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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중국의 부상과 우리의 선택 - 이서항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지속적인 고도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부상문제가 최근 또다시 국내외적으로 언론매체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 '굴기'(?起)라고 표현되는 중국의 부상(rise of China)은 사실 21세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국제정치의 화두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특히 금년은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어 내고 개혁?개방에 나선지 꼭 30년이 되는 해이자 세계 모든 사람들의 눈이 쏠리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됨에 따라 중국에 대한 국제적인 주목과 관심은 그 어느때 보다도 높다.그렇다면 왜 중국의 부상이 국제정치의 중요한 화두가 되면서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일까? 크게 3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첫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중국의 엄청난 변화 때문이다. 우선 중국의 국민총생산(GDP)은 지난 30년간 거의 매년 10%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15배로 늘어났으며 오늘날의 총 경제규모는 세계 3위를 자랑하고 있다. 물론 1인당 국민소득은 13억이라는 많은 인구로 인해 아직도 세계의 하위권(100위권)을 맴돌고 있지만 전체적인 경제총량은 미국과 일본을 뒤쫓는 강대국 수준인 것이다. 특히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은 막대하며 무역으로 벌어들인 외환보유고는 올해 초 무려 1조5천억여 달러에 달해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둘째, 중국의 부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또한 확대된 경제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는 물론 세계 각 곳의 자원과 원자재를 대상으로 거의 무차별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 수년동안 에너지 및 자원확보를 위해 자원부국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중앙아시아 등의 지역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외교를 펼쳐 왔으며 이러한 공세적인 접근은 이미 국제사회에 경계음을 울린 바 있다.셋째, 중국의 부상과 관련하여 국제적인 관심과 우려의 대상이 되는 또다른 이유는 군비지출과 이와 연계된 군사력 증강때문이다. 중국은 지난 10여년간 거의 매년 두자리수 이상의 비율로 국방비를 늘려왔으며 올해 국방비도 작년에 비해 17%이상 늘린 것으로 발표된 바 있다. 중국 국방당국은 증대된 국방비가 주로 군병력의 관리 및 처우개선에 집중되고 개선된 군사력은 "국가의 독립과 영토보호를 위해 사용될 뿐, 다른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주변국의 시선은 이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동북아의 많은 국제안보 전문가들은 중국의 실제 국방비 지출이 정부의 공식발표 수치보다 2-3배 높으며 지역 군비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지난 수년간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총 무역거래량은 1년에 약 1,450억 달러로 중국은 우리의 제1위 교역상대국이자 제1위 수출대상국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나라사이의 교역규모는 수교가 이루어진 14년 전과 비교해 볼때 약 23배가 늘어난 수치이다.무역규모의 확대와 함께 우라나라와 중국간의 사회?문화?인적 교류도 놀랄만 한 변화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1992년 수교 당시 불과 13만명에 불과했던 양국간 상호방문자는 작년에 거의 6백만명에 달해 무려 45배나 늘었다. 현재 두 나라사이의 항공기 운항편수가 주 평균 약 830회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인적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국제적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 중국의 급격하고도 무서운 부상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결국 아래와 같은 2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즉, 중국의 부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와 이러한 중국의 부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이 내부적으로 도농간 격차, 지역 불균형, 정치적 민주성의 한계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도 성장과 발전을 지속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엔은 지난 5년간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도를 미국보다 1% 앞선 약 17%로 산정했는데 이러한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장을 계속할 중국을 어떻게 대우하고 또한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중국의 놀라운 부상이라는 국제정치의 엄연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취할 선택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중국의 부상이 가져올 위험요인을 줄이면서 기회요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 같다./이서항(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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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3.14 23:02

[금요칼럼] 불안과 매혹 - 김탁환

3월과 함께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새내기가 오가는 교정은 봄바람과 함께 싱그러움으로 넘쳐난다. 갓 스무 살, 나는 꿈 많던 그 시절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매혹과 불안을 꼽는다.매혹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지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어찌 글쓰기뿐이랴. 자신이 택한 일에 몰두하여 시간의 흐름조차 잊는 것, 저물 무렵 일을 시작하여 길어야 30분 쯤 지났으리라 여겼는데 밝아오는 동쪽 창문에 깜짝 놀라는 것, 그것이 바로 매혹이다. 스무 살은 자신을 매혹시키는 일을 찾고 그 일에 온 몸 온 마음 바쳐 몰두하는 시절에 다름 아니다.그렇다면 불안이란 무엇일까.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청년 시절을 예로 들어보자. 밤을 꼬박 새워 쓰고 또 쓴 습작을 통해 카프카는 글쓰기가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를 알아버렸다. 오직 글만 쓰면서 하루를 한 해를 평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열정을 다하여 글을 짓던 카프카도 늘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욕망에 필적할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1912년 9월 22일 밤을 새워 <선고>란 단편을 완성하고는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을 듯하고, 큰 불이 준비되어 그 불 속에 모든 것, 가장 기이한 생각들조차도 불타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며 기뻐하는 카프카. 1914년 중편 <변신>을 완성한 후 <변신>에 대하여 심한 혐오를 느낀다. 마지막 부분은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때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며 극도의 불안을 드러내는 카프카. 프라하 출신의 섬세한 소설가는 과잉된 매혹과 과잉된 불안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이 위험한 외줄타기가 젊음의 순수한 표정이고 현재까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스무 살은 성공을 향한 욕망이 큰 만큼 좌절로 인한 두려움도 깊고 자신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잦다. 과연 카프카가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탁월한 소설을 썼을까. 내 아버지가 조금 더 부자였더라면, 이 대학교가 아니라 저 대학교에 합격했더라면, 사사롭게 쓸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스무 살 젊은이는 좀 더 쉽게 불안을 이기고 좀 더 아득한 매혹으로 나아갔을까.모리스 블랑쇼는 젊은 카프카의 변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에게 이로운 상황이란 영원히 찾아들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전부 바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기의 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스무 살 대학 새내기에게 불안과 매혹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외적인 변명 따윈 일찌감치 접고 일 그 자체가 내뿜는 매혹에 다가가는 것이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일로부터 멀어지거나 자책하며 일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도 처음부터 <지옥문>이나 <칼레의 시민>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발자크 평전』에서 츠바이크는 훗날 인간희극이라는 전대미문의 작품을 남기는 대작가의 보잘 것 없는 젊은 날을 꾸밈없이 전한다. 이 못된 젊은이의 재능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학교마다 그는 벌 받는 자리에 있었고 라틴어는 32등이었다!불안과 매혹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안도 사라지고 매혹도 없는 일상이 백배는 더 위험하다. 미래의 안락을 정해두고 현재를 단지 그곳으로 가는 수단쯤으로 파악하는 삶이 천배는 더 끔찍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서 매혹에 떨고 불안에 잠길 일이다.갓 스물의 젊은이여! 불안한가?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라. 불안한가? 잠을 줄여 그대 일에 몰두하라, 즐겨라. 불안은 매혹의 어머니일지니./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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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3.07 23:02

