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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쁜 극장

유대인이면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에 관한 열 가지 신화>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불모의 사막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짜 신화부터 통렬히 비판한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역사가답게 그는 1917년의 발푸어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모든 조약문, 선언, 협정문 등을 일일이 들어 증거로 삼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마을 500여 개를 짓뭉개고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쫓아내버린 1948년의 대재앙(Al Nakbah)은 모든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이 저질러온 학살과 점령, 폭격, 장벽 세우기, 물과 전기마저 끊어버리는 가두기 정책 등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고통, 공포, 처참한 일상에 대해 그는 매우 차분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숱한 증거와 증언을 통해 밝혀낸다. 그리고 이처럼 처참한 내부 식민지의 주민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감내하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종족 절멸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정책임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 떠나간 이스라엘 대사는 이임 인터뷰에서, 불모의 사막 위에 건국한 이스라엘 역사를 자랑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은 매우 부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는 입장을 세련되게 설파하고 있다. 도대체 저 나라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어느 누구도 하마스의 테러에 의한 작년 연말의 기습과 대량 살상, 납치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강심장도 그렇게 끌려간 이들이 무사히 구출되어 나오기를 바라지 않거나 그 일을 저지른 조직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모두의 성찰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성찰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개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분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모든 일의 연원을 찾고 그동안의 과정을 통렬하게 반추해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가자에서 이스라엘이 퍼부어대는 일상의 폭격은 병원, 학교, 구호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몇 해 전 거기 얹혀 전해온 믿기 힘든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폭격의 현장, 그 죽음의 도시에서 직선거리 몇 킬로 바깥의 언덕 위, 맥주를 마시며 이 광경을 즐기고 있던 한 무리의 이스라엘 청년들, 그들의 환호는 참 해맑고 숨김이 없었다. 저 가학적인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는 참 나쁜 극장과 관중들-. 그리고 다시 오늘, 우리는 가자의 비극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댓글을 바라보고 다시 절망한다. 저 비극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세상의 지도에서 없애는 것이라는, 저항할 여지를 없애는 길은 인종 청소밖에 없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이 인터넷 공간을 망령처럼 떠돈다. 저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기를 빈다. 원래 극장은 비극을 위한 공간이었다. 타인이 겪는 진퇴양난의 비극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관중들은 전율하고 공포에 떨었으며 자기 삶을 깊이 반성했다. 그게 극장이 이룩해온 순기능이다. 사자에게 뜯기거나 동료들끼리 찔러 죽이는 검투 시합을 와인을 마시며 즐기던 극장과 그 문명은 결국 처절하게 망했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현장에서든 사이버공간에서든 저 비극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 ‘온 세상이 가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고 온 세상이 가자를 지켜보는 서구를 지켜보고 있다. 서구의 도덕적 자살을 우려하면서~’ 프레데릭 로르동의 말이다. 어찌 서구뿐이랴? /곽병창(극작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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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5:06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문화생태계 구축에 구심점 역할 기대

전북은 예로부터 전통예술의 대표적 생산지이자 공급지로 전승과 유통이 활발한 지역이다. 근대 시기 권번이 해체된 후에도 지역 유지들이 전주국악원을 설립하여 전통예술의 전승 활동을 지속해 왔고, 1960~70년대 라디오, TV 등 대중매체가 문화 전반을 잠식하였을 때도 문화 예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전북의 이러한 문화예술적 기반은 전통 예인을 대거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었고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이하 도립국악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로 개원 38주년을 맞은 도립국악원은 행정 관료의 운영에서 벗어나 국악전문가 수장 체제로 거듭나면서 국악계는 물론 도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또한 국악원 본원의 증개축으로 신청사 입주를 앞두고 있어 국악 연수, 국악 공연의 상설화 등 앞으로 국악의 전승과 생산 공간으로서도 이목을 받고 있다. 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은 8만6000여 명의 연수생 양성, 학술행사, 전통예인 구술 채록, 민속예술발굴총서 출간 등 국악교육과 연구로 국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제고하며 국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해 왔다. 나아가 예술단은 지속적인 정기연주회(창극단(57회), 관현악단(50회), 무용단(32회))와 기획·상설연주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며 대표 예술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이에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악가무 일체를 갖춘 제작환경을 구축하며 수준 높은 공연작품을 생산 유통하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공연예술단체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전북도립국악원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80~90년대 부흥기를 맞이했던 국악계는 현재 학령인구 감소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영향으로 지방 대학의 국악과는 폐과와 통폐합을 거듭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 시대를 지나 생성형 AI가 산업생태계를 지배하는 AI사피엔스시대(AI를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에 진입하고 있다. 이처럼 국악 교육을 통한 전문 인재 양성이 축소되고 가파르게 사회 구성원과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 도구가 급변하고 있는 시기이다. 문화예술을 교육, 생산, 유통하고 있는 도립국악원도 문명의 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산업 구조의 패러다임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며 원천소스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멀티유즈(multi use)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 동시대인들의 요구와 동시대의 문화 생산은 어떠한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최근 창극 <춘향>을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도립국악원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수준 높은 전통 소리를 바탕으로 세련된 시청각적 요소를 구현하며 낯익음과 익숙함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동시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국악의 대중화와 저변확대에 가치를 두었다면 도립국악원은 이제부터는 전북의 문화 환경을 어떠한 양상으로 조성해 나갈지에 대한 촘촘한 밑그림이 요구된다. 또한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느리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생산하는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역할과 기능 수행이 절실하다. 나아가 전북만의 특별한 문화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구심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노복순 실장은 한국음악을 중심으로 공연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국악평론가이자 연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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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2 15:16

하얀양옥집 문턱을 넘으면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도민들의 눈높이에 다가서기 위한 취지로 역대 도지사가 사용했던 관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도민에게 돌려주는 게 도리다.” 김관영지사의 뜻에 따라 도민들에게 높고 큰 성역이었던 관사가 철문을 떼어내고 담을 낮춰 도민들이 문턱을 드나들 수 있도록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지사 취임 2년만이고 이 집이 지어진지 53년 만이다. 1971년 준공한 2층 단독주택. 도민들에게 환원하겠다는 원칙은 정해졌지만, 콘텐츠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어떤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가 결정되기까지 상당한 고민의 과정이 있었다.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의 역할과 한옥마을이란 관광지 안 장소로서 전북을 알릴 수 있는 복합적 기능을 담는다는 방향성에 의견이 모아졌고 결국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게 어렵고도 무거운, 그래도 흥미롭고 해볼 만한 숙제가 던져졌다. 곧 바로 관사조성 TF가 꾸려졌다. 구도심에 위치한 타지역 사례에 비해 한옥마을 관광지 안에 위치하고 크지 않은 아기자기한 사이즈인 점을 최대 장점으로 살리는 게 포인트. 내부에서 이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외부의 도움을 받아 이 집의 이름이 찾기로 했다. 촘촘한 공모를 거쳐 “하얀 양옥집”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불렀던 ‘하얀집’, ‘양옥집’의 새로운 버전이다. 과거의 이름이 50년이 흐른 후 오늘의 새 이름이 된 것이다. 관사를 도민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본래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건물의 역사성과 미학, 사람들의 기억과 구술이 한 장소의 이름을 짖는 기준이 된다는 전문가의 의견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걸 보니 정말 제격인 이름이다. 집을 보면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1, 2층 합쳐 100평이 채 안 되는 이 곳에 전북의 컬러를 어떻게 담을까? 먼저 콘텐츠 구성의 원칙을 정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어느 누구나의 곳”이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은 처음부터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꼽는 점이다. 도민 대신 “이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이웃 100명을 모았다.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을 공유하는 방으로 여러 이웃들의 인생책이 있는 곳이다. 세평 남짓의 제일 작은 방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 방문객들이 가장 좋아하고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곳 “100인의 서재”가 하얀양옥집의 철학을 대표한다. 공간 구성의 가장 핵심키워드는 ‘조화’다. 한옥마을 안 양옥집이라는 이질적 충돌을 “양옥집 안 한옥” 콘셉트로 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래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지, 창살, 원목 등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고 자개머릿장을 2층 메인 자리에 놓은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TF 구성 후 두 달여가 지나고 ‘하얀양옥집’이 문을 열었다. 지역 청년들의 <들턱 전(展)>으로 집들이를 마쳤고 지금은 우리가 사는 지역, 동네를 스케치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문턱을 넘어 첫 발걸음이 닿는 이 곳은 늘 새로운 일로 분주합니다. 과거, 휴식과 담소의 공간이었던 응접실에 이제는 작품 한 점을 걸고, 라디오와 TV 소리 대신 예술가의 연주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레는 마음으로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늘 멋진 무언가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얀양옥집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 글처럼 예술이 있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공간이길, 문턱을 넘을 때마다 설레이게 하는 것이 우리 지역의 예술이길 바란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임진아 본부장은 전북대학교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관 큐레이터,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업무에 이어 2016년부터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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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5 15:04

돌도끼도 자산이다.

