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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⑨ 익산이 품고 낳은 사람들

조선시대 익산지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또 모여들었으며, 죽어서 묻혔다.관계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성종 17년(1486)에 태어나 명종 17년(1562)에 죽은 소세양(1486~1562)을 들 수 있다. 소세양은 관직이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관직을 사직한 뒤에는 익산으로 내려와 말년을 보냈다. 소세양이 익산에 터를 잡은 이유는 외손봉사를 위해 외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소세양은 문장은 물론이고 율시와 송설체에 뛰어났으며 그의 저서로는 <양곡집>(陽谷)이 있다. 왕궁면 용화리에는 소세양 일가의 묘소가 있는데, 소세양의 아버지인 소자파(1451~1524), 소세양 본인의 신도비 등과 함께 중종 37년(1542)에 소세양이 직접 지은 어머니 왕씨의 묘비가 있다.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유계(1607~1664)를 들 수 있다. 그는 죽어서 익산에 묻힌 경우이다. 유계는 1633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여 청과 강화한 후 유배되기도 하였다. 후에 복직되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그는 특히 학문으로 더 유명세를 떨쳤다. 그가 1639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은거하면서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는 훗날 노론과 소론 사이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1659년에는 효종이 승하한 후 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기년설을 주장한 노론 편에 서서 남인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노론의 역사관을 반영하여 고려사를 재구성한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유계는 이이(李珥, 1536~1584)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노론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여러 편 저술한 노론의 전위적인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죽은 뒤 익산에 묻혔는데, 그의 신도비문과 묘표는 각각 현종 9년(1668)과 13년(1672)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이 지었다.충의를 대표할만한 인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보(1544~1592), 소행진 등을 들 수 있다. 연안이씨인 이보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400여명의 익산 출신 의병과 함께 이치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로, 익산 은천사의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다.한편 조선 전기 문신이자 좌리공신에 오른 이숭원(1428~1491)을 파조로 하는 연안이씨 충간공파 문중에서는 다른 곳에 있던 이숭원의 위패, 영정, 교지, 공신회맹록 등을 선조대(1567~1608)에 익산으로 옮겨오기도 하였다. 후에 후손들은 어서각, 현동사(영당) 등을 세우고 이것들을 봉안하였다.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함열 사람 호산 서홍순(1798~?)이다. 서홍순은 전주 풍남문의 호남제일성을 쓴 서예가이자, 글씨로 일가를 이룬 이삼만(1770~1847)의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홍순은 초서를 잘 썼으며, 가늘게 쓴 것은 바탕의 무늬와 같아 글자가 없는 듯 했다고 한다. 이삼만이 서법의 전수를 위해 <화동서법>을 간행하였듯이 서홍순 역시 함열에서 목판으로 찍은 <호산필첩>을 간행하기도 하였다.종교계에서는 일제강점기 익산에 터를 잡은 뒤 우리나라 4대 종교로 발돋움한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을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원불교는 박중빈이 1916년 고향에서 얻은 깨달음에 연원을 둔다. 그러나 현재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24년 익산에 불법연구회를 조직한 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박중빈과 제자들은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낮에는 엿장수, 밤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원불교의 터전을 닦았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4.01.08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⑦ 후백제 개국의 터전, 익산

익산지역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재기를 꿈꾸던 곳이며, 백제 무왕 역시 익산을 발판으로 삼고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도 익산지역에는 재기와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유민이 있었고, 의자왕(재위 641~660)의 오래된 원한을 씻고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견훤(867~936)이 있었다.892년 무주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였던 견훤(867~936)은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열광하는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년이 되었는데, 신라의 김유신(595~673)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였으니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물론 이 연설은 이 일대의 민심을 이용하기 위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후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백제, 더 나아가 마한과 연결시킨 점이다. 견훤은 후백제 건국의 정신적역사적 토대를 익산에 두었던 것이다.익산지역은 한때 준왕이 마한을 건국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건마국이 마한의 맹주로 한때를 호령하였던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 들어섰던 곳이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그들의 땅을 고구려 유민에게 내주기도 하였으며, 보덕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익산지역의 많은 백제 유민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 익산 사람들의 그러한 박탈감은 마한과 백제를 잇겠다는 견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을 것이다.후백제 개국의 정신적 토대를 익산으로 삼았던 견훤은 마한과 백제 계승의식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익산일대에 대한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미륵사 개탑開塔이다.미륵사 개탑에 대한 이야기는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나온다. 혜거국사(899~974)는 고려 광종 19년에 국사가 된 승려인데, 후삼국시대에는 주로 후백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혜거는 917년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922년에는 미륵사 개탑을 계기로 열린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기도 하였다.