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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문학은 고통의 축제다 - 안도현

작가들의 글쓰기를 흔히 출산의 고통에 비유한다. 예술 작품의 탄생이 그만큼 엄혹한 진통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또한 작가들은 생의 환희나 행복보다는 고통과 결핍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이 아무런 아픔 없는 태평성대라면 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게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이렇듯 문학작품과 작가는 고통이 낳은 자식들이다. 다음 달 8일부터 14일까지 전주에서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에 참가하는 외국작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이들의 생의 이력은 하나하나 기구하고, 아프고, 눈물겹다. 그야말로 고통의 축제를 보는 듯하다.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오는 루이스 응코시라는 소설가가 있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극심하던 60년대에 흑인소년과 백인소녀 간의 성관계를 묘사한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편도 기차표만 받고 강제추방을 당한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후 30여년을 잠비아, 보츠와나, 말라위 등지의 인근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로 유랑한 작가다. 그는 1994년 최초의 흑인 정권인 만델라 정권이 선 이후에야 조국을 찾을 수 있었다. 1994년 벌어진 르완다 학살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다. 3개월 간 거의 일백만 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작가 욜란드 무카가사나가 이번 행사에 참여한다. 그녀는 학살 당시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생소한 나라 기니 비사우에서 오는 작가 로우렐은 돌고 돌아 한국에 온다. 그는 자국 내에 국제공항이 없어 인접국인 세네갈까지 버스 편으로 이동을 하고 세네갈에서 다시 유럽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대장정에 돌입한다. 아시아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베트남의 여성 소설가 레 밍 쿠에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유소년 자원군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력이 있다. 그녀는 5년의 군 복무 기간을 마친 뒤 1969년에 하노이에 돌아왔지만, 전장과 떨어진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정글로 돌아가 종전될 때까지 정글에서 군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전사다. 소련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하던 당시 유명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파타우 나데리는 감옥에서 시를 쓰던 시인이다. 그는 끊임없는 감시와 위협, 모욕 속에서도 담뱃갑 속에 끼워진 은박종이에 시를 썼고 자신을 보러 온 아내에게 그것을 은밀히 건네주었다. 우리의 김남주 시인이 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그리고 이집트의 작가 소날라 이브러힘은 1959년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이 좌익분자 처벌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지식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투옥하던 시기에 7년형의 강제 노역을 언도받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작가 파미다 리아즈는 계엄 정권하에 잡지를 발간하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력의 소유자다. 지구촌의 마지막 하나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이러한 작가들이 일정한 시기에 한데 모인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45개국에서 80명에 가까운 작가들이 오는 것은 80여 개의 외국 언론이 한국에 오는 것과 같다. 80여 개의 찬란한 고통과 80여 개의 순결한 영혼이 한국으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어쩌면 문학올림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여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소설가, 그리고 문학평론가 2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 독자들과 함께 축제의 장을 펼친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한국작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기 그지없다. 고은, 신경림, 송기숙, 최일남, 김주영, 전상국, 황석영, 한승원, 현기영, 강은교, 박범신, 김훈, 김용택, 황지우, 도종환,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윤대녕, 김인숙, 문태준, 김선우.고통스러운 세상에 뿌리를 둔 문학을 읽고 즐기는 것은 고통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모처럼 마련되는 품격 있는 축제를 이제 마음껏 즐길 일이 남았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한국의 작가가 수상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할 일은 아니다. 11월에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은 우리 한국문학의 힘을 확인하는 축제가 될 것으로 본다./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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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9 23:02

[금요칼럼] 권력과 능력과 서비스 - 김열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잖은 한국인들에게 권력은 매력 덩어리다. 그러기에 조선조 시대에 과거 시험 보러 가곤 하던, 그 소위 '선비'란 이들이 남긴 전통이나 내림은 지금도 퍼렇게 살아 있을 것 같다. 이건 정말이다. 온 세계의 동화에서 그 소년 주인공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탐색의 길', 곧 '참음의 길'에 오르게 되어 있다. 멀리 있을 무엇인가 매우 귀하고 희귀한 것을 혼자서 찾아 나서게 된다. 한데 한국의 동화에서는 정해 놓다시피 '과거' 보러 나선다. 그 뻔한, 그 지천인 벼슬 찾아서, 권력 찾아서 나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온 세계에서 가장 속된 동화가 이 땅의 동화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그러지 말아야 할 테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절로 메스껍다. 그리고 세계의 동화 대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소년의 꿈이 권력과 벼슬에만 걸려 있다면 그건 결코 '청운의 꿈'이 될 수 없다. 그건 짙은 비구름의 '흑운의 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소위 국가 권력이나 정치권력의 세가 크면 클수록 또 그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한 나라는 후진성을 면하기 어렵고 못난 꼴 면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할 때, 과거 보러가곤 하던, 그 전통, 그 내림은 차라리 저주스럽다. 그게 지금껏 남아 있는 게 안타깝다. 상당수의 한국인 가운데는 권력은 커녕 권(權) 자만 들어도 오금을 못 쓰는 사람, 아니면 어깨에 힘주는 사람 또는 군침 삼키는 사람 등등은 수두룩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인간들 앞에서 무턱대고 굽실거리고 따리 붙이고 하는 족속인들 적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저 못 된 권력이란 게 온 사회에 걸쳐서 흉을 떨칠 대로는 떨치고 나부댈 대로는 나부대고 설치고 하기 때문일 것 같다. 거의 만능의 힘, 마술의 힘 노릇을 하게 때문일 것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의 고위 층 비서관들이 두 사람씩이나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꼴로, 우리 한국 사회가 '권력 만능 사회'란 것을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준 것은 그 증거 치고도 일급의 증거다. 그들은 각 종 기관을 제 욕심대로 떡 주무르듯 했다. 경제고 문화고 무엇이든 상관없이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권력은 '도깨비 방망이'나 다를 게 없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경우,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두들겨 댄 ,저 '사람 도깨비'들도 문제지만 그들 방망이질 따라서 춤춘 당사자들도 문제다. 우리의 권력은 이처럼 부리는 자에게서나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서나 다같이 '요술 방망이'인 셈이다. 그런 게, 지금 우리나라의 소위, 권력이다. 그건 요컨대 괴물이고 요물이다. 운래 權은 나무 이름이다. 그러던 게 저울이 되고 무엇인가 방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선 權은 속임수가 되었다. 다음으로 뭐든 헤아리고 측정하는 것도 權이 되었다. 이게 바로 權의 음지와 양지다. 사회의 독(毒)이 되고 악이 되는 한편으로 사회의 만사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권모술수(權謀術數)라든가 권사(權詐)라는 말은 權의 음지 중의 음지다. 권사는 사기 치기와 같은 말이다. 權은 그 꼴이다. 사기 치기인가 하면 준칙(準則)이고 기준이다. 그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제 마음대로 재주넘는 게 權이다. 그러다 보니, 권세, 권도(權道) 등이 그렇듯이 권력도 그 양단 사이에서 버꾸를 넘게 되었다. 권력은 그걸 쥔 자의 개인적 욕망과 야합을 하고는 설쳐대게 되었다. 올바른 저울 노릇하면서 사회의 준칙이 되고 기준이 되어서 사회를 좌지우지해야 할 권력이 권모술수며 권사(權詐)에 기울어서는 사회를 제 마음 대로 움직여보려고 들게 되었다. 그게 일부 전직 청와대 비서관들의 권력이었다. 이제 참 다운 민주 사회답게 국가 권력이 변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이제 국가 권력도 사법 권력도 국가와 사회를 올바르게 저울질해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서비스고 봉사라야 한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사회의 온갖 힘들과 병존하고 공존해야 한다. 이제 국가의 힘은 경제다. 그건 정치권력 보다 윗자리에 앉으면 앉지 내리 앉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며 글로벌리즘을 계기로 삼아서 문화의 힘도 마찬가지로 세가 매우 커져 가고 있다. 교육이 팔을 걷고 활개 치면서 그 힘을 과시해도 당연하다. 이렇듯이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사회의 힘과 나란히,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야 한다.아니 스스로 그들 아래에서 굽실거리면서 서비스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통치란 말은 정치가 저 잘났다고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이제 그런 묵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는 것이 사회와 국가를 위한 권력이 될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국가 권력, 정치권력 그 자체를 위해서 경사스럽고 기꺼운 일이 될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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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2 23:02

