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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전영천 (주)다오코리아 대표이사 "코로나19, 스포츠 전 분야에 친환경 변화 기폭제 될 것"

눈길 함부로 걷지 마라. 네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김구가 즐겨 읊조렸다는 시의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 증권가에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또한 이 말을 인용해 통합 미래에셋대우 출범을 앞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선구자는 그만큼 어려운 거다. 어느 분야에서건 첫 길을 가는 자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필자가 만나 본 전영천(59)씨가 어쩌면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장수 산골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북체육중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도인의 길에 들어선 그는 선수로서, 교단에 선 교육자겸 지도자로서, 특히 심판으로서 엄청난 성과를 일궈냈다. 대개의 경우 그쯤되면 해외에 다니고, 골프장 드나들면서 잘먹고 잘 살면서 만족할 법도 한데 그는 또다시 기업가로 변신, 체육환경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유도계의 포청천으로 유명한 그를 만나 그간의 삶의 궤적과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오랜만입니다. 코로나 19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데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예순 살을 일컬어 이순(耳順)이라고 하는데 이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돼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죠(하하~) 살다보면 좋은 때도, 어려운 때도 있는 법인데 요즘 살기 편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저 역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만, 묵묵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강타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유독 스포츠와 경제 분야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체육인 출신 기업인이기에 남보다 훨씬 코로나 사태를 보는 관점이 다를 듯 합니다. 올해 초 국내에서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때만 해도 저는 길어봤자 여름이면 다 풀리겠지 생각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달렸겠지만) 최소 내년말까지는 뚜렷한 돌파구가 없어보입니다. 지금은 체육계 일선 현장에서 한발 물러선 상태에서 기업활동에 전념하고 있는데 주변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죽겠다고 합니다. 저 역시 더 추운 겨울이 올것으로 보고 마른 수건도 짠다는 각오로 경영에 임하면서 또 한편으론 향후 가치창출을 할 수 있는 분야에 과감히 투자할 생각입니다. △유도 선수와 지도자, 심판으로는 매우 큰 성과를 이루셨는데, 기업인으로선 스스로 어느 정도 점수를 주십니까. 뭐든 쉬운게 없죠.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먹고 사는것과 관련된 경제 활동인것 같습니다. 지도자 시절, 특히 심판을 하면서 참 어렵다고 느꼈는데 기업인은 솔직히 더 어렵네요. 친환경 유도매트로 특허를 얻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등 뭔가 좀 잘 된다 싶었는데 올림픽이나 각종 국제대회는 연기되고 전국체전을 비롯한 국내대회 또한 취소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이제 친환경 자재나 미세먼지 감소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등장했기에 학교나 아파트 등지에 저희가 생산하는 친환경 자재가 폭발적인 수요를 가져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유도인으로서 회고해볼까요 저는 장수읍이 고향입니다. 전북체고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유도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후 유도 명문인 용인대와 상무에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원광대 대학원, 경상대 대학원도 졸업했죠. 전북체고 시절 무릎에 큰 부상을 입은게 화근이 돼 훗날 용인대와 상무에서 국가대표까지 지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우석고에서 20년 넘게 교편 생활을 하면서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고창군청 감독을 맡아 선수를 길러냈는데요, 우석고에서부터 지도했던 김성민 선수가 도쿄 그랜드슬램 3연패를 하는 걸 지켜봤죠. 유도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유도 경기의 하일라이트인 헤비급 결승전 심판을 맡았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죠. 선수로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코치와 감독 등 지도자로서, 또 심판으로서는 과분한 영광을 입었습니다. △유도에 관한 한 종주권을 지닌 일본에서 크게 자존심이 상했을것 같습니다만... 두말할 나위가 없죠. 자신들이 유도를 전세계에 보급한 선구자로 여기고 있는 일본 유도인들로서는 한국인 심판이 아시아인 최초로 올림픽 헤비급 결승전 무대에 서는 장면은 쉽게 넘길 수 없었을 겁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후배 유도인들이 저보다 한걸을 더 나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전북 출신 유도인이라면 더 말할것도 없겠죠. △아이디어 하나로 벤처기업을 창업하면서 기업으로 변신했다죠? 매일 매트위에서 뒹굴며 생활하던 중 일선 학교 현장의 유해물품이 심각하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고 친환경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친환경매트는 특히 아파트 등의 층간소음을 차단하는 효과도 매우 컸습니다.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 대회때 유도경기장이 가장 쾌적하고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선 학교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에 유도복이나 유도 매트를 무상으로 지원하는 등 힘 닿는대로 나서고 있습니다. △향후 계획도 뚜렷할 것 같습니다. 생활매트 분야를 별도로 마케팅 법인을 설립하고 아파트를 비롯한 일반 가정에 어울리는 탄성을 갖춘 생활소비재 브랜드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생각입니다. 특히 스포츠 매트가 가잔 탄성과 안정함을 생활매트로도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내후년 전북에서 열리는 아태마스터스 대회를 계기로 도내 경기장 주변이 완벽하게 혁신을 기반으로 한 친환경자재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도내 자치단체의 큰 관심도 기대합니다. 무예 스포츠매트 전문기업을 설립했는데 작금의 안전한 경기 환경에서 한단계 더 올라가 체육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기업으로 키우겠습니다. ◇ 전영천 다오코리아 대표는 비인기 종목인 유도의 경우 선수로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않아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지게 마련이다. 축구, 야구 등 극소수 구기종목 스타 몇명을 제외하고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더라도 중고교에서 교사만 돼도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인해 선수로서 대성하지 못했기에 전영천의 삶은 더욱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987년 유도부가 창단됐던 우석고에서 초대 감독교사를 맡으면서 유도인 전영천의 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창단 이듬해부터 전국 4강대열에 팀을 올려놨고, 수없이 많은 전북 출신 유도인을 길러냈기 때문이다. 고창군청 감독을 맡으면서 이미 전국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늘 2보전진을 위해 1보후퇴를 하는 등 관용의 리더십을 선보였다. 유도계의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을만큼 모든 외압을 물리치고 공정성 하나를 지켜낸 그는 20년 넘게 크고작은 대회의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국제A급대회 최다 심판 기록과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올림픽 헤비급 결승전 심판을 맡는 영광을 누렸다. 바이전주우수업체협의회 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중인 그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 상품에 대한 홍보와 판로개척 활동을 돕고 있다. 진흙밭에 묻혀있던 선수를 발굴해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냈듯 유망 업체들을 스타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도 명감독에서 이젠 중소기업 명감독으로 변신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를통해 지역사회에 작은 주춧돌 하나라도 놓겠다는 그의 행보가 더욱 믿음직해 보인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 기획
  • 위병기
  • 2020.09.14 16:16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한국무용가 애미킴 "전주 무대 바탕으로 한국춤의 세계화 이룰 터"