[금요칼럼] 부자가 뭐가 문제인가? - 김민영

고소영에 이어 때 아닌 강부자 열풍이 분다.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이 새 정부와 청와대를 대부분 차지했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고소영정부에 이어 땅 많은 강남부자 내각이 국민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장관 후보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1% 안에 드는 재력가들이다. 자산이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것 말고도 이 분들은 공통점이 많다. 대체로 서울 강남에 모여살고 부부는 각자 아파트 한 채씩, 혹은 두세 채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오피스텔과 임야, 농지도 상당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분들 주변에는 한결같이 부동산 정보에 밝은 분들이 많은데 이 분들은 대개 선의로 투자를 권유하며 이렇게 투자하면 값이 뛰어, 본의 아니게 재산이 늘어난다. 또한 이 분들은 외제차를 애용하고 값비싼 예술품, 골동품, 귀금속을 사랑하고 이름난 헬스장과 골프장에서 우의를 다진다. 이런 분들도 인생의 회한과 아픔이 있는데 젊은 날 병약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과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자라 외국국적을 갖게 된 관계로 자녀들과 헤어져 사는 아픔이다. 공통점이 참 많은 분들이다. 부자가 뭐가 문제인가? 청와대는 국민들이 흥분하자 이렇게 응수했다. 부를 축적하는 것이 유능함의 표상이라 생각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새 정부 관계자들의 철학이 깊게 배여 있다. 그렇다. 부자가 문제라 생각하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정당한 노력으로 얻은 부는 존경의 대상이지,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청와대나 장관 후보가 된 분들의 언행이 국민적 상식이나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 아닐까 싶다.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유방암 검사를 했는데 암이 아니라는 결과를 보고 남편이 기뻐하며 서울 서초동 오피스텔을 사줬다 부부가 교수 25년 하면서 재산30억이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양반 아니냐는 등 한마디 한마디가 어록에 남을 만한 언급들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많은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또 사고팔기를 반복한 것이 투기를 통해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 것 말고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좁은 국토에서 땅과 주택을 투기의 대상,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삼다보니 서민의 허리를 휘게 만들고 경제의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동산투기 망국론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부동산투기를 막는 것이 사회정의이며 공동체의 합의일 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경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게다가 벌써부터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개발재건축 용적률 완화와 민간 분양가 상한제 폐지 정책은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새롭게 도입한다는 지분형 주택 정책도 주택을 투자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정책이니 집 없는 서민보다 다주택보유자, 부동산자산가들에게 훨씬 더 친근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보니 땅부자 내각이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주택정책을 펼치겠느냐는 국민적 의구심이나 거부감이 표출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청와대 대변인은 또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재산이 많다고 자격이 없다고 하면 흑백논리라며 중요한 것은 능력과 국가관이라 했다. 이 또한 정당한 항변인지 모르겠다. 지금 장관 물망에 오른 분들 상당수가 교수인데 능력이 있는 교수라면 10년간 제대로 된 논문 한번 발표하지 않고, 제자들의 논문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관 후보의 절반에 가까운 분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나 자녀들의 상당수가 국적을 포기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당혹스럽다. 우리는 역대 총리, 장관들이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논문표절 의혹이나 자녀국적시비 등 도덕성 문제로 줄줄이 낙마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를 국민들이 용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왕 물러날 것이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정리되는 것이 여러모로 국익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새 정부가 국민적 불신을 받으며 반쪽짜리 정부로 출발하는 것보다는 다소 늦더라도 온전한 장관들로 구성되어 믿음직한 출발을 하는 것이 나은 것 아니겠는가? /김민영(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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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2.29 23:02

[금요칼럼] 선진화 위한 정책연구시스템 개편 - 전홍택

우리나라는 건국 60년 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산업화 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세계적으로 드문 모범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그렇다면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에 우리가 추진하여야 할 국가적 과제는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선진화이다.선진화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의 모든 면을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결국 국가경쟁력과 국민의 삶의 질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글로벌 경쟁시대에 국가경쟁력과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는 국가간 이동이 불가능한 제도와 정책이므로 결국 선진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수준의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전체의 정책능력이 요구된다.국가 정책능력은 정책의 기획?조정?집행?평가 등 정책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국책연구소, 기업연구소, 대학, NGO 등으로 구성되는 정책연구시스템의 총체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정책연구시스템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선진화라는 국가적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개편이 필요한 실정이다.첫째, 정책연구시스템에서 정부와 국회는 정책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두 개의 축이다. 그런데 정부는 자체적으로 상당한 정책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20여개 국책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있으나 국회는 자체적인 정책능력이 제한되어 있는데다 국회의 정책능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국회내 연구기능도 미약하다.둘째, 정부의 정책연구기능을 지원하는 국책연구소는 단일이사회 체제로서 총리실 산하에 있기 때문에 과거의 각 부처 산하체제에 비해서는 연구에 대한 정부 개입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정부측 이사가 이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책연구소 예산이 거의 전부 정부출연금과 정부용역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책연구소의 연구가 객관성과 공정성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셋째,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사회현상은 복잡다기하기 때문에 종합병원에서 다전공 의사들이 협력 진료하여야 하는 복잡한 질병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국책 연구소들은 대부분 한 개 분야에 전문화된 연구소로서 복잡다기한 사회현상을 여러 분야의 종합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다전공 협력연구에는 부적합하다.넷째, 대부분의 국책연구소들은 한 개 분야에 전문화되어 있으므로 그 분야를 담당하는 해당 부처가 주요 고객이며 예산 또한 해당 부처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부처는 단기현안과제의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므로 국책연구소는 중장기과제보다 단기현안과제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끝으로 대학, NGO 등 민간부문의 정책연구가 최근 활성화되는 추세에 있으나 정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는 인력과 정보, 예산 등이 크게 부족하다.따라서 정부는 정책연구시스템을 개편하여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고 국가전체의 정책능력을 높임으로써 선진화 추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선진화 추진을 위한 정책연구시스템개편방향은 첫째, 국회의 연구기능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회 산하 일부 연구소를 통합하여 국회로 이관하여 연구중심 종합연구소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둘째, 국가적으로 중요한 중장기 과제를 종합적 시각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회 산하 일부 연구소를 통합하여 국민경제자문회의 또는 대통령실에 두고 연구중심 종합연구소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나머지 연구소들은 정부용역연구소로 특화할 수 있을 것이다.셋째, 연구회의 해체에 따라 정부 각 부처의 자체적인 정책능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으므로 각 부처는 필요한 정책연구 인력을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이를 통해 정부, 대학, 연구소, 기업 간 정책연구 인력의 교류, 양성을 촉진해야 한다.넷째, 국회와 정부의 정책연구를 지원하는 종합연구소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연구소 소장 임기를 적정하게 정하고 임기를 보장하는 한편 재원조달의 안정성이 유지되도록 하여야 한다.마지막으로 대학과 NGO 등의 정책연구 활성화를 위해 정부용역시장의 확대, 정책연구 생산자간 인력교류활성화, 정책정보의 공개 확대 등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전홍택(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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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2.22 23:02

[금요칼럼] 왜 '글로벌' 인가 - 이서항

새 정부의 출범을 보름남짓 앞두고 한 사회불만자의 방화에 의해 불타버린 국보 제 1호 숭례문의 처참한 모습은 우리 국민 모두를 안타깝고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600여 년 전 조선 건국과 함께 한양(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 그리고 6?25 전란 등 그 숱한 역사의 영욕 속에서도 꿋꿋이 모습을 지켜왔건만, 어처구니없게도 불과 다섯 시간만에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 버렸으니 우리 국민이 느낄 참담함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에는 매번 모든 사람들이 약간은 들떠있고 희망을 갖게 마련이다.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 이른바 글로벌(global)이라는 단어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위축과 이념에 기반한 지나친 대북지원 등 때문에 과거정부의 세월을 잃어버린 10년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 글로벌을 강조하는 새 정부의 출범은 국민들에게 그야말로 낙관적 기대를 갖게 해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일어난 숭례문 소실은 이러한 희망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분노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언제까지 절망과 낙담의 기분만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제 방화사건이 일어난지도 거의 닷새가 지나 지금은 과거의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취할 때는 아닌지, 과감히 국면전환을 제의하고 싶다. 특히 미래를 설정하는 기준으로 우리는 새 정부가 내세우는 글로벌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명박 정부가 국정운영의 큰 지표로 글로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달 28일 이명박 당선인은 한승수 총리를 지명 발표할 때에도 총리 인선의 첫 번째 덕목으로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인사를 꼽았으며 한 총리지명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있는 폭넓은 국제적 경험으로 통상과 자원외교 수행의 적격자라고 밝힌 바 있다. 우물안 개구리식의 국내가 아니라 세계와 통할 수 있는, 그리하여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의 기준으로서 글로벌이 표방되고 있는 것이다.숭례문 방화사건도 따지고 보면 글로벌 의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요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키는데 있어서 세계적 기준에 한참 미흡한 국내적 기준을 따랐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의 첫 번째 보물을 잃은 것이다. 숭례문에는 기본적인 화재방지 장치인 스프링클러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며 경보기도 없었고, 더욱이 야간에는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어 무단 침입자에 의한 사고는 이미 예견돼 있었다. 또한 소방당국은 문화재 화재에 대한 자세한 대응 매뉴얼도 없어 눈뜨고 화재현장을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세계적(글로벌) 기준은 어떠한가? 선진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자국의 중요 문화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꼼꼼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정해 이날을 전후로 문화재청과 소방청이 나서서 중요 문화재와 관련시설에 대해 실전을 방불케하는 화재 진압 훈련을 한다.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등 이름난 역사?문화 시설을 갖고 있는 프랑스는 이들 시설에 대해 가연성 물품의 반입금지 등 일본보다 더 엄격한 화재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도 자금성과 천안문 등에 대해 감시카메라, 연기감지기, 자동 스프링클러 등은 물론이고 40명 이상으로 구성된 자체 소방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글로벌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의 일, 국제사회의 현안에 대해서 너무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또한 중동에서 어떻게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는가 등에 대해서 수수방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 12위 경제 및 무역대국으로서 세계와 통하고 앞으로 더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보다 더 높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글로벌 기준에 맞는 국가로 나가기 위해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참여와 후진국에 대한 공적경제원조(ODA) 제공이다. PKO의 경우, 우리나라는 작년 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18개 지역에 400여명을 파견하고 있으나 분쟁지역에 대한 신속한 파견을 이루지 못하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또한 ODA의 경우, 세계적 기준은 자국 국민총샌상(GNI)의 0.7% 이상 제공을 권유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제 겨우 0.01%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세계와 통하고, 그리하여 진정한 일등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보호에 있어서도 그리고 국제 현안의 관여와 개입에 있어서도 글로벌 기준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이서항(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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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2.15 23:02

