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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6)무주 치목마을의 삶을 엮는 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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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단원 풍속도첩(김홍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주 적상산 동남쪽 적상산성으로 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수림이 특별한 풍경을 자아내는 치목(致木)마을이 있다. 치목마을은 옛 전통 그대로 길쌈을 하며 삼베를 짜는 집이 많아 ‘삼베마을’로도 불리는 고장이다.

 ‘길쌈’은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것으로,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한 그림과 문헌 및 유물에 그 흔적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일반 부녀자들은 농사일이 끝나면 저녁 밥상을 차린 후 베틀에 앉아 새벽까지 길쌈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길쌈하던 윗세대 모습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섬유산업이 발달하면서 어렴풋한 기억과 기록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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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첩(김준근-독일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

 길쌈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당나라로 모시를 보낸 기록과 『삼국사기』에 추석의 다른 명칭인 가배의 유래와 더불어 전해진다. 신라 유리왕 9년(32년) “왕의 딸 2명으로 하여금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 음력 7월 16일부터 길쌈을 하게 하여 한 달이 된 8월 15일에 승부를 가렸는데,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을 가배(嘉俳)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팔월 대보름 추석을 한가위 혹은 가배라고 칭하는데 길쌈을 장려하며 ‘가배’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월 칠석 전설의 여주인공도 옥황상제의 딸이자 베를 짤 짜 이름마저도 직녀(織女)였다. 신라의 공주도 편을 갈라 길쌈을 한 것처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옷을 짓는 것은, 의생활을 담당한 여성들의 삶 속에 오랫동안 지속된 풍습이자 몫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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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베틀짜는 여인(상), 견우와 직녀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견우와 직녀가 함께 있는 모습과 직녀로 추정되는 여인이 베틀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왕과 왕비가 칠석날 궁에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기록으로는,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는 모시와 삼을 스스로 심어 많은 사람이 베옷을 입는다”란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공민왕 13년(1364년)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면서 무명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길쌈은 남성들의 농사일과 함께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직조 노동인 길쌈의 결과로 나온 포목은 화폐처럼 통용되어 교환가치를 가졌고 국가의 조세로도 쓰이며 가계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 시기 군역을 지는 대신 내는 군포는 1명당 2필인데,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을 제외하고 16세에서 60살까지의 남자는 군포를 내야 했다. 대가족을 꾸리던 당시 집안에 성인 남성이 5명이 있었다면 10필을 내야 했으니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군정이 문란해질 때면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강제 징수했다. 갓 태어난 새 새끼의 입 주위가 노란 것을 어린아이에 빗대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고 했고, 이미 죽은 이에게도 체납을 구실로 징수를 강행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로도 불리었다. 게다가 군포를 못 내고 도망을 간 경우가 생기면 이웃과 친족들에게 징수하기도 했으니, 가족을 입히는 것 외에도 세금을 내기 위해 했던 여성의 길쌈 노동은 무척 고단했다. 

 무슨 일이든 반복해서 몸에 푹 밴 것을 “이골 난다”라고 하는데, 길쌈의 거친 과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확한 삼이나 모시를 손질해 한 올 한 올 실로 삼기 위해서는 손톱으로 가르고 이(齒)로 째게 된다. 한 올씩 입술과 치아를 사용하여 삼는다고 하는데 이를 계속하게 되면 이에 골이 파여 생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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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신천 길쌈하는 모습 (일제강점기 유리원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단함과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베틀가를 부르고 놀이도 함께 하면서 ‘내방문화’가 전해지고 ‘길쌈 두레’와도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한, 길쌈한 삼베는 지방에 따라 경북 안동산을 ‘안동포’, 경북산을 ‘경포’, 함경도산을 ‘북포’, 전남 곡성산을 ‘돌실나이’라고 불렀다. 

  삼베 길쌈은 봄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는 재배와 거두고 삶아서 껍질을 벗겨 실을 뽑고 짜는 등 수십 번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치목마을은 집집마다 삼을 재배하고 길쌈을 이어온 마을이다. 1988년 손순임(1950년생)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공동작업을 하다 2011년 영농조합이 만들어져 전통 길쌈 방식을 잇고 있는데, 최근 ‘삼베짜기’가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되는 경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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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목마을 삼베짜기/사진제공-무주군청

 치목마을에서 오랜 세월 삼베를 짜온 김영자 어르신(1937년생)은 어린 시절부터 친정어머니가 길쌈하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레 배웠다고 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친정어머니가 지어주신 10여 벌의 옷을 혼수로 해서 이웃 마을로 시집와서 줄 곳 길쌈을 했다. 

 “젊었을 때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소. 농사지으며 애덜 키우고 길쌈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해요. 내가 만든 수의를 남편에게 입혀 보내고 내가 입고 갈 수의도 마련해 놓았어요. 길쌈이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요. 예전엔 다들 옷 짓는 게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도 무릎도 망가졌지만, 그래도 길쌈해서 살림에 보태고 애들 학비 내줬어요”라며 길쌈과 함께한 그녀의 삶을 이야기했다.

