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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1. 흥부전에 담긴 가치 - 남원 땅 흥부가 전한 나눔 메시지를 지역의 힘으로

태산같이 쌓인 곡식 누구를 주자고 아껴서 이리 몹시 때렸을까.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장손으로 태어나서 선영(先塋, 죽은 조상) 제사 모신다고 호의호식 잘사는데 누구는 버둥대도 이리 살기 어려울까. 차라리 나가서 콱~ 죽고 싶소!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가만 들어보면 맞고 들어온 사람 위로는 못할 망정 자신의 처지를 보태 한탄하는 넋두리이다. 이 대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흥부의 아내로 놀부네 갔던 흥부가 실컷 맞고 돌아온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진짜 흥부가 기가 막힐 말이지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에 의한 재산 상속의 차별과 조선 후기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말로 흥부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이러한 『흥부전(興夫傳)』은 많은 식솔을 위해 노동을 하는 가난한 농민을 동생 흥부로 표현을 했고, 신흥부자와도 같은 삶을 사는 이를 형 놀부로 표현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흥부전(興夫傳)』은 조선시대 지어진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 『흥보가(興甫歌)』 또한 존재한다. 이 판소리 사설 버전은 전라북도 고창 출신 신재효(1812~1884)가 1864년부터 10여 년간 정리한 것으로, 흥부가(興夫歌), 박타령, 흥부타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이 같은 흥부전은 사실 작자와 연대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정조와 순조 시대 명창인 권삼득(1771~1841)이 흥부가를 특히 장기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볼 때 18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그 흥부전의 유력한 발상지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아영면이 꼽힌다.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은 흥부가 태어난 곳이며,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 정착했다가 훗날 복을 누리고 살았던 곳이라는 것이다.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에 등장하는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라는 대목 속 운봉읍과 함양군 사이가 곧 성산리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또 성산리에 전해오는 박첨지라는 사람에 대한 설화도 흥부전의 줄거리와 비슷하여, 남원 기원설에 설득력이 보태진다.오래전 이곳에 살았던 박첨지는 부유했지만, 매우 인색하여 이웃과 소작인들에게 못되게 굴었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내쫓았다. 훗날 동생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때도 매를 때려 쫓아냈다. 이후 함양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가 죽게 되자 평소 박첨지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은 죽은 박첨지의 시체조차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부자가 된 아우는 형의 소식을 듣고 마을로 찾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돈과 제답(祭畓)을 주며 해마다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였고, 성산마을 사람들은 결국 박첨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성산리에는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이 지역의 복원 노력이 더해져 흔적으로 남아 있다.또한, 남원에 살았던 춘보라는 천석꾼이 흥부의 모델로 지목되기도 하고, 그 밖에 이야기의 배경을 평양으로 지목하는 1833년에 쓴 필사본 『흥보만보록』 등을 비롯하여 다른 판본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찌 됐든 흥부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별별 품팔이를 다 했던 흥부 부부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가난한 농부인 흥부가 우리 품이나 팔러 갑시다라고 부인에게 이야기하고는 가래질하기, 전답 갈기, 이집 저집 다니며 이엉 엮기, 비 오는 날 멍석 걷기, 땔감 하기, 말짐 싣기, 말편자 박기 등의 품을 팔고, 흥부 아내는 방아 찧기, 자리 짜기, 떡 만들기, 술 거르기, 나물 뜯기 등을 하며 동네의 잡일을 닥치는 대로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노력에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자 곡식을 빌리러 관청을 찾아가는 흥부의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다. 당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있다는 환곡을 얻으려다, 가난한 백성이 어찌 나라의 곡식을 그냥 가지려는가? 매는 맞아 보셨소?라며 비아냥거리는 관아의 사람에게 매품 거래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매를 대신 맞고 곡식을 받기로 한 날 나라에서 사면령이 내려져 매품도 팔지 못한 흥부가 천근만근의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선 여러 품팔이를 마다치 않고 살아가던 가난한 백성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그렇게 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던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며 얻은 박에서 대박을 터트리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 박에서 나온 물건들이말로 당시 백성들이 갈망했던 품목일 것이다. 흥부 부부가 슬근슬근 톱질하니 온갖 것들이 박에서 펑펑 나오는데, 불로초를 비롯하여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환혼주(還魂酒), 장님을 눈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는 수많은 약재와 약주가 나오고, 논어, 맹자, 사략, 통감 등 책도 나온다. 그리고 자개장롱, 삼층장, 동래 반상, 안성 유기, 곳간을 가득 채우는 곡식과 모시와 비단 등에 목수까지 나와 집도 지어주고 돈벼락에 대박을 맞은 흥부의 모습으로 당시 귀하게 여기는 것과 신분 상승을 위해 백성도 책을 보며 공부를 해야 함을 암시했다.그리고는, 대박을 맞은 착한 동생 흥부에게 샘을 내며 어설피 따라 하다 쪽박을 차게 된 놀부 이야기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메시지를 담아 대리만족을 얻게 해준다. 어느 고을이나 있을 신분 상승한 졸부의 얄미운 행태나 가난한 아우 같은 농민의 삶을 투영한 흥부전의 내용은 조선 후기 생활상이 잘 반영된 것으로 대박과 쪽박으로 뒤집어 불합리한 당시 경제 상황과 세태를 비판하고 사회의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형제가 화해하는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흥부전이 남긴 해학과 풍자는 우리에게 권선징악이나 징벌보다 중요한 형제애와 보은과 나눔의 메시지도 전해준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쌀쌀한 계절, 소외된 이웃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네며 흥부전에 담긴 나눔의 가치를 지역의 힘으로 귀하게 여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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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0. 봉선화야 너는 아느냐 - 역사에 묻힌 아픔, 억울한 피해자들 명예 회복해줘야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독일 장교가 듣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는 장면이다. 가끔 쇼팽을 들으면 그 장면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그 영화 속 독일군 장교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해피앤딩이었지만, 우리에겐 그 사연과 비슷하지만 결과가 달랐던 새드앤딩의 사연이 있다.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봉선화(鳳仙花, 봉숭아)를 아름답고도 처량하게 그린 노래 울 밑에 선 봉선화는 한국 가곡의 효시로 꼽히는 곡이다. 1920년 작곡가 홍난파가 애수라는 곡으로 발표한 후, 1925년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나라와 민족의 신세가 처량한 봉선화와 같다는 비유를 그리고 있다. 31 독립운동 이후 1920년대의 이 시기는, 더욱 삼엄해지고 악독해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백성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고통에 젖어만 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련과 한숨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며 봉선화를 빗대어 부른 이 노래는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구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알음알음 불려왔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된 계기가 있다. 1942년 소프라노 가수 김천애(당시 23세)가 일본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독일가곡을 부른 후 앵콜송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른 때부터이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떠나갈 듯했고, 동포들은 무대 뒤로 찾아와 김천애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부터 귀국한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한복 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일제는 가창 금지는 물론 음반판매도 금지시키며 당시의 블랙리스트로 만들었다. 김천애는 일제 경찰에 여러 차례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일제는 울 밑에 선 봉선화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붙잡아가곤 했다. 실제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불렀던 학생들을 잡아다가 의자에 묶어 놓고 집게로 혀를 뽑아서 죽인 일이 있으며, 그 수가 밝혀진 것만 해도 386명이었다고 전해진다.그 봉선화의 노래에 관한 사연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독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한 가지가 더 있다. 여수 순천사건으로 희생이 된 故김생옥 선생의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성악가 김생옥과 유명 피아니스트 박순이와의 결혼은 1944년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한 사건에 휘말린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사건의 비극으로 인해 남편 김생옥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순이가 불과 27세 때의 일이다.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결혼 후 유럽으로 함께 유학을 준비하던 김생옥(당시 30세)은 1948년 10월 광주 동방극장에서 순천여학교 제자들과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음악회 장소였던 동방극장에서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어 음악회를 3일만 연기하자는 연락이 왔고, 연기한 그 날 사이에 여수 순천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순천여학교 120명 중 20명만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기에 제자들이 걱정된 김생옥은 아내에게 금방 갔다 올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순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사건에 휘말린 김생옥이 체포되어 1948년 10월 31일 순천시 죽도봉 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된 것이다. 나중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처형되기 직전 김생옥은 내가 성악가인데 노래 한 곡 부르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며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불렀다고 한다. 이내 김생옥의 노래에 감동한 사형 지휘관은 노래를 잘 부르는 인재이니 죽이지 마라.는 의미로 손 신호를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빨리 죽이라.는 신호로 오인한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겨 그만 총탄을 맞고 말았다는 새드앤딩의 이야기이다. 소식을 들은 박순이는 순천으로 달려갔지만,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한꺼번에 사살된 시신들이 죽도봉 골짜기에 뒤섞인 채 그대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다.4년 만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3살 된 아들과 8개월의 딸인 두 아이를 키우게 된 박순이는 앞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인이 된 박순이는 자손들을 잘 키우며 오히려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사회복지활동을 이어갔다. 봉선화 같은 꽃다운 나이에 처량했을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세상을 품었던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어찌 그 아픔이 이 사연일 뿐이랴만 무고하게 희생된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한이 된 채 우리의 시간 속에 남겨져 있다.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며 우리의 역사에 남겨진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은 역사와 기억으로 전승되고, 제주의 4.3사건도 재조명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 5.18 광주항쟁도 옳게 보듬어 주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남겨진 가족으로 고통을 겪은 이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까.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에 의하여 여수 순천사건이 일어난 지 이제 69년이 지나 내년이면 70주년이 된다. 올해, 10월 19일 그 날도 어김없이 다가왔지만 아픔을 아우를 이렇다 할 이슈도 못 만들고 역사의 더걱거리는 더께가 된 채 또 지나갔다. 이제는 순천 여수사건에 의하여 무고하게 피해를 본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해 주어야 한다. 억울하게 휘말려 희생을 당한 민간인들과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가슴에 멍울로 남아있는 깊은 아픔과 한을 치유해 주어야 할 것이다. 김생옥 선생, 그가 시월의 마지막 날에 불렀던 울 밑에 선 봉선화 노랫말처럼 말이다.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봉선화의 꽃은 지면서 봉긋하게 열매를 품어내 씨앗을 투두둑 뱉어낸다. 그 힘에 씨앗은 튀어나와 주변에 자리 잡고 다음 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봉선화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고향 누이 같은 꽃이다. 친숙한 민족의 정서를 지닌 봉선화는 역사의 굴곡과 함께 노래로 이어져 왔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첫눈이 오기 전에 봉선화를 물들인 흔적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선연한 아픔으로 남아있는 일들도 이제는 잘 헤아려 역사 앞에 오명을 씻고 회생하기를 기원해 볼 일이다.△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故 김생옥 선생의 아들은 훗날 전북 익산 출신의 아내와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 가족은 다른 피해자 가족과 더불어 시신도 수습 못 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남아있는 자들의 아픈 시간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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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9. 봉동씨름과 남원 만복사지 저포 이야기 - 봉동서 천하장사 기운 받고 만복사지서 저포 던져볼까

천~하 장사 만~만~세~ 빛 고운 한복을 입은 이들이 나와 구성진 소리로 흥겨운 노랫가락을 이어간다. 씨름판에 천하장사가 탄생함을 알리는 소리이다. 요즘에야 익숙지 않지만 얼마 전만 해도 명절 즈음이면 온 가족이 한데 둘러앉아 TV에 나오는 씨름대회를 지켜보곤 하였다.한 해의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풍요의 계절이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맘때쯤 우리는 예로부터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이 여럿 모여 이야기꽃도 피우고 놀이를 즐기며 흥을 보탰다. 사실 노는 데 엄청난 의미나 목적이 있으랴마는, 풍년을 비는 놀이, 마을의 화합과 평안을 비는 놀이, 내기를 위한 놀이, 겨루기 놀이 등 다양한 형태의 놀이가 뒤섞여 긴 세월을 이어오며 우리의 역사와 생활 속 민속놀이로 내려오고 있다. 이 같은 오래된 전통과 함께 내려온 지역의 민속놀이로는 봉동의 씨름을 들 수 있다.완주군 봉동에 전해지는 봉동씨름은 단순한 겨루기 놀이가 아니라 마을의 당산제와 함께 지켜온 지역의 자산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본래 씨름은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성행했던 인류 공통의 풍속이지만 우리만의 전통 역시 긴 시간 이어지고 있는 특별한 민속놀이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래로 조선시대의 씨름은 유희 종목이자 왕의 놀이로서, 또는 사신 대접을 위한 기예이자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 민간놀이가 되어 왔다.봉동만의 특별한 씨름이 전해지는 봉동읍은 과거 봉상면과 우동면의 여러 마을이 합쳐진 곳으로, 이곳에는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의 봉상(鳳翔)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봉산리의 봉실(鳳實) 등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남겨져 있는 곳이다.이러한 상서로운 땅의 기운을 지닌 봉동에는 강둑을 따라 커다란 노거수가 8그루나 있는데, 이중 봉동 당산제단이라 써진 제단이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곳에서 300여 년 역사의 봉동당산제를 올려 왔고 올해도 봉동읍민의 날인 10월 10일에 당산제가 열렸다. 오래전부터 해거름 무렵 평안을 기원하고 주민들의 화합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강가에 횃불을 두르고 씨름을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예로부터 봉동에서는 힘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내려올 만큼 봉동의 씨름은 유명하다. 이는, 전국씨름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황소를 탄 사람들 중에 봉동출신이 유독 많아서 전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봉동 씨름은 본디 선 자세에서 샅바를 잡는 오른씨름이었다가 전국대회에서 왼씨름 한가지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선 자세로 샅바를 잡는 왼씨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봉동씨름 대회는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으로 치러지고 있는데, 애기씨름은 말 그대로 아이들의 씨름이고 중씨름은 청소년의 씨름, 상씨름은 성년남자들의 씨름이다. 한사람이 이기면 다른 사람이 도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밤이 깊은 시간까지도 횃불을 환하게 밝히고 진행되기도 하였다.이렇듯 오랜 시간 주민의 화합과 지역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가 함께 있어 봉동씨름의 특별함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씨름이 겨루기 놀이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관과 내기의 형태로 남아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겼던 민속놀이로는 윷놀이를 들 수 있다. 