아마 경기도 연천군은 낯설어도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군에 입대한 그렉 보웬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중, 1978년 한탄강변에서 석기 몇 점을 줍게 되고, 이 석기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문화는 날을 한쪽에서만 가공한 찍개문화, 양쪽에서 날을 떼어내 좌우와 앞뒷면이 대칭을 이루는 주먹도끼문화로 구분된다. 마치 찍개가 커터칼이면 주먹도끼는 맥가이버칼일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프랑스 생 아슐유적에서 발견되어 아슐리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고고학자인 모비우스는 주먹도끼가 인도의 서쪽인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확인되자 인도를 경계로 모비우스라인을 설정한다. 이는 곧 구석기문화 이원론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류가 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가미된 시각이며, 당시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인도 동쪽인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됨에 따라 그 학설이 깨지게 된 것이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3만 년 전보다 오래된 유적이 없었는데,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1980년대부터 약 2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일본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같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후지무라는 일본 내에서 신의 손으로 불리게 되며, 그가 조사한 유적은 국가 사적이 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던 2000년, 한 신문사 기자의 몰래카메라로 석기를 땅 속에 묻어 놓고 나중에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후지무라 조작 사건은 일본의 맹목적 국가주의와도 연관되어 있지만, 전곡리유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이처럼 전곡리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구석기 유적이고, 그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주먹도끼이다. 그 주먹도끼가 우리지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남고창IC 자리에서 확인된 고창 고수면 증산유적과 익산 춘포면 쌍정리유적, 전북혁신도시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주먹도끼가 발굴되었다. 우리지역의 구석기문화는 임실 하가유적에서 정점을 찍는다. 섬진강 최상류에 위치한 하가유적은 강이 휘감아 도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곡리와 입지가 매우 유사하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가유적의 석기제작 기술은 섬진강을 따라 일본까지 전해진다. 당시는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 서해는 육지로 이어져 있었지만, 하가유적에서 일본까지 가는 길은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원거리 교류망을 형성한 하가 구석기인들의 기술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올해 5월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화재(文化財)는 물건이나 재화적 의미가 강한 반면, 문화유산(文化遺産)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으로 가치를 더하자는 의미이다. 주먹도끼 한 점이 계기가 되어 연천군이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의 보고가 되고, 30여 년 이상 이어진 구석기 축제가 연천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아쉽게도 우리 지역에서 주먹도끼가 나온 유적은 도로가 나거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임실 하가유적은 지금도 구석기시대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곡리보다는 늦었지만 하가 구석기인의 문화유산을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야 한다. /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한수영 원장은 전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환기의 분묘와 매장>(공저)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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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8 15:13

풍선 날리기, 작란(作亂) 또는 전쟁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띄워 올리는 일은 그 행위만으로도 낭만적이다. 타이완 시골 마을 지우펀의 풍등처럼-. 띄우는 이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풍등이 저물어가는 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를 때 우리는 환호작약한다. 거기 쓰인 글귀가 ‘선영아 사랑해’든, ‘엄마 아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요’든 그걸 띄워 올리는 마음들이 두루 간절하고 아름답기에 나랑 별 관련 없는 풍등에도 같이 손뼉 치며 기뻐한다. 이래저래 풍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맨몸으로는 지상에서 오 미터도 못 떠오르는 인간의 유한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낭만적 소품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에 이런 풍선은 어떤가? 오늘도 어김없이 재난 문자가 온다. “00시 00분경 00지역 상공에서 북한에서 날려보낸 오물 풍선이 포착되었습니다. 야외활동 간 적재물 낙하에 유의하시고 발견 시 내용물은 열어보지 마시고 가까운 군부대나 경찰관서에 신고하시고-.” 말 그대로 재난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풍선을 들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희한한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한쪽은 위대한 공화국 이름으로 한쪽은 풍요의 상징 자유대한의 이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름다운 한반도의 밤하늘을 향해 밤도깨비 두상처럼 괴이한 풍선을 날려 보내며 그들끼리 박수를 친다. 선진국 문턱에 다 왔다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도대체 이 유치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는 풍선질을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대체 낭만적이지도, 랑만적이지도 않다. 전략으로도 전술로도 그다지 효과적일 리 없다. 그저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단순한 발상, 네가 먼저 멈추기 전엔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억지 떼쓰기에 다름 아닌 짓이다. 저쪽이 담아 보내는 건 오물에 양말짝에 담배꽁초요, 이쪽이 보내는 것은 상대방 vip의 포르노 합성사진, 드라마, 가요가 담긴 유에스비란다. 이런 일로 상대방 접경지역의 주민들 사이에 자기 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이 싹트고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심이 사무치게 치밀어 오른다면야 반쯤은 효과가 있다 할까? 문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리 없다는 사실 아닐까? 그렇게 자유대한을 동경하게 하고 싶으면 전면적인 개방정책을 펼쳐서 남한의 드라마며 가요가 북한 주민의 일상을 헤집게 할 궁리를 하는 게 훨씬 빠른 길 아닐까? 적개심과 조급함에 사로잡힌 몇몇 탈북자들이 이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저 불장난이거나 아니면 소동을 만들어 주목받으려는 작란(作亂)에 지나지 않는다. 장난이거나 작란이거나 그것이 총질로 이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들어가고 마는 것을 숱한 전쟁사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끔찍한 일인가? “조카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이래 가지구 약이나 제대로 들어가갔네? 내레 다시 묻갔어. 도대체 이거이 누구를 위해서 보내는 거이가?” 얼마 전 막을 내린 어떤 연극에서 한 탈북자가 풍선 날리기를 막으며 애타게 호소하는 대목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풍선이란 말인가? 제발 멈추자. 이제 먹고 살 만한 나라, 체면과 자존심도 좀 챙길 때가 된 나라가 한발 양보하고 먼저 멈추자. 그게 그리 어려운가? 영 멈출 수 없다면, 그 안에 몇 안 남은 이산가족들의 편지라도 넣어보면 어떨까? 빛바랜 가족사진이라도, 눈물 젖은 손수건이라도 넣어 보내면 어떨까? 꿈인 듯 생시인 듯 답장이 오지는 않을까? 유치한 장난에 하도 지친 끝에 해보는 공허한 상상이다. /곽병창 극작가∙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교수는 창작극회 창작소극장 대표·전주시립극단 무대감독·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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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17:27

