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오층석탑 세워 백제 계승 대내외 표방
익산지역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재기를 꿈꾸던 곳이며, 백제 무왕 역시 익산을 발판으로 삼고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도 익산지역에는 재기와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유민이 있었고, 의자왕(재위 641~660)의 오래된 원한을 씻고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견훤(867~936)이 있었다.
892년 무주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였던 견훤(867~936)은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열광하는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년이 되었는데, … 신라의 김유신(595~673)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였으니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물론 이 연설은 이 일대의 민심을 이용하기 위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후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백제, 더 나아가 마한과 연결시킨 점이다. 견훤은 후백제 건국의 정신적·역사적 토대를 익산에 두었던 것이다.
익산지역은 한때 준왕이 마한을 건국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건마국이 마한의 맹주로 한때를 호령하였던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 들어섰던 곳이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그들의 땅을 고구려 유민에게 내주기도 하였으며, 보덕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익산지역의 많은 백제 유민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 익산 사람들의 그러한 박탈감은 마한과 백제를 잇겠다는 견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을 것이다.
후백제 개국의 정신적 토대를 익산으로 삼았던 견훤은 마한과 백제 계승의식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익산일대에 대한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미륵사 개탑開塔’이다.
미륵사 개탑에 대한 이야기는 <갈양사 혜거국사비> 에 나온다. 혜거국사(899~974)는 고려 광종 19년에 국사가 된 승려인데, 후삼국시대에는 주로 후백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혜거는 917년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922년에는 미륵사 개탑을 계기로 열린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갈양사>
선불장이 열릴 정도였다면, 미륵사 개탑이 단순히 석탑의 보수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륵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수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백제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보살상의 손과 유사한 미륵사지 출토 청동보살 손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 혹은 고려로 단정할 수 없는 기와나 금속공예품 등 역시 922년 미륵사 개탑 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미륵사에 대한 정비뿐만 아니라, 백제 궁성터에 대한 정비도 실시하였다. 옛 백제 궁성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금동불입상을 봉안하였다. 이처럼 백제의 옛 궁성에 다시 세운 왕궁리 오층석탑은 후백제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는 것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한 기념비적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