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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효행록에 담긴 지소(紙所)의 흔적과 효자 이야기

이달 10일 전주시민 기록관이 개관하면서 제7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이는 수장고에 전시하고 있다. 이 출품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김종선 씨가 출품한 선조 효행록(1848년)이다. 이 효행록은 그림과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효행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고 더불어 전주의 지소(紙所)가 표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선조의 선영 가는 길을 서울 서대문부터 경기도 고양(일산)까지 지명으로 표시하였고, 뒷부분은 효행 내용을 4언절구로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전주천에서 장어를 잡아 위독한 아버지를 살린 효자이야기 효행도에 담긴 내용을 분석해보면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 승암산 아래 전주천을 따라 장어를 잡기 위해 오르내리는 효자 김수철이 보인다. 승암산 자락을 타고 조금 올라간 곳에 붉은 글씨로紙所가 찍혀있고, 인근에 초가집 3채와 기와집 4채가 보인다. 고덕산 아래 남고진 모습이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효행도에서 왜 지소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냐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효자 김수철은 승암산 아래 좁은 목(병암)에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장어를 잡게 된다. 이때 지소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우연히 지나가다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즉 그림을 보면 지소에서 근무하는 아이와 승려, 부남면 도윤(지금의 면장에 해당), 이렇게 세 사람이 그 광경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켜보고 있다. 또 김수철은 아버지 흥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전주천을 오르내리는데, 3일 후 대성동 지역에서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두 마리의 장어를 팔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옷을 걸치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혹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며 효자 김수철은 거금 1전을 주고 장어를 사서 아버지에게 드린다. 위독한 병에 걸려 당장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는 아버지를 아들이 어렵게 구한 장어로 구완하여 한 달을 더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 속에는 남고진 산성과 승암산 그리고 전주의 지소가 기록되어 있어 매우 의미가 있고, 특히 전해오는 전주의 효자이야기 중 장어를 소재로 하는 내용은 이 효행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전주 지소(紙所)의 흔적을 찾아서 전주 지소(紙所: 전주부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 3명이 모두 그려져 있는데, 지소를 관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남면의 도윤(都尹: 현 면장)인 이통원(李通元)과 지소승(紙所僧) 월연(月連) 그리고 지소청직(紙所廳直) 민육월남(閔六月男)이 그려져 있다. 1872년 전주부지도를 보면 부남면에는 지소가 없으며 어은골에는 나타나고 있다. 전주부의 부남면은 향교가 있는 교리를 포함해서 옛 교동사무가 있는 방축리 그리고 지금의 완산동(은송리, 곤지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쪽으로 반석역을 지나 객사동, 죽음리, 은석리, 봉산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보면 지소는 부남면에 속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지소로 적합한 자리는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야 하고, 철분이 없는 맑은 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북대 소장 전주부지도를 살펴보면 효행도와 마찬가지로 신원(상관면사소)에서 물줄기가 흘러오다 굽어지는 지점에 지소가 있다. 이 지점을 추정해 본다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색장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사는 90세 어르신 이완근씨에게 물어보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전주천에서 종이를 많이 떴으며, 우리 색장동 마을 앞에서도 종이를 떴다고 하였다. 이 어른이 말하는 곳은 색장동 방앗간 지점으로 예전에는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이후 방앗간으로 변하여 지금은 개조하여 멋진 찻집으로 변했다고 한다. 색장동정미소 뒷 칸을 보니 은석동에서 보를 막아 이곳으로 오는 물줄기가 있어 예전에 이곳이 동네였으며 지소가 있었음을 가능케 한다. 전북대에서 소장한 지도를 보면 상관면 지역에 만마관이 건재하고 있으며 신원(新院:지금의 신리) 바로 밑으로 지소가 표시되어 있다. 지소 있는 바로 왼쪽 산은 승암산으로 지소가 있는 곳은 색장동지역으로 생각되며 차 후 기초조사를 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임실과 남원에서 오는 사람들은 색장동의 색장치를 넘어 신원-갓바위-문수골-은행다리를 넘어 서울로 가는 코스이다. 즉 지름길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는 창암 이삼만도 공기골에 살면서 직접 만마관(萬馬關)편액을 써서 붙였다고 전하는데, 아마 이곳을 지나면 매우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색장동에는 반일운동을 했던 이거두리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후세에 전하고자 형 김수철의 효행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효행록> 효행도에 나타나는 효자 김해김씨 김수철(金守哲)은 효자동 바우배기에 살았는데, 그의 효행사실을 후세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생 김우철이 글을 짓는다. 족보를 보면 김수철은 자가 재수(再守)이고 또 다르게는 인여라 불렀으며 호는 경향정이다. 그는 선흥의 장남으로 신사년 8월 27일 생이다. 그는 향년 47세에 운명하였는데 묘소는 임실군 관촌면 신흥사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자료를 보면 김수철은 부친이 8년 동안 지병이 있어 백초를 다 시험했지만 1812년(壬申) 겨울에 병의 증세가 점점 악화되고 이질에 걸렸다. 이에 의원은 마땅히 특효약은 장어뿐이라고 하면서 이를 추천하였다. 효자 김수철은 장어를 구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으며, 하천의 연에도 배를 든든히 하고 지켰다. 또 삼일 동안 자면서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승암산 아래 병암을 지나는데 한 자가 넘는 장어가 눈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장어탕을 끊여 진상하니 이때는 섣달이었다. 그 후 삼일이 지나 또 병암(승암사 부근)을 지나는데 도로변 인가에서 발가벗은 어린아이가 눈 위에 서 있고 손에는 하나의 간지대가 있는데 간지대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 두 마리 장어였다. 이 장어를 1전을 주고 사서 그 날 탕을 끊여 아버지께 진상을 하니 병세가 점점 차도가 있어 한 달을 더 살게 되었다. 이런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후예들에게 보이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김수철의 동생 우철은 1848년(무신) 섣달에 추모하는 마음으로 글을 지어 남겼다. 전주에도 효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모님이 고기가 먹고 싶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니 떨어졌다는 이야기며, 또 겨울에 수박을 찾아 헤맸다는 수박동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장어를 구하는 효행사실은 기록상으로 볼 때 처음이지 않은가 사료된다. 효행의 중요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이 시대에도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전주의 지소 자리도 복원되기를 희망해 본다. (끝)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라북도 문화재위원

  • 기획
  • 기고
  • 2019.12.19 17:26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옛 교과서가 전하는 풍경

교과서는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아이들의 낙서장이나 아궁이의 불쏘시개, 변소의 휴지가 되기도 하지만, 교과서는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맞게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실은 책. 우리는 결국 교과서를 펼쳐가며 많은 것을 배웠다. 교과서적이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창의력이 떨어지고, 평면적이고, 소극적이라는 표현으로 쓰이지만, 교과서적인 것이 당시 사회의 가치 기준과 올바른 사실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나날이 심해지고, 신조어와 줄임말이 난발하고, 언어의 파괴가 한낱 재미로 여겨지는 모국어의 난세에 잊고 살았던 우리 언어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도 교과서다. 교과서의 가치를 알고 그에 얽힌 아련한 추억을 쉬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교과서를 간직하고 있다. 교과서와 같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역사의 현장에 없던 일제하 교과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전주시에 기증된 옛 교과서는 22종이다. 시대별로 나누면 1920년대 1종, 1930년대 2종, 1940년대 9종, 1950년대 2종, 196070년대 8종이다.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은상(전주) 씨가 기증한 2030년대 교과서인 『초등농업서(권2)』(1924)와 『수신서(권5)』(1933조선총독부), 『이윤세제와 가격원칙』(1939고양서원)과 권태웅 씨(74전주)가 기증한 『새로운 작문』(1972정음사)이 포함돼 그 가치를 크게 높였다. 홍일이(67전주) 씨는 196070년대 초등학교 45학년 자연실과 교과서와 6학년 산수 교과서 7점을, 오미소(전주) 씨는 1940년 보통학교용 교과서 정가표를 기증해 흥미를 더했다. 이들 모두 교과서 변천사와 함께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뜻깊은 기증품이다. 일제는 한일 강제 병탄 이후 조선교육령을 개정해가면서 천황에게 충성하는 일본 신민(臣民)을 양성하고, 일본인다운 품성을 함양하며, 국어(일본어)를 널리 보급하는 것 등을 공포했다. 정치의식이 성장할 여지가 있는 고등교육과 인문교육의 기회를 빼앗고, 오직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수신서』는 동화정책의 대표적인 예다. 보통학교 수신(修身) 교과서에 금상 천황폐하께서 내지의 인민도, 조선대만의 인민도, 모두 친자식같이 여기시고 똑같이 사랑해 주시는 것, 참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으로 일본 천황과 일장기에 복종하게 했고, 조선인 의식의 밑뿌리와 실핏줄까지 찢고 물들이려 온갖 책략을 써가며 광분했다. 한 민족의 정신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오로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의 한글교과서 옛 교과서에는 철수와 영이와 바둑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53년 문교부에서 출판된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사회과목인 『고장 생활』에는 군청색 반바지를 입은 종한이와 복남이가 산다. 책은 두 아이가 오늘부터 우리들은 이 학년이다. 일 학년 동생들이 생겼습니다.라고 노래 부르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으로 시작된다. 종한이와 복남이는 언덕길에서 힘들어하는 짐수레꾼을 도와주고, 어머니가 빨래하는 냇가에 가고, 시장과 농장과 집 짓는 것을 구경하면서 쌀과 옷과 물의 중요함을 알고, 서로 돕고 사는 세상살이의 즐거움과 일의 보람을 배운다. 교과서의 주인공은 이후 철수와 영이(19541963), 인수와 순이(19631973), 동수와 영이(19731981)로 바뀌며 시대의 언어를 들려준다. 『고장 생활』은 이조(85세전주) 씨가 기증한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19451953)의 교과서자습서 10점 중 하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은 기증자는 4학년 1학기 『우리나라의 생활 1』(1948문교부), 임시교재라는 부제가 달린 5학년 1학기 『초등 이과』(1947군정청문교부), 2학기 『셈본』(1947군정청문교부), 56학년용 『초등 지리 교본』(1946), 5학년 자습서인 『새전과자습서』(1947삼중당서점), 전국 중학교 입학시험 기출문제가 수록된 『입학시험문제집』(1948삼중당),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인 『중등 공민』(1949동심사)과 지리교과서인 『이웃나라 생활』(1949동지사), 2학년 영어 교과서인 『UNION』(1950일심사)을 기증했다. 1950년대 교과서는 책 제목과 본문에 셈본 등 살려 써야 할 옛말이 가득해 더 정겹다. 일부 책은 기증자가 전주 조촌공립초등학교와 신흥중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책의 곳곳에 밑줄과 낙서 등 70여 년 전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조 씨는 『전주다움』(2018년 9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선생도 학생도 한글을 모르는 해방 후 깜깜이 학교를 거론했다. 일본 책을 싹 없애버리고 한글로 공부를 하려는데, 어디 한글로 된 교과서가 있어야지요. 물론 한글 활자도 없었고요. 그때가 미군정 시절이었는데, 조선어학회에서 임시방편으로 철필로 한글을 한 자 한 자 써서 최초의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철필로 원고를 쓴 다음 그것을 등사기로 밀어서 책을 만든 거지요. 그가 기증한 책은 조선어학회에서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한글 교과서다. 민족의 서글픈 역사를 안고 기억과 기록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우리만의 교과서다. △우체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체부, 그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낭만이다. 그의 모자와 옷과 운동화의 빛깔들 그의 전신에서 흘러오는 모든 것은 무한한 그리움이다. 그의 낡은 가죽 가방은 시다. 흘러넘칠 만큼 배부른 사연들을, 때로는 헐렁헐렁하게 흔들리는 몇 통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큼직한 가방에는 어떤 기다림과 동경과 바램(바람)이 흠뻑 배어 있다. ∥최명희의 수필 「우체부」(1965) 중 권태웅 씨가 기증한 『새로운 작문』은 박목월(19151978) 시인과 문학평론가 전규태(전 전주대 교수)가 편집자로 참여한 고등학교 교과서다. 책의 본문에 소설가 최명희(19471998)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수필 「우체부」가 실려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문명의 소음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간의 슬프고 즐거운 호흡을 전하는 우체부를 보면 즐거운 몽상에 빠져들고, 자신도 보랏빛 우체부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내비친다. 1965년 9월 28일 연세대학교가 주최한 제4회 전국 남녀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장원으로 뽑힌 이 수필은 1968년부터 1978년까지 작문 교과서인 『새로운 작문』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인 『작문』(전규태정음사)에 실렸다. 그러나 『작문』에는 작가의 이름이 빠지고 학생 작품으로만 표기되었으며, 작품 제목도 「집배원」으로 바꿔 소개됐다. 두 책의 본문에는 우리가 거의 매일 대하는 우체부를 소재로 재치 있게 글을 엮어 나갔다. 짧으면서도 메커니즘에 대한 가벼운 비평이, 깔끔하고 차분한 문장에 담겨 있다고 소개됐다.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처럼 귀한 기억과 오랜 흔적이 담긴 물품의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증자가 우체부처럼 반갑고, 그들이 건네는 모든 것에 설렌다.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분홍빛 편지, 검은빛의 부고, 공무원 합격 통지서, 기차표와 버스 회수권, 행사 초대장, 묵직하고 먹먹한 곡절이 담긴 월급봉투,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좀이 슨 책, 한 시대가 담긴 흑백사진. 헤아릴 수 없는 손길과 대화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낡은 것들이 가득할 그들의 가방 속이 가장 푸짐한 인간의 호흡이며, 숱한 생명의 축소된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오랜 기억을 나누는 것은 허허로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채우는 일이다. 나만의 훈훈한 꽃잎으로 세상에 체온을 전하는 것이다. /최기우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부위원장최명희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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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9.12.05 16:55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의 유림(儒林), 격변의 시대에 인륜의 기치를 들다