전북애향본부가 진정한 애향의 기수다

몇십 년 전이었으리라. 이른 새벽에 경남여객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고향인 남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승객이 고작 대여섯 명쯤 되었다. 그 버스의 행선지는 진주나 부산쯤으로 기억된다. 필자의 옆자리에는 70세가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두 분 대화가 경상도 말씨라서, 아니, 이처럼 이른 새벽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일찍 서둘러 출동하는 것일가 하는 등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전북을, 전북 사람을 어찌 생각하느냐’는 단도직입적 질문이었다. 그 노인은 서슴없이 금방 질문에 응답했다. 전북 사람들은 한반도 내에서 가장 으뜸 양반들이라고 했다. 자신은 광복 전 일제 시대부터 전국 남한 북한을 안 다녀본 데가 없이 여행했었고, 모든 고장 사람들 다 겪어 보았는데, 그중에 전북(전주) 사람들의 인간성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예절 바르고, 인심이 후하고, 남 배려심이 매우 극진하며 객지인 대접이 가장 융숭하다며 치하에 침이 마르지 않았다. 특히 못사는 사람들이 객지를 떠돌며 살 곳을 찾아 헤매다가 마지막 찾아든 전북에서는 결국 뿌리 내리고 터 잡아 살길 찾더란다. 전북 사람들은 배운데 있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학문이 뛰어나다는 뜻은 아니고 조백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자기는 금산사 밑 어느 작은 종교에 빠져 일제 때부터 연년세세 전북을 찾았다고 했다. 타향을 하나 골라라 한다면 자기는 전북을 제2 고향으로 여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탁월한 지식인답지는 않았지만 슬기로운 인생 경험은 출중나다 싶었다. 전북인들은 자연을 섬기기를 조상 섬기듯 한다고도 했다. 전북인들은 순정적이고 순종의 미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도 했다. 여리고 감성적이고 남의 일에 잘 울어주기도 하며....그는 또 전북 여성들 칭찬에는 웅변이 되고 있었다. 전북 여성들은 문자 그대로 양반집 규수들이란다.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순종 그 자체이며, 옷 매무새는 또 어떻고, 음식 다루는 일 하며, 특히 김치 잘 담는 손맛은 조선에서 으뜸이란다. 그 노인은 우리네 일상을 거울 보듯이 잘 살펴 그려내고 있었다. 전라도 폄하의 발언은 자기 앞에서는 누구든 용납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찾고 있었던 전북의 정신이 열거되는 대화였다. 그런데 정작 전북인들은 자기 장점, 자기 정신을 모른단다. 정말이지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한 일을 찾아 나서는 중후한 단체가 있으니 이름하여 ‘전북애향본부’인 것이다. 전북 중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북의 정신이며, ‘행동하는 애향’을 외치며 함성을 터뜨리는 애향의 기수들....바른 정신은 구현되어야 한다. 옳은 신념은 실천되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새만금 예산 삭감을 정부에 성토하기 위해 버스 100대에 5000 명 전북인을 분발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국회의사당을 함성으로 뒤덮었다. 전북애향본부가 해낸 것이었다. 해방 이래 전북인의 분발, 전북의 분노를 이렇게 폭발시킨 때가 있었던가? 또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모저모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몇 차례나 벌렸다. 그래 순종이 미덕이라며 온순 이미지로만 치장하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냥 낙후의 쓴맛을 보는 우리 자신에게 성찰과 자각의 대 전기를 마련하는 공동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애향, 이는 자신의 혁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애향은 우리가 찾아 나서는 행동 철학이며, 우리에게로 회귀하는 우리다움의 정려인 것이다.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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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4 18:21

수묵 정신의 고향, 전북

‘수묵’이란 단순히 재료의 측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묵화는, 동양의 관점으로 우주의 기본색이라는 청.백.적.흑.황을 모두 합친 색인 ‘먹’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자연의 본질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정을 표현한다. 수묵이 인간의 정신이나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매우 유용한 회화 양식이라는 사실은 동양회화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이 이상으로 삼는 상태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정신에서 노니는 풍류의 높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정신이 문예의 진수에 해당한다. 모든 색을 흑과 백으로 단순화시켜 뜻을 증폭시키는 수묵화는 숙명적으로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수묵화에는 단순함과 균형 그리고 조화와 평화가 갖는 국제적 조형언어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수묵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수묵은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는 회화양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묵은,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정신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신을 그려서 뜻을 얻는다는 것은 속진(俗塵)을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 뿐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 까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홍운탁월에 의해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무경계의 경지 그곳에 수묵화의 세계가 있다. 한국의 화단에서 수묵화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특히 전북과 전주로 좁히면 그 인물은 더 또렷해진다. 송수남 화백이다. 그는 평생 자기 혁신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 온 화가이다. 그가 추구해온 창의성과 실험 정신은 미래를 여는 종자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수묵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이다. 수묵이 더 이상 과거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며 현대의 눈과 사고로 그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 수묵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수묵이 시대의 언어임과 동시에 정신의 영역이 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 놓은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주로 낙향한다. 남천(그의 호)에게 있어 흑석골 작업실은 그이의 인생 중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동시에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예술 혼이 정점에 이른 공간이다. 그는 흑석골에 은거하면서 지금까지 그가 세상에서 얻은 영예를 반찬처럼 먹어 버리며 고뇌와 절체절명의 순간마저 스스로 작품이 되게 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형태를 구축하며 새로운 실험을 계속한다. 그리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11년 동안 가족 간의 송사로 시끄러워 잊혀 진 듯 했다. 최근 가족 간의 재산권 다툼 문제가 합의되어 재판이 종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흑석골 작업실에는 개발 이익을 위한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벌써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제는 남천의 미학적 기반이던 고향에서 남천의 예술적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망인은 남천의 작가 정신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속분을 전체 기증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유족 모두 공공성이 있는 미술관이 건립된다면 낙관과 아카이브 등 남천 송수남 화백의 기초 연구 자료를 기증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송수남 화백이 평생을 추구하며 이룩한 예술 정신의 뿌리는 전북이지만, 그가 도달한 미감은 한국 고유의 미학임과 동시에 동양 사유의 고유성이다. 나아가 인류의 보편 세계다. 전주시는 문화 도시를 천명해 왔다. 진정 문화가 생명력이 있으려면 그 문화가 확산되어야 하고 새로운 변화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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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7 15:13

상설공연이 제맛이야

부산, 강릉, 안동, 목포 그리고 전주. 서울로 집중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분산을 위해 문체부가 엄선한 관광거점도시이며, 세계적 수준의 관광도시를 목표로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다섯 도시 중 한 곳이 전주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풍경과 맛깔난 밥상, 푸짐한 저녁 술상까지 전주는 매력 있는 관광지임은 분명한데, 여기에 더불어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의 저녁 시간을 더욱 즐겁게 해주는 것, 상설공연이다. 여러 지자체와 공연단체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상설공연을 추진하였는데, 전주도 나름의 감성을 바탕으로 수년째 상설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상설공연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상적 상설공연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태양의 서커스’다.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된 서커스인데, 1987년 라스베이거스 미라지 리조트 그룹의 회장 스티브 윈은 LA에서의 공연 관람 후, 이 새로운 방식의 서커스가 성공할 것을 확신 자신의 호텔에 ‘미스테르’라는 작품을 상설공연 상품으로 유치하게 된다. 예상대로 관객의 호응이 이어지고, ‘오쇼’, ‘카쇼’ 등 새로운 후속 작품이 등장하면서 태양의 서커스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공연의 메카로 바꿔놓는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 태양의 서커스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공연장이 아닌 오리지널 작품을 위한 혁신적 무대장치가 갖추어진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 뮤지컬과는 달리 판권 판매가 불가하기에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상설공연이다. 매일 저녁 오리지널 공연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 6개의 대형 작품이 올려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은 잊을 수 없는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순회공연인데, 해외 순회팀의 경우 배우와 스태프, 세트 구성까지 본국에서 이동해 임시 마을을 짓고 공연을 해야만 하기에,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태양의 서커스를 보기 위해서는 사막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손쉽게 선택하는 중국 여행상품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상설공연이다. 북경의 ‘금면왕조’나 상해 패키지의 ‘송성가무쇼’는 물론 장예모 감독이 중국의 명산과 호수 등을 배경으로 만드는 ‘인상시리즈’ 또한 상설공연이다. 중국의 역사가 담긴 작품을 전 세계의 관광객이 매일 저녁 즐기고 있으며, 중국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반면 상설로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수적이며 지속적 관객 동원도 쉽지 않다. 지역의 대표 브랜드 공연을 찾기 힘든 이유이다. 다만 전주를 찾은 외지인이 전통적인 한옥 마당에서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국악 콘텐츠를 직접 관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경험일 수 있다. 전주가 갖고 있는 문화자산을 발굴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전주의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며, 전주만의 상설공연을 통해 가족단위 관광객이 흥겹게 관람하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다면, 전주는 더욱 빛나는 관광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 다섯 바탕이 시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듯이, 전라도의 질펀한 향기가 묻어나는 전주만의 새로운 브랜드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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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0 17:49