[금요칼럼] 법대의 미래, 오해 바로잡기 - 한승헌

법학전문대학원법(로스쿨법)의 발효에 따라 로스쿨 인가경쟁은 한층 더 긴박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입학 총 정원의 책정에 이어 설립인가 심사가 시작되면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에서 47개나 되는 대학들이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나서는 과열현상은 보기에도 딱하다. 저러다가 인가에서 탈락되는 쪽에서 무슨 격한 반응이 나올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법학교육위원회 위원들에게 임명장과 아울러 방석모를 하나씩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부 고위인사에게 농담을 건넨 일도 있다.로스쿨도 어디까지나 대학원의 일종이다. 그런데도 그처럼 전력투구를 하는 것은 단순한 경쟁심리라고 이해할 수만은 없다. 이 나라의 법조인 양성제도가 올바른 법치주의나 국민을 위한 법률 서비스 향상에 중요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해서일까? 아니면 거기서 양성되는 판 검사, 변호사가 대단해서일까?어쨌든 로스쿨 인가를 못 받는 대학은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야말로 올인을 하는 양상이다. 그러면서 일부에서는 기존의 법과대학(또는 법학과)은 이제 무슨 강등이라도 당하거나 효용이 떨어진 듯이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다.로스쿨 인가를 받은 대학에는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이하 법대, 정확히는 법학에 관한 학사학위 과정)를 둘 수 없고, 로스쿨 없는 대학에만 법대가 남게 된다고 해서 그 위상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겼다고 해서 의과대학(학부)의 존재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법대는 법대로서의 고유한 존재이유가 있고, 로스쿨의 선행 교육기관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 법대이다. 물론 로스쿨법에 의하면, 그 입학자격은 다양한 전공자 흡수를 위해 비법학 전공자에게도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로스쿨 입시에서 법학(지식)시험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법대의 매력이 반감되는 이유로 보는지 모르겠다.그러나 이런 의견도 있다. 학부에서 법학 전공 4년에 로스쿨 3년, 도합 7년 동안 법학 공부를 한 사람과 로스쿨에서 3년만 법학 공부를 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 중에 누가 변호사시험에 유리할까? 7 대 3으로 법대 졸업생이 우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로스쿨법에 입학생의 3분의 1 이상을 비법학전공자로 해야 한다는 규정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법학전공자가 사실상 입학에 유리하거나 로스쿨 쪽에서 환영을 받을 여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전공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법대 출신의 합격을 제한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법대의 우세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본다.판 검사나 변호사의 배출이 법학교육의 유일한 목적일 수는 없다. 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법대의 일반 대학원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법조 실무교육에 치중하는 로스쿨보다는 법대와 그 대학원에 가야만 한다.뿐만이 아니다. 법학사의 학력(실력)을 필요로 하는 직역도 얼마든지 있다. 3부의 공무원을 비롯하여, 기업, 학교, 각계 민간단체, 그 밖의 여러 분야에 법대 출신들이 맡기에 알맞은 직종은 부지기수다.또한 로스쿨의 입시에는 대학 학부의 성적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학부의 성적이 좋아야 로스쿨 입학에 유리하기 때문에 로스쿨은 법대 교육의 정상화 및 면학분위기에도 일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로스쿨의 도입은 결코 법대의 위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어떤 이는 법대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쿨이 없는 대학은 판검사, 변호사를 배출하는 대학 축에 못 끼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조인 배출에 있어서 로스쿨과 법대의 역할은 직접이냐 간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배출이 아니면 보람도 못 느끼고 권위도 서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너무 공리적이다. 역전경주로 말하자면, 골인 지점에 들어오는 최종 주자만을 안중에 두고, 첫 번째나 중간구간을 역주한 선수의 공로는 폄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로스쿨 대신 법대가 있는 대학을 마이너 리그 쯤으로 여기거나, 스스로 그렇게 자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한승헌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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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05 23:02

[금요칼럼] 남북정상회담 논의 구조의 문제점 - 이우영

며칠 후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7년만에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만난다. 두 번째 만남인 까닭에 처음 만남만큼의 설렘은 없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모두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안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회담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213합의 이후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는 북한핵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로 얼룩지워진 지난 반세기의 분단구조가 종식되어 평화체제로의 전환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을 가장 반기고 지원해야 할 남한내 분위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심지어는 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하는 여론마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동안의 북한문제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논의 구조의 비정상적인 경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흔히 남남갈등으로 표현되는 북한관련 논의 구조는 대북정책 자체의 문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북한문제를 국내정치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좀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정부의 포용정책이나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문제는 정책자체에 있기 보다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즉,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대북정책을 이용하여왔다는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은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정립된 이래로 근본 철학이나 이념이 바뀐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골간은 전쟁이 아닌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그리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13합의 이후 한나라당 일각에서 포용정책이 원류는 자신들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이 만들었던 정책을 그 동안 스스로 비판하였다는 논리적 모순을 고백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북정책이나,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이 그동안의 포용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남남갈등은 내적으로 정쟁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남남갈등이란 말 자체가 특정 언론사가 만든 조어로서 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담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논의 구조가 국가와 민족이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상회담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가하는 식의 건설적인 논의가 아니라, 회담 개최의 당위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 회담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정쟁적인 논란들이 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2차정상회담 발표때부터 논란이 중심이었던 대통령 선거와의 연관성도 과거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설득력이 없는 문제이다. 이미 2000년 정상회담 발표에도 집권당 득표에 도움이 안되었던 경험이 있다. 오히려 KAL폭파 사건과 같은 남북관계에서 부정적인 사건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만, 대북지원이나 교류확대와 같은 긍정적 사안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검증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논의구조가 문제가 있는 것은 일파적으로 보수기득권세력의 정치적이고 정쟁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만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차 정상회담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집권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설득이나 배려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필요하고 정당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의 수렴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정책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무시한다는 것이 교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추진하는 정책자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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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8 23:02

[금요칼럼] 지금도 사투리, 표준어 따지는가? - 김열규

서울을 떠나서 남행하는 열차 안에서 생긴 일이다.  막 서울역을 나서서 남행하기 시작한 열차의 어느 칸이 시끌벅적했다. 부산과 대구 등지의, 이른바, '남도 여성'들이 많이 탄,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 여성들이 귀를 틀어막고는 견디고 있는 사이에 기치는 마침내, 동대구역에 닿았다. 대구 여성, 한 무리가 내렸다. 기차가 종착역, 부산을 향해서 출발하자, 여자들은 이젠 살았다고 귀를 막은 손을 내렸다. 한데 웬걸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부산 지역 여성만 남았는데도 서울 여자들, 귀는 여전히 따가웠다.  견디다 못한 서울 여자 승객 한 사람이 친구들을 대표해서 부산 여자들이 모여서 앉은 쪽으로 갔다.  '그 좀 조용할 수 없을까요?' 부산 여성이 대뜸 받아서 소리쳤다. '그래, 이 칸이 말칸 니 칸이다 칸은 거가?' 서울 여자는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저기 저 여자들 다 일본 사람이야?' 이렇게 투덜대고는 한숨을 토했다. 이건 남도 사람들이 들으면 여간 재마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 비해서 서울 사람들은 무순 이야기인지 전혀 못 알아듣고는 어리둥절할 게 뻔하다. 거기에는 영남말의 멋과 흥이 넘실대고 있지만 서울 사람 귀에는 외국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 여성 귀에 일본말로 들린 부산 여성의 발언을 서울 사람 알아듣기 쉽게 옮겨 보자. '그래, 이 (기차) 칸이 몽땅 네 칸이라고 말하는 건가?' 이쯤 될 테지만 그래 가지고는 흥겨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부산 여성의 발언은 짧은데도 '칸'이 자그마치 네 번이나 되풀이 되어있다. '칸, 칸, 칸, 칸'의 반복이 신난다. '프랜치 캉캉'의 춤사위 같다. 일행시(一行詩)가 아니면 , 무슨 경구나 속담처럼 재미있게 들린다.  하지만 그걸 서울말로 옮기고 보면, 영 맨송맨송 해서, 무슨 맹꽁이 울음 같다. 재미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그런데도 참 딱한 말버릇이 지금도 버젓이 활개 치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니고 서울 시민가운데서도 중류의 말을 '표준어'라고 떠받들고, 서울 아닌 다른 고장의 말은 '사투리'라고 퉁을 주는 일이다.  '사투리/ 표준어'의 이분법은 지금도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다. 설쳐대고 있다. 아니, 망언을 떨고 망발을 해대고 있다. '사투리/ 표준어'로 온 나라 안의 말을 양단(兩斷)한 것은 일제 치하의 저 욕된 식민지 시대의 일이다. 한데 그 본보기가 된 게 뜻밖에도 일본이다. 그 당시 이미 저들은 그들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方言)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으로 다분히 치욕스러운 한국어의 양분법이 거기 꿈틀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다. 한데 그게 언젠데, 그게 지금도 나부댄다면 그건 분명히 시대착오다. 이제 모든 면에서 지역차별은 없어져 마땅한 이른바, '지역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중앙집권적인 지역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림짐작이긴 해도 '사투리'란 낱말은 '서툴다'와 사촌 간쯤 될 것 같다. 당치도 않게 각 고장의 고유한 말이 서투르고 시원찮다고 해서는 욕되게 부른 것이 다름 아닌 '사투리'란 그 고약한 낱말일 것 같다. 물론 '방언(方言)'이란 낱말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야 한다. 방언이란 낱말을 곧이곧대로 풀면 어떻게 될까?  그건 '중안 아닌, 변두리, 외딴 곳의 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이, 그나마 중앙은 섬기고 떠받들고 지방은 깔아뭉개고 하던 아주 고약한 묵은 시대의 이분법이며 그 악습이 거기 엉겨 있다.  모르긴 해도 한 나라 안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 또는 사투리와 표준어로 나누고 있는 국가는 흔할 것 같지 않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양분법이 통하고 있는 나라로 우리들이 알만한 나라는 아마도 일본뿐 일 것 같다.  '시엄씨 몰래 술 뚱쳐 먹고 이 방 저 방 다니다가 시엄씨 궁뎅이를 밟았네'  진도 며느리들의 아리랑 타령은 진도 말이라야 제대로 멋 부리고 익살을 떤다.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밀양 아리랑을 뜯어 고쳐서 '날 좀 보세요' 한다면 상대가 천하의 절색이라도 바라볼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 '사투리와 표준어'의 이분법은 그만 두자. 호남 말, 강원 말, 충청 말 , 영남 말과 나란히 서울말이 있을 뿐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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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1 23:02