올가을에도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참으로 고운 빛을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전주향교에는 모두 다섯 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월당(月塘) 최담(崔湛) 선생께서 심었다는 수령이 430년 된 은행나무도 있다. 은행나무가 향교와 밀접하게 된 것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과 강학하신 공자의 행적 때문이다. 향교가 전통시대 지방의 공립중등교육기관이자 공자를 위시한 유가의 성현들을 제향(祭享)하는 곳이고 보면 은행나무야말로 향교와 딱 어울리는 나무일 것이다. 오늘은 파란 가을하늘에 샛노란 가지를 펴고 수백 년을 우뚝 서온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전주의 유림들이 격변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향교를 중심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를 살피려고 한다. △위성계(衛聖契)를 조직하여 향교를 재정비하다 먼저 볼 자료는 『전주 위성계안(全州衛聖契案)』이다. 위성계(衛聖契)는 성인, 곧 공자의 도를 지키는 계모임을 뜻한다. 표지를 넘기면 선성공자(先聖孔子)라는 글귀와 함께 공자의 초상화가 맨 처음 보인다. 다음 장에는 유림서사(儒林誓辭;유림의 맹세)가 있는데 첫째, 인륜을 밝히고 의리를 바루어 인간의 도리를 보존할 것이며 둘째, 성인을 지키고 현인을 보호하여 향교를 유지할 것이며 셋째,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사문(斯文; 유학)을 진흥하자는 세 가지 맹세를 실어두었다. 다음으로는 위성안현모란분의(衛聖安賢冒亂奮義)라는 여덟 글자가 책 좌우면에 한 자씩 큰 글씨로 적혀있다. 성인과 현인의 도를 수호하여 난세에도 의로움을 떨친다는 뜻인데 이 글씨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였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의 것이다. 기운생동하는 필체에 유학을 수호하고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다음에는 면와(?窩) 이도형(李道衡)이 쓴 두 편의 서문이 실려있다. 첫 번째 서문은 1952년에 쓴 것인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향교가 피폐해져 봄가을 석전대제(釋奠大祭)조차 제대로 거행할 수 없게 되자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이 아들 이도형에게 계를 조직하여 석전대제를 치를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라 명하였고, 부친의 명을 따라 이도형은 100여 명의 유림들을 모아 계를 조직하게 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고재 이병은은 간재의 제자로서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병칭되던 큰 학자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버려진 성현의 위패 25위를 수습하여 보전한 공을 쌓기도 한 분이다. 이병은은 계 조직에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고 재산을 불려서 늘어난 재산의 3분의 2로는 봄가을 석전대제를 준비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다시 재산을 불려 전쟁통에 없어진 위패를 다시 만들어 봉안할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두 번째 서문은 1954년에 쓴 것으로 1952년 계안을 만들 때 전쟁중이라 참여하지 못한 인원을 더 참여하게 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서문 뒤에는 여덟 조항의 조약문이 붙어있는데 계의 의의, 계원의 요건, 기금의 관리와 활용, 임원의 역할 등이 서술되어 있다. 서문 뒤에는 향교에 모셔진 성현을 간략하게 소개한 성현사략(聖賢事略)이 있고, 다음에는 제사 관련 각종 제문, 계성사(啓聖祠)에 배향된 인물 소개, 계성사홀기(啓聖祠笏記)가 실려있으며 그 다음에는 6개 면(面)의 통문(通文)이 부록되어 있다. 그리고 <계사사월향교중수희사금록(癸巳四月鄕校重修喜賜金錄)>에는 1953년 향교 중수에 필요한 기금을 낸 계원의 이름과 금액이 정리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 책의 마지막까지는 <전주위성계원좌목(全州衛聖契員座目)>이 실려있다. 계원의 성명 아래에 작은 주를 달아 자(字), 본관(本貫), 가계(家系), 거주지, 사우관계 등을 정리하였는데 그 인원이 도합 656명에 달하니 계의 규모는 물론 전주지역 유림들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성계의 유림들은 향교를 구심점으로 점점 쇠미해가는 유학을 호위하고 선비의 기상을 떨치고자 하였다. △훌륭한 행실을 포상하여 널리 알리다 향교의 기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풍속에 대한 교화이다. 전주시에서 수집한 통문(通文) 한 점과 최기영(崔基瑛), 최우현(崔宇鉉) 부자에 대한 포상 문건은 유림의 이 같은 사회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통문은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공동의 관심사를 연명하여 통지하던 문서로 유림들의 통문은 유통(儒通)이라고도 불렀다. 유통 가운데는 서원이나 향교의 건립과 보수, 효자열녀충신에 대한 표창 건의, 문집의 발간, 향약계의 조직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오늘 살펴볼 통문 또한 임피박씨(臨陂朴氏)의 열행(烈行)에 관한 내용이다. 통문이 담겼던 봉투 앞면에는 전주향교가 발신자로 각 군의 향교와 서원이 수신자로 명기되어 있고, 뒷면에는 통문의 발신일이 1926년 정월 어느 날로 적혀있다. 임피박씨는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던 권일헌(權一憲)의 처이다. 박씨 부인은 남편이 병들자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남편의 장례시에는 유감이 없도록 예를 다하였으며 장례를 치른 뒤에는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쌀 한 톨 먹지 못한 채 10여 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박씨부인의 행실에 대해 통문은 이와 같은 열녀의 절개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니 그 보고 들은 바에 대해 침묵할 수 없어서 이렇게 통문으로 알리니 원컨대 여러 선비들이 부인의 열행을 한목소리로 널리 알려서 후세의 부인된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도록 할 수 있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며 풍속 교화의 본보기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통문 아래에는 직원(直員) 정성모(鄭性謨)와 장의(掌議) 황의찬(黃義贊) 외 18인의 이름을 연명하였다. 최기영, 최우현 부자에 관한 포상 문건은 호남도지간소(湖南道誌刊所) 유림(儒林) 황의찬(黃義贊) 외 42군(郡)의 명의로 작성하여 대성교숭포부(大成敎崇褒部)로 보낸 것이다. 대성(大成)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곧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대성교는 1923년 조형하(趙衡夏)를 중심으로 유교의 개혁을 모색하여 창립한 유림 단체이다. 문건은 책자의 형태로 묶여 있고, 책자 가운데 부분에 대성교회지인(大成敎會之印)으로 보이는 인장이 찍혀있다. 최기영, 최우현 부자는 본관이 전주이고 고려말 충절을 지킨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의 후손이다. 최기영은 호가 은암(隱菴)이고 최우현은 호가 학인(鶴人)이다. 문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최기영 부자는 오륜을 독실하게 실천하고 학행은 물론 문장도 빼어나 향선생(鄕先生)이라 불릴 만큼 귀감이 되므로 이들을 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건의 말미에는 대성교숭포부 교장(敎長) 참판(參判) 김재순(金在珣)과 부교장 서긍순(徐肯淳) 외 12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전통시대의 윤리를 다시 음미하다 오늘 소개한 세 자료는 전주의 유림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같은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유림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일제는 향교의 자율성, 독자성을 제한함으로써 유림들의 사회적 역할을 약화시켰다.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제도 앞에서 전통시대의 교육과 가치체계는 구식(舊式)으로 평가절하되어 속절없이 뒷전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위성계안(衛聖契案) 서문에서 빈 산의 불가(佛家)도 조석으로 예불을 올리고 서양에서 온 예수교도 한 달에 네 번 예배를 올리는데, 이른바 갓을 높이 쓰고 띠를 드리운 채로 벌레처럼 칩거하고 거북처럼 숨어들어 향교 안에 그림자 하나 없으니 성인을 호위하고 현인을 높이는 마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한 것은 유림 스스로의 각별한 자성을 촉구하는 일갈이었다. 전주의 유림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서 그렇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끊임없이 환기하였고 풍속 교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향교와 유림이 보여준 교화 활동은 한편으론 다시 음미되어야 할 것도 있다. 가령,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을 열행(烈行)으로 기리는 것은 존엄한 생명의 가치로 볼 때, 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강요된 열행을 두고 볼 때 일방적으로 미화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필자는 전통시대의 가치체계가 무조건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맹목적으로 묵수(墨守)해야 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여러 윤리적 덕목 안에 내재한 본질적인 가치를 탐색하고 발굴함으로써 오늘날에 더욱 유의미한 가치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전통과 현대가 생생(生生)하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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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1 16:57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100년 된 간찰첩, 사제(師弟)의 선비정신을 말하다

가을이 완연해가는 즈음이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던 최양숙의 노래가 사람들의 귓전에 입가에 맴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각종 sns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의 근황이 즉각적으로 전파되고 때론 과시되기도 하는 오늘날의 풍경 속에서 하얀 종이 위에 한 글자씩 정성껏 써 내려가던 손편지는 갈빛으로 바스락거리는 플라타너스 잎처럼 아련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렇다고 필자가 옛 방식은 귀하고 지금 것은 못하다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논리를 강권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에 맞는 소통의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매체가 그 시대의 소통 방식을 만들어가듯 편지를 통해 의사를 주고받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정서와 사유가 편지글 안에 오롯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약 100년쯤 전에 만들어진 간찰첩(簡札帖)이다. 이 첩은 전주시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인데, 이제 백 년을 거슬러 간 편지글 모음에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우리는 이 첩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지 간찰첩 안으로 들어가 보자. △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간찰첩의 표제는 간재전선생유훈(艮齋田先生遺訓)이다. 풀이하면 간재 전 선생님께서 남기신 가르침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간재 전 선생은 누구인가? 아마도 독자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겠지만, 자료 소개글의 본새에 따라 약간의 췌언을 붙인다. 간재 전 선생은 곧 간재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으로 간재는 그분의 호이다. 전우 선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마지막 적전(嫡傳)으로, 성(性)이 곧 리(理)라는 성리학의 본령을 확고하게 세워 제국주의에 찢긴 조선의 정신을 온전히 하고 성선(性善)에 기반한 의리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당대의 거유(巨儒)이다. 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던 1908년 이후로는 서해의 왕등도(?登島), 군산도(群山島), 계화도(繼華島)를 옮겨가며 성리학에 몰두하였고, 1922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00여 제자를 길러냈다. 어쩌면 그에게 성리학은 도의(道義)가 무너진 세계를 바로잡을 무기요, 교육은 훗날을 도모할 전사(戰士)를 양성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러진 제자 가운데 김의훈이란 분이 있었다. 간재가 종유했던 인물과 길러낸 제자들을 정리해놓은 『화도연원록(華島淵源錄)』에 따르면 김의훈은 자(字)가 경희(卿喜)이고 고종 병자년(1876)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부안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간찰첩 첫 면에 붙어있는 봉투에 수신처가 부안(扶安) 상동면(上東面) 제내리(提內里)에 있는 김경희(金卿喜)의 서옥(書屋)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 아울러 간찰첩의 표제 우하단에 이여재(貳如齎)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이여재사고(貳如齋私稿)』를 통해 김의훈의 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할 때 이 간찰첩은 김의훈에게 보낸 스승 전우의 편지를 김의훈이 간재 사후 어느 시점에 간재전선생유훈이라는 표제를 붙이고 첩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첩은 자그마한 9폭 병풍 모양으로 접을 수 있고 앞면과 뒷면에 모두 13통의 편지가 붙어있다. 크기는 접었을 때 가로 18.5cm, 세로 25.5cm이고, 펼쳤을 때의 길이는 166.5cm이다. 편지 말미의 간지와 『간재집』의 내용을 살필 때, 편지의 작성 시기는 1914년부터 1919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간재가 계화도에 우거(寓居)하면서 강학하던 때였다. △학문의 요체를 일러주고, 학인(學人)의 자세를 권면하다 편지글의 대부분은 간재가 자득한 학문의 요체를 김의훈에게 전수하는 내용들이다. 간재 평생 공부의 핵심은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구명하는 것이었다. 간재는 성(性)은 리(理)로, 심(心)은 기(氣)로 철저히 구분하였고 심(心)을 리(理)로 파악하려는 일체의 논의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간재는 이러한 논쟁을 통해 성(性)이 스승이고 심(心)은 제자라는 성사심제(性師心弟),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독창적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간찰첩에 실린 첫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열 번째 편지가 심과 성에 관한 논의를 담은 편지들이다. 한편 간재는 제자에게 공부하는 방법과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일러주기도 하였다. 가령, 여섯 번째 편지는 병을 조리(調理)하던 김의훈에게 보낸 것인데, 제자가 병에서 회복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옛날 어느 스승이 유생에게 병중에 공부가 어떠했는가 물으니 유생이 매우 어려웠다고 대답하자 스승이 병들지 않았을 때처럼 해야 그게 바로 공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체득하였는가?라는 내용을 덧붙여 병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뜻을 보이기도 했다. 또 아홉 번째 편지에서는 생각을 세워 주재(主宰)하라【요점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데 있으니 흐리멍덩해져서는 안 된다】와 나그네로서의 근심을 없애라【가뿐하게 물리쳐 근심이 설 수 없게 하라】는 두 가지 자세를 제시하고 진실로 이 도리를 능히 한다면 앞날에 반드시 무한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열한 번째 편지에서는 평생 남을 탓해봐야 아무런 득이 없고 잠시라도 자기에게 돌이켜보면 또한 여미(餘味)가 있으니 어찌하여 이 맛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저 무익한 것을 취하는가?라며 자기성찰을 이렇듯 명징하게 당부하기도 하였다. △간찰첩의 의의 전통시대 편지는 일신상의 다양한 근황을 담고 있어 다채로운 일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 간찰첩은 학문이라는 무거운 주제로만 시종일관할 뿐 아취(雅趣) 어린 풍류나 정겨운 일상 등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 깍듯하게 예우하며 자신이 깨우친 학문의 요체를 전수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일러주는 근엄방정한 스승과 제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 곡학아세의 무리들이 시류에 편승하고, 그 결과 도덕과 의리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학문을 통해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던 칠십을 훌쩍 넘긴 노선생이 제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제자 김의훈은 스승의 이런 간절함을 정확하게 알았다. 그래서 스승께서 돌아간 뒤 그간의 편지글을 모아 정성스럽게 첩을 만들고 간재 전 선생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이란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아마도 김의훈은 이 간찰첩을 늘 곁에 두고 스승의 유훈을 수도 없이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는 학문을 부여잡고서 암흑의 시대를 건너려 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간소한 간찰첩의 커다란 울림이 있다. 시대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간찰첩에 어려있는 두 분의 형상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평생의 실천으로 완성해간 두 사제의 삶은 범부의 단안(斷案)이 함부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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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7 17:04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 화산동에서 발간한 종교 간행물 '복된 말씀' 이야기