[금요칼럼] 참된 융합 - 김탁환

바야흐로 융합의 시대다. 통섭 혹은 문화콘텐츠 혹은 CT(Culture Technology) 같은 용어들이 유행하면서, 여러 학문의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연구하는 프로그램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이런 흐름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1990년대부터 학제 간 연구가 권장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각 학과에 소속된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모여 연구만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상이한 학문 영역 때문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컸고 연구 성과를 장기적으로 이어갈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다. 문과 내의 학제 간 연구나 이과 내의 학제 간 연구와는 달리, 문과와 이과 간의 학제 간 연구는 가능성을 인정받으면서도 변변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등학교에서부터 문과와 이과로 배움의 영역을 분리한 탓이 가장 크다. 문과의 경우는 수학이나 과학을 등한시하게 되고 이과의 경우는 국어나 역사 등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SF(Science Fiction) 작가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대부분 문과 출신인 까닭에 과학을 소재로 한 이야기 발굴과 창작에 두려움과 거리감을 느낀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잇달아 선보인 『개미』나『뇌』와 같은 장편소설이 해당 과학 분야에서 수준 높고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작가들은 아직 과학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꿈꾸는데 주저한다.과학과 예술 등 여러 학문과 예술에 두루 능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인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로버트 루터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에는 독창적인 사고를 하는 13가지 도구들이 실려 있다. 각각의 예로 제시되는 인물에는 과학자도 있고 예술가도 있어서, 13가지 도구에 두루 능하면 다빈치 형 인간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품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13가지 생각도구를 익힌다고 한 인간이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다빈치 형 인간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각의 도구들이 탄생한 삶 자체에 주목해야 하며, 그 삶의 전제들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학제 간 교육기관은 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삶 자체를 융합하려는 시도다. 교수진부터 전공이 각양각색이고 학생들도 문과, 이과, 예술가 가리지 않고 넓게 포용한다.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의 언어와 습성을 이해하고, 함께 연구할 과제를 기획 단계부터 공동으로 찾고, 그 결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학제 간 교육기관의 목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과와 이과, 그리고 예술까지 아우르는 다빈치 형 인간을 배출하는 것을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의욕을 갖고 시작한 융합형 인재의 창출은 쉽지만은 않다. 우선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교수와 학생들이 아무리 열린 마음을 지녀도 고등학교 때부터 젖어온 문과 혹은 이과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문과 출신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 정보를 접한 경험이 적고, 이과 출신은 고전(古典)이나 장편 소설 등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융합형 교육에 참가한 이들이 선구자적 의지를 갖고 자신의 장점을 버리고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융합형 교육에 맞는 새로운 논문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매학기 제출되는 학제 간 학위논문을 검토하면 찬차만별이다. 교육기관을 어느 학과에서 주도하여 만들었느냐에 따라 어떤 논문은 공대식이고 어떤 논문은 인문대식이고 어떤 논문은 예술대식이다. 기껏 2년 혹은 5년 동안 통합형 교육을 한 후에 그들을 다시 높은 학문의 벽 안으로 끼워 넣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제도와 교육 방식도 중요하지만 참된 융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움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가슴이다. 일본의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에는 부와 명성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일에 몰두하는, 원숭이 조련사, 소믈리에, 칠기 장인 등 11명의 청춘들이 등장한다. 다빈치 형 인간을 꿈꾸는 젊은이여! 도전하라. 극복하라. 아름답게 승리하라./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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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2.01 23:02

[금요칼럼] 국민성공시대 인가, 재벌성공시대 인가 - 김민영

요즈음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표현이다. 새 정부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는 비지니스 프렌들리 - 친기업정부론은 여러 방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말은 친기업이지만, 그 혜택은 고스란히 몇몇 재벌대기업에 집중되는 양상이다. 인수위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출총제 폐지 금산분리원칙 완화 지주회사 규제완화 등은 잘 알려진 것처럼 몇몇 재벌의 오래된 숙원사업이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92%는 출총제 폐지에 아예 반대한다고 하니 사실 이런 제도개선은 중소기업들과는 그다지 큰 이해관계가 없다. 중소기업에 계열사 출자문제나 지주회사 규정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이며, 금산분리 완화라는 것도 막대한 자본력을 갖춘 몇몇 재벌기업의 이야기이지 중소기업이 은행 같은 금융기관을 사들일 엄두나 낼 일인가? 따지고 보면 새 정부는 재벌의 오래된 민원에 대해서는 일종의 현찰을 내밀고 있지만, 전체 고용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소상공인들의 민원은 언제 현실화될지 모르는 어음으로 돌려막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새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핵심적으로 내놓은 정책이 중소기업지원펀드 조성이다. 20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행 매각대금으로 중소기업지원펀드를 조성하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5-7년 후, 즉 차기 정권에서나 현실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불공정거래와 횡포를 차단하는 일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선인이나 인수위의 의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이 될 만한 사업이면 대기업이 밀고 들어와 중소기업 문닫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하도급 과정에서 일방적 계약해지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훔쳐가기 등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는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를 해결할 대안은 많이 나와 있다. 정부차원의 중소기업 법률지원, 대행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납품가 원자재 원가연동제 등이 그것이다. 재벌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형유통업체에 대한 입점제한 등 적절한 규제 역시 재래시장상인이나, 영세상인들의 숙원사업이다. 이외에도 중소기업을 지원업무를 전담하는 힘있는 중소기업부를 신설하자는 제안이나 하도급 불공정거래 조사와 시정을 담당하는 공정거래위를 획기적으로 강화하자는 제안도 매우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그러나 인수위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눈 여겨 보는 것 같지 않다. 재벌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대형유통업체보다는 영세상인들이 경제활동에 있어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런 경제주체들이 살아나는 것이야말로 한국경제가 사는 길임은 자명하다. 만약 이명박 당선인이 강조하는 친기업정부론이 친재벌 친수도권 친대형유통업체로 한정된 것이라면, 그에 따라 다수의 경제주체들이 새정부 경제정책의 고려대상에서 소외된다면, 결과적으로 이명박 당선인이 이루고자 하는 경제활성화도 사회통합도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경제환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몇몇 재벌대기업이 아니라 다수의 경제주체들이 나래를 펼 수 있는 경제정책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사족이지만, 일전에 재벌총수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는 당선인의 파격적인 제안은 재고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한국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재벌들이 실제 투자와 경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어려움이 있다한들 대통령과 직접 전화통화를 하지 않아도 관계부처의 공무원들이 다 알아서 잘 챙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당선인의 의지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수시로 이뤄지는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전화통화는 경제살리기라는 명분 아래 이뤄지는 새로운 유착이라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재벌이 최고권력자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특혜를 구하는 시대, 즉 정경유착의 시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대한민국 아닌가.△김민영 처장(41)은 2004년 총선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공동집행위원장, 수도권과밀반대전국연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민영(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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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25 23:02