[금요칼럼] 엄살과 투정의 시대 - 안도현

며칠 전 출근길에 모처럼 연탄을 싣고 가는 트럭을 보았다. 반가웠다. 연탄 실은 트럭이 마치 흑백사진 같았다. '연탄' 하면 줄줄이 떠오르는 기억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했다. 아직도 연탄으로 차가운 계절을 나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직도 연탄으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물을 데우며 겨울을 나야 하는 가구가 20만이다. 북녘에서는 겨울나기 연료로 연탄마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고 한다. 엄살이 아니다. 나는 '연탄 한 장'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이 가을에 스스로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인가?" 삼시 세 끼 배곯지 않고 먹고 살만 한 호시절이라는데, 한쪽에서는 영 글러먹은 세상이라고 삿대질로 세월을 다 보내고, 또 한쪽에서는 옛적보다 사는 게 수월찮다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있다. 도처에 투정과 엄살이 넘쳐나고 있다. 경제를 탓하고 정권을 탓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탓하지는 않는다. 이게 문제다. 귀성길에 고속도로가 막히면 길게 늘어선 다른 차들을 탓하지 자신의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의 하나라는 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파트 시세의 급상승을 어찌 정부의 정책 부재 탓으로만 돌리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분명히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입으로 밥 들어가는 일도 투정 아니면 엄살이다. 잘 생각해보자. 더 맛난 것을 혀끝으로 찾으려는 욕망과 더 몸에 좋은 것을 섭취하려는 욕망의 부추김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점점 속물이 되어온 건 아닌지? 먹는 일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도시에서 먹는 일에 한사코 목을 매달고 살지는 않았는지? 남보다 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으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것은 아닌지? 요즈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정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거머쥐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다가오는 대선에 이겨 그 한을 풀겠다는 뜻이다. 엄살의 극치다. 이건 선술집 같은 데서 울분을 참지 못해 술상을 내리치며 내뱉어야 할 소리다. 이런 신파조의 엄살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가 없다. 그들은 10년 동안 권력을 잃었을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은 이 기간에 참으로 소중한 민주주의를 얻었다. 비로소 성취한 민주주의를 향후에 어떻게 잘 가꾸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 타령은 안 된다. 다시는 '겨울공화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따뜻함이다.참여정부의 실패와 무능에 대한 지적도 엄살과 투정으로는 곤란하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따뜻함에 대한 배려의 실패이다. 객관적인 논리와 투명한 일 처리의 배면에 따뜻함은 전무했다. 여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이른바 경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따뜻하지 않은데, 누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겠는가?곧 추석이 다가온다. 고향은 따뜻한 밥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누구도 고향에서는 투정과 엄살을 부리지 않았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알았고, 반찬을 서로 권할 줄 알았다.명절은 그렇게 더불어 밥 먹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시간이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고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고향에서는 성공했다고 떠벌이며 자랑할 일이 아니며, 실패했다고 기죽어 고개 숙일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밥상 앞에서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다. 올 가을엔 제발 따뜻한 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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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14 23:02

[금요칼럼] 피랍자 생환이 최우선 아닌가 - 한승헌

아프간 피랍자들의 생환은 누가 뭐라던 정부 당국의 적절한 대응으로 이끌어낸 성과였다. 생존자 전원 석방 합의가 공식 발표되었을 때, 그동안의 피말리는 극한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 하고 간절히 염원하던 모든 국민들은 감사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다각적인 노력을 평가했다. 그러나 거개의 언론들에서는 정부 측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은 별로 하지 않은 채, 이런저런 문제점만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외국인의 시각, 현실을 무시한 평가, 정부 폄하의 속셈까지도 드러나 있다.두 목숨의 희생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나머지 피랍자를 45일 만에 무사히 생환시킨 마당에 그 과정상의 방법이나 조건을 가지고 이런저런 말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불과 며칠 전 만하더라도 피랍 후의 상황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던가. 지난 7월 19일 아프간에서 한국인 23명이 반정부 무장단체 탈레반에 의해 납치당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절망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탈레반은 처음엔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한국정부가 연내 철군방침을 밝히자 이번에는 탈레반 죄수 23명과 인질의 맞교환을 석방조건으로 내세웠다.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의 시한을 정해놓고 인질 살해의 협박을 되풀이했다. 탈레반 포로의 석방은 우리의 힘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아프간 정부와 미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테러집단과의 협상은 없다는 그들의 원칙론 앞에 달리 돌파구가 없었다. 배형규 목사의 피살, 대통령 특사의 아프간 파견, 고도로 계산된 탈레반의 언론플레이와 심리전, 심성민씨 추가 살해, 한국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는 탈레반의 전략, 양측 대면협상의 개시, 여성 인질 두 사람의 석방, 대면협상의 재개, 전원석방 합의에 이르기까지.탈레반의 총부리 앞에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인질들의 절망적 표정을 동영상으로 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 국민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람만 무사히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런 간절한 요망에 부응하고자 정부는 전력을 다했다. 밖으로 알려진 보도만으로도 제반 악조건 속에서 정부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전원 석방의 합의가 발표되고 나자 언론은 곧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입을 모아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문제 삼았다. 아프간이나 미국이 냉담했고 달리 사태를 풀어갈 방도가 없는 가운데,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인질을 두 사람이나 살해하는 마당에, 무장단체의 직접 협상 요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우리 쪽에서 직접 대면을 요청하고 싶은 판국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자국민이 무장집단의 총구 앞에 떨고 있는 마당에 테러집단과의 협상금지원칙에 묶여있을 정부가 얼마나 있을까. 사태 해결 전후의 외국 언론의 비난에 대해서 우리 언론이 좀 더 분명히 반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테러집단과의 협상 불가, 몸값 불가원칙만 준수하고 있다가 우리 형제가 몰살당했다면, 그때 언론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분명코, 인명이 최우선인데 운운했을 것이다. 아니면 국제사회의 원칙을 지켰으니 잘했다고 할 것인가. 우리 정부의 선택은 트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잘 한 일은 (누가 했던 간에) 잘했다고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연말 철군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서 협상에서의 이점을 놓쳤다고도 한다. 철군 시기는 어차피 계획되어 있던 것이어서 초동단계에서 인명의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발표였다. 만일 그와는 달리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한국군의 아프간 철수시기가 결정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이야 말로 씻을 수 없는 굴욕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시종 탈레반에 끌려 다녔다고 비판했는데, 이번 같은 특수상황 하에서 무슨 수로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는지 묻고 싶다. 국정원장의 과잉노출과 과잉홍보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전 게임 몰수를 하듯이 정부를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흔히들 공과(功過)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공으로 과를 씻을 수 없듯이, 과를 이유로 공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다음 정권을 맡아보고 싶은 정당이나 지도자라면 지금의 국가공직이 바로 다음번의 내(우리) 자리라는 가정을 하고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옳다.우리는 이번 인질사태를 조성한 탈레반의 비인도적 만행에 대하여 분노한다. 동시에 우리 정부의 해외파병정책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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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07 23:02