1953년 5월 전주시 화산동 149번지에서 종교 간행물 창간호 발행을 준비하고 인쇄하기 위해 부지런한 손놀림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호남 기독교 역사의 첫 숨결이 잠들어 있는 선교사 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을 것이다. 목회자에게는 목회 자료를 제공하고 평신도에게는 신앙을 성숙하게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복된 말씀> 제1권 제1호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복된 말씀>은 1950년대 초반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가 다시 일어설 기반조차 없을 때 어렵게 첫 책을 만들었다. 정세가 어둡고 생활의 기본 양식조차 갖춰지지 않았어도 당장의 불행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의 지향점을 고민하고 절대자가 부여한 인간의 품격을 올곧이 지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출판이었을까. 단행본 크기에 33면의 거친 종이에 쓰인 이 종교 기록물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창간한 <복된 말씀>은 전주시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을 통해 66년 전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1953년 발행한 창간호부터 한 권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온 김진영 원로목사님과 이영무 목사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주 기록물로서 <복된 말씀>의 가치는 우리 지역에서 인쇄하고 발간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강제 폐간된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2016년 3월 계간으로 36년 만에 복간했다는 정신에도 기초한다. 창간하는 일에도 수많은 노고가 들어가지만, 한번 만들어낸 것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쳐야 할 고비를 넘고 다음 세대에 남길만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하다. 창간 8년 후인 1961년은 <복된 말씀>의 확장기로 이귀철 목사가 책임 편집을 맡았다. 문화공보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고 격월간으로 발행하다가 1968년부터 월간으로 발행회수를 늘리게 되었다. 잡지로써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지역뿐 아니라 전국 단위 교계에서도 인정받았다. 1961년 발행한 제8권 제9호를 읽어보면, 주일학교 운영과 현실적 난점을 주제로일선 담당자의 노트에서라는 형식을 빌려 아동 설교 현황과 방법론에 대해 필명 버린 돌이 기고한 원고가 눈에 띈다. 편집부에서 설교(일반 설교, 청년 설교, 아동 설교), 논문, 수상(감상문 형식) 및 기타 분야에 200자 원고지 30장 내외를 기준으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원고 모집을 하고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하였다. 이 시기부터 모든 간행물에 반공을 국시의 제 일의로 삼고 온 국민의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는 혁명공약이 좋은 책 등불 삼아 밝은 가정 이룩하자!는 혁명 구호가 함께 인쇄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책을 만들고 인쇄를 한다는 것은 검열의 대상이었고, 군사혁명에 충실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야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발행인 인돈(印敦)은 유진벨(Eugine Bell) 선교사의 사위로 한국 이름 인톤을 한자로 표기하였으며 William A. Linton이 본명이다. 또한 최초의 편집인 김홍전 박사는 본래 음악을 전공하였는데 못난이 성가대를 만들고 지휘를 하기도 하였고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사해사본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집안이 모두 독립투사들이었으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입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케되고자하는 권두언의 다짐에도 투사의 결의가 엿보인다. 이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김진영 목사님은 처음 발간할 때부터 관여했었고 어떻게 인쇄했는지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중간에 휴간할 수밖에 없었던 독재자들의 만행은 물론 군산 미군부대에서 쓰던 인쇄기를 가져다가 출판한 인쇄소의 위치까지도 기억했다. 삼일운동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신흥학교와 서문교회 역사, 1898년에 개원한 전주 예수병원의 역사까지 자신이 죽으면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을 사람이 많지 않아 한탄한다. 목사님은 1980년 폐간되었던 복된 말씀을 2016년 봄에 복간하여 일 년에 네 차례 30권째 발간하고 있다. 모든 기억이 기록으로 남는 것은 아니라 누군가 지켜낸 자료들이 기록유산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생활의 흔적이 역사가 되는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문화유산의 가치 발굴을 굴뚝 없는 산업으로 바라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전주를 기억할 만한 수많은 사료 중에 민간이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소실되거나 사장될 가능성이 많은 물품이면 보다 많은 시민과 국민에게 알려 문화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낱 흔적이 아니라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출판과 인쇄의 결과물로 나온 책이나 문서에는 내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성, 형태, 기술, 저자 등 시대의 모든 정보가 제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사료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民)이 주(主)가 된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첫걸음으로 기록을 소중하게 여길 줄 하는 태도를 지니고 소소한 일상의 축적이 종래에 가서는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을 형성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다. /이광익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 YMCA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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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4 16:27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1950년대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59년 9월 전주 전동성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펴낸 聖友 창간호(전주시 제2회 기록물 수집 공모전 대동상)와 1952년 전주 전북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펴낸 학우지 窓(4회, 올곧음상)을 통해 60년 전 청춘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들여다보자. 현재 80대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일제 때 태어났다. 사춘기 때 625전쟁을 겪었고,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일가를 이루고 세파를 헤쳐 온 고난의 행군 중심에 있었다. 그들이 청춘일 때 펴낸 문예잡지를 통해 금강석보다 강한 열정을 만나본다. 그들은 내일에 의뢰하면 공허한 어제를 남긴다 Boys! Be ambitions! 등을 금언 삼아 살았다. △전주 전동천주교학생회 聖友 창간호 聖友는 1959년 8월13일 인쇄, 9월5일자로 발행된 전주 전동천주교학생회가 발간한 종교 잡지다. 학생회장에 따르면 성우는 천주교 성지에 자리잡은 전동천주교회 학생회의 불품는 듯한 정열의 산물이다. 60년 세월을 견디느라 종이는 누렇게 변색,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교과서 크기 152쪽에 담긴 글에는 천주를 향한 신앙, 眞善美한 삶이 깃들어 있다. 세로 2단 또는 3단으로 편집됐고, 표지를 오른쪽으로 넘기면 전라선 전주시 덕진역전 조방지거 德津陶瓦工場 전주시 전동 88 전화 436番 永豊양조장 전주시 역전 노송동 601 전화 7708番 普光出版社 등 3개의 상업광고가 표출된다. 광고란 상단에 편집된 우리의 盟誓는 엉뚱해 보이기도 하지만, 6.25전쟁을 겪은 지 몇 년 안 된 당시 시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맹서 3개항은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 통일을 완수하자다. 사진 2장이 실렸는데, 한 장은 여학생들의 쁘레시디움 봉헌사열식 입당 광경이고, 다른 한 장은 1959년도 전북교구교리 및 구기대회 우승 기념 사진이다. 글은 절반 정도가 한자인 국한문 혼용이다. 요즘 기준으로 한자 3급 이상 수준의 한자들이 많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이 혼란스럽다. 김홍섭님의 기고 殉敎者의 遺趾를 찾아서를 살펴보자. 이 글은 유항검 일가 순교 후 100여년 만에 이굴된 당시의 상황을 이서면 재남리 바위백이 이굴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박요셉씨(이서면 재남촌, 63세)의 증언을 토대로 상세히 다룬 기고문이다. 그 곳은 전주서 서북방향으로 약40里許 전군가도에서 式側으로~ 약500米突을 一邊으로 하는 그 일가족들의 손자욱이 혹시나 印처졌음직도하여 등은 낯설다. 許는 그 쯤 되는 곳이고, 式側은 옆으로, 米突은 미터로 해석된다. 한글도 아릿다운, 불품는 듯한 정열, 나어린 농부들이, 흐르고 말었습니다 처럼 현대인이 보면 낯선 표현, 표기다. 성우에 실린 글은 순교자의 유지를 찾아서, 조선 천주교회의 유래, 가톨릭적 성서관 등 대부분 교회 이해에 관한 것들이다. 신실함을 다지는 편지글, 수필 등은 물론 음악에 대한 글도 실렸다. 박창유의 글 나의 死生觀처럼 무거운 글도 있지만, 김진수의 글 비와 故鄕이나 조정운의 追憶처럼 비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고향을 연결 짓거나 희망을 노래하는 수필도 다수 실렸다. 조정운은 추억에서 창밖의 만상을 바라보며 희망에서 살라. 행복이 오리라고 노래했다. 또 15편이 시와 단편소설 마리아의 소녀들의 기도(김옥순 작), 시나리오 어머니(김금순) 등 창작물이 실렸고, 특집편에서는 마틴 루터 생애를 약전 형식으로 다뤘다. 전동가톨릭 학생회칙에 따르면 학생회는 1959년 4월에 출범했고, 회원은 고등학생이었다. 또 이광수 학생회장의 창간사에 따르면 학생회원은 300여 명이었고, 또 전주전동천주교회와 尹방지거 사베리오 神父 편에 따르면 전동천주교회 신자는 4000명을 헤아렸다. 성우에는 전동성당과 유항검, 치명자, 성모마리아 등에 대한 글들이 많다. 그 만큼 유항검 일가 성지에 살며 전동천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깊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유항검은 1784년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순교자가 되었다. 그 성지에 1914년 전동성당을 세운 프랑스 출신 윤방지거 사베리오 신부는 1915년 57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유요안이루갈다 동정부부를 모시고 치명자산에 누웠다. △전북고등학교를 잊지 말자 1952년 2월 세상에 나온 전북고등학교 학우지 窓 창간호는 窓編과 孤光編 등 2편이다. 잡지 뒤편에 소개된 61명 소개란의 생년월일을 보면 4263~4268년 생, 그러니까 17~22세 학생들이다. 나이 차가 있다 보니, 18세 학생에 대해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와도 같다고 소개하고, 22세 학생에게는 우리반에서 제일 할아버지 늙은 친구 장가는 가셨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하고 장난어린 소개를 하고 있다. 전주고등학교가 1951년 9월1일자로 개칭해 출발하면서 기존 전북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전주고로 편입된 모양이다. 월영 학생은 권두사에서 우리들 학우들의 우정이란 偉力으로 (중략) 전 전북고등학교의 추억의 실마리를 풀어 그윽한 그 향기를 풍기어 본다는 의미로(후략) 창간했다고 썼다. 또 窓의 孤光編에서 손건 학생은 전북고교가 그립다는 글을 통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오늘은 우리는 전주고등학생이다. 또한 1학년 시대는 전북이란 이름 그대로 전북고교생이었다. 그날의 학생수는 많지 않게 文理科 합해서 120명 밖에 아니되였다. 이 글에 따르면 손건은 1952년 당시 전주고 2학년이다. 또 문과와 이과는 각각 60명 정도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窓 편집진이 연도 표기를 서기 대신 단기(4285년)로 표기한 것도 눈에 띈다. 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 때문이었을까. 활자가 아닌 등사 인쇄했다. 기름종이에 철필로 원고를 쓴 다음 잉크 묻힌 롤러를 밀어 인쇄 했는데, 글씨는 매우 반듯하다. 글감 대부분은 우정과 학창시절 추억, 그리움, 선생님, 전북고등학교가 없어진 데 따른 아쉬움과 향수 등이다. 청춘의 기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금강석과 같고 에베레스트와 같은 우뚝 솟고 빛나는 인류를 위하고 대한민국을 위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을 맹서한다. 窓編 3~6쪽에 실린 글 新有機化合物의 合成에서는 학구적 열기, 애국적 결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1951년 미국에서 결핵균에 유효한 신유기화합물이 발견됐는데, 그 합성법을 고찰하는 원고를 게재했다. 세계 선진국에 뒤지지 않아야 겠다는 결기가 살아 있다. 뒤떨어진 기초과학 논쟁이 한창인 대한민국 현실을 본다.

  • 기획
  • 김재호
  • 2019.10.09 15:55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사진 아카이브-전주의 오늘을 기념한다

△묻다 : 우리는 왜 기념하려 하는가? 인간의 기억에는 정해진 선이 있다. 기억은 종종 물리적 공간에 갇히고 시간의 흐름에 속수무책 퇴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념한다. 마음에 담을 만한 뜻깊은 일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공통의 기억을 지키기 위한 각성의 행위로 다시 한번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현재를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는 유명한 말을 재해석하면 결국 오늘을 기념하라는 주문이 아닌가 싶다. 전주 기록물 아카이브 중 일부로 기념사진과 졸업앨범 속 사진들을 통해 전주의 무엇을 기념하고자 했는지, 전주의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었는지 사진에 귀 기울이며 들어보려고 한다. 기념사진 속 주인공들은 그저 묵묵히 우리를 바라본다. △오늘을 기념하라 :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의 다른 말 기념사진은 어떤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촬영하는 특수한 목적이 있다. 시간이라는 망각의 문 앞에서 기억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거나 퇴색하기 때문에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는 일련의 과정이 곧 사진이라는 기록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1948년 6월, 전주 고사동 소재 체육관 앞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조선 역도연맹 창시자인 서상천, 항일운동가 조완구, 이주상(1960년, 제10대 전주시장)과 전주의 체육인들이 조선 역도연맹 전북지부 결성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체육인의 정신과 기세를 보여주는 단단한 자세가 인상적인데, 사진의 맨 앞에 역기가 있고 그 한가운데 태극기를 걸어둔 모양에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인다. 이 기념사진 한 장으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짧지만, 사진 속 1948년의 김구 선생과 역도연맹 사람들은 아직도 젊고 기세가 단단하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선생은 불과 1년 뒤인 1949년 6월 26일 암살되고 만다. 이들이 김구 선생과 함께 촬영한 사진은 그 시간 그 장소가 마지막이었을 테다. 우리가 일상에서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 순간이 매번 마지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은 매 순간 현재를 통해 과거를 지나 미래로 향하고 있기에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상황과 관계, 감정 등이 영원하고 불변하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기념하려 할까. 또 그것들을 영원의 상태로 박제하려 했을까. 누군가 함께했던 시간의 사진들, 눈으로 봤던 아름다운 풍경들 그 외에 모든 종류의 기념사진을 더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의 만남을 기록해 주시오. 이 시간 그와 함께한 나의 마지막을 기록해주시오 △사진을 읽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힘 : 푼크툼(punctum)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노트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요소를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해석의 틀에서 읽히는 촬영자의 의도로 주로 객관된 내용이 스투디움이다. 푼크툼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특징들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일반적 해석의 틀을 깨는 감상자의 주관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찍고 있는 기념사진에서도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찾아볼 수 있을까? 1949년에 촬영된 서문유치원 원족(소풍) 기념사진을 본다. 사진이 주는 객관적 정보는 오목대로 소풍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의 즐거운 한 때를 기념하는 장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선생님과 엄마와 아이들은 한껏 옷을 차려입고 줄을 지어 사진가를 앞에 두고 가을 소풍의 하루를 기념했다. 이렇게 단순한 차원의 기록 사진으로의 상(像)을 스투디움이라 한다. 그런데 이 단체 사진의 오와 열을 이탈해 혼자 떨어져 얼굴에 손을 대고 앞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는 어찌된 영문일까? 오목대의 둥근 언덕까지 풍금은 어떤 연유로 자리했을까? 전주서문유치원 원족기념이라는 저 작고 하얀 글씨는 왜 하필 저 위치에 적어 넣었을까? 하며 사진이 보여주는 상(像)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게 하는 힘, 7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저 사진을 보며 당시의 일상적 풍경에서 지금 다시 특별한 풍경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사진이 던지는 물음표가 우리를 쿡 찌르는 순간이 바로 푼크툼이다. 매 순간 맞이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들, 마지막 경험(Memento mori)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carpe diem), 가슴을 쿡쿡 찔러대는(punctum) 이 특별한 기념사진은 이렇게 박물관이 아닌 개개인의 사진 저장고인 앨범에서 시작한다. △아카이브(Archive) 그리고 아키비스트(Archivist) : 한 권의 졸업앨범 아카이브의 사전적 의미는 기록의 저장이다. 따라서 아카이브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한 원칙에 따라 수집하고 분류한 기록들을 지속 관리함으로써, 이용을 원하는 누구라도 공유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는 데 있다. 기록물 관리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아키비스트(Archivist)는 이를 행하는 주체이다. 1967년에 촬영된 전주 중앙여중 졸업앨범의 사진은 아카이브와 아키비스트의 역할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한 권의 졸업 앨범에는 학교와 학생, 교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별로 지역의 명승지 변천사를 알 수 있고, 교육과정의 일면이 담겨 있고, 학생들의 개성과 재간이 빛을 발하는 지면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졸업앨범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복장과 단체 사진의 포즈 아울러 배경이 된 전주의 풍경 등을 학창 시절의 추억과 함께 볼 수 있다. 졸업 앨범은 기념의 속성을 넘어 한 시대의 기록을 분류하는 기준이고 저장의 방법이다. 단순히 추억으로 떠올리기에 졸업앨범이 주는 사진의 위력은 이토록 경이롭고 훌륭하다. △개인의 기록이 도시의 역사로 남는다 : 시민기록물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에 남겨둔 무늬가 기록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격을 높이고 바탕을 채워가는 것이 역사가 되어 남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습이 한동안 애석하게도 개인의 역사를 말하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금하거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서 수많은 개인의 기록이 이미 먼 뒤꼍으로 사라졌다.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때, 고인의 유품을 정리할 때, 버려지는 사진에는 한 개인의 역사와 함께 시간과 공간의 역사 또한 사라진다. 앨범 속 기념사진 한 장에 눈에 보이는 정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와도 같고 이웃이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의 전주가, 지금의 전주가 그리고 모두가 함께 기억할 미래의 전주가 움을 틔우려고 옆구리 찔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주의 역사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전주 시민 모두의 것이다. 개인의 역사가 모여지는 곳에 전주의 정신과 전주의 품격이 함께할 것이다. 이미 망자가 되었거나 어른이 되어버렸고, 어르신이 된 누군가는 계속 우리 시대에 사진 한 장으로라도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 삶을 즐겨라, 현실에 충실하라. 그리고 이 순간을 기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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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9 16:30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뜻을 바르게 쏘아 올린 전주의 활터 '천양정'

