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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남농영농조합법인 김영숙 대표 "친환경 농업시장 주목…2차 가공으로 부가가치 높여"

서울 쌀 직판·무농약 딸기 사업 등 우여곡절 / 급식 시장 진출…농산물 인터넷 쇼핑몰도

▲ 남원 덕과면 사율리에서 만난 남농영농조합법인 김영숙 대표.

남농영농조합법인(대표 김영숙, 이하 남농)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어려운 농촌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고향 농촌으로 달려가 설립한 영농조합법인이다.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에 자리잡은 남농은 지난 20여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친환경농업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집중, 연매출 100억 원에 육박하는 남원 대표 영농조합으로 성장했다.

 

남농은 이제 생산과 가공, 유통, 서비스를 아우르는 6차 산업의 큰 틀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남농이 추구해 온 생산자 농민들의 1차 울타리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지난 23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남농 사무실에서 김영숙 대표이사를 인터뷰, 농업의 6차산업화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았다.

 

-남농은 창립 22년된 농민 기업인데, 주로 어떤 사업을 합니까.

 

“초창기에는 서울, 성남 등 수도권에 사는 형, 동생 등을 대상으로 고향 쌀 판매 사업을 했고, 아이쿱 생협 등과 손잡고 우리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사업을 주로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친환경농업에 초점을 맞춰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은 대강면에 있고, 원예 청과는 이곳 덕과 사업장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0억 여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단기적으로는 매출 100억 원을 넘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합원은 약 300명 정도 됩니다. 남원 지역 생산 조합원들이 20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군산, 익산 등 타지역 조합원들입니다.”

 

-남농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가 상당히 나온 상황에서 농민회 조직을 통해 어려운 농촌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농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농촌 현장에 들어갔는데요, 농산물 판매사업 과정에서 ‘남농영농조합법인’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남원농민회가 1989년 1월에 창립됐고, 남농은 1992년에 출범했습니다.”

 

-남원농민회의 경제사업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남원농민회의 목표는 살맛나는 농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부터 ‘우리가 어떻게 경제사업을 할까’ 하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했죠. 그 결과, 현재 우리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도시에 팔기로 했습니다. 꿀을 팔았고, 쌀도 팔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통일벼 수매가 중단, 농민들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 때 남원농민회 회원 16명이 화물차를 구입해 쌀을 서울에 직접 판매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마침 1994년 영농조합법인 특별법이 만들어지자 ‘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출범시킨 겁니다. 꿀을 팔면서 경제 마인드를 키웠고, 서울에 쌀을 직판하면서 쌀 출하작목반을 만드는 등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남농으로 법인 전환한 후 사업이 잘 됐습니까.

 

“남농은 전국에서 3∼4번째 출범한 영농조합법인이데요, 성남과 서울에 쌀 판매점을 잇따라 냈고, 1994년에는 유통센터, 1995년에는 도정공장을 지었습니다. 대도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쌀 판매를 적극적으로 벌인 결과, 1995∼1996년에는 쌀 사업이 엄청 번창을 했고, 성남 직판장이 3개로 늘었습니다. 7∼8㎏ 소포장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등 쌀 판매를 선도적으로 치고 나갔죠.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쌀 사업만 했습니까.

 

“내부적으로는 쌀만 잘 판매한다고 농촌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고민이 있었고, 복합영농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1994년도에 덕과·사매·보절지역 농민들과 함께 채소 시설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작 들녘에 시설하우스 사업을 끌어들인 것이죠. 채소가 생산되면 곧바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채소 유통센터와 저온저장창고도 지었습니다. 질 좋은 채소를 생산하기 위해 퇴비장도 지었죠. 남농이 사업체로 진화하는 초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초기부터 준비를 잘한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그랬지요. 그러나 느닷없이 쌀 판매 현장에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1995년 무렵, 소비자 요구가 양에서 질로 변했는데, 남원지역 쌀을 수도권에 팔고 있던 남농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소비자층에서 밥맛이 없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죠. ‘이런 쌀을 어떻게 먹어?’ 하는 반응이 나오면서 남농의 서울 쌀 사업이 망했어요. 다행히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는 채소 사업 쪽에서 진행한 무농약 친환경 딸기 브랜드 ‘새벽딸기’가 큰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 무농약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컸고, 새벽딸기는 현대백화점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연히 새벽딸기 작목반이 만들어졌고요.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무렵에 흑자 내던 사업들이 적자를 내면서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사업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쌀 사업에 큰 변화를 꾀해야 했겠군요.

 

“서울에서 쌀 사업을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남원과 임실, 순창, 무주, 장수, 진안, 곡성, 구례까지 지역의 농협과 일반 매장에 남농의 쌀을 팔았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죠.”

 

-미곡종합처리장(RPC) 사업도 이때 구상됐나요.