선불장이 열릴 정도였다면, 미륵사 개탑이 단순히 석탑의 보수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륵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수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백제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보살상의 손과 유사한 미륵사지 출토 청동보살 손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 혹은 고려로 단정할 수 없는 기와나 금속공예품 등 역시 922년 미륵사 개탑 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미륵사에 대한 정비뿐만 아니라, 백제 궁성터에 대한 정비도 실시하였다. 옛 백제 궁성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금동불입상을 봉안하였다. 이처럼 백제의 옛 궁성에 다시 세운 왕궁리 오층석탑은 후백제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는 것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한 기념비적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2.25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⑥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 VS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조사 현장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639년 백제의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탑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진 사리봉영기와 사리를 봉안한 사리호 외에도 다양한 공양품들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이 사리갖춤과 공양품의 발견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사리갖춤의 조성시기가 삼국시대 백제라는 견해들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정말로 타당한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봉안되기 62년 전인 577년에 봉안된 부여 왕흥사지 사리갖춤과 43년 후인 682년에 봉안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을 함께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왕흥사지 출토 사리갖춤이 금제사리내호-은제사리외호-동제사리외함 순으로 중첩시킨 것과 달리, 왕궁리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 사리갖춤은 유리사리병-금제사리내함(호)-금동사리외함(호)의 순으로 중첩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금동전각형사리기-금동외함으로 구성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과도 다른 것이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사리내외호는 비슷한 형태인데, 어깨 부분이 넓고 목이 길며 주둥이가 넓은 병 형태이다. 이러한 미륵사지 석탑 사리내외호의 형태는 위덕왕 재위 때인 577년에 봉안된 왕흥사지 사리내외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내함은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외함과 같은 상자형이다.사리기 표면을 장식한 무늬를 살펴보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내외호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내함에는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결합된 것과 함께 구슬무늬가 공통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 금동외호 아랫부분에 연속된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를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장식 무늬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에는 별다른 무늬가 없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기에는 연꽃무늬나 구슬무늬가 없이 전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이처럼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구성 방법, 무늬 등에서는 동일하지만 형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6세기 말의 전통이 강한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7세기의 새로운 경향을 살펴볼 수 있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보다는 늦은 의자왕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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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8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⑤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대(600~641년)에 선화공주의 권유로 조성한 사찰이라고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7세기 전반, 즉 백제 무왕대 이 사찰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발굴에서는 서원, 중원, 동원으로 이루어진 사지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불당, 탑, 회랑이 3개소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언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미륵사 창건에 참여한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만 부각되어 종종 미륵사는 백제 때에만 법등을 밝힌 사찰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과 미륵사터에서 나온 유물들은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도 법등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왔음을 이야기 해준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창건했던 당시보다 미륵사가 확장되었는데, 남문과 당간지주, 남쪽의 연못이 이때에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 금마군 미륵사가 벼락을 맞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는 이 직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일신라시대 미륵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향로를 꼽을 수 있다. 금동향로는 2000년 10월 23일 중원의 뒤편 회랑지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반원형으로 높게 솟은 뚜껑과 납작한 대야 형태의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몸체는 동물 다리 형태로 된 4개의 다리와 결합되어 있어, 흔히 수각향로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각향로인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다소 번잡하고 섬약했던 중국 당나라 수각향로와 달리 힘찬 동세와 단아함이 돋보인다.백제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었던 후백제 역시 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미륵사를 금산사와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이는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922년 미륵사 개탑을 기념하여 선불장(選佛場)을 개최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불장을 개최한 것으로 보아 미륵사 개탑이 대대적인 중창불사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백제가 통일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후백제의 유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미륵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았다. 