2018년 11월 22일 「제5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천양정 관련 문건이 2건 나왔다. 하나는 1960년대 궁도대회의 결과를 알 수 있는 획기지와 하나는 천양정 사원(射員)인 이종성(1917生, 작고)의 활통과 일기장이다. 획기지(劃記紙)란 사정(射亭)에서 사원들이 대회를 할 때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기록한 성적표이다. 대회를 다 마친 후에는 장원자에게 획기지와 부상을 수여하는 것이 사정의 전통이었다. 획기지를 기록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사정명, 성명, 초순, 중순, 하순의 칸이 있고 맨 마지막에는 합계를 기록하는 선이 있다. 획기지에 선을 긋고 그 안에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는 숫자를 기록하는데, 초순에 5발을 쏘아 맞힌 숫자대로 가운데 중(中) 자가 찍힌 도장을 찍고, 불발을 하면 그냥 동그라미 도장을 찍는다. 이어서 중순과 하순을 한 다음 총 15발을 쏘아 합산을 하여 맨 아래에 적중한 숫자를 기록한다. 그래서 획기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활쏘기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원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출품된 자료는 단기 4293년 9월 18일에 제41회 전국 체육대회 전북예선대회, 제64회 전라북도 궁도 선수권대회 획기지이다. 주최는 전라북도궁도협회이고 후원은 전주 천양정이다. △옛 사원(射員)이 천양정에서 쓰던 활통 천양정의 사원으로 활동한 이종성 씨는 완산동에 집이 있었는데 김영은 씨가 고택의 물건을 수습하여 오다가 예사롭지 않은 활 통과 일기장 43점을 발견하여 전주시에 기증하게 되었다. 붉은빛을 띠는 활통에 향산(香山)이라는 호가 적힌 것으로 보아 이종성의 호를 향산으로 추정할 수 있고, 활통 안에는 화살이 13개, 작은 화살이 6개, 검은색 작은 화살이 1개 있었다. 화살통은 옻칠이 되어 있으며 중간은 끈을 2줄로 묶어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위쪽은 뚜껑이 있어 활을 넣고 빼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기를 살펴보면 천양정에 가서 활 연습을 하였다는 대목이 자주 나오며, 정읍 필야정에서 주최하는 궁도대회에 참석하여 궁도 입문 이후 최초로 입선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 개인의 일기장이지만 거의 매일 다가산에 활을 쏘기 위하여 가는 한 사원의 모습을 볼 때 전주 사람들에게 천양정은 매우 중요하였고, 단지 활을 쏘기 위한 장소가 아닌 조선시대 향사례(鄕射禮)의 전통을 이어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정신의 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의를 중요시하는 천양정의 사원들 1712년(숙종 38년)임진년에 전주부 내의 유지들이 강무(講武:조선시대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는 일)를 위하여 다가교 서쪽 기슭에 4칸의 정자를 짓고, 과녁을 북서쪽 황학대(黃鶴臺:현 신흥학교)에 세우고 천양정이라 명하였다. 이곳 황학대는 신흥학교 본 건물 뒤에 있는 터로, 학교 뒷 건물로 들어가면 황학대를 알리는 황학문(黃鶴門)이라는 암각서가 있다. 그러나 9년 뒤에 홍수를 만나 천양정이 모두 유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1722년에 전주부 무인 김삼민 등 4인이 발기하고, 유지들의 협조로 다가산 아래 다가정을 김삼민의 소유로 짓게 된다. 그래서 다가정은 천양정의 정신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830년 다시 사정을 만들 때 전주의 부노들은 당연히 옛 이름인 천양정을 사용하게 된다. 다가산 아래 천양정의 천양(穿楊)이란 뜻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활쏘기는 고대에 이미 존재했고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도 신궁으로 알려졌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데 남원의 황산전투가 밑거름이 되었는데, 사실 이 전투에서 아지발도를 무찌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발의 화살이었다. 조선을 창제하는데 이성계의 신궁에 가까운 솜씨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전하고 있다. △청양정 사원들이 법정 투쟁으로 다시 찾은 다가산 광무 9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명목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1906년 3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통감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국 내 일본인 경찰을 1400명 규모로 늘리며 경찰기구를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에 드나들면서 애국심을 불태우는 사원(射員)들을 제지하기 하기 위해 학교를 건립한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사정들을 통합하게 된다. 1912년 전주부 내에 있던 군자정(현재 기령당), 다가정(다가산 바로 밑), 읍양정(곤지산 동쪽)을 강제로 통합하고 사정의 재산을 매각하거나 학교를 짓는데 강제로 기증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지금의 다가산 북서쪽에 자리한 천양정이다. 천양정 사원들은 1918년 5월 29일 이건호를 천양정 사장으로 선임하고 새로운 발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다가산 정상에 일본인들이 조선의 기를 누르기 위하여 신사가 만들어지자, 천양정의 사원들은 모두 합심하여 투쟁하였다. 분하고 또 분하였으나, 사원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일본의 야욕은 막강했다. 이후 광복이 된 이후에야 법적 소송을 통해 옛 땅을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이 천양정 앞 효산 이광열의 기적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가산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전주천과 푸른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다가산 지킴이 효산 선생 덕이다. 우리가 애국하자는 소리를 말로만 외치기는 너무도 쉽고, 전장에 나가 싸워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땅을 지키면서 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정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이 천양정에는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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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9 16:58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 기록, 시간을 쓰다 - 1973년 완산중 3-4반 박병익군의 일기

<일기, 민간기록의 꽃>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다. 꼼꼼하게 기록된 일기야말로 가장 미시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한 민간 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전주 민간기록물로서 병익일기의 가치> 1973년 중3 박병익군의 일기는, 1970년대 초반 전주에 유입된 서민의 생활을 생생히 보여준다. 전매청에 다니는 어머니와 방직공장에 다니는 누나들, 조지 포먼 같은 권투 선수가 되고 싶은 형과 쌍절권을 돌리며 이소룡을 닮고 싶어 하던 친구들, 빈대 극장과 동그라미 빵집을 기웃거리다 삥 털리는 어리숭한 중학생 등등, 그 웃픈 시절을 되살리는 시간여행의 통로다. 병익 군의 일기에 반공의 날 책상을 한쪽으로 밀고 레슬링을 한 기록이 있다(72.11.23.). 그 기록을 보는 순간 김일의 박치기 장면이 떠올랐다. 안토니오 이노끼의 뒷머리를 거머쥐고 오른발을 높이 들어 박치기에 돌입하는 정지 화면은, 온 국민이 한 목소리 박치기 소리로 레디 액션, 한반도는 그 순간만큼은 통쾌, 상쾌, 유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양말이 닳도록 비벼대고, 차범근의 슛 골인이 한반도 창공에 메아리칠 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면에는, 끽소리 함부로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엄연했다. 일기장 뒤표지 반공 아는 척하는 말에 비밀은 샌다 방첩은, 당시 국가 권력의 서슬 퍼런 위협을 상징한다. 그러했다. 일기장 속 박 군의 정치 인식과 스포츠 몰입, 극장 순례, 연예 폭식은 당시 여느 중학생과 다를 바 없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은 책 속의 이야기일 뿐, 매사 주먹과 으름장이 먼저인 시절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에 들어설 때면 새마을운동에 힘쓰는 어른들 속에서 번영의 미래를 꿈꾸고(73.1.9.), 날이 추워지면 일선 장병과 병든 이웃을 걱정했으며(73.12.0.) 시험 때면 예비고사와 취직 준비하는 형과 누나들을 걱정하던(72.11.27.) 정다운 시절이었다. 병익일기는, 전쟁의 무자비에 비하면 그나마 좋은 세월이 틀림없는, 도시 중심의 산업 사회로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70년대를 살았던 전주 학창 시절의 자화상이다. <1973년 전주에 유입된 남원 양반> 병익군은 남원 송동 안계 사람이다. 70년대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병익군의 부모님도 자녀교육을 위해 일찌감치 전주로 이사를 온 것으로 보인다. 전주로 유입된 각처의 사람들은 주로 정류장이나 역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병익군의 가족은, 전주-남원 전라선을 이용한 전주역(지금의 시청 자리)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기린봉으로 나무를 하러 가고(72.11.19.), 김장하려고 덕진에서 배추 80포기를 버스에 싣고 오거리에서 내린 어머니(72.12.10.), 동부시장에서 철도(지금의 기린대로) 사이에서 깡패를 만나 돈 10원과 목걸이를 빼앗긴 것(73.1.20.) 등을 감안하면 병익 군의 집은 노송동 병무청 주변 어디쯤이 된다. 병익 군의 형 병훈은 제1회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73.3.4.), 둘째 형 병배는 병익보다 한 학년 위다. 여동생 기순은 중학교 추첨 5번 전일여중에 배정된다(73.2.16.). 어머니는 남원으로 장사를 다녔는데 무거운 짐을 역까지 들어다 드리며 병익 군은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73.10.6.). <중3 남학생의 해피 데이> 73년 중3 병익 군의 목표는 고등학교 진학이다. 당시 고입 시험은 10과목이다. 과학 30점, 사회 국사, 공업기술, 국어 25점, 영어, 수학, 체육 20점, 음악, 미술 10점 그리고 반공 15점, 체력장 20점까지 해서 총 220점 만점이다. 병익 군은 학교와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극장과 탁구, 축구 그리고 스포츠 중계와 연예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다. 코리아극장, 아카데미극장, 삼남 극장, 제일극장, 현대 탁구장, 중앙 탁구장, 전북 탁구협회장, 역전 탁구장, 챔피언 탁구장, 중앙초, 교대부속, 풍남초 등이 놀이터인 셈이다. 추운 겨울이면 고향 동네 형, 누나들과 술 한 되, 화토 놀이도 재밋거리다. 문화방송 10대 가수 청백전(72.12.2.) 남자팀은 김상진, 나훈아, 남진, 이용복, 여자팀은 하춘하, 김상희, 조미미, 문주란, 정훈희 등이었다. 제5회 킹스컵(72.11.18.~28.), 뮌헨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73.11.)과 관련해서는 승패, 순위, 선수 특성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골 넣는 장면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되새길 정도다. 제54회 전국체전에서 전북 4위(73.10.12), 제7회 ABC 아시아 농구선수권 대회(신동파, 박형태, 이광중, 이동광, 유기형, 박한, 기로한, 이자연, 강호연)(73.12.4.), 뮌헨 서부독일 오픈 탁구 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이에리사, 박미라, 정영숙), 단식 우승(정영숙)(74.2.24.), 조지 포먼이 노턴을 상대로 2회 KO를 거두며 30전 30승 27KO(74.3.28.) 등은 일기에 기록해야 할 중요 뉴스였다. <일기로 보는 시민들의 생활상> 병익일기는 지난 2018년 10월, 제5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기증된 민간기록물이다. 일기를 공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기를 역사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우리는 일기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다양한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전주 민간기록물의 기본 취지가, 전주시민들의 삶,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기야말로 가장 훌륭한 민간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일기장을 공개한 박병익 선생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다양한 계층의 일기가 수집되어 전주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풍성해지기를 소망해 본다. /김규남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지역문화연구공동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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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5 16:11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밀쳐둘 책은 없다