한국무용가 애미킴(43)은 전주를 무대로 한국춤의 세계화를 꿈꾼다. 단단한 내공을 바탕으로 해서다. 30대 초반 무용단을 이끌고 전국무용제에 전북대표로 출전해 금상을 수상하며 이미 실력을 검증받았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무용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넓혔다. 그의 춤 진수는 지난 2017년 자신이 대표로 있는 애미아트에서 발표한 창작무용 백제 아리랑에서 보여줬다. 이런 춤을 공짜로 볼 수 없다고 자발적인 후원회까지 결성됐다. 애미킴의 공연은 이 때부터 자리예약제와 유료 공연으로 진행됐다.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유료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전북무용계에 신선한 바람이었다. 젊은 춤꾼들의 설 무대가 갈수록 좁아지는 엄혹한 현실에서 애미킴이 한국무용의 미래를 어떻게 펼쳐나갈지 궁금했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2017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올린 백제 아리랑작품이 무용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떻게 만들어졌나. 대본부터 안무, 공연까지 1인 3역을 한 창작무용이다. 아버지 금파춤부터 중국무용, 내 춤을 녹여낸 작품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세계에 흐른 찬란했던 백제의 유산을 전주의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사설 무용단으로서 대작을 올리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당시 무대예술지원 사업을 받아 무대에 올렸는데, 지원비(1500만원)로 턱없이 부족해 적금을 깨서 제작비에 보탰다. 그만큼 작품에 열정을 쏟았다. 중국틱하지 않느냐, 역사적 허구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하게 만든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1시간 만에 긴 여행을 다녀온 느낌을 받았고, 춤으로 어떻게 그리 무한한 상상력과 감동을 줄 수 있느냐는 말에 힘이 났다. -백제를 소재로, 전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설 레퍼토리로도 가능할 것 같은데. 완성도를 더 높여 재공연, 순회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여력이 되지 못했다. 백제문화권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사실 공연 후 입소문을 타고 공주시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공연을 위해 최소 5000만원 정도 비용이 든다고 했더니 고개를 돌리더라. 고향인 전주를 거점으로 한 전주만의 색깔을 가진 전주춤으로 시작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작품인데, 오히려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웃음) -부친인 금파 선생의 춤을 모태로 하면서 창작무용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두 분야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금파춤보존회 이사장으로서 금파춤 보존과 재해석 작업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애미아트 대표로서는 창의적인 춤으로 글로벌을 지향하고 있다. 모두 다 중요한 과제며,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무용의 세계화에 관심이 큰 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8일 금파춤보존회 주최로 마련한 풍남춤락페스티벌 국제안무가전도 그 일환이다. 2006년 출발한 이 페스티벌은 작년부터 국제전으로 바꿨다. 인터넷 등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홍보해서 여러 팀들이 참여 의사를 나타냈으나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본선에 오른 팀마저 경선에 나오지 못해 아쉬웠다. 중국 유학 때 만난 중국 무용가들도 한국춤의 국제화에 든든한 응원군이다. 애미아트 차이나로 불릴 만큼 끈끈하게 연결돼 있고, 실제 여러 작품들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무용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 여러 나라 무대에 올리는 작업도 필요할 것 같은데. 통역이 필요 없는 언어가 춤이다. 국제무용제 같은 곳에 나가서 우리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 춤을 보고 초청하고 싶다는 단체도 있어 기회가 닿으면 해외페스티벌 무대에 나설 생각이다. -젊은 춤꾼들이 설 무대가 없어 무용예술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현실은 어떤가. 일반인들의 무용에 대한 관심도가 아주 낮다. 공연 관람객이라야 무용인이나 지인 정도다. 체면치레 관객이다. 대학의 무용학과가 폐지되고, 학교 졸업 후 전공을 살릴 길도 많지 않다. 휘트니스 강사, 요가 강사로 생계를 꾸리는 현실에서 무용의 앞날이 어둡다. -전북의 경우 무형문화재도 상대적으로 많이 있고, 전통무용 공연도 활발하지 않나. 원로 무용인들은 탄탄하다. 그걸 받쳐줄 젊은 세대 무용인이 없다. 무형문화재만 하더라도 나이를 따진다. 무용경력이나 실력, 가치 등을 바라보지 않는다. 변질되기 전에 작품을 복원해서 전승 발전시키는 게 문화재 지정의 목적일 텐데 그 취지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또 전주가 전통을 중시하는 만큼 전주를 소재로 한 창작무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젊은 춤꾼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야 지역의 무용도 발전할 수 있고 전통춤도 살릴 수 있지 않겠나. -백제아리랑 작품도 그렇지만, 전주 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큰 것 같다. 나의 춤 뿌리인 전주를 어떻게 춤으로 표현할까 항상 고민한다. 복원된 전라감영을 소재로 한 최근 한 무대에 오른 작품을 보면서 솔직히 너무 속상했다. 전통 춤도, 창작 춤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다. 백제아리랑은 큰 규모의 작품이기에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소수 인원으로, 혼자라도 전주를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코로나19로 무대활동이 막혔는데. 올해 중국에서공부 잘 했다고, 전주에서 공부 마치고 왔다고 각각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었는데 준비 중에 코로나를 만났다. 내년쯤 개인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 발표회는 그동안 내가 공부해온 전통무용, 신무용, 민족무용, 창작 무용을 망라할 계획이다. 또 전북문화관광재단의 공연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동화를 춤으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한국무용과 발레 등을 현대무용단과 협업으로 진행한다. 코로나 때문에 야외 행사가 어려워 제작된 내용을 유튜브로 공개할 예정이다. -앞으로 포부는. 한국춤이 세계에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유학을 마친 뒤 전주로 돌아와서 외국 무용가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외국 무용가들 중 코로나 이후 자신들과 동행해줄 수 있느냐는 제안도 받았다. 예술 인지도가 높은 나라의 큰 페스티벌에 한국춤이 소개된 적이 없는 데 내 춤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 애미 킴은 -전통무용과 창작무용 넘나드는팔색조 -금파춤부터 최승희춤, 애미스타일 춤까지 애미의 무대는 음악과 사람, 춤이 하나가 된다. 관객을 홀린다고나 할까. 살풀이 12분짜리 공연이 1분처럼 금세 지나갔다. 작년 국제춤페스티벌에 참가한 중국에서 온 무용가들이 페스티벌 개막공연 작품인 애미킴의 호적춤살풀이를 보고 천상의 춤 같다고 극찬했다. 고요하면서도 심금을 울린 마력이 애미 춤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7월 김제 청운사에서 진행된 코로나19 희생자 추모제에서도 애미 춤은 마력을 보여줬다. 본인은 스스로 감정대로 몸짓했는데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사납고 야무진 평소 무대와 달리 관객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힐링 춤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애미를 보고 팔색조라는 평이 따른다. 전통무용을 할 때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원숙함으로꼭 느네 아버지다는 평가가 따르고, 창작무용을 할 때는 과감한 변신으로 또다른 애미가 나온다. 살풀이 공연만 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의 무대가 다르고, 매번 새로운 느낌을 던진다. 애미킴의 아버지는 전북 무용을 개척한 금파 김조균 선생이고, 어머니 역시 금파의 춤 동반자로 무용협회 전북지부장을 지낸 김숙 선생이다. 오빠인 김무철씨는 한량무 전북무형문화재 보유자다. 무용가 집안에서 태어난 애미가 춤꾼으로 성장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3~4살 유치원 때부터 춤을 접했으며, 6살 때 모습이 공연 팸플릿에 등장한다. 38년째 춤과 살아온 셈이다. 학교 시절(전북사대부고-경희대) 각종 학생무용제를 석권했고, 32세 때 최연소 전국무용제 금상을 거머쥐면서 안무자 연령 제한이 만들어지게도 했다. 금파 작고 전인 20세까지 선친으로부터 춤 기본과 전통춤을 배우면서 한국춤을 정립했고, 그 후 무용단을 다니면서 바깥춤(창작춤)에 눈을 떴으며, 한국무용의 전설인 최승희에 꽂혀 신무용을 익혔다. 최승희 춤을 배운 재일교포 백홍선으로부터 3년여간 최승희 주요 작품을 사사한 애미는 최승희의 보살춤과 무당춤을 발표해 한국 무용계 주목을 받기도 했다. 중국 유학을 통해 중국 여러 민족의 춤을 익힘으로써 그의 춤 레퍼토리가 다양해졌고, 춤세계 또한 그만큼 넓어졌다. 그가 중국에서 받은 박사 학위 논문은 <한국궁중무 학연화대처용무의 합설 연구>. 한중문화의 연관성을 조명하며 한국궁중무에 담긴 정치사회적 현상과 의미를 분석한 논문이다. 세계적으로 풀어내고 연구할 수 있는 무용기호학을 동원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왕성한 활동을 꿈꿨던 그에게 코로나19는 여러모로 악재다. 춤추고 가르치고 작품을 만드는 게 사실상 올 스톱되면서다. 유학 전 그가 이끌었던 애미아트가 잠정적으로 해체된 상태다. 중국 강의도 코로나에 막혔다.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에 이제 그가 변화로 답할 때다. 그는 자신의 춤과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유튜버 진출도 고려중이란다. 지금도 피터 팬의 삶을 꿈꿉니다. 세상에 찌들거나 또다른 생각을 하면 재미있는 작품, 순수한 작품이나 나오기 어렵지요. 동화 속마음으로 사회 돌아보고 삶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은데, 철들지 말아야 할 텐데, 코로나가 나오면서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철이 드는 것 같아 두려워요. /김원용 사회문화교육 에디터

  • 기획
  • 김원용
  • 2020.08.31 16:48

[에디터가 만난 사람] 퓨얼셀랩스 김태영 대표이사 "우리미래 수소연료전지에 달렸다"