‘전북 PDF 웹 도서관’을 만들자

‘비매품 도서’ 중에도 좋은 책이 꽤 많다. 단체의 기관지와 회보, 사업 결과보고서, 연구용역 보고서, 전시 도록, 지자체의 홍보용 도서, 포럼·세미나 자료집 등이다. 이 책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조건에서 무료로 나눠주기에 구하기 힘들다. 이 도서 중에도 공공기관이나 공익의 성격을 띤 단체는 도서관·연구단체·연구자 등에 책을 보내기도 하지만, 실상 그 자료들을 공공시설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책을 발행한 단체마저 여러 이유로 그 책을 오래 보관하는 일도 드물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신청하지 않아 도서관 납본 의무가 없고, 한정판인 데다 출간 수량도 적어 어느 순간 몽땅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비매품 도서에 대한 안타까움은 2017년에 나온 <항일운동을 증언한 염재야록>(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을 읽으며 더 짙어졌다. 이 책은 임실 출신 유학자 조희제(1873~1937)가 쓴 뒤 우여곡절을 거쳐 후대에 전해진 <염재야록>의 한글 번역본이다. <염재야록>은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책을 쓰고 지키느라 갖은 고초를 겪은 관련 인물들의 일화만으로도 절절한 감동을 선사하지만, 정작 일반인들은 한문으로 된 책의 본문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한글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서 한 말의 의병·독립 운동, 애국 투사들의 행적을 상세히 알게 됐고, 책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책 발간에 앞장선 광복회 전북지부는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번역본 270여 권을 전국 국립대학 도서관과 언론사, 전라북도 관계기관, 광복회 전국 지회 등에 무료로 배부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북에서는 국립군산대·전북대 도서관과 전주시립 건지·금암도서관에서 번역된 책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온오프라인 서점은 물론 원작자의 고향인 임실의 도서관을 비롯해 전북의 도서관 대다수에서는 그 책을 찾을 수 없다. 비매품 도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써 지켜낸 <염재야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한다면 책을 출판해 판매·보급하거나 전자책으로 제작해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저작권자·번역자를 비롯한 많은 이의 결단이 필요하다. 비매품 도서의 활용과 보존의 대안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많은 비매품 도서가 웹 공간에서 PDF 형태로 다양한 독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연구원 홈페이지에는 전북의 각종 동향 자료와 연구보고서가 있고, 전북특별자치도 문화관광재단 홈페이지에는 전북 문화정책자료와 홍보 자료, 포럼·세미나 자료집이 있다. 전주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전주시민의 생활사를 시민의 구술로 기록한 <전주시 마을조사서>와 이 결과를 활용해 작가들이 쓴 동화집 <고을 전주의 10가지 숨은 옛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기관과 단체의 홈페이지 자료실에 상당한 양의 쓸만한 자료가 있다. 하지만, 어느 단체의 홈페이지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웹에서 그 단체가 낸 모든 오프라인 자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년 전 자료는 거의 삭제됐다. 따라서 공적기금으로 제작하는 비매품 도서를 비롯해 각 단체의 홈페이지에 산재한 PDF 자료를 한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전북 PDF 웹 도서관’ 운영을 추진해 볼 일이다. 웹 공간을 활용하면 자료를 만든 취지를 한층 더 살릴 수 있고, 해당 자료들이 무참하게 사라질 일도 없을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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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3 16:41

신록의 시간을 넘기며

국어사전을 펼치고 화(和)자 들어가는 낱말들을 찾아보면 참 많기도 하다. 대충만 열거하면, 화담(和談) 화해(和解) 화답(和答) 화음(和音) 화순(和順) 화열(和悅) 화의(和議) 화친(和親) 화충(和衷) 화화(和會) 등이다. 이 어휘들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 사회는 건강하고 화동이 충만할 터이다. 화친하고, 화합하고, 함께하고,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니 이는 따라서 협동, 협치와 공동선을 창출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고를 동반하므로 반목이나 갈등의 부정적 사고는 분쇄되고 추방되는 전제가 먼저 이뤄질 것이다. 어느 최근 일간지에 관심 끄는 통계가 수록되었는데, 지지하는 정당이 각각 다른 사람끼리 한 자리에 동석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 상태가 90% 넘는다 하였으며, 보수와 진보, 전라도인과 경상도인, 일간지 구독 성향이 다른 상호, 종교가 다른 상호, 가난한 자와 부자, 사용자와 노동자, 학식이 높은 자와 낮은 자, 노인들과 젊은이들 등등도 비율이 모두 높게 나타난다고 했다. 분별하여 나눌 수 있는 한 모든 계층별 그룹간 대립과 대척 관계는 심리적 반목 상태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현상이다. 정치적 극한 대립이 다른 영역까지를 영향끼쳤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민족성의 먼 시원에서 더듬어보면 단합과 협동, 단결과 협치, 화합과 화융의 구현이 분명했던 역사적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수많은 국난을 극복하고 무수한 환란을 이겨낸 어귀찬 민족이었는데, 요새 몇 년 평화의 시기라 해서 복이 넘쳐 다량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이 같은 부끄러운 상황을 퇴치하고 대아적, 대승적 상태로 반전시켜야 할 것이다. 5월을 일컬어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 시인이 있었다. 5월은 꽃이 지고 나서 신록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서두르는 시절이다. 꽃의 영락과 화려함의 쇠락 뒤에 따라 오는, 봄의 대척점에 초여름이 오는 게 아니라 꽃을 품어 열매 맺음으로 순행하는 선순환의 자연 섭리에 귀착하는 것이다. 5월은 진정으로 자연의 섭리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맨 처음의 단계인 셈이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습하거나 건조하지도 않으며, 그저 알맞게 화풍난양(和風暖陽)의 계절이다. 산에 들에 많은 수목들이 꽃의 시절을 넘어 열매를 마련하기로 서로 경쟁하는게 아니라 함께 울력하고 공공선에 나아가는 것이다. ‘화’자로만 충만하고 ‘화’자의 의지로만 융성하는 계절, 신록의 신선한 너울거림으로 마냥 부푸는 인심, 인정이 무한한 환희로 전환, 충일하지 않는가? 조국 강토는 신록의 계절인데 왜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색깔인가? 숲을 이룩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5천만이 함께 공공선에 나아간다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이다. 신록을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낙목한천(落木寒天) 쓸쓸한 때의 수묵화를 그리는 바야흐로 우리들 실수가 참절할 뿐이다. 우리의,우리 민족의 영특하고 영명한 슬기를 한 데 모으자. 대륙과 대양을 꿰뚫고 관통하며 시대를 넘어 미래로 가는 터널을 뚫자.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지금 퇴보하는 상황으로 읽히는 모든 분야, 모든 막힘을 뚫고 나아가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태백의 준령을 굽이치게 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온 겨레가 한 노래를 부르자. 푸르름의 상생 정신으로 ‘화’자 돌림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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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7 15:22