[금요칼럼] 남북 합작드라마 '사육신' 유감 - 이우영

북한에서 제작된 드라마 '사육신'이 지난 8일부터 방송되고 있다. KBS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이 제작을 시작한지 2년여만의 일이다. 사육신은 명실상부한 최초의 남북한 합작 드라마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동안 남북한간에는 다양한 방송교류가 있어왔다.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등의 제작협조가 있었고, 보도부분에서도 현지 진행 방송 등이 시도되어왔다. 또한 태조왕건의 오프닝 장면 등을 현지에서 촬영하는 등 드라마 부분에서도 부분적인 교류가 있었다. 드라마 사육신은 기존 교류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과거의 교류가 대부분 일회적이고 이벤트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한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적지 않은 사회문화교류가 있었으나 그 성과가 축적되지 못하였다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경우는 그 동안 남북이 쌓아올린 신뢰와 교류과정에서 이해하게된 상대방의 기술적 문화적 특성을 종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세상에 내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KBS는 이번 '사육신' 제작을 위해 북한 총 210만 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 가운데 70만 달러가 현금이며 140만 달러는 방송 장비다. 또 카메라 기술, 조명, 세트, 의상, 분장, 디지털 오디오 편집 기술 등 각종 방송 기술을 북측에 전수되었고, 이는 향후 북한의 드라마 제작 인프라로 활용될 전망이다. 어쨌든 남한 방송에서 북한 배우들이 나오고 연출가 등 북한 제작자들이 엔딩 크래딧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남북한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의미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사육신은 시청자들로부터는 외면 받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7%대로였던 시청률이 3주가 지나면서 2%대로 떨어졌는데, 이는 TV방송에서 마지노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애국가 시청률 3%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렇게 시청률이 낮은 것은 낯선 배우들, 이해하기 어려운 억양과 말투, 느린 진행 등이 남쪽의 시청자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시청률이 반드시 높을 필요는 없다. 또한 남한의 드라마도 그 정도의 시청률을 보인 경우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육신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작품자체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일단 정치적 이유에서 작품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 드라마 제작과 방영을 퍼주기의 결과라고 하면서, 법적 제재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북한 것이니까 무조건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막무가내식 반대도 있다. 문화적 차이가 드라마를 외면하는 원인이라는 사실도 문제가 없지 않다. 북한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경향 즉, 문화적제국주의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지불한 비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남한의 드라마 제작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제작비는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총 비용 가운데 제공된 방송장비는 앞으로의 방송교류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문화적 차이가 더욱 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획일성, 문화적 배타성이라는 작품외적 이유에서 사육신을 외면하는 한 앞으로의 남북한 사회문화교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교류나 남북한간 이해 증진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눈에 띠는 교류아이템을 찾아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 내의 반북적인 사고, 냉전적 문화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스스로의 성찰이 없는 한 심지어 완벽한 합작 드라마라도 방송을 타기 어려울지 모른다. 더 나아가 사회문화적 접촉이 남북간의 거리감을 확대시킬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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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31 23:02

[금요칼럼] 서울 올라간다니? 이제 그만하자 - 김열규

'서울 올라가서 부산 내려 온다' '대구서 서울로 올라 간다' 지금도 이렇게 말하는 지역주민들이 적지 않다. 올라가긴 도대체 어디로 올라간단 말인가? 내려오긴 도대체 어디로 내려온다는 걸까? 서울이 어디 하늘 꼭대기에 붙어 있고 부산이나 대구 등의 고장이 어디 땅바닥에 내려 박혀 있다면 모를까, 그런 말 이제는 쓰면 안 된다. 그것도 멀쩡한 지역 주민이 그런 묵고 낡아 빠진 말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모르다가도 또 모를 일이다.  일반적으로 '위아래'란 말은 단순히 방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분이며 처지의 높낮이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무슨 물건일 때는, 그 가치며 값을 따져서 상품(上品)과 하품(下品)으로 차별지울 때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심지어 좋고 나쁜 것, 제대로 된 것과 엉터리인 것의 구별도 상하로 나누어서 매길 수 있다.  윗자리와 아랫자리, 웃어른과 아랫것, 손위와 손아래, 윗분과 낮은 것. 사람 가지고도 이같이 위아래를 따지고 높낮이를 구별한 것은 그렇다 쳐도, 그게 지역 간에까지 설치고 나선 것은 이젠 용납할 수 없다. 조선왕조는 세계사 전체를 보아도 아주 별난, 아주 강한 중앙집권의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겠는가? 거기 담긴 고약한 지역차별이 '서울 올라 간다'를 관용어로 굳어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나부대고 있다. 조선조 이래의 낡아빠진 시대에는 예사로들 '상경하고 하향(下鄕)한다'고들 말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 고향 가는 걸 하행(下行)이라니 말도 아니다. 이제부턴 당당하게 '상향(上鄕)한다고들 말해야 한다. 요즘에도 여전히, 이 따위 말을 남들에게서 예사로 듣게 될 적마다 필자는 결코 떠올려서는 안 될 걸 문득 떠올리곤 한다.  그 흉악한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서울에서 대구나 부산으로 가는 기차 길은 상행선이라 하고 부산서 서울로 가는 철길은 하행선이라고 했다. 저들은 저들의 수도인 일본의 동경으로 하여금 중앙에 자리하게 하고 또 최상층에 버티고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가 차라리 낫다고 부산이나 대구 사람들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하나 마나다. 이 따위를 지금 새삼스레 연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문득 모르는 새에 떠올리곤 하는 것이 본인으로서는 부끄럽고 괴롭다. 못난 필자는 스스로 그 따위 고약한 것을 연상하게 되지 않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싶다.  그러니까, 이제 각 지역사람들은 떳떳하게 서울은 내려간다고 하고 제 고장은 올라간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면 어느 곳이나 위아래로 매길 것 없이, 그냥 광주 가고 서울 가고 한다고 그렇게만 말하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한데 비슷한 보기는 또 있다. 그건 다름 아니고 '너 언제 서울 들어 왔냐?' '당신, 언제 충주 내려 갈 거지?' 이런 말이다. 여기서 서울은 안이고 내부다. 지역은 한데고 바깥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울은 중심에 들어가서 자리 잡게 되고 지역은 가장자리나 변두리로 밀려 나서 처져 있게 된다. 이것도 극심하게 낡아빠진 중앙집권제의 퇴회된 유물이다. 오래 전, 조선왕조 시대라면 '대국 들어가서 조선으로 나온다'고들 말했다. 물론 여기서 대국(大國)은 중국이다. 따라서 조선은 소국(小國)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창피한 말버릇은 일제시대로 이어져서는 요즘의 대명천지에서도 여전히 서승대고 있다.  '나 내일 미국 들어가!라는 말버릇이 바로 그렇다. '들고 난다'는 말에 담긴 조선조 사람들의 자기비하(自己卑下)나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 비하나 요즘의 각 지역 사람들의 자기 깔보기나 하나도 다를 것 없이 창피한 일이다.  올라가고 들어가는 곳이 서울이고 내려가고 나가는 곳이 지역이라면 국토 전체를 두고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그건 다름 아니고 나무 그림이다. 서울이 당당히 중심 근간에 위치하고, 그것도 최상층에 자리하고 지역들은 아랫부분의 곁가지 끝에 달랑 달랑 붙어 있는 그런 나무 모양이 연상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극히 최근의 사회구조나 국가 구조는 흔히 '리좀'이란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땅위의 나무 모양이 아니고 지하의 뿌리들에 견주어지기도 한다. 거기엔 위아래의 구별도 중심 바깥의 차별도 없다. 그러기에 서울 올라가고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도 보통 착오가 아니다. 이제 제발 그만두자! 서울 올라간다는 그 말! 모든 지역 사람들이시여!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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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24 23:02

[금요칼럼] 언어의 진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눈시울을 뜨뜻하게 적시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시위를 하러 떠나는 고등학생들의 눈 밑에 교사가 치약을 발라주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다. 영화의 이 사소한 장면은 그 사소함 때문에 빛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막아서도 안 되는 역사의 흐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오늘날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먼 옛날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광주'는 여전히 현실이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민주주의를 지켜온 사람들은 이를 '광주항쟁'이라 부른다. 얼마 전 유력한 대선주자의 한 사람은 이를 두고 스스럼없이 '광주사태'라고 말해버렸다. 놀라웠다. 이 용어는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폭도'나 '불순분자'로 내몰던 자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이미 폐기처분 되었어야 할 잘못된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이 제5공화국 수준이라는 뜻이다. 과거로의 화려한 회귀일 수도 있다. 언어는 의식을 반영한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사태'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사태'이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그 이전에 의식을 바꿔야 하고, 또 의식을 바꾸려면 치고 박는 경선 준비보다는 '화려한 휴가'를 몇 번 더 보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무릇 하나의 명칭이란 단순히 사건의 기호에 머무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이 시작할 때부터 마무리될 때까지를 두루 아우르면서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푯대가 되는 것이다. 1894년에 이 땅에 일어난 큰 사건이 있다. 이를 부르는 명칭도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하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오농민전쟁'이 최근에는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건은 '동학란'이었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슬그머니 '동학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197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에는 '혁명'이 없었다. 아니, '5.16혁명'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달달 외우고 성장한 세대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한테 잘못 가르쳤다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독 나를 잘못 가르친 어른들에게 따지고 싶어지는 것일까?언어는 변화한다. 그것도 그 형태와 의미가 변화할 뿐만 아니라 식물처럼 영양분을 먹고 쑥쑥 자란다. 물론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언어도 있다. 때로는 언어에 유기체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한국전쟁'이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6.25동란'은 우리 눈앞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한편 우리가 떠나보낸 '동무'의 자리를 '친구'가 차지하고 앉아 있기도 하다.남북교류가 잦아지면서 북한에 출입하는 이들한테 정부에서 누누이 교육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상대방을 부르는 용어다. 북한을 '북측'이나 '북쪽'으로 부르라는 것이다. 왠지 어색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에 서로 합의한 언어이므로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머지않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남북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북측'과 '남측'이라는 말로 상대를 부를 것이다. 한때 북쪽을 향해 우리는 '북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불러대던 적이 있었다. 만약에 그 '북괴'라는 말을 지금 누군가 다시 꺼내 쓴다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것인가.1980년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대학생인 우리는 '북괴가 남침하면 우리도 총을 든다'는 벽에 적힌 구호를 보아야 했다. 그 속에는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해 광주는 무법자들에 의해 온 도시가 빨간색으로 물들어야 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데, 이 참에 한 번 묻고 싶어진다. 언어는 과연 진보하는가?/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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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17 23:02

