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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창작, 재능 기부가 아닌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소설, 한 곡의 음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들은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낸다. 그런데도 종종 그들의 노력은 '재능 기부'라는 명목 아래 너무 쉽게 요구된다. 예술가의 창작이 단순한 나눔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결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진지한 노동이며, 감정을 담은 창작의 결과물이다. 예술가들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고민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들의 창작 과정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작업이 재능 기부로 취급된다면, 그들은 자신이 쏟은 노력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재능 기부라는 개념은 선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예술가들이 경제적 안정 없이 창작은 지속 가능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점이 예술가에게 정당한 보상이 필요한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다. 창작 활동은 단순한 ‘해주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계와 직결된 일이기도 하다.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예술가는 창작에 전념하기 어려워진다. 예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고, 이는 창작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다. 결과적으로 창작의 질과 양이 줄어들며, 예술가들은 점점 더 창작에서 멀어진다. 정당한 보상이 없으면 예술가들은 경제적 불안 속에서 창작을 포기할 위험에 처한다. 이는 예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잃게 만들고, 우리 사회는 삶의 건강하고 중요한 도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재능 기부'로 예술이 쉽게 소비되면, 예술의 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술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창작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예술의 힘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 예술의 힘은 단순한 상품의 소비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된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자유를 유지하려면 경제적 자립이 필수적이다. 경제적 독립 없이는 외부의 압박이나 상업적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예술가의 노동은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 예술이 주는 감동과 위로, 그 안의 메시지는 결국 자유로운 창작에서 나온다. 예술가들이 경제적 안정 속에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야, 그들의 창작물은 깊이와 진정성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예술가 개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풍요로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국, 모든 노동은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예술 분야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작이 재능 기부로만 소비되는 것은 이 원칙을 어기는 것이며, 그들이 창출한 가치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존중받고, 그들이 가진 창의성과 열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예술의 가치를 지키고, 우리 사회가 문화적 풍요로움을 지속하는 길이다. 예술가의 작업을 단순한 재능 기부로 여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의 작품과 노동에 대한 공정한 대우와 보상, 예술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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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9 15:34

서예의 본고장! 그 뿌리를 찾아서

우리 도는 명실공히 서예의 본고장이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내년이면 15회째를 맞이한다. 잘 어울리진 않지만 필자가 중학교 때 나름 서예부에서 특별활동을 하였다. 사물함도 없던 그 시절에 동아리 수업이 있는 수요일에는 먹과 벼루, 화선지, 붓, 서진을 챙겨서 무거운 가방을 낑낑대고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서예의 본고장인 전북의 피가 모름지기 흐르고 있었나 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했을까? 한자문화권에 속한 고대 한반도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자가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대에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중국의 천자를 직접 만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이 중간에 교역을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기원전 109년으로,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자의 기록은 어떻게 했을까?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무덤에서는 붓과 삭도가 발굴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다호리 1호는 발견 당시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논흙이 공기를 차단하여 무덤 안에서는 통나무로 만든 목관과 대나무 바구니가 부장된 상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나무로 짠 바구니 안에서 5점의 붓과 철로 제작한 삭도(削刀)가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다호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한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 장화(張華)가 기록한 <박물지>에는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몽염(蒙恬)이 붓글씨용 붓을 처음 만든 것으로 전한다. 이후 기원후 105년에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종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나무나 나무판자, 혹은 비단 같은 곳에 붓으로 문자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에서 붓과 함께 출토된 삭도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나무판 같은 곳에 글씨를 잘못 썼을 때 칼로 긁어내는 지우개(書刀)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우개로 사용된 삭도가 바로 전북혁신도시 완주 신풍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다호리유적이 삼한(三韓) 가운데 변한(弁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라면, 신풍유적은 마한(馬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다. 신풍유적은 다호리보다 시기가 앞서는 기원전 2세기경의 유적으로 신풍유적이 발굴된 전북혁신도시 일대는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철기가 출현한 곳이다. 그 최초의 철제품 가운데 삭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단, 다호리유적은 오랫동안 습지로 보존되어 붓이 남아 있었지만, 신풍유적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유기물질은 이미 다 썩어서 사라져버리고, 철로 만든 삭도만 남아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아직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삭도가 문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자의 시작을 알려주는 최초의 유적이 전북혁신도시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이 삭도가 전시되어 있다. 길이가 20㎝ 남짓 되고, 겉에는 녹이 슬어서 실물을 보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이 앞으로 써내려갈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서예(書藝)의 본고장임을 자부하는 전북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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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5:02

친일파의 생존법

저들의 생명력은 길다. 길고 집요하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시비, 선악의 구별도 내동댕이쳐버리는 본성, 그것이 뼈에 새겨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외세가 나라를 침탈하는 난세의 국면에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엇이 옳은지와 무엇이 살길인지를 궁리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아슬아슬 오가며 생존을 이어간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식구들의 목숨을 건사하는 일, 그것이 난세의 민중들이 그 험한 세월을 견디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옳은 길만을 바라보고 재산도 가족도 초개같이 버릴 각오를 한 이들은 끝내 저항하는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이고, 오로지 무엇이 살길인지, 어떻게 해야 난세의 혼란을 틈타 한밑천 두둑이 챙길지를 고민한 자들은 친일파가 되어 호의호식 살아남았다. 동양적 사고의 중심에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에는 네 가지 정도의 기준이 필요하다. 나보다 약한 존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일,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친일파들의 사는 방식에는 그 어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남을 짓밟고 대의명분을 어기면서까지 제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인간답지 못 한 일이요 나쁜 짓이다. 친일파의 뿌리는 바로 나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의 길을 걸은 자들이 세상이 바로잡힌 뒤에 살아남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소한 자신의 무지와 잘못된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깊이 은둔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저들에게 그런 성찰의 기회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저들의 재산과 알량한 경험을 새 나라를 세우는 근간으로 삼으며 저들을 지지하고 부추기는 길을 택했다. 약하고 가난하나 올곧게 산 이들에 대한 저들의 공포와 적개심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왜곡된 이념전쟁의 논리로 삼았고 그로 인해 무수한 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이 저들이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이승만 시대의 진면목이다. 한동안 잠잠한 듯하던 친일파들이 다시 세상의 중심에서 분탕질을 일으키는 데에는 이전과는 다른 분명한 이유가 있다. 대다수의 기성 세대들이 분명히 정부수립일이라고 배우고 외웠던 1948년 8월 15일을, 그 시절의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정부수립이라 쓰고 찬양하던 그 날을 두고, 건국절 운운하며 기를 쓰고 내세우려는 데에는 분명 새롭고 음험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뼛속까지 친일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자들이 이 나라 권력의 중심에 선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식량 수탈과 병참기지화를 위해 건설한 철도며 공장을 두고 저들이 내린 시혜쯤으로 여겨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다. 그래서 식민 통치는 그 자체로 국제법상 정당한 것이었다며 진짜 독립투사들을 조롱하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밀어 올리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건국절 운운한 적 없다는 정부가 독립운동 단체들을 포함한 정부의 요직에 저들 이데올로그를 줄줄이 배치하고 있는 것은 장차 한일군사동맹까지를 염두에 둔 집요한 포석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은인자중하다가 그럴듯한 이론을 들고 나와서 다시 발호하는 친일파들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치장을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무엇보다도 저들의 뿌리가 참으로 나쁜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고 알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곽병창(극작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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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6 15:27