특히 중국 송의 도자기는 물론 고려청자, 차도구인 다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차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여 88개의 사찰만 남길 때에도 미륵사는 익주(益州)의 자복사(資福寺)로써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천년 가까이 번성했던 미륵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륵사에서 만력15년이 새겨진 수키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인 1587년까지만 하더라도 지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영정조대 문신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에 미륵산 서쪽 기슭 옛 미륵사의 유구가 있다. 7층 석탑이 있는데 높고 크며 동방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100년 전 벼락을 맞아 반이 허물어졌다.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려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8세기에는 이미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는 임진년과 정유년 왜란 때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폐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2.11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④ 백제의 궁성, 왕궁리 유적

백제의 궁성유적인 왕궁리유적과 관련하여 1965~1966년 5층석탑에 대한 해체조사가 있은 이래 1976~1977년 궁성 일부와 금당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1989년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유적은 동서로 뻗은 네 개의 석축이 공간을 구획하며, 그 주변은 궁장宮墻(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궁성의 크기는 대체로 남북 490m, 동서 240m 내외이다. 내부에서는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 서북쪽 일대의 공방 관련 건물지, 화장실 등 33기의 다양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궁성의 북쪽은 정원과 후원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무왕 사후 본격적으로 사찰 관련 건물이 들어섰는데, 5층석탑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석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관궁사(官宮寺), 대관궁사, 왕궁사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왕궁리유적에서는 수막새, 인장와(印章瓦) 등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기와가 확인되었다.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는데, 수부는 국왕이 거처하고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왕궁리 궁성의 후원은 네 번째 석축 동쪽 끝부분에 조성되었는데, 이곳에는 연못과 부속 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연못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조시설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배수시설과 연못을 통과한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그리고 왕궁리 궁성 서북편에서는 3곳의 대형 화장실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시대 유적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길이가 10.8m, 폭이 1.7~1.8m, 깊이가 3.4m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보인다. 화장실의 내부에는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으며, 변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지하수로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벽면에 점토를 덧발랐다. 화장실과 석축 배수로는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화장실 내부에 일정량의 오수가 차면 수로로 배출되는 구조이다.왕궁리유적에서는 궁성에서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제작하기 위한 공방터도 확인되었다. 공방터에서는 연꽃모양의 구슬과 영락 등의 금제품, 동, 유리 조각 및 찌꺼기 이 외에도 이를 만들 때 사용하던 도가니, 숫돌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무왕 사후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은 궁성 남측 대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사찰은 남북 중심축선상에 목탑-금당-강당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이 사찰터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부터 통일신라시대 후기 유물까지 확인되는데, 사찰과 인접한 다른 건물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한편 이 사찰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된 사리갖춤 역시 석탑의 조성시기만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석탑의 경우, 통일신라의 가구식 단층기단과 백제 석탑의 평평하고 얇은 옥개석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 후백제 견훤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런데 이 석탑의 1층 옥개석 중앙 적심에 뚫린 2개의 네모난 사리공과 기단 내부 방형 심초석에 品품자로 뚫린 3개의 방형 사리공에서 다양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1층 옥개석의 사리갖춤은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를 함께 봉안한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리제사리병과 금제사리내함은 기법과 무늬가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유사하여 백제 때 제작된 것을 후백제 견훤이 재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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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4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③ 백제의 또 다른 왕도, 익산

익산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중요한 지방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왕궁리 일대는 위덕왕대(554~598) 말기부터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명실상부하게 왕도로서 익산이 자리매김한 것은 무왕대(600~641)이다.여러 설화에서는 무왕이 익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마를 캐던 서동(무왕)이 다섯 개의 금을 얻은 곳이 오금사(五金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설화와 역사의 기록은 모후의 출생지가 익산이었거나 즉위 이전 무왕의 근거지가 익산이었음을 의미한다.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였다. 즉 익산은 백제의 새로운 왕도, 또는 별도였다는 것이다.익산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위덕왕대 백제는 사비도성 바로 앞에 있는 알야산성이 신라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었다. 신라와 본격적인 대결을 준비하던 무왕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군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에 부합된 곳이 바로 익산이었다. 