이 윷놀이는 여러 형식의 놀이가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특별한 이야기와 더불어 전해지고 있는 남원 만복사지의 저포를 들 수 있다.조선시대 김시습(金時習)이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는 남원에 살았던 주인공 양생(梁生)이 부처님과 저포(樗蒲)놀이를 하여 이겨 인연을 얻었다.는 내용의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가 실려 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보다도 더 기막힌 저승과 이승의 사랑 이야기를 남원에 남겨 놓은 김시습의 상상을 따라가 보면 그 사연의 매개가 되는 저포놀이가 있다.젊은 청춘 남녀가 만복사를 찾아가 향불을 피우고는 각기 제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 양생은 저녁 기도가 끝나자 법당에 들어가서 소매 깊이 간직하고 갔던 저포를 꺼내 불전에 던지기 전 소원을 빌었다. 자비로운 부처님 오늘 저녁 부처님과 함께 저포놀이를 하려 합니다. 제가 지면 법연을 차려 부처님께 갚아드리고, 부처님께서 지시면 아름다운 아가씨를 얻게 해주시옵소서. 축원을 마치고 저포를 던지자 양생이 이겼다. 기뻐하며 다시금 불전에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꽃다운 인연을 바라옵니다. 그 뒤로 불좌 뒤에 깊숙이 앉아있으니 얼마 안 되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김시습의 상상에서 나온 소설 속 소재이지만 도대체 저포놀이가 무엇이길래 주인공이 부처님과 겨루며 인연을 걸었을까 호기심을 갖게 된다. 당시 저포놀이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긴 놀이로 《조선왕조실록》과 다른 문헌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대중적인 놀이였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6권엔 맏형수 이씨(李氏)의 묘지명이 나오는데, 용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라는 문구가 전해지는 등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즐긴 놀이의 일종으로 그 방법이 윷놀이와 비슷하다.저포(樗蒲)는, 저(樗: 가죽나무)와 포(蒲: 부들)의 열매가 모양은 같으나 색이 달라서 이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었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저포는 원래 중국의 놀이로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있었다고 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노자(老子)가 서융(西戎)에서 배워온 것으로 호족들은 이것으로 점을 친다라고 적혀 그것이 아주 오래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확히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 문헌을 참고하면 최소한 백제시대부터 저포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저포의 놀이방식은 사실 오늘날 윷놀이와 매우 비슷하여 윷놀이와 같은 놀이 혹은 그 기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에 따라 저포를 뜻하는 탄희(攤戱)와 윷놀이를 뜻하는 사희(柶戱)가 같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두 가지를 다른 놀이로 분명히 구분하는 견해가 문헌으로 모두 존재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사희는 저포이자 탄희라고 일컫고 있고, 『목은집시고(牧隱集詩藁)』에 나온 「저포시」는 그 내용이 윷놀이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저포와 윷놀이가 다르다는 주장에 의하면 두 놀이가 엄밀하게는 놀이 방식과 명칭들이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그 둘을 구별한다.신원봉이 쓴 『태평어람』과 이고(李翶)의 『오목경(五木經)』이 윷놀이와 다른 저포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이며,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사희변증설」 역시 저포가 윷놀이와 가까운 다른 놀이라고 하였다.백세 뒤 나의 무덤에 표할 적에마땅히 꿈속에서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거의 내 마음을 안 것이라천 년 뒤에는 나의 회포를 알아줄까.김시습은 59세로 죽기 직전에 「아생(我生)」이라는 시를 써 현실과 꿈속을 넘나들며 살았던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 엄청난 상상으로 이야기를 쏟아낸 김시습도 당시 저포놀이를 매개로 한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이야기를 남원에 남기고 백세도 못 살고 떠났다.이 가을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놀듯이 찾아보며, 봉동에서 기운을 받고 만복사지에서 영화 속 대사와 함께 마음으로나마 힘껏 저포를 던져보고 싶다. 《왕의 남자》 속 명대사처럼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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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13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8. 시간을 품은 깊은 맛, 순창 - 순창 사람이라도 서울서 고추장 담그면 제 맛 안나더라

전후에 보낸 쇠고기장볶음을 잘 받아서 아침저녁의 반찬으로 삼고 있느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느냐? 무람없다. 무람없어. 난 그게 포첩(육포)이나 장조림 따위의 반찬보다 나은 것 같더라. 고추장은 내 손으로 담근 것이야.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물건을 인편에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부모의 마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연암 박지원(1737~1805년)으로, 아들에게 장을 담가 보내며 쓴 편지가 『연암선생 서간첩』에 남겨져 있다. 고추장을 손수 만들어 보냈는데 잘 먹었는지 답이 없어 갑갑해 하고 살짝 마음 상해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 고추장 사랑에는 정약용 선생도 남달랐다. 『다산 시문집』에는 배를 타고 가며 고추장을 가져가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작은 상자에는 고추장이 있고 / 小盒茄椒醬여행길 주방엔 장작불 연기로세 / 行廚榾柮煙사람과 고기 사이를 이어주는 맛이 / 人間梁肉味모두 이 강 뜬 배에 있구려 / 都只在江船요즘 들어 인기 쉐프로 남성 요리사들이 등장하면서 음식 만드는 남자를 TV에서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요리하는 일상이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지금도 그러한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었다니 놀랄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궁중음식을 담당했던 이들도 남성이 중심이었고, 초기의 고추장은 입맛을 돋우며 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담그며 나누어 먹은 기록을 남긴 것에는 조화로운 맛과 발효음식에 담긴 지혜를 귀하게 여긴 듯싶다. 또한, 선비 못지않은 조선 왕들의 고추장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수많은 기록과 지역의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흔적들이 순창의 자산이 되어 깊은 맛으로 자리 잡았다.장(醬)의 명가인 순창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고추장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 북쪽 여진족을 쳐부수고 남쪽 왜구를 격퇴한 전공을 세웠는데 경상도를 거쳐 올라오는 왜구를 순창 인근 남원 운봉지역에서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즈음 이성계가 만일사(萬日寺)의 무학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창에 들렀는데 그때 인근 민가에서 순창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초시(椒豉)에 비벼 낸 밥을 먹어보고 이 맛을 잊지 못해 임금에 오른 후 순창 현감에게 진상토록 했다는 설화이다.이때 이성계가 맛본 초시가 고추장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성계는 고려시대 말기인 1335년 태어나서 1392년 태조로 즉위했고 1408년 사망했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가 순창에서 고추장을 맛본 건 늦어도 고려가 아직 망하지 않았던 1392년 이전이다. 고추장의 주요 재료인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이성계가 사망한 뒤 적어도 100년이 지난 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성계의 입맛을 사로잡은 초시는 산초(山椒)나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껍질) 등을 넣은 장류로 고추장의 전신으로 여길 만하니 매운맛을 내는 발효식품인 것은 맞다.또한, 본관이 전주인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년)은 승려들이 만들기 시작하여 평민들이 즐겨 먹기 시작했다는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남겨 놓으며 번초(蕃椒)를 백성들이 고추라 부르며 하루라도 끊을 수 없는 최고의 양념이라 소개했다. 그 기록을 보아도 승려인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고추장에 관한 사연은 순창의 귀한 이야기 자산으로 의미를 둘 수 있다.고추장은 조화미(調和美)가 강조된 맛과 영양이 우수한 발효식품으로 조선시대 장류의 발전은 고추장으로 꽃피웠다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고추장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고추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호초(胡椒)나 천초(川椒)와 같은 매운맛을 내는 장(醬)문화가 존재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고추의 도입 시기와 관련해서는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설과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와 있었고 이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소수의견이지만 두 학설의 절충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임진왜란 때 이 고추가 일본으로 역수출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고추 재배가 일반화된 후에는, 고추가 종래에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했던 호초와 천초를 대체하며 점차 장(醬)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중기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고초장(苦椒醬, 古椒醬)이 기록된 점이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년)에 고추장의 제조법이 기록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추장 중 가장 유명한 순창 고추장에 대한 명성은 과거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조 때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소문사설(謏聞事說)》중 「식치방(食治方)」이 대표적이다. 순창고추장조법(淳昌苦艸醬造法)에는 순창의 유명한 고추장 담금법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재료의 내용과 비율 등이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 최영연, 1925)에는 순창고추장의 색깔은 연한 홍색이고 맛은 달고 향기로우며, 기운은 맑고 차서 반찬 중 뛰어난 식품이다. 순창 사람이 서울에 와서 손수 이 고추장을 만들었는데, 맛과 색깔이 모두 본지방에서 생산하는 고추장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순창 고추장은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담가도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같은 맛이 나지 않아, 순창의 물맛과 기후가 조화를 이루고 재료들을 섞는 비율이 좋아 그만의 맛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순창 고추장은 귀하게 여겨지며 임금에게 진상(進上)되는 것이기도 했다.신분 고저를 떠나 사랑을 받았던 고추장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다양한 이야기도 함께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고추장을 가장 좋아한 왕은 정조로 입맛이 없을 때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정조실록(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고추장을 사랑했던 정조는 대궐 밖을 나설 때마다 고추장을 챙겼다고 하며, 이후 연희궁 앞에 아예 고추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고추장에 관한 왕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스토리는 심한 현기증과 입안의 염증으로 고생하는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비약으로 고추장을 구해줬다는 이야기이다. 고추장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영조는 고추장이 늙은이의 입맛을 지켜준다.면서 고추장을 장맛이 좋은 사가로부터 진상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전해진다. 그 이후 기력을 차린 영조가 훗날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고추장은 슬프기도 하다. 매운 것을 먹으면 눈물이 나는데, 매운 고추장으로 눈이 시큰할 때마다 생각날 사람은 그 사연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마음도 더해진 것인지 모르겠다.조상의 지혜로 일반적인 밥상에서 약치(藥治)이며 식치(食治)였던 고추장을 위시한 발효식품인 장들은 건강을 지키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어루만지는 심치(心治)를 겸한 듯하다. 좋은 재료가 지닌 땅의 힘, 사람의 정성과 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맛있게 취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마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장(醬)맛은 그 집안의 음식 맛을 판가름한다는 속설이 있으며 어머니의 손길이 가장 오래 담겨있는, 정을 느끼는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음식으로 치유의 과학을 전해준 조상의 지혜에 감사하며, 가을과 더불어 장(醬)이 익어가는 소리에 마음을 더해보면 어떨까. 그 시간에 담긴 의미를 헤아려보며 고추장의 명가 순창의 풍요로운 가을을 느껴 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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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5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7. 고지도가 그려낸 고창의 정취 - 조선시대 지리정보에 생활사까지 담은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고지도가 있다. 조선시대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을 그린 「전라도무장현도(全羅道茂長縣圖)」이다. 당시 무장현에 있던 무장읍성의 내부가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어 지도를 통해 당대의 풍경과 생활사까지도 엿볼 수가 있다. 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동헌과 객사 등 관아의 실제 모습이 회화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지도라고 소개하고 있다.이 지도는 읍성이 주변 지역보다 크게 그려진 군현 지도의 특성을 지닌 채 현대의 지도와 같이 완벽한 축척을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산과 바다로 이르는 물길과 사람들의 흔적을 담은 마을과 길 등이 마치 한 폭의 회화처럼 그려져 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지도의 여백에는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와 산과 하천 그리고 포구의 이름, 민가의 수, 논밭 등의 기록이 적혀 있어 지역의 정보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읍성 남문에서부터 나와 홍살문을 지나며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과 성벽을 견고하게 표현한 모습이 흥미롭다. 남문에는 진무루(鎭茂樓)가, 읍성 안쪽에는 시장(市場)과 동헌, 객사 그리고 둥근 원형의 감옥(獄)과 연못도 그려져 있다. 남문 앞쪽에는 남산 솔숲의 울창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고, 특히 버드나무와 복사꽃이 활짝 핀 모습과 일동면에는 이석탄(李石灘) 신주를 모신 충현사(忠賢祠)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지도 오른쪽 하단에 을미맹춘(乙未孟春)으로 시작되는 글을 보면 을미년 이른 봄 시기(맹춘은 음력 1월을 칭하기도 함) 봄이 무르익는 고장의 아름다운 찰나를 사진 찍듯 그린듯하다.서쪽 해안의 심원죽도(心元竹島)에는 전죽봉산(箭竹封山)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대나무만을 별도로 관리하던 봉산(封山: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이다. 그 곁에 물결을 일으키며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짐을 싣고 다니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도 정겹지만, 특히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고기 잡는 전통적인 도구인 창살 모양의 어전(漁箭)이 그려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사실 남아있는 읍성과 변치 않는 지형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하고 그 밖의 기록들은 문자로 확인하면 되지만 당시 읍성 주변의 모습이나 구체적인 정취는 오롯이 남겨진 이 지도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지도 속에 의미 있고 아름답게 표현된 공간과 어우러지는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노라면 당대 사람들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안목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시금 배워 아름다움을 되돌려 놓아야 할 듯싶다.지도 속 무장읍성은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지어진 성으로 사적 제346호로 지정돼 있다. 진무루 주변의 석축 성곽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쌓인 토성으로 우리나라 읍성 중 지어진 연대가 가장 정확하게 알려진 성이다. 병마절도사 김저래(金著來)가 호남 여러 고을 백성과 승려 2만여 명을 동원해 4개월 동안 쌓았다고 하며, 원래는 옹성을 두른 남문과 동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옹성이 사라져 남문과 동헌, 객사 등이 남아있다.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와 주민의 거주 지역을 함께 빙 둘러쌓은 성으로, 읍(邑)이라는 글자 자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읍성이 자리한 곳은 지역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의 생활공간을 의미하기도 했다.「전라도무장현지도」와 또 다르게 무장읍성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광여도』의 「무장현」 지도를 보면 관아(衙, 아), 창고(倉, 창), 객사(客舍)와 무기를 세워놨던 군기(軍器) 등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의 표현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1872년지방지도』의 「무장현지도」는 읍성의 표시가 훨씬 자세하다. 성문만 해도 『광여도』에 없는 동문 등 문이 추가로 표시되어 있고, 관청의 경우 내아(內衙), 관청(官廳), 관노청(官奴廳), 작청(作廳), 형청(形廳) 등이 세부적으로 구분되어 나타나 있다. 군기고(軍器庫) 옆 훈련청(訓練廳)의 모습과 향청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지도를 그리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심에 담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전라북도 고창은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이 부군폐합령에 의해 하나의 군으로 통합된 경우로 본래는 읍성이 세 곳이나 있었고 동헌과 객사, 향교도 셋씩 있었다. 이중 고창시내 자리 잡은 고창읍성은 사적 제145호로 서산의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 읍성으로 손꼽힌다. 고창읍성은 무장읍성보다 더 늦은 조선시대 단종 원년(1453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석성이다. 