시사를 앞세운 잡지도 대부분 시소설수필 등 문학작품과 음식부채한지 등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소재로 한 글과 사진이 있다. 전주 최명희문학관이 보유한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수필과 콩트도 『삼양』(삼양사1982), 『창공』(대한항공1982), 『에너지관리』(에너지관리공단1983), 『쥬단학』(한국화장품1983), 『영창』(영창악기1984), 『무주라이프』(쌍방울개발1991), 『전북의정연구』(전북의정연구소1982) 등 문학과는 무관한 잡지에서 찾았다.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에 기증된 잡지들을 보면서 목차와 필자의 명단에 먼저 눈이 닿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일찍부터 문학 자료의 수집과 보존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일본은 문학인의 친필서간필묵일기노트유품 등 특수 자료와 도서잡지신문 등 일반 자료뿐 아니라, 문학작품이 단 한 편이라도 실려 있다면 성인잡지까지 소홀하지 않게 수장고에 간직하고 있다. 어떤 잡지든 수많은 보물이 있다. △잡지에서 찾은 문학인과 문학작품 전북은행의 종합교양지인 『전은문예』(1990) 창간호는 최승범진동규의 시와 우한용 소설가의 콩트를, 제2집(1991)은 이기반(19312015)황길현(19332002)의 시, 송하춘의 콩트, 유기수(19242007)이봉섭(19341993)의 산문, 조규화(19472006)의 동화를 만난다. 표지화는 만평가인 박래윤 화가의 작품이다. 1993년 『전은가족』으로 이름을 바꾼 이 책은 그해 봄호에 소설가 이홍근(19362009)의 수필을, 가을호에 전규태의 수필과 모필장 채주봉 명장을 소개한다. 『체신정보』(1989전북체신청) 창간호는 최승범최종규의 시와 홍석영의 산문을, 『체신정보』(1991)에는 채규판의 시와 김순영(19372019)김여화장정자의 수필이 실려 있다. 남천 송수남(19382013)의 그림을 표지에 담은 『월간 전라』(1989) 창간호는 정렬(19321994)안도현의 시와 최형(19282015)김태자국명자의 수필이 있다.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을 소재로 한 홍석영의 소설 「바람아 물어보자」도 이곳에서 연재가 시작됐다. 월간 『전북의정연구』(1991) 창간호는 전영래(19262011)의 전북의 얼을 찾아서와 송영상의 전라도 풍물기가 눈에 띈다. 2000년 출간된 『전주사람 송영상의 전라도 풍물기』(전주문화원)의 시작이 이곳이다. 온통 예술인의 작품으로 채워진 예술단체의 기관지는 한 편도 밀쳐둘 것이 없다. 특히, 『전주예술』(전주예총1993) 창간호에 실린 작촌 조병희(19102002)의 글은 전주전북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하고, 『전주예술(제35호)』(2001)은 소설가 형문창(19472011)과 화가 김치현(19502009)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전북문인협회의 기관지 『전북문단』(1987) 창간호를 펼치면 첫 장부터 문학의 밤에 작품낭독 순서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는 문인의 사진이 이채롭다. 전북작가회의 창간호 『작가의 눈』(1997)은 시인 최형을 특집으로 소개한다. △잡지에서 살피는 전북 문화사 1992년 『전북시대』 창간호는 최승범의 축시로 시작된다. 총선이 끝난 직후라 선거와 관련된 기사가 많지만, 최일남 소설가의 산문 「해장국과 비빔밥의 變態(변태)」, 대한민국 보건행정의 개척자로 불리며 평생 인술(仁術)을 펼친 이영춘(19031980) 박사를 조명한 기사와 고창 박물관백과사전으로 통하는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의 인터뷰는 지금도 챙겨야 할 내용이다. 홍석영의 콩트 「초상화」도 있다. 김용택 시인의 창간 축시를 담은 시사종합잡지 『전북저널』(1997) 창간호는 전북대 강준만이정덕 교수, 저널리스트 김수돈,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향토사학자 신정일의 글이 눈에 띈다. 타블로이드판에 큰 사진을 앞세운 『월간화보 전북저널』(1991) 창간호는 매월 첫째셋째 화요일 전주 코아백화점 앞 광장에서 열린 이색 시장과 크라운맥주 전주공장, 전주의 유명 찐빵가게 <백일홍>의 정창석 장인의 이야기, 합죽선과 엄주원(19382004) 명장을 만날 수 있다. 『지방생활』 1991년 창간호는 전주시와 완주군의 생활안내 전화번호가 절반을 차지하지만, 욕쟁이 할머니집으로 불리는 <삼백집>과 당시 전주의 민중운동을 상징한 온다라미술관과 황토현문화연구회가 소개돼 있다. 『전라화보』(1995) 창간호는 장수 곱돌 석기공장과 전주 백학야간학교의 일상이 담겨 있다. 수집된 잡지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전북인』과 『책속의책』이다. 1991년 4월부터 일 년 정도 발행된 월간 『전북인』은 지역을 생각하는 향토지를 앞세웠다. 창간호에는 최명희와 전북대 왕철 교수의 대담이 실렸고, 최일남 소설가의 칼럼과 김유석 시인의 수필이 있다. 이후 발간된 잡지에도 이병기(19322008)강인한김판용의 시와 김병용(소설가)오정요(방송작가)윤이현(아동문학가) 등 여러 문학인의 글이 담겨 있다. 당시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김병용은 창간호에 실린 유학자 건암 김형관 옹의 기사는 지금도 챙겨야 할 만큼 귀한 자료라며 지자체와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이 땅의 문화자산이 보존되고 널리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간재 전우(18411922)와 후창 김택술(18841954)의 학맥을 이은 건암(19151998)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핍박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전주 기린봉 아래 마당재에서 스승의 업적을 기리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쳤으며, 『건암문집』을 남겼다. 책표지에 발행 연도를 통일염원 44년으로 쓴 『책속의책』은 1988년 금강서점(전주)녹두서점(군산)황토서점(익산)이 전북사회과학서점연합의 이름으로 발행했다. 사회과학서적을 중심으로 도서 안내와 독후감이 주요 내용이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의 법정투쟁 소식과 전북의 민주화 운동사를 엿볼 수 있어 더 소중하다. 박창신 신부와 김용택 시인의 젊은 모습도 만난다. 당시 편집위원인 우석대 이재규 교수는 이 잡지가 총 3회에 걸쳐 발행된 것으로 기억했다. 유의미한 기록들이 누군가의 책장에 깊이 간직돼 있을 것이라며 민간기록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도움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카이빙이 시급하다 잡지를 비롯한 책은 장식품이 아니다. 책장에 꽂아두거나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다. 펼쳐서 읽어야 책이며, 여러 사람의 손이 타서 그 내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훼손되고 잃어버릴 위험이 높은 만큼 책 한 권이 담고 있는 가치를 연구하고 그 의미를 확산하기 위한 아카이빙을 서둘러야 한다. 전북 문학의 소중한 유산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연구하는 온전한 문학박물관을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위한 기운을 창출해야 한다. 문학 자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김용철이영숙한창섭 씨와 같은 기증자들이 활발하게 나오길 바란다. /최기우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최명희문학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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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1 17:57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기록으로 보는 100년 전 전주 풍경

전주는 조선왕조 500년의 본향으로 그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기록문화는 우리 지역만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완판본으로 상징되는 목판인쇄는 20세기에는 활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쇄문화의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추동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육당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문명국가로 등장한 일본의 인쇄 출판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거금을 들여 활판인쇄기를 도입하고 일본인 기술자까지 국내로 불러들여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을 창간하는 등 근대출판으로 전환하는데 혁명적인 과업을 이루었다. 잡지 창간 당시(1937년) 18세 소년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신문명에 눈을 뜬 최남선의 혜안은 한국의 출판인쇄문화를 견인한 새빛임에 틀림이 없다. 육당의 전주 답사기와 더불어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전주의 옛 모습을 살펴본다. △현대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육당이 쓴 『심춘순례』는 전주를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다니면서 기록한 현대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원조격이다. 그가 쓴 『심춘순례』는 1925년부터 기록되어지는데 지금은 없어진 이리(익산)에서 전주까지 연결된 경편철도를 타고 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전주역은 구 전매청 부지로 현재는 태평동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당시 전주는 호남선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서울에서 오는 교통편이 없어 불편했는데 경편철도는 호남선과 전주를 이어주던 동맥의 역할을 한 셈이다. 책을 보면 익산에서 출발하여 대장촌을 지나 삼례역에서 숨을 고른 후 한내천을 건널 때 비비정과 호산서원을 바라보며 전주 입성을 기대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한내천 교량 위에 열차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그 길이 바로 경편철로이다. 경편철도는 1914년 11월에 준공하여 1927년까지 13년간 운행하던 협궤열차였다. 육당은 경편열차를 체신없는 값으로 어떻게 까불깝죽하는지 마치 요망스런 방울 당나귀에 올라앉은 것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고(故) 작촌 조병희 선생은 그놈의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고 하니, 저거 광산에 있는 철도 정도나 되나요. 딸까닥 딸까닥 혀요. 그것 하나 남겨 놓았으면 전주 물건인디. 협궤차하고는 틀려요. 아주 좁아요. 광산철도하고 비슷혀. 기차는 화통이 쭉 나오고 눈이 어떻게 텔레비에 나오는 솜리까지 댕기는디 그것 한번 더 봤으면 좋겠어. 우리가 어디를 갈 적에 우우하고 갔는디 탈선이 되었어요, 탈선이 되니까 모두 동네에 가서 막대기를 가져다가 올려 가지고 갔응께, 가히 짐작할 수 있지요, 뭐 도로보다 조금 낫다고 볼 수 있으니까나. 철도는 철도여. 뚜껑이 있고 그랬으니까. 지금 덕진 어디로 가는고 하니 지금 국악원 요짝으로 지났어요. 덕진 거기, 빽빽 소리 내고 헐 적에는 향수가 있었는디 지금은 없어졌어요. 한 세기를 살으신 어른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전주 옛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전주역의 넓은 광장에서 짐 다툼하는 작은 지게꾼들의 수월치 않은 싸움통에 한참 우스운 괴로움을 겪고라며 육당이 전주역에 내렸을 때의 풍경을 묘사한 글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전주역을 내리자 지게를 맨 짐꾼들의 모습과 전주성의 훼철한 길을 따라 남문까지 이동하는 모습이 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경편철도는 그 후 1927년에 철도국이 전북철도를 매수하여 경전북부선의 기존 철로를 광궤로 개축에 착수하여 1929년 9월에 완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한 전주 이리 광개축 공사와 더불어 전주에서 순천간 철도를 1936년에 준공하여 여수까지 이르는 노선을 전라선이라 명명하였다. 경편철도가 광궤로 개축하면서 전주 역사도 한옥의 형태로 1929년 새롭게 완성되었다. 새롭게 부각된 노송정 전주역사 부근은 전주의 중심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육당이 전주에서 모악산으로 가는 여정에 꽃밭정이를 지나는데 길가에 엿장수가 벌린 좌판과 엽전 꾸러미의 풍경도 재미있다. 모악산 가는 길 문정리의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세내 흐르는 큰 벌판(난전)이 시원하게 눈앞에 전개되는 모습도 생경하게 표현하였다. 당시 육당은 불교계의 큰 어른인 석전 박한영 스님을 모시고 다녔는데, 이렇게 전주의 곳곳을 다니면서 천재도 모르는 처처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매일 기록한 글을 자신이 창간한 시대일보에 발표하였다. 당시 열악한 교통과 통신수단을 생각할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기고한 글들은 한 권의 책 『심춘순례』로 탄생한다. 곰팡내 나는 서적만이 이미 내 지식과 견문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의 기록은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전주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 듯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날마다 무심코 지나가는 거리와 건물, 나무 등 그것들의 생애도 기록해 두자. 시간의 흔적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다시 우리 후손에게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기록은 인생 수첩이 되고 가족사는 마을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기록은 공동체의 기록으로 넓게는 지역사가 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질 것이다. 경편 철도가 지나가던 길에는 녹슨 철로만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역사(驛舍)는 전주시청과 아파트가 들어서서 흔적도 없어졌지만 육당이 남긴 기록은 영원하다. 기록이 주는 힘이다. #『심춘순례』란 『尋春巡禮』는 육당 최남선이 쓴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의 글이다. 육당은 석전 박한영 스님<(1870~1890년 생으로 승려이자 교육사상가, 완주군 삼례읍 하리 조샛마을에서 태어남. 동국대 전신 주앙불교전문학교 교장,조선불교교 교정(현 종정) 역임>과 함께 1925년 3월 28일부터 50여 일간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도인閒道人이라는 필명으로『시대일보』에 그 순례기를 연재했고, 1년 후 전반부의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오세창의 제자(題字)와 고희동의 표지삽화, 정인보의 표제지가 실릴 만큼 이 책은 당시 최고 지성들의 관심 속에 출간되었다. 그것은 『심춘순례』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닌, 일제에 빼앗긴 국토를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본격적인 우리문화답사기였기 때문이다. /이종호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신아출판사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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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8 16:27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언론 창달의 중심지, 전주

전주시가 지난해 2월 21일부터 3월 30일까지 실시한 2018 전주기록물 수집 공모전에서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에 거주하는 김용철씨(73)는 전주지역에서 발행된 신문과 잡지 등의 창간호 40여점을 내놓아 대상인 꽃심상을 수상했다. 김용철씨는 당시 신문 등 출판물에 대한 애정이 많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그것들이 전주의 의미 있는 기록물로 남게 된다니 영광이다 고 수상 소감을 피력했다. 그가 제4회 전주기록물수집공모전에 내놓은 자료는 1988년 전북도민신문과 전라일보, 전주일보 등 전주에서 발행된 지역신문 소식지와 창간호는 물론 당시 세상에 나온 생활정보지인 번영로와 까치고을 창간호였다. 또 함께 출품한 전주예술, 소년문학, 더불어 사는 전주 등 전주지역에서 쏟아진 다양한 종류의 신문잡지류도 포함됐다. 지난 30년간의 전주 언론과 출판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였다. 김용철씨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1988년 이후 전북 신문 상황을 들여다본다. 김용철씨의 수집 출판물 중 단연 눈길을 끄는 신문은 전북도민일보와 전라일보, 전주일보의 소식지 및 창간호다. 1987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6.29선언은 언론출판계 판도에 격랑을 일으켰다. 1988년 하반기 전북에서는 전북도민신문과 전라일보가 창간됐다. 1973년 5월 이후 유지되던 전북일보 1도1사 체제가 무너지고 전북일보-전라일보-전북도민일보 3사 경쟁체제가 됐다. △전북도민신문 창간 전북도민신문은 1988년 8월 8일자 전북도민신문 창간 소식지(타블로이드 4면)를 냈다. 송주인 사장이 취임사를 통해 창간을 알렸고, 새 신문의 주인이 됩시다란 공고를 통해 도민들이 주주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열기는 뜨거웠다. 소식지는 도민주 20만 주를 돌파했고, 주주는 5000명에 육박한다고 썼다. 또 소식지 4면에서는 전라일보와의 통합 추진 작업이 결렬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전북도민신문이 지난 5월 13일 자본금 7억5000만원, 전라일보가 5월 17일 자본금 3억2000만원으로 각각 법인회사를 설립한 뒤 3개월동안 통합협상이 시도되어 왔으나 통합사 제호부터 의견이 맞섰을 뿐만 아니라 도민주, 사원 정원 등 의견 접근을 보지 못해 통합은 요원한 실정에 놓이게 됐다고 알렸다. 전북도민신문의 발행인인쇄인은 송주인, 편집인편집국장은 서흥석씨가 맡았다. 1988년 10월14일 문공부에 등록(등록번호 가-78호)한 이 신문은 전주시 고사동 1가 340-1번지에 둥지를 틀고 11월22일 창간호 20면을 시장으로 출발했다. 창간호 1면에서 함께 열자! 위대한 전북이라고 주창했다. 송주인 사장은 창간사에서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민주화, 지방화의 새로운 시대의 장이 열리는 이때 3500여 명의 주주들 출자금을 근간으로 창간,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해 사랑받고 신뢰받는 공기(公器)로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창간 축하 메시지는 민정당 윤길중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했고, 박권상 자유기고가 는 창간 특별기고를 통해 여론의 힘으로 국회를 움직여 명실상부한 지방자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특집기사에서는 낙후 전북의 탈피, 판소리, 지방자치제를 맞는 도민의식조사 등을 다뤘다. 당시 도지사는 강현욱, 전주지검장은 유순석, 교육감은 홍태표, 전주시장은 육종진이었다. 주요 창간 축하 광고는 문화연필, 호남식품 보리음료 보리보리, 쌍방울 등이었다. 1989년 2월 27일 주총에서 김재호 이사가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경영권을 장악했고, 1990년 10월 10일 새롭게 출범한 경영진이 제호를 전북도민일보로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4년부터 김택수 사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전라일보 창간 전라일보는 1988년 7월 29일 등록번호 가-69호로 문공부 등록을 전북도민신문보다 먼저 마쳤지만, 약 1개월 뒤인 1988년 12월 20일 36면에 달하는 묵직한 창간호로 출범했다. 전라일보는 1988년 8월 12일과 10월 10일 등 중간 중간에 소식지인 전라일보 뉴스판(대판 4면)을 통해 전라일보 창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알렸다. 전라일보 창간에는 기업인 황온성씨의 자본금 3억2000만 원 투자가 결정적이었다. 이치백 발행인 겸 사장은 창간사에서 주어진 언론 사명에 입각, 역사의 창조가 어느 선택된 소수가 아닌 무언의 다수라는 진리를 새로이 인식하고 그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실존의 밑거름이 될 것을 만천하에 거듭 천명한다고 했다. 창간 축사는 민정당 박준규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 등이 했다. 당시 전라일보는 창간호를 36면 발행하며, 지역발전의 선두주자임을 선언했다. 창간특집 1(13~24면)과, 창간특집 2(25~36면)으로 구분, 창간특집 1의 1면에는 백두산 천지에 전라일보 사기를 꽂은 사진을 게재했다. 창간특집 2의 1면에는 비상을 주제로 한 송수남 화백의 한국화와 고은 시인의 시를 올렸다. 또 최승범 전북대 교수(시인)는 전라감사 연재를 시작했다. 본지 3면에서 지역발전을 위한 장기 시리즈 연재에 들어갔다. 두산그룹이 백화양조, 두산유리, 베리나인을 광고했는데, 당시 군산지역 향토주류사인 백화가 두산에 인수됐음을 보여준다. 전라일보는 1994년 6월 전라매일, 1999년 10월 전북제일신문으로 변경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2년 2월25일 전라일보 제호를 회복했다. 그해 8월 현 유춘택 사장 체제가 됐다. △전주일보 창간 전주일보도 1991년 7월 31일 창간호(7월20일 등록번호 가-116) 34면을 발행, 종합일간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사옥은 전주시 우아3동 747-65번지다. 회장 이윤근,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 박계훈, 편집국장 서재철 체제로 출범했다. 창간호 1면 사진으로 전주시 인후동 330-1번지 맹종죽 밭에서 김영채 사진부장이 촬영한 맹종죽(孟宗竹) 사진을 굵직하게 실었다. 박계훈 발행인은 창간사에서 본격 지자제 원년에 탄생하는 신문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걸쳐 지역사회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했다. 강암 송성용은 창간 축하 휘호 논정필직을 썼다. 또 벽천 나상목 화백의 산수화 하산고은(夏山高隱), 조병화 선생의 민주를 이끌어가는 힘으로란 축시가 눈에 띈다. 1988년 5월 8일 타블로이드 28면으로 창간된 주간 서도신문의 발행인 이윤근씨가 주간 전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해 발행하다가 일간종합신문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 일간 전주일보였다.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1996년 9월 13일 자진 폐간했다. △지방 일간지 난립 시대 2000년 10월 25일 새전북신문 창간 이후 전주를 기반으로 한 지방일간지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 전주 기반 지방일간지는 2019년 6월 현재 전북일보(서창훈), 전북도민일보(김택수), 전라일보(유춘택), 새전북신문(박명규), 전북매일신문(전은경), 새만금일보(이재춘), 전북타임스(송민순), 삼남일보(고종승), 전주일보(신영배), 전주매일(조봉성), 전라매일(홍성일), 전민일보(이용범), 전북연합신문(조광래), 전북중앙(강현민), 호남제일신문(김만중), 전북금강일보(김병학) 등 16개사이다.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 전북일보 선임기자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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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9.06.20 15:20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사진에서 근대도시의 탄생을 엿보다