더 낯설게, 전주국제영화제

외지인이었던 나에게 전주살이가 즐거운 이유는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생활환경 그리고 전주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축제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것에 있다. 2000년부터 시작, 어느덧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축제인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전국 각지의 지인들 덕분에 매년 봄, 설레는 밤을 함께 하였던 전주국제영화제 이야기를 해보자. 도대체 전주국제영화제는 어찌 알았으며, 전주에 내가 살고 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꾸준히 다양한 사람들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고 있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영화제를 찾은 이유를 묻는 나의 질문에 ‘전주에 와야만 볼 수 있다’, ‘독특하다’, ‘새롭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고는 하는데, 내가 보아온 영화들도 하나같이 일반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난해’하고 ‘평범하지 않은’ 영화들이었다. 온종일 거리의 풍경을 고정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 수도자가 걷는 모습만 보여주는 영화, 남미와 아프리카와 중동의 낯설고도 어색한 영화. 어디서 이런 영화를 구해오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참으로 독특하다.반면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영화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낯섦’에 있다. 비주류 작품이나 독립영화를 바탕으로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함으로써 평론가는 물론 영화팬들에게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그들이 영화제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상과 다른 ‘일탈’이다. 영화는 분명 상업적 측면과 함께 우리네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하며, 전주국제영화제가 그러한 대안적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반응은 어떨까? 영화제 종료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영이 지속되고 있다. 성공의 가장 큰 이유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직접 생산하는 콘텐츠에 있다. ‘디지털’ ‘독립’ ‘대안’을 내세우며 2000년 출발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영화용 ‘필름’ 카메라가 아닌 방송용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영화를 제작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필름을 사용한 제작 방식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디지털이었는데, 각기 다른 국가에서 선발된 3명의 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목표로 만드는 3편의 단편영화는 영화제의 얼굴이 되었다. 이러한 전주국제영화제만의 독특한 제작 지원 사업을 통해 매년 독창적인 디지털 영화가 생산될 수 있었으며, 다양한 국적의 감독들이 전주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의 특성은 각기 다른 개성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합종연횡.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가치일 수 있는데, 일탈을 꿈꾸는 다양한 인류가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에서 만나 영화를 넘어 전주만의 해방구를 만들고 새로운 대안을 창조하였다. 디지털이 주류가 된 지금은 “전주시네마프로젝트”로 규모를 키운 이 프로젝트는 최근 ‘노무현입니다’를 비롯한 특색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주류 영화계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전주만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25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더욱 발전하기를 응원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더 낯설게, 나의 일상과 다른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새로운 즐거움과 뜻밖의 만남이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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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3 18:15

오일장을 기록하자

오일장은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장날이면 일부러 사고팔 물건을 만들어 나오거나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이라도 만날 요량으로 시끌벅적한 장터에 나섰다. 뜨끈한 국밥을 나누며 안부를 물었고, 막걸리 한 사발에 묵은 감정을 털어 냈다. 형편에 따라 살림을 들이거나 내놓았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솜씨 삼아 엮어 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에는 만든 사람의 체온이 스며 있었다. 그 온기는 지치고 상한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60여 곳에 이르던 전북의 오일장이 40여 곳으로 줄었다. 교통이 발달하고, 대형할인점이 들어서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장터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흥성하던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오일장’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한다. 오일장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먹을거리와 볼거리와 놀거리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건네는 다정함이 흔전만전하기 때문이다. 수확의 기쁨과 수고로움에 대한 존중도 넘친다. 서툴거나 틀리게 적은 가격표시판마저 옅은 미소를 선사하고, 아무개 집과 상회라는 가게 이름들은 잠시 밀쳐두었던 아련한 추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장터는 먹먹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전북의 오일장들은 본래 명성이 자자했다. 2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고창 해리장, “1910년경 임피군 남삼면에서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한 난장을 시초로 씨름·도박·농악이 횡행했다.”라는 기록이 남은 군산 대야장,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의 동학 지도자들이 참가한 금구·원평 집회가 열린 김제 원평장,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로 우시장이 유명했던 남원장,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한데 섞여서 들리는 남원 인월장, 전라·경상·충청의 문화가 만나던 무주 무풍장, 영화 <행복>(2007)에서 주인공들이 짜장면 데이트를 즐긴 장수 번암장, 대를 이은 상인이 많은 장수 장계장, ‘용머리장’이라고도 불리는 정읍 산외장 등이다. 생강의 봉동장, 인삼의 진안장, 고추의 임실장 등과 같이 특산물 하나만으로도 금세 떠오르는 장터도 여럿이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가치를 찾아서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땅이 내어준 것들을 성실히 일궈낸 사람들이 꾸려온 오일장의 역사와 풍경은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오일장에는 땀내 나는 삶이 있고, 고단한 일상을 꾸려가는 상인들의 한숨과 비탄도 녹아 있다.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잊히기 전에 세심하게 기록돼야 한다. 대학의 관련 학과와 지역의 청소년·부녀회원 등을 기록자로 활용하면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어물전의 칼과 도마, 오래된 국밥집의 주걱과 국자 등 상인들이 쓰던 도구를 전시하는 <장터 도구 전시회>와 까맣고 투박한 손의 주름마다 새겨 있을 상인들 삶의 굴곡을 살피는 <장터 상인들의 손 사진 전시회>, 특산물을 활용한 <장터 음식 맛 겨루기>, <장터 특산품 뽐내기>, <단골손님 자랑하기> 등은 재미뿐 아니라, 색다른 역사를 새기는 시작이다. 초·중·고교의 체험학습에 오일장을 포함해 물건 구매를 비롯한 <노포 운영자와의 대화>, <우리 동네 특산물 찾기>, <어르신들과 이야기> 등의 시간을 갖는다면 지역을 이해하고, 다양한 삶의 지층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오일장에서는 그저 마음껏 해찰하며 기웃거리기만 해도 사람 사는 정과 때묻지 않은 풍경을 만나리라. 그 고장의 생생한 사투리를 듣는 호사는 덤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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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6 15:19

술과 노래와 춤과의 조합

아주 오래전 필자는 어느 중앙지 칼럼으로 읽은 내용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어 이를 이 지면에 소개하려 한다. 매우 인상 깊었던 연유이리라. 미국 거주 어떤 우리 교포 2세 대학교수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인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한인 집성촌 한 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었단다. 그 중국인이 말하기를 “그 민족은 이상합니다. 일과 후 저녁에 서로 모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싸움질하고는 흩어지는데, 다음 날도 또 다시 만나 그렇게 반복하곤 하는, 그런 좀 모자란 사람들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중국인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듣게 되었지만 이 교수는 오히려 충격적 감동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술 잘 마시는 것은 낭만을 누리면서 감성적 정리적 즐김에 다름 아니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풍류를 아름답게 누리는 미풍이라고 생각했으며, 문제는 싸움하는 일인데, 이는 의견의 극단의 차별성으로 인한 변증법적으로 논하자면 정반합으로 건너가는 치열한 공방이 아니겠는가 하고 긍정적 단정을 하게 되었노라고 술회하였다. 지금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K-팝의 경우 그것이 바로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의 연장선상에서 승화된 성과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잘 놀고, 일은 재빠르게 잘하는 민족이라고들 자타가 공인한다. 잘 노는 일이 바로 예술하는 일로 변환하는 현대 문화 흐름을 볼 때 우리 민족성은 특히 예술 지향적 성향을 띤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하길, 우리 민족은 풍류를 누릴 줄 아는 민족이라 평했다고 한다. 풍류란 그 개념이 오늘날 연예 장르의 예술인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는 현대 개념의 풍류에다가 학문의 즐김까지를 포함시킨 확대된 개념이었다. 한반도 고대 역사상의 제천의식도 집단 가무에 천지신명께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술과 노래와 춤추는 행위 조합의 행사가 그대로 엄숙한 국가적 의례였으니 오늘에 전해오는 풍속은 당연한 필연성을 지닌다. K-팝은 물론 K-드라마, K-무비, K-클래식, K-뮤직 등 예술 문화 전반에 걸친 융성은 세계 인류를 감동케 한다. 국악 부문은 또 어떠한가? 판소리며, 민요며, 시조창이며, 농악 등등 온 민족이 이에 따라 흥에 젖어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다. 농악은 일하면서 함께 공연하는 풍악이다. 일과 놀이가 상생으로 융합한 것이다. 예술에 우리네 고유 정서를, 예기에 우리네 당찬 낭만을 담아냄은 가히 높은 수준인 것이다. 이때에 우리네 정한도 풀어내고, 희로애락의 만 기지 정서를 표상한 것이다. 사실 놀이나 일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함께 함’에 방점을 두었다. 일할 때는 품앗이로 공동 작업을 했으며, 놀이나 예술 공연도 함께 굿을 쳤던 것이다. 이는 종합예술의 성격으로 그 예술성이 승화 확창 되었다. 예술만 그런 게 아니라 역사적 큰 행사도 함꼐 함으로써 그 위용을 높이 떨쳤던 것이다. 임진란 때의 민중 단합, 3.1운동 때의 집단 함성, 동학 동민 혁명 때의 단일 대오, 근래 축구 응원전 때의 붉는 악마 군집 등등 크게 이룬 것에서의 우리네 단합은 타민족 어디에서도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큰 용기를 일으키고 신명이 표출되며 소기의 목적 달성은 효과적이었다. 근래 서울 중앙 박물관 관람객 수가 1년 평균 460여 만명이란다. 이 수는 세계 여섯 번 째라니, 우리 민족 문화 지수, 우리나라 국격이 세계 여섯 번째가 아니겠는가? 지고한 예술 지향의 민족성에 무한 자부심을 느낀다.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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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9 16:20