질곡의 삶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어르신의 담담함이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을 떠올리게 한다. 고단함과 보람을 한 올 한 올 엮으며 이뤄낸 그 모든 여정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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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쌈, 단원 풍속도첩(김홍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주 적상산 동남쪽 적상산성으로 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수림이 특별한 풍경을 자아내는 치목(致木)마을이 있다. 치목마을은 옛 전통 그대로 길쌈을 하며 삼베를 짜는 집이 많아 ‘삼베마을’로도 불리는 고장이다.

 ‘길쌈’은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것으로,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한 그림과 문헌 및 유물에 그 흔적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일반 부녀자들은 농사일이 끝나면 저녁 밥상을 차린 후 베틀에 앉아 새벽까지 길쌈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길쌈하던 윗세대 모습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섬유산업이 발달하면서 어렴풋한 기억과 기록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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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첩(김준근-독일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

 길쌈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당나라로 모시를 보낸 기록과 『삼국사기』에 추석의 다른 명칭인 가배의 유래와 더불어 전해진다. 신라 유리왕 9년(32년) “왕의 딸 2명으로 하여금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 음력 7월 16일부터 길쌈을 하게 하여 한 달이 된 8월 15일에 승부를 가렸는데,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을 가배(嘉俳)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팔월 대보름 추석을 한가위 혹은 가배라고 칭하는데 길쌈을 장려하며 ‘가배’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월 칠석 전설의 여주인공도 옥황상제의 딸이자 베를 짤 짜 이름마저도 직녀(織女)였다. 신라의 공주도 편을 갈라 길쌈을 한 것처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옷을 짓는 것은, 의생활을 담당한 여성들의 삶 속에 오랫동안 지속된 풍습이자 몫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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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베틀짜는 여인(상), 견우와 직녀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견우와 직녀가 함께 있는 모습과 직녀로 추정되는 여인이 베틀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왕과 왕비가 칠석날 궁에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기록으로는,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는 모시와 삼을 스스로 심어 많은 사람이 베옷을 입는다”란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공민왕 13년(1364년)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면서 무명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길쌈은 남성들의 농사일과 함께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직조 노동인 길쌈의 결과로 나온 포목은 화폐처럼 통용되어 교환가치를 가졌고 국가의 조세로도 쓰이며 가계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 시기 군역을 지는 대신 내는 군포는 1명당 2필인데,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을 제외하고 16세에서 60살까지의 남자는 군포를 내야 했다. 대가족을 꾸리던 당시 집안에 성인 남성이 5명이 있었다면 10필을 내야 했으니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군정이 문란해질 때면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강제 징수했다. 갓 태어난 새 새끼의 입 주위가 노란 것을 어린아이에 빗대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고 했고, 이미 죽은 이에게도 체납을 구실로 징수를 강행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로도 불리었다. 게다가 군포를 못 내고 도망을 간 경우가 생기면 이웃과 친족들에게 징수하기도 했으니, 가족을 입히는 것 외에도 세금을 내기 위해 했던 여성의 길쌈 노동은 무척 고단했다. 

 무슨 일이든 반복해서 몸에 푹 밴 것을 “이골 난다”라고 하는데, 길쌈의 거친 과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확한 삼이나 모시를 손질해 한 올 한 올 실로 삼기 위해서는 손톱으로 가르고 이(齒)로 째게 된다. 한 올씩 입술과 치아를 사용하여 삼는다고 하는데 이를 계속하게 되면 이에 골이 파여 생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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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신천 길쌈하는 모습 (일제강점기 유리원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단함과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베틀가를 부르고 놀이도 함께 하면서 ‘내방문화’가 전해지고 ‘길쌈 두레’와도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한, 길쌈한 삼베는 지방에 따라 경북 안동산을 ‘안동포’, 경북산을 ‘경포’, 함경도산을 ‘북포’, 전남 곡성산을 ‘돌실나이’라고 불렀다. 

  삼베 길쌈은 봄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는 재배와 거두고 삶아서 껍질을 벗겨 실을 뽑고 짜는 등 수십 번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치목마을은 집집마다 삼을 재배하고 길쌈을 이어온 마을이다. 1988년 손순임(1950년생)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공동작업을 하다 2011년 영농조합이 만들어져 전통 길쌈 방식을 잇고 있는데, 최근 ‘삼베짜기’가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되는 경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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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목마을 삼베짜기/사진제공-무주군청

 치목마을에서 오랜 세월 삼베를 짜온 김영자 어르신(1937년생)은 어린 시절부터 친정어머니가 길쌈하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레 배웠다고 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친정어머니가 지어주신 10여 벌의 옷을 혼수로 해서 이웃 마을로 시집와서 줄 곳 길쌈을 했다. 

 “젊었을 때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소. 농사지으며 애덜 키우고 길쌈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해요. 내가 만든 수의를 남편에게 입혀 보내고 내가 입고 갈 수의도 마련해 놓았어요. 길쌈이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요. 예전엔 다들 옷 짓는 게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도 무릎도 망가졌지만, 그래도 길쌈해서 살림에 보태고 애들 학비 내줬어요”라며 길쌈과 함께한 그녀의 삶을 이야기했다.

질곡의 삶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어르신의 담담함이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을 떠올리게 한다. 고단함과 보람을 한 올 한 올 엮으며 이뤄낸 그 모든 여정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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