[금요칼럼] 경제성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전홍택

이명박 당선인이 선거 공약으로 내 건 연 7% 경제성장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인수위는 고유가 등 대외 여건의 악화를 감안하여 올해 성장목표를 6%로 하향조정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경제성장이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성장은 대다수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오는 성장이다. 이러한 성장은 개인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더 많은 기회,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신분 상승 가능성 증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등 사회정치문화 나아가서는 개인의 도덕적 성격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배양하는 최상의 토양이다.미국에서는 2차 대전 후 60년대 전반까지의 활발한 경제 성장이 토대가 되어 케네디 대통령 이래 흑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고 빈곤층 대상 복지 프로그램이 확대 되었으며, 소수자의 가치관 존중 등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확산되었다.반면, 1970년대 들어 지속된 경제침체의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들의 흑인에 대한 대학입학 할당제 폐지 등 소수자에 대한 배려 축소, 이민에 대한 반감 증가 등 그 동안의 정치사회문화적 발전을 되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우리나라는 70년대 이후 외환위기 전까지 연 7%를 넘는 성장을 통해 1960년 50세에 불과하던 기대수명이 1980년 65.7세, 2000년 76세로 늘어나는 등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토대 위에 정치 민주화에 성공하였고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배려 등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신분상승 기회제공 등 바람직한 정치사회문화적 발전을 이룩해 왔다.그러나 외환위기 후에는 경제성장이 연 4% 수준으로 크게 둔화된 가운데 일자리 창출도 연 30만개 이하로 줄어든 결과, 청년층 경제활동 인구가 2004년부터 4년 연속 감소하였으며, 15세 이상 인구의 고용률이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치는 6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에 따라 청년층은 취업걱정, 장년층은 실직걱정에 시달리는 고달픈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연 6%에 달하던 1인당 소득 증가율이 외환위기 후 거의 절반으로 줄어 든 데다 경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서민중산층은 성장의 혜택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성장 둔화가 지속된다면 향후 정치사회문화 발전도 정체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청년층의 경제활동 참여와 15세 이상 인구의 고용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성장의 혜택이 서민과 중산층으로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 40만개 정도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이 연 6%대로 상승해야 한다.이를 위해 새 정부는 잠재성장률을 현재의 4% 후반에서 6%대로 끌어 올리는 것을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만약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쓴다면 성장률은 당장 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 보다 높아지면 큰 후유증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 경제가 여러 번 경험한 사실이다. 잠재 성장력을 확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인기 있는 정책은 아니다. 미국이 90년대 중반부터 '신경제' 호황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 혁신이 이루어진데 기인한다.그러나 80년대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규제완화로 경제시스템의 효율이 높아지고 또한 90년대 초 클린턴 대통령의 강력한 재정 적자 감축 추진으로 미래인플레에 대한 우려가 불식되어 장기 금리 하락이 이루어진 것도 90년대 경제 호황의 큰 요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저소득층 교육 기회 확대 프로그램 등 민주당의 야심찬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하였으나 당선 후 재정 적자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재정지출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명박 정부도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번영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규제완화와 교육 개혁,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등을 통해 잠재 성장력 확충을 꾸준하게 추진하기를 기대해 본다./전홍택(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소장)전홍택 소장은 재경부 금융발전심의위원, 정보통신부 정책심의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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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18 23:02

[금요칼럼] 戊子年의 국제정세 전망 - 이서항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시간을 재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자연현상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여하여 달력을 만들고 해(年)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은 앞일을 예측하면서 새 희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무자년 새해도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바램을 안고 기지개를 편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벽두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1백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국민 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아직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10년만의 정권교체로 새 정부가 출범하는 우리에게 올 한해동안 국제정세는 과연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예측력을 동원하여 앞을 내다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가지의 전망이 가능하다.우선 첫째,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프랑스?일본?호주 등 세계 주요국에서 정권교체 내지 정부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곧 이들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 변화로 이어져 새로운 국제안보 환경이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2009년 미국 행정부가 공화당에서 민주당의 그것으로 바뀔 가능성은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문제, 북핵문제, 기후변화문제에의 대응 등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정책기조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중국?러시아 등 이른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부상함에 따라 미국중심의 단극적 국제질서에도 일정한 변화가 예고된다.안보환경의 변화 속에서 국제사회가 직면할 가장 중요한 현안은 기후변화에의 대응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기후변화가 환경?안보?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온실가스 배출 감축문제는 선진국의 에너지 사용, 경제구조 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그 목표 설정과 이행방법을 둘러싸고 국가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둘째, 세계경제 측면은 새해초부터 나타난 고유가 행진이 보여주듯 불안정성과 불균형성이 내연하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고유가와 함께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국가의 자원수요 급증, 유동성 과잉에 따른 투기적 수요의 확산, 달러화의 가치 하락 및 이에 따른 세계적 불균형 조정의 어려움 등 위험요인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경제도 판도 자체가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이 필요한 이러한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는 배경으로는 미국이 갖는 경제적 위상의 약화, 단일경제권 유럽연합(EU)의 영향력 증대, 중국을 비롯한 이른바 BRICs 의 급속한 부상, 그리고 동아시아의 세계경제의 중심지역으로의 부상을 들 수 있다.셋째, 동북아로 눈을 돌려보면 이 지역이 앞으로 당면할 구조적 도전의 요소는 변환하는 미국 (transforming U.S.), 부상하는 중국 (rising China), 보통화하는 일본 (normalizing Japan), 그리고 복귀하는 러시아 (returning Russia)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서는 기존의 패권국가, 신흥국가, 그리고 재도약?재부상을 는 국가군(群)간의 경쟁과 견제가 표면화되면서 새로운 세력구도가 형성되고 그 결과 지역안보정세의 유동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끝으로 한반도를 보면, 북한에 있어서는 대내외적으로 체제변화를 향한 필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구도 공고화 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또한 시장경제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시도할 것이나 회복이 부진한 경제는 향후 국제사회의 지원에 그 추이가 영향 받게 될 것이며 핵무장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경제재건을 위한 환경 조성은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비핵화에 우선순위를 두는 한국의 실용정부 출범과 중국의 대북 피로감이 영향을 미쳐 북한이 핵폐기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의 지원과 교역은 크게 줄 것이며 이는 북한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평화체제 구축을 포함한 남북관계도 핵문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는 협력과 갈등의 이중성 속에서 진전과 정체를 반복하는 이상한 형태의 발전추세를 보일 전망이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 주변의 국제정세를 보면, 어느 하나도 쉽게 해결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준비태세를 갖출 수 있는 것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능력인 만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혼란과 불행은 없을 것이다.△이서항 실장은 핵확산금지조약 평가회의 한국대표,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서항(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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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11 23:02

[금요칼럼] 여행과 인생 - 김탁환

새해 첫날, <삼국유사>를 편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게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책이 바로 고전이고, <삼국유사>는 항상 첫머리에 놓인다. 올해 내 눈길을 끈 대목은 인도까지 다녀온 신라 승려들이다. 아리나,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갔고, 현태를 제외하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유학길에 올랐던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신 후 발길을 돌린 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왜 어떤 승려는 죽을 각오로 그 먼 오천축(五天竺)까지 가고 왜 어떤 승려는 토굴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몇 년을 두문불출할까.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읽을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이들을 평생 떠돌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지구촌 가족이니 글로벌 시대니 하는 단어들이 유행해도,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히 준비하고 나선 여행길도 작은 방심이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따뜻한 고향 인심과 내 가족의 밝은 얼굴이 그립다. 당장 돌아갈 마음이 굴뚝같은데도, 여정을 접지 못하는 것은 낯선 길로 뛰어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곳까지 왔는가. 자문자답의 밤이 길어진다.2007년 내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행가 혜초의 발길을 좇느라 분주했다. <왕오천축국전>을 펴들고 여름에는 2주 동안 인도를 돌았고 가을에는 또 2주 동안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길게 뻗은 실크 로드를 다녔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혜초가 여행을 시작한 중국 광저우와 숨을 거둔 오대산을 살필 예정이다. 답사여행을 통해 나는 혜초의 단정하고 깊은 문장에 새삼 감탄했다. 가령 혜초는 이렇게 적는다. 다시 소륵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소륵의 현재 지명인 카슈가르에서 구자국의 현재 지명인 쿠차까지는 기차로 15시간이 넘게 걸린다. 긴 사막 길을 가는 동안 혜초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현재 서점에 진열된 각종 여행기에는 낯선 길의 고통과 신기한 체험, 독특한 풍광을 묘사하는 문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갈라 터진 발바닥과 주린 배를 안고 걷고 또 걸었을 혜초는 단 한 줄의 불평도 없이 담담하게 길의 방향과 기간만 적고 만다. 고통을 안으로 삭히는데 익숙한 혜초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은 감추기 어려웠다. 남인도로 가던 길에 혜초는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로 시작하여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라는 시를 지었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우리네 인생은 흔히 시간을 따라 회고된다. <서른 즈음에>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처럼, 10년 단위로 나이를 먹는 감회를 잔잔히 읊는 노래도 많다. 우리네 인생은 또한 공간을 따라 그 의미를 탐색할 수도 있다. 맹모삼천지교의 예에서 보듯 어디에 살았고 살고 살 것인가가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 동안 내가 정붙이고 오간 동네를 떠올려보라. 그 꾸불꾸불한 길모퉁이 집에 처음 닿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적어보라.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가 어색하듯 처음 이사 간 집도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나이와 집에 적응하는 과정을 우리는 또한 인생이라고 불렀다. 시간과 공간을 겹쳐서 삶을 반성하면 더더욱 금상첨화이리라.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때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낯선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계기가 무엇이든, 길 위에 올라선 다음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길 위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가르치며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마시며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은 어떤 낯선 곳을 찾아가시려는가. 그곳은 마을일 수도 있고 분야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곳이 어디든 부디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김탁환 소설가(40)는 경남 진해 출신으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와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총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열하광인'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나 황진이' 등이 있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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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04 23:02