[금요칼럼] '직구'만 아는 정치인의 언어수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다음 바로 그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영국의 처칠 수상, 그는 유머리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그가 낸시 에스터라는 영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과 벌인 설전은 들어볼만하다.낸시; 당신이 만일 내 남편이라면 당신의 음료수 잔에 독을 넣고 말겠소.처칠; 그래요. 만일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독을 마셔버리겠소.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나는 나라를 위해서 언제라도 한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다만 그 시기가 일각이라도 늦게 오기를 빌고 있을 따름이다.처칠은 학생 때 성적이 최하위권을 맴돌았다는데, 어디서 그런 재치와 순발력이 나왔을까이미 정치 유머의 고전이 되다시피 한 또 하나의 이야기도 역시 영국산.수의사 출신의 한 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는 중에 반대당 의원이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수의사라면서? 그러자 이 수의사 의원 왈, 그렇소, 당신 어디 아프시오? 진찰해드릴까요?정치의 세계에서는 상대당 또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필수적인데, 그러다보니 말이 격해지기 쉽다. 그래선지 위에 든 바와 같은 정치인의 수준급 유머는 아직 한국에서는 흉년이다. 언젠가 국회에서 한 야당의원과 경제부총리 사이에 이런 말의 혈투가 벌어졌다.의원; 그렇게 치고 빠지지 말라. 부총리;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자꾸 그래요?의원; 어디에다 대고 신경질을 부리느냐? 부총리; 인격적으로 모독하지 말라.바야흐로 대선의 계절, 정치판에는 음해와 막말이 횡행한다. 상대정당과의 본선도 아닌 집안끼리의 예선 리그에서 저렇게 치고받고 해서야 패자가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승자를 도와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심지어 당 대표가 사생결단의 비방은 말라고 호소한다. 어떤 일간지의 李 갈리게, 朴 터지게라는 기사 제목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1차 방정식 밖에 모르는 말솜씨들이다. 직구만 알고 커브나 서브마린의 위력과 묘미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미테랑 대통령과 시라크 총리가 각기 사회당과 보수당을 이끌고 기형적인 동거정부를 꾸려가고 있던 1990년대의 이야기. 미테랑이 이런 자화자찬을 하였다. 과거에는 출산율의 저하로 고민했는데,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한 후에는 출산율도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보수파의 시라크 총리가 아주 점잖게 반박을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출산율 상승은 사회주의의 성과라기보다는 프랑스 국민 개개인의 노력의 성과라는 것을 대통령께서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개개인의 노력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진미를 알 수 있는 말이다.)도대체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가겠다는 인물이라면, 식견과 도량, 신념과 교양,품격과 신뢰감 등 여러 면에서 무언가 남다른 데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검증 평가할 수 있는 내신과 수능성적이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말과 행실에 의해서 채점된다. 그런데 적어도 말의 품격에 관한 한 우리 정치인들은 낙제 근처의 수준이다. 그렇지 않은 극소수를 예우하는 뜻에서 대부분이라는 말을 붙여 주자. 나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언행에 오염되어 사고와 언어생활에서 건강성을 잃어가는 국민들을 위해서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공직 선거 후보자(그 지망자 포함)들에게 일정 기간 언어교육을 시킨다. 둘째 선거과정이나 의정생활에서의 발언을 개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반칙을 통고하거나 공개한다. 셋째 학교교육 및 사회교육에서 민주시민에 합당한 언어교육과정을 밟게 한다. 넷째 저질 발언을 상습적으로 일삼거나 음해성 발언으로 한몫 보려는 후보를 가려내어 정계에서 도태시킨다.한 야당의 유력한 경선후보들 사이에 여론조사 설문사항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누가 좋다고 생각하십니까?와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놓고 서로 막무가내다. 당에서 내놓은 절충안 ....누구를 뽑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는 양편에서 모두 손사래를 젖는다. 자기네 이해에 직결되는 표현에는 이처럼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 희화적이다. 평소 상대방에 대해서 말할 때도 이처럼 한 마디 한 대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후보야 말로 민주사회에 합당한 지도자로서 알맞는다고 할 것이다./한승헌(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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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10 23:02

[금요칼럼] 아프가니스탄 인질사건의 뿌리 - 이우영

봉사를 위해서 이국땅에 갔던 무고한 시민 23명이 텔레반에 납치 된지도 열흘이 넘어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걱정에 휩싸여 있다. 이미 한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잡혀있는 인질들의 고통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이 사건의 본질을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이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절대적 가치의 하나인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필요한 바를 얻으려고 하는 텔레반의 행위는 이유를 불문하고 반인륜적 범죄라는 점이다. 사실 그 동안 납치나 인질 그리고 이를 포함한 테러는 우리와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이라크, 나이지리아 그리고 소말리아 등 여러 지역에서 한국 사람들도 납치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애꿎게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유에서 경제적 동기까지 납치와 같은 범죄의 대상이 된 까닭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세계화의 진전으로 한국 사람들의 활동법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프카니스탄의 경우에서 잘 보이지만 납치나 인질 그리고 이를 포함한 테러의 확대가 한국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시대통령의 장담(?)과는 달리 세상이 점점 안전하지 않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우리 국민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특히 부시정권의 일방적 패권주의가 테러 증대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 도처에서 테러관련 사건이 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당장 우리 국민들을 억류하고 있는 텔레반의 경우, 미국의 침공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테러 집단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부시정권 때문에 생겨난 집단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부시정권이나 미국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차원으로 시각을 넓혀 본다면, 텔레반 존재의 원인은 소련과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가장 불안정한 나라의 하나인 이라크도 그러하고, 해적(혹은 군벌)이 창궐하는 소말리아, 참담한 학살의 현장인 수단의 다르푸르, 만성적인 분쟁지역인 레바논과 팔레스타인도 근대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분별한 침략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서 때로는 군대를, 때로는 종교와 사상을 앞세워 남의 나라를 지배하였던 국가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를 저지하려던 미국의 대소 정책의 산물이었던 무자헤딘이나 텔레반에 대한 미국이나 소련의 태도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세계적 분쟁지역이라고 한다면 마치 해당국가나 국민들의 문제로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잔인무도한, 반인권적인 테러집단과 이들의 문화(국민성과 종교성을 포함하여)가 원인이고 본질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분열과 상호 적대감 확산은 전적으로 제국주의 지배정책의 산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식민지 경험이후 둘로 나뉘어 피튀기게 싸우고 있는 우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 식미지 경험으로 여전히 아픈 우리 국민이 또 다른 역사의 피해지역에서 겪는 고통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 못지않게 제국주의의 아픈 역사를 아직도 겪고 있는 우리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레바논과 같은 국가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명분이라 어떻든 간에 현지사람들은 우리를 가해국가의 군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납치사건의 본질을 따져보는 것이 텔레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질의 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히 비판하고, 가능하다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들의 행위와 존재 자체에 책임이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좀 과하게 말한다면 텔레반이 살인범이라면 이들은 교사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들에게는 입을 닫고 있는 것일까?/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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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8.03 23:02