차량기반 수소연료 전지로는 국내 유일한 기업인 퓨얼셀랩스 김태영 대표가 수소연료전지의 미래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오세림 기자 수소 연료전지는 200여 년 전 발명된 이래 수소전기차와 우주정거장 등에 사용됐으나 그 특성상 생산이나 운반, 저장이 매우 어렵다. 현대차나 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들이 수소연료전지 패권을 잡기위해 뛰는 가운데 정부도 지난해 수소전기차와 연료전지를 기반으로 세계최고 수준의 수소시대를 선도하겠다는 소위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며칠전 전주에 1호 수소시내버스가 등장하면서 도민들도 수소 경제에 눈길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도내 한 스타트업이 2시간 넘게 체공가능한 수소연로전지 드론을 개발,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부안 신재생에너지센터에 입주해 있는 (주)퓨얼셀랩스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김태영(40) 대표이사를 만나 그간의 추진 경위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먼저 퓨얼셀렙스는 일반인에게 좀 생소한데 어떤 회사입니까. 수소연료전지 스타트업 기업인 퓨얼셀랩스는 연료전지 파워팩을 전문으로 설계하는 엔지니어링 회사입니다. 연료전지는 수소를 직접 연료로 활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전기화학적 변환장치인데요, 우리는 공랭식 소형 연료전지 파워팩 (3 kW급 이하) 및 수냉식 대형 연료전지 파워팩 (80 kW급 이하)을 직접 설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형 연료전지 파워팩을 활용해 6.5 kg의 임무장비를 달고 80분 연속 비행이 가능한 연료전지 드론과, 대형 연료전지 파워팩을 활용한 물건 배송이 가능한 자율주행 기반의 스케이트 보드형 자동차 플랫폼 자동차 하부 샤시 부분에 연료전지 파워팩과 수소용기를 결합한 스케이트 보드형 타입 부분과 그 위에 캐빈을 탑재하여 물건을 이송할 수 있는 분리형 자동차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선정한 BIG3분야 중소벤처기업 혁신성장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됐죠? 3년간 135억원 규모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됐는데요, 스케이트보드 타입의 연료전지 플랫폼(F-Platform)으로 차량의 출력 부분만 담당하게 될 언더바디모듈로써 용도에 맞게 바디 위쪽 부분에 다양한 형태의 캐빈이 탈장착 될 수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분리형 모듈에 대한 연구가 많은 기업들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제안한 플랫폼 타입은 기존 이차전지 기반이 아닌, 연료전지로 제안된 타입이며 전 세계 최초로 제안된 컨셉입니다. 스케이트보드 타입의 소형전기차량은 도심지내 무인배송에 적합한 물류 운반 부분에 처음 도입될 계획입니다. 2021년 말까지 시제품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며 2023년에 최종 제품을 판매할 계획입니다. △여건이 좋은 수도권을 떠나 왜 부안에서 창업했는지 궁금합니다. 퓨얼셀랩스를 창업하기 이전에 8년 가량 부안에 있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료전지실증센터에서 근무했습니다. 연구원을 다니면서 연구원 창업 형식으로 회사를 창업하게 됐죠. 전형적인 시골같아 보여도 부안은 연료전지 사업을 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인프라 및 지원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새만금 배후기지로써 태양과 풍력을 포함한 신재생에너지 메카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수소저장 및 이를 활용한 사업은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안군에 본사를 두고 앞으로 다양한 연료전지 사업을 통해 전라북도 및 부안군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나설 생각입니다. △연료전지 부품사업과 관련해 두산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연료전지 드론용 파워팩의 핵심기술중 연료전지 스택 기술은 가장 자신있는 부분이나 연료전지용 수소용기 개발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됩니다.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은 연료전지 드론 분야에서 전세계 가장 앞서있는 선진사인데요, 두산과의 협력 관계를 통해 연료전지 드론 시장을 같이 개척하고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얼마전 현대차그룹에서 수소차를 집중적으로 개발, 생산및 보급한다는 비전을 선포한 적이 있는데 수소차나 수소전기차와 퓨얼셀렙스의 상생 방안은 과연 있을까요 현대차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많은 투자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연료전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부지원책과 맞물려 급격한 수소전기차 시장을 새롭게 창출해 나가고 있습니다. 작년 기준으로 4900여대의 수소전기차가 새로 보급댔고, 올해는 1만 1000대 정도의 수소전기차가 생산 예정입니다. 현대차도 핵심이 되는 연료전지 스택을 직접 생산하고 있지만 시스템을 구성하는 수소공급계, 공기공급계 및 열관리 장치에 관련된 많은 중소 중견기업들을 지원하여 연료전지 부품 생태계를 조성했습니다. 저희는 이런 연료전지 부품사들과 협력을 통해 저희 만의 새로운 연료전지 파워팩을 개발할 계획입니다. 해외 자동차 업계 및 관련 업체들에게 저희 파워팩을 제공해 다양한 형태의 연료전지 제품이 출시 될 수 있도록 글로벌 파트너쉽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오는 28일 부안 현지에서 대규모 시연회를 갖는다죠? 그동안 저희가 개발한 연료전지 드론 시제품을 가지고 부안군청 앞에서 도지사님과 부안군수님을 비롯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연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에서 만든 연료전지 드론은 스택 방열 특성이 높지 않아 외기온도 35도 이상에서는 운전을 하지 못하지만 저희가 개발한 연료전지 스택은 외기온도 43도 조건에서도 안정적인 방열 특성을 가진 분리판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업용 드론은 그 활용처가 무궁무진 합니다. 이차전지 기반의 드론은 비행시간이 15분 내외로 내풍성이 크지 않아 임무수행에 한계가 많지만 연료전지 기반의 드론은 6 kg이상의 무게를 달고서 80분 비행이 가능하기에 육상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임무 수행이 가능합니다. 저희가 개발한 연료전지 드론은 순간 최대 출력이 11 kW입니다. 경쟁사의 경우 6 kW 수준입니다. 특히 새만금쪽 수상 태양광 및 해상 풍력 단지내 12 m/s 근처의 바람이 불더라도 안정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특히 80분 정도의 비행시간은 육상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풍력단지내 풍력발전기 유지보수 점검 및 주요 부품 이송과 같은 특수 임무 수행이 가능합니다. 기존에는 육상에서 필요한 부품을 제공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비용이 1회 천만원을 넘어가지만 저희가 개발한 드론을 활용할 경우 인건비가 들지 않아 50만원 미만으로 임무 수행이 가능합니다. 김태영(40) 대표이사는 김태영(40) 대표이사의 고향은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이 바로 김 대표가 태어나 중학교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택시 운전기사였던 부친 슬하에서 1남1녀중 장남이었던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한얼중 시절 줄곧 전교 1위를 차지하면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으나 마산고에 진학하면서 뜻하지 않게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반에서 늘 꼴찌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을 회복하면서 학업에 정진하면서 그는 고3때 전교 10위권 정도로 올라서면서 예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일찌감치 건축가를 꿈꿨던 그는 성균관대 토목과에 진학한 뒤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하면서 시야를 넓혀나갔다. 내친김에 성균관대 대학원에 진학, 토목에 대한 전문성을 더 길렀으나 이후 박사과정은 카이스트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엔지니어의 길을 걷게된다. 2010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료전지실에 들어가면서 연료전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그는 2013년 현대자동차 연료전지팀 책임연구원으로 1년 가량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2014년부터 올초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연료전지실증센터에서 책임연구원과 센터장 등을 지내면서 부안과 인연을 맺게된다. 부안 신재생에너지단지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분원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퓨얼셀랩스를 창업한 그는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을 걷고 있다. 24편SCI 논문과 34개 국내외 특허 출원 및 등록 실적에서 알 수 있듯 대기업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뉴리더로 급부상하고 있다. 언젠가 테슬라와 스페이스X 수장인 엘론머스크 같은 사람이 될 날을 꿈꾸고 있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 기획
  • 위병기
  • 2020.08.03 16:03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임동창 풍류 피아니스트 “전통음악이 갖고 있는 본성 ‘허튼가락’으로 재탄생시켰다고 자부”

아티스트 임동창씨(64)는 형식의 파괴자다. 일반의 생각을 뛰어넘는 창조적 예술로 판을 뒤흔들어왔다. 30대 때인 90년대 중반, 까까머리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동시에 꽹과리와 징을 치고, 무대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모습만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는 국악을 피아노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동서양 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데 열심이었다. 피앗고(피아노와 가야금을 합친 악기)를 개발해 자신의 연주 무대에 등장시킨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와 완주 창포마을 할머니 다듬이 연주단의 예술감독을 맡는가 하면,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부터 주현미장사익송창식 등 대중가수들과의 무대교류 역시 그의 예술적 지향점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2000년 EBS 교육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인 우리가락 노랫가락에 임동창의 피아노 풍류방을 열고, KBS 의 K소리 악동 프로그램 총감독으로 활동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높였다. 그런 그가 고향(군산) 전북에 온 것은 제자들과 함께 2008년 남원에 둥지를 틀면서다. 그러나 한동안 자신의 작업과 제자 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지역 친화적 예술활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역사회와의 소통은 2014년 완주 풍류마을을 맡은 후였다. 그는 완주 풍류마을에서 콘서트와 축제 등 울림이 있는 여러 기획으로 지역의 팬들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코로나19 속에 무대 예술이 셧다운 된 상황에서 그가 새로운 뭔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를 평창 대관령 숙소에서 만났다. 평창 외출은 지인이 숙소를 내줘 그동안 해온 작업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조만간 현 기거지인 완주 소양으로 돌아가 작업을 이어갈 것이란다. -선생님 뒤에 따르는 이름이 참 많다. 풍류 피아니스트, 국악 피아니스트, 피아노 명인, 국악인, 작곡가 등등. 어떻게 불러주는 게 좋은가. 기자나 PD, 국악인 등이 붙여준 이름들이다. 어떤 기자는 한국 10대 기인에 올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개의치 않는다. 다만 내 바탕은 작곡이다. -창작곡집도 여러 권 내셨고, 특히 허튼가락이라는 창작집은 선생님의 혼신이 담긴 역작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전국 지명을 붙인 아리랑시리즈가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노래책에 수록된 아리랑만 188곡이다. 전국 시군이 망라됐다. 완주군 읍면 아리랑을 따로 만들었는데 , 완주 풍류축제 때 각자 읍면 마다 아리랑을 부르게 해서 화음을 이루게 했더니 감동적이더라. 작년에는 아시아문화발전재단의 유튜브 프로젝트로 필리핀러시아일본중국 등 8개 아리랑을 만들어 보급했다. -지역별 아리랑 작곡도 본인이 추구하는 작업의 일환인가. 그건 아니다. 물론 아리랑 가락이 너무 좋다. 한국인 정서를 쉽게 표현한 노래가 아리랑이다. 유네스코 등재로 그 가치도 인정받았다. 그 많던 아리랑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 사라져 아쉬웠고, 강의나 공연을 갔을 때 해당 지역의 정서를 담은 아리랑을 만들어 선물로 내놓은 것이 하나둘씩 쌓였다. -국민들이 잘 아는 대표 작품을 꼽는다면. 대통령 취임식 축하송으로 사용된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전 제2건국위원회에서 주제곡으로 쓰겠다 해서 작곡했는데, 이 곡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도 사용됐다. -본인의 활동이 한국음악에 어떻게 기여했다고 자평하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만하다고 할 것이지만,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자부한다. 그것이 내가 만든 허튼가락이다. 허튼가락은 조상의 자식이다. 조상의 디엔에이가 거기에 다 들어있다. 다른 물질을 섞지 않고 그 요소만 갖고 있다. 부모 DNA 없는 걸 가져온 것이 아니기에 온고지신한 것이다. 한 음악이 아니라 한 장르다. 전혀 새로운 장르다. -허튼가락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 나 혼자만의 숙제였다. 2002년 화두가 풀리고, 풀린 화두로 2003년도 작업을 해서 탄생시켰다. 조상의 얼을 제대로 잇는, 조상이 남겨준 전통음악이 갖고 있는 정수본성을 알아냈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피바디음악원에서 내 허튼가락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허튼가락이 알려지게 되면, 전 세계적으로 한국음악에 귀 기울이는 현상이 생길 것이다. -요즘 트로트 열풍이다. 트로트에 우리 음악의 DNA가 있지 않나. 트로트는 엔가의 아류일 뿐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향수를 달래주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단말마로 생각한다. 우리의 딴따라는 민요다. 그렇게 좋은 민요를 일본이 잘랐고, 그것을 이어가지 못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음악보다 좋은 게 없다. 흥을 돋우고 그 흥을 내서 사람을 동화시킨다. 어떤 흥이냐가 중요하다. 가요는 뽕이며 마약이다. 우리의 정악은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다. 민요는 깊게 어우러진다. 쑥대머리 한 대목만 하더라도 온몸과 마음을 다 써서 하니까 내 슬픔을 극도로 배가시켜 정화시킨다. 조상들은 우리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이런 기가 막힌 두 가지를 남겼다. 그런데 이것을 다 놓쳐버렸다. -코로나19 속에 예술인들도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무대 예술가로서 답답하지 않나. 나에겐 오히려 행운이다. 코로나는 빨리 끝나야겠지만. 내 작업의 주가 작곡이고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다. 엊그제 임실공연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와서 너무 좋았다. 돈이 부족해도 산다. 어려서 남들 밥 먹듯이 굶고 살았기 때문에 먹고사는데 신경 쓰지 않는다. -경북 달성에서 매년 열리는 100대 피아노콘서트에 애정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유입됐다. 달성군이 군청사 개청 100년을 기념해 2012년부터 100대 피아노콘서트를 열어 피아노 공연의 메카를 만들었다. 바이엘부터 찬송가, 가요, 재즈. 전통 장단 등 모든 장르를 담아냈다. 하루 평균 4만명이 관람할 만큼 성공했다. -전북의 대표 음악축제인 세계소리문화축제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참여할 의향은 없으신지. 사실 잘 모른다. 다만 손에 쥐는 게 없는 것 같다. 시민들이 즐기는 것도 좋지만 뭔가 누적된 자산이 있어야 한다. 소리축제에 참여해달라는 간접적 권유가 있었으나 뜻이 없었다. 완전히 맡겨줘야 하는 데, 그러려면 기존 시스템을 허물어야 한다. 100대 피아노도 첫 해부터 부르짖던 걸 못하고 있는 데 그게 가능하겠나. -전북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을 텐데. 좋은 인연이 되고,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할 것이지만 그게 참 어려운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을 소개해달라. 지금은 오로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하고 있다. 나와 함께 해온 아이들이 창의적이면서 보람된 삶을 살아야지 않겠나. 평창에서의 작업도 그것이다. (아이들이)내년부터 정말 창조적으로 살 시기가 왔다. 허벌나게 준비하고 있다. (어떤 작업인지 귀뜸해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깜짝 놀랄 만하다는 말로 더 이상 답변을 피했다.) ------------------------------------------------------------------------ △ 임동창과 아이들 평창 작업실을 찾았을 때 임동창 선생은 곧장 몇 명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리고 공손하게 한국식 절을 하도록 했다. 무대에서 공연이나 평소 말에 거침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불리는 그이기에 제자들의 절 예법이 의아스러웠다. 이유를 설명했다. 부모는 생명이다. 자식 대신 죽을 수 있는 게 부모다. 끝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서천 동강중 방과후 학교에서 지도하던 한 학생이 아버지를 경시하는 말에 충격을 받고 들려준 이야기란다. 부모만이 아닌, 왜 어른을 공경하느냐도 설파했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먹는 음식이 모두 옛날 선조들이 먹어본 음식이다. 선대가 만들고 경험해서 마음놓고 먹는 것 아니냐. 경험은 인생의 스승이다. 절 예법이 미풍양속이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라는 그의 생각에 아이들도 금세 공감했단다. 현재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서 사숙하며 그와 동행하는 제자(그는 아이들이라고 부른다)는 12명. 10대부터 30대까지, 그림사진풍물 등 전공 분야도 다양하다. 서천에서부터 남원, 완주로 거처를 옮기며 함께 해온 제자들이다. 그는 허튼가락 정리로 마무리 숙제를 풀고서 아이들을 만나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나 이외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한 것도 아이들이다. 지금의 모든 활동도 아이들이 중심에 있단다. 풍류마을 위탁 관리를 접은 것도 아이들의 뜻을 받들어서다. 좋은 경험하고, 용돈 버는 것도 좋지만 창의적인 일은 아니라는데 전체 아이들이 뜻을 모았단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도 남 이야기처럼 했다. 2016년 프랑스 다큐멘터리 영화 거장인 레지스 게젤바시 감독이 임동창 아티스트를 통해 한국음악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중단된 사건이 있었다. 영화 남과 여러브스토리등의 작곡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레이와 만남 장면부터 완주 풍류마을의 생활, 공연 활동 모습 등 90% 이상 촬영했던 게젤바시 감독이 별세하면서 유럽 전역에 상영할 계획이 멈춰섰다. 그런 만큼 아쉬움도 컸을 텐데 오히려 감독의 기일을 잊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제사를 모신단다. 아이들에게 인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중단됐던 다큐멘터리는 현재 한국 감독이 맡아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원용 사회문화교육체육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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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0.07.20 16:54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유태호 HS그룹 대표이사, 전북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젊은 리더 '자리매김'