[금요칼럼] 표절과 대작(代作)이라는 속임수 - 한승헌

연말의 대선 등 정치기사에 치어서 크게 부각은 안 되었지만, 박사학위를 둘러싼 온갖 비리를 알리는 기사가 내 마음을 또 한 번 어둡게 하였다. 모 체육대학 강사로 일해 온 아무개 씨가 그 학교의 박사과정을 둘러싼 금품 거래와 논문 대필 등 비리 내막을 수사당국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체육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여러 사람 연루되어 있다니, 예사롭지가 않다. 미술계 중진인 유명한 화가 한 분의 박사학위 논문 대필 의혹도 기사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런 보도 내용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박사 학위를 둘러싼 불미한 행태가 적지 아니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심 봉사 개천 나무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박사라는 명예가 문제의 근원이다. 그리고 정당한 노력과 성과 없이 가짜를 탐하는 그 허욕이 문제다. 그러지 않고서야 체육인이나 미술인까지도 굳이 그런 시비의 여지를 무릅쓰고 박사가 되려고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성직이라 할 목사들 중에도 편법 내지 가짜 박사가 적지 않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거기에는 표절이나 대필이 으레 한 몫을 하기마련이다. 표절은 남의 글을 훔쳐다가 제 것처럼 써먹는 문화절도행위다. 대필은 남을 시켜서 대신 글을 쓰게 하는 수법으로서, 대개 특수관계나 금전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표절하는 만큼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한층 더 나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비법이 작용한다. 석, 박사의 92%가 논문 부정을 저질렀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하는 통계도 나왔었다.저작권법 분야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올해에 적지 않은 충격을 경험했다. 일년 내내 저작권 관련 기사가 매스미디어를 장식했다. 그 중에는 에프티에이협상에 연관된 저작권법 개정 논의나 정보의 디지털화에 따른 법적 분쟁 대응 등 전향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낯부끄러운 구시대적 고질도 만만치 않았다. 표절과 대작의 치부가 언론과 사회의 일대 관심사로 부각되어 심지어 대대적인 톱뉴스로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특히 부총리나 대학 총장 같은 고위직 인사의 표절 의혹에 대한 융단폭격식 성토 기사는 우리나라 저작권 풍토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고위직)을 무너트리는 데 저작권문제를 악용한 선례도 남겼다. 우선 특정 인물들이 고위직에 오르기를 전후하여 표절 의혹에 휩싸였으며, 그들이 그 자리를 물러나자 공세는 그날로 중단되었던 것이다. 표절문제가 진상과 책임의 규명보다는 마땅치 않은 상대방에 대한 요격용 신병기로 위력을 발휘하여 그때마다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두어 가지 생각이 났다.우리나라 학계를 비롯한 각 분야에 표절이 광범하게 고질화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개탄을 했다. 불운하게도 표적이 되어 밀려났던 인사들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실력과 명망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병마를 어떻게 하면 퇴치시킬 수가 있을까?우선, 가짜 박사의 허상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싶다. 학위와 무관한 저술에서의 표절과 대필에서는 장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이어서 효험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득이 타율적인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데, 부정이 드러난 경우에는 어떤 종류이든 불이익이 가해져야 한다. 여기에는 인사상으로나 행정상으로그래야 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민사상 형사상의 책임까지도 물어야 한다. 근자에 한국행정학회가 학술논문 표절방지규정을 마련하여, 만일 표절이 밝혀질 경우에는 공개사과, 5년 이하 학회지 기고 게재금지, 회원자격정지 등의 불이익을 주기로 한 것은 하나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또한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에서 저작권 존중에 대한 계몽교육을 하는 방안도 필수적이다. 최근 서울대학교가 오는 새 학기부터 학문과 과학 연구윤리 과목을 신설하여 전교생(학부)의 교양과목으로 수강을 하도록 한 것은 다른 대학이나 연구단체 및 조직에서도 모범이 될만한 선례라고 할 것이다.새해에는 무엇보다도 이런 문화적 절도와 문화적 사기행위가 뿌리 뽑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위장, 위계, 위선 따위는 자신을 속이면서 세상을 속이는 중첩적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때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무슨 이득을 얻을지 몰라도, 마침내는 실체가 들어나 엄청난 재난으로 되돌아온다는 인과법칙을 알아두어야 한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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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28 23:02

[금요칼럼] 새로운 정권 정책의 과제 - 이우영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 선거과정은 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에 휩싸여 제대로된 정책 점검이 이루어지 않았다는 문제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정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부터 당선자의 정책에 대한 보다 꼼꼼한 검토와 비판 그리고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정책은 핵심적인 논란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두번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핵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북한의 태도가 있었지만, 보다 꼼꼼히 따져보면 정권에 대한 반감이 대북정책을 매개로 표출된 점도 없지 않다. 다행히 북한의 태도변화와 미국의 정책 전환으로 핵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점증되고 있고, 더 나아가 북미관계 정상화 그리고 한반도 지역의 평화정착의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들어서는 새로운 정부는 어떤 면에서 북한핵문제와 동거(?)하였던 현 정부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NLL문제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고 북한 핵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착단계에 들어선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등 기존 정부의 성과도 고스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사회적 분란이 적지 않았지만, 평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전략은 노태우 정부시절에 확정된 한민족공동체방안에서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 213합의 이후 한나라 당에서 현정부의 대북정책도 근본은 자신들의 통일방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올바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대북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교체되면 대북정책을 정쟁화하는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권의 몇 차례 바뀌면서도 통일방안의 근본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은 평화를 바탕으로하는 단계적 통일방안의 대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이러한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새로운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질 수 있지만, 특히 대북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정서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기존 정부가 이룩한 대북관계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보다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경우와 같이 미국이 북한문제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혹시라도 새로운 정부가 반동적인 정책을 지향함으로서 또 다른 한미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구체적인 대북정책은 정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보다 철저히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나, 우선 새로운 정책을 펴기위한 국내적 인프라에 대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정부내에서 통일업무의 분장문제일 것이다. 남북관계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부처의 개입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대북정책을 부서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지 그리고 조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람직 방향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립되기 위해서는 당선자나 당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선거의 구호로서 혹은 정권 획득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들을 위한 실질적 정책 수립에 매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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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21 23:02