[금요칼럼] "말, 그 함부로 하지 말것" - 김열규

'말 잘했다!'이건 칭찬인가 하면 나무람이고 또 핀잔이기도 한 묘한 말이다. 핀잔일 때는 '말 같지도 않는 말', '억지 부리는 말'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무람일 때, '말 잘했다!'는 이른바, 아이러니가 되는 셈이다. '말 같지도 않는 말'을 뒤집어서 비꼬는 것이 된다.요즘 우리들이 신문을 읽고 TV를 보면서 무심코라도 자주자주 '그 말 잘한다!'라는 아이러니를 내뱉게 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그나마 큰 자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발언하는 것을 들을 때, 드물지 않게 시민들이 '그 말 잘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신분이 높을수록 그들 말이 땅바닥을 뒹굴고, 진흙구덩이 속에 내리박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일반 시민으로서도 괴로운 일이다.그러자니 예부터 자주 써온 말이 절로 생각난다. '신언서판(身言書判)!' 바로 이 한마디다. 하지만, 오늘날 그게 잊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나마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그런 것 같아서 마음 아프다.그래서 새삼, 경구(警句)라고 해도 좋고 잠언(箴言)이라고 해도 좋을 '신언서판'을 되새겨 보자. 몸가짐과 말과 서예(書藝)와 그리고 판단력, 이 넷이 다름 아닌, '신언서판'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인간의 능력과 인품을 매기는 '4 대 기준'이 되어 왔다. 특히 '선비'며 벼슬아치에게서는 절대의 기준이었다.한데 오늘 날 서(書)가 컴퓨터의 자판(字板)찍기에 밀려나면서 덩달아서 '신언판'의 셋도 한꺼번에 퇴락하고 있는 것 같다. 언(言)을 말이라고만 했지만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언은 말의 내용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논리도 '언'이고 따라서 말투, 말버릇도 물론 '언'이다. 더욱이 언행(言行)이라면서 언이 행동이며 행위와 짝 지어서 사용된 것은 매우 큰 뜻을 품고 있다. 언행일치라면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이 곧 행동이요 행위가 바로 말임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말을 떠난 행동이 없듯이 행위를 떠난 말이 없다는 것도 십분 의미하고 있다.뿐만 아니다. 신(身)과 짝지어서 신언(身言)이 되면 몸가짐이며 행실이 곧 언어요 언어가 다름 아닌 처신(處身)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언행'이나 '신언'이나 어차피, 말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말임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말은 인간의 로고스요 이법(理法)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 판국에 누군가 말을 함부로 하면, 그나마 내뱉다시피 아무렇게나 하고 즉흥적으로 토하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가 막말을 해대고 쌍소리 비슷한 말도 해댄다면 어떻게 될까? 그나마 나라의 큰 자리며,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런다면 나라꼴은 또 어떻게 될까?물으나마나다. 답은 아주 뻔하다. 그의 행실도 처신도 인품도 파탄을 빚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시민들에게서 '그래 말 한번 잘한다'는 아이러니를 들을 적마다 나라꼴이 구겨질 게 뻔하다.언책(言責)이란 말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다. 그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복리를 위해서 마땅히 할 말 해야 하는 책무를 의미한다. 공중을 위해서 중론을 모아서 말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해도 좋다. 한데 또 다른 하나는 말한 사람이 그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져야하는 책임이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언책이 제대로 구실을 다하고 또 지켜질 것을 전제하고서야 공인(公人)은 공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언서판'이 살고 그의 인품도 지켜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아예 입 닫아야 한다. 정말이다. 함구무언해야 한다.오늘날은 여론의 시대다. 중론과 공론의 시대다. 그건 제 혼자의 생각을 잘난 척하고는 떠벌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인(公人)들의 공적인 발언은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바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차라리 현명할 것이다. 그들에게야말로 침묵이 금일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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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27 23:02

[금요칼럼] 글씨 잘 쓰는 사람 - 안도현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늘어났는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 컴퓨터 탓이다. 학생들이 꽤나 정성들여 작성한 제출한 리포트도 사정이 다를 거 없다. 글씨체가 너무 조악해서 봐줄 수가 없다. 대학생들의 글씨가 중학교 신입생만도 못한 게 수두룩하다. 우리의 교육과정도 글씨 잘 쓰는 공부는 제쳐둔 듯하다. 이대로 방치하다 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육필이라는 말은 매우 고색창연한 말이 되었다. 글을 치는 게 아니라 쓰는 작가는 이제 극소수다.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를 잊을 수 없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 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메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상이었다. 그러한 좀팽이의 글쓰기가 경이로워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서 내가 맨 먼저 배운 문학은 선배들의 글씨체를 흉내 내는 일이었다. 선배들처럼 글씨를 써야 적어도 선배들과 같은 수준의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는 만년필로 아주 예쁘고 멋진 글씨를 썼다. 함부로 흘려 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모범생의 필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문학청년의 냄새가 나는 글씨였다. 그 필체를 연습한 덕분에 나는 그 선배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고, 때로 선배의 소설을 원고지에 옮겨 쓰는 대필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 선배의 필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를 거쳐 몇 해 동안 내 후배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글씨를 통해 원고정서법뿐만 아니라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다.습작 시절에는 글씨 못지않게 어떤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는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는 첫 번째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기관이나 단체, 출판사나 신문사 이름이 찍힌 원고지를 손에 들게 되는 날은 대단한 문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원고지와 육필의 시대는 그 빛나던 야성을 잃었다. 가끔 문예작품 심사를 하다가 보면 그런 필체와 그런 원고지를 만날 때가 있다. 인쇄한지 좀 오래된 듯 원고지의 모퉁이가 바랜, 아주 유려한 만년필 필체로 정성을 들인 원고 말이다. 원고를 작성한 방법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연령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원고에 쓰인 언어는 수십 년 전의 정서와 감각에 머물고 있기 십상이다.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기를 놓친 원고를 옆으로 제쳐두면서 나는 원고지라는 형식의 종말을 쓸쓸히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나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여덟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자기나 컴퓨터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퍼스널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타자기와 달리 무진장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는 신비한 기능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시 한 편을 쓸 때 보통 수십 장의 파지를 내던 나는 서슴없이 글을 치는 쪽에 줄을 서버렸다. 문명의 편리함을 쫓은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필체가 시원찮은 시인이 되었다. 글씨를 쓰지 않으면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우표 뒷면에 침을 바를 일도 없어져버렸다. 원고를 이메일을 통해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원고 마감 시간 직전에 몇 번의 클릭으로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랄 만큼 편리해졌으나 이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작 석 줄밖에 안 되는 졸시 너에게 묻는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 연탄재로 바뀌는가 하면 수많은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모든 국민이 다 서예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어라는 글자 고유의 조형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글씨에 인격이 드러난다는 말은 케케묵은 관용구가 되었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책꽂이에 꽂아두던 펜글씨 교본 같은 책을 다시 우리 학생들의 손에 쥐어줘야 하나?/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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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20 23:02

[금요칼럼] 로스쿨, 로와 스쿨 사이 - 한승헌

지난 7월 3일 오후, 여야 로스쿨법 처리 합의 - 라는 긴급 뉴스가 나오자 성급한 축하전화가 몇 군데서 왔다. 내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이끌고 로스쿨법의 성안, 입법에 힘을 기울여 온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번 회기에는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는 뒤집기 뉴스가 나왔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만일 이번에 또 미루어지면 여러 대학과 학생, 수험생들의 낭패와 손실이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나의 이런 조바심과는 달리, 밤 11시가 넘고 30분이 지나도 고대하는 뉴스는 뜨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뉴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 회기가 끝나는 자정 3분 전에 로스쿨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긴급 뉴스. -심야인데도 여기저기서 축하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이로써 사개추위가 2년 동안 역동적으로 추진해온 사법개혁 작업은 대체로 마무리가 된 셈이다. 되돌아보건대, 사법개혁의 여러 과제 중에서. 국민이 형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배심재판제의 도입, 수사기관 조서 중심 재판의 폐단을 바로잡는 공판중심주의 확립 등이 유난히 힘들었지만, 학계와 법조계, 시민단체의 찬반양론이 뜨겁기로는 로스쿨법이 단연 으뜸이었다. 이 법안을 눈 흘겨보는 국회의 늑장부리기 또한 메달 감이었다.10여년 논란 끝의 만성(晩成)이라고 해서 꼭 대기(大器)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국회가 직권상정 처리라는 비상절차를 밟았는데도 별다른 비판, 비난이 없는 것은 입법 내용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로스쿨 입학 총 정원의 책정은 그동안 큰 관심사가 되어왔다. 그렇다고 로스쿨 논의가 이 문제에만 묶여 있다시피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법학계나 법조계에서도 입학정원 논의에만 매달리지 말고, 어떤 사람을 뽑아서 무엇을 어떻게 잘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법학적성시험, 교육과정, 강의방식 등에 관해서도 심도 있게 연구 개발을 해서 정부와 학교 그리고 교수들이 서로의 숙제를 함께 풀어가야 할 것이다.로스쿨에서는 지금의 법대(학부) 교육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납득할만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실무교육을 병행한다는 정도의 말은 정답이 되지 못한다. 학부 4년의 법학전공자와 비법학전공자를 어떻게 같은 수준에 놓고 강의를 할 수가 있을까 - 이 점도 난제 중의 하나다.물론, 지금 교육인적자원부 당국이나 각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고 있겠지만, 로스쿨 교육의 본질문제에 맞닿아 있는 사안들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은 채 단지 입학 정원을 둘러싼 격론만 되풀이하는 것은 교육자나 법조인의 양식에 합당한 일이 아니다. 대학사회의 로스쿨 과열을 이해는 하면서도 그 정도와 행태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민주사회에서는 사법부를 포함한 법조계도 여러 직역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그 직분이 다소 중요시된다고 해서 로스쿨을 놓고 사생결단이라도 할 듯이 나서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 정부는 로스쿨(법학대학원) 설립을 원하는 모든 대학에 인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졸업생이 나온 작년의 사법시험 합격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학교 측이나 수험생, 재학생 모두가 난감해졌다. 낙방생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입학 정원 및 인가 학교 수의 적정 여부와 함수관계가 있다. 그것은 낙방생 개개인의 불운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책 실패의 탓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일본의 한 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일본의 실패를 거울삼아 시행착오가 없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한승헌(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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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13 23:02