전통한지 연구는 표류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이 그동안 한지에 대해 연구한 내용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에 대한 기본 연구조차 하지 않으면서 전통한지 제지 기술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연구 내용은 학문 발전과 관계가 멀고 심지어 연구 윤리까지 심대하게 훼손하고 있어 연구자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인해보니 실상은 이러하다. 먼저 태지를 재현했다. 연구자들은 연구에 앞서 선행 연구자 J교수를 만났고 그를 통해 태지에 대한 연구 내용을 자문 받았다. 서지학자 J교수는 1991년 연구 논문을 통해 태지의 역사와 더불어 원료가 되는 해캄의 존재에 대해 규명했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연구 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선행 연구자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참고 문헌에서조차 누락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 최초로 태지의 원료가 해캄이었음을 밝혔다고 하면서 100년 전에 사라진 태지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대대적으로 연구 업적을 부풀려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언론은 이들의 거짓 정보에 발을 맞추듯 자체 검증 없이 복사 보도했다. 100년만에 재현에 성공했다는 태지는 지금도 한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인사동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다음 시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는 응시자가 준비한다. 이 종이는 크기와 품질이 규격에 맞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지는 두껍고 질이 좋으며 표면이 매끄럽다. 조선시대에 시지는 과거 시험이 폐지된 1894년까지 생산되었다. 산림과학원은 이 종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33년 다트헌터가 은평(지금의 신영동)에서 장판지 뜨는 광경의 사진을 유일한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또 세검정 장판지 기술이 의령의 장판지 기술과 출발이 다름에도 억지로 연결시켜 마치 의령식 장판지 제지기술이 시지 기술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산림 과학원은 사진을 오독했고 사실을 심대하게 왜곡했다. 그들이 재현한 것은 1970년대 의령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판지였을 뿐 시지는 아니었다. 시지와 장판지는 재료와 초지법이 다르고 제조 공정이 다르다. 특히 시지는 인쇄 적합성에서 매우 우수한 종이로 장판지와 완전히 다른 종이이다. 세 번째 감지를 재현했다. 감지는 쪽물을 들여 완성하는 종이이다. 이 감청색 염색지는 고려 조선시대에 주로 불교 경전을 사경하거나 변상도를 그리는데 사용해 왔다. 지금까지 짙은 청색의 감지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이고 연구의 대상이다. 감지는 완성된 한지에 염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선 종이의 섬유가 강한 잿물 성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내절강도나 인장강도가 현저히 약화된다. 감지 재현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보면 재현 과정이나 절차 그리고 완성도에 문제가 많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감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용역에 참여하여 자신이 이미 완성한 기술을 복수로 이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학문 연구는 자료와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연구 성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과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 과제 등에 이르기까지 서술해야 한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한지 연구자들은 연구 성과를 훔치고 왜곡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조차 곡해했고 기 발표한 연구조차 중복 수행했다. 거짓과 속임수에 국민을 속이고 있다. 국가기관의 연구자의 연구윤리가 이정도면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닌가?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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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2 15:28

일고수이명창

아무리 뛰어난 판소리 명창이라 하더라도 노련한 고수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무대를 만들 수 없다는 의미를 뜻하는 말이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다. 판소리는 소리꾼의 역량과 성향, 관객의 반응과 분위기 등에 따라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느낌을 만들고는 하는데,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북장단과 추임새를 통해 바로잡는 이가 진정한 고수이다. 더욱이 고수는 무대에서 홀로 고독할 수 있는 소리꾼의 상대 역할을 담당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도 하고, 관객의 호응을 유도해 소리꾼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사설을 잊었을 경우 능청스럽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판소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수이지만, 관객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객석을 바라보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소리꾼과는 달리 고수는 소리꾼을 바라보며 명품 조연 역할을 할 뿐인데, 판소리 고수처럼 우리 지역 문화현장에서 명품 조연을 맡고 있는 숨은 일꾼 이야기를 해보자. 야외 녹화 현장이나 행사장에서 만나게 되는 기술진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빠른 현장 대처 능력과 정확한 기술적 이해가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수들과 날로 새로워지는 장비와의 만남 앞에서 “내가 경력이 얼마인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조명감독 A는 그런 면에서 탁월하다. 언제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답변에 막힘이 없으며,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이 느껴지는데, 오롯이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 덕분이다. 그는 항상 공부하며, 새로운 장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한다. 절대 자신의 위치와 경력을 뽐내지 않으며, 최고의 작품을 위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누구나 그와 일하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새로운 공연,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기획자 B는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의 기획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언제나 공연의 준비 과정 자체를 즐기며, 현명한 판단으로 녹록하지 않은 지역의 현실을 넘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고는 한다. 변하지 않는 그의 열정과 전문적인 업무 역량 덕분에 관객들은 지역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을 만나는 행운을 맛볼 수 있다. 항상 진지한 고민과 가슴 뛰는 도전을 위해 열심이며,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의 미소에서 행복을 찾는 그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문화계의 대표 일꾼에서 이제는 예술경영을 고민하고 있는 관리자 C는 내일이 기대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성실한 자세로 일해 왔으며, 지역의 동료 예술인들을 위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며,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사업을 통해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응원하며, 새로운 관객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회성이 아닌 지역 문화의 지속적인 가치를 가꾸어가는 중심에 그가 자리하고 있음은 너무도 다행이며, 그의 새로운 행보가 기대된다. 눈에 잘 보이는 명품 주인공 뒤에 진심을 다하는 조연들이 어디 이 세 사람뿐이겠는가?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 그러한 그들의 열정이 있기에 지역 문화계가 더욱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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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5 18:24