100대 기업은 커녕, 1000대 기업 명단을 봐도 토종 전북기업 한두개를 찾기 어려운게 엄연한 현실이다.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을 분석해 보면 전체의 71.1%가 수도권에 있는데 전북 토종기업은 씨가 마르다시피한게 사실이다. 과거에 좀 잘 나간다 싶었던 토종 기업은 대부분 부도가 났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곳 조차도 본사를 서울로 옮겨 활로를 찾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전북에 기반을 두고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기업이 있다. 바로 HS그룹인데 유태호 대표이사는 불혹(40세)의 나이에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기업을 일구고 있다. 지난 25일 전주시 효자동에 있는 HS그룹 본사에서 유태호 대표이사를 만나 창업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HS그룹에 대해 소개 부탁합니다. 아직 일반인들은 HS그룹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역 향토기업으로 1999년 환경에너지 사업을 운영하는 (유)대한이엔이(에코그룹)에서 비롯됩니다. IMF 당시 한국유리에 다니시던 아버님(유희권 HS그룹 명예회장)께서 명예퇴직과 동시에 사업을 뛰어든게 오늘날 HS의 모태죠. 이후 2008년 ㈜희성산업을 설립해 농협중앙회와 유기질비료 납품계약, 친환경 유기농자재 제품 공시에 이어 지역대학과 산학협력, 경영혁신형(MAIN-BIZ) 중소기업 인증, 기술혁신형(INNO-BIZ) 중소기업 인증 등을 받으며 성장해왔습니다. 2016년 이후 전북에 1,000억 규모를 투자해 HS CHEMICAL을 설립, 스마트팜 작물생육 유기자제, 친환경 병해충제, 친환경 소재, 손소독제 등의 신소재 산업 생산 전문기업으로 활동중입니다. 2018년부터는 유기농 영유아식품 전문브랜드 아이스푼을 런칭, 국가식품 클러스터에 유기농식품공장을 착공하여 HS FOOD / HS F&D계열사로 식품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스마트팜, 투자금융, 사모펀드 운영하는 금융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12개 계열사에서 약 200명의 임직원이 연 1000억원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2030년 매출 1조, 1만명 고용 달성이 목표입니다. △부친께서 직장 생활을 하시다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때 학업을 중단하고 동참했다죠? IMF시절 아버님께서 직장을 그만두시고 나오셔서 갑자기 사업을 시작하실때 저도 대학교를 휴학하고 동생과 함께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때마다 정주영 전 현대회장의 임자, 해봤어?라는 말을 되뇌이며 난관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스마트 농생명산업과 연계해 식품산업에 방점을 두고 사업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과거 어느때 보다 크게 와닿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전북에서 시작해 성장해온 전형적인 향토기업 입니다. 결코 뿌리를 잊지 않고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할 것입니다. 전북지역의 숨은 일꾼을 찾아 시상하는 전북대상을 주관하거나 지역의 골프 유망주인 박현경 프로를 3년간 지속적으로 후원해 이번에 KLPGA 챔피언십 우승에도 작은 힘을 보탠게 큰 보람입니다. 전북대학병원, 전북장애인협회의 행사, 홀트아동복지회, 소아암 돕기행사 등을 적게나마 후원하고 있고 나름대로 지역 문화인프라 확대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룹의 성장이 늘 지역사회와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K팝 못지않게 K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푸드산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하죠? 단언컨데 저희 HS그룹의 차세대 주력사업은 스마트농생명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식품산업분야 입니다. 유기농업에 사용되는 우수한 친환경 농자재를 김제를 비롯한 호남평야 곡창지대에 공급하고 그곳에서 자란 품질 좋고 풍부한 곡물자원을 기반으로 HS FOOD에서 식품으로 가공해 유통/마케팅 전문계열사인 HS F&D에서 국내외로 유통하는 큰 그림을 가지고 운영중 입니다.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의 쌀을 소비하는 식문화권 사회에 저희 아이스푼 브랜드 제품이 수출되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자사의 스낵류 제품에 러브콜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출시한 아이좋은 유기농 쌀파스타는 유기가공식품인증, HACCP 인증을 받은 안심 먹거리로, 유기농 현미와 유기농 백미만을 사용한 글루텐 프리(Gluten Free) 쌀 파스타로 글루텐에 민감한 아이뿐만 아니라 밀가루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나 소화가 힘든 사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런 성과들은 K푸드의 다양한 성과들이 맞물려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전북의 농산물을 활용한 K식품이 반드시 전세계에 진출하는 장면이 실현될 것입니다. △롤모델로 삼는 기업은 어느 곳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HS그룹은 2개의 기업을 롤모델로 삼아서 경영하고 있습니다. 우선 미국의 곡물회사 카길 입니다. 우리는 친환경 농자재와 스마트농업을 기반으로 곡물을 재배하고 수확한 농산물을 활용해 식품 및 바이오산업 등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사업 방향이 카길의 발자취와 같고 앞으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AI, ICT 등 다양한 기술을 접목시켜서 대한민국의 카길이 되겠습니다. 또 하나, 기업의 조직형태와 문화는 CJ그룹 같은 그룹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부터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해 다양하고 전문화된 분야를 공부하면서 임직원들과 비전을 공유하고 같은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사업방향에 반영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토종 기업으로서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에 기여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는데 때로는 크고작은 규제나 관행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행정들이 많이 펼쳐져서 지역과 기업이 상생 발전하고, 일거리 많고 살기 좋은 전북이 됐으면 하는게 간곡한 바람입니다. ◇ 유태호 대표는 누구인가 유태호(40) 대표이사는 완주시 삼례읍 구와리가 고향인데 군산에서 초중고를 졸업한뒤 미술대 교수를 꿈꿨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간게 서울대 미대였는데 수완이 뛰어난 점을 눈여겨 본 부친의 권유와 집안사정 등이 겹치면서 졸업을 못하고 사업에 투신했다. 훗날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글로벌 경제수업을 받으면서 이론과 현장을 접목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20년 전, IMF 직후 트럭 2대를 가지고 부친, 남동생 등 3부자가 똘똘 뭉쳐서 사업을 시작한게 대박을 내면서 주목받는 CEO로 성장했다. 사업 초기 일거리가 있는 곳은 어디라도 달려가서 고객의 부름에 응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환경 및 농자재 산업에서 자리가 잡히자 그는 매출이 늘어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신성장동력을 찾아 기업을 계속 확장시켜 왔다. 서울대학교에서 바이오 최고경영자 과정, 식품영양 FNP CEO 과정, 농식품유통 AAMP 최고과정, AMP 경영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등을 밟으면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는 귀띔이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28대 이사를 맡아 이젠 중앙무대에서도 적극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그는 항상 사람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게 바로 경영철학이다. 혼자가면 빨리갈 수 있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전북 출신 사업가로서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가족으로는 스튜어디스 출신의 아내와 아들 셋이 있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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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9 16:47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세계가 한복을 입게 하라" 외치는 한복 전도사 황이슬 손짱(주) 대표