K-music의 원소스인 판소리, 전용공간 마련으로 글로벌 대응성 강화해야

며칠 전 막을 내린 파리 올림픽은 도시의 지형지물을 활용한 파격적인 개막식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동안 여느 올림픽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기장 밖에서, 경기장을 벗어난 혁신적인 개막식을 펼친 것에 대해 혁명의 도시, 예술의 도시다운 면모를 발휘했다는 평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은 이른바 ‘파리 스타일’의 개막식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막식의 기저에는 파리와 프랑스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파리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그들의 역사, 문화, 스포츠, 가치지향을 서사로 엮어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취하고 싶은 내용을 영리하게 잘 포장하여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번 개막식에서는 파리라는 도시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며 하나하나 그 가치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세계인들의 축제를 통해 프랑스가 가진 콘텐츠를 거대 작품에 집약하여 보여줌으로써 파리의 도시 공간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 전주라는 도시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전주는 전통문화예술을 생산·소비하는 지역으로 표상된다. 이는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창극사(1940)에 수록된 89명의 판소리 명창 중 37명, 전·후기 8명창과 근대 5명창은 14명으로 전북 출신이 제일 많고 전북도가 지정한 판소리무형유산 보유자는 10명으로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이다. 전라감영, 전주통인청대사습, 전주권번, 전주국악원, 청학루로 이어온 판소리 교육은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전국고수대회를 개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소리문화에 대한 도민의 가치 인식과 관심은 전북도립국악원 설립과 우진문화공간의 <판소리 다섯바탕의 멋>, 한벽문화관의 <해설이 있는 판소리>를 기획하여 소리꾼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 예술적 토대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개최와 전주판소리합창단을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전주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생산자, 패트런(patron), 소비자가 균형 있게 정주하고 있어 소리꾼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세대를 이어 가꾸어 온 판소리적 환경을 전주의 대표 문화예술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나아가 K-music의 산실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판소리 전용 공연 공간 마련이 요구된다. 다른 지역에서는 판소리가 자연도태 되어 소리문화가 사라져버렸지만 전주 소리판은 처절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하며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고귀하고 숭고한 예술자본을 완전하게 정착시켜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아닌 동시대인들에게 살아있는 소통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이제는 특성화된 전용 공연 공간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전주에서는 소리꾼은 물론 소리에 진심인 팬덤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 판소리적 생태계는 양호하다. 이러한 판소리적 자본이 세계적인 예술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글로벌 대응성을 강화한 전략이 필요하다. 판소리는 K-music의 원천소스이자 토종 유전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다양한 음악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 지구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유문화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다. 우리는 전통예술의 세계화·대중화를 외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유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을 때만 세계화는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전주는 판소리’라는 명제가 정합성을 획득하여 전주라는 도시 공간의 대표 문화로서 전 인류와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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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9 15:11

오롯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기를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2011년, 영화계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신예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이웃집 문에 붙였던 쪽지다. 그 해,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술계의 비극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인의 열악한 삶을 고발하며, 예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었다. '최고은 법'으로 불리며, 이후 10년 넘게 수차례 개정을 거쳐 예술인 복지의 기틀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하지만, 예술인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이 물음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예술인복지법 시행 이후, 예술인 지원의 방식과 기준에 변화가 있었다. 예술인은 단순한 창작자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로서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는 헌법 제1조에 명시된 '국가는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과 합의의 결과다. 이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술 노동과 예술인 삶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올해 예산은 5년 전보다 166% 증가한 1,067억 원. 예술활동준비금, 생활안정자금, 예술인 고용보험, 공공임대주택 지원 등이 그 대표적 사업들이다.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도 많은 예술인이 중앙복지사업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 결과, 약 6,100명이 예술인 활동증명을 완료했고, 올해 601명이 예술활동준비금 18억 3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는 전북지역 예술인 활동증명 완료자 수 기준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높지 않은 비율이라 아쉽지만 그나마 이를 제외하고는 지역 예술인들이 혜택 볼 수 있는 사업은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국토부와 협력하여 예술인들에게 주거∙창작공간을 지원하는 사업은 주로 서울 중심부에 공공임대주택이 위치해 있어 생활권이 지역인 예술인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자녀돌봄센터도 마찬가지다. 또한 예술인고용보험과 산재보험도 문화예술 용역 및 일거리와 연결되는 것을 고려할 때, 예술시장이 열악한 지역의 현실에서는 그 체감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지역 소외와 차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인복지사업에서도 나타나는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예술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청년예술가의 지역 유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국가의 정책은 지역 곳곳으로 이어져야 하며, 예술인 복지정책 또한 예술인의 삶 곳곳에까지 맞닿아야 한다. 중앙과 지역, 현장과 사람, 일상으로 연결되는 범국가적 예술인 복지정책을 위해서는 지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중앙과 지역을 잇는 강력하고 활발한 협력적 연계망이다. 그리고 광역단위든 지역이든, 예술인 복지 기능과 역할을 위한 거점이 마련될 때, 중앙 정책이 지역 곳곳, 예술가의 삶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다. 지역 예술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예술인 복지정책 한계점에 대한 지역의 제안이다. 예술인들의 삶은 좀 나아졌을까? 지금도 예술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증하고 있을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란다. 비록 작고 습한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지라도, 오롯이 창작에 매진할 때, 무대와 관객을 압도하며 우리 삶과 사회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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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2 17:36

'파묘(破墓)'를 파다

근래에 천만 관객을 넘은 영화가 〈파묘〉이다. 이야깃거리도 흥미롭지만 고고학을 전공한 필자의 눈에는 무당, 굿, 목관 등의 다채로운 아이템들이 눈에 들어왔고, 영화를 보고난 후 마치 과거 속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은 무엇일까? 바로 무당이다. 영화 속 주인공 이화림(김고은)의 직업인 무당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과 맞닿아 있다.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고, 단군왕검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군주이자 곧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신화 속의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 천 년 동안 제사장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농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당시에는 비가 안 와도, 비가 많이 와도, 병에 걸려도, 혹은 죽은 조상을 위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내세를 위해서도 단군을 찾았을 것이다. 단군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특정인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제사장 단군이 신과 소통하는 모습은 흡사 영화 속에서 돼지를 재물로 바치고 이화림이 굿을 하는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는 일반인이 가지기 어려운, 뭔가 신령한 도구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때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천부인 3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칼과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거울, 신의 소리를 뜻하는 청동방울 이 3가지로 추측되고 있다. 이 천부인 3개가 바로 절대 권력과 신비로운 힘을 상징하는 희귀 아이템인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는 봉분을 파헤치자 목관이 등장하는데, 이 목관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지금도 사용하는 나무관이 무엇이 대수겠냐만 기록이 적은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데 목관의 출현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관을 사용하기 전에는 땅에 바로 시신을 매장하기 때문에 부장품이 많이 없지만, 목관을 사용하면서 관 내부에 공간이 생기고 부장품이 증가한다. 부장품의 희소성이나 수량을 근거로 계층을 나누고, 계층이 다양해질수록 보다 발전된 사회로 해석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목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되는 시기에 청동거울과 청동칼, 청동방울과 같은 의례용 청동유물이 함께 발전한다는 점이며, 이는 곧 계층이 나뉘고, 권력자가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시작, 즉 마한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롭게도 그 고대국가의 시작을 알려주는 목관과 청동유물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발굴된 지역이 바로 전북혁신도시이다. 전북혁신도시는 당시 고대국가의 수도 서울인 것이다. 2024년 영화 파묘에는 마한(馬韓)에 터전을 잡고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조상들이 마한에서 백제로, 백제에서 후백제로, 후백제에서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나는 요즘이지만 목관의 역사, 무당의 역사가 2천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더욱이 그 시작이 바로 우리 동네라는 점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소중한 우리 것들이 차고 넘친다. 약간의 호기심만 있으면 누구든 고고학자가 되어 어디로든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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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5 15:47

