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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 - 박범신

오래 전 나는 장편소설 <불의 나라> <물의 나라>를 연작으로 썼다. 사람들은 우스개소리로 나를 가리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 작품을 쓰던 때는 80년대 초반으로서 정치적인 억압과 아울러 개발이데올로기가 사회는 물론 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관통하던 시절이었다.아는 바와 같이, '불'은 전투력의 상징이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빠른 성장을 거듭해온 것은 불같은 열정으로 불같이 뜨겁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웠던 우리 나라는 지난 반세기 완전히 '불의 나라'로 탈바꿈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항문 근처에 불이 붙은 채 '앗뜨거, 앗뜨거!'하면서 일제히 내달리는 형국이 됐다. 출발하는 지점에선 각자 품고 있던 꿈의 빛깔이 달랐을테지만, 뜨겁게 단근질을 당하면서 내달리다보면 애당초 품었던 고유한 꿈은 저리 가라, 그저 남보다 앞서 달리는 자만을 뒤쫓아 허겁지겁 쫓아가는 획일적 서열경쟁만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잡고 만 셈이다.그에 비해 '물'은 생명의 표상이다. 물은 낮은데로 낮은데로 흘러 모든 서열을 무화시켜 마침내 수평을 이루고, 한없이 부드러우며, 포용성이 높다. '불'이 남성성이라 한다면 '물'은 당연지사 여성성이자 모성의 기호이다.지난 반세기, 대를 물려온 가난의 사슬을 끊어낸 원동력이 '불의 정신'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그늘의 대부분은 그로 인해 '물의 정신'이 부족해졌다는데 그 연유가 있다고 본다. '불'이 지나치게 승(勝)하면 '물'이 말라버려 토양이 산성화되고 사막화되는게 당연하다. '불'과 '물'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양면의 통합, 혹은 균형일 터이다.지금의 대통령은 이런 논리의 극명한 텍스트로 삼아 좋을 분이다. 그는 '불의 정신'이 사회의 핵심동력이었던 개발시대에 그 개발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불같이 일하므로써 '30대 회장'이라는 성공신화를 이루어낸 분이다. '불의 정신'을 그분처럼 효과적으로 활용한 이도 드물고, 또한 그분처럼 그것에 큰 혜택을 본 이도 드물다.그런데 정치판으로 옮겨간 후 그분의 성공신화는 '물'로 쓰여지고 있다. 시멘트 감옥에서 해방된 청계천을 보라. 청계천 복원으로 그분은 성공적인 서울시장이 되었고, 그것으로 기반을 쌓은 뒤에 '대운하공약'을 보태어 마침내 대통령으로 도약했다. 애당초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도로를 건설할 때 현대건설의 주역으로 그분이 기여했고 청계천 복원사업 또한 그분이 앞장서 해냈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당신이 덮은 청계천을 당신이 벗겨낸 바, 한 개인의 삶으로 보면 아이러니칼하면서 절묘한 전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야말로 유례없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라고 할 만하다.각설(却說)하고.4대강 정비사업이 식을 줄 알았던 대운하문제를 논쟁의 중심으로 재점화시켰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4대강'이든 '대운하'든 직설법으로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충언하고싶은 것은 물에 대한 사업은 '물'과 상의하고 '물의 영혼'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치수사업이란 수천만년 굽이쳐 흘러온 물줄기를 겨우 강제로 펴놓는 식의 반환경적인 사업이 대세였다.어쨌든, 대통령은 어떤 분인가.인생의 전반기에서 그분은 '불의 아들'로 살았고, 인생의 후반기에서 그분은 '물의 아들'이 되고자한다. 곳간만 쟁여놓는다고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경제를 살리는 일 못지않게 지금 중요한 것이 '물의 정신'이라고 할 때, 그분은 정말, 청계천, 대운하, 4대강이 표상하는 바, '물의 아들'로 변모했는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그분은 어쩌면 '불'같았던 젊은 날로부터 한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걱정이다. '물'을 '불'의 방법으로만 다루면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물'의 조화나 균형이 없다면 세상은 계속 사막화가 진행될 것이다. 이 사막화의 세상에 맑은 '샘물'을 끌어오는 대통령이 되어야 마지막 성공신화를 쓸 수 있다./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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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26 23:02

[금요칼럼] 절망 넘어 희망으로 - 정목일

2008년은 너무 가혹했다. 미국으로부터 발진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금융 태풍은 전 세계를 경제공황과 위기로 내몰았다. 이 태풍의 기공할 공포와 위협은 이제 시작일 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있다. 경보도 없이 들이닥친 경제 태풍은 우리 삶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다. 코앞에 닿은 2009년의 설계와 기대를 깡그리 깨트려버리고, 한해를 어떻게 보내야하는가, 한숨과 걱정 속에 떨게 만든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2008년은 큼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돌발적이고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요동쳤다.금년 시발부터가 시커멓게 변해버린 태안반도의 갯벌과 바다를 씻어내는 일부터 시작됐다. 청정 바다가 시커먼 기름바다로 변해버렸다. 생명의 보고였던 갯벌이 검은 기름으로 뒤덮여 죽음의 바다가 돼버리자 온 국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 하얀 면(綿) 옷가지와 이불깃으로 기름을 닦아내었다. 갯벌과 바다의 검은 기름을 한 장씩의 타올로 얼굴과 마음을 씻어내듯 닦았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바다가 오염되고 생명을 잃은 것에 깊은 반성과 함께 마음을 닦아냈다.국보 1호 숭례문의 화재와 소실은 국민들에게 경악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졌다는 허망함만이 아닌, 민족 자존심과 문화 정체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다. 국민들이 TV로 숭례문 전소 장면을 시청하면서, "이럴 수가!" 가슴을 치면서 통탄하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국보 1호를 잃은 것은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에 대한 무관심의 결여가 가져온 참변이었다. 민족 자존심의 상징물이 어이없게도 국민들이 TV 생중계를 보는 중에 허물어 내리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쇠고기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무려 100일간이나 한국사회를 마비시켰다. 촛불군중이 광화문과 시청 앞을 메우고 경찰과의 시위군중의 대치로 한국의 중심이 무질서와 함성으로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촛불시위는 국회와 행정도 무위로 만들었다. 국회도 없었고, 정치도 실종되었다. 나라의 원로도 보이지 않았고, 타협과 모색도 없었다. 경찰의 물 대포 앞에 유모차가 등장했다. 극과 극의 대치와 충돌이 있을 뿐이었다.2008년은 국민적인 기대와 희망의 팡파르가 울린 가운데 시작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해이여서 큰 기대와 전진을 바랐다. 하지만 1년의 결산은 구겨지고 멍든 시련의 자국들로 채워졌다. 2008년의 대형 사건들은 대비 부족과 안일한 사고 풍조가 빚어낸 재앙이었다.더욱 기막힌 일은 2009년에 대한 공포이다. 금년보다 가혹한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만 겪는 경제위기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난국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내년의 화두요, 당면 과제다. 나라와 민족마다 있는 힘을 다해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한파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이 재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경제고속성장의 탑을 무너뜨리게 된다.지금 우리는 역사와 민족공동체의 역량을 결집하여 난국 극복에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위기와 난국 때마다 민족애와 애국심으로 일치단결을 보여주었던 우리 민족이 아니었던가.극단적인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우리'라는 민족공동체의 횃불 아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제 난국을 이겨 나가야 한다. 기름으로 뒤덮인 태안바다의 갯벌과 바다를 전국 수백만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자신이 입었던 속옷이나 이불 천으로 닦아내듯내일의 희망을 찾아내야 한다. 숭례문을 잃고서 깊은 반성과 각오로써 민족의 영혼과 애국심을 다졌던 것처럼 우리는 한마음이 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가난과 소외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웃을 돕는 일에, 경제 한파를 녹이는 일에, 다함께 마음과 실천의 촛불을 켜들 때다.2009년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역량이 새로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2009년을 희망과 중흥의 새 찬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2008년의 교훈을 거울삼아 민족화합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동방의 해뜨는 나라'로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부과된 시대적 임무이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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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19 23:02