민본을 지켜온 땅의 기운

이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은 일찍부터 군주가 백성으로부터 존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이 그릇된 정치를 할 때마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고, 군주의 하늘’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반상의 귀천과 남녀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왕조 세습을 부인했던 정여립(1546∼1589)의 꿈과 토지는 백성이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며 낮은 곳에서 민본을 실천한 유형원(1622∼1673)의 바람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사람이 하늘이다.” 외치며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군은 곳곳에 집강소를 설치하며 풀뿌리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았다. 부안 우동리에 터 잡고 칠산바다 위도를 율도국 삼아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은 <호민론>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반발하는 백성이 있음을 알렸다. 일제강점기에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1923년 정우상(1911∼1950)이 13세의 나이로 매일신보 신춘현상공모에 당선된 동화 「무도(舞蹈)하는 어(魚)」의 핵심은 임금이 갖춰야 할 으뜸은 백성의 소리를 고루 들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다. 1930년 김완동(1905∼1963)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에는 정사에 무관심한 채 악착같이 자신의 이익만 좇던 임금이 백성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내용이다. 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임금은 몰아내야 한다는 두 작가의 신념은 1926년 공립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과 일본인 교장 추방 사건으로 이어졌다. 김제소년회에서 활동한 곽복산(1911∼1971)의 동화 「새파란 안경」(1928)은 물욕에 눈이 먼 부자가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 내용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1929년 전국의 소작쟁의 389건 중 전북에서 일어난 것이 314건이라는 기록은 이 작품들의 가치를 더 확고하게 한다. 글에는 작가가 속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사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에서 청년과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운 것도 바른 정치를 일깨우기 위해서다. 1960년 4·19혁명에 앞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첫 시위가 전주에서 있었다. 전북대 학생 7백여 명이 독재 정치 타도와 3·15 부정선거의 재선거를 요구한 ‘전북대 4·4운동’이다. 1965년 3월 한·일 외교 회담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벌어졌을 때도 전북대와 전주고 학생 수백 명이 ‘매국적인 한·일 회담 절대 반대’를 쓴 현수막을 들고 시내를 누볐다. 유신 치하에서 처음 구속된 성직자는 1972년 12월 13일 전주남문교회에서 강제 연행된 은명기(1921∼1996) 목사다. 원광대·전북대·전주대 학생들이 앞장선 1980년 5월 4일 시위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운동이며,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주축인 5·27시위는 고교생이 스스로 무리를 이뤄 분연히 일어선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시위다. 1980년 5월 17일·18일 전주의 처절한 밤과 5·18민주화운동의 첫 희생자인 이세종(1959∼1980) 열사, 1987년 14개 시·군의 거리를 가득 메운 6월항쟁, 2000년대의 촛불집회 등은 얼마나 애절하고 당당한가. ‘부정’이 ‘정의’를 압도하는 시대에 ‘민주’와 ‘민본’은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가치가 되고 있다. 난세 속 4·10 총선, 외침과 저항과 혁신이 가득한 이 땅의 기운을 거스르지 말자.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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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8 16:23

지방 소멸과 고향 붕괴를 보며

지방 붕괴니 지역 소멸이니 하는 말 뜻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모두 소중한 고향도 잃어간다. 말하자면 거주민 감소를 넘어 아예 시골 동네가 텅텅 비어간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거나 사망에 의한 자연 감소일 터이다. 보충되거나 채워짐은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동네마다 아기 울음 들린 지가 몇십 년이 넘었다고들 말해진다. 사람 사는 데 따른 모든 부차적 문화나 기구 또는 제도도 소멸된다. 삭막하고 휑한 분위기가 농촌마다 다르지 않다. 아직 빈집들은 몇몇 남아 있어서 겉으로는 가옥 수가 유지되는 듯하나 마을을 들어가 보면 사람의 기척이 없다. 인간의 아름다운 정서를 누리던 소중한 고향 산천이 인정 떠난 낯설고 물설은 타향으로 변모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러운 일인가? 부모님 자애로운 눈길이 서려 있던 고샅길 하나하나가 폐허가 되고 정겹던 그 옛 추억마저 소멸되는 게 아니겠는가? 요샛말로 귀촌 귀농이란 말이 있어 ‘고향 되돌림’에 대한 시책이 제시되고 있으나 그 실효는 미미할 뿐이다. 그래서인데, 필자는 감히 의견 하나를 내고 싶다. 막연한 낭만풍의 귀촌은 실효가 없을 터이고, 돌아가서 무슨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은 즐거움이 되는 것이어야 하고 경제적 생산성도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인용해 본다. 장차 전답이 잡초로 무성할 것이니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리라 하는 소위 선언문이다. 살벌하고 번다한 도시 생활과 벼슬길을 청산하고 인간 성정이 부활하는 자연 귀의의 주장인 셈이다. “돌아가리.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 어찌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으리. 지난 날이야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앞날은 좇을 수 있음을 안다네. 실로 길은 잃었어도 멀리 가지는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안다오.” 긴 명문이었다. 도연명은 고향에 돌아가 글을 읽었다. 문학과 학문을 달성시켰다. 필자는 그 의견 하나가 예술인들을 농촌에 영접하자는 것이다. 빈집들을 수리하여 저렴하게 임대해 주어 맹렬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게 터전을 마련해 주자는 제언이다. 농촌이 느닷없이 예술촌이 되는 것이다. 별장의 개념이 아니다. 주민등록도 마쳐서 주민 인구수도 늘리고 농촌 생산물 소비 통로도 마련하는 상부상조의 실현을 해보자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은 자연 빈번히 교류할 것이다. 호강스러운 말이지만 무슨 힐링의 계기도 되며 약간은 지역 경제도 살아나지 않겠는가?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여타 골고루 재주 있는 예술인들이 농촌을 드나든다면 사람 사는 정경이 살아날 것이다. 옛날에 조정에서 고급 벼슬아치를 벽지에 귀양 보냈는데, 그 배소에서 학문과 문학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부수 효과가 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사람 하나, 문명한 사람 하나 이주는 그 지역의 명소화를 이끄는 법이다. 강진에 머물던 정약용 선생의 경우가 그 본보기이다. 유명 소설가, 유명 시인들을 지자체에서 크게 환대하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필자의 생각은 그런 화려한 귀촌을 말함이 아니라 잠재력 있는 예비 예술인, 아주 유명치는 않아도 성실한 예술인을 영접하자는 것이다. 루소도 그랬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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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15:55

전통한지 복원보다 세계유산 지정이 우선인 나라

한국의 전통한지는 무엇이며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는가. 이 물음에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문화재청에서 한국 전통 한지 기술의 근거로 제시하는 자료는 류행영의 제지기술이다. 그의 전승 이력을 살펴보자. “자신의 부친에게 배워 한지를 제작하던 김갑종 씨로부터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 받아 55여 년 동안 전통한지 제작에 몰두해 왔다. 김갑종 선생은 ‘일제 강점기 군용지’를 제조하여 납품하던 장인이었으며 그 제조 기술은 유일하게 류행영 선생에게만 전수하였다” 무형문화재는 계보 중심에 의한 전승을 기준으로 한다. 류행영은 그의 부친과 부친의 제자 그리고 보유자에게 이어졌다는 계보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유일하게 전승받은 제지술이 일본 군용지 기술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한지장인을 지정하면서 일제 강점기 전쟁물자인 군용지를 만들던 기술자를 대한민국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지정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전통한지에 대한 첫 단추부터 어긋나게 만든 파행의 단초다. 지금 우리는 한국 고유의 한지에 대해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부르짖는 황당무계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 한지기술은 정립되어 있는가? 한지를 뜨는데 사용하는 발과 발틀은 전통성을 가지고 있는가? 연구 성과는 물론이고 연구를 시도한 기록조차 없다. 도구뿐 아니다.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조차 종이를 뜨는 전통 초지법이 무엇인지, 어떤 기법이 있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하나의 줄이 발틀의 뒤에 매달린 채 물을 흘리며 뜨는 기법만이 유일한 한국식 초지법이라 주장하지만 조선시대 유물에는 가둠뜨기 종이도 다수 존재한다. 더욱이 줄을 이용한 흘림뜨기는 1953년경 일본식 가둠 뜨기 도구를 새롭게 개량한 초지법으로 조선시대 제지법과 다르다. 이 초지법은 많은 양을 뜰 수 있다는 경제성 면에서 선호했지만 앞과 뒤의 종이 두께가 다른 관계로 홑지 두 장을 엇갈리게 놓아 두 장을 하나로 합해야만 만들어지는 불완전 방식이다. 제지법의 관점에서 보면 단점이다. 결국 한지의 특성은 완성품인 종이가 말한다. 현대 한지장이 만든 한지는 조선시대 종이 수준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다. 특히 밀도가 크게 낮으며 새롭게 종이 표면에 남겨진 발 지지대 자국으로 표면이 균질하지 못하다. 백색도는 낮고 크기도 작다. 이것은 많은 이야기를 시사하고 있지만 특히 원료처리와 도구 그리고 초지법이 달랐음을 반증한다. 조선시대의 종이 한 장조차 재현하는 기술력이 없는 현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문화유산의 실체만 있을 뿐 과거의 도구와 제지술은 사라졌다. 그래서 전통한지는 긴급 보호가 필요한 종목이다. 시급히 원형 기술을 찾아 복원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세계유산 지정에 앞서 전통한지 기술부터 복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등재운동단체와 이에 편승하는 중앙부처, 지자체는 유네스코 지정을 위해 온갖 술수와 편법 그리고 세몰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필자는 지정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정부와 관계부처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전통한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신용장도 없으면서 세계저명 미술관 미술품 수리와 복원에 한지가 쓰인다는 거짓 정보 등을 언제까지 언론이 받아쓰게 할 것인가? 거짓은 아무리 덮어도 거짓이고, 따라서 영원히 거짓이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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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5 16:43