참 나쁜 극장

유대인이면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에 관한 열 가지 신화>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불모의 사막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짜 신화부터 통렬히 비판한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역사가답게 그는 1917년의 발푸어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모든 조약문, 선언, 협정문 등을 일일이 들어 증거로 삼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마을 500여 개를 짓뭉개고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쫓아내버린 1948년의 대재앙(Al Nakbah)은 모든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이 저질러온 학살과 점령, 폭격, 장벽 세우기, 물과 전기마저 끊어버리는 가두기 정책 등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고통, 공포, 처참한 일상에 대해 그는 매우 차분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숱한 증거와 증언을 통해 밝혀낸다. 그리고 이처럼 처참한 내부 식민지의 주민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감내하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종족 절멸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정책임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 떠나간 이스라엘 대사는 이임 인터뷰에서, 불모의 사막 위에 건국한 이스라엘 역사를 자랑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은 매우 부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는 입장을 세련되게 설파하고 있다. 도대체 저 나라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어느 누구도 하마스의 테러에 의한 작년 연말의 기습과 대량 살상, 납치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강심장도 그렇게 끌려간 이들이 무사히 구출되어 나오기를 바라지 않거나 그 일을 저지른 조직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모두의 성찰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성찰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개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분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모든 일의 연원을 찾고 그동안의 과정을 통렬하게 반추해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가자에서 이스라엘이 퍼부어대는 일상의 폭격은 병원, 학교, 구호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몇 해 전 거기 얹혀 전해온 믿기 힘든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폭격의 현장, 그 죽음의 도시에서 직선거리 몇 킬로 바깥의 언덕 위, 맥주를 마시며 이 광경을 즐기고 있던 한 무리의 이스라엘 청년들, 그들의 환호는 참 해맑고 숨김이 없었다. 저 가학적인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는 참 나쁜 극장과 관중들-. 그리고 다시 오늘, 우리는 가자의 비극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댓글을 바라보고 다시 절망한다. 저 비극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세상의 지도에서 없애는 것이라는, 저항할 여지를 없애는 길은 인종 청소밖에 없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이 인터넷 공간을 망령처럼 떠돈다. 저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기를 빈다. 원래 극장은 비극을 위한 공간이었다. 타인이 겪는 진퇴양난의 비극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관중들은 전율하고 공포에 떨었으며 자기 삶을 깊이 반성했다. 그게 극장이 이룩해온 순기능이다. 사자에게 뜯기거나 동료들끼리 찔러 죽이는 검투 시합을 와인을 마시며 즐기던 극장과 그 문명은 결국 처절하게 망했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현장에서든 사이버공간에서든 저 비극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 ‘온 세상이 가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고 온 세상이 가자를 지켜보는 서구를 지켜보고 있다. 서구의 도덕적 자살을 우려하면서~’ 프레데릭 로르동의 말이다. 어찌 서구뿐이랴? /곽병창(극작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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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5:06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문화생태계 구축에 구심점 역할 기대

전북은 예로부터 전통예술의 대표적 생산지이자 공급지로 전승과 유통이 활발한 지역이다. 근대 시기 권번이 해체된 후에도 지역 유지들이 전주국악원을 설립하여 전통예술의 전승 활동을 지속해 왔고, 1960~70년대 라디오, TV 등 대중매체가 문화 전반을 잠식하였을 때도 문화 예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전북의 이러한 문화예술적 기반은 전통 예인을 대거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었고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이하 도립국악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로 개원 38주년을 맞은 도립국악원은 행정 관료의 운영에서 벗어나 국악전문가 수장 체제로 거듭나면서 국악계는 물론 도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또한 국악원 본원의 증개축으로 신청사 입주를 앞두고 있어 국악 연수, 국악 공연의 상설화 등 앞으로 국악의 전승과 생산 공간으로서도 이목을 받고 있다. 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은 8만6000여 명의 연수생 양성, 학술행사, 전통예인 구술 채록, 민속예술발굴총서 출간 등 국악교육과 연구로 국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제고하며 국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해 왔다. 나아가 예술단은 지속적인 정기연주회(창극단(57회), 관현악단(50회), 무용단(32회))와 기획·상설연주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며 대표 예술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이에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악가무 일체를 갖춘 제작환경을 구축하며 수준 높은 공연작품을 생산 유통하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공연예술단체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전북도립국악원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80~90년대 부흥기를 맞이했던 국악계는 현재 학령인구 감소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영향으로 지방 대학의 국악과는 폐과와 통폐합을 거듭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 시대를 지나 생성형 AI가 산업생태계를 지배하는 AI사피엔스시대(AI를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에 진입하고 있다. 이처럼 국악 교육을 통한 전문 인재 양성이 축소되고 가파르게 사회 구성원과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 도구가 급변하고 있는 시기이다. 문화예술을 교육, 생산, 유통하고 있는 도립국악원도 문명의 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산업 구조의 패러다임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며 원천소스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멀티유즈(multi use)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 동시대인들의 요구와 동시대의 문화 생산은 어떠한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최근 창극 <춘향>을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도립국악원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수준 높은 전통 소리를 바탕으로 세련된 시청각적 요소를 구현하며 낯익음과 익숙함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동시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국악의 대중화와 저변확대에 가치를 두었다면 도립국악원은 이제부터는 전북의 문화 환경을 어떠한 양상으로 조성해 나갈지에 대한 촘촘한 밑그림이 요구된다. 또한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느리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생산하는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역할과 기능 수행이 절실하다. 나아가 전북만의 특별한 문화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구심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노복순 실장은 한국음악을 중심으로 공연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국악평론가이자 연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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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2 15:16

