과 아픔의 기억으로 남아있던 그곳은 당시의 기억에 더해 우리가 만들어가는 추억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을바람이 나들이를 부르는 계절, 비비낙안이 자리한 곳에서 풍요로운 만경강의 정취를 느껴보고, 감성의 강인 섬진강 본류의 중간지점인 향가에서 옛 선조들의 풍류와 그곳에 남겨진 민족의 애환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남북철도의 단절된 구간을 이어갈 바람도 싣고 가을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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