전주 민간기록물 정신의 숲으로 들어온 빛바랜 가족사진 앨범에는 근현대 시기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정보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사진 속 주인공들의 모습과 함께 당시 도시 경관과 당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이 어디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누구와 사진을 찍었는지? 왜 사진을 찍었는지 등등을 헤아려 보면, 전주의 근현대 사회문화사가 어렴풋이 엮어진다. 이때가 바로 개인과 가족의 사적 기록이 공적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도시인의 욕망, 경제적 생활인 모습 담겨 18~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는 마침내 조선을 멸망시키고, 일본의 식민 세력의 지배 아래 들게 했다.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조선말 개화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 정권 아래서 근대사조가 물밀 듯이 들이닥치게 되었다. 근대 도시가 생겨나면서 과거 조선의 전통적인 도시도 탈바꿈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총체적인 변혁은 각별히 도시인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도시 경관에 나타난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살던 도시인들의 삶은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근대 도시가 형성되어가는 길목에서 사진의 배경이 된 건물, 간판, 휘장, 길거리 풍경, 자연경관, 사진관의 키치(kitsch) 등이 미장센으로만 볼 수 없는 요소들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만 훔쳐볼 수 있는 흥미로운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구조물이나 경관을 포함한 지리적인 정보가 도시의 역사를 전부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미장센을 실증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잃어버린 시간과 인물을 찾아내게 되면 이 사진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되살려내는 훌륭한 역사문화 자료가 된다. 식민정부는 근대적인 개념의 도시계획을 실행하면서 과거의 도시를 변용했고, 때로는 전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구적 외형의 관공서, 상공업용 건물이 세워지고, 주거지가 구획되었으며 도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신도시 건설이 이루어졌던 증거 자료들이 사진 속에 들어 있다. 또한 도시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구조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근대 도시에 어느 사이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과 일본 거류 민촌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민족적 차별이 공간적으로 상징화되어 가고 있었다. 달라진 도시 경관 속에서 우리는 도시의 근대성을 바라본다. 식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거대 이념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실천성, 욕망, 그리고 경제적 생활인의 모습이 앨범 속에 담겨 있다. △전주 바로보기, 도시와 농촌 오가는 사람들 행적 봐야 근대 도시로 부상한 전주에는 토박이들 보다는 이주해온 이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근대시기 도시 이주민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노동인구의 증가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상업인구의 증가, 지식인층의 증가가 두드러지며, 이 계층의 활동이 근대 도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근대 도시 전주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우리의 눈을 크게 떠서 이 도시와 주변 농촌을 오가는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야만 한다. 당대인들-기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도시와 농촌을 넘나들고, 여전히 농촌과의 질긴 끈을 가지고 도시의 삶을 이어왔다. 도시와 농촌, 근대와 전통을 넘나들던 이 경계인들의 의식과 인식을 통해서 도시의 삶을 역동적으로 그려 보아야 한다. 많은 농촌 거주인들이 새로운 생계 수단을 찾아서 기회가 많은 도시로 나왔다. 과거와는 다른 경제사회생활이 전개되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직업관, 생활관 등이 뿌리 채 뽑히는 경험을 했어야만 했다. 이들은 스스로가 변화의 소용돌이 속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이든, 부유한 이든 도시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고, 생생하지도 않다. 기록은 있으되 파편적이다. 그래서 추론하거나 기록의 조각들을 맞출 수밖에 없는데 반해서 한 개인의 연작 생애 사진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생생하며, 촘촘하다. 도시의 외형에서 경험의 내면으로, 도시인의 삶을 순환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사진 속 주인공은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사진 속에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려고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귀는 있으되 들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성영화 시대 변사를 만나듯, 사진의 변사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그가 건네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의 후손들이 변사가 되어서 선친의 목소리를 대변해 준다. 근대 도시로 이주해서 살았던 선친과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낸다. 그렇지만, 이제 가족 앨범을 보면서 구성지게 읊어 줄 변사들도 하나 둘 무대를 떠나고 있다. 떠나기 전에 변사를 만나야 하나,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가치를, 존재의 가치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증된 사진과 앨범이 중요하듯,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변사들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청자(聽者)가 필요하다. 서 말의 구슬도 꿰어야만 보석이 되듯 수천, 수만 장의 사진과 그 이야기들을 꿰어야만 자료로서의 보물이 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일을 우리가 부지런히 시작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함한희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대학교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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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6 14:56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낯선 가족 앨범에서 나를 만나다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사진 앨범 기증자인 김옹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면서 궁금증이 더해졌다. 한벽당이에요. 한벽당.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요?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사 진 이구만요, 이 사진이... 몇 달 전 전주시 정신의 숲에서 수집한 기록물 전시를 둘러보던 나는 오래된 사진 앨범 앞에 발을 멈췄다. 한 가족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앨범을 민간기록물로 내어놓은 분의 뜻이 가상해서 한 장 한 장을 들추며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다. 그래서 어느 날 기증하신 분의 집으로 불쑥 찾아갔다. 찻상 위에 펼쳐진 복사판 앨범-원본은 정신의 숲에 기증했기에 복사본을 앞에 두고 노부부와 나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벽당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가족과 친구들 이야기에 앞서 사라진 옛 경관을 아쉬워하는 두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가족사진이 곧 도시사의 자료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노부부는 조부의 독사진을 보면서 한말(韓末)에 태어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선대(先代)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들춰냈다. 이제까지 장롱이나 문갑 그리고 상자 속에 고이고이 간직해 온 사진들처럼 가족 이야기도 개인의 기억과 마음에 가만히 묻어 둔 것들이다. 모서리가 찢겨 나간 사진처럼 노부부의 기억도 한 부분이 잘라져 나갔다. 구겨지거나 빛이 바랜 사진처럼 그분들의 기억도 어슴푸레해졌다. 그래도 한 장 한 장이 모두 소중한 사진처럼 아련하게 회상되는 그분들의 기억은 귀하기만 하다. 사진은 개인이 소장한 앨범이나 상자 속에서 나온 순간 역사적인 물증이 된다. 노부부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실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삶의 희로애락을 다 접어두고 이 세상을 떠나버린 다정해 보이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코끝도 시큰해졌다. 그래서 낯선 가족사를 통해 나를 만나게 되는가 보다. 노부부가 보여준 한 장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가족사진 속에서는 부모님과 형제, 사촌의 이야기가 들어 있고, 혼례사진 속에서는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서 식을 올리기까지의 사연들도 숨어 있다. 또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로 둘러싸여서 찍은 부모님들의 회갑잔치 사진은 참 다복해 보인다.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가슴 절절한 가족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사진 속 배경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거나 흔히 보기 힘든 경관이 사진 속에 나타나면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사라진 풍광 속과 관련된 우리의 기억이 되살아나서이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때로는 사진 속에 얼핏 보이는 풍경과 물건들이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서 역사적인 물증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가족사진 속에서는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사진은 특별한 때에만 찍거나 아니면 사진관이나 야외에 놀러 가서 기념으로 찍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어서 그랬다. 집안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드물어서 집안 내부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 보기는 쉽지 않다. 집안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사를 집으로 부르거나 사진기를 가진 친지나 친구를 데려 와야만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추억거리고, 경험이 없는 신세대들에게는 역사공부가 된다. 특히 혼례나 회갑연 사진들은 역사적 물증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복장, 음식 그리고 혼례에 사용된 용품들이 과거의 의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노부부의 부모님은 집 마당에서 혼인식을 치렀다.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선 신랑 곁에 활옷에 원삼 족두리를 쓴 신부의 다소곳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랑 신부를 에워싼 하객들이 던지는 덕담과 농담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 당시에는 혼례 못지않게 회갑연도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사진 찍기 힘든 시절이었는데도 사진사를 불러다 기념사진을 촬영할 만큼 회갑의 의미가 컸다. 우리 할머니 때만 해도 60세를 넘기는 것이 장수(長壽)하는 것이라고 해서 잔치를 크게 했다.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서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회갑연에서는 부모님께 떡, 과일, 사탕을 높게 괸 상을 올리고 그 앞에서 자손들이 절을 하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드리면서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아버지가 받으신 회갑 상 위뿐만 아니라 양쪽에 떡을 잔뜩 괴어 올려놓은 시루도 등장했다. 시루에다 떡을 찌던 시절 떡 맛은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명절이나 잔치 때가 되면 떡쌀을 담그고, 다음 날에는 쌀을 씻어서 빻고 그 빤 가루를 시루에 안쳐서 김을 푹 올려서 떡을 찌셨다. 아이들이 기웃거릴라치면 할머니께서는 떡이 설익는다고 걱정을 하셨다. 아마도 맛있는 떡을 빨리 먹이고 싶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마음이 김이 덜 오른 시루를 미리 내릴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김이 오르는 시루 속에는 떡을 쩌 주는 귀신이 들어 있는가 보다 라고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잔치에서는 시루에 찐 떡을 마음껏 먹어보기도 하고, 또 잔치 끝나면 어김없이 작은 떡 보따리가 대청마루에 한 가득 펼쳐진다. 시루 채 들어다가 마루에 올려놓고, 손님들에게 떡 보따리를 싸시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이 바빠진다. 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이 빈손으로 가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드디어 큰 시루 속에 들어있던 그 많은 떡을 다 나누고 나면 어느덧 잔치도 막을 내린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찾아낸 노부부의 기억과 나의 애틋한 추억까지 더해져서 찻상 위에 마시다가 만 오미자차의 발그스레한 색깔이 노부부와 내 마음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함한희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대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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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3 17:01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 가림출판사와 한국문학의 발전

△전주 가림출판사(嘉林出版社) 목판본 출판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석판본(石版本) 출판을 거쳐, 활자 인쇄가 대중화되면서 전주에서는 1940년대부터 대양당인쇄소(大陽堂印刷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책을 찍어내게 된다. 그리하여 50년대에는 보광출판사(普光出版社)를 중심으로 대학교재, 시집, 교지 등이 출판되고, 60년대에는 가림출판사(嘉林出版社)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사를 이끈 散文時代(산문시대), 四季(사계)와 같은 동인지들이 전주에서 발간되게 된다. 70년대에는 신아출판사를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잡지인 수필과 비평, 문예연구 등이 발간된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주 가림출판사는 지역의 다양한 책은 물론이고,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잡지를 간행하였다. 가림출판사는 당시 전주중앙초등학교(현 경기전) 동문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70년대 팔달로를 개통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가림출판사에서는 강인한(姜寅翰, 1966)의 시집 異常氣候(이상기후), 신석정(辛夕汀, 1967)의 시집 山의 序曲(산의 서곡), 최승범(崔勝範, 1968)의 시집 候鳥의 노래(후조의 노래) 등을 발간하고 全北文學을 창간호부터 4집까지 발간하였다. 문학잡지, 시집 이외에도 대학 교재, 지역 역사서 등을 발간하였다. 1964년 가림출판사에서 발행한, 평론가 김현의 평론집 存在와 言語의 판권지를 보면 1964년 7월 인쇄. 발행인 김종배. 발행소 가림출판사. 전주시 전동 2가 54. 등록번호. 바 5호.와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발행인 김종배 씨에 대해 소설가 김승옥이 쓴 내가 만난 하나님에서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종배 사장이란 분은 당시 연세가 40대 중반인 키가 자그마하고 강건하게 생긴 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자수성가한 사람으로서 비록 뚜렷한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의협심이 강하고 이상이 높았다. (중략) 최하림이 방문하여 대학생 몇 명이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문학동인지를 발간하고 싶어서 운운하니 선뜻 내가 당신들을 기르겠다라고 나선 것이었다. (김승옥, 2004:186 인용) △동인지 散文時代(산문시대) 발간의 의의 散文時代는 1962년 6월에 1호가 발간되었고, 10월에 2호, 1963년 6월에 3호, 10월에 4호, 1964년 9월 5호를 낸 문학동인지이다.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20대 청년 김현, 김승옥과 시인 최하림이 산문 동인회를 결성하여, 한국문학사에서 전혀 새로운 잡지가 전주의 가림출판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되었다. 한국 문학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散文時代는 이후 강호무, 김창웅, 김치수(2집), 김성일, 염무웅(3집), 곽강수, 서정인(4집) 등 모두 10인의 동인으로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동인으로 참여한 강호무의 첫 시집 棺木(관목)이 1965년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동인지 散文詩代는 1964년 9월에 10인의 동인이 참여하여 5집을 발간하고 마친다. 散文詩代가 비록 2년 동안 5집까지의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이 잡지는 당시의 문학계를 흔들어 놓은 대표적인 동인지로 자리매김하였고, 현재까지도 많은 문학도들에게서 회자되고 있다. 한편, 1966년 시 동인지 四季(사계)가 황동규, 박이도, 정현종,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 당시 젊은 시인과 평론가가 참여하여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소설가들이 산문 동인지 散文詩代를 발간한 것에 호응하여, 당시 젊은 시인과 평론가들이 의기투합하여 시 동인지 四季를 발간한 것이었다. 四季1호는 1966년 6월 황동규 시인이 저자 대표로, 四季 2호는 1967년 6월 박이도 시인이 발행자 대표로, 마지막 四季 3호는 1968년 7월 20일 정현종 시인이 발행자 대표로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四季 동인지도 당시 우리 문단의 참신한 신예들로 구성되어 시에 대해 탐구를 계속했던 동인지이다. △68문학 68문학은 문학동인 그룹으로, 1968년 散文時代와 四季 동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하였다. 1969년 1월에 68문학 제1집을 한명문화사에서 발간하고, 평론가 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이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고, 평론가 염무웅이 창작과 비평으로 가면서 두 개의 유파로 갈라졌다. 68문학의 동인은 散文時代의 김승옥, 최하림, 강호무, 김성일, 김현, 김치수, 염무웅 등과, 四季의 김화영, 황동규, 정현종, 박이도, 김주연등이 주축이 되고, 거기에 박상륭, 박태순, 이청준, 홍성원, 이성부, 이승훈, 김병익 등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평론가가 참여하였다. 임영봉(2007;397)에 따르면, 이들 동인지의 발간을, 독자적인 문학을 표현하고자 하는 4.19세대들이 기성 문단의 질서를 허물어뜨리고 한국문학의 새 주체로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1962년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散文時代 잡지를 발간한 산문 동인 모임과, 1966년 전주 가림출판사에서 四季를 발간한 시 동인들이, 더 큰 동인지인 1968년 발간한 68문학으로 발전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잡지인 문학과 지성의 모태가 된 것이다. 전주에서 발간된 1962년 散文時代, 1966년 四季가 탄생하기까지는 당대의 젊은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의 치열한 문학적 삶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전주에서 출판을 하던 출판인들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선배들의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새롭게 재현되길 기대한다. /이태영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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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9 20:28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과 전주의 책판