하얀양옥집 문턱을 넘으면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도민들의 눈높이에 다가서기 위한 취지로 역대 도지사가 사용했던 관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도민에게 돌려주는 게 도리다.” 김관영지사의 뜻에 따라 도민들에게 높고 큰 성역이었던 관사가 철문을 떼어내고 담을 낮춰 도민들이 문턱을 드나들 수 있도록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지사 취임 2년만이고 이 집이 지어진지 53년 만이다. 1971년 준공한 2층 단독주택. 도민들에게 환원하겠다는 원칙은 정해졌지만, 콘텐츠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어떤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가 결정되기까지 상당한 고민의 과정이 있었다.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의 역할과 한옥마을이란 관광지 안 장소로서 전북을 알릴 수 있는 복합적 기능을 담는다는 방향성에 의견이 모아졌고 결국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게 어렵고도 무거운, 그래도 흥미롭고 해볼 만한 숙제가 던져졌다. 곧 바로 관사조성 TF가 꾸려졌다. 구도심에 위치한 타지역 사례에 비해 한옥마을 관광지 안에 위치하고 크지 않은 아기자기한 사이즈인 점을 최대 장점으로 살리는 게 포인트. 내부에서 이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외부의 도움을 받아 이 집의 이름이 찾기로 했다. 촘촘한 공모를 거쳐 “하얀 양옥집”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불렀던 ‘하얀집’, ‘양옥집’의 새로운 버전이다. 과거의 이름이 50년이 흐른 후 오늘의 새 이름이 된 것이다. 관사를 도민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본래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건물의 역사성과 미학, 사람들의 기억과 구술이 한 장소의 이름을 짖는 기준이 된다는 전문가의 의견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걸 보니 정말 제격인 이름이다. 집을 보면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1, 2층 합쳐 100평이 채 안 되는 이 곳에 전북의 컬러를 어떻게 담을까? 먼저 콘텐츠 구성의 원칙을 정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어느 누구나의 곳”이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은 처음부터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꼽는 점이다. 도민 대신 “이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이웃 100명을 모았다.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을 공유하는 방으로 여러 이웃들의 인생책이 있는 곳이다. 세평 남짓의 제일 작은 방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 방문객들이 가장 좋아하고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곳 “100인의 서재”가 하얀양옥집의 철학을 대표한다. 공간 구성의 가장 핵심키워드는 ‘조화’다. 한옥마을 안 양옥집이라는 이질적 충돌을 “양옥집 안 한옥” 콘셉트로 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래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지, 창살, 원목 등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고 자개머릿장을 2층 메인 자리에 놓은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TF 구성 후 두 달여가 지나고 ‘하얀양옥집’이 문을 열었다. 지역 청년들의 <들턱 전(展)>으로 집들이를 마쳤고 지금은 우리가 사는 지역, 동네를 스케치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문턱을 넘어 첫 발걸음이 닿는 이 곳은 늘 새로운 일로 분주합니다. 과거, 휴식과 담소의 공간이었던 응접실에 이제는 작품 한 점을 걸고, 라디오와 TV 소리 대신 예술가의 연주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레는 마음으로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늘 멋진 무언가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얀양옥집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 글처럼 예술이 있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공간이길, 문턱을 넘을 때마다 설레이게 하는 것이 우리 지역의 예술이길 바란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임진아 본부장은 전북대학교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관 큐레이터,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업무에 이어 2016년부터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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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5 15:04

돌도끼도 자산이다.

아마 경기도 연천군은 낯설어도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군에 입대한 그렉 보웬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중, 1978년 한탄강변에서 석기 몇 점을 줍게 되고, 이 석기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문화는 날을 한쪽에서만 가공한 찍개문화, 양쪽에서 날을 떼어내 좌우와 앞뒷면이 대칭을 이루는 주먹도끼문화로 구분된다. 마치 찍개가 커터칼이면 주먹도끼는 맥가이버칼일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프랑스 생 아슐유적에서 발견되어 아슐리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고고학자인 모비우스는 주먹도끼가 인도의 서쪽인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확인되자 인도를 경계로 모비우스라인을 설정한다. 이는 곧 구석기문화 이원론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류가 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가미된 시각이며, 당시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인도 동쪽인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됨에 따라 그 학설이 깨지게 된 것이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3만 년 전보다 오래된 유적이 없었는데,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1980년대부터 약 2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일본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같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후지무라는 일본 내에서 신의 손으로 불리게 되며, 그가 조사한 유적은 국가 사적이 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던 2000년, 한 신문사 기자의 몰래카메라로 석기를 땅 속에 묻어 놓고 나중에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후지무라 조작 사건은 일본의 맹목적 국가주의와도 연관되어 있지만, 전곡리유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이처럼 전곡리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구석기 유적이고, 그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주먹도끼이다. 그 주먹도끼가 우리지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남고창IC 자리에서 확인된 고창 고수면 증산유적과 익산 춘포면 쌍정리유적, 전북혁신도시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주먹도끼가 발굴되었다. 우리지역의 구석기문화는 임실 하가유적에서 정점을 찍는다. 섬진강 최상류에 위치한 하가유적은 강이 휘감아 도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곡리와 입지가 매우 유사하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가유적의 석기제작 기술은 섬진강을 따라 일본까지 전해진다. 당시는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 서해는 육지로 이어져 있었지만, 하가유적에서 일본까지 가는 길은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원거리 교류망을 형성한 하가 구석기인들의 기술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올해 5월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화재(文化財)는 물건이나 재화적 의미가 강한 반면, 문화유산(文化遺産)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으로 가치를 더하자는 의미이다. 주먹도끼 한 점이 계기가 되어 연천군이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의 보고가 되고, 30여 년 이상 이어진 구석기 축제가 연천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아쉽게도 우리 지역에서 주먹도끼가 나온 유적은 도로가 나거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임실 하가유적은 지금도 구석기시대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곡리보다는 늦었지만 하가 구석기인의 문화유산을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야 한다. /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한수영 원장은 전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환기의 분묘와 매장>(공저)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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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8 15:13

풍선 날리기, 작란(作亂) 또는 전쟁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띄워 올리는 일은 그 행위만으로도 낭만적이다. 타이완 시골 마을 지우펀의 풍등처럼-. 띄우는 이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풍등이 저물어가는 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를 때 우리는 환호작약한다. 거기 쓰인 글귀가 ‘선영아 사랑해’든, ‘엄마 아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요’든 그걸 띄워 올리는 마음들이 두루 간절하고 아름답기에 나랑 별 관련 없는 풍등에도 같이 손뼉 치며 기뻐한다. 이래저래 풍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맨몸으로는 지상에서 오 미터도 못 떠오르는 인간의 유한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낭만적 소품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에 이런 풍선은 어떤가? 오늘도 어김없이 재난 문자가 온다. “00시 00분경 00지역 상공에서 북한에서 날려보낸 오물 풍선이 포착되었습니다. 야외활동 간 적재물 낙하에 유의하시고 발견 시 내용물은 열어보지 마시고 가까운 군부대나 경찰관서에 신고하시고-.” 말 그대로 재난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풍선을 들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희한한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한쪽은 위대한 공화국 이름으로 한쪽은 풍요의 상징 자유대한의 이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름다운 한반도의 밤하늘을 향해 밤도깨비 두상처럼 괴이한 풍선을 날려 보내며 그들끼리 박수를 친다. 선진국 문턱에 다 왔다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도대체 이 유치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는 풍선질을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대체 낭만적이지도, 랑만적이지도 않다. 전략으로도 전술로도 그다지 효과적일 리 없다. 그저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단순한 발상, 네가 먼저 멈추기 전엔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억지 떼쓰기에 다름 아닌 짓이다. 저쪽이 담아 보내는 건 오물에 양말짝에 담배꽁초요, 이쪽이 보내는 것은 상대방 vip의 포르노 합성사진, 드라마, 가요가 담긴 유에스비란다. 이런 일로 상대방 접경지역의 주민들 사이에 자기 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이 싹트고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심이 사무치게 치밀어 오른다면야 반쯤은 효과가 있다 할까? 문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리 없다는 사실 아닐까? 그렇게 자유대한을 동경하게 하고 싶으면 전면적인 개방정책을 펼쳐서 남한의 드라마며 가요가 북한 주민의 일상을 헤집게 할 궁리를 하는 게 훨씬 빠른 길 아닐까? 적개심과 조급함에 사로잡힌 몇몇 탈북자들이 이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저 불장난이거나 아니면 소동을 만들어 주목받으려는 작란(作亂)에 지나지 않는다. 장난이거나 작란이거나 그것이 총질로 이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들어가고 마는 것을 숱한 전쟁사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끔찍한 일인가? “조카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이래 가지구 약이나 제대로 들어가갔네? 내레 다시 묻갔어. 도대체 이거이 누구를 위해서 보내는 거이가?” 얼마 전 막을 내린 어떤 연극에서 한 탈북자가 풍선 날리기를 막으며 애타게 호소하는 대목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풍선이란 말인가? 제발 멈추자. 이제 먹고 살 만한 나라, 체면과 자존심도 좀 챙길 때가 된 나라가 한발 양보하고 먼저 멈추자. 그게 그리 어려운가? 영 멈출 수 없다면, 그 안에 몇 안 남은 이산가족들의 편지라도 넣어보면 어떨까? 빛바랜 가족사진이라도, 눈물 젖은 손수건이라도 넣어 보내면 어떨까? 꿈인 듯 생시인 듯 답장이 오지는 않을까? 유치한 장난에 하도 지친 끝에 해보는 공허한 상상이다. /곽병창 극작가∙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교수는 창작극회 창작소극장 대표·전주시립극단 무대감독·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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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17:27