[금요칼럼] 6·25와 6·15 그리고 기억의 정치 - 이우영

지금도 그러하지만 과거에도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통일이나 북한과 관련된 책들이 그나마 관심을 끄는 시기가 6월이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625와 관련된 숙제를 하기 위해서 책을 구입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도 여전히 6월은 북한 및 통일관련 서적의 성수기인데 625에 더하여 2000년 615가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북한관련 책이 조금은 더 읽힌다는 사실이 바람직한 것 같으면서도, 그 이유가 민족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착잡하였지만, 요즈음은 그래도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는 615가 또 다른 배경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나아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일시적이나마 6월의 북한 관련 서적 판매에 도움을 주는 625와 615사이에는 1950년과 2000년의 시간적 간극 보다 더 큰 거리감이 존재한다. 625가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쟁이었다면, 615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남북한 최고지도자간의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625나 615가 무엇인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실보다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 특히 분단사에 대한 사고 방식은 지극히 편협하였다고 할 수 있다.625의 경우는 '상기하자'라는 구호아래 북한의 침략성, 김일성 집단의 무자비함,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로 기억되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김일성과 북한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불과 3년에 걸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들만 300만에서 400만 정도로 세계사적으로 비슷한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안되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사건으로 생각되기 보다는 증오를 확대하고, 그래서 새롭고 더 큰 전쟁을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와 달리 615의 경우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반세기동안 지속되었던 남북간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과 북한의 정교한 전략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있다. 양쪽의 생각들이 나름대로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 입장에 서 있건 남북관계의 변화나 그 속에 살고 있는 남북한 보통사람들의 변화보다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의 공과여부나 김대중정부의 이념 평가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615를 통하여 무엇을 얻었고, 무엇이 부족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관심은 뒷전에 밀리고 있다는 말이다. 615나 625가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가 분명히 다르지만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이고, 민족구성원의 삶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현대사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지만, 남북관계와 관련된 사건들의 경우는 편향적이고 심지어 왜곡되어 있는 정도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냉전적 사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냉전적 사고가 단순히 '안보'를 굳건히 하거나 국가적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는 정상적 사고가 아닌 상처를 끊임없이 덧내고자 하는 비정상적 사고를 조장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식이 아닌 투쟁과 갈등의 분열의식을 자극하고, 평화로운 삶이 아닌 전투적 삶의 확산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불행한 일상과 불안정한 심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정한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일정하게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615와 625의 기억의 정치는 누가 주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올바른 기억과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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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7.06 23:02

[금요칼럼] 야당 유력 경선후보간의 다툼 - 임동욱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한나라당 유력 대선후보간의 다툼이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유력 경선후보들은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약점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있고 쟁점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한술 더 떠 대통령을 중심으로 청와대까지 이 다툼에 끼어들어 재판관인 선거관리위원회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를 시발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국가정체성 등의 쟁점과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다시 대운하 평가보고서의 변조논란 등을 대하는 국민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할 것 같다. 반면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자유롭기는커녕 본질적으로 이를 즐기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국민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현재 당사자들은 개인 및 당파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면서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쁠 것이다. 주판을 튕기는 셈법은 간단하다. 공격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공격이 상대방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위해를 가해 반사이익을 얻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 공격이 허구라는 것을 반증함으로써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논의를 개인에서 조직으로 발전시키면 야당의 입장은 미리 매를 맞음으로써 내성이 생길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밝혀서 본선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할 것이다. 이 와중에 국민의 관심을 얻어 흥행의 성공이라는 효과까지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여당의 입장에서는 미리 유력후보들을 낙마시키거나 흠집을 잔뜩 내서 본선을 지금보다 쉬운 싸움으로 몰고 가고 싶을 것이다.정치는 출혈 없는 전쟁이라고 말한 마오쩌둥의 말이나 전쟁보다 위험한 게 정치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생각해보면 현재 청와대까지 개입하고 나선 야당의 유력 경선후보간의 다툼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이익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라의 발전과 내일을 잠시라도 고민해보면 지금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라도 국가의 이익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한국대통령학연구소의 연구(2002)는 개인적 차원에서 대통령이 지녀야 할 구체적 자질로 비전제시능력, 인사관리능력, 위기관리능력, 민주적 정책능력 및 실행능력, 도덕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 능력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이나 이 연구에 따르면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제시 능력이다.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비전제시 능력이 다른 어느 능력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국민통합과 직결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를 관리하고 싶으면 우선 등 따습게 배불리 먹으면서 밤에 편하게 자는 문제는 물론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 나라 전 분야에 대한 청사진을 밝고 분명하게 그려내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자질, 특히 도덕성을 중심으로 개인을 흠집 내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고적(retrospective)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 봤을 때 문제가 있으면 결격사유가 되고 앞으로도 과오를 되풀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흠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겪은 지난 두 번의 대선패배는 바로 회고적 판단과 직결되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후보의 병역비리는 물론 산업화 시절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에 대한 반발심에 기초한 회고적 판단들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 회고적 판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망적(prospective) 판단이다. 이를 강조하면 미래를 바르게 끌고 나갈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회고적 판단은 전망적 판단의 보조적 역할을 해야만 한다. 비전제시 능력은 전망적 판단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하므로 이를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우에 그 정당성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회고적 판단과 전망적 판단의 접점에서 선택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바른 판단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과거는 사실이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불투명하다는 점에 있다. 흔히 선거공약을 전망적 판단의 근거로 들이대고 있지만 장밋빛 미래가 전망이 아니다. 우리 정치는 상대방을 흠집 내고 낙마시켜 상대적인 반사이익을 향유하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회고를 전망으로 연결시키는 데는 취약하기만 하다. 개인이나 조직이 작은 상처나 흠집에 견뎌내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투구의 양상까지 전개된다. 지금보다 진화한 다툼 시스템이 만들어져 전망과 회고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 전망이 회고에서 나올 수 있을 때 후보가 겪어낸 삶의 역정을 짚어보는 회고가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자질 및 능력이 있다는 전망과 직결될 수 있다. 그래야만 도스토옙스키가 정의한 것처럼 정치란 조국에 대한 사랑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정치도 가능해진다./임동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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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29 23:02

[금요칼럼] 대선에 대한 희망사항 - 고원정

오는 12월 대통령선거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며 결국 누가 당선되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대선이라는 제도 자체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느냐는 점을 생각해보기로 하자.우선 4년 중임제를 채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국민의 지지도가 높지 않은 대통령이 하필 임기말에 추진한다는 점에서 역풍을 맞고 말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거론한 4년 중임제 개헌은 이론상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5년 단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87년 체제」는 이제 청산해야만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5년 단임제는 타협의 산물이었고 그 타협의 주역들은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5년 단임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려냈다. 줄줄이 실패한 대통령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난 20년의 정치사는 상당부분 이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은 취임 초기 과도한 의욕에 사로잡히기 쉽다. 5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도 짧고, 다시는 선거를 치르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평가를 받아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크다. 무언가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바심은 결국 많은 무리수를 두게 만든다. 더 이상의 표가 필요하지 않기에 국민들과 함께 가려 하지 않고 앞서가거나 가르치려 든다. 다행히 잘 나갈 때는 좋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랬듯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지지도가 하락하면 5년 단임제는 최악의 상황을 빚어낸다.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식물대통령이 되거나 「역사가 평가한다」는 식의 독선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넘겨주어야할 것은 넘겨줄 준비를 해야 할 임기말이 이전투구의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5년단임제는 당사자에게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흔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대통령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근거인 「경험」을 단임제의 대통령은 혼자 가슴에 한으로 물러나야만 한다.다음으로 내각제가 아닌 순수 대통령제를 고수할 생각이라면 부통령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국무총리는 대통령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 위상에 너무 차이가 난다. 만에 하나 대통령 유고시에 정치적으로 그 역할을 대행하기가 쉽지 않다. 가령 지난 1979년 10.26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국정의 2인자였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재의 총리로는 일단 유사시 국정의 연속성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부통령제는 차기 주자를 키울 수 있고 검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 출사표를 던졌거나 거론되고 있는 후보군들을 한 번 살펴 보자. 아직 대통령감은 아니지만 부통령이라면 적임자일 것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무모하게 대선가도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부통령 혹은 부통령 후보라는 중간단계를 거친다면 개인으로서는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고 국가로서는 더 많은 인재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마지막으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고려해보았으면 한다. 지금의 상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경선을 통해 후보가 가려지겠지만, 이른바 범여권의 경우 그 이름을 다 떠올리기도 힘든 군웅할거의 판도가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 아직 감이 잡히질 않는다. 과연 단일화가 가능할 지도 의문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도 있다. 소속이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한 무대에 올려놓고 열에서 대여섯으로, 다시 두엇으로, 하나로 압축해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후보들이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겠는가? 선거만을 의식한 무리한 단일화가 화학적 결합에 이르지 못할 경우의 부작용 또한 우리는 많이 겪어보지 않았던가. 결선투표제는 이런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능력이 있고 나름대로 지지층이 있는 후보들은 모두 1차투표를 치르면 되는 것이다.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정치공작을 펼치고 담합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최종 당선자는 당연히 50% 이상의 지지를 받게 된다. 「4자 필승론」 따위의 해묵은 담론들도 효력을 잃게 된다. 생각해보자. 6월 항쟁으로 이루어낸 「87년 체제」가 4년 중임제에 정?부통령제, 그리고 결선투표제를 채택했다면? 늦었지만 다음 정권에서는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고원정(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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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22 23:02