[금요칼럼] 의사, 판사만 꿈꾸는 아이들 - 김용택

중고등학교로 강연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꿈을 물어보게 됩니다. 아이들은 좀처럼 자기의 꿈을 말하려 들지 않다가 조금 보채기 시작하면 하나 둘 자기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들의 꿈은 대게 네 가지 정도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의사가 되는 게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판사나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고, 또 하나는 교사가 되는 게 꿈이고, 나머지 하나는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무원이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꿈을 이루면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 봅니다. 모두들 하나 같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 한다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옛날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물어 보면 우리들은 하나 같이 모두 조국과 민족을 들먹였지요. 공허한 빈말이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빈말이라도 좋으니, 지금의 아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단 한명도 그런 '공공의 꿈'을 말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나는 또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물어 봅니다. 모두들 입을 모아 홍익인간이라고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홍익인간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봅니다. 하나 같이 모든 인간에게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주 잘 배운 아이들의 이 정답과 꿈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 속과 겉이 다른지 나는 놀랍니다.▲'직업'이 곧 '꿈'인 학생들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은 서울대지요. 인간들의 위대한 꿈과 이념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왜소한 개인이지요. 쩨쩨하고 이기적인 욕심뿐이지요. 우리나라 학부모님들이나 학생들의 꿈이 하나 같이 의사요 판사요 교사요 공무원이라는 현실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버리지요.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의 꿈이 겨우 의사가 되는 게 꿈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 어머니들의 한결 같은 꿈이 자기 딸이 교사가 되는 게 꿈인지, 생각하면 그 꿈이라는 것이 초라하기만 합니다.얼마 전에 하버드와 예일대와 엠아티 대학을 다녀왔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한국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아이비리그'에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큰 문제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하나 같이 하버드에 들어오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인생의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이 더디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답이 딱 하나 밖에 없는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학생들이 하나의 정답을 찾느라 헤맨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토론에 약하고 에세이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토론과 에세이는 늘 새로운 사고를 원하는 다양한 창조정신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창조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학습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것이지요.▲ 창조적인 삶을 찾아야 할 시기꿈이 의사요 교사요 판사가 나쁘다는 게 아니지요. 또 개인의 꿈을 누가 간섭할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꿈이어서 대통령이 되면 무엇 합니까. 정말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국민들에 환호를 받는 좋은 대통령이어야지요. 대통령이 꿈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인생의 한 과정일라는 말이지요. 의사가 꿈이 아니라 훌륭한 의사가 꿈이어야지요. 교사가 꿈이 아니라 정말 위대한 교육자가 꿈이어야지요. 학생들의 꿈이 일자리에만 매달리는 그런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 모두를 불쌍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점수를 가지고 이리저리 뛸 입시 철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나중에 잘하게 되고 사회에서 자기의 몫을 찾을 것입니다. 직업인이 아닌 창조적인 삶을 살 길을 지금 찾을 때입니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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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12 23:02

[금요칼럼] 원자력으로 기후변화를 막자 - 장인순

우주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 무엇일까? 바로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물질과 에너지가 같으며, 서로 변환된다'는 상대성 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하고 40년 만에 실증된 바로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핵융합, 핵분열)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이 원리가 궁극적으로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핵반응에 의해서 에너지는 물론 원소와 분자를 생성하고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흙, 곧 지구를 탄생 시켰다.45억년이라는 긴 지구의 역사 동안에 자연은 핵반응에서 생긴 에너지 곧 햇빛을 화석연료 속에 화학에너지 형태로 저장하여 땅속 깊숙이 묻어 두었다. 약 200년 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석탄이라는 대량에너지를 이용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화석에너지의 사용이 급증하였으며, 앞으로 100년 이내에 고갈될 것으로 전망될 뿐만 아니라, 이의 남용으로 인한 온실가스 효과로 지구상의 생명체의 생존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전 세계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화석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화석에너지의 남용은 인류의 미래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기에, 대량의 저탄소 청정에너지 개발은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 그 해답은 바로 우주의 탄생과 별들의 생성과 소멸을 지배하는 핵반응이라는 원자력 기술이다.원자력의 에너지밀도는 화석에너지의 100만배 이상으로서,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자원 의존형이 아닌) 두뇌 의존형의 청정에너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두뇌 바로 과학기술이 만든 에너지이다. 그 뿐인가. 가장 값싸게 해수를 담수화할 수 있는 해수담수화 원자로, 차세대 청정에너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수소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수소생산원자로 등 인류가 필요한 에너지와 마실 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이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 우주를 지배하는 핵반응을 이용해서 인류의 에너지와 물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겠는가!원자력기술은 고온, 고압, 내 방사선, 내진 등 극한 상황을 아우르는 최첨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종합적인 복합기술로서 모든 분야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이끄는 모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산업은 여러 첨단 분야에서 국내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불과 4반세기 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원자력 발전소 이용률이 단연 세계1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 아니라, 20기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으로 국내전기의 40%공급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양질의 가장 값싼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조국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고 온실가스를 규제하기 시작하면 우리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원자력도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과학 기술인에게는 원자력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기술분야에서 안전성이 최우선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과학기술과 안전성은 언제나 하나이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용률 1위라는 것은 바로 원자로의 안전성과 관련된 원자로 유지보수실력이 세계 최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안전성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원자력 발전 선진국으로 진입시킨 이 땅의 원자력기술인에게 맡기고, 원자력 계에 따뜻한 이해와 격려를 부탁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후손들이 에너지가 풍부한 사회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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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2.05 23:02

[금요칼럼] '남의 떡'에 대한 정보를 버려야 - 박범신

남쪽의 항구도시에 내려갔다가 이틀 사이 세 개의 도시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속 철도가 생겨서 서울에서 A시까지 이제 명실상부 일일생활권으로 묶였다."고속철도로서 이렇게 가까워졌으니, 경제도 좀 나아졌겠네요?" 내가 말했고, A시에 사는 상대편은 대뜸 고개를 저었다. "나아진 건 서울뿐이지요. 고속철도 때문에 A시 사람들이 이제 쇼핑을 서울로 하러 가니까요. 우리 A시 경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빠른 내리막길입니다. 게다가 수도권 규제까지 풀린다니, 정말 큰일이에요."나는 고속철도를 한 시간 정도 타고 D시로 올라왔다."요즘 B시 경제는 어떻습니까?" 내가 또 물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단번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A시에서 올라온 걸 알고서 "그래도 A시가 우리보다 낫지요. 우린 아예 결딴나게 생겼습니다. 정부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도권 사람들만 국민이라는 건지 원." 하고 말했다. 내가 다음 날 C시로 올라간다고 하자 "C시는 행정도시다 뭐다 해서 우리보다 경기가 훨씬 나을 겁니다."라고 그는 또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그러나 C시 사람들의 대답은 딴판이었다."아이고, 우리는 그놈의 행정도시 때문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왜요?" "행정도시 해줬다고 생색내며, 정부에선 그 외엔 아무런 배려도 없었거든요. 차라리 행정도시 그거,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 솔직히 말해서 A시나 B시야 중앙정부 덕본 게 훨씬 많지요. 우리 C시는 빛 좋은 개살구 격인 행정도시 때문에 오히려 원망이 많습니다."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수도권의 한 친구는 A시와 B시와 C시의 불만을 한 마디로 냉정히 쓸어덮었다. "수도권이 살아야 지방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기업도시다 행정복합도시다 하면서, 그동안 수도권을 묶어 놓고 지방에 온갖 재정지원을 해온 것은 명백한 정책적 오류라고 그는 지적했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사는 수도권 규제를 "확 풀어놔야" 그 혜택이 지방에 골고루 미친다는 논리였다.깊이있는 논의는 물론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들 모두의 발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장은 나 또는 우리보다 너 또는 너희의 '떡'이 크다는 것이었다. 개발의 연대를 숨가쁘게 지나오면서 우리도 모르게 키워온 이 '남의 떡'에 대한 과대 포장의 습관과 감수성은 이제 우리 모두의 집단 무의식 속에 돌이킬수 없을 만큼 너무도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남의 떡이 크다'는 정보로 가득차 있을 때 만나는 심사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에 따른 분노일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는 너와 나를 위험하게 가르고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도덕성을 무화無化시킬 뿐 아니라 설령, 실질적으로 살림살이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나아진 살림살이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요컨대 행복과 스스로 거리를 벌리는 결과가 자초하고 마는 것이다.'행복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알랭은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성공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라고 설파했다.중요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지점'.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남의 큰 떡'에 대한 너무나 많은 정보 때문에 만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환경속에 놓여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정상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의 떡'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남의 정상에 대한 정보일 뿐이므로 설령 '남의 떡'을 내가 그대로 가진다고 해도, 내게 그것이 '만족하는 지점'은 결코 될 수 없다. 자신이 인생에서 참으로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 자신만의 정상을 꿈꾸기 때문에 '남의 떡'에 그다지 흔들리지 않으며, '남의 떡'에 대한 갖가지 정보 때문에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당장 비를 피할 집도 있고, 크든 작든 테레비 냉장고도 있고, 어쩌면 자가용도 갖고 있는 당신,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 논리가 세뇌시켜준 서열주의에 따른 획일적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어쩌면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를, '만족하는 지점' 곧 행복을 찾아 내가 품고 갖는 일이다. '남의 떡'을 쳐다보는데 바빠서 곁에 둔 '행복'을 혹시 스스로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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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1.28 23:02