제발 지방방송 좀 꺼

“지방방송 좀 꺼!” 교실 한쪽 집중하지 못하고 떠드는 아이에게 주는 선생님의 핀잔이자. 술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울 때 사용하는 독기 어린 표현이다. 오늘은 그 지방방송 이야기를 해보자. 내 어린 시절에는 1대의 텔레비전 앞에 수많은 동네사람들이 모였지만, 내 아이의 어린 시절인 지금은 1명의 시청자 앞에 수많은 텔레비전이 존재한다. 누구나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으니, 지방방송의 경쟁력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참고로 서울을 중심으로 지역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는 ‘지방(地方)’과 달리 ‘지역(地域)’은 사회 전체를 동등하게 나눈 일정한 공간의 의미이니, 지역에 사는 우리는 ‘지역방송’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옳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지역방송이다. 흔히 “지역방송은 재미가 없어요”, “왜 서울의 재미있는 방송을 못 보게 하는 거예요”라고 말을 한다. 지역방송 피디인 나로서도 부정하기 어려운 지점이 충분히 존재함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정말 전주MBC와 JTV 같은 지역방송이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루 종일 서울 중심의 이슈와 사건만 보도되는 뉴스, 인기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프로그램, 세계를 오가며 제작한 걸작 다큐멘터리의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을 수 있으나, 그 어디에도 지역에 사는 우리의 모습과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다. 지역에는 누가 사는지, 지역에는 어떤 문화가 있는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루 이틀이 아닌, 매일 매일이 이렇다면 지역에 사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지역방송도 당연히 볼만하여야 하며,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더 나아가서는 타지에 살고 있는 출향민이 “이게 우리 동네 이야기야”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방송이어야 할 것이다. 내 나름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장수 프로그램을 뽑아보았는데, 전주MBC의 ‘얼쑤 우리가락’과 JTV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이다. ‘얼쑤 우리가락’은 1995년 첫 방송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26년을 이어온 국악전문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 지역방송을 대표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국악 꿈나무를 발굴하는 것은 물론 고품격 콘서트의 기회를 제공해 국악의 저변을 확대하였으며, ‘광대전’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향 전주의 자긍심을 높인 프로그램이다. 또한 2008년 5월, 첫 방송을 시작으로 17년간 지역 전통시장을 탐방하며 제작하는 ‘와글와글 시장가요제’는 매주 수많은 지역민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더욱이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는 ‘복지’이고 ‘문화활동’이기도 하다. 특히 전주와 같은 도시를 떠나 시골의 작은 전통시장을 찾을 때 더욱 그러한데, 작은 면(面)에서 녹화가 있는 날이면 수백의 관중이 모이고, 도시의 대형 공연장 못지않은 흥겨움이 넘쳐난다. 지친 농촌생활을 벗어나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해방구 같은 역할을 지역방송이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장의 논리로만 결정된다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모두가 서울만을 바라보며 지역의 가치가 무시되는 사회, 과연 우리의 미래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역 소멸이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시대에, 지역을 보다 살기 좋고 즐거운 공간으로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역에도 사람은 살고, 문화가 필요하며, 그러한 곳에 지역의 방송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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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8 17:07

‘미술로창’ 10년이 남긴 선물

㈔문화연구창의 ‘미술로창 잡담클럽’은 매주 수요일마다 미술관을 찾아 그림 보고 점심 먹고 수다 떠는 모임이다. 2014년 2월 26일 첫 모임을 한 미술로창은 2024년 2월 28일 531회를 끝으로 10년의 여정을 마쳤다. 531주의 수요일마다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미술관을 찾은 것이다. 미술로창의 진행 과정은 항상 같았다. 매주 월요일 그 주에 찾아갈 전시장을 SNS로 알린다. 수요일 정오에 만나서 그림을 보고, 작가와 만나거나 참가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갹출해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 참가자는 대중없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오면 좋고, 안 와도 그만. 왜 빨리 안 오냐고, 왜 안 왔냐고 묻지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몇 회를 하겠다거나 몇 명을 모으겠다는 계획이나 기대도 없었다. 그저 설·추석·크리스마스 등과 날짜가 겹쳐도 꿋꿋하게 전시장을 가자는 다짐뿐이었다. 10년 동안 회당 평균 참가자는 5∼9명. 적을 때는 2∼3명, 많을 때는 30명에 이르기도 했다. 초기에는 각 영역의 예술인과 문화시설·단체 근무자가 주를 이뤘다가 학생, 종교인, 교사, 주부, 퇴직자, 자영업자, 직장인들로 연령과 직업이 다양해졌다. 매주 전시를 고르고, 작가를 섭외하고, 기록을 남기며 미술로창을 이끈 사람은 한국화를 전공한 고형숙 화가다. “미술관에 가고 싶지만, 낯설고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친구가 돼주고 싶었다. 작품에 대한 이해보다 화가와 작품을 가깝게 느끼기만을 바랐다.”라는 그의 소망처럼 모임이 계속되면서 미술관은 편하고 익숙한 공간이 되어갔고, 화가와도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는 사람이 늘었다. 참가자들끼리 마음을 맞춰 전주시·완주군을 벗어나 군산시·남원시·담양군·서울시·순창군 등으로 꽃놀이를 겸한 미술기행을 떠났고, 화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가 작품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비문과 오기, 현학적 수사가 지나치게 많은 전시 소개 글을 원망하다가 문화시설과 연계해 글쓰기 강좌인 ‘문화예술인을 위한 문장강화’를 열기도 했다. 고형숙 화가는 마지막 모임에서 “많은 분을 만나 나이와 직업과 상관없이 그림과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 시간이었다. 그동안 재밌게 잘 놀았다.”라면서 해산을 알렸다. 그의 말처럼 미술관을 향한 걸음은 때론 해찰하며 느슨하게 때론 유쾌하고 발랄한 나들이가 돼야 한다. <2023 문예연감>에는 2022년 1,612건의 전라북도 문화 활동 중 시각예술이 697건으로 43.2%였다. 경북(621건), 전남(417건), 강원(404건), 충북(401건), 충남(351건), 제주(316건) 등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행사 관람률은 영화 52.4%, 대중음악·연예 11%, 미술 7.3%, 뮤지컬 5.5%, 연극 5.4%, 전통예술 2.4%, 문학 행사 1.9%, 서양음악 1.9%, 무용 0.55% 순이며, 미술 분야는 2019년 13.5%, 2020년 8.7%, 2021년 5%, 2022년 6.7%로 코로나19의 회복세가 더디다. 미술로창과 같은 활동이 지속돼야 할 명확한 이유다. 미술로창은 끝났다. 하지만, 미술로창이 10년 동안 다져 놓은 길은 수천수만의 갈래로 이어질 것이다. 누구든 가까운 사람들과 숱한 미술로창을 만들어 예술작품 감상이 일상다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생활 속 미술로, 헤쳐모여!”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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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1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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