[금요칼럼] '롱테일 법칙'과 기초과학 - 김승환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상류층 20%가 국가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80/20'의 법칙을 찾아낸 후 소수 정예의 핵심 시장원리로서 또한 선택과 집중의 경영전략으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디지털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기에서 그동안 무시되었던 다수의 힘을 드러내는 '롱테일 (long tail) 법칙'이 새로운 대안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롱테일'은 2004년 이후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 시작한 키워드로 최근 이 개념의 창시자인 미국 인터넷 비즈니스 잡지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한국을 방문하며 국내에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롱테일 법칙'은 다수의 소액구매자의 매출이 상위 20%의 매출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역-파레토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판매량을 분석해보니, 안 팔리는 책도 모두 합치면 소수의 베스트셀러의 매출보다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른바 '롱테일 법칙'이 온라인 비즈니스의 새로운 전략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롱테일 경제학은 현재 위기에 처한 과학기술, 특히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의 전환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제한된 국가 자원 속에서 고속 경제성장을 위한 응용개발 연구와 국가 과학기술 로드맵에 따른 과도한 선택과 집중은 연구의 대형화집단화 추세와 산업 투자비중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전략 아래 오랫동안 '쏠림'이 조장된 결과 대학에서의 기초과학 분야와 창의적 소규모 개인 연구는 '정글의 법칙' 속에 고사 위기에 몰리고 있다.한 예로 올해 과학재단의 핵심기초 연구비의 경우 2천여 명의 연구자가 신청했지만 그 중 87.2%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지방의 경우에는 연구비 신청 자체를 포기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부산 D 대학의 모 중견교수의 경우 1년에 SCI 논문을 6편씩 쓰는 연구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학재단과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는 여전히 '하늘의 별따기'였다. 두뇌한국 (BK21)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도 해외에 수시로 보내면서, 막상 엄청난 투자를 통해 어렵게 배출된 고급 과학 인력은 실제 현장에서 손을 놓고 놀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의 대학 기초연구 지원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 풀뿌리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천500편의 SCI 논문을 창출해낸 것은 사뭇 눈물겨운 일이다.세계 선진 각국의 과학기술 총역량과 국력 간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SCI 논문으로 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은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브릭스(BRICs)를 넘어 G7 선진국의 추격 가시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기초과학 지원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롱테일 법칙의 적용을 통한 '풀뿌리 기초과학 생태계 살리기'를 들 수 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선택과 집중에서 더 나아가 다수 개인연구자에 대한 저변 투자를 크게 확대하여 연구역량의 총합을 획기적으로 증대하고 기초과학 생태계를 피라미드형으로 복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응용개발 대비 기초분야의 정부지원의 비율이 매우 낮다. 이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과학계와 머리를 맞대고 현장의 과학자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기초과학의 지원 패러다임 전환과 가치 극대화를 위한 국가적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 클린턴의 '창의적 자본주의'처럼 '롱테일법칙' 전략에 따른 기초과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적극적인 국가 지원은 과학자의 사기진작을 넘어 미래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 문제 만큼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떠나 정부교육계과학계언론이 모두 힘을 합쳐서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김승환(포스텍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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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15 23:02

[금요칼럼] 군인들을 위한 기도 - 이해인

어떻게 님들을 잊을 수 있습니까/어떻게 님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꽃다운 나이에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함께 스러진 슬픈 님들이어/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이 조그만 나라 위해/목숨까지 바친 고마운 님들이어/지금은 이 낯선 땅/돌 위에 새겨진 님들의 이름을/바람과 파도가 기도처럼 불러줍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정다운 별로 살아오는 님들/지지 않는 그리움이여......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사랑으로 새깁니다/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감사로 새깁니다.......이 추모시의 일부가 부산 유엔기념공원 추모명비에 새겨 져 있다기에 얼마 전 일부러 보러 갔었다. 예전에 해외에서 손님들이 오면 유엔묘지를 꼭 참배하고 싶다고 하여 안내 해 준 일이 있지만 이번에 다시 가 보니 참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고 기뻤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40895명의 이름이 나라별로 새겨진 추모명비 앞에서 한참 동안 찡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2천여기의 유해가 안장 되어 있는 묘역을 방문한 유족들이 적어 놓고 간 그리움의 메모들도 바람에 실려 오는 장미향기 속에 애틋하고 눈물겨웠다. 어떤 유족들은 병사의 유골을 가져가려고 안 좋은 마음으로 왔다가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어 그대로 두고가며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고 한다.여중시절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거룩한 예식처럼 동작동 국군묘지를 참배하게 하고 군인들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쓰도록 가르쳤던 담임선생님들의 영향으로 나는 지금도 6월이 되면 전쟁터에서 희생된 군인들,지금도 곳곳에서 우리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기로 지향을 갖는다. 어린 시절 전쟁을 직접 겪어서인가 지금도 종종 총소리에 놀라고 어둡고 퀴퀴한 냄새 나는 방공호에 숨어있거나 피난길에 쫓기는 꿈을 꾸기도 한다. 가족 친지들과 트럭을 타고 피난을 왔던 이곳 부산에서 일생을 봉헌하는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문득 신기하게 여겨질 적이 있다. 전시가 아닌 요즘은 상황이 매우 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나라를 지키며 수고하는 군인들에게 우리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새롭게 가져야 할 것이다. 이 6월만이라도 각별하게! 얼마전 강원도 춘천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 지난 2월에 입대한 조카애를 면회하러 갔는데 군부대에서 듣는 뻐꾹새 소리, 무더기로 피어 있는 패랭이꽃들이 유난히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아 백일 휴가를 나온다는 조카는 몸이 10킬로나 빠진 걸로 보아 그간의 훈련이 꽤 고되었던 모양이지만 집에 있을 때 보다 안팎으로 훨씬 성숙하고 정돈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엄마를 어머니로 호칭하고 모든 말을 다 '습니다' 체...로 바꾸어서 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음이 나에겐 새삼 놀랍고 대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학을 다녀 와 서른 다 된 나이에 현역으로 입대하니 적응 못하고 힘들어 하진 않을까 우려하던 바와는 달리 그는 한결 늠름하고 씩씩한 청년의 모습으로 멋지게 변해 있었다. 직속상관이 사실은 자기와 나이가 같지만 그래도 서로 잘 지낸다는 것, 입대 전에 듣던 것과는 달리 군 생활이 그렇게까지 힘든 것은 아니고 할만하다는 것, 예외적인 혜택을 누리기 보다는 그냥 남들하고 똑같이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떳떳하고 좋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말에 나는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며 그래도 한번 쯤은 뒤를 돌아보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 조카에게 나는 '그래. 잘 가라 권이병! 쿨한 군인답게 행동 해 주어 고맙다. 그렇게 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렴...'하며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다. '주님, 이 땅의 모든 군인들이 몸 마음 건강하게 성실하게 인내롭게 맡겨진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자신을 넘어서는 넓은 마음과 동료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나날이 새롭게 무장하는 투철한 투사이게 하소서. 그들의 가족인 우리 또한 변함없는 초록의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보고 싶고 걱정 되는 애틋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씩씩하고 용기 있고 절제있고 참을성 많은 '군인정신'으로 우리 또한 일상의 싸움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여 주소서. 아멘' /이해인(수녀시인)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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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6.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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