[금요칼럼] 아들내외로부터 받은 감사장 - 정목일

근래 아들내외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작은 액자에 넣은 것인데, 아들내외가 손녀를 안고 찍은 사진도 들어 있었다.'수향이가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항상 저희를 먼저생각하시고 큰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중략) 수향이가 밝고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우리 가족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두 분께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감사장을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이런 감사장은 처음이어서 얼떨떨하기도 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데, 나는 부모님께 한번도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고 말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며느리가 손녀를 출산하기 전부터 우리 내외는 큰 고민에 빠졌다. 맞벌이를 하는 아들내외가 출산하면 누가 양육할 것인가. 아내 역시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퇴직하고 손녀를 양육하는 일을 맡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손녀의 양육은 외가에서 맡기로 결정이 났다. 아들내외에게 아이 셋을 낳아달라고 부탁하던 나는 머쓱한 꼴이 되고 말았다. 대책도 없이 필요성만 강요한 셈이다.젊은 사람들에게 출산을 권유하며 "이것이 애국하는 일이다."라고 하면, "우리나라 환경으로선 아이를 많이 가질 수 없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국민연금을 낸 것만큼 받지 못하는 원인은 저(低) 출산 다(多) 고령자 현상에 있다. 저 출산문제는 국가경제와 민족번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나라는 차츰 노인국이 돼가고 있다.유엔인구기금(UNFPA)이 발표한 전 세계 156개국을 분석한 '2008년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인구 감소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 동안 낳는 평균 자녀 수(평균출산율)가 1.20명으로 홍콩(0.96명)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낮다.한국에 사는 20대 후반과 30대 여성들은 육아해결을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로 꼽는다. 저 출산과 고령사회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국가발전과 민족장래는 어둠의 터널로 빠져들고 말 것이 분명하다. 아무 걱정 없이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장려책이 나와야하고, 환경조성이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별로 세 자녀를 출산할 경우에 장려금과 아파트청약에 우선순위를 준다는 정도로는 실효성이 없다. 이제 자녀출산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아선 안 된다.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국민의 자녀라는 개념에서 출산환경 개선과 제도 개선을 단행해야한다. 임신에서부터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는 복지정책을 펴야 한다.국가재정 문제의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저 출산문제를 가정에만 맡겨두는 태도는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한 인식이다. 한 아이의 출산으로 부모, 친가, 외가의 어른 6명이 고민에 빠지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출산기피 현상은 지속될 것이고, 민족의 앞날은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손녀 첫돌을 맞아 아들내외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외가에서 양육하기 때문에 간혹 만나는 날이면, 얼굴이 낯설어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다. 그러나 이건 다행한 경우에 속한다. 손자가 외국에 있어서 일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 노인들도 많고, 결혼시킨 자녀가 오래 동안 손자를 낳지 않아 안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손자와 간신히 안부를 주고받지만, 노인들은 혈연의 정을 아쉬워한다.현대의 핵가족제도는 조손간(祖孫間)의 단절을 가져왔고 노인들에게 애정결핍을 안겨주고 있다. 조손간의 따뜻한 혈연관계의 복원은 가정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이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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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중
  • 2008.11.21 23:02

[금요칼럼] 정직성이 생명이다 - 장인순

청소년.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싱싱하고 정의에 불타며 무엇보다도 정직한 이름이 아닌가?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온 한국 청소년의 반부패 인식지수가 10점 만점에 6.1이라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청소년 18%가 "10억을 번다면 10년을 감옥에 가도 좋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성인들의 반부패지수는 몇 점이나 될까, 참으로 참담하고 두려울 뿐이다. 아침이 조용한 나라에서 백의민족으로 살아온 은근과 끈기의 후손들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선현들의 말씀은 세살 먹은 아이도 안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부정부패는 못 배운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는 자 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권력이 없는 자 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통사람 보다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저지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이 참담한 현실을 치유할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평생동안 선진국, 후진국 등 40여 개 국을 다니면서 도대체 선진국과 후진국은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선진국을 만드는 요인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나라 국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고유한 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을 배우면서 느낀 점은, 그토록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유사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선진국은 인재를 중요시하는 창의적 교육정신을 바탕에 둔 수월성 교육을 시키는 훌륭한 교육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진국 국민은 정직하고, 책을 많이 읽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다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선진국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은 국민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정직성은 인간관계와 사회에 믿음과 신뢰를 주는 묘약으로서 인간 모두가 추구하는 자유의 원천이며, 이 자유는 곧 인간조건의 신비와 매듭을 푸는 열쇠로서 바로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독서력은 그 국가의 성장 동력이며 동시에 정직성을 회복하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한다.또한 여성인력을 많이 활용하는 것도 선진국들이다. 공직사회에 여성인력이 많으면 보다 깨끗해질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거의 모든 부정부패는 국가제도를 만들고 관할하는, 힘 있는 공무원과 그리고 권력있는 자들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다.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어 국가의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수호해야할 국회의원들이 여야 할 것 없이 동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정행위를 눈감아주고 서로 보호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범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고 귀를 열어 놓으라고 충고하고 싶다.입시준비를 위한 책 이외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인성교육과는 거리가 먼 이 땅의 청소년들은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보면서 자란 진정한 피해자가 아닌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데, 청소년들의 가슴에 드리우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방법은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부모라는 윗물이 맑으면 아이들은 정직할 수밖에 없다. '땀의 미학'을 알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땀 흘리고 정직하게 사는 부모의 삶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생명력이 있는 교과서이다.우리는 분명 균형감각을 상실한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자연과학이 인문사회과학과 함께 어우러진 교육을 통해서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느림의 미학'을 위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우리국민 모두의 소망이 있다면 바로 정직한 정부, 정직한 공무원이다. 이와 함께 힘 있는 자, 교육자 그리고 공정한 언론과 함께 믿음과 신뢰가 넘치고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싶은 것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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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1.07 23:02