 

“남농의 당시 경영진은 많은 것을 깨달았죠. 쌀은 쌀대로, 원예 청과는 원예 청과대로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고민의 결과물이 RPC 사업과 친환경쌀 전략입니다. 당시 쌀 시장은 큰 변화가 있었어요. 도정공장, 도매점들이 미곡종합처리장과 대형마트에 밀려 사라져갔고, 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쌀 시장 대부분을 가져갔습니다. 그 틈에서 우리의 위치가 위험했고, 남농은 RPC에서 친환경쌀만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덕과에서 하던 사업을 분리, RPC를 대강면에 짓고 전문 경영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2006년부터 남원지역에 친환경쌀 작목반을 만들고, 전북지역 유통망을 확대했습니다. 아이쿱 생협에도 2010년 결별할 때까지 공급했죠.”

 

-남원지역 미질에 대한 시비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당시 우리는 그냥 ‘우리쌀’이면 다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원, 특히 덕과면 일대의 미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먼저 작목반을 구성하고, 품종을 다수확이 아닌 고품질 쌀로 단일화했습니다. 친환경 농법, 즉 소식 재배와 땅심 높이기 등 땅으로 되돌려주는 농업을 하도록 유도하고, 논에 볏짚을 깔았죠. 결국 미질이 크게 좋아졌는데, 그 관리 비용이 여전히 만만찮아요.”

 

-새벽딸기로 시작된 청과는 어땠습니까.

 

“청과도 어려웠습니다. 청과 사업을 위해 서울에 유기농 전문 매장 금수강산을 만들었고, 나중에는 남농 지분을 51%로 한 ‘남농CS’라는 유통회사로 발전시켰어요. 그런데 당시 시장은 친환경 청과만 취급해 회사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남농CS에 납품한 조합원들 외상이 쌓여갔고, 원성이 높아갔죠. 가만 둘 수 없었어요. 제가 2004년 대표로 취임한 후 담판을 짓고 결별했어요. 수년에 걸쳐 외상값은 모두 받아냈습니다. 결국 청과부문의 서울 사업도 중단한 것입니다. 남농은 1998년부터 아이쿱 생협과도 사업을 같이 했는데, 딸기 작목반 등 우리지역 개별 작목반들은 생협 쪽에 물건을 판매하면서 살아 남았습니다. 남농은 당시 걸음마 단계인 아이쿱이 ‘맨 땅에 헤딩’할 때 외상으로 물건주고 키워주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이쿱이 산지를 가져갔어요. 우리를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한 것이지요. 그런 속에서 청과사업은 꾸준히 해 왔습니다. 전국적으로 일반시장에서는 보금자리, 생협시장에서는 청암농장의 딸기쨈이 유명했는데, 이들에게 딸기를 판매했어요. 초기부터 그런 사업을 계속 했고, 그래서 저희는 청과 정품부터 비품까지 판매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어요.”

 

-결국 초기부터 10년 넘게 진행한 사업들이 좌초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

 

“농민이 1차 농산물을 잘 생산하게 해서 유통시키는 것을 남농의 역할이라고 규정짓고 지난 20년을 달려왔습니다. 돌이켜보면 1차 농산물은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부가가치도 낮습니다. 동지라고 믿고 함께 해 온 아이쿱 생협 속셈도 결국 산지를 모두 계열화하고 싶은 것이었어요. 우리는 농부가 살 수 있는 조직을 추구하는데, 그들은 우리와 농부들을 떼어놓으려고 한 것이죠. 결국 2010년에 아이쿱과 결별하고, 거래를 단절했습니다.”

 

-당시 아이쿱과의 거래가 적지 않았을텐데, 대안이 있었습니까.

 

“다행히 우리가 계속 추구해 온 친환경농업 시장이 커지고 있었고, 친환경농산물을 학교 급식시장에 직접 공급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2006년부터 전북지역 일부 학교에서 친환경쌀을 썼는데, 너무 소량이어서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학교 쪽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아이쿱 생협과 거래를 중단한 후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노력한 결과, 아이쿱 매출을 웃도는 학교급식을 확보했습니다. 남농은 현재 서울 11개 구청 65개학교, 부산 연제구 21개교 등에 납품하고, 전북지역에서는 남원과 임실지역 학교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농산물 가공사업 진출은?

 

“농산물 사업은 직접 생산자들을 만날 수 있는 면을 넓히고, 상호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춰 부가가치가 높은 진화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첫째는 1차 생산품을 가공해 생산하는 사업, 둘째는 복합영농입니다. 쌀 농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청과 등과 결합할 수 있는 복합영농, 친환경영농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자, 양파 등 이모작을 시도하고, 청과 산지 구축을 계속 주문하고, 가공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마침 2012년말부터 전북 학교급식에 친환경 원예농산물이 공급되도록 결정됐습니다. 큰 힘이 됐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청과 산지를 만들고, 가공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청과는 반드시 가공사업과 함께 해야 합니다.

