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비가 또 비가
사뭇 쏟힌다
잣게 친 피아노의 音階
말
발
굽이
튄다
뚝 덜컥
멈춘 구름 새로
트인 하늘
내 가슴 -「소낙비」전문, 1958년
시행이 간결하고 탄력적이다. 정형 시조의 전통적 구속성에서 벗어나 연과 행의 자유로운 배치를 통하여 시조에서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 여름 거세게 내리치는 빗방울 속에서 '빠른 템포의 피아노 건반 소리'를 연상한다거나, 튕겨 오른 빗방울의 형상을 마치 '말발굽이 튄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그의 초기 시는 감각적 이미지즘을 지향하고 있다.
이우는 국화 향기 출렁이는 뜨락에
입동 철 심는 구근 숨소리도 죽이고
지붕을 넘어다보는 허탈한 은행나무
해질녘 드는 바람 갈잎만 서걱이고
서릿병아리도 으시시 세운 깃털
엊그제 웅성이던 가을 이내 자릴 뜨는구나.
-「정원소묘」전문, 1968년
늦가을 스산한 정원의 풍경이 선연(鮮姸)하다. 이우는 '국화 '와 잎을 떨군 '은행나무' 그리고 으스스 깃털 세운 '서리병아리'와 서걱이는 '갈잎' 등의 병치 효과가 늦가을 황량한 뜨락에 질감을 더한다. 시인의 주요 관심은 한국적 선비 정신과 멋 그리고 품격이다. 그러한 관심은 우리의 소리, 빛깔 그리고 고유 음식과 풍물에 이르기까지 간결한 문장과 운치 있는 문체로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민족 고유정서와 풍경 복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는 대발마다/ 새벽빛이 트여들고/ 옛 어른 / 정갈한 서안(書案)머리/ 먹 향기도 /번져온다.
두루마리 한 자락을 / 자르르 펼쳐들면/ 그냥 그대로도/ 고운 선 무늬 이룬/ 우리네 /옛 어른들의 / 마음결이 읽힌다. -「태지苔紙」에서, 1980년
태지(苔紙)는 한지의 일종으로, 이는 합죽선과 더불어 전주 특산품의 하나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 종이를 아껴 쓰시기도 했다. 이 종이를 대하면 그때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돋는다."면서, 옛 어른들의 향기를 그대로 좇고 싶은 선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늙은 감나무 쳐다보며
지어미가 이르는 말
- 야속도 하지
단 두 개 홍시라니
뒷짐 진
지아빈 하늘 바라다
- 나무 위해
뭘 했는데. - 「홍시」전문, 1998년
부부가 감나무 아래서 단 한 번 서로 주고받는 말투이지만 그 속에서 옛 어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단 두 개 홍시라니' 하며 아쉬워하는 지어미와 느긋이 뒷짐진 채 '-나무 위해 / 뭘 했는데' 하며 오히려 그것마저도 감사해하는 지아비, 이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순박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