[금요칼럼] 산악인들이 고봉에 오르는 힘 - 박범신

산악인들은 왜 명줄을 걸고 산에 오를까.특히 7천,8천이 넘는 고봉들은 직벽에 가까운 벼랑이 많은데다가 만년빙하가 쌓여 있기 때문에, 8천 미터 이상되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곳을 일찍이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산소가 모자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빙벽은 물론 위험한 크레바스가 거미줄같이 깔려 있으며, 극한의 추위와 눈사태 등의 위험이 상존하니 그야말로 죽음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수많은 산악인들이 일상의 희생을 무릅쓴 채 돈을 모으고 시간을 모아서 그 '죽음의 지대'에 기꺼이 도전하고 있다.왜 그들은 산에 오를까.돈이나 어떤 명리를 위해서?아니면 좋아서? 미쳐서?산악인들이 고산에 올라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극히 소수가 누리는 부가가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자기 명줄을 걸고 정상에 올라도 현실적인 어떤 보람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등반가는 이르기를, 고산등반을 하려면 첫째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둘째 가족과 직장으로서 버림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셋째 등반을 끝내고 돌아와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어야 비로소 프로등반가라 할 수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참으로 비장한 출정사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좋아서 그들은 오르는 것일까.단순히 좋아서, 라고만 말하고 말면, 위의 비장한 출정사에 비해 그 낱말이 너무 범박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또 미쳐서, 라고 말하면 표현의 천박함 때문에 산악인들이 혹시 화를 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저렇게 따져 보면, 산악인들의 고산등반엔 확실히 어떤 합리적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쾌락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야성적인 등반가였던 쿠쿠츠카는 고산 등반에서의 '몇일'은 일상에서의 '몇년' 혹은 '몇십년'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그 어떤, 내적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내적가치의 전제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반대급부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싶은 인간 본연의 욕구와 맞닿아 있다.일상의 삶은 어떠한가.우리는 매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하지만 빙벽에 들러붙은 산악인은 다르다.그는 빙벽에 붙는 순간 습관과 권태로울 뿐인 안락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는 완벽한 단독자이고 모든 선택권을 쥔 절대적인 자유인이며 자신과 빙벽과의 관계만으로 승부하는 실존적 존재가 된다. 한순간 한순간이 놀랍게 생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감각과 야성과 이성적 판단이 한통속으로 완벽하게 융합하는 전에 없는 경험 속으로 빠진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능동성을 발휘해 그를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과감하게 분쇄해 나간다. 허위의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고, 엉뚱한 유혹에 빠져 길을 잃어서도 안되고, 타인의 어떤 조력도 구할 수 없다. 그에게 욕망과 모랄이 있다면 철저히 자신의 목숨값이 기준이다. 그러니 이성에 눌려있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를 것이고, 합리성과 구조에 눌려 있던 야성이 빅뱅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쿠쿠츠카가 말한 바, 고산에서의 몇일이 일상에서의 몇십년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그렇다면, 산 아래에서 사소한 안락과 기득권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만을 나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습관적 일상의 눈으로 볼 때, 아무런 명리에의 소득도 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그들은 '미쳤다'.안락은 좋은 것이지만 권태롭다.위험한 시간은 우리에게 단독자로서의 강한 의지를 불러오고 집중력과 능동성을 드높이며 최종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킨다. 티베트에선 이런 위험한 순간을 '거꾸로 매달린 틈'과 같다 하여 '바르도'라고 부른다. 어떤 것은 끝나고 어떤 것은 시작되는, 또 어떤 것은 추락하고 어떤 것은 상승하는 과도기의 시간이다.요즘 경제가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한다.야수와 같이 갈 용기가 있다면 불리한 조건들을 기회의 병풍으로 삼을 수도 있다. 길게 보면 영원한 추락은 없다. 빙벽에 들러붙어 제 몸의 이성과 감성과 야성을 완전히 융합해 마침내 한 봉우리를 넘어서고마는 산악인들의 의지를 배울 때가 아닌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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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31 23:02

[금요칼럼] 이순신 장군의 붓 - 정목일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인물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한 때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 있었다.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좋은 정치를 편 대왕으로,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민족의 태양' '성웅'으로 불려진다. 이순신장군상에는 어김없이 긴 칼을 잡고 있다.경상남도는 역점사업으로 '이순신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순신 장군을 세계화하고 남해안 시대 문화관광을 선도하기 위해서 1천500여 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알리기, 거북선 건조 등 세계화작업과 이충무공 정신선양, 거북선 탐사 등 19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라남도에서도 함께 추진하고, 일본에서도 참여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이순신 프로젝트 중 흥미로운 것은 거북선 찾기이다. 경상남도에서 이번에 거북선을 찾는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거북선이 수장된 된 곳으로 예측되는 거제 칠천량 해저를 샅샅이 뒤져 거북선 잔해를 찾아내자는 것이다.이순신 장군은 광화문 대로에 긴 칼을 든 구국의 영웅으로 서있다. 이순신의 손은 칼만을 잡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한 손은 붓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해군의 사령관으로서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수행해 23전 전승으로 조선을 구하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찬란한 기록을 남겼다.이순신은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하였지만, 한 손은 붓을 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으로서 어느 누구보다 휴식과 수면이 필요했다. 그의 건강은 곧 국가존망과 결부돼 있었다. 밤이면 보초 이외에 모든 군졸들이 취침해 내일의 전투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장군만은 잠들 수가 없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와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군졸들이 잠에 빠진 밤중에 장군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야 했다. 장군은 정신의 피로 먹을 갈았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붓을 들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전투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느꼈다.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망각의 바이러스를 풀어 사실과 진실을 퇴색시키고 소멸시켜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임진왜란은 조선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했고, 전쟁 중에 가장 고단하고 고뇌하고 잠 못 들어 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그는 7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잠 들 수 없었다. 그의 손엔 칼과 함께 붓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가 기록되지 않아 훗날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한낱 전설이 되고 설화가 되어 떠도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과장되고 와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장군이 잠들지 못하고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기록해 놓은 '난중일기'는 그의 일생 전부이자 생명이나 다름없었다.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국난을 수습한 인물을 가려 공신을 책봉했다. 일등공신에 오른 인물은 육군에 권율 장군, 해군에 이순신, 원균 장군이었다. 이 세 사람은 당시 무무백관들에 의해 일등공신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이순신과 원균의 평가는 너무 대조적이다. 이순신은 민족의 태양, 성웅, 불멸이라는 최상의 상징성으로 추앙되지만, 원균의 경우는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순신과 원균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통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고, 원균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점이 큰 차이를 만든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1592년(선조 25)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한 달 전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일기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으므로 본래는 이름이 없었으나,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찾기는 해저 속에 묻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금속은 시간에 의해 녹슬고 형체도 없이 해체되고 소멸되는 것이어서 그 잔해를 건져낼 수 있을까 관심이 쏠린다. 이순신장군이 남긴 '난중일기' (국보 제 7호)는 영원 속에 그대로 남아 그를 역사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위대성은 구국의 영웅에 그치지 않고, 그가 치룬 전쟁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와 진실을 증언하고자 한 점이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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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24 23:02