익산지역은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만경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 진격하기에도 용이하였다. 아울러 익산은 너른 평야가 있어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였다는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그 첫 번째 증거는 궁성(宮城)의 존재다. 남북 490m, 동서 240m의 규모를 자랑하는 왕궁리유적은 궁성에 부합하는 유적이다. 아울러 왕궁리유적 북쪽에는 오금산성과 저토성이 있는데, 이 두 산성은 궁성의 방어와 유사시 대피 용도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궁리 궁성은 궁장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는 부여 왕경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기와를 쌓아 기단을 조성한 건물과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 등을 지었다. 이와 더불어 공방, 대형화장실, 정원과 후원 등의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두 번째 증거는 왕실 사찰의 존재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찰은 백제의 새로운 궁성에서 불과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제석사이다. 제석사는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를 보인다. 또한 동서 회랑의 길이가 100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140m로, 백제 사찰가운데에서는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639년 벼락으로 7층 목탑, 불당, 회랑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왕 재위 당시 제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세 번째 증거는 새로운 통치이념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법왕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에서는계율종과 함께 현세에서 계율을 잘 지켜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미륵상생신앙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교신앙은 개인적, 귀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왕이 연못 속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보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무왕은 미륵하생신앙을 익산시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미륵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서원, 중원, 동원 등 세 개의 사원을 병립시킨 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000만년 후에 나타나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의 서원을 사찰의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륵하생경〉에는 성불한 미륵불을 영접한 전륜성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통일제국이라고 한다.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던 무왕은 그의 원대한 포부인 삼한일통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9층탑의 조성을 미루어 볼 때, 미륵사 창건을 통해 불교의 패러다임을 개인불교와 귀족불교에서 호국불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왕릉이다.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두 기의 대형 고분은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있으며, 흔히 쌍릉이라 부른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덤의 구조와 출토품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이 고분이 무왕릉과 왕비릉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능산리의 왕릉과 비교해봐도 대형인 점과 부여지역의 왕릉에서 확인된 바 없는 옥장신구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왕릉급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 인사 가운데 익산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무왕과 그의 왕비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처럼 익산지역은 무왕대에 왕도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궁성의 건설, 왕실 사찰의 조영, 그리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기념물 즉 미륵사의 창건을 볼 때, 무왕의 익산 개발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즉 금마와 왕궁 일대는 백제의 계획도시이자 또 다른 왕도였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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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3.11.27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② 백제의 지방 거점, 익산

익산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4세기 이후 이 지역에는 마한의 전통을 고수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에서 5세기의 굽다리토기(高杯)가 다량으로 발견된 간촌리 분구묘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다. 묵동유적 역시 백제계 분묘가 익산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영되는 5세기 중엽 이후에 해당하지만, 마한 토착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묵동유적의 분묘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지만, 짧은목항아리, 곧은목항아리, 세발그릇 등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이처럼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백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도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이 바로 웅포리 고분과 입점리 고분이다.웅포리 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이 혼재되어 있다.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서는 곧은목항아리, 굽다리토기, 뚜껑접시, 쇠도끼, 쇠낫, 칼 등이 공통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앞서 두 유형의 무덤과는 달리 쇠도끼 등의 철기가 보이지 않는다.쇠도끼, 쇠낫, 칼이 세트를 이뤄 부장된 널무덤이 마한 토착세력의 전통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백제의 문화를 수용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백제 중앙 귀족의 묘제라 할 수 있는 굴식돌방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완전히 백제의 귀족체계에 편입된 이들로 여겨진다.입점리 고분은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널무덤 등 21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백제의 고분은 19기인데, 86-1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에서는 토기, 꺽쇠, 쇠못 등 일부만 남아 있었을 뿐 이미 파괴되거나 도굴된 상태였다.