[금요칼럼] 나와 남, 우리와 남, 그 관계는 - 김열규

'우리가 남이가!'  지난 날, 어느 대통령이 내놓고 큰소리 친 말이다. 그전서부터 누구나 자주 쓰던 이 말이 그 뒤로 새삼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의 입길에 곧잘 오르내리기도 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발언은 물론 얼마든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동지나 동료들 또는 동학들의 합심이 나쁠 턱이 없다. 친한 친구끼리 마음 합치면 안 될 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남이가!'를 함부로 나무랄 수만은 없다. 흉볼 수만은 없다. 그 말로 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警句)가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 바로 그 말을 일방적으로 칭송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배타적인 뉘앙스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가 (내가) 알 게 뭐야!'  '우리만 잘 어울리고 잘되면 그만이야. 남들이야 죽을 쑤든 밥을 굶든 우리완 아무 상관없어' 이런 따위 뜻도 거기 진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남을 강하게 갈라 치고는 남에서 등 돌리고 마는 낌새가 거기 진하게 풍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  그 말이 지난 양지와 음지, 그건 원칙적으로는 반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 속에 껴들고 보면, 양지보다는 음지가 더 짙게 끼쳐져 있는 게 사실일 것 같다.  거리에서, 지하도 계단에서, 광장에서 또 수퍼나 마트에서는 그 음지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면 과장일까?  도시의 횡단보도에서 좌우 통행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좁은 계단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무질서다.  앞에서 오고 있는 사람, 계단을 밟고는 마주 보고 오는 사람, 그들은 거의 안중에 없다. 나만 알아서 제 빨리 차고 나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서로 부딪치건, 상대방 앞을 가로지르건 전혀 무관심하다. 제 갈 길 제 멋대로 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공공건물의 문을 드나드는 풍경은 더 문제가 많다. 들고 나는 사람 가운데 자신을 양보 하거나, 비껴서거나 하는 사람은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신이 들어서려다 말고 안에서 나오는 상대방을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잡고는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적이다. 다들 제 깜냥대로다. 나만 있고 우리만 있고 남이 없다.  '남 그 따위 내가(우리가) 아랑곳할 게 뭐야!'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없이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온 사회에 오직 나뿐이고 다만 우리뿐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만 설치고 우리만 나부대는 곳에는 사회가 없다. 공중(公衆)은 없고 잡동사니 군중이나 어중이떠중이의 우중(愚衆)이 있을 뿐이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우리는 남을 더불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은 나나 우리의 기틀이고 터전이다. 남들이 없어지면 그 순간에 나도 유야무야하게 된다. 이럴 때, 당대의 대표적인 서구 철학자의 한 사람인 E.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남은 또 다른 나고 나는 또 다른 남이다' 그렇게 말했다. 나와 남이 따로 별 개 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거기 인간 윤리의 궁극이 있노라고 그는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 철인은 윤리학을 철학의 최정상에 올려 세우려 들었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 등이 종래에 차지하고 있던 철학의 안방에다가 윤리학을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의 윤리는 동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 온 것처럼 부모 자식, 형제자매, 어른 아이, 스승 제자 사이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윤리다. 나와 남, 우리와 남의 관계야말로 윤리다. 그 점을 우리는 레비나스에게서 배워도 좋을 것이다. 말로는 그래도 실제로는 어려워 할 것 없다. 횡단보도나 계단에서는 좌우 통행 지키면서 남을 비껴 가 보자. 어디든 좋다. 공공 건물의 문에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열린 문 한번쯤 잡고 서 있어 보자. 그러면서  '먼저 가시죠!' 말해 보자.  그걸로 우리 사회의 윤리는 환히 틔고 밝게 여릴 것이다. 내가 또 다른 남이 될 것이고 남이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드디어는 '남도 우리야!'  그렇게 따뜻하게 다사롭게 말하게 될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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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14 23:02

[금요칼럼] 처음 대통령을 뽑는 딸에게 - 안도현

사랑하는 딸아, 설레느냐? 12월 19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느냐? 그날은 너의 손으로 처음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참 많이 컸구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로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너의 작은 손으로 정부를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한편으로는 답답한 심정도 숨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일찌감치 후보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고 투표할 기회를 빼앗겨버린 탓이다. 오로지 후보의 이미지와 구호로만 편을 가르는 선거판을 지켜보며 나도 솔직히 흥이 나지 않는다. 어쩌겠느냐? 그 누구를 탓할 것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엄중히 한 표로 판단하는 일뿐이다. 너와 나의 한 표만이 희망이다.딸아, 머지않아 너에게 투표통지서가 배달될 것이다. 내가 너만 한 나이였을 때는 국가가 나에게 그 용지를 전해주지 않았다. 나는 국민이었으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자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투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죽음의 시대였다. 죽음을 삶으로 가까스로 변환시킨 게 1987년 6월이었다. 그 당시 다섯 살 먹은 너를 안고 시위대 뒤를 쫓아가던 일 아느냐?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해달라는 것이었지. 항쟁이었다. 국민들의 염원을 최루탄으로 잠재우려던 세력들을 잊으면 안 된단다, 딸아. 그때 흘린 눈물을 단지 추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단다. 눈물은 핏물이었다.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참고해야 한다. 너는 결코 역사의 무뇌아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부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한 표를 던져라.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다. 민족이 갈라선지 60년이 넘었다. 60년이 넘게 싸우고 으르렁대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세월을 보냈다. 남북의 체제와 이념과 문화의 이질성은 모두 분단으로부터 나왔다. 치고받고 싸우면서 둘 다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손을 잡아보자고 한 게 겨우 10년이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10년이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약을 상처에 발라야 한다. 경제나 국방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북한은 남한하고 맞장 붙을 상대가 아니다. 가난하고 피곤해진 형제에게 발을 거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 같으면 동생한테 그리 하겠느냐? 딸아, 여전히 북한에 대해 각을 세우고 삿대질하는 자들이 있단다. 냉전시대로의 회귀를 존재의 목표로 삼는 자들이란다. 그들의 언행을 유의해서 관찰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너는 부디 이 민족의 사랑을 위해 한 표를 던져라.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청년백수로 지내고 있는 딸아, 대통령이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고 믿지 마라.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환상에 속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일자리가 생긴다면 대통령 선거를 해마다 한 번씩 해도 좋겠지. 청년실업이란 말이 쏙 들어가게 될 터이니까. 너의 일자리는 대통령이 만드는 게 아니라 너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에 넘어가서는 안 된단다.이와 함께 제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왜곡된 경제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지 마라. 부동산 투기로 얻은 재산을 재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 이 땅에 희망은 없단다. 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왜 좀 더 많이 나누어야 하는지, 경제적인 부가 왜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는지, 진정 경제에 관한 총체적인 사유와 토론이 필요한 때다.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돌리면서도 온 국민이 경제숭배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모순을 직시하기 바란다. 딸아, 이제 너의 한 표가 중요하다. 너의 한 표가 투표율이고, 너의 한 표가 정부고, 너의 한 표가 혁명이고, 너의 한 표가 너의 권력이다. 부디 너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라. 만약에 투표하는 날 다리를 다치게 된다면 기어가서라도 투표해라. 모처럼 쉬는 날이니 여행을 가자고 어떤 친구가 제의해오면 그 친구하고 절교를 하더라도 투표해라. 내가 먼 데 좀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비의 말을 거역하더라도 투표해라./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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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07 23:02

