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동굴 '황금박쥐'로 공동체 희망의 싹 틔우다
산빛이 물빛 못지않게 맹렬하다. 묵은 초록에서 산벚꽃 흩날리는 연한 분홍을 넘어 기세등등 연두로, 생생한 초록으로 번지는 그 맹렬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 발치와 마을이 만나는 작은 호수, 송림제(松林堤)는 그 한없는 초록물을 빨아들이고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이 맹렬과 깊이가 번갈아 수만 번, 그렇게 키워놓은 고창군 상하면 송림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걸음마를 떼고 조금씩 활력을 찾아가는 마을을 찾았다.
△ ‘조기산제’ 풍습 간직= “첫 고사리를 끊을 때면 마을사람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산에 올랐지요. 그때가…”
마을 내력을 소상히 꿰고 있는 직전 마을이장 박영준씨는 그때가 곡우(穀雨) 무렵이었다고 한다. 마침 알이 차고 살이 연한 조기떼들이 칠산 앞바다로부터 북상을 시작하는 때였다. 마을사람들은 산 못지않게 바다로도 걸음을 재촉했다. 고창에서 서해에 닿아 있는 심원면, 해리면, 상하면까지 조기가 북상 채비를 시작하면 마을도 바빠지곤 했다. 갯가로 떠밀리다시피 올라오는 조기를 건져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뭍에서 물에서 얻어다 차린 음식이 ‘고사리조기매운탕’이다. 집집마다 이른 봄 먹을거리를 챙겨주신 하늘과 땅과 바다에 올리는 작은 제사를 준비했다. ‘조기산제(조기심리라고도 했다)’다. 보릿고개 어렵사리 허기를 견뎠던 송림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 봄 풍경이다.
송림마을은 송림산과 장사산이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든든하게 감싸안은 작은 분지에 놓였다. 차분하고 고즈넉한 정경이다.
△ 공동체사업 통해 ‘함께 걸음’= 모두 17세대 47명 주민 대부분이 밀양박씨. 그야말로 오순도순 한 모둠으로 살고 있는 송림마을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꿈틀거리고 있다. 꿈틀거림이 어느덧 걸음마가 되었다. 벌써 몇 발자국 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 첫 걸음이 ‘메이플스톤공동체사업’이었어요. 지난 2015년 공동체 창안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죠.”
당시 마을이장으로 공동체사업을 이끌던 박영준 씨는 송림마을이 공동체창안학교를 마치고 뿌리단계에 선정되면서 받은 300만원이 종자돈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마을공동 고사리 밭을 일구고, 건고사리 포장재를 개발해 마을을 알리는 매개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무엇보다 ‘우리도 무엇인가 함께 뜻을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 것이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 ‘오쇼 프리마켓’에 먹거리 선보여= 오쇼 프리마켓은 고창군(군수 박우정)과 고창공동체협의회, 고창식도락마을체험사업단이 함께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고창읍성 앞 광장에서 여는 프리마켓이다. 고창의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공동체들이 땅을 빌어 키워낸 농산물, 여럿이 힘을 모아 가공한 농제품에, 체험거리, 만들거리, 볼거리, 먹을거리를 가지고 여는 작은 장터이다. ‘오쇼’는 빨리빨리 오시오(싸게싸게 오쇼)라는 뜻에, 고창에서 찾는 다섯 가지 쇼(Show, 보러오쇼, 사러오쇼, 놀러오쇼, 먹으러오쇼, 만들러오쇼)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오쇼 프리마켓은 쌀빵 만드는 공동체, 발효음료 만드는 공동체, 도자기 만드는 공동체, 동물체험하는 공동체, 농사체험하는 공동체, 마을음식 발굴하는 식도락공동체 같은 고창공동체협의회 소속 서른 개 남짓 공동체가 참여해, 3월부터 시작해 지난달 30일 두 번째 장마당을 열었다.
송림마을은 고사리, 콩, 녹두, 깨, 호박, 복분자, 오디, 고추 같은 농산품을 장에 내놓았다. 고창에서 아직 낯설은 형식 프리마켓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띠게 살아나고 있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 리는 없는 것. 이것이 송림마을에게는 작지만 어느덧 두 번째 걸음이다.
△ 마을 동굴 황금박쥐 서식= 송림마을은 다시 생생마을 기초단계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올해 초 이장이 새로 뽑히면서 마을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의미심장한 걸음이다.
“우리 마을에는 7년 전인가부터 황금박쥐가 살고 있어요.” 마을 뒤편 송림산 기슭에는 서른 개 남짓한 인공동굴이 있다. 일제 말기 서해바다를 향해 대포를 설치하려 뚫은 것이라 한다. 식민지 마을사람들의 고된 노역도 욕된 역사와 함께 갇혀 있다. 그 동굴 가운데는 얼마 전까지도 한여름이면 음식을 보관하던 ‘냉동동굴’이 있다. 동굴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냉장고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 5미터가 넘는 깊이 동굴 하나에는 빨간박쥐라도고 불리는 멸종위기종 황금박쥐가 살고 있다.
송림마을에 찾아와 이제는 한 식구가 된 소중한 이웃 황금박쥐를 ‘생생마을’의 대표선수로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마을 출신으로 고창을 대표하는 진을주 시인 생가(진을주동산)와 물빛 고운 송림제 사이에 황금박쥐 포토존을 만드는 것을 필두로, 마을공동창고 벽면에 황금박쥐 테마 벽화, 마을 산품을 담는 황금박쥐 포장재 개발 등을 알차게 준비하고 있다.
△ 지도자의 건강한 역할분담= “공동체사업도 다시 가다듬었어요. 그전에는 없던 ‘마을사업’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며 고생하신 박영준 전 이장님은 ‘오쇼 프리마켓’을 계속 책임지고요.”
고교 진학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가 30대 중반 결혼과 함께 다시 고향마을에 둥지를 튼 박재만 이장(50세) 자신은 생생마을 기초단계 도전과 진행을 맡기로 한 것이다. 직전 이장과 새 이장의 건강한 협력의 출발, 싱싱하다. 두 사람의 리더가 준비하는 송림마을의 미래, 황금박쥐 힘을 빌어 절대로 멸종하지 않을 건강한 마을의 꿈이, 마지막 봄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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