전북애향본부가 진정한 애향의 기수다

몇십 년 전이었으리라. 이른 새벽에 경남여객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고향인 남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승객이 고작 대여섯 명쯤 되었다. 그 버스의 행선지는 진주나 부산쯤으로 기억된다. 필자의 옆자리에는 70세가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두 분 대화가 경상도 말씨라서, 아니, 이처럼 이른 새벽에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일찍 서둘러 출동하는 것일가 하는 등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전북을, 전북 사람을 어찌 생각하느냐’는 단도직입적 질문이었다. 그 노인은 서슴없이 금방 질문에 응답했다. 전북 사람들은 한반도 내에서 가장 으뜸 양반들이라고 했다. 자신은 광복 전 일제 시대부터 전국 남한 북한을 안 다녀본 데가 없이 여행했었고, 모든 고장 사람들 다 겪어 보았는데, 그중에 전북(전주) 사람들의 인간성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예절 바르고, 인심이 후하고, 남 배려심이 매우 극진하며 객지인 대접이 가장 융숭하다며 치하에 침이 마르지 않았다. 특히 못사는 사람들이 객지를 떠돌며 살 곳을 찾아 헤매다가 마지막 찾아든 전북에서는 결국 뿌리 내리고 터 잡아 살길 찾더란다. 전북 사람들은 배운데 있는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학문이 뛰어나다는 뜻은 아니고 조백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자기는 금산사 밑 어느 작은 종교에 빠져 일제 때부터 연년세세 전북을 찾았다고 했다. 타향을 하나 골라라 한다면 자기는 전북을 제2 고향으로 여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탁월한 지식인답지는 않았지만 슬기로운 인생 경험은 출중나다 싶었다. 전북인들은 자연을 섬기기를 조상 섬기듯 한다고도 했다. 전북인들은 순정적이고 순종의 미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도 했다. 여리고 감성적이고 남의 일에 잘 울어주기도 하며....그는 또 전북 여성들 칭찬에는 웅변이 되고 있었다. 전북 여성들은 문자 그대로 양반집 규수들이란다.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순종 그 자체이며, 옷 매무새는 또 어떻고, 음식 다루는 일 하며, 특히 김치 잘 담는 손맛은 조선에서 으뜸이란다. 그 노인은 우리네 일상을 거울 보듯이 잘 살펴 그려내고 있었다. 전라도 폄하의 발언은 자기 앞에서는 누구든 용납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가 찾고 있었던 전북의 정신이 열거되는 대화였다. 그런데 정작 전북인들은 자기 장점, 자기 정신을 모른단다. 정말이지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한 일을 찾아 나서는 중후한 단체가 있으니 이름하여 ‘전북애향본부’인 것이다. 전북 중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북의 정신이며, ‘행동하는 애향’을 외치며 함성을 터뜨리는 애향의 기수들....바른 정신은 구현되어야 한다. 옳은 신념은 실천되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새만금 예산 삭감을 정부에 성토하기 위해 버스 100대에 5000 명 전북인을 분발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국회의사당을 함성으로 뒤덮었다. 전북애향본부가 해낸 것이었다. 해방 이래 전북인의 분발, 전북의 분노를 이렇게 폭발시킨 때가 있었던가? 또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모저모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몇 차례나 벌렸다. 그래 순종이 미덕이라며 온순 이미지로만 치장하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마냥 낙후의 쓴맛을 보는 우리 자신에게 성찰과 자각의 대 전기를 마련하는 공동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애향, 이는 자신의 혁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애향은 우리가 찾아 나서는 행동 철학이며, 우리에게로 회귀하는 우리다움의 정려인 것이다.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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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4 18:21

수묵 정신의 고향, 전북

‘수묵’이란 단순히 재료의 측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묵화는, 동양의 관점으로 우주의 기본색이라는 청.백.적.흑.황을 모두 합친 색인 ‘먹’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자연의 본질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성정을 표현한다. 수묵이 인간의 정신이나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매우 유용한 회화 양식이라는 사실은 동양회화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이 이상으로 삼는 상태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정신에서 노니는 풍류의 높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정신이 문예의 진수에 해당한다. 모든 색을 흑과 백으로 단순화시켜 뜻을 증폭시키는 수묵화는 숙명적으로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수묵화에는 단순함과 균형 그리고 조화와 평화가 갖는 국제적 조형언어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수묵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수묵은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는 회화양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묵은, 전신사조(傳神寫照)라는 정신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신을 그려서 뜻을 얻는다는 것은 속진(俗塵)을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 뿐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 까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홍운탁월에 의해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 무경계의 경지 그곳에 수묵화의 세계가 있다. 한국의 화단에서 수묵화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특히 전북과 전주로 좁히면 그 인물은 더 또렷해진다. 송수남 화백이다. 그는 평생 자기 혁신을 통해 변화를 추구해 온 화가이다. 그가 추구해온 창의성과 실험 정신은 미래를 여는 종자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수묵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이다. 수묵이 더 이상 과거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며 현대의 눈과 사고로 그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 수묵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수묵이 시대의 언어임과 동시에 정신의 영역이 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 놓은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주로 낙향한다. 남천(그의 호)에게 있어 흑석골 작업실은 그이의 인생 중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동시에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예술 혼이 정점에 이른 공간이다. 그는 흑석골에 은거하면서 지금까지 그가 세상에서 얻은 영예를 반찬처럼 먹어 버리며 고뇌와 절체절명의 순간마저 스스로 작품이 되게 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형태를 구축하며 새로운 실험을 계속한다. 그리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11년 동안 가족 간의 송사로 시끄러워 잊혀 진 듯 했다. 최근 가족 간의 재산권 다툼 문제가 합의되어 재판이 종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흑석골 작업실에는 개발 이익을 위한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벌써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제는 남천의 미학적 기반이던 고향에서 남천의 예술적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망인은 남천의 작가 정신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속분을 전체 기증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유족 모두 공공성이 있는 미술관이 건립된다면 낙관과 아카이브 등 남천 송수남 화백의 기초 연구 자료를 기증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송수남 화백이 평생을 추구하며 이룩한 예술 정신의 뿌리는 전북이지만, 그가 도달한 미감은 한국 고유의 미학임과 동시에 동양 사유의 고유성이다. 나아가 인류의 보편 세계다. 전주시는 문화 도시를 천명해 왔다. 진정 문화가 생명력이 있으려면 그 문화가 확산되어야 하고 새로운 변화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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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7 15:13