이곳도 애초에 그 목적이 방어에 있었던 것을 보면 근방이 호남내륙의 전초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읍성은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리는데, 백제시대 산을 의미하는 모와 처소나 방위를 나타내는 량이라는 글자를 본 따 고창을 불렀던 모양부리(毛良夫里)에서 유래했다. 둘레는 약 1.7㎞, 높이는 4~6m로, 축성 당시 관아건물 22동과 연못, 수구문 등이 있었지만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1976년에 성문, 성벽을 비롯해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다.고창읍성에는 본래 민가가 거의 없이 관아 건물만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 남아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많은 관아 건물을 복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읍성과 또 다른 점은, 대부분의 읍성은 남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고창읍성은 남문이 없고 오히려 북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까닭은 고창이 동쪽과 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아 산을 둘러쌓은 읍성도 자연히 평지에 가까운 북쪽에 정문을 내게 되었다.두 읍성이 자리했던 곳은 주변의 산과 강, 바다 등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그러한 까닭에 고창읍성과 대나무 숲은 영화 「왕의 남자」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고, 무장읍성 가까이에 있는 선운사는 동백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드라마 「대장금」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인기를 끌었다. 고창읍성 성문 앞 광장에는 판소리의 집성자 신재효 선생의 고택이 있고 그 곁에는 판소리 공연장인 동리국악당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똑같은 장소이지만 우리 옛 지도에서 보이는 것과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 속 멋진 구도의 화면으로 보이는 것, 웅숭깊은 업적을 남겨내는 것도 그 땅이 건네는 힘의 표현일 것이다. 지역의 풍경은 깊은 고민을 담아내거나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새로운 시각과 감동을 주고 사연을 건넨다.옛 지도를 통해 당대의 정세나 생활상을 파악하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이야 위성과 드론이 땅의 지형지리를 한눈에 알게 하지만,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호를 비롯하여 우리 국토의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한 사람들이 남긴 고지도를 보면 어찌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 지형의 모습을 담아냈는지 놀랍기만 하다. 그들도 종종 기존의 군현 지도를 엮거나 참조하기도 했겠지만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확인해 지도를 그리고 지역에 대한 여러 고민까지 탐구하고 담아내며 노력한 전문인이다.그런 의미에서 고지도는 단지 지리적인 위치만이 아닌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선생이자 당대 기술과 노력으로 집약된 으뜸 실용서가 아닐까 싶다.가을의 고창 선운산 일대는 동백을 대신하여 잎 없는 꽃대를 밀어내며 붉게 피어나는 꽃무릇의 향연이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다. 구월, 가을 문턱에 들어서며 네비게이션이 건네는 음성과 위성지도를 뒤로하고 「전라도무장현지도(全羅道茂長縣地圖)」속 길을 따라 고창의 정취를 느끼며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아름다운 고지도를 지금의 관광지도에 응용해도 멋들어질 듯 싶다. 그때와 지금을 중첩해 오늘을 비춰보는 것도 지도에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고창의 내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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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0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6. 적(敵), 이완용의 흔적과 적산가옥 - 매국노 누웠던 명당엔 돌무더기만 수북이…

적(敵), 싸움의 상대를 말한다. 그리고 해를 끼치는 요소를 일컫는다. 요즘 들어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에겐 청산해야 할 적, 을사오적이 있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주권을 빼앗으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군인들을 대동한 이토 히로부미가 어전회의에 들어와, 참석한 각료들을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조약에 반대했지만, 건강 문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총 8명의 대신 중 일부가 찬성했는데 당시 서명한 5명을 매국노라고 하여 을사오적이라고 칭하였다.전국 곳곳에서는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제와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언론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써서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고 을사오적을 규탄했다.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당함을 알리는 우국지사들이 줄을 이었다. 통분한 국민들은 을사오적에 대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와는 반대로 을사오적은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승승장구했는데, 그중 대표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이 전북 익산에 있다.적(敵), 이완용의 본관은 우봉(牛峰)으로 경기도 광주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출신이다. 1858년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며 형편이 달라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맡으며 전라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뒤 미국을 오가며 외교관 생활을 했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조선의 중앙정부 조직이었던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에 관련하여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퇴위를 강요해 순종이 즉위하게 했다.이로 인해 전국에서 의거가 일어났고 성난 민중에 의해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탔다. 그럼에도 1910년 총리대신으로서 한일 강제병합 체결을 주도했다. 그 대가로 을사오적 중 가장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아 자손들까지도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이완용은 1909년 이재명(李在明, 1890~1910년) 의사에게 칼에 찔리는 테러를 당한 뒤 후유증을 앓으며 암살을 두려워하는 불안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무덤이 훼손될까봐 전국에 가묘를 몇 개씩 두었으며 최고의 명당을 익산에 찾아 놓고 1926년 2월 11일 종로구 옥인동 자신의 집에서 병사했다.당시 《경성일보》에 따르면 그의 장례는 일황이 내린 장례 깃발을 앞세워 성대하게 치러졌고,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들었다 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이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가 조선총독부의 발행금지 처분으로 삭제된 채 호외로 발행되었다.장례 후 이완용의 시신은 용산역에서 기차에 실려 내려가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 154-3번지 자신이 명당으로 지목한 터에 묻혔다. 묘소를 훼손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자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식칼이 묘에 꽂아 있거나 봉분이 파헤쳐지는 등 훼손이 이어지자 1979년 그가 죽은 지 53년 만에 후손에 의해 유골은 화장되어서 뿌려지고 묘는 폐묘되었다. 당시, 남겨진 이완용의 관 뚜껑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5만 원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적폐청산의 의미로 태워졌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완용이 남긴 흔적으로 남아있던 명당인 그곳엔 컨테이너와 돌무더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적의 또 다른 대표 흔적으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있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을 뜻하는 말로 적으로서 머물러 있었던 이들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전라북도는 이 땅의 양곡을 노리는 적들에 의해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서해의 물길과 군산항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제로 침탈했던 시기 전후로부터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이 수탈을 목적으로 전라북도에 살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배하자 철수하면서 그들이 살던 집들은 정부에 귀속되었다. 당시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청은 남한 내 모든 일인 소유재산을 인수하였고, 이후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귀속재산법 및 1950년 시행령에 의해 수많은 적산에 대한 매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그에 따라 오늘날 적산은 단순한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보다 적에게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재산이라는 의미로 일제강점을 입증하는 역사의 흔적으로 가치를 남기고 있다.근대문화유산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산에는 대표적인 적산가옥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가옥)이 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과거 군산유지들이 거주하던 신흥동 일대에 위치한 주택으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집이다. 목조 2층 형태로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으며, 일본식 정원과 건물의 모습 등이 건립 당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이 가옥은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범죄와의 전쟁》 등 우리나라 근대사를 소재로 다룬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되었고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탐방의 메인 코스의 거점으로 인기장소가 되었다.익산에는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가옥(구 호소카와 농장가옥)이 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목조 2층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다.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 농장 중 가장 대표적이었던 호소카와(細川) 농장 안에 있었던 주택이자, 전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의 할아버지 소유였던 농장의 일본인 농업기술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봄나루, 춘포(春浦)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면서도 호소카와 농장으로 인해 대장촌(大場村)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수탈해간 돈으로 일본의 총리가 탄생했다 하니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이 일원은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호소카와의 도정공장과 춘포역 그리고 수탈의 통로였던 만경강과 이어지는 근대사의 흔적지로 남아 역사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지난 8월 15일 익산역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끌려갔던 출발지이자 이완용 시신이 실렸던 용산역에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아픈 기억도, 적(敵)과 적산(敵産)의 흔적까지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그 역사의 흔적 따라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땅이 지닌 힘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도 있지만 아픔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깊이 새기며 그 흔적을 따라 가봐야 할 팔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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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8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⑮조선의 금서 '설공찬전'은 그저 귀신이야기였을까

여름엔 귀신 이야기가 인기다. 무서운 이야기 이른바 귀신 이야기나 공포영화가 여름에 인기를 끄는 것은 서늘한 이야기가 무더위를 가시게 하기 때문이다.어느 날 밥을 먹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아들 모습을 본 아비가 오른손잡이가 왜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하느냐라고 질타한다. 그러자 그 아들이 내가 아들로 보이오? 저승에서는 모두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한다오. 나는 죽은 조카 귀신이오라고 말을 한다. 이 소름 돋는 귀신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 소재로도 활용된 조선시대 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이다. 이 소설은 <금오신화(1465~1470)>를 이은 두 번째 소설이자 <홍길동전>보다 무려 100년 앞서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국문 번역 소설이자 대중화된 소설이었다. 그리고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 6차례나 등장한 조선의 금서였다.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아예 불태워 흔적을 멸하게 한 소설이었으며 이야기의 배경은 전라북도 순창이다.<설공찬전>은 조선시대 중종 때 문신이었던 채수(蔡壽, 1449~1515)가 지은 소설이다. 성리학이 존중받는 시절에 당시의 유학자가 윤회 사상을 도입하여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도 흥미롭지만, 귀신 이야기를 빌어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한 내용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사실 이이의 <사생귀신책>과 서경덕의 <귀신론>,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영향을 준 중국의 <전등신화> 등도 귀신 소재였지만, 유독 <설공찬전>이 금서로 지목된 까닭은 윤회화복(輪廻禍福)설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채수처럼 유능한 인물이 시대 상황을 비판한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의 조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채수는 21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젊은 나이에 요직을 거쳐 34세에 대사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산수(山水)나 지리, 불교나 도교, 토속신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그는 연산군 때 도승지 임사홍의 잘못을 탄핵하였으며, 성종 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될 만큼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봉해졌으나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지금의 상주로 내려가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곳 쾌재정에서 1511년 순창을 배경으로 하는 <설공찬전>을 지었다가 소설의 내용을 두고 유학 사림과 조정의 공격을 받아 책은 불태워지고 채수도 핍박을 받게 된다.어린 시절 귀신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는 채수는 패관소설(稗官小說)에 능통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순창 설(薛)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적당히 섞어 귀신 이야기를 풀어갔다. 순창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등에 가계가 이어져 동전리의 지명을 본따 동전설씨(銅田薛氏)로도 불린 순창의 주요 성씨 중 하나이다.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순창에 살던 순창 설씨 가문의 설충란은, 좋은 가문에 부유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딸은 혼인하자마자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한편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아들 공침이 뒷간에 다녀오다 귀신이 들린다. 이에 귀신 쫓는 무당을 불러 귀신을 내쫓으려 하자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여자이므로 이기지 못해 나가지만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고 하였다. 이후 죽었던 설공찬이 사촌 아우 공침에 들어와 저승의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귀신 공찬이 공침의 입을 빌려 이승에서 어진 사람은 죽어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어도 주전충처럼 반역해서 집권하면 지옥으로 떨어지며, 신의를 지켜 간언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죽어서도 높은 벼슬을 하고 여자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설공찬전>이 금서로 지정되고 나아가 불태워지기도 했던 것은 당대의 정치와 사회, 유교 이념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내용 때문이었다. 반역자는 임금이라도 지옥에 간다거나, 여성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쌓은 덕에 따라 저승에서 보답을 받는다는 내용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다.하지만 그보다도 큰 문제가 된 구절은 주전충과 같은 사람은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라는 말이었다. 비록 주전충은 중국 사람이었지만 절도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일을 연상시켜 왕의 정통성을 직접 공격한 셈이었다. 중종을 왕위로 세우는 데 일조한 공신이었기에 중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서 겨우 극형을 피하고 파직이 되었지만, 당시 그에 대한 성토 분위기는 뜨거웠다.사실 채수가 그와 같은 글을 통해 조정을 비판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연산군의 폭정 이후 중종이 즉위했어도 많은 반정공신이 선정을 베풀기보다는 자신들의 재산 증식에만 몰두했고, 중종은 즉위 초 무기력한 존재로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연산군이 쥐어짜나 중종이 쥐어짜나 별다를 게 없었다. 채수는 이런 현실에 절망했고 그런 결과로 중종반정의 정통성에도 회의를 느끼며 귀신 이야기를 빌어 시대 상황의 비판이 담긴 <설공찬전>을 지었던 것이다.역사를 살펴볼수록 상황은 되풀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오백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교훈을 건네는 작품인 <설공찬전>은 그저 전설의 고향에 소재로만 기억될 귀신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 상황을 빗댄 이야기는 백성들에겐 통쾌함으로 속이 시원하게 하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은 자들에겐 두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그러한 이유로 책이 모두 불 태워졌음은 물론이고, 책을 숨기고 내놓지 않은 자들은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 요망한 내용이 담겨있는 책을 숨긴 죄를 다스리는 법)로 죄를 다스린다 했다. 그런 까닭에 <설공찬전>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만 남겨져있다가 1997년 이문건(1494-1567년)이 쓴 《묵재일기(默齋日記)》 3책의 합지 이면에 숨겨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떨어져 나간 채 13쪽으로만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후반부의 전개를 더욱 궁금하게 한다.그 시절 누군가에게 숨겨져 읽혀온 온전한 <설공찬전>을 찾아보고 싶다. 시절이 달라도 금서는 은밀하게 읽히며 내밀하게 보관되었을 것이다. 마저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한 뒷부분의 이야기도 궁금하니 힘써 찾아보고, 그 배경이 된 순창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현재 순창 금과면에선 설공찬문학관 조성이 추진 중이다. 지역의 자산이 되는 <설공찬전>의 의미를 잘 담아 역사의 교훈을 살펴볼 수 있는 고전소설의 성지로 순창이 알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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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0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⑭ 옛 정취 담긴 정읍 피향정·완주 비비정, 선조들 인간계·신선계 경계서 더위 피하고 풍류 즐기던 곳