한복은 우리 고유의 의복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백제 유물에서 한복을 찾아볼 수 있어 역사성 측면에서도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복의 비중은 국내 전체 옷 시장의 1%에도 못 미친다. 명절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장롱 속에 잠잔다. 이런 잠자는 한복을 깨우는 데 온몸을 던지고 있는 이가 한복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황이슬 손짱(주) 대표(32)다. 그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고 세계가 한복을 입는 날을 꿈꾸는 한복 전도사다.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는 자서전적 책을 내면서 주목을 받았고, 한복입고 증명사진 찍기서부터 졸업식청소외식 등 한복 입고 1000가지 행동하기를 제안하며 직접 찍은 사진을 올려 젊은층을 한복으로 끌어들였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주역 앞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과 매장을 찾았을 때 라이브 쇼핑 방송(그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매주 두 차례 진행하는 쇼핑 방송에서 한복과 한복 사업에 대한 열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한복의 특성상 신데렐라로 떠오른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젊은 나이에 단기간 급성장을 이뤘다. 오늘의 손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이라면. 한복 대중화의 걸림돌을 소비자와의 접근성에 있다고 보았다. 한복 생산자의 72%가 1인 업체가, 종사자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다. 판매유통방식의 변화 흐름을 따르는데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젊은층이 좋아하는 방식,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판매 방식에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며 제품 제작에 반영했다. 여기에 주얼리나 잡화 등이 주로 이용하는 백화점 팝업 입점, 크라우딩 펀딩 등에도 과감히 도전했다. -황 대표가 만드는 한복 제품부터 판매까지 톡톡 튄다. 특히 한복의 일상화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 매장과 서울 홍대 매장 두 곳의 오프라인 매장을 두고 있으나 주력은 온라인 판매다. 디자인만 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캠페인성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럽고 쉽게 한복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한복을 어떻게 소비할 수 있는지 인터넷과 영상, 사진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복 일상화의 스피커 역할을 하고 싶다. 한복 업계의 아이콘이 되는 게 꿈이다. -지금까지 수백 종류의 한복을 만들었는데, 스테디셀러가 있다면. 내가 입고 있는 셔츠 개념으로 만든 흰색 저고리다. 장식 무늬 없이 기본을 잘 지킨 작품이다. 2016년 출품 이후 1000장 정도 팔렸다. 한복이 전체 옷 시장의 1%도 안 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일반 옷으로 보면 10만장 팔린 셈이다. 배이지 색에 하얀 동전을 붙인 두루마리 재킷도 꾸준히 찾는 제품이다. -최고의 제품을 꼽는다면. 올 초 출품한 여행용 한복인 나오 저고리, 나오 바지가 히트를 쳤다. 여행할 때 활동성이 보장되고, 인생샷으로 부를 만큼 사진으로도 예쁘게 나오는 것에 착안했다. 내구성, 숨은 주머니 등을 만들어 크라우딩 펀딩에 부쳐 1억3000만원 어치가 판매됐다. 이 옷 때문에 한복에 입문하게 됐다는 마니아도 생겼다. 올해 다시 한 번 크라우딩 펀딩에 나설 계획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고비라면. 전통과 현대를 이어준다는 신념으로 한복을 만들었으나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옷은 옷으로 봐주면 좋을 텐데 어떤 틀에 넣고 재단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한복 입는 사람을 북한 여자 같다고 한 줄로 혹평도 한다. 한복의 생활화를 위해 누군가 시도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독려하고 응원해주면 좋겠다. -말이 나온 김에 어디까지를 한복으로 봐야 하는지, 황 대표의 의견을 듣고 싶다. 전통한복은 기본적으로 깃과 고름, 동전 세 가지다. 그렇다면 고름이 없거나, 소재를 양장지로 쓰면 한복이라고 할 수 없는가. 조선 후기 때 한복지로 만들어진 옷만이 한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틀에 넣지 말고 크게 봤으면 좋겠다. 모양과 길이가 바뀌어도 비대칭을 특징으로 삼는 한복적 요소가 담기면 넓은 의미의 한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반팔 한복, 미니스커트 한복이 있어야 젊은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한복이라고 하기 뭐하면 모던한복, 현대한복, 21세기 한복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전통도시 전주와 한복은 막연하지만 잘 어울릴 것 같다. 전주에서 한복 관련 행사도 개최하고 있고, 한복 차림으로 한옥마을을 거니는 관광객도 낯설지 않다. 다른 도시와 비교할 때 전주에서 한복 문화가 잘 발달됐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사업 초창기에는 지역적 특성을 사업 강점으로 여기지 못했다. 원단 구입의 편리성이나 물류비용 때문에 서울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주 기반이라는 점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전주에서 만드는 한복이라면 한복 잘할 거라는 게 소비자의 믿음이다. 한복진흥센터 미팅에 가보면 전주의 위상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복입기를 선도하는 도시로 손꼽히고, 업계 인지도도 높다. - `세계가 한복 입게 하라`를 모토로 삼았다.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난다. 여기에 황 대표의 꿈과 희망이 담긴 것 같다. 실제 가능하다고 보는가. 세계화에 앞서 산업화, 일상화가 우선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청바지가 처음 노동자들의 옷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옷이 됐다. 옷은 양식이다. 한복도 옷이다. 청바지가 세계적인 옷이 됐는데, 한복이라고 그러지 못하란 법이 있나. -실제 여러 세계시장을 노크했는데 반응이 어땠나. 온라인커머스뿐 아니라 밀라노파리뉴욕 등 세계적인 패션 본고장에서 열린 패션쇼와 페어 등에 우리가 만든 한복을 출품해보았다. 이런 패션 전문 페어에 출품하는 것 자체부터 높은 벽을 경험했다. 또 그들이 좋아하는 옷과 우리가 좋아하는 한복이 다르고, 밀라노와 파리의 선호도도 달랐다. 유니크 하다는 반응은 많았지만 정작 판매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현재의 한복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그 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지금도 고민 중이다.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일이라면 한복 유니폼 개발과 보급이다. 학생 교복을 비롯해 여행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한식당 종사자, 한의사 등 전통 관련 직종에서 유니폼처럼 입을 경우 한복 대중화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현재 준비 중인 한복 운동복 등 한복 홈웨어도 한복의 일상화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 농반 진반으로 앞으로 한복으로 우주를 정복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복이라는 이름이 주는 , 옭아매는 시선이 깨졌으면 좋겠다. 5000만명 중 1%라도 한복 마니아가 있어야지 않겠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공부하면서 소통하겠다. ● 손짱(주)는 창업 10여년 만에 일상 한복으로 국내 한복업계 톱3로 성장 황이슬 대표는 어려서부터 한복과 친숙했다. 전주 남부시장에서 포목점과 이불커튼점을 하던 부모님 곁에서 자연스럽게 한복을 접했다. 어머니는 한복을 짓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가 한복을 사업으로 시작한 것은 대학(전북대 산림자원과)에 진학한 직후인 20세 때다. 손으로 만든 여러 수공예품을 만들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후 가장 인기가 높았던 수제 한복으로 특화시켰다. 현 회사 이름 또한 수공예품 중 최고라는 의미로 당시 사용했던손짱 온라인에서 나왔다. 매력적이고 문화적 가치를 담은 한복이 더 널리 입는 옷이 되길 바라면서 자신의 나이 때에 맞는 젊은 한복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한복 미니스커트도 만들고 소재에 변화도 줬다. 사업 시작 후 5년 쯤 지나면서 유사품이 많아져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중적인 옷이 되려면 일상 한복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길을 쫓아 지금의 손짱으로 서게 했다. 현재 손짱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9명. 생산을 총괄하는 공장장, 상품 매니저, 쇼핑몰 호스트, 사진 촬영, 인스타그램 관리자, 매장 판매 매니저 등으로 구성됐다. 국내 한복 업체가 가족끼리 운영하는 영세 업체가 많은 실정에서 연간 매출액 12억원 대로 국내 한복업계 톱3에 들 정도의 규모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한복업계 총아로 우뚝 선 것이다. 이 회사가 지금까지 런칭한 한복 제품이 1500종에 이르며, 현재 600종이 업로드 돼 있다. 상품 생산은 본인 소유의 설비에서 프로젝트별 객공(임시로 고용한 직공)을 사용한다. 제품별 양이 많지 않아 외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전부 황 대표의 몫이다. 한 시즌에 많게는 200개도 만든다. 이리 많은 종류의 상품을 디자인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변형으로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코로나19로 외출과 여행 자제 분위기 속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해온 황 대표가 꿈인 한복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어떻게 열어젖힐 지 주목된다. /김원용 사회문화교육체육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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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8 17:24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박종완 계성건설 대표이사 "성실하고 꼼꼼하게 공사 마무리…탄탄한 신뢰 쌓았죠"