상설공연이 제맛이야

부산, 강릉, 안동, 목포 그리고 전주. 서울로 집중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분산을 위해 문체부가 엄선한 관광거점도시이며, 세계적 수준의 관광도시를 목표로 국가가 지원하고 있는 다섯 도시 중 한 곳이 전주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풍경과 맛깔난 밥상, 푸짐한 저녁 술상까지 전주는 매력 있는 관광지임은 분명한데, 여기에 더불어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의 저녁 시간을 더욱 즐겁게 해주는 것, 상설공연이다. 여러 지자체와 공연단체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상설공연을 추진하였는데, 전주도 나름의 감성을 바탕으로 수년째 상설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상설공연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상적 상설공연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태양의 서커스’다.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된 서커스인데, 1987년 라스베이거스 미라지 리조트 그룹의 회장 스티브 윈은 LA에서의 공연 관람 후, 이 새로운 방식의 서커스가 성공할 것을 확신 자신의 호텔에 ‘미스테르’라는 작품을 상설공연 상품으로 유치하게 된다. 예상대로 관객의 호응이 이어지고, ‘오쇼’, ‘카쇼’ 등 새로운 후속 작품이 등장하면서 태양의 서커스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공연의 메카로 바꿔놓는 중요한 콘텐츠가 된다. 태양의 서커스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공연장이 아닌 오리지널 작품을 위한 혁신적 무대장치가 갖추어진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 뮤지컬과는 달리 판권 판매가 불가하기에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상설공연이다. 매일 저녁 오리지널 공연의 특성에 맞게 설계된 라스베이거스의 전용 공연장에서 6개의 대형 작품이 올려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은 잊을 수 없는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태양의 서커스를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순회공연인데, 해외 순회팀의 경우 배우와 스태프, 세트 구성까지 본국에서 이동해 임시 마을을 짓고 공연을 해야만 하기에,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태양의 서커스를 보기 위해서는 사막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손쉽게 선택하는 중국 여행상품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상설공연이다. 북경의 ‘금면왕조’나 상해 패키지의 ‘송성가무쇼’는 물론 장예모 감독이 중국의 명산과 호수 등을 배경으로 만드는 ‘인상시리즈’ 또한 상설공연이다. 중국의 역사가 담긴 작품을 전 세계의 관광객이 매일 저녁 즐기고 있으며, 중국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반면 상설로 공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수적이며 지속적 관객 동원도 쉽지 않다. 지역의 대표 브랜드 공연을 찾기 힘든 이유이다. 다만 전주를 찾은 외지인이 전통적인 한옥 마당에서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국악 콘텐츠를 직접 관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경험일 수 있다. 전주가 갖고 있는 문화자산을 발굴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전주의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며, 전주만의 상설공연을 통해 가족단위 관광객이 흥겹게 관람하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다면, 전주는 더욱 빛나는 관광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 다섯 바탕이 시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듯이, 전라도의 질펀한 향기가 묻어나는 전주만의 새로운 브랜드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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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0 17:49

‘전북 PDF 웹 도서관’을 만들자

‘비매품 도서’ 중에도 좋은 책이 꽤 많다. 단체의 기관지와 회보, 사업 결과보고서, 연구용역 보고서, 전시 도록, 지자체의 홍보용 도서, 포럼·세미나 자료집 등이다. 이 책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조건에서 무료로 나눠주기에 구하기 힘들다. 이 도서 중에도 공공기관이나 공익의 성격을 띤 단체는 도서관·연구단체·연구자 등에 책을 보내기도 하지만, 실상 그 자료들을 공공시설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책을 발행한 단체마저 여러 이유로 그 책을 오래 보관하는 일도 드물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신청하지 않아 도서관 납본 의무가 없고, 한정판인 데다 출간 수량도 적어 어느 순간 몽땅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비매품 도서에 대한 안타까움은 2017년에 나온 <항일운동을 증언한 염재야록>(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을 읽으며 더 짙어졌다. 이 책은 임실 출신 유학자 조희제(1873~1937)가 쓴 뒤 우여곡절을 거쳐 후대에 전해진 <염재야록>의 한글 번역본이다. <염재야록>은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책을 쓰고 지키느라 갖은 고초를 겪은 관련 인물들의 일화만으로도 절절한 감동을 선사하지만, 정작 일반인들은 한문으로 된 책의 본문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한글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서 한 말의 의병·독립 운동, 애국 투사들의 행적을 상세히 알게 됐고, 책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책 발간에 앞장선 광복회 전북지부는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번역본 270여 권을 전국 국립대학 도서관과 언론사, 전라북도 관계기관, 광복회 전국 지회 등에 무료로 배부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북에서는 국립군산대·전북대 도서관과 전주시립 건지·금암도서관에서 번역된 책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온오프라인 서점은 물론 원작자의 고향인 임실의 도서관을 비롯해 전북의 도서관 대다수에서는 그 책을 찾을 수 없다. 비매품 도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써 지켜낸 <염재야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한다면 책을 출판해 판매·보급하거나 전자책으로 제작해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저작권자·번역자를 비롯한 많은 이의 결단이 필요하다. 비매품 도서의 활용과 보존의 대안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많은 비매품 도서가 웹 공간에서 PDF 형태로 다양한 독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연구원 홈페이지에는 전북의 각종 동향 자료와 연구보고서가 있고, 전북특별자치도 문화관광재단 홈페이지에는 전북 문화정책자료와 홍보 자료, 포럼·세미나 자료집이 있다. 전주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전주시민의 생활사를 시민의 구술로 기록한 <전주시 마을조사서>와 이 결과를 활용해 작가들이 쓴 동화집 <고을 전주의 10가지 숨은 옛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기관과 단체의 홈페이지 자료실에 상당한 양의 쓸만한 자료가 있다. 하지만, 어느 단체의 홈페이지에 어떤 자료가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웹에서 그 단체가 낸 모든 오프라인 자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년 전 자료는 거의 삭제됐다. 따라서 공적기금으로 제작하는 비매품 도서를 비롯해 각 단체의 홈페이지에 산재한 PDF 자료를 한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전북 PDF 웹 도서관’ 운영을 추진해 볼 일이다. 웹 공간을 활용하면 자료를 만든 취지를 한층 더 살릴 수 있고, 해당 자료들이 무참하게 사라질 일도 없을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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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3 16:41