[금요칼럼] 생각대로 쓰다 - 김용택

미국산 쇠고기 파동, 유가의 급등과 미국 발 금융위기, 그리고 중국산 분유 사태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랜 가뭄과 늦더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러한 기후변화의 낌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바꾸려 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위기가 우리 살림살이의 위기가 될 줄을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고, 어마 어마하게 잘 사는 나라의 은행이 망할 지를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런 사태에 대응하는 나라 일군들의 긴장된 얼굴들을 화면으로 보며 우린 그냥 덜컥덜컥 겁이 날 뿐이었습니다. 넥타이 풀고 회의하는 그들의 입과 얼굴을 살피는 언론들도 모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숨이 차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아우성만 칠 뿐 이 명백한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그 어떤 현실적 타개책도 장기적 계획도 대안도 없이 슬그머니 위기의 꼬리가 사라지려고 합니다.▲일상 속에 다가온 위기위기는 문제의 핵심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지요. 이런 위기를 맞아 모두들 입을 모아 어렵다고 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거리에 차량의 물결은 넘치고 주말이면 차들이 고속도로와 산과 들을 매웁니다. 식당과 술집은 사람들로 넘치고, 거액을 쏟아 부은 지자체들의 내용 없는 축제의 에드벌룬은 이 고을 저 고을의 가문 하늘에 둥둥 뜬, 뜬 구름을 잡습니다. 위기라는 말이 뻥 같지요. 혹 이 위기의 국면만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에라, 모르겠다. 그러려면 그러라는 똥 뱃장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위기는 또 옵니다. 다시 올 위기의 파고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구체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혼돈과 공포의 파고는 일순간에 우리들의 일상을 덮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이번 금융위기는 말 그대로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글로벌하게 실감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글로벌하다 해도 문제의 단초는 우리에게 있고, 그 해결 방법의 실마리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을 제일로 치는 가치와 덕목을 재고할 때가 왔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진정한 자기 혁신이 필요 합니다. 글로벌이란 무엇입니까. 지식과 자본의 세계적인 공유를 의미합니다. 지식은 세계화 되고 다국적 시장에 맡긴 자본은 큰 물방울로 쉽게 빨려갑니다. 자본과 지식의 공유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사고를 요구합니다. 큰 문제는 교육의 틀을 바꾸는 일입니다. 시험만 잘 보는, 나 홀로 똑똑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이미 그 생명력을 다 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는 풍요로운 인간정신에서 오는 창조적인 인간이 요구 됩니다. 더불어 자본에 기댄 삶의 가치척도는 폐기되고 자연과 생태와 순환에, 그리고 땅에 대한 투자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을 끝없이 파괴합니다. 지속발전 가능한 삶과 자연! 친화적인 가치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가까이 다가갈 때입니다.▲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 파괴새로운 세기의 날은 밝은지 오래 되었는데 우리는 지금 눈을 감은 채 몽당 빗자루를 붙잡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구시대적인 낡은 가치에 기댄 모든 장치는 새롭게 수리되거나 폐기 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독점은 한군데가 무너지면 다 함께 망한다는 뜻입니다. 왜 아직도 우리는 새로운 가치 창출에 이리 인색합니까. 왜 아직도 우리는 낡은 이념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씁니까. 사회의 모든 독점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음모지요. 경제의 민주화는 인류 생존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우리 인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시대를 거쳐 기후변화에 대처해야하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다다랐습니다. 한정된 지구 자원 고갈은 인류의 미래를 약속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괴테의 시입니다. 지금 음미할 만한 내용입니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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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7 23:02

[금요칼럼] 이땅의 교육은 어디로 - 장인순

지구상에서 이 땅의 학생과 학부형 같이 힘든 삶을 사는 나라가 또 있을까!세계에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고, 정부 예산 10%를 초과(1년간 20조원)하는 세계 제일의 사교육비를 쓰는 나라에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탈감 그리고 무기력뿐이라니. 진정 교육의 왕도는 없는 것인지?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크게는 자연의 질서로 가르치는 것, 지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키우는 건, 작게는 교육 그 자체는 머리에 처넣은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사고력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초, 중, 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고학력이 될 수록 질문이 적을 뿐 아니라 학교수업이 점점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70%이상이 4년 동안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다면 이런 교육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고학력으로 갈수록 입시에 매달려 암기 위주의 반복적인 학습과, 문제를 이해하지(why)않고 푸는 방법(how)만을 강요하는 일률적인 강의로 학생들이 흥미를 잃은 재미없는 교실로 전략되었기 때문이다.▲ 질문과 토론의 교실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 보낼 때 하는 말의 거의 전부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이다. 한편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 가서 질문을 많이 하라"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엄마가 아이들의 입술에 달콤한 꿀을 발라주고 "배움이란 이렇게 달콤한 거야"라고 가르친다. 지극히 적은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모든 학문분야에서 세계정상에 우뚝 서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에서 어떻게(how)가 아니고 왜(why)라고 하는 접근 방법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하게 되고 거기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동시에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 사고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교육은 일률적으로 머리에 처넣는데만 급급한 반면 유대인들은 머리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교실이 토론과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곳으로 학생들이 가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진정한 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과 용기 있는 교육자란우리말에 용장 밑에는 졸장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훌륭한 교육자 밑에는 훌륭한 학생들이 있다는 뜻이다. 훌륭하고 경쟁력 있는 교육자 밑에는 학생들이 변화 할 수밖에 없으며 반드시 경쟁력 있는 학생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 있는 교육자의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이루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고 열을 알아서 하나로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한두 개를 알고 하나를 가르치면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피곤할 수밖에 없다. 많이 알수록 지도하기 쉽고 배우는 학생도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은 예술 (Teaching is art)이라고 한다. 교육자의 가르치는 행위는 예술가가 새로운 자기 작품에 영혼을 불어 넣은 것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아는 용기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가르치는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서 자신의 장단점을 깨달음으로써 좋은 점을 더 좋게,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어 자신을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자의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교육자가 교원평가제에 기꺼이 참여하며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동료들의 평가가 어떤 것인지 자기를 돌아보고 변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과 교육자와 학부형이 하나 되는 것으로 즐거운 교실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력이 있는 교육자이다.▲ 마르지 않은 교육의 샘이 시대를 시간이 뜨거운 시대 바로 무한경쟁시대이며, 자원전쟁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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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0 23:02

[금요칼럼] 우리가 잊은 가난 - 박범신

지난 해, 멀고 먼 터키에서 독자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베이한 도안즈. 터키의 중부도시 카르세르에 있는 에르지에스 대학 한국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번역원이 주최한 한국문학 독후감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고 그 부상으로 변역원이 초청해 방한의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에다가 눈이 커서 더욱 영민해 뵈는 이 터키처녀가 선택한 텍스트는 나의 초기 작품 '우리들의 장례식'. 단편 '우리들의 장례식'을 쓴 것은 아마 서른 살 무렵, 197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서 일주일에 서른 시간 넘게 수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밤에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퇴근하고 대학원에 갈 때는 매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면 늘 졸기 바빴다. 그날도 졸다가 제때 내리지를 못하고 그만 대학 앞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졸다 깨고 보니, 아주 낯선 곳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버스가 부르릉 하며 사라지고나자 갑자기 적막해졌고, 그 적막 속으로 개천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낮은 지붕과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초겨울이라서 개천은 벌써 얼어있었고, 루핑으로 된 판잣집 지붕들 위로 고압선이 도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히끗히끗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이 장위동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나는 무엇에 홀린 듯, 대학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장위동 달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고압선 전신주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니까 고압선 철제 전신주 사이로 뚫려진 길이었다. 어둑신한 길을 따라 오십여 미터를 들어갔을까. 판잣집 추녀 밑에 싸구려 나무관 하나가 기대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나무관의 아랫도리는 가린 것이 없어 골목길에서 그대로 진눈개비를 맞고 있었다.삐죽이 열린 좁은 재래식 부엌에서 늙수구레한 부부가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노모가 죽었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서 조문객은 물론 이웃사람 하나도 와있지 않았다. "눈을 맞는데, 왜 관을 방에 들여놓지 않나요?" 나는 그만 묻지 말아야할 것을 묻고 말았다. 남자가 말없이 방문을 열고 어둡고 비좁은 방안을 보여주었다. 노모의 시신이 아랫목에 뉘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방이 너무 작아서 기성품 나무관을 도저히 방 안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나는 다음날 대학원 수업에 가지 않았다. 하루 여섯 시간이 넘는 수업에 지칠 대로 지쳤으나 나는 퇴근해서 곧장 내 셋방에 돌아와 앉아 '분노'로 밤새워 소설을 썼다. 발표할 곳도 없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70년대의 혹독한 가난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한 분노로 내 자신이 이미 '화염병'이 되었으므로, 난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우리들이 장례식'을 썼다. 노모가 죽었으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한밤중 달동네 복판을 가르고 지나가는 개천 바닥에 노모를 남몰래 묻는다는 이야기였다."이 작품을 쓸 땐 당신처럼 먼 데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는 독자를 만날 날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어요. 소설 속 이야기는 당시로선 단순한 픽션이 아니었거든요"나는 터키에서 온 처녀에게 말했다.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쓴 우리나라의 '70년대 풍경'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간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지금의 젊은 제자들보다 멀고 먼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날아온 처녀와 말이 더 잘 통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내 젊은 제자들과 내 '새깽이'들이 다 잊어버린, 이해하지 못하는, 그렇지만 불과 30여년밖에 안되는 그 역사를 터키의 처녀로부터 비로소 이해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당신은 지금 어떤가?세상은 이제 남의 가난이나 불행에 대해선 아무도 분노하지 않을 만큼 발전했다. 그렇지만 때로 나는 묻는다. '발전'한 것이 맞기는 맞는가. 고통 받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꿈꾸는 것은 어쩌면 '꿈'이 아니라 천박한 '욕망'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허겁지겁 욕망을 쫓다 아우성치며 달려가다가도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애당초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가 가난이 오히려 선(善)이라고 말했던 세월을 한번 쯤 굽어볼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게 아직도 터무니없이 적을 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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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03 23:02