△전국에서 유일하게 私版(사판)의 기록이 남아있는 전주 조선시대 전국에서 책을 찍을 때 만든 책판의 목록을 기록한 冊板目錄(책판목록)이 있다. 이 책판목록에서는 주로 관청에서 출판한 책판을 다루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1885년에 필사된 完營客舍冊板目錄(완영객사책판목록), 1778년경에 필사된 各道冊板目錄(각도책판목록), 1780년경 또는 1814년 이후 필사된 冊板錄(책판록) 등 몇 가지 책판목록에는 전주의 서점에서 출판한 책판의 목록을 全州私板(전주사판) 또는 私板(사판)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주의 경우에만 私板(사판)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 私板은 서점에서 책을 발간할 때 사용한 목판을 말하는 것이다. 1750년경에 쓰인 諸道冊板錄(제도책판록)에서는 구체적으로 南門外 私板(남문외 사판), 西門外 私板(서문외 사판)으로 표시하고 있다. 전주의 南門外는 남문밖이나 남밖으로 불렸고, 西門外는 서문밖으로 불렸다. 이 私板(사판)을 통하여, 이미 1700년대 초반에 전라도의 首府인 전주에 영리를 목적으로 사적인 출판을 하는 출판소가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책판 목록을 종합하면, 전주에서는 18세기에 이미 판매용으로 추정되는 책이 42종이 발간되었다. 家禮(가례), 講譜論語(강보논어), 講譜周易(강보주역), 九雲夢(구운몽), 論語大全(논어대전), 論語大全諺解(노어대전언해), 唐音(당음), 大學大全(대학대전), 大學大全諺解(대학대전언해), 東萊博議(동래박의), 童蒙先習(동몽선습), 杜律(두율), 禮記奎璧(예기규벽), 孟子大全(맹자대전), 孟子大全諺解(맹자대전언해), 史略(사략), 史要聚選(사요취선), 三經奎璧(삼경규벽), 三國志(삼국지), 三略(삼략), 喪禮抄(상례초), 書傳大全(서전대전), 書傳大全諺解(서전대전언해), 小學(소학), 小學大全諺解(소학대전언해), 詩傳大全(시전대전), 詩傳大全諺解(시전대전언해), 兒戱原覽(아희원람), 韻考(운고), 類合(유합), 剪燈新話(전등신화), 全韻玉篇(전운옥편), 周易大全(주역대전), 周易大全諺解(주역대전언해), 中庸大全(중용대전), 中庸大全諺解(중용대전언해), 中庸或問(중용혹문), 千字(천자), 草千字(초천자), 通鑑(통감), 寒喧箚錄(한훤차록), 訓義小學(훈의소학). △서계서포, 칠서방, 다가서포, 문명서관, 완흥사서포, 창남서관, 양책방 南門外(남문외)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출판소는 七書房(칠서방)이 해당될 것이다. 칠서방은 사서삼경을 찍어내 전국적으로 유명한 출판사이다. 전주 칠서방의 고무도장에는 全州 南門外 西天里/七書房/主 張在彦(전주 남문외 서천리/칠서방/주 장재언)으로 칠서방이 고무인의 주소에 南門外로 나오고 있다. 西門外(서문외)을 가리키는 서점으로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西溪書鋪(서계서포)를 들 수 있다. 이미 여러 책의 간기에서 西門外가 보인다. 서계서포에서 사용한 고무도장에 全州郡 西門外 石橋西邊/西溪書/主卓鐘佶(전주군 서문외 석교서변/서계서포/주 탁종길)이란 주소와 출판소, 주인 이름이 보인다. 少微家熟點校附音通鑑節要卷之十三 道光十一年(1831)辛卯八月日 西門外開板 崔永 喪禮初要, 光武七年(1903) 癸卯秋 完山西門外 重刊 일반적으로 판매용 책인 완판방각본의 시작은 童蒙先習(동몽선습)으로 보고 그 발간연도를 1714년으로 보고 있다. 刊記(간행기록)에 西門外라고 쓰인 책들은 대체로 서계서포에서 발행한 책으로 이해된다. 서계서포가 명시된 책들은 대체로 1800년대 초반과 중반에 많이 발간된 책들이다. 御定奎章全韻 西溪書鋪 1860년, 『簡牘精要』 西溪書鋪 1861년 전주의 최초의 서점인 서계서포에서는 1800년대부터 1911년까지 한글 고전소설인 화룡도, 조웅전, 유충열전, 심청전, 초한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열여춘향수절가, 이대봉전, 구운몽, 삼국지 등 17종의 고전소설을 찍어냈다. 이 서점에서 발간된 소설이 아닌 판매용 책은 21종에 이른다. 그리하여 광복 74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이 오른 소설은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 심청전, 토별가 등이다. 심청전 大韓光武十年丙午(1906) 孟春完西溪新刊 열여춘향슈졀가 完西溪書鋪 서계서포와 다가서포를 중심으로 발간된 완판방각본 한글고전소설은 서울의 경판본과 비교되어 전국적으로 팔리게 되었다. 특히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은 판소리계 소설이 중심이 되었고, 영웅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경판본과 비교하여 3배 정도의 분량이 많고 서사구조가 잘 짜여 있으며, 또한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 재미가 매우 풍부하였다. 전주 천변에 있던 칠서방에서는 七書(四書三經)를 비롯하여 32종의 판매용 책을 간행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七書 冊板은 1870년 전주의 河慶龍(하경룡)이 감영의 책판을 임대소장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全州府 河慶龍 藏板(전주부 하경룡 장판)의 간기를 갖는 책판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매우 유명한 책판이다. 칠서방은 서울의 ?東書館(회동서관)과 함께 大韓每日申報(1908년 07월 04일자)에 최신 신간 서적광고를 냈다. 칠서방은 1908. 6. 6.부터 1908. 7. 19까지 황성신문에 32차례의 서적 광고를 냈다. 20세기 초, 일제의 간섭으로 판권지를 붙이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출판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서점들은 서울, 대구 등 전국과 교류를 하는 매우 큰 출판사로 자리하고 있었다. 西溪書鋪 (서계서포, 탁종길, 1911), 多佳書鋪(다가서포, 양진태, 1916), 文明書館(문명서관, 양완득, 1911), 完興社書鋪(완흥사서포, 박경보, 1912), 昌南書館(창남서관, 장환순, 1916), 七書房(칠서방, 장환순, 1916), 梁冊房(양책방, 양승곤, 1932년) 전주가 교육의 도시로 일컬어진 것은 주로 희현당과 완판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현재 전주시, 전주역사박물관, 전주완판본문화관, 전북대학교 등에 보관된 완판본 책을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서계서포와 칠서방에서 발간한 책과 이 책방을 운영한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전주문화를 이야기하는 데 필수적인 문화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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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5 20:37

선친일기를 통해 100년 전 전주를 재조명

조그만 일기장 속에는 1916년 전주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한벽루와 다가산의 풍광을 가감 없이 기술하고 있다. 일기의 주인공은 진안 용담현에서 태어나 20살인 1916년에 전주농업학교에 입학한 이상래(1896~1979)학생이다. 일찍 진안 주천의 사립화동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오니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휴일이면 명승지인 오목대, 덕진운동장, 한벽당, 다가정 등을 친구들과 다니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긴다. 1916년 전주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간혹 사진이나 문서를 통하여 사료를 접하기도 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활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전주시에서는 전주 관련 기록물을 통한 전주정신을 찾기 위하여, 각종 사진, 문서, 박물류 등(1910년 이후)을 2017년부터 수집공모하게 된다. 그래서 2017년도 제1회 전주시기록물공모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전주시민의 많은 호응이 있었고 여기서 선친일기는 내용의 소중함을 인정받아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일기는 양도 많지 않고 기간도 1916년 5월부터 8월까지 약 3개월만 기록하고 있다. 지질도 좋지 않다. 만지면 부서지는 갱지에 가는 세필로 썼다. 그리고 625사변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일기장의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것이 어떻게 자료를 인정받게 되었을까. 바로 선친일기 속에는 전주의 자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학교생활도 군사교육이나 다름없는 교육이라, 모든 기록에 한글을 쓰면 제재를 당하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국한문과 일본어를 섞여 쓴 것이다. 특히 국어를 쓸 때도 語라 쓰고 있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임금이 나라안에 있지 못하고 나라 밖에 있는 것을 이체자로 쓴 것이다. 선친일기 속에는 한벽당에 있는 서당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 서당 얘기를 하면 먼 과거의 얘기 갖지만 이 서당은 금재 최병심(1874~1957)이 타계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 일기 속에는 서당에 관한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1916년 6월 4일 일기를 옮겨 본다. 돌아오는 길에 한벽루 근처에 있는 최씨의 서재에 들러 구경하였다. 사방인 대밭인 가운데 2-3동의 초가가 있고 동자 5,6명과 갓을 쓴 학동 6,7명이 소매가 넓은 도복을 입고 단정히 앉아 독서하고 마당에는 해당화 백작약 등의 꽃이 교태를 부리며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죽간(竹竿) 한 가지를 주인에게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일기 속에서 말한 최씨서재는 금재 최병심의 서당이다. 바로 이곳은 한벽당 옆 최담유허비가 있는 교동 산 7-9번지이다. 이곳은 사방이 대나무밭이였고 초가집이 3채 있었다고 금재의 손자 최동호씨도 증언한다. 너무나 일기장과 일치한다. 서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바로 옆에 흐르는 옥류천은 물이 맑아 이 물로 콩나물을 길렀다고 전한다. 바로 이곳은 또 전라도의 최고의 명필인 이삼만이 살던 집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바위에 암각서가 많이 현존하는데 바로 이것이 이삼만의 글씨이다. 금재 최병심은 이곳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된다는 의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육의 목표가 뚜렷했다. 한 사람이라도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갓을 쓰고 학생들에게 도복을 입혀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전라선철도를 설계할 때 한벽당으로 설계하여 철거의 위기에 처하자 금재는 끝까지 투쟁하여 한벽굴을 뚫게 한 장본인이다. 과거 학계에서는 왕조실록이나 관에서 발행한 고문서는 역사성을 인정하지만, 지역의 역사는 향토사로 인정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전주 분조를 기록한 죽계일기나 고종 때 완산동에 살았던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공모에 선정된 선친일기는 비록 3개월의 짧은 기록이지만 전주시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전주-이리간 경편철도 기록이 나오고, 덕진공원의 운동장에서 전주구락부 주최로 전국자전거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사로운 일기가 역사가 될 수도 없다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의 한토막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친일기를 통해 1916년도 전주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소중한 자료를 사장하지 않고 후손들이 번역하여 전주시민에게 제공까지 하고 있다. 이 선친일기는 출품자의 관점에서 이름을 붙여졌지만 이제는 전주시민의 일기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일기를 쓴 이상래의 호를 따서 시강일기로 불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일기 속에는 전주의 많은 인류학적 문화코드가 숨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예를 들어 다가정에서 제1보통학교와 제 2보통학교가 운동회가 벌어지는 광경이 있다. 이 사실을 통하여 두 학교가 왜 본 학교에서 운동회를 안 하고 다가산 아래에 와서 연합운동회를 했는가도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시강일기에는 전주에서 벌어지는 사월 초팔일의 관등행사, 삼천동의 농장견학, 누에 키우기 실습, 전주단오절 행사 등을 기술하고 있어 좀 더 세심한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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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1 20:36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삶과 죽음을 비춰보는 종교 기록