신록의 시간을 넘기며

국어사전을 펼치고 화(和)자 들어가는 낱말들을 찾아보면 참 많기도 하다. 대충만 열거하면, 화담(和談) 화해(和解) 화답(和答) 화음(和音) 화순(和順) 화열(和悅) 화의(和議) 화친(和親) 화충(和衷) 화화(和會) 등이다. 이 어휘들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 사회는 건강하고 화동이 충만할 터이다. 화친하고, 화합하고, 함께하고,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니 이는 따라서 협동, 협치와 공동선을 창출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고를 동반하므로 반목이나 갈등의 부정적 사고는 분쇄되고 추방되는 전제가 먼저 이뤄질 것이다. 어느 최근 일간지에 관심 끄는 통계가 수록되었는데, 지지하는 정당이 각각 다른 사람끼리 한 자리에 동석하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 상태가 90% 넘는다 하였으며, 보수와 진보, 전라도인과 경상도인, 일간지 구독 성향이 다른 상호, 종교가 다른 상호, 가난한 자와 부자, 사용자와 노동자, 학식이 높은 자와 낮은 자, 노인들과 젊은이들 등등도 비율이 모두 높게 나타난다고 했다. 분별하여 나눌 수 있는 한 모든 계층별 그룹간 대립과 대척 관계는 심리적 반목 상태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현상이다. 정치적 극한 대립이 다른 영역까지를 영향끼쳤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민족성의 먼 시원에서 더듬어보면 단합과 협동, 단결과 협치, 화합과 화융의 구현이 분명했던 역사적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수많은 국난을 극복하고 무수한 환란을 이겨낸 어귀찬 민족이었는데, 요새 몇 년 평화의 시기라 해서 복이 넘쳐 다량의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이 같은 부끄러운 상황을 퇴치하고 대아적, 대승적 상태로 반전시켜야 할 것이다. 5월을 일컬어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 시인이 있었다. 5월은 꽃이 지고 나서 신록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서두르는 시절이다. 꽃의 영락과 화려함의 쇠락 뒤에 따라 오는, 봄의 대척점에 초여름이 오는 게 아니라 꽃을 품어 열매 맺음으로 순행하는 선순환의 자연 섭리에 귀착하는 것이다. 5월은 진정으로 자연의 섭리가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맨 처음의 단계인 셈이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습하거나 건조하지도 않으며, 그저 알맞게 화풍난양(和風暖陽)의 계절이다. 산에 들에 많은 수목들이 꽃의 시절을 넘어 열매를 마련하기로 서로 경쟁하는게 아니라 함께 울력하고 공공선에 나아가는 것이다. ‘화’자로만 충만하고 ‘화’자의 의지로만 융성하는 계절, 신록의 신선한 너울거림으로 마냥 부푸는 인심, 인정이 무한한 환희로 전환, 충일하지 않는가? 조국 강토는 신록의 계절인데 왜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색깔인가? 숲을 이룩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5천만이 함께 공공선에 나아간다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것이다. 신록을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낙목한천(落木寒天) 쓸쓸한 때의 수묵화를 그리는 바야흐로 우리들 실수가 참절할 뿐이다. 우리의,우리 민족의 영특하고 영명한 슬기를 한 데 모으자. 대륙과 대양을 꿰뚫고 관통하며 시대를 넘어 미래로 가는 터널을 뚫자.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지금 퇴보하는 상황으로 읽히는 모든 분야, 모든 막힘을 뚫고 나아가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태백의 준령을 굽이치게 하는 신록의 정신으로 온 겨레가 한 노래를 부르자. 푸르름의 상생 정신으로 ‘화’자 돌림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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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7 15:22

더 낯설게, 전주국제영화제

외지인이었던 나에게 전주살이가 즐거운 이유는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생활환경 그리고 전주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축제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것에 있다. 2000년부터 시작, 어느덧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축제인데, 느닷없이 찾아오는 전국 각지의 지인들 덕분에 매년 봄, 설레는 밤을 함께 하였던 전주국제영화제 이야기를 해보자. 도대체 전주국제영화제는 어찌 알았으며, 전주에 내가 살고 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꾸준히 다양한 사람들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고 있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영화제를 찾은 이유를 묻는 나의 질문에 ‘전주에 와야만 볼 수 있다’, ‘독특하다’, ‘새롭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고는 하는데, 내가 보아온 영화들도 하나같이 일반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난해’하고 ‘평범하지 않은’ 영화들이었다. 온종일 거리의 풍경을 고정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화, 수도자가 걷는 모습만 보여주는 영화, 남미와 아프리카와 중동의 낯설고도 어색한 영화. 어디서 이런 영화를 구해오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참으로 독특하다.반면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영화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낯섦’에 있다. 비주류 작품이나 독립영화를 바탕으로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함으로써 평론가는 물론 영화팬들에게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그들이 영화제에게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상과 다른 ‘일탈’이다. 영화는 분명 상업적 측면과 함께 우리네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하며, 전주국제영화제가 그러한 대안적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반응은 어떨까? 영화제 종료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영이 지속되고 있다. 성공의 가장 큰 이유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직접 생산하는 콘텐츠에 있다. ‘디지털’ ‘독립’ ‘대안’을 내세우며 2000년 출발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영화용 ‘필름’ 카메라가 아닌 방송용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영화를 제작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필름을 사용한 제작 방식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디지털이었는데, 각기 다른 국가에서 선발된 3명의 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목표로 만드는 3편의 단편영화는 영화제의 얼굴이 되었다. 이러한 전주국제영화제만의 독특한 제작 지원 사업을 통해 매년 독창적인 디지털 영화가 생산될 수 있었으며, 다양한 국적의 감독들이 전주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의 특성은 각기 다른 개성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합종연횡.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가치일 수 있는데, 일탈을 꿈꾸는 다양한 인류가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에서 만나 영화를 넘어 전주만의 해방구를 만들고 새로운 대안을 창조하였다. 디지털이 주류가 된 지금은 “전주시네마프로젝트”로 규모를 키운 이 프로젝트는 최근 ‘노무현입니다’를 비롯한 특색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주류 영화계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전주만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25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더욱 발전하기를 응원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더 낯설게, 나의 일상과 다른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새로운 즐거움과 뜻밖의 만남이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홍현종 JTV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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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3 18:15

오일장을 기록하자

오일장은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장날이면 일부러 사고팔 물건을 만들어 나오거나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이라도 만날 요량으로 시끌벅적한 장터에 나섰다. 뜨끈한 국밥을 나누며 안부를 물었고, 막걸리 한 사발에 묵은 감정을 털어 냈다. 형편에 따라 살림을 들이거나 내놓았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솜씨 삼아 엮어 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에는 만든 사람의 체온이 스며 있었다. 그 온기는 지치고 상한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60여 곳에 이르던 전북의 오일장이 40여 곳으로 줄었다. 교통이 발달하고, 대형할인점이 들어서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장터 역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흥성하던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오일장’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한다. 오일장에는 그 지역의 특별한 먹을거리와 볼거리와 놀거리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건네는 다정함이 흔전만전하기 때문이다. 수확의 기쁨과 수고로움에 대한 존중도 넘친다. 서툴거나 틀리게 적은 가격표시판마저 옅은 미소를 선사하고, 아무개 집과 상회라는 가게 이름들은 잠시 밀쳐두었던 아련한 추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장터는 먹먹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전북의 오일장들은 본래 명성이 자자했다. 2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고창 해리장, “1910년경 임피군 남삼면에서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위한 난장을 시초로 씨름·도박·농악이 횡행했다.”라는 기록이 남은 군산 대야장,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의 동학 지도자들이 참가한 금구·원평 집회가 열린 김제 원평장, 전국 3대 장터 중 하나로 우시장이 유명했던 남원장,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한데 섞여서 들리는 남원 인월장, 전라·경상·충청의 문화가 만나던 무주 무풍장, 영화 <행복>(2007)에서 주인공들이 짜장면 데이트를 즐긴 장수 번암장, 대를 이은 상인이 많은 장수 장계장, ‘용머리장’이라고도 불리는 정읍 산외장 등이다. 생강의 봉동장, 인삼의 진안장, 고추의 임실장 등과 같이 특산물 하나만으로도 금세 떠오르는 장터도 여럿이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가치를 찾아서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땅이 내어준 것들을 성실히 일궈낸 사람들이 꾸려온 오일장의 역사와 풍경은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오일장에는 땀내 나는 삶이 있고, 고단한 일상을 꾸려가는 상인들의 한숨과 비탄도 녹아 있다.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잊히기 전에 세심하게 기록돼야 한다. 대학의 관련 학과와 지역의 청소년·부녀회원 등을 기록자로 활용하면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어물전의 칼과 도마, 오래된 국밥집의 주걱과 국자 등 상인들이 쓰던 도구를 전시하는 <장터 도구 전시회>와 까맣고 투박한 손의 주름마다 새겨 있을 상인들 삶의 굴곡을 살피는 <장터 상인들의 손 사진 전시회>, 특산물을 활용한 <장터 음식 맛 겨루기>, <장터 특산품 뽐내기>, <단골손님 자랑하기> 등은 재미뿐 아니라, 색다른 역사를 새기는 시작이다. 초·중·고교의 체험학습에 오일장을 포함해 물건 구매를 비롯한 <노포 운영자와의 대화>, <우리 동네 특산물 찾기>, <어르신들과 이야기> 등의 시간을 갖는다면 지역을 이해하고, 다양한 삶의 지층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오일장에서는 그저 마음껏 해찰하며 기웃거리기만 해도 사람 사는 정과 때묻지 않은 풍경을 만나리라. 그 고장의 생생한 사투리를 듣는 호사는 덤이다. /최기우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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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6 15:19