[금요칼럼] 인터넷 저작권과 어린 네티즌 - 한승헌

전남 담양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매어 숨진 한 소년을 애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열여섯 살 난 그 학생의 죽음이 하필이면 저작권법 위반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는 뉴스는 저작권학도인 나를 매우 침통하게 만들었다. 마침 저작권문화학교 강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마음이 착잡했다. 그 고교생은 인터넷에서 한 편의 소설을 내려 받은 일이 있는데, 경찰에서 저작권법 위반으로 출석요구서가 날아오자 고민 끝에 자살이라는 극한수단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 세상은 정보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로 엄청난 콘텐츠가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 중에는 사진, 영상, 영화, 소설 등 저작물이 홍수를 이루어 파일 공유 사이트나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네티즌들이 얼마든지 퍼 올리거나 내려 받아 듣고 볼 수 있다.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그 일을 무슨 준법의식으로 막기는 어렵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장이나 행길에 책이나 디브이디를 쌓아놓고 손대면 안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범죄를 옹호하거나 고소인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인터넷범죄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갈 사정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저작권의식은 아직도 낮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조차 대담하거나 지능적인 표절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드물지 않고, 더러는 그런 일을 약점 삼아 마땅치 않은 상대방을 쓰러트리기도 한다. 그 상대방이 손을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표절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는 없고 그것을 요격미사일로 삼아 명중 격추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부도덕성에서는 피차일반이다.대학생들은 어떤가? 부산의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의 리포트 채점을 하려고 보니, 110명의 학생 중 39명의 리포트가 똑 같아서 표절로 처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이 공유파일에서 영화나 음악을 내려 받는 일은 다반사가 되어 있다.대학 교수와 대학생들의 저작권의식이 이러할진대, 10대의 어린 세대들에게 어른들도 외면하는 준법을 기대하기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우선 그들은 지능이나 지각 또는 판단력이 어른들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어디서 교육을 받거나 계몽을 받은 적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소년에게 경찰에서 난데없는 소환장(출석요구서)이 날아왔으니, 그 두려움이 어떠했겠는가?서울의 어느 경찰서의 경우, 그런 종류의 저작권법 위반사건의 고소가 한 달에도 3백 건 내지 5백 건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사건에서 누가 그 많은 이용자를 추적하여 범인(?)을 알아냈단 말인가?보도에 따르면, 모 법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그런 작업을 해가지고 무더기 고소를 해놓고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합의금을 받아내곤 한다고 한다. 그 어린 학생들에게 사전에 주의나 경고 한번 주지도 않고 그런 무자비한 짓을 하는 곳이 다름 아닌 법무법인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린 학생들을 표적 삼아 무더기 고소를 해서 큰 이득을 챙기는 변호사라면, 그 과오가 어린 네티즌의 내려 받기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다 큰 성인들에게는 몰라도 청소년들을 상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무더기 고소, 그것은 법의 극은 무법의 극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저작권 침해의 예방에는 무엇보다 교육과 계몽이 중요하다. 저작권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침해행위를 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는 교육이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에 앞서서, 또는 그와 아울러 교양교육이나 연수, 훈화, 세미나 등에서도 저작권 존중사상을 고취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전문분야를 불문하고 저작권법을 적어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표절을 비롯한 남의 저작물 무단이용에 대하여 엄격한 제재가 따라야 한다.저작권법 위반을 두둔하거나 눈감아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위법행위 예방을 위한 교육과 계몽, 경고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사안(事案)의 경중과 정상을 고려한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벌금을 바치면 될 일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의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변호사도 자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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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30 23:02

[금요칼럼] 남북회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 이우영

2007년 정상회담의 약속대로 남북 총리회담이 2박3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비록 임기 말이고 선거 국면이라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8개도 49개항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제2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2개의 부속합의서를 채택할 정도로 성공적인 회담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합의서의 채택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회담 분위기도 좋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회담의 합의사항들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총리회담의 진행과정을 볼 때, 국방장관 회담을 포함하여 남북한간 다양한 회담은 순항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이것은 곧 바로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한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북한 핵문제 해결과 남북한 평화정착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남북한간의 대화가 활발해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현재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회담간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핵심이 되었던 장관급 회담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리회담이 정례화되면서 기존 장관급회담은 소멸되는 것인지 아니면 총리회담과 별개로 지속되는지가 불투명하다. 만일 국방장관 회담도 순항하면서 정례화되고, 부총리급이 주도하는 경제관련 회담이 성사된다면, 그리고 남북한간에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가 가동되면 통일부 장관이 참여하였던 기존의 장관급 회담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 이산가족 문제 등 남북관계 전반에 관련되어있으면서도 총리급 회담을 비롯한 전문분야 회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을 수 있다. 2007년 정상회담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으면서도, 합의사항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회담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문제가 앞으로 진행될 각종 회담의 수준을 혼란스럽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실무회담, 장관급 회담 그리고 총리급 회담과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각급 회담에 다루어야할 주제들의 차원과 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최고위급이 결정하여야 하는 북한의 딱한 사정을 고려할 때,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사항 도출이 불가피하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북한간 소통구조의 정비는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간 회담이라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합의가 중요하겠지만, 먼저 남쪽 내에서 각급 회담의 위계관계 정립과 각급 회담 담당 부처 및 회담 간 대상 정리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총리급 회담이 정점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각 회담을 관련 주제별로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회담간의 위계 문제 등은 단순히 회담의 정비를 넘어서서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과도 연결된다는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남북관계가 활성화되면서 통일부만이 남북관계 업무를 관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경제문제는 재경부, 문화교류는 문화부 그리고 인도적 지원문제는 복지부의 전문성이 절실해지면서 통일부의 능력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담의 정비는 곧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의 재고가 필요하게 된다. 정권 교체기에 정부의 업무분장을 새롭게 하기는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남북관계의 활성화로 비롯된 각급 회담의 증가과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회담간 관계를 정비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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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23 23:02

[금요칼럼] 정치, 그 따위 없는 곳에 살고 싶다 - 김열규

누군지가 '정(政)'이 뭐냐고 묻자, 공자가 답했다. '정(正), 곧 바른 것, 정당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라.'政은 바를 正에 움켜잡을 복(?)이 달라붙어 있으니 공자의 해석은 일단은 전적으로 옳은 것 같아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공자 말대로라면 오죽 좋을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그러면서 우리들은 다들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게 될 것 같다. 부정을 택하여서는 거기 악착같이 달라붙곤 하는 비중이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데 공자의 해석은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政이란 글자의 겉모양만 보고 내린 해석이기 때문이다. 워낙 그 엄밀한 어원을 캐면 , 正과 征은 또 政, 이들 세 글자는 모두 꼴불견의 개망나니들이다. 발음이 모두 같은데다 뜻도 셋이 모두 그게 그것이다. 正을 '바를 정'이라고 미화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그 으뜸의 의미는 남을 치고 부수고 뺏고 하는 폭력을 의미했었다. 그러기로는 정복의 征이 다를 것 없다. 그리고 정치의 政도 마찬가지다. 셋 다 다같이 깡패고 폭력이고 부당한 무력(武力)이다. 남의 고을이나 집단을 쳐서는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해서는 뜯어낼 것, 깡그리 뜯어내기로는 이들 셋이 한 패거리다. 하긴 그렇다. 인류 역사에서 상고대부터 중세기까지 한 집단 또는 한 국가의 정사(政事)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던 것이 침략이고 전쟁이고 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政자 풀이가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 또는 일부 집단 전체의 규모에 걸친 정치로서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 현실에서 政은 공자의 말을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征과 통하고 부당한 폭력이나 싸움질과 통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것 같다.아니 판단을 망설이고 뭔가를 궁금해 하고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건 장담해도 좋다. 워낙 正은 치고받고 하기 그 자체 또는 그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했다. 거기에 박살내고 휘갈기고 한다는 뜻의 복(?)이 야합해서는 政자는 생겨 난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의 政은 이 본시 의미를 알뜰하게 살뜰하게 지켜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폴리티션'과 '스테이츠맨', 이 두 낱말을 구별한다. 어느 쪽이나 우리말로는 정치가라고 번역이 될 텐데도 저들은 그 둘을 다르게 쓴다. '스테이츠맨'은 공자의 말대로, 옳을 正을 지켜내려는 정치가들이다. 이에 비해서 폴리티션은 政의 흉측한 어원 풀이가 그대로 적용될 정치가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의 이른바 '대선(大選)'은 거의 그 대부분이 서로 헐뜯기고 서로 피 보기다. 심지어 상대방 밑구멍을 훑어 내보이려고 덤비기도 하는데 그 때 본인의 밑구멍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날 건지 어떤지 국민들은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가 하면 소위 통치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곤 하는, 전 국가 규모에 걸친 정치는 무지와 독선과 횡포로 넘쳐 있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그들끼리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흉물스럽게 뭉치다 보니 부패와 부정으로 권력 상층이 부분적으로 문드러져 가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든 간에 공자의 政자 풀이가 적용될 여지를 찾아내기는 쉬울 것 같지 않다.20세기의 중간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인 토마스 만은 그의 '비(非) 정치인의 성찰'이란 에세이집에서 말했다. '현대인에게 정치는 숙명이고 운명이다.'그는 현대인이 유감스럽게도 피치 못하게 '호모 폴리티쿠스', 곧 '정치인'이 아닐 수 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더러운 운명, 흉측한 숙명을 타고 난 꼴이 된다. 적어도 우리 한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딘가 정치라는 그 흉물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간절한 소망 이루고 살고 싶다. 한데도 그 망할 것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니, 이를 어찌한담? 소망의 간절함이 큰 만큼, 슬픔도 아픔도 크다./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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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16 23:02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코는 벌름거리게 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혼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걷는 일이 유아독존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일이라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 세계는 우리의 걷기에 동참한다. 풍경은 우리가 떠나온 곳이 궁금해 천천히 뒤로 지나가고, 달빛과 별빛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따라온다. 바람은 귀밑머리를 간질여 줄 것이며 땅은 발바닥을 떠받쳐 줄 것이다. 웅덩이는 웅덩이대로, 돌부리는 돌부리대로 유심히 우리의 걷기를 보살펴 줄 것이다. 승용차가 별로 없던 시절, 불과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참 많이 걸었다. 자동차는 걷기의 추억 따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수밭머리에 해 지는 풍경도, 마른 수숫대 위에서 뛰는 방아깨비도 보여주지 않으며, 수숫대가 서로 몸을 비비며 서걱대는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사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하는 풍경과 소리들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차창 밖으로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일 뿐이다.자동차가 적으면 당연히 오래 걷기 마련이다. 북한을 방문하면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는 북쪽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불 보따리만한 짐을 등에 지고 걷는 할머니도 있고,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걷는 소녀도 있고, 앉은뱅이책상 같은 걸 어깨에 메고 걷는 소년도 있다. 이제 남쪽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걷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걸을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거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걷는 다리의 수고를 덜어주니까 말이다. 남쪽 사람들이 걷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건강을 위해서다. 비로소 도시의 강변이나 등산로는 아침저녁으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걷는 것으로는 모자라 뜀박질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건강마라톤 대회는 참가자들이 매년 급증하고 있는 덕분에 주최 측이 밑질 일이 없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술자리를 나가봐도 걷기 예찬은 끊이지를 않는다.한쪽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걷고, 또 한쪽은 먹고사는 일에 배가 불러 살을 빼려고 걷는 현실이 나를 참 아득하게 만든다. 남과 북의 경제력의 차이일 뿐이라고, 콧방귀 한번 뀌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는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걷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내 뱃살이 두꺼워질 때 누군가 꼬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게 걷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의 도리다.나는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학교 앞 거리에 어느 날 이런 현수막이 나붙었다.이유 없이 배회하는 자를 신고합시다학교 부근 파출소에서 내걸은 이 현수막의 폭력성 앞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대한민국은 이유 없이 배회할 자유도 없는 나라라는 말인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라는 멋진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다/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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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9 23:02

