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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의 재해석 ⑦ 벤치마킹 - 보길도 윤선도 원림

판석보 설치 일정한 수면 유지 / 부용동 안에 25채 건축물 조성 / 대부분 소실 복원작업 진행형 / 일제, 초등학교 지어 기운 막아

▲ 세연지에서 바라본 세연정. 원림에 발을 들여놓으면 세연지의 집채만한 바위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항길에 고산 윤선도(1587~1671년)의 이상향이 있다. '자연과 세상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세연정(洗然亭)을 중심으로 들어선 원림(園林)을 말한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황금기를 주도한 윤선도는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제주로 향하다 우연히 들른 보길도에 정착했다. 당시 고산의 나이가 51세였다. 고산은 자신의 정착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칭하고,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

 

이 가운데 격자봉 기슭에 살림집인 낙서재를, 낙서재 건너편 산중턱에는 동천석실이라는 휴식공간을 지었다. 이와는 별도로 부용동의 초입에 세연정을 지었다.

 

고산은 조선시대 호남을 대표하는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으로, 재산이 넉넉했다고 알려진다. 재력을 바탕으로 고산은 특히 세연정과 원림을 조성하는데 각별한 정성을 들였다. 33㎢ 크기의 보길도에서 부용동이 중심이라면, 원림은 낙원의 심층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산은 원림을 조성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듯 개울물을 막아 세연지를 조성했다. 하류 쪽에 만들어진 높이 약 1m·길이 약 11m의 수중보인 판석보가 인공섬을 만드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판석보는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돼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세연지의 물이 판석보를 거치면 장방형으로 만들어진 인공연못인 회수담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세연지와 회수담의 사이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세 칸·측면 세 칸의 정자가 세연정이다. 주변에는 춤추는 무대인 동대와 서대까지 만들었다.

 

섬의 깊숙한 곳에 못을 파고 돌을 옮겨 신선이 살 것 같은 도원경을 조성하기 위해 보길도 주민은 물론 인근 노화도의 주민들이 동원됐고, 공사기간만 5년에 달했다고 한다.

 

고산은 원림으로 친지들을 불러 자주 연회를 열었다. 풍악이 울려 퍼지면 동대와 서대에선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고산은 또 세연지에 배를 띄웠고, 낚시대를 드리웠다. 판석보를 지나 150m 가량 오르면 옥소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악기를 켜면 소리가 세연정을 감쌌다고 한다.

 

원림에 발을 들여놓으면 '조선최고의 별서조원(別墅造園)'이라는 평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연지의 집채만한 바위들이 방문객을 맞고, 무희들이 춤췄던 동대와 서대의 주변에서는 동백나무가 하늘거린다.

▲ 세연정에서 바라본 보길초등학교.

세연정의 난간에 기대면 주변의 풍광이 시야에 빼곡하게 들어오고 눈과 귀를 간지럽힌다.

 

문화재청 자문위원으로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복원에 관여한 우석대 신상섭 교수는 "골육조형(骨肉造形·암석과 산맥을 조화롭게 하는 것)과 음양오행에 따라 구조물을 배치하는 등 고산 특유의 절개와 철학적 안목이 돋보인다"면서 "산간에 은둔해 자기구제를 통한 초속적인 자유를 얻고자 했던 고산은 원림을 통해 언젠가 오실 임을 맞이하기 위한 전략적 경관계획과 은자로서의 조경술을 구체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제가 원림의 기운을 막기 위해 지었다는 보길초등이 정원의 전면을 가린 탓에 답답함이 두드러진다. 차분하고 청량해야할 원림에 초등생들의 소음도 그대로 유입된다.

 

고산은 부용동에 들어온 이후에도 관직복귀, 유배, 낙향을 거듭하다 85세를 일기로 낙서재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부용동에서 7차례에 걸쳐 13년간 머물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됐다. 부용동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혹사당한 조비들이 불만을 품고 불을 질렀다는 구전이 전해내려온다. 그러다가 지난 1993년 세연정이 복원됐고, 이후 동천석실와 낙서재 등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주변의 복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원림은 고산의 왕국이자, 불우한 천재의 낙지(樂地)다. 그리고 갖가지 부침을 겪은 원림은 '시름도, 욕망도 내려놓으라'고 담담하게 속삭이는 듯하다.

 

● 한국 전통정원 종류

 

- 화려한 궁궐정원, 세속 떠난 선비의 별서정원

 

전통정원은 크게 궁궐정원과 민간정원으로 분류한다. 또 조성주체·동기·성격에 따라 궁궐정원, 별서정원, 향원(鄕園), 산수정원 등으로도 나눈다.

 

△궁궐정원=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을 들수 있다. 일반인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왕족만을 위한 정원인 만큼 크고 화려하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대신 지나친 기교와 인위를 삼가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천원지방·天圓地方)'는 음양오행사상을 조영의 원리로 삼으며, 왕의 사색과 명상을 돕는 치유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경주의 안압지와 포석정도 신라시대 대표적인 별궁의 정원이다.

 

△별서정원=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가 낙향해서 지은 원림을 말한다.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세속에서 비껴나길 원했던 사림들이 안빈낙도와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기 위해 조성했다. 주로 전원이나 산속 깊은 곳에 집이나 정자를 짓고 돌 하나에도 인문학적 가치를 담는데 주력했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을 비롯해 전남 담양의 소쇄원, 경북 영양의 서석지 등이 대표적이다.

 

△향원= 벼슬이나 낙향 등과 상관없이 특정 가문이나 개인이 고향마을에 조성한 정원이다. 남원 광한루원, 대구 달성의 하엽정, 경북 성주의 한수헌 정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산수정원= 한국정원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산수간에 위치한 정원이다. 산수정원에는 잠시 머무는 장소인 정자가 서있다. 사방이 트여 있는 정자에서는 주변의 자연경관을 막힘 없이 감상할 수 있다. 경북 영덕의 침수정과 경북 예천의 초간정 등이 자연을 벗삼은 산수정원으로 불린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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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epicure@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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