[금요칼럼] 나비의 삶 - 정목일

이 세상에서 나비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을 듯하다. 몸통보다 몇 배가 큰 날개로 춤추듯이 나르는 모습만으로 환상과 행복을 느낀다. 몸 자체가 예술품이다. 형형색색 무늬와 현란한 색채미학, 두 장의 날개는 대칭미의 완성품이다.나비의 삶은 우아하며 평화롭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투지도 않는다. 꽃을 사랑하면서 희망과 미래를 준다. 꽃에게 꿀을 얻는 대신 식물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와 씨앗으로 번성과 풍요를 갖게 만든다.나비는 언제나 무도복 차림새이고 걸음걸이는 곧 춤이다. 꽃에 다가갈 때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벌과는 달리, 곡선을 그으며 다가간다. 다짜고짜로 꽃 속으로 파고드는 벌과는 다르다. 소리 없이 다가가 꽃에 눈 맞추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다. 오래도록 밀어를 속삭인다.나비는 꽃의 빛깔을 가장 잘 안다. 꽃의 향기를 가장 잘 맡는다. 나비야말로 빛깔과 향기를 알아내는 기막힌 감별사이다. 신이 보낸 미의 천사, 평화와 사랑을 위한 사자(使者)가 아닌지 모른다. 인간은 나비의 황홀한 빛깔과 무늬를 갖고 싶어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삶을 갖길 원한다.꽃이 어여쁘다고 한들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무료와 슬픔이 느껴진다. 꽃에 나비가 앉는 모습이야말로 평화와 행복의 표정이다. 유토피아의 구성 요소는 숲과 물, 여기에 꽃과 나비가 있어야 한다. 꽃과 나비는 사랑, 행복, 번영을 상징한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생명체의 숙명이며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비만은 살상을 하거나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한다.꽃가루받이를 통해 식물의 번식을 도모함으로써 생명체 모두에게 이로움을 안겨준다. 가장 연약하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나비는 모든 종(種)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타고 난 예술가이다. 나비가 꽃에서 꿀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일만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삶과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고 있다.꽃은 열매와 씨를 맺고, 열매와 씨는 다시 대지에 생명을 틔운다. 속씨식물은 동물을 유혹해 자기 씨를 멀리 퍼트리게 하려고 당분과 단백질을 생산해낸다. 그 덕에 세상의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온혈동물인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다.꽃이 없었다면 인간도 나타날 수 없었다. 인간은 꽃의 종류를 엄청나게 늘리고 꽃씨를 세상 곳곳으로 퍼트렸다. 그 대가로 과일과 씨앗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감각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꽃과 나비의 사랑과 공생이 있었기 때문이다.기상학에서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날개 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기상학이 아닌 생태학에서도 나비효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꽃을 찾는 나비의 날개 짓은 부드럽고 미약하지만, 인류와 전 생명체의 삶과도 유기적인 관계가 있으며 도움을 준다.나비의 모습과 삶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하면 유익한 나비 같은 삶을 가질 수 있을까. 나비처럼 모든 관계와 삶에 이로움과 축복을 주는 효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비처럼 경쟁, 대립, 갈등, 시기, 모함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삶을 가질 수 있을까.가끔 한 사람의 좋은 삶, 작은 선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켜 큰 힘이 되는 것을 본다. 말없이 쓰레기를 줍는 사람, 자신의 처지가 딱한 데도 이웃을 돕는 사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권력자는 권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부자는 빈자를 위해,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위해,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과 장애자를 위해, 스스로 베풀고 봉사한다면 '나비의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선행 하나씩으로 사랑의 등불을 켜면. 서로서로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는 나비의 삶을 취할 수 있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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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26 23:02

[금요칼럼] 이 가을에 시 한편 - 김용택

날씨가 가물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은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높고 눈이 부시게 푸르기만 합니다. 그 하늘아래 나무와 풀들은 있는 힘을 다해 햇살과 바람을 빨아들이며 익어 갑니다. 강변이나 논두렁이나 밭가에 구절초 꽃이며 쑥부쟁이며 고마리 꽃이며 물봉선화 꽃들이 만발 했습니다. 강아지풀도 억새도 갈대도 바라구 풀도 수크렁도 다 이삭을 피워냅니다. 밤송이들이 쩍쩍 벌어지고, 감은 붉은 얼굴을 세상에 내밉니다. 야산에 가보면 작은 오솔길에 밤과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발아래 툭툭 떨어집니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차창으로 언 뜻 눈길을 주면 거기에 가을꽃들이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오! 저 꽃들 좀 봐라! 누가 가꾸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도, 나와 언제 그러마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마치 지상의 모든 것들과의 굳은 약속인양 그렇게 눈이 시리게 피어납니다. 낮은 산자락 작은 마을 어느 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키 발을 딛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난간에다가 호박쪼가리를 한 개 한 개 널고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저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고향 같은 굳은 약속입니다.시인은 그런 사람일 터입니다. 저기 저렇게 꽃이 피어 있다고, 저기 저렇게 산과 들에 곡식들이 익어간다고, 저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있다고, 저기 저렇게 노을이 붉게 사위어 간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일터입니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대하고 찬란하고 높은 지위와 권력과 돈을 쥐고 세상을 흔드는 자들에게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1톤 트럭에 잡화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 가장의 어깨에 내리는 어머니같은 눈길일 것입니다.발아래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을 사랑해야 할 가을입니다. 정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캄캄한 절망이, 때로 그런 삶의 난간 앞에 서서 우린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절망 속에 서서 고개를 한번 돌려 보면 거기 마른 풀잎이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의 시든 풀잎에 바람이 되는 사람이 또한 시인일 터입니다. 이 가을에는 여러분들이 다 시인입니다.가을바람이 부내요. 시 한편 실어 보내드립니다.'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는/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충분한 음식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모든 사람들이/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가능함을/나는 믿습니다.//우리들이/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모든 이들이/똑같이 소중함을/나는 믿습니다.//선한 기독교도와/선한 이슬람교도가/선한 유대교도와/선한 무신론자들이 있음을/그리고 내가 신뢰하는/모든 이들의 마음에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만일 믿지 않는다면/어떻게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요./날마다/목마름에 슬피 우는 아이들이 있음을/그리고 날마다/싸움을 벌이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음을/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어린아이들은 피부색과 상관없이/서로 어울려 뛰어놀고 있음을/나는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그리고 부디 이와 같은/희망을 간직한 이들? ?많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며/동시에 내가 믿는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벤자민 스바냐의 시-아름다운 소망-전문.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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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9 23:02