전북경제는 늘 어렵다고 한다. 인구는 줄어들고 전북의 경제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한 까닭에 거의 전 부문에 걸쳐 도내 경제는 발전보다는 쇠퇴로 대변됐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시간으로, 또 공간으로 확대되고 발전하는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다. 건설업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전북을 넘어 전국단위 기업으로 키워가는 계성건설 박종완(57) 대표이사가 바로 그다. 창업한지 20년도 안돼 계성건설은 지난해 전국시공능력평가액 131위로 올라섰고, 2년 연속 전북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 최고 건설사를 꿈꾸는 박종완 대표를 지난 24일 전주시 중화산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창업에 얽힌 뒷얘기와 향후 포부를 들어봤다. △먼저 젊은 시절 사업에 뛰어든 배경이 궁금합니다. 전주공고와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극동건설이란 곳에 입사해 건설업을 체계적으로 배웠는데 대기업에 근무하다보니 건설 산업의 전국적인 현황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 부대끼면서 창업의 꿈을 키워오던 중 대전현장의 골조공사를 담당하던 한 사장님께서 박 과장은 경영마인드가 남다르니 사업하면 꼭 대성할거다란 말씀에 용기를 얻어 곧바로 전주에 내려와 창업한게 2001년, 38살때였습니다. 돈이 없이 시작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최선을 다한 나날이었고, 운도 따라줬습니다. 좋은 직장인 극동건설을 그만두고 내려올때 두려웠으나 학교나 대기업 인맥을 통해 지역공동도급을 수주할 기회를 얻었고 운이 좋아 관급공사도 낙찰 받았습니다. 변치 않는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공사를 마무리하려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 시나브로 업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숱한 기업들이 명멸했고, 특히 도내 건설업계의 부침이 무척 심했는데 사업 확장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경기가 어려울수록 유동성확보가 가장 중요하죠, 사업을 하다보면 선제적인 투자금이 제 때 회수되지 않거나 유동성 부족으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거나 경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저는 건지산 이지움아파트 신축사업 이후부터는 자체사업 규모를 대폭 줄이고 금융기관을 통해 공사비가 확보된 도급공사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향후 사업 추진 방향은 어떻게 구상하고 계십니까. 주거부문은 복합민원의 소지가 있고 준공 후에도 하자처리로 많은 인력과 비용이 수반되기에 비중을 줄일 생각입니다. 반면 생활패턴 변화에 맞춰 물류사업(냉동, 냉장창고 등)과 관광문화사업(케이블카, 스포츠레저관련) 등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매출향상으로 인해 전국도급순위가 올라가고 회사의 신인도가 제고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수주기회가 확대되는 선순환을 하고 있지만, 양적성장 못지않게 회사의 질적 성장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사태로 건설업 상황도 결코 녹록치 않고 관급발주 건수도 줄어들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히 전북은 경제규모가 너무 적어 먹거리를 찾아 전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실적은 어떤게 있습니까. 2010년 아파트브랜드 이지움(Easyum)을 런칭한뒤 건축한 대표적인 주택사업은 만성 이지움 레이크테라스, 삼례 이지움 주상복합아파트, 동산동 이지움 아파트, 목감역 이지움 더테라스, 천년 이지움 아파트, 건지산 이지움 아파트, 월드컵 이지움 아파트, 금천 솔라이지움 오피스텔 등이 있습니다. 이중 만성 기지제에 있는 이지움 레이크테라스는 전주의 비버리힐즈라고 과분한 평가도 해주십니다. 대표적인 건축으로는 전주 그랜드힐스턴 호텔, 익산 지식산업센터 컨벤션센터, 평창 레지던스 호텔, 여수 라마다호텔 등이 있으며 성장의 발판이 됐던 토목사업은 전주 효천지구 도시개발사업 조성공사, 완주테크노밸리 산업단지 조성공사, 군산 신역세권 택지개발 조성공사 등이 있습니다. 완주테크노밸리 산단공사와 효천지구 조성공사, 도청 앞 이지움 빌딩 등이 인상에 남죠 △평소 현대건설 창업자인 정주영 전 회장을 무척 존경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웃으며)맞습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그 분의 어록 중 작은 일에 성실한 이를 보고 우리는 큰일에도 성실하리라 믿는다. 작은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는 사람은 큰 약속도 틀림없이 지키리라 믿어준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최선을 다 한다.라는 말씀을 늘 가슴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게을러질때마다 정주영회장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고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많은 고뇌를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평소에 감명 받았던 책속 한 줄의 글귀가 도움이 되곤하죠. 그래서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변치 않는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전북도민이 자랑스러워하는 대표건설사가 될 수 있도록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 계성건설 박종완 대표는 박종완(57) 대표이사는 남원 덕과에서 태어났으며 용북중, 전주공고를 거쳐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 극동건설에 다니다 사직한뒤 전주로 내려와 2001년 작은 회사를 인수해 계성종합건설(주)라는 상호로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종합건설사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토목건축공사, 토목공사, 건축공사, 산업설비공사, 조경공사, 소방공사, 전기공사, 통신공사 등의 면허를 차례로 취득하고 건축물은 물론 주택, 토목분야까지 진출했다. 현재 약 100여개에 이르는 협력업체와 두터운 상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부러움을 사고 있다. 박종완 대표는 오늘날 계성건설이 있기까지 창업때부터 늘 함께 호흡해 온 200명 가까운 임직원들의 노고를 첫손에 꼽았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기에 도내 대표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박 대표는 특히 고비고비 마다 향토은행인 전북은행이 믿어주고 도움을 줬다며 감사의 뜻을 표시한 뒤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몰라도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박 대표는 창업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어음이나 당좌를 사용하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직원 급료는 단 한번도 지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지금도 이를 철칙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자수성가한 이가 범하기 쉬운 독선이나 구두쇠가 되지 않기위해 늘 초심을 잃지않고 기업의 사회적 책음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반복한다. 내년 여름부터 국제로타리 3670지구(전북) 총재로 예정돼 있는데 이것도 사회봉사의 일환이다. 늘 정상이 아닌 7부능선에 있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채찍질하는데 전북도청 앞 이지움 빌딩으로 본사를 옮기지 않고 규모가 작은 중화산동 구사옥에서 근무하는 것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내와 1남2녀가 있으며 한때 마라톤을 하면서 사업상 두주불사였으나, 요즘엔 산책이나 골프를 즐기면서 가끔 막걸리만 마신다고 귀띔했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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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20.04.27 19:20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육육걸즈 박예나 대표 "고객과 함께 하는 100년 기업 만들고 싶어"