여름이 한창이다. 날이 더워지니 시원한 곳을 찾게 된다. 이럴 때 우리 선조들은 멋진 풍광이 드리워진 곳에 정자를 짓고, 인간이 사는 현세와 신선들이 산다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계에서 더위를 피하며 풍류를 즐겼다.전북에는 춘향이의 이야기로 유명한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순창의 귀래정(歸來亭)을 비롯하여 옛 정취가 담긴 정자들이 남아있다.정읍에는 피향정(披香亭)이 있다. 피향정은 연지(蓮池), 흡향정(吸香亭), 피향각(披香閣), 피향당(披香堂) 등 불리는 이름이 많았던 정자이다. 주로 불리는 피향정은 향국(香國)을 둘로 나누었다는 뜻을 지녔는데, 정자를 중심으로 상연지제(上蓮池堤)와 하연지제(下蓮池堤) 두 연못으로 나뉜 곳에 연꽃의 향이 가득 차 불렸던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시대 상연지는 메워져 길과 민가가 되었고 지금은 하연지만 남아있다. 이는 일제가 피향정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던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피향정은 호남에서 손꼽히는 정자로 보물 제289호로 지정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상연지가 있던 앞쪽에는 피향정이라 쓰인 현판이 있고 하연지 쪽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피향정 천장에는 옛 사료에 근거한 연꽃무늬가 복원되어 피향정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피향정은 이름 의미 속에 담겨 있는 연지(蓮池)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관청의 손님도 맞고 종종 숙박의 기능을 하며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집 한 채와 맞먹을 정도의 큰 규모로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정면은 5칸, 측면은 4칸의 아름다운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28개의 화강암을 기초석으로 삼았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기초석이 30개 들어갈 규모인데 2개를 빼고 28개로 한 것은, 당시 천문을 나누는 기준이었던 우주의 28숙(별자리)을 따른 것으로 선조들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는 정자이다. 이러한 피향정의 멋과 의미 덕분인지 정자에는 많은 문인이 찾아 시문을 남겨 전해 내려오고 있다.피향정은 여러 기록을 살펴보아도 누가 언제 처음 지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시대 광해군 때인 1616년에 현감 이지굉이 초라했던 건물을 중건하고, 이후 확장 중건을 한 차례 더 거쳐, 1716년(숙종 42년)에 현감 유근이 전라감사와 호조에 청하여 정부의 보조로 재목을 변산에서 베어다가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서 넓혔다고 한다. 그 후, 1855년(철종 6년) 현감 이승경이 새롭게 중수한 것이 지금에까지 남아있다 하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1957년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환원되었다.그리고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 태수를 지내는 동안 근처에 있는 연못 주변에서 풍월을 읊었다 전해지고, 이 때문에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최치원의 흔적을 기리는 축제와 관련 이야기는 남아 피향정의 가치를 가꾸어 주며, 피향정 곁에는 오랜 역사가 새겨진 비석군(碑石群)이 줄지어 서서 고을의 사연과 피향정의 지난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비석군 가운데에는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의 부친으로 태인군수를 역임했고 나라를 잃은 상실감에 자결한 우국지사 홍범식(1871~1910년)을 기리는 애민선정비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단초 중 하나로 농민들의 수탈로 만들어져 원망을 샀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도 함께 있어 역사 속의 허물을 되돌아보게 한다.완주에는 비비정(飛飛亭)이 있다. 조선시대 1573년(선조 6년)에 최영길에 의해 창건되었다. 비비정의 이름은 지명을 따와 지어졌다고도 하지만, 최영길의 손자 최양이 정자의 제호와 휘호를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지어졌다는 사연이 송시열이 쓴 기문인 『비비정기』에 정자명의 유래로 나온다.송시열은 무관을 지낸 최영길과 그의 아들 최완성, 손자 최양을 언급하면서 최양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데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칭찬했다. 또 최양의 장대한 기골을 보고 장비(張飛, 중국 삼국시대 명장)와 악비(岳飛, 남송 명장)를 떠올렸고, 그들이 용맹뿐 아니라 충절과 효로도 알려진 사람이니, 날 비(飛) 두 자를 써서 귀감으로 삼는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아도 뜻은 큰 것이라고 하였다.비비정 아래는 만경강이 굽이쳐 흐르고, 주변으로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어,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게다가 이곳은 전라도 이남에서 수도로 오가는 사람 대부분 거쳐 갔던 길에 자리 잡아 수많은 사연이 지나고, 각종 해산물과 소금을 실은 배가 오르내렸던 물자의 길목에 있었다. 선비와 나그네들이 비비정에서 발걸음을 멈추어 쉬어가며, 시와 글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음은 물론이다.비비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떨어질 낙(落)과 기러기 안(雁)을 써서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부르는 것도 특별하다.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의미로, 비비낙안은 완산팔경과 만경8경 중 제5경에 해당하기도 한다. 비비정은 비록 1752년 관찰사 서명구(徐命九)의 중건 이후 오랜 세월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소실되었지만, 1998년 복원되어 풍광 좋은 그 자리에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예로부터 정자는 쉼을 건네는 장소이고 선비의 장소로 정신을 나누며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주변의 모습도 바뀌었다지만, 이제 완주의 비비정은 근처 만경강 다리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된 구 만경강 철교와 더불어 호산서원과 삼례토성을 곁에 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그리고 정읍의 피향정엔 그 이름의 의미가 담긴 연꽃이 만개했다. 하지만 상연지가 복원되지 않아 그 이름을 이제 피향정으로 올곧이 부르기엔 부족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피향정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 절실하다. 하지만 길과 민가로 되어버린 상연지를 복원하는 데는 큰 자금이 들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피향정이 가진 본연의 의미를 찾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 볼 일이다.그리고 비비정 옆 호산서원과 사당도 입구의 홍살문이 서운치 않게 정성껏 복원되길 기대한다.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길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소망을 지닌 채, 이 여름 피서 겸 선조의 정취가 깃든 장소를 찾아 비비정의 강바람도 담고 피향정의 연꽃향에 우리 마음도 함께 담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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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⑬ 채용신이 그린 시대정신과 사람들, 벼슬 물러나 전북에 살며 지역 이야기·애국충절 화폭에 담아

△<사진 1> 만석꾼, 곽동원의 초상화지난 6월 초상화 한 점이 2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작품이다.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채용신은 동근(東根)이라는 본명 외에, 석지(石芝)라는 호와 고종에게 하사받은 석강(石江)이라는 호 등 그 이름이 많았던 화가이다. 그는 모든 분야의 그림을 다 잘 그렸지만,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려 어진화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채용신의 어진 모사와 화사 내용은 고종 시기 승정원일기에 잘 기록되어있다.채용신은 뛰어난 화가이자 무과로 등재해 벼슬이 종2품(從二品)에 이른 사람으로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채용신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도 지금의 서울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관리한 현령이었고, 김홍도도 정조의 어진을 잘 그린 포상으로 현풍현감이 되어 관직에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유명 화가가 관직에 종종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로서 당시의 자연풍경을 주로 남겼고, 김홍도가 세시풍속을 주로 남겼다면 채용신은 사람들의 사연이나 초상화를 그림으로 남겨냈다.특히 채용신은 우리 지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정읍에서 세상을 떠나 익산에 묻히기 전까지 주변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이 특별한 까닭은, 그림이 전하는 당시의 스토리 속에 지역의 이야기와 애국충절의 마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김제와 군산 사이 만경강을 배경으로 춘우정의 사연을 그린 김영상투수도(金永相投水圖)를 보면 잘 알 수 있다.△<사진2> 김영상 투수도작품을 보면,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보이는 그림 한가운데에 배 한 척이 떠 있고 배 좌측으로 물에 뛰어들어 몸부림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그림의 주인공 김영상이다. 물에 빠진 김영상을 보며 부지런히 손짓하는 순사와 승객, 뱃사공의 당황한 모습은 물론, 화폭의 위와 아래로 민가와 함께 그 무렵 다녔던 기차까지 그려져 역사의 한순간이 실감나게 전해지고 있다.김영상은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1836년 정읍에서 태어나 저명한 유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활동을 중단하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정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제가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이름 있는 유학자 100여 명에게 천황 이름으로 노인 은사금을 내리자, 김영상은 일왕의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일왕 도장이 찍힌 은사금 증서를 찢어 입에 넣어 삼키고, 일본 순사의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김영상은 천황모독죄로 군산감옥으로 압송되고, 군산으로 가던 그가 만경강 신창 나루 근처에서 입고 있던 옷의 의대에 절명사를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건이 바로 그림 속 장면이다. 당시 투신 후 괘씸죄가 추가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옥사한 김영상의 정신과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낸 채용신의 뜻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채용신은 명나라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인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도 그렸다. 총 8폭의 그림으로 가로 183㎝, 세로 169㎝의 대작이다. 감상용이 아닌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에 봉안되었던 종교화다. 관우 신앙은 명나라 때 조선에 온 장수가 전파한 것으로, 왜적을 물리친 것이 관왕의 위령 덕이라 믿었던 것이 유래가 되어 관왕묘에 제사 지내던 것이 일제에 의해 1908년(순조 2년) 폐지되었다. 현재 전북에는 전주와 남원 등에 관왕묘가 남아있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는 채용신이 그린 관우 초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아마도 채용신이 삼국지연의도나 관우초상을 그렸던 마음에는 주유가 적은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관왕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도 일본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는 애국의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 여겨진다.어진이나 관우 초상 외에도 다양한 초상을 그린 채용신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면을 응시한 모습이다. 특히나 눈빛을 중심으로 세밀한 의복과 소품 등 표현 속에 그 사람의 품성이 깃들어져 보는 이들에게도 주인공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싶다. 자애롭게 표현된 고종의 눈빛, 영조의 형형한 눈빛과 불에 타 반쯤 남아 용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짐작하게만 하는 태조의 어진에서 풍겨오는 왕의 기품은 글로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걸작인 황현 초상(黃玹 肖像)은 사진과 더불어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를 잃게 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로 유명하다.△<사진3> 황현 초상 및 사진황현의 초상화는 그가 자결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에 1909년 김규진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지만 자결한 그의 스토리를 담아 사진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표현하였다. 사실적 묘사와 흑백의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적 느낌이 더해져, 황현의 당당하고 굳은 의지가 생동감 있게 전해져온다.김영상이나 황현 등 수많은 우국지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데에는,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 신분 고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뜻깊은 정신과 업적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고자 했던 채용신의 사명감이 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채용신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유명한 인물의 초상만 그린 것이 아니다. 사대부나 중인, 일반 민중의 그림도 그렸다. 그가 그렸던 인물 중 운낭자(雲娘子)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으로서 이름은 최연홍이다. 27세 때인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 때 군수를 도운 일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서는 기적(妓籍)에서 제외하며 상을 내렸고, 사후 평양 의열사에 제향되었다고 한다. 채영신이 운낭자의 27세 때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서양화의 인자한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연상시킬 만큼 신분을 떠나 그 사연을 특별하고 숭고하게 보이게 한다.△<사진4> 운낭자상사람의 정신까지 담아 그려낸 그의 섬세한 작품에 감탄을 하고 보니, 채용신의 붓끝과 그의 마음을 따라 우리 고을 미술 기행을 해도 좋을 듯싶다. 채용신은 92세의 일생 중 벼슬에서 물러난 후 35년을 전북도에 거주하며 자기공방을 가지고 초상화를 의뢰받아 많은 작품을 남긴 군수 출신의 전업 화가로 살았다. 사실, 당시 초상화의 주요 쓰임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했다니 하니, 아직도 우리 고을 어딘가에는 그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 중 몇 점이 가문에 모셔져 아는 듯 모르는 듯 특별한 눈빛을 건네며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그 흔적도 찾아 그가 남긴 눈빛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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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0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⑫ 물을 다스려 안은, 벽골제와 황등제 -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 소중한 문화유산