[금요칼럼] 나의 독서 일기 - 장인순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으로 계절을 느끼는 가을은 농부들에게는 땀 흘려 일군 수확의 계절이며, 동시에 많은 수험생에게는 고통과 인고의 계절이기도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추석이라는 황금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 연휴에 조상의 묘를 찾는 것 외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황금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아름다운 연휴가 황금알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시간을 창조하는 삶 '독서'나는 일 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황금연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향이나 혹은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 생활 철학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 12시간이상을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다. 이런 연휴에 움직이면 많은 시간과 돈을 길에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만 아니라, 긴 연휴 후에는 심신이 피곤하여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씩 책을 읽으면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즐거움, 특히 연휴 끝자락에서 느끼는 지적포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감이다. 인생의 삶의 가치는 감격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는 글을 통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현재를 결단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 의미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독서는 간식 아닌 주식많은 사람들은 항상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바빠서 매끼니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많지 않듯이, 현대를 사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을 만드는 삶, 다시 말하면 숨어있는 시간을 찾고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한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작은 시공간에 갇혀 살지만, 책을 읽고 지적 배고픔을 채워가는 사람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지적 체력을 가짐으로서 담대하고 정직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선진 시민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독서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니고 우리 삶의 주식이 되어야 한다.독서가 곧 황금알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책 읽는 것 같이 쉽고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쉬운 책 읽기를 위해서 우선 책사는 연습을 열심히 하자. 나는 평소에 시간이 있거나 혹은 출장을 갔을 경우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미술관이나 특히 대형 서점에 들러서 책을 보고 많은 책을 산다. 그리고 출장 중에 남는 출장비는 모두 책을 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책을 선물 하는 것은 인격을 전하는 것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으로 가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독서의 중요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토마스 바트란 의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도 잠자며, 자연과학은 경직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바로 책이 없는 사회는 배만 부르면 행복한 동물의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황금연휴에 책을 읽어 황금알을 낳자./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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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2 23:02

[금요칼럼] 가을엔 '혼자'가 되자 - 박범신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가을이 주는 감성적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감수성도 깊은 가을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여름은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다.일광은 타오르고 녹음은 무섭게 뻗어나가고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걷는다. 문을 있는대로 열어젖혀야 하고 우두자국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게 여름이다. 한낮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아낌없이 열리고 불타오르니 우리들의 영혼은 작열하는 일광 밑에서 숨을 곳이 없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소리치면서도 그 소리의 메아리가 무엇을 울리고 되돌아오는지 가려보지 못한다. 영혼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내면의 뜰은 횡경막에 눌려 비지땀을 흘릴 뿐이다.그러나, 지금 돌아보라.낮에는 햇빛이 아직 뜨겁지만, 저물녘이 오면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흰옷을 찾아입고 창문을 하나씩 닫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소스라쳐 돌아보면 당신은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다.'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버려야겠다'선구적이었으나 고독하게 살았던 전혜린(田惠麟)의 문장이다. 가을이 주는 첫 번째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혼자'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 이제 머지않아 나뭇잎은 물들고 들녘의 곡식은 익고 하늘은 끝간데 없이 높아질 것이다. 그때가 돼도 천지간에 당신이 한 존재로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셈이 된다. 그것은 곧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지난 여름에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성숙한 가을에 '혼자'인 것을 깨닫고 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솟아날 수밖에 없다. '촛불'과 '올림픽'과 '고소영'같은 낱말들이 여름 복판을 관통하고 있는게 보일 것이다. 성숙을 통해 혼자가 된다는 것을 과거를 깊은 성찰로 뒤돌아본다는 것이고 동시에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뚜렷이 인식하고 포기할 수 없는 본원적인 꿈으로 앞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을은 그런 힘이 있다.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게 인지상정이다.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고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나를 덮칠 때, 그리하여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못한 내 삶의 물집들이 눈물겹게 시선 속으로 들어올 때, 바로 그런 가을에 이야말로, 마실나갔던 본성이 내 영혼 속으로 되돌아와 나를 깨우는 축복의 시간이다.가을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그리고 자신에게 묻자. "괜찮은가. 내 삶이 지금 이대로좋은가"/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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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05 23:02

[금요칼럼] 우포늪에서 띄우는 편지 - 정목일

창녕 우포늪에 오면 1억 4천년만 전 태고의 시공간을 만날 수 있다. 여름의 우포늪은 온통 개구리밥, 마름, 생이가래 등 수생식물들로 덮여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늪가엔 수양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늪은 꿈을 꾸는 듯 평화롭다. 여름의 늪은 왕성한 생명의 숨결로 차 있다. 자동차의 매연과 소음으로 하늘을 볼 수 없는 도시인에게 우포늪은 태고의 공간과 숨결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소벌(우포), 나무벌(목포), 모래벌(사지포), 쪽지벌 등 4개 늪을 총칭하는 우포늪은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의 230만㎡에 걸쳐 분포하는 국내 가장 큰 내륙습지이다.낙동강 유역 창녕, 함안지역은 늪지지역이 굉장히 넓었으나 대부분 매립되어 늪의 90%가 소실되었다. 그런데도 우포늪이 이나마 남아 있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우포늪이 시멘트 공간으로 변하지 않고, 대단위 공업단지나 아파트단지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딜 가서 우포늪 같은 태고의 공간을 찾으며, 생명의 보고(寶庫)를 볼 것인가.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사박물관이다.금년 1월에 세계적인 자연사박물관인 워싱톤국립자연사박물관에 가 본 적이 있다. 공룡연구소까지 갖춘 이 자연사박물관엔 과학적인 시설과 자연계와 인류 역사를 테마로 한 1억 2400만 점의 소장품이 있다. 선사시대 각종 동. 식물을 비롯해 전 세계 각국의 자연사 유물들이 전시돼 관람객을 압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연사박물관은 이미 '자연'과 '생명'을 상실했다. 거대한 야수에서부터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상실하여 표본과 박제품이 되어 진열돼 있을 뿐이다. 관람객들은 동물들의 주검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던 숲과 늪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자연사박물관을 메운 관람객 중에 6세의 소녀가 어머니 품속에서 울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소녀는 "이곳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죽어 있어요."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 자연사박물관엔 살아있는 게 없다. 거대한 생명체의 무덤, 아니 주검의 박제품을 보여주는 삭막한 공간에 불과할 뿐이다.우포늪은 얼마나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궁전인가. 1억년 생명의 유전자와 숨결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람사협약(습지보전 국제협약)에 등록된 세계적인 습지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삵, 고니, 가창오리, 가시연, 순채 등 1천여 종 동 .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우포늪에선 멸종 위기의 세계적인 희귀종인 가시연꽃이 피고 있다. 어찌 동물의 박제품을 진열한 자연사박물관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경남에선 우포늪에 따오기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고, 1970년 이전엔 흔한 겨울철새였으나 최근에 거의 멸종이 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가져와 정착시키려는 프로그램이다. 오래 전에 지리산에 곰을 방목한 일이 있지만, 먼저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부터 복원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포늪에 외래종인 베스와 황소개구리에 의해 고유종인 물고기가 멸종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오는 10월엔 창원에서 람사총회가 열린다. 람사협약은 '철새 서식지 보호'라는 것만을 협약하자는 게 아니다. 종(種) 다양성의 보존과 인류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습지를 보존하고 현명하게 이용하자는 데 있다.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총회를 앞두고 우리는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앞으로의 대책에 진지한 검토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전 인류의 반을 먹여 살리는 신의 은총인 쌀이 습지인 논에서 생산된다. 습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놀라운 생명성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우포늪 등 육지 습지와 낙동강 하구언의 을숙도 등 바다 습지를 생명의 자궁으로 인식하고 보존해야 한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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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9 23:02