 

-두레아띠 등을 통합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요.

 

“그렇습니다. 2012년 ‘두레아띠’, 2013년 ‘꿈엔들 잊힐리야’를 통합했는데요, 모두 농산물 가공사업장들입니다. 남농이 1차 생산물을 2차 가공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업, 즉 초창기부터 그렸던 그림이 이제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는 셈입니다. 남농은 인터넷 상에서 친환경먹거리 전문 쇼핑몰 유기엔(www.62n.c o.kr)을 운영하며 유기농 미곡과 친환경 청과, 가공식품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초청행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소비자 초청행사를 계속 이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서울과 부산 급식학교 학부모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봄과 가을로 나눠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행사는 봄에 5회, 가을에 8회 합니다. 또 학생 학부모가 지역을 찾아오는 행사는 봄과 가을에 각각 3회씩 진행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6차산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지요.

 

“소비자들이 덕과에 내려오면 지역의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농사체험이 1번이예요. 조합원들이 생산하는 논에 가서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베기를 주로 하는데, 이외에 봄에는 감자 캐기, 가을에는 고구마 캐기, 미꾸라지 잡기도 하지요. 마침 덕과면 옆에 사매면 혼불 마을과 서도역이 있는데, 딱 좋은 관광문화코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도역 레일바이크를 타고, 혼불 문학관도 들러 봅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쌀로 떡메치기를 하며 떡도 만들죠. 가을에는 탈곡 등 벼수확 체험을 하고, 짚을 꼬아서 재밌는 놀이도 해 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제품들을 맛보게 하면, 그들이 사가고, 모두 함께 식사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모두가 황홀해 합니다.”

 

-남원시에서도 많은 지원 협조를 할 텐데, 만족하십니까.

 

“남농의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선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친환경농업을 남원 전역에서 하다보면 관리가 너무 힘들어요. 행정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행정이 지원하면 농가 소득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친환경농업과 관련, 김 대표께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지역 사매 덕과 보절 3개 면을 친환경 유기농업 특화지역으로 전면화 하는 것을 우리가 해보려고 합니다. 봄부터 경작자 모임을 계속 추진하고 있어요.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자리를 굳힌 만큼 대단위 유기농단지로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리산 온 사람들이 여기에 들러 하루쯤 머물러 가고, 먹고 체험하고, 그러면서 지역에 활기가 도는 것이죠. 좀 더 넓게 보면 남원과 임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임실 치즈마을에 오시는 분들이 우리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6차 산업 아닐까 생각해요. 그동안 남농의 선배들이 추구해 온 살맛나는 농촌 만들기라는 가치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생산과 소비, 도시와 농촌이 동행하는 방향으로 우리 남농의 브랜드 가치를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 김영숙 대표는 '농민과 동행' 원칙, 10년간 영농조합 이끌어

10년 째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이끌고 있는 김영숙 대표(51)의 어릴 적 꿈은 농촌에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완주 이서가 고향인 김 대표는 농촌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알았다. 어른이 되면, 농촌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서에서 전주여고까지 통학을 했는데, 아침마다 딸 버스비 빌리러 다니는 것이 엄마 아빠의 일이었다. 그런 가난한 농촌살이를 벗어나고 싶었다. 꿈이 컸던 그녀는 부모님이 권하는 상업고와 교육대학을 가지 않고 4년제 사범대를 갔다. 그것이 얼마나 부모님에게 버거운 결정이라는 것을, ‘철딱서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그 당시는 몰랐다.

 

스물다섯에 남편 황의동씨와 결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시댁에서 농촌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소녀시절 ‘찬란하게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그 농촌으로 돌아간 것이다.

 

힘든 농촌 시집살이였지만, 이겨냈다. 그 당시에는 ‘운동’적인 삶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게 농촌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농촌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농민운동의 가치와 맞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농사 짓다가 남농영농조합법인 실무자로 들어갔다. 혼자 농사지을 수 없어 함께 입사, 조합 일을 익혔다. 1994년 일이다. 조합은 당시 몇 년간 수도권 쌀 판매 덕분에 잘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앓고 있었다. 운영자금이 없어 빚으로 연명하다보니 농가에 제 때 돈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자들이 판을 벌리고,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다 떠났다.

 

2004년,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남농 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게 됐다. 적자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빚을 갚아 나갔다. 흑자 구조로 바꿔야 살맛나는 농촌을 만들겠다며 세운 남농 문을 닫지 않는 길이다. 그러다보니 억척스러워졌고, 주위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김 대표가 지난 10년 남농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힘은 원칙이었다. 농민 조합원의 울타리가 되겠다는 원칙, 그들과 언제까지나 동행하겠다는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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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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