최악의 가뭄이다. 살다 살다 이런 가뭄은 처음이라고들 한다. 바짝 말라붙은 하천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죽어버린 물고기 떼의 모습과 거북이 등 모양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말라만 가는 곡식들이 마음을 더 애달게 한다.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는 물가 근처에서 생활해 왔다. 문명의 시초가 늘 강에서였던 것이나 인류가 물을 생명수로 여기며 물의 재난이나 물 부족에 대비해왔던 것은 그와 같은 까닭이다. 더욱이 치수(治水)는 전통 농경사회에서 식량 생산에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특히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전북도 일대에서는 물을 잘 다루고 활용하는 것이 생존 그 자체였다. 이중 예로부터 고을마다 물을 넉넉하게 사용하기 위해 하천이나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담아 놓은 저수지와 둑은 지난 과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치수법 중 하나였다.김제시의 벽골제(碧骨堤)는 가장 유명한 저수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벽골의 이름은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벼의 고을이라는 뜻으로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辟卑離國)으로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으로 김제를 불렀다. 벼 고을의 둑이 벽골(碧骨) 표기된 것은 이두 표기(우리말 고유의 문법 형태를 보충하고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적는 문법)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기록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처음 둑을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저수지 축조를 한 것을 보면 당시 선조들의 토목기술이 대단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둑을 쌓는데 동원된 사람들의 짚신에 묻은 흙을 턴 것이 쌓여 산을 이루어 신털미산 혹은 초혜산(草鞋山)으로 이름 붙여진 지명을 보면 오랜 시간에 걸쳐 큰 규모의 공사가 회자되었던 것 같다. 이후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축과 재축을 거쳐 온 기록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중 1415년 (조선 태종 15년)에 중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벽골제 중수비는 벽골제 제방과 함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중수비는 애초 신털미산 정상에 건립되어 있었지만,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장소인 벽골제 단지 내로 이전되었다. 세월에 흔적으로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해 전문을 알아볼 수 있다.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군도 역시 이 둑을 쌓게 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둑의 길이는 6만 843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만 7406보이다. 다섯 개의 도랑을 파서 논에 물을 대는데,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였는데, 이 둑은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와서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고, 인종(仁宗) 21년 계해년에 와서 증수(增修)하였는데, 끝내 폐기하게 되니 아는 이들이 이를 한탄하였다. (후략)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김제군, 벽골제 내용 원문 발췌)오늘날 그나마 모습을 남기고 있는 제방 일부는 평지에 일직선 거리로 약 3㎞가량 펼쳐져 있는데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돼 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며 지역 정체성을 갖게 해 준 귀한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수 있는 의미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림에는 이수와 치수가 근간이 되어 왔다. 농경사회가 나라의 근간이 되었던 까닭에 곧 물을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목숨을 다스리고 윤택한 삶을 좌지우지하는 길이 되어 왔던 것이다.한때 우리는 국가가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 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여 물에 대한 철학을 되새기기도 했지만, 작금에 물에 대한 인식은 4대강 등 몇 가지 이슈에 한정돼 있는 듯 보인다.하지만 보다 편리하고 발달된 기술로 다스리고 있을 뿐 물은 여전히 우리가 주의 깊게 다스려야 할 대상이며 오늘날에는 생태와 지역 문화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더욱 많은 귀한 대상임을 되새겨야 한다.그렇기에 옛 선조들이 해왔던 물을 대하는 귀함과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벽골제와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치수의 흔적과 옛 물길을 다시 복기하듯 살펴보며 선조의 지혜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물의 흔적도 귀한 자산이다.익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다는 호수와도 같은 큰 저수지,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리는 황등제(黃登堤)의 흔적이 아직까지 황등면의 지명에 남아 그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뱃길마을, 섬말, 샛터, 도선마을 등 백제 무왕의 설화와 함께 원형을 발굴해서 이어갈 우리의 역사이다.《대동여지도》와 《동여도》에도 황등제의 표기가 분명히 있고,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는 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登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 두었다.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 등에도 황등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지만, 아직은 백제 유적지 들판에 담겨 있는 원형의 모습이 상상으로만 남아있다. 사라진 지역의 귀한 자산인 황등제의 원형이 올곧이 복원되기를 바란다.심한 가뭄이 든 지금은, 선조들이 우리 지역에 남긴 물을 다스리며 귀히 여겼던 그 마음도 담아 기우제라도 함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비가 충분히 내려 목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수를 흐르게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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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3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⑪ 세월을 품은 피바위와 요강바위, 자연이 빚어낸 세월의 흔적…'지역이야기 꽃' 피우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며 세상 풍경은 십 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더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함께하는 사물들도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 독특한 모양의 돌이나 바위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이름을 지어 부르며 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주었다. 동네 어귀 근처 혹은 길가에 남아, 어떤 것은 풍자로 웃음을 짓게 하고, 어떤 것은 소원을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이나 슬픔을 품으며 우리 곁을 지켜왔다.△남원시 인월면 피바위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의 바위가 그렇다. 달을 끌어낸다.는 뜻의 인월(引月)이라는 지명과 붉은빛을 띤 바위라는 뜻의 혈암(血巖) 곧 피바위라는 이름에는 그만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3000여 명의 왜구가 지리산 일원에서 노략질을 일삼을 때, 조정에서는 토벌을 위해 활 쏘는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신궁 이성계를 보낸다. 이성계는 기습을 계획하고 황산에서 기다렸지만, 적장 아지발도는 황산에 이르기 전 진지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고려 침략 전 누이로부터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이성계는 꾀를 내어 할머니 한 명을 아지발도에게 보냈고, 할머니는 이곳에 황산이라는 곳은 없다.고 거짓말을 해 그가 안심하고 황산에 이르게 하였다. 작전에 성공한 이성계는 어두운 밤에도 활을 쏘기 위해 달이 뜨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기도에 화답하듯 그믐밤임에도 밝은 보름달이 떠올라 화살이 적장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이때 람천에 있는 바위에 적장과 왜구들이 흘린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하여, 이 지역을 인월로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피바위의 붉은 흔적은 이성계의 호국 전설보다도 훨씬 이전의 세월을 품었을 수 있다. 철기시대를 이끈 지역의 산물로 더 거대한 역사를 말이다.기록을 보면 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성계의 왜구토벌 활약 상황이 중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기에 기록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운봉(雲峯) 팔량티(八良峙)에 피바위[血巖]가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왜장 발도(拔都)를 쳐 죽인 곳으로 돌 위에 얼룩진 피가 지금까지 생생하다. 임진년에 바위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왜적이 왔으니 괴이한 일이다.고 기록하고 있다.△『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피바위에 대한 내용 원문바위에 관한 전설은 기록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 주민 구전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피바위 위에서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기를 받을 수 있으며 바위가 잡귀를 물리치고 우환을 막아 준다는 속설 때문에 바위 부스러기를 따로 보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던 피바위의 전설이 최근 과학적 분석 및 여러 지질학자의 검증을 통해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연구에 따르면 피바위의 붉은빛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의 피에 물든 것이 아니라, 일반 바위보다 높은 바위의 철분 성분이 오랜 시간 물에 닿으면서 산화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은 과학적 검증보다 오랜 세월이 품은 이야기의 힘이 더 센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사연을 그대로 지역의 자산으로 간직함이 좋을 듯싶다.피바위로부터 멀지 않은 구간, 전라북도 순창에는 섬진강을 호위하듯 들어선 장군목이 있다. 주변 산봉우리가 신비롭게 웅장하게 마주 선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형상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장구목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수만 년 동안 섬진강 물살이 다듬어 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km에 걸쳐 드러나 꿈틀거리며 물결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물 중심 바위 중 툭 도드라져 가운데가 움푹 파인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위 가운데가 파인 모습이 마치 요강 같다고 하여 이 바위에는 요강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순창군 장구목 요강바위요강바위는 둘레 1.6m, 깊이 2m, 폭 3m, 무게 약 15t으로 움푹 파인 외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그 파인 공간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5명이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요강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독특한 외형과 이름만큼이나 역사의 아픔과 개인의 소망까지 소중히 간직한 자연물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유명세에 억대의 비싼 가격까지 매겨진 탓에 1993년에는 중장비까지 동원한 도석꾼들에 의해 바위가 도난을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요강바위를 내가기 위해 도석꾼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길을 낸 탓에 길을 정비하는 인력으로만 알고 주민들도 상황을 잘못 짐작했다 한다. 하지만 다행히 1년 6개월 만에 마을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 와 지금의 자리에서 지역의 상징이 되고 있다.△요강바위 주변 지형이 드러난 여지도의 순창군 일부사시사철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피바위와 요강바위 같은 바위의 모습들은 긴 시간을 통해 자연이 빚어낸 세월의 흔적으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짧은 인간 생애 속에서 긴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해오며 지금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 자연과 시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품게 되는 듯하다. 유독 바위에 관해 여러 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지난 5월에는 임실의 사라졌던 동자바위가 한 독지가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 마을을 찾아가 보니, 되살아난 동자바위가 어르신들 틈에 어울려 능청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역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또 사라지기도 한다.브뤼셀의 상징으로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Statue of the Pissing Boy)도 프랑스 루이 15세가 약탈해 간 후 다시 되돌려졌다는 일화를 지낸 채 도시를 상징하며 사랑받고 있다. 사라졌을지라도 지역 이야기가 품었던 흔적을 발굴하고 다시 살리는 것이 지역만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믿는다.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지역에 구전되거나 기록에는 남아있지만, 사라진 흔적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 소박한 모습으로 자생했던 식물들도 다시 지역의 이야기와 더불어 꽃과 나무로 피어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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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09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⑩ 특별한 장소, 동국사와 두동교회 - 우리 문화에 외래 종교 스며든 공간, 담고 있는 의미 커

군산에는 특별한 소녀상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의자에 앉은 소녀상과 달리 꼿꼿이 서 있는 소녀상이다. 소녀상이 특별한 것은 서 있는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식 사찰 양식으로 지어진 절에 일제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잊지 말자는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것이다. 그 어디보다도 더 적절한 장소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지역에는 이처럼 역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한 장소와 건축물들이 있다. 군산의 동국사(東國寺)와 익산의 두동교회가 대표적이다.일본 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 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것은 순수한 포교 목적이 아닌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 식민지를 고착화 하려는 의도였기에, 그들은 1899년 5월 군산이 개항하자 기다렸다는 듯 일본식 사찰과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6월에는 일본불교 최대 종파 조동종(曹洞宗) 우치다(內田佛觀)스님이 군산의 외국인 거주지 1조통(영화동)에 금강선사(錦江禪寺)라는 이름의 포교소를 개창하였다. 이후 금강선사는 1913년 현 위치(금광동)로 옮겨와 에도시대 풍의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고, 1955년 동국사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동국사가 특별한 것은 일제강점기하 전국에 세워진 일본식 사찰 500여 개 중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이라는 점이다.동국사는 군산이 고향인 고은 시인과의 특별한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자전적 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과 「만인보」 등에는 동국사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일찍이 동국사에 자주 다녔던 고은 시인은 동국사 주지 혜초(慧超) 스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출가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중장이라는 법명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이 민족의 애환이 서린 동국사에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에 국내에서 열한 번째로 사찰 경내에는 최초로 서 있는 소녀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일제가 당시 우리나라 소녀들을 끌고 가 종군 위안부로 삼고 고통 속에서 살게 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한 결정이었다.그에 앞서 2012년 9월에는 일본 불교 종단인 조동종이 과거에 행한 과오에 대한 불교적 참회와 사죄의 뜻을 담아 동국사 경내에 참사문비를 세운 바 있어 두 기념물이 함께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밖에 동국사에는 1919년에 교토에서 만든 국내 유일의 일본 전통 양식의 종각과 국가지정 문화재 64호로 등재된 대웅전, 보물 제1718호인 군산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373여 점이 남겨져 있다.군산의 동국사가 일제가 우리의 불교문화에 외래문물인 일본불교를 강제로 이식하려고 했던 사례라면, 익산의 두동교회는 역시 외래 종교인 기독교문화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교문화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에게 합류된 사례이다. 건물 두 동을 합해서 만든 교회라 해서 두동교회라 이름이 지어진 이 교회는, 기독교가 우리 문화 속에 들어오기 전의 유교 전통과 기독교 신식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두동교회가 유난히 특별한 것은 이 교회가 김제 금산교회와 더불어 두 곳에만 남아있는 ㄱ자형 교회 건물이라는 점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일곱 살만 되어도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아니한다)이라고 하여 남녀를 구별하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리하는 것을 삼갔던 당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예배드리는 장소를 남녀가 분리되는 두 공간으로 구분한 두 개의 동을 합쳐 교회를 ㄱ자형으로 만든 것이다. 일종의 현지 토착형 선교라고 할 수 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와 자율성을 존중하였을 뿐 아니라 독창성까지 돋보이는 건물인 것이다.1929년 세워진 두동교회는 두 축의 중심인 강단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편인 동서 측에는 여자들만, 왼편인 남북 측에는 남자들만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더욱이 똑같은 ㄱ자형 건물이라도 남자가 앉는 공간이 더 길게 지어지고 강단도 남자석을 바라보고 있는 김제의 금산교회와 다르게 두동교회는 강단이 중심에 설치되어 있고 남녀공간이 똑같은 크기로 지어져 더욱 의미가 크다. 남녀의 공간을 분별하는 우리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했던 기독교적인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두동교회의 건립 사연도 특별하다. 이 고장에 박재신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대를 지을 자식이 없던 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익산시 성당면의 선교사였던 해리슨(William B. Harrison, 하위렴)은 박재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전도하며, 교회에 다녀야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고, 이에 박재신의 아내는 3㎞ 넘게 떨어진 이웃 마을로 예배를 다니게 되었다.처음에 박재신은 집안 여자들의 교회 출입을 반대했지만 부인이 임신하게 되자 아예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놓았고, 1923년 5월에는 구연직 전도사와 첫 예배를 드리며 두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박재신의 소작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교회에 나오면서 1년새 교인이 80명까지 증가하였고, 두동교회는 박재신이 곳간으로 쓰던 고패집(ㄱ자형) 창고에 마루를 깔고 예배 처소를 넓히기까지 하였다.그러나 1929년 박재신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게 되면서 박재신의 마음이 급변했고, 교회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을 모두 비우라고 명하였다. 박재신의 눈치를 봐야 했던 교인들의 대부분이 교회를 떠났지만, 이 중 20여 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남은 신자가 채소밭 100평을 내놓았고, 마침 1929년 6월 소나무를 실은 배가 침몰하여 배에 실려 있던 소나무들이 두동리 근처 성당포구까지 떠내려온 덕에 적은 돈으로 목재를 구매하여 현재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우리 문화에 외래종교가 이식된 동국사와 외래종교에 우리 문화가 자연스럽게 깃든 두동교회 두 곳을 차례로 둘러보며 우리가 그저 무심코 지나치는 다른 건물들에도 외향만이 아닌 그만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특히 말없이 동국사 경내를 응시하는 소녀상의 모습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민족의 아픔과 당시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던 소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촛불로 뭉친 국민의 염원으로 세워진 새 정부는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고 지난 과오들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게는 우리 주변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들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오월 푸르른 날, 새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국사와 두동교회로 특별한 나들이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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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2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⑨ 귀한 우리술, 죽력고와 이강주 - 봄 나들이…전통주로 취하고~ 세상 시름 잊고~