술과 노래와 춤과의 조합

아주 오래전 필자는 어느 중앙지 칼럼으로 읽은 내용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어 이를 이 지면에 소개하려 한다. 매우 인상 깊었던 연유이리라. 미국 거주 어떤 우리 교포 2세 대학교수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인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한인 집성촌 한 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었단다. 그 중국인이 말하기를 “그 민족은 이상합니다. 일과 후 저녁에 서로 모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싸움질하고는 흩어지는데, 다음 날도 또 다시 만나 그렇게 반복하곤 하는, 그런 좀 모자란 사람들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중국인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듣게 되었지만 이 교수는 오히려 충격적 감동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술 잘 마시는 것은 낭만을 누리면서 감성적 정리적 즐김에 다름 아니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풍류를 아름답게 누리는 미풍이라고 생각했으며, 문제는 싸움하는 일인데, 이는 의견의 극단의 차별성으로 인한 변증법적으로 논하자면 정반합으로 건너가는 치열한 공방이 아니겠는가 하고 긍정적 단정을 하게 되었노라고 술회하였다. 지금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K-팝의 경우 그것이 바로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의 연장선상에서 승화된 성과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잘 놀고, 일은 재빠르게 잘하는 민족이라고들 자타가 공인한다. 잘 노는 일이 바로 예술하는 일로 변환하는 현대 문화 흐름을 볼 때 우리 민족성은 특히 예술 지향적 성향을 띤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하길, 우리 민족은 풍류를 누릴 줄 아는 민족이라 평했다고 한다. 풍류란 그 개념이 오늘날 연예 장르의 예술인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는 현대 개념의 풍류에다가 학문의 즐김까지를 포함시킨 확대된 개념이었다. 한반도 고대 역사상의 제천의식도 집단 가무에 천지신명께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술과 노래와 춤추는 행위 조합의 행사가 그대로 엄숙한 국가적 의례였으니 오늘에 전해오는 풍속은 당연한 필연성을 지닌다. K-팝은 물론 K-드라마, K-무비, K-클래식, K-뮤직 등 예술 문화 전반에 걸친 융성은 세계 인류를 감동케 한다. 국악 부문은 또 어떠한가? 판소리며, 민요며, 시조창이며, 농악 등등 온 민족이 이에 따라 흥에 젖어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다. 농악은 일하면서 함께 공연하는 풍악이다. 일과 놀이가 상생으로 융합한 것이다. 예술에 우리네 고유 정서를, 예기에 우리네 당찬 낭만을 담아냄은 가히 높은 수준인 것이다. 이때에 우리네 정한도 풀어내고, 희로애락의 만 기지 정서를 표상한 것이다. 사실 놀이나 일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함께 함’에 방점을 두었다. 일할 때는 품앗이로 공동 작업을 했으며, 놀이나 예술 공연도 함께 굿을 쳤던 것이다. 이는 종합예술의 성격으로 그 예술성이 승화 확창 되었다. 예술만 그런 게 아니라 역사적 큰 행사도 함꼐 함으로써 그 위용을 높이 떨쳤던 것이다. 임진란 때의 민중 단합, 3.1운동 때의 집단 함성, 동학 동민 혁명 때의 단일 대오, 근래 축구 응원전 때의 붉는 악마 군집 등등 크게 이룬 것에서의 우리네 단합은 타민족 어디에서도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큰 용기를 일으키고 신명이 표출되며 소기의 목적 달성은 효과적이었다. 근래 서울 중앙 박물관 관람객 수가 1년 평균 460여 만명이란다. 이 수는 세계 여섯 번 째라니, 우리 민족 문화 지수, 우리나라 국격이 세계 여섯 번째가 아니겠는가? 지고한 예술 지향의 민족성에 무한 자부심을 느낀다. /소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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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9 16:20

전통한지 연구는 표류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이 그동안 한지에 대해 연구한 내용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에 대한 기본 연구조차 하지 않으면서 전통한지 제지 기술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연구 내용은 학문 발전과 관계가 멀고 심지어 연구 윤리까지 심대하게 훼손하고 있어 연구자들로부터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인해보니 실상은 이러하다. 먼저 태지를 재현했다. 연구자들은 연구에 앞서 선행 연구자 J교수를 만났고 그를 통해 태지에 대한 연구 내용을 자문 받았다. 서지학자 J교수는 1991년 연구 논문을 통해 태지의 역사와 더불어 원료가 되는 해캄의 존재에 대해 규명했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연구 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선행 연구자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참고 문헌에서조차 누락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 최초로 태지의 원료가 해캄이었음을 밝혔다고 하면서 100년 전에 사라진 태지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대대적으로 연구 업적을 부풀려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언론은 이들의 거짓 정보에 발을 맞추듯 자체 검증 없이 복사 보도했다. 100년만에 재현에 성공했다는 태지는 지금도 한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인사동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다음 시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는 응시자가 준비한다. 이 종이는 크기와 품질이 규격에 맞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시지는 두껍고 질이 좋으며 표면이 매끄럽다. 조선시대에 시지는 과거 시험이 폐지된 1894년까지 생산되었다. 산림과학원은 이 종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33년 다트헌터가 은평(지금의 신영동)에서 장판지 뜨는 광경의 사진을 유일한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또 세검정 장판지 기술이 의령의 장판지 기술과 출발이 다름에도 억지로 연결시켜 마치 의령식 장판지 제지기술이 시지 기술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산림 과학원은 사진을 오독했고 사실을 심대하게 왜곡했다. 그들이 재현한 것은 1970년대 의령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판지였을 뿐 시지는 아니었다. 시지와 장판지는 재료와 초지법이 다르고 제조 공정이 다르다. 특히 시지는 인쇄 적합성에서 매우 우수한 종이로 장판지와 완전히 다른 종이이다. 세 번째 감지를 재현했다. 감지는 쪽물을 들여 완성하는 종이이다. 이 감청색 염색지는 고려 조선시대에 주로 불교 경전을 사경하거나 변상도를 그리는데 사용해 왔다. 지금까지 짙은 청색의 감지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영역이고 연구의 대상이다. 감지는 완성된 한지에 염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선 종이의 섬유가 강한 잿물 성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내절강도나 인장강도가 현저히 약화된다. 감지 재현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보면 재현 과정이나 절차 그리고 완성도에 문제가 많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감지를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용역에 참여하여 자신이 이미 완성한 기술을 복수로 이용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학문 연구는 자료와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연구 성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과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 과제 등에 이르기까지 서술해야 한다. 그럼에도 산림과학원 한지 연구자들은 연구 성과를 훔치고 왜곡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조차 곡해했고 기 발표한 연구조차 중복 수행했다. 거짓과 속임수에 국민을 속이고 있다. 국가기관의 연구자의 연구윤리가 이정도면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닌가? /김호석 수묵화가·전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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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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