온전하게 남아있던 86-1호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귀걸이, 재갈등자행엽 등의 마구류와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1호분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한성도읍기 말기인 5세기 중엽, 웅진도읍기 초기인 5세기 후반,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 또는 이보다 늦은 5세기 말~6세기 초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궁륭형의 천장 형태와 마구 등으로 볼 때 웅진시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4/4분기일 가능성이 높다.한편 금동관을 착장한 입점리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의 작호제(爵號制)에 따라 왕 또는 후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양서〉(梁書) 백제전에 언급되어 있는 22담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지역에서 왕 또는 후라고 불리며 백제 중앙의 고위 귀족에 편입될 수 있었던 집단은 한때 마한연맹체의 맹주를 자임하였던 건마국의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그렇다면, 웅진도읍기 금강 하구를 중심으로 백제 중앙과 관련이 깊은 무덤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은 웅진에서 서해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강은 양날의 검처럼 전란시에는 적군의 이동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금강유역에 대한 방비는 백제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웅포리와 입점리 지역의 옛 마한세력에 대한 회유를 통해 친백제 세력으로 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웅포리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이고,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청자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20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① 마한의 중심, 익산

익산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다. '익산역사유적지구'는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4대 고도(古都)보존지구로 지정됐으며,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위한 각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익산시전북일보KBS전주방송총국국립문화재연구소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익산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전북의 역사문물전, 익산'기획전을 열고 있다(2014년 2월19일까지). 본보는 익산의 역사유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화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연재 기획물을 마련했다.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집필로 10차례에 걸쳐 진행될 이 기획은 익산의 역사유물의 가치를 다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유물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삼국지〉 위서 동이전과〈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 따르면,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지(韓地)지에 와서 한왕(韓王)을 자청하였다. 고조선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은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그렇다면 '고조선 왕의 남천'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던 익산지역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왕궁면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前漢鏡)이다. 평장리유적에서는 전한경과 함께 한국식 동검 2점, 청동창과 청동꺽창 각 1점 등이 확인되었다. 초엽문과 반리문이 새겨진 전한경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조선 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194년~180년 사이와 일치한다.이와 더불어 결정적 증거로 철기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조선 준왕의 남천 직후와 맞물려 있다.익산시 춘포면 신동리의 널무덤에서 덧띠토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도끼, 새기개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동리 널무덤의 형식은 청동기시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던 무덤 형식과도 다르며, 삼한시대 유행했던 분구묘와도 연결되지 않아 외래 집단이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그렇다면, 익산에 정착한 고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한서〉 한전(韓傳)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외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하여 토착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산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乾馬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익산지역 마한인의 생활 흔적은 장신리유적과 송학동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07년에 발굴된 장신리유적은 해발 9~12m의 완만한 구릉의 사면에 조성된 마을유적으로, 총 27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토기와 함께 불에 탄 쌀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식생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송학동유적에서는 다른 유적에 비해 다양한 생산도구가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생산기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송학동유적에서 나온 구슬 거푸집은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푸집은 열에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다른 생산 도구인 받침모루는 토기 벽을 두드리는 도구로, 토기 벽의 밀도를 높여 얇으면서도 강도가 높은 토기를 만들수 있었으며, 받침모루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토기 표면에 두드림무늬가 생기는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었다.익산지역의 마한인들은 고조선 세력과는 달리 무덤 주위에 고랑을 판 분구묘를 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등동 분구묘와 율촌리 분구묘인데, 낮은 분구와 주구를 가진 저분구묘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간촌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곡령신으로 마한인들이 숭배하던 새를 형상화한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건마국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 세력을 대체하여 마한연맹의 맹주를 자처하였으나, 점차 그 지위를 목지국에 내줘야만 했다. 또한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체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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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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