조선시대 백미의 도자기가 있다. 백자 철화 끈무늬 병(白磁鐵畵垂繩文甁)이란 이름의 보물이다. 그 멋스러운 모습은 만든 이의 마음과 도자기를 취했던 선조의 풍류가 느껴지는 듯싶다. 풍만한 곡선을 그린 백자의 잘록한 목에, 휘감아 늘어뜨려져 살짝 말려진 끈이 여백의 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멋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선비가 바지 춤에 귀한 약주를 담은 술병을 걸고 마치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다. 이러한 기품이 있는 병에 담겨 봄나들이의 벗으로 함께 할 우리 술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죽력고와 이강주를 담고 싶다.명주라는 표현에 걸맞은 죽력고와 이강주는 본디 갖고 있는 품성은 물론이고, 독특한 향미가 매력적인 술이다. 더욱이 예로부터 선조들이 약주 즉 약이 되는 술이라 하여 심신에 좋은 동반자로 여기며 귀하게 여긴 술 중에 최고인 술이다.조선시대 후기 당시 우리 조상들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봄에 마시기 좋은 술로 꼽은 호남의 술이 지금의 정읍에서 전해지는 죽력고이다. 죽력(竹瀝)이라는 말은 대나무 진액을 의미하는데 약을 의미하는 고(膏)를 붙여 죽력고라고 불렀다. 죽력고가 봄에 마시기에 좋은 술이라지만 약주라는 단어에 걸맞게 예로부터 약으로 쓰였다는 것은 고문헌과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으로 순창에서 체포된 전봉준 장군이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상했을 때 죽력고를 구해 마시고 원기를 회복해 서울로 압송될 때는 수레에 꼿꼿이 앉아서 갔다고 전해진다. 이 죽력고가 꽤나 몸에 좋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다산 정약용 선생도 『목민심서』에서 그 죽력을 채취하여 약을 조제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신기한 효력이 있어 저절로 많이 파급되는 것이라고 효능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구사당집』 제2권에는 죽력고는 겨우 세 되를 얻어 복용하시고 있으나 이 섬에는 역죽(瀝竹)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 생강도 없으니, 참으로 괴롭고 기막힐 노릇입니다라며 병든 이에게 줄 죽력고가 없어 안타까워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명성이 대단한 술인 죽력고는 현재 송명섭(宋明燮) 명인에게 정통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죽력고는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 죽력을 추출해야 하기에 대량생산이 무척 어려우며, 이 지역의 쌀과 대나무 진액 외에 생강, 계피, 솔잎. 석창포 등이 들어가므로 술보다 약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죽력고처럼 약주로 대접을 받는 대표적인 술이 또 있다. 이맘때 피어나는 배꽃의 배를 주재료로 빚어 죽력고처럼 봄의 술로 사랑받았던 이강주(梨薑酒)가 그것이다. 이강주 역시 약주였기에 이강고(梨薑膏)라는 이름이 함께 따라다녔다. 전주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급 술로, 배(梨)와 생강(薑)이 들어가서 이강(梨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재료인 쌀과 정제수와 전주의 배, 봉동의 생강 이외에 울금, 계피, 꿀 등 몸에 좋은 재료들을 섞어 만들어 정말 약주라고 부르기에 제격이다. 특히 생강과 계피에서 나는 독특한 맛과 향 그리고 부드러움 덕에 선조들은 이강주를 더운 밤의 서늘한 초승달 빛으로 묘사하며 술잔 속 여유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강주 또한 오랜 전통의 명주로 고문헌 속에 유독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 순조 때의 문신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계산기정( 山紀程)』에 조선 최고의 술 중 하나로 이강주를 추천했고,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에도 우리나라 5대 명주 중 하나로 이강주를 꼽곤 하였다. 이 문헌들에 의하면 이강주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에서 즐기던 고급 약주로서 신선과 어울린다는 평판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많은 문헌에서 이강주를 언급하며 그 역사와 전통을 증명하고 있는데, 봉산탈춤의 말뚝이 사설 부분에는 아예 자라병, 강국주 이강주를 내놓고라는 대사가 나오고, 한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도 나라를 대표하는 건배주로 쓰일 정도였다.하지만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술이 몸에 이로운 약주가 되려면 잘 마셔야 한다. 전해 내려오는 우리 옛말에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술을 마실 때에도 예의가 필요해서 사람들 사이 화목과 질서 유지를 위해 술 마시는 것을 예법으로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마을의 자치규약이었던 향약에는 이처럼 고을에서 어른을 모시고 술 마시는 예법을 배웠던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정극인 선생의 『불우헌집』을 보면 어린이는 서당을 열어서 깨우치는 법을 엄하게 하고, 이웃 간에는 향음주례를 정하여 화목한 규정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손위 어른과 마실 때 두 손으로 받아 정면으로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마시는 풍습은 이러한 예법으로부터 나온 우리 모습이다.이렇듯 술은, 우리 문화 속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다. 꽃이 피어서 마시고 꽃이 진다 마시며, 기쁜 일로 축하하며 마시고, 슬픈 일을 위로받으며 마신다. 과거 술을 지혜롭게 즐길 줄 알았던 선조들처럼 건강을 위한 약주로 예를 갖추며 마시기도 한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지만 좋은 이들과 함께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은 행복이고 위안이기도 할 것이다. 앵화우(櫻花雨)나리고 이화우(梨花雨)나리는 시절 나들이길 벗으로 우리 전통주가 어떨까. 멋들어진 병에 귀한 술과 봄빛을 함께 담아 세상사 잊고 기분 좋게 취해도 좋을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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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8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⑧ 마음을 노래한 상춘곡과 정읍사 - 옛 선조들의 풍류… 봄꽃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다

봄꽃과 더불어 봄 노래가 한창이다. 화사한 봄은 우리 마음을 꽃처럼 피워낸다. 봄의 낭만에 취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봄을 노래하고 시구를 떠올리며 더욱 낭만적이 되는 듯싶다.전라북도 정읍에 살았던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은 요즘 시절에 딱 맞게 봄을 맞아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며 하는 노래라는 의미의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그가 벼슬을 사임한 뒤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만년을 지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가사문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대중적인 시 형식이었다. 고려 시대 후기에 발생하여 조선시대 초기 사대부 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행(行)에 제한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연속체 율문(律文) 형식과 폭넓은 개방성 때문에 양반은 물론 승려, 부녀자, 중인과 서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던 민족의 문학이었다. 가사문학에는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세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고?)녯 사람 風流(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옛 사람의 풍류에 내가 미칠만한가? 못 미칠까?)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난,(천지간의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마랄 것가. (산림에 묻혀 있어서 즐거움을 모르는가?)數間茅屋(수간 모옥)을 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작은 초가를 시냇물 앞에 두고,)松竹(송죽)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 주인) 되어셔라.(소나무와 대나무 울창한 데에 풍월주인이 되었구나.)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엊그제 겨울을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桃花杏花(도화 행화)난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복숭아꽃과 살구꽃이 석양 속에 피어있고,)綠楊芳草(녹양 방초)난 細雨中(세우 중)에 프르도다.(푸른 버들과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불우헌집(1786) 제2권에 실린 정극인의 상춘곡 중 일부당시의 가사문학을 보면 선조들이 우리 주변의 자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동양적 사상에 의한 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곁에 두고 즐기는 친근한 대상이었다. 특히 자연을 삶의 벗으로 여기고 동경하는 다른 가사 작품들이 항상 임금의 은혜나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토로한 것에 비해 상춘곡은 그러한 상투적인 내용이 없어 더욱 특별하다.이는 그가 이미 벼슬살이를 마친 후에 창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관직에 대한 욕심 없이 순수하게 안빈지족(安貧知足)의 삶을 즐기는 그의 마음이 잘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호를 딴 불우헌(不憂軒)이란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향리의 자제들에게 협동하고 예의를 갖출 것을 가르친 것이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古縣洞鄕約)의 시초가 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향약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예안 향약보다도 81년이 앞섰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임금 성종이 치하를 하자 정극인은 송축하는 의미로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가사는 불우헌집에 남겨있고, 현재는 무성서원에 신라 말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정극인의 가사 작품처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노래는 문학이 되고 당시 조상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정극인이 살았던 정읍에는 가사문학 훨씬 이전의 유명한 노래 한편이 더 전해진다. 정읍사(井邑詞)가 바로 그것이다. 작자와 연대 모두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옛 백제 지방의 노래로 짐작되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 가요라는 점에서 특별하다.달하 노피곰 도다샤(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져재 녀러신고요(저자에 가 계신가요)어긔야 즌대를 드대욜셰라(아,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 곳에나 다 내려놓고 오시어요)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아, 내 님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악학궤범에 실린 정읍사 전문당시 정읍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달에게 남편의 안녕을 빌며 밤길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낸 노래이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정읍사의 노래와 망부석을 연결하여,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 망부석(望夫石)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춘곡에 담겼던 정극인의 순수한 마음처럼, 이 노래에는 하염없이 님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상대방을 향한 원망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걱정과 관심으로 일관해 그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1493년에 출간된 악학궤범에 실리기까지 무려 700년 이상을 구전으로 전해졌다고 하니, 그 그리움과 사랑이 전해지기까지 세월에 쌓인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눈과 마음을 돌려 우리 곁을 돌아보면, 꽃송이 채로 붉게 떨어져 땅 위에서 아프게 또 한 번 피어나는 동백꽃은 남편을 그리는 그 여인의 마음을 닮아있다. 그리고 화사한 봄꽃과 더불어 꽃놀이를 즐기는 모습에선 옛 선조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복잡한 시류와 바쁜 일상을 지내오며 우리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미처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채 지나치는 순간들이 많다. 봄이 건네주는 봄바람 꽃바람에 우리 마음을 담아보며 봄날이 가기 전에 지금 흘러나오는 봄 노래라도 따라 불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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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1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⑦ 전주 탁백이국과 진안 애저찜 - 역사도 '전북의 맛'에 반했다

1928년 12월에 발간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에는 경기도 여자부터 시작해 팔도(八道) 여성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전라도의 여자들이 다른 도의 여자보다 요리를 잘한다. 그 중에 전주여자의 요리하는 법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다고 말하며 음식에 관한 한 서울여자가 갔다가 눈물을 흘리고 호남선 급행열차를 타고 도망질할 것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사실 예로부터 전라북도가 다양한 전통의 맛과 푸짐한 상차림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풍요로운 전라북도 농경문화를 낳은 자연의 축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남평야의 기름진 땅과 이를 둘러싼 산 그리고 옥토를 적시며 흐르는 좋은물에서 양질의 쌀과 갖가지 채소가 생산되었고, 서해바다에서 온 다양한 수산물이 음식재료로 더해져 풍요로웠기 때문이다.근래에 들어와 전주의 유명한 음식 목록에 비빔밥이 빠지지 않는 것은 근방에 좋은 쌀과 식재들이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비빔밥 못지않게 향토색이 짙은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방신영, 1917)에 콩나물국밥 대신 콩나물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에서는 탁주를 담는 그릇을 뜻하는 탁백이 탁백이국이라고 부르며 우리 조상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콩나물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오며, 조선시대에도 이를 나물로 무쳐먹거나 구황식품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콩나물국으로 먹었다는 기록이나 구체적인 조리법은 191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다. 콩나물국은 사실 재료를 구하기 쉬워 사시사철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정착된 조리법은 매우 단순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독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유명했던 것은 주재료인 이곳의 콩나물, 쌀, 물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별건곤 12월호에는 팔도의 명물을 예찬하는 기사에서 전주의 탁백이국이 특별히 맛있는 것은 좋은 물 덕분이라며 이를 칭찬하고 있다.서울의 설렁탕이 명물이라면 전주명물은 탁백이국일 것이다. 다른 채소도 마찬가지지만 콩나물이라는 것은 갖은 양념을 많이 넣은 맛있는 장과 놓아야만 입맛이 나는 법인데 전주콩나물국인 탁백이국만은 그렇지 않다. 단지 재료라는 것은 콩나물과 소금뿐이다. 이것은 분명 전주콩나물 그것이 단 것과 품질이 다른 관계이겠는데, 그렇다고 전주콩나물은 류산암모니아를 주어 기른 것도 아니요, 역시 다른 곳과 똑같이 물로 기를 따름이다. 다 같이 물로 기르는데 맛이 그렇게 다르다면 결국 전주의 물이 좋다고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략)지금의 전주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맑고 풍부한 물은 맛있는 콩나물을 재배하기에 제격이었다. 콩나물국밥 보급의 비결은 물뿐만이 아니기도 했다. 현재 남부시장의 근원이 된 남문 풍남문밖에 형성된 시장의 여건도 영향을 주었다. 시장음식으로 전주의 좋은 물과 콩나물, 싸전다리에서 유통되던 쌀 등을 조리하여 손쉽게 상인들이 먹게 되면서 콩나물국밥이 호황을 누렸다.전국에 널리 알려진 콩나물국밥과 다르게 좀 특별한 별미도 있다. 전북 10미(味) 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을 끄는 진안의 애저찜이 바로 그것이다. 애저(兒猪哀猪)를 한자로 풀었을 때, 아이 兒자가 붙어 혐오감이 들 수 있는 까닭에 슬플 哀를 붙이기도 하였다. 어미 뱃속에 있지만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어 슬프다고도 해석할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죽은 새끼돼지를 먹는 것이 슬프다고 풀 수도 있다. 옛날 먹을 것이 귀해 일반적인 식재는 물론 농가의 고기가 특히 귀하고 아쉬웠던 당시, 죽은 새끼돼지도 그냥 버릴 수밖에 없어 찜으로 요리했던 데서 생겨난 음식이다. 돼지는 대략 8마리에서 15마리까지 새끼를 낳는데, 한꺼번에 많은 새끼를 낳다보니 새끼가 뱃속에서 죽은 채 태어나기도 했고 어미젖을 먹다가 깔려 죽는 경우도 있었기에 애저찜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넘어오면서 애저찜의 기원은 조금 변질된다. 조선시대 독점적 상권을 부여받은 상인들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돈 많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그러한 부의 과시수단으로 공급이 한정되어 있던 애저찜을 먹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결국 죽은 새끼돼지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어미돼지를 잡아 태어나기 직전 어미 뱃속에서의 새끼돼지로 애저찜을 요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애저찜에 대한 기록은 콩나물국밥보다 시기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규합총서>나 <증보산림경제>,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 등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쓰인 문헌에서 돼지새끼집을 삶아서 갖은 양념과 함께 찐다., 새끼돼지의 뱃속에 여러 가지 양념을 채우고, 솥에 물 한 사발을 부은 다음 대나무를 솥에 걸쳐서 새끼돼지를 안친다. 동이에 물을 담아 솥 위에 놓고 천천히 불을 지핀다. 동이의 물이 따뜻해지면 찬 물로 세 번 바꾸어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식기를 기다렸다가 초장에 찍어 먹는다.와 같은 조리법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기원을 알아본다면 진안군 강정리의 당산제의 제물 목록에 애기돼지가 기록 되어있었던 걸로 그 역사를 추측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오래 전 진안 강정마을 당산제에 올랐다는 돼지새끼를 마을사람들이 도로 파내어 찜 형태로 요리해 먹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안 사람들은 이 당산제의 역사를 근거로 애저찜의 본고장을 진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사연을 지닌 애저는 양반들도 즐겨 찾았던 음식이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연회의 식단에도 들어 있던 특별식이기도 했다.어머니의 정이 담긴 집밥이나 콩나물국밥 같은 친숙한 음식이거나 혹은 애저찜처럼 생애 몇 번 먹어볼지도 모르는 별미이던 음식은 우리와 떼어놀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은 어떨때는 장소가 연상되기도 하고 누군가와 먹었던 기억으로 인해 때론 위안이 되기도 향수를 느끼게도 한다. 그렇기에 요즘엔 요리와 맛집에 관련된 것들이 대중의 높은 관심사가 되었다. TV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맛집투어를 다니며 SNS로 인증하는 것이 유행이다. 그도그럴 것이 맛있는 음식은 생각만해도 즐겁고 찾아가는 여정에 따라 그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더욱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역의 특색을 음미할 수 있는 맛있고 든든한 향토음식으로 모두가 행복한 봄날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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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31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⑥ 춘풍이 전해온 매창과 황진이 - 이별이 애끓게 한 사랑…오늘도 사무치게 그립구나