[금요칼럼] 가을의 문턱에서 - 김용택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햇살은 지구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며, 지상에 따가운 햇볕을 내리 쬔다. 가을이 오고 있다. 인간들이 아무리 '철'없이 곡식을 가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생태와 순환을 조정하려 해도 오고 가는 여름과 오는 가을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어김없는 저 가을 앞에, 계절 앞에 고개 숙여라. 저 위대한 자연의 질서와 순환 앞에 무릎 끓어라.올해는 소낙비가 유독 많았다. 비가 하도 국지적으로 그것도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기상청도 두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기상청의 날씨 오보를 가지고 말도 많았다. 그러나 기상청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우리 인간이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버린 것이다.뜨거운 여름날 소낙비는 모든 곡식에게 거름이고 약이다. 특히 벼가 동 베어가는 8월 중순을 넘어서서 소낙비가 쏟아지다가 날씨가 확 들어버리면 햇살은 정말 뜨겁게 대지를 내리쬔다. 어른들이 그런 날씨를 보며 "하따, 벼가 한 뼘씩은 커 불것다." 하시며 좋아 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소낙비가 뚝 그치고 난 후 벼를 보면 벼가 쑥쑥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1년 중 가장 늦게 씨를 뿌리는 배추와 무씨를 뿌리고 쪽파를 심을 때다. 대게의 곡식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을 하는데, 그 중에 무와 배추와 쪽파는 한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 늦게 거둔다.어렸을 때 어머니와 배추 씨를 땅에 묻으며 물었다. "어매, 왜 이렇게 한구덩이에 여러 개의 씨를 묻어?" "한 개는 날아가는 새들이 먹고, 한 개는 땅에 있는 벌레가 먹고 땅위로 솟은 싹은 사람들이 먹는다."고 하셨다. 이제 그 말도 옛말이 되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벌레와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고, 날짐승 들 짐승들이 곡식을 '공격'한다.농부들만큼 자연과 생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동네 앞 정자나무에 잎이 피는 것을 보고,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그해의 흉년과 풍년을 점친다. 달의 모양, 바람 부는 방향과 몸에 느껴지는 바람결로 비가 오는 것을 안다. 이 때 쯤 어디를 가면 강물에 다슬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짐승과 곤충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날씨를 점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것을 오랜 전통으로 전해 주었고, 그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이 가르쳐 준 교육내용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물려받았다.하늘이 높고 파랗다. 지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부지런히 가을을 준비한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자연의 약속을 농부들은 믿고 살았다. 그것이 농사였다. 농부들은 땅에 곡식을 심어 곡식을 키우고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 자기도 먹고 세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땅을 살리고 곡식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들, 그들의 저 오랜 삶을 우리들 삶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맑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 속에 자라는 벼와 곡식들을 보며 한탄한다. 우리들이 농사지은 것은 값이 땅이 꺼지게 떨어지고 우리가 사오는 것들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그러기를, 그런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농부들의 한숨이 우리 땅을 꺼지게 한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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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2 23:02

[금요칼럼] 어머니의 태극기 - 장인순

광복 63주년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은 8월이다. 연구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언덕의 대형 태극기는 하늘에 계신 어머님과 태극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와함께 태극마크를 단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삼 조국의 의미를 생각한다. 과거 우리나라는 수없는 외침으로 짓밟히고 갈갈이 찢겨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우리 국민 특유의 민족혼이 자유민주주의와 맞물려 그 많은 상처를 치유했다. 아직은 분단의 아픔은 있지만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이 된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보릿고개와 배고픔이 상식으로 통했고 국민소득 100불 시대였던 1960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 외국유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목표였다. 결핵으로 힘들었던 것을 털고 1969년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쥐어줄 100불(당시 정부에서 허용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힘들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아들의 유학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가난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삶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렵게 마련해주신 100불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였다.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았던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내방에 들어오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께서는 내게 눈물과 정감을 나누어 주시는 대신 하얀 종이에 곱게 싼 것을 건네주시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순간 내 손안에 들려진 무게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은 무엇일까? 평소에 말씀이 적으셨고, 아무리 힘들어도 7남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주신 종이를 풀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깨끗한 태극기' 한 장이 얌전히 접혀 있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펼쳐들고 오랫동안 어머니 마음 앞에서 가슴이 메는 통증을 느꼈다. 교육을 받지도 못한 어머니가 단돈 100불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신 태극기에는 어떤 의미와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십여 년 이상 일본에 사시면서 국가가 없는 국민의 슬픈 비애를 몸소 체험하셨던 어머니이기에, 더 큰 땅에 가서 공부 마치고 빨리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는 어머님의 민족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내가 학위를 받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머니! 그 후 일 년 만에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이 나이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란 언어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우리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단어이기 때문 아닐까!1999년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으로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연구원 입구 언덕 위에 12X9m짜리 대형 태극기를 걸 수 있는 국기 게양대를 만든 것이었다. 태극기는 지금도 1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대한민국의 얼과 함께 휘날리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을 유학 보낼 때 가방 속에 몰래 태극기를 하나씩 넣어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딸아이들이 머무른 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아이들 공부방 벽에 태극기가 걸려있지 않는가. 내가 그 시절 어머니께 전해 받았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그 곳에 걸려 있는 듯 숙연함에 목이 멨다.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의 선물은 무엇일까! 어느 시인의 "엄마는 눈물을 진주로 만든다"는 말처럼 여리면서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강한 우리들 어머니들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뜨거운 교육열이 있었기에 조국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태극기는 하나인데 왜 이렇게 분열되고 촛불집회 속에 반국가, 반민주주의 구호가 나오는 걸까. 참으로 안타깝다. 8월 광복절, 올림픽 경기장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는 우리 선수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이 땅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는, 그러면서 남을 배려하고 질서있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하나의 태극기 아래 힘을 합쳐서 작지만 강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면 한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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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15 23:02

[금요칼럼] '제3의 눈' - 박범신

티베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일대의 사원에 가면 사원꼭대기에 커다랗게 한개의 눈이 그려져 있는 걸 흔히 보게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이 외짝눈이 새겨진 T셔츠나 돌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원 입구에서 쭉 찢어진 커다란 눈을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마치 숨기고싶은 내 오장육부를 투사하는 듯한 눈빛이다.이 눈을 흔히 '제3의 눈'이라 부른다.이는 영혼의 눈이다. 티베트에서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본성을 똑바로 보는 정견이 그 첫째이고, 정견을 확고히 다져 끊이지 않는 체험으로 다지는 명상이 그 둘째이며, 그러한 정견과 명상을 우리의 실재, 또는 현실적인 삶 전체와 합일시키는 행위가 그 셋째이다. '제3의 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견을 위한 눈이다.사람에겐 눈이 두개 있다.좌우에 눈이 있는 것은 넓게 보자는 것보다 오히려 똑바로 보자는 뜻에 더 부합된다. 한쪽눈만 가지고선 아무래도 사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개의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믿는 현상에 불과하다. 객관적 현상을 똑바로 보자는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바로 이 두개의 눈에서 비롯된다.그렇다면 현상은 곧 진실인가.사실주의적 세계관의 문제는 진실이 항상 사실이나 현상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고약하게도 사람은 보는 데로만 알고 보는 데로만 느끼고 보는 데로만 삶을 운영하지 않는다. 사람은 두개의 눈으로 현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 제3의 눈' 으로 현상 너머의 다른 본질을 또 본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거창하게 본성을 꿰뚫는 영혼의 눈이라고까지 갖다 붙일 것도 없다. 문화적 인간과 야만적 인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제3의 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눈과 상상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사물을 볼 때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사람이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지만 은밀한 내적 통로를 통하여 그는 그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않고 기억과 상상력을 보태어 해석한다. 이를테면 숲을 보면서 수목장이란 장례문화를 생각하고, 장례문화를 통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를 통해 평생 나무꾼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가난한 생애에 닿는다. 가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기억의 총체성을 부과해서 그는 숲을 보고 해석하는 셈이 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뛸 수도 있다.상상력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숲을 보고 자연의 원리를 상상할 수 있고 자연의 원리를 짚어 우주를 내다볼 수도 있다. 지구조차 떠날 수 없는 인간이 신을 찬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조건은 따져보면 식욕과 성욕조차 이길 수 없는 동물의 층위에 놓여있지만, 그와 동시에 신적인간에 이를 수 있을 만큼 그 층위가 넓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어떤 이는 그 자신 부처가 된다. 인간이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토록 넓은 층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제3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각설하고.단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오로지 생물학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잘 먹고 어떻게 잘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비로소 기억과 눈과 상상력의 눈이 작동한다. 짐승의 층위로부터 하늘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대의 스펙트럼 앞에 존재하는 인간이 어떤 층위에다 자신의 삶은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요약되는 '제3의 눈'에 달려 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우리가 세계에서 최상의 정보화 국가를 이룬다고 해도 이 모든 정보가 오히려 기억과 상상력을 도태시키거나 감금시키는 방향으로만 확장된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성공'이라고 부르는 '신화'도 마찬가지다. '제3의 눈'을 감금시키는 정보화나 성공은 우리를 다만 물질의 감옥 속에 가둘 뿐이다./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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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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