[금요칼럼] DJ납치사건과 일본의 책임 - 한승헌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중에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한 납치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지난번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처사에도 강력한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의 유명환 주일대사가 위 납치사건으로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데 대하여 일본 외무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를 사실상 사죄라고 했다. 마침 일본 현지에서 이런 보도를 접하게 된 나는 쓰던 글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쓸 수밖에 없게 됐다.국정원의 진실규명위원회가 지난 달 24일 공표한 김대중납치사건 조사결과는 지금까지 34년 동안이나 은폐되어 왔던 권력범죄를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그만큼이라도 밝혀냈다는 점에서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그 조사보고는 의혹의 두 가지 핵심에 관해서 결론을 내려놓았다.첫째, 범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둘째, 단순 납치가 아닌 살해 목적을 가진 범행이었다는 점 등이다. 문장 상으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는 묵시적 승인 등 우회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건 조사의 제약과 고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박 대통령의 지시 여부 및 살해 목적의 유무가 국내적 관심사인데 반해서 범죄 발생지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영토주권의 침해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번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는가 하면, 새삼스럽게 무슨 수사라도 할 듯 한 제스처까지 보였다.지난 34년 동안, 한일 두 나라의 시민단체와 언론 등 각계에서 사건의 진상 및 책임의 규명을 그처럼 줄기차게 요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동풍 격으로 이를 묵살해온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의 진상조사 발표가 나오자 마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이 피해자 사정청취와 한국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실인즉 일본 당국은 1973년 8월 이 건 범죄 발생 당시 피해자 신변의 위험을 사전에 간파하고도 응분의 안전보호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범죄 발생 후 육로와 해상의 경비 검문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범인들의 도주 및 납치를 가능케 하였다. 당시 피해자는 일본에 적법하게 입국하여 체류 중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박정권의 탄압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정부는 그의 신변의 안전을 비롯한 기본인권을 지켜 줄 법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뿐인가, 일본 측은 범죄 발생지 관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초동단계부터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밝혀낸 사실마저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자국의 국내법상 이 사건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사를 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30여 년을 허송해왔다.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타나카 수상과 일본 국민에게 진사하였으며, 그 후 또 한번의 정치결착을 함으로써 두 정부는 이 사건을 더 이상 거론치 않기로 합의하였다.(그때를 전후하여 타나카 수상에 대한 금전 제공설까지 나돌았다.)한국정부에 대한 사과 요구는 기본적으로 두 나라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그 엄청난, 범죄를 방임했거나 자기 영토 내에서 검거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과 검은 유착을 하여 성급하게 수사도 중단한 일본 당국이 그러한 자기 과오는 접어두고 한국정부에 대해서 떳떳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설령 한국정부에 사과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사건 발생 후 한국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친서를 갖다 바치며 일본 수상에게 사과한 이상 일본정부가 또 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일본정부의 여러 과오를 생각한다면 일본정부 또한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여야 마땅하다. 지난날 두 번에 걸친 한일 간의 소위 정치결착은 어디까지나 정부끼리만 서로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고,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 대한 두 나라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정부의 사과의무는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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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2 23:02

[금요칼럼] 정상회담 이후의 평양 - 이우영

지난 18일부터 21일부터 평양을 다녀왔다. 대북지원 단체 남북어깨동무가 평양 영유아들을 위해 마련한 콩우유 공장 준공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가 적지 않았다. 전세기를 타고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의 평양 순안 공항의 외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베트남의 국가수반의 방문으로 베트남항공 비행기가 대기 중이었는데, 최신 기종의 베트남 비행기와 초라한 북한 고려 항공의 비행기들이 대비되어 속은 편하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은 전화에 시달리는 베트남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살았는데, 지금의 처지는 비행기 차이만큼 역전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 만에 방문한 평양거리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자동차를 포함하여 전차,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의 왕래 빈도가 높아졌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교통량의 증가는 시민의 유동성 증가를 의미한 것으로, 군밤과 군고구마를 파는 길거리 매대의 증가와 더불어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동강 중간의 양각도의 호텔방에서는 강건너에 있는 시장이 보일정도로 컸었고, 기념품점은 가는 곳마다 있어 남쪽 손님의 지갑을 탐내고 있었다. 그리고 상점의 점원들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밤거리는 이제 야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고, 새로운 건설 현장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외양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양시민들이 활기를 되찾았다는 점이다. 지난번 방북때 함께 갔던 남한의 어린이들이 소년궁전의 북쪽 어린이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뒤로 빠지거나 쭈삣거리던 아이들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응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부담스러웠을 남한 손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과거와 달리 남북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부딪치고, 담소하는 것을 막지 않은 북한 당국의 결정도 의미 있었지만, 평양의 공공장소나 묘향산의 등산길에서 만난 북한사람들 대부분이 남한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맞아주었다. 평양의 외면적 변화나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의 활성화와 유통되는 상품의 증대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동안 꾸준히 지속된 대북지원과 다양한 사회문화교류가 남한이 북한 사람들을 회유하여 체제붕괴를 유도할 것이라는 북한의 의구심을 약화시킨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동행하였던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만 하더라도 근 10여년동안 평양에 어린이 병원을 지어주고, 춥고 굶주린 아이들을 꾸준히 보듬어 온 결과 상호이해가 돈독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어깨동무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북쪽의 아이들을 볼 때는 답답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적지 않은 분노감에 휩싸였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그 만큼 문을 연다면, 북의 어린이들의 고통은 크게 줄어 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이외의 지역은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는데, 일차적으로 북한 당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남한 당국이나 남한의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콩우유 공장 기계를 소독하기 위한 솔조차 어렵게 구하는 북한, 어린이 병원의 기초적인 물품을 절실하게 부탁하는 북한의사들을 여전히 괴물과 같은 공포의 대상으로 각색하고 있는 남한의 어른들을 생각하니까 참담한 마음마저 금할 수 없었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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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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