봄이다. 향긋한 봄바람이 콧끝에 감긴다. 춘풍에 실려 온 남쪽의 매화소식은 마음을 설레이게 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전주 한벽당 아래 바위에는 매화향기를 찾아가는 소로라는 뜻을 지닌 심매경(尋梅逕)이라 쓰인 암각서가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기녀를 만나러 갈 때 매화 향기를 맡으러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는데 그 설렘을 표현한 길인 듯 싶다.시대를 막론하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마치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그 사연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내며 설레이게 한다. 전라북도에는 남원 광한루를 거닐었던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예향의 낭만을 만끽할만한 이야기가 여럿 전해져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안의 매창 이야기와 익산의 소세양이 사랑했던 황진이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매창과 황진이는 재능과 기예가 출중해 조선시대 기녀문화를 대표하는 시와 사연을 많이 남겨 역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들이다.瓊花梨花杜宇啼 (경화이화두우제) 배꽃 눈부시게 피고 두견새 우는 밤滿庭蟾影更悽悽 (만정섬영갱처처) 뜰 가득 달빛 어려 더욱 서러워라相思欲夢還無寐 (상사욕몽환무매) 꿈에나 만나려도 잠마져 오지 않고起倚梅窓聽五鷄 (기의매창청오계)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울어라가슴 한구석 설레임과 아련함을 동시에 전해주는 이 시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중기에 부안에서 태어난 기녀 매창(梅窓, 1573~1610)이다. 평생에 동쪽 집에서 밥 먹는 것을 배우지 않고, 매화 창문에 달그림자 비낀 것을 사랑하여 스스로 매창이라고 하였던 그녀는 그 이름만큼이나 봄날의 매화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당대 유명한 기녀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무엇보다 낭만적인 사랑을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시조와 한시에 능했고, 노래와 춤은 물론 거문고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 한다. 비록 기녀 신분임에도 몸가짐이 곧아서 손님들이 희롱하려 하면 곧잘 시를 지어 물리쳤다 전해진다. 실제로 그녀는 허난설헌, 황진이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손꼽는 여류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시조와 한시를 남겼다. 현재 58수(매창의 시는 56수로 기록되어 있고 2수는 다른 이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싯구로 구성된 <매창집>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한권은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매창을 두고 <홍길동전>을 지었던 허균은 성품이 고결해서 기생이지만 음란한 짓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해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고 말했다.그런 그녀가 열렬히 사모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인 출신으로 당상관 벼슬까지 오른 뛰어났던 시인 유희경이 그 사람이다. 시와 거문고 연주를 잘한다는 부안의 기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희경과 만난 매창은 아름다운 시절을 보낸다. 이후 오랜 이별 가운데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전주에서 짧은 해후를 갖기도 하지만 다시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면서 두 사람은 영영히 이별하게 된다. 매창은 거문고를 안고 38세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유희경을 결코 잊지 못했고 유희경 또한 그러한 매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고 한다.매 창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럴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을 앞에 두고 님과 이별하는 일유희경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워 사무처도 서로 못보고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만남은 잠시이고 늘 헤어져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던 유희경의 시 역시 이심전심 두 사람의 마음을 함께 전해주고 있다.또 다른 주인공인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관찰사와 형조판서우찬성좌찬성홍문관 대제학까지 두루 지낸 뒤 익산으로 은퇴한 명사였으며, 율시 등 각종 시문에 능한 문장가이자 송설체를 잘 쓰는 명필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소세양에게는 강직하고 호기로운 면모도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스스로 여색에 빠지는 것은 사내라고 할 수 없다고 자부하여, 당시 송도의 명월(明月)이라고 소문났던 기녀 황진이(黃眞伊)와 시한부 연정을 맺었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소세양은 자신의 친구 앞에서 명월이 뜨는 날 명월 황진이를 만나 한 달 뒤 그 다음 명월이 뜨는 밤에 헤어지겠다는 약속을 한다. 당시 소세양과 황진이의 한 달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두 사람이 어떠한 생각으로 한 달을 함께 지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약속된 30일이 지나 소세양이 떠나려고 할 때의 시문이 전해져 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언해준다.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이 다 지고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만 노랗게 피었구나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높은 누각 하늘과는 한 자 사이 맞닿았고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들은 취하는데 술은 천 잔이로다流水和琴冷(류수화금냉)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어우러져 서늘하고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소리에 향기를 풍겨오네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나면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운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이어지리황진이가 읊은 시를 듣고 소세양은 내 맹세한 대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고는 며칠을 더 머물렀으며, 이후 익산에 내려와서도 황진이와의 짧은 만남을 그리워했다고 한다.매창과 황진이의 이야기는 단지 기녀라는 이유로 자칫 가치가 훼손될 수도 있다. 기녀는 우리나라 오랜 문화예술사에서 예악을 담당하고 당대 예술을 선도했던 중요한 축이었음에도 겉으로 드러난 신분 탓에 이중적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녀라는 직업을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가무기(歌舞妓)와 매음(賣淫)을 업으로 삼는 창기(娼妓)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매창과 황진이와 같은 기녀는 시서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예기(藝妓)로서 오늘날의 프로 예술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단순히 가십거리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남긴 자취와 글은 그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예술적인 작품인 것이다.그가 세상을 뜨자 인조 임금이 3일을 애도했다는 조선시대의 문신 신흠(1566~1628)은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늘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글을 남겼다. 그들에게서 풍겨났던 매화 향기는 그저 누군가를 이끄는 가벼운 유혹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봄이 찾아옴과 함께 풍겨내는 매화향의 고결한 자연섭리처럼, 그들만의 예술적 재능과 사랑을 그려내는 진심이 담긴 아름다움일 것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는 매창이,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는 황진이가 사랑했던 소세양이 잠들어있다.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해도 좋을 새봄, 매화 향기에 이끌리듯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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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17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⑤ 동학농민혁명군 루트와 전봉준 공초-'평등 세상' 외치던 뜨거웠던 정신…유산계승에 힘 모아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발표한 격문의 내용이다. 짧게 쓴 문장이지만 그 결의가 실로 절실하게 와 닿는 글이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3년째 되는 해이다. 고부(현재의 정읍)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과 횡포에 항거해 발발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봉건주의와 오랜 억압속에 살던 농민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우고 한국의 근현대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대사건이었다.역사의 전말은 이렇다. 어릴적부터 체구가 작아 녹두(綠豆)라 불렸던 전봉준 장군은 고창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여러 곳을 거쳐 살다 고부에 정착했다. 그런데 당시 고분군수 조병갑은 온갖 명목으로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백성들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는 등 폭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정읍천 하류에 농민들이 잘 사용하던 보가 있었음에도 굳이 핑계를 만들어 흉년이 들어도 만석이 난다는 이름의 만석보를 쌓고 세금(水稅)을 거둘 정도였다. 민심을 파악한 조정에서 조병갑을 익산으로 전출을 시켰으나 쉽게 수탈을 일삼던 고부를 떠나기 싫었던 조병갑이, 조정에 손을 써 다시 돌아오면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봉준과 1000여 명의 분노한 농민들은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 모여 뜻을 같이 하고 관아를 습격했다. 옥을 열어 죄 없는 농민들을 풀어주었으며 곳간을 열어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횡포를 상징하는 만석보를 파괴하고 만석보 혁파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리들의 만행은 계속되어 전봉준과 농민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각지에서 1만 여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해 차례차례 관군을 격파했고 급기야 전주에 입성해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기까지 하였다. 비록 조정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를 구실로 들어온 일본군이 관군에 합세하면서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은 패배하였고 전봉준 장군은 붙잡혀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역사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다양하게 남겨진 기록과 기억으로 전승되는 흔적 덕분이다. 고창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와 부친 전창혁이 아이들을 가르친 서당터가 남아있고, 정읍에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이 사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근처에는 우물물로 농민혁명군의 밥을 지어 먹여 동학농민혁명군 우물로 지칭되는 우물과 관아터도 있다. 만석보가 있던 터에는 설명판이 있고, 비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된 만석보 혁파비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각(碑閣)을 세워 놓았다. 말목장터의 감나무 역시 100년 이상 자리를 지키다가 2003년 태풍 매미때 쓰러진것을 보존처리하여 동학농민혁명전시관으로 옮겨놓았고 다른 감나무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로써 대표적인 것은 체포 압송될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사발통문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재판기록인 전봉준 공초(全琫準 供草)가 있다. 사진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 사진기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1895년 2월 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관청인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안도현 시인은 이 사진에 대한 인상을 시(詩)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남겨 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작가로 우리 곁에 있다. 1968년 정읍시 고부면에서 발견된 사발통문도 있다. 고택 마루 밑에 70년 동안 묻혀 족보 속에 있었던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문) 너의 성명은 무엇이냐? 답) 전봉준이오문) 나이는 몇 살인가? 답) 41살 이오문) 사는 곳은 어디인가? 답) 태인 산외면 동곡리오문) 직업은 무엇인가? 답) 선비를 업으로 삼고 있소간단한 문답으로 시작된 전봉준 공초는 31일간에 걸쳐 5번 열린 심문에 275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법정 심문기록이다. 법무아문의 관원과 일본영사가 함께 재판에 참여한 것으로 전봉준 장군이 의연하게 답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전봉준 공초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전개 과정, 그리고 전봉준 장군의 사상을 이해하고 관련지점 및 인물에 얽힌 그의 심리와 고증의 기준이 되는 가치있는 고문서이다. 재판 후 사형판결을 들은 전봉준 장군은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자다. 그런데 역률(逆律:역적을 처벌하는 법률)로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고종실록에 사형판결일만 나와 있고 집행일이 명시되지 않아 사형일이 판결 당일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경성신보, 시시신보, 동경조일신문 등에 전봉준 장군의 사형집행이 판결 다음 날인 4월 24일(음력 3월30일)로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으로 기록된 전봉준 공초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전체 가사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랫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진 전래민요다. 그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청나라 군사 혹은 푸른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이라고도 하고, 전봉준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부안출신 신석정 시인은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갑오동학농민의 노래를 발표했다. 1963년 정읍 덕천면에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 당시 건립위원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위촉으로 신석정 시인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쓴 시이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어이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나왔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린다/ 저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이었네. 전원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일제시대부터 저항시를 써왔던 신석정 시인의 면모가 돋보이는 시이다. 비록 실패한 혁명이 되었지만 평등한 세상을 꿈꾼 수많은 농민들의 염원은 민족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우리 땅에 남아 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고자 관련 지자체나 유관기관들은 유적을 보존복원하고 관련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유적지 답사와 테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유산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루트로의 연결성과 정확한 고증에 따른 지원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 뜨거웠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을 때 유산 계승에 힘을 모아야 한다. 평등사회를 꿈꾸며 나아갔던 동학농민혁명군의 발자취를 의미있게 복원하고 잇는다면 크나큰 자산이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민족정신의 구간으로 올곧이 되살려 그곳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환한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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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24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④ 이야기의 보고, 새만금 - 굽이굽이 펼쳐진 고군산 절경…'최치원' 설화 숨어 있었네