일자리가 없어 청년층이 지역을 등지고, 인구 감소로 지역의 활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자치단체마다 기업유치에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다. 그러나 수도권과 멀리 떨어져 입지적으로 불리한 전북에 규모 있는 사업장을 차리겠다고 선뜻 나서는 기업들이 현실적으로 많지 않다. 상장사와 코스닥 등록업체를 통틀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전북에 본사를 둔 번듯한 업체가 드문 실정에서 연간 600억원대 매출액을 올리는 기업이라면 의당 주목을 받지 않겠는가. 그것도 청년 창업으로 일군 성과라면 더욱 값질 수밖에 없다. 온라인 쇼핑몰 업체인 (주)육육걸즈가 바로 그런 기업이다. 이 회사의 대표는 20대 여성이다. 전주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고용인원이 100명이 넘는다. 대표는 지금까지 5억원에 가까운 기부천사이기도 하다. 일자리 때문에 고민할 나이에 되레 100명이 넘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청년 CEO 박예나 대표(28)를 만나 `성공신화`를 들어봤다. -회사 이름이 특이하다. 어떻게 명명됐나. 옷 사이즈(66)와 소녀들(Girls)을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중학교 3학년 때 개인 블로그로 `육육걸즈`(www.66girls.co.kr)를 개설했다. 보통의 여성들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학생 때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구상하고, 옷 사이즈로 특화한 것 모두 특별하게 보인다. 사춘기 여학생들은 누구나 꾸미는 걸 좋아한다. 중학교 시절 통통한 내 체형에 맞는 예쁜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시중에 유통되는 66사이즈 옷이 애매했다. 그 시절 미니 홈피를 만들어 이런 옷들로 홈피를 꾸미는 게 재미있었다. -취미가 사업으로 연결됐다는 말인데, 학생 신분으로 그게 쉬운 일인가. 어렸을 때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서울에 있는 예술고 진학을 희망했다. 집안 형편이 안 돼 인문계 고교(전북여고)에 진학했으나 공부에 맘을 붙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재능을 살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하셨다.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 시작은 구제 옷을 싸게 사서 파는 일이었다. 수입과 상관없이 서울에 있는 재활용처리장에서 구제 옷을 구입하는 게 쓰레기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다. 하루 23시간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렇게 3년간 조금씩 기반을 넓혔으나 구제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져 보세 옷으로 눈을 돌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울 남대문시장, 동대문 시장으로 발품을 팔았다. -온라인 쇼핑몰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개다. 치열한 경쟁 속에 단단한 쇼핑몰로 성장시킨 비결이라면. 시장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늘 트렌드를 살핀다. 새로운 상품을 보여주고, 빠른 배송 물류시스템을 갖춘 것이 강점이다. 옷을 좋아하다보니까 한 스타일 치우치지 않았다. 호기심 많아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어떤 옷이 잘 팔릴까 집요하게 고민한다. -일에 묻혀 산다고 들었다. 회사 규모가 커진 만큼 관리자로서 여유도 누릴 만한 데. 온라인 쇼핑몰은 1주일만 관리하지 않아도 고객들이 금세 알아차린다. 대표라고 해서, 사업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저녁 12시 퇴근이다. 연휴나 명절도 없다. 매일 웹디자인이 잘 됐는지, 상품 업데이트가 제대로 됐는지 꼼꼼히 살핀다. -아무래도 지역에 본사를 두는 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서울로 본사를 옮길 것을 고민했다. 서울에 물류창고를 둘 경우 현재 물류비용으로 드는 연간 2억원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부모님과 나를 있게 한 전주를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주에서 1등을 해보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서울에 있었다면 그저 한 온라인 쇼핑몰이었겠으나 지역에 있기 때문에 더 주목 받지 않는가. -사업 규모가 늘면서 매각에 대한 유혹은 없었나. 사업체 매입과 지분 투자를 원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혀 고려치 않는다. 돈이 아니라 일이 좋아서 시작했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사업 규모가 커진 만큼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고려해야지 않을지. 규모가 커지면서 고민이 되는 대목이기는 하다. 하지만 의류 쇼핑몰이라는 게 배추나 토마토를 파는 게 아니다. 여성 의류사업은 굉장히 감성적인 분야다. 숫자와 데이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경영에서 중시하는 게 있다면. 회사는 고객과 같이 나이를 먹는다. 길게 가려면 고객만족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본다. 현재 80만명 회원의 85%가 재구매 고객이다. 회사의 큰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 -향후 예상되는 어려움은. 온라인 쇼핑몰은 경쟁의 연속이다. 소비자의 패턴도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플랫폼도 다양해지고 마케팅 방식도 달라진다. SNS도 빠르게 진화한다. 그런 변화와 유행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상품을 양산하는 게 관건이다. -대학시절 이미 스타 창업가로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청년창업의 모델이 되고 있는데, 지역의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팁은. 나는 무작정 시작했다. 처음부터 돈을 보고 한 일이 아니다. 가슴 뛰는 일이 있다면 소자본이라도 좋다. 무한정 고민할게 아니라 일단 도전하라. 성공이 아닌, 성장을 위해서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 100년 이어질 기업을 만들고 싶다. 수 안 쓰고, 꾀 안 부리고, 욕심 안 부리겠다. 서울과 수원에 이어 부산 3호점을 내고 싶고, 전국에서 입어보는 옷, 좋은 쇼핑몰 만들고 싶다. ● [육육걸즈는 어떤 회사] 4만원에서 600억원으로 성장 육육걸즈 본사는 전주국립박물관에서 정읍으로 가는 도로인 전주시 완산구 호동길에 자리하고 있다. 물류창고를 옆에 둔 본사 건물에 11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 회사에서 취급하는, 인터넷 쇼핑몰에 등록한 상품이 1만8000개다(옵션까지 포함). 그 중 85%가 자체 생산품이다. 박예나 대표는 기성 제품을 단순히 중개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화장품을 제외하고 의류, 액세서리, 주얼리, 신발, 가방, 헤어밴드 등 패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금세 유행이 바뀐다. 패션은 속도전이다. 고객 눈높이에 맞춰 신속히 제품을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시장과 다른 제품, 회사의 모토인 66사이즈를 예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자체 제품 비중을 계속 높인 이유다. 1주일에 100가지를 만든단다. ODM 방식이지만, 이 과정에 대표가 적극 개입한다. 모든 의류제품을 직접 입어보고 수정해서 생산토록 하고 있다. 현재 100여개 협력업체가 있다. 지난해 660억원 매출액을 올렸다. 집에서 준 용돈 10만원으로 구제(舊製) 니트 1개와 신발 1켤레를 구매해 판매하는 것으로 출발, 새 옷처럼 보이게 깨끗이 수선하고 다림질 등을 해가며 아등바등 나름 열심히 사업(?)을 벌여 처음 한 달 내내 번 돈 4만원이었던 시절은 먼 이야기다. 중진공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 중국, 대만, 미국으로 3억원어치 수출도 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시장으로도 넓혔다. 서울 상수점에 이어 최근 수원점을 오픈했다. 주변에서 투자 대비 수익률이 낮기 때문에 만류했으나, 직접 입어볼 때 좋은 상품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박 대표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 누구였을까. 횟집을 하던 부모님을 보면서 고객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횟집을 찾아주는 손님들을 정말 고맙게 생각했다. 온라인 판매지만 처음 3년간 고객들에게 손 편지로 고마움을 전했다. 하루 200장의 손 편지를 쓴 적도 있다. 돈 버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알려주고, 고객의 고마움을 알게 한 부모님이 보이지 않은 가장 큰 멘토였던 셈이다. /김원용 사회교육문화체육 에디터

  • 기획
  • 김원용
  • 2020.03.10 19:03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조계현 기아타이거즈 단장 “전북야구 발전 도움 되는 일 언제든 팔 걷겠다”

군산상고는 걸출한 야구스타들을 즐비하게 배출했다. 군산이 야구도시로 명성을 쌓은 것도 군산상고가 있어서다. 특히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9회말 5대4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얻은역전의 명수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군산상고의 별칭이 됐다. 김봉연김준환김성환김일권 같은 대형 스타들이 1970년대 군산상고를 전국적인 야구 명문학교로 올려놓았다면, 조계현이 1980년대 황금기를 열었다. 군산상고가 가장 많은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것도 조계현이 활약했던 1980년대 초였다. 조계현은 1981년 1학년 때 팀을 대통령기 우승으로 이끌며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교 때 혹사당한 팔 때문에 대학시절(연세대)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조계현은 프로에 진출한 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전남북 연고로 출범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군산상고 출신이 주축을 이뤄 전성기를 누렸고, 해태의 마지막 전성기에도 조계현이 버티고 있었다. 선수 은퇴 후 여러 구단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던 조계현은 선수 때만큼의 명성을 쌓지는 못했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가 2017년부터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맡아 새로운 야구인생을 펼치고 있다. 선수시절 팔색조싸움닭 등 여러 별명을 얻을 만큼 많은 열성팬들을 몰고 다녔던 조 단장(56)을 만나 그의 야구인생을 들어보았다.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요즘 안방극장을 달구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장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역할로 나오는 데, 실제 어떻습니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지요.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감독 중심의 야구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오래 전부터 제너럴 야구, 즉 단장 중심으로 운영됐는 데, 우리도 최근에는 구단 야구로 가는 추세 입니다. 감독은 구성된 선수를 갖고 최고의 실력을 내도록 하고, 단장은 선수 영입부터 선수 육성 등 중장기 플랜도 세우는 임무를 맡는 게 메이저리그 형태로 말이죠. -기아타이거즈 최초로 선수 출신의 단장이 됐습니다. 어떻게 단장으로 발탁됐습니까. 또 선수 출신 단장의 강점이 있다면. 선수와 지도자 생활 대부분을 타이거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구단과 선수 사정을 잘 알 것으로 평가한 것 같습니다. 기아에서 지난해 미국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을 영입한 만큼 감독 및 선수단과 호흡을 맞추는데 선수 출신 단장이 강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교와 프로야구 시절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 뽑혀 일본에 갔을 때 교포 할머니께서 떡을 가져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됐을 때인데, 꼭 이겨달라던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봉황기청룡기 대회를 우승한 뒤여서 피로가 누적됐으나 3차전 모두 출전해 2승 1세이브를 거뒀습니다. -고교 때와 달리 대학 시절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고 2때 하루 12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봉황기 결승에서 만난 천안 북일고와 12회 연장까지 가서도 승부를 내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연장전 혈투를 벌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던지며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고 우승을 했지만, 쇄골 골절 부상을 겪어야 했어요. 이후 운동을 거의 못해 저에게는 지옥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한물간 선수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보다 제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더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대학시절의 공백을 딛고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88년 프로 입단 대신 농협 실업팀을 선택할 때 야구를 그만둘 경우 평범한 직원으로라도 남고 싶어서였습니다. 훈련 방법을 바꾸고 별별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속도가 나오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렇게 5~6년 고민했던 문제가 참으로 우연치 않게 풀렸어요. 훈련을 하면서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특별했어요. 140킬로 중후반 속도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100개를 피칭했는데 계속 그 속도가 나왔어요. 집에 가서 많이 울었고, 설렘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더는 투수 생활을 못할 줄 알았던 때였기에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로 활약할 당시 강타자와 대결에서도 피하지 않고 배짱투구로 지금까지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프로야구 시절 가장 전성기로 꼽는다면. 해태 선수시절 한국시리즈에서 5번 우승했습다. 당시 선동렬이강철 등 쟁쟁한 멤버들이 활약할 때였죠. 특히 93년도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해였습니다. -조 단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꼽는다면. 야구에 입문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문철웅 선생님이셨습니다. 76년 대통령배 우승의 주역이었던 군산상고 김용남 선배를 보면서 목표가 생겼고, 고교 1학년 때 부동의 국가대표 1번 타자 김일권 선배가 자신이 입던 국가대표 옷을 주며 꼭 국가대표가 되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고 최동원 선배는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군산상고 야구 성적이 저조 합니다. 2000년부터 10년간 전국대회 우승이 전무했으며, 최근의 가장 좋은 성적이 4년 전 전국체전 우승이 고작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보는지. 야구할 수 있는 조건은 잘 갖춰져 있다고 봅니다. 시민들의 열성어린 응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죠. 현재 모교야구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선후배 동문들을 중심으로 군산야구위원회 발족을 준비 중입니다. 엘리트 야구와 사회인 야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전주와 익산을 연계해 전북 야구발전의 디딤돌을 놓고 싶습니다. -기아타이거즈에 대한 전북 팬들이 많습니다. 기아타이거즈는 한 때 군산 월명야구장을 제2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매년 4~9경기를 가졌지만, 지금은 군산경기가 없어졌습니다. 군산 경기를 재개할 계획은 없는지. 광주 홈경기를 치를 때 30% 정도가 외지에서 찾고, 그 절반 가까이가 전북 팬일 만큼 기아에 대한 전북 팬들이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연고제 시행에 따라 전주고와 군산상고 출신 지명권이 경남 연고의 NC가 갖고 있어요. NC를 제치고 기아가 군산에서 홈경기를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21년 이후 도시연고 대신 전면 드래프트제 시행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나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전북 야구팬들의 갈증 해소는 당분간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북은 야구 열정이 높은 고장입니다. 전북연고 구단인 쌍방울레이더스가 SK로 넘어갈 때 지역연고지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고, 10구단 창단 때 기회를 잡지 못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11구단, 12구단을 만들어 양대 리그로 갈 수도 있을 텐데 도민들의 열망과 의지의 결집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에 대비해 야구장 신설이나 리모델링에 대한 관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선수시절이나 지도자 때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단장으로서 팀을 탄탄하게 만들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올인 할 것입니다. 그 다음 무엇을 할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북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야구는 저의 모든 것이었고, 제 인생을 풍요롭게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과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많은 경험을 갖게 한, 무한히 감사한 존재입니다. 그런 야구를 내 곁으로 오게 한 것이 고향입니다. 제 마음에는 늘 고향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북야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언제든 팔을 걷겠습니다. ◆ [조 단장의 선수시절 뒷이야기] 덩치만 큰 평범한 소년에서 야구 전설이 되기까지 고교 야구와 프로야구 판을 흔들었던 조계현이 처음부터 야구천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그저 덩치 큰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야구에 발을 디딘 것은 해체된 군산남초등학교 야구팀이 재창단되면서였다. 학교는 야구 실력 등을 따질 겨를 없이 신체적 조건을 따져 선수를 모았다. 조계현도 담임의 안내와 동기인 백인호(기아 타이거즈 3군 코치)의 추천을 받아 합류했다. 당시 코치는 모교 출신의 스마일 피처 송상복이었다. 고무신 신고 나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58명이 지원해 훈련을 시작한 1주일 뒤에는 18명만 남았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야구팀에 남기는 했지만, 조계현은 야구자체에 취미가 없었던 데다 소질 또한 보이지 않았다. 1루수 포지션이었는데 타격과 수비 모두 형편 없었다. 너무 못해 민폐였다. 부끄러웠단다. 4학년 여름 방학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아예 빠졌다. 그런 그가 야구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최규거 당시 교장이 선수들에게 사비로 육성회비를 지원해주면서다. 5학년 때 투수로 전향하면서 그의 실력도 일취월장 했다. 6학년 때 이르러서는 게임을 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천하무적 팀이 됐다. 백인호 고장량 한경수 등이 당시 주축이었다. 조계현과 관련해 또 하나의 베일에 쌓인 이야기가 있다. 1982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교류전에서 3차전 경기 마운드 책임을 그가 도맡은 것을 두고 당시 교류전 감독이 경북고 감독이어서 라이벌 팀 에이스를 혹사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조 단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승부욕이 강했던 자신이 자원해서 나선 것이란다. 별명 싸움닭이 말해주듯 그는 지는 것을 못 참는단다. 무엇이든 자신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프로야구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거쳐 단장직을 맡고 있는 지금도 살아 있어 보였다. -프로야구 이력 △해태 타이거즈 입단(1988년 1차 1순위)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두산 베어스 (2000~2001)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2003~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2008~2009)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2010~2011) △LG 트윈스 수석코치 (2012~2014)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 (2015~2017) /김원용 에디터