최근 전동성당에서 이색적인 사진 출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앙인이 담는 전동성당의 사진이 있을 것이고, 조금 특별하게는 여행으로 한옥마을에 방문하여 일상의 시간과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남기는 사진이 있다. 그런데 종교적 신념이나 일상적 방문과는 색다르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들로 구성된 사진가들의 출사가 130년 동안 한자리에 우뚝선 전동성당의 상징적 면모를 사진과 기록으로 담아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130주년을 맞이한 전동성당은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사진과 기록을 공모하고 있는데, 현대의 사진뿐 아니라 장롱과 다락에서 나온 몇몇 기록은 그 동안 미처 몰랐던 것이어서, 향후 많은 이야기를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가령, 전동성당을 처음 지은 보두네 신부에 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데,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메달과 죽음을 얼마 앞두고 쓴 편지 등이 이번 공모를 통해 확인되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종교유물과 종교기록은 그 자체로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고 역사적 상징성도 크기 때문에 박물관과 기록원의 콘텐츠를 구성하는 데도 비중이 크다. 또한 그것들은 시대와 궤를 같이하고 있어서, 종교유물과 기록물이 시대사와 생활사를 손색없이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직지이다. 직지를 통해서 당시의 불교사상은 물론, 한지문화나 인쇄문화와 같은 서지학적인 차원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기록은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종교유물과 종교기록이 훼손과 망실의 속도에 있어서도 빠르다. 더러는 너무나 소중하기에 가지고 있던 사람의 죽음과 동시에 태워져 없어지거나, 더러는 너무나 쓸모없다고 여겨지기에 버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종교유물과 종교기록을 모으려는 시도가 결코 이른 감이 있는 것도 아니며, 솔직히는 늦었지만 지금이 또한 적기라는 마음으로 시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주시에서 오는 20일부터 주최하는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의 특별 주제로 시민의 삶 속에 종교문화 기록을 발굴하고 모으려는 의도가 뜻깊다. 혹자는 종교에서 수집하면 될 일인데, 구태여 전주가 나서서 할 필요까지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직지가 종교유산이자 동시에 국가유산인 것처럼, 어떤 특정인이나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두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설령 그것이 수집된 이후에도 기증으로서만이 아니라 기탁의 맥락에서 관리하고, 언제든지 해당 종교에서 필요로 할 경우에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두의 자산인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기록원이 그렇게 종교기록을 보전하고, 국학진흥원의 유교책판이 그러하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전주시에서 전주정신의숲 프로젝트를 통해 민간기록물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관련된 유물과 기록이 상당수 확인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종교인이 이리저리 이사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최종적으로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모든 것을 고물상에 넘기거나 없애려고 하였던 것도 있다. 전주정신의숲에 기탁된 그것들은 몇 차례 전시에서도 선보여졌고, 몇 점은 유일본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아 소중하게 보전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견해가 담겨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종교계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설립될 때부터의 기록과 사진을 20여권의 앨범에 간직하고 있던 교사의 기탁 사연도 있다. 어느 날 명을 달리하면서 앨범들도 사후 정리 과정에서 온 데 사라졌다가 소장자의 가족이 그것만큼은 꼭 간직하고 있으라고 했다면서 전주정신의숲에 기탁하였다. 그 앨범에는 예전의 학교시설, 종교시설은 물론 전주의 근현대 발자취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것으로 가득했다. 자칫 없어질 수 있던 것이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무소유의 정신이 짙게 깔린 까닭일까? 우리나라 유산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불교유물과 불교기록의 경우, 훼손과 망실의 속도는 훨씬 심하다. 전주와 전북의 근대현대 기록과 사진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한 스님은 당신이 그 중요성을 아는 만큼, 불교계에서도 이런 마음들이 널리 퍼져 많은 기록들이 다시금 되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목이 쉬도록 한다. 이제 그것은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해당하는 일일 것이기에, 이번 종교문화 분야의 기록공모가 기대된다. 꼭 신앙인이나 종교인이 아니어도, 졸업여행에서건 수학여행에서건 어김없이 사진 한 장 정도는 담은 기억을 누구나 가진 전동성당, 금산사, 서문교회, 원불교 교당의 모습은 물론이고, 민족종교의 그 기록이 어느 누군가의 기억만이 아니라 전주의 기억이 되고 모두의 기억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자산인지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만큼 또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가지게 될 것이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빛깔을 담아낼 수 있는 이들이 그려내는 전동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누구나 으레 포토 존에서 담아내는 전동성당이 아닌 종에 얽히거나 이층 회랑과 지하 주추에 담긴 이야기를 간직한 기록과 사진은 무엇을 또 말할까? 이번 출사에 나온 이들이 한결 같이 다음에는 일찍부터 준비해서 금산사의 사계를 담으면 좋겠다고 하듯이, 전주의 종교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자료들이 담고 차고 넘치게 나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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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4 20:56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지역 3.1운동과 민간 기록물

우리 민족의 독립은 연합국의 승리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일본패망후 연합국측이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2019년 올해는 그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올해는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독립 쟁취에 관한 민족적 자신감과 함께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해가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거족적 운동이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무단통치를 접고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으며, 학생들은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펼쳤다. 동시에 평양 의주 원산 등 북쪽의 주요도시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중남부지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2만 1천매 정도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전주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 두가지 루트이다. 그 하나는 천도교측 인종익이 2월 28일 열차를 타고 다음날 3월 1일 이리에 이르러 전주행 경편철도를 타고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여 천도교 전주교구로 가서 독립선언서 1천 8백매를 전달하였다. 3월 2일 전주교구는 관할인 임실,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의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전주부내 상관, 소양 등 지역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 한 루트는 기전학교 출신으로 천안 양대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임영신이 기독교계 책임자인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전주에 전달하였다. 임영신은 흰 상복을 입고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을 찾았고, 이돈수장로는 독립선언서를 서문교회 김인전목사와 청년의사 신일용에게 전달하였다.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 천도교 박태련집, 신흥학교 등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전주지역 만세운동은 3월 13일 정오경 남문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첫 시위 날자를 12일로 보는 기록도 있다. 3월 2일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음에도 13일에 가서야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3일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일경에 발견되어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3월 13일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일어난 첫 번째 만세운동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공립보통학교 학생, 천도교도들을 주축으로 밤 11시까지 다섯차례 이어졌다. 참여인원은 기록에 따라 1만명에서 수천명, 150명까지 차이가 크다. 150명은 전라북도장관이 보고한 것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만세운동에 전주권번의 예기조합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기생 중 4명이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3.1운동은 천대받던 머슴, 기생들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3월 14일에 3시경에 다시 만세시위가 있었다. 완산다리 부근으로부터 다수의 학생들을 앞세우고 천여명의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시내 중심인 식산은행(산업은행)까지 진출하였다.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 1개 중대가 14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시내의 만세는 잦아들었지만 전주 외곽 초포, 봉동, 삼례 등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4월초까지 이어졌다. 4월 3일 김봉근은 일장기를 달고 장사를 하고 있는 남준식의 가게로 찾아가 전 조선의 상인들이 독립을 부르짖고 철시 중임에도 일본의 국기를 달고 영업하다니 묵과할 수 없다고 힐난하고 일장기를 강제로 떼려고 하였다. 구금된 기전여학생들은 단식으로 저항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 의하면 전라북도의 3.1운동 시위 참가 연인원은 총 121회에 17만 5천명이다. 횟수가 가장 많은 곳은 전주와 군산 21회, 남원이 19회이다. 참여인원은 전주와 남원이 각각 5만명, 군산이 2만 5천 8백명, 정읍이 1만 8천명이다. 사망자는 남원이 34명, 옥구 32명, 군산 21명, 익산 16명이다. 전주는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종자는 남원이 가장 많아서 142명이고 그 다음이 익산으로 50명이며, 전주는 15명으로 적은 편에 든다. 피해 인원은 전주가 434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군산으로 145명이다. 전주는 시위횟수와 참여인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망자는 없고 실종자도 적은 편이다. 이는 곧 전주 시위가 다소 평화적이고 과격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주시는 출판과 기록의 도시로 매년 민간 기록물을 공모 수집하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해 2018년에는 3.1운동 관련 기록물을 수집하였다. 3.1운동 기록물들이 귀해 많은 기록물들이 수집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꽃심상을 받은 민족선언서는 족자 형태로 길이가 1m에 이른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3.1절을 맞아 선포한 것으로, 우리는 삼일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정기를 다시 진흥함으로써 남북통일을 맹서하고 이를 실천완수하기 위하여 이에 민족선언을 선포하노라.라고 시작된다. 삼일운동 정신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듯이, 결연한 정신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것으로 한국전쟁 중의 삼일절을 읽어볼 수 있다. 풍류상을 받은 『도왜실기(屠倭實記)』는 1932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김구 선생이 약술하고 1946년 엄항섭이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내용도 대단하지만 제일 뒤에 독립선언서를 싣고 거기에 부기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적 공적을 남긴 기미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라고 크게 쓰고, 작은 글씨로 이것이 28년후 조선해방의 원동력이 되었으니 씨앗은 반드시 뿌려야 할 것이요 뿌려진 씨앗은 결국에 결실이 되고만 다는 교훈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위대하도다 33인의 선열이여!라고 써놓았다. 대동상을 받은 31운동 태극기는 19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날의 정취를 담아 삼일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올곧음상을 수상한 유관순 표지 숙제장은 어렸을 때 많이 본 공책이다. 삼일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읽어 볼 수 있는 정겨운 노트이다. 사라지는 민간 소장 기록물을 수집 보존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이다. 특히 기록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주에서 민간 기록물을 수집해 보존해 간다는 것은 더욱 뜻있는 일이다. 『도왜실기』 에 3.1운동과 광복을 두고 씨는 뿌려야 하고 뿌려진 씨앗은 결실을 맺는다고 한 것처럼 전주에서 민간기록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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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8 20:19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소중하지 않은 기록물은 없다

전주시와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2016년부터 시작한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반가운 책들이 모였다. 공공기관기업단체축제의 역사를 집대성한 백서사사년사도록 부류의 책이다. 이 책들은 그 단체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한 단체(분야)의 삶과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들은 지역의 생태를 온전하게 세우는 주춧돌이다. 게다가 이런 책은 대부분 비매품으로 발간돼 서점에서 살 수 없고, 해당 지역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렵다. 책을 발간한 목적이 보존하고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한 것이기에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더 크다. 기증자는 김영순김진화문순옥이만호이영희인춘후임주희채수현최현숙 씨. 전주에 살거나 부모님이 전주에 살았던 이들로, 대개 이런 책도 받아주나요?라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린 귀한 인연이다. △행간에 숨은 지역 이야기 『신흥 40년사』(2008)는 1968년 전주시 고사동 한복판에서 신흥공업사로 시작한 ㈜신흥콘크리트가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도전과 개척, 시련과 극복, 끈기와 창조의 역사가 빼곡하다. 회사의 발자취를 넘어 60년대 이후 전주전북의 산업 동향과 국내 콘크리트 산업사가 4백여 쪽에 수록돼 있다. 경영진과 20년 이상 장기근속자, 전현직 공장장지게차운전자영업과장현장노동자 50여 명의 인터뷰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명인 신흥이 창업주(이교성)의 모교인 신흥고등학교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6070년대 벽돌과 시멘트를 배달하는 말 구루마(말이 끌던 수레)가 전주 시내를 활보했다는 것도 책을 펼치면 알게 된다. 『전주교도소 100년사』(2008)에는 1908년 경원동(현 전북대 평생교육원)에 있던 광주감옥 전주분감부터 전주감옥, 전주형무소, 전주교도소에 이르는 100년의 역사가 담겼다. 교도행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교정원로 초청 간담회에 실린 증언들은 전주의 역사문화 콘텐츠로 스토리텔링 해도 좋을 만큼 특별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빨치산 두목의 여인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임신한 것을 알고 대통령 특사로 감형된 이야기와 석전 황욱(18981993)이 유려한 붓글씨로 진정서를 써 살려낸 아들, 간첩죄로 수용된 조선의 마지막 황녀 이문용(19001987) 등이다. 이 백서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전주시에 기증되지 않았다면, 다시 펼쳐 살피지 않았다면 귀한 얘기들은 책 안쪽 깊숙이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전주향토지』(전주문화원1990)는 전주의 문화원형을 알 수 있는 귀한 내용이 가득하다. 책은 한 권이지만 낱낱이 풀면 일제강점기부터 풍남문전주교덕진연못대장정거리장날 등 전주의 옛 모습이 담긴 12장의 사진을 비롯해 1990년을 기준으로 한 전주 지명 풀이와 세시풍속과 특산물 등 도시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경험할 수 있다. 문화예술 관련 단체의 기록물은 다양한 사진과 글을 통해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이들의 생전 모습과 지역의 생활상까지 알게 돼 더 반갑다. 『전주대사습사』(1992)는 작고현존 명창들의 한 때가 있으며, 수상자의 거리행렬 사진 속 전주의 옛 시가지 정경도 볼 수 있다. 다시 챙겨 읽어야 할 이 땅의 명창 이야기도 꽤 많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그간의 예술경영 성과와 문화사업 경과를 기록한 『소리 10년, 예술 10년』(2010)은 사진작가 유백영 씨가 찍은 공연전시 사진들이 화사하다. 경영역사예술공간미래부록(기록)의 6부로 나뉜 책을 펼치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성장하며 겪은 녹록하지 않은 세월과 전북의 공연예술사가 일목요연하다. △함께 모여 높아지는 지역의 긍지 『전북연극사 100년』(전북연극협회2008)은 끈끈한 생명력을 가진 이 땅 연극의 뿌리를 간추려 엮은 책이다. 판소리의 창극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신재효(18121884)부터 1020년대 창극과 소인극 운동, 50년대 전북극예술협회, 6070년대 박동화와 창작극회, 8090년대 전주시립극단과 황토 등을 비롯해 2000년대 초반까지 전북 연극의 역사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촘촘하다. 『전북민예총 10년사』(2014)는 전북 문화예술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해온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10년의 기록이다. 2003년 창립 이후 전북의 예술 담론과 문화 경향의 흐름을 살피고, 예술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사유가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자료집』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다섯 권이 기증됐다. 그해 영화제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두툼한 이 책들은 10여 년 정도로 출판 연차가 짧고 전주국제영화제 사무실과 영화제 마니아들의 책장에 많이 꽂혀 있어 희소성이 적다. 하지만 전주와 관련된 도서가 모두 있을 것 같은 전주시립도서관과 전북대학교전주대학교 도서관에는 없다. 『2009 세계서예비엔날레 도록』이 몇 권 찾아지는 것과 비교하면 더 아쉽다. 전주를 대표하는 축제의 온전한 역사를 오래 지키고 싶다면 해당 단체뿐 아니라 지역 구성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전주교도소 100년사』와 『전주향토지』에는 일제강점기 호남 의병장 16명이 찍힌 사진이 수록돼 있다. 같은 사진이지만, 하나는 해상도가 좋은 대신 사진 설명이 1910년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전주분감에 투옥된 호남 의병장들로 짧다. 다른 하나는 사진의 질은 떨어져도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되었다.는 설명과 의병장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자세히 서술돼 있다. 여러 사료를 비교검토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예다. 『전북예총사』(2011)는 1962년 창립부터 2010년까지 전북 문화예술사 50년의 기록이다. 선기현 회장은 발간사에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자료를 찾는 일의 고단함을 꺼냈고, 지난날 우리의 지역문화예술은 우수성과 뛰어난 창조성에도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지 못하고 장본인들과 함께 묻혀버리는 일이 많았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시민과 더불어 추진하려는 마음이 이것이다. △흔할 때부터 챙겨야 한다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찢기고 퇴색되고 버려지면서 사람들과 멀어지다가 어느 심지 깊은 이의 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살아남은 것이 희귀본이다.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이란 관용구는 옆에 있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수집 공모전과 별도의 기증자들에게 받은 도서는 책을 좋아하는 이의 책장에 오래 꽂혀 있거나 애호가들이 아껴 놓은 책이다. 헌책방에 가끔 노출되기도 하며, 간간이 도내 도서관 귀퉁이에도 있다. 지자체나 해당 기관의 책장에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책이다. 소중하지 않은 기록물은 없다. 흔한 것도 귀하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추억은 아련할 뿐이다. 기록된 것이 먼저 남는다. 기록물을 챙기는 손길이 분주할 때, 이 땅의 역사는 더 당당해진다. /최기우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부위원장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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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1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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