돛 걸고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나 멀리 불어온다뗏목 타니 한나라 사신 생각 약초 캐니 진나라 동자 생각세월은 무한의 밖 천지는 태극의 안봉래산이 지척에 보이고 나는 또 신선 노인을 찾아간다- 최치원, 「바다에 배 띄우니」몇 해 전 한국과 중국 간 정상회담이 있었을 때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직접 인용하여 화제가 된 최치원의 시이다. 시구 말미에 언급된 봉래산은 중국 <사기(史記)>에도 기록된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로 신선이 살며 불사의 영약이 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릉도원에서의 삶이 눈앞에 그려지는 시의 묘사를 따라가면 최치원의 전설이 서린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에 이른다. 고군산군도는 이름 그대로 군산의 오래 된 섬의 무리들로, 신선이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선유도를 비롯한 총 63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다.고군산군도는 과거에는 사람의 접근이 힘들었던 섬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는 조선시대 <정감록>의 예언이 이뤄진 것인지 1991년 새만금방조제가 착공되고 몇몇 섬들이 육지와 교량으로 이어지면서 이 일대의 운명은 변하게 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활력이 없던 지역의 경제가 살아나고, 새만금이 우리나라 국토의 균형발전 및 전라북도 성장 동력으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가 정부와 지역 내부에서 잔뜩 감돌았다. 기존의 빼어난 경관은 접근성이 높아짐에 따라 잠재가치가 큰 관광지로의 도약을 꿈꾸게 했다. 심지어 군산 앞바다를 전진기지로 중국, 나아가 동북아시아 지역의 거점으로 보다 거대한 비전을 그리기까지도 하였다.부푼 기대와 다르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발길을 끌어오는 일은, 단지 땅을 고르고 도로등 건설 인프라를 조성하고, 더불어 해외와 민간의 투자 유치를 벌이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새만금을 선점하려는 지자체들의 입장이 있고, 기업 유치를 위한 현실적인 조건들, 또한 이곳에 새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한 정주 요건의 마련 등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지역의 뿌리이자 정체성으로 자리잡아온 이곳의 역사와 이야기를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일이다. 지역의 역사문화가 함께 어우러지지 않는 개발은 사상누각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군산군도는 지역의 이야기자원들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의 지형만 봐도, 만경강과 동진강의 두 물길을 따라 전라북도의 이야기들이 모여들고, 또한 수려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섬마다 제각기 그만의 이야기가 스며있어 개별적이고도 종합적인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다.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지역의 가치가 담긴 이야기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고군산군도에 남겨진 최치원의 설화는 특별하다. 최치원은 우리 역사 속 대학자로 과거 중국에 이름을 알린 바 있지만, 그 명성은 앞선 시진핑 주석의 인용에서도 보았듯이 지금의 중국에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 양주에 최치원 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다. 신라말엽의 문장가이자 대석학이었던 최치원은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자 동방문학의 시초를 이룬 문호이다. 이러한 최치원은 그의 탄생설화를 포함한 이야기들을 고군산군도에 남겼다. 원래 경주최씨의 시조는 금빛 나는 돼지(금돈)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 돼지 최씨로 불린다. 단군이 곰에서 나왔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박혁거세가 박 속에서 나왔다는 설화와 함께 황금돼지 민속설화가 남겨져 있는데, 이 사연이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인 것이다.전설에 따르면 최치원이 태어나기 전 그의 부친은 고군산군도에 있는 내초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오히려 황금빛이 나는 암퇘지에게 붙들려 토굴에서 몇 달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 황금돼지가 새끼를 배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바로 최치원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했지만 매번 황금돼지에 가로막혀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황금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 사이 다섯 살이 된 최치원에게 아버지가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을 했다. 그러자 최치원은 황금돼지가 해놓은 나무토막을 몰래 엮어 배를 만들어 도망가자고 제의하였고 이윽고 두 사람은 어린 최치원의 기지에 따라 탈출에 성공했다 한다.신시도의 월영대는 최치원 선생이 피리를 불고 시를 읊으면 그 글 읽는 소리가 중국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신시의 명칭 자체가 최치원이 글을 읽으며 새로움을 다짐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새만금에는 내초도와 신시도에 남겨진 황금돼지와 최치원 이야기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설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와 문학의 배경이 된 수 많은 이야기 보물창고다. 새만금의 비전은 먼 곳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남겨진 이야기가 바로 지역의 힘이되어 복을 불러오는 원천으로 활용 될 때 새만금의 의미와 비전도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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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2.1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③ 만마관과 풍남문 - 막을 건 막고 품을 건 품었던 '호남제일관'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은 시구에는, 그가 광한루에 오르기 전 지나왔다는 만마관이 등장한다. 과거 만막관이라고도 불렸던 만마관(萬馬關)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이다. 지어질 당시 전주와 호남평야의 미곡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의 출입구였기에 그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곳 이었다. 왜적이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전주로 들어올 때 침공을 저지하는 1차 방어요새가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시구 속 언뜻 스치는 만마관 이름에는 봄 그늘 고요하고 만발한 꽃기운으로 전쟁 대신 노래와 춤이 성한 노래 속 평안이 층층 성벽의 철벽 요새와 그 문인 만마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고마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군사적 요새지역으로서 만마관은 축조시기와 기원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공존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 17첩 4열이나 1872년 <지방도> 임실현지도 등 옛 지도와 문헌 그리고 최명희 작가의 소설 <혼불>에도 만마관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전주와 완주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꼽은 완산승경(完山勝景) 32경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과 역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만마관의 관(關)은 본래 문의 빗장을 가리켰다. 즉 빗장으로 문을 닫아서 막을 사람을 막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라에서도 관문 위에 성벽이나 대문을 세우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이곳은 호남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수비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루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만마관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길손들로 인해 관문 밖 마을에는 주막이나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고, 병졸과 부대원들 거처를 중심으로 바로 아래 쑥재에 마을이 생기기도 하였다.그러나 관문이 무조건 사람을 막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관문은 문(門)으로서 사람을 지나가게 하고 또 통과하게 한다.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악랄한 행동에 저항해 일으킨 갑오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에서, 농민들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통과했던 길이 바로 이 만마관이었던 것이다. 농민혁명군은 그렇게 호남제일관을 지나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주성의 풍남문(豊南門)에 도착했다. 세워졌을 당시 명견루(明見樓)라고 불리웠던 풍남문의 명칭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풍패를 빗대어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주요 성읍이나 산성에는 서울의 4대문처럼 4방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전주성도 마찬가지여서 1389년 축성 당시 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 문루가 세워졌고 이중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앞서 만마관을 지나왔던 농민혁명군은 성 안의 백성들에 의해 활짝 열린 풍남문을 통과하여 전주성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비록 지금은 풍남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문들이 모두 사라져 이후 보물 제308호로 지정된 풍남문만이 남아 호남의 사통팔달을 기원해주고 있지만, 이처럼 관문은 때로는 막고 때로는 통과하게 하여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 하고 있다.만마관 이야기로 돌아오면, 만마관이 있던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일대는 현재 제17호선 국도가 지나고 있다. 상관(上關)이라는 지명 자체가 관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남쪽에 있는 마을은 반대로 남관이 되었는데 모두 만마관이 있었기에 유래한 이름이다. 이처럼 이 지역을 대표했던 만마관은, 성곽이 도로를 지나고 있었던 까닭에 세월의 풍파속에 소실돼 성벽을 쌓았던 돌무더기만이 남아있다. 풍남문의 경우 조선시대 대화재를 겪고 근래에 들어 노후화되어 몇 차례 모습을 잃을 뻔 했음에도 복구와 보수를 거쳐 그 이름과 모습을 이어오고 있는데, 만마관과 주변 천연요새 지역 역시 과거 성곽을 쌓았던 형태로 복원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게 된다. 이는 그 자리를 든든히 지키고 열어주었던 만마관의 모습과 함께 일대의 역사적 가치 및 문화적 기억을 함께 되살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어느덧 첫 달의 절반을 지난 2017년 붉은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의 의미 속에도 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닭 유(酉)자는 상형문자의 기원상 술을 빚어 담은 항아리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술 주(酒)의 기본이 되는 글자이기도 하다. 한편 유(酉)의 상형자는 같은 십이지의 토끼 묘(卯)의 상형자와 함께 문(門)을 닮은 형상으로도 해석되는데, 유(酉)가 문이 닫혀 있는 형태인 것과 달리 묘(卯)는 문이 열려 있는 형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양은 묘방(토끼의 방향)인 동쪽에서 떠올라 유방(닭의 방향)인 서쪽에서 지기 때문에, 마치 관(關)과 문(門)처럼 열고 닫는 의미를 취한다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정유년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있어 왔다. 1597년 정유년은, 당시 임진왜란때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해이자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순신 장군이 남은 배 13척을 수습해 10배나 넘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300년 뒤 1897년 정유년에는 고종이 삼한(三韓)을 아우른다는 뜻의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해 이때 지은 국호가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었지만, 반대로 그 해는 외세와 일제의 간섭 앞에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2017년 우리가 맞이한 정유년 역시 세계사의 굵직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탄핵의 여부에 달렸지만 프랑스도 대선이 예정돼 있고, 새로운 리더가 미국을 이끌게 되고,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과 네덜란드는 총선이 실시된다. 정유년의 유(酉)가 품고 있는 의미처럼, 결국 통과해야만 하는 중요한 지점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막아야 할 재난과 국가적 어려움은 막아내고 번영과 행복을 맞아들이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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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20 23:0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② 고도리 불상과 동자바위의 인연 - 천년의 세월 '님' 그리워하며…우리네 삶도 위로받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을 두고, 인(因)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緣)은 그를 돕는 것이라 하였다. 문화나 종교를 떠나 사람은 그러한 인과 연에 의해 짜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이나 과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인연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여산은 옛~고을 호남의 첫 고을 그 역사 몇~천년 나리어 오면서...익산 여산면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고향에 있는 여산초등학교를 위해 교가 가사를 남긴 바 있다. 몇천 년을 이어온 역사의 끈이 곧 나와 우리 고장을 이어주는 인연이라는 가사는 우리로 하여금 지역과 연결된 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인연 이야기로 남녀 사이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이 인연으로 맺어지고 늘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매년 칠월칠석 일 년에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기도 한 이 여산의 옆, 익산시 금마면에도 고려 때로부터 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가슴아린 인연 이야기가 있다.1번국도를 타고 시인 신동엽이 마한, 백제의 꽃밭이라고 일컬은 금마면을 향할 때 우리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남겨진 왕궁리 유적지에 시선이 뺏겨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석불 2기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바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으로 두 개의 석불이 하나의 쌍이어서 쌍석불로도 불리는 석상이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도 인연으로 엮여져 있다는 피천득의 인연의 문구가 강하게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다. 고려시대 말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석불은 부르면 들을 수 있지만 맞닿을 수는 없는 가깝고도 먼 200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도 가깝고도 먼 지척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어 더욱 그 사연을 궁금하게 한다. 석조여래 입상은 각각 동고도리(여자)와 서고도리(남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음력 12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새벽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옥룡천이 얼지 않아도 만날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곧 찾아올 섣달 그믐날 그들의 만남이 기다려진다.기록에 의하면 조선 철종 9년(1858)에는 익산 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이, 당시 쓰러져 방치되어 오던 석조여래 입상을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그 때 씌어진 《석불중건기》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남녀간 사랑의 전설과 풍수적 의미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임실군 덕치면 천담 섬진강에도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이곳에 서 있었던 동자바위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옛날 마을의 사냥꾼 총각이 어느 날 뒷산에서 꿩을 발견하고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은 꿩을 맞춘 채 두꺼비나루 건너 산기슭에서 나물을 캐던 처녀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한참 꿩을 찾던 총각은 이윽고 꿩 앞에서 파랗게 질려있는 처녀를 쳐다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몇 날 며칠 처녀를 못 잊던 총각이 두꺼비나루를 건너 결국 처녀에게 가려고 했을 때 마침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일어 두꺼비나루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움에 시름하던 총각은 병이 들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렇게 총각이 죽은 날 밤 천지가 진동하고 광풍이 일었는데, 날이 밝자 총각이 살던 마을 앞에는 놀랍게도 생시의 총각모습을 닮은 동자바위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두꺼비나루 건너에는 동자바위와 마주 보이는 곳에 여자를 상징하는 바위가 생겨났는데, 이는 역시 총각을 그리워하던 끝에 한날한시에 죽게 된 여인의 바위였다. 그 후 남편이 부인을 싫어할 경우 동자바위에서, 부인이 남편을 싫어할 때에는 여인바위에서 돌을 쪼아 가루를 만들어 몰래 상대방의 음식물에 섞어 먹이면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는 설이 전해져 사람들이 돌을 쪼아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아쉽게도 여인바위는 도로공사로 인해 흔적이 사라진 상태이고, 동자바위 역시 이야기만을 남긴 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근처 순창 장군목의 요강바위는 1993년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사라진 동자바위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을까. 찾을 수 없다면 그 이야기와 모습을 살려 복원함도 좋을 듯하다.가까운 듯 먼 거리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과 동자바위 이야기를 떠올리며 인연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서편의 남자 석조여래 입상은 의연히 웃고, 동쪽 석조여래 입상은 배시시 화답하는 통에 전설 속 안타까운 인연에도 그들은 괜찮다고 도리어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든 물성에 의한 것이든 시간이 깃들고 사연이 담긴 인연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끌어당긴다. 늘 곁에 있다가도 한순간 사라지기도 하는 인과 연에 대해 돌이켜 보고 좋은 인연은 잘 보듬고 나쁜 연은 흘려 보낼 줄 아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윤주 한국지역문화 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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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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