  • 기획
  • 김원용
  • 2020.01.19 16:14

[새해특집 :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김홍국 재경전북도민회장 겸 하림회장 "전북인 발상의 대전환…새롭게 도약하는 기회로"

전북일보는 올해 창간 70주년을 맞아 전북의 상징적인 사람들을 만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문에 걸쳐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코너를 신설했다. 정치경제 에디터와 사회문화 에디터가 새해부터 격주 간격으로 경향각지의 인물을 만나 그들이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들어본다. 새해 첫 코너는 김홍국(62) 재경전북도민회장이다. 그는 국내 26위 대기업집단을 이끌고 있는 하림 회장이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하림지주 회장실이 있는 강남구 도산대로 하림빌딩 14층에서 진행됐다. 한남대교와 남산이 코앞에 보이는 회장실에서 꼬박 2시간 동안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가슴 뭉클하게 소회를 밝혔다. △4~5년전 인터뷰를 할 때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먼저 재경 전북도민회장으로서 새해 포부와 다짐을 듣고 싶습니다. 영원한게 없지요, 속내를 보면 저도 또한 하림도 어느새 재계 랭킹 26위 대기업 집단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흔히 전북인 수가 600만명 이라고 합니다. 전북에 약 180만명,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약 350만명, 나머지 지역에 70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지난 1년은 조직을 새롭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32개의 단체를 만들었고 특히 호남향우회에서 분리해 육성하느라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도민회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거나 기부금 지정 단체를 만든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인천, 성남 등지에서 지난해 새롭게 도민회가 구성됐는데 단순한 교류에 그치지 않고 지역발전을 위해 서로 토론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토대로 올 한해 전북인이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평소 1%의 가능성만 있어도 기회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전북과 도민들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무일푼에서 시작했기에 누구보다 긍정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압니다. 오늘날 전북이 낙후됐다고 하는데요, 외부적 요인 못지않게 우리의 문제는 없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극 나서지 못하고 냉소적이거나 소극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만 전북이 도약할 수 있습니다. 전북도민회는 경북, 경남, 강원 등과 더불어 7개도민회가 도민회 연합을 만들었습니다. 핵심은 지방에 유수의 대학을 오게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연세대가 있는 신촌 20만평을 공원과 주택용지로 공급하고 지방으로 이전하는 획기적 발상을 할 수 있습니다. 주택, 기숙사, 쇼핑센터는 물론 교육적 환경이 지금보다 더 좋게 제공되고 대학에도 이익이 남는 시스템을 갖추게 해서 서울 유수의 대학이 지역으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만 우리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전북에서는 요즘 새만금 사업이나 제3금융중심지가 최대 관심사 입니다. 중국 시안부터 대만, 한반도, 필리핀, 일본 등지까지 거주하는 인구가 약 14억5000만 명입니다. 14억여명의 인구를 가진 거대 청년시장 이라는 거죠. 새만금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은 지중해나 마찬가지죠. 문제는 우리가 새만금을 유럽최대의 무역항인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처럼 만들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식품산업의 허브로 육성 가능하다고 봅니다.새만금이 제조업형 항구로 발전해야 하고, 특히 오렌지 하나 안나오는 네덜란드가 전세계 농식품 수출 2위 국가로 성장한 것을 잘 봐야 합니다. 네덜란드 회사와 합작투자하면 새만금에 은행도 금융도 다 따라옵니다. 중요한 것은 돈 냄새 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과감한 규제철폐, 기업이 투자를 할 만한 매력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새만금에 대기업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14억 청년시장을 우리가 주도하려면 새만금에 큰 배 들어오게 전문부두 만들고, 배후도시를 육성해야 합니다. 정부가 예산 지원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구요, 제도적으로 돈 냄새 나는 지역을 만들어서 기업들이 킁킁거리며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소떼 방문을 성사시켰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사례처럼 하림그룹도 언젠가는 북의 협동농장에서 축산을 할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성화 한 북한의 토지를 개량시킬 수 있고, 단백질을 비롯한 식량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남한의 우수한 기술과 노하우와 북한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이 있지 않습니까.언젠가는 이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국내 곡물자급률이 약 22%여서 78%는 수입하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곡물자급률 측면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가 전세계에서 가장 부족한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림은 지금부터 50년 후에는 글로벌경쟁력을 갖춘 곡물메이저로 등극하는게 바람입니다. 김홍국 회장은 인터뷰 말미 손때가 묻은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꼼꼼히 읽어줬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앞서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요지는 그렇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이기심의 철학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질서를 파괴하는 방종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즉 긴 시각에서 봤을때 잘못한 일이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으며, 바르게 한 결정과 행동이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거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편법을 써서 잘되는 일 없다는 거다. 하림그룹의 모태는 1978년 익산시 황등면에 세운 종계사육장 황등농장이다. 창업주는 김홍국 현 하림그룹 회장으로 그는 농장-공장-시장을 잇는 3장 통합경영 아래 육계계열화를 목표로 1990년 10월 (주)하림을 설립했다. 하림그룹은 농식품 전문기업으로 곡물유통(해외곡물 트레이딩), 해운(벌크 해운, 특수 해운, 무역), 사료(배합사료, 사료 첨가제, 유기비료), 축산(부화, 종축, 비육), 도축가공(오리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식품제조(펫푸드, 종합식품, 식품 서비스, 육가공식품), 유통판매(TV홈쇼핑, 온라인 모바일몰, 식품 판매점, 프랜차이즈) 등 크게 7개 영역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익산 마동에 ㈜하림지주 신사옥을 건립해 입주했으며, 하림은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에서 자산 11조9000억원으로 재계 순위 